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갓진 시골에 아담한 카페가 하나 있다. 귀농한 부부가 운영한다. 아내는 낙천적이고 남편은 신중한 성향의 소유자다. 이상적인 조합이다. 대략 큰 그림을 그려놓고 꿈을 좆아 달리려는 아내의 과속을 남편이 적절히 견제해 균형을 잡아가니까. 매사 협의 과정엔 충돌이 잦지만 결국은 중간 지점을 찾아 절충한단다. 귀농 가부 문제에서부터 부부의 주장이 엇갈렸다. 귀농 이후에도 의견이 상충하는 때가 많았다. 폐가에 가까웠던 농가 주택을 근사한 카페로 재생하면서도 자주 옥신각신했다. 아무려나 카페는 잘 돌아간다. 딱히 주변 경관이 수려한 입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잘것없는 곳은 아닌 데다, 카페의 담백한 외관과 내부의 소박한 디테일이 어우러져 손님들의 호감을 산다.
부부가 귀농한 지 올해로 6년째. 전에 살던 곳은 인천. 남편 이태호(46, 카페 ‘홍담’ 대표)는 IT 업계를 거쳐 다년간 자영업을 하다가 이곳 충남 홍성군 구성면 시골로 귀농했다. 귀농을 먼저 제안한 건 아내 우연희(41)였다.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에서 살맛나게 살아보자는 아내의 느닷없는 제안에 이태호는 아마도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것 같다. 부부 공히 시골 생활 경험이 없는 데다 귀농이 자칫 가시밭길을 걷는 고행으로 흘러갈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아니, 시골 생활을 장난으로 아나?’ 아내의 귀농 제안을 듣자마자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그랬다.(웃음) ‘언덕 위의 하얀 집’을 짓고 소탈하게, 마음 편하게 살아보자는 게 아내의 목적이었다. 그건 여러모로 무모한 도전에 불과했다.”
아내의 생각을 꺾어놓을 필요성을 느꼈다는 얘기인가? 무모한 도전이 없는 인생은 따분할 수 있다.(웃음)
“여러 날을 숙고했다. 내가 싫다고 아내의 뜻을 묵살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래 차분하게 생각해봤는데 시골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TV에 나오는 ‘자연인’처럼 남자들에겐 수렵 생활에 대한 로망이라는 게 다들 있지 않나? 결국 아내의 뜻을 따르게 됐다.”
사전 귀농 준비는 했나?
“이 대목에서도 아내와 이견이 있었다. 매사 긍정적인 전망을 하는 아내는 ‘일단 그냥 내려가자, 내려가서 적응하면 된다, 귀농이 어렵다는 얘기가 들리지만 우리만큼은 다를 거다,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했다. 착각에 빠져 있었다.(웃음) 이런 아내의 주장까지 동의할 수 없었던 나는 양재동에 있는 aT센터를 드나들며 관련 정보부터 수집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주관하는 귀농귀촌종합센터를 통해 귀농교육도 받았다. 아내의 손을 잡고 곳곳을 돌며 귀농 투어를 하기도 했다. 농업시설업자들을 통해 유용한 팁도 얻었다.”
충실한 사전 준비를 한 셈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도출할 수 있었을 테고.
“기본적인 방향 하나를 미리 확정할 수 있었다. 흔히 농토는 빌려 쓰고 대신 시설 설비에 자금을 투입하라는 얘기를 하지만, 이건 위험한 방법이라는 걸 현장 답사를 통해 알았다. 만약 농사에 실패할 경우 시설비를 몽땅 날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 자금은 전적으로 토지 구입에 쓰고 시설은 지원금을 받아 하자는 원칙을 세우고 귀농지 선정에 나섰다.”
홍성군을 귀농지로 선택한 이유는?
