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인데도 바다 위에 띄워진 고깃배는 정지화면처럼 가만히 멈춰 있다. 바위섬 저편으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선을 고정한 채 바다를 향한 낚시꾼의 뒷모습이 한가롭다. 물때에 맞춰 바닷길이 열리면 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어서 당도하는 작은 섬의 기적을 날마다 마주한다. 바다를 앞에 두고 있는 그저 적요하기만 한 카페는 감성을 품었다.
섬이라는 음절이 전하는 서정성은 쓸쓸함과 평온함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런 섬 안으로 찾아드는 자발적 고립이 주는 진정한 휴식, 더 볼 것 없다. 섬의 군락 고군산군도로 떠난다.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 대장도. 다섯 개의 섬이 내륙과 다리로 연결된 고군산군도는 새만금방조제를 관통하며 섬으로 향한다. 시원하게 뚫린 30km가 넘는 방조제 도로가 바다를 가로질렀다. 길목마다 전망대와 쉼터가 마련돼 있고, 그중에 해넘이 휴게소는 신비로운 일출과 일몰을 보여주는 곳이다. 고군산군도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고즈넉한 섬마을 야미도의 평온함도 스쳐 지나간다. 고군산군도에 닿기 전부터 가슴 확 뚫리는 풍광이 반기는 새만금방조제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이기도 하다.
다도해 절경을 한눈에, 신시도
전북 군산시 남서쪽에 위치한 고군산군도는 6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옛 군산의 섬 무리’라는 뜻의 고군산군도는 그 옛날 중국 사신 서긍이 고려 방문기를 남긴 견문록 ‘고려도경’에서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이라고 표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천혜의 경관과 생태자원으로 고군산 8경으로 불리며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중에 가장 먼저 신시도에 닿는다. 새만금방조제와 곧바로 연결된 고군산군도의 관문이며, 군도 중에서 큰 규모에 속하는 섬이다. 섬을 둘러싼 199봉에서 월령봉과 대각산으로 이어지는 신시도 산행은 산과 바다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코스라서 찾는 사람이 제법 많다. 계절이 무르익을 때면 고운 단풍이 달빛 그림자와 함께 바다에 비친다는 월영단풍은 고군산 8경에 속한다.
섬 속의 국립신시도자연휴양림은 우리나라 최초로 바닷가에 지어진 친환경 휴양림으로 매월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숙박과 상관없이 입장료만 내면 휴양림 주변 탐방이 가능해서 평소에도 산책이나 트레킹을 위한 방문객들이 찾아든다. 산책로를 걸으며 만나는 달맞이 화원이나 전망대를 지나면서 마주하는 숲과 탁 트인 바다는 복잡한 도시를 떠나온 이들에게 해방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상쾌한 공기 속에서 내다보는 저 멀리 고군산대교의 주탑과 섬들이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원시적 풍광과 SNS 감성 품은 무녀도
신시도에서 곧바로 무녀도로 건너오면 따스한 섬마을 풍광이 맞아준다. 섬에 들면서 무녀도라는 지명이 혹시 김동리 소설 ‘무녀도’와 관련 있을까 생각했지만 섬 이름의 유래는 따로 있었다. 섬의 형태가 마치 장구와 술잔을 놓고 춤을 추는 무당의 모습처럼 보여 무녀도라 불렸다고 한다.
무녀도에서는 단연 쥐똥섬이 볼거리다. 섬마을 앞바다 저편으로 몇 걸음도 안 된다. 물때에 따라 바닷길이 열리면 질펀한 갯벌 사이로 섬까지 걸어가는 풍경은 그림처럼 아련하다. 쥐똥섬 해안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나타나는 똥섬 역시 독특하다. 약 9000만 년 전의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무녀도의 똥섬은 시간이 만들어낸 지질구조를 보여준다. 똥섬을 옆에 두고 자리 잡은 펜션 아래로 연결된 데크를 따라 걸어가면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근래 들어 사람들이 무녀도를 찾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섬 앞에 시선을 끄는 노란 버스 때문이다. 마을 주민들이 스쿨버스를 개조한 것이다. 무녀 2구 마을버스라는 버스 카페는 서해 오션뷰가 끝내준다. 청량한 바다와 푸른 하늘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만들어내는 섬 풍광은 비길 데 없이 아름답다. 이뿐 아니라 젊은 층에게 무녀도가 핫플로 소문난 데는 이국적인 버스 옆에 자리한 방탄소년단의 RM 벽화도 한몫한다. 오래된 바닷가 마을의 원시적 풍광과 함께하는 무녀도는 지금 SNS 감성이 풀풀 나는 매력 또한 품고 있다.
신선이 노닐던 섬에서 한나절, 선유도
무녀도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선유도다. 예전부터 고군산군도의 섬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섬이다. 섬 북단의 봉우리 형태가 마치 두 신선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 선유도다. 이름조차 신선이 놀던 섬이라는 선유도(仙遊島)는 군도의 중심 섬이다.
겨울 끝자락인데도 해변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선유 8경 중 하나로 고운 모래가 10리나 깔려 있어서 명사십리해수욕장으로 불리는 해변 너머로 망주봉이 듬직하다. 그 옛날 억울하게 유배된 충신이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했다는 유래가 깃든,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3호인 망주봉이 물이 빠져나간 갯벌을 내려다보고 있다. 여름철엔 망주봉에서 떨어지는 빗줄기가 폭포수가 되어 시원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석양이 지는 바다가 붉게 물들어 장관을 이루는 선유낙조(仙遊落照)는 선유 8경의 으뜸이다. 요즘은 액티비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바다 위에서 즐기는 짚라인이나 전기 스쿠터와 자전거, 섬 투어를 위한 유람선, 도보 산책이나 갯벌 체험 등의 재미거리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주변에 옥돌해수욕장의 선유봉 등산길과 명품 데크길도 찾아볼 만하다.
아니 온 듯 다녀가시오, 장자도와 대장봉
이제 선유도 맞은편의 장자도를 가기 위해 장자대교 위를 달려간다. 장자도는 대장도를 가기 위한 길목인데 장자도의 호떡마을이 유명해서 오가는 여행자들의 손에 호떡 하나씩 들린 걸 쉽게 본다. 장자도에 딸린 대장도는 선유도나 무녀도에 비해 작은 섬이지만 오밀조밀한 섬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섬 깊숙이에서 맛보는 자발적 고립의 행복을 누려볼 만한 포인트다.
고군산군도에 들어섰다면 대장도의 대장봉을 빼놓을 수 없다. 오르는 코스는 두 군데 길이 있는데, 우측 장자할머니 바위 쪽 계단길이 수월한 편이다. 비밀의 정원처럼 좁은 숲속을 걷는 듯하다가 정자 쉼터에 앉아 잠깐씩 숨을 고르고 올라야 한다. 해발 140m 정도지만 절대 만만치 않다. 정자 쉼터 기둥에 쓰인 ‘아니 온 듯 다녀가시오’ 글귀를 보면서 잠시 쉬었다가 구불길과 무섭게 경사진 계단을 다시 올라야 한다. 숲길 옆으로 바다를 향한 할머니바위는 아기를 업은 여자가 밥상을 든 모습이라고 한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간 남편이 급제하여 돌아오자 아내는 정성을 다해 상을 차려 내왔건만 남편이 데려온 소실을 보게 되었고, 서운한 마음에 그대로 굳어서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숨차게 가파른 길을 오르고 섬에 담긴 이야기를 마주한다. 아시아의 숨은 명소로 CNN에서도 소개했던 고군산군도의 대장봉이다. 이윽고 마주하는 잔잔한 서해의 아스라한 섬 무리들이 자아내는 기운을 선사받는다. 땀을 식히면서 일몰 속에 잠긴 신비로운 섬 무리를 바라볼 수 있다면 더없는 행운이다. 크고 작은 섬들이 어우러진 다도해의 평화로운 풍광에 차분하게 압도당하는 순간이다.
캐릭터를 만나 위태로우면서도 설레는 낭만을 느끼고, 한 인물의 인생을 곱씹는 고독한 과정을 차곡차곡 걸어간다. 나이 들수록 깊어지는 감정과 걷는 길에 대한 신뢰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내딛도록 인도한다. 연기가 곧 삶인 배우 예수정(67)의 이야기다.
“릴케 이야기라면 언제든 하고 싶어요.”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그가 말했다. 배우 예수정은 독일의 시인 릴케가 좋아 독어독문학과에 진학했고, 독일의 극작가이자 연출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말에 매료되어 연극을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그와의 이번 인터뷰는 릴케와 함께 떠나는 여행 같았다.
여행하듯 쉼이 되는 연극
예수정은 2000년대 들어 ‘도둑들’, ‘부산행’, ‘신과함께: 죄와 벌’ 등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와 ‘비밀의 숲’, ‘원더우먼’ 등 인기 드라마에 출연하며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다. 하지만 그가 연기를 시작한 건 연극을 하고 싶어서였다. 1979년 ‘고독이란 이름의 여인’이라는 연극으로 데뷔했다. 이어 ‘과부들’, ‘밤으로의 긴 여로’, ‘화전가’ 등 많은 연극 무대에 올랐고, 히서연극상, 한국여성연극인상 연기상, 이해랑연극상 등 권위 있는 상을 휩쓸었다.
