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검진이 보편화되면서 위암이나 대장암 조기 진단이 늘었다. 이 가운데 수술보다 환자에게 부담을 덜 주는 내시경 치료가 적극 활용되고 있어, 고령의 환자들도 안전하게 치료받을 수 있다.
이에 비해 식도암은 상대적으로 발병률이 낮은 만큼 관련 연구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조기 식도암 환자가 고령이어도 안전하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관심이 집중된다.
◇75세 전후 재발률 0%, 부작용·입원기간 등 비슷
서울아산병원 소화기내과 김도훈 교수팀은 표재성 식도암으로 내시경 점막하 절개박리술(ESD)을 받은 환자 413명을 75세 이상, 미만의 두 집단으로 나눠 분석한 결과, 같은 위치에 재발한 환자는 두 집단 모두 한 명도 없었으며 출혈, 천공 등 부작용 발생률과 병원 입원 기간 등이 거의 비슷했다고 최근 밝혔다.
아무래도 나이가 많을수록 기저 질환이 있거나 신체적으로 쇠약한 경우가 많아 치료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식도는 내벽이 얇아 고난도 내시경 기술이 필요하다고 알려졌는데 이번 결과로 환자들이 걱정을 덜 수 있게 됐다.
식도암 수술은 암을 포함해 식도 대부분을 절제한 뒤 남아있는 식도에 위나 대장을 연결하는 방법이다. 수술 범위가 커 내시경 치료보다 합병증 위험이 크고 통증도 심해 수술 후 삶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시경 치료가 가능한 조기 단계에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림프절 전이가 없으면서 암이 점막층에만 얕게 국한된 표재성 식도암의 경우 내시경을 통해 특수 전기칼로 암세포를 도려내는 내시경 점막하 절개박리술이 가능하다.
최근 인구의 고령화와 내시경 정기 검진이 활발해지면서 노년층의 조기 식도암 환자를 대상으로 내시경 점막하 절개박리술을 시행하는 경우 또한 증가하고 있다.
◇식도암 내시경 치료, 나이와 상관없이 안전하다
김도훈 교수팀은 2005년 12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표재성 식도암 환자 413명을 75세 이상 집단과 미만 집단으로 분류해 치료 후 재발률, 부작용, 입원 기간 등을 평균 약 33개월 동안 분석했다.
59세부터 79세의 환자에서 총 459개의 식도암 병변이 존재했으며, 75세 미만 환자 369명의 병변 총 408개, 75세 이상 환자 44명의 병변 총 51개가 있었다.
우선 내시경 점막하 절개박리술을 받은 전체 식도암 환자 중 평균 추적 기간 33개월 내 같은 위치에 암이 재발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병변에 발생한 시술 부작용은 75세 미만, 75세 이상 집단에서 각각 △출혈 1.2%(5건), 2.0%(1건) △천공 3.9%(16건), 5.9%(3건) △협착 5.6%(23건), 7.8%(4건) △폐렴 0.7%(3건), 0%(0건)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이때 발생한 부작용은 내시경 시술 중 치료되거나 추가적인 수술 없이 항생제 투여 등 가벼운 처치로 회복되는 증상인 것으로 밝혀졌다. 시술 과정에서 환자가 병원에 입원한 기간도 75세 미만 환자는 3~4일이었으며 75세 이상의 환자는 3~5일인 것으로 나타나 거의 차이가 없었다.
김도훈 서울아산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식도암 환자 중에서 단순히 고령의 나이 때문에 내시경 치료도 포기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이번 연구로 식도암 내시경 치료가 나이와 상관없이 안전하다는 것이 밝혀졌다”며 “내시경 치료는 식도암이 많이 진행되지 않은 초기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정기검진을 통해 조기 발견될 수 있도록 신경 쓰고, 금연과 금주 습관을 통한 예방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노년학·노인의학학술지(Geriatrics & Gerontology International, IF 2.118)에 최근 게재됐다.
극작가 노경식(盧炅植·79)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어떤 얘기든지 들려주세요.”
