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림축산식품부가 농촌 관광 활성화를 위해 농촌관광상품 할인, 농촌 방문 인증 이벤트, 주제별 우수 농촌여행지 추천 등 ‘2022 여행가는 달’ 캠페인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2022 여행 가는 달’은 국내여행을 통해 일상을 회복하자는 의미를 담은 “여행으로 재생(再生) 하기”를 주제로 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여행가는 달’과 연계해 주제별 우수 농촌관광지를 추천하고 다양한 농촌관광 홍보 행사를 진행한다.
더불어 6월 2일부터 농촌체험휴양마을과 지역의 관광지를 연계한 체류형 농촌관광상품을 30~50% 할인된 요금으로 이용할 수 있다. 경기도 연천군, 강원도 홍천군, 경상북도 상주시 등 7개 시군에서는 낙농체험, 글램핑, 시골밥상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농촌여행지 방문 인증 행사(농촌, 어디까지 가봤니? 6월 2일~7월 31일), 농촌관광 누리집 웰촌 캐릭터 작명 대회(웰촌 캐릭터, 이름을 지어주세요 6월 7~17일), 여름농촌여행 밸런스게임(밸런스게임, 당신의 선택은? 6월 20일~7월 1일) 등이 열릴 예정이다. 추첨을 통해 농촌체험꾸러미, 편의점 상품권 등 다양한 경품도 제공된다.
‘여행가는 달’ 농촌관광상품 할인 내용과 주제별 농촌여행지, 홍보행사 등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한국농어촌공사 농촌관광 누리집 웰촌과 한국관광공사 누리집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상북도와 전주시, 총 2개 지자체가 ‘2022년 지역 한복문화 창작소’ 조성 대상지로 최종 선정됐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하 공진원)은 두 지역을 한복문화 확산의 거점으로 삼는다고 12일 밝혔다.
‘지역 한복문화 창작소’는 올해 처음 추진하는 사업이다. 지역 기반의 한복 기반시설을 조성해 한복 창작 활동을 지원하고, 지역사회와 연계한 참여형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를 통해 지역 한복 문화산업을 활성화하는 것이 목표다.
특히 한복기술 또는 소재 산업이 활성화된 지역을 중심으로 정부와 지자체가 협업해 지역 내 한복산업이 자생력을 갖추고, 더 나아가 한복문화를 확산하는 지역중심지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매년 평가를 통해 최대 3년간 총 10억 원 지원
이번에 선정된 지자체는 매년 평가를 통해 최대 3년간 총 10억 원을 지원받는다. △1차연도에는 한복문화 창작소 기반시설 조성(4억 5천만 원), △2차연도에는 세부 프로그램 운영(3억 원), △3차연도에는 자체 보유 역량 강화(2억 5천만 원)를 단계적으로 추진해 나간다. 또한, 사업 기간에 지역 내 초·중·고 50여 개 학교에서 한복문화 교육도 운영한다.
경상북도는 상주시에 있는 ‘한복진흥원’ 내 약 161평의 공간을 ‘상주상의원’으로 탈바꿈한다. 명주, 삼베, 인견 등 전통 섬유산업 시설 등을 기반으로 한복 역사·기술 교육관, 한복 창업 개발소 등 생산, 판매와 연구개발까지 한복을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공간으로 재구성할 계획이다.
‘2023년 동아시아문화도시’인 전주시는 ‘한국전통문화전당’ 내 약 266평의 공간을 창작소로 만들어 인근에 있는 전주한옥마을, ‘웨딩 거리’, 전통시장 등의 지역 자원을 활용할 예정이다. 한복인과 시민 중심의 특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한복 향유 공간을 마련해 한복 상권의 상생과 한복문화 확산 중심 공간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문체부 정책 담당자는 “지역 한복문화 창작소를 기점으로 새로운 한복문화콘텐츠를 생산하고, 향유 기반을 마련해 한복문화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겠다”라며, “앞으로 정부와 지자체가 힘을 모아 지역 곳곳에 한복문화 창작소를 뿌리내려 전국에 한복문화를 꽃피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적막한 산촌이다. 길섶은 잔설로 하얗다. 해발 500m 고지대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토박이들은 이곳을 ‘하늘 아래 첫 동네’로 친다. 좀 전에 빠져나온 문경의 도심이 현세의 바깥처럼 멀어진다. 세사의 아귀다툼도, 부질없는 불화도 틈입할 수 없는 오지이니 소란과 소동을 싫어하는 이에겐 낙원? 이창순(67, 흙집펜션 산모롱이 대표)에겐 그랬다. 조여진 마음의 현(絃)을 탁 풀어놓고 느린 선율처럼 여생을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적지라 봤다.
“귀촌지를 물색하다가 이 마을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야, 여기다! 더 볼 것도 없다! 내심 환호성을 질렀지. 눈에 콩깍지가 씌었던 셈이다.(웃음)”
건설회사 토목 담당 직원이었던 남편 이경구(69)를 따라 도시를 전전하며 살았던 이창순에게 귀촌은 오래 묵은 숙원이었단다. 나, 언젠가 시골에서 살리라. 새들이 지저귀는 뒷산을 산책하고,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음악을 즐기고, 밤엔 별처럼 떠오르는 상념을 건져 올려 새끼줄을 꼬듯 긴 글을 쓰며, 나 마침내 산골 자연의 일원으로 돌아가리라. 그런 염원이 샘물처럼 퐁퐁 솟았던 모양이다. 진심으로 간절하면 뛰어들게 마련이다. 그는 상주시에 있었던 모든 살림을 정리하고, 과녁을 향해 직진하는 화살과도 같은 쾌속질주로 귀촌을 결행했다.
이창순이 이 산촌에 옴짝달싹 못 하게 꽂힌 건 수려한 산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착한 가격으로 나온 너와 지붕 황토집이 그를 행운처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준공검사도 마치지 않은 신축 흙집의 평화롭고 참신한 자태에 억누르기 어려운 감흥을 받았던 것. 결함이나 난관이 없는 귀촌이었던 셈이다. 매사 꼼꼼하면서 과묵한 성정의 소유자라는 남편 역시 아내의 주동에 선선히 따랐단다. 결국 이창순은 이상적인 귀촌 생활의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며, 이제 낭만과 만족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때로 따분하면 변덕을 부리는 법. 인간의 반응이 어떠한지 조사하기 위해 심술쟁이가 된다. 뜻하지 않게 남편이 너무 이른 실직을 했다는 게 아닌가.
어휴, 이제 뭘 먹고 살지?
“우리가 귀촌한 게 15년 전이다. 당시 남편은 겨우 50대 초반이었다. 한창 일할 때라 상주시에서 직장 생활을 계속하며 주말부부로 살기로 하고 귀촌을 했던 거다. 그런데 귀촌 1년 만에 남편이 실직했다. 좋았던 시절이 단 1년 만에 끝날 줄을 어떻게 알았겠나? 어휴, 이제 뭘 먹고 살지? 생계가 순식간에 막막해지더라고.(웃음)”
미리 모아둔 생활자금이 없었나?
“가진 재산 전부를 긁어모아 540평 대지에 지은 황토집을 샀다. 남편의 수입으로 살면서 은퇴 이후를 대비할 경제활동을 천천히 모색하면 된다고 구상했었는데, 돌연한 실직으로 비상 상황을 맞이했다. 그렇다고 기죽어 지낼 일도 아니지. 뭔가 돈벌이를 찾아내면 된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외떨어진 적막강산 시골에서 호구책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결혼 이후 난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식 농사가 최고려니 하고 집 안에서만 살았으니까. 이런 내가 시골에서 가능한 돈벌이가 무엇일까? 궁리 끝에 답을 찾았다. 전에 곶감 명산지인 상주시에 살며 감 깎기 알바를 했던 경험을 살려 곶감을 만들어 팔면 되겠다는 착상이었지.”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론이었나?
“아니다. 이왕 상황이 이렇게 된 김에 역할 바꾸기를 하기로 했다. 남편에게 기대나 원망을 가질 거 없다, 이제부터 돈은 내가 벌겠다! 이런 결심을 한 뒤 내가 찾아낸 아이디어였다.”
수고한 당신, 이제는 쉬라? 그 진취적인 발상에 부군의 반응은 어땠나? 세상의 모든 남편들이 부러워할 제안인데.(웃음)
“별 뚜렷한 반응이 없었다.(웃음) 우리 세대 남성들이 흔히 그렇듯, 남편 역시 지독한 가부장적 위신을 중심에 놓고 살았다. 그게 하루아침에 변하겠나? 그러나 시골에서 15년을 살면서 긍정적으로 변하더라. 이건 귀촌으로 얻은 소중한 선물의 하나다.”
과거에 견줄 바 없이 원만한 부부 관계를 누린다는 얘기다. 도시에서와 달리 부부가 하루 24시간을 거의 함께 지낼 수밖에 없는 게 시골 생활이다. 이는 금슬을 북돋울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한다. 정반대로 상대의 단점을 새삼 적나라하게 감상하고 괴로워 악몽을 꾼 사람처럼 비명을 지를 수도 있다. 이창순은 후자의 늪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거다. 스스로 먼저 변함으로써 남편의 변화까지 유도하고자 했다. 이 웅장한 의도가 귀촌의 한 가지 목표였는데 결국 성과를 거두었다는 얘기다.
