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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시의 최고 특산물은 풍기인삼이다. 매년 풍기인삼축제가 열린다. 그런데 이 축제에선 조선의 문신이자 도학자인 주세붕을 기리는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어떤 연유로? ‘풍기인삼의 아버지’랄까, 풍기인삼 재배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 바로 주세붕이다. 당시 백성들은 나라에 산삼을 캐다 바치느라 고생이 자심했는데, 이를 딱하게 여긴 주세붕이 소백산 산삼 종자를 통한 인공 재배에 성공한 뒤 기술을 보급했다.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재직하던 때의 일이다. 군수 노릇도 이쯤이면 최고봉이다.
주세붕의 명민한 행장은 또 있다. 영주시 순흥면에 조선 서원의 시초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 백운동서원은 얼마 뒤 사액서원(임금이 이름을 지어준 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변신, 마침내 영주라는 작은 고을을 사림 집합소로 띄워 올렸다. 조선 말 고종조에 이르기까지 우후죽순처럼 많은 선비를 배출했다. 그 수가 자그마치 4000여 명. 그래 오늘날까지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 불린다.
백운동서원의 후신인 소수서원은 퇴계 이황이 주도해 설립했다. 주세붕에 이어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가 1549년 조정에 편액과 더불어 서적, 토지, 노비를 하사하길 요청했는데, 명종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이듬해 친필 편액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사액서원의 효시인 소수서원이 열렸다. 입학 정원은 30명. 소수서원의 기틀을 잡아나간 건 퇴계였다. 천하의 퇴계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으니 알조다. 그는 도학(道學)의 부흥을 평생 사업으로 삼으며 수많은 저작을 쏟아낸 인물이다. ‘학문을 할수록 길이 멀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자기 검증에 엄격했다. 그러하니 서원 운영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겠는가? 학칙은 엄준해 미풍양속을 해치거나, 수신(修身)엔 관심 없고 앉으나 서나 과시(科試)에 붙을 궁리만 하는 유생은 바로 쫓겨났다.
담장 사이로 난 출입문을 들어서자 소수서원의 내경이 좍 펼쳐진다. 평편한 터 곳곳에 다수의 건축물이 있어 조선 최고의 서원다운 위용을 과시한다. 크게 보면 학문을 익히는 강학 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 공간으로 나뉜다. 자연경관에 기대어 머리를 식히며 쉴 수 있는 유식(遊息) 공간은 담장 밖 외부에 조성했다. 강학 공간의 중심 건물은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강학당으로 가장 큰 규모를 지녔다. 여기엔 ‘백운동’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소수서원의 시발이 백운동서원에 있다는 걸 잊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강학당 뒤편엔 교수들의 숙소인 일신재와 직방재, 유생들이 기거한 지락재와 학구재를 배치했다. 유생들의 기숙사는 교수들의 숙소보다 작고 낮게 지어 흥미롭다.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는 게 도리라는 암시를 담은 구조일 터다.
책을 보관한 장서각 앞뜰엔 정료대가 있다. 밤이면 관솔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힌 일종의 가로등이다. 사람들은 일쑤 서원을 따분한 곳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가만히 뜯어보라. 겹겹의 의미와 개성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소수서원의 모습은 여느 서원과 달리 자유로운 건물 구성을 했다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조선 서원들은 통상 중국식 배치법인 전학후묘(前學後廟, 앞쪽에 학당, 뒤쪽에 사당을 둠) 양식을 도입했다.
반면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 우측에 학당, 좌측에 사당을 둠) 형식을 구사했다. 아울러 건물들이 윷판에 윷가락 흩뿌려놓은 듯 헐겁게 널려 있다. 따라서 위엄을 갖춘 학문의 전당이라기보다 사적인 대저택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소수서원의 이 활달한 구조는 사액서원의 효시로 등장, 참고할 만한 어떤 범례나 전형을 전제할 여지가 없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경내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이제 냇물과 야산이 어우러진 유식 공간이다. 물 좋고 산 좋으면 정자가 필수 품목. 서원 정문 코앞에 있는 경렴정은 물소리로 귀를 씻기 좋은 정자다. 다소곳이 아담하고 소박해서 아름답다. 현판은 두 개다. 해서체 현판은 퇴계가 썼고, 초서체 현판은 퇴계의 제자이자 초서의 달인인 황기로의 글씨다. 퇴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현판 글씨를 쓰던 황기로의 붓이 파르르 떨렸다던가. 흠모하는 스승의 눈길만으로도 레이저 맞은 듯 주눅 드는 게 제자다. 냇물 건너편 둔덕엔 퇴계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는 정자 취한대가 있다. 서원 들머리에 조성된 노송 숲도 빼어난 경관 요소다. 수백 년 수령의 노거수들이 끽해야 100년 안짝을 머물다 세상을 지나가는 인간들을 굽어보고 있다. 이 노송들을 일러 학자수(學者樹)라 한다. 사시사철 푸른 솔의 기개 역시 공부감이라는 데서 붙은 별명이다. 소나무들이 서원 쪽으로 갸웃이 고개를 들이밀고 청강하는 품새를 연상해 지은 이름이라는 얘기도 있다. 학문의 바다 소수서원에선 노송도 학동으로 불려간다.
전통건축의 고전, 무량수전
이제 천년고찰 부석사를 찾아간다. 소수서원과 쌍벽을 이루는 영주시의 고품격 문화유산으로, 부석면 봉황산 자락에 있다. 산기슭을 타고 한참 이어지는 소로 끝자락에 닿자 부석사가 문득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막이 오르면서 무대가 펼쳐지듯이. 이렇게 극적으로 느껴지는 건 경사면과 구릉지가 절묘하게 배합된 터에 들어앉은 건축물의 조화미와 세련미가 매우 빼어나기 때문이다. 부석사 전각들을 일컬어 ‘한국 전통건축의 고전’이라 하는데 이게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부석사에서 천상이나 극락, 또는 서방정토를 느낀다. 미학으로 간을 친 건축적 맛과 멋을 음미하는 사이에 불교적 상상력까지 나래를 펴는 셈이다.
부석사의 수려한 전각들 중에서도 뛰어난 건 무량수전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로 추정되는 법당이다. 고풍스러운 정취가 짙게 묻어난다. 아담하고 단아한 봉정사 극락전의 구조미가 우수하지만, 건물 규모나 법식의 완성도에선 무량수전이 한 수 위다. 무량수전 불단에 모신 소조여래좌상도 걸작이다. 한국의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불상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특이한 건 불상이 봉안된 위치다. 통상 법당 중앙 정면에 불상을 두지만 이곳에선 측면인 서쪽에 있다. 이런 배치법을 취한 이유가 명확하진 않지만, 소조여래좌상을 서방정토의 부처로 추정해 서쪽을 바라보게 배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무려나 소조여래좌상의 상호에 기품과 위의가 넘쳐 눈을 뗄 수 없다. 숨소리 새어 나올 듯 입매는 생생하고, 눈은 반쯤 내리떠 그윽하다. 올려다보면 호방한 표정이고, 옆으로 보면 냉엄한데, 물러나며 돌아보자니 연민이 어린 얼굴이다. 이렇게 각도에 따라 기색이 다르지만 하나같이 가슴을 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바라보는 풍광 역시 가슴으로 들이친다. 저 멀리에서 출렁거리는 산군(山群)의 파노라마가 장엄한 화엄 세상의 축약도로 비쳐서.