극작가란 무언가. 연출가에게는 무한대의 상상력을, 배우에게는 몰입으로 안내하는 지침서를 만들어주어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자가 아닌가? 그래서 달리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인생 후배로서 한평생 외길만을 걸어온 노장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무대 위 모노드라마를 관람하듯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커튼을 열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봐 주시겠습니까?
노경식 희곡집 1권 을 꺼내 들다
인터뷰에 나가기 전 서재에서 책 하나를 찾아냈다. 노경식의 첫 희곡집 이었다. 노경식 작가와도 가까웠던, 지금은 고인이 된 은사에게 2004년 초판을 선물로 받았다. 책을 받고 13년 만에 일종의 필자 사인회를 거행(?)한 것.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로 당선된 걸 생각하면 한참 시간이 흘러 희곡집을 발간했다.
“내가 책을 늦게 냈거든. 그래도 지금까지 7권이나 나왔어요. 희곡은 한 40편 되는 것 같아. 그중에 5편 정도 빼고는 다 공연을 했습니다.”
전북 남원 출신인 노경식 작가는 경희대학교 경제학과를 거쳐 서울예술대학교의 전신인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에 들어가 동랑 유치진, 여석기 선생으로부터 극작 수업을 받았다. 올해 80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리얼리즘의 대표 현역 극작가다. 노경식 작가는 토속적인 색채에서부터 역사, 정치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써왔다. 앞서 언급한 1971년 작품 으로 제8회 한국연극영화 예술상(백상예술대상) 희곡상과 연기상 등을 받아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작년 극작50주년 기념공연 을 비롯해 , , 등은 노경식을 대표하는 역사 시대극이다.
“내가 왜 역사나 정치에 관심이 많냐면 경제학과 중에서도 경제사를 전공했기 때문입니다. 조선, 한국 경제 그런 쪽. 그래서 시대극이나 역사적인 소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독립운동사라든지 임진왜란도 많이 썼고요.”
작가 황순원의 눈에 든 남원 촌놈
처음 노경식의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은 경희대 재학 시절 만난 소설 의 작가 황순원이다. 황순원은 노경식이 수강하던 교양국어의 담당 교수였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하와이’란 제목의 수필을 교내 학보사에 투고했어요. 저는 당해본 적 없는데 전라도 출신 선배들이 서울에 올라와 가난 때문에 차별당한 이야기를 쓴 글이었어요. 꽤 길었는데 학보에 실렸더라고요. 그것을 보고 황순원 선생님이 잘 썼다며 칭찬해주셨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황 선생님도 동경 유학 시절 비슷한 차별을 당한 적이 있으셨더군요.”
황순원은 학생 노경식을 볼 때마다 “너 수필 잘 쓰더라”며 글쓰기를 부추겼다. 결국 또 한 번 파란의 주인공이 됐다.
“우리 학교에는 그때 교내 문학상 제도가 있었어요. 미술, 음악, 시, 소설, 그림…. 1등이 되면 등록금이 면제였습니다. 황순원 선생님 역시 제가 글을 문학상에 내보기를 계속 권하셨습니다. 저는 그냥 희곡이나 한번 써볼까 해서 써냈습니다. 근데 그게 또 1등이 된 겁니다. 희곡을 쓴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상을 주는 교수들의 입장이 사실 난감했다. 이전 수상자였던 무역학과 학생이 장학금만 받고 글쓰기를 멈춘 것이다. 경제학과인 노경식 또한 장학금을 받고 글을 쓰지 않으면 주나 마나 한 상황이 되니 심사위원 교수끼리 회의를 열었다.
“희곡 심사위원이었던 김진수 선생 옆에 있던 황순원 선생님이 ‘왜? 경제학과야? 노경식?’ 하더니 ‘어, 노경식이 내가 알아. 내가 보증할게’라고 해서 제가 된 겁니다.”
결국 노경식은 빚을 톡톡히 갚은 거다. 대학 시절 희곡으로 장학금을 타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는 극작가로 사니 말이다.
