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xhibition
◇기후미술관: 우리 집의 생애
일정 8월 8일까지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환경보호가 전 세계의 과제로 당면한 가운데,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는 전시가 열렸다. 모든 생태계의 집인 지구, 인간이 거주하는 건축물, 새와 곤충의 서식지 등 세 개의 집을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해 그 안에서 벌어진 참혹한 환경오염을 이야기한다. 이상 기후로 집단 고사한 침엽수, 아사한 동물, 남·북극의 해빙 등 죽어가는 지구의 모습을 실제 고사목과 박제 동물, 영상 등으로 선보이며, 아파트를 짓고 부수는 과정에서 생산 및 폐기되는 사물을 작품으로 재해석한다. 전시실뿐 아니라 마당, 로비, 건물 외벽 등 여러 곳을 전시 장소로 활용해 미술관 전체를 인간을 둘러싼 환경처럼 보이도록 했으며, 특히 옥상에는 서식지를 잃은 새와 곤충의 보금자리를 설치해 전시 일정과 무관하게 올가을까지 남겨둔다. 기후위기에 대한 전시지만 그 자체가 탄소 배출 행위라는 모순을 고려해, 전시 준비 과정에서도 폐기물과 에너지 사용을 최대한 줄이고 재사용과 재활용을 생활화했다. 배우 박진희가 국문 오디오 가이드 녹음에 참여해 진심 어린 목소리로 인류가 직면한 현실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나무 인형의 비밀 - 체코 마리오네트
일정 8월 29일까지 장소 서울역사박물관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지구 반대편 국가 체코의 전통문화를 생생하게 즐길 수 있는 전시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 체코의 흐루딤인형극박물관과 협력해 마련된 이번 전시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체코 인형극을 중심으로 156점의 인형과 무대 배경, 실황 영상 등을 다채롭게 선보인다. 18세기 유랑극단에서 출발한 체코 인형극은 라디오나 TV가 없던 시절 도시 간 소식을 전달하며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전시는 이 같은 기원을 시작으로 인형극 부흥기를 맞은 20세기 초중반, 다양한 인형극장이 탄생한 20세기 후반까지 인형극의 발전을 연대기적 구성으로 살펴본다. 또한 단순히 역사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오감을 만족시키는 체험존을 마련해 전시장을 찾은 어린이들의 흥미를 유발한다. 체코에서 직접 공수해온 마리오네트 인형과 손가락 인형, 음향 장비 등을 통해 인형극을 재현해볼 수 있으며, 유랑극단이 타고 다니던 마차에 들어가 가까이 감상할 수 있다. 가족 단위로 방문하기 좋아 여름방학이 시작된 손주와 함께 방문하면 더 즐거운 추억을 남길 수 있다.
● Book
◇영혼을 품다, 히말라야 (박경이 저·도트북)
남들이 가지 않은 길에 용감하게 오르는 이들이 있다. 바로 고산 등반가다. 이들은 동상에 걸려 손가락을 자르고, 때로는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 모습을 보면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산을 오르는 이유가 궁금해질 때도 있다. ‘왜 산을 오르는가?’ 어쩌면 산을 사랑하는 모든 산악인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 여성 산악가 박경이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의 삶으로 대신한다.
에세이 ‘영혼을 품다, 히말라야’는 고산 등반가의 삶과 철학을 저자가 ‘죽음의 지대’ 히말라야 고산에 직접 오르며 만난 이들의 이야기로 현장감 넘치게 풀어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극한의 자연환경에서 자기 존재의 참된 의미를 사유하고, 자신을 포함해 편견과 차별이란 또 다른 산을 넘어야 했던 세계 여러 여성 산악인의 고충을 담담히 반추한다.
책은 단순히 감상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산 등반을 떠나려는 이들에게 필요한 내용을 흥미롭게 알려준다. 셰르파와 루트 개척, 베이스캠프 생활 등 기본 상식부터 트레킹 준비물, 고산병 극복 방법 등 실전에 필요한 정보까지 한데 담아 등반 의욕을 고취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죽으러 산에 가지는 않지만 죽을 걸 알면서도 산을 오른다”는 많은 고산 등반가의 마음을 대변한다. 관중도 심판도 없지만 반칙하지 않고 정직하게 산을 오르는 이들의 삶을 간접 체험하다 보면 서문에서 던졌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 풀린다. 등산의 진정한 묘미는 정상이란 결과보다 자신을 믿으며 한 발씩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인생이란 산을 탈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이다
◇시가 인생을 가르쳐 준다 (나태주 엮·앤드)
‘풀꽃시인’ 나태주가 한국 시의 진수를 엿볼 수 있는 역작을 갈무리해 엮었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국민 시 ‘엄마야 누나야’부터 조지훈의 희귀 시 ‘병에게’까지 총 125편이 담겼다.
◇킵 샤프 (산제이 굽타 저·니들북)
나이가 들어도 인지 기능을 총명하게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을 소개한다. 뇌에 관한 오해와 진실, 구체적인 12주 프로그램을 통해 막연하게 느껴지는 뇌 건강 영역을 실용적으로 접근한다.
◇바람이 내 등을 떠미네 (한기봉 저·디오네)
평생 세상을 뾰족하게 바라보았던 언론인 출신 저자가 평범한 중년으로 돌아와 세상살이의 단상을 덤덤하게 풀어놓는다. 짧지만 강렬한 60여 개의 글이 또래 독자에게 위로를 전한다.
● Stage
◇마리 앙투아네트
일정 7월 13일~10월 3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로버트 요한슨
출연 김소현, 김소향, 김연지, 정유지, 민우혁, 이석훈, 이창섭, 도영 등
18세기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뮤지컬로 다시 돌아온다. 올 7월 막을 올리는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는 한때 고귀한 신분이었지만, 각종 오명 속에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녀의 삶을 통해 진실과 정의의 의미를 조명한다. 사회의 부조리를 타파하고자 혁명을 선도했던 인물 마그리드 아르노를 중심으로 극이 전개되는 오리지널 버전과 달리, 한국 버전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에 비중을 실어 두 여인의 삶을 더욱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특히 당대 부의 상징이었던 파리 베르사유 궁전과 빈민가 마레지구를 무대 위에 재현해 계급 간 갈등 구조를 명확히 그려낸다.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로코코 시대의 화려한 귀부인 드레스와 다채로운 가발도 재미를 높이는 포인트. 목걸이 사건, 바렌 도주 사건, 단두대 처형 등 대중에게 친숙한 사건을 위주로 재해석해 공감대를 더한다.
◇렁스
일정 9월 5일까지 장소 아트원씨어터 2관 연출 박소영
출연 이동하, 성두섭, 오의식, 이진희, 류현경, 정인지 등
매 순간 선한 의도로 행동하기 위해 고민하는 한 연인이 사랑, 환경, 출산 등의 주제로 치열하게 토론하며 ‘좋은 사람’의 정의를 찾아나가는 이야기다. 환경을 위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여자와 아이를 낳아 좋은 부모가 돼야 한다는 남자의 정답 없는 갈등이 진정한 ‘선’(善)의 의미를 묻는다. 특별한 장치 없이 두 배우의 대화로만 이어지는 전개가 몰입도를 높인다.
