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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사 강형구 씨
- 지난 2월 4일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된 이후 8개월 만에 연명의료를 안 하거나 중단한 환자의 수가 2만 명이 넘었다고 보건복지부가 10월 9일 밝혔다. 이 제도의 핵심인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의 숫자는 8개월간 5만8845명.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의 보급과 연명의료결정법이 자리 잡은 이면에는 제도의 정확한 내용을 알리고 작성을 돕는 등록기관과 상담사들의 활약이 있다. 그중 죽음준비교육, 호스피스 완화의료와 관련해서 초창기부터 활약해온 상담사 강형구(姜炯求·60) 씨를 만나봤다. “처음엔 저도 죽음준비교육이라는 분야가 생소했죠. 하지만 국내 상황이 고령화 사회로 급속하게 기울면서 수요도 늘고, 한번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형구 씨는 20년 넘게 생명보험회사에서 교육과 영업을 담당했던 보험맨 출신. 이후 치킨 프랜차이즈에서 직원과 점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담당했다. 그러다 그는 죽음준비교육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 배경에는 한국싸나톨로지협회 임병식 이사장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 그는 “워낙 개인적으로 믿는 분이라 마음이 흔들렸다”고 말한다. 또 오랜 기간 보험업계에서 쌓아온 감각도 긍정적인 알람을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2013년 싸나톨로지스트 교육에 참여하게 된다. 협회가 배출한 첫 번째 기수다. 이후 이 분야에 관심이 생긴 강 씨는 각당복지재단의 죽음준비지도자 과정도 심화과정까지 수료했다. 2년간 죽음 준비와 관련한 교육에 매달린 셈이다. 정책 초창기 강사 12인에 선정돼 “그러다 2015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아름답고 존엄한 나의 삶 전문강사를 모집했어요.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활성화하기 위해 죽음 준비나 호스피스에 관한 교육을 할 수 있는 인력을 뽑았던 것이죠. 총 12명을 선발했는데 다행히 합격해 전문강사로 활동할 수 있었죠.” 이 사업은 지금의 완화의료나 연명의료 관련 정책의 씨앗이 됐다. 선발된 강사들은 2017년까지 전국을 돌며 죽음 준비 등 관련 교육을 진행했다. 전국의 노인복지관 등 중장년을 대상으로 한 교육도 진행했지만 상당수 교육은 국민건강보험공단 실무자 등을 상대로 이뤄졌다. 당시만 해도 이 분야에서 정책을 실행하는 기관 실무자들도 이해의 폭이 넓지 않았다. “아무래도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으니까요. 특히 치매에 걸리거나 호흡기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을 두려워해요. 또 죽음의 순간에 느껴지는 고통에 대한 걱정도 있고요. 호흡기 문제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통해 해소할 수 있고, 죽음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통증은 걱정 안 하셔도 된다고 하면 안심하십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도파민이 통증을 막아주거든요. 그 외에 죽음을 준비할 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할지 알려드리면 무척 좋아하십니다.” 전국을 돌며 다양한 계층 대상 교육 그는 3년간 40여 개 기관을 돌며 교육을 진행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강의로 시각장애인 대상 교육을 꼽았다. “일반적으로는 준비된 자료 화면을 통해 교육을 하는데 그분들은 볼 수가 없으니까요. 장애가 있으신 분들은 그렇지 않은 일반인에 비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큽니다. 그래서 꼭 교육이 필요한 상황이었죠. 구술로만 설명이 가능하도록 사례를 엮은 뒤 스토리텔링을 통해 꼭 필요한 정보들을 전달했는데, 다행히 호응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렇게 3년간 전국을 돌고 난 강 씨는 현재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사로 활동 중이다. 말 그대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관련한 교육을 하고, 작성을 희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서류 기재와 등록 등의 과정을 돕는 역할이다. 현재 전국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등록할 수 있는 곳은 총 86곳(지역보건의료기관 19곳, 의료기관 46곳, 비영리법인·단체 20곳, 공공기관 1곳)이다. 또 전국 238개 국민건강보험공단 본부와 지사, 출장소에서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다. 강 씨가 활동 중인 곳은 비영리 사단법인인 희망도레미. 보람과 의무감이 움직이게 해 “의향서 작성이나 교육에 대한 신청이 들어오면 상담사가 2인 1조로 나가 교육을 진행하고 서류 작성을 도와줍니다. 이때 더러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상담사들이 절대 서류 작성을 유도하지 않습니다. 의향서 작성은 무조건 본인의 의사에 따라 진행되며, 저희는 관련 내용 안내만 할 뿐이에요. 건당 할당량이 있거나 수당을 받는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안내를 하다 보면 그런 오해들을 받고, 간혹 어르신이 의향서 작성 후 자녀분들이 항의를 하시는 경우도 있어요. 또 기관끼리 의사소통이 안 돼 문전박대당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상담사들이 받는 돈이 많은 것이 아니다. 각 등록기관마다 내규를 통해 교통비를 지급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담당하는 기관인 국가생명윤리정책원 산하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측 관계자는 “상담사의 활동비는 각 등록기관의 재량으로 정해지며, 정책적으로 정해놓은 가이드라인은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강 씨가 상담사 활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다른 상담사들과 마찬가지로 ‘봉사활동’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어르신들 대부분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있고, 본인 의사와 관련 없이 연명의료로 연장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그런데 막연히 무서워만 할 뿐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아요. 특히 지방에 계신 어르신들은 상담사를 만날 기회가 많지 않고, 한글을 읽고 쓰는 것조차 안 되시는 분들은 더더욱 어려운 것이 현실이죠. 때문에 저와 같은 상담사들의 활동이 그분들에게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러한 간절함이 제게는 원동력이 되고요. 막연히 두려워만 하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시곤 ‘후련하다’고 말씀하실 때 보람을 느낍니다.”
