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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끽다끽반(喫茶喫飯)
- 선어(禪語)에 나오는 말이다. ‘차를 마실 때는 차 마시는데 집중하고,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데만 집중하라’는 말이다. 몇 해 전 댄스동호회 파티에 초대되어 간 일이 있다. 그때 회장을 맡았던 사람이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의전부터 시작해서 안 끼는 데가 없었다. 메인 파트의 시작은 그 회장의 시범댄스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회장이라는 사람이 루틴 순서를 완전히 까먹고 헤맸다. 다시 시작했으나 마찬가지였다. 망신은 망신대로 당하고 그 파티는 엉망이 되었다. 혼자 이것저것 다 하려다 보니 집중이 안 된 탓이었을 것이다. 시범을 하기로 했으면 시범에만 집중하고 다른 의전은 다른 임원들에게 맡겼어야 했다 아니면 의전만 맡고 시범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필자는 수많은 댄스 시범과 경기대회에 나갔으나 한 번도 루틴 순서를 틀린 적이 없다. 더구나 모던 5종목을 전문으로 했으니 플로어에 나가 다섯 가지 춤을 춘 것이다. 어떤 시범에서는 여러 가지 루틴을 구사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같은 왈츠라도 학원 용, 선수용, 장애인 파트너 용, 초급, 중급 등으로 기억해야할 루틴의 가지 수도 많다. 그럴 수 있었던 요령은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집중했기 때문이다. 시범장소나 경기장소에 가면 눈을 감고, 또는 눈을 뜨고 주변의 기물 위치와 댄스 루틴을 대비시켜 기억을 다지는 것이다. 당구를 치면서 상대방이 스마트폰 보는데 한눈을 팔고 있으면 그 게임은 십중팔구 필자가 이긴다. 같이 당구를 치면서도 옆 당구대에 신경 쓰는 사람도 있다. 당구라는 것이 흐름이 있기 때문에 계속 집중해서 보고 있지 않으면 제대로 칠 수가 없는 것이다. 여러 가지 모임이 겹치는 경우가 많다. 그전에는 두 군데 모임이면 둘 다 참석했다. 한 군데는 앞쪽만 참석하고 다른 모임에는 뒷부분에 참석하는 것이다. 아예 못 가는 것보다는 환영받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군데 모두 불만족한 것이다. 처음 간 곳은 중간에 다른데 간다고 하니 분위기를 깨는 것이다 두 번째 간 곳은 이미 자기네들끼리 공유한 분위기가 있는데 거기 중간에 들어가는 것은 민폐가 된다. 이미 술이 한 순배 돌았다면 그 수준에 못 맞춰 더 불편하고 어색해진다. 앞 모임에서 술을 많이 마셨다면 두 번 째 모임에서도 마셔야 하므로 과음하기 쉽다. 그래서 요즘은 한군데만 집중하고 한 군데는 미리 양해를 구하고 안 간다. 요즘 사람들은 바쁘다. 그리고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한다. 멀티태스킹의 소질이 있는 사람들이다. 같은 시간에 여러 가지 일을 다 잘 처리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그러나 무리이다. 다 잘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드물다. 특히 남자들은 한 가지 이상을 동시에 하기에는 무리라는 분석이 있다. 태생적으로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옆 테이블 손님들 얘기도 다 들으면서 수다도 떨고 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자들은 누가 옆에 앉았었는지도 기억을 못한다. 그러면서도 앉은 자리에 집중 하지 못한다. 마음을 정하고 한 자리에 앉았다면 끽다끽반(喫茶喫飯) 할 일이다.
- 2018-01-1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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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개띠의 여행 추억, "먹고살 만해졌을 때 우리는 봇짐을 멨다"
- 58개띠들이 하면 유행이 된다. 폭발적인 우리 사회 인구증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58년생들은 사회 변화와 유행을 주도한, 지금으로 치면 ‘완판남’·‘완판녀’로 부를 수 있는 세대다. 그들의 문화적 파괴력은 굉장했다. 여러 분야 중 특히 여행과 관련한 58개띠들의 문화주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빈궁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이들은 다양한 여행을 경험해나갔다. 1978년. 58개띠들이 만 스무 살이 되던 해. 당시 8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린다. ‘바캉스 파장 … ‘고요’ 되찾는 산하, 연인원 5천만 기록’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당시 여름휴가를 위해 산과 계곡, 바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를 증언한다.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작년 대비 피서객이 40% 늘었다는 대목이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성인이 된 58개띠들이 피서객 증가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도 제주도는 관광지로 인기가 좋았다. 평소 600석 내외로 운영되던 서울-제주 간 항공편은 피서기간에는 1000석 이상으로 증편돼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다음 해인 1979년, 철도청은 고급여행을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새마을호 객차 확충을 서둘러 진행했다. 물론 58개띠들이 여행 보따리를 맘껏 싸기 시작한 원인에 경제성장의 수혜도 빼놓을 수 없다. 1977년은 우리 경제의 상징적인 시기였다. 1인당 GDP가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해 1034달러를 기록했고, 수출 역시 최초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배고픔은 점차 잊히고 있었다. 가장 원하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그렇다면 58개띠들의 신혼여행은 어땠을까. 통계청이 2011년 발표한 ‘최근 30년간 초혼자료 분석’에 따르면, 1981년의 남성 초혼 연령은 26.4세, 여성은 23세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58개띠들의 결혼이 이뤄진 시기는 이들이 23세에서 26세를 지낸 1981년에서 1984년 사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1982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젊은이들의 신혼여행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등장한다. 한국갤럽이 18세 이상의 남녀 12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많이 다녀온 신혼여행지는 부산(21.6%), 경주(12.6%) 순이었다. 아무래도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주도는 3위(12.2%)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재미있는 것은 순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존재다. 당시 지방 거주민들에게 서울은 충분히 매력 있는 여행지였다. 신혼여행으로 서울을 선택한 이들은 5.4%나 됐다. 가고 싶은 신혼여행지로는 역시 제주도(46.5%)가 가장 많이 꼽혔고, 당시 왕래가 여의치 않았던 외국을 꼽은 이들도 13.1%나 됐다. 3위는 설악산(11.8%)이 꼽혔는데, 다녀온 여행지에서 7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설악산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1978년 진갑을 맞은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관광지도 개발이 막 시작된 설악산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천지개벽’ 58개띠가 해외 땅을 밟은 것은 ‘여행’보다 ‘일’이었다. 물론 해외 출장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고위직 공무원이나 주요 기업의 임원이 해외 출장이라도 나가면 모두 기삿거리가 됐다. 그만큼 해외 방문은 쉽지 않았다. 출장이 목적이어도 회사의 매출 규모가 낮은 기업은 여권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중동에서 일어난 건설 붐은 58개띠들의 해외 구경의 좋은 구실이 됐다. 굳이 따지자면 58년생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말까지 일었던 중동 붐의 막차를 탄 세대다. 1985년 해외로 나간 한국인은 약 48만 명이었다.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 이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많았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다. 서울올림픽 개최 다음 해인 1989년이 되면서 전 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졌다. 1983년만 하더라도 50세 이상인 사람이 관광예치금을 200만 원 이상 맡겨야 관광여권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매년 대상 연령이 낮아지다가 1989년에 완전 자유화가 이뤄졌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1990년부터 신문 지면에는 ‘배낭여행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즐겨 찾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에서 태국이나 필리핀으로 바뀌었다. 세운상가 외제장사 아시나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해외 출장 근로자들의 부업 중 하나는 바로 소니와 산요로 대표되는 일본 가전제품을 내다 파는 일이었다. 이들이 면세점 등에서 구매해 들여온 카메라, 오디오, 전기밥솥 등은 세운상가 상인들에게 늘 환영받았다. 그러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지면서 소비자들이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사갖고 들여오는 문화가 확산됐다. 이런 문화의 아이콘으로 ‘코끼리 밥통’이 있다. 일본 조지루시 전기밥솥은 밥맛이 좋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고소득층 사이에서 필수품 대접을 받았고, 점차 대중화되어갔다. 매일경제신문은 1992년 광복절 ‘일제선호 불치병인가’란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일본 버블경제의 거품이 꺼져가면서 가전제품 상점가가 몰려 있는 아키하바라역 인근 가게들은 불황을 겪고 있지만, 한국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밥통 등 가전제품을 사주는 덕에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최근 중국 관광객 유커들이 백화점에서 한국산 밥통을 사재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당시 58개띠들의 나이는 34세였다. 