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상조회사에 입사해서 내가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장례 절차도 염습 기술도 아닌 ‘노자 멘트’였다. 염을 다 하고 관에 모신 직후 유족들을 모시고 염습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뒤 마지막 인사를 시킨다. 그러면서 시신 위에 저승 가시는 길에 마지막 용돈을 드리라고 ‘멘트’를 친다. 멘트를 얼마나 감동적으로 치느냐에 따라 그날 노잣돈 액수가 결정되기 때문에 노자 멘트는 매우 중요했다. 그 시절 노자 멘트는 대부분 보조팀장들이 했는데, 노잣돈이 적게 나오는 날에는 고참에게 욕을 들어먹곤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 가족도 염습 장면을 참관하면서 아버지의 관 안에 노잣돈을 넣어드렸다. 마지막 ‘천판’(관 뚜껑)을 덮고 결관하여 다시 안치실에 모실 때까지도 나는 장례지도사들이 노잣돈 빼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마지막 천판 닫는 순간 유족에게 깊숙이 고개 숙여 인사드리라고 하는데 그 순간 빼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잣돈 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인간은 영혼이 사는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어왔다. 이러한 생사관을 바탕으로 영혼이 사는 세계에서도 재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죽은 사람의 몸이나 무덤 속에 재물을 넣어주는 문화가 생겨났을 것이다. 이런 문화는 동서양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고, 심지어 순장(殉葬)이라는 형태까지 생겨났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문명이 발달하면서 이런 풍습은 점점 사라졌다. 이후 국가별·종교별로 다른 생사관이 생겨났고, 그에 따른 죽음 의례도 발전해왔다.
우리 전통 장례에서는 노잣돈 놓는 절차를 찾아볼 수 없다. 비슷한 절차로는 습(襲)1)의 단계에서 ‘반함’(飯含) 의례가 있다. 반함은 시신의 입에 쌀과 엽전 혹은 구슬을 물려 입안을 채우는 것이다. 이는 부모님에 대한 예(禮)로 행하는 것인데, ‘예서’에는 ‘반함을 하는 이유는 차마 입이 비어 있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맛있고 깨끗한 물건을 채우는 것’이라 나와 있다. 저승 가서 쓰라고 드리는 노잣돈과는 의미가 다른 것이다.
내가 염습을 할 때는 주로 불교용품점에서 판매하는 지전(紙錢, 가짜 돈)을 준비해서 유족에게 미리 나누어드리고 노잣돈을 올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노잣돈은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죽은 이에게 5만 원 지폐를 가득 넣어드린다고 해도 유족들 마음에 미움과 원망이 가득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가치 없는 종이 쪼가리일 뿐이다. 지전이라 하더라도 가족들 마음에 공경과 사랑이 가득하다면 10억 원, 100억 원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을 담아 저승으로 보내드리자.
1) 유교 상례 절차의 두 번째 단계로 고인을 목욕시키고 습의(襲衣)를 입히는 절차다.
사랑하는 이와 백년가약을 맺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혼주석에 앉을 나이가 되었다. 자녀를 품에서 떠나보낼 생각을 하면 버진로드를 걷던 그때보다 더 두근거린다. 중요한 순간에 실수를 할까 우려스럽기도 하다. 오랜만에 준비하는 예식이 떨리고 걱정스러운 이들을 위해 결혼 준비 전후 알아두면 좋은 에티켓을 소개한다.
Step 1 결혼 준비의 첫 단추, 상견례
상견례는 성공적인 결혼을 위해 넘어야 할 첫 관문이다. 가족이 될 이들과 처음 인사를 나누는 자리인 만큼 자녀뿐 아니라 혼주도 긴장감을 갖고 임해야 한다. 상견례의 장소나 일정 등은 자녀 측에서 준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혼주는 예비 사돈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데 집중한다. 단정한 옷차림, 온화한 미소 등 외적인 부분도 인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지만, 상견례에서는 대화 주제가 분위기를 좌우한다. 특히 자녀 입장에서는 어른을 상대로 대화를 주도하기 어렵기 때문에 양가 부모가 화젯거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
처음은 간단한 안부 인사로 시작해 자녀가 고심해 예약한 상견례 장소와 메뉴를 칭찬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 좋다. 그다음 자녀의 어린 시절, 취미 등 가벼운 화제로 이야기를 돌린다. 자녀와 평생을 함께할 상대인 만큼 궁금한 것이 많을 테지만, 가정형편이나 정치, 종교, 학력 등 민감한 질문은 지양한다. 또 학술적 이슈를 논하며 지식을 과시하지 않도록 유의하고, 연예인 가십 등 가벼운 소재도 언급을 삼간다. 이외에 집안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수 있으므로 대화 중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는지 자녀에게 미리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상견례 중 예물, 혼수 등 결혼 준비에 필요한 요소를 논의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칫하면 금전적인 이유로 얼굴을 붉히게 될 수도 있다. 준비 과정에서 상대 집안과 의견이 쉽게 일치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정리된 뒤 상견례를 진행하는 것이 좋다.
코로나 시대 상견례의 ‘웃픈’ 준비물 ▶ 이제는 상견례가 ‘5인 이상 집합 금지’의 예외 규정으로 적용되고 있지만 여전히 찜찜해하는 이들이 많다. 일부 식당은 가족임을 증명해야 하는 곳도 있다고 하니, 만일을 대비해 가족관계증명서나 청첩장을 챙기는 것이 좋다. 국제결혼 등의 이유로 대면이 어렵다면, ‘줌’ 등 화상회의 시스템으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는 방법도 있다.
Step 2 일생일대의 순간, 결혼식
예식 당일에는 최소 2시간 전에 도착하는 것이 좋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의외로 식장에 촉박하게 도착해 허둥대는 혼주가 꽤 있다. 웨딩홀을 둘러보고, 이른 시각부터 식장을 찾은 하객을 맞이하려면 여유 있게 출발해야 한다.
식 중 혼주의 참여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 양가 어머니의 화촉점화는 대부분 당일에 리허설이 진행되지만 신부 입장 시 딸과 손을 잡는 법, 사위에게 손을 넘겨주는 타이밍 등은 예식 직전 간단히 안내되는 경우가 많다. 헷갈릴 것 같으면 유튜브에서 ‘신부 입장’, ‘혼주 입장’ 등의 키워드를 검색해 예식 영상을 보고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자녀와 인사를 나누는 시간에는 등을 토닥여주며 생각해놓은 덕담을 건넨다. 그 한마디가 자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순간으로 기억된다. 다만 눈길을 끌 정도로 펑펑 울 경우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것이 좋다.
식이 끝나면 원판 사진 촬영을 깜박하고 곧장 연회장으로 이동하는 혼주가 있다. 혼주가 자리를 비우면 촬영이 불가하고, 다음 예식까지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식순이 끝날 때까지 대기해야 한다.
폐백의 분위기는 덕담이 좌우한다 ▶ 본식 후 신부와 시댁 가족이 인사를 나누는 자리인 폐백은 신부에게 매우 어려운 행사다. 어색한 건 시니어도 마찬가지지만, 어른으로서 용기를 북돋아주면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 덕담은 신부가 절을 하고 술을 올릴 때 건네면 된다. 높은 어른이 함께할 때도 시부모가 먼저 절을 받는 것이 관례다. 잘살라는 의미가 담긴 ‘절값’도 잊지 않고 준비한다.