‘발효곶감’을 개발해
곶감 사업은 어땠을까? 우아한 전원생활을 밑그림으로 삼은 그의 귀촌은 곶감 생산에 뛰어들면서 돌연 귀농으로 선회했다. 감나무 과수원에서 붉게 영근 감을 사들여 곶감으로 가공 판매해 수익을 거두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농사치고 만만한 게 있던가. 시행착오가 많았다. 강인한 체질과 바지런한 기질로 안팎을 이룬 그였지만 힘에 부쳐 고꾸라질 지경에 빠지기도 했다. “허! 그거 집어치우라니까!” 듣느니 매양 남편의 퉁바리였다. 그러나 그는 귀를 틀어막고 탕탕 행진했다. 남편의 핀잔을 차라리 응원의 함성으로 받아넘겼다.
“나에겐 장점이 하나 있다. 뭐 하나에 몰입하면 옆에서 누가 죽어 나가도 모른다. 일단 곶감 농사에 뛰어들었으면 10년은 맞붙어봐야 한다는 신념을 고수했다. 덕분에 이젠 알아주는 이가 많은 곶감 생산 농가로 도약했다. 그러기까지 시련이 숱했지만.”
어떤 시련이었나?
“한마디로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첫해엔 초보자로서는 과도한 물량인 감 4만 개를 사다가 곶감을 만들었다. 근데 별로 판 게 없었다. 초기 한동안의 연매출이 불과 기백만 원에 불과했다. 판로를 찾기 어려워서였다. 이상 기온으로 5만 개의 곶감이 상해 모조리 폐기한 해도 있었다.”
그럼에도 마침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SNS 마케팅을 적극 구사했다. 그보다 유력한 건 재래식 발효곶감을 개발한 데에 있다. 곶감 농가들이 다들 유황 훈증을 해 상품을 만든다. 유황을 써 주황빛을 내고 곰팡이도 잡는 것인데, 자칫 과도하면 건강에 해로울 수밖에. 유황 훈증이 위험하다 판단한 나는 자연 건조 방식을 활용했다. 유해균 제거를 위해 오미자액과 식초를 감 표면에 도포했고. 이렇게 해서 시장에 내놓은 게 ‘이창순 발효곶감’이다. 이건 차별화된 고품질 곶감이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어 소비자들의 호감을 사게 됐다.”
곶감을 전공으로 삼아 오랫동안 허우적거렸지만 결국 좋은 학점을 받았다. 이창순의 종목은 곶감에 그치지 않는다. 투 트랙 전략으로 귀농 열차를 가동해 달린다. 민박을 병행하고 있으니까. 민박 영업의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손님이 넘쳐 방이 부족했던 이웃의 민박집에서 이창순의 방 하나를 빌려 쓴 게 동기였다. 옳다구나, 이제 민박이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황토집은 물론 주변의 순수한 자연환경이 민박의 최적 조건에 해당한다는 걸 비로소 깨닫고 민박 사업에 시동을 걸었던 거다.
“남편을 설득해 집을 증축했다. 토목 전문가인 남편이 직접 황토방 세 칸을 지었다. 이름을 지어 붙이고 블로그에 스토리를 올리는 것으로 민박을 시작했지.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즐거움에 힘든 줄 모르고 땀을 쏟았다. 당장의 성과가 어떻게 나오든 10년은 밀고 가야겠다는 각오로.”
펜션이나 민박집의 경쟁이 치열하다. 업체들의 운영 실정은 어떻다고 보나?
“내가 한때 문경시 민박협회 대표를 맡았는데, 다들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잘되는 곳은 대략 10%에 불과할 정도지. 우리 집처럼 잘되는 곳은 드물고.”
인터뷰 중에도 예약 전화가 걸려오고, 투숙객들이 들이닥친다. 겨울철 비수기임에도 씽씽하게 돌아가는 것. 이 민박집은 어떤 매력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일까?
“‘조용하게 제대로 쉬어가는 민박집’이라는 테마를 정해 퀄리티를 높였다. 가령 방에 TV를 들여놓지 않았는데, 고요한 산골에서 가족들이 충분한 대화의 시간을 즐기길 바라서다. 원하는 이들에겐 산나물 일색의 자연 밥상을 조식으로 제공한다. 이러한 요소들에 만족하는 고객들이 늘어나면서 자리가 잡혔다.”
성장 과정은 순조로웠나?
“곶감 사업과 마찬가지로 초기엔 어려웠다. 집어치우라는 남편의 볼멘소리를 번번이 들었거든.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블로그 마케팅이다. 블로그 관리에 잠시만 소홀해도 손님이 줄어드는 경험을 하고서 운영에 충실을 기했다. 그게 성장의 토대였다.”
성공한 귀농 사례로 이름났더라. 소득은 얼마나 올리지?
“곶감과 민박을 합친 작년 매출이 1억 1000만 원이다. 강소농 대열에 오른 셈이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연매출 목표치 3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더 달려가야 한다. 요즘 내가 생각한다. 아하, 나도 부자가 될 수 있겠구나!(웃음) 얼마든지 사업을 키워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사는 거다. 귀농으로 나를 재발견한 셈이지. 사업만이 아니라 삶 자체를 새롭게 변모시킬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었다.”
그는 자신에게 찬사를 바친다. 어라, 내 안에 사업 기질이 있었네? 긴 잠에서 퍼뜩 깨어난 사람처럼 놀란 눈으로 자신이 거둔 성과를 돌아보며 남모를 도도한 성취감을 느낀다. 밝은 미래에 관한 비전으로 설렌다. 한없이 수동적으로 소심하게 살았던 과거의 이창순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없이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장부 이창순이 등장한 것이다. 과거의 삶은 상처의 전시장에 가까웠던가? 그는 여성이자 아내로서 괴롭게 감내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일상의 구속과 아픔을 이 산촌에서 글로 써 청산한 걸 귀농이 준 최상의 선물로 여긴다. 그가 쓴 글 더미들은 책으로 출간됐다.
이창순 씨가 주는 귀농 Tip
•반드시 부부가 함께 귀농하자. 부부 협업이 아니고선 난관을 헤쳐나가기 어렵다.
•귀농엔 강인한 체력도 필수다. 나만의 건강법을 고안해 일상적으로 실천하자.
•정책자금에 의존하는 귀농은 위험하다. 자칫 빚더미에 올라앉을 수 있어서다.
•민박을 할 경우 무엇보다 입지 여건부터 따져야 한다. 맑은 계곡을 낀 곳이라면 최적지다. 청결한 침구, 따뜻한 사교, 고객 불편 사항의 신속한 처리 등도 관건이다.
•SNS 마케팅을 구사하라. 판로 확보에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농부가 땅에 비지땀을 쏟아 필수 식량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농업은 신성한 직업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천하의 뿌리’에 관여된 일이 농업이다. 반면 믿기 어려운 직업이 농사다. 땀 흘린 만큼의 공정한 대가가 주어지는 경우가 흔하던가?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에 따라 좌우되는 작황, 널뛰기하는 가격, 불안정한 판로 등 리스크 요인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의 악조건을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귀농을 하는 이들이 많다. 나만큼은 성취할 수 있다는 뜨거운 신념을 가지고 농사에 뛰어든다. 경북 상주시의 산골로 귀농한 임원식(61, 상주갑장산굼벵이농장) 씨도 그랬다.
“경치 좋은 시골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정원이나 농장을 가꾸며 마음 편하게 사는 삶. 이건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진 로망이 아닐까? 내게도 막연하나마 오래전부터 그런 꿈이 있었다.”
귀농은 임원식 씨에게 오래 묵은 꿈이었던 거다. 비록 막연한 바람이었지만. 다시 말해 언젠가 기회가 오면 시골에서 한번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언젠가’가 오지 않아도 무방할 몽상 차원의 꿈이었다. 그런데 그 ‘언젠가’가 별안간 도래했다. 회사에 감원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그는 경남 거제시에 있는 삼성중공업 직원이었다. 이름난 대기업이고 연봉도 높은 수준이라 자청해서 그만둘 이유가 없었으나, 구조조정의 칼바람 앞에서는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선배 직원들부터 차례로 무자비하게 잘리는 걸 본 그는 곰곰 궁리하다가 자신의 차례가 오기 전에 명퇴를 신청했다.
명퇴 뒤 그의 고민은 본격적으로 깊어졌다. 이제 어떡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체인점? 창업? 그가 생각한 건 장사였으나 가만히 따져보니 그건 당최 적성에 맞지 않았다. 간이라도 빼줄 듯이, 심지어 영혼까지 팔 듯이 자세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상업인데 그건 참 싫었던 것이다. 이때 그는 오래된 꿈인 귀농을 카드로 뽑아들었다. 그리고 숙고에 들어갔으며, 결국은 귀농만이 믿을 만한 대안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머리를 감싸 쥐고 더 고민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내 박선숙(56) 씨의 동의를 얻는 일이 만만치 않았던 것. 남편들이 마치 지상낙원을 건설하겠다는 투로 열렬히 귀농을 선창해도 아내들은 십중팔구 앵돌아앉기 십상이다. 그의 아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합리성 있는 이유를 내세워 ‘강력한’ 반대를 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내와 함께 귀농해야 한다는 기본 방침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차근차근 설득에 나섰다. 그 과정이 길고 힘들었다고 한다. 마침내 동의를 얻어내 귀농을 한 건 2016년 8월. 부부는 손잡고 나란히 경북 상주시 낙동면 갑장산 기슭의 산골로 들어갔다.