연극을 시작한 이유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극장은 시민의 계몽 공간’이라는 말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연극이란 언제나 스스로 계몽되고 관객을 계몽시키는 매개체다. 그는 매 순간, 매 작품마다 자신부터 계몽된다고 했다.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연기자라는 직업이 관객으로부터 관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관객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제게 계몽은 알람이에요. 알람을 듣고 깨어서 자신을 잘 들여다보는 것이죠. 사회 속에 있는 나를 살펴보는 거예요. 사회의 어떤 부조리함에 대해 깃발을 들고 나서란 의미는 아니에요. 하지만 눈앞에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 생각하라는 거죠. 이마에 등불 하나 켜고 내 안과 밖을 비추며 보는 거예요. 브레이트는 그렇게 관객의 따귀를 때리며 연극임에도 현실을 생각하도록 이질감을 주죠. 실생활을 체에 쳐서 걸러내면 굵은 입자들이 위에 남잖아요. 연극은 그렇게 입자들이 딱 보이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작품 자체를 좋아하죠. 극을 통해 나부터 계몽되고, 그렇게 설레고, 그런 설렘을 극장을 찾는 사람들과 공감하고 싶은 거예요.”
그에게 연극은 쉼이자 기쁨이다. 매일 같은 장면을 연습하지만 언제나 예측불허의 상황이 벌어지고 자신을 거기에 내던진다. 그 과정이 마치 여행 같단다. “연극은 매일 같은 장면을 연습하잖아요. 2주간 하는 연극이어도 이전에 석 달씩 연습을 했어요. 매일 똑같은 상황이지만, 매번 달라요. 마치 우리 삶처럼요. 아침에 눈 뜰 때마다 하늘색이 다르고 심장 두근거림이 다른 것처럼, 일부러 다르게 연습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연극 무대와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하고, 44년 동안 연기를 하면서도 지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결이 다른 공간에서 연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연기자나 배우라고 인식하기보다 그저 공연이라는 장르를 즐겼다. 오히려 드라마나 영화 작업을 하며 배우라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고.
“관객석이 안방 극장, 시네마 극장, 인터넷 극장으로 바뀐 거죠. 연기를 하면서 느끼는 현장감은 작업을 하는 당시에만 느껴요. 그리고 완성된 작품이 공개될 때 관객과 연결되는 것이죠. 연극하고는 조금 달라요. 그럴 때는 배우라는 걸 느끼기도 하지만 사실 내가 배우라는 건 거의 잊고 살아요.(웃음)”
철학과 고독을 곱씹다
릴케는 실존주의를 예언하며 현대문학의 문을 연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그에게 시는 삶 그 자체였다. 예수정 역시 그렇다. 그에게 연기란 삶 그 자체다. 44년이라는 연기 인생에서 주인공을 맡고 싶다는 갈증은 없었는지 묻자, 그는 “어떤 역할이든 하나의 인생이기 때문에 무게감도 같다”고 답했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각 캐릭터가 가진 서사에 집중하고 그의 철학을 곱씹는다. 연극에서 주인공은 작품의 기승전결이라는 파도를 여유 있게 타야 한다. 조연은 주인공의 그림자로 서사에 맞는 뒷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는 캐릭터의 희로애락이라는 파도를 타며 수영한다. 특히 낭만을 느꼈던 작품이 있냐고 묻자, ‘밤으로의 긴 여로’라는 연극에서 맡았던 어머니 역 ‘메리’에게서 낭만을 느꼈단다. “낭만은 위태로운 설렘 같아요. 느닷없이 계산하지 않고 나를 다 내어줄 것 같은 느낌이에요. 나를 다 준다는 건 위태롭죠. 그러면서도 설레는 것이 낭만 아닐까요?”
‘밤으로의 긴 여로’는 그가 직접 제작하고 좋아하는 후배들과 함께 올린 무대다. 제작비가 부족해 집에 있는 가구들을 가져와 무대를 꾸며야 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을 할 때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는지, 공연을 끝까지 마치고 나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생각했다. 이때부터 그는 ‘여분의 삶을 산다’는 마음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는 작품이나 캐릭터가 가진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60대 후반에 접어든 요즘은 작품이나 역할의 철학을 고르는 기준이 과거와 달라졌는지 물었다. 인간 예수정으로 역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물 자체로서 조금 더 바라볼 수 있게 됐다는 답이 돌아왔다.
“젊을 때는 악한 역이 궁금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저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하는 걸까’ 그 인물의 타당성이 궁금해지더라고요.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맡았던 장 회장 역이 딱 그랬어요. 그 사람은 선과 악을 구분하기보다 나의 목표를 향해 가장 확실하게 걸어가는 게 내 인생이고, 그 외의 것들은 쳐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목표를 위한 수단을 쓴 거지 비겁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둘러대지 않고 솔직한 거죠.”
어떤 한 인물의 인생의 서사를 생각하며 연기한다는 점에서 배우는 탐구하는 직업이다. 특히 작품이나 캐릭터의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였으니, 맡은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연구하는 과정은 오롯이 혼자 지나가야 하는 고독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고독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누구에게나 고독한 순간이 있어요. 처음 고독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는 서럽거나 불안한 마음이 있겠죠. 그런데 그 불안함을 살짝 걷어내면 나에게 굉장히 좋은 시간이 와요. 고독은 타인,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들의 인생에 끼어들 자리가 없을 때 느껴지는 것이에요. 그때가 바로 나와 온전히 만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막연한 불안감이 사라지기 전까지 우리는 자연을 찾게 된다. 그 안에서 나 자신을 더욱 밀착시키게 된다. 자연과 자연 속의 내가 하나 되었을 때 단단해진다. 그는 릴케의 말을 인용했다. “‘나무 사이를 거쳐 수많은 나라를 지나온 바람, 아침, 밤, 이런 자연들은 우리가 끼어들 수 있도록 허용한다.’ 고독하다고 물리치려하거나 도망가려하지 않아도 돼요. 릴케의 말처럼 자연은 우리가 끼어들 수 있게 하니까요.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는 뜻이죠. 그의 표현대로, 이 시간을 거치면 우리는 ‘총명’해집니다.” 그러면서 그는 당부했다. 혹시 이 차가운 겨울에 고독을 느낀다면 조금만 더 기다리시라고, 막연한 불안감은 꼭 없어진다고.
나이 듦과 죽음 또한 인생이기에
그렇게 하나하나 쌓아온 연륜은 첫 주연을 맡아 2020년 개봉한 영화 ‘69세’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이 영화로 2020년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수상했다. 영화에서 맡은 역은 69세 ‘효정’. 29세의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노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의 편견에 맞닥뜨리는 역할이다.
“수치심은 무슨, 감히 어디다 손을 대. 자존심이 상한 거죠. 나이가 드는 것과 감정이 무뎌지는 것은 상관이 없어요. 오히려 감정이 깊어지죠. 겉으로 보기에는 무덤덤해 보일 수 있지만 무뎌지는 건 아니에요. 다만 감정에 속지 않고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거죠. 연륜이 있기 때문에 감정을 풍선처럼 불기도 하고 바람을 빼기도 하면서 운용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해요.”
릴케는 자신의 묘비에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아닌 기쁨이여”라고 적었다. 그는 죽음까지 포함한 삶 자체를 긍정했다. 또한 누구에게나 고독은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예수정 역시 고독과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수정이라는 삶이 하나의 극이라면, 67년 동안 매일 무대에 오른 셈이다. 그는 삶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생각해본 적 있을까?
“살아 있다는 건 죽음이 언제나 따라다닌다는 거죠. 환한 빛으로 가득 찬 신비롭고 예쁜 곳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죽음이라고 생각해요. 죽음 자체, 죽음 직전은 물론 두렵겠죠. 우리가 대학에 가면 얼마나 신이 날지 상상하면서도, 고등학교 3학년 때 치러야 할 수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잖아요. 그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거죠. 저라고 죽음을 어떻게 피해가겠어요? 하지만 내 몸에서 영이 떠나서 가는 곳을 생각하면 위안이 되죠.”
나의 좌표를 들여다보며
그에게서는 여전히 연기에 대한 기쁨이 느껴졌다. 연기를 계속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었다. 또한 단단하게 나아갈 그만의 심지가 있으면서도, 세상에 흔들리지 않을 여유가 있었다.
그라고 상처받은 적이 없었을까. 릴케의 시를 사유해서일까. 역시 사람이기에 상처받지만, 아파하면서도 어떻게든 한 발을 내딛게 된다고 했다. 내가 걷는 길에 대한 어떤 신뢰가 있는 것처럼. 한 작품을 마치고 나서 성장해 있는 자신을 보며 거창하지는 않아도 어찌됐든 걸어가고 있다고 다독인다. 그는 이렇게 계속 걸을 수 있다면 배우라는 일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특별하게 무엇을 노력한다기보다 이제는 하나의 습관처럼 됐어요. 다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놓치는 것은 없나’ 조금 더 살펴보려고 하죠. 지금 나의 좌표가 어디쯤인가, 걸어가는 길이 너무 헤매는 길은 아닌가, 엄청나게 변화하는 이 시대를 내가 어느 정도 범위로 수용하고 거부하며 가고 있나 생각해요.”