- 2018-11-0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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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알아야 할 위로의 언어
- 두 해 전 일이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큰 사고를 당해 입원을 했다.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며 병원을 두 차례 옮기기까지,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병원을 방문해 친구의 심적, 영적 회복을 도왔다. 상태가 많이 좋아져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자 사람들이 문병을 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는 내가 올 때가 가장 편하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다른 사람들은 문병 와서 환자와 대화를 나누는 방법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너무 진지하게 몸 상태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충고를 하는 친구, 보험 얘기를 하는 사람 등 각자 환자에게 필요한 이야기라 생각할 수 있지만, 환자는 이런 말들보다는 육체적 고통에 대한 위로가 무엇보다 필요한 상태다. 게다가 문병객들이 올 때마다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몸 상태에 대해 반복해서 설명을 해야 하는 일도 힘들다. 환자의 재활 스케줄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아무 때나 방문하는 사람들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물론 정신없이 바쁜 일상 속에서 문병을 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간혹 자기 시간에 맞춰 방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무리 바빠도 환자 상태와 스케줄을 고려해 방문하는 것이 예의다. 더구나 예후가 좋지 않은 병으로 인해 입원해 있는 환자를 만나러 갈 때는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아무 말도 안 하는 것도 위로 환자를 만났을 때 어떤 말도 위로가 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낫다. 또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해”라고 말하지 말고 필요해 보이는 게 있으면 그냥 도움을 주는 것이 좋다. 환자 혹은 환자 가족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뭐가 필요한지 알게 된다.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를 위해 하루 반나절 정도 시간을 내서 대신 환자를 돌봐준다면 보호자가 그동안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정리할 수 있고, 몇 시간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환자에게 어린 자녀들이 있다면 돌봐주고 음식을 해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캐시 피터슨(Cathy Peterson)은 말기암 진단을 받은 남편을 돌보는 과정과 남편의 죽음 이후 몇 해간의 삶을 기록한 책 ‘애도 수업’에서 바른 돌봄과 위로에 대한 값진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남편이 말기암 진단을 받은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자 사람들이 보인 첫 반응은 회피였다고 한다. 마주하게 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 진단을 받은 환자만이 질병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은 오해다. 말기암 환자들도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 평범한 어느 날의 안부를 묻듯 “몸은 좀 어떤지”,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면서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다. 질병, 사별을 겪은 사람에게 말을 건넬 때는 당황스럽고 불편할 수 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상황을 피하는 사람도 있다. 장례식장에 갔을 때 우리는 유족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한국의 장례 문화에서는 조문을 간다는 것 자체가 큰 위로다. 그러므로 애써 억지로 위로의 말을 건네기보다는 손만 잡아줘도 된다. 때로는 뻔한 위로의 말보다 그게 더 위안이 된다. 배려 없는 응원 되레 상처되기도 간혹 유족에게 건네는 형식적인 말들이 상처가 되기도 한다. “힘내세요”라는 말은 그럴듯한 위로처럼 들리지만 큰 의미는 없는 말이다. “좋은 곳에 갔을 거야”라는 말도 그렇다. 유족 입장에서 어디가 더 좋은 곳일지를 생각해본다면 그렇게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또 “이만하면 됐어.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도 위험하다. 사별한 사람은 충분한 애도를 했다고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의 가족에게 “이제 떠날 때가 된 거야”라고 말하면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이렇듯 격려와 위로를 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도 상대에게는 아픈 데를 후벼파는 말이 되기도 한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 해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이런저런 치료 방법들을 시도해봤는지, 자신이 추천한 의사에게 가봤는지 등을 물어보는 것은 마치 가족이 부주의해서 고인의 죽음을 불러온 듯한 인상을 주므로 절대 해서는 안 될 질문이다. 심지어 고인이 생전에 소유했던 물건을 어떻게 처리할 건지 묻는 사람도 있는데, 부디 가족들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자.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른다면 솔직한 심정을 말하는 것이 좋다. “뭐라 위로드릴 말이 없습니다.” 어떠한 감동적인 말이나 문장보다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함부로 교훈을 늘어놓거나 종교적인 언어로 유가족을 위로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차라리 아무 말 없이 곁에서 손잡아주는 것이 더 낫다. 한 해에 두 아이를 각각 백혈병과 뇌종양으로 잃은 부모가 있었다. 두 아이가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을 때 하루는 목사가 찾아와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만한 시험 외에는 주시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아이의 부모는 큰 상처를 입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일이 있는지 생각해보라”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종교적인 언어, 성경 구절 등을 부적절하게 인용해서 하는 위로는 가족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실과 슬픔의 치유’의 저자 미셸과 앤더슨(Kenneth Mitchell and Herbert Anderson)은 이러한 위로를 ‘미성숙한 위로’라고 말한다. 말보다 마음을 전해야 사별자는 마음껏 슬픔을 표현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별자가 편하게 생각하고 신뢰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줘야 한다. 그리고 ‘말’이 아닌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애도의 과정에서는 남아 있는 문제를 해결해주고 이끌어주려는 시도보다는 그냥 곁에서 묵묵히 함께하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어떤 위로보다 낫다. 사별자가 뭔가 말하고 싶어 하면 잘 들어주고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라는 표현 정도가 좋다. 남아 있는 가족에게 가장 좋은 위로는 고인에 대해 좋은 말을 해주고 추억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가족은 고인의 삶이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거나 고인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애도 초기뿐 아니라 시간이 한참 지난 후라도, 고인이 가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고인의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등을 말해주는 것이 좋다. 특히 고인의 자녀에게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해주는 것이 좋다.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게 되고 건강하게 추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위로의 말에는 이처럼 존중, 존엄, 긍휼이라는 참된 가치가 들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내게 꼭 필요한 위로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위로의 말이 어떠해야 할지 가늠이 될 것이다. 사별자는 마음껏 슬픔을 표현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별자가 편하게 생각하고 신뢰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줘야 한다. 그리고 ‘말’이 아닌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윤득형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도미, Chicago Theological Seminary과 Claremont School of Theology에서 목회심리학과 영성상담학을 전공했다. 현재 각당복지재단에서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 회장, 의향서 본부장, 애도심리상담센터 센터장 등을 맡고 있으며, 감리교신학대학교와 숭실사이버대학에서 학생을 지도하고 있다. 저서로는 ‘슬픔학개론’이 있고, ‘애도수업’, ‘우리는 왜 죽어야 하나요’ 등을 번역했다.