귀농 한 달 만에 시작한 굼벵이 농사
“터는 미리 사두었다. 인터넷을 통해 전국의 농지 매물을 검색해 곳곳을 답사한 끝에 이곳의 땅을 사들였다. 적은 자금으로 마음에 드는 터를 구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터는 좋아도 너무 외지거나 길이 없는 땅이 많더라. 헛걸음이 잦았지.”
Q 작물 선정도 미리 해두었나?
A “아니다. 일단 시골로 빨리 내려가고 싶어 작물에 대한 모색 없이 그냥 내려왔다. 산자락에 사둔 땅 인근에 있는 빈집을 임시로 빌려 살며 작물 구상을 시작했다. 처음엔 사슴농장이나 옻나무 재배에 관심을 가졌으나 실상을 좀 파악해보니 만만치 않겠더군. 생산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과수 농사나 자금이 많이 드는 시설 하우스 농사도 그렇고. 그러던 차 TV 방송에 나온 굼벵이(흰점박이꽃무지의 유충) 사육 농가의 성공 스토리를 보고 굼벵이 사업이 유망하겠다고 판단했지. 그게 굼벵이 농사에 뛰어든 계기였다.”
Q 귀농하자마자 곧바로 굼벵이 사육을 시작했나?
A “지체 없이 일을 착수했다. 경기도 연천에 있는 굼벵이 농가를 찾아가 상담을 하고, 교육을 받고, 굼벵이 종자(종충)를 분양받아 사육에 나섰던 거지. 셋집에 있던 창고를 사육사로 썼고.”
Q 보통은 미리 작물 선정과 공부를 하고 귀농을 한다.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지. 당신은 일사천리로 진도를 냈네?
A “사실 굼벵이 사육과 가공 생산이 별로 어렵지 않다. 여느 농사에 비해 한결 수월하거든. 물론 굼벵이 공부는 사육 착수 이후 충실하게 했다. 경북농민사관학교를 통해 2년에 걸쳐 천적곤충과정과 유용곤충과정 교육을 이수했으니까. 여하튼 귀농 한 달 만에 굼벵이 농사를 시작했으니 엄청 속도를 낸 셈이다. 내 땅에 내 집도 신속하게 지어 이사도 했다. 불과 서너 달 만에 이 두 가지 일을 해치웠지.”
Q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A “지금 와서 돌아보면 너무 조급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월급이라는 게 없으니 한시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만 했던 거다. 매사 추진력을 가지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게 좋은 거라는 생각과 그렇게 살아온 습성도 작용했지만.”
땔나무를 베겠다면서 종일 낫만 가는 건 바보짓이다. 저 굴 속에 호랑이가 있는지 고양이가 사는지 궁금하면 굴로 들어가 봐야 한다. 그는 성격 자체가 느긋하기는커녕 박력이 넘쳐 뭐든 영감이 떠오르면 즉시 판단해서 즉시 해치우는 사람인 거다.
알아주는 굼벵이 농가로 부상했으나
허준의 ‘동의보감’에선 굼벵이를 아주 좋은 약용곤충으로 적시했다. 굼벵이 섭취를 혐오하는 사람이 드물지 않지만, 예부터 약용은 물론 식용으로 민간에서 흔히 쓰인 곤충이었다. 굼벵이 사육이 농업의 한 장르로 등장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효능이 탁월하지만 식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가 2016년에야 식약처에 의해 식품 원료로 승인됐으니까. 그즈음 곤충산업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굼벵이 농사가 블루오션으로 부각되면서 사육 농가가 급증했다. 1000개 이상으로까지.
상품화되는 과정은 비교적 간단하다. 산란한 굼벵이 알을 리빙박스 안에서 3개월 정도 길러 살을 찌운 뒤 환, 분말, 엑기스 등 식용상품으로 가공하면 되니까. 질병이 거의 없고, 투자 비용도 적게 들고, 게다가 온·습도만 잘 맞춰주면 크게 손이 가지 않아서 매력적인 고소득 특화작물로 각광을 받았다. 민첩한 머리와 바지런한 손발을 가진 임원식 씨는 이 기특한 애벌레를 야무지게 잘 길러 고품질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상주에서 알아주는 농가로 급부상했다.
“굼벵이 농사는 신선놀음에 가깝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수월하다. 그러나 차별화된 고품질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선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문제는 역시 판로다. 기르기는 쉽지만 팔기는 쉽지 않은 거다.”
Q 어느 정도 수익을 올리는가? 사육 농가가 급증하면서 고전하는 농가들이 많다던데. 폐업도속출하고.
A “처음 3년간은 부진했다. 어떤 농사든 초기의 바닥 다지기에 3년은 걸린다. 시행착오도 겪으며 성장의 힘을 얻어가는 필수적인 수련기지. 아무튼 부진한 가운데에서도 서서히 매출이 올라 2019년엔 연매출 9000만 원을 기록했다. 블로그를 운영하고 노하우를 활용한 덕분이었다. 이젠 궤도에 올라섰구나! 그런 판단을 했지. 농장 이름이 알려지면서 견학을 오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다 코로나로 위기를 맞이했다.”
Q 매출이 급감했나? 코로나의 횡포로 곤경에 빠지지 않은 분야가 드물다.
A “2020년 매출이 반 토막 났다. 소비가 위축되고 주요 판로였던 지역 축제장에서의 가판이 불가능해지면서 벌어진 일이다. 사육 농가가 포화 상태이기도 했고. 올해는 더 상황이 나쁜 것 같다.”
불운이라 할 수밖에. 아무도 못 말릴 급한 성격대로 후다닥 일을 진행했음에도 궤도에 올라섰으나, 코로나의 기습으로 주춤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절체절명의 상황까지는 아니지만 낙심이 컸던 모양이다. 그러나 일단 대차게 강물에 오른 사공은 멈추지 않는 법이다. 급물살에선 노를 묘하게 잘 저어 나가면 그만이다. 비바람에 시달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겠는가. 그는 방향을 선회하기로 했다. 굼벵이의 사육 규모를 왕창 줄여 코로나 종식 이후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새 작물에 도전했다. 그 이름도 참신한 참두릅을 기르기로 하고, 올봄에 스마트 팜 타입의 시설 하우스를 지었다. 귀농 5년 차 이상의 귀농인에게 주는 연리 2%짜리 영농자금 3억 원을 지원받아서.
“내가 시작한 참두릅 농사는 기존 노지 재배 방식과 크게 다르다. 노지에서 기른 두릅나무의 마디마디를 잘라 하우스 안의 물병에 꺾꽂이처럼 꽂아 기르는 방식이거든, 이걸 ‘마디수침 재배법’이라 부른다. 이 재배법으로 연중생산이 가능해 최대 10배까지 수익 증대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메리트가 큰 농법이라 성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지.”
‘이미 남들도 많이 하는 재배법 아닌가?’ 하는 생각이 대번에 들었지만 아직은 선도적 농법이란다. 이 분야의 고수를 만나 멘토로 삼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성공 보증서는 어디에서도 발부받을 수 없다. 인생이라는 미스터리가 늘 그렇듯, 농사에도 역시 복병과 변수가 음흉하게 나타나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들 대수로울 것 없다. 행복이라는 밥상에는 늘 고난이라는 양념이 동행하므로 복병은 복병대로 열나게 때려눕히면 되는 거다. 임원식 씨의 기본 태도가 그렇다. 그는 약 7억 원의 자금을 들고 귀농했다. 내 생각엔 그 돈이면 그냥 경치 좋은 산골에 오두막 하나 짓고 놀고먹겠다만 그는 생각이 영 다르다. 백수에 흥미 없다.
“그간 지니고 온 자금은 전부 사라졌다. 농토를 사고 집을 짓는 데 주로 사용됐지. 적자에 따른 손실금도 좀 있지만 그건 수업료가 아니고 뭐겠는가? 다 투자분이라 생각한다. 75세까지는 열심히 농사를 지을 작정이다. 월 350만 원 정도는 가져야 생활이 되던데, 그걸 벌기 위해서도 뛰어야 한다.”
Q 월 100만 원으로 희희낙락 사는 시골 부부도 많던데?
A “내가 단지 돈벌이만을 위해 뛰는 건 아니다. 도시와 직장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열심히 하며 살고 싶다는 기본 이상을 좇아 달리는 거거든. 당신 행복해? 누가 그리 물어보면 답은 ‘그렇다!’다. 몸은 고달프고 고민도 많지만, 난 지금보다 더 좋은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 자유로운 영혼이 된 느낌이다.”
어떤 직업이든 유쾌하기만 하겠는가. 애환과 성취는 궁합이 잘 맞는다. 고로 그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는 거겠지. 그의 뇌에 세팅된 목적은 삶의 질을 높이는, 즉 자기 확장에 있는 것 같다.
임원식 씨가 주는 귀농 팁
•할 일 없으면 농사나 짓는다고? 어림없다. 귀농은 절대 쉽지 않다. 단단한 각오와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하자.
•자칫하면 원주민들에게 왕따당한다. 절대적인 신임을 얻도록 노력하자. 인사부터 잘하고. 목에 힘주면 발붙이기 어렵다.