Step 3 마무리까지 품격 있게, 답례
첫인상만큼 끝 인상도 중요하다. 식이 끝난 뒤에는 하객에게 답례 인사를 전하는 것이 마지막 매너다. 코로나19 이전까지만 해도 식사가 그 역할을 했지만, 최근에는 하객이 줄어 답례품에 더욱 신경 쓰는 분위기다. 답례품 종류는 캔들, 꿀, 홍삼, 와인, 기프트 카드 등 다양하다. 비대면 시대인 만큼 메신저 등을 통해 전해도 되지만, 축의금을 내고 예식에 참석하지 못했거나 모바일 청첩장으로만 초대한 하객에게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상례다. 특히 자녀와 연결고리 없이 개인적인 친분으로 초대한 하객은 자녀가 직접적으로 연락하기 어렵기 때문에 신경 써서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성의를 표현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자녀의 행사에 참여해준 이들을 잊지 않고, 훗날 그들의 경조사에 참석해 받은 마음을 배로 돌려주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귀해지는 시니어에게는 가장 고마운 답례가 될 것이다.
은퇴 후 자녀 결혼시키면 하객이 줄어든다? ▶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 신부지만, 그 자리를 빛내주는 건 하객이다. 문제는 은퇴를 하면 인간관계가 협소해져 초대할 하객 수도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녀에게 결혼을 독촉할 수도 없는 노릇. 자녀의 결혼식을 북적북적하게 해주고 싶다면, 은퇴 전부터 지인의 경조사를 꾸준히 챙기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SNS)를 활발히 해 많은 이들과 교류하는 것이 좋다.
도움 사단법인 한국웨딩플래너협회
고전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인류의 보물창고입니다. 사람은 짧은 생을 살다 가지만 축적된 지혜는 면면히 이어집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사람의 생각과 정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고전에 담긴 지혜는 삶의 고갱이가 되어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 ‘영혼의 혼밥’을 짓는 신아연 작가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을 위해 동양 고전을 재료로 솥단지를 걸었습니다.
“집에 글쎄 도둑이 들었지 뭐예요. 얼마나 놀랐는지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어요.”
요즘 하고 있는 어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재기발랄한 아가씨가 데이트 상대에게 던진 대사입니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젊은 층에서 딴에는 재치로 하는 말, 단순 유행어라고 하기엔 그 철없음에 민망하여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어디 비교할 데가 없어서 일상의 자잘한 사건 사고를 장난삼아 6.25 난리를 끌어들여 말할까요. 6.25를 직접 겪은 세대가 이 말을 들을 때 느낌이 어떨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거겠지요. 그저 재미있고 유쾌하면 그만인 거지요. 하지만 전쟁의 상흔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괴리, 허탈, 상처, 분노를 더해 세대 간의 정서적 공감력 단절에서 오는 잔인한 슬픔이 가슴에 멍울질지도 모릅니다.
‘도덕경’을 쓴 노자는 전쟁의 참상을 이렇게 애곡하고 있습니다.
군대가 머문 곳에는 가시덤불만 자라고, 큰 전쟁이 있은 후에는 땅이 피로 저주받아 흉년이 들며, 만물을 낳는 흙조차 모성을 잃어버린다고. 무고한 백성들뿐 아니라 전쟁터에 끌려간 말이 전선에서 새끼를 낳는다고. 그러니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하며, 이겼다 해도 승리를 미화하지 않고 상례(喪禮)로 처리해야 한다고. 그것은 흉사이기 때문에 나쁜 일을 기리는 자리, 즉 오른쪽에 최고 지휘관이 서야 한다고.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는 사람은 살인을 즐기는 사람이며
살인을 즐기는 사람은 결코 큰 뜻을 펼칠 수 없다.
길한 일이 있을 때는 왼쪽을 높이고 흉한 일이 있을 때는 오른쪽을 높인다.
둘째로 높은 장군은 왼쪽에 서고 제일 높은 장군은 오른쪽에 위치한다.
이는 상례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을 살상하였으므로 이를 애도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상례로 치러야 한다.
-노자 ‘도덕경’ 31장
올해로 6.25전쟁 71주년을 맞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함께 시작됐으니 전쟁의 참혹함을 새삼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6.25전쟁은 분단의 고통과 함께 여전히 살아 있는 슬픔입니다. 그 슬픔을 함께 아파하지는 못할망정 조롱하는 듯한 유행어를 듣는 것은 언짢고 화가 납니다.
‘전쟁이 나쁘지, 농담이 나쁜가’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해학과 촌철의 달인 장자의 비유를 들어볼까요?
‘장자’ 칙양편에는 인간사를 달팽이 뿔 위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비유한 글이 나옵니다.
달팽이 머리 위에 뿔이 두 개 나 있는데
각각이 하나의 나라다.
왼쪽 뿔은 촉나라고, 오른쪽 뿔은 만나라다.
이 두 나라는 서로 땅을 빼앗기 위해
틈만 나면 전쟁을 벌였다.
그 싸움이 워낙 치열해서
널브러진 병사의 시체가 수만 구나 되고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면
15일이나 걸려야 돌아왔다.
촉만지쟁, 와각지쟁으로 불리는 장자가 만든 우화입니다. 두 나라 간의 싸움이 처절하기 그지없지만 기껏해야 달팽이 뿔 위에서의 일이니 그야말로 하찮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하늘이나 우주에서 내려다본다면 인간들끼리의 전쟁이 달팽이 뿔 위에서 벌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겠지요. 더 중요한 것은 달팽이의 두 뿔은 한 몸에 달려 있다는 거지요. 두 뿔 중 하나를 잃게 되면 달팽이는 부상을 입거나 죽음을 맞게 되겠지요.
결국 전쟁은 승자가 없습니다. 노자 말씀대로 오른쪽을 높인들, 상례로 치른들 모두가 희생자요, 부질없는 일인 거지요. 병법가인 손자조차 이익을 얻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 해도 감정이나 기분이 앞서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지혜의 대가들은 입을 모아 전쟁은 가급적 치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지구상 어딘가에서는 지금도 전쟁 중이니….
이익이 아니면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가능성이 높지 않으면 군사를 쓰지 않으며, 위험이 없으면 결코 싸우지 않는다. 군주는 분노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되고, 장군은 화 때문에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망한 나라는 다시 살릴 수 없고,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릴 수 없다. 그래서 밝은 군주는 전쟁에 신중하고, 뛰어난 장군은 깊이 경계한다. 이것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군대를 온전히 하는 길이다.
- 신정근 ‘공자와 손자’
“58년 개띠입니다.” 어느 모임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첫마디다. 개띠의 당당함과 그들의 파란만장한 세월이 그 한마디에 포함되어 있다. 1953년, 전쟁이 끝나고 아기가 많이 태어났는데 그 절정기가 1958년이다. 개띠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뺑뺑이 추첨으로 배정받아 들어갔다. 58년 개띠라는 말은 사회 여러 방면에서 이전 세대와 차별되고, 이후 세대와도 분명하게 구분되어 생긴 용어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운동장에 가득했다. 교실이 모자라 오전과 오후반으로 나뉘었다. 필자는 비 오는 날 잠시 낮잠을 잤다가 오후반 등교가 늦어 엉엉 운 적도 있다. 그 시절은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가난한 집 아이가 꽤 많았다. 대부분 도시로 나가 공장에 취직했고, 여자들은 식모살이를 했다. 그러나 형편이 괜찮은 아이들은 과외도 했다. 필자는 학교가 너무 멀어 쌀 두 가마니를 주고 친척집에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 펜팔을 했다. 단양 골짜기에 사는 소년에게 줄곧 편지를 써댔다. 엄마가 공부에 지장이 있다며 편지가 오면 아궁이에 집어넣곤 했다. 그 일로 엄마에게 대들던 사춘기가 떠오른다. 펜팔은 얼굴도 모르는 누구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냥 누군가에게 솔직한 말을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것 같다.