김기진 영주문화원 원장
“예로부터 많은 선비가 배출된 고장”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다. 그럴만한 내력이 있다. 우선 고려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안향과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이 태어난 곳이다. 조선의 문신 주세붕이 영주에 백운동서원을, 퇴계가 소수서원을 설립해 학풍을 일으키고 수많은 선비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에 따라 선비 정신이 면면히 이어졌던 것. 김기진 영주문화원 원장 역시 선비 정신을 중심 가치로 삼고 산다.
“조선시대 영주에선 4000여 명에 이르는 선비들이 배출되었다.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영주에 살면서 지역 풍토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나쁜 짓을 삼가고, 조상과 문중에 부끄럽지 않은 처세를 하는 게 좋은 삶이라 여기는 이들에 의해 올바른 지역 정서가 형성된 측면이 여실하다. 다시 말해 영주는 살기 좋은 곳이다. 범죄 발생률도 낮다.”
김 원장은 독서 애호가라고 들었다.
“난 소백산 자락에 산다. 산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좋은 글을 읽는 일보다 더 행복한 게 없더라. 평생 무수히 많은 책을 읽었다. 덕분에 시집을 낼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했다. 2023년엔 좋은 글들을 뽑아 엮은 책 ‘산에서 보고 들은 것’을 출간했다.”
어디를 가나 과욕과 과속이 넘치는 세상이다. 영주라고 크게 다를까 싶은데.
“세상은 어지럽지만 올곧은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동네에 옳고 그름을 아는 선비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 경우 좋은 풍토가 유지될 수 있다. 영주엔 다행스럽게도 선비 정신을 존중할 줄 아는 이들이 아직 많다. 내가 아는 영주 사람들은 다들 나름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간다. 그들은 자녀 교육에도 충실하다.”
영주엔 명산 소백산이 있다. 소백산은 어떤 산이라 보나?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예부터 흉년이 들어 막막할 때 영주 사람들은 된장 한 종지 들고 소백산에 들어가 산나물을 채취해 생계를 해결했다. 소백산은 영주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물심양면으로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평등의 산이다.”
좋아하는 명문 하나를 소개한다면?
“‘겸손함은 하늘과 통한다’는 글귀를 가슴에 담고 산다. 젊을 때는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 많았다. 그런데 독서를 하며 자신을 꾸준히 다스리면서 사람이 변했다. 책이 곧 스승이었다.”
영주문화원을 통해 성취한 건 어떤 것이 있나?
“‘영주근현대사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역사는 보통 이름난 사람들 중심으로 쓰인다. 난 이름 없는 사람들의 역사도 중요하다고 봤다. 그게 아카이브 작업에 뛰어든 동기다. 2년여 동안 5만여 점의 자료를 수집해 일을 완결했다. 큰 상도 받았다.”
문화원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요소는 무엇이라 보나?
“첫째는 젊은 피의 수혈이고, 둘째는 열악한 예산 사정을 개선하는 일이다. 둘 다 난제지만.”
한동안 한 달 살기나 일 년 살기가 유행처럼 퍼졌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주를 여행해도 일주일 살기라 하듯 하루이틀을 지내도 그 지역에 스며든 여행을 선호한다. 목포에 머물면서 요즘 새로운 여행 패턴인 짧게 살아보기를 경험했다.
목포의 골목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쪽문 옆을 지나고 작은 텃밭을 지나 그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2박 3일을 살았다.
1897년 목포항 개항 이후 ‘목포는 항구다’라는 말은 지금껏 불변이다. 목포 유달산 중턱엔 가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져 있고, 그 거리를 걷다 보면 지금도 구슬픈 가락이 어디선가 들려오기도 한다. 잔잔한 바다 옆으로 갓바위가 전설을 품었고, 바닷가 마을의 저녁노을에 전율했다.
목포해상케이블카는 고하도 전망대를 거쳐 발밑으로 목포 원도심과 다도해를 짜릿하게 선사했고, 평화의 광장으로 몰려든 커플들은 밤바다에 넋을 잃는다. 목포 주변 섬 여행도 손쉽고, 해산물 노포 맛집도 지천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목포의 변화 역시 만만찮지만 빛바랜 듯 옛 발자취가 여전히 남아 있는 목포다.
북교동 예술인 골목과 옥단이길의 레트로 정서
도시의 매력은 그곳을 지키고 있는 유형무형의 것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목포는 예부터 예향이었다. 유달산을 중심으로 몇 갈래로 뻗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우리 근현대사를 이어나갔던 예인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문학의 향기가 좁은 길마다 연결되어 있고, 화가의 집도 가수 이난영 일가의 전시관도 함께한다.
목포를 대표할 만한 인물로는 대통령도 있고 유명 연예인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1930년대 초반부터 해방 무렵까지 목포에 살았던 옥단이를 빠뜨릴 수 없다. 옥단이는 이 지역 출신 차범석 작가의 작품 속 실존 인물이다. 옥단이길에 들어서면 물지게를 진 여성 캐릭터 안내판이 맞이한다. 척박했던 시절의 순박한 물지게꾼 옥단이. 목포 사람들의 허드레 물장수를 하며 좁다란 골목길 일대를 누볐던 밝고 당찬 여성이었다. 목포역에서부터 유달산 부근까지 오래된 옛집들 사이로 4.6km에 걸쳐 11개 골목의 옥단이길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처음엔 탐험하듯 걷던 길이 옥단이라는 이름의 정겨움으로 그저 푸근하다.
옥단이라는 인물을 문학 캐릭터로 세상에 내놓은 차범석 작가의 ‘작은 도서관’은 말 그대로 자그마하다. 작가의 오래된 잡지와 대본집, 희곡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도슨트가 없어도 누구나 들러서 조용히 책을 보고, QR 코드로 관광 해설과 목포 시민들의 목소리로 낭독한 오디오북을 들어볼 수 있다. 차범석 작은 도서관이 자리한 골목은 차범석길 27이다. 이 길 곳곳에서 수필가 김진섭, 문학평론가 김현, 극작가 김우진, 여성 문학을 대표하던 작가 박화성 등 문인들의 자취를 보여준다. 현재 예술인 골목이 있는 북교동은 지금의 목원동 일대지만 목포 사람들은 여전히 북교동이라 부른다.
골목 안에는 1970년대 감성을 소환하는 흑백사진 속의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도 여전히 건재하다. 개항과 함께 하루 품팔이를 하던 사람들의 계 모임으로 한때 성황을 이루었던 마인계터 골목, 그 옛날 노라노 패션학원으로 유명했던 건물이 미술관으로 재생된 모습도 보인다.
유달산 자락의 노적봉과 근대역사문화공간
북교동 예술인 골목 옆으로 조금 넓게 트인 길을 따라가 보자. 법정 스님과 고은 시인이 만났던 ‘목포 정광정혜원’을 지나게 된다. 김환기, 남농 허건, 박수근, 천경자 등 남도 출신 예술인들이 그려진 벽화가 쭉 이어지는 오르막을 오르면 곧바로 우뚝 솟은 유달산이다. 유달산을 빼고 목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지략이 떠오르는 노적봉이 언덕 위에서 맞아준다. 저편으로 목포 앞바다가 시원하다.
유달산을 내려가기 전에 들러볼 곳이 있다. 바로 옆 숲을 이룬 산 아래 1982년에 조성된 국내 최초의 야외 조각공원이다. 자연, 문화, 조각이라는 주제로 설치된 조각 작품들로, 국내 작가는 물론이고 예술성 높은 외국 조각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의외로 찾는 사람이 적어 호젓하다.
노적봉과 조각공원을 뒤로하고 유달산 저쪽 아래로는 근대역사문화공간을 비롯한 옛이야기들이 기다린다. 근대역사관 1, 2관과 일본영사관,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은옛 모습 그대로다. 또한 전시관마다 일제강점기의 수탈과 비인간적 야욕 및 잔인함을 증언하고 있다.
