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깊은 옛길과 불교 유산을 함께 답사할 수 있는 명품 코스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미륵대원지를 탐승 기점으로 삼는다. 하늘재 정상까지는 약 2km. 정상에선 다시 원점으로 회귀한다. 재 너머 반대쪽 길이 끊겼기에.
옛날 이름은 계립령, 요즘은 하늘재로 부른다. 옛길 중에서도 옛길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옛길이다. 고증할 수 있는 역사로 볼 적에 그렇다. ‘삼국사기’는 적시하고 있다. 신라 초, 156년에 이 길을 열었다고. 근 2000여 년 전에 생긴 길이니 아득하다.
두 발 달린 사람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마다 의미심장한 산길이 열렸겠지. 하늘재보다 더 오랜 길이 왜 없으랴. 역사가 채록하지 않은 고갯길들이 그 얼마나 많으랴.
그러나 인간은 시간 저편을 보는 눈이 없어 역사를 빌려 사라진 과거 한 줌을 움켜쥔다. 없는 게 시간을 보는 눈뿐이랴. 삶을 보는 눈이 없어 편견에 기대어 내가 아는 것만 우기며 산다. 사랑을 보는 눈이 없어 편린으로 남은 추억을 쥐어짜 아픔을 아로새긴다.
하늘재 옛길로 접어든다.
겨울 숲의 알싸한 냉기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완만한 흙길이라서 걷기에 좋다.
물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작은 계류에 서린 물빛이 투명하다. 거기에 무엇이 있나? 들여다보니 송사리 떼가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무슨 열정으로, 무슨 정념으로 온몸을 휘저어 흐름을 거스르는가. 그러나 거스름이란, 거역이란, 살아 있는 증빙이기에 순연(純然)이다.
삶의 고역스러움은 거역해야 할 때 거역하지 못한 응징으로도 주어지는 게 아닐지. 우리는 얼마나 자주 타성에 젖어 생활에 순종해왔던가. 얼마나 자주 본연을 잃은 굴종으로 ‘쌩쇼’를 일삼았던가.
송사리들의 용을 쓰는 역행엔 남세스러운 게 하나 없다.
잠깐의 걸음만으로도 숲의 안통에 닿는다. 숲이 깊어 나무들과 가까워진다.
헐벗은 저 나무들. 헐거운 저 표정들. 초록 이파리를 무성히 달아야만 생동하랴. 얻어 걸친 것 없이 태연한 겨울나무들도 알고 보면 씨억씨억 거센 숨을 토한다. 숲 그늘 새로 비집어 든 햇빛 한 조각이면 거뜬하다. 햇빛과 물과 공기만으로도 평생을 말짱히 사는 나무들의 청빈한 삶이라니….
그에 비해 인간의 삶은 얼마나 비경제적인가. 나무가 남이 아니라지만, 남이 아니기 이전에 어쩌면 고등한 선생님이다.
길은 굽이굽이 연신 휘어진다.
경사도가 낮아 숨찰 게 없다.
새소리마저 그쳐 그지없이 고요한 오후다.
쥐죽은 듯 조용한 숲길이다.
음미할 만한 적막이다.
욕조에 몸을 담그듯이 고요에 마음을 담근다. 그러자 새삼스럽게 귀가 열린다. 두 귀를 마냥 열어두는 건 산 아래 저자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지금 이 순간엔 들을 수 없는 것들마저 듣는 기분이다.
일테면 메마른 낙엽들의 밀어를. 나무가 나무를 어루만져 내는 첼로의 저음을. 또는 하늘재 길 공사를 하는 신라인들의 두런거림을. 귀에 고이는 상상의 독주(獨奏), 들을 수 없는 걸 듣는 청각의 뻥에 나는 기꺼이 속는다. 만상의 비밀을 품은 고요가 주는 선물이라 믿기에.