“ 초연 때 모셨는데 작품이 마음에 드셨나봐요. 내 손을 꼭 잡고 ‘애썼다. 잘 썼다’ 그러시면서 ‘희곡이 소설보다 좋은 거 같아. 관객을 놓고 박수도 받고 야, 희곡 좋은 거 같다’ 나한테 그런 말씀도 하시더라고. 뭘 잘해드린 적도 없는데 참 예뻐해주셨어요. 황순원 선생님이 결혼식 주례도 서주시고 말입니다. 선생님이 서주신 제자가 많이 없을 겁니다.”
현역 작가로서 저력을 과시하다
인터뷰 차 만났던 9월 대학로의 한 카페. 그 어느 때보다 한결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지난여름 제2회 늘푸른 연극제를 통해 무대에 올린 연극 가 관객의 뜨거운 호응과 평단의 찬사 속에 막을 내린 것. 공연이 끝나고 원로 연극인들과 함께 기분 좋은 온천 여행을 다녀왔다고 덧붙였다.
늘푸른 연극제에서 노경식 작가가 선택한 는 신의 한수였다. 그와 함께 연극제에 초청된 배우 오현경, 이호재, 연출가 김도훈은 대표작을 내걸고 공연했다. 노경식 작가 또한 대표작인 을 공연할 것이라 대부분 사람들은 예상했다.
“는 2005년에 극단 미학에서 초연했던 작품입니다. 기대만큼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그런대로 성과가 나면 모르겠는데 미치지 못하니 작가는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잖아요. 도 마침 생각하고 있었는데 늘푸른 연극제에 선정됐습니다. 나를 선정한 거니까 내가 맘대로 작품을 고를 수 있다기에 를 선택했습니다. 좀 오래전에 써서 개작을 많이 했어요. 이번에는 만족합니다.”
그의 대표작 을 기다린 관객에게는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노경식 작가는 현역 작가로서 과감한 도전에 박수받기를 택했다. 원로 연극인으로서 지금껏 살아온 노고에 대한 격려 대신 말이다.
“만족이야. 기분 좋습니다. 이번 연출을 맡은 김성노씨한테 고맙다는 소리를 몇 차례 했어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는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제헌국회에 설치했으나 1949년 친일 경찰의 ‘6·6습격사건’을 기점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준 정치극이다.
여전히 잘 팔리는 극작가
“나는 잘 팔려, 고민 안 해(웃음).”
연극 가 끝나기가 무섭게 노경식 작가는 신작을 내놓았다. 이미 세상에 내놓은 것, 꼭 쓰겠다고 작정한 것 두 가지 작품이 있다. 여전히 잘 팔린다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재밌다. 우선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이라는 제목의 4·19혁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4·19혁명에 관한 작품이 없어요. 왜 없는 줄 알아요? 4·19혁명이 나고 5·16 군사정변이 났잖아. 그 이야기에 손댔다가 시끄럽고 어쩌고… 몸을 사리는 거지 작가들이. 내가 4·19세대거든. 나라도 본격적으로 4·19 얘기를 써야 되겠다. 내가 겪은 이야기니까. 그래서 마침내 성공을 했어요.”
4·19혁명과 관련해 작가로서의 사명감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는 노경식 작가. 몇 달을 걸려서 자료를 찾고 화보집을 보면서 작품을 썼다.
“내가 아는 얘기, 겪었던 일이에요. 그리고 4·19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초의 이야기죠. 구두닦이, 우리 학생, 대학생, 초등학생들도 나왔어요. ‘총 쏘지 마세요’라면서요. 양아치들, 매춘부까지 다 나왔던 민초들이 이뤄낸 역사입니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매춘부라며 깜짝 놀랄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작가의 고향 남원과 관련한 토속적인 얘기를 쓰고 싶단다.
“사실 봄꽃이 아니었으면 먼저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자꾸 뒤로 밀리고 있어요. 늘 생각은 있어요. 우리 집안의 얘기도 관계가 있고요. ‘밤으로의 긴 여로’ 같은 것을 쓰고 싶은데 어찌 될지.”