주변에는 일본인들이 남긴 적산가옥과 일제 잔재들이 있고, 골목마다 아픈 역사의 상흔을 만나게 된다. 목포는 호남 곡창으로 일본인들이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발걸음하는 골목마다 일본과 떼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묻어 있다. 지금은 타임머신을 탄 듯 옛날이야기를 돌아보며 거니는 역사의 거리가 되었다. 알고 걸으면 더 재미있는 목포의 골목길은 역사와 함께하기에 더 의미 있다.
하늘이 가까운 보리마당로의 골목 이야기
유난히 낡은 풍경의 골목이 많은 목포다. 유달산에 기대어 자연스럽게 형성된 마을 골목길이 감성을 품었다. 한때 넓은 보리밭이었고 보리타작을 주로 했다던 보리마당로는 현재의 서산동으로 지대가 높은 윗자락이다. 영화 ‘1987’에서 연희네 슈퍼로 알려진 서산동 골목은 좁기도 하지만 가파른 오르막이다. 영화 속에서는 연희(김태리)와 이한열(강동원)이 무심한 척 속 깊은 시국을 주고받고, 삼촌(유해진)은 조카에게 보안상 위험한 부탁을 하던 곳이다. 우리 모두에게 뜨거웠던 1987년의 이야기가 촬영된 골목이다.
이제는 인문도시 서산동 시화골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스러운 사진관이나 작은 미술관, 벽화가 그려진 오밀조밀한 골목 안의 자잘한 정서가 그곳 사람들과 하나가 된다. 다닥다닥 붙은 골목 양옆의 담벼락 사이로 주민들이 지나가며 살짝 옆으로 비켜주기도 하는 게 자연스럽다. 좁은 골목을 오르내리는 동네 사람들이 서로 인사하며 안부를 주고받으니 정겹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골목은 좁은 계단이었다가 누군가의 대문 앞이기도 하다. 가끔 고양이가 까무룩 졸다가 인기척에 놀라 도망간다. 비탈진 마을을 오르다 보면 시선 끝엔 늘 하늘이다. 하늘이 가까운 동네다.
공간의 전환, 누스테이에서 살아본 2박 3일
유달산 자락에 앉힌 보리마당로의 너른 공터에서 골목에 이르니 손바닥만 한 텃밭을 일구던 마을 사람이 반겨준다. “여기는 내비게이션에 번지수보다는 한빛교회로 치는 게 가차워요. 거기가 주차하기도 좋으니께 글루 오믄 더 편치.” 뭐라도 도움이 되려는 마음이 진심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트렌드로 떠오른 말 중 하나가 ‘워케이션’이다. 워크(Work)와 휴가(Vacation)의 합성어로, 원하는 곳에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근무하는 것을 말한다. 머무름으로 업무와 그 지역을 충분히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의 라이프스타일이다. 목포 ‘누스테이’는 인구 소멸이 심화되는 지역에서 재생 건축을 통해 거주와 일이 가능토록 했다.
새벽 잠결에 나지막한 뱃고동 소리에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도심 재생 건축으로 생겨난 목포의 숙소 ‘누스테이’는 자신만의 시간을 담은 여유로운 워케이션이 가능하다. 골목 안 서늘하도록 정갈한 2층집에 모든 게 갖추어졌다. 쉼과 일이 진행되는 공간 1층, 계단참을 밟으며 올라간 2층에선 테라스의 푸른 식물들과 함께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 바다가 보이는 발코니에선 차를 마셔도 좋고, 캠프파이어가 가능한 루프톱에선 불멍의 시간이다. 동네의 따스함이 남아 있는 공간에서 나만의 속도대로 살며 크리에이티브한 효과를 기대해볼 만하다.
한국잡지협회가 28일 국립중앙도서관 본관 전시실에서 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도서관과 ‘근현대잡지 특별전’을 개최했다.
‘근현대잡지 특별전’은 잡지협회 창립 60주년 기념 ‘잡지주간 2022’ 행사의 일환이다. 이날 개막식에는 백종운 한국잡지협회장을 비롯해 잡지주간 2022 집행위원회의 심상기 조직위원장, 이창의 부위원장, 백동민 집행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백종운 회장은 개막식 인사말에서 “잡지는 126년 역사 속에서 문화적 가치와 시대를 기록하는 매체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번 전시를 통해 당시의 문화와 생활상, 대중의 취향 등 시대의 흐름을 확인해보고, 잡지가 우리 삶에 여전히 가까이 있다는 사실과 우리 삶이 얼마나 풍부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 모두가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근현대잡지 특별전’은 ‘오늘, 당신의 잡지’라는 주제 아래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함께해온 150여 종의 잡지를 선보인다. 시대별 문화 흐름에 따라 △1부 만인의 기록, 잡지의 힘 △2부 문화를 잇는 활로 △3부 우리 삶의 종합교양 △4부 잡지 큐레이션 등 총 4부로 나눠 섹션을 구성했다.
1부 만인의 기록, 잡지의 힘(1890~1910년대)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인 ‘대죠선독립협회회보’를 포함해 ‘소년’, ‘새벗’ 등 근대 초기 잡지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소년’은 근대적인 종합 월간지의 효시로, 잡지협회는 해당 잡지의 창간일(1908년 11월 1일)을 ‘잡지의 날’로 제정했다.
2부 문화를 잇는 활로(1920~1940년대)에서는 지식과 교양에 대한 갈망이 커지던 1920년대 이후의 문화소통 창구였던 ‘학원’, ‘문장’ 등의 잡지를 전시한다. 3부 우리 삶의 종합교양(1950~1970년대)에서는 광복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부터 물질적 성장으로 교양에 대한 욕구가 충만했던 1980년대까지의 ‘샘터’, ‘뿌리깊은 나무’ 등을 만날 수 있다.
마지막 4부 잡지 큐레이션(1980년대~현재)은 디지털 기술 발달에 따른 대중의 취향과 기호를 접목한 다양한 잡지들을 소개한다. 이외 1914년에 창간된 어린이 잡지 ‘아이들보이’, 최초의 여성 잡지인 ‘가뎡잡지’, 월간 종합교양지 ‘사상계’ 등 희귀본 또한 살펴볼 수 있다.
전시기획을 맡은 문예슬 감독 겸 큐레이터는 “잡지는 역사 속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시대의 변화에 따라 문화적 가치와 역사를 기록하는 매체이다. 잡지가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일상적 생활에서도 친밀하게 스며들어 활용되길 바라며, 대중들에게 잡지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매체의 변화 속에서 미래 잡지 공존 시대를 모색하고자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개막행사 종료 후 ‘제15회 잡지 미디어 콘텐츠 공모전 시상식’이 열렸다. 올해 5월부터 8월까지 진행된 이번 공모전에는 약 300여 편의 공모 작품이 접수됐다. 심사를 통해 일반부 9편, 청소년부 11편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수상작은 12월 31일지 한국잡지정보관 내 M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근현대잡지 특별전-오늘, 당신의 잡지’는 개막식 다음날인 10월 29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열린다. 전시 프로그램은 국립중앙도서관 휴관일을 제외한 날 상시 운영된다.
언덕을 오르면 무슨 일이 기다릴까. 종로구의 그 골목으로 접어들면 거대한 고목이 중심을 잡고 있다. 권율 도원수 집터의 은행나무다. 여름이면 주변을 시원하게 할 만큼 초록이 울창하고 가을이면 온 동네에 노란 은행잎이 흩날린다는 이야기다. 오래전 살던 집을 찾기 위한 단서로 붉은 벽돌집과 바로 이 큰 나무가 있는 은행나무골 1번지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딜쿠샤의 역사를 언덕 위의 은행나무는 지금껏 지키고 있었다.