“경상도나 전라도는 너무 멀어 일단 배제했다. 1년의 절반은 추운 겨울인 강원도도 제외했다. 경기도도 뺐다. 땅값이 너무 비싸니까. 결국 충청도로 가기로 했는데, 우리가 귀농할 당시 충북권은 예산 부족으로 귀농지원금이 적다고 해 충남권이 적합하다고 봤다. 해서 충남 곳곳을 돌아다니며 귀농교육을 받는 한편 토지를 물색, 마침내 이곳 홍성에 터를 잡게 됐다.”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는 데는 아내도 동의했나?
“동의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실랑이를 피할 길이 없었다.(웃음)”
나이 든 남편들은 흔히 말한다. 아내의 뜻을 따르는 게 신상에 좋다고. 살아보니 아내의 머리가 더 현명한 걸 알겠더라, 그리 판단하는 거다.(웃음)
“난 아내를 존중한다. 하지만 삶터 문제는 워낙 중요한 대목이라 양보할 수 없었다. 아내는 마을 한가운데 나온 매물을 사자고 했는데, 가격이 저렴하다는 매력이 있는 땅이었다. 그러나 130여 가구로 이루어진 마을의 복판에 거주할 경우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각별한 공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나는 자신이 없어 반대했다. 본의 아니게 마을에 민폐를 끼칠 수도 있어 조심스러웠다. 결국 아내가 양보해서 마을과 떨어진 이곳의 매물을 사게 되었다.”
뜻밖에 찾아온 많은 손님
부부가 구입한 터의 면적은 밭 600평을 포함해 약 800평. 60년 전에 지어져 낡다 못해 쓰러져가는 빈집 한 채가 딸린 터였다. 땅을 결정한 뒤 이태호는 일주일 만에 이사해 귀농 생활에 돌입했다. 가까이 있는 홍성읍내에 셋집을 얻어 임시 거처로 삼고서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를 귀농 열차에 몸을 싣고 일단 질주하고 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처럼 신속하게, 거침없이 움직였다. 이사하자마자 즉각 집수리에 나서는 한편 농사에 뛰어들었다는 게 아닌가. 다분히 충실했던 사전 준비에서 나온 추진력이었으리라.
농사 작목은 어떤 걸 선택했나?
“30여 종의 작물을 심었다. 600평에 불과한 작은 밭에 다양한 작물을 재배했던 거다. 귀농 전 막연하게 생각한 건 고구마 농사였다. 소규모라도 고구마 한 가지를 잘 키워 생산하면 부부가 먹고살 만한 정도의 수익은 나오지 않을까, 대충 그런 구상을 했는데 귀농교육과 현장 답사를 통해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 그렇다면 고구마보다 유능한 작물을 찾아내야 했다. 과연 우리 밭의 토질에서 어떤 작물이 잘 자랄지 알아내기 위해 30여 종을 시험 재배했다는 얘기다. 그 결과 블루베리가 적합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현재 블루베리 400주를 기르고 있다.”
집수리는 부부가 손수 했다지?
“비용도 줄이고, 우리의 취향에 맞는 집을 만들고 싶어 거의 모든 공정을 직접 처리했다. 워낙 낡은 집이라 기둥, 서까래, 흙벽 정도만 남기고 털어낸 뒤 보수작업을 시작했다. 옛날 집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고치고 다듬었다.”
수리 과정에서 부부간 의견 충돌은 없었나?
“왜 없었겠나? 많이 다퉜다.(웃음) 아내는 감성적 스타일로 개성을 살린 구조를 추구했다. 반면 난 실용성과 기능성 중심의 단순하고 깔끔한 공간을 원했다. 결국 절충점을 찾아갔지만 이견 조율하느라 우왕좌왕이 잦았다. 보수를 완료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처음부터 카페로 개조하자는 계획을 가지고 진행했나?