프리한 80? 행복한 극작가!
노경식 작가와 얘기하는 동안 머리에 맴도는 의문 한 가지가 있었다. 지금까지 만나온 극작가는 대부분 연출과 겸업을 하고 자신만의 극단을 거느리고 있다.
“나는 한 번도 극단에 들어가본 적이 없어요. 단원이 돼본 적도 없고. 그냥 늘 자유롭게 조직에 구애받지 않고 연극을 했어요.”
듣고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노경식 작가가 극작가로 데뷔한 1965년도에는 출판사 편집장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드라마센터 동기들이 연극판으로 몸을 옮겼을 때 노경식 작가는 매일 출근을 해야 했다. 대신 누구든 노경식 작가가 쓴 대본을 넘겨주면 공연을 하겠노라고 했다.
“국립극단에서도 내 작품을 하겠다고 하니까 극단에 소속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내 극단을 가져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다들 잘해주고 공연 잘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무엇보다 스스로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작가들은 연출 해석이 잘못되면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에요. 혹시라도 연습실에 가면 앉았다가 ‘술이나 한잔하자!’ 그러면 땡이고. 술 마시다가 살짝 얘기하면 되지. 화내고 그럴 필요 전혀 없어요. 한 사람 머리보다 두 사람이 낫지 않겠어?“
연출자도 작가도 창조자이고 작품을 좋게 만들 뜻으로 만났으니 서로의 신뢰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대학로 만빵 모임 좌장 납십니다!
경계 없이 만나고 사귄 덕에 주위에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러다 만든 모임이 바로 만빵 모임이다. 노작가가 좌장(?)으로 있는 만빵 모임은 2년째 대학로 바닥을 주름 잡는 원로 연극인 모임으로 자리 잡았다.
“두 주에 한 번씩. 매주 목요일 오후 5시. 만원씩 가지고 빈대떡 주점에서 모이다가 ‘만빵 모임’이 된 거예요. 혼자 부담하려면 너무 크니까. 여유 있는 친구들이 가끔 다 내기도 하고 나오면 받고 안 나오면 안 받고 그래요. 우리도 한번 모여보자 해서 만나는데 만빵 모임의 존재를 아는 후배들이 빈대떡 주점에 돈을 맡기고 갈 때도 있더라고요. 만나서 한잔하고 그러면 좋잖아.”
원래는 70세 이상만 모이다가 가끔 후배들도 종종 참여하고 있다. 만나서 막걸리는 기본. 웃고 떠들고 과거를 추억하다 요즘 젊은이들의 연극에 대한 걱정도 한다.
“평가라기보다 우리 연극이 좀 시류를 따른다고 해야 하나, 영합한다고 해야 하나. 가볍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좀 묵직하고 그런 작품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적어도 만빵 늙은이들은 그렇게 생각해(웃음).”
사실 이런 말을 하고 싶어도 이제 젊은 후배들을 만날 기회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정말 특별한 인연이라 꼭 좀 와주십사 연락하는 사람이 있으면 연극을 보러 가는 정도다. 아무렴 어떤가! 그래도 늘 행복한 웃음을 잃지 않는 노경식 작가는 어딜 가나 인기가 높다. 지금 이 시간 해피 바이러스 내뿜으며 젊음의 거리를 거닐고 있을 노경식 작가에게 인터뷰 중 약속했던 한마디를 남기고자 한다.
“고향에 관한 연극 꼭 쓰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젊은연극제란? 전국의 연극영화전공 학생들이 주축이 된 연극제.
평생 오로지 한길만을 걸으며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이들의 모습은 언제 봐도 멋있다. 여전히 젊음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무대에 오르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연출력과 필력을 뽐내는 네 명의 연극 원로가 제2회 늘푸른 연극제에서 만났다. 바로 대한민국 연극을 대표하는 배우 오현경과 이호재, 연출가 김도훈과 극작가 노경식이 올해 주인공들이다. ‘원로연극제’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늘푸른연극제’로 문패를 바꿔 달은 이 연극제는 원로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따뜻한 예술가들의 잔치였다. 8월 한 달, 평균 연령 79세 젊은 오빠(?)들의 무대로 대학로 극장가가 뜨거운 박수로 넘쳐났다.