◇비틀쥬스
일정 8월 7일까지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연출 알렉스 팀버스
출연 유준상, 정성화, 홍나현, 장민제, 김지우, 유리아 등
팀 버튼 감독의 영화를 뮤지컬화한 작품으로, 2019년 현지 초연 이후 세계 최초로 선보이는 라이선스 공연이다. 황당한 사고로 유령이 된 부부가 자신의 신혼집에 이사 온 한 가족을 쫓아내기 위해 장난꾸러기 유령 ‘비틀쥬스’와 합세해 벌어지는 이야기다. 공중부양을 하는 캐릭터와 시시각각 변하는 무대 등 마술 같은 연출이 놀이공원에 온 듯한 짜릿함을 선사한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등산의 바이블로 통하는 미국의 등산 도서 ‘마운티니어링’(mountaineering)의 부제는 ‘산에 자유가 있다’이다. 이 제목을 빌려 필자는 ‘트레킹에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트레킹은 등산보다 난이도가 낮아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다. 배낭 하나 메고 훌쩍 떠나 아름다운 자연과 교감하며 걸을 때, 얼마나 자유로운가. 트레킹을 즐기려면 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트레킹이 등산과 다른 점, 건강에 좋은 이유, 철학자들의 트레킹 예찬론, 시니어들이 즐길 때 주의해야 할 점 등을 알아보자.
코로나19 사태가 몰고 온 언택트 시대에 트레킹 인구는 늘어나고 있다. 비교적 감염 걱정 없이 자연을 즐기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트레킹은 느리고 고지식한 여행이다. 일반 여행은 차를 타고 여러 관광지를 찍고 다니지만, 트레킹은 온전히 두 발로 길을 여행한다. 속도가 느리기에 길에서 만난 새와 나무, 풀 한 포기와도 친구가 된다. 자연과 호흡하며 걷다 보면 느린 속도에 적응되고,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걸 느낄 수 있다. 치유는 트레킹이 은밀하게 건네는 선물이다.
느린 여행, 트레킹의 매혹에 빠지다
트레킹의 사전적 정의는 다소 애매하다. 백과사전에는 ‘목적지가 없는 도보여행 또는 산과 들과 바람 따라 떠나는 사색 여행’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목적지 없이 바람 따라 떠나는’ 트레킹은 없다. 트레킹은 목적이 뚜렷할수록 좋다. 그래서 필자는 나름대로 트레킹에 대한 정의를 내려봤다.
일반적으로 등산은 산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행위를 말한다. 반면 트레킹은 정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정상을 대신하는 새로운 목적을 찾아야 한다. 산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이런 이유로 트레킹의 영역은 무한히 확장된다. 개인 취향에 따라 꽃길, 물길, 단풍길, 눈길, 강길, 섬길, 문학예술, 유적답사 등 다양한 목적과 테마를 잡을 수 있다. 그래서 트레킹은 육체적 행위이며 상상력이 강조되는 정신적 행위다.
트레킹은 걷기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 유산은 인간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꾸준히 걸으면 누구나 건강해질 수 있다. ‘동의보감’에는 “좋은 약을 먹는 것보다 좋은 음식이 낫고, 음식을 먹는 것보다 걷기가 더 낫다”고 쓰여 있다. 우리 선조들은 걷기의 위대함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걷기가 각종 암과 성인병을 예방하고 치유한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증명됐다.
인간은 걸으면서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존재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인간의 발을 다양한 교통수단이 대신하고 있다. 프랑스의 작가 다비드 르 브르통은 자신의 저서 ‘걷기 예찬’을 통해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고 주장했다. 걷기를 통해 느끼는 행복한 감정은 인간 존재의 정체성을 깨닫는 과정이다.
걷기를 삶의 모토로 삼고 불꽃처럼 살다 간 사람은 19세기 철학자 니체다. 그는 우울증을 걷기로 치유했다. 스위스 엥가딘 고원의 실스마리아(Sils Maria) 마을에 방을 얻어 지내며 호수를 걸었다. 이곳에서 역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탄생했다는 건 널리 알려졌다. 니체는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걷기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며 대부분의 작품을 걸으면서 완성했다. “앉아서 지내는 삶은 성령을 거스르는 진정한 죄악이다. 걷기를 통해 나오는 생각만이 어떤 가치를 지닌다”는 말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어디 니체뿐인가. 칸트, 루소, 디킨스 등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가 걷기를 예찬했다.
시니어 트레커들이 주의해야 할 점
필자는 모험적 트레킹을 즐긴다. 모험은 인간의 피를 뜨겁게 하는 힘이 있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를 위해 노력하고, 마침내 목표를 이뤘을 때의 느끼는 희열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모험의 목표는 거창할 필요가 없다. 체력과 능력에 맞게 정하면 된다. 북한산 또는 지리산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백운대나 천왕봉에 오르는 걸 목표로 하면 된다. 북한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제주 올레길 완주는 더없이 훌륭한 목표다.
몇 년 전 필자는 오랫동안 꿈꿨던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다녀왔다. 포터 없이 홀로 히말라야를 자유롭게 걷자는 목표를 세웠다. 어깨를 짓누르는 짐의 무게와 고산병에 시달리며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끝내 목표를 달성했다. 이른 아침 맑은 공기를 마시며 병풍처럼 둘러싼 설산을 향해 걸어갈 때 느꼈던 행복함과 충만함은 아직도 깊게 남아 있다. 히말라야 산속 어느 로지에서 만난 5명은 공교롭게도 모두 혼자 온 트레커들이었다. 한국, 미국, 독일, 러시아, 이스라엘 등 국적도 다양했다. 트레킹을 좋아해 세상 구석구석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들과 밤새 수다를 떨었다. 나는 한국의 제주 올레길을 추천했고, 그들에게 알래스카, 아이슬란드, 러시아 등의 알려지지 않은 코스를 알려줬다. 10년 후에 알래스카에서 만나자는 우리의 두루뭉술한 약속은 지켜질 수 있을까.
시니어들이 트레킹을 즐길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체력과 건강을 항상 점검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고는 무리하고 얕잡아볼 때 나온다. 자연 앞에서는 겸손하고 솔직해야 한다. 관절이 안 좋으면 스틱을 사용해 무릎이 받는 하중을 줄이는 게 필수다. 스틱은 관절이 받는 하중의 30%를 줄여준다. 트레킹 코스는 무리하게 짜지 말고 여유롭게 움직이는 게 좋다. 걸을 때는 되도록 술을 마시지 말자. 술은 과음을 부르는 법이고, 취하면 사고가 일어나기 쉽다. 술은 걷기를 마치고 마시는 걸 원칙으로 정하자. 트레킹에는 등급이 없다. 걷기를 통해 행복을 즐기는 자가 최고의 트레커다.
지구 한 바퀴의 거리는 약 4만 ㎞다. 하루에 11㎞ 정도를 1년쯤 걸으면 약 4000㎞다. 10년쯤 걸으면 지구 한 바퀴 거리다. 그 과정에서 얻는 건강과 반짝반짝 빛나는 사유는 보너스다. 그렇게 꾸준하게 걷다가 하늘이 부르면 미련 없이 떠나자. 나의 묘비명은 이렇게 쓰이면 좋겠다. ‘열심히 걷는 모습이 아름다웠던 사람’.