- 2018-07-23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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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웰다잉 연극단'의 무대 위 웰다잉 수업
- 사회복지법인 각당복지재단의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의 커뮤니티 ‘웰다잉 연극단’. 단원 모두 웰다잉 강사 자격을 갖춘 이들로 2009년 3월 창단해 올해로 10년째 자원봉사 형태로 활동 중이다. 웰다잉 연극 ‘춤추는 할머니’, ‘행복한 죽음’, ‘소풍가는 날’ 등을 통해 공감대를 일으키며 더욱 쉽게 죽음의 의미와 준비 방법에 대해 전파하고 있다. 최근 공연작인 ‘아름다운 여행’(장두이 작·연출)은 존엄사 유언장과 사전장례의향서, 버킷리스트를 준비하는 노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실제 암 투병 중에도 항암치료를 견디며 무대에 선 최명환 단장은 “100회 공연을 하는 것이 버킷리스트였는데, 이미 초과 달성했다”며 “웰다잉 연극단 10년사를 잘 엮어 책으로 남기는 것이 새로운 버킷리스트다”라고 말했다. 김희숙 부단장은 “단원 모두 유언장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둔 상태”라며 “웰다잉 전문가들이지만, 죽음을 주제로 연극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강의보다는 몸으로 보여주며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내용을 이해시키는 데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웰다잉 연극단 총무를 맡은 홍재응 씨는 “연극을 통해 관객은 자기 마음속 이야기와 마주한다. 특히 언젠가 떠나리라 인정하면서도 멀리만 느꼈던 죽음의 문제와 직면하며 실천을 미루거나 망설였던 일들을 상기하게 된다”고 말하면서 관객의 반응을 통해 연극의 효과를 실감한다고 덧붙였다. ‘아름다운 여행’에서 저승사자 역의 방성희 씨는 “웰빙과 웰다잉은 하나이지, 분리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나의 죽음에 대해 스스로 결정권을 갖고,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 즉,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라고 조언했다. 연극의 주인공인 노인 역의 유한권 씨는 “죽어가는 인물을 연기하며 간접적으로 죽음을 체득하게 됐다. 그러면서 죽음은 곧 새로운 삶을 위한 과정임을 깨달았다”며 관객뿐 아니라 연극 단원으로서 느낀 소회를 들려줬다. 단원들은 입을 모아 “우리는 웰다잉을 위해 웰빙하는 사람들”이라 말한다. 자신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웰다잉을 실천하길 바란다는 그들의 웰빙 무대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웰다잉 연극단은 올해 2월 4일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시행에 맞춰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노인복지관, 평생교육원 등 10곳을 선정하여 무료로 찾아가는 공연을 진행했다.
- 2018-06-22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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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족을 위로하는 ‘애도’, 우리는 제대로 해왔을까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가족을 잃은 이에게 우리가 가장 흔하게 하는 말이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면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막막해진다. 누구나 하는 위로의 말은 상투적이고 진심이 담기지 않은 것 같아 고민스럽다. 이렇듯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사람을 위로하는 데 익숙지 않다. 유족을 보듬는 일은 분명 필요한 일이지만 제대로 위로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는 그동안 없었다. 최근 웰다잉이나 호스피스 등 죽음과 관련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함께 주목받고 있는 분야가 있다. 애도상담이 그것이다. 국내에 애도상담을 보급하고 있는 윤득형 박사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는 무엇인지 들어봤다. 애도 과정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애도상담은 다양한 형태의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겪는 심리적, 영적, 정서적, 신체적 문제들을 잘 헤쳐 나갈 수 있게 도와주며, 슬픔의 과정을 제대로 겪어내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과정이라 정의된다. 국내에서는 아직 낯선 분야이지만 해외에서는 그리프 카운셀링(Grief Counseling)으로 불리며 이미 상담의 한 전문 분야로 자리 잡고 있다. 호스피스 기관에서는 사별 가족을 위한 팀이 운용될 정도다. 윤득형 박사도 미국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애도상담을 세부전공으로 연구했고, 각당복지재단에서 상담활동이 필요한 상담가나 종교인 등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애도의 첫 단계는 함께 있어주기 애도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그동안 가장 궁금했던 내용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유족을 만나면 어떤 말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윤득형 박사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 질문이라며 이렇게 답했다. “애도를 위해 간단한 한 문장을 말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아무 생각 없이 ‘안녕하세요’라는, 상황에 맞지 않는 인사를 건네기도 하지요. 보통 목례 정도만 해도 큰 문제는 없지만, 뭔가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은데 표현할 방법이 없다면 ‘뭐라 위로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심정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나치게 종교적 언어로, 좋은 데 가셨다거나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가족에게 위로가 되지 않아요. 유족의 생각에 고인에게 좋은 장소는 자신의 곁이고 그곳이 안식처이니까요.” 그렇다면 제대로 된 애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윤 박사는 3가지를 추천한다. 첫째는 함께 있어주기. 물리적으로 옆에 있어주는 것이다.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연락하고 만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다음 단계는 열린 질문 하기. “애들은 어때?”, “기분은 좀 어떠니”와 같은 질문을 통해 상대가 감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가장 중요한 들어주기가 있다. 이때 감정을 섣불리 이입하거나 자신의 경험을 투사하면 안 된다. 유족이 슬픔을 실컷 표현할 수 있도록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윤 박사는 예견했던 죽음이든 갑작스런 이별이든 유족이 겪는 슬픔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한다. 상실 후에 남아 있는 이들이 겪는 극한 감정을 그는 ‘비탄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보통 2~3주 정도 지속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애도의 과정을 겪게 되는데 이때는 돌봄이나 상담 등이 도움이 됩니다.” 슬픔 해소하지 못하면 후유증 남아 윤 박사는 애도상담의 필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애도의 과정을 제대로 겪지 못하면 복잡한 반응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비탄의 과정이 비정상적으로 오래 지속돼 몇 년이 지나도 슬픔에 잠길 수 있고, 사별한 후 십수 년 후에 느닷없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격동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 신체적인 질병이나 이상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어요. 특히 어휘력이 떨어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이상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본인 탓을 하며 괜한 죄책감을 갖게 될 수도 있어요.” 특히 세월호 사건과 같은 국가적 대형 재난에서는 유족이 겪는 슬픔을 사회가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족들이 슬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실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데, 시신을 확인하지 못하거나 원인을 알지 못하면 진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것. 사회적으로도 이들의 슬픔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순구하게 애도할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 2018-03-29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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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동계올림픽은 제가 꾸던 꿈이었습니다. 前 강원도국제스포츠지원단장 박종흔 씨