거의 100년 전 개인의 공간이 당시와 거의 흡사하게 복원되었다. 딜쿠샤는 그 시절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에 있던 저택으로 3.1 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AP통신 특파원 고 앨버트W.테일러(Albert Wilder Taylor)와 메리L.테일러(Mary Linley Taylor)부부가 살던 집이다.
두 외국인 부부의 취향이 가득 담긴 공간이 우리의 오묘한 역사의 흔적과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이야기가 깃든 딜쿠샤는 그 시절의 디테일한 분위기와 일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탈바꿈되어 공개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탄광 개발을 위해 아버지와 한국을 찾은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 출장차 일본에 갔다가 운명의 여인 메리를 만난다. 영국 출신 배우 메리와 1917년 인도에서 결혼을 하고 한국에서 신혼 생활을 하게 된다. 어느 날 한양도성을 산책하다가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행촌동(杏村洞)의 은행나무에 반한 메리가 이곳에 집을 짓고 싶어 한 것이 딜쿠샤의 시작이었다.
1923년에 정초석을 세우고 1년 만에 완성된 딜쿠샤(Dilkusha). 이국적인 이름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 희망, 이상향'을 뜻한다. 부부는 인도에서 딜쿠샤라는 궁전을 보고 그들의 스위트홈이 완성되면 딜쿠샤라 할 생각이었다. 드디어 한국에서 정착해 살면서 창 밖으로 은행나무가 보이는 딜쿠샤에 살게 된 부부는 고통스럽고 혼란했던 시기의 한국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기업인이자 연합통신 특파원으로 고종의 장례식 취재를 의뢰받았던 테일러는 기사 내용에 3.1 운동을 추가하게 된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마침 아들 브루스가 태어난다. 메리는 출산 직후 세브란스 병원 창문을 통해서 고종의 장례 행렬을 보았다고 했다. 이때 병원에 왔던 테일러는 갓 태어난 아들 브루스의 침대 밑에 숨겨진 종이 뭉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기미독립선언문이었다. 이것을 동생 윌리엄의 구두 뒤축에 숨겨서 도쿄에 가서 타전했고 마침내 뉴욕타임스에 3.1 운동 기사가 실리게 된 것이다. 이 뿐 아니라 테일러에 의해서 제암리 학살사건을 비롯해서 3.1일 운동을 제압하기 위한 일제의 각종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금광사업과 특파원으로 갖가지 일을 겪으면서 테일러 부부는 점차 조선에 깊은 애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위기가 찾아왔고 테일러는 구금되고 메리도 가택연금 상태가 되어 결국은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이 땅을 떠나게 된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캘리포니아에 상륙한 테일러는 줄곧 한국행을 꿈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1948년에 세상을 떠났다. 메리는 한국을 사랑한 남편의 뜻에 따라 테일러의 유해를 가지고 그해 한국을 찾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딜쿠샤에도 들렀다. 앨버트 테일러는 현재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아버지와 함께 잠들어 있다.
이토록 다사다난했던 역사 속의 사실을 이들이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방인이었지만 한국을 사랑했고 위험 속에서도 한국을 위한 일을 서슴지 않았던 앨버트 테일러, 마지막 안식처로 한국에서 잠들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게 테일러와 메리 부부의 딜쿠샤가 잊혀 가던 중 아들 브루스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을 찾고 싶다고 한 것이다. 그동안 소유권이 몇 번이나 바뀌고 국가 소유가 되었지만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 불릴 만큼 방치되었던 집, 한국 전쟁 후 집 없는 많은 사람들이 버려진 딜쿠샤의 공간을 쪼개서 살았다고 한다. 2006년 66년 만에 딜쿠샤를 찾은 부르스는 이것을 보고 그동안 어려운 이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주어 감사해했다고 전한다.
이후 서울시는 딜쿠샤의 복원 및 재현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특히 메리는 다재다능해서 글과 그림이 뛰어나 남겨진 많은 그림과 기록이 전시되었고 그녀의 기록이 복원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테일러 씨의 손녀 제니퍼 린리 테일러는 딜쿠샤 관련 자료 1026건을 기증했다. 2018년부터 시작한 복원 작업 끝에 역사전시관으로 재탄생되어 2021 3월에 개관에 이르렀다. (2017년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등록)
1층과 2층의 전시장은 그들이 살던 1920년대의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파티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던 1층은 거실 내부를 상세히 재현했다. 부부의 결혼과 입국, 한국생활을 보여준다. 메리의 그림이나 호박 목걸이 이야기도 전시되었다. 테일러가 메리에게 청혼할 때 준 호박 목걸이는 미국으로 추방되어 살면서 한국에서 살던 기억을 바탕으로 쓴 책의 제목이 '호박 목걸이'다. 그리고 금광 사진이나 금강산 여행을 그림과 기록으로 남긴 것들, 벽난로…. 모두 그들의 숨결이 깃든 추억들이다.
2층에는 테일러 부부가 여가를 보내는 공간이다. 영상으로 딜쿠샤의 복원 과정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전시물 중에는 메리가 한국의 주변 사람들을 그린 초상화가 인상적이었고 테일러의 언론활동 모습도 남겨져 있다. 한국의 병풍이나 고려청자, 램프나 테이블 등 동서양이 조화를 이룬 집안이 전체적으로 아름답다.
수많은 시간들을 견뎌낸 널찍한 거실의 창문으로 햇살이 환하게 들어온다. 당시에는 언덕 꼭대기 집이어서 멀리 지나가는 기차가 보이고 남산과 한강이 시원하게 들어오는 전망 좋은 집이었다는데 지금은 아파트와 건물들로 가로막혀있다. 다만 옆의 창문을 통해서 은행나무의 풍경은 고스란히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딜쿠샤는 종로구 사직터널 오른쪽 축댓길로 오르면 언덕 위의 2층 붉은 벽돌집이다. 이제는 복원되어 겉모습이 살짝 새것 느낌이 들긴 하지만 1923년부터 추방되던 1942년까지 테일러와 메리 부부 가족이 살던 100년 전의 테일러가(家)이다.
◇ 가는 길: 서울의 서대문역이나 독립문역에서 나와, 김구(金九) 선생의 사저였던 경교장(京橋莊)을 거쳐 돈의 박물관을 지나면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이 나타난다. 행촌 성곽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변을 오가는 이들의 여유로운 산책길이다. 월암근린공원에서 곧바로 나타나는 홍파동 언덕배기의 홍난파 가옥을 지나면 저 앞으로 400년이 넘는 수령의 우람한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그 은행나무에 마음을 빼앗겨 집터를 선택한 메리의 시선으로 나무를 바라보기도 하며 발걸음을 하다 보면 “DILKUSHA 1923” 명판이 새겨진 붉은 벽돌집 딜쿠샤가 맞아준다.
◇ 딜쿠샤 방문은 사전예약제로 진행한다.
- 예약 방법 :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 검색 → 딜쿠샤
https://yeyak.seoul.go.kr/web/reservation/selectReservView.do?rsv_svc_id=S210226112026774583
- 문의 : 딜쿠샤 전시관(070-4126-8853)
중장년층이 추억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전시를 소개한다. ‘광고’로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읽는 전시 ‘광고, 세상을 향한 고백(告白)’이다.