2022년의 끝자락이자, 60대의 끝자락을 보내고 있는 그다. 이 무렵 삶에 자극을 주는 단어가 있냐고 묻자 ‘청허’(聽許)라는 답이 돌아왔다. 잘 듣고 허락한다는 뜻이다. 역시 릴케의 문장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그의 말을 곱씹어보자. 잘 듣고 나를 인내하며 허락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언젠가 신에게 청허를 빈 것은 ‘하나의 혼을 묵과해 줄 신의 인내’뿐이었다.”
- 릴케 ‘말테의 수기’
● Exhibition
◇앨리스 달튼 브라운 : 빛이 머무는 자리
일정 10월 24일까지 장소 마이아트뮤지엄
앨리스 달튼 브라운은 지난 50년간 건물의 외부와 실내의 경계, 그리고 실내에 빛이 머무는 자리를 그려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해외 최대 규모 회고전이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 ‘미스티’, ‘비밀의 숲’ 등에 아트 프린트가 소개돼 인기몰이를 한 ‘황혼에 물든 날’(Long golden day)의 오리지널 유화 작품과 마이아트뮤지엄 의뢰로 제작한 신작 3점을 포함해 2~3m 크기의 대형 유화와 파스텔화도 소개한다. 이외에도 작가의 작품 활동을 총망라하는 작품 8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자연 소재와 인공 소재의 대비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작품은 빛과 물, 바람이 어우러진 청량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오디오 가이드와 도슨트를 운영해 작품의 이해를 높일 수 있으며, 어린이 대상 키즈 아틀리에와 시즌 이벤트 프로모션 등 전시와 연계한 다양한 교육·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아트 오브 뱅크시
월드투어 인 서울
일정 2022년 2월 6일까지 장소 갤러리아포레 더 서울라이티움
‘얼굴 없는 거리의 화가’, ‘거리의 아트 테러리스트’ 등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행동하는 예술 세계를 관객들과 공유할 체험형 전시가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열린다. 뱅크시는 사회·정치적인 문제와 예술의 허례허식, 미술계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퍼포먼스로 화제를 일으켰다. 그는 도둑 전시와 길거리 그림 판매, 아트 테러, 다큐멘터리 연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에 잠식된 예술계를 조롱했다. ‘뱅크시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지만 모두 그가 누군지 안다’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로 뱅크시의 정체는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다. 이러한 익명성 덕분에 불평등하고 억압된 세상에서 사회·정치적인 문제에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메시지를 자유롭게 담아 표현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예술 테러리스트‘라 칭해온 뱅크시는 디스토피아 같은 장소에 그래피티 예술을 그려 넣음으로써 우리가 처한 현실을 풍자한다.
● Book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노부토모 나오코·시공사)
늙어가는 부모가 가장 두려워하는 병은 ‘치매’다. 자식에게 끝을 알 수 없는 부담을 지게 하는 건 어떤 부모든 피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 노부토모 나오코의 어머니도 그랬다. 완벽한 주부이자 자랑스러운 어머니였던 그녀는 딸에게 뜻밖의 새해 인사를 전한다. “올해는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 영상감독인 노부토모 나오코가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아버지의 애틋한 나날을 기록한 에세이다. 치매 전후로 질병 당사자, 가족,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생활이 어떻게 바뀌는지 여과 없이 보여준다.
책은 치매를 슬프고 비참한 것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치매 진단을 받은 85세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돌보는 아버지. 딸은 카메라를 통해 부모님을 바라보며 비참했던 일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치매 할머니와 귀먹은 할아버지의 맞물리지 않는 어긋난 대화는 훈훈하고 사랑스럽게도 느껴진다.
어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고, 아버지가 간병에 뛰어들며 외부의 도움을 거부하던 노부부는 사회와 다시 연결된다. 이 과정을 시간 순으로 전개하는 이 에세이는 우리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노화와 질병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한편, 가족과 돌봄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준다.
저자는 어머니를 돌보면서 인간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저자의 간병 경험을 통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한 사람의 인생이 질병으로 정의되거나 기억될 수 없고, 우리는 모두 언젠가 늙고 약해지며, 결국 서로에게 의존해야 하는 연결된 존재라는 걸, 간병은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상호 돌봄이라는 걸 알려준다.
◇보험, 인문학에 빠지다 (이경재 저·바른북스)
보험은 이제 필수품이 됐지만 아직 보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하다. 30여 년 동안 보험을 연구하고 강의한 저자가 보험을 인문학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보험의 새로운 가치를 알려준다.
◇데카메론 프로젝트 - 팬데믹 시대를
건너는 29개의 이야기 (마거리 애트우드 외 28인·인플루엔셜)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하던 14세기, 액자 소설 ‘데카메론’이 사람들을 위로했다. 700여 년 전 ‘데카메론’을 재현하기 위해 ‘뉴욕타임스’가 세계 각지 작가들의 단편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장명숙·김영사)
한국인 최초 밀라노 패션 유학생, 이탈리아 정부 명예기사 작위 수여자, 구독자 87만 유튜버 밀라논나의 인생 내공을 담은 에세이. 오늘도 고군분투하는 모든 이에게 위안과 희망의 언어를 전한다.
● Stage
◇하데스타운
일정 9월 7일~2022년 2월 27일
장소 LG아트센터
연출 박소영
출연 조형균, 박강현, 시우민, 최재림, 강홍석, 김선영 등
제73회 토니어워즈 최우수 작품상, 제62회 그래미어워즈 최고 뮤지컬 앨범상에 빛나는 최고의 무대가 한국에서 최초로 펼쳐진다. 극작과 작곡·작사를 맡은 아나이스 미첼의 동명 앨범을 극으로 만든 ‘하데스타운’은 2016년 브로드웨이에서 첫선을 보인 후 뮤지컬 애호가들이 가장 주목하는 작품이 됐다. ‘하데스타운’은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아내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지하 세계로 향하는 오르페우스, 사계절 중 봄과 여름은 지상에서, 가을과 겨울은 지하에서 남편인 하데스와 보내는 페르세포네의 이야기가 지상과 지하 세계를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교차된다.
◇사랑했어요
일정 10월 31일까지
장소 광림아트센터 BBCH홀
연출 임영근
출연 조장혁, 정세훈, 성기윤, 고유진, 홍경인, 김용진 등
독보적인 음악 세계로 대중을 사로잡은 故김현식 주크박스 뮤지컬 ‘사랑했어요’가 광림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故김현식은 한국적 언더그라운드 스타일을 제시했다는 평가받는 싱어송라이터다. ‘비처럼 음악처럼’, ‘내 사랑 내 곁에’ 같은 명곡들을 편곡을 통해 되살린 그의 음악이 다시 한번 세대를 뛰어넘는 감동을 선사한다.
◇카포네 트릴로지
일정 9월 14일~11월 21일
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연출 오루피나
출연 이건명, 고영빈, 박은석, 송유택, 장지후, 강승호 등
독보적인 갱스터 누아르 장르의 작품 ‘카포네 트릴로지’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3년 만에 관객을 만난다.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는 20세기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마피아 ‘알 카포네’가 주름잡던 미국 시카고를 배경으로, 렉싱턴 호텔 661호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선과 정의가 위태롭게 흔들리던 시대의 ‘안티 히어로’ 이야기를 그려낸다. 탁월한 시대상 반영과 풍자, 위트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큰 마이크를 앞에 두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거나, 음식을 먹거나, 아니면 손으로 효과음을 내면서 오로지 소리만 들려준다. 제목에는 먹방, 롤플레이, 자연현상, 수면 등과 같은 단어가 달려 있다. 이쯤 되면 뭘 말하려는지 알아차리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번 큐레이션의 주제는 바로 ‘ASMR’이다.
‘ASMR’은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의 줄임말이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자율감각 쾌락반응이다. 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영상을 뜻한다. 바람 부는 소리, 연필로 글씨를 쓰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 등을 제공한다. 이런 설명 등을 요약해 ‘청각을 통한 오감 만족’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근래에 생긴 개념은 아니다. 2010년대 미국과 호주 등에서 유행하면서 전 세계로 퍼졌다.
“10년 전에 유행했던 걸 왜 이 시점에 소환하는 것이냐?”라고 묻는다면 바로 ‘코로나19’ 때문이다. 9월 모바일 설문조사업체 오픈 서베이가 발표한 ‘건강관리 트렌드 리포트 2020’에 따르면, 정신건강을 위한 행동 1순위는 충분한 수면이다. 코로나19가 없었던 지난해보다 3.1%P 증가한 수치다. 실제로 숙면의 어려움을 호소한 경우는 작년보다 7.6%P 증가했다. 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상 동영상 혹은 ASMR과 같은 음성 콘텐츠를 찾는 경우가 47%로 가장 많았다. 코로나로 인해 ASMR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쉽게 잠들지 못하는 분들을 위한 ASMR 채널을 소개한다.