진우석 시인이 되다 만 여행작가, 걷기 달인으로 통한다. 학창 시절 지리산 종주를 시작으로 20년 넘게 걸었다. 저서로 ‘대한민국 트레킹 바이블’, ‘해외 트레킹 바이블’ 등이 있다. 현재 (사)한국여행작가협회 회장, 두발로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
나이 들다 보니 죽는 것에 관심이 많아진다. 이미 주변에서 또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많이 보았다. 젊었을 때는 교통사고 같은 사고사가 많았지만, 이제는 질병으로 죽는 사람이 많다. 부모님들도 연로하셔서 작고하시는 분이 많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이 나이쯤 되면 죽음에 대비하게 된다. 죽어서 매장을 원하는 사람도 많지만, 요즘은 화장이 대세라고 한다. 그다음은 묻힐 장소로 선산, 공원묘지, 납골당, 삼림욕장 등이 거론된다.
어디서 죽느냐도 중요하다. 그전에는 집에서 임종해야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집이 아닌 곳에서 죽으면 객사라고 하여 불쌍하게 봤다. 그러나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최근에는 병원에서 죽는 경우가 무려 73%라고 한다. 병원도 집이 아니므로 객사에 속한다. 그러나 이 비율은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다. 고령이 되면 병원에 자주 가야 하고 그다음에는 아예 병원 신세를 지다가 죽는 것이다. 집에는 오지도 못하고 바로 병원 장례식장에서 장지로 향한다.
어떻게 죽느냐도 중요하다. 암 같은 질병이 생겨 고통을 받다가 죽는 경우가 가장 불행해 보인다. 돈은 돈대로 까먹고 그 힘들다는 항암치료와 통증,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뜨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졸지에 객사하는 경우가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져 죽으면 고통은 순간적이다. 고혈압, 고지혈증을 ‘소리 없는 살인자’라 표현하며 무서워하지만, 죽음의 방법에서는 반드시 회피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고통만큼은 순간적이다. 고혈압이나 고지혈증을 앓고 있으면 기름진 음식, 술 등을 못 먹게 한다.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다가 죽는 사람에 비하면 불행이다. 차라리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다가 심근경색이나 뇌경색으로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지 않고 후유증이 남아 고생하다가 죽을까봐 관리를 하는 것이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또는 졸지에 죽음을 맞이했을 때 팬티가 깨끗한지 걱정이 된다는 사람도 있다. 죽으면서도 남들 눈을 의식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죽고 나면 그만이다. 본인을 중심으로 보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죽을 때도 남을 의식하는 병폐다.
요즘 나는 여행을 자주 다닌다. 고산병 위험을 무릅쓰고 히말라야에도 가고 각종 전염병이 있다는 아프리카에도 갈 예정이다. 교통수단도 위험하고 여행지에서도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위험하다며 말리는 지인이 많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 하다가 죽는 것도 행복이라고 본다. 위험하다고 집에서만 있다가 죽을 수는 없다. 사고로 죽을 수는 있지만, 확률적으로 사고 없이 잘 다녀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히말라야 고봉을 등정하다가 사고로 죽은 등산가도 많다. 그 사람들은 객사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슬람교에서 해마다 성지순례를 하다가 죽는 사람도 많다.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냐고 물으니 성지순례 하다가 죽으면 천당에 간다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객사(客死)이자 내가 만들어낸 말이지만, 도사(道死))인 것이다.
이 책은 요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는 내 삶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서 다시 일어본 책이다. 여류 작가 정희재 씨가 쓴 책인데 내가 얼마 전 다녀온 안나푸르나 트레킹 얘기도 나온다. 책 제목에는 ‘피곤한 세상에서 벗어나 잠시 쉬어갈 용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멈춰서도 괜찮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라는 부제도 있다.
평생을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잠시 멈춤’이란 단어는 생소하기만 하다. 멈추지 말고 앞만 보고 부지런히 가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달랐다. 고산병을 예방하려면 절대 가이드보다 앞서지 말라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가이드가 답답했는지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가이드를 앞서려고 했다. 그래서 가이드보다 앞서가는 사람은 벌칙으로 1만 원씩 내기로 했다.
저자는 티베트에 가기 전에 유서를 써놓고 갔다고 했다. 심장도 약한 편인 데다 고산병으로 멀쩡한 사람도 목숨을 잃는 사고가 종종 발생하는 곳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장례를 치르는 방법을 일러두고 유품정리는 어떻게 하라는 둥 유서를 쓰고 나니 마음이 달라지더란다. 무사히 티베트를 갔다 온 뒤 써두었던 유서를 읽어봤을 때는 다시 태어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나는 저자처럼 유서를 쓰지는 않았지만 주변 정리 및 마음의 준비를 했다. 고산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버린 사람들이 꿈에 나타나기도 했다.
저자는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할 때 여러 명이 같이 갔다고 했다. 인적도 드물고 지형도 험한 곳이라서 서로 의지하며 지냈는데 트래킹 마지막 날 저자는 혼자 자겠다고 했다. 대단한 선언이자 용기였다. 일행들을 의식했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같이 간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날 밤 저자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혼자 여유를 즐긴 시간은 별로 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일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도 일행과 떨어져 혼자 잔 날이 있었다. 최연장자라는 이유로 독방을 배정받은 것이다. 전날 같이 자던 사람이 코를 너무 골아 잠을 설쳤다고 불평을 한 이유도 있었다. 그날 밤 마음이 차분히 정리되면서 꿀 같은 잠을 잤다. 마치 태고의 자연 속에 혼자 누워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자는 다른 사람들 시선을 너무 의식하면 그들이 만들어놓은 룰대로 살게 된다고 했다. 내가 중심이 되어야 행복하다는 조언이다. 한창 일해야 할 직장인이라면 남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러나 퇴직한 시니어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행동에 옮겨도 된다. 그래야 자기 성찰의 시간도 가질 수 있고 힐링도 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태해지거나 퇴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얻는 게 더 많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조건을 갖춘 곳에서 살다가 그만큼 불편한 환경을 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 밖에서의 고생은 값진 경험과 감미로운 추억이 되어 현재의 안락함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게 해준다.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숙식이었다. 입에 맞지 않는 현지 음식, 난방 시설이 전혀 안 되어 있는 숙소, 코 고는 사람과의 동침, 너무 추워 손이 곱은 상태에서의 짐 싸기, 일행 30명이 하나의 변기를 번갈아 사용해야 하는 불편함 등이 나를 괴롭혔다. 우리가 자주 먹는 김치 한 조각, 고추장 한 숟가락, 라면 국물 등이 얼마나 맛있고 입맛을 돋우는 음식인지 새삼 느꼈다. 간천엽, 갈매기살, 막걸리 같은 좋아하는 메뉴는 포기하더라도 한국인은 한국 음식을 먹어야 산다. 오죽하면 ‘한국인 고문하기’에 ‘라면 먹을 때 김치 안 주기’가 들어 있을까. 한국은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천국이다.