하늘에 닿을 지경으로 높고 가파른 잿마루라 하늘재? 그렇지 않다. 해발 525m로 그다지 높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다. 경탄할 만한 산경을 펼쳐보이지도 않는다. 아마도 하늘 아래 처음 열린 길이라는 뜻으로 지어 붙인 이름이리라.
신라의 드높은 이상을 유비(類比)한 지명으로도 손색이 없겠지. 신라가 이 길을 개설한 게 민생의 편익만을 위해서였겠는가. 영토 확장의 욕망과 군사적 요충 확보라는 계산까지 실린 길이지 않겠는가.
하늘재의 쓰임새는 실로 다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날의 고속도로에 맞먹을 핵심 도로 인프라였으며, 불교문화의 유통 교차로였고, 툭하면 창검이 각축하는 전장(戰場)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멀지 않은 문경 새재에 열린 새로운 고갯길이 각광받으면서 하늘재의 이용 빈도가 낮아졌다. 종단엔 잊히기에 이르렀다.
하늘재 마루에 올라서자 전망이 탁 트인다. 백두대간 첩첩준령들이 출렁거린다.
마의태자도 저 헌걸찬 산 물결을 바라봤을까. 신라 패망의 한에 겨워 명멸하는 세사의 덧없음을 한탄했을까. 고증할 방법이 없으니 전설일 뿐이지만, 마의는 하늘재를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하늘재 들머리에 있는 미륵대원지의 미륵리석불입상도 마의가 세웠다 하고.
하늘재에서 펼쳐진 인간사의 영욕과 부침의 드라마는 이미 연기처럼 사라졌다. 시간의 파괴력 앞에서 그 무엇인들 지속할 수 있으랴.
자연은 인간사와 달라 고요처럼 의연하다. 그저 유유자적으로 영속한다. 따져놓고 보면 놀랄 만한 대비이지 않은가.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어릴 적 이 노래를 부르면서 궁금한 점이 많았다. ‘정말 산봉우리가 1만 2천 개나 될까? 산이 대체 얼마나 큰 거야? 그 정도면 산맥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그 많은 봉우리는 누가 센 걸까?’ 등이다. 연전에 어느 신문 칼럼에서는 1만 2천 봉은 봉우리 수가 아니고 금강산 속 절들의 부처님 숫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게다가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한 산’이란다. 물론 노랫말이라 미화시켰겠지만, 여간 궁금한 게 아니다. 가 볼 수 없으니 더 답답하다.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둔 이런 생각을 다시 끄집어낸 것은 금강산의 화가 ‘소정 변관식의 40주기 전’이다. 그림으로나마 의문을 풀고 대리만족이라도 해볼 양으로 성북미술관에 들렀다.
성북미술관은 해마다 이름난 화가의 기획전뿐만 아니라 예술 영화 상영도 해서 자주 찾는 곳이다. 위치도 성북동 언덕배기라 조용하고 새소리도 들리니 퍽 평화롭다. 그러나 더 큰 즐거움은 끝난 후에도 있다. 출출한 배에 얼굴 크기만 한 옛날 왕돈까스냐 감칠맛 넘치는 돼지 불고기냐 하는 이 지역 명물을 고르는 것도 성북동을 찾는 적지 아니한 이유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변관식의 산수화는 적묵법(옅은 색 먹부터 짙은 색 먹으로 그 위에 먹을 쌓아가는 방법)과 파선법(진한 먹을 튀기듯 찍어 선을 파괴하는 방법)을 사용해 금강산의 깊은 산중과 그 기백을 힘차게 드러냈다. 작가의 대표작 을 보면 한가운데 힘차게 솟은 봉우리가 하늘을 향해 쭉 뻗은 기상이 그의 기법과 잘 어우러진 걸작이다.
