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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 도사 되는 법] 컴퓨터 영어 정복 위해 야간대학 다녀
- 도덕경에 필작어세(必作於細)란 말이 있는데 어떤 큰 일이든 반드시 조그만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어떤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릇 작은 고통은 반드시 감수해야 한다. 직장에 입사해 누런 16절지에 인쇄된 양식 위에 먹지를 대고 네, 다섯 부를 작성한 기억이 떠오른다. 검은 볼펜으로 꾹 눌러 써야만 제일 뒷장이 보일 정도이니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지 알 것이다. 특히 오타라도 생길라치면 글자 위에 두 줄을 긋고 정정한 글씨를 쓰 것도 보통 일은 아니다. 필자가 20대 시절엔 마이컴, 마이카의 세상이 오리라곤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프랑스 기술자들과 같이 근무할 때 필자는 타자기가 고작이고 이것도 한번 사용하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인데 외국인들은 노트북 컴퓨터를 사용했다. 노트북이 워낙 신기해 외관도, 자판도, 모니터도 몇 번이건 만지고 또 만졌다. 우리나라 기술자는 도면, 기술서류 등 하드카피에 파묻혀 일하고 있는데 외국인은 책상에 노트북 컴퓨터 1대만 덜렁 올려 놓고 근무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달나라에서 온 이방인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워드프로세서라는 브라운관식 모니터가 딸린 컴퓨터가 사무용으로 보급됐다. 물론 덩치가 워낙 커서 책상 1대를 독차지하고, 70명이 근무하고 있는 사무실에 1대가 배치돼 신입사원인 쫄다구가 한번 사용해 보려면 퇴근시간 이후나 가능했지만. 그래서 필자는 퇴근시간 이후에 컴퓨터를 만져볼 수 있다는 기대로 마냥 그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컴퓨터 전원스위치를 켜면 모니터에 C:// 도스를 진행할 용어를 넣으라고 커서가 깜박 꺼린다. 컴퓨터 컴자도 모르는 컴맹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어려워 고철덩어리나 다름 없었다. 컴퓨터 전공자들은 그나마 사용할 수 있어 퇴근시간이면 이들이 하는 걸 어깨너머로 보고, 노트에 기록하면서 배웠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용하다 보면 밤 12시를 넘겨서 통행금지 시간에 걸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사용하다 보면 에러 메시지가 뜨는데 재부팅해서 사용하다 컴퓨터가 먹통이 된 적도 많았다. 그런 다음날 출근하면 으례 상급자들에게 욕을 먹곤 했다. 사용 매뉴얼을 읽어 봐도 어려운 영문용어로 돼 있어서 사용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글판 매뉴얼이 발행되어 보기는 쉬웠으나 해석이 잘못돼 영문 매뉴얼을 같이 보지 않으면 않됐다. 컴퓨터 달인이 돼 사용법에 대한 쉬운 책을 쓰겠다는 생각에 대학 영어영문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주간에는 업무 보고 야간에는 학생으로서 공부에 매달리느라 정말 ‘밤을 잊은 그대’가 됐다. 그러나 시작하면 반은 이룬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당시 하루 하루는 정말 지루하고 너무 힘들었지만 1년은 순식간에 가버렸다. 1년이 이렇게 짧은걸 처음 알았다. 어느덧 졸업도 하고 하나를 이뤘다는 성취감이 뿌듯했다. 하지만 컴퓨터에 대하여 배우면 배울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컴퓨터를 쉽게 배울 수 있는 책들이 시중에 하루가 멀게 홍수처럼 나오기 시작했으나 대부분의 책들이 번역한 책들을 모방하는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컴퓨터를 잘하려면 자판의 글자를 익혀야만 쉽다고 해 그때 나온 프로그램도 활용했다. 한글과 영문 자판 숙달용인데 글자가 모니터 상단에서 내려오면 그 글자를 자판으로 쳐서 손이 자판에 익숙하도록 하는 게임이었다. 드디어 회사에서 1개 부서당 3대의 공용컴퓨터를 지원해주게 돼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많아 졌다. 근무시간에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틈을 이용해 자주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문서를 작성하고 편집하고 인쇄하고 사용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됐다. 하지만 사용 중 에러메세지가 뜨면 복구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컴퓨터에 대해 좀 더 깊게 공부 하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회사에서 컴퓨터 활용능력 필기 및 실기시험을 시행한다는 공고문이 나왔다. 필자가 원하고, 기다리던 시험이어서 도전장을 내밀기로 했다. 이왕이면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기 위해 퇴근 후 사무실에서 실기시험 준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필기시험 준비를 내실 있게 진행했다. 그 결과 무난히 필기 및 실기 시험에 합격하는 쾌거를 얻게 됐다. 컴퓨터를 공부하면 할수록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 하루자고 나면 새로운 용어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고, 어제 알고 있는 정보는 구식이 돼 버리는 것이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은 지장이 없었으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어 컴퓨터에 깔려 있는 프로그램부터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어느 정도 이해됐을 때 이제까지 익혀온 지식을 활용해 개인 홈페이지 만들기에 도전하기로 하고 나모웹에디터 프로그램 공부와 실습을 같이 해 본 결과 무난히 홈페이지가 완성됐다. 이제까지 배운 지식으로 한수원 최초 전자결재시스템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기본계획을 수립해 관련 부서에 협조를 받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직면했다. 모두가 필자와 같이 변화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컴퓨터에 대한 상식이 없는 선배와 상사들이 변화가 두려워서 “이제까지 모든 업무가 아무 문제없이 잘되어 가는데 쓸데 없이 골치 아픈 시스템을 만들어 누구를 골탕 먹이려고 하느냐” 등 핀잔을 들엇다. 그래서 중도에서 포기할까도 했으나 이왕 시작 한거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초심과 같이 최고 결재권자에게 보고했ㄷ. 그런데 최고결재권자가 거부는커녕 정말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진행하다 문제가 발생하면 직접 대면보고를 하라고 칭찬해주기도 했다.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두러움도 있었다. 꼭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안 되면 어떻게 하지 불안감이 시간이 갈수록 쌓여 갔다. 이렇게 시작한 지 5개월 만에 드디어 시스템이 만들어졌으나 전자결재가 다음 결재자로 전달되지 않아 또 한 번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신념과 끈기로 밀어붙인 결과 6개월 만에 시스템 가동에 성공했다. 그리고 3개월 간 기존시스템과 같이 사용 후 전자결재시스템으로 바꾸게 됐다. 그 당시 만들어 놓은 시스템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아주 만족하게 잘 사용돼 후배들로부터 문서관리 일등공신이란 평가를 받는다. 필자는 후배들에게도 이 시스템에 안주하지 말고 더 좋은 아이디어와 시스템이 있으면 언제든지 바꾸라고 조언도 해주고 앞으로도 후배들을 위해서 힘 닿는 데까지 도울 생각이다. 브라보 시니어 파이팅!