-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닦아야만 했으니까. 희망이 보이는가 싶더니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망연자실 고개를 떨어뜨렸지만 초석이 다져졌고 단단한 징검다리가 놓였다. 노력은, 꿈은, 그렇게 현실이 됐다. 한 달여 남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삼수(三修) 만에 이뤄낸 쾌거’라고 말한다. 세 번의 도전 동안 수많은 사람의 헌신과 노력,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올림픽 또한 없을 것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노장을 기억해냈다. 前 강원도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자 現 아라웰다잉연구회 회장인 박종흔(朴鍾昕·69) 씨. 꿈이 이뤄진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창동계올림픽의 백전노장을 만나다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박종흔 씨를 만났다. 이미 10년도 더 된 올림픽 유치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는 기자의 말에 해드릴 대단한 얘기가 없다며 멋쩍게 웃는다. 박종흔 씨는 올림픽 관련 업적 외에도 공직자로서 명망 높고 존경받던 인물. 지금도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삶을 살고 있다. 2009년 강원도청 지방부이사관으로 공직을 내려놓기 전까지 지방과 중앙정부 요직을 비롯해 2014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업무까지 두루 섭렵한 박종흔 씨는 나랏일(?) 전문가였다. 현역 시절 인생을 걸고 몰두했던 일은 단연 ‘올림픽’이었다. 평창동계올림픽 재수 시절인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머릿속에는 오로지 올림픽 유치 생각밖에 없었다. “2004년도에 국무총리실에서 재난관리과장을 하고 있다가 강원도로 내려와서 받은 첫 보직이 ‘강원도 국제 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이었어요. 첫 번째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하고 난 뒤에도 강원도가 재도전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올림픽 유치에 관한 업무를 하는 조직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국제스포츠위원회가 구성되자마자 올림픽 유치를 위한 준비를 틈틈이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 신청 뒤 후보 도시가 되기까지 각 도시 간 보이지 않는 경쟁은 치열하다. 홍보 담당자로서 어깨가 당연히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경쟁 도시와 비교해 최대한 좋은 인상과 올림픽 정신에 입각한 행동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밝힌 ‘드림프로그램’ 국제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을 하면서 단연 보람되고 뿌듯했던 것이 드림프로그램이었다. 올림픽 유치활동을 하는 중 가장 정열적으로 힘을 다하고 관심을 가졌던 프로젝트였다.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고 있고, 성과가 이번 올림픽에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드림프로그램입니다. 제가 오기 전부터 기획된 것이었어요. 눈이 내리지 않고 얼음이 얼지 않는 나라의 청소년을 강원도로 초정해 동계스포츠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죠. 스노보드도 타고 스키도 가르쳐주고 스케이팅도 가르쳐줬습니다.” 한편으로는 IOC 위원에게 한 표를 호소하겠다는 전략도 깔려 있었다. “아프리카 지역은 동계올림픽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동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왔던 참가자들을 통해 우리의 뜻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끊임없이 이어진 드림프로그램은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열매를 거두었다. 2009년 드림프로그램에 참가했던 말레이시아 피겨스케이트 선수 줄리안 지 지에 이(21)는 말레이시아 동계스포츠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동계올림픽 출전 기회를 얻었다. 박종흔 씨가 한창 활동하던 2005년 참가했던 남아프리가공화국의 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타마라 제이콥스는 2월 초 성화 봉송 주자로 뛸 예정이다. 동계스포츠를 널리 알리고 올림픽정신을 실현한 소중한 프로그램이 시간이 지나 빛을 발하고 있다. “그땐 정말 용평스키장에서 살았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과 같이 지내고요. 인솔해온 지도자들에게는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면 평창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도록 IOC 위원들에게 말해 달라고 막후활동을 했습니다. 제가 돌아다니면서 다 한 거죠. 지금 생각해도 드림프로그램은 정말 잘된 프로그램입니다.” 겨울 스포츠의 장, 평창으로 오세요! 강원도청에서 홍보부장 업무를 보다가 국제부장직을 맡아 서울로 근무지를 옮겼다. 이번에는 평창이 동계스포츠 경기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상을 전 세계에 심어주는 일이 관건이었다. “예를 들어서 스노보드 세계 챔피언십 대회를 한다고 하면, 다음 대회를 우리가 유치해오는 것이었어요. 프레젠테이션도 많이 했고 또 큰 대회도 여러 번 강원도에서 유치했습니다. 동계올림픽에는 국제스키연맹, 스케이팅연맹, 바이애슬론 등이 쭉 있잖아요. 산하 연맹들이요. 거기서 다 호응을 또 해줘야 합니다. 대회를 유치하려고 많이 다녔고 유치도 꽤 했어요.” 국제부장에 이어 올림픽 업무를 총괄하는 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 되면서 밤낮 없이 일에 매달렸다. 홍보부장 때 용평스키장이 집이었다면 이후에는 전 세계가 올림픽 유치를 위한 영업장이었다. 세계를 돌며 평창에 한 표를 호소했고 열정을 쏟았다. 유리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뛰었다.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러시아의 소치와 대한민국의 평창이 근소한 차이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개최지 결정은 남아메리카의 과테말라에서 이뤄졌다. “우리나라는 전세기 한 대로 날아갔는데 러시아는 초대형 화물기 7대를 가지고 날아왔어요. 시내 곳곳에다가 공연장 만들고 엄청난 오일 머니를 갖다 부은 거죠.” 뭔가 전세가 밀리는 기운이었지만 우리 측도 표결이 있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발로 뛰고 평창을 알렸다. “권양숙 여사님이 마침 저희를 도와주셨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을 만나서 미팅도 하고 애써주셨죠. 나름대로 전략을 세웠습니다만 소치를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4표 차이로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러시아 소치에 내주고 말았다. 2007년 7월 3일. 뼈아픈 그날이었다. “평창은 벌써 2차 도전이었고 유치를 확신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더 이상 올림픽 업무를 보기가 싫어지더라고요.(웃음)” 쏟았던 정열에 비해서 얻은 게 없었다. 