ASMR Boyoung 반보영
엄마나 애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귀를 파다가 깜빡 잠든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이 채널은 사물을 이용한 소리를 주로 들려주는데, 특히 귀 청소를 콘셉트로 한 영상이 가장 많다. 이어폰을 끼고 들으면 실제로 누가 귀를 파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영상 중간에 눈앞에 있는 사람처럼 상황극을 해서 몰입도가 더 높다. 영상으로 이런 경험을 하면 좋은 점도 있다. 귀이개가 닿는 차가운 촉감이나 잘못 건드렸을 때의 고통이 없다. 한마디로 잠에 빠지도록 해주는 가장 좋은 환경을 구현하고 있다. 덤으로 빗질이나 샴푸하는 소리를 담은 영상도 있는데, 듣다 보면 미용실에 온 기분이 들어 마음이 차분해진다.
뚜비 Ddoobiii ASMR
실제로 황시목 같은 검사가 있을까? 직장에 황시목 같은 후배가 있으면 어떨까? 황시목의 사무실은 어떨까? 깨끗할까? 참고로 황시목은 얼마 전에 방영을 끝낸 tvN 드라마 ‘비밀의 숲’의 주인공이다. 드라마는 끝나도 여운은 늘 남는다. 정말 좋은 드라마는 또 봐도 재밌다. 이 채널은 영화 혹은 드라마 속 장소나 장면 그리고 등장인물이 연상되는 ASMR을 들려준다. ‘황시목 검사의 사무실’이나 ‘호그와트 주방’이 그 단적인 예다. 드라마나 영화가 남기는 여운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면 이 채널을 추천한다. 자기 전에 드라마를 보고 싶은데 너무 피곤해서 엄두가 나지 않을 때 들어도 좋다. 잠도 자고 드라마도 느낄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TV창비
갑자기 출판사 유튜브 채널을 소개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언뜻 보기에 출판사 채널이랑 ASMR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최근 이 채널이 시인의 ASMR을 마련했다. 시를 낭독하는 채널은 유튜브에 많다. 하지만 시인이 자신이 쓴 시를 직접 읽어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요즘 상황은 코로나19 때문에 낭송회를 여는 일도, 참여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그런 시기라서 그런지 더 반갑다. 시각의 청각화가 이런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박소란 시인의 ‘모르는 사이’를 추천한다. 듣고 있다 보면 어느새 단잠에 빠져든다. 그만큼 효과는 입증된 셈(?)이다.
힐링사운드 ASMR
이 채널 소개는 많이 망설였다. 혼자만 알고 싶은 채널이었기 때문이다. 구독자 수는 적지만 영상은 알차다. 영상을 들으면 영화 ‘봄날은 간다’의 주인공 상우가 떠오른다. 대나무숲에서 조용히 소리를 채집하던 그처럼 채널 운영자는 직접 자연의 소리와 영상을 모은다. 그만큼 생생하다. 평균 8시간이 넘는 긴 영상이지만 계속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여행하는 기분도 들고, 동시에 마음이 평온해져서 보고 있으면 몸이 노곤해진다. 풀벌레 우는 소리와 빗소리, 계곡물 소리를 듣다 보면 커다란 숲에 들어선 듯한 기분도 든다.
*구독자 수는 2020년 10월 기준
오는 17일이 광복절 대체공휴일로 지정되면서 금 같은 휴일이 하루 더 늘었다. 갑작스러운 휴가에 신이 나면서도 무얼 해야 할지 고민부터 앞선다. 여행지 근처 숙소를 예약하기엔 늦었고,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기엔 시간이 아깝다. 결국 답은 넷플릭스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3일간의 짧은 휴일을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들어줄 넷플릭스 작품 3편을 소개한다.
1. 삼국지 극장판 (Three Kingdoms Theatrical Release Version, 2010)
삼국시대를 호령했던 영웅들의 가슴 뜨거운 이야기를 다룬다. 위·촉·오 세 개의 나라로 나뉜 시대 모진 계략과 술수, 뜨거운 의리와 배신 등 지배권을 쟁취하기 위한 장수들의 험난한 여정을 그려낸다. 95부작의 대서사시인 중국 드라마 '삼국지'를 8부작으로 압축한 버전으로 원작의 감동과 스피디한 전개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원작 드라마는 제작 기간 5년에 약 25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됐으며, 2010년 현지 방영 당시 24개 주요 도시에서 시청률 1위를 차지하는 등 큰 사랑을 받았다. 젠빈천, 위허웨이, 루이 등이 출연한다.
2. 비밀의 숲 2 (Stranger 2, 2020)
웰메이드 드라마 '비밀의 숲'이 시즌 2로 돌아온다. 비밀의 숲은 고독한 검사 '황시목'(조승우)과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형사 '한여진'(배두나)이 은폐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비밀 추적극이다. 이번 비밀의 숲2는 반전을 거듭하는 서사 구조와 입체적인 인물, 긴장감 넘치는 연출로 시청자들을 열광하게 했던 첫 번째 시즌의 후속작이다. 시즌 1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배우 조승우, 배두나가 전혜진과 최무성 등 뉴페이스와 함께 색다른 호흡을 맞춰갈 예정이다. 날카로운 필력의 이수연 작가가 다시 한번 펜을 잡았으며, 연출은 드라마 ‘공주의 남자’, ‘함부로 애틋하게’ 등에서 매력적인 영상미를 선보였던 박현석 PD가 맡는다. 15일 첫 방송되며 방송분은 넷플릭스에 순차적으로 공개된다.
3. 퍼펙트 맨 (Man of Men, 2018)
까칠한 로펌 대표 '장수'(설경구)와 철없는 꼴통 건달 '영기'(조진웅)가 사망보험금을 걸고 한 방을 노리는 코믹하고 아찔한 이야기. 영화는 조직 보스의 돈 7억을 빼돌렸다가 돈을 다 날려 빈털터리가 된 영기 앞에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장수가 나타나며 시작된다. 장수는 2개월 동안 자신이 마무리해야 하는 일을 도와주면 사망보험금을 넘기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고, 돈이 필요한 영기는 거래를 수락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혀 다른 두 남자는 장수의 버킷리스트를 지워나가며 비슷한 구석을 발견하고 조금씩 우정을 쌓아나간다. 조진웅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더불어 관록이 말해주는 설경구의 연기는 보는 이들에게 빵빵 터지는 웃음과 동시에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올해에는 벚꽃놀이도 없었고 봄꽃의 흐드러짐도 만나지 못하였다. 계절의 변화를 느낄 새도 없이 지나는 가장 젊은 날의 봄이 아쉽다. 연두색 새잎이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5월을 느끼기 좋은 곳이 어딜까 고민하다 창덕궁 후원을 떠올렸다. 가을에는 몇 번이나 갔으나 봄은 처음이다.
창덕궁은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 때 만들어졌다. 형제의 피를 묻히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꺼렸다. 1405년 새롭게 창건된 창덕궁은 이궁(離宮)이었으나 조선의 역사 속에서 종종 법궁(法宮)의 역할을 하였고 현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 평가받고 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회화나무 여덟 그루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백 년 된 노구에 연두색 새잎이 돋고 있다. 궁궐 안의 가장 오래된 돌다리인 금천교를 건너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 정전인 인정전이 나온다. 그 뒤로 편전이었던 선정전, 왕의 침전이었다가 편전으로 사용한 희정당과 대조전이 있다.
왕과 왕비의 침실이기도 했고 왕자와 공주의 교육 장소로 쓰였던 대조전은 조선 멸망을 지켜본 비운의 전각이다. 한국을 일본에 넘기는 합병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고 ‘창덕궁 전하’라 불리던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이곳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전각들은 대부분 촘촘하게 붙어있어 수월하게 둘러볼 수 있다. 사대부 양식의 건물인 낙선재만 주 전각들과 약간 떨어져 있다. 이에 반해 후원은 꽤 발품을 팔아야 한다.
양옆에 긴 담벼락이 늘어선 길을 따라 후원으로 들어간다. 비밀의 정원답게 들어가는 입구가 길다. 이때부터 초록 샤워기를 틀고 그 아래에 선 듯 느껴진다. 대여섯 살 정도 된 딸 둘과 고궁 나들이에 나선 한 가족이 앞서 걷다가 감탄사를 터뜨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나 다를까 구부러진 길 끝부터는 더 깊은 초록의 터널이다.
싱그러움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열하게 달린다. 뽕나무, 은행나무, 쪽동백나무, 함박꽃나무, 느티나무.... 나뭇잎을, 그러쥐어 꾹 짜면 연두와 녹색이 절묘하게 섞인 5월의 색이 주르르 흘러내릴 듯하다.
숲 터널 끝에 자리한 부용지가 은밀하다. 사각의 연못을 가운데 두고 동쪽에는 영화당이 남쪽과 북쪽에는 각각 부용정과 주합루가 서 있다. 정조가 즉위한 해인 1776년에 만든 주합루는 계단식 구조물 위에 2층 누각 형태를 띠고 있는데 1층은 도서관인 규장각이, 2층은 학자들의 배움터이자 토론장으로 애용되었다.
부용지를 나와 숙종 때 만들어진 애련지와 조선 시대 양반가옥을 본떠 만든 연경당을 둘러보고 다시 시작되는 초록 샤워 길을 지나 왕의 휴식공간이었던 존덕정에 이르러 발길을 멈춘다. 쉼조차 싱그러운 봄이다. 너른 숲길에 작은 오솔길이 나 있다. 길을 따라 들어가면 인공적으로 물길을 낸 옥류천이 나타난다. 이곳 또한 휴식처이다.