- 2016-05-3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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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지에서 생긴 일] “삶과 죽음의 갈림길”
- 23년 전 필자 가족은 가까운 친지들과 사이판, 괌으로 3박 4일 휴가를 갔다. 모처럼의 해외여행이라 세 가족은 모두 웃고 떠들며 매 순간을 만끽했다. 그렇게 꿈 같은 3박 4일이 끝나고 마지막 날 비행기를 타기 위해 시간에 맞춰 괌 국제공항으로 나갔다. 그런데 즐겁던 여행은 그때부터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연발한 것이다. 두 집 아빠들은 직장 때문에 반드시 한국으로 가야 했다. 다행히 다른 비행기 편이 있어 두 아빠와 한 가족은 먼저 떠났다. 그러나 필자 가족 모두와 다른 한 가족 일부는 덩그러니 남게 됐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필자 일행은 괌에서 하루를 더 자게 됐다. 다행히 항공사가 호텔 방을 제공했다. 그래서 필자 일행은 별 불만 없이 호텔로 들어가 각자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필자도 샤워기를 틀어 공항에서 대기로 생긴 피로를 풀었다. 그런데 한참 샤워하고 있던 그때였다. 갑자기 샤워기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몸도 기우뚱거렸다. ‘쾅’하는 기분 나쁜 소리도 들렸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밖으로 나가려는데 몸이 휘청거려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남편이 소리 질렀다. “다들 엎드려! 바닥에! 책상 밑으로 들어가! 지진이다. 지진!” 머리털 나고 처음 겪는 지진이었다. 알몸으로 후다닥 바닥에 엎드렸다. 엎드리자마자 TV가 ‘탕’하며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벽에 붙은 액자도 납량영화의 한 장면처럼 혼자서 ‘부르릉’ 소리를 냈다. 엎드렸는데도 몸은 계속 이리저리 굴렀다.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며 눈을 감은 채 작은 아이만 찾아댔다. 지진으로 정전이 됐는지 호텔 방은 전기가 다 나가 완전히 암흑천지로 변해 버렸다. 그렇게 공포의 시간이 1~2분가량 지났을까? 남편은 다시 소리쳤다. “다들 밖으로 나가!” 헐레벌떡 일어나 공포심에 계속 떨리는 손으로 옷을 대강 걸치고 작은아이 손을 꽉 붙잡고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작동이 멈췄다. 다시 비상구 계단을 찾은 뒤 계단을 통해 단숨에 1층 로비로 내달렸다. 9층에서 1층까지 1분이나 걸렸을까? 말 그대로 초특급 스피드였다. 삶을 향한 투쟁으로 상기된 얼굴과 헐떡거리는 숨소리였지만 모두가 살아서 다시 상봉했다. 이미 로비는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알몸인 채 아랫도리만 손으로 가리고 있는 구레나룻이 수북한 중동계 사람, 젖을 물리다 내려왔는지 앞가슴을 풀어헤친 채 아기를 안고 있는 백인 아낙네 등 그야말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지진이 지나간 후 곧 커다란 해일이 닥칠 거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일념에 남편은 전화로 택시를 찾았다. 다행히 한 택시기사가 연결돼 공항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공항 가는 길은 난장판이었다. 배가 뒤집혀 육지로 올라와 있었고 땅이 갈라져 차량이 처박혀 있었다. 필자 가족은 이런 아비규환 속을 뚫고 공항에 도착했지만 헛수고였다. 이미 공항도 닫혀 있었다. 필자 가족은 할 수 없이 공항 문 앞 처마가 있는 쪽에 구해 온 비닐을 깔고 앉았다. 공항이 다시 정상화되면 언제라도 떠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들이 죄다 살아남기 위해 자기 나라말로 지껄여대는 바람에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여기선 못 있겠다 싶어 남편을 호텔 찾으러 보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다시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았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낡디낡은 숙소였으나 가장 안전하다는 내륙에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론 이곳에서도 한숨도 못 잤다. 지진 공포 때문에. 다음 날 괌 당국은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공지했다. “하루 더 묵어야 한다”는 것. 당국은 대신 고급 일본호텔로 필자 가족을 안내했다. 그곳은 모든 물품이 지진을 대비해 붙박이로 튼튼하게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하고 안전한 호텔이라도 몸이 둥둥 떠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느낌은 떨칠 수가 없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사고가 가져다준 트라우마였다. 그렇게 삶과 죽음의 갈림길 속에서 이틀 밤을 새운 뒤 다음 날 드디어 고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필자 가족은 기내에서도 속이 울렁거렸다. 죽음의 문턱이 그렇게 후유증을 남겨 줬으나 공항에서 마중 나온 다른 가족들과 만나선 오열이 아닌, 한 줄기 눈물만 흘렸다. 기다린 그들의 아픔도 알기 때문이다. 5박 6일 유난히 길었던 ‘죽음 체험 여행’. 다시는 외국여행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머리 숙여 신에게 깊이 감사했다.
- 2016-05-30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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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도사 되는 법] 여직원이 던진 한 마디
- 2000년대 초반 ‘아름다움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강의를 의뢰받은 적이 있다. 주제를 보고 필자는 대단원에 나이 들어 얼굴에 잔주름 가득한 미국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두건을 한 채 뼈만 앙상한 흑인 어린이를 안고 있는 사진을 넣기로 했다. 이 사진만큼 ‘아름다움의 지속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 필자는 완전 컴맹이었고 강의용 파워포인트 교재는 디자인팀 여직원이 만들어 주곤 했다. 필자는 그날도 평소대로 강의 콘티를 손으로 스케치한 후 디자인팀 여직원에게 파워포인트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뒷부분에는 헵번이 머리에 보자기를 두른 멋진 사진을 넣어서. 필자의 요청은 처절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필자가 “네이버에서 헵번을 치면 그의 사진이 죽 나오는데 몇 번째 페이지를 열고 거기서 머리에 보자기를 둘러쓴 헵번의 사진을 파워포인트에 넣어줘요”라고 여직원에게 설명하자 그 여직원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안티를 던진 것이다. 그가 날린 한마디는 바로 “사진을 캡처해서 저한테 이메일을 보내 주시면 간단하잖아요!” “….” 그의 말 중에 ‘이메일’이라는 단어는 알아듣겠는데 ‘캡처’는 도대체 알아듣지 못할 ‘외계어’였다. 그 여직원이 도도한 자세로 자리로 돌아간 후 필자는 생각에 잠겼다. 필자는 무거운 환등기와 슬라이드 트레이를 양손에 들고 강의 다녔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만에 새끼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USB라는 신기한 물건만 호주머니에 넣고 가면 되는 세상으로 변했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천지개벽했는데 필자는 아직도 아날로그 세상에 머물러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젠가 직원의 도움을 받지 못할 상황이 되면 그야말로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바로 ‘기분 잡치지만 컴퓨터 공부 한번 제대로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50세 넘어서 젊은 사람들과 컴퓨터학원에서 같이 공부하는 장면을 떠올리니 이것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필자 아이들이 어릴 때 집으로 모셔서 배우던 컴퓨터 선생님. 그렇게 해서 필자는 퇴근 후 집에서 컴퓨터 개인교습을 받게 됐다. 수개월에 걸쳐 인터넷 검색 방법, 한글 워드 작성법, 이메일 주고받는 법, 엑셀, 파워포인트, 포토샵을 두루 배웠다. 블로그 만드는 법을 배워 블로그도 개설했다. 필요한 사진을 ‘캡처’해서 파워포인트를 만드는 것 역시 공부했다. 아날로그에 익숙한 필자가 컴퓨터를 이해하고 배우는 과정에 좀 어려운 면도 있었으나 반복 연습으로 극복했다. 어느 날 회사 디자인 회의 시간에 필자는 호주머니에서 USB를 턱 하니 꺼내 노트북에 장착하고 슬라이드를 실행했다. 그날 깜짝 강의에 사용된 파워포인트 교안을 필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원들은 눈이 동그래져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컴퓨터는 기초적인 것을 배우고 나면 그 외의 다양한 기능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파워포인트로 몇 년 동안 강의 교안을 만들다 보니 이제 손에 익게 된 것이다. 요즘에는 글씨체와 크기, 사진의 배열, 배경 색상 등 슬라이드 디자인에도 신경 쓰고 있다. 몇 년 전 보자기를 쓴 헵번의 사진을 ‘캡처’해서 이메일로 보내라던 그 여직원의 당돌한 한마디가 발단돼 필자 앞에 찬란한 IT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 2016-05-24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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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문화]“젊음이 넘치는 섬, 필리핀 보라카이!”