•관행 농사는 소득을 기대하기 어렵다. 똘똘한 작물 선정을 위해 미리 심각한 고민과 연구를 해두는 게 좋다.
•작목을 정했다면 확실한 멘토를 만나라. 그 사람의 실패담이 거울이다.
•교육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라. 새로운 지식도 얻고 멘토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다. 각종 지원사업도 교육을 이수해야 받을 수 있다.
•직거래만이 답이다. SNS 마케팅을 공부해 적극 활용하라.
강영석 상주시장 인터뷰
오래전부터 쌀, 누에, 곶감의 도시로 유명한 상주시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농업 도시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지난해 치러진 4·15 보궐선거를 통해 민선 7기 8대 상주시장으로 취임한 강영석 시장은 상주시의 농업 혁신 도시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강 시장은 인터뷰에서 상주시가 귀농귀촌 1번지로서 손색이 없다고 밝히며, 농업 혁신 도시로서의 가능성과 귀농귀촌인을 위한 정책, 그리고 농촌의 애환 등을 솔직하게 술회했다. “농업 여건만 보더라도 상주시로 귀농귀촌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에게 상주시의 귀농귀촌 여건과 현실에 대해 들어봤다.
“우리 시는 낙동강과 백두대간을 사이에 낀 천혜의 자연환경과 방대한 농지, 풍부한 용수량 등으로 예부터 뛰어난 농업 여건을 자랑해온 곳입니다. 삼백(三白, 쌀·누에·곶감)으로 잘 알려진 전통적인 농업 도시로서 국제 슬로 시티로 인증도 받았죠.”
강영석 상주시장의 말대로 상주시의 농가는 1만3885호로 전국에서 네 번째, 경북에서 두 번째다. 농업 인구도 2만9290명으로 전국에서 일곱 번째, 경북에서 두 번째고, 농지 면적은 2만5315ha로 도내에서 으뜸이다. 그야말로 경상북도에서 손꼽히는 거대 농업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농업의 선택지도 무척 다양하다고 강 시장은 밝혔다.
상주시의 귀농귀촌 강점
“곶감과 시설오이는 전국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며, 근래는 신품종 청포도가 고소득 작물로 각광받고 있어 생산 면적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봉, 육계, 한우, 쌀, 배 등의 기존 작물도 전국 1~2위 생산량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마트팜 혁신밸리와 경북농업기술원을 유치함에 따라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선진 농업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습니다.”
강 시장은 곶감과 쌀, 친환경 농업, 과수 등의 중점 품목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농사만 잘 지으면 마음 놓고 살 수 있도록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상주시가 귀농귀촌인의 유입을 강력하게 필요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농지 면적은 도내 최고이나 전체 인구수는 면적에 비해 턱없이 적다.
“우리 시는 2019년 초부터 10만 이하 인구로 돌아섰습니다. 2021년 5월 통계로는 9만6337명입니다. 시내 동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가 4만9957명이니, 실제로 18개 읍면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는 4만6380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1개 면의 인구가 2500명 이하로 떨어지면 생활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삶의 기반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됩니다. 특히 우리 시는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31%가량 되는 초고령 지역이기도 합니다. 향후 농촌 사회, 지역 사회를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규 인력이 유입되어야 합니다.”
2021년 귀농귀촌 사업비로 125억5000만 원
귀농귀촌인을 위해 상주시가 준비하고 있는 옵션은 다양하다. 올해 상주시 귀농귀촌 사업 비용은 총 125억5000만 원에 달한다. 분야는 귀농귀촌인 보조 및 융자 지원, 귀농귀촌인 유치를 위한 주거 조성, 귀농귀촌 활성화를 위한 교육 사업이다. 귀농귀촌인 보조 지원은 총 3억1200만 원으로 주민 초청 행사 운영, 주거 임대료, 주택 수리비, 정착 지원 사업 등을 추진한다. 융자 지원은 올해 상반기 선정분만 해도 45억 원 규모이며, 39개소의 귀농인에게 토지 구입, 하우스 신축, 농가 주택 매입 및 신축 등의 사업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한다.
귀농귀촌인 유치를 위한 주거 조성 사업에는 72억 원을 투자하여 한국토지주택공사와 공동으로 추진하는 귀농귀촌형 공공임대주택단지 사업과, 매년 2~3개소씩 추가로 조성하는 귀농인의 집 조성 사업이 있다. 귀농귀촌 활성화를 위한 교육 사업으로는 총 3억5000만 원을 투자하여 마을 단위 융화 교육, 공동체 귀농학교, 농촌생활기술학교, 귀농귀촌인 역량 강화 교육 프로그램 등을 추진한다. 또한 귀농귀촌인을 지원하기 위한 민간 지원 조직으로 상주다움 사회적협동조합을 지원하여 민간 차원에서 교육과 공동체 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는 것도 타 시군과는 다른 상주시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전국 최초 귀농귀촌형 공공임대주택 마련
특히 주목할 부분은 공검면 양정리의 귀농귀촌형 공공임대주택단지와 사벌국면 삼덕리의 스마트팜 혁신밸리와 인접한 청년보금자리 조성 사업을 통해 농촌 지역에 주택을 마련하고자 하는 부분이다. 전국 최초로 올 연말에 조성되는 귀농귀촌형 공공임대주택단지는 규모는 작지만 널리 알려져 농촌형 주거 복지 사업을 새롭게 이끌어나가리라 기대되고 있다. 농촌 지역에 단독주택단지를 지어 공공임대로 제공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1만여 명의 귀농귀촌인이 지역에 와서 농업과 농업 관련 직종에 종사하면서 지역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각 지역의 농업과 농촌 관광, 농산물 가공 분야 등에 종사하면서 지역의 스타 농부가 되고 성공 사례가 되어, 다른 귀농귀촌인들을 유인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2009년에 생긴 민간 공동체귀농지원센터가 주축이 되어 귀농귀촌인들의 커뮤니티를 조성하고 많은 귀농귀촌인의 디딤돌이 되어주었습니다. 매년 계속되는 교육과 모임으로 귀농귀촌인들이 모이는 구심점이 되어주고, 우리 시로 오고자 하는 귀농귀촌인들을 맞이하는 마중물이 되어주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귀농귀촌을 하려면 급격한 변화에 대비
많은 사람들이 귀농귀촌을 통해 농촌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고자 하는 꿈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의 귀농귀촌인들은 지역 사회에 적응하는 것만 해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현실이다. 이에 대해 강 시장은 급격한 변화는 반드시 갈등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고, 변화의 밝은 부분에 주목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지역 사람들과 귀농귀촌인 간에 갈등이 생기면 기존 지역 사회에서 이루어지던 방식으로는 봉합되지 않고 갈등이 드러납니다. 이는 순기능도 있지만 귀농귀촌인에게 왜곡된 시선을 갖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일부 언론이나 방송에서는 귀농귀촌인들이 조용한 지역 사회에 갈등을 부추기는 것처럼 보도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 지역에는 고소득 영농을 위해 귀농하는 분들이 많아, 막상 투자한 만큼 결과를 얻지 못하면 원인을 외부로 돌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텃세를 지레 두려워하여 기존 마을과 떨어진 곳에 거주하고자 하는 귀농귀촌인들도 있습니다. 고향에 온 귀농귀촌인 중에도 마을 주민들과의 불화로 마을을 옮기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귀농귀촌으로 인해 생겨난 변화가 좋은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귀농귀촌인들이 지역에 와서 반드시 잘 지내는 것도 아닙니다만, 지역 주민과의 갈등을 ‘텃세’라고 이름 짓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 봅니다.”
텃세라는 말의 어폐, 다르게 생각해봤으면
텃세라는 것은 지역 주민들이 하나가 되어 새로 들어온 귀농귀촌인을 괴롭힌다는 뜻이 있지만, 귀농귀촌인이 관련된 갈등에서 기존 마을 주민들이 일방적으로 귀농귀촌인을 가해하는 경우는 없다고 강 시장은 밝혔다. 오랜 시간 지역민과 귀농귀촌인을 보아온 강 시장은 도시에서는 그런 갈등이 없느냐고 반문한다. 무엇보다도 현재 농촌의 현실이 텃세가 발생하기 어렵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기존 마을 공동체도 많이 붕괴됐고, 노인들밖에 없어 텃세를 부릴 만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귀농귀촌인들이 이장과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자율방범대장 등을 차지하고 있는데 텃세가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도시 지역에서도 층간 소음, 주차 등으로 끊임없이 언성 높일 일이 생깁니다. 특정 인물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은 대도시에도 당연히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농촌은 과거처럼 긴밀한 대면 접촉이 일상화된 공간이 아닙니다. 노년층도 스마트폰으로 정보화 사회를 살고 있고, 옛날처럼 동네 사람들이 장례식과 마을 잔치를 하며 모이는 일도 줄었습니다. 진입로와 토지 경계, 소음, 쓰레기, 축사 악취 등으로 이웃 간 갈등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텃세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포털 검색창에서 ‘상주 귀농’ 검색
강 시장은 매년 1400가구 1800명을 유치하여 농촌 지역의 인구 유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5년간 매년 1200여 가구, 세대원은 1700여 명이 유입되고 있다.