그의 산수화 중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 하늘 향해 쭉쭉 뻗은 산세 사이에는 쬐끄만 집이 한두 채 있고 사람들도 간간이 있다는 점이다. 사람 중에는 지팡이를 45도쯤 뻗쳐 들고 도포 자락 휘날리며 어딘가를 바삐 가는 선비도 있다. 평민들의 모내기, 아낙의 새참 나르는 모습 등 그 시대의 풍속도 담겨 있다. 계곡 물은 산세에 비해 마냥 부드럽게 흐른다.
하지만 후딱 보아서는 알 수 없고 숨은 그림 찾듯 유심히 들여다보아야만 보인다. 여기서 작가의 마음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절 묵묵히 금강산을 그리며 세월을 낚는 모습이다. 그의 사진 속 굳게 다문 입은 그 시절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닮았다. 그 강인한 정신 속에 부드러움과 해학은 쬐끄맣게 그림 속에 숨어 있다. 그의 말대로 ‘욕심 없이 지묵에 싸여 살아온 나의 지난날’이 그림에 녹아 있다.
문득 아버지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 왕건에게 바치자 모든 것을 버리고 금강산에 숨어든 마의태자가 떠오른다. 그의 뜻이 어떻건 간에 금강산은 한 나라와 바꿀만한 폭과 깊이를 지닌 명산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한평생을 금강산에 바친 화가의 마음도 그렇지 않았을까. ‘고희가 지나 7년이 지났는데도 그림에 대한 정열이 더욱 강렬해진다.’라는 작가의 고백은 그런 의미에서 금강산에 바치는 헌사일 것이다.
금강산의 한 귀퉁이나마 그림으로 보니 그 속살을 살짝 엿본 듯 갈증이 조금은 풀린다. 옛 그림과 먹의 정취도 좋지만, 숨은그림찾기도 참 재미있었다. 그러나 일만 이천 봉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봉우리를 세다가 어느덧 숫자를 잃어버렸다. 그렇다. 그것은 꿈의 숫자다. 봉우리 세기는 다음번 전시에서 다시 도전해 보기로 하고 미술관 문을 나섰다.
용문사 가는 도로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도로 양 편으로 길게도 이어진다. 우수수 낙엽이 떨어져 만추의 여정이 가득한, 휘어진 길. 그 뒤로 아스라이 옛 추억 한 자락이 떨어지는 낙엽 위로 오버랩된다. 형형색색으로 변한 산야 속에 유난히 노란 단풍잎이 눈을 시리게 한다. 이렇게 도로변에 은행나무를 심어 놓은 것은 용문사에 노거수 은행나무가 성성하게 버티고 있음을 알려주려 함이었으리라.
◇ 단풍 든 한적한 산길에서 만난 정지국사부도
용문사의 가을은 화려하다. 해마다 이곳의 아름다운 가을을 만나기 위해 많은 행락객들이 찾아든다. 주차비(소형 3000원)와 입장료(성인 2000원)를 내고부터는 누구나 걸어야 한다. 입구 쪽에 단풍 든 공원 앞으로 2007년에 개관한 양평 친환경 농업박물관(용문면 신점리 508-10, 070-7715-3796, http://sam.go.kr)이 있다. 옛 성루를 연상케 하는 한옥 모양의 박물관 앞으로 분수가 솟구친다. 유치원생들은 그 모습을 보고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아이들 눈 속에는 감성이 많이도 묻어 있는 듯하다. 실내에는 양평역사실과 친환경농업실이 있고 사찰요리를 만들어보는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주변의 공원에는 아이들 취향인, 귀여운 조형물과 시비 등이 많이 눈에 띈다. 사자상 양 귀 쪽으로 수도꼭지를 달아 놓은 모습도 해학적이다.
다리를 건너면 일주문이지만 이번 여행길에는 곧추 정지(正智)국사부도 팻말(0.5㎞)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산길은 큰 도로와는 달리 한적하다. 아직 걸음이 서투른 유치원생들과의 눈높이 대화가 싱그럽다. 부도까지 올라가야 하는 길목은 붉은 단풍이 에워싸고 있다.