내 집은 그야말로 보금자리다.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이다. 날씨가 추울 때 히터 스위치만 올리면 방이 금세 따뜻해진다. 사계절에 맞는 이불을 덮으면 쾌적한 잠을 잘 수 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냉장고 문만 열면 된다. 화장실도 깨끗하고 샤워까지 하고 나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TV만 켜면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즐비하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다. 집을 떠날 때는 이런 안락함과 일시적인 이별을 해야 한다. 히말라야 트레킹하면서 TV도 못 보고, 고산병 때문에 씻지도 못하고, 당구도 못 치고, 술도 못 마시고, 휴대폰은 아예 꺼두었다. 물론 그 덕분에 건강에는 도움이 됐다.
히말라야에서는 아침 먹고 걷고, 점심 먹고 걸었다. 하루 8시간을 걷는 8박 9일간의 트레킹이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총 23만 보, 거리로는 100km, 해발 4130m까지 오르는 힘든 여정이었다. 체중이 3kg이나 줄었다. 마라톤이나 댄스 대회에 나가면 3kg 정도는 금세 줄지만 다시 원래 몸무게로 돌아온다. 그런데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고 돌아온 후에는 매일 고기를 먹고 포식하는데도 체중이 늘지 않는다. 트레킹하기 전 볼록했던 아랫배가 홀쭉해졌다. 이제는 정시에 식사를 안 하면 뱃가죽이 등에 붙는 느낌이다. 허벅지 뒤쪽에도 근육이 생겼다. 엉덩이도 탄탄해졌다. 그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붙지 않던 근육이 생긴 것이다. 이 근육은 계단을 오를 때 큰 도움이 된다. 오르막에도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발걸음이 가볍다. 앞으로 10년쯤 내 체력이나 건강 유지에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다.
얼마나 버틸지 모르지만, 다시 몸이 근질근질하면 어딘가로 또 떠날 것이다. 이번 트레킹에서 말썽이 될 뻔했던 낡은 등산화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도 몰래 꿈틀거리는 새로운 여정에 대한 준비로 보인다. ‘히말라야에 갔다 온 사람’이라는 호칭이 따라 붙으며 마음도 겸손해졌다. 그곳에서 태고의 대자연을 접하고 돌아오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다. 높은 준령의 설산은 수억 년을 그대로 버티고 있는데 인간은 100년도 살지 못한다.
1월 초 히말라야 트레킹을 할 때 가장 걱정했던 일은 고산병이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4130m. 내 생애 가장 높은 곳에 도전하는 등산이라서 고산병에 대해 미리 알아봤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전문 산악인과 젊은 의사가 고산병으로 죽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히말라야에 간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말렸다. 고산병으로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가지 않겠다고 통보를 했는데 더 늦으면 정말 못 갈 것 같아 결국에는 다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트레킹을 하고 저녁에 롯지에 도착하면 할 일이 없었다. 저녁식사 후 8시에 취침을 해서 다음 날 오전 6시에 기상했다. 무려 10시간이나 잤다. 한국에서는 평소 6시간 정도 자는데 그 시간에 비하면 긴 잠이다. 그러나 트레킹이 워낙 힘들다 보니 잠자리에 들면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첫날 밤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큰형님 꿈을 꿨다. 죽은 큰동서도 꿈에 나타났다. 세 사람 모두 저 세상으로 간 사람들이라서 기분이 찝찝했다. 죽을 때가 되면 저승으로 먼저 간 사람들이 부른다는 얘기가 생각 나 잠을 떨쳐내고 일어나 앉기도 했다. 최종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가 가까워오자 기대감과 두려움이 앞섰다. 처음 가는 곳이라 설렘도 있었지만 고산병 걱정도 돼서 신경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현지 가이드는 고산병에 걸릴지는 미리 알 수 없고 끝까지 올라가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다만 고산병 예방을 위해 샤워는 물론 머리도 감지 말라고 조언했다. 잘 때도 털모자를 쓰고 머리를 따뜻하게 하라고 했다. 트레킹할 때마다 땀을 비 오듯 흘렸지만 일주일 동안 씻지 못했다. 몸이 근질거리고 답답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물티슈로 간편 세수를 하고 면도는 아예 포기하니 편하기도 했다.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해서 하루에 2ℓ짜리 병에 든 물을 다 마셨다. 막걸리나 맥주를 마시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다음 날 행보를 위해 그럴 수 없으니 아쉬웠다.
최종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찍고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서 자던 날이 최악이었다. 사람들 얼굴이 풍선처럼 부었고 가져간 커피믹스 봉지도 부풀었다. 저기압 탓이었다. 머리가 아프다는 사람, 어지럽다는 사람, 입맛이 없다는 사람, 똑바로 걷지 못하겠다는 사람, 소화가 안 된다며 체면 불구하고 방귀를 뀌는 사람 등 다양한 증세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고산병은 보통 해발 2400m 이상의 높이에서 발생한다는데 트레킹 3일 차에 3000m급 푼힐 전망대에 올랐을 때도 괜찮았다. 높은 곳에서는 산소가 부족해 호흡수가 늘어나고 혈액의 점성도 떨어져 혈액이 산소를 신체 곳곳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남성 발기 부전 치료약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 뇌와 뇌를 둘러싼 뼈 사이에 공간이 생긴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나이 때문에 제일 걱정했던 최고령자가 가장 팔팔했다.
1월 6일부터 20일까지 네팔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왔다. 전남불교환경연대가 주관하고 청소년 13명이 포함된 총 27명 팀에 나도 합류한 것이다. 목표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등정이었다. 8박 9일간의 일정에 네팔 수도 카트만두와 제2의 도시 포카라 관광도 포함되어 있었다.
네팔은 한국과 3시간 15분 시차가 나는 나라다. 남한보다는 약간 크고 인구는 약 3000만 명이다. 세계 10대 최고봉 가운데 8개의 봉우리를 보유한 산악 국가다. 히말라야에서는 해발 7000m가 넘지 않으면 ‘마운틴(mountain)’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다. 심지어 세계 3대 미봉으로 불리는 마차푸차레도 피크(peak)로 불린다.
8박 9일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은 비행기를 타고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이동하고 다시 버스로 2시간 만에 당도한 나야풀에서 시작되었다. 첫날부터 고전이었다. 4시간짜리 코스였는데 돌계단으로 된 오르막을 오르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숙소에 돌아와 땀에 젖은 옷을 말려봤으나 습도가 높아 귀국하는 날까지 마르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7시간을 걸어 고라파니까지 갔다. 계속 오르막 돌계단이 나왔고 소똥, 말똥이 마구 방치되어 있어 냄새가 진동했다. 이날부터 체력 미달로 탈락자가 한 명 나왔다. 끝없이 이어지는 돌계단, 등에 진 짐이 부담스러웠다. 원래 짐을 날라주는 포터를 2인당 한 명씩 고용했는데 포터가 가지고 가는 짐 외에도 개인이 지고 가야 할 짐이 있었는데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날씨 또한 한국의 늦가을 정도의 기온이라 내복을 입은 사람들은 진땀을 빼며 고전했다.