김포공항 입국 수속 행렬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신문에 게재된 해외여행 광고를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도 일본, 미국, 동남아로 지금과 차이가 나지 않았고, 도쿄 4일 여행상품이 70만 원 선, 필리핀 4일 여행 상품이 48만 원 선으로 가격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다면 중국 관광의 유무다. 58개띠들이 중국 관광지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1994년 중국여행 전면자유화 이후부터다. [추억 한토막] 대전역 가락국수 맞먹는 앵커리지공항 우동의 추억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났던 대전역. 선로가 붐비고, 대기시간이 길었던 탓에 대전역 승강장의 가락국숫집은 승객들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비행기 여행과 관련해서도 대전역 가락국수와 비슷한 추억의 공항이 있다. 다소 엉뚱하게도 미국 알라스카 앵커리지공항이 그곳이다. 대한항공이 1975년 서울-파리 여객노선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노선이 늘기 시작하면서 앵커리지 공항은 상당수 여객기가 들러야 할 경유지였다. 당시 여객기들의 비행거리가 짧았고, 냉전으로 인해 소련 영공을 지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절차였다. 이런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 버블시대 해외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일본의 항공사들도 이곳을 들러야 했다. 환승보다는 급유의 목적이 컸기 때문에 앵커리지에서 머무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해외 출장이 잦았던 상사맨들이나 항공사 관계자들은 당시 앵커리지의 추억을 기억한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했던 안영희 동년기자는 “한 시간은 있어야 했는데 승객들이 딱히 할 만한 것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면세점들이 장사가 잘됐죠”라고 설명한다. 이 공항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던 매장은 바로 ‘우동’. 해외 왕래가 잦았던 한국과 일본의 ‘밀리언 마일러’ 사이에선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성지였다. 일본의 몇몇 사이트에 남아 있는 기록의 편린을 맞춰보면, 앵커리지 우동은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주인은 미국계 일본인으로 육수 제작과 제면을 직접 하는 정통파여서, 본토 일본인들도 인정할 정도였다고. 가격은 10달러 내외로 비싼 편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선 ‘앵커리지 우동’이란 단어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수준 높은 우동집을 칭하는 대명사처럼 통용되고 있다. 장사가 잘되자 한 항공사 자회사가 주인을 밀어낸다.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물론 우동은 인스턴트로 바뀌었다. 냉전의 종말과 항공기 성능의 향상으로 앵커리지 경유 노선이 줄자 이 우동집은 한국인 사업가에게 넘어간다. 맛도 한국식으로 변했고, 단무지는 별매여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대한항공에서 정년퇴직한 정용진 기장은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서 앵커리지공항의 우동은 자주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어요. 우동과 함께 팔았던 연어 고기도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이어서 인기가 많았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 2018-01-02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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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터처블한 고전을 터처블하게 만든 강신장 대표
- 강신장(60) (주)모네상스 대표는 지식 디자이너이자 창조 프로듀서다. 지식 속에 숨겨진 창조의 씨앗을 찾아내고 가치를 재해석해 창조의 영감을 생산해낸다. 삼성경제연구소 근무 시절, 대한민국 인문학 열풍을 일으키고, 1만 개에 달하는 5분 동영상 콘텐츠로 1만 명이 넘는 CEO들을 매혹시켰던 그가 2014년 모네상스를 창업, 고전 전도사로 나섰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끝까지 읽지 않은 고전’을 세계 최초로 5분 동영상으로 시각화하는 무모한 작업에 팔을 걷어붙였기 때문이다. 문학뿐 아니라 역사, 철학, 정치 등 비문학에 이르기까지 총 500권의 고전을 5분 동영상으로 제작하는 작업 대장정을 마쳤다. “고전(古典) 보기, 더 이상 고전(苦戰)하지 마세요” 그가 만든 영상 고전의 가장 큰 장점은 쉽고 재미있다는 점. ‘읽기도 힘들지만 읽었어도 몰랐던 고전의 의미’를 손에 잡히게 해설해준다. 고전의 줄거리와 평론을 결합, 5분으로 간결하게 만들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등 디지털 기기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강력한 그래픽 이미지와 텍스트를 결합해 ‘읽는 책’을 ‘보는 책’으로 구성한 게 특징이다. 강신장 대표는 요즘 고전과 노는 게 일이다. 5분 고전동영상(모네상스닷컴) 작업, 고전책(‘고전 결박을 풀다’) 집필, CEO를 위한 고전학교 ‘루첼라이 정원’ 운영 등 ‘고전 삼두마차’를 이끌며 고전의 바다에 풍덩 빠져 있다. 퇴직 후 창업 아이템(?)으로 ‘고전’을 선택하셨습니다. 고전을 5분 동영상화하는 작업에 도전한 특별한 동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창조는 ‘나다움’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에이티브’라기보다는 ‘오리지널’에 가까운 것이죠. 나다운 것을 만들려면 내가 왔던 곳 오리진(origin)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창조는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역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기업 임원생활을 해보았지만 책임이란 짐, 권위와 형식, 시키는 일을 해야만 하는 틀에 박힌 삶이었어요. 작은 변화도 두려웠고, 나다움을 살리는 생활은커녕 생각 자체가 퇴화되더군요. 그래서 나를 되돌아보고, 나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 고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전을 읽는다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겨우겨우 읽어도 그 뜻을 알기가 어려웠지요. 누구나 고전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고전을 외과수술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조는 전진이 아니라 역진이다.” 전진과 속도만 외치는 시대라 그 의미가 더 와 닿습니다. 창조력의 비밀을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창조력의 근원은 휴머니티(humanity)입니다. 창조력은 결국 사람을 보고 사람들 마음속에 충족되지 못하고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아픔과 결핍과 갈증을 보는 인문정신에서 출발하니까요. 그런데 휴머니티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오직 연민의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만 볼 수 있기에 최고의 창조기술은 ‘연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살펴보면 위대한 발견은 모두 연민의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파편화된 삶을 살다 보니, 모두가 아픕니다. 그래서 타인의 아픔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민의 눈을 뜰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고전을 읽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상상력은 자신이 가진 레퍼런스에 비례하게 마련이지요.” “모든 혁신은 연민의 자식들이다.” 연민의 힘을 강조하셨는데요. 고전 공부를 통해 깨닫게 된 강 대표의 인생 모토는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수페르 아스트라(super astra)’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별보다 더 높이’인데요. 별보다 더 높은 곳은 고도가 아니라 흡수도입니다. 만약 우리가 철저히 상대방 입장에서 그 사람 마음을 봐줄 수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별보다 더 높은 곳이고, 또 만약 우리가 철저히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나를 보고 내가 하는 일을 볼 수만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별보다 더 높은 곳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고전을 통해 사람을 보고 나를 보는 성찰의 인문학을 비로소 만난 것 같습니다.” 고전 미니동영상의 부제가 ‘나를 만나는 5분의 기적’이더군요. 고전을 요약본으로 만든다, 특히 5분 동영상으로 고전의 맛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제기도 있는데요. 마치 사랑과 정성으로 만들어야 할 어머니의 손맛을 영양제 한 알로 해결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 같습니다. “무식해서 용감했다고나 할까요. 아마 제가 학자라면 절대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고전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로부터의 비판이 너무나 두려웠을 테니까요. 저는 고전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탓하기보다, 읽도록 만들어주는 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고전을 읽지 못하는 독자의 아픔을 공감했기에, 어떻게 하면 쉽고 재미있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만을 생각했습니다. 제 장점은 복잡한 지식을 말랑말랑 쉽고 재미있게 만들 줄 아는 데 있으니까 이것을 결합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때 저명한 영문학자이신 김욱동 교수를 만나게 되었고 김 교수님께서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용기를 주셨기에 다른 전문가와 본격적인 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영상을 보고, 고전을 읽지 않기보다는 고전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리라 생각해요.” 고전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끝까지 읽지 않는 책’이란 말이 있지요. 5분 동영상 500편 리스트를 살펴보니 저 역시 중도 포기한 책이 많더군요. “어려움, 두꺼움, 두려움의 결박을 풀고 언터처블(untouchable)을 터처블(touchable)로 만들자. 읽는 고전을 보는 고전으로 만들자. 이것이 저의 목표였습니다. 단지 축약이 아니라 에센스 농축 작업이라고나 할까요. 고전을 한눈에, 한 손에 잡을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습니다. 