고등학교 때는 서울에 사는 준이라는 소년에게 편지질을 했는데 아침이 오면 지난밤에 쓴 편지가 너무 유치해서 박박 찢어버릴 때가 많았다. 저 별은 나의 별, 이 별은 너의 별. 별과 달을 자주 글 소재로 써먹었다. 편지를 자주 쓰다 보니 글 솜씨가 좋아져 친구들 연애편지를 대필해주고 옥수수와 고구마를 얻어먹기도 했다.
당시 수학여행을 가면 다른 학교 남학생들이 주소가 적힌 쪽지를 여학생들에게 던졌다. 누구를 지정해서 쓴 쪽지가 아니라 줍는 사람이 그 쪽지의 임자.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다가 결혼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필자가 아는 사람 중에도 있다. 그 부부는 딸이 “엄마 아빠는 어디서 어떻게 만났어?” 하고 물어볼까봐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다 한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누가 뒤를 바짝 따라오며 말했다. 누군가 필자에게 호감을 보이는 게 싫지는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왜 이러세요” 하며 튕겼다. 예전에는 대부분 남자가 프러포즈를 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스무 살 봄, 이종사촌과 잘 알던 그는 계속 필자를 따라다녔다. ROTC 복장을 하고 자주 필자 앞에 나타나곤 했다. 그 시절은 주로 남자들이 데이트 비용을 부담했다. 돈이 없을 때는 전당포에 손목시계를 맡기기도 했다. 주로 만나는 장소는 다방이었고, 커피 한 잔을 시켜 둘이서 나눠 먹기도 했다. 가끔 이종사촌 커플과도 만나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필자는 예술을 좋아했다. 한눈에 그에게 반해서가 아니라 외로움 때문에 가까워진 것도 같다. 만남은 운명이다. 필자는 말라버린 우물가에 누워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평생 동안 그 순간이 그 낯선 장면이 자주 떠오른다. 그가 속내의를 사서 아버지를 찾아왔던 일, 아버지와의 어색한 만남, 죄책감에 당황스러워하던 그의 표정. 아버지는 서너 달 후 뇌졸중이 와서 길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돌아가셨다. 그는 장례식에 참석했다. 필자는 숙명으로 결혼을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판돈으로, 대우에서 나온 컬러텔레비전과 냉장고를 샀다. 컬러텔레비전은 그 해 혼수품으로 처음 나온 제품이었다. 시어머니는 밤색 모직코트 옷감을 혼수함에 넣어주었다, 양장점에 가서 모직바지와 코트를 맞춰 입었다. 지금도 그 기억이 남아 옅은 밤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시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신혼여행을 가야 하는데 입고 갈 마땅한 옷이 없었다. 그 시절의 결혼 예복은 긴 소매 옷, 앞이 막힌 구두가 상례였다. 신혼여행을 안 가면 남들 보는 눈도 있고 후회도 될 것 같아 아산 현충사로 갔다. 하룻밤 있었나.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젊은 날의 쓸쓸함이여! 그때 그 얇은 마음이 얼마나 외로움에 떨었을까.
결혼을 후회하지 않으려 무척 애를 썼다. 7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필자는 늘 동생들에게 모범이 돼야 했다. 지금은 홀가분하다. 58년 개띠 인생. 이제부터는 자존감 회복에 중점을 두고 싶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사랑하자. 그래야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더불어 살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
우리의 근대사 속 중요한 장면에서 등장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영정사진이다. 부산의 이태춘 열사의 사진을 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옆에 나란히 선 문재인 대통령의 사진이나, 이한열 열사의 영정사진을 든 이상호 의원의 사진은 그 장면만으로 아직까지도 상징성을 인정받고 회자된다. 영정사진은 고인이 누구였는가 설명하는 생의 마지막 수단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정사진을 마련하는 일을 꺼려하고 좀 더 뒤로 미뤄놓고 싶어 한다. ‘장수사진’이라는 선의가 느껴지는 명칭으로 바뀌어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영정사진이 언제부터 우리의 장례 문화에 자리 잡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가장 오래된 기록을 꼽자면 1934년 11월 일본 총독부에 의해 발표된 의례준칙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의례준칙 전문 중 기제(忌祭)의 서(序) 첫 번째 항목에 ‘제주지방(祭主紙榜) 또는 사진(寫眞)을 제위(祭位)에 봉안(奉安)함’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전까지 영정(초상화)은 지금의 용도와는 조금 달랐다. 조선시대까지는 장례나 상례 때 등장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에서 조상을 기리기 위해 신주나 지방 대신 사용했다. 사당을 이전에 영당(影堂)이라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 영정사진 탄생
실제로 일본에서는 훨씬 더 이전에 영정사진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개항을 통해 사진이란 문물이 수입된 이후 일본에선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했다. 또 세이난전쟁(1877년) 때 난을 진압하기 위해 파병되는 군인들에게 사진을 한 장씩 찍어줬다는 기록도 나오는데 이때의 사진을 일본의 최초 영정사진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 전통은 청일전쟁(1894년)에도 이어졌다.
국내에 사진이 본격적으로 들어 온 것은 1883년. 한성순보에 촬영국이라는 사진관에 대한 보도가 나오는데, 황철이란 사람이 세운 사설 사진관이다. 이후 지운영은 1884년 고종의 어진을 찍었다. 이들을 통해 많은 인물사진이 촬영된 것으로 전해지나 남은 기록은 거의 없는 상태다.
일제강점기 시절 영정사진 자료 역시 찾기가 쉽지 않다. 일제강점기의 고종 황제나 순종 황제 장례식에도 영정사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완용의 매일신보 부고 기사에는 그의 초상사진이 쓰였지만, 경성일보에 게재된 그의 장례식 보도사진 속 제위에도 영정사진의 모습은 없다.
광복 후인 1945년 7월 5일 당시 주한미국공보원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이 촬영한 백범 김구 선생의 장례식 영상자료에는 백범의 영정사진이 등장한다. 그의 사진은 운구행렬과 효창공원까지 함께했다.
을지대학교 장례지도학과 이철영 교수는 “과거 국내에선 장례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데 인색해 영정사진의 기록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발견되는 오래된 사진도 대부분 1960년대 이후의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일제의 의례준칙에 기록이 남아 있는 만큼 일본의 영향을 받아 장례 때 영정사진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장의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1982년을 기준으로 영정사진의 대중화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추론도 있다. 당시 부산에서 일본식 장례 상품을 그대로 들여온 상조회사가 영업을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영정사진 문화가 함께 들어왔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일본에서 영정사진이 장례식에 대중적으로 사용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라는 의견이 있다.