3일 차에는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해 푼힐 전망대에 올랐다. 우리는 이미 3000m 고도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때 가장 걱정하던 고산병 증세가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목적지인 4130m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갈 수 없다고 했다. 샤워도 하지 말고 특히 머리를 따뜻하게 유지하라고 했다. 샤워는 물론 세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털모자를 쓰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물티슈로 눈곱만 겨우 닦아내는 고양이 세수를 했다. 남자들은 아예 면도를 포기했다. 자외선 차단제도 땀이 워낙 많이 나서 소용없었다. 무엇보다 날마다 땀에 젖어도 목욕을 못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4일 차에는 타다파니에서 촘롱을 거쳐 시누와까지 6시간, 5일차에는 도반, 히말라야 롯지, 데우랄리까지 6시간을 걸었다. 길도 가파랐지만 데우랄리는 해발 3150m라서 고산병을 적응하는 구간이었다. 도반부터는 눈길이었다. 아이젠 없이는 걸을 수 없는 겨울 날씨에 진눈깨비까지 내려 길이 사라지기도 했다.
6일 차는 디데이였다. MBC로 불리는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해발 3700m), ABC로 불리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해발 4130m)까지 갔다가 다시 마차푸차레 캠프로 돌아와 숙박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입구에는 트레킹 완주 축하, 환영 간판이 있었다. 그 위쪽으로 故 박영석 대장과 히말라야에서 숨진 산악인들을 추모하는 묘비가 있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가 마치 서울의 인왕산처럼 마음만 먹으면 올라갈 수 있을 것처럼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안나푸르나는 8091m, 마차푸차레는 6993m이다. 전문 암벽 등반 기술이 필요한 구간이다. 고산병 증세가 여러 사람에게서 나타났다. 두통에 심하면 구토 증세까지 보였다. 소화도 안 되어 방귀도 자구 뀌게 된다. 약을 먹는 사람도 있었지만, 가이드 말로는 소용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날은 긴장이 많이 됐다 기대감과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신령한 산으로 쉽게 등정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마차푸차레가 눈앞에 다가와 있고 그 아래 양쪽으로 눈 덮인 산들과 계곡을 보고 있자니 태고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설산의 한기와 찬바람은 이불 안쪽까지 뚫고 들어왔다.
7일 차부터는 하산을 했다. 밤부까지 내려온 뒤 8일 차에는 촘롱에서 갈림길로 지누단다까지, 9일 차에는 나야풀까지 매일 8시간을 걸었다. 8박 9일 동안 우리는 약 23만 보, 100km를 걸었다.
히말라야는 여러 산이 겹쳐 있다. 그래서 산 하나를 넘어가려면 계곡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그다음 산을 올라야 한다. 당연히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반복되었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보면 또다시 급경사로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했다. 그마저 돌계단은 우기에 홍수와 산사태가 자주 없어진단다. 도반까지는 돌계단이 많지만 그 뒤부터는 자연스런 흙길이다. MBC에서 ABC까지는 왕복 4시간 코스. 양옆에 트인 계곡이 있어 분위기가 호젓했다.
68세의 나이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를 완주했다. 이 코스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모두 말렸다. 체력적으로도 무리일 뿐 아니라 특히 고산병이 위험하다고 했다. 그러나 위험한 상황도 없었고 고산병 증세도 겪지 않았다. 평소의 체력만으로도 젊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같이 행동할 수 있었다. 시니어의 버킷리스트에 히말라야 트레킹이 들어 있어도 소망일 뿐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 뿌듯한 마음으로 버킷리스트 항목 하나를 지운다. 탄탄해진 무릎 위 근육과 허벅다리 뒷 근육을 만져본다.
숙박과 숙식
롯지(Lodge)는 우리나라 민박집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숙박 시설이 열악하다. 샤워하기가 어렵다. 더운 물을 쓰려면 200루피(한화 2000원) 정도 내야 하고 방은 난방이 안 된다. 싼 건축 자재로 만들어진 건물이라 문도 틀어져 있어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침낭만으로는 추위를 이길 수 없다. 수단껏 이불을 구해왔고 150 루피 정도에 뜨거운 물을 사서 물통과 핫팩을 안고 자야 했다. 식사 메뉴도 다양하지 못해 전통 음식인 달 바트를 자주 먹었다. 돈을 더 주면 한국 라면과 밥을 먹을 수 있다. 김치찌개 등 한국 음식을 파는 롯지도 있다.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좌식 변기라 불편했다. 휴대폰 충전과 와이파이를 사용할 때도 100~200루피의 돈을 받는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롯지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성수기에는 예약 없이는 숙박도 어렵다. 독방도 있지만 대부분 한 방에서 4~6명이 자야 한다. 보통 6시에 저녁식사를 마치지만 특별히 여가시간을 즐길 거리가 없어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자는 경우가 많다.
복장
1월의 날씨이지만, 카트만두는 낮 기온이 약 20℃나 된다. 그러나 고산에서는 영하 15℃까지 떨어지므로 옷을 다양하게 준비해야 한다. 아침시간에는 손이 곱을 정도로 춥고 트레킹을 하다 보면 땀이 나서 하나씩 벗게 된다. 포터가 짐을 날라주지만, 포터 짐에 더 이상 넣을 공간이 없으면 나머지 짐은 스스로 메고 가야 한다. 기온 편차가 심해 여름옷에서 겨울옷까지 갖춰야 하니 짐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포터는 여러 사람 짐을 합쳐서 지고 가기 때문에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은 가져가면 안 된다.
동경
몇 달 전 ‘6월 백두산 여행단’에 자리가 있다는 제보를 듣고 곧바로 예약했다. 백두산은 늘 마음속 버킷리스트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백두산에 가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여행단을 따라가기로 확정한 뒤 몇 달 동안 어서 빨리 백두산 등정 날짜가 오기를 기다렸다. 백두산은 어떤 모습일까, 천지를 보면 어떤 감흥이 있을까, 출발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흥분이 됐다. 정상에 오르면 신명한 기(氣)라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중국과 북한을 통해야 갈 수 있다. 최근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어 금방 왕래가 성사될 것처럼 분위기가 급변했지만,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지는 아직 요원한 일이다. 안타깝지만 중국을 통해서라도 갈 수 있어 그래도 다행이다. 우리 땅인데 중국이 자기네 땅이라면서 금을 그어놓아 속이 아프다. 우리가 주권을 잃었던 시기에 일본과 중국이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맺은 ‘간도 협약’으로 중국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백두산은 2750m의 고산이다. 그래서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을지 고민한 적이 있다. 고산병도 걱정되었다. 아직까지 그렇게 높은 산은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코스는 천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다 있다. 이번에는 중국 땅을 통해 올라가는 서파와 북파 코스에 도전했다. 백두산 정상에 올라도 천지를 보기가 어려우니 날짜와 코스를 바꿔 두 번 기회를 갖자는 것이다.
등정 첫날 - 서파 코스
중국 땅에 도착한 지 사흘째. 드디어 백두산에 올라가는 날이다. 먼저 서파로 올라간다고 했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셔틀 버스로 중턱까지 가서 거대한 건물의 산문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1440개 계단을 오르는데 비가 더 쏟아져 우비를 입고 우산까지 써야 했다. 정상에 오르니 넓은 전망대가 있었다. 그런데 천지 쪽은 짙은 안개로 아무것도 안 보였다. 궂은 날씨가 원망스러웠다.