“귀농귀촌은 농촌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염원일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가꾸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꿈입니다. 통계와 숫자로는 잡히지 않지만, 지역에 이미 터를 잡은 귀농귀촌인들이 지역에 만족하고 기존 주민들과 화합하며 어울려 살 수 있도록 많은 고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강 시장은 마지막으로 귀농귀촌을 꿈꾸는 독자들에게 당장 두 가지를 해봤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한 가지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검색창에 농업교육, 귀농교육을 입력하고 동영상 온라인 교육을 듣거나 오프라인 교육 행사에 참가해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고 싶은 지자체의 이름과 귀농을 붙여서 ‘상주 귀농’과 같은 식으로 검색해서 시군 귀농귀촌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보는 것입니다. 귀농귀촌 담당자들이 친절하고 간결하게 귀농귀촌에 대한 여러 궁금증을 풀어줄 것입니다.”
강 시장은 다양한 귀농귀촌 정책을 개발하고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 조성’과 ‘사람이 찾아오는 환경 조성’을 통해 인구 감소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어갈 것이라고 전했다.
MZ세대와 뉴노멀의 등장, 코로나 팬데믹으로 결혼문화도 크게 바뀌고 있다. 애지중지 키운 딸과 아들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시니어들은 걱정부터 앞선다. 결혼 준비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부터 자녀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지까지….
요즘 젊은이들은 자립심이 강해 스스로 준비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부모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부모가 자녀의 결혼을 모른 척하고 싶어도 모른 척할 수 없는 셈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7월호는 커버스토리에서 코로나19로 소규모‧고급화하고 있는 ‘2021 웨딩 트렌드’와 자녀를 품에서 떠나보는 과정에서 빠질 수 없어 알아두면 좋을 ‘혼주 에티켓’을 소개한다. 또 자녀 결혼에 필요한 예물과 혼수, 신혼집 마련에 필요한 꿀팁에 허니문 변천사도 알려 준다.
평생 화두 ‘동반성장’ 의지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상생 염원을 담은 오톨도톨한 점자혼용 명함을 제시하는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을 표지와 기사로 만날 수 있다. 정 이사장이 들려주는 참 좋은 시절, 그때는 그랬지 추억 속 이야기에 빠져보면 어떨까.
한줌의 늦깎이 역사 소설가 오세영 씨는 데뷔작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 '자산어보'로 돌아왔다. 역사란 퍼즐의 이음새를 자신만의 결로 다듬어 모나지 않은 그림으로 완성할 때 보람을 느낀다는 그를 만나 북인북 코너를 구성했다.
‘경북 최대의 농지 면적과 적극적인 귀농귀촌 정책을 완비한 상주시’를 가보고 싶은 귀농귀촌 우수 지자체로 소개한다. 오래전부터 쌀, 누에, 곶감의 도시로 유명한 상주시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농업 도시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농업 혁신 도시로 전환을 꾀하고 있는 상주시의 귀농귀촌 여건과 정책 지원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구해줘 부동산에서는 ‘아파트 말고 꼬마빌딩으로 노후준비’를 이야기한다. 대출 규제와 고강도 중과세, 집값 상승으로 부동산 시장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아파트 말고 빌딩을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빌딩 선호 추세가 만들어지고 있다. 최근 빌딩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꼬마빌딩이 궁금한 독자를 위한 알찬 내용이 담겨 있다.
슬기로운 보험생활에서는 기존 가입 보험의 숨은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보험 리모델링’을 소개한다. 보험 리모델링은 보험 가입 구조나 기능 개선을 통해 위험관리의 가치를 올리는 행위다. 시니어들을 보험 리모델링에 따라 노후 의료비를 대비가 달라질 수 있다.
1985년 강변가요제에 발표돼 선풍적 인기를 끈 노래가 있다. 임석범과 김복희가 마음과 마음이라는 듀엣으로 부른 ‘그대 먼 곳에’가 주인공이다. 36년이 지난 지금도 아내와 함께 마음과 마음을 이끌며, 음악과 라이브 카페, 유튜브까지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는 임석범을 만났다.
이 외에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 7월호는 꿈에서라도 함께 살아보고 싶었던 첫사랑 이야기를 담은 브라보 마이 러브, 명나라 고관 대작의 집에서 벌어지는 운우지락이 그려진 중국 춘화 이야기를 담은 재미있는 性인문학, 고급 취미에서 재태크로 변신하고 있는 아트테크를 소개한 생활 속 법률 상식, 차려 먹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오는 장수 밥상을 알려주는 이달의 구독, 먼 길 가다 만난 나무처럼 맑은 청주(淸州)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느린 여행, 닭과 전복을 활용한 이색 보양 레시피를 담은 엄마가 엄마에게 같이 시니어들이 재밌고 알차게 즐길 수 있는 내용을 가득 실었다.
시니어 전문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 7월호는 전국 서점과 인터넷에서 구매할 수 있다.
초가집 한 채, 물가에 있다. 나무들 우거지고 옥색 냇물 돌돌거리는 산골짝이다. 개울 건너엔 들이 펼쳐져 후련하고, 들판 건너편은 높고 낮은 산들의 파노라마로 청신하다. 초가를 지은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석학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다. 산천경개 수려하고 윤택하니 이 아니 좋을쏘냐? 그는 반색하며 무릎을 탁 쳤을 게다. 세상의 문장을 독하게 섭렵한 내공으로 산수를 가늠하는 눈썰미도 달인 경지에 이르는 게 성리학자다. 햐, 그런데 초가의 몸피가 한 줌 크기다. 왜 이렇게 지었나?
벼슬이면 벼슬, 학문이면 학문, 정경세는 헌걸차 몸담은 분야마다 큰 발자국을 남긴 준재다. 그런 그가 요즘말로 시골 세컨드하우스에 속할 정자를 아주 자그맣게 지었다. 성냥갑 크기의 방 한 칸과 마루 한 칸이 고작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대충 지은 움집이 아니다. 들보와 기둥은 제법 야무지고, 마루 벽엔 쌍으로 창을 달아 통풍과 채광에 지장 없게 했다. 몸 하나 편히 눕히고 비바람을 능히 피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던 거다. 그는 이 초가에 ‘계정’(溪亭)이라 이름을 붙였다. 중앙정치의 꿍꿍이와 아귀다툼에 밀려 한미한 신세가 될 때면 낙향해 이 오두막에 머물렀다.
작고 초라한 계정은 인테리어 하나 없으나 아름답다. 잎이며 꽃이며 군더더기 다 털어내고 본질만으로 존재하는 한 그루 겨울 나목처럼 개결하다. 비우고 또 비웠으니 득도에 가까이 간 정자다.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난 옛사람의 자유로운 정신을 이 집에서 보지 않고 무엇을 더 볼 것인가. 정가의 이전투구에서 패퇴한 사대부들은 흔히 번듯한 원림(園林)을 지어 경영하며 울분을 달랬다. 정경세는 달랐다. 그의 내부는 이미 넓어 보잘것없는 초소형 정자에서도 활달하게 노닐었다. 겨우 나뭇가지 하나를 침상으로 삼아 발톱으로 움켜쥐고 밤을 보내는 산새들의 생태와 유유상종하며 허름한 초가를 우주처럼 크넓게 썼을 게 아닌가.
계정 옆댕이엔 대산루(對山樓)가 있다. 2층짜리 조선 전통한옥을 본 적 있는가? 우리의 옛집은 왜 다들 단층이냐고 섭섭해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면 2층으로 지어진 대산루를 찾아볼 일이다.
한옥으로선 이례적인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一’자형 1층 위에 정면 2칸, 측면 5칸의 ‘l’자형 2층 누각을 올려 전체적으로는 ‘ㅓ’자형을 이루고 있다. 예사 건축 구성이 아니다. 아마도 당대의 첨단 테크놀로지를 동원했을 테다. 2층 누각에 온돌방을 설치한 데에서도 대단한 창의적 발상으로 지어진 집임이 확인된다. 2층 하부에 벽을 치고 흙을 채워 인공지반을 확보한 뒤 구들과 고래, 아궁이를 설치해 온돌방을 만든 것이다.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을 사각 돌덩이들로 조성한 점도 이채롭다. 왜 그랬는지 딱히 밝혀진 건 없다. 누각 마룻장에 빠끔하게 뚫어둔 구멍 하나도 요상하다. 용변을 보거나 청소를 위한 배출구라는 설이 있으나, 여하튼 익살스럽다. 1층 계단 쪽 회벽엔 ‘工’(공)자 문양들을 또렷하게 새겨 넣었다. 이건 누각의 풍류를 즐기되 공부에도 열을 내라는 뜻? 공부에 미치되 설 미쳐서야 푼수밖에 될 게 없다. 깨달음을 좇는 게 선비들의 공부였으니 산수 간에 앉아서도 궁구(窮究)를 일삼았다.
대산루 자리엔 원래 정경세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학당 건물이 있었다. 그걸 6대 후손 정종로(鄭宗魯, 1738~1816)가 새롭게 지어 대산루라 했다. 정경세 생시의 학당 모습을 볼 수 없어 실로 아쉽다. 그러나 대산루의 형상과 디테일이 매우 기발해 기분을 돋우기엔 부족함이 없다.