대중문화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중에서도 광고는 그 시대의 소비문화, 유행 등을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우리나라는 광고 문화가 특히 발달했다. 30초짜리 광고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문화를 주도했고, 세월이 지나도 광고는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를 반영하듯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광고, 세상을 향한 고백’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광고를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깊이 있게 설명하는 전시다. ‘고백’은 우리말로 ‘아룀’으로 우리나라에서 ‘광고’라는 단어를 본격적으로 쓰기 이전에 사용된 용어다.
이 전시의 특별한 점은 ‘실감형 영상전시’라는 점이다. 전시는 아나몰픽 기법(특정 지점에서 착시효과로 입체감을 극대화하는 기법)을 활용했다. 벽면과 미디어 큐브 기둥에 영상을 투사해 광고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현재 1부와 2부 전시가 진행 중인데, 각각 상영 시간이 7분으로 소개돼 있다. 실감형 영상 전시이기 때문에 전시는 매우 입체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과거를 추억하면서 전시를 관람하게 되기 때문에 전시 시간이 짧다고 느껴질 정도다.
먼저 전시 1부는 ‘광고합니다’로 광고에 담긴 시대별 소비문화의 변화를 들여다본다. 첫 번째 근대와 신문물 시대는 개항기 때로 광고를 보면 신문물의 도입과 함께 의약품에 관한 관심이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말라리아 치료제 금계랍, 국산 소화제 활명수 광고가 많았다.
더불어 일제강점기 당시 양복, 화장품, 조미료 등 소위 근대문물의 광고는 식민지의 소비 욕망을 자극했다. 1920~30년대에 외국의 영향을 받아 유행한 화려한 패션과 스타일 등을 광고를 통해 볼 수 있어 눈길을 끈다.
두 번째 광복과 재건 시대는 1950~60년대를 말한다. 광복과 6⸱25전쟁을 경험한 후 일상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필수품 광고가 주류를 이룬다. 최초의 국산 치약 광고가 나왔으며, 라면은 영양식품으로 소개됐다. 본격적으로 광고가 대중에게 친숙해진 때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1970년대에는 아파트의 대중적 보급으로 주거환경이 변화하면서 가전제품 광고가 인기를 끌었다. 가사노동 시간을 줄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라는 중산층의 생활양식을 강조했다. 1970년대 말, 국산 자동차 광고는 당시에 유행하던 ‘마이 카(My Car)’ 문구로 샐러리맨의 욕망을 부추겼다.
마지막으로 1990년대 초 광고는 개인·개성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소비와 유행에 민감한 신세대의 문화가 반영됐다. 패션과 화장품, 삐삐와 휴대폰과 같은 품목들은 단순히 제품이 아닌 문화를 소비한다는 전략으로 신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어 1990년 후반 신세대의 관심은 인터넷이 만든 사이버공간으로 옮겨졌고, 초기 인터넷 광고와 이동 통신 광고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특히 1990년대 광고가 현재의 중장년층에게 익숙해서 반가움을 산다. 타키온, 걸리버 등 추억의 휴대폰 광고들이 등장한다. “같이 들을까?”로 유명한 SKY 광고도 나와 눈길을 끈다.
2부 전시 제목은 ‘그래, 이 맛이야!’로 시기별 식품 광고를 통해 대중의 음식 소비문화를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조미료 광고, 광복과 6·25 전쟁 이후에는 밀가루 광고가 많이 등장했다. 밀가루가 영양가가 높고 여러 용도로 활용 가능한 재료임을 알리는 데 광고의 초점이 맞춰졌다. 설탕과 분유는 영양식품으로 소개됐다.
1960년대는 밀가루 식품 광고가 본격화된다. 정부의 혼분식장려운동으로 밀가루 식품이 우리 식생활의 주류가 됐기 때문. 특히 국수와 국수 기계 광고 등에 혼분식장려 문구가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1960년대 초 출시된 라면은 당시 혁명적인 식품으로 주목받았고, 카레라이스가 쌀의 대용식으로 떠올랐다.
1970~80년대는 경제성장과 함께 식료품의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추게 된다.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조미료⸱제과⸱통조림과 같은 품목들이 가정의 식탁을 차지했다. 텔레비전 광고에서는 CM송이 크게 유행했다. 오란씨, 롯데 껌, 브라보콘 CF 등이 이에 해당한다. CM송이 유행하면서 광고를 따라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광고 문화는 더욱 발전했다.
이어 서울올림픽(1988)과 해외여행완전자유화(1989)를 거치며 외국문화와 외식이 유행했다. 점차 선진국의 식생활과 고급스러운 서비스를 추구함에 따라, 패스트푸드⸱베이커리⸱패밀리레스토랑 등의 외식문화가 자리 잡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국내 식품기업의 해외 진출,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의 음식도 세계 속에 확산되고 있다.
한편, 3부와 4부는 올 하반기 공개된다. 3부 '참 곱기도 하구나'는 패션과 화장품 광고, 4부 '기적인가 기술인가'는 우리의 일상을 바꿔놓은 전자제품 광고에 주목한다.
전시가 열리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광화문 역 인근에 위치한다. 광화문 일대로 나들이를 갈 때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들러 추억 여행에 빠져보는 것을 추천한다.
기나긴 코로나19 대유행으로부터 벗어나는 5월, 단계적 일상회복에 발맞춰 다양한 전시의 개최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청와대의 어제와 오늘, 근현대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예술 작품과 기록물, 이맘때에만 꽃을 피우는 북한 식물들부터 독서와 국가무형문화재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행사가 준비돼있다.
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은 오는 22일까지 ‘기록으로 보는 청와대’ 기록전을 개최한다. 현장과 온라인에서 동시 개최하는 이번 전시는 대통령기록관 야외공간에 방문하거나, 대통령기록관 누리집 ‘이기록 그순간’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
현장 전시관에는 총 114건의 기록물이 전시돼있다. 1부 ‘청와대의 시간’, 2부 ‘청와대 공간’, 3부 ‘기록으로 보존하는 청와대’로 구성돼, 청와대의 변천 과정, 경내 건축과 본관의 각 실, 그리고 그 공간에 있었던 대통령의 사진들이 함께 공개된다.
1부 청와대의 시간에서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청와대의 변천 과정을, 2부 청와대의 공간에서는 청와대 본관, 영빈관, 상춘재 등 청와대 경내 건축의 특징과 용도를 소개한다. 3부 ‘기록으로 보존하는 청와대’에서는 현재 대통령기록관에서 관리·보존하고 있는 청와대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온라인 콘텐츠 ‘청와대’에서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청와대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 사진, 문서 등 60여 점을 선보인다. 특히 1991년 개최된 청와대 준공식과 신본관에서 치러진 행사 기록 등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기록물이라 눈길을 끈다. 콘텐츠 원문은 대통령기록관 누리집 속 ‘기록컬렉션-이기록 그순간’에서 볼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예술원은 한국근현대미술사 흐름을 짚어볼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지난 10일부터 6월 3일까지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예술원 1층 전시실에서 ‘2022년도 대한민국예술원 소장작품전’(이하 예술원 소장작품전)을 개최한다. 1954년 예술원 개원 당시 초대 회장을 지낸 춘곡 고희동 선생을 비롯한 작고 회원 51명과, 미술 분과 현 회원 15명 등 총 66명의 작품 66점을 대중들에게 선보인다.
예술원은 1974년부터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 미술 분과 회원들의 작품을 수집하고, 이중 일부를 소개하는 ‘예술원 소장작품전’을 격년으로 열고 있다. 올해는 고(故) 송영방 회원의 (2015년 작)와 고 김병기회원의 (2018년 작), 고 한도용 회원의 (2018년 작), 최의순 회원의 (1964년 작), 정상화 회원의 (2014년 작)를 처음 소개한다. 이번 전시는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관람할 수 있으며, 관람료는 무료이다.