우선 정지국사탑비를 만난다. 비문은 권근이 지은 것이라지만 글자가 거의 마모되어 버렸다. 80m 정도 오르면 정지국사부도(보물 제531호)가 홀로 있다. 정지국사(1324∼1395)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고려 충숙왕 복위 1년(1332), 8세 때 장수산 현암사로 동진출가(童眞出家)했다. 바로 선을 닦다가 능엄경을 배워 깊은 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공민왕 2년(1353)에는 무학과 함께 원나라로 가서 지공을 스승으로 한 나옹의 제자가 되었다. 1356년, 귀국해서는 은둔하면서 수행에만 힘썼다고 한다. 천마산 적멸암에서 “나는 간다”는 말을 남기고 법랍 54세로 입적했다. 제자 조안이 이곳에 부도와 비를 세웠고, 나라에서는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생전에 개풍 영천사의 대장경을 용문사로 옮겨 봉안했다고 한다.
사찰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는 무수한 돌탑이 있다. 넓은 터에는 ‘산사무공(山寺武功)’이라는 손 글씨가 쓰여 있다. 무공 템플스테이가 펼쳐지는 곳이며 108탑을 조성하는 듯하다.
◇ 국내에서 가장 큰 용문사 은행나무는 단풍 들기도 더뎌
조금 더 내려오면 용문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다. 경내의 건축물과 함께 단풍 든 용문산(1,157m)이 한눈에 조망되는데, 무엇보다 커다란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 높이 50m, 둘레 12.3m)에 눈길이 머문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뿌리가 내려 이처럼 성장한 것이라고 전해오는 국내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다. 수령이 대략 1100여 년에서 1500여 년으로 추정된다. 정미의병 때 톱을 댔더니 피가 났고, 불을 질렀을 때도 이 은행나무만 타지 않았던 신목(神木). 노익장을 과시하듯 잎이 무성하고 주변 나무들보다 단풍도 더디 든다.
경내 약수에 목을 축이고 잠시 둘러본다. 이 사찰은 진덕여왕 3년(649)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진성여왕 6년(892)에는 도선국사가, 고려 공민왕 때는 나옹선사가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세종 29년(1447)에는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의 원찰로 삼으면서 대대적으로 중건했다. 조선 초기에는 절집이 304칸이나 들어서고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일 만큼 번성했다고 한다. 그 후 왜군이 전소시켰고 6·25 때도 파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을 비켜날 즈음, 찻집 솔내음, 다래향에서 맛있는 대추약차의 그윽한 향내에 취해보거나 용문산 정상까지 산행을 해도 된다.
◇ 상원사에 오르면 속세의 번뇌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
굳이 산행을 안 해도 된다. 찻길이 잘 나 있기 때문. 상원사 입구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석불부터는 민가가 사라진다. 울창한 숲 사이로 차 한 대가 갈 수 있는 임도 운전이 아슬아슬하지만 잠시 차를 멈출 수 있는 공간이 반갑다. 시원한 물줄기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그곳에도 아름답게 단풍이 들었다. 물소리, 새소리, 단풍 숲까지 어우러져 사랑스러운 길이다. ‘무릉도원’이 여기구나 싶을 생각이 절로 드는 곳. 찻길이 끊어지는 곳에서 누군가 정성스레 가꿔 놓은 텃밭, 작은 연못, 깎아지른 듯한 언덕에 잘 쌓은 돌담이 해사한 웃음으로 반긴다.
돌계단을 따라 경내에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 3층석탑을 에둘러 대웅전, 선방으로 이용되는 청운당, 요사채인 제월당이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는 삼성각이다. 절 마당, 트인 공간 저 멀리 용문산 능선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상원사는 창건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 보우선사(1301∼1382)가 여기 머물며 정진했다고 전해온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조안선사가 중창했으며 무학대사(1327~1405)가 왕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수행했다.