박탈감이 없었다면 세 번째 도전 때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었다. “만약 있었으면 조직위원회에서 활동을 했겠죠. 그런데 한 3년 그렇게 하고 나니까 올림픽은 조금….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정년을 2년 남긴 상황이었거든요. 좀 더 유능하고 젊은 친구들이 새롭게 유치 업무를 맡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올림픽 유치가 물거품으로 돌아간 뒤 박종흔 씨는 올림픽 업무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며 강원도지사였던 김진선 전 지사에게 학교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이후 주문진에 있는 강원도립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9년 정년퇴직했다. 못다 이룬 평창의 꿈은 후배들에게 넘겨주었고, 올해 마침내 결실의 그날을 맞게된 것이다. 후배들이 선배님으로서 박종흔 씨를 좀 챙기고 있는지 물었다. “안 그래도 후배한테 우스갯소리로 나를 잊은 게 아니냐며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나를 기억하라고 했더니 알았다 하더라고요.(웃음)” 후배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동계올림픽의 꿈을 실현시켰기에 자신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올림픽 유치 과정 속에서 상당 기간 근무한 것에 새삼 보람을 느낍니다. 이게 끝내 무산됐더라면 우리의 노력도 물밑으로 가라앉았을 거예요. 우리가 못 이룬 일을 후배들이 이뤄낸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죠. 제 나름대로 훗날 기여할 일이 있다면 물론 당연히 해야겠죠.” 박종흔 씨는 지금도 눈이 내리면 ‘이 눈은 설상경기에 좋을 눈이구나, 아니구나’를 생각한다. 오랜 시간 올림픽과 함께했던 삶이 여전히 몸에도 생각에도 배어 있다. 나랏일 전문가, 웰다잉 전문가 되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일궈낸 백전노장은 지금 그럼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제2인생도 궁금했다. 최근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웰다잉’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마침 기자와 마주한 곳은 현재 회장으로 활동 중인 아라웰다잉연구회의 공간이었다. 은퇴 뒤 인생에 대해 고민하다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것, 즉 ‘웰다잉’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과거에는 퇴직 공무원이 길가에서 쓰레기를 줍거나 산불 감시, 교통질서 캠페인 같은 단순노동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죠. 저는 30~40년 공직에 있었던 노하우를 접목해서 전문 재능을 기부하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생각했습니다. 퇴직 무렵 웰다잉에 대한 인식이 조심스럽게 사회에 퍼져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박종흔 씨는 2013년 웰다잉 전문가로 거듭났다. 그때 당시 *각당복지재단이 강원도의 동해가정법률상담소를 포함, 다섯 군데를 선정해 웰다잉교육전문지도강사양성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16주 교육을 이수한 뒤 웰다잉 지도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는 비영리 민간단체인 아라웰다잉연구회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웰다잉 전문가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경로당과 노인복지원을 찾아다니면서 무료로 강의도 하고 봉사도 한다. 예전에는 아름다운 인생 마무리에 관해 주로 다뤘지만 최근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해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혹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 물었다. 또 봉사 이야기를 꺼낸다. 평생 공직생활에 국민들 염원을 담아 발에 땀나도록 뛰어온 사람이 지치지도 않나보다. “퇴직 전부터 악기로 봉사하고 싶어서 한 10년 색소폰을 배워뒀습니다. 그래서 심심치 않게 어르신들을 위해 연주하고 있습니다.” 남을 돕는 것도 좋지만 지금껏 헌신하며 살아온 자신과 더불어 가족과 행복한 인생을 많이 즐기시길 바란다. 2월, 평창 밤하늘에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면 손자에게 꼭 말하시라. “저게 다 할아버지 덕분이었다”고 말이다. *각당복지재단 1986년 설립된 각당복지재단은 인류애 정신에 입각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죽음준비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말기환자를 보살피는 호스피스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 2017-12-2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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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 시작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알고 계시나요?
-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연명의료의 시행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연명의료결정법’ 시행을 앞두고, 올해 10월부터 시작된 시범사업이 내년 1월 15일까지 진행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사회적으로 논의된 것은 2009년 ‘김 할머니 사건’ 이후부터다. 당시엔 ‘사전의료의향서’로 불렸고 이후 민간 차원에서 캠페인을 통해 작성되기도 했다. 정부의 공식 사업 전까지 오랜 기간 동안 제각각 이뤄져 작성을 고려하는 시니어 입장에선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과연 어떻게 써야 할까. 정부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관련한 이번 연명의료 시범사업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위해 희망자와 상담하고,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작성된 의향서를 등록해주는 기관과 작성된 의향서에 따라 연명의료 중단 여부를 이행하는 병원이 지정된 것이다. 정부는 이 기관들에서 발생한 문제점들을 진단해 시범사업 이후 제도를 시행할 때 보완할 계획이다. 현재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작성 여부를 고민하고 있다면 일단 정부가 시범사업을 위해 지정한 기관으로 연락해보는 것이 제일 확실하다. 비공식 기관에서 작성하면 효력 없어 현장 관계자들은 정식 등록기관이 아닌 비공식 민간기관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유도하는 곳이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고 경고한다. 이들 민간기관들은 홈페이지나 SNS 등을 통해 임의로 만들어진 양식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도록 유도하면서 작성과 보관에 대한 비용 등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시범사업의 공식 등록기관들은 의향서 상담과 작성비, 등록비를 받지 않는다. 관계 기관은 여전히 활동 중인 비공식 민간기관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설립추진단 백수진 부장은 “시범사업 등록기관으로 지정되지 않은 곳에서 작성된 의향서는 양식이 동일해도 법적 효력을 지니지 못한다”고 설명하면서 “이는 등록 과정에서 진행되는 상담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전에 작성된 의향서들 역시 법적 효력은 없다. 다만 현재 의향서 작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의사능력이 없는 환자라면 과거에 작성한 의향서를 추정적 의사로 활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참고자료일 뿐 효력을 지니진 못한다. 의사능력이 없는 환자가 연명의료를 중단하기 위해서는 가족 2인의 동일한 의사 진술이 있어야 한다. 연명의료결정법상 가족 전원의 합의도 환자의 연명의료 중단의 근거가 될 수 있지만, 시범사업에서는 제외된다. 정부는 이번 시범사업에서 각 공식 등록기관이 지방의 다른 협력기관과의 협약을 통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에 대한 상담과 작성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등록기관 중 2개의 의료기관을 제외하면 공식 등록기관이 서울에 두 곳, 대전에 한 곳뿐이기 때문이다. 