“아니다. 카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작지만 편안한 살림집을 만들되 부부 둘이 차를 마시며 기분 좋게 쉴 수 있는 공간도 꾸미자는 정도의 계획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도중에 바뀌었다. 집 고치기를 지켜보던 마을 이장님이 카페를 하면 괜찮을 거라는 조언을 해준 게 계기가 됐다. 시골 카페라도 운치를 돋운 분위기에 착한 서비스를 할 경우 가능성이 있을 거라 판단했다. 카페를 통해 부진한 농업소득을 보완할 수 있을 거라 봤다.”
결과적으로 카페를 차린 건 탁월한 선택이었나?
“그렇다. 2019년에 오픈하자마자 뜻밖에도 손님이 많이 찾아왔으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코로나 팬데믹 때 대형 카페들은 손실이 컸지만 우리는 무난했다. 반려견 동반이 가능한 공간이라 강아지를 안고 오는 이들도 많다. 카페가 마을 사랑방 역할도 해야 한다는 걸 감안해 과도한 인테리어는 자제했다.”
시골 생활 만족도 80%
카페의 분위기는 뭐랄까, 영업집이라기보다 정겹게 꾸민 이웃집 사랑방처럼 편안하다. 천장에 노출된 서까래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옛이야기들을 두런거린다. 창밖으로는 바람이 지나가고 구름이 다가온다. 카페 외벽은 온통 하얀 칠을 입혀 정갈하다. 귀농을 선창했던 이태호의 아내는 하얀 집의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즐기는 식의 낭만적인 시골 생활을 갈망했다지. 그 바람이 얼추 이루어졌다. 특히 안도할 만한 건 카페 수익을 통해 원만하게 가계를 꾸려나가게 됐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기본 서사는 부를 축적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시골에서 농사지어 부를 확장하긴 어렵다. 이태호 역시 농업소득만으로는 충족할 수 없다는 걸 온몸으로 경험했는데, 용케 카페 사업에 뛰어들어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그는 더 달리고 싶다. 카페는 중간 정거장 정도로 여긴다.
“농사로, 특히 소농으로 돈을 벌기는 실로 어렵다. 우리는 카페를 통해 어느 정도 안정감을 얻었지만 사실 시골 카페의 태생적인 성장 한계는 명확하다. 확장성이 크지 않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이라 보나?
“일의 외연을 넓혀나가고 있다. 우리는 수년 전부터 남의 농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현재는 아이들 대상의 방과 후 학습교사를 맡고 있다. 한편 지역의 청년 귀농인들을 모아 농업회사법인을 설립, 다양한 형태의 소득 창출을 도모하고 있는데 이건 성장 가능성이 크다. 이를 중점 사업으로 삼아 키워나가고자 한다.”
귀농 6년 차에 이르렀다. 현재 상황에 만족하나? 원했던 삶을 살고 있나?
“흠, 만족도 80%쯤? 도시에서보다 한결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시골로 내려오면서 우리 부부는 가족 중심의 삶, 가족이 모태가 되는 삶을 목표로 삼았다. 그게 이루어졌다. 게다가 귀농 이후 아이 둘을 얻었다. 4인 가족이 된 거다. 농사의 현실은 녹록지 않지만 소박한 살림을 꾸려나가며 가족과 함께 따뜻하게 살 수 있는 현 상황에 순간순간 기쁨을 느낀다.”
모두가 물신(物神)을 숭배하는 세상이다. 돈에 관해선 어떤 생각을 하지?
“돈이 많아야 행복도 가능하다고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밥 먹고 살 수 있는 정도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을 한다. 금전보다 소중한 가치는 부부애, 가족애에 있는 게 아닐까?”
그의 언사는 수굿하지만 생각엔 단단한 심지가 박혀 있다. 온유한 품성이 느껴지지만 매사 치고 나가는 성향? 지난 귀농의 날들을 그는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한다. “난 치열하게 살았다!”
이태호가 주는 귀농 Tip
•귀농 실패 사례가 드물지 않다. 섣불리 뛰어드는 건 무모하다. 심사숙고하되 일단 귀농을 결정했다면 과감하게 도전하라. 보수적인 접근으로는 부족하다.