또 효령대군(1396~1486)은 원찰로 삼았다. 세조 8년(1462)에는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러 찾아왔다가 중창불사를 했다고 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 순종 원년(1907)에 왜병이 이 지역에 집결해 있던 의병을 소탕하기 위해 불을 질러 법당만 남겨놓고 모두 타 버렸다가 1918년에 복원했으나 6·25 때 모두 불타 버렸다. 이후 1969년이 되어서야 주지 덕송이 초막삼간을 짓고 복원에 착수, 1970년에 주지 경한니가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원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사자석상을 닮았지만, 정확한 형태가 아닌, 예사롭지 않은 조형물이다. 땅속에서 나온 유물들을 한데 조합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란다. 또 사찰 내에는 철조 여래좌상(경기문화재자료 제119호)이 있다. 상원사 가까이 있는 윤필암은 고려 중엽 모덕이 창건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다.
◇ 보릿고개 연수리 정보화 체험마을의 돌담 따라 걷기
상원사에서 내려오면 ‘연수리 보릿고개 정보화 체험마을’을 만난다. 연수리는 연안마을과 장수마을을 합해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예로부터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장수골’이라고 불렸다. 현재 보릿고개마을은 성공한 정보화마을이다. 다양한 체험거리는 계절에 맞추어진다. 봄에는 산나물 채취, 냉이 캐기를 하고 여름에는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긴다. 가을에는 밤 줍기와 등산을, 겨울에는 청국장 만들기 등의 체험을 한다.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고, 돌담장에 형형색색으로 색칠해 볼거리를 준다. 사계절 체험객들이 줄을 잇는다. 특히 슬로푸드 음식체험이 인기다. 보리떡 직접 만들어보기, 지천에 난 쑥을 직접 뜯어 쑥떡 만들기, 농민들이 재배한 국산 콩으로 두부 만들기, 잘 익은 호박으로 호박밥 지어 먹기 등. 체험객들이 늘 찾는, 성공한 체험마을이다.
마을을 비켜 용문으로 오는 동안에도 눈이 시리다. 곳곳에 멋지게 지은 전원주택들이 구슬처럼 박혀 이국적인 모습을 자아낸다. 그리고 경기도 영어마을 양평캠프도 있다. 실제 미국 버지니아의 마을을 재현한 이국적인 캠퍼스다. 그래서 와 등 드라마 촬영지로도 이용되었다. 학습 목적이 아닌 관광객들은 6000원이라는 입장료를 감수해야 한다.
용문면에도 할 거리가 있다. 레일바이크(031-775-9911, http://www.yprailbike.com)를 탈 수 있다. 용문면 삼성리∼양평읍 원덕리까지 왕복 6.4㎞ 구간이다. 또 용문장날(5일, 10일)도 볼만하다. 국철이 생기면서 장날은 제법 구색을 갖춰가고 있다. 지역에서 나오는 가을 특산물을 파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Travel Tip
- 주소
용문사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문의 : 031-773-3797, http://www.yongmunsa.org
상원사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220-5, 문의 : 031-773-4634
보리울체험마을 문의 031-774-7786, http://borigoge.invil.org
기타 문의 양평군청 문화관광과 : 031-773-5101
- 찾아가는 방법
자가용 서울 → 6번국도 이용 → 마룡교차로에서 341지방도로로 좌회전 → 덕촌삼거리에서 직진 → 용문산 관광단지 주차장
대중교통 수도권전철 중앙선이 용문까지 운행(2009년 12월 개통)되고 있다. 용산역~용문역(05:20~22:58) 약 1시간 30분 소요. 용문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용문사, 연수리행 등 각 방향 농어촌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문의 용문시외버스터미널 : 031-773-3100, 용문역 : 031-773-7788
- 추천 맛집
용문산 입구에 중앙식당(031-773-3422), 한마당식당(031-773-5678), 용문산식당(031-773-3434) 등 산채요리 음식점이 있다. 그외 용문에서 다소 떨어져 있지만 무쇠솥에 오랫동안 달여 낸, 국물 진하고 고기 넉넉한 고바우집(031-771-0702, 설렁탕)을 비롯하여, 이북식 만두가 맛있는 회령만두국(031-775-2955)이 괜찮다. 용문읍에 있는 강원식당(031-773-4459, 막국수, 묵채밥 등)도 괜찮다.