인식 바뀌어 웃는 사진 쓰기도
불과 얼마 전까지 영정사진 제작은 남겨진 자녀나 가족의 몫이었다. 따로 영정사진을 찍어두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 그러나 정작 가족이 사망했을 때 준비되는 영정사진은 증명사진이나 주민등록증 사진을 확대해 인화한 조악한 수준의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전 준비의 필요성이 점차 커져갔다.
그러다 사진 장비와 기술 보급으로 사진관이 많아지고, 영정사진 촬영을 일종의 봉사활동 수단으로 삼는 사진가들이 늘면서 사진에 대한 걱정은 줄어들게 됐다. 또 이를 통해 영정사진에 대한 인식도 상당히 개선됐다.
영정사진 촬영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 한 동호인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정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노인이 많았다”며 “그러나 최근에는 영정사진이 장수사진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사진찍기를 즐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심지어 2~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촬영해두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제는 동네 노인정 등을 통해 영정사진을 파일 형태로 공동 보관하는 문화까지 생겼을 정도라고.
그렇다면 영정사진은 어디에서 준비하는 게 좋을까. 제일 만만한 곳은 역시 사진관이다. 영정사진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가족사진을 찍는 날 영정사진까지 함께 찍어두는 사람들도 있다. 또 최근에는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기 위한 인물사진 전문의 흑백사진관도 서울 북촌이나 연남동 등 일부 지역에서 생겨나고 있다. 가장 대중화된 사진 크기는 28×36㎝다.
현직 사진사들은 아직까지도 본인이 직접 와서 찍는 영정사진보다 생전 사진을 바탕으로 합성해 만드는 게 많다고 말한다. 물론 요즘은 자신의 장례식에 쓸 영정사진을 미리 준비해두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솜사탕 사진관 고용주 실장은 “영정사진을 찍으러 오시는 분들의 태도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져 치아가 보이게 웃거나 심지어 선글라스를 쓰고 측면 모습을 촬영하는 사람도 있다”면서 “만약 의상이 문제라면 평상복을 입고 촬영한 뒤 한복이나 양복으로 간단히 합성할 수 있고 비용도 6~7만원 선으로 장례식장에서 만드는 비용보다 저렴하니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금년은 유래 없는 10일간의 추석 명절 휴일로 국민들은 긴 휴식의 시간을 맞이하게 됐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젊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으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뉴스를 내보낸다.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명절을 중시하는 어른들에게는 괘씸한 젊은이들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우리 국민 가운데는 명절만 되면 매년 두 번씩 반복되는 교통체증을 겪으면서도 성묘를 하기 위해 고향을 찾는 사람이 많다. 꼭 성묘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보지 못한 가족과 지인들을 만난다는 즐거움으로 고향을 찾는다. 그런데 명절이 끝난 후에는 부작용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가족 간 갈등이 표출되기도 하고 이혼율이 급격히 높아진다는 통계도 보인다. 어찌된 일일까? 즐거운 명절이 행복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명절의 의미를 되새겨봐야 한다.
명절은 오랜 전통을 계승하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 속에는 우리 민족이 가진 특성과 농경문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계승과 소멸을 되풀이하면서 전통은 우리 앞에 서 있다. 관혼상제를 중시하던 문화를 돌아보면 지금 우리의 전통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관례는 단발령을 계기로 자취를 감춰버렸고, 혼례는 서양식으로 대부분 진행되고, 상례 역시 장례식장이라는 장소를 설치해 상조회사에서 대신 치루고 있다. 그나마 남은 것이 제사인데 그 역시 원형이 변형되고 있다.
이번 추석 명절에도 조상들의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하고 차례를 지낼 것이다. 그런데 농경사회에서 만들어진 성묘의 풍습은 급속한 도시화와 핵가족화로 인해 변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장례 방식이 매장에서 화장으로 옮겨가면서 묘지 문제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지 오래되었다. 이러한 형태로 진행되면 성묘를 가는 사람들도 줄어들 것이고, 한 세대만 지나면 성묘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70~80세가 넘은 어른들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 조상의 묘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는 일일 텐데, 그 후손들은 그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마음도 있고, 심지어 손자 세대로 가게 된다면 이마저 사라질 처지에 놓여 있다.
변화는 자연스런 이치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고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과거에서 현대로, 현대에서 미래로 변화하는 것을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에게는 성묘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에는 제사를 언제 지낼 것인가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집안도 많다. 과거에는 늦은 밤 시간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났지만 요즘에는 직장 문제로 늦은 시간까지 제사를 지내는 일이 불편해서 제사시간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만약 시간을 바꾸지 않으면 다음 날 결근을 하거나 휴가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제사를 지내는 일 자체가 후손으로서의 의무감 이외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제사 절차나 상차림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제사를 지내지 않거나 다른 종교 시설에 모시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기 싫어서 종교를 바꾸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씁쓸할 뿐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정말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전통을 지키기 위해 성묘의 방법을 바꾼 가족이나 문중도 많다. 흩어진 조상님들의 산소를 찾아 성묘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비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제는 조상들의 산소를 한곳에 모아놓고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는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이러한 문제를 두고 심하게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성묘나 제사가 사라지는 것보다 오히려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켜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통을 지키자니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고, 전통을 버리자니 불효자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은 현실 속에서 누구나 진퇴양난의 고민을 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예학자였던 신의경 선생은 개장(改葬)을 논의하면서 “옛날의 개장은 분묘가 어떤 이유에서 붕괴되어 시신이나 관이 없어질 우려가 있을 때 하는 것이었으나, 요즈음에는 풍수설에 현혹되어 아무 이유가 없이도 천장(遷葬, 천묘)을 하는데, 이것은 심히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장(移葬)이나 개장은 특별한 이유 없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며, 이것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훼손되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집안이 번창하기를 기대하면서 조상의 묘를 함부로 이전하거나 개장하는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상을 한곳에 모시고 성묘를 하는 것은 부득이한 선택일지 모른다.
과거 매장하던 풍습에서 화장하는 풍습으로 바뀐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지만 이제 70% 정도의 국민이 화장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최근에는 시신을 화장해 그 유골을 그릇에 담아 봉안당(奉安堂)에 모시는 가족이 늘고 있다.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국가의 정책으로 화장을 권장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고, 봉안당이나 수목장이 관심을 받는 것도 자연스런 현상이다. 필자가 평소에 노인을 많이 상대하고 있지만, 과거처럼 매장을 고집하는 사람은 드물다. 조상들의 묘를 돌보는 것은 자신들의 책무이지만 정작 본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자식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 후손들이 잘 해내기도 어렵고 선산에 묻혀도 수시로 돌볼 자녀도 많지 많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스스로 미래에 대해 포기하는 것일까.
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선진국이 자신의 정체성을 전통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의 고민은 불편한 진실도 아니고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질문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를 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해준 조상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죽음의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시대가 달라지면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도 달라지고 방법도 달라진다.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다. 이 세상에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가족과 친척 혹은 문중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 좋은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어떨까. 그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도리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다. 이번 추석은 행복한 명절이 되기 위한 지혜를 모아보면 좋겠다.