타 지역의 수요에 대응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문제는 협력기관과 비공식 민간기관을 일반인들이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관계자들은 “반드시 공식기관을 통해 주거지 인근의 기관이나 상담사를 안내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희망자들이 주의해야 할 사항은 더 있다. 의향서 효력에 관한 내용이다. 공식 등록기관인 각당복지재단 관계자는 “간혹 의향서를 작성하고 나면 교통사고 등 응급상황에서 심폐소생술 등 의학적 처치를 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며 “연명의료 중단은 임종 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이 있을 때만 진행하며 의향서를 작성했다 해도 예기치 못한 응급상황에는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전에 웰다잉 교육과 숙고 필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결정하는 안락사나 존엄사로 이해하는 것도 문제다. 의향서 작성은 임종 과정에서 무의미할 수도 있는 의학적 처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지, 생을 일찍 마감하고 싶다고 해서 죽음을 앞당길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는 아니다. 시행 관계자들이 연명의료결정법이 ‘존엄사법’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11월 15일 기준으로 전국에서 시범사업을 통해 작성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총 1331건. 적지 않은 숫자다. 현장 실무자들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결정하기 전에 관련 기관에서 진행하는 웰다잉 수업 등 교육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입을 모은다.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결정하는 일은 심사숙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 2017-12-18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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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웰다잉] “풍요로운 영혼의 에필로그 같은 죽음을 맞이하세요”
- 죽음을 준비해본 적이 있는가? 언뜻 생각하면 법적인 몇 가지 절차를 제외하면 구체적으로 생각나는 준비가 없다. 평생 모아온 재산만 잘 물려주면 그만인 걸까. 죽음은 경험자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최근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관심받는 분야는 바로 임종학(臨終學), 즉 싸나톨로지(Thanatology)다. 싸나톨로지는 주로 국내 대학의 평생교육원을 통해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이들 대학 중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을 통해 싸나톨로지에 대해 알아봤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싸나톨로지 과목의 정식 명칭은 ‘죽음교육 전문가’다. 이 강의를 책임지고 있는 신경원(申瓊媛·54) 강사는 싸나톨로지를 이렇게 정의한다. “싸나톨로지는 통섭학문(統攝學文)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심리학이나 인류학, 신학 등 모든 학문의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일이지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학이 통합된 학문입니다. 종교적 관점도 중요한데 특정 종교를 주제로 하진 않아요. 때문에 여러 종교에서 연구를 위해 오시고, 그 과정에서 역지사지의 마음을 알 수 있기도 하죠. 함께 의견을 나누고 연구하다가 각자의 종교로 돌아가서 그들만의 언어로 해석이 되는 셈이죠.” 싸나톨로지가 중요한 이유에 대해서는 ‘주체적인 죽음’을 강조했다. “이끌려가는 죽음이 아니라, 내 죽음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에요. 물론 ‘주체적’이라는 뜻은 자살은 아니에요. 죽음을 거부하고 무서워해서 벌벌 떨다가 시간을 다 보내버리면 내 삶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게 되거든요. 허겁지겁 아프기만 하다가 간다면 얼마나 많은 회한이 남겠어요.” 싸나톨로지를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다루는 사람이 많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의료인이나 종교인, 심리상담가, 시니어 대상의 교육자 등으로 죽음을 곁에서 자주 대하는 직업군들이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호스피스와 다른 부분은 호스피스는 임종을 눈앞에 둔 환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한 실천적 활동이라면, 싸나톨로지는 호스피스 영역을 포함한 이론적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개인적 이유로 이 학문을 공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신 강사는 교육 과정에서, 도외시하고 그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죽음에 대한 관점이 변화하는 것이 느껴지고, 이러한 변화가 삶과 사람의 가치, 진정한 삶을 생각하는 계기로 이어지는 것을 자주 본다고 말했다. 싸나톨로지와 관련해선 미국의 교육단체 ADEC(Association for Death Education and Counseling)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한국싸나토로지협회가 민간자격제도를 운영 중이다. 또 대한웰다잉협회, 각당복지재단 등 웰다잉을 연구하는 다른 몇몇 단체들도 이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강의는 생애주기에 따른 사별이나 동양사상에서 본 죽음, 호스피스와 완화치료, 상실, 임종환자를 위한 음악·철학치료 등 다양하다. 2000년대 초반 웰빙 바람을 타고 유행됐다가, 그 시기에 입양된 동물들이 수명이 다할 시기가 돼 최근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반려동물 상실도 다룬다. 그렇다면 좋은 죽음은 무엇일까? 좋은 죽음과 그 대비법에 대해 신 강사는 이렇게 조언한다. “주체적인 죽음을 위해서는 나의 의지로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시기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경제력이나 신체적인 상황이 받쳐줄 때 가능한 것이죠. 그렇게 서서히 준비해가면서 내 인생에 몰입하며 즐기는 삶을 사세요. 보통은 자기 이름을 빨간 글씨로 쓰는 것조차 무서워할 정도로 죽음을 외면하려 하잖아요. 그러지 마시고 영혼의 무게를 풍요롭게 해줄, 에필로그와 같은 마지막을 계획해보세요.” 미니 인터뷰 수강생 고원철(65)씨 “우울증 벗어날 수 있는 계기돼” 죽음교육 전문가 과정에서 만난 고원철씨는 사회복지활동을 하는 지인을 통해 이 교육을 알게 됐다고 했다. 원래 대학병원에 교재를 공급하는 사업을 했다는 그는 1986년 겪은 큰 사고가 죽음을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났어요. 꽤 큰 사고여서 여섯 시간 만에 겨우 깨어났어요. 그 과정을 겪으면서 죽음이란 것을 체감하게 된 것 같아요.” 그는 죽음에 대해 배우는 과정이 우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정반대라고 단언했다. “원래 은퇴 후에 농사를 조금 지으면서 지냈는데, 그때 우울증이 왔어요. 그러다 이 수업을 듣게 됐고 긍정적으로 변했어요. 임종을 맞게 된다면 어떨지 예측할 수 있게 되어 막연한 두려움도 사라졌죠.” 그는 매주 배우는 강의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주제로 구성된 것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매번 정치 얘기나 비슷한 잡담만 하다가 시간을 허비하잖아요. 이 과정을 듣고 나서는 화제도 다양해지고,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줄 수 있어서 좋아요.” 마지막으로 고씨는 또래의 시니어들에게 싸나톨로지를 추천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마 비슷한 입장일 거예요. 연로한 부모를 모시거나 가까운 가족의 죽음 혹은 자살을 경험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분들이 감상적으로 젖어들지 말고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이런 교육이나 공부로 이겨내면 좋겠어요.”