- 주변 볼거리
용문산에는 용계, 조계골(신점1리)이 있다. 또 용문면에서는 레일바이크(031-775-9911, http://www.yprailbike.com)를 탈 수 있다. 2010년 5월 3일 개장되었고 용문면 삼성리에서 양평읍 원덕리까지 왕복 6.4㎞ 구간이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19세기의 위대한 발견 중 하나인 아스피린. 독일의 화학자인 호프만이 아버지의 고통을 줄이기위해 버드나무 잎과 껍질을 이용하여 해열 진통제인 아스피린을 발견했다. 최근 겨울이면 해년마다 우리나라 축산 농가를 긴장시키고 피해를 주고 있는 조류독감의 치료제인 타미플루는 중국남부에서 자생하는 스타아니스(팔각)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성분을 이용해서 만들고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종류는 지금까지 175만종이 밝혀졌는데,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생물종의 수는 약 10만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이중 식물은 4310종정도다.
그러나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약효나 이용방법이 개발된 식물은 5%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니니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개발이 필요할 것이다.
그 중 우리나라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어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책갈피 속에 끼워두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추억을 꿈꾸던 나무가 은행나무다. 은행나무에는 플로보노이드가 들어 있어서 유충이나 곰팡이 바이러스들을 살균, 살충해주는 역할을 하므로 책을 오래 보관하게 해준다.
은행나무는 약 2억년전인 중생대부터 지구상에 존재해온 나무로 은행나무과에는 은행나무만이 유일하게 현존하는 종이며 다윈은 은행나무를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말했다. 은행은 익혀서 먹으면 폐를 따뜻하게 하고 기를 늘리며 기침과 천식을 가라앉힌다. 본초강목과 중약대사전에서는 심장의 기능을 돕고 설사를 멎게하며 야뇨증 냉증 주독해소 강장작용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은행잎 추출물은 현기증, 이명, 두통, 기억력상실, 집중력장애 개선에 효과가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은행잎은 다른 나라 은행잎에 비해 효과나 성분이 10배 이상 높다고 한다. 한때는 외국에 수출까지 하던 효자 상품이기도 하다. 은행잎 추출물을 이용해 개발된 징코민은 혈액순환촉진재로 혈소판이 응고되지 않도록 점도를 낮추어주고 혈관을 확장하는 역할로 인해서 심장병을 예방하기도 하고 당뇨병으로 피가 굳어져 괴사가 일어나는 것을 예방한다. 중국의 마오쩌둥도 평소에 은행잎을 달여 먹으면서 건강을 유지했다고 한다.
은행은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잔주름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으며 은행잎에 들어있는 플라보노이드 성분은 세포막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기도 해 화장품원료로도 사용되고 있다.
열매는 당질, 지방질, 단백질이 주성분이며 카로틴, 비타민, 칼슘, 칼륨, 인, 철분 등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술안주로 많이 이용되고 최근에는 은행이 첨가된 소면, 칼국수, 과자류로 개발되고 민간요법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나무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나무가 용문산 용문사에 있는 은행나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세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슬픈 여행길을 가는 중에 심었다 하기도하고 신라의 고승인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고 간 것이 나무로 되었다고도 한다.
이제 완연한 봄이 되어 꽃 봉우리들이 살포시 올라오고 있다. 봄이 되면 우리주변에 약이 되고 우리건강에 유용한 나무 한그루씩 심어 가족과 이웃의 건강을 지키는데 일조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