- 정열과 환희가 넘치는 섬 필리핀 보라카이 섬을 다녀왔다. 눈부신 햇살, 블루레몬에이드 같은 바다, 먹어도 먹어 도 물리지 않는 망고쥬스. 우리가 꿈꾸는 홀리데이 그 이상을 채워줄 보라카이를 소개해 본다. 필리핀은 총 7,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다도해 국가로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섬을 자랑한다. 그 중에 800여 개의 섬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을 가졌다. 특히에메랄드 빛 바다는 필리핀 바다의 상징이다. 필리핀은 크게 3지역으로 나눈다. 북부지방인 루손에는 수도 마닐라가 있어 경제의 중심지고, 남부지방인 민다나오는 불안한 정치로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며, 중부지방인 비사야스는 휴양의 중심지인 보라카이와 세부 팔라완이 있는 곳이다. 필리핀은 지방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다. 보라카이에서는 아클란이라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보라카이 섬! 말로만 듣던 환상의 섬을 가기 위해 현지 공항에서 내리던 순간 필자는 혼란스러워졌다. 공항이 국의 조그만 기차역만큼이나 협소하고 정리돼 있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입국 차도 허술하면서도 무척이나 까다로왔다. 더구나 면세품에 대한 절차가 쓸데없이 엄격해 걸리기만 하면 폭탄 요금을 맞게 된다. 단단히 한몫 챙기려는 술수가 나의 환상여행 첫인상을 장식하고 말았다. 지저분한 공항을 나서자 숨이 막히도록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마중 나온 현지 가이드를 따라 승용차를 타고 섬으로 향한 1시간 20분 동안 편도 1차선으로 이어지는 시가지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빌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양쪽 길가로 늘어서 있는 주민들의 옷은 볼품 없었다. 질서 없이 오가는 오토바이 삼륜차가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굉음소리도 전율을 느끼기 충분했다. 정신없이 15분 가량을 혼란 속으로 달리다 보면 어느새 제3의 세상 여행객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곳은 바로 옆 블록 이었다. 호텔 앞에 다 달았을 때는 앞서가는 선진국이었다. 진입로에 펼쳐진 원주민의 고된 삶과 이방인들의 부로 형성된 환상의 세계는 그야 말로 묘한 힐링을 선사해주었다.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와 끝이 없이 이어진 백사장, 길게 늘어서 있는 키가 큰 야자수, 문만 열면 쏟아지는 에어콘의 시원함, 설탕가루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화이트 비치…. 천국이 따로 없었다.아침에는 멋진 부페조식과 숙소 바로 앞에 펼쳐진 수영장에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낮에는 맛사지 천국의 각종의 서비스로, 초저녁엔 붉게 물드는 석양과 함께 하는 신나는 뱃놀이와 스쿠버 다이빙이 이어진다. 하늘과 바다를 모두 내것 처럼 맘껏 소유한다. 그리고 육지의 밤에 펼쳐지는 불타는 젊음의 마당에 앉아 그 유명한 산미구엘 맥주 한 모금은 반복되는 일상을 탈출하기에 아주 충분했다. 길게 이어지는 화이트 비치 해변가 주변에는 각종의 현지 식 먹거리들이 즐비해 있고 감동으로 버글 대는 사람들이 미어 터진다. 지상낙원의 섬에서 맛보는 다양한 요리들, 더구나 우리나라 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먹을 수 있다. 밤의 시작부터 깊어질수록 쿵쿵대는 음악소리, 젊음과 낭만이 출렁대는 심장의 소리들이 특별한 추억으로 낮과 밤의 두 얼굴 되어 총천연색으로 해변을 수놓는다. 특히 맛사지를 좋아하는 필자는 전 일정 내내 각종의 스파 서비스를 받았다. 천차만별의 스파가 화려하게 또는 고풍스럽게 전세계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열심히 달려온 우리 시니어 들에게는 환상의 보답이었다. 살면서 누구나 여행은 선호한다. 모든 게 만사 귀찮을 때는 여행의 참 맛을 느끼는 것도 인생을 사는 한 방법일 것이다. 다 안정된 다음에 라고 하지만 우리 삶에는 안정이란 영원히 오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다리 떨리지 않을 때 그저 심장이 떨릴 때 그때, 떠나라고 한다. 더 늦기 전 어느 날에 훌쩍 떠나 보는 것도 용기가 필요할까? 이글거리는 자연 아래 조금 타면 어떠랴. 젊음이 들끓는 곳에서 그들과 함께 잠시라도 동행 하는 것, 어차피 삶의 주어진 시간 속에 무거웠던 몸을 맡기고 맛사지 받으며 둥둥 떠보는 것도 시니어 들의 멋진 일상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모든 일정을 끝내었다. 다시 검은 얼굴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현지인들의 빈곤함을 거쳐 공항으로 향했다. 세상에는 빈부가 함께 공존한다는 진리를 깨달으며 그 또한 삶의 일부이기에 거부할 수 없는 다른 매력을 느끼며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새삼 느끼는 천국의 행복 대한민국이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 옛날에 초가집이 아닌 고급스러운 저택 같은 곳, 세계 1위인 우리나라 공항이었다. 새삼 깊은 감사와 안도를 느꼈다. 필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 2016-05-2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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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문화] 아프리카 쇼나 조각을 한국서도 즐길 수 있다
- 총선투표로 공휴일이었던 날(4월 13일). 아침에는 비가 조금씩 내렸지만 차츰 개이면서 화창한 날씨가 봄바람을 부채질했다. 필자는 일찍 투표를 마치고 파주 헤이리마을로 봄나들이 갔다가 쇼나 조각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합정역 1번 출구로 나와 2200번 광역버스를 타고 헤이리 1번 출구 앞에서 내린 뒤 맨처음 둘러본 곳이 '레오파드락갤러리의 쇼나 조각 갤러리 & 숍'. 건물 바깥에 전시된 조각물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갤러리 여사장님의 손짓에 따라 들어갔다가 아프리카대륙의 강한 생명력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쇼나(Shona) 조각’을 만난 것이다. 쇼나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가장 큰 부족의 명칭인데, 짐바브웨는 아프리카에서 독특한 석조 문명을 이룩한 조각의 나라로 알려졌다. 쇼나 조각가들은 스케치나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오로지 정과 망치, 끌, 불, 사포 등 전통적인 도구만으로 자연석에 깃들어 있는 형태를 쪼아내고 연마해 조각한다. 특히 이 조각은 작업할 때 들리는 돌의 내면의 소리 때문에 '혼의 예술'이라 부른다. 쇼나 조각은 짐바브웨에서 싹텄지만 현재는 대표적인 제3세계 미술양식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이 조각은 신비감과 생동감을 자아내며 자연스러운 질감과 정서적인 풍부함을 머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록펠러, 로스차일드가, 찰스 왕세자 등은 쇼나 조각의 대표적인 애호가이며, 피카소도 쇼나 조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파리현대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등 세계 대표적인 미술관들이 쇼나 조각을 전시를 하고 있으며, 비평가들로부터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쇼나 스톤즈(SHONA STONES)’은 짐바브웨에서 나는 사문암 종류이며, 200가지가 넘는 다양한 색상이 있다. 무늬가 표범과 닮았다는 레오파르드락, 아프리카의 녹색 금으로 알려진 버다이트, 보랏빛 운모 라피도라이트,지구 최초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버터제이드, 귀한 코발트스톤과 오팔스톤 등이 있다. 돌 속에 녹색, 갈색, 보라색, 하얀색, 에메랄드색 등 저렇게 다양한 빛깔이 들어 있다는 것도 놀랍고, 돌을 깎아서 이토록 아름답고 능숙하게 조각을 하는 솜씨도 놀라웠다. 이런 희귀한 돌을 채굴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울까? 여러 가지 빛깔의 쇼나스톤을 붙인 ‘파라오 조각’도 유명하다. 너무도 실감 나게 만들어진 호박조각, 앙증맞은 부엉이들이 대표적이다. 여사장님은 궁금해하는 것들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해외생활을 오래 한 연유로 우리 발음이 좀 특이했던 사장님이 아름다운 보라빛의 라피도라이트 하마를 선물로 줬다. 앙증맞은 게 장식하거나, 독서하며 책장을 넘기다 고정할 때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라피도라이트는 리튬이 함유되어 있어서 진정효과가 나며, 불안하거나 스트레스받을 때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이것을 산 사람이 구입하던 날로 바로 큰 계약도 체결했다며 가지고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길 거라 했다. 헤이리예술인마을 초입에서 쇼나 조각을 감상한 것만으로도 그날의 나들이는 대박이었다. 헤이리에 가시는 분들은 꼭 한 번 들러서 작품감상 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지인들에게 쇼나 조각을 선물한다면 받는 분들에 매우 특별한 선물이 되리라 생각하며 갤러리를 나왔다. 헤이리예술인마을은 1998년 파주의 15만 평 부지에 꾸며진 복합문화예술 마을로, 다양한 창작 공간을 비롯해 전시, 공연, 축제, 교육, 교류 등 새로운 것을 계속 개발 중이다. 점포마다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며져서 볼거리가 많은 게 강점. 각종 매체를 통해서 알려져서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많은 연인과 가족들이 찾는 참 좋은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았다.