•지자체들에서 주관하는 ‘6개월 미리 살아보기’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해 기초를 다지자.
•귀촌과 귀농이 융합된 형태의 시골살이를 모색하자. 소규모 농토를 통해 농업인 자격증을 획득하고 혜택을 받되, 라이프스타일은 귀촌의 방식을 취할 경우 한결 만족도가 높아진다.
•농사 하나에만 의존하지 말자. 과도한 노동에 몸이 망가질 수 있다. 찾아보면 농외소득을 얻을 수 있는 일거리가 많다.
•남편만의 단독 귀농은 필패의 지름길이다. 술과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반면 아내가 귀농을 주도해 함께 내려온 경우엔 99%가 정착에 성공하더라.
•부부가 함께 일하는 데 의미를 둘 경우 시골 카페도 권장할 만하다. 단 주변의 시장성을 면밀히 분석하고 결정하라.
의식주 가운데 하나에 해당할 정도로 중요한 ‘집’. 대한민국에서 집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누군가에게는 자랑거리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고민거리이기도 하다. 은퇴 후에는 편하게 만족하면서 살 수 있는 ‘나의 집’이 필요하다. 40·50세대인 지금부터 준비해야 로망의 집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다.
40·50세대의 노후 살 집 마련 지침서 ‘은퇴 후 평생 살 집’이 최근 발간됐다. 이 책은 시니어 매거진 가 40·50세대를 위해 기획한 콘텐츠 큐레이션 매거진 시리즈 ‘dice@11pm’의 세 번째 책이다.
40·50세대는 자녀의 독립이나 은퇴로 인해 라이프스타일이 변하는 시기다. 그에 따라 노후에 지낼 장소를 선택하는 것은 깊은 고민이 동반된다. ‘은퇴 후 평생 살 집’ 편에서는 40·50세대의 고민을 덜고 준비를 돕고자 노후 주거지에 대한 정보를 총망라했다. 단독주택의 로망을 실현할 수 있는 귀농귀촌부터, 대기 행렬이 이어지는 프리미엄 실버타운까지 다양한 주거 유형을 소개한다. 독자는 나에게 맞는 집은 무엇인지 탐색하고, 어떻게 하면 마련할 수 있는지 정보도 얻을 수 있다.
파트1에서는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 ‘다운사이징’ 등 주거 트렌드와 함께 노후에 어떤 준비를 하면 될지 전반적으로 설명한다. 파트2는 대한민국 인구 1000만 명이 넘게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투자와 주거 목적을 모두 잡을 수 있는 방법은 물론 최근 주목받고 있는 실제 사례들도 엿볼 수 있다. 파트3에서는 단독주택 매입 방법부터 시골살이 로망을 실현한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단독주택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포함했다.
파트4에서는 실버타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만 60세 이상만 입주 가능한 실버타운의 장단점, 유형별 맞춤 실버타운 등에 대해 소개한다. 파트5는 ‘따로 또 같이’ 사는 코하우징을 중심으로 공동체 주거에 대해 얘기한다. 국내외 다양한 코하우징 사례도 만나 볼 수 있다. 파트6 마을과 도시 편에서는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지역사회의 역할이 중요해진 이유와 전 세계 최근 동향에 대해 다뤘다.
파트1부터 6까지 순서대로 보지 않아도 무방하다.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숫자처럼 어느 파트를 봐도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책 곳곳에 있는 QR코드를 활용하면, 지면의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더 많은 정보를 습득 가능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노후 주거지 선택에 대한 마음을 굳히고 취득한 정보를 활용할 수 있다.