동네에 먹자골목이 있다. 길 좌우로 200m 정도 각종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다. 잘되는 집은 손님들이 줄을 서지만, 안 되는 집은 파리만 날리다가 몇 달 못 가 없어지고 다시 다른 업종이 들어오는 일이 반복된다. 한 달에도 몇몇 점포들이 문을 닫고 새로운 음식점이 문을 연다. 개업 화환들이 화려하게 입구를 장식한 개업 음식점들을 보면 희망이 가득해 보이지만, 상례로 보아 몇 달 못 가 또 문 닫을 거라는 예상이 되면 측은한 마음마저 든다. 새로 문을 연 호프집 옆에 얼마 안 가 새 호프집이 생긴다거나, 치킨집이 있는데 또 치킨집이 생기면 둘 중 한 집은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치킨게임을 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지금의 자영업 시장은 인테리어 업자만 돈을 버는 구조다.
강남의 잘 꾸며놓은 고깃집에 갔었다. 손님보다 종업원 수가 더 많아 보였다. 2층이 경관이 좋아 2층으로 가려고 했더니 2층은 서빙이 안 된다며 그냥 1층에 앉으라고 했다. 넓은 1층에도 손님이 앉아 있는 곳은 몇 테이블 안 되었다. 월세는 꼬박 내야 하는데 이렇게 장사가 안 되니 주인은 속이 바짝바짝 탈 것이다.
손님이 많기로 소문난 강남 대형 쇼핑몰은 젊은이들이나 몰려가는 곳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시니어들이 좋아하는 메뉴를 요리하는 음식점들도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자주 가는 쇼핑몰인데도 이런 음식점들이 있다는 걸 몰랐으니 장사가 잘될 리 없다. 시설은 깨끗하게 잘해놓았으나 한창 저녁을 먹을 시간인데도 손님이 얼마 안 되었다.
잠실의 한 삼계탕 집은 한때 손님이 벅적였는데 최근 문을 닫았다. 삼계탕 한 그릇에 1만5000원을 받아 돈을 좀 버는가 했더니 적자라며 문을 닫은 것이다. 겉으로는 손님이 많아 남는 장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큰 시설을 유지하자니 관리비에 인건비에 카드 수수료까지 떼이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계탕 집을 정리하고 아파트 단지 안에 김밥 등을 파는 분식집을 차렸는데 현금 장사에 손님이 많아 오히려 낫더란다. 음식 값이 싸서 손님들이 부담 없이 드나들기 때문이다.
자영업자들은 권리금을 내고 점포를 확보한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봐야 성공 확률은 10% 정도다. 20~30%는 문도 못 닫고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고, 나머지는 적자란다. 외식 산업 성공률은 매우 낮다. 잘되는 업소라 해도 끝까지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줄을 서다가도 손님들의 취향이 바뀌어 어느 순간 발길을 돌리기도 한다. 여기에 건물주가 집세를 올리거나 자기가 운영한다며 내보내는 일도 발생한다.
건물주들은 가만히 있어도 해마다 건물 값이 오른다. 현재 금리는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그렇다면 집세도 내려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장사가 잘되면 집세를 올리는 건물주도 많다. 자영업자들은 잠자는 시간 빼고 하루를 쉬지 않고 일한다. 그래야 겨우 살아남기 때문이다. 반면 건물주들은 골프나 치러 다니면서 앉아서 거저 돈을 번다.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세상살이가 쉽다. 하루 종일 일해도 남는 게 없는 자영업자들에 비하면 뭔가 불공평해 보이지만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이런 정도의 현상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러나 모순은 모순이다. 공평하지 않은 것들이 많아 보인다. 새 정부가 이런 문제들을 직시하고 합리적인 조정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
어느 민족에게나 영웅은 있다. 다만 양상은 제각각이다. 국민성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영웅들을 규정하고 파악한다. 때로는 어떤 민족에게 영웅인 인물이 다른 민족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어떤 영웅을 어떻게 떠받드는지 살펴보면 국민성의 일단을 검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글 김유준 프리랜서 dongbackproject@gmail.com
우리에게 영웅은 어떤 의미인가? 이웃 나라 일본이나 중국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를까? 21세기 들어 요즘처럼 한중일의 관계가 긴박하고 날카롭기는 처음이다. 더불어 세 나라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그들의 영웅들을 우리와 비교해보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현실적이되 현실적이지 않은 중국 영웅들
먼 옛날부터 중국의 영웅들에게는 도교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의 영웅 관우가 번성 전투에서 패하고 참수된 이래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신격화된 것은 대표적인 예. 정사(正史)인 진수(陳壽)의 삼국지에는 “강이자긍(剛而自矜)의 단점으로 패망했으니 이수(理數)의 상례”라 기록된 장수가 민담과 설화 차원에서는 신선의 경지까지 오른 것이다.
관우의 사당이 무묘(武廟)라고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 일컬으며 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받들듯 중국 사람들은 관우를 자국의 무를 대표하는 인물로 숭앙한다. 여타 영웅들에게서도 도교(또는 도교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토착신앙)의 영향은 거의 빠짐없이 드러난다. 의 모사 장량이 신선에게 태공망의 병법서를 전수받는 과정이 그렇고, 에서 제갈량이 남동풍을 불러오거나 자신의 수명을 늘릴 때의 묘사 역시 그렇다. 그 바탕에는, 인간이 신선의 경지에 올라 삼라만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에서 손오공이 요괴들을 물리치며 천축국으로 향하는 여정에도 도불습합(道佛習合)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를 비롯한 민담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중국 문학의 커다란 줄기인 무협소설에도 이런 경향은 짙게 나타난다. 세계적 거장 이안 감독이 영화화한 왕두루의 소설 에서 주인공 리무바이는 최고수의 경지에 이른 뒤 죽음을 맞이하고 또 다른 주인공인 용은 거친 물길에 스스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소설에서 그들의 죽음은 또 하나의 경지에 이르는 단계로 묘사된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에서 두 사람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한다.
“리무바이는 강호를 떠나려는 순간 최고의 무공에 도달한다. 최고의 무공은 다스리지 않고 조화하며 삼라만상의 기운과 조응하는 자기 내면의 기를 끌어낼 때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은 리무바이도 용의 질주하는 욕망, 젊음의 활기를 은근히 부러워한다. 그것도 세상이치다. 어느 쪽도 결핍이다. 진정한 자유는 그 결핍을 인정하는 것. 영화 마지막에는 그 결핍을 초월하는 용의 해결방식이 나온다.”
서극 감독의 이나 정소동 감독의 은 더하다. 이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빠짐없이 장풍을 쏘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2000년에 리메이크된 ‘촉산전’에서 아미파의 본산인 아미산(촉산)은 숫제 구름 속에 둥둥 떠 있다. 이수민의 으로 대표되는 이런 무협소설 속에서 중국의 무술 고수들은 죽기도 전에 이미 비현실적 경지에 이르러 있다.
이런 경향이 단지 고대 영웅들에게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덩샤오핑에 의해 ‘문화대혁명은 내란’이라 규정되었음에도 모든 중국 인민폐(人民幣: 런민비)에 초상이 그려진 마오쩌둥은 중국인들이 영웅을 신격화하는 가장 가까운 예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영웅들은 그리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은 인간세상을 번민의 각축장으로 해석하고 끊임없이 도탄을 초월하려 애쓴다. 그 시도가 성공적이든 아니든, 중국인들은 그들 영웅이 마침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믿으려 한다. 머나먼 고대에서부터 그런 영웅들이 활개쳐온 세상이기에 그들은 그들의 제국이 다름 아닌 세계의 중심, 중국(中國)이라 여긴다.