- 2016-05-16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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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59년生, 감출 수 없는 부끄러움 - 김애양 은혜산부인과 원장·수필가
- 나는 안경 대신에 콘택트렌즈를 착용하여 눈이 나쁘단 사실을 한동안 숨겨왔다. 우리 시절엔 여자가 안경을 쓰는 걸 터부시했었으니까. 예를 들어 택시기사도 안경 쓴 여자를 첫손님으로 받으면 온종일 재수가 없단 말을 공공연하게 했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믿기나 할까? 맞선 보는 자리에 안경을 쓴 색싯감은 일순위로 딱지를 맞았다는 일화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근시의 원인은 아직도 잘 모른다는데, 대개 어두운 데서 책을 읽는다든가 눈에다 너무 가깝게 대고 본다든가 텔레비전 앞에 바투 앉아 시청을 한다든가 등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부르며 절대로 사주지 않았던 부모님 덕분에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텔레비전은 구경도 못하고 자란 내가 시력이 나빠진 데에는 억울한 사연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최루탄 탓이라 믿고 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이었는데 몇 정거장만 올라가면 고려대학교와 맞닿았다. 그 당시 대학교 근처에 산다는 건 곧바로 최루탄 세례를 받는다는 말과 같았다. 4·19와 5·16땐 아직 어려 엄마 품에 있었기에 세상이 아름답게만 느껴졌지 그렇게 매운바람이 불어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나서부터 봄은 최루탄 가스와 함께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학기가 되면 대학생들은 여지없이 교문 밖으로 뛰어나와 데모를 벌였고 데모를 진압하는 경찰이 최루탄을 투척하면 매캐한 연기가 온 동네를 뒤덮고 말았다. 그 겨자보다도 더 모질게 매운 최루탄 가스 앞에서 우리들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눈물을 질질 흘리며 대학생들을 원망하곤 했다. 특히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이 혀를 끌끌 차셨다.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하다니…” 친구들과 모래성 쌓기 놀이를 하다가 불발탄이 된 최루탄 조각이 땅속에서 불쑥불쑥 솟아나오면 그게 마치 수류탄이기라도 되는 듯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던 날도 많았다. 최루탄 가스가 눈이나 코, 피부로 들어가면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며 심한 통증이 찾아온다. 어떤 땐 구토까지 일으키며, 피부가 온통 뒤집어지기도 했다. 일시적 실명현상까지 일으키는 최루탄 가스 세례를 해마다 받고도 내 시력이 나빠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할 것이다. 그렇게 매운 환경 속에 성장한 나는 중학생이 되던 해부터 안경잡이로 살아야 하는 운명에 접어들었다. 안경 쓰기의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대학생이 되면 절대 데모 따윈 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1978년에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세상은 정권에 대해 반발하는 국민정서가 정점에 올랐던 그 시기였다. 나라가 흔들바위에 올라앉은 것처럼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이듬해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얼마나 흉흉한 시절인지 모른다. 내가 다니던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에는 붉은 글씨로 ‘독재 정권 물러나라’라는 대자보가 매일 새롭게 붙었다가 뒤돌아보면 어느새 떼어내고 없어지곤 했다. 교정 곳곳엔 날카로운 눈빛의 아저씨가 손에 워키토키 무전기를 들고 우리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나는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런 아저씨와 눈이 마주칠까봐 건물 뒤로 먼 길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학생들 사이에선 늘 무언가 새로운 정보가 수군수군 퍼져나갔고 등사기로 민 조잡한 인쇄물이 나돌아 다녔다. 주로 ‘군사 정권을 타도하자’는 내용이었다. 캠퍼스 한곳에서 간헐적으로 데모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면 여지없이 삽시간에 경찰버스가 밀어닥쳐 마치 닭장을 탈출한 어린 닭을 잡아들이듯 한심하단 표정으로 여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싣고 떠났다. 정말 무서운 광경이었다. 나무 위에 유령처럼 숨어 있었던지 정보부 직원이 어느결에 나타나 군홧발로 잔디밭을 짓밟으며 데모 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대학이 지성과 아무 관계없는 치열한 전투 현장처럼 여겨졌다. 그러다가 부마(釜馬)사태가 발발한 1979년 가을 무렵이었다. 학생들은 모두 서울역 앞에 집결하기로 결정했다. 과 대표가 결연한 모습으로 더는 침묵할 수 없으므로 한 곳에 모여 구국의 결의를 다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이 아마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벌인 가장 큰 시위였을 것이다. 진압하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 붙들려 옷이 찢어지거나 신발을 잃어버린 학생들이 대다수였고, 곤봉으로 얻어맞은 친구들도 많았고, 몇몇 학생은 결국 붙잡혀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때 만일 나도 친구들을 따라 서울역에 갔었더라면….’ 그때 서울역에 가는 대신 나는 도서관으로 향하며 이렇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의과대학에 들어온 이유는 정치에 상관없이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려는 것인데 일일이 세상 돌아가는 일에 참여하다 보면 언제 공부를 하겠어? 의사란 이념보다는 인간애를 중시하고 또 실천하는 직업이 아닌가? 구태여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대학생들이 세상을 바로잡을 테지…. 하지만 그건 치졸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고 사실 나는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어떤 교육을 받아왔던가? ‘국민교육헌장’을 제대로 못 외우면 손바닥을 대나무 회초리로 맞았고, 국어 시간엔 애국에 대한 표어를 짓고 미술 시간엔 ‘반공 포스터’를 그렸다. 자나 깨나 반공교육을 통해 공산주의를 무슨 괴물이거나 악마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때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단어는 뭐니뭐니 해도 ‘간첩’이었을 것이다. 강원도에 살던 이승복이란 아이가 무장공비를 향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저항하다가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몰살당했다는 뉴스는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하필 이승복은 나와 생년월일이 똑같은 1959년 12월 9일생이라서 결코 그 이름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뿐인가. 서울 한복판에도 무장공비가 출몰한다는 소식은 우리들 머리 위에 구름처럼 공포를 드리워 놓았다. 공포만큼 인간을 다스리기 편한 도구가 또 있을까? 청와대를 폭파하는 목적으로 남하했다는 간첩 김신조가 체포되었다는 속보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구름에서 비가 떨어지듯 하늘에서 불안감이 뚝뚝 떨어졌다. 대학생들이 데모를 벌이면 어른들은 그게 모두 북한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거라고 말했다. 그럴 땐 북한 공산당이라고 하지 않고 빨갱이라고 부르게 마련이었다. 그건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사실 대학생이 되었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을 향해 감긴 눈이 떠지는 건 아니다. 일간 신문에 실리는 기사를 액면 그대로 믿었고,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던 평범한 여학생이 정권의 실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다른 친구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서울역을 향해 뛰어가도 그건 지각없는 부화뇌동일 뿐이라 여겼다. 