편집인은 “삶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나이 들어서 어디서 살 것인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숙제가 됐다. 다이스앳 ‘은퇴 후 평생 살 집’을 준비하면서 다양한 주거 유형이 있고, 트렌드가 시시각각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삶이 가능한 집이 나의 노후를 위한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인생의 중대한 숙제를 푸는 데 있어 ‘은퇴 후 평생 살 집’이 큰 도움이 됐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의 ‘dice@11pm’ 시리즈는 40대 이상의 ‘후기청년’ 세대를 위한 다양한 은퇴·노후 정보를 다룰 예정이다. ‘dice@11pm’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잠 못 드는 매일 밤 11시,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주사위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명명됐다. 6개의 면으로 이루어진 주사위처럼 ‘dice@11pm’도 여섯 개의 파트로 구성됐다.
는 프리미엄 경제신문 ‘이투데이’가 발행하는 중장년 대상 월간지다. 품격 있는 시니어들이 행복한 노후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강, 금융·자산, 주거, 뷰티, 여행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심사하는 ‘우수콘텐츠 잡지’에 2017년부터 3년간 선정되어, 공공성과 유익함을 인정받았다.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그건 좀 미친 짓 아닌가?” 김화자(59, ‘꽃피는 산골농원’ 대표)는 이런 핀잔을 종종 들었다. 그러나 귀에 담지 않았다. 시골살이의 고독과 농사의 고난을 헤쳐나가느라 몸은 물론 마음마저 상할 수 있으니 충분히 숙고하라는 충고쯤으로 여기고 시골행에 시동을 걸었다. 시골살이는 김화자 부부에게 오래 묵은 로망이었다. 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부부 단둘이 시골에서 오순도순 살고 싶다는 꿈에 무슨 결함이 있으랴. 김화자에게 귀농은 자연스러운 이행(移行)이었던 같다. 상류의 물이 하류로 흘러가는 것과도 같은 순행. 올해로 그는 귀농 11년 차를 맞이했다. 애초 귀농을 만류했던 이들의 말이 이젠 사뭇 달라졌단다. “어라, 이 사람들 성공했네!”
김화자의 집은 무주군의 명산 적상산 아래에 있다. 한갓진 외딴집이다. 집 앞엔 개활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인상적인 건 이 집에서 바라보이는 산 풍경이다. 뒤편으로는 적상산이 떡 버티어 집을 보듬었고, 앞쪽에선 대호산이 뭔가 서기를 풍겨 생동감을 부여한다. 저 멀리 아스라이 덕유산도 보인다. 하얀 눈을 뒤집어쓴 그 산의 정상부는 아예 설산인데,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를 편집해 붙인 듯 신비감이 감돈다. 여기나 저기나, 앉으나 서나, 밤이나 낮이나 산들의 동향을 관찰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환경이다. 산경(山景)에 심취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에게 적격인 삶터다. 김화자는 마땅한 시골을 물색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인터넷에 매물로 나온 이곳을 둘러보고 곧바로 부지를 사들였단다. 첫눈에 호감이 가서.
“이왕이면 산세 좋은 곳에 터를 마련하고 싶어 강원도와 경기도 북부 지역 곳곳을 답사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곳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강원도의 산세를 닮은 분위기에 보자마자 반했으니까. 깊은 맛을 풍기는 산세에다 탁 트인 경관까지 보기 좋게 어우러져 즉시 매입했다. 철탑이나 축사가 인근에 없는지, 가격은 합리적인지, 갖가지 꼼꼼한 점검부터 하는 게 매입 수칙이라지만 그런 걸 다 생략하고 샀다. 한참 뒤에 알고 보니 시세보다 훨씬 비싼 땅값을 치렀더라.(웃음) 하지만 억울하진 않았다. 취향에 맞는 터를 구입했다는 기쁨이 더 컸으니까. 터를 정하고 나자 지인들이 ‘미쳤다’는 소리를 또 끄집어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무주에서 무슨 재주로 살 거냐면서.(웃음)”
초기 5년은 혹한기
터 일대의 자연환경 하나에 꽂혀 일을 저지른 셈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날 이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시골살이를 해왔으니까 말이다. 터에 서린 무슨 지령(地靈)의 선한 감독을 받았을 리 없겠지만, 첫눈에 반한 땅이 주는 만족감을 정서적 기반으로 삼아 순항을 해왔으니 김화자에겐 영락없는 명당이다. 귀농 전에 그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살았다. 남편과 함께 문구점을 18년간 운영하다가 접고 시골로 들어온 것.
