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한낮, 상주시 외서면 소재지 거리에 적막이 가득하다. 오가는 이도, 차도 드물어 고요하다. 연신 바람이 지나가고 낙엽이 흩날릴 뿐이다. 과거 한때 제법 씽씽하게 돌아간 다운타운이었지만, 이농 조류에 휩쓸려 진즉 저물었다. 이렇게 쓸쓸한 거리 한편에 앤티크 그릇을 파는 가게가 있다. ‘어! 쥐죽은 듯 조용한 촌 동네에 웬 앤티크 숍?’ 다들 의아해하기 십상이다. 올해로 귀농 13년 차에 이른 유은하(51, ‘베키의 작은 지구’ 대표)가 운영하는 가게다.
가게만 유은하의 일터는 아니다. 주업은 농사다. 농장과 가게를 바지런히 오가며 귀농의 날을 영위한다. 이런 삶에 그는 만족한단다. 물론 고생과 고난도 많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인생이라는 트랙에선 대체로 고통이라는 난코스를 돌파하고서야 질주의 동력을 얻게 된다. 유은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당초 귀농 자체에 아무런 뜻이 없었다. 농사를 지으며 시골 생활을 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다면 귀농을 하지 않았으면 될 일이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남편으로부터 뜬금없는 귀농 제안을 받고 깜짝 놀라 ‘황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남편의 뜻을 끝내 외면할 수 없었다. 귀농 전에 부부는 모로코에서 살았다. LG전자 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아들 셋을 거느리고 독일을 거쳐 모로코에서 거주했다.
“사표를 내고 한국으로 돌아가 촌에서 농사짓고 살자고? 뜬구름 잡는 얘기로 들렸다. 한창 젊은 30대 나이에 편안한 생활이 보장된 주재원을 그만두겠다니 공감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남편으로선 조직 생활에서 오는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한계점에 달해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에겐 내색하지 않았지만, 동료 직원을 통해 그가 가슴통증을 호소할 정도로 힘겨운 상황에 놓인 걸 알았다. 이런 남편의 귀농 뜻을 말리는 건 결례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귀농 정착 과정이 이민 생활에 맞먹을 정도로 힘들다는 얘기가 있다. 남편이 귀농을 만만하게 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이제 와 생각하면 남편이 농사의 어려움을 잘 몰랐던 게 농사에 뛰어든 힘으로 작용한 것 같다. 나 역시 농사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저 남편의 뜻이 굳건한 걸 보면 치밀한 계획이 이미 있겠지, 그쯤의 판단을 했다. 남편이 바라는 건 자연과 함께하는 소박한 시골살이였다. 조용한 시골에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기를 희망했다. 적게 벌어 적게 쓰면서도 한결 좋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차가운 세상을 고려할 때 이는 낭만적인 꿈에 가까운 게 아닐까, 내심 많이 불안했다.”
이곳을 귀농지로 택한 이유는?
“남편이 모로코에서 귀농 관련 정보를 얻으려 상주시 귀농귀촌센터와 소통한 게 계기였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곳에 온 건 참 다행스러운 선택이었다. 농사 문제 외의 모든 여건이 우리 가족에게 좋다는 걸 뒤에 깨달았으니까.”
귀국과 동시에 곧장 이 동네로 들어왔다지?
“모로코에서 이삿짐이 오기도 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우선 필요한 건 귀농 교육이었다. 폐교에 위치한 친환경 농업단체를 통해 교육을 받았고, 용케 사무장 자리가 주어졌다. 월급을 받으면서 농업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짐이 올 때까지 폐교 공간을 거처로 삼아 다섯 식구가 먹고 잤다. 농업단체와 귀농 선배들의 도움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처지가 바뀌었다. 모든 게 낯설었을 테고, 따라서 ‘아니, 이게 대체 뭔가?’ 하는 회의를 느끼진 않았나?