5월의 창덕궁은 어느 곳 하나 싱그럽지 않은 곳이 없다. 전각과 후원의 생기 가득한 풀과 나무 사이를 걸으며 코밑까지 온 봄을 느낀다. 숨바꼭질 동무를 찾아 기쁘듯 숨어있다 얼굴을 내미는 연못과 정자에서 휴식의 기쁨을 누린다. 가는 봄날의 아쉬움이 달래 진다.
관람 안내 : 창덕궁의 전각은 휴관 일(매주 월요일)을 제외하면 상시 관람이 가능하지만 후원은 궁궐 전각 관람료(대인 3000원)와는 별도의 후원 관람료(대인 5000원)를 내고 들어간다. 후원 관람은 90분 정도 소요되며 해설사와 함께 회차 별 100명으로 입장을 제한하고 있다. 예약은 6일 전 오전 10시부터 입장 전날까지 받는다. 예약인원 50명, 당일 발권 50명이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해설사 없이 회차별로 입장하여 자유 관람하는 형태로 운영 중이다.
이젠 초록이 완연하다. 탁 트인 세상을 보러 가볍게 훌쩍 떠나 자연 속에 파묻히고 싶어진다. 시골 마을에 스며들듯 이루어진 '이원 아트빌리지'는 반짝이는 초여름빛을 받으며 자연과 잘 어우러져 있었다. 충북 진천군 이월면 미잠리에 위치한 친환경 복합문화공간 이원 아트빌리지의 하루는 충분한 여유와 쉼을 주는 시간이다.
미잠리(美蠶里). 이곳 지형이 누에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막 시작된 초여름이 싱그럽다. 방문을 허락하면서 하신 말씀이 '요즘 볕이 좋고 온 천지에 피어난 꽃들이 너무 예뻐 혼자 보기 죄스럽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애초부터 '함께 하기' 위한 공간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건축가 원대연 교수와 사진작가 이숙경 부부가 이원 아트빌리지를 만들어낸 것은 2003년이었다. 한때 롯데호텔, 롯데월드, 압구정 현대백화점, 여의도 63 빌딩 등의 국내의 굵직한 건축 작품의 설계와 공사를 진행했던 건축가 원대연. 그리고 '(주)플러스 건축'을 설립, 건축전문지 '월간 플러스' 창간, 후학들을 가르치는 대학교수로 더없이 왕성한 시절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건축문화와 일상을 엮어서 '여행 넘어서기'라는 책 1,2,3권, 건축 가이드북 ‘살수록 고마운 집 - 자연에, 좋은 집에, 멋진 나날들’을 출간하기도 한 작가다.
“생명의 집을 지을 수 있으면 다 버려도 좋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바삐 돌아가는 세상일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내 의지대로 삶의 리듬을 원했다.
그 무렵을 이용재 건축평론가는 이렇게 적었다. '국내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투시도의 달인 원대연은 만날 반복되는 일에 치이고 지금 내가 왜 살고 있는 거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뭘까? 고민했다. 전국의 땅을 보러 다닌다. 진천군 이월면 미잠리가 맘에 든다. 아예 이월면으로 보따리 싸서 내려간다. 생태마을 건립에 나선다. 왜 만날 남의 것만 만들어 주냐. 외부 간섭 없이 나만의 자유로운 건축을 실현하겠다. 이제부터 넘어야 할 가장 큰 상대는 나 자신이다.'
마침내 6년 만에 이원 아트빌리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2005년에는 한국건축가협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건축상'을 수상했다.
"자연에서 싹이 돋아 자연의 숲이 이루어진 건축의 숲을 본 것이다. 인공조미료가 배제된 건강 자연식품의 건축을 만난 것이다. 옥내 공간에 집중된 기존 건축과는 달리 옥내 공간과 옥외 공간이 등가로 다루어지면서 풍부한 공간 연출을 하고 있는 Vernacular 한 건축이다." - 건축가협회상 수상 수상에 대한 심사평에서
입구의 담장에 담쟁이덩굴이 덮이기 시작했다. 그 앞으로 마을 사람이 무심히 지나가는 풍경, 논과 밭과 마을길이 아트빌리지와 분리되어 보이지 않고 함께 자연스럽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이런 곳이 있었나 놀랄 일이 기다린다.
사방에서 들어오는 자연 채광으로 전시된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상촌 미술관 제1관, 2관, 3관. 이숙경 사진작가의 작품과 건축가의 그림,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마음껏 볼 수 있다. 그리고 미술관을 중심으로 미로처럼 연결된 문화공간을 찾아 걷는 맛이 시작된다. 전시관이나 세미나실뿐 아니라 자연 경사를 그대로 살린 골목길을 따라 발견되는 건축 예술이 흥미롭다.
어디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예쁜 골목과 샛길이 이어지는 열린 공간이다. 목련 갤러리 뒤편으로 목련 정원이 기다리고 있다. 너른 다목적 행사장과 공연장, 갤러리와 소소한 아트공방들, 색색의 담장을 지나 작은 숲 쉼터를 만나면 누구라도 거기 그냥 한 번 앉아서 쉬고 싶어 진다. 토기인형과 담 아래 꽃들이 편안히 피어난 조붓한 길을 걷다 보면 샛길과 계단을 통해 숨겨진 듯한 공간이 나타나서 지루할 틈이 없다.
이곳에선 모든 게 나지막하다. '사람 눈에 허술해 뵈고 만만해 뵈고 편안한 게 좋은 집'이라고 말한다. '언젠가는 이렇게 나지막한 집이 쑥쑥 자라나는 나무에 뒤덮여서 안 보이기를 바란다'는 원대연 건축가.
전망대로 올라가면 나무판자를 겹겹이 얹어 만든 너와지붕이 눈 앞에 펼쳐진다. 너와지붕 너머로 이어지는 이월면 미잠리 농촌 마을이 자연스럽다. 어울림이다. 이렇게 한 바퀴 돌다 보면 이상한 '균형'이랄까 그런 게 느껴진다. 어느 것 한 가지만 유난하지 않고 돌 하나 소나무 한 그루도 그 자리에서 함께하는 역할의 의미를 있다는 것.
결국은 마당과 골목길, 그 모든 건축물과 뒷동산이 어디든 연결된다. 내비게이션의 지시대로 길을 찾는 요즘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의미 없음을 알려준다. 아트빌리지의 길을 따라서 걸으며 상상력을 만끽하고 창의력을 발동시키는 그런 건축의 힘을 전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아트빌리지 옆으로 난 오솔길을 잠깐 걸어가면 광장처럼 널따랗고 멋진 공간이 기다린다. 신록의 계절이다. 산 아래 울창한 숲과 잔디밭이 어우러진 그곳에 부드러운 바람이 가득 차 있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빛 내림이 눈부시다. 중앙엔 넓은 원형으로 울퉁불퉁한 돌의자가 던져진 듯 놓여있다. 거기 앉아 회의도 하고 여유롭게 수다와 휴식이 즐거울 수 있는 숲 마당, 자연 속에서 놀아볼 수 있다.
"야생화를 300~400개쯤 심었지요. 잘 피어나서 계절별로 책 찾아가며 사진을 찍어놨는데 그러나 어느 정도 살다가 반 이상은 죽더라고요. 이곳이 아무리 자연이라고 해도 야생화는 야생에 있어야 해요. 그래서 심지 마라, 옮기지 마라, 살아있는 건 그 자리에 두어라 해요."
건축 예술가의 열정으로 자연과 한 몸이 되는 마을이 이 땅에 만들어졌고 그곳에 사람이 살았다. 그리고 건축가가 제시한 공간을 통해서 다수의 누군가는 공감했다. 그래서 그가 추구하는 관계성이 수용되고 그 꿈이 지속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운영의 부침을 맞으면서 2012년 개방을 멈추었고 나름대로 대비를 한다.
"이 곳을 기부를 하거나 재단을 만드는 것을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그럴 경우 그동안 내가 지켜왔고 생각해온 마을이 유지될지 걱정됩니다. 아마 이 나무들이 온전히 있기 어려울 듯해요. 요즘은 그래서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어요. 눈이 올 때 이 숲의 풍경이 다양합니다. 또 사계절 따라 늘 다르죠. 지금도 깜깜한 밤에 사진을 찍으면 칼라가 정말 이뻐요. 어제도 영산홍을 찍었는데 빨간색이 낮과 밤이 달라요. 완전한 어둠 속에서 또는 달밤에도 찍어요. 자연 속에서 변화하는 색감이 대단합니다."
푸릇푸릇한 식물들의 향이 뿜어 나오는 선큰 가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정원 계단에 둘러앉아 멋지게 세월을 사는 이의 건축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특별하다.
비밀의 문을 연 듯한 그 옆의 오디오실은 신세계다. 가치를 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오디오와 스피커, 그리고 재킷 포장이 그대로인 희귀 소장품 레코드판이 잘 정돈되어 있다. 70대 은발의 곱슬머리 건축 예술가는 음악 한 곡을 걸었다. 그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던 '매기의 추억'이 감동적이었던 건 단지 오디오의 성능 때문이었을까. 그 시골 마을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생생함을 지금도 기억한다.