“자영업이 대부분 그렇듯 자유시간이 없다. 스트레스도 많고 갑갑증이 난다. 더구나 우리는 휴일 없이 일에 매달려 살았다. 덕분에 문구점 규모를 키울 수 있었지만 언젠가는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 일찍부터 아이들을 다 키운 뒤엔 시골에 가서 마음 편하게 살 작정을 했는데, 마침내 적당한 시점에 이르러 가게를 청산하고 2013년에 이곳으로 내려왔다.”
도시에도 장점과 매력 요소가 많다. 시골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나?
“돈을 벌기엔 도시가 한결 유리하겠지만 만족할 만한 좋은 삶을 꾸리는 데엔 시골이 더 낫다고 봤다. 그리고 그 좋은 삶이란 시골의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텃밭을 일구고 정원을 가꾸는 식의 여유로운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유롭고 평온하게 살고 싶어 오랫동안 시골을 꿈꾸었던 거다. 어휴, 도시는 참 싫다. 스트레스와 부자유는 물론 교통체증과 매연에 질렸다.”
농사는 어떤 작물을 하나?
“농원의 전체 부지 1800평 중 1500평에다 사과와 블루베리 농사를 한다. 처음엔 사과 농사만 하다 나중에 블루베리를 추가했다. 애초 우리는 귀촌 형태의 시골살이를 구상했다. 호미자루 한 번 손에 쥐어본 적 없는 나로서는 본격적인 농사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냥 한가하게 살고자 했다. 인근에 구천동 관광지구가 있으니 상황을 봐서 나중에 민박집을 하면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정작 들어오고 나서는 귀농 쪽으로 방향이 잡혔다.”
그렇게 된 계기가 있겠지?
“원래 이 터 일부에 사과 과수원이 있었던 데다 마을 주민들이 사과 농사를 하라 권유를 해 입문했다. 무주는 사과 특산지구다.”
농사 초심자가 과수원에 뛰어들었다. 막막한 게 많지 않았을까?
“처음 1년은 너무도 힘들었다. 호미로 풀을 메다가 집어던지고 주저앉아 펑펑 울기도 했다. 문제는 농사에 관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덤벼들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무주농업대나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열심히 배웠다. 여러 해에 걸쳐 농업교육을 이수하면서 농촌체험학습지도사, 농식품가공기능사, 팜파티플래너 1급 지도사, 다육아트지도사 등 다수의 자격증을 땄다. 농촌융복합산업 사업자 인증도 받았고.”
당초 귀농에 뜻을 두지 않고 내려왔지만 어차피 본격 농사에 승차했으니 제대로 한번 달려보자! 아마도 그런 결기가 작동했던 게 아닐까? 김화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민감하게 움직이는 걸로 귀농 생활을 개척해나갔다. 그러자 매사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농사일이 즐거워졌다. 비록 고달픈 노동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나날이지만 도시에서와 달리 마음은 편하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농사로 얻는 수익은 쉬 오르지 않더란다. 초기 5년은 혹한기였다는 것.
“월 300만 원, 즉 연간 3500만 원 정도의 순소득을 목표로 삼았다. 그쯤이면 부부 둘이 먹고살기에 충분할 거라 봤다. 하지만 손에 쥘 게 거의 없었던 초기 5년간은 많은 고심을 하며 지냈다. 다시 말하자면 자리 잡는 데 5년이 걸린 셈이다.”
그마저 괜찮은 성적이지 않나? 10여 년이 지나서야 궤도에 오르는 귀농인도 많다.