“이삿짐이 도착하면서 거처를 옮겼지만 편하지 않았다. 모로코에서 안락하게 살던 때에 비할 수 없는 썰렁한 현실에 당혹스러웠다. 아이들 육아에 마음을 붙이려 했지만 안정감을 찾기 어려웠다. 남편이야 원하던 길로 접어든 것이지만 난 스스로 선택한 귀농이 아니다. 갈등과 혼란을 느꼈다. 자주 눈물이 나더라. 동네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 집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어쩌다 밖에 나가야 할 일이 있을 경우에도 눈을 감고 다니다시피 했다.(웃음)”
너무도 빈약한 수입 실적
두문불출하며 불편한 현실과 거리를 두었던 셈이다. 칩거 기간은 약 2년. 길게 이어진 은둔이다. 삶에 쓴맛이 끼어들고, 남편을 향한 야속한 감정이 부글거렸을 터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내려가면 우울의 덫에 발목 잡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이 그를 호출하는 뜻밖의 일이 생기면서 칩거를 자진 해제했다. 안으로 걸어 잠근 마음의 문고리를 풀고 비로소 외부와 만나게 됐다. 대단한 용무를 위한 호출은 아니었다. 양파농장에서 일손이 필요하다며 유은하를 부른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활기를 되찾은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시골에선 늘 일손이 부족하다는 걸 뒤에 알았지만, 농사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나를 불러주는 게 신기했다. 주어진 일은 캐낸 양파를 손질하는 작업이었다. 예상보다 일이 어렵진 않았다. 내가 생각보다 일을 척척 잘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웃음) 이후 부르는 이들이 늘었고, 일당 받는 재미를 느끼며 오라는 곳마다 달려갔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과 만나기 시작하면서 움츠렸던 한때에서 벗어나게 됐다.”
본인의 농사는 어떤 복안을 가지고 시작했나?
“2년간 맡았던 사무장 일을 그만둔 남편이 농사에 나서면서 본격적으로 귀농 서막을 열었다. 부부 협업 또는 분업을 하기로 했다. 관행 농사에서 탈피한 친환경 농업으로 방향을 정했다. 다품종 작물을 재배하는 소농으로 자리 잡을 목표도 세웠다. 그게 농사의 정석이라 봤기 때문이다.”
농사가 잘 되었나?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다. 수익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생강, 고추, 양파, 고구마 등 갖가지 작물을 노지 밭에 심었지만 헛수고였다. 보기 좋게 참패한 꼴이다.”
귀농 초기엔 대부분 적자를 본다. 수련기의 통과의례처럼.
“우리의 문제는 훨씬 심각했다. 초기에 기록한 마이너스 폭이 가장 컸지만, 10여 년간의 농사 전체를 통틀어도 성적은 빈곤하다. 벌어들이는 것 없이 투자비만 계속 들어갔다. 주변 귀농인 중 일부는 자금을 까먹고 빚만 늘어 어쩔 수 없이 역귀농을 하던데, 우리 역시 곤경에 몰릴 걸 미처 몰랐다. 어설픈 농사로 돈을 벌기란 실로 어렵다.”
나쁜 실적을 초래한 원인은 무엇이라 보나?
“재배 기술 미숙이 주원인이었다. 예컨대 900평 밭에 고구마를 심었는데 생산량은 100kg도 안 됐다. 양파밭의 풀을 방치했다가 아예 거둔 게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수확하는 시기를 놓쳐 호박농사를 망치기도 했다.”
농사 경력 올해로 10년이다. 이젠 기술이 늘었겠지?
“망가지면서 배운 게 많아 일정 수준에 올라서게 됐다. 우리는 초기의 다작물 재배 방식을 중도에 버린 뒤 하우스에서 기르는 토마토 하나에 주력했다. 매력적인 토마토란 평을 듣고 있다. 특히 당도가 높아 찾는 이들이 많다. 이는 남편이 연구하고 분투해 거둔 성과다.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다.(웃음) 일찍이 유통업체와 계약해 대부분의 물량을 납품한다. 판로 걱정을 면한 셈이다.”
한때 역귀농 생각해
한시름 덜고 산다는 얘기로 들린다. 효자 작물 토마토 덕분에 이젠 어딜 가든 당당하게 명함을 내밀 수 있다. 부부간의 유유상종과 협력으로 거둔 성과다. 그러나 결산회계 수치는 여전히 섭섭한 수준. 그간 농사에 쏟아부은 자금과 빚까지 고려하면 밥맛을 잃을 지경이다. 그렇다고 유은하가 기죽은 채 동동거리는 기미는 어디에도 없다. 힘든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인내하길 거듭하는 사이에 정신적 체력이 강화됐다. 농사는 물론 시골 생활의 맥락과 방법을 읽는 눈이 환해졌다. 한때 역귀농을 고려했으나, 흔들리는 마음을 잡도리해 버텼다. 길의 끝에 낙원이 있겠지, 그렇게 긍정하며 고비를 넘어섰다.