딱딱한 책을 오감을 자극하는 5분 영상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고난도 외과수술이자 성형수술이었습니다.(웃음) 답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주인공보다 나를 만나게 하는 관점 전환에 초점을 뒀습니다. 고전은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도와주고, 다른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힘을 키워줍니다. 다 읽고서도 그 뜻을 몰랐던 고전의 의미를 동영상을 통해 알게 됐다는 독자 소감을 들을 때 행복합니다.” 고전이 좋긴 한데, 일각에선 ‘돈이 되나?’ 하면서 실용적 관점에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하하. 저는 고전, 나아가 인문학으로 팔자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접체험과 성찰을 통해 세상의 아픔을 볼 수 있으니까요. 다른 사람 마음속에 있는 고통을 보는 좋은 방법은 삶의 밑바닥으로 가보는 것입니다. 밑바닥에 내려가 보면 더 이상 남의 일이 남의 일로 보이지 않거든요. 모든 것이 나와 연결되지요. 초연결 시대에 그런 연결지능만큼 우수한 재능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전은 그걸 가능하게 하지요. 인생의 고전(苦戰)을 대리경험하게 해주니까요. 고전은 한마디로 고전(苦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아닐까요? 역지사지, 백번 강조하지만 상상만으론 한계가 있어요. 바닥을 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치고 올라왔는지 대리경험을 하고, 내 삶에 적용할 지혜를 얻지요. 운이 좋아지고, 운을 바꿀 수 있는 혁신과 창조력의 원천을 얻는 데 이 이상의 방법이 있나요?” 그의 입에서 ‘주홍 글씨’, ‘노인과 바다’ 등의 고전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인생반전의 포인트가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예컨대 ‘주홍 글씨’의 진정한 교훈은, 우리 모두가 의도하지 않았던 잘못으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혔을 때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그 낙인을 지울 수 있을까에 대한 방법을 성찰하도록 하는 것이 그 가치라고 설명한다. 주인공 헤스터 프린의 삶과 투쟁 속에 그 길이 있기에 주홍 글씨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또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허탕을 친 후에 몇 날을 싸워 어렵게 잡은 청새치를 상어에게 모두 뜯긴다. 즉 천신만고 끝에 겨우 한 가지를 이루었는데 그것마저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을 때 과연 나라면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성공이 아니라 과정 속에 있는 것이고, 비록 물질적 가치로는 파멸할 수 있지만, 정신적 가치로는 패배할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기에, 공평하지도 않고 선택할 수도 없는 운명의 비정하고 부당한 공격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성찰해보는 것이 진정한 문학작품의 가치라는 조언이다. 강 대표에게 가장 와 닿은 고전은 어떤 작품이었는지요. “‘이반 일리치의 죽음’입니다. 성공한 중견 판사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겪는 마음의 분노와 불안, 치유를 다루는 내용이지요. 우리가 살면서 중요하다 생각하고 매달렸던 것들이 죽음이란 거대한 필연 앞에서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성찰하도록 해주는 내용인데요. 이 작품은 저에게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하더군요.” 10년 전, 삼성경제연구소 상무 시절 만났을 때 창조학교에 대한 꿈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야심차게 설명했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임원 시절의 그때와 지금의 늦깎이 고전 전도사가 되고 나서 달라진 점이 있는지요? “혁신과 창조는 제 커리어를 관통하는 키워드였어요. 재미있기도 했고 열심히 일한 결과 과분한 인정도 받았습니다. 큰 실패가 없는 삶을 살았죠. 하지만 돌아보니 일에 대한 집착이 하늘을 찔렀어요. 그것은 쥐어짜는 상상력이지, 따뜻한 상상력이 아니었습니다. 일만 보고 사람을 돌보지 못한 것을 뒤늦게 깨달았어요. 이제 인격의 바탕을 갈고 닦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지요. 잘난 리더보다 따뜻한 리더가 되고자 노력하는 것, 그게 가장 달라진 점입니다.” 58년 개띠이시지요. 개띠는 치열하게 살아온 베이비붐 세대 중에서도 첫 스타트 세대입니다. 올해 환갑이신데요. 인생의 뉴스타트 기점에서 되새기는 인생의 의미를 부탁드립니다. “한마디로 인간적으로 좀 더 성숙해져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형식에 갇히지 않고, 모든 것을 해체해보고 다르게 보려고 노력하고자 합니다. 환갑이 되었으니, 이제야말로 진정한 시작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찢어진 청바지에 빨간 운동화를 신어도 보고 자유롭게 살아보려 해요. 그 속에 행복이 있더군요. 원점에서 모든 것을 해체해 다르게 보려고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오는데 강 대표가 인용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한 구절이 귀를 맴돌았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삶, 살면 살수록 생기가 빠져나가는 삶, 나는 내가 산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실은 나도 모르게 조금씩 내려오고 있었던 거야. 그래, 맞아.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산을 오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딱 그만큼씩 진짜 삶이 내 발 아래로 멀어져가고 있었어….” 2018년 한 해, 우리가 세우는 야심찬 계획은 산 정상을 향해 열심히 올라가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딱 그만큼 내려가면서도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계획인가. 혹시 우리는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진 않은가. 새해엔 별보다 더 높은 곳, 그곳에 이르는 사다리를 놓아보는 것 어떻겠는가.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성공하는 CEO의 습관’, ‘하이터치 리더’, ‘용인술, 사람을 쓰는 법’ 등이 있다.
- 2018-01-0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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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들이 떳떳하게 사는 법
- 바야흐로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하던 삶의 방식들은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고 생소하고 낯선 시간의 문 앞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든다. 과거 우리 부모 세대는 대개 60 언저리 혹은 70 이전에 세상을 하직하셨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60대 중반을 바라보는 주변의 친구들은 모두 세상을 버릴 생각 없이 말짱하다. 요즘 같아서는 정말 100세 시대라는 말이 실감 난다. 그렇다면 좋은 세상이 온 건데 우울하고 두려운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건 어쩌면 우리에게 덤으로 주어진 30년 정도의 시간이 주는 공포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과거 인류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미지의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왜 걱정되지 않겠는가. 과연 그 긴 시간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 그 긴 시간을 견딜 물질적 동력은 준비되기나 한 걸까? 간혹 신문과 방송 같은 미디어에 전문가가 등장해 길어진 수명에 대비하는 갖가지 대응책을 소개하고는 있지만 살아보지 않은 것은 저나 나나 똑같지 않은가. 100세가 다 되신 철학자 김형석 선생 같은 분 정도는 되어야 경험을 말할 수 있는데 어디 그분 같은 경력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각자 자신이 살아온 방식으로 각자 미래를 개척하는 수밖에는 없을 듯싶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 취향에 맡겨놓는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핵심은 어떻게 그 긴 시간을 물질적인 걱정 없이 품위 있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경제 활동이 왕성한 시기에 이런 미래의 실상을 모른 채 부모 봉양하고, 자식 교육시키고, 결혼 비용까지 댄 어리석은 일들이 후회되지만 다 지난 일이고 어디 호소할 데도 없다. 미래를 예측한다는 분들은 TV에 나와 그러니 나이 들어도 일을 해야 한다고 뻔한 말들을 늘어놓지만, 그걸 몰라서 걱정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비록 건강이 염려 없더라도 이 나이의 고령자를 써 줄 곳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어떤 이는 그래서 평생교육이 필요하니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교육을 받으라고 역설한다. 아, 앓느니 죽지! 취미로 교육받는 건 모르지만 취업은 언감생심이다. 고교 교사로 있는 가까운 친구 하나는 정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최근 딸이 직장 때문에 손자를 돌봐 달라는 바람에 낮에는 학교로 밤에는 딸네 집으로 출근하며 “늘그막에 이 무슨 고생이냐”며 죽을 맛이라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그는 최근 우리 친구들 사이에 최고로 부러운 존재다. “야, 2년만 버티면 죽을 때까지 생계 걱정이 없는데 무슨 소리야. 네가 제일 팔자 좋다.” 전화 끊고 입맛이 씁쓸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딸애는 세상 물정도 모르고 결혼하고 애 낳으면 회사를 그만둔단다. 자식을 먼저 잘 키운 뒤에 다시 프리랜서로 일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 말도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런 생각이 여성들의 노후를 혼란스럽게 만든 원흉이 아닌가. 남편만 바라보다 물먹은 여자가 어디 하나둘인가! “얘, 무슨 소리야 힘들어도 내가 키워 줄 테니 열심히 다녀. 노후를 생각해야지. 나한테 양육비 주면 열심히 키워 줄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나이 들고 가장 억울한 것이 소위 ‘경력단절’이라는 장벽이다. 과거에 아무리 화려한 경력이 있었어도 단절되고 나면 고철에 불과하다. 남성보다 여성의 노후가 불안한 이유이다. 애 키우는 거야 경험 많은 노인들이 더 잘하는 영역이고 노인 돈벌이에도 기여하니 힘은 들어도 윈윈 하는 길이 아닌가. ‘얘야 부디 끝까지 남아 임원 자리까지 해 보고 그만두렴.’ 여성이 떳떳하게 사는 길이다.