계정도 대산루도 고귀하지만, 정경세가 늘 바라보았을 물가 풍경도 내 눈엔 절경이다. 화려하지 않으나 정겹고, 웅장할 거 없으나 섬려하다. 옛사람의 꿈과 상상이 저 산수와 함께 무르익었을 게다. 예학(禮學)의 대가였던 정경세는 ‘섬김’의 도리를 실천, 타자를 가슴속에 들여놓는 일을 본분으로 삼았다. 사설 병원 존애원(存愛院)을 세워 백성들을 무료 진료하기도 했다. 정경세의 말년은 곤궁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랑곳없었다. 적게 먹고 끝내 담백하게 살았다. 가난을 가난으로 느끼지 않았으니 무소유의 본이다. 비범한 한 생애였구나.
답사 Tip
경북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있다. 우복종택(국가민속문화재 제296호) 공터에 주차하고 종택과 계정, 대산루 순으로 답사한다. 종택 들머리엔 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산중의 봄은 더뎌 아직 볼 꽃이 없다. 골을 타고 내달리는 바람에 억새가 휜다. 그렇잖아도 겨울 칼바람에 이미 꺾인 억새의 허리, 다시 꺾인다. 길섶엔 간혹 올라온 애쑥. 저 어린 것, 작달막하나 딱 바라진 기세가 보통 당찬 게 아니다. 겨울을 견디어 불쑥 솟았으니 잎잎이 열락(悅樂)으로 설렐 게다.
상주시가 ‘호국의 길’이라 이름 붙인 둘레길이다. 때 묻지 않은 산과 강의 흥겨운 어우러짐을 볼 수 있다. 황희 정승의 위패를 모신 옥동서원(상주시 모동면 수봉리)을 기점으로 삼는다. 강을 따르는 평평한 오솔길이라 걷기에 좋다.
여덟 개의 여울목이 있어 구수천 팔탄(龜水川 八灘)이라 부른다. 크거나 깊은 물줄기는 아니다. 그러나 유장한 맛을 풍긴다. 가파른 벼랑을 끼고 굽이쳐서다. 강을 따라 오솔길이 솔솔 풀려나간다. 묵은 정으로 찾아든 길도 아니건만 구면처럼 정겹다. 눈이 시릴 듯 시원한 건, 보이느니 절반은 산이요 절반은 강, 수려한 풍치에 안구가 씻겨서일 게다. 이런 데가 드물다. 둘레길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많은 요즘과 달라 예전엔 거의 무인지경 오지였다. 산과 강이 농밀하게 어울려 허전한 구석이 없다.
좋구나! 탄성이 절로 나온다. 햇살을 튕기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 잎을 아직 매달지 못한 채로도 생기를 머금어 완벽한 나무들. 저만이 간직한 비밀에 겨워 스멀거리는 숲. 바위벼랑 모서리를 거머쥔 소나무들의 곡예. 누가 각본을 썼을까, 풍경의 공연엔 흠결이 없다. 도시에는 없는 무대다. 연중무휴로 돌아가는 이 극장에는 입장료가 없다. 자연이 인간을 상대로 뭔가 챙기는 일이 있던가. 은근히 바라는 게 있던가. 사람만 과욕을 부린다. 그러고도 채워지지 않아 시달린다. 시달리는 사람은 그러나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자연이 슬며시 보듬어주기에. 슬며시 보듬어주는 자연의 손길. 자연 속에서 흐뭇해 고마움을 느끼는 건, 그 무상의 자비가 우리를 방문할 때이기도 하다.
오솔길은 융단처럼 폭신하다, 아니 따뜻하다. 따뜻해서 혼자 걸어도 둘이라 느끼게 한다. 오솔길이 일어서서 동행하는 기분을 야기하니 말이다. 귀찮지 않은 둘. 순수한 어깨동무. 열광이나 환호가 아니라 말 없는 신뢰를 보내오는. 그래서겠지,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것처럼 삶이 얼얼할 때면 오솔길을 찾아가는 건. 찾아가는 오솔길보다 좋은 건 내 마음 안에 오솔길 하나 들여놓는 일일 테다. 오솔길이 있는 마음이라면 문지방이 없어 무정한 처신도 없을 것이다. 느려도 멀리 가는 오솔길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안달복달이 없어 세상의 과속에 함부로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후미진 산중에도 사람이 산다. 저만치에 인가가 보인다. 농가 두어 가구가 밤농사와 표고버섯 재배로 살아가는 것 같다. 고립무원까지는 아니라도 감당해야 할 외로움이 왜 없으랴. 불편은 또 얼마나 많으랴. 그러나 지옥 구덩이에 던져놔도 적응하는 게 사람이다. 살면서 얻어지는 야생의 기질로 거뜬히 자립하고 소박한 대로 자족하는 게 산사람이다. 꽃 중에도 야생화의 향기가 더 진하지 않던가.
강을 따라 더 내려간다. 구수천 풍경이 여기에서 절정에 오르는가. 산은 높아 이제 봉우리를 볼 수 없다. 산그늘이 강을 뒤덮었다. 비죽비죽 날 선 바위벼랑들은 감히 범접 못할 위용으로 장쾌하다. 좁혀진 산곡의 폭으로 물살도 거칠어졌다. 아름다워 빼어나다기보다 등등한 기세로 뛰어나다. 이곳에서 강을 버리고 산길을 따라 모롱이를 돌면 저승골이다. 저승골? 이름이 왜 이런가.
저승골에 기억할 만한 역사가 서려 있다. 고려를 유린한 몽고군이 상주산성을 공격했다가 이 골짜기에서 패퇴했던 것. 상주의 민간인 유격대에게. 이는 ‘고려사’에 기록된 또렷한 승전 역사로, 상주의 향토사가들은 저승골에서 몽고군들이 숱하게 죽었다고 논증하고 있다. 육군본부가 간행한 ‘고려 전쟁사’도 상주산성 항쟁을 ‘대승첩’으로 기록했다. 옛사람들의 의열과 기개에 숙연해진다.
전쟁이 터지면 산하도 전장으로 화한다. 시대의 울분이 극에 달하면 산하도 죽음을 목도한다. 멀리 갈 거 없다. 구수천변 아찔한 벼랑에서 몸을 던진 옛사람이 있다. ‘정조실록’이 기린 이름, 고려의 악공(樂工) 임천석(林千石). 그는 이성계의 쿠데타로 고려가 무너지자 거문고를 타 호곡(號哭)한 뒤 세상을 버렸다. 이를 애사(哀史)라고만 할 수 있겠나. 열사(烈士)의 죽음엔 비애가 없다. 절의(節義)란 실로 호방한 정조(情操)이지 않겠는가.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두 번째는 보은 법주사이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에 위치한 법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로 사적 제503호이며, 속리산 천황봉과 관음봉을 연결한 그 일대는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속리산은 해발 1057m의 천황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렀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 의신(義信)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이곳 산세의 웅장함과 험준함을 보고 불도(佛道)를 펼 곳이라 생각하고, 큰 절을 세워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의신 조사가 법주사를 창건하고 진표 율사가 7년을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하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전하는 바는 조금 다르다.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 그 후 진표 율사가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不思議房)으로 돌아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그때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 하였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 법회를 열었다고 하니, 현재의 법주사는 진표 율사의 뜻에 따라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진표 율사가 세운 금산사와 이곳 법주사는 모두 미륵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후 56억 7000만 년이 지나 미륵이 오면 용화수(龍華樹) 나무 아래서 세 번에 걸친 설법(龍華三會)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니 금산사가 제1도량, 법주사가 제2도량, 금강산 발연사가 제3도량으로 창건한 용화삼회(龍華三會) 설법도량인 것이다.
고려 문종의 아들 대각국사 의천의 동생 도생 승통(導生 僧統)이 절의 주지를 지냈으며 1363년(공민왕 12)에는 왕이 절에 들렸다가 양산 통도사에 칙사를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로 옮겨 봉인토록 하였으니 지금도 법주사 내에 모셔져 있다.
조선 세조 때에는 신미 대사가 주석하면서 크게 중창되어 이후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이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사명대사 유정 스님이 20년에 걸쳐 팔상전을 중건하였으며 벽암 각성 스님이 황폐화된 절을 중창하였고 그 뒤 수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의 시가 실린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법주사가 보유한 문화유산으로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팔상전(국보 제55호)·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보물 제848호)·대웅보전(보물 제915호)·원통보전(보물 제916호)·법주괘불탱화(보물 제1259호)·소조삼불좌상(보물 제1360호)·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철확(보물 제1413호)·복천암 수암화상탑(보물 제1416호)·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복천암학조등곡화상탑(보물 제1418호)·보은 법주사 동종(보물 제1858호) 등이 있으며, 주변에는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이 있다.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속리산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에 걸쳐있는 명산으로 예로부터 우리나라 8대 경승지로 전해지며 해발 1058m 천황봉을 중심으로 관음봉·비로봉·경업대·문장대·입석대 등 해발 1000m 내외의 산봉우리들이 있다. 그중 문장대는 속리산의 빼어난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경승지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그 남쪽 수정봉 아래 좋은 자리에 법주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속리산 일대는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터널을 뚫어 보은에서 법주사까지 쉽게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꼬불꼬불 열두 굽이를 돌아 올라가는 말티재를 넘어야 했다. 이 고갯길은 고려 태조 왕건이 법주사에 행차할 때 닦은 길이라고 전해지며 조선 세조는 즉위하기 전 상환암에서 백일기도를 올렸으며, 즉위 후에는 복천암에서 사흘간 치병(治病)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개를 올라서면 세조에게 벼슬을 제수받은 정이품송이 있고 이어 옛 사하촌(寺下村)이었을 산채백반 식당들이 빼곡한데, 그 이후 일주문까지는 길 양쪽으로 떡갈나무 숲이 아름다운 오리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정이품송과 식당가를 지나 산사 7곳 중 가장 비싼 입장권(4000원)을 끊고 떡갈나무 우거진 맑은 계류(溪流)를 따라 오리 숲길을 걸어 들어가노라면 일주문이 나오는데 ‘호서제일가람(湖西弟一伽藍)’, 즉 호서(충청)지방 제일의 절집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그 아래 안쪽에는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라고 씌어 있어 대단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오리 숲길을 산책하듯 걸어 일주문을 지나면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와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가 나오는데 역사적인 의미가 있으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는 것이 좋다.
