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 농업·농촌에 대해, 이동필(李桐弼·63)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간단하게 ‘전환기’라고 명명했다. 자신의 고향이자 농업 현장인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농부로 일하면서 느낀 솔직한 속내였다. 그러나 그는 전환기 속에서 맡은 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고자 한다.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 스스로 돌아보는 ‘마음공부’ 뜨락에 씨앗을
친구 부부가 퇴직하고 경기도 용문에 가서 살고 있다. 500평 부지에 멋진 집이 있고 마당 텃밭이 꽤 넓다. 필자가 그 집에 자주 가는 이유는 어릴 때부터 전원주택 생활을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공에 떠 있는 아파트 생활은 너무 무미건조하여 땅에 가까이 가고 싶은 모양이다. 각종 유실수, 유기농 신선 채소, 화초를 기르는 재미와 진돗개 한 마리 기
이전과 달리 요즘은 소위 적당한 시기라는 게 따로 없는 세상이다. 일 년 사시사철 계절과 상관없이 무엇이든 대부분 할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떠날 수 있다. 특히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람 중에 시니어가 있다. 은퇴 후의 시간적 여유로움과 공허함을 채워줄 가장 좋은 도구가 여행이다. 그동안 치열하게 사느라 미루어 두었던 세상 나들이를 언
한 해에만 외국 관광에 나서는 사람들이 13억 명이라고 한다. 비행기 등 여행 수단이 발달하고 소득도 늘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인들이 해외여행에 나서면서 어딜 가나 중국인들이 보인다.
필자가 처음 유럽에 갔을 때가 80년대 초반이었다. 그때만 해도 유럽에서 동양인들을 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인들을 비롯하여 중국인들까지 가세하면서 어딜 가나
도시에 살다 농촌으로 삶터를 옮기는 것을 귀농 또는 귀촌이라고 한다. 농촌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농사를 지으러 가는 것은 ‘귀농’이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귀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시골을 찾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가는 것보다 여유를 즐기기 위해 이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 또한 자신이 살던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결혼하고 40대에 같은 아파트, 같은 층에 살게 된 인연으로 가깝게 지내던 여고 3년 선배가 있었다. 내가 카톨릭 신앙을 가지게 됐을 때 가톨릭 신자이던 대모로 모시고 세례 받을 만큼 가깝다. 나는 평소에 대모를 ‘언니’라고 불렀다. 은행원 남편과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언니다. 젊었을 때는 내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었기에 언니네 집으로 자주 놀러가곤
사노라면 가끔은 숨을 공간이 필요하다. 젊은 날이었다. 과음을 하고 동료들 몰래 건물 뒤로 돌아가서 시원하게 토악질을 해댔다. 보고도 못 본 척해주면 좋으련만 꼭 뒤따라와서 등을 두드려 주는 선배가 있었다. 썩 고맙지는 않았다. 손등에 흉터를 가리려는데 까뒤집어 들어내게 하며 “야! 우리 톡 까놓고 지내자” 하고는 정작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 유형이다.
현재 태양광발전설비 전문기업인 에타솔라에서 활동 중인 김진수(金鎭洙·56) 부사장은 처음부터 태양광 전문가는 아니었다. 전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첫 직장생활은 유통 분야에서 시작했다.
“원래는 파스퇴르유업에서 특판팀장을 했어요. 그곳에서 한참을 일하다 놀이동산 드림랜드로 옮겨 총괄팀장을 맡았죠. 퇴직을 한 뒤에는 청과 도매업에 손을 댔어요. 제가
아내가 무릎 연골을 다쳐 병원에 함께 가는 중이었다. 자동차 라디오에서 청취자의 사연을 소개하는 코너가 흘러나왔다. 그 내용은 필자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야기는 이렇다.
등산 중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배낭 속 사과를 꺼내 먹고 싶었으나 정상에 올라 먹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참았다. 정상에 올라 기쁜 마음으로 사과를 꺼내는 순간 절벽으로 떨어져 결국
이제야 비로소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고 했다. 삐걱대던 시절을 지나 생각을 바꾸고 삶을 대했더니 희망이 찾아들었다. 나이 먹고 퇴역 군인처럼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이 사람.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는 이유? 일이 더 하고 싶어서란다. 멋진 목소리의 DJ, 활기찬 시니어 기자 소리 듣는 게 좋다는 윤종국 동년기자를 만났다. 화창했던 어느 화요일 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