- 2017-11-03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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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安全자산’ 달러의 가치
- 시절이 하 수상하다.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할 때마다 국내 증시가 빠지고 원화 가치가 추락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 경고음이 울린다. 북핵 외에도 미국 금리인상, 중동 불안, 유럽 부채 등 정치·경제 이슈들이 수시로 국내 자산의 가치를 위협한다. 경제·금융 전문가들은 “자산의 일부(10~30%)는 외화(달러)로 가져가라”고 한목소리를 낸다. 위기 시 자산을 지키기 위한 차선의 방어책이다. # 제약회사 임원을 지낸 뒤 정년퇴임한 지모(62)씨는 요즘 북핵 관련 뉴스를 들을 때마다 걱정이 앞선다. “혹여나 전쟁이 발발하면 집과 주식의 가치가 사라질까 두렵다”며 “위기를 대비해 안전자산인 금과 달러 매입을 서두르고 있다”고 말했다. # 중견기업에 다니는 김모(51)씨는 매월 급여일마다 가슴을 졸인다. 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송금해야 하는데 환율에 따라 금액이 크게 변동되어서다. 김씨는 “연초에는 5000달러 송금에 약 600만원이 필요했는데, 지난달에는 원·달러 환율이 1130원 수준으로 내려오면서 대략 550만원이 들었다”며 “환율이 떨어질 때마다 꾸준히 달러를 사서 적립해놓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따라 환율이 널뛰기를 하고 있다. 연초 1210원까지 치솟았던 원·달러 환율은 9월 11일 현재 1130원 수준으로 밀렸다. 우리나라는 ‘신흥국의 자동인출기(ATM)라고 불릴 정도로 유독 조그만 충격에도 자금이 크게 출렁이는 특징이 있다. 작은 폭격에도 충격파가 매우 큰 국내 금융환경에서 생존 자산, 가치보존 자산으로 외화(달러) 자산이 주목받는 이유다. 위기 때 강한 ‘가치보존 자산’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7월 개인 달러화 예금잔액은 105억2000만 달러로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전월보다 5억3000만 달러가 증가했다. 이 중 달러화 예금이 48억4000만 달러가 증가했고, 엔화 예금이 4억7000달러 늘었다. 박해영 하나은행 Club 1 PB센터 PB팀장은 “전쟁을 경험한 어르신 세대는 가격(환율 등)에 상관없이 금과 달러에 관한 매수 문의가 많다”며 “대한민국에 위기가 오면 달러가 제값을 한다는 것을 경험상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전쟁과 같은 극단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국내 자산 가격이 폭락하고 달러 가치가 치솟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은 수시로 반복 재현되고 있다. 실제 북한의 핵실험이 단행될 때마다 코스피지수는 어김없이 하락했다. 환율도 크게 요동쳤다. 6차 북핵 실험이 단행된 9월 3일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영업일 대비 달러당 10.20원 상승했고, 코스피는 전 거래일 대비 28.04포인트 내려앉았다. 뿐만 아니라 (금리가 오를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국고채 3년물의 금리는 0.04%포인트 상승 마감해 주식과 원화, 채권 가치가 동시에 하락하는 ‘트리플 약세’를 기록했다. 비단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만이 국내 자산의 가치를 위협하는 요인이 아니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과 유럽 부채 문제, G2(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등 끊임없이 불거지는 대내외적 불안 요인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한국 경제가 구조적으로 위기에 취약한 허약체질이어서 국내 주식, 채권, 부동산 등의 분산투자뿐 아니라 ‘통화분산이 필수’라고 강조한다. 장호준 SC제일은행 자산관리본부 전무는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 금융 선진국 투자자들은 자산의 40% 정도를 달러 등의 해외 통화로 보유하지만, 국내 투자자들은 대개 연수나 여행 목적으로 외화를 매입하는 수준으로 그 비율이 자산의 5% 이하에 그치고 있다”며 “자산 포트폴리오의 통화 다변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달러화 등을 자산 포트폴리오에 넣으면 위기상황에 급락할 위험이 있는 원화 자산의 실질적인 가치를 상당 부분 보전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수익을 낼 수 있다. 오세준 알펜루트자산운용 펀드매니저는 저서 에서 원·달러 환율의 높은 변동성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오히려 ‘축복’이라고 강조했다. 대한민국에 보릿고개가 찾아왔던 1997년 외환위기(IMF)로 되돌아간다고 가정해보자. 코스피지수는 역대 최저치인 280선까지 밀렸고, 부동산시장도 폭락했다. 원·달러 환율은 종전 900원을 밑돌다 순식간에 1900원대 중반까지 치솟았다. 만일 이때 달러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가치가 급등한 달러를 팔아 국내 주식과 부동산을 헐값에 사들여 경제 회복 후 막대한 차익을 얻었을 것이다. 통화분산, 달러 외에는 대안이 없나 부침이 심한 국내 자산의 국제적 실질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통화분산은 다양한 통화에 이뤄질수록 효과적이다. 그러나 통화시장에서 미국 달러화는 기축통화로서 단연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달러의 역습이다. 이민구 한국씨티은행 WM상품부 부장은 “전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위기의 원인은 미국에 있었지만 미국 달러화의 가치는 더 치솟았다”며 “불확실한 금융환경에서는 안전자산으로 금이 우선 주목받지만, 진짜 위기가 오면 달러가 상승한다”고 말했다. 미국 달러 외 통화분산 차원에서 주로 고려되는 통화는 현재 일본 엔화, 유로화, 중국 위안화 등이다. 신동일 KB국민은행 대치역 PB센터 부센터장은 “자산가들이 통화분산 차원에서 주목하는 통화는 단연 미국 달러화로, 외화 거래의 70~80%가 미국 달러화에 집중되고 있으며 일부 위안화나 엔화 등도 매입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중국이 미국을 위협하는 강대국으로 빠르게 성장 중이지만, 위안화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게 중론이다. 이민구 부장은 “미국 달러화의 가치는 시장에 의해 결정되지만, 중국 위안화는 펀더멘털(기초체력)에 상관없이 중국 정부의 정책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많아 안전자산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달러화에 비해 위안화나 엔화, 유로화 등으로 투자할 곳은 제한적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 2017-09-30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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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세 대기업 퇴직자 ‘서드에이지(Third Age)’ 라이프
- 대기업에서 인사담당 임원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이상철(57세)씨는 전 직장 동료들끼리 월 1회 정기적으로 모이는 OB(Old Boys) 모임에 가입했다. 그가 가입한 모임은 매월 특정한 주제에 대해 2시간 정도 강의를 들은 후 저녁을 먹으며 토론하는 학습모임이다. 이번 달 모임의 주제는 ‘저성장 고령화 사회에서의 생애설계’였다. 이번 강의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평균수명 76세 시대의 나이에 대한 개념과 평균수명 100세 시대의 나이에 대한 개념이 달라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강사는 청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간의 일생을 하루에 비유해 설명했다. 새롭게 생겨난 시간 ‘서드에이지(Third Age)’ 평균수명 76세 시대의 인생시계를 4등분하면 오전 6시에 해당하는 나이는 19세다. 오전 6시는 기상시간에 해당하며 19세의 나이는 사회활동을 시작하는 나이를 의미한다. 그리고 정오가 되면 점심을 먹고 잠시 쉬고 오후 6시가 되면 퇴근시간이다. 인생시계에서 오후 6시, 즉 퇴근시간은 퇴직시기를 의미한다. 조퇴하는 사람도 있고 야근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오후 6시는 공식적인 퇴근시간, 즉 퇴직시기다. 하지만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 시간의 상징은 변한다. 오전 6시 기상시간은 25세가 된다. 그리고 낮 12시는 50세에 해당하고 퇴근시간은 57세에서 75세로 바뀐다. 100세 시대의 인생시계에 의하면 이상철씨는 현재 퇴근시간이 아니라 점심시간 직후에 있다. 100세 시대의 장수 보너스로 인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시간이 바로 50세부터 75세까지의 시간이다. 노년 전문가들은 이 시기를 서드에이지(Third Age), 즉 ‘제3의 연령기’라고 부른다. 미국의 사회학자 윌리엄 새들러 박사는 서드에이지를 ‘창조적 불확실성의 시기’라고 하면서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에 비유했다. 신대륙은 미지의 세계다. 그리고 예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회가 넘치는 세상이기도 하다. 부모님이나 선배들과는 다른 삶을 원했던 이상철씨는 서드에이지를 제2차 성장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역할에 충실한 삶에서 자아실현의 삶으로 퍼스트에이지(First Age)가 배움의 시기이고 세컨드에이지(Second Age)가 가족을 위해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시기라고 한다면 서드에이지(Third Age)는 자아실현을 위해 매진해야 하는 시기다. 이상철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세컨드에이지를 살았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남은 인생은 좀 더 자기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삶을 살며 성장해온 시기를 ‘제1차 성장의 시기’라고 하면 자기 중심의 삶을 살면서 성장하는 삶은 ‘제2차 성장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중심의 삶을 살기로 한 그가 제일 먼저 한 작업은 하고 싶은 일들을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모두 적어보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자료1] 같은 양식지를 이용해 하고 싶은 일들을 구분해 정리해보았다. 