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원식 소설가
대전에서 은행원으로 살았던 홍성규씨(75)가 명퇴 뒤 귀촌을 서둘렀던 건 도시생활에 멀미를 느껴서다. 그는 술과 향락이 있는 도회의 풍습에 착실히 부응하며 살았던 것 같다. 어지럽고 진부한 일상의 난리블루스,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돼 있는 게 삶이라는 행사이지 않던가. 그러나 문득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정색을 하고 화드득 나를 돌아
박원식 소설가
구불구불 휘며 아슬아슬 이어지는 가파른 비탈길의 끝, 된통 후미진 고샅에 준수한 한옥 한 채가 있다. 집 뒤편으로 세상의 어미로 통하는 지리산 준령이 출렁거리고, 시야의 전면 저 아래로는 너른 들이 굼실거린다. 경남 하동군의 곡창인 악양면 평사리 들판이다. 광활한 들 너머에선 섬진강의 푸른 물살이 생선처럼 퍼덕거린다. 호방하고 수려한
정동 전망대 카페에서
차 한잔 하면서 오랜 역사와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나를 돌아보게 되고 수많은 세월 동안 스처 간 사람들의 숨결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은 서울시청 서소문청사1동 13층에 있는 정동 전망대이다. 덕수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멀리 인왕산과 백악산이 펼쳐 보인다. 가까이 서울 신청사가 우람하게 서 있고 빌딩 숲 속에 옛 고
'가온'은 '가운데'를 뜻하는 우리말인데, 새문안로 3길이 한글 이야기의 중심거리이기 때문에, 이 길을 ‘한글 가온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글 가온 길에 가면, 한글학회와 주시경선생의 집터, 그리고 주시경선생과 헐버트선생의 부조가 새겨진 조형물이 설치되어있다. 또, 이야기꾼 전기수 할아버지와 각종 한글 조형물,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있다. 그리고,
우린 가끔 영화를 본다. 서둘러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집근처에 있는 영화관을 찾는다. 조조영화는 거의 반값이다. 한 사람 표값이면 둘이 볼 수있다. 영화를 보고 커피를 한 잔 하며 이리저리 쇼핑도 하고 여유를 즐긴다. 평소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여 TV 채널 돌려가며 좀 보다보면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된다. 아내와 제대로 시간을 갖기도 어려워 언젠가
그토록 바라던 조국이 해방된 지도 70여년이 지났다. 단기간에 눈부신 성장을 이룬 조국의 모습을 보니 자랑스럽고 감격스럽다. 특히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 세워진 내 동상을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1910년 나라를 잃고 일본의 무자비한 지배가 시작되었다. 조그마한 힘이나마 독립운동에 보태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상해로 떠났다.
내 나이 33세이던 192
중학교때, 작문시간엔 일주일에 꼭 책 한 권씩 읽고 원고지에 독후감을 써서 내는 숙제가 있었다. 숙제를 내면, 선생님이 빨간 펜으로 밑줄을 그어 가면서 평을 써 주었는데, 선생님이 평이 무척이나 궁금해서 숙제를 돌려 받는 날이 기다려지곤 했다. 문학을 사랑하는 작문선생님을 만나게 된 덕분에, 문학작품을 많이 읽게 되었는데, 그때 감명 깊게 읽은 작품 중의
김원휘 목사는 독립유공자다. 필자가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그리워 더욱 존경스러운 아버지다.
아버지 김 목사는 갑신정변의 해 1884년 7월 20일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났다. 의성군은 안동군과 함께 우리나라 유교의 본고장이고 한학 수준이 높았다. 그래서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학공부를 했다. 그러나 밀려오는 신학문의 흐름을 빨리 받아들여 대구에서 기독교 학교에서
동생을 업고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외가에 가는 어머니를 필자는 작은 보따리를 들고 따르고 있다. 그때 필자는 7세 정도 였을까 아직 국민학교를 안 가는 나이였다. 외가에 가면 남의 집 문간방에 외할머니가 혼자 사시고 계셨는데 외할머니는 단아고 조용했다.
외가가 단칸방에서 살아야 할 정도로 어려웠던 이유는 필자의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이다. 외할
얼마 전 여행으로 중국 상하이(上海)에 다녀왔다. 먹을 거리와 볼거리의 색다름에 취해서 이틀을 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상하이임시정부청사’에 들렀다. 일본에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일했던 곳이라는 피상적인 생각으로 건물 앞에 섰다.그러나 임시정부라 하기엔, 청사는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자그만 3층 건물로 들어서자 좁고 가파른 계단은 삐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