현지 사진사가 맑은 날 천지 배경 사진과 얼굴 사진을 합성해서 팔고 있었다. 백두산에 정상에 오른 것만으로 만족하고 하산해야 했다. 한반도 최고봉이라 해서 상당한 고생을 각오했는데 중턱까지 버스로 올라가서 그런지 한편으로는 싱거운 면도 있었다. 호텔로 돌아온 뒤에 로비에 걸린 대형 천지 그림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내일도 천지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아쉬움에 그렇게라도 위안을 삼은 것이다. 가이드는 ‘천지를 보려면 5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 가능하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백 번 올라가야 두 번 천지를 볼까 말까 할 정도로 어렵다’는 말도 전해진다 했다. 그러면서 내일 북파 코스로 올라가니 천지를 보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라고 했다. 그만큼 천지는 신명한 존재라는 설명이었다.
등정 둘째 날 - 북파 코스
북파 코스로 도전하는 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화창하게 맑았다. 오늘은 천지를 꼭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가이드는 천지가 워낙 고산이라 올라가봐야 천지를 볼 수 있을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너무 오만을 떨거나 장담을 하면 부정 탈 수 있으니 겸손하게 결과를 기다려보자는 분위기였다. 북파 코스는 전세 버스에서 셔틀 버스로 갈아타고 다시 10인승 봉고차로 갈아탄 뒤 거의 정상까지 지그재그로 운전하면서 가도록 되어 있었다. 가이드는 봉고차를 타고 가면서 숲 사이로 정상 부근이 보일 때마다 오늘은 천지를 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산 중턱쯤에서 전망대가 깨끗하게 보였는데 그렇게 보이면 틀림없이 천지를 볼 수 있을 거라며 격려했다.
그러나 정작 정상에 오르니 하늘은 쾌청한데 묘하게도 천지 쪽은 짙은 안개에 완전히 가려 있었다. 그런 풍경도 참으로 신묘하게 보였다. 세찬 바람을 참으며 막막한 심정이었지만 기다려봤다. 줄지어 천지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간간이 함성을 질러대면 그쪽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안개는 잠깐씩만 옅어졌고 그 순간도 수시로 변했다. 찰나에 천지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필자도 어렴풋이 본 것 같기는 한데 뚜렷이 본 것이 아니었다. 봤다는 확신은 없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너무 간절한 마음이 반영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천지를 보라고 주어진 한 시간을 다 소비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집합 장소로 내려가려는데 일행들이 중간에서 필자를 잡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는 아쉽다고 했다. 오늘 천지가 보일 가능성이 높으니 점심은 물론 후속 스케줄을 포기하고서라도 더 기다려 꼭 천지를 보고 가자는 권유였다. 말은 안 했지만 모두들 천지를 꼭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 천지여!
그렇게 10여 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앞줄에서 사람들이 “우와~” 하며 함성을 질렀다. 천지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뛰어올라가 보니 과연 천지가 앞에서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짙게 가려져 있던 안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마치 극장 커튼처럼 걷히면서 천지의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끔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눈앞에 펼쳐진 고고한 자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검은 물결, 그리고 그 뒤에 병풍처럼 펼쳐진 고봉들 위에 아직 남아 있는 잔설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할 말을 잃고 한동안 눈앞에 펼쳐진 천지를 바라봤다.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첫날 정상에서 무난하게 천지를 볼 수 있었다면 이런 감동은 밀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날도 날씨가 맑아 올라가자마자 천지가 보였다면 기쁨이 덜했을 것이다. 날씨가 화창한데도 천지 쪽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어 그토록 애를 태우던 천지였다. 한 시간이나 기다려도 여전히 꿈쩍 않던 천지였다.
그런데 천지 보기를 거의 포기하고 내려가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극적이었다. 그래서 더 감동적이었다. 천지는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 감탄스러운 마음에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미친 듯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내 마음속 버킷리스트 하나가 지워지는 날이었다. 내려오는 길, 거대한 장백폭포와 계란을 삶아 먹을 수 있는 온천지대를 둘러봤으나 천지에 온몸의 감각을 빼앗겨버린 뒤라 어떻게 봤는지도 기억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자연을 마주하는 일은 거울을 보는 일과 같다. 자연이 거대하고 단순할수록 내 안의 껍데기는 사라지고 알맹이만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곳에서 느끼는 나는 아주 작고 또한 아주 크며 힘없고 미약한 존재다. 동시에 우주를 포함한 자연이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의 강렬함을 잊을 수 없다. 여행이란 교실에서 배운 지식들을 현장에서 직접 느끼고 체험하는 시간이 아닐까. 많은 이의 버킷리스트인 우유니(Uyuni). 잘 알려진 소금사막과 바람이 만들어낸 놀라운 기암괴석,
붉은 빛깔의 호수, 안데스의 희귀동물 라마까지 신비함이 가득한 곳이다. 새롭고 아름다운 그 세계로 떠나보자.
해발 3660m,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 ‘라파스’
볼리비아는 남미의 가장 가난한 나라이지만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모험심 많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꼭 한 번 가보고 싶어 하는 꿈의 여행지이기도 하다. 우유니 사막에 가려면 먼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로 들어가야 한다. 볼리비아의 헌법상 수도는 수크레이지만 실질적인 행정수도는 라파스로 ‘평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멀리서 해발 3660m에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 오색 성냥갑으로 만든 산처럼 보인다. 대표적인 사가르나가 거리 골목에는 안데스 특유의 패브릭과 장신구들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재래시장은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안데스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모자를 사서 쓰고 나니 금방이라도 빗자루를 타고 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부풀린 치마에 중절모를 쓰고 등짐을 진 컬러풀한 의상의 인디오 여성들 모습에서는 이국적인 향기가 느껴진다. 높은 지대라서 모든 길이 언덕처럼 되어 있어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지만 거리마다 가득한 상점들과 사람들 보는 재미에 힘든 줄도 모른다.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한 ‘마녀시장’
사가르나가에서도 가장 유명한 골목은 ‘마녀시장(Witch Market)’이다. 이곳엔 말린 라마의 태아와 향료들이 기묘한 냄새를 풍기며 진열되어 있다. 온갖 색상의 돌과 장식품을 작은 병에 담아 행운의 상징으로 팔기도 한다. 남미 대부분의 나라가 그러하듯 이곳 또한 스페인이 전파한 천주교가 안데스의 전통적 제의와 만나 독특한 형태로 발전되었다. 하지만 토속신앙도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천주교도인 인디오들은 하나님께 중요한 소원을 빌 때 살아 있는 라마를 잡아 바치는데, 이때 말린 라마 태아를 올리기도 한다. 온갖 허브와 목각, 희귀한 진열품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빗자루를 탄 마녀가 나타나 마법을 부릴 것 같다. 이곳 골목은 뭔가 음험하면서도 삶의 비밀을 들킬 것 같은 으스스함이 함께 느껴져 색다른 감흥이 일어난다. 1549년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산 프란시스코 성당과 레스토랑, 전통 공예품을 파는 상점들, 여행사들이 즐비한 좁은 골목들은 여행자들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제공해준다. 라파스에 머무는 동안 시간이 허락된다면 달의 계곡(Valle de la luna) 투어를 떠나보자. 달 모양과 흡사하다고 해서 달의 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은 마치 화성에 온 듯한 느낌을 갖게 해줄 것이다.