산림청 국립수목원은 북방계 및 북한 식물들을 만나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강원도 양구군 소재 ‘DMZ자생식물원’의 북방계식물전시원이 오는 17일부터 이달 31일까지 특별 개방된다.
DMZ자생식물원은 9개의 전문전시원으로 구성돼 있다. 비무장지대 분포식물의 61%인 1100종을 보유하고 있다. 해마다 이 시기에는 함박꽃나무, 가침박달, 설앵초, 갯활량나물, 애기자운, 물앵도나무 등이 피어 있으며, 이번에 특별 개방된 북방계식물전시원에는 너도개미자리, 백두산떡쑥, 흰양귀비, 오랑캐장구채, 만병초 등이 방문객들을 반길 것이다.
산림청 측은 “봄은 늦게, 여름은 일찍 찾아오는 비무장지대 특유의 기후 특성 때문에 이 시기에만 꽃을 피우는 북방계 및 북한 식물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특별개방을 2주간 진행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국립무형유산원 누리마루 3층 라키비움 책마루에서 작은 전시 를 지난 9일부터 10월 28일까지 개최한다. 작은 전시는 책마루의 문화 프로그램 중 하나로, 서가 곳곳에 전시 공간을 마련해 다양한 모습과 방법으로 무형유산 관련 작품을 소개하는 행사다.
이번 전시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라는 주제로 다양한 전통 기술을 통해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나전서류함(나전장)’, ‘은입사 차합(입사장)’, ‘화관(자수장)’ 등 국가무형문화재 10종목의 보유자, 전승교육사, 이수자들의 작품을 모았다. 더불어 작품에 활용된 국가무형문화재의 기록화 영상과 도서를 준비해 방문객들에게 더욱 깊이 있게 무형유산을 소개할 예정이다.
라키비움 책마루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하며, 일요일을 제외한 법정공휴일에만 휴관한다. 도서 열람 및 대출 외에도 다양한 문화행사를 진행하는 등 지역민과 방문객을 위한 문화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경복궁 바로 옆, 서울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지만 110년 넘게 높은 담장에 둘러싸여 방치됐던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가 대규모 녹지광장으로 변신해 올 하반기 시민 품으로 돌아온다. 서울시는 송현동 부지 전체를 열린공간으로 조성, 광화문광장 개장시기와 연계해 올 하반기 임시개방한다고 밝혔다.
송현동 부지 3만7117㎡이 녹지광장으로 변신하면 서울광장(1만 3207㎡)의 약 3배, 연트럴파크(3만 4200㎡)와 맞먹는 녹지가 생기게 된다. 청와대 개방, 광화문광장 개장과 함께 광화문과 북촌 일대가 휴식과 여유, 활력이 넘치는 공간으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된다.
송현동 부지는 조선시대에 왕족과 명문세도가들이 살았지만, 1910년 일제강점기 식민자본인 조선식산은행 사택이 들어섰고, 광복 후에는 미군정이 접수해 미군숙소로, 다시 주한미국대사관 직원숙소로 쓰였다. 90년 가까이 외세에 소유권을 빼앗기며 가슴 아픈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1997년 미국으로부터 삼성생명이 매입한 이후 주인이 한 차례 바뀌는 동안 쓰임 없이 폐허로 방치됐다.
서울시는 지난해 12월 서울시-대한항공-LH 간 3자 매매교환방식으로 확보한 송현동 부지에 대해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하기 전까지 임시 개방하기로 하고, 올해 2월 시민 아이디어 공모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했다. 현재는 대한항공에서 부지 소유권 이전을 위한 기반조성(부지평탄화 등) 공사가 진행중이다.
서울시는 송현동 부지를 ‘쉼과 문화가 있는 열린공간’으로 조성한다는 목표로 조성계획을 마련했다. 110년 넘게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공간인 만큼, 인위적인 시설을 설치하기보다는 서울광장처럼 넓은 녹지광장에 최소한의 시설물만 배치해 다양한 용도로 활용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다.
현재 3.7%에 불과한 서울도심의 녹지율을 15%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로 오세훈 시장이 지난 21일(목) 발표한 ‘녹지생태도심 재창조 전략’과 연계해 광화문 일대 도심에 대규모 녹지를 확보하는 중요한 기회로 삼는다는 계획이다.
녹지광장에는 광화문~북촌~청와대로 이어지는 지름길(보행로)을 만들어 접근성을 높이고, 차량 통행이 많은 율곡로와 감고당길 대신 이용할 수 있는 녹지보행로도 만들어 걷고 싶은 도심 보행길을 선사한다.
또한, 그늘막, 벤치 등 도심에 부족한 휴게시설을 곳곳에 만들어 바쁜 일상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한다. 공연이나 전시 같은 다양한 이벤트가 열릴 수 있는 공간도 별도로 마련해 도심 속 문화 향유 기회도 제공할 계획이다.
시는 공공기관, 대기업, 금융, 관광 등 도심 중추기능이 집중돼 있는 광화문-시청 일대와, 오래된 주거지가 밀집한 북촌 일대에 대규모 녹지를 확보함으로써 시민과 관광객은 물론, 지역주민들의 정주여건도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송현동 부지는 장기적으로는 도심내 녹지공간으로 조성되고 일부는 ‘(가칭)이건희 기증관’(대지면적 9,787㎡, 전체 부지의 26%)이 건립될 예정이다. 향후 국제설계공모를 통해 정부추진 ‘(가칭)이건희 기증관’의 건립부지(위치)를 확정하고, 조화를 이루는 통합 공간계획(안)을 마련해나갈 계획이다.
한국의 20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격동적이었다. 본격적인 개항, 일제 강점기와 광복, 전쟁과 분단, 그리고 독재정치와 민주화 운동까지 혼란하고도 찬란한 세월을 보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뤄진 비극적인 역사와 수많은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니어들은 이 같은 역사의 현장에서 때로는 참여자로 때로는 방관자로 때로는 관계자로 활동했다. 그렇기에 시니어들에게 근현대사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기억이고 생활에 가깝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한국전쟁 이후의 경제 성장 과정부터 군사정권의 독재와 민주화 운동까지 시니어들과 함께했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세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날 수 있다.
국제시장 (Ode to My Father, 2014)
“내는 그래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기 참 다행이라꼬.”
영화 ‘국제시장’은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해 살아온 우리 시대 아버지 ‘덕수’의 이야기를 그린다. 함경남도 흥남에서 태어난 덕수는 소년기에 전쟁을 겪으며, 아버지와 여동생과 떨어지며 남은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온다.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덕수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20대 청춘 시절에는 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독일에 가서 석탄을 캤다. 독일로 파견나온 간호사와 고국에 돌아와 결혼도 하고 해양대에 합격하며 오랜 꿈을 이룬다. 그러나 막내 동생의 결혼자금을 벌기 위해 다시 베트남으로 떠난다. 덕수의 희생 덕분에 온 가족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영화는 끝이 난다.