지극히 현실적인 일본의 영웅들
중국과 달리, 일본 영웅들의 머리 위에 신의 면류관이 얹히게 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천황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천조대신: 天照大神) 이후 신격화의 자격은 오직 왕족에게만 부여된다.
물론 수백, 수천의 잡다한 신들이 신사(神社)에 모셔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본격적 믿음이라 부르기 힘든 것은, 일본 토속신앙인 신도(神道)를 본격적 종교로 인정하기 힘든 까닭과 궤를 같이한다. 지방의 신사에 모셔진 신격화의 대상들은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영향력이 국소적이고 제한적이다. 정순분이 쓴 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일본 신화는 천상신(天上神: 天津神)과 지상신(地上神: 地津神) 간의 투쟁이 중심축을 이루는 점이 특징으로, 지상신은 천상신에게 지배당하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일본의 첫 통일 정권인 야마토 조정의 지배층인 황족이나 귀족이 믿었던 신이 천상신이 되고, 평정된 지역의 사람들이 믿었던 신이 지상신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당시의 정치적 패권을 잡은 야마토 조정의 신화가 문자로 서술되어 남고, 그 밖의 토속적·자연적 신화는 점차 사라져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토속적 신화가 절멸된 결과, 일본 사람들을 사로잡는 영웅들은 새롭게 구성돼 현실과 맞닿아 있게 됐다. 일본의 대표적 설화인 모모타로(桃太郞)가 현대에 이르러 묘사되는 방식은, 일본 사회가 어떻게 영웅을 소비하는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모모타로는 복숭아에서 태어났다는 전설 속 영웅이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귀신들을 쫓아냈다고 전해진다. 교활하게도 일본의 군국주의는 이 모모타로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을 고무시키는 방법으로 이용했다. 영국과 미국을 귀축(鬼畜)으로 규정하고 군인들에게 ‘모모타로가 되어 귀신들을 물리치자’고 부추긴 것이다( 같은 충신들의 이야기 역시 비슷한 목적으로 사용됐다).
종전 이후 모모타로는 방송에서 탐관오리를 벌하는 영웅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모모타로는 40분쯤 악당들의 악행을 지켜보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일본 장구 소리를 배경으로 귀신 가면을 쓰고 “복숭아에서 태어난 모모타로” 하고 나타난다. 그러고는 단칼에 악당들을 베어버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귀신을 물리치는 비현실적 영웅이 정의의 사도라는 현실적 영웅으로 재탄생한 셈이다.
모모타로에게서도 발견되는 ‘떠돌이 정서’ 역시 일본 영웅을 특징짓는 중요한 축.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가 두 자루 검으로 고수들과의 대결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으며 일본을 평정한 이래,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무용담을 펼치는 사무라이의 이야기는 일본 대중예술의 단골소재가 됐다. 드라마와 영화로 수없이 만들어졌을 만큼 히트한 제니가타 헤이지(?形平次) 시리즈(이름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은 동전 던지기가 특기이며 오라로 포박하는 데도 능하다), 영화와 드라마로도 히트한 만화 ‘아기를 동반한 무사’, 주인공이 막부의 특명을 받고 전국을 떠돌며 사건을 해결하는 ‘다비가라스의 사건수첩’(미소라 히바리의 남편으로 유명한 고바야시 아키라가 주연했다) 등은 대표적 예라 할 만하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게 나타났다가 귀신같은 솜씨로 사건을 해결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일본 영웅들의 전형적 여정이 ‘헐크’나 ‘도망자’ 같은 미국 드라마 시리즈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은 꽤 흥미롭다. 일본 떠돌이 영웅들의 출발점이 모모타로 또는 미야모토 무사시라면 미국 떠돌이 영웅들의 출발점은 ‘OK 목장의 결투’의 와이어트 어프라 할 만한데, 양쪽 모두 허무한 정서 또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쿨한’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일본 영웅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서민들 속에 파묻혀 있어 영웅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다. 툭하면 아무데나 ‘신(神)’을 갖다 붙이는 일본 사람들의 속성은 이처럼 현실과 맞닿아 있는 영웅들의 실상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영웅은 영웅이되 영웅이 아니며, 일본의 신은 신이되 신이 아니다.
우리들의 독특한 영웅들
우리 영웅들의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현실적이라는 점에서는 일본과 비슷하지만 알고 보면 숫제 정반대라고 할 수도 있다. 영웅들을 신처럼 떠받드는 경향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중국인들의 떠들썩한 양상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우리의 영웅들은 일본과 중국 사이 어딘가가 아니라 완전히 동떨어진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먼저 (역사 속 위인들을 제외하면) 우리 영웅들은 정체가 불분명하다.
임꺽정을 예로 들어보자. 조선 중기 때 양주의 백정 출신인 그가 일당들과 함께 구월산을 중심으로 신출귀몰하며 3년 가깝게 관군들을 농락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史實). 그러나 그가 관곡을 털어 백성들에 나눠준 의적인지, 살육을 일삼은 포악한 도적인지는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곤궁한 시대가 그를 도둑 또는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실록을 들여다보자.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장길산도 다르지 않다. 황석영의 소설에서 이갑송을 비롯한 장길산 무리들은 절대적 의리로 똘똘 뭉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도 그랬는지는 알 길 없다. 조선 숙종 때 광대 출신인 장길산이 뛰어난 기지와 탁월한 용맹으로 도적들의 수괴가 됐고, 이후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일대를 주름잡았으며, 나아가 역적모의까지 감행했다는 것만 사실로 확인될 뿐이다.
정체가 모호한 의적을 논하다 보면 흥미로운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조선 후기 때 실학자 이익은 에서 임꺽정, 장길산과 더불어 홍길동까지 포함시켜 ‘조선 3대 도둑’이라 칭했는데, 여기에서 질문 한 가지. 홍길동은 실존 인물일까, 아닐까.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다. ‘연산군 시절에 관군에 붙잡혔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기록은 부실하지만, 서자 신분으로 무리를 이끌고 관가를 습격했다는 등의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허균이 쓴 의 주인공은 이 인물을 바탕으로 그려진 게 틀림없다.
소설 속에서 홍길동은 의적 활동에 그치지 않고 조정으로부터 병조판서 제의까지 받으며 나중에는 아예 도술로써 괴물까지 퇴치한다. 그리고 활빈당 무리들을 이끌고 율도국(栗島國)으로 건너가 그곳 왕을 굴복시키고 이상향을 일군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점이 아이로니컬하게 느껴질 만큼 도교의 영향이 짙은 것이다. 은 민초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사회상을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쓰였지만, 주인공의 모습은 실제로 민초들이 떠받든 영웅들의 면모와 거리가 좀 있었다.