“가장 난감한 건 경제문제였다. 가령 남편이 사무장 일을 해 받은 월급이 150만 원이었는데 주재원 시절 받은 보수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불편과 불안을 끌어안고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남편이 도시로 나갈 뜻을 비치더라. 내 생각은 달랐다. 모로코 같은 힘든 곳에서도 살았는데 여기서 못 산다? 그 정도로 우리 부부가 허술한 존재는 아니라고, 여기에서 정착하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동안 미루었던 살림집을 서둘러 지어 배수진을 쳤다.”
면 소재지에 가게를 냈다. 하필 앤티크 식기류를 파는 이유는?
“독일과 모로코에서 살 때 취미 삼아 모은 앤티크 그릇이 무척 많았다. 작은 컨테이너 한 개 분량이었으니까. 그걸 팔아 살림에 보태기 위해 2년 전 가게를 차렸다. 지금은 딜러에게 상품을 공급받는다. 모두 유럽산이다. 주 고객은 상주 시내에 사는 여성들이다.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도 유통 채널이다. 소소한 수익을 거둘 뿐이지만 나의 쉼터이자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해 즐겁다. 남편도 활로를 찾아냈다. 상주 시내의 회사에 취직한 지 2년 지났다.”
그렇다면 농사는 누가 짓나?
“400평 토마토 농장은 여전히 중심축이다. 새벽에 부부가 농장으로 달려가 일을 한 뒤 남편은 회사로, 난 가게로 출근한다. 퇴근 후에도 함께 농장 일을 한다. 크지 않은 농장이라 감당할 만하다.”
이제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오른 셈인가?
“경제 사정은 여전히 열악하지만 나머지는 불만이 없다. 원래 자상했던 남편은 여전히 자상하다. 귀농 선후배들과도 매우 유쾌하게 지낸다. 아들 셋도 주체적인 인간형으로 성장했다. 한 녀석은 부모처럼 농사를 짓겠다고 원예과에 들어가 머잖아 가족농을 이룰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좋은 이웃들을 얻어 행복하다. 연극 공연과 아이들 돌봄 활동 등을 하는 동아리와 좋은 인연을 맺었는데, 이건 귀농으로 얻은 최상의 선물이다. 그들은 창의적이고 헌신적이며 재미있다. 나에게 중대한 유고가 생겨도 아이들을 거두어줄 사람들이다. 사는 형편이야 고만고만하지만 돈보다 귀한 가치를 놓치지 않고 산다.”
유은하는 한때 도시의 ‘건물주’가 되는 꿈에 사로잡혀 살았다. 그 부질없는 욕망은 이미 사라졌단다. 어느덧 남편이 추구한 ‘적게 벌어 적게 쓰면서도 한결 좋은 삶’의 열차에 동승했다. 다이내믹한 인생 여행이다.
유은하가 주는 귀농 Tip•보통 원주민 텃세를 우려하지만, 작은 성의만으로도 긍정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다. 나도 주민들의 심술을 경험하고 고심했다. 마을 공동 상수원을 나눠주지 않아 전전긍긍했다. 결국 집 옆에 관정을 파 식수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주민들과 잘 지내기 위해 인사 잘하는 식의 작은 친절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풍물패를 불러 주민들과 함께 지신밟기 놀이를 하는 등 수차례 마을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이건 즐거운 경험이었다. 마을지원금 명목으로 150만 원을 건네기도 했다. 이후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충동에 이끌리거나 준비 없는 귀농은 위험하다. 사전에 신중을 기해 제반 상황을 점검하라. 누가 뭐래도 시골은 기본적으로 살 만한 곳이다. 자연환경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사로 돈을 잘 벌긴 어렵다는 걸 유념하자. 경제문제에 관한 사전 대책을 수립한 뒤 내려가라. 농사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경제효과를 거둘 방안도 찾자. 찾으면 찾아진다는 점에서 시골은 기회의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