도서실에 두더지처럼 숨어 있던 나는 스스로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는 착한 딸이라고 믿었다. 그땐 그랬다. 덕분에 안기부에 끌려가는 일 없이 무사히 대학을 마치고 의사가 된 걸 안도해야 할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여러 가지로 평가해야겠지만 확실한 건 만일 내가 다시 대학시절로 돌아가 민주화 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서게 된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면, 그땐 절대로 데모대를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기적인 시선으로 개인의 안정만 도모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남미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권력과 억압에 대한 항거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된 역사가 아니란 걸 새삼 알게 되었다. 칠레에는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짓밟힌 수많은 목숨이 스러져갔고 아르헨티나의 ‘추악한 전쟁’ 동안에는 불순분자로 낙인 찍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수만 명의 실종자들이 있었다. 과테말라에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구엘 앙헬 아스투리아스의 는 어쩌면 그렇게 우리나라의 모습과 닮았던지 소름이 끼쳤다. 대통령의 심복이 겪는 불행이 비정한 군부정치의 생리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또 로베르토 볼라뇨의 에는 멕시코시티의 대학에서 데모대가 진압 당할 때 화장실에 숨어서 13일을 연명한 우루과이 출신의 여대생 이야기가 나온다. 그건 실화를 가지고 만든 소설이어서 더욱 숨죽이며 읽게 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멕시코 시(詩)의 어머니’로 추앙받는다는 조금 심오한 내용이다. 또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에는 여죄수에게 가하는 고문의 강도를 연구하며 강간을 저지르는 의사가 등장한다. 그 의사는 성적 고문을 하는 동안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를 들려주는 친절함을 베풀었다는데 이 희곡의 공간적 배경은 ‘칠레일 수도 있지만 오랜 독재 기간이 끝난 직후 민주정부가 들어선 경우라면 어느 나라도 무방하다.’라고 설정되어 있는 것만 봐도 독재란 전염병처럼 세상에 널리 퍼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민주화 투쟁을 하던 데모는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반향이었던 것이고 그런 데모에 동참하지 않았던 나는 전 세계적으로 비겁한 인물이 된 셈이다. 그런 중에 칠레 태생의 천재적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가 어느 수상식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걸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양질의 글쓰기란 ‘암흑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고, 허공에서 뛰어내릴 줄도 알고, 문학이 기본적으로 위험한 일임을 알고 쓰는 글’이라고. 그게 비단 글쓰기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즉 암흑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고, 허공에서 뛰어내릴 줄도 알고, 기본적으로 인생이란 위험한 것이란 걸 알고 사는 삶이 가치가 있다는 뜻이리라. 그러니까 나는 그동안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채 살아왔던가 보다.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안정과 자기 영달을 추구한다지만 내게 남은 세월엔 지난 부끄러움으로 더는 낯을 붉히지 않게 되길 소망한다. △ 김애양(金愛洋) 은혜산부인과 원장·수필가 이화여대 의대 졸. 은혜산부인과(서울 강남구 역삼동) 운영. 1998년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5권 발간. 한국의사수필가협회를 결성해 모임을 주도하고, 해마다 ‘한국 의학도 수필공모전’을 통해 의대 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다.
- 2016-05-1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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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 6월의 여름과 겨울
- 6월의 중순, 아직 태양열이 그렇게 극성을 부리기에는 이른 초여름이다. 잎들이 겨우 연록에서 초록으로 바뀌려는 시간인데 그 하루 내가 김포공항을 통하여 한국을 떠나는 날에는 이미 그 전날의 극성스런 열기로 대지도 덥혀져있었고 당일의 새 기운으로 기습작전이라도 하는 양 쏟아 내리는 햇빛으로 모든 고형의 물질들은 졸아들고 녹여날 것 같은 무더위였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도 없는데 날씨는 그렇게 식물의 삼투압처럼 오히려 내게서 떠나는 사람의 지극히 작은 여분의 에너지 움직여 보려하고 활동해 보려 안간힘 쓰는 에너지를 빼앗아버리는 열기다. 70년대 말부터 아니면 그보다는 좀 빠르게 한국의 산업화가 그 용트림을 하기 시작하였을거다. 그 분위기에서 시대의 흐름을 탄답시고 시도하였던 작은 규모의 자영업은 경험부족과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실패를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누군들 스스로의 책임을 인정하는 성숙함이 있을까. 누군가 째째하다면 가까운 사람을 원망하고 조금이라도 책임을 안다면 그 사회 그 시대 그 역사를 원망하지 않겠는가, 나는 사회를 조금 원망할 만큼의 덜 됨과 섭섭함과 앙금이 있었다. 빈 손, 빈 손도 아니고 후불 비행기티킷을 사서 두 아이와 함께 우리 네 가족이 김포국제공항을 떠난 날이 육중한, 특수합금으로 만든 비행기라도 녹여낼 듯한 무더위의 1980년 6월이었다. 동과 서로 멀다는 것 문화가 다르다는 것 인종이 다르고 그 곳은 이미 디벨로프드(developed) 발전을 이룬 곳이라고, 생활방법등등으로 다름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밤낮의 시차가 있지만 계절은 동위선상이라 알았다 한국이 삼복더위에 맞먹는 열기였기에 우리는 반팔소매의 체온을 낮게 지켜줄 수 있는 가벼운 옷을 입고 떠났다. 학력을 경력을 한국에서의 모든 기득권들을 비행기 안에서 태평양바다에 던져버리라는 선배이민들의 충고가 있을 만큼 이미 미국의 한인이민사회도 작은 공동체를 이룰 만한 크기로 자라있었다. 나는 버릴 건 버렸고 마음 각오가 단단하여 새 출발에는 완벽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새 출발에 대한 설렘보다는 불안을 안고 김포공항에서 나에게 던진 질문을 비행 중 내내 생각했다 대답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올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 한국사회가 나를 밀어내었나? 내가 한국을 떠나는 것인가?’ 비행기가 착륙한다는 기내방송이 들려오기 전부터 억수로 퍼붇는 장대비는 이미 내 옷과 몸은 물론 내 마음까지 물난리를 만난 고통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비행기도 꾸물거리며 착륙하였고 겁먹어 착륙한 후에도 살그머니 까치발걸음으로 타맥(tarmac)을 향하여 움직인다. 춥고 서글픈대로 입국절차를 마치고 공항로비의 의자에서 한숨을 돌리는데 추움이 뼈속을 파고드는 눈 폭풍 속의 겨울 냉기다. 추위 속에 가벼운 여름 옷차림은 누추하고 서러워 내 손이 빈 손이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면서 두려움을 준다. 창밖으로 보이는 비 내리는 모양은 폭포수같기도하고 강이 하늘로부터 버티칼 흐름을 하는 집중 폭우다. 공항의 광활한 활주로가 하늘로부터 내리는 물과 지상의 물이 합하여 작은 강을 이룬다. 얼마나 오래 동안 비가 내리려는지 검은 구름이 공항건물을 완전히 보쌈하였고 모든 자연의 빛은 달아나버렸다 . 버티칼로 흐르는 물, 그 물을 걷어내려는 자동차와이퍼의 요란한 움직임 뿐 공항을 떠나 친구집으로 가는 동안 내게 보여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겨우 반년 전에 공부하러 온 친구의 아파트 동네 길은 종이 깡통 플라스틱용기들이 어지러이 빗물을 타고 옮겨다니는 한심하고 을씨년스러운 공포감마져드는 삭막한 풍경이다. 풍요한 미국이라는 정보도 꿈도 신천지를 찾는 필그림의 각오도 너무 허무하게 무너지려는 순간 비는 강풍을 동반하여 표효하며 먹이를 찾아 헤메는 산짐승 울음을 운다. 어련할까 친구가 말한다 “이건 아직 미국이 아니다. 니가 살 미국이 아니니까 미리 결론내리지마라” 그 날 김포공항의 날씨와 케네디공항의 날씨가 내 속의 조국과 고향을 점지한 건 아닐까?