범접할 수 없는 화술의 대가, 배우 오현경
연극계 후배들은 오현경을 ‘학 같은 배우’라 부른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후배를 꾸짖는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고 곧다. 화술의 대가, 그의 연기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표현이다. 국내에서 가장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배우로 통하는 오현경은 사비를 털어 ‘송백당’을 열고 후학을 위해 화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번 연극제의 개막작이자 오현경의 출연하는 연극 은 1984년 초연 때부터 오현경이 아버지 역을 맡아왔던 작품이다. 젊음을 향한 늙은 아버지의 주책스런 욕망을 해학과 능청스러움으로 표현해 초연 때부터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이번 무대에서도 또한 강단 있고 깊은 대사와 호흡으로 나이를 잊은 열연을 보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사실주의극에 시적 분위기를 불어넣는 연출가 김도훈
혹자는 연출가 김도훈을 일컬어 ‘돈과 억세게 거리가 먼 연극인’이라고 부른다. 관객의 입맛에 맞는 연극은커녕 자신만의 연출 스타일을 끈질기게 고집하고 남녀의 애증과 갈등, 인간의 본질 파악에만 집중한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진지하고 무거우며 당연히 관객이 많이 들지 않는다. 대중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연출가 김도훈. 1976년 극단 뿌리 창단 이후 40년 동안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선보였다. 그러나 역시 그의 대표작은 이다. 남루한 집을 배경으로 한 가족이 붕괴되고 해체되는 과정을 그린 테네시 윌리엄스의 은 1976년 첫 연출 후, 그가 가장 자주 무대에 올렸던 레퍼토리다. 이번 공연에는 국회의원을 지낸 배우 최종원이 주인공 톰으로 출연했다.
역사를 통해 현실을 환기시키는 참여적 극작가 노경식
“작가로서는 이런 자리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평생 처음으로 포스터에 나온 작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연극 잘 만들어서 후배나 선배들에게 부끄러움 없었으면 합니다.” 극작가 노경식
극작가 노경식은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희곡 로 등단했다. 지난해 까지 50여 년 동안, 약 40여 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그가 작품을 통해 들려주고자 했던 것은 우리 한국인의 이야기였다. 늘푸른연극제의 작품으로 무대에 오른 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협조했던 친일 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설치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부패권력에 의해 해체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 2005년 극단 미학(정일성 연출)에 의해 초연된 바 있다. 작가 특유의 역사적 안목으로 완성된 기록극이다. 의 총연출은 극단 동양레퍼토리의 상임연출가 김성노와 협력연출 이우천이 공동으로 맡았다. 권병길, 정상철, 이인철, 김종구, 유정기 등 노련한 60대와 40~50대의 중장년 및 젊은 배우들 등 총 30여 명의 연기자들이 종횡무진 새롭게 무대를 석권하는 대형 파노라마로 꾸며졌다.
첫사랑을 찾아가는 노년을 연기하다, 배우 이호재
이호재는 1964년 를 시작으로 그동안 출연한 작품만 200여 편이 넘는다. 연극평론가 구히서는 그의 연기에 ‘연기의 교과서, 대사의 달인’이라는 별칭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무대 위에서의 유연성과 순발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배우’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는 2007년에 초연된 작품으로 극작가 이만희가 이호재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50년 만에 만난 동창이 첫사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고백하는 동창생들의 이야기다. 젊은이들이 주는 풋풋함이 아닌 시니어의 우정과 사랑의 감정을 잘 녹였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끝에서 따질 것 없이 던지는 그들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애잔하게 그려졌다.
한국 부자들은 은퇴 후 생계와 일에서 벗어나 가족 및 지인들과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인생의 제 2막'을 즐기기 원한다. 또한 적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월평균 673만원의 생활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는 일반가구 은퇴 후 월평균 적정 생활비 194만원에 비해 약3.5배 높은 수준이다.