이원 아트빌리지, 이곳에서는 한두 시간 또는 한나절이면 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 마을의 따뜻한 고요함에 푹 빠져봐야 한다. 숲에 들어 자연의 빛과 바람과 하늘을 마주는 순간 자연 속에 그만 묻혀버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름다움은 천천히 느리게 즐겨야 제 맛이다. 청정한 산세에 둘러싸여 있는 건축 마을에 푹 잠겨 보냈던 하루. 생거진천(生居鎭川), 충북 진천 이월면 미잠리의 이원 아트빌리지에 가면 느리고 무심히 자연 속에 스며드는 온전한 날이 된다.
△충북 진천군 이월면 미잠길 306-1 / 이원아트빌리지에 가고 싶다면 미리 연락을 해서 의견 조율이 필요하다. 지금도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일반 단체 방문객이 예약을 통해서 방문한다.
주변 볼거리와 맛집
△이월성당 (梨月聖堂)
그곳에 가면 또 한 군데 들러볼 곳이 있다. 원대연 건축가가 설계를 봉헌하여 지어진 '이월 성당'. 이원 아트빌리지를 나와 밭둑 옆으로 잠깐 달리다 보니 멀리 성당 뾰족탑의 십자가가 보인다. 자연의 흐름의 바라보듯 시골 들판을 내려다보는 듯한 위치에서 저녁노을을 받고 있다. //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송림리 292-5번지
△ 진천막국수
진천에는 건강한 맛집이 여럿 있다. 그중에 메밀로 만든 시원한 막국수가 인기다. 메밀 새싹이 수북이 얹혀 나오는 메밀 새싹 물막국수와 비빔막국수는 따뜻한 육수도 함께 나온다.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국수 양념도 자극적이지 않다. 무채와 열무김치도 심심하고 맛있다. 속이 실하고 큼직한 메밀만두도 빠뜨리지 말고 맛볼 것. // 진천 막국수 / 충북 진천군 이월면 진광로 725 / 막국수 7000원, 메밀 왕만두 5000원
△ 미잠米과
생거진천 쌀로 만든 건강한 빵. 진천에서 농사짓고 정미소도 직접 운영, 도정, 제분하여 쌀빵을 굽는다. 쌀눈이 살아있는 빵으로 특허출원, 쌀빵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 식감이 부드럽다. 건강기능성을 선호하는 사람들과 밀가루 알레르기 환자 등의 고객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SNS 등의 입소문으로 전국 각지에서 주문 요청이 많다고 한다. 방문 고객에게는 아메리카노 한 잔이 서비스로 제공된다. 식빵은 물론이고 쌀 인절미 크림빵, 현미깜바뉴 등 미잠미과 만의 쌀빵 종류가 다양하다. 충북 진천군 이월면 미잠리 403 /10:00~19:00
내비게이션을 따르다 보니 차가 산으로 들어간다. 자연을 한 자락 슬쩍 걸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연 속에 있는 미술관이라 들었다. 그러나 이토록 깊은 산중일 줄이야. 씨억씨억 초록을 뿜는 숲 사이 언덕을 올라 주차장에 도착하자 아예 산꼭대기이지 않은가. 기발하게도 산정(山亭) 미술관이다. 그래서 뮤지엄 산(山)? 그러나 ‘山’이 아니라 ‘SAN’이다. 공간(space), 예술(art), 자연(nature)을 합성한 약자다.
산정이라 사방에 보이느니 산이다. 세상을 분할한 하늘 절반, 산봉우리들 절반. 하늘과 산 사이에 뮤지엄이 슬쩍 끼어든 형국이다. 간신히 자연에 가담한 약세(弱勢)가 아니다. 부지는 넓고 건물은 우람해 훤칠하다. 우람하나 이물감이 없다. 건물의 태와 됨됨이에 뾰족하게 튀는 게 없어 자연과 불화 없이 조응한다. ‘건축의 철학자’로 불리는 안도 다다오(安藤忠雄·79)의 작품이다. 그는 자연과 건축, 그리고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본때 있게 구현하는 건축가로 유명하다.
이 뮤지엄의 설립자는 어떻게 산꼭대기에다 일을 벌일 발상을 했을까? 자연을 애호하는 못 말릴 취향과 세상의 추세를 읽는 시퍼런 촉이 아니고선 감행하기 어려운 역사(役事)다. 삼성가 이병철 회장의 장녀로 한솔그룹을 이끌었던 이인희 고문(2019년 작고)이 세웠다. 그는 열렬한 아트컬렉터. 평생 모은 소장품을 자연으로 끌어들여 건립한 산상 미술관으로 허를 찌르듯 관습을 흔들었다. 뮤지엄 산의 태동부터가 이렇게 전위적이다.
판석을 깐 진입로를 따라 ‘플라워 가든’으로 들어선다. 뮤지엄의 초입일 뿐이지만 완상할 게 많아 벌써 다른 세상이다. 패랭이꽃 군락과 하얀 자작나무들, 조각정원이 어울려 뮤지엄의 서장을 열어준다. 산정의 적막한 허공엔 흩날리는 꽃잎들. 피어나는 봄꽃들 지천이라 몸에 묻을 듯 농밀한 건 꽃향기. 길은 곧게 나아가다 휘어지거나 급하게 꺾인다.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콘크리트 담장이 보도의 흐름에 편승해 시야를 슬쩍 가려주거나 별안간 확 트이게 한다. 인위적으로 풍경의 변주를 꾀한 설치다. 정교한 의도에 따른 구성이다. 직설적으로 다가오는 풍경은 여실해 명쾌하지만, 보일 듯 말 듯, 보였다 안 보였다 변전하는 풍경은 삶을 은유한다. 노골적이어서 온전한 게 있던가. 보이면 있고 안 보이면 없는가. 높낮이와 커브의 각도를 세밀하게 재단해 조성한 담장의 효과로 풍경에 철학이 실린다. 이건 뮤지엄의 절정을 보러 가는 길목에서 만난 전희? 애피타이저? 풍경을 요리하는 수완에 즐겁다.
시각적 충격에 걸음 멎어
이제 ‘워터 가든’이다. 뮤지엄 산의 예술적인 외부 공간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별한 곳이다. 여기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풍경이 존재한다. 산상 대지에 물을 가득 채워 꾸민 ‘물의 소국’(小國)이 있으니 말이다. 널따란 사각형 수조들에 담긴 물과 물빛으로 찬연한 공간이다. 갑작스런 물의 등장, 그 급속한 풍경의 변이라니. 시각적 충격에 걸음이 멎는다. 나는 지금, 물을 분할하며 본관으로 관입하는 보도 위에 서 있지만 수면을 밟고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보도와 수면이 수평을 이루어서다.
워터 가든의 물 경치에 흥취를 느끼는 사람이 많다. 수변 테라스엔 커피를 마시며 물과 산과 하늘을 바라보기에 적격인 벤치가 놓여 있다. 거기에 앉고 싶지만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다. 도시라는 욕망의 경기장을 벗어나 고요한 수변에서 차를 마시며 모처럼 자연을 만끽하는 사람의 행복이여! 행복이 아니라 고독이면 어떤가. 물가에선 ‘나’를 바라보기 좋다. 저 투명한 물빛처럼 나도 한때 순수했다고, 내 안에도 물이 있어 눈물도 많아 슬프다고, 저 무심한 수면에 물살을 일으키는 실바람은 어디로 가며 나는 흘러 어디로 가는가, 라고 요모조모 쓸모 있는 상념을 굴려볼 만한 물가이지 않은가. 그러라고 안도 다다오가 워터 가든을 설계했다.
그의 건축적 오브제는 물, 햇빛, 바람 등 자연의 질료들이다. 그의 정신적 테마는 관조(觀照) 혹은 명상이다. 자연을 불러들인 건축으로 사람의 오감과 내면을 일깨우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일컬어 노상 하는 말들의 요점이 그렇다. ‘뮤지엄 산’이 완성됐을 때 그는 “그저 조용한 상자 같은 미술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고 술회했다. “사람들 모두가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감성이 풍부해져,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도 썼다.
본관 복도로 들어서자 조명부터 침침해 구미에 맞다. 미술관들의 과한 조명에 나는 일쑤 김새더라. 인공조명은 안도 다다오의 자연주의에 위배된다. 가급적 자제! 그는 집요하게 자연의 빛을 건물 내부로 끌어들였다. 복도 벽면의 상부와 하부에 낸 창으로 빛이 들이치게 했다. 천장을 뻥 뚫어 빛과 함께 하늘을 수용한 전시실도 있다. 노출 콘크리트 벽과 기둥, 기하학적 선형, 번뜩이는 예각 구조물, 텅 빈 중정(中庭)…. 그의 건축적 키워드를 이루는 형태와 기법이 거대한 미술관의 세부에서 깨알처럼 구현돼 요동친다.