푸른 하늘과 맞닿은 소금사막 ‘우유니’
볼리비아 남서쪽, 해발 약 3600m에 자리 잡은 우유니 사막(Salar de Uyuni)은 남미를 대표하는 매혹적인 여행지다. 원래 바다의 땅이었던 우유니는 대륙붕의 충돌로 바다 아래의 땅이 하늘 가까이 솟구쳐 오르면서 만들어졌다. 고지대의 공기가 건조해 시간이 흐르면서 바닷물이 증발되었고 이로 인해 생겨난 소금평원 우유니는 언제 가도 아름답지만 특히 12~2월의 우기 때 가면 비가 고인 물에 푸른 하늘이 반사되어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나기도 한다. 서울과 경기도를 합친 것보다 넓은 면적의 거대한 소금사막을 사륜구동차를 타고 가로질러가다가 다른 행성에 착륙이라도 한 듯 소금사막 한가운데 발을 내딛었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으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사막의 풍경 앞에서 모두들 카메라 셔터를 눌러가며 인생샷 한 장이라도 건져보기 위해 바쁘다. 소금사막의 광활한 풍경 앞에 서면 삶의 가장 소중한 것들이 떠오른다.
2박 3일의 우유니 사막 투어가 가장 인기
우유니 사막 투어는 초입의 작은 광산마을 포토시에서 시작한다. 이곳에서 사람을 모아 1일 투어, 2박 3일 투어 등 다양한 투어를 한다. 시내에는 많은 여행사가 있다. 경쟁이 심한 만큼 몇 곳을 비교해서 선택하는 것이 좋다. 길이 험해 사륜구동차를 이용해야 하며 투어 비용은 한 대를 기준으로 책정되므로 함께 투어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비용은 낮아진다. 우유니 사막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려면 2박 3일 투어가 좋다. ‘우유니’ 하면 대부분 하얀 소금사막만 생각하는데, 기암괴석으로 가득한 사막 지대와 플랑크톤 작용으로 인해 붉은 빛을 띠는 신비로운 호수, 눈 덮인 산, 수많은 플라밍고를 볼 수 있는 호수까지 희귀한 풍경이 가득하다. 또 소금호텔을 둘러본 후 눈부신 사막 한가운데 앉아서 맛보는 라마 스테이크의 맛은 잊을 수 없다. 조금 전 귀엽다고 쓰다듬어주었던 라마가 입속으로 들어가는 상황은 조금 께름칙하지만 그토록 부드러운 고기는 태어나 처음 맛보는 진미였다.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온천욕
덜컹거리는 지프를 타고 뜨거운 태양 아래를 달리는 동안 바라보는 창밖 풍경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바람이 깎은 예술조각들이 가득한 협곡과 붉은 빛깔의 신비로운 호수를 지나 무리지어 날아오르는 플라밍고를 만날 때까지….
이토록 짧은 기간에 신비로운 풍광을 흠뻑 경험할 수 있는 곳도 드물다. 변화무쌍하고 이국적인 향기를 열린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준 건 함께 차를 타고 2박 3일 동고동락한, 칠레와 독일에서 온 친구들이다.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할 때는 국경이나 언어 장벽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칠레에서 온 친구는 어디선가 커다란 타조 알을 주워와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여행 마지막 날, 칠레 국경을 넘기 전에 만난 노천 온천은 축복이었다.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물도 잘 나오지 않는 곳에서 씻지도 못한 채 다니다가 대자연 속에 거짓말처럼 준비되어 있던 따스한 온천을 만나자 모두들 앞뒤 재지 않고 옷을 벗어던지며 뛰어들었다.
볼리비아의 자연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곳곳에 반짝이는 풍경이 많다. 팀 케일은 ‘나를 유혹한 낭만적인 곳들’이라는 책에서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먼 곳까지 가는 색다른 모험을 꿈꾸었다. 이런 꿈은 가슴 설레게 하는 꿈 아니었는가?” 하고 묻는다. 그의 말처럼 그 시절처럼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고 있다면 지금 당장 떠나야 한다. 안 그러면 영원히 떠나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이루지 못한 꿈을 아쉬워하며 자신에게 큰 죄를 저질렀다며 안타까워할지도 모르니까.
travel tip
항공>> 한국에서 볼리비아 라파스로 가는 항공편은 미국과 페루를 경유한다. 라파스에서 우유니는 국내선 항공이나 버스를 이용한다. 우유니 마을에 있는 여행사를 통해 다양한 사막투어에 참여할 수 있다. 당일치기로 소금사막을 즐기는 1일투어와 우유니를 출발해 칠레 북쪽의 사막도시 산페드로데 아타카마로 가는 2박3일의 투어가 인기가 좋다.
비자>>
볼리비아는 여행시 비자가 필요한 나라다. 여행비자의 경우 30일 단수비자가 발급된다. 한국에서 볼리비아 영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아 출국할 수도 잇지만 비용이 비싼 편이다. 라파스 국제공항으로 입국시 한국에서 준비하는 것보다 저렴하고 간편하게 비자를 받을 수 있다. 남미의 다른 나라를 거쳐서 볼리비아로 들어간다면 페루 쿠스코영사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영사관, 브라질 상파울루 영사관, 칠레 산태아고 영사관 등에서 무료로 발급이 가능하다.
고산병>>
해발3600미터에 위치하고 있어 간혹 고산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지만 라파즈에서부터 오는동안 어느정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유니에서 고산증을 호소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산병은 낮은 지대에서 해발 2000-3000미터 이상의 고지대로 이동했을 때 산소가 희박해지면서 생기는 신체반응으로 피로, 두통, 호흡곤란, 체온저하 등이 있다. 대처방법은 낮은 지대로 이동하는 가장 좋으며, 물을 충분히 마시고, 천천히 걷는 것도 도움이 된다.
세계 일주 여행을 위해 긴 고민 끝에 32년간 다니던 직장에서 명예 퇴직한 아버지 정준일(59)씨. 포병장교 전역 3개월 전, 갑작스런 아버지의 세계 일주 제안에 진행 중이던 취업 전형까지 중단하게 된 아들 정재인(29)씨. 가장으로서, 취업준비생으로서 장기 여행은 많은 것을 내려놓는 담대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무언가를 잃지는 않을까? 후회는 없을까? 걱정 반, 설렘 반으로 떠난 200일의 세계 일주에서 돌아와 부자는 알게 됐다. 그때의 근심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 아버지 정준일
32년간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문득,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본 적이 없다는 회의감에 평소 꿈꿔왔던 세계 일주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현재는 기타 연주, 맛집 탐방 등 건강한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다.
△ 아들 정재인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꼰대’ 아버지의 제안으로 얼떨결에 세계 일주를 시작한다.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며 언젠가 본인도 미래의 아들과 세계 일주를 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기획 중이다.
◇ 정준일·정재인, 우리 부자의 여행은?
준비 기간 2개월(이후에는 여행지에서 그때그때 준비)
여행 루트 서유럽-터키-동유럽-북유럽-북/중/남미-오세아니아-동남아시아-인도-아프리카
여행 콘셉트 친해지길 바라!