속리산사실기비는 1666년(현종 7)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썼는데 명산 속리산에 세조가 행차한 사실과 수정봉 위 거북바위를 당 태종이 자르게 했다는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비각 속에 보호되고 있으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이다.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는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중기 고승 벽암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1664년(현종 5)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정두경이 짓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 낭선군이 썼는데 커다란 암반 위에 홈을 파서 비석을 세웠다.
오리 숲길을 벗어나 계류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면 비로소 법주사 경내로 들어서는 사실상 첫 관문인 금강문이다. 마곡사가 해탈문이 첫 관문이듯 법주사는 금강문인데 그 안에 모셔진 분들은 문수, 보현보살과 금강역사로 똑같다.
다만 마곡사는 보현과 문수 모두 동자상을 모셨는데 법주사는 어린 동자상이 아닌 보살상을 모신 점과 해탈문이 아닌 금강문으로 부르는 점이 다르다. 금강문으로 들어서면 산중에 위치한 산사(山寺)지만 전체적으로 평지 지형에 크고 작은 당우(堂宇)들이 자리 잡고 있다.
금강문 오른쪽에 있는 쇠솥(鐵鑊, 보물 제1413호)은 신라 성덕왕 때 당시 승도(僧徒) 3000명을 먹일 쌀 40가마가 들어간다는 것인데, 반대편인 왼쪽 끝에는 우리나라 최대크기인 80가마가 들어가는 돌솥(석조(石槽),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이 있어 대조적이다.
철당간 옆에 있는 석련지(石蓮池)는 원래 용화보전 앞에 희견보살상, 사천왕석등과 한 줄로 서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용화보전이 없어지면서 본래의 자리를 잃고 그 축(軸)을 벗어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법주사의 중앙에는 팔상전(八相殿)이 있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은 사찰 창건 당시 의신 조사가 초창했다고 전하나, 정유재란 때 불탄 후 사명대사와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다고 하며 지난 1968년에는 완전 해체, 수리하였다.
팔상전에서 대웅보전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쌍사자 석등이 있다.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다. 디딤돌 위에 선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인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사자의 갈기와 다리 근육 등이 매우 사실적인 통일신라 석등의 대표작이다.
법주사 금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철확(쇠솥)이 있고 왼쪽으로 철당간과 석련지, 돌확(석조)이 있다. 금강문 정면으로는 두 그루 나무가 버티고 선 사천왕문이며 팔상전을 지나면 쌍사자 석등이 있고 이어서 대웅보전이다. 마침내 부처님이 계신 곳이다.
법주사는 법상종 사찰이며 미륵신앙 도량이기에 대웅보전과 미륵전(용화전) 양대 불전이 핵심이다. 미륵전은 조선 말기 대원군 때 훼손되었기에 천년고찰 법주사의 주불전은 바로 이 대웅보전이며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근래에 다시 지어 팔상전 왼쪽에 우뚝 서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가 주불이라면 대웅보전이 맞겠으나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다면 대적광전이나 대광명전으로 불러야 하는데 옛 기록에 대웅대광명전이 흥선대원군 시절 미륵장륙상을 헐어갈 무렵 대웅보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대웅보전에 오르는 중앙계단의 넓은 폭과 중앙의 답도(踏道)가 특이하며 좌우 소맷돌 위쪽에 새겨진 원숭이 석상도 눈길을 끈다.
이렇게 금강문을 들어서서 사천왕문, 팔상전을 지나 쌍사자 석등과 대웅보전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화엄 신앙축이라면 팔상전에서 왼쪽으로 사천왕 석등과 석연지, 희견보살상을 연결 후 용화보전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미륵 신앙축이었는데, 용화보전과 장륙상이 없어지는 통에 이 축선은 없어지고 중간에 있었던 석연지와 쌍사자 석등이 흩어져버렸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배치와 조화가 무너지고 산만해 보인다. 게다가 최근에 과거 용화보전 자리에서 남쪽으로 자리를 옮겨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우뚝 세우니 법주사의 상징 팔상전이 눌려 보이는 점이 다소 아쉽다.
대웅보전 앞 오른쪽으로는 네모꼴 모양의 원통보전이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모셔 관음전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창건 당시 의신조사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 된 후 1624년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으며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원통보전 옆에는 희견보살상이 세워져 있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옛 용화보전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위치가 변경된 상태이다. 희견보살은 법화경의 소신(燒身)공양을 실천하는 모습을 세운 것인데 부처님께 최대의 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1200년 동안 자신의 몸에 향과 기름을 바르고 먹고 마신 후 스스로 불을 붙여 1200년 동안 태워서 공양하였다는 것이다.
금동미륵대불은 원래 용화보전에 미륵장륙상을 봉안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미륵장륙상이 사라지고 난 후 중건할 때 금동미륵장륙삼존상을 다시 모셨으나, 이도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시 당백전 만들려 헐어갔고 용화보전도 무너져 초석만 남았다는 것이다.
1939년에 미륵불상 조성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은 사람이 요절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재개되어 1964년 완공됐지만, 아쉽게도 시멘트로 만든 불상이었다. 1986년에 이를 헐고 25m 높이의 청동미륵상과 8m 높이의 기단부에 용화전 등을 준공한 것이 1990년이며 2002년에는 청동불에 개금불사를 완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법주사 경내는 대략 돌아보았다. 물론 대웅보전 앞 왼쪽으로 사대부 솟을대문과 담장을 두른 선희궁 원당이 있는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나중에 위패를 모셔가 조사당으로 쓰고 있다거나 금동미륵불 남쪽으로 통도사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모신 세존사리탑과 능인전 등이 있다.
또한 진영각, 삼성각, 명부전 및 선원을 포함한 스님들 요사채 등 당우들이 많지만 특별하게 눈길을 끄는 곳은 청동미륵대불 아래 바깥쪽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거기 새겨진 마애여래의좌상이다.
한국의 대표 산사(山寺)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속리산 법주사. 깊숙한 산속이지만 오붓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최근 세운 거대한 미륵불 외에는 옛 절집 모습 그대로 남아 천년고찰의 역사와 향기를 가득 품고 있는 호서제일 가람이다.
한낮에도 그저 적요한 읍내 도로변에 찻집이 있다. ‘카페, 버스정류장’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버스정류장’이란 떠나거나 돌아오는 장소. 잠시 머물러 낯선 곳으로 데려다줄 버스를 기다리거나, 마침내 귀환하는 정인을 포옹으로 맞이하는 곳. 일테면, 인생이라는 나그네길 막간에 배치된 대합실이다. 우리는 모두 세월의 잔등에 업히어 속절없이 갈피없이 흔들리며 먼 길을 가는 나그네가 아니던가. 저마다 여정을 손에 쥔 순례자이며 여행자! 상호에 서린 서정을 음미하며 찻집으로 들어선다.
‘카페, 버스정류장’ 주인 박계해(57)씨는 5년여 전까진 문경시 가은읍의 산골에서 귀농자로 살았다. 그보다 더 오래전엔 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교직생활은 신바람 났었더란다. 그럼에도 교사직을 버리고 귀농을 한 건 그 어떤 틀에 사로잡혀 살기를 악어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일처럼 싫어하는 성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남편이 어느 날 귀농을 선창하고 나선 데 있었다. 그녀는 고분고분 따랐으며, 남편보다 더 빠르게 시골생활에 적응했다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그렇게 시작된 시골 살림은 이후 10여 년간 계속됐으나 다시 행선지를 바꾸었다. 인생이라는 여행 혹은 순례에 무슨 고정된 목적지가 있을 것인가. 박계해씨는 우연히 상주시 함창읍의 거리를 걷다가 오래된 일본식 2층 고가에 필이 꽂혀 단박에 임대를 하고 찻집을 차렸다.
교사에서 농촌생활자로, 다시 소읍의 찻집 운영자로. 다채로운 편력을 하며 중년기 15년여의 세월을 흘러온 셈이다. 섭렵이 쏠쏠했으니 드라마도 푸짐하렷다. 행복과 불행이, 만족과 불안이, 빛과 그늘이 순리처럼 그녀의 시간을 곡예하며 통과했을 게다. 그렇다면 마땅히 자리에 모시어 경청하는 게 사리에 맞는 일. 운치도 정취도 남실거리는 찻집에 마주앉아 한 여자의 삶에 서성거리는 나름의 광량(光量)이라는 걸 느껴볼 수 있는 기회란 행운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귀농 10년의 얘기부터 들어볼까? 순식간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후다닥 귀농한 대목으로부터 얘기가 시작되었다.