- 2016-12-0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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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인생의 터닝 포인트
- 1915년 5월 27일생이신 아버지와 1922년 11월 1일생이신 어머니 사이에서 1946년 1월 4일 8시께 1942년 8월 13일 누님에 이어 둘째로 태어났다. 2년 뒤 여동생, 4년 뒤 또 여동생이 태어났고 막내 남동생과는 9살 터울이다 어릴 적 기억은 4세 때 한국은행 돌계단을 오르면서 엄마 손 잡고 명동 가던 것뿐이다. 누나는 공부를 잘해 늘 전교 1등이었는데 그 동생은 말썽꾸러기라서 늘 창피하다며 야단을 쳤었다. 학교에서 누나에 거는 기대가 크면 클수록 필자는 야단을 적게 맞고 반대로 장난은 늘어만 갔다. 드디어 누나가 50년 개교 이래 처음으로 경기여중을 들어갔다. 누나 졸업과 동시에 필자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 무엇 조금만 잘못해도 엄청 꾸중을 들었다. 아마도 그동안 적립해 놓은 야단을 한꺼번에 듣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학교 주변은 피난민이 많이 살았는데 대개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의 자제였다. 학교 끝나고 오는 길에 그들 몇이 모여 한 아이를 끌고 가 여럿이 골목에서 때리는 것을 보았다. 말썽부리고 공부는 잘못 해도 남을 해치고 약자를 괴롭히지는 않았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뛰어들었고 우릴 아는 애들이 뒤따라 들어와 패싸움이 되어 일이 엄청 커졌다. 다음날 부모가 들어왔는데 그악스런 이북말씨에 네 일도 아닌데 싸움판에 끼었다는 요즘 말로 하면 변호사법 위반으로 징계를 먹었다. 다행히 초등학교여서 퇴학이 없어 전학으로 결정됐다. 5학년 후반 남대문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런데 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과를 끝내고 집에 오려는데 왠지 많은 아이가 빨리빨리 교실을 빠져나가고 열 두어 명이 남더니 뒤에서 양동이를 머리에 씌우고 몰매를 놓는 것이었다. 학교 근처에 서울역 양동이라는 사창가가 있었는데 그곳 아이들이 뭉친 게 한패, 남대문 시장 뒤 고아원 아이들이 한패로 그들만의 리그가 볼만했다. 전학생이 왔는데 패싸움 때문에 전학 왔다니까 기선을 잡기 위해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망치를 하나 들고 갔다. 노는 시간에 하면 여러 명에게 당할 것 같아 공부시간 중간에 뒤에서부터 한 명씩 깼다. 당연히 학교가 난리 났다. 결국 3개월 만에 멀고도 먼 교동초등학교로 전학 갔다. 이곳은 맹모삼천지교란 말이 실감 나는 곳이었다. 한반이 72명인데 왜 이렇게 조용히 공부만 하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필자도 할 일이 없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두 달 후 6학년이 되었다. 72명이 어깨 맞대고 촘촘히 앉아 시험을 봤다. 그래도 두 달 공부 열심히 했다고 아는 문제가 많아 정말 신나게 시험 봤다. 일요일이 주일 후 시험성적표가 성적순으로 나와 뒷벽에 붙었다. 그런데 나름대로 시험도 잘 봤는데 팔저 이름이 없는 것이었다. “선생님 제 이름은 없는데요?” “그래? 번호는 몇 번까지 있니?” 72번이요.” “그럼 맞는데 어디 보자.” 갑자기 머리에 벼락이 떨어졌다. “야 임마 여기 있잖아. 너는 네 이름도 못 읽냐.” 아차 필자 번호 67번에 필자 이름이 있는 것이다 필자 생전 그렇게 재미있게 시험 본 경험이 없을 정도로 재밌게 봤는데 이상했다. 시험지 확인을 해보니 평균 82점인데 67등이었다. 그렇다면 점수 18점 안에 66명이 있다는 것 아닌가. 6년 내내 최고 점수 평균 91점 받아봤지만 등수에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중학교 입학해 공부 좀 하려는데 집에 큰일 생겼으니 빨리 가보라는 담임교사 말에 어리둥절해 가보니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갔다. 5남매 장남으로 7식구 돌보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우선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신문 배달뿐이었다. 대학도 안 가려는데 어머니가 앞으로는 대학 졸업장 없으면 행세를 못 하니 앞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나오더라도 졸업장은 반드시 가지라고 말했다. 공부 잘하는 누나 한 사람 대학 보내기도 쉽지 않은데 필자 덜컥 시험을 봐 경희대에 턱걸이로 합격하니 어머니는 얼마나 심란했을까. 그 시절은 생애 최고의 순간이기도 했고 불안의 나날이기도 해다. 필자는 누나가 결혼한 뒤 군대에 갔다. 훈련을 마쳐 각자 본대로 가는데 그 많은 훈련병 다 호명해 갔으나 마지막까지 혼자 남았다. 알고 보니 육군본부였다. 군대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필자 복에 육군본부라니 말도 안 됐지만 사실이었다. 근무 중 월남파병 백마부대에 차출되어 강원 화천 오음리서 훈련받았다. 만기 제대를 하고 도저히 경희대 주간을 다닐 형편이 되질 않아 건국대 야간대학으로 옮겨 낯에는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녔다. 경희대 다니며 친구들과 만든 “포도원”이란 모임은 지금도 50년 넘게 만나고 있는데 이혼, 상처, 상부, 본인 사망한 친구가 없는 모임이다. 건국대 야간은 낙원동에 위치한 96%가 직장을 다니며 주경야독하는 백전용사들이다. 지금도 매월 첫 수요일 저녁은 그들과 함께하는데 시멘트에서도 싹 튼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는 지독한 독서광들인 친구들이다. 