이상철씨는 이 양식지를 이용해 하고 싶은 일들을 정리하면서 자기 중심의 삶을 위해 ‘꼭 하고 싶은 것’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과, 하면 좋지만 굳이 안 해도 상관없는 ‘하면 좋은 것’의 항목을 다음과 같이([자료2] 참조) 채웠다. 이상철씨는 직장에 있는 동안 인사업무를 하면서 조금씩 공부를 한 심리상담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본인과 상담을 한 후배나 동료들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심리상담소를 열어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심리상담사를 인생 2막의 직업으로 삼아보기로 했다. 아직은 자녀들이 독립 전이고 국민연금수령 시점도 6년이나 남아 기본소득에 대한 불안감이 없지 않지만 더 늦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에 결심을 굳히기로 했다. 그리고 현재 대학에서 상담심리학과 교수로 있는 친구를 찾아가 심리상담사의 길에 대해 자문했다. 제2차 성장을 위한 재무 포트폴리오 변경 이상철씨가 심리상담소를 개소하기 위한 자격과 경험을 갖추기 위해서는 대략 5년의 시간과 대학원 석사과정을 포함한 교육비가 약 5000만원 정도 소요된다. 그리고 심리상담을 진행할 사무실이 필요하다. 당장 돈이 되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대신 새로운 직업을 위한 공부를 선택한 이상철씨는 가계의 재무구조와 소비구조를 바꿔야만 했다. 그는 현재 거주 중인 아파트를 매각하고 좀 더 외곽의 아파트를 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파트를 매각한 잔액으로 오피스텔을 사서 임대를 하기로 했다. 오피스텔의 임대료 수입은 현재의 생활비를 보조하고 향후에는 심리상담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외 자녀독립 지원자금으로 준비해둔 자금의 일부는 본인의 교육비와 창업준비자금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자녀들에게 미리 뜻을 밝혔다. 그 대신 퇴직 후 건강을 위해 신경 쓰기로 한 운동 증 비용이 많이 드는 골프를 줄이고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또자동차를 통해 하는 여행보다는 자전거를 이용한 여행을 더 많이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대부분의 50대 퇴직자들이 제1차 성장기의 열매를 어떻게 잘 관리할까를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이상철씨는 100세 인생이 선물한 보너스의 시간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다시 한 번 더 배우고 성장하고 성숙하는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 2017-09-13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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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크바움 유형종 대표 인터뷰-오페라 키드(kid)의 생애, 확률과 통계적 사고가 만들다
- 수만 가지의 수를 내다보고 절대 실패하지 않는 삶을 사는 알파고형 인간을 만났다. 계획적이면서도 일정하다. 돌다리는 두드려볼 생각 없이 잘 닦여진 길을 선택해왔다는 사람. 수학이나 과학자를 만나러 갔더라면 대충 짐작이라도 했을 텐데. 그의 직업은 음악 칼럼니스트다.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천국 무지크바움 대표이자 음악 칼럼니스트 유형종(劉亨鐘·56)을 만났다. 인생역전 드라마만 재밌다는 편견은 접으시고, 유형종 대표의 기막힌 인생설계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시라. 클래식 놀이터 주인장 유형종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는 놀이터(?) 무지크바움의 주인장인 유형종 대표. 그는 클래식 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예술을 강의하는 강연자로서 삶을 살아간다. 압구정역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무지크바움에서는 요일마다 오페라, 클래식, 발레 감상 동호회 모임을 비롯해 음악과 관련한 각종 강연이 이뤄지고 있다. 클래식 음악을 찾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늘 유형종 대표와 눈을 맞추고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눠야 하는 직업 특성 때문일까? 유형종 대표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활발할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만나서 한다는 말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저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좀 폐쇄적이죠. 그런데 여기는 클래식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좋아요. 욕심 같은 거 별로 없어요. 그저 저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데 그 원천이 음악? 클래식인 거죠.” 자발적 은둔형 외톨이의 삶을 택하다 유형종 대표는 주로 오페라와 발레 등 서양 예술의 결정체와도 같은 분야를 전문으로 글을 쓴다. 역사적으로 사교계와도 친밀한 예술이 오페라와 발레 아닌가. 그런데 그가 클래식 음악에 눈뜬 이유가 기가 막히게 남다르다. “제가 남들 하는 걸 안 해요(웃음). 가령 카카오톡도 안 합니다. 중학교 때는 친구들이 영어공부한다며 팝송을 듣더라고요. 저는 그때 팝송이랑 대중가요 대신 클래식 음악만 듣겠다고 결정했죠.” 마침 집에는 어머니가 가지고 계셨던 클래식 음반들이 여러 장 있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1867~1957)가 지휘한 푸치니의 라 보엠(La Bohe‵me)과 베르디의 아이다(Aida)였다. “그거 말고 몇 장 더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토스카니니’라고 적혀진 음반들과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입니다. 그게 제 인생 첫 음반인 거죠. 중학교 들어가서 오페라 음반을 사기 시작하면서 ‘내 취미는 음악이야!’라고 생각했어요.”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집 안에서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던 유형종 대표는 다행히 네 살 터울의 동생과 죽이 잘 맞았다. “동생이 동아일보 유윤종 기자입니다. 음악이나 문화 쪽으로 저보다 유명할걸요? 둘이 집에서 뭐했냐면 클래식 음악 모음집 15곡을 쭉 듣고 난 다음에 점수를 매겨요. 그러고는 둘이 합산해서 종합 1위를 뽑는 거죠. 그리고 한 달 있다가 또 해요. 순위가 바뀌었는지 확인하는 게 우리 형제의 놀이였습니다.” 클래식 음악만큼 발레의 매력에도 빠져버렸다. 1984년 빈 국립 발레단(오스트리아)과 내한한 러시아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의 춤사위를 보는 순간 마치 신이 춤추는 것 같았다. 남자가 무슨 발레냐고 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렇게 자신만의 세상에서 기쁨을 만끽하고 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팝송이 싫어요. 뮤지컬도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오페라와 발레를 감상하고 이것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사는 게 재밌습니다.” 내 인생의 원동력은 확률과 통계 클래식을 듣고 오페라를 감상하는 취미는 끝이 없었다. 잠시나마 꿈꿨던 음악대 진학을 접고 상경대를 선택했다. “성악을 전공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저는 체력도 약하고 성공할 것 같지 않다고 말씀해주시더군요. 여러 가지 생각을 했죠. 나는 튼튼하지 않으니 애호가로 사는 게 더 행복할 수 있겠다 생각했죠. 그런데 어머니 앞에서는 삐져서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웃음).” 음대 포기의 이유에 맏이라는 가정 안에서 위치도 작용했다. 역사학도 좋았지만 맏이면 당연히 돈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상경대 진학을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도전 한 번 안 해보고 너무 빨리 포기한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저는 경영학을 전공했어요. 수를 좋아했죠. 경영학에도 회계학이 있는데 그것도 재밌었고요. 회사에서도 기획 재무 쪽 일을 했어요. 고등학교 때 미적분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확률과 통계는 아주 좋아했어요. 그래서 제 모든 생활 전반이 확률 통계적 사고로 돌아갑니다. 성악을 선택하지 않은 것도 그렇습니다.” 유형종 대표는 음악대학에서 음악사 수업 외에 공부를 더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화성악 청강을 해봤다. 그런데 음대생의 영역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고 한다. “음대생이 전공하는 영역은 음악 애호가로서 확률과 통계적으로 좇아갈 수 없는 영역이었어요. 저는 예술가 기질은 없어요.” 무모한 짓은 안 하고 평생을 살았다는 유형종 대표. 굉장히 좋아 보여도 무엇을 희생해야 한다면 하지 않았다. 목적지향, 확률통계. 이런 것을 고려해서 원칙을 세우고 의사결정하는 것이 습관화됐다고 말한다. “대신 재미가 없죠. 어떤 사람들은 저보고 냉소적이라더군요.” 취미가 인생의 큰 그림이 되다 경영학과에 들어간 뒤 공부보다는 음악감상 동아리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는 클래식을 듣는 음악감상 동아리의 규모가 꽤 컸습니다. 지금과 비교도 안 됩니다. 동아리에서 음악감상실을 운영했기 때문에 DJ 활동을 의무적으로 했어요. 감상실에서 트는 곡목을 칠판에다 적는 것도 일이었습니다.” 물론 감상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절반이 숙면에 들기는 했지만 감상실 운영으로 동아리를 유지했다. 가을에 열리는 교내 합창대회는 음악감상에 방해돼 싫었다. “합창 시즌만 끝나면 속속 커플들이 탄생했어요. 헤어지면 커플이 동시에 탈퇴를 하니까 동아리 모습이 말이 아니었죠. 연애금지령도 있었는데 저는 철저히 그 법칙을 따랐습니다(웃음).” 