그에 비하면, 조선시대 최대의 혁명이라 할 만한 동학농민혁명의 주체들은 실체(?)가 분명하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비롯한 수많은 실존 인물들은 민초의 주장을 대변한 진정한 영웅들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역사적 영웅으로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암살’에 등장하는 김원봉 같은 독립투사들 역시 마찬가지. 우리 영웅들은 누구 못지않게 영웅적이었지만, 우리는 오랜 기간 그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에 이어 일제 강점기와 독재라는 슬픈 역사를 거치며 한때 낭만적 목적만으로는 영웅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어떤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대적, 정치적, 경제적 해석이 뒤따라야 했고 그 해석을 심의하는 주위의 눈길은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때문에 대중매체가 건드릴 수 있는 영웅의 세계는 한계가 뚜렷했다. 시간을 몹시 거슬러 올라가 건국 신화를 건드리거나 고작해야 암행어사 같은 비현실적 영웅들을 부각시킬 뿐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한동안 영웅 없는 시대에 살아야 했다.
충무공의 무용담을 재조명한 ‘명량해전’에 이어 올해는 이라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성공적으로 소개됐다. 그와 같은 문화 현상이 각별히 기쁜 이유는 달리 없다. 영웅 없던 나라에 바야흐로 영웅들의 시대가 찾아온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유준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 등을 번역했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유재철 씨를 설명할 때는 꼭 붙는 명칭이 있다. 바로 ‘대통령 염장이.’ 최규하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염하고 장례 전반을 진행한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들의 장례와 같은 국가적 행사뿐만 아니라 서경보 스님, 정몽헌 회장, 정대 스님, 법장 스님, 법정 스님, 여운계씨와 같은 큰스님들과 유명인사들의 장례도 도맡아서 진행했던 유재철 연화회 대표지만, 시작은 그저 평범한 한 명의 염장이였을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어떻게 해서 그는 염습이라는 쉽지 않은 분야를 자신의 업으로 받아들이고 장인의 소명의식으로 최고 전문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을까?
“염습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드리는 일이다. 염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잡념이 없어지고 몰입하게 된다.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어 생각한 대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지를 느끼는 고귀한 업으로 일한다.”
염습이라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아직 많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그러나 업의 험상궂은 이미지와는 달리, 유재철 연화회 대표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것은 맑고 순하다는 인상이었다. 그의 말속에서 자신이 맡은 일의 가치를 믿고 그 일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 느껴졌다.
유 대표가 염장이가 된 것은 우연의 힘, 혹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힘처럼 보인다. 경기도 광주에 고향이 있는 유 대표는 일찍이 집안 내에서 시행되던 장례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까다롭고 복잡한 상례 또한 낯설지 않았다. 돌아가신 가족들을 위한 염을 진행하곤 했다. 즉 장례 문화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으며 염에 대해 일찌감치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방황 끝에 발견한 ‘대통령 염장이’의 시작
그러나 경험적으로는 익숙했어도 장례를 업으로 삼고자 하는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녔다. 27살부터 사업을 시작한 그는 아파트 섀시 설치, 방화문 제작, 의류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그런데 그 어느 사업도 잘 풀리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라도 광주에서 능인회라는 장의업을 하고 있던 친구들을 알게 됐습니다. 두 친구들은 불교 청년 운동에 소속된 젊은 사람들이었고 정직한 장의업을 통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 일을 도우면서 저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그들의 성공을 보고 장의업을 배우겠다는 사람은 제법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 대표처럼 직접 염을 하는 것에 적극적이고 능숙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 유 대표는 이내 친구들의 인정을 받았다. 유 대표가 염을 업으로 하게 된 것은 방황 끝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염을 배우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게 되자 유 대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염을 잘한다는 사람을 만나 배움을 구한 것도 그 증거다. 각 지방마다 각기 다른 지식들이 전수되고 있었고 유 대표는 그 하나하나를 확인하고 맞추며 정돈된 염습 체계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른 살 중반에 광주 친구들에게 석달 배워 서울에 장의사를 시작했죠. 3년을 틈나는 대로 전국을 다니며 염하는 걸 배웠어요. 막상 가서 염하는 걸 보면 참고할 수 있는 분도 있었지만 배울 게 없는 분도 있는 등 상황이 여러 가지였어요.”
당시 장의업이나 상조회사들은 서울 밖 지방에서 발달되어 있었으나 시장으로서는 역시 서울이 가장 큰 규모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상조회사들은 지방에 머무르려 하고 있었고 영업 조직만 서울에 올려 놓은 형국이었다.
‘동네 장의사’보다는 뭔가 특색 있는 장의사가 되고 싶어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와 제일은행 본점 사이에서 처음 장의사를 시작한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침 그때 큰스님들이 많이 돌아가셨고 큰스님 장례를 한 번 치르면 손님이 수천 명씩 왔다. 이런 대규모 5~7일장을 10년 넘게 하면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동국대 대학원 장례문화학과를 다니기 시작한 것도 스님들과의 인연 덕분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도전이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의 장례
염장이로서 자신을 쌓아가던 유 대표에게 마침내 삶의 전환점이 왔다. 2005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의 장례문화학과를 다니며 석사 학위 논문을 쓰던 유 대표는 단체장에 관한 논문 작성에 착수했다. 대통령 관련 자료는 행정자치부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모두 기밀이었다. 결국 유 대표는 김구 선생 자료와 비밀 해제된 육영수 여사의 장례 자료를 입수하여 논문을 준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06년 10월 22일 최규하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를 듣고 곧바로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을 찾아갔다. 뭔가 자신이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석사 논문 때 인연을 맺은 직원을 만나 ‘도와줄 게 없느냐’고 물었더니 ‘마침 잘 왔다’며 최 대통령 장례는 물론 2년 전 돌아가신 영부인 홍기 여사의 이장을 도와 달라고 했다. 최 대통령과 현충원에 합장하기 위해서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직이었을 때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육영수 여사는 큰 문제 없이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죠. 그러나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인인 홍기 여사는 최 전 대통령보다 2년 먼저 돌아가셔서, 미리 장례를 치르다 보니 현충원이 아니라 원주에 있는 선산에 안장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최규하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면서 홍기 여사를 이장하여 현충원에 함께 합장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국장은 행자부에서 담당하는 일이었지만 매뉴얼은 없고 파편적인 자료들만 모아져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유 대표는 5일장을 진행하면서 날밤을 새면서 공부를 하고 그걸 쉼 없이 적용하며 악전고투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일들 투성이였지만 유 대표는 결국은 해냈다.
“당시 최 전 대통령의 종친회도 장례 과정에 참석했었는데, 종친회에서 제안한 명정, 그러니까 관직과 이름을 쓰는 명정 문구를 봤더니 일반 양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최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아닙니까? 좀 더 격이 높아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명정 문구로 교체할 수 있었죠.”
세 명의 대통령을 모시고, 장례의 최고 전문가가 되다
최 전 대통령의 장례는 유 대표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복사나 촬영을 불허하는 박정희, 윤보선 전 대통령 등의 장례 자료를 눈과 손으로 확인하고 익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40여 건에 달하는 대통령과 총리의 장례 역사를 공부하여 전체 장례에 대한 지식을 통괄할 수 있게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에게 장례 전체 일정에 대한 관리가 맡겨졌다. 그는 그때의 지식을 바탕으로 국가장 매뉴얼을 만들었다.