2014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천만 관객을 돌파하여 ‘국민 영화’ 대열에 올라섰다. 남북 분단으로 가족을 잃고, 가족과 나라를 위해 평생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산업화 세대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며 대중의 공감을 얻었다. 이산가족으로 갈라섰던 여동생과의 재회 장면은 수많은 관객의 눈시울을 붉히며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남산의 부장들 (The Man Standing Next, 2019)
“너하고 나하고 그냥 머슴살이한 거야, 규평아.”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암살한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40일 전, 미국에서는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이 청문회를 통해 전 세계에 대한민국 정권의 실체를 고발하며 파란을 일으킨다. 그를 막기 위해 중앙정보부장 김규평과 경호실장 곽상천이 나서고, 대통령 주변에는 충성 세력과 반대 세력들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흔들린 충성과 그 날의 총성, 대통령이 암살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영화는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18년간 지속된 박정희 독재정권의 종말을 알린 이 사건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으로 꼽힌다. 영화의 서사는 대통령 암살사건 발생 40일 전,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그리고 육군 본부에 몸담았던 세력들의 관계와 인물들의 심리를 면밀히 따라가며 담담하게 진행된다. 실제 인물들의 과열된 ‘충성 경쟁’과 이를 표현하는 배우들의 명품 연기가 관객들을 영화에 푹 빠져들게 만든다.
1987 (1987:When the Day Comes, 2017)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
1987년 1월, 경찰 조사를 받던 스물두 살 대학생이 사망한다. 증거인멸을 위해 경찰은 시신 화장을 요청한다. 하지만 사망 당일 당직이었던 최 검사는 이를 거부하고 부검을 밀어붙인다. 또 경찰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거짓 발표를 이어간다. 그러나 계속해서 고문에 의한 사망을 증명하는 흔적들이 나타나자 윤 기자는 ‘물고문 도중 질식사’라고 보도한다. 이렇게 영화는 어떤 대학생의 억울한 죽음을 조사하고 알리려는 사람들과 이를 막으려는 부패된 공권력 사이에서 뜨거웠던 1987년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영화는 20대 초반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고 박종철의 비극적인 죽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의 정점이었던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며, 한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 중 하나가 됐다. 부패한 독재정권에 열렬히 맞서 싸우는 민주화 운동가들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도 강렬한 역사의식을 일깨운다.
‘정읍’ 할 때 ‘내장산 단풍’만 떠오른다면 올가을엔 무성서원에도 한번 발길을 돌려볼 일이다. 지난해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의 서원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서원이 발원됐다는 안동 지역 3곳을(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거쳐 전라도로 넘어왔다.
정읍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25년 전, 서울역에서 마지막 기차를 타고 정읍에 내려 고창을 간 적이 있다. 마중 나온 친구 차를 타고 고창으로 넘어가는 길은 줄곧 산등선을 따라가는 도로였다.
그때 깊은 밤이었는데도 유별나게 환했다. 옆을 보니 환한 달이 빛을 밝히며 열심히 차를 따라왔다. 그 달을 보자 학창 시절에 배웠던 백제 가요 정읍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데를 드데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데 졈그랄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정읍의 달이 얼마나 밝던지… 그날 우리 차를 따라 달리던 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정읍은 내게 이렇게 환한 빛을 밝히는 달의 고장으로 기억돼 있다. 그런데 정읍에 위치한 무성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됐단다. 서원 취재를 핑계로 정읍을 방문하기로 했다.
무성서원이 위치한 곳은 앞으로는 천이 흐르고 뒤로는 성황산을 등진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이다. 원촌마을 한가운데에 무성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안동의 소수서원이나 도산서원, 병산서원은 마을과 뚝 떨어져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에 비해 무성서원은 외양상으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언제든 마을 주민들이 찾아와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눠도 될 만큼 친근하고 격의 없어 보인다. 서원을 알리는 홍살문도 주민들이 거주하는 대로변에 떡 버티고 있다. 원촌마을이 곧 무성서원이고 무성서원이 곧 원촌마을인 듯싶다.
이런 마음을 읽었던 걸까? 해설가가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무성서원의 특징은 특별한 사람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신분 차별 없이 수학의 기회를 제공한 데 있다”며 해설을 이어갔다. 또한 이곳은 항일 의병운동의 첫 시작지였단다.
원촌마을에는 2원5사, 즉 서원 두 곳(무성서원, 용계서원)과 사당 5곳(남천사, 송산사, 필양사, 시산사, 도봉사)이 있는데, 구한말 일본 제국주의의 강탈에 맞서 저항한 항일의병운동이 이곳 서원을 중심으로 처음 일어났다고 한다.
항일의병 선봉장으로 알려진 면암 최익현 선생이 무성서원에서 1906년 첫 의병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강연회를 했다는 해설가의 설명에 새삼 원촌마을의 역사적 유산이 위대해 보였다. 무성서원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켰던 최익현 선생은 결국 일본군에 의해 체포돼 대마도에 감금됐는데, 단식 투쟁 끝에 1907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무성서원이 기리는 인물 중 대표적인 이는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해 천재로 이름을 떨친 신라시대의 학자다.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6년 만인 18세에 빈공과(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한 후 학자와 정치가로 이름을 날리다가 고향이 그리워 신라로 돌아온다. 하지만 통일신라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결국엔 태산(현 정읍) 지역 향리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깊은 좌절만 한 채, 이곳 정읍에서 학문에 심취하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최치원. 그가 이룩한 학문의 경지는 높았으나 견고한 신분제 사회를 구축한 신라의 권력층은 그의 능력을 시샘하며 지방으로 떠돌게 만들었다.
이외에도 무성서원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표작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도 기리고 있다. 정극인은 최치원 등과 함께 무성서원의 사당인 태산사에 위패가 있고 무성서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정극인의 묘소와 재실이 있다.
다들 전라도를 예술의 고장이라 부른다. 단순히 근현대사의 예술가들만 배출한 건 아닌 것 같다. 면면한 역사의 흐름 속 문학과 예술의 고장이라는 이름답게 걸출한 문인과 학자들을 배출한 것이다. 역시 남다르다.
마을 한편에는 큰 연못이 있어 연꽃이 한창이다. 안동 지역 서원들이 만든 연못이 서생들의 휴식공간이었다면 이곳 무성서원이 위치한 원촌마을의 연못은 마을 주민들의 휴식공간이다. 연꽃을 즐기며 이곳저곳 산책할 수 있다. 한국의 서원을 엘리트 교육의 산실이라고만 할 수 없는, 마을 교육의 현장이 바로 무성서원이다
무성서원(武城書院)
신라시대 말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사적 166호). 무성서원은 최치원이 태산군(정읍 지역의 옛 지명) 태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고 떠나자 백성들이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제를 올렸던 생사당(生祠堂), 태산사가 뿌리다.
이후 조선시대 중종 때 태인현감으로 부임한 영천 신잠의 생사당이 태산사와 합해져 태산서원으로 불리다가, 1696년(숙종 22) 사액을 받아 무성서원이 됐다.
무성서원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의 작가 정극인, 눌암 송세림, 묵재 정언충, 성재 김약묵 등을 추가로 배향하며 성장했고,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철폐에도 살아남아 역사적·학문적 가치를 증명했다.
무성서원의 입구는 현가루(絃歌樓)로 불리는 두리기둥을 쓴 정면 3칸, 측면 2칸 기와집이며 안으로 들어가면 명륜당이 있으며, 오른쪽에 4칸의 강수재(講修齋), 왼쪽에 3칸의 흥학재(興學齋)가 있어 동·서재(東西齋)를 이룬다. 3칸인 신문(神門)을 지나면 사우(祠宇)인 단층 3칸의 태산사가 있는데, 그 안에 최치원을 북쪽 벽에, 같이 모신 사람들의 위패(位牌)는 좌우에 봉안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헌종 10) 중수한 것이며, 명륜당은 1825년(순조 25)에 불탄 것을 1828년에 중건하였다. 특히 이곳 무성서원에는 중요한 서원 연구자료가 있다. 1968년 12월 19일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여행 이야기, 두산백과)
병마와 마주친 오철근(77세) 어르신은 오로지 집 주위에서만 맴돌다가 10년의 세월을 속절없이 보내버리고 말았다. 뇌경색으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대인기피증에 시달렸고 삶에 대한 의미는 퇴색되어 하루하루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면서 10년 만에 외출을 했다.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는 시간들을 다시 찾게 해준 외출이었다.