대단한 모험을 즐기지 않고 확률과 통계를 바탕으로 살아왔다는 유형종 대표. 그는 대학생활 이후에도 나름 순탄했다고 말한다. 1987년 첫 직장인 대우증권에 입사해 2006년 한국신용보증보험의 임원으로 20년 직장생활을 마무리할 때까지 그는 영락없는 금융인의 모습으로 인정을 받아왔다. 칼럼니스트로서의 이중생활도 멋지게 즐겼다. “졸업 후에 동호회 후배들이 창립기념일 문집을 만들 때 저에게 의뢰하기에 글을 쓰게 됐고, 1995년부터 잡지에 정식으로 음악 칼럼을 쓰기 시작했어요. 음악감상 동아리 후배인 의 기자가 저를 칼럼니스트로 추천했어요. 그때부터 음악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을 얻게 됐습니다.” 금융업계에서 대리, 과장으로 승진하는 동안 업무와 야근으로 음악회는 꿈도 못 꿨다. 대신 음반을 들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매달 밀려오는 잡지사 음악 칼럼을 쓰는 작업도 일상의 큰 업무(?)였다. “금융회사는 아침 8시가 되면 일을 시작해요. 저는 6시 반에 출근을 했어요. 부서장님이 저더러 부지런하다고 칭찬하셨는데 오해죠. 저는 글을 쓰기 위해 회사에 빨리 간 것이잖아요.” 한 달에 한 번씩 월간지에 기고를 하고 짬짬이 공연 프로그램 글도 썼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제가 하는 다른 일에 대해 사장님이 알게 되셨어요. 표정이 좋지 않더라고요. 임원이 그런 일 하는 것을 몰라서 언짢으셨을 겁니다.” 진짜 인생의 문을 열다 유형종 대표는 2003년 은퇴를 준비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느꼈다. 회사에서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딱 3년이란 시간이 남아 있었다. “회사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확률적으로 알고 있었어요. 다른 회사로 가느냐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냐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의 즐거움을 희생해서까지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 해설가로 살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이었지만 좀 더 밀도 있는 공부를 하며 강의자료를 준비했다. 연재하던 글을 모아 은퇴 시기에 맞춰 단행본 출간을 계획했다. 결국 2006년 9월 은퇴, 12월 1권과 2권(시공사) 출간. 꽤 멋진 은퇴 작전이 성공했다. 20년 남짓의 넥타이 삶을 청산하고 난 유형종 대표는 무지크바움에서 음악과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칼럼을 쓰고 외부 강의를 하면서 여전히 음악에 파묻혀 살고 있다. 올해 우리 나이로 쉰일곱인 유형종 대표는 스스로 2년 전까지가 음악 칼럼니스트로서 전성기였다고 생각한다. “음악 칼럼니스트라고는 하지만 글 써서 먹고살겠어요(웃음)? 제 공간인 무지크바움에서 동호회나 강좌를 열고 외부 강의도 다니고요. 그런데 제 나이가 이제 기업체 특강 강사로는 좀 많아요. 왜냐하면 기업체 사장이 저랑 나이가 같거나 어리거든요. 물론 저도 이제 돈을 열심히, 많이 벌 생각은 없어요. 생업은 55세까지 충분히 했다고 봐요.” 이런 날을 생각해서 20년 직장생활을 했다. 먹고사는 데 당장 큰 문제는 없다. 벌어놓은 돈도 있으니 즐기면서 오래오래 이 일을 하고 싶다. “마음은 천국이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되니까. 대신 제가 일정을 짜놓고 많은 일들을 정해야 하니까 좀 바쁘죠. 마음은 천국, 몸은 지옥? 앞으로도 10년은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리고 10년은 골골거리면서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웃음).”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최근 귀찮지만 꼭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슈베르트에 관한 글을 쓰게 됐다고. 예술서 100권, 문학서 100권, 사상서 100권 총 300권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는 한 대형 출판사에서 유형종 대표에게 제안을 해왔다. 아직 정해진 바는 없지만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제부터 자료조사를 새로 해야죠. 그런데 사실 쓰겠다고 한 이유가 딴 게 아닙니다. 제 동생도 쓰기로 했더군요. 괜찮은 필자를 출판사에서 저자로 섭외했던데 내가 안 쓰면 소외될 거 같아서 할 수 없이 쓰는 거거든요(웃음).” 그래도 적잖은 사명감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보았다. “불명예는 막아야죠(웃음). 적어도 대한민국 예술 필자 100명 중에 끼지 못한다는 소리는 들으면 안 되잖아요. 불타오를 정도는 아니고 약오름?” 말은 이렇게 해도 어떤 주제로 쓸지에 대해 찾아보고 있다. 너무 어렵게 않게 슈베르트에 대해 사람들이 알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책을 쓰게 될 것 같단다. 유형종 대표는 어떤 것을 평가하고 논하는 평론가의 삶을 구하지 않는다고. “칼럼니스트로서 내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은 갖되 너무 깊숙이 관여하지는 않아요. 관객으로서 내 시선을 내려놓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 공연장 사장 할래? 그러면 전 아마 안 할 거예요. 사람 임명하고 관리하는 거 하기 싫어요. 육체는 힘들지만 영혼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싶어요.” 인터뷰하는 동안 그가 20년 금융 전문가에서 음악 칼럼니스트로 변신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는 원래부터 직장생활 20년 하고 난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러니 지금이 제1인생이죠. 제1의 인생을 위해 기반을 마련하고 돈을 번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처음부터 그의 시작은 음악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느낌이다. 평생 제1의 인생을 위해 살아온 집념과 고집이 앞으로도 영원하기를 기대해본다.
- 2017-09-0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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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환 AJ가족 인재경영원장 “가족을 고객처럼, 가정은 회사처럼 경영했죠”
- 조영환 AJ가족 인재경영원장(62)은 ‘가정도 회사처럼, 가족은 고객처럼 경영하라’고 말한다. 그는 “가정은 기업의 축소판”이라며 “가족에도 회사 경영 마인드가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실제로 1990년부터 가정경영계획을 수립해, 27년여 실행해온 성공적 가장이기도 하다. 삼성그룹에서 26년간 인사조직 분야를 담당했다. 이후 5년간 강연, 집필 등을 하며 프리랜서로 활동했고 현재는 AJ가족 인재경영원 원장으로 3막의 인생을 경영하고 있다. 보통 베이비부머 세대의 직장인은 입사~퇴직이라는 한 우물의 인생이 일반적 코스입니다. 조 원장께선 55세에 퇴직해 5년간 프리랜서, 3막 기업인으로 재기와 변신을 거듭하셨는데요. 먼저 퇴직 후 프리랜서로의 변신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퇴직 후 충격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원래 자유로운 영혼의 피가 흐르고, 역마살 체질이 있어서 물 만난 고기 같다는 생각이 곧 들더군요. 특히 생활 리듬은 깨뜨리지 않으려고 유의했어요. 새벽 5시에 일어나 운동하고, 아침식사는 집사람과 같이하는 등으로요. 퇴직한 지 3개월 만에 책을 냈습니다. 5년 동안 책을 13권 썼으니 그야말로 왕성한 활동이라고 할 만하지요. 그때 저는 삼성출신 전직 임원보다 작가라는 호칭으로 불러달라고 했지요. 태국에서 2종, 중국에서 2종이 번역됐고요. 김구라, 이경규 등이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강의를 위해 전국 팔도를 돌아다녔습니다. 머리도 기르고, 넥타이도 매지 않고요. 모범 직장인의 전형인 삼성 스타일에서 벗어난 것이 자유로움을 줬습니다. 강연, 집필 외에 젊은이들을 위한 무료 취업 코칭 등의 재능기부를 했어요. 그러다가 커플이 생겨 주례도 서고… 심지어 아파트 동대표 회장까지 맡아 지역 봉사활동을 하는 등 보람이 많았습니다(웃음).” 직장을 그만두고 자유인으로 생활하시는 동안 특별히 명심하신 사항이 있었나요. “회사 다닐 때, 하루 종일 밖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가족 간의 문제점, 약점이 눈에 들어왔어요. 같이 있을 시간이 많아지니 잔소리가 늘어났던 겁니다. 당연히 식구들이 점점 불편해했지요.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집사람에게 슬쩍 물어보더래요. ‘아빠, 언제까지 집에 계실 거냐’고. 그 말을 듣고 가까운 헬스클럽에 등록해 2시간 운동하고 점심과 저녁 약속 억지로라도 만들면서 집에 있는 시간을 줄였습니다. 잔소리하고 싶은 것 있으면 꾹 참고요. 좋은 점, 칭찬거리만 보고 말하려 애썼지요.” 프리랜서 생활 5년 만에 다시 새장(?) 안으로 들어가 AJ가족 인재경영원 원장이 되셨습니다. “(웃음) 바쁜 중에도 모처럼 스케줄이 비는 날이 있잖아요. 어느 날 점심약속이 없어 오피스텔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먹는데 ‘여기서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하는 처량한 생각이 들더군요. 같이 일할 조직과 구성원이 그리웠어요. 마침 AJ가족의 문덕영 부회장이 제 책을 읽고 스카우트 제의를 해와 응하게 됐지요.” 베이비부머 세대가 ‘퇴직 이후 새로운 2막’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공통의 당면과제입니다. 아직 조직에 있는 사람이든 프리랜서이든 준비해야 할 필수사항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이전 조직에서의 좋은 평판이라고 봅니다. 평가가 실력에 관한 것이라면 평판은 인품을 포함하는 것이지요. 퇴직 후엔 평가보다 평판이 더 중요해요. 술버릇, 말과 행동, 주변과의 교류 등인데,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것이 평판입니다. 누구하고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평생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2막 때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제가 2막 인생에 빨리 적응한 것도 사람농사를 잘 지어놓은 덕분이었어요. 조직생활이 아닌 자신만의 새로운 일을 한다면 가장 잘하는 일,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성공률이 높습니다. 