건국대 야간 경제과를 졸업하고 학사가 되었다. 어머니 말대로 앞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그해 10월 아내와 결혼했다. 그리고 1973, 75, 78년 생 딸 2, 아들 하나 아이 셋을 낳았다. 그리고 큰애가 아들과 딸, 작은애가 딸 둘을 낳았다. 1998년 소마라는 개인회사를 만들었다. 특수방식의 사료 첨가제였다. IMF가 왔지만 사료비를 아끼려는 농가가 많아져 오히려 매출이 늘었다. 크기를 키워 주식회사로 만들고 상호도 (주)지니 바이오로 변경했다. 이후 회사는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사옥도 사고 직원도 늘리고 거의 수직 상승곡선이 그려졌다. 하루 운행 거리가 최고 762km. 평균 500km가 넘을 정도로 영업하고 다녔다. 그리고 영업을 위해 삼성 SM5를 샀다. 이 차는 세상에 차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내게 알려준 최초의 차였다. 차 뺀 지 2년 만에 35만km를 달렸지만 잔 고장 하나 없이 잘도 달려주었다. 그런데 2000년 구제역이 왔다, 매출이 100%에서 3%로 떨어졌다. 1년 후 재기를 노려 농가를 다니길 약 20일. 그러나 다시 구제역이 왔다. 사옥도 팔아가며 버티고 버티며 2011년까지 왔지만 역부족 결국 남에게 넘겼다. 그러는 사이 나라에서 지하철 공짜카드가 나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이가 벌써? 대한노인회에 이모작 준비에 관해 문의했다, 그런데 답이 “집에서 가까운 경로당에 가서 봉사하라”라고 하는 것 아닌가. . 잔버들 경로당에 가서 한 달을 버텼다. 경로당은 구립이라 지원금이 일 년에 360만원이 전부였다. 그래서 근처 절, 성당, 교회, 기업체를 다니며 ‘한 달에 한 번 어르신들께 점심 기부를 해 달라’며 다녔다. 많은 사람 앞에서 직접적인 필자 일도 아닌 금전적인 것을 부탁하러 다니다 보니 얼굴만 벌게 지며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40여년을 오로지 스피치 교육만 하고 있다는 ’한국언어문화원’을 찾아갔다. “지금처럼 서로 마주 보고 일대일로 상대를 설득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낚시법이라 한다면 저희는 일대 다중을 설득하는 투망법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하는 원장 말에 뿅 가서 그날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발성 연습을 하며 우리말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6개월 하고 나니 발성이 제대로 나오게 되었다. 얼마나 배웠는지, 남 앞에 제대로 설 수 있는지 알아보려 2012년 11월 3일 전남 광주시에서 열리는 제38회 박정희대통령기 쟁탈 전국웅변대회에 그 당시 한참 신문, 방송에 오르내리는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웅변했다 . 결과는 특등. 그 한 번의 경험으로 연단 공포증을 단숨에 없애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쉬지 않고 매주 월요일이면 스피치 공부하러 다니고 있으며 현재는 한국언어문화원에서 교수진에 등록되어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특등으로는 성이 차질 않았다. 2015년 11월 7일 광주에서 열리는 제41회 박정희대통령기 쟁탈 전국웅변대회 주제는 그해 대단히 가물어 식수마저 끊기는 지역까지 있어 ‘환경은 생명이다’”라는 원고로 참가해 마침내 대상을 거머쥐게 되었다. 1년 후 조선에듀케이션과 유어스테이지(주) 시니어파트너즈에서 강사 과정이 있다기에 응시해 생애 재설계를 배웠다.건강, 인식, 관계, 경제, 직업, 주거, 여가, 계획과 실천, 교수법을 배웠다. 그렇게 죽을 만큼 공부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결과는 합격. 필자가 강사가 되다니 꿈만 같았고 그 길을 계속 가고 싶었다. 2013년 3월 11일 강사자격인증서를 받았고 3월 21일 드디어 강사위촉장을 받으며 강사생활이 시작됐다. 필자는 무엇이든 빠르지 않고, 재주부릴 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절대 뒤로 가지는 않는다. 필자는 강사 과정을 함께 공부했던 사람 중에 대단히 해박하고 아는 것이 많았다. 공부해 보니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회 각당복지재단에서 웰다잉을 공부하라 지도해 주셔 죽음학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죽음의 의미를 알아보는 로고테라피 강의는 그 중에도 백미였다. 다모작포럼협동조합에서 “한(정수) 이사”의 준말인 ‘하니’란 애칭으로 교장 선생 일도 보람 있게 하고 있다. 필자에게 강사라는 꿈이 있었을까? 연단에서 누굴 가르친다는 게 가능했을까? 필자는 돈만으로 격을 따지는 세상에서 인성의 사각지대에 있는 그들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동안 배운 모든 과정을 녹이고 녹여 재미있는 강의를 하다 보니 지금은 공무원연금공단 변화관리 전문강사로 활동하며 직접 겪은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전환 과정'을 중장년에게 전수해주려 하고 있다. 아울러 '다가치포럼 협동조합' 전무이사로 '중장년 미래전략 강사양성'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정부 지도자 과정도 다음 달에 개설할 예정이다. 교육이 대세라는 생각은 팔저를 생각하면 당연한 길이다. 무궁한 발전이 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 함께 가는 길이기에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 2016-08-17 15: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