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가슴에 기쁨과 희망, 좌절도 품고 산다. 마치 뷔페식당처럼 한 접시에 담겨 있다. 세 가지 이상의 물감을 섞으면 탁한 색이 나온다. 그래서일까 지하철도 그런 것 같다.
붐비는 시간이었다. 옷차림도 산뜻한 말쑥한 청년이 내 뒤에 섰다.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는 것 같았다.
“ 선배님, 안녕하세요. 아, 그 일은 제가 처리 못 했는데요. 그럼
저는 옷 입는 데는 잠방이입니다. 무신경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걸치고 나왔다가 푸른색 양복 하의에 노란색 스포츠 양말 차림이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한심한 것은 이 차림이 괴상망측하단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온종일 돌아다녔다는 겁니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서 아내로부터 “패션 테러리스트”란 핀잔도 듣고서야 문제
한번 맛을 보면 익숙해지는 것일까? 때로는 아깝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자식들이 주는 선물이니 두말없이 받아들이고, 덥석 따라나섰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보니 신세계가 따로 없다.
사람이 간사한지라 좋은 맛을 보니 더 나은 것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필자도 알뜰한 사람이라 불필요할 곳에는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필자의 젊은 시절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8월 중순이 넘어도 무더위는 꺾이지 않고, ‘폭염특보’만 휴대폰을 두드린다.
여름에 시원하여 에어컨 가동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던 ‘관악의 전원주택’ 필자의 아파트도 올해는 요금폭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손주와 함께 더위를 쫓으면서 끈끈한 정을 키운 이야기를 펼친다.
◇올 여름 피서하기
올 폭염에 힘들어 보이는 쌍둥이 손녀·손자를 데리고 피서
우리가 일본에 도착해서 전학서류를 전부 내서 학급배정을 받은 것은 3학기 때였다. 우리에게는 2학기 까지는 있었는데 3학기라니... 암튼 그렇다 하니 그대로 따르면 되는 일이라 특별히 힘든 일도 아니라 그러려니 했다.
큰 애는 4학년 2반이었고 작은 애는 2학년 1반이었다. 큰 애 담임은 부끄러움 반에 걱정 반으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어쩔 줄 모르는
1915년 5월 27일생이신 아버지와 1922년 11월 1일생이신 어머니 사이에서 1946년 1월 4일 8시께 1942년 8월 13일 누님에 이어 둘째로 태어났다. 2년 뒤 여동생, 4년 뒤 또 여동생이 태어났고 막내 남동생과는 9살 터울이다
어릴 적 기억은 4세 때 한국은행 돌계단을 오르면서 엄마 손 잡고 명동 가던 것뿐이다. 누나는 공부를 잘해 늘
아들이 어릴 때부터 강아지 한 마리 키우는 게 소원이라고 했지만, 마음이 아프면서도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유로는 집이 좁은 아파트라서였고 기관지가 약했던 아들을 생각해 털 날리는 강아지를 집안에서 키울 수는 없었기 때문인데 그보다는 예전 기르던 강아지 쮸쮸가 생각나서였다. 쮸쮸는 15년 동안 우리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았던 개다.
그러나
이른 아침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들었다. 올케였다.
“오빠가 중환자실에 계셔.”
오빠의 의식이 이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싸늘해지는 기분. 입원했다는 말도 없었는데 중환자실이라니?
사흘 전, 감기 기운이 있어 의원에서 약을 지어 먹고, 저녁을 먹은 뒤 잠자리에 들었는데 호흡이 힘들다고 했다. 응급실에 가자고 했더니, 늦었다고 해서 이튿날 종합병원
이번에 부산 노사발전위원회에서 강의 요청이 왔을 때 사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강사료와 교통비는 준다고 했지만 과연 멀리 부산까지 가야한다는데 부담이 생긴 건 사실이다. 더구나 한창 휴가철이다. 거절할 명분도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처럼 멀리 부산까지 가는데 여름휴가 차 며칠이나 또는 일박이라도 할 생각도 했었다. 부산에는 지금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