어설프게 다른 사람의 권유로 원하지 않는 영역의 일이나 잘 모르는 일을 할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삼성화재 인사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인사기획, 이론연구, 노사관리업무를 담당했지요. 또 삼성화재 사업부장(상무이사급)을 지내셨지요. 이론연구와 현장 근무의 양수겹장 경력을 갖고 계신데요. 인사조직관리의 요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무엇인가요. “인간 존중입니다. 저는 리더가 하는 일은 직원들의 일을 대신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군불을 때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말만이 아니라 진정한 인격체로 대해주면 성과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일선 직원들과 같이 밥 먹고, 이야기하고, 고충을 처리해주고 산간벽지라도 경조사는 다 찾아다녔지요. 제 자동차 1년 주행거리가 6만5000km로 웬만한 택시 버금갈 정도였어요. 보험사 사업부장 때는 보험설계사 900명의 이름을 석 달 만에 다 외웠어요. 본인은 물론 배우자, 자녀 대소사까지 챙겼지요. 혼자 사는 사람은 반려동물 이름까지 외우고 예방접종 시기까지 먼저 알려주며 인사했습니다. 고성과자에겐 그 사람을 위한 맞춤형 시를 써서 액자에 담아 감사를 표했고요. 그러니 제가 보험 지식은 하나도 없어도 저절로 사기, 성과가 함께 올라가더군요.” 그는 ‘인간 존중’의 핵심은 효율보다 효과를 따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의 계산으로는 손해보는 것 같지만 결산에서는 남게 돼 있다는 것. ‘작은 진동이 큰 감동의 파동을 일으키게 돼 있다’는 게 그의 수십 년 경험의 철칙이다. 조 원장은 지금도 그때 알고 지내던 직원들과의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전국 각지에 회원 100여 명의 ‘조사모(조영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운영되고 있을 정도라며 자랑했다. 퇴직 후 그가 고객 감동경영의 노하우를 묶어낸 처녀작의 제목은 다. 인간 감동경영도 배우면 가능합니까? “저절로 할 줄 알면 성인이게요(웃음). 저는 신참 때도 꿈이 임원 승진보다 ‘상사한테는 신뢰, 부하한테는 존경을 받고 싶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현실에선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게 힘들잖아요. 상사한테 인정받으려면 직원들에겐 몰인정한 사람이 돼야 하고, 직원들한테 존경받으려면 상사한테는 무능한 사람으로 무시받기 쉽고…. 그래서 위아래에서 모두 신뢰와 존경을 받는 사람이 누가 있나 찾아봤어요. 롤모델로 삼으려고요. 책은 물론, 조직 내외의 인물들에서 찾아보고 적용하고, 실패하면 수정하고… 그러면서 제 나름의 감동경영 방식을 개발하고 만들어나갔습니다.” 직원 감동경영과 가족경영은 자칫 시소게임이 되기 쉬운데요. 어느 하나에 치중하다 보면 한쪽은 소홀히 하게 됩니다. 가족은 어떻게 감동시키셨는지 궁금합니다. “고객감동 방식과 가족감동 방식은 다르지 않습니다. 가족경영의 어려움을 겪는 것은 가족을 너무 쉽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족도 고객처럼 대하라고 후배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전략과 기획 마인드를 가지고 감동시킬 방법을 연구하라고요. 가족감동도 공짜는 없어요. 연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꾸준히 기대 이상으로 해주고, 생각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고요. 가족경영도 프로젝트를 세우고 예산을 배정해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점검하고 시정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조 원장께서 실행하신 가정경영의 대표적 히트작은 무엇인지요. “가족경영과 조직 인사관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회사에서는 1년을 어떻게 살 것인지, 회사 운영계획을 자세하게 수립하지요. 그러나 가정에선 그런 걸 잘 안 합니다. 저는 과장으로 지내던 시절인 1990년경부터 집사람, 두 아들 등 온 가족이 참여해 가정경영계획을 매년 세웠습니다. 먼저 가족 모두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것들, 예컨대 건강, 재산, 가정, 친족, 문화, 지식 등으로 범주를 정해 각각 실천사항 등을 토의해 결정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노트에 기록해놓고 같이 실행할 것을 다짐하면서 서명, 관리합니다. 다음 해 초에는 결산을 해 잘잘못을 따져서 차기 계획을 수립하고요. 가족 구성원이 참여하고 공감한 것이라 실천하기가 한결 쉽고 실행률도 높더군요. 아이들에게 계획적인 삶을 사는 습관을 키워주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출근 전 1분간 가족과의 포옹 습관도 스스로 자부하는 가정경영의 히트작으로 꼽았다. ‘포옹이 포용’을 낳더라는 이야기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거실에서 1주일 1회 온 가족 회식 프로젝트 등을 실행했단다. 덕분에 각각 가정을 이룬 두 아들은 지금도 아버지를 친구처럼 여긴다. 술친구는 물론이고 스크린 골프, 당구도 같이 치고 고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찾는 지피지기 1호다. 둘째 아드님이 내성적이라 친구를 못 사귀자 안방을 최고급 음향, 모니터를 갖춘 피시 장비를 설치해 오락실로 만드셨다고요. 그때 ‘예산 개념 없이 무조건 무한정 지원, 이 방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라는 글귀를 방문에 써 붙이셨다면서요. “교육은 비용이 아니고 투자입니다. ‘정보화 기기들과 빨리 친해지고, 트렌드를 놓치지 말고, 그리고 즐거운 학창 시절을 만들고, 친구들을 많이 사귀란 취지’에서요. 만일 내가 이것을 말로 수십 번 했다면 아이가 따랐겠어요? 결국 중요한 것은 환경 조성이에요. 왜 안 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니고요.” 그는 “가정에서 부모도 마찬가지고, 조직에서 상사도 마찬가지다. 왜 못하냐고 질책할 것이 아니라 잘하려면 어떤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는가를 고심하는 게 어른의 의무”라고 강조하면서 “내가 아닌 상대에게서 사고나 행동 규범을 출발시키는 게 필요하지요. 내 사고방식이나 가치체계, 생존 방식을 고객의 수준과 눈높이에 맞추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상대의 언어와 습관, 취미 등을 눈여겨보고 다가가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는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의 소통 방식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은퇴 후 가장 확실한 보험은 배우자와의 금실이라는 시쳇말도 있습니다. 부부경영은 어떻게 하시나요. “가슴에 안아버리는 것입니다. 따지기 시작하면 풀리지 않아요. 다 들어주고, 생각이 정말 다르면 다음에 마음이 편안할 때 다시 의견을 조율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에요. 서로 잘잘못을 따지고 비난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게 부부입니다. 나이 들어선 의식적 노력이 필요해요.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부부애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젊어서야 애정으로 살지만, 나이 들면 인간애로 사는 게 부부 아니겠습니까.” 조 원장은 고객 감동경영을 부인 감동경영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결혼 20주년엔 부인을 위한 글을 직접 써 감사패를 수여했고, 30주년엔 직접 끓인 소고기미역국을 비롯해 정성 어린 생일상을 진상했다. 동시에 30주년 숫자에 맞춰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30가지 이유’를 작성해 헌정했다. 처음엔 ‘쓸 것’이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쓰기 시작하니 아내의 장점들이 소록소록 떠오르더란다. 이런 패키지 상품을 선사하니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이 술술 잘 풀리더라고. 배우자 몰래 만들어놓은 비자금 내지 비상금이 간혹 문제가 되곤 하는데요. 조 원장께선 어떻게 관리하시나요? “비자금에 대해서는 찬반론이 있지만 저는 찬성 입장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가정살림에서도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거든요. 살다 보면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몰라요. 비자금은 숨겨둔 돈이라는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긴급할 때 활용할 수 있어 남자나 여자나 어느 정도의 비자금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나이 들수록 경조사비 부담도 만만찮고, 긴급 용도로 써야 할 경우도 있는데 이 비용을 배우자에게 구구절절 설명해 그때그때 손을 벌리려면 궁색합니다. 구태여 비율로 이야기하자면 총소득의 20% 정도는 비자금으로 비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씀 들으니 조직관리의 노하우를 가정경영에도 잘 접목시키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가장 행복하셨을 때는 언제인지요? “후배들이 멘토라고 많이 찾아와줄 때입니다. 책을 출간한 뒤 여기저기서 후배와 친구들이 서점이나 가판대에서 사진을 찍어 보낼 때도 그렇고요.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면접토론 때 참고서적으로 제 책 을 제일 위에 꽂아놓았을 때도 행복하더군요. 다만 이순(耳順)이라는 육십을 지나니 잘났다고 뻐기거나 욕심내는 것은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익어가는 징조인지, 기운 빠지는 징조인지 잘 모르겠지만요.” 그는 앞으로 인생 4막의 꿈은 집필하고 강의하고 코칭하는 생활이라고 말했다. “역사기행이나 문화기행 같은 깊이 있고 의미 있는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젊은이나 후학에게 도움이 되는 선배, 사람부자가 되면 잘 사는 삶 아니겠습니까?”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현재 AJ가족 인재경영원 원장. 삼성화재 인사팀에서 채용-인사기획-노사관리 업무를 담당했다. 삼성경제 연구소 인사조직실 컨설팅 등을 수행했으며 삼성화재 인사담당 임원으로 부임, 상무이사 승진 후 삼성화재 사업부장을 지냈다. 당시 ‘함께 근무하고 싶은 상사’로 뽑혔다. 저서로는 , , 등 다수가 있다.