총재산 19억으로 부자인 김도훈씨는 행복한 노후를 위해 어떻게 자산관리를 해야 할까?
먼저 김도훈씨의 수입과 지출에 대해 살펴보자. 수입은 상가임대수익(세후 4%가정)과 월지급식ELS(세후 6%가정)를 합해 연 4300만원이다. 지출은 생활비, 종신보험비, 교육비, 미혼자녀생활비 등을 합하여 연 9500원으로 수입보다 많아서 매년 5200만원의 재산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19억의 재산에서 5200만원은 비율상 약2.74%로 작게 생각 되지만,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해 재산의 실질 가치를 따져 보면 현재의 자산관리 상황은 행복한 노후를 일구는데 커다란 방해요인이다.
이에 금전적으로 안정적인 노후 생활을 위해 세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로 부동산 자산의 비중을 줄이기를 제안한다.
김도훈씨는 전체 재산 중 부동산 자산의 비중이 73.68%로 자산10억~50억 보유자의 평균 비중인 50.2%보다 매우 높다. 대지 및 임야의 가격이 올라가서 양도차익이 크게 발생하는 것을 기대하기 보다는 무수익 부동산을 매각해 수익이 창출되는 금융자산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둘째로 금융자산의 자산배분 비중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기를 제안한다.
현재 금융자산의 기대수익률은 연7.8%이며, 위험(표준편차)은 11.19%이다. 합리적 자산배분 전략을 통하여 제안한 자산배분의 기대수익률은 연7.85%로 현 상태보다 높으며, 위험도 10.94%로 낮다.
셋째로 금융자산 투자에서 절세전략 활용을 제안한다.
2013년부터 이자와 배당을 합친 금융소득이 2000만원 이상이면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에 해당되어 높은 세율이 적용 될 가능성이 커졌다.
제안한 포트폴리오에는 시장중립형 롱숏펀드, 국민주택3종채권(제로쿠폰), 브라질 국채 등의 절세 및 비과세 상품을 편입 하여 금융소득종합과세에 해당 될 확률을 낮췄다.
미국의 대표적 부자인 앤드류 카네기는“통장에 많은 돈을 남기고 죽는 사람처럼 치욕적인 인생은 없다. 재물은 남을 위해 사용될 때 더욱 빛을 발한다”라는 말을 남기며 생전에 부의 사회 환원을 실천했다.
동호회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경험을 적극 공유하며, 전시회, 뮤지컬 등 문화예술 행사 관람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골프 등을 중심으로 스포츠 여가 활동에 적극 참여해 개인적으로 행복한 노후를 보냄과 동시에 사회공헌 기부 및 활동 등의 공동체적 행복에도 관심 갖기를 바란다.
전북 순창군이 농업인에게 중고 농기계를 알선해 주는 '중고 농기계 소개소'를 운영한다고 11일 밝혔다.
순창군은 최근 경기 침체와 영농 자잿값 인상 등 경영 압박으로 고가의 새 농기계를 사는 대신 중고 농기계를 사려는 농업인이 늘고 있어 농기계 임대사업소 내에 중고농기계 소개소를 운영키로 했다.
현재 군내에는 경운기 4024대를 비롯해 트랙터 1283대, 콤바인 458대 등 1만 2224대의 농기계가 보급돼 있다.
농업인은 농기계 가운데 불필요한 중고 농기계를 팔려고 해도 이를 필요로 하는 농업인과 연결이 안돼 버려두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군은 '중고 농기계 소개소'를 개설하고 징검다리 역할을 해 농업인에게 편의를 제공키로 했다.
농업기술과 김도훈 담당은 "중고 농기계 소개소는 농업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제도로 농업인의 편의 제공은 물론 농기계 이용률이 크게 높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고 농기계에 대한 문의는 농업기술센터 인력육성 농기계사업소(☎063-650-5141)로 연락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