거장들의 작품 번갈아 전시
아이들은 천진해 이 웅장하고 복잡한 미술관에서 ‘비밀의 성’(城)을 본다. 상상을 펼쳐서다. 어른들은 압도될 테다. 상상을 잃어서다. 예술이 위대한 건 상상력의 거친 날개로 신과 맞먹으려 비상한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상상력 외에 자유정신의 높이, 자연을 읽는 섬려한 안목,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무한한 존중. 그런 게 안도 다다오의 건축세계를 가능케 했을 터인데, 햐, 그는 말하길 ‘창의적 체력’이야말로 개중에 관건이라 했다. 창의적 체력이란 건강한 몸뚱이의 에너지를 말한다. 79세 노인인 그는 오늘 아침에도 들입다 뛰었을 게 틀림없다. 흥미로운 유형의 인간이지 싶다. 그에겐 세상을 달관한 시늉이 없어 미덥다. ‘목숨을 건 강인한 도전 정신’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건축을 추구하는 리얼리즘과 적당한 금욕 추구도 멋있다. 뮤지엄 산의 건축미를 즐기기 위해선 안도 다다오의 이러한 성향들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뮤지엄의 많은 전시실 가운데 인기를 누리는 공간을 볼까? 페이퍼 갤러리. 이곳은 종이의 역사와 가치를 알리는 국내 최초의 종이 전문 박물관이다. 종이 관련 국보와 보물, 진귀한 유물과 공예품을 전시한다. 약하디약한 게 종이이지만 강하디강한 게 또한 종이. 인류의 역사는 종이의 발명과 함께 진보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이기심으로 살고 종이는 이타심으로 존재한다. 아낌없이 나를 내주길 운명으로 삼은 종이이니 이미 득도했다. 페이퍼 갤러리에 머문 시간은 ‘종이부처’와 만난 추억을 안겨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종이 재료로 쓴 파피루스도 여기에 있다. 유리온실 안에서 억새와 비슷한 파피루스가 푸르게 자란다. 순전히 파피루스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오는 관람객도 있다. 청조갤러리는 뮤지엄 산이 소장한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이쾌대 등 거장들의 작품을 번갈아 상설 전시한다. 매년 두 차례 기획전도 열린다. 현재 ‘회화와 서사’ 전이 진행 중이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위해서는 특별히 독립공간을 마련했다. ‘백남준 홀’로 작품 ‘커뮤니케이션 타워’를 전시했다. 전깃줄을 뭉쳐 만든 타워 형태의 기반에 TV와 민속탈을 주렁주렁 매단 작품. 이게 뭔가? 현대와 전통의 통섭? 문명 굿판? 자화상? 어떻게 봐도 답일 게다. 엿장수 맘대로! 그냥 그렇게 내가 느끼는 대로 보고 즐기면 일단 그만이지 않을까. 현미경을 들이대고 종일 초파리의 겨드랑이 털 개수를 세는 곤충 학자처럼 골똘히 미술작품을 파고들 일 아니다. 궁리를 너무 하면 왜곡이 쉽고, 생각을 너무 조이면 좁아진다. 백남준이 금언을 설했다. “옷도 헐렁하고, 생각도 헐렁하고, 행동도 헐렁헐렁, 헐렁이가 일을 낸다구. 진짜 예술가는 헐렁이야!” 삶도 예술도 틀을 만들면 갇힌다는 얘기이겠다. 예술의 헐거운 정신을 보는 게 작품 감상법이라 들어도 무방하다. 백남준은 노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때 더듬더듬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중얼거림은 뜻밖에도 쓸쓸한 것이었다. “신은 참 불공평해. 내가 왜 쓰러져야 하나?”
아주 특별한 두 곳
마침내 자문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마음이란 물결처럼 요동치기 쉬운 것. 이걸 어떻게 다잡아야 할까. 뮤지엄 산에선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뮤지엄 내·외부 공간에 있는 미술작품 감상 자체가 명상적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명상 체험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 두 곳이 있다.
제임스 터렐 전시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은 ‘빛의 예술가’로 세계에 알려진 작가다. 화가라면 당연히 ‘빛’과 무관할 수 없다. 빛을 탐구하고 묘사하는 게 화가의 본분이니까. 그러나 제임스 터렐의 작업은 많이 다르다. 그는 빛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빛을 ‘사용해’ 작품을 만든다. 일정한 공간에 빛을 집어넣으면, 즉 빛과 공간이 조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한 오랜 실험 끝에 그는 놀랄 만한 ‘빛의 아트’를 정립했다.
터렐의 작품은 빛과 공간, 그리고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프로그램에 의해 세밀하게 조정된 자연광이나 인공광을 공간에 투입, 작품을 완성한다. 다시 말해 공간이라는 캔버스에 빛이라는 물감을 투사, 다양한 테마를 신비스럽게 풀어낸다. 터렐 전시관에서 관객은 네 가지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 가장 기이한(?) 작품은 간츠펠트(Ganzfeld, ‘완전한 영역’이라는 뜻)로 동굴 형태의 공간에 50여 종의 LED 빛을 순차적으로 살포하면서 작업을 진행한다. 이 작업의 목적은 관객에게 착시를 경험하도록 하는 데 있다. 동굴 속에 들어간 관객은 형언하기 어려운 신비와 환영에 즉각적으로 빠져들고 만다. 예컨대 공간 가득 짙은 안개가 끼고, 좁았던 공간이 무한히 확장된다. 이 돌연한 환각에 관객은 신비감과 황홀감 또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작업 종료 뒤, 빛이 보여준 강렬한 환상의 의미를 자문하기에 이른다. 여기서부터는 명상이다. 내가 빛을 보고 살았다, 하지만 빛이 보여준 게 참일까? 삶과 세상은 허상이지 않을까? 남에게 나는 허상으로 비치지 않을까? 이 일련의 의식 흐름을 통해 마침내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
명상관
지난해, 뮤지엄 산 개관 5주년 기념으로 개설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해 만든 돔 형태의 건물이다. 바닥에서 천장으로 길게 이어지며 초승달 모양으로 뚫린 틈새로 하늘이 보이고 빛이 들이친다. 쉼 명상, 여유 명상, 싱잉볼 명상 등을 전문가가 도와준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지만 입소문이 나 참가자가 많다. 안도 다다오는 다음처럼 명상관의 의도를 피력했다. “태양의 움직임과 함께하는 공간에서의 명상으로, 자연과 우주를 만나 교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터렐 전시관과 마찬가지로 명상관을 이용하려면 별도의 입장권을 사야 한다.
며칠 전 쑥섬에 들어가는 날은 따사로운 햇살이 비쳐주고 바닷 바람도 적당히 불어줬다. 쑥섬 지기 김상현 선생님과 동행하게 되었다.
고흥의 중학교 교사였던 김선생과 이쁜 약사였던 부인이 부부가 된 후인 18년 전부터 현재까지 쑥섬을 이뤄낸 이야기를 들었다. 부부는 2000년도에 평생 계획을 각자 글로 써서 교환한 끝에 김선생의 외할머니 댁이 있는 쑥섬에 멋진 정원을 꾸미기로 한 후 연구하고 땀을 흘린 끝에 18년이 흐른 지금 이렇듯 쑥섬을 일궈냈다고 했다.
쑥섬은 개방된 지 3년 남짓 되었지만 희귀 난대림이 조성돼 있어서 전남 민간정원 1호로 지정되었다. 해마다 가볼만한 섬, 쉴 섬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쑥섬은 규모가 크거나 손길이 많이 간 숲은 아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섬 자체가 신성한 자연의 정원이고 꽃밭이다. 스무 명 남짓의 거주민이 살고 있다. 향긋하고 질 좋은 쑥이 많이 난다. 행정 명칭은 애도(艾島).
전남 고흥의 섬 나로도에서 출발하는 작은 배 쑥섬호는 12인승으로 3분이면 바로 눈 앞의 쑥섬에 도착한다. 지루하거나 배 멀미할 틈이 없다. 마을에 들어서면 울퉁불퉁한 돌담길이 정겹다.
작은 숲은 난대 원시림을 이루고 있다. 일반 식물원에서는 볼 수도 없는 것들이라고 한다. 세월을 살아온 육박나무, 붉가시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등이 군락하고 있어서 산길을 걸으며 자연의 숲에서 정화된다.
숲을 오르다 보면 저 멀리 시원한 바다가 나타나기도 한다. 땀을 식히며 쉬다가 다시 걷다 보면 산 정상의 비밀정원이 눈앞에 나타난다. 섬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정원이었다.
별정원 달정원이란 이름으로 조성된 이곳에서 일 년 내내 피고 지는 400여 종의 다양한 꽃들과 일출과 일몰의 어우러짐을 누릴 수 있다.
김 선생은 로즈메리 화단으로 얼른 다가가더니 식물에게 인사하듯 두 손으로 마구 흔들어 허브향기를 즐긴다.
요즘은 각종 허브는 물론이고 꽃양귀비와 당아욱, 작약, 페튜니아, 조팝나무 등이 지천으로 눈부시다. 숲길에는 수국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새하얀 찔레꽃도 한창이었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숲길을 따라 내려가면 등대가 있다. 성화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성화 등대에선 쑥섬의 뒷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다시 마을로 가는 길가엔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어서 꽃이 피고 질 때는 길가에 붉은 동백이 뚝뚝 떨어져 동백꽃길이 된다고 한다.