“수원성은 건축 기록 덕분에 지금도 지을 수 있을 정도잖아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은 저밖에 없어요. 행안부가 이사를 다니면서 자료가 사라졌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지식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이론의 구축과 정리,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실제로 진행한 커다란 경험들까지, 유 대표가 단숨에 최고 전문가의 자리에 오르게 된 건 우연이 만들어준 다리에 최선을 다한 그 자신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래서 최 전 대통령의 장례 이후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 또한 유 대표의 관리 아래에 진행하게 됐다. 워낙 큰 일들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였었기에 정신이 없었지만 국가급 규모의 장례에 대한 경험이 이미 있었던 유 대표로서는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만큼 사연도 많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 때, 행안부에서 노제에 쓸 만장 2000개를 준비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우선 대나무를 구하는 게 걱정이었는데, 담양군청에 요청을 했더니 다음 날 트럭에 2000개를 실어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만장에 쓰일 글씨는 명정을 써주신 동방대학원대학교 정상옥 총장님께 부탁 드려서 교수님들과 재학생들, 총장님 선후배들이 모여서 800장을 만들었고, 조계사 지관스님이 만장을 쓰는 모습이 방송에 나가니 전국의 서예가들이 올라 와서 하루만에 1200장을 써주셨습니다. 그런데 1500개 정도 작업을 끝냈을 때, 발인 전날 오전에 행안부에서 이유는 묻지 말고 대나무가 아니라 PVC로 만장대를 교체하라는 전달을 받았죠. 밤샘해서 겨우 발인 날 새벽에야 완성하여 시청 앞으로 가져 갈 수 있었습니다.”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국가장이 가능할까?
아직 단체장, 특히 국가장에 대해선 민감한 문제들이 남아있다. 명칭이 제각각인 건 기초적인 문제 중 하나일 뿐이다. 그에 더해 우리네 정치와 역사가 만들어낸 미묘한 사안들이 돌출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국가장법을 보면 가족들이 요청하면 국가장을 치를 수 있고, 국가장을 치르면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어요. 그런데 노태우, 전두환 두 전 대통령은 서훈이 취소되어 현충원 안장대상자에서 제외되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돌아가시고 가족들이 국가장을 요청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고 국가장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유 대표는 이어서 국가장이면 국가적인 공식행사인지 약식행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흔히 국가장이면 국가적인 공식행사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국가적인 공식행사인지, 아니면 약식행사인지를 가르는 건 애국가 제창을 하느냐 마느냐입니다. 문제는 국가장에서 애국가가 나온 적이 없다는 거예요.”
유 대표는 또한 국가장에서 종교 색채를 유지시키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볼 수도 있는 것이 국가장인데 식순에 4대종교 의식을 굳이 보여주는 건 시간적으로 낭비라는 것. 또한 다른 종교인이 봤을 때도 불만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장례는 엄연한 문화, ‘제대로 하자’
“우리나라 장례 문화에서 일제 문화 좀 없애고 싶어요. 특히 장례식에서 상주가 완장을 차는 건 일본 쪽 문화예요. 3.1 운동이 고종 황제 국장 치르면서 했잖아요.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얀 옷 입는 거에 거부감 있는 거야 일본인들이. 그래서 머리 자르고 까만 옷 입으라고 했어요. 그게 세련된 것처럼 보이게끔 선전도 했고. 그리고 모두가 까만 옷 입으니까 그 중에서 상주를 구분시킨다고 완장을 차게 한 거예요. 일제 때 했던 걸 왜 아직도 하고 있어요?”
유 대표는 인터뷰 말미로 가며 ‘제대로 하자’는 말을 거듭 했다. 그 말에서는 문화로서의 장례가 그 자체로 권위와 전통을 가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절실히 느껴졌다. 그것은 남들은 쉬이 가질 수 없는 극단적으로 드물고 특별한 경험들을 통해 유 대표가 얻게 된 고유한 꿈이자 마땅한 자격이기도 할 것이다.
상조업이 우리나라에 등장한 지 벌써 30년이 넘었다. 상조 서비스 제공 업체는 무려 259개이고 가입자는 378만 명, 산업의 규모는 선수금만 3조2483억 원에 달하지만 아직 관련법이 없다. 딱히 상조업에 관한 전문가도 없다. 한마디로 총체적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장례상품을 넘어 웨딩, 돌·칠순·팔순잔치, 여행 상품 등 다양한 상품을 통해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책임지는 상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전문가들의 다양한 견해와 조언을 들어봤다.
# “상조업의 정착과 양성화를 위해 정부 차원의 관리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상조라는 신종 비즈니스는 대략 2005년부터 활성화됐습니다. 이게 규모가 커지니까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규제해야겠다고 판단해 그 방안을 일본에서 주로 벤치마킹을 했죠. 그 결과 상조업은 선불식 할부거래업으로 분류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잘못된 거예요.”
강동구 생사의례문화연구원장은 상조업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맡고 있는 것이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상조업은 갑작스럽게, 혹은 예정된 어려움인 ‘가족의 죽음’이라는 위기 상황을 공동체의 도움으로 준비해 대처한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는 공정거래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을 규제, 관리하는 곳이지 상례라는 문화적인 부분에 있어선 이해가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즉, 상조업이 돈의 문제로만 접근돼 그걸 일률적으로 처리하는 데에 급급했던 정부의 대처가 업계의 혼돈상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설명이다.
“일반적으로 공동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상례, 상사를 관장하는 주무부서는 가정의례준칙 등을 다루고 있는 여성가족부입니다. 그런데 상례의 부분인 장례, 즉 상례와 관련된 시설들은 복지시설로 분류되기 때문에 장례를 맡고 있는 부서는 보건복지부예요. 그러니까 지금 상조법과 관련된 상황이 정부 부서로서는 공정거래위원회,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로 3원화돼 있는 겁니다. 여러 갈래로 나뉜 이 상황을 하나의 법과 부서에서 관장해야 산업이 제대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 통합적인 주무부처의 확립이 문제를 막을 수 있다
상조업이 할부거래법에 포함돼 규제를 해야 하는 필요성이 생기니 공정거래위원회에서는 할부거래법에 의무적으로 선수금의 50%를 맡기게끔 했다.
“그런데 애초에 우리나라에서 상조회사라는 걸 운영하는 사람들이 상례라는 문화를 알고 사업을 시작한 사람들보다는 보험업, 방문판매, 다단계 등 소비자에게 돈을 받는 사업에 더 익숙한 영업 잘하는 사람들로부터 출발했어요. 그 사람들 생각에 의무적으로 50%를 미리 끌어가 버리면 회사 운영을 어떻게 하는가, 반발이 생겼죠. 그래서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그렇다면 좋다, 공제조합을 만들어라고 명령해서 공제조합이 만들어집니다.”
강 원장은 공제라는 개념 자체가 보험업의 개념이라고 지적했다. 원래 법에서는 50%를 내기로 되어 있는데, 공제조합을 통하게 되니 각 상조회사들은 신용도에 따라서 최저 15~25%만 예치하면 50%를 예치했다는 증서를 공제조합에서 끊어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 보험이라고 하면, 교통사고는 터질지 안 터질지 모르는 확률의 문제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모두 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상조업은 반드시 닥칠 일에 대한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강 원장은 정작 은행에 예치해 거래한 상조회사만이 힘들어져 그 피해는 결국 소비자들에게 고스란히 떠 안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강 원장은 현재의 상조업과 관련된 난맥상을 해결하기 위해서 주무 부서를 하나로 묶는 통합적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핵가족화가 되었다고 해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가족주의적인 나라입니다. 상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이 줄어들기는 커녕 더 거세질 수도 있습니다. 진짜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문제를 정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