- 2017-09-0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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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연금 관리 정상화하라
- 국민의 평생월급 국민연금 운용자산이 처음 600조 원을 돌파하였다. 일본 공적펀드·노르웨이 국부펀드 이어 세계 3위 수준이다. 하지만 지도부 공석에 운용 차질 불가피 우려도 크다. 국민연금공단이 국정농단 스캔들에 휘말려든 것은 오래 전 이야기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도 몇 달이 지났다. 국가예산 규모보다 훨씬 큰 국민의 평생월급을 이렇게 방치해도 되겠는가? 국민연금의 주인은 가입자와 수급자이다. 정부는 국민연금을 관리하고, 공단은 이를 대행하는 업무수탁자이다. 공단조직에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주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사장은 대통령이, 임원은 복지부장관이 임명한다. 업무관리 수급자인 정부나 공단이 국민연금을 떡 주무르듯 할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정치적 이해관계로 비전문가 낙하산 인사가 자행되었던 것이 지금의 결과다. 국민연금공단의 독립성을 보장하도록 법을 확 바꾸어야 한다. 국민대표기관이 포함된 인사추천위원회를 구성하여, 엄격한 자격을 구비한 자를 공개모집하도록 한다. 이사장은 적어도 국회청문을 거치도록 하고, 임원과 위원회 구성도 낙하산 밀실인사가 철저히 차단되어야 한다. 국민연금법에 따르면 국민연금 기금운용과 관련한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기금운용위원회’다. 제도상으로는 복지부 장관이나 기금운용본부장이 마음대로 기금을 주무를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은 기금 운용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휘둘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금운용위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다. 기금운용위원회는 기금운용지침, 연도별 운용계획, 운용결과 평가 등 기금운용에 관한 중요 사항을 심의·의결한다. 하지만 내부자들로 구성된 기금운용위원회의 민낯은 독립성과는 거리가 멀다. 회의는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나머지 위촉위원들도 대부분 비전문가다. 이런 위원들이 모여 두 시간 밥 먹으면서 회의를 하니, 안건 대부분은 무사 통과였다. 기금 운용 지배구조의 최상단에 있지만 기금운용위원회는 기금의 실제 운용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예산회계법이나 국가재정법처럼 예산편성과 집행ㆍ결산을 제대로 하여야 한다. 경영정보도 투명하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열린 회의에서 삼성합병과 관련된 의결권 행사를 어떻게 할 것이냐를 두고 논쟁이 오갔으나, 당시 위원장인 전 복지부장관은 두 회사의 합병 안건을 운용위원회 회의에 부치지도 않았다. 기금운용위원회가 거수기 역할밖에 못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기금운용위원회를 상설화하고 위원들을 전문성 있는 인사로 구성해 명실상부한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만들어야 한다. 감사기능을 활성화 하여 기금운용에 대한 불안을 불식시키는 노력하여야 한다. 국민연금은 국민이 믿는 평생월급이다. 독립성과 자율성이 보장되도록 국민연금의 조직과 운용방식을 근본적인으로 개혁하여야 한다. 지난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다. 새 정부는 국가예산보다 큰 규모인 국민연금공단의 지도부 정상화부터 서둘기 바란다. 국민연금의 주인인 국민은 내일의 희망을 먹고 산다.
- 2017-08-1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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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이기 힘든 체면 유지비
- 근 30년을 알고 지내는 미국인 친구가 있다. 직장생활을 할 때 그는 바이어였고 필자는 스포츠 장갑 수출을 담당하는 임원이었다. 미국 시장을 처음으로 개척하기 위해 관련 업체 디렉토리를 보고 팩스를 보냈다. 몇 군데서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미국 출장을 떠났다. 미국 동부부터 바이어들을 만났으나 정보만 빼내려는 바이어도 있었고, 처음이라 아직 미심쩍어하는 바이어도 있었다. 심지어 바이어라고 식사비용을 필자에게 전가하는 등 갑질을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 일정으로 서부에서 그를 만났다.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뜻밖으로 환대를 해주고 필자가 먹고 싶어 하던 랍스터에 스테이크까지 사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귀국 일자에 맞춰 첫 주문을 선물로 안겨주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미국 비즈니스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회사를 퇴직하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을 때 다른 바이어들은 외면했으나 그는 선뜻 거래선을 필자에게로 옮기겠다며 지원했다. 필자는 사업을 접기까지 10년 정도 그와 관계를 맺어왔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이익을 가져다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 후 비즈니스 관계가 끝나 딱히 만날 일이 별로 없었는데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그는 필자에게 연락을 한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오는데 그때마다 필자가 저녁식사를 대접한다. 하필 비싼 쇠고기를 좋아해서 꽤 부담이 되기도 했다. 둘이 먹어도 20만 원 정도 나오니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젠 비즈니스 관계도 끝났으니 비용 부담은 그가 하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되었다. 더구나 필자는 퇴직하고 수입이 없는 상태이고 그는 아직 회사 카드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렇게 하자고 하면 당연히 받아줄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느 날 그가 또 한국에 왔다며 연락을 해왔다. 이번에는 타이완 수출상도 한 명 데리고 왔다고 했다. 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이참에 저녁식사 비용은 그에게 대라고 요구하는 게 나을 듯했다. 하얏트 호텔에서 만나 저녁식사로 뭘 먹고 싶냐고 물으니 의외로 명동엘 가자는 것이었다. 강남은 워낙 비싼 음식점들이 많지만, 명동이라면 대중적인 음식점이 많아 마음이 놓였다. 명동을 구경시켜주고 필자가 가끔 가는 한정식 집으로 데리고 갔다. 식사를 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근황에 대해 얘기할 때 필자가 이제는 수입이 없고 국민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간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식사비용은 못 내겠다는 암시였다. 그런데 즐거운 식사가 끝나고 일어서는데 이 친구와 타이완에서 온 수출상이 손을 모으며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고 나니 필자가 비용을 대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라서 어쩔 수 없이 카드로 결제했다. 그나마 쇠고기가 아니라서 다행스럽게도 12만 원 정도가 나왔다. 2차로 마신 생맥주 비용은 타이완 수출상이 냈지만, 저녁 식사비용에 비하면 소소한 비용이었다. 체면유지비란 그런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지불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못했다.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친구에게, 그것도 멀리서 왔는데 식사비용을 내라고 하기가 야박해보이고 난감했던 것이다. 그래도 필자 사정을 생각해서 이번에는 단단히 별렀지만 결국 이번 저녁식사도 필자가 감당해야 했다. 이제 그가 알아서 지불하기 전에는 체면유지비로 감당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그가 필자를 도와준 마음을 고맙게 생각하고 그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봤자 몇 번이나 더 만날 것인가. 끝까지 좋은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된다.
- 2017-05-31 16: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