- 2016-05-0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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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家和만사성의 조건 Part 2] 어머니 손맛 물려받은 복(福)자매 -요리연구가 한복려·복선
- 서울 종로구 원서동, 창경궁 돌담길을 지나 걷다 보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고아한 한옥들과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도 옹기종기 장독들이 따스한 햇볕을 머금는 곳이 있으니, 바로 ‘궁중음식연구원’이다. 1971년 궁중음식의 대가이자 인간문화재인 황혜성(黃慧性·1920~2006) 선생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인 ‘조선왕조 궁중음식’을 전수하기 위해 마련한 곳으로, 현재는 맏딸인 한복려(韓福麗·69) 궁중음식연구원장과 둘째 딸인 한복선(韓福善·67) 한복선식문화연구원장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그들에게 궁중음식이란 어머니의 삶이자, 한국 식문화의 큰 줄기, 그리고 곧 자신들의 삶과도 같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한복려 원장과 한복선 원장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기능 보유자다. 자매의 어머니이자 큰 스승인 황혜성 선생에게 전수 받았는데, 셋째 딸인 한복진(64) 전주대학교 전통음식문화과 교수도 같은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현재 한복진 교수는 일본에서 연구 중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대개 ‘세 자매가 어머니를 닮아 같은 일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한다. 한국 식문화라는 큰 줄기를 이어간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저마다의 특성을 살린 곁가지를 뻗어가고 있다. “(한복선)각자의 성품이나 재능을 살려 저마다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언니는 맏딸로서 엄마의 연구원을 맡아 기능 전수와 교육을 위한 책임을 다하고, 저는 해외 생활과 TV 프로그램 경험 등을 살려 실생활 궁중음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있죠. 셋째는 대학 교수니까 전문적인 연구와 학생 지도를 하며 인재 발굴에 힘쓰고요. 어머니가 활동하실 적에는 ‘요리 연구가’라는 말도 잘 안 쓰이던 시절인데, 요즘은 요리 분야도 아주 다양해졌잖아요. 어머니가 일궈놓으신 것들을 바탕으로 더 넓고 깊게 우리 식문화를 알려야죠.” 우리가 물려받은 것은 재산 아닌 정신 가업을 이어가는 형제들 사이에는 다툼이나 경쟁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들 자매는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상처럼 정답고 사랑이 넘친다. “(한복려)우리는 물질적인 재산을 물려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머니는 당신의 정신과 배움을 우리 자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셨어요. 그것을 가꾸어 나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요. 저도 아들이 있는데, 그 아이는 요리를 전공하지 않아요. 그래서 기능적인 부분을 전수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물려받은 정신만큼은 이어주기 위해 집안일에 어느 정도는 참여시키고 있어요.” 그렇다고 황혜성 선생이 유형의 재산을 전혀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순히 기능적인 전수나 손재주에 그칠 수 있는 궁중요리라는 분야를 글과 책을 통해 역사적 산물로 탄생시킨 것은 가보인 동시에 우리 식문화의 보물과도 같다. “(한복려) 내 어머니의 것이라 해서 지키고 물려주는 것 그 이상의 책임감을 갖고 있어요. 책만이 아니라, 물건들도 있고 해서 이런 것들을 모아 황혜성 자료관 등의 이름으로 내려고 해요. 어머니는 한국 궁중음식 역사의 큰 표적과도 같으신데 우리가 무언가를 정립해서 다독거려 놓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 잊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커요. 어머니 제자들도 많기야 하지만, 자식이자 제자인 제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일이니 얼마가 걸리더라도 해내려고 해요.” 자매가 뜻을 모아 하는 일에 한복선 원장의 딸인 정라나 경희대 호텔관광대학 교수도 합세했다. 강 교수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현재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한복선)할머니가 손주 진로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주셨죠. 딸이 미대를 다닐 때 담당 교수가 미술 쪽은 아닌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뉴욕에 있는 요리 학교를 보내려던 참이었어요. 어머니께서 일본에서 조리 공부를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셨죠. 그때 손주의 입학식에도 같이 가시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어요.” 역시 피는 못 속여~ 가장 좋은 스승이었던 어머니에게 배운 덕일까? 자매가 일을 대하는 방법이나 모습에는 황혜성 선생의 면모가 배어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음식을 하는 어머니의 손길만 닮는 것은 아니었다. “(한복선)어머니는 꼭 친구들을 모아 여행도 다니고 먹을 거며 뭐며 다 대접해주셨어요. 연로하셔서 몸도 힘들고 하실 텐데 왜 저렇게까지 하실까 했는데, 요즘 제가 딱 그래요. 내가 자리를 만들고 베푸는 게 훨씬 즐겁다는 것을 깨달은 거예요. 전에는 어머니의 그런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했는데, 이젠 그런 마음이 이해돼요.” 황혜성 선생의 따스함을 닮은 이가 한복선 원장이라면, 어머니의 단단한 카리스마를 지닌 이가 한복려 원장이다. 이는 맏이로서 느낀 책임과 부담감을 숙명으로 여긴 데서 나온 성품이기도 하다. “(한복려) 동생들이 나 같으면 그렇게 못 산다고 얘기해요. 대를 이어가는 자식으로서 사람들이 ‘어머니는 훌륭한데 딸들은 그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 점에서 동생들보다 어깨가 더 무거운 것 같아요. 제가 잘 이끌고 우리가 노력해야만 ‘역시 그 어머니에 그 딸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 2016-05-0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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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문화] ‘해어화' …운명에 맞서다 시들어버리다(영화평)