역할 분담 아버지) 경비 총무와 숙소정리, 아들) 아버지의 보좌관이자 안전책임자
여행 경비 약 6000만원 (아버지 퇴직금 + 아들 장교복무 봉급)
다음 여행 내년에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며느리가 함께하는 이집트 여행 계획
Intro>>우리 과연 친해질 수 있을까?
Q. 세계 일주 여행 파트너로 아내나 친구가 아닌 ‘아들’을 꼽은 이유
아버지: 친구나 아내, 딸과 여행을 가는 것도 좋겠지만 장기간 여행할 수 있는 체력과 외국어 실력을 겸비한 아들과 함께하는 게 가장 마음 편하리라 생각했죠. 주변 사람들을 보면 오랜 시간 함께 여행하면서 생긴 마찰로 평생 보지 않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아들과 함께라면 혹여나 그런 서운한 감정이 생기더라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사실 여행을 가기 전 아내는 명예 퇴직을 반대했지만, 결정을 내린 후에는 고생했다면서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Q.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
아들: 처음 아버지의 제안을 받고 깊은 고민 끝에 거절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얼마 후, 가장 친한 후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와 소주 한잔을 하게 됐죠. 후배는 아버지에게 해드리지 못한 것이 많다며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이라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다음 날 바로 아버지께 함께하겠다고 말씀드렸죠.
Q. 여행을 앞두고 기대했던 점과 우려스러웠던 점
아버지: 여행 전, 그동안 영상과 책으로만 접했던 전 세계의 자연환경과 건축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죠. 막상 오랜 시간 한국을 떠난다 생각하니 건강이 우려스럽고, 음식이 입에 안 맞아 쫄쫄 굶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서더라고요. 여행 중 이탈리아에서 더위를 먹어 앓아눕고, 페루 쿠스코에서 고산병으로 고생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다행히 크게 몸이 아프거나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았어요. 처음엔 현지 음식만 먹겠다 다짐했지만, 한국 음식을 먹지 않으니 도저히 힘이 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세계 각지에 있는 한국 음식점을 애용했죠.
아들: 모두가 한 번쯤은 꿈꾸는 세계 일주를 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들떴지만, 아버지와 여행을 해야 한다는 부담과 어색함을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행 초기에는 아버지와 특별히 할 말도 없었고, 아버지의 잔소리에 괜히 왔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 터키 파묵칼레의 노천 온천탕에서 아버지와 오랜만에 목욕을 하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마음을 열게 됐습니다.
Travelling>> 어리기만 했던 아들, 어느새 든든한 버팀목이 되다
Q. ‘역시 아들이랑 오길 정말 잘했다!’라고 느낀 순간
아버지: 여행 중 만난 사람들(외국인 포함) 대부분이 아들과 세계 일주를 하는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각종 예약, 교통 티켓, 경로를 알아서 잘 짜는 아들이 참 든든했어요. 그럴 때마다 ‘아들이랑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Q. 중년 여행복의 상징인 아웃도어가 아닌, 아들이 코디해준 옷을 입고 다녔다는데
아버지: 아들 덕분에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옷들을 마음껏 입고 다녔어요. 처음에는 그런 옷들이 너무나 어색하고 남사스러웠는데, 이왕 여행 와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워보기로 한 이상 나부터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아들이 권하는 옷들을 입어봤어요. 사람들이 멋지다며 엄지를 치켜 올려줬고, 사진으로 봐도 괜찮은 제 모습을 보며 점점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지금도 그때의 패션만큼은 아니지만 종종 가벼운 여행을 할 때면 헌팅캡을 쓰곤 합니다.
Q. 아버지와 아들의 여행이기 때문에 벌어진 문제들
아버지: 내게 아들은 늘 어리게만 보여서 이것저것 관심을 보인 것인데 오히려 그것을 잔소리로 여겼는지 참견하지 말라 해서 좀 서운했습니다. 결국 아들을 자기주도적인 결정 아래 책임을 질 줄 아는 어엿한 성인으로 인정하고 모든 걸 믿고 맡기기로 했죠.
아들: 예전의 권위적인 모습 속 말이 통하지 않는 아버지와의 여행이었기 때문에 의사소통 측면에서 문제들이 많았어요. 원체 깔끔한 성격의 아버지가 숙소에 들어올 때마다 어엿한 성인인 제게 잔소리(빨래, 양치질, 정리정돈 등)를 해대셔서 방을 따로 쓰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남들과 여행할 때보다 두 배 세 배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어 매일 밤을 새워가며 아버지에게 적합한 여행 일정을 짜드리곤 했죠.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쳤지만, 좋든 싫든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가끔 “아버지와 여행하려니 힘들지? 고생이 많다”라는 아버지의 말이 큰 힘이 됐죠.
Q. 아들이 아버지에게 의지했던 부분은?
아들: 저는 성격이 급하고 계획적이라 무언가 일정에 어긋나는 일이 생기면 스트레스를 받곤 해요.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연속인 배낭여행에서 제가 초조해하거나 힘들어할 때 아버지께서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라며 정신적으로 안정시켜주셨죠. 청결하신 아버지께서 늘 위생에 신경 쓰신 덕분에 깨끗한 숙소에서 묵고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Outro>> 아들에게 아들이 생긴다면? 세계여행 강추!
Q. 만약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아버지: 여행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나를 둘러싸고 있던 고정관념과 고집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당연히 ~해야지’, ‘무조건 ~다’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라며 너그럽게 넘어가는 성격으로 변했죠.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퇴직한 베이비붐 세대들이 겪는 우울감을 느꼈을 거예요. 여행을 다녀온 후 태어나 처음으로 책도 써보고, 인터뷰도 해보고, 방송도 출연하고, 그렇게 새로운 경험들과 연계해 제3의 인생을 시작하는 기분이에요. 여행이 아니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꿈만 같은 일들입니다.
아들: 우선 아버지가 굉장히 편해졌습니다. 예전의 수직적인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해서 어떤 대화도 편하게 나눌 수 있게 됐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편해지니 예전엔 ‘꼰대’라고 생각했던 아저씨들의 행동과 말들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됐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취업 빙하기인 요즘, 아버지와의 세계 일주를 좋게 봐주신 인사 담당자 덕분에 좋은 직장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부자간의 관계도 예전처럼 서먹했을 테고, 취업도 어찌 됐을지 모릅니다.
Q. 처음은 늘 아쉬운 법! 다시 여행을 떠난다면?
아버지: 너무 체면을 차리느라 외국인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하지 못했고, 액티비티도 참여하지 않았어요. 다시 여행을 간다면 나이와 체면 생각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외국인들과 소통하고 투어 활동도 해보고 싶습니다.
아들: 계획을 너무 타이트하게 짜서 여행 중 여유시간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다시 여행을 떠난다면 휴식시간을 통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요가체험, 템플스테이 등)을 갖고 싶습니다.
Q. ‘아들도 아들의 아들과 여행하길 바란다’고 말한 아버지, 그때의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
아버지: 아들이 나중에 손자를 낳아서 여행을 하게 된다면 지금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내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아들에게 부족한 아버지였지만, 아들은 손자를 더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멋진 아버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 나는 가정을 위해서 나부터 엄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시대가 변했기에 아들은 아이와 더 많이 소통하는 아버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아버지이고 아들은 늘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내 기준으로만 자식을 바라보지 말고 너그럽게 이해하고 포용하는 아버지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