“남편의 제안을 따라 귀농 교육을 받으며 곧바로 제 마음도 시골로 향했어요. 제 고향이 하동 악양의 시골인데요, 허물어져가는 돌담집에 대한 애호 같은, 농촌의 자연과 풍경에 매료되는 성향 덕분이었죠. 드디어 지인의 소개로 가은의 시골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모든 게 맘에 들었어요. 빈집 하나를 사서 적당히 고쳐 시골 살림을 시작했어요. 도시 출신인 남편과 달리 저는 풀이나 피도 잘 뽑고, 매사 빠르게 적응했어요. 시골생활의 많은 점들이 좋았어요.”
“귀농의 초기 정착에 갖가지 애환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선생의 시골생활은 좀 달랐군요. 일테면, 어떤 점들이 만족스러웠죠?”
“무엇보다 도시에서와는 달리 자연이 주는 감흥들이 참 좋았어요. 하늘, 땅, 나무, 풀, 모든 자연 생태가 주는 힘이라는 것, 그게 좋았어요. 재래식 화장실을 쓰며 도시에서 좌변기를 쓸 때 느꼈던 죄의식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만족스러웠어요. 이웃분들과의 소통은 늘 즐거웠어요. 제가 말이죠, 마을 부녀회장을 맡기도 했어요. 상(喪) 당한 집에서 이웃들과 둘러앉아 전을 지진 기억도 많아요. 학교생활의 경험을 살려 할머니들을 모신 학급을 운영하기도 했어요.”
귀농 경험, 책으로 펴내다
“처음 3년간은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았어요. 교직 근속 20년을 채우기 직전에 사표를 써 연금 대상자가 되진 못했지만 퇴직 때 받은 돈이 있었기에 미리 걱정하거나 연연해하질 않았어요. 그런데 3년이 지나자 돈이 바닥나고 말았어요(웃음). 저나 남편이나 돈 문제엔 워낙 태평한 사람들이었어요. 저축이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거든요.”
“돈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게 귀촌귀농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물질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이 세속에선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저희 집 가훈을 들어보실래요? ‘내비도!’ 바로 그거였어요. 남편이나 저나 그냥 사는 스타일이었어요. 귀농해서 살며 생전 처음으로 돈의 위력을 실감했어요. 어느 정도 돈 문제에 덜미를 잡혔던 거죠. 마치 벌을 받는 것처럼(웃음).”
‘내비도!’ 내버려둬라, 저절로 흘러가련다. 렛 잇 비(let it be)! 근사한 푯대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삶이란 낭만적 지향이건 급진적 가치이건, 물적 토대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하다는 소식이 난무하지만, 그게 반드시 그러기만 하랴.
귀농이나 귀촌이란 소유를 헐겁게 하는 실천일 수도 있다. 소유하지 않음이 아니라 가급적 소유의 부피와 무게를 줄이는 지혜를 발휘할 절호의 찬스일 수도 있겠지. 박계해씨의 사고와 삶은 자유로운 지평을 향했던 것으로 보이며, 귀농의 나날들은 한동안 유쾌했던 것 같다. 그러나 통장 잔고가 바닥을 치면서 당장 활로를 찾아야 했다.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라서 일을 만들어 덤벼들었어요. 가은읍내에 점포를 얻어 옷을 팔았어요. 전에 천연염색과 바느질 공부를 해둔 게 있었는데, 그게 도움이 됐어요. 손수 염색한 옷가지들이 제법 팔려나갔으니까.”
“시골 옷가게 매상이라는 게 소소했을 테고, 남모르게 진땀 흘린 시절들이었겠어요.”
“당시 아들과 딸, 두 녀석이 학생이었는데 교육비 부담이 컸어요.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갈까, 늘 고심이 많았어요.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거나 위축되진 않았어요. 이왕이면 일을 즐겁게 해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가게에 딸린 안방을 동네 사랑방처럼 활용해 아줌마들과 교류를 했어요. 제가 교직에 있을 때 교사 극단을 만들어 활동한 경험이 있는데요, 가은 시골의 초등학교 학부형들과 작당을 해 연극 캠프를 열기도 했습니다.”
고심이 많은 생활이었지만 여흥을 누리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던 셈이다. 취향과 재능을 죽이는 난감한 상황에서도 여하튼 들고 일어서는 게 낙관의 힘이렷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처럼 즐거운 게 다시 있을까. 무슨 일이건 억지로는 하기 싫은 반면, 하고 싶은 일은 기어이 해내면서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사실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벌인 일이기도 했어요. 연극 강사로 나서 수입을 얻었으니까. 주부강좌에 나가 천연염색을 강의하기도 했어요.”
“가은 시골에서의 귀농 경험을 담은 책, 를 출간했더군요.”
“촌에 살며 농사를 좀 했지만 사실 일머리가 서툴렀고 커다란 애착도 없었어요. 자연이 드러내는 사계의 민감한 변화를 만끽하는 일, 야산에 올라 산나물을 뜯는 일, 어른들과 어울리는 일은 참 좋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어떤 허기 같은 게 있었어요. 나, 이렇게 살다가 마는 거야? 아니지, 이건 아니지 하는 생각으로 귀농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제가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하는데, 그가 말했어요. ‘기록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과 마찬가지다’라고. 그 말에 자극을 받아 마을 얘기,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좌충우돌한 경험담 등을 글로 썼던 겁니다. 책 출간 뒤엔 글쓰기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비록 물적 애환이 자심했다지만 동분서주, 야무지게 자신을 건사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말이죠, 귀농으로 맞닥뜨린 시련 중에 부부간 갈등이 깊어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더군요. 선생의 그 열렬한 날들 중에 부군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흠. 저희 부부는 이혼을 했어요. 제가 먼저 이혼을 원했고, 마침내 남편이 동의해줬어요. 저는 그를 존경하고 좋아하고 사랑했어요. 그러나 더 이상 발전이 없는 한계를 깨달았어요. 소통에 문제가 생겼어요.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옳다는 판단을 했죠.”
언젠가는 섬에서 살고 싶어
이혼을 금기시하는 묘한 모럴도 있지만, 결혼이 자연스럽듯이 이혼 역시 당연한 귀결로 찾아드는 수가 있다. 이혼이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고, 차라리 좋은 경험이었다고, 박계해씨는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녀는 이혼 절차를 완료하고 남편과 함께 법원을 나서던 날의 기억을 다음처럼 글로 썼다.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독립을 축하해! 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이 대단한 남자와 결혼했던 것이 뿌듯해서 그에게 몸을 찰싹 붙이고 팔짱을 끼었다.’
박계해씨의 찻집 ‘카페, 버스정류장’은 귀농 이후 그녀의 삶을 새로운 쪽으로 데려다주었다. 인생엔 터닝 포인트라는 게 있는 법. 찻집 운영과 더불어 그녀의 나날은 바닷장어처럼 생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로 시인 강은교 선생이 이 찻집을 다녀간 뒤 ‘카페 버스정류장’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어지간히 지역의 명소로 부상해 일부러 찾아드는 이가 드물지 않다. 토속적 미감과 모던한 감각이 잘 버무려져 낭만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적막한 소읍의 찻집에선 차만 파는 게 아니다. 예술인들을 위한 전시장으로, 노래 공연장으로, 시낭송 공간으로 쓰이기도 하니까.
“귀농 이후 그 어느 시절보다도 편합니다. 일단은 규칙적인 소득이 발생하기에 안도할 수 있고,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과 만나 삶을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아요. 아이들도 잘 자라 아들놈은 부산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딸은 만화가로 일하고 있어요. 두 번째 책 을 펴낸 일도 즐거운 추억이 되었어요.”
“귀농으로 촉발된 인생의 색다른 여정이 어떤 안착에 이른 거예요?”
“꽤 안심을 느끼지만 이 찻집은 앞으로 5년 정도만 더 할 작정입니다. 경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이곳을 지역 예술인들에게 내놓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저는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거나 환경을 바꿔야겠죠. 음, 요즘엔 시나리오를 쓸 궁리를 하고 있어요. 독립영화가 아닌 상업영화용 시나리오를요. ‘나의 경제’라는 제목의 책도 한 권 쓸 예정이에요.” “가령, 무인도에 혼자 살아야 할 경우 꼭 가져가고 싶은 한 권의 책이 있다면?”
“이상의 예요. 어, 그런데 제가 최종적으로 가서 살고 싶은 곳이 섬인데요?(웃음)”
“섬에서의 삶을 꿈꾸세요? 고독을 견딜 수 있겠어요?(웃음)”
“가급적 환경을 새롭게 바꿔 자신의 삶이 점점 나아지는 걸 느끼고 싶어요. 경험 세계를 넓혀 내적으로 성숙하는 기쁨을 맛보며 살고 싶다는 거!”
길은 다양하며, 모든 길마다 나그네의 경전이다. 삶의 문제를 여행으로 혹은 순례로 치환할 수만 있다면 귀농이건 섬이건 가슴 설레는 행로이지 않겠는가. 잠정적인 고난이야 해 뜨기 직전의 어둠이나 추위에 불과할 테고.
길은 다양하며, 모든 길마다 나그네의 경전이다. 삶의 문제를 여행으로 혹은 순례로 치환할 수만 있다면 귀농이건 섬이건 가슴 설레는 행로이지 않겠는가. 잠정적인 고난이야 해 뜨기 직전의 어둠이나 추위에 불과할 테고.
박원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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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