- 벚꽃이 지면서 무성한 초록빛 잎만 남겼다. 반면 잎을 먼저 선보인 철쭉이 그 자리를 메운다. 우리 인생사와 비슷하다. 먼저 되었다고 으스댈 일이 아니고 늦다고 투덜댈 일도 아니다. 야산 언저리에는 앵초 미나리냉이꽃이 수줍게 자리를 지킨다. 그야말로 꽃들의 잔치다. 다른 꽃 부러워하는 일 없이 다들 제멋에 겨워 피었다 진다. 인생도 이들과 같으면 얼마나 좋으랴! 눈에 꽃을 담다 보니 영화 가 눈을 끈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타이틀이 무척 시적이면서 왠지 숙명적인 느낌이 들어 사뭇 슬픈 느낌이 든다.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지칭했다는 이 말은 미인을 뜻하기도 하지만, 조선 시대 기생을 일컫는 말이었다. 조선 시대는 아니지만, 1940년대 아직 기생이라는 신분적 굴레를 벗을 수 없는 시대를 배경으로 두 여인의 숙명이 가슴을 친다. 전반부의 꽃같이 화려한 기생의 의상과 더없이 맑은 소녀들의 우정이 지나치게 밝고 고와서 빛나는 사금파리를 보듯 오히려 불안을 더한다. 그 두 소녀는 국악인 ‘정가’의 맑은소리를 타고난 정소율(한효주)과 노랫가락이 심금을 울리는 서연희(천우희)다. 여기 그 시대 최고 작곡가 김윤우(유연석)가 소율의 애인으로 등장하며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런데 기생이면서 예인인 소율과 연희가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을 만나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두 소녀의 우상인 이난영은 정가보다는 유행가에 알맞은 목소리를 극찬한다. 당시 윤우도 자신의 역작 ‘조선의 마음’을 부를 사람으로 소율이 아닌 연희를 택한다. 결국, 윤우는 연희에게 곡도 주고 마음도 준다. 철석같이 믿었던 애인의 배신에 소율은 윤우의 사랑을 되찾으려 연희같이 유행가 가수가 되려 한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세속적 권력의 논리로 운명에 대적하려는 비극을 내포한다. 그녀는 결국 끝까지 지키려던 정조를 버리고 일본 경무국장의 애첩이 되며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자신의 맑은 정가 소리를 헌신짝 내버리듯 던져버린다. 권번에서 함께 배우던 기생들이 부러워하던 소리를 버리고 남의 것을 흉내 내는 것은 변심한 애인을 되찾기만큼 힘들고 절망적이다. 잃은 것을 찾으려는 급급한 마음은 소율을 점점 불행의 늪으로 빠뜨린다. 결국,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소율은 연희를 따라 윤우도 죽고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연희를 쫓는다. 최근 발굴된 연희 앨범을 자기 것이라며 연희 역할까지 한다. 비극과 멜로의 차이는 작지만 분명하다. 주인공의 비극이 보편적 공감을 획득하면서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느냐의 여부이다. 마지막 거짓 공연장에서 만난 PD는 “진정 저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사랑은 거즛말이’였어요.” 라고 말한다.” 그것은 죽기 전 윤우가 어쩔 수 없는 변심을 용서하라는 의미로 소율에게 준 곡이다. 이 지점에서 경계선이 애매해진다. 영화는 맑은 정가의 소리와 목포의 눈물, 사의 찬미 등으로 이어져 뮤지컬만큼 다채롭고 화려하다. 성예람 작곡에 조선 중기 문신 김상용의 시조를 붙인 정가 ‘사랑은 거즛말이’는 가슴을 파고들며 에인다. ‘사의 찬미’ 또한 시대를 담고 영화의 결말의 복선으로 알맞다. 진실에 맞닥뜨려 꽃다발을 떨어뜨리는 장면은 해어화와도 어울리며 사랑의 상징인 꽃, 피었다가 시드는 사랑의 실체 등으로 중의적 의미를 나타낸다. 박흥식 감독은 당시 역사 속에 기생의 삶을 빌어 사랑과 인생에 대해 여러 생각을 영화 속에 담으려 한 것 같다. ‘사랑은 거짓말’ ‘그렇게 좋은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요?’ ‘헛된 나를 잊는 대신 부디 너만은 잊지 않기를····’ 등의 대사 속에 품은 의미는 관객의 공감을 끌어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다 보니 한 가지 주제로 쭉 끌어가는 힘이 옅어지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요즘 영화가 거의 그렇듯이 마치 뷔페를 차려 놓고 관객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먹으라는 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영화의 흥행을 좌우하는 것이 스타시스템으로 귀착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흥행 여부를 떠나 배우들의 연기에 의존한 바 크다. 남자 배우들의 ‘브로맨스’에 기대는 흥행 공식을 떠나 여배우를 투톱으로 내세운 것은 그런 면에서 모험적이며 두 배우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 한효주의 눈물 연기와 천우희의 애절한 목소리는 영화를 살리는데 한몫을 했다. 눈물에 섞인 ‘사랑은 거즛말이’ 곡조가 지금도 가슴속에 바람처럼 잦아들며 기어코 한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 2016-05-03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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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펫팸족 당신이 알아야 할 10가지 [2]
- 시니어 펫팸족이 대세라지만 집안에 새로운 가족을 들이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반려동물을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단지 반려동물이 예뻐서? 혹은 내가 적적해서 펫팸족이 되려고 했다면 생각부터 고쳐야 한다. 반려동물을 만나러 가기 전 적어도 당신이 알아야 할 10가지를 알아보았다. 1. 반려견과 함께 살면 10년이 젊어진다. 최근 메디컬데일리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영국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지리·지속 가능 발전학과 연구진은 개를 키우는 것이 신체 나이를 최대 10년 젊게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지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스코틀랜드 중동부 테이사이드 주(州)의 평균 79세 노년층 547명을 대상으로 신체나이와 반려견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이들 중 반려견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 그러지 않는 사람들보다 신체운동능력이 월등했다. 불안감이나 우울증도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연구진은 “반려견과 생활하는 것이 노년기에 접하기 쉬운 정신적, 신체적 퇴보를 자연스럽게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2. 반려견·반려묘를 입양하는 것은 소중한 생명을 살리는 일 유기·유실동물은 동물보호법이 정한 10일이 지나면 유기·유실동물의 인도적 처리(안락사)로 생을 마감한다. 열흘 안에 주인이나 입양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작은 생명의 심장은 멈춰버린다. 혈통 좋은 반려동물도 좋지만, 입양도 한 번쯤 생각해보길 권한다. 그런데 꼭 명심할 것이 있다. 유기·유실동물들은 버려지고 상처받은 기억이 있다. 그러므로 더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다. 분양동물보다 더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3. 반려견과 반려묘의 평균수명 개의 경우 큰 개인지 소형·중간 개인지에 따라 수명 차이가 있다. 소형·중간 개의 수명은 14~17년, 큰 개는 9~13년으로 큰 개가 소형·중간 개보다 수명이 더 짧다. 소형·중간 개는 빨리 어른이 되지만 큰 개에 비해 노화가 느리다. 큰 개는 천천히 성숙하는 대신 노화가 빨리 온다. 고양이 평균 수명은 15년이다. 고양이 종류에 따라 수명 차이가 있지만 거의 40세 가까운 나이까지 살아 기네스북에 올랐던 장수 고양이도 있다. 