운동 잘하고 공부도 잘했던 핸섬 보이
청소년 시절의 어르신은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핸섬 보이였다. 그의 부친은 지방의 기초의회의원이었다. 어르신은 어린 시절 스케이트를 아주 잘 탔는데, 당시 지방에서 스케이트를 탈 정도면 주위의 부러움을 살 만한 집안이었다. 그 시절 농촌은 몇몇 집을 빼고는 다 고만고만한 살림이었다. 겨울철, 꽁꽁 언 논배미에서 썰매는 타는 아이는 많았지만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특별히 선택된 아이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고 외모까지 출중했으니 여학생들에겐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르신에게 청소년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한때는 잘나가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당시 부친은 장남의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보셨는지, 아니면 유난히 운동신경이 뛰어난 아들의 소질을 파악했는지 스케이트를 선뜻 사주셨다. 은빛 스케이트 날을 번쩍이면서 얼음을 가르던 그는 고등학교 때 전국체전 경기도 대표로 출전해 입상을 했고, 상을 탈 때마다 운동장 조회 때, 전교생 앞에서 교장선생님의 칭찬을 듣곤 했다.
군 생활도 운 좋게 카투사로 했다. 당시 카투사에게는 일반 군대와는 다른 환경을 제공했다. 어르신은 미군들과 복무하면서 오로지 영어에 매진했다. 통역을 할 정도의 실력은 제대 후 사회생활에 많은 도움이 됐다. 군 생활을 하면서도 전국체전이 열리면 경기도에서 보낸 협조 공문으로 도 대표 선수로 출전하곤 했다. 하계체전 때는 육상선수로, 동계체전 때는 도 대표 스케이팅 선수로 활약했다. 스케이트는 나이가 들어서도 자주 즐기는 운동이었다. 칠십에 가까운 나이에도 태릉은 물론 잠실 롯데월드 빙상장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다녔다. 세월이 한참 흘렀는데도 그의 스케이트 실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스케이트만 신으면 펄펄 날았다. 어르신은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술 먹다가 술자리에서 죽거나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쓰러져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술과 스케이트를 사랑했다.
스물한 살 어린 나이에 결혼
지병이 있던 아버지의 병치레로 장남인 그는 스물한 살 어린 나이에 이웃 마을에 살던 세 살 아래 소녀와 결혼을 했다. 어른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른 결혼 후 아내는 곧바로 임신을 했고, 그 사실도 모른 채 그는 군대에 입대하고 말았다. 제대 후 집에 돌아오니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며 엉금엉금 다가오면 어른들 눈치가 보며 슬며시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 시절에는 자식 한번 제대로 예뻐해주지도 못하고 안아주지도 못한 채 살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지난 시절을 돌이킬 때마다 그는 자식들에게 사랑 표현 못하고 산 걸 제일 안타까워했다.
잃어버린 10년
60대 중반이 막 지나던 어느 날, 머리에 열이 오르고 뜨거웠다. 그게 뇌경색의 전조증상인지도 모른 채 방치하다가 결국 병원으로 실려 갔다. 중증의 뇌경색이었다. 좌측 팔과 다리가 마비됐고 음식물을 씹어 삼키는 게 어려운 삼킴 장애까지 발생했다. 어르신 건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먹는 것’인데, 제대로 삼키지 못했으니 잘 먹지도 못했다. 당연히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여기에 심리적 상실감까지 더해져 우울증이 생기면서 삶의 의지를 잃어갔다.
지독한 뇌경색은 어르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매일매일 빨리 죽게 해 달라고 빌었다. 자살을 생각하던 하루는 실행에 옮겼다. 안방에서 전깃줄로 목을 매고 침대에서 뛰어내렸는데 지지대가 부러지는 바람에 돌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다. 쿵! 소리에 놀라 달려온 둘째 아들에게 발견되어 119구급차로 병원으로 실려 갔다. 미수에 그쳤지만 이후에도 자살 충동이 시시각각 그를 엄습했다.
몸무게 51㎏의 다소 왜소한 체구는 병마로 참혹했다. 한때 펄펄 날던 몸이 한순간에 편마비가 되어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버렸으니 그 실망이 오죽했을까. 대인기피증으로 만나는 사람도 없이 하루를 버티다가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다시는 아침이 오지 않기를 수없이 기도했다. 이렇듯 삶이 지난(至難)했으니 식구들에게, 특히 아내에게 짜증을 부리기 일쑤였다. 아내는 명일역 근처에서 혼자 노점상을 하면서 생계를 책임졌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장사를 마치고 고단한 몸으로 들어온 아내는 온종일 말 한마디 못한 채 보낸 남편의 스트레스를 다 받아줘야 했다. 어르신이 막걸리라도 한잔 마신 날에는 늦은 밤까지 아내를 앞에 앉혀놓고 술주정을 했다. 가부장적인 사고와 직설적인 표현은 자녀들도 힘들게 했다. 2남 1녀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모습이 보기 싫어 일찌감치 독립해 나갔다.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졌고 몸이 불편한 어르신의 외로움은 점점 깊어졌다.
진심어린 대화를 통해 위로를 받다
2020년 초에 오철근 어르신을 만났다. 편마비의 불편한 몸과 피폐해진 정신으로 자존감이 한없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삶의 의미를 잃은 채, 막걸리를 마시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어르신에게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마음도 삭막하게 닫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심으로 위로를 건네는 나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더니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청소년 시절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역사에 대한 식견도 높아 한국의 고대사를 포함해 근현대사에 해박했다. 나와 대화가 통해서인지 어르신은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10여 년간 잊고 살았던 스케이팅에 대한 추억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어르신은 잠실의 123층 롯데월드타워가 건설되었다는 걸 뉴스로만 봤다며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어르신의 흔쾌히 그 요청을 들어드리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한 날에 지하철을 이용해 롯데월드타워에 도착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일시적으로 문을 닫는다는 안내를 들어야 했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냥 귀가하기는 너무 아까웠다. 기왕 나온 김에 화려한 벚꽃과 연산홍이 화사하게 핀 석촌호수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어르신은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미소를 감출 줄 몰랐다. 연산홍과 어우러져 더욱 홍조를 띠었다. 푸르게 변해가는 나뭇가지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와 유유히 호수를 헤엄치는 백조들의 자유로움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그렇게 한동안 시선을 고정한 채 자신의 지나간 10년의 세월을 찾아갔다.
며칠 후에는 함께 종로로 향했다. 장애인 리프트와 엘리베이터를 몇 번씩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종로에서 지난 시절을 추억하며 거리를 걸었다. 휠체어를 밀면서 힘들었지만, 어르신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힘을 냈다. 종묘를 찾았다. 종묘는 조선 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받들고 제례를 봉행하는 유교 사당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번지에 있으며,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휠체어를 타고 종묘를 탐방하면서 어르신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했다. 그 해박한 식견에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들이 좋았는지 어르신은 내친김에 명동에도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명동 거리로 나갔다. 명동을 거쳐 종로 송해거리의 한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막걸리도 한 잔 곁들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인사동 거리를 탐방했다. 그날, 겨우내 꽁꽁 얼었던 얼음이 봄과 함께 해동하듯 어르신의 마음도 서서히 봄빛으로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