쑥섬을 천천히 한 시간쯤 돌아보면 심신이 맑아진다. 그리고 고즈넉한 섬의 고요와 숲의 고요를 통해서 힐링을 선물 받는다. 특별한 여행지가 그리울 때 자연 속에 꽃이 만발한 힐링 파크 쑥섬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여행 정보
ㆍ전남 고흥군 봉래면 애도길 43. 전남 고흥군 봉래면 나로도 여객선터미널에서 배 타고 3분
ㆍ탐방비 5000원 + 뱃삯 2000원 *10명 이상 단체는 예약 필요
ㆍ자연환경보호를 위해 큰 배낭과 음식물 반입 반려동물 동반 자제
봄바람 살랑살랑 불어오는 요즘. ‘방콕’이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분들 계신가? 부부가 혹은 가족끼리 또는 동성 친구끼리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곳, 게다가 ‘먹방’까지 기대할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볼까 한다.
경춘선 기차여행[김유정역]_실레마을 이야기길 따라 점순이를 만나다
7호선과 경의중앙선이 교차하는 만남의 장, 상봉역. 춘천 가는 기차는 대성리, 가평을 지나 출발한 지 72분 만에 멈춘다. 내린 곳은 근대문학 ‘봄봄’, ‘동백꽃’의 산실, 실레마을이 있는 김유정역. 역사 맞은편으론 ‘비단으로 병풍을 두른 산’, 금병산이 포근하게 안아준다. 역사를 빠져나와 약 5분 정도 걸었을까. 버선발로 마중 나온 ‘점순이’를 만난다.
“그새 좀 컸는가? 반갑단 말보다 다짜고짜 키부터 재 보는데 잘 봐야 내 겨드랑 밑에서 넘을락 말락. 또 고갤 숙일밖엔 도리가 없다. 딸이 더 자라야 성례를 시켜줄 수 있다며 차일피일 미루고 일만 시키는 장인, 아버지를 못마땅해하면서 나를 충동질해대는 점순이, 반발하다가도 끝내 이용만 당하는 나는 정말 어리석은 머슴이던가. 빙장님, 올가을엔 꼭 성례를 시켜줘요. 더 이상은 못 참아요. 장인의 약속을 반신반의하며 뒷골 콩밭으로 향한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린 비로 안 그래도 고즈넉한 잣나무, 소나무 숲 사이 길은 더없이 폭신폭신. 그 순간이다.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녀들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결코 머물 수 없는 눈웃음의 그녀들이.”
아주 치명적이었던 들병이들 ‘눈웃음 길’을 스치듯 빠져나오면서 그 들병이 꾐에 빠졌던 근식이가 걷던 그 ‘한숨사연 길’을 돌아본다. 오죽하면 자기 집 솥을 훔쳤을까? 세월의 무게만큼 겹겹이 쌓인 잣나무 가지들을 밟고선 심호흡 여러 번에 팔다리도 죽죽 펼쳐본다. 오전 10시에서 12시 사이에 가장 많이 뿜어낸다지 아마. 이윽고 마주한 두 갈림길. 어느 쪽을 택할 텐가? 동백꽃(생강나무) 길 따라 정상도 좋겠고 산골나그네 길 따라 터벅터벅 걸어도 좋겠고. 오늘은 기어코 산골나그네가 병든 남편을 끌고 사라진 으슥한 산 저편으로 가볼 텐가?
김유정역 실레마을에선 김유정문학촌을 구경하고 난 다음 둘레길인 ‘실레마을 이야기길’을 반드시 한 바퀴 산책해야 한다.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의 그곳, 인쇄박물관이 지척에 있는데 많은 분들이 모르고 그냥 지나치고 만다. 김유정 선생이 귀향해 야학을 일으켰던 곳, 금병의숙(錦屛義塾)에서의 인증샷도 의미 있겠고 기차카페로 개조된 폐김유정역에서 타임킬링도 가성비 있다. 인근엔 레일바이크 장도 있고. 또 '먹방'도 빠질 수 없으리. 춘천 하면 닭갈비 아닌가? 역전에서 ‘점순네’를 찾으시라.
꽃 피고 새 우는 고궁 산책[창덕궁]_덕혜옹주가 남긴 마지막 메모를 찾아서
4월 어느 날. 마침 하늘빛은 미세먼지를 걷어내고 바깥 기운도 그리 차갑지 않다. 어제 생일을 챙겨주지 못한 아내를 위해 함께 집을 나섰다. 막상 어디로 가야 하나? 눈치를 살피는데 그냥 ‘가까운 곳’으로 가잔다. 더 어려운 숙제라고?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반겨주는, 다리품 많이 팔지 않아도 되는,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은 어떨까.
1405년 태종 때 제2의 왕궁으로 창건되어 임진왜란 이후 불타버린 경복궁을 대신한 곳. 마지막 임금 순종 때까지 약 270여 년간 왕조의 정궁 역할을 한 곳. 그나마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시크릿 가든’인 후원이 있어 자연과의 조화미와 전통의 조경미를 만끽한 적 있으신지. 그러나 오늘의 관심사는 따로 있다.
바로 낙선재! 경복궁의 건청궁이 그러하듯 창덕궁 내 단청을 하지 않은 유일한 곳. 여인의 '비운' 같은 게 서려 있다고나 할까?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가 말년을 보낸 곳(정확히는 낙선재의 우측 끝에 있는 수강재). 두리번두리번 돌아서 드디어 만난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어쩌면 혼신의 힘으로 써내려간 것일까. 그녀의 마지막 편지(메모)에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옹주는 1989년 4월 12일, 향년 77세로 이곳 낙선재에서 운명한다. 새들이 우짖고 꽃들이 피어나는 4월이면 다시 찾아오고 싶은 곳. 올봄에 방문하신다면 한 가지 추가할 곳이 생겼다. 작년 말에 재개관한 창경궁 대온실이 바로 그곳. 후원 쪽으로 가면 이웃한 창경궁과 연결되는 출입구가 있는데 지척이니 함께 둘러보면 ‘엄지 척’ 장담할 수 있다.
세종마을 도보여행_이 골목 저 골목 헤매기 좋아라
세종마을은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사이에 있는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부 지역을 말한다. 경복궁 서편에 있다 하여 북촌에 대비해 ‘서촌’으로 소문난 곳이다.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입구를 나와 대로를 따라 걷노라면 이윽고 우리은행 건물이 나타난다. 도보여행은 여기서부터 ‘딱’이다.
좌측 골목길로 접어들면 세종마을의 주요 목적지 중 하나인 ‘이상의 집(터)’이 나온다. 백부의 권유로 건축과에 입학한 시인은 1929년 3월, 수석으로 졸업하는데 화가의 꿈을 늘 간직하고 있었다고. 얼핏 카페 같은 이곳엔 비밀의 문이 있는데 그곳을 통하면 잠시나마 그와 호흡할 수 있다. 한 걸음 두 걸음 올라선 다음 이내 날개를 펼쳐 오래된 기와지붕 위로 훨훨 날아올라보라. 이걸 놓치고선 여길 다녀갔다 말할 수 없으리.
할머님과 며느님께서 푸근한 미소와 여유로 차근차근 귀엣말하시듯 이곳저곳 소상히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있는 헌책방’이 다음 코스다. 고인이 된 창업주 할아버지가 결혼하면서 부부의 가운데 이름을 따서 상호로 정했다는 곳, 대오서점이다. 분수를 아는 즐거움 정도로 해석되는 가훈 이야기, 다락방 사연, 풍금 이야기, 드라마 ‘상어’의 주인공(손예진과 김남길) 뒷담화(둘은 흥행작 ‘해적’에서 다시 인연을 이어간다)까지 줄줄 풀어놓으셨는데 그동안 세월이 좀 흘렀나보다. 없던 액세서리 진열대도, 사진 촬영금지 팻말도 보이고 그새 입장료(2500원)도 훌쩍 인상됐다. 오늘따라 주인장도 안보이고 대신 시니어 알바께서 맞이해준다. 가수 아이유가 앨범사진을 찍었다는 상업적 내음 물씬 나는 설명엔 노코멘트할밖에.
좀 걷다 보면 공통으로 생각나는 건 뭐? 때맞춰 신기하게 나타난 곳이 ‘통인시장’이다. ‘골라먹는 맛과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잡도리 쉼터 파라솔 아래에서 ‘셀프’로 즐기기도 편하다. 먼저 1인 5000원 하는 도시락을 구입하면 되는데 엽전 열 냥을 제공하니 하나에 500원인 셈. 그 복잡한 골목길에서 기다랗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 박노수미술관을 지나서 수성계곡 물소리를 벗 삼아 기린교를 건너는 상상도 분명 힐링이다. 다리품을 팔아 ‘시인의 언덕’에 오르면 북한산은 물론 북악산 아래 청와대, 경복궁 일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교통 편리한 역세권에 세종대왕, 정철을 비롯해 수많은 다양한 인물들이 살다 간 흔적이 이리도 집약된 곳 또 어디에 있을까? 종로구에 신청하면 해설사와의 동반 투어도 가능하니 봄날엔 놓치지 마시라. 서촌에 바람이 부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가? 봄날은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