현재 미국에 사는 고양이 ‘코듀로이’가 ‘세계 최고령 고양이’ 기네스 기록을 가지고 있다. 작년 보도 당시 26세로 사람으로 치면 124세에 해당하는 나이다. 4. 반려견은 초콜릿, 양파를 먹으면 안 된다 반려견이 먹으면 안 되는 대표적인 음식이 땅콩버터다. 알레르기나 만성 질환이 있는 반려견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 초콜릿 또한 위험하다. 초콜릿 속 카페인과 테오브로민을 반려견이 섭취하면 구토와 탈수증 복통을 일으키고 체온 상승과 발작, 심한 경우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양파의 매운 성분은 적혈구 생성과 활동성을 낮춘다. 위험할 정도로 양파를 섭취하면 수혈을 해야 한다. 포도 또한 먹어서는 안 된다. 강아지 종류에 따라 구토나 설사 증세가 나타나는데 식욕감퇴, 탈수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신부전증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이 경우 3~4시간 안에 죽을 수 있다. 사과, 자두, 복숭아, 배, 살구 등에 들어 있는 시안배당체를 반려견이 먹으면 현기증, 호흡곤란, 발작을 일으킬 수 있고 심할 경우 혼수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우유, 치즈, 아보카도, 빵, 베이컨 등도 반려견이 먹으면 안 된다. 5. 반려인의 잘못된 행동 3가지 1. 안내견을 제외한 다른 반려동물은 대중교통이용 시 이동장(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반려동물을 담는 물건)을 이용해야 한다. 반려동물이 답답해한다고 잠시 내려놓은 순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남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충분히 이동장 적응 훈련을 해야 한다. 2. 반려견과 산책할 때 목줄을 풀어주거나 감정 상태를 모르는데 다른 반려견들과 어울리게 두면 안 된다. 사람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서먹하다. 동물들이라고 다르겠는가. 반려인이 생각 없이 한 행동 때문에 반려견들이 싸울 수 있다. 3. 준비 없이 길고양이에게 밥 주는 것도 삼가야 한다. 한국고양이보호협회는 작년 10월 주변과의 갈등을 줄이면서 ‘길고양이 돌보는 방법’을 소개했다. 이 단체는 “먹이뿐만 아니라 깨끗한 물을 먹이는 것이 중요하며 야행성인 고양이의 습성을 고려해 일몰 이후 일정한 장소에서 먹이를 주는 것이 좋다”고 했다. 또한, 길고양이의 치아, 잇몸질환 등의 문제를 줄이기 위해 사료 이외의 음식을 줘서는 안 되고, 고양이가 먹고 남긴 음식물은 즉시 치우기를 당부했다. 6. 안내견에게 말을 걸지 말라안내견은 잘 알다시피 시각장애인의 안전한 보행을 돕는 장애인 보조견이다. 심심치 않게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안내견. 이들을 대하는 성숙한 자세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더라도 꼭 알았으면 한다. 안내견과 마주쳐도 말을 걸면 안 된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안내견은 몸과도 같은 존재다. 안내견 또한 주인을 보호해야 할 임무가 있다. 혹시 안내견과 소통하고 싶다면 주인에게 먼저 물어봐야 한다. 주인의 동의 없이 말을 걸고 만지면 안내견은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음식물 또한 절대 주어서는 안 된다. 안내견들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이나 간식을 갈구하는 눈빛을 보내지 않도록 훈련돼 있다. 반려동물이 안내견 가까이에 가는 것도 막아야 한다. 안내견들 모두 힘든 훈련을 통해 뽑힌 우수견이기는 하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오면 짖고 싸울 수 있다. 무엇보다 안내견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훈련됐다. 다른 곳에 집중하면 주인 돕기에 어려움이 생기니 방해되는 행동은 삼가라. 7. 반려견의 발바닥을 살펴라 반려견을 키우다 보면 발을 들고 겨우 걷거나 혹은 발을 만졌을 때 신경질을 내는 일이 종종 있다. 이때 반려견의 발바닥을 확인해봐야 한다. 발톱이 부서져 피가 났다면 반려견이 통증을 심하게 느끼기 때문에 지혈제와 붕대를 이용해 빨리 치료해줘야 한다. 부서진 발톱을 제거할 경우 회복이 늦고 발톱이 변형될 수 있다. 발바닥에 뾰족한 돌, 마른 진흙, 뭉친 털 등이 낄 때도 있다. 이때는 털을 깎고 발을 씻은 뒤 소독약을 발라준다. 맨발로 땅을 디디고 다니기 때문에 발바닥이 마르고 갈라지면 위험할 수 있다. 급한 상황이라면 일반 로션을 발라줘도 되지만 피부를 단단하게 해주는 성분이 포함된 강아지 전용 크림을 발라주는 것이 좋다. 집안에서만 활동하는 반려견의 경우 발톱이 너무 자라 피부로 파고들 수 있으니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8. 반려견은 반드시 동물등록을 해야 한다 2014년 1월 1일부터 개를 기르는 사람들은 전국 시·군·구청에 반드시 동물등록을 해야 한다. 단, 동물등록 업무를 대행할 수 있는 자를 지정할 수 없는 읍·면·도서(島嶼) 지역은 제외된다. 대상은 3개월 이상 된 개이며 미등록 시 4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동물등록을 하는 이유는 주인이 반려동물을 잃어버렸을 때 동물보호관리시스템(www.animal.go.kr)의 동물등록정보를 통해 더욱 쉽게 찾기 위해서다. 동물등록방법은 3가지다. 동물의 몸에 직접 삽입하는 내장형 무선식별장치와 외장형 무선식별장치, 등록 인식표 부착 방법이 있다. 9. 반려동물 분양 계약서를 써라 개와 고양이에 한해 소비자 분쟁 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고시 제2014-4호, 2014. 3. 21)이 마련돼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판매업자는 반려동물을 판매할 때 7가지 항목이 기재된 계약서를 제공해야 한다. 소비자 분쟁 해결기준에서는 분쟁 유형 3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우선 반려동물 구매 후 15일 이내 폐사할 경우엔 동종의 동물로 교환 혹은 구매가를 환급받을 수 있다. 단, 소비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경우 배상 요구를 할 수 없다. 구매 후 15일 이내에 질병이 발생하면 판매업자가 책임지고 치료를 한 뒤 소비자에게 인도해야 한다. 단 회복 기간이 30일 이상 지연 돼 도중 폐사할 경우 동종 동물 혹은 구매가를 환급한다. 마지막으로 계약서를 내주지 않았을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에 계약해지가 가능하다. 반려동물 분양계약서에 기재되어야 할 7가지 1. 분양업자의 성명과 주소 2. 애완동물의 출생일과 판매업자가 입수한 날 3. 혈통, 성, 색상과 판매 당시의 특징사항 4. 면역 및 기생충 예방접종기록 5. 수의사의 치료기록 및 약물투여 기록 등 6. 판매 당시의 건강상태 7. 구매 시 구매금액과 구매날짜 10. 반려동물 사체, 이제는 폐기물이 아니다. 동물장묘사업은 농림축산식품부의 동물보호법을 적용받는다. 그동안 반려동물 사체는 환경부의 폐기물관리법상 폐기물로 분류·처리됐다. 동물장묘사업장을 개설할 때 환경부에서 주변 환경 피해 여부를 점검해 ‘설치승인서’를 내줬는데 받기가 쉽지 않았다. 농식품부는 “동물화장은 일반폐기물 처리와 달리 유독물질이 거의 나오지 않고, 크기도 작아서 설치승인서 제출 사업장에서 제외했다”고 말했다. 동물이 죽으면 쓰레기 봉지에 넣어서 버리면 그만이었다. 지금까지 반려동물 사체 상당수가 불법 화장, 매장, 폐기물로 처리됐지만, 법 개정으로 더욱 존엄한 장례 절차가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 2016-03-25 1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