“우리는 친환경 농법으로 사과와 블루베리를 생산한다. 따라서 품질이 좋다. 이게 입소문이 나면서 찾는 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농사 자체는 쉽지 않다. 특히 자연재해엔 속수무책이다. 농부가 최선을 다해도 물과 햇빛이 도와주지 않으면 망칠 수 있다.”
일찍이 현자가 말했더라. 하늘은 때로 사람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논다고. 어떤 식의 자연재해를 경험했나?
“태풍이 몰아쳐 사과나무들을 쓰러뜨렸다. 낙과 발생이 극심해 팔 만한 게 없었다. 밤낮없이 나무를 일으켜 세우는 작업을 하며 울었다.(웃음) 봄철에 느닷없이 쏟아지는 우박, 긴 장마, 겨울 가뭄 등 수시로 악재와 부닥친다. 자연 앞에서 사람은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걸 실감하며 산다. 그러나 행복감을 맛보는 때가 아주 많다.”
어떤 때에?
“창밖이 밝아오는 아침에 눈을 뜰 때, 가만히 피어나는 들꽃을 바라볼 때 참 좋다. 밭에서 힘겹게 일하면서도 내가 지금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산다는 자각을 할 때도 행복하다. 이건 도시에서 가게를 할 땐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경험이다.”
괜히 시골에 들어왔다는 후회는 없었는지?
“한번은 사다리를 타고 사과나무를 돌보다가 떨어져 발목뼈 세 군데가 부러졌다. 게다가 수술마저 잘못돼 무려 2년간 심한 고생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다. ‘아이고, 내가 왜 시골에 와서 이 고생을 하지?’(웃음) 하지만 잠깐 스쳐가는 후회에 불과했다.”
이미 얻을 건 다 얻었다
그의 농원은 정갈하고 쾌적하다. 2층으로 지은 살림집과 정원 공간, 체험장과 가공공장, 사과와 블루베리 밭, 또는 이리저리 이어지는 통로 등이 유기적으로 구성돼 조화로운 한편 기능성을 극대화했다. 부부가 쏟아부은 비지땀과 능력과 시간의 산물이다. 농장의 핵심 공간은 체험장이다. 이곳은 급조한 비닐하우스지만 내부 치장이 꽤 흥미롭다. 벽면에 걸린 수예품과 그림들, 선반에 올라앉은 공예품들, 너른 자리를 차지하고서 재잘거리는 수백 점의 다육식물들. 이것들은 모두 김화자가 손수 만들거나 가꾼 것이라는 점에서 가히 독창적이다. 그는 이곳에서 방문객들을 상대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우리 농원은 무주군 1호 치유농장이다. 과수 농사만 하다가 치유체험농장으로 전환한 이후 나름의 성장을 해왔다. 체험장에 있는 모든 사물이 치유 프로그램 소재로 쓰인다. 이건 실로 만족스런 대목이다. 나의 취미와 취향을 즐길 수 있는 수단을 프로그램화해 남들과 공유하고 소득까지 올리고 있으니까.”
일과 취미를 접목한 셈인가?
“시골에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자는 게 기본 목표였는데 그게 이루어졌다. 처음엔 농사만 했지만 노동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취미 역시 제대로 즐겨 삶의 질을 높이고 싶었는데 그게 이루어졌다.”
흔히 원주민이나 귀농인이나 농사에 매몰돼 취미 내지는 문화 활동과 무관한 일상을 산다. 당신의 스타일은 독특하다.
“내가 경험한 시골 인심은 정겹고 순박하다. 그러나 평생 호미를 쥐고 사는 할머니들을 보면 안타깝다. 때로 그들을 농원에 모셔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러면 무표정하던 얼굴에 생기가 돌더라. 귀농인들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문화를 즐길 수 있다. 난 읍내 합창단에 가입해 노래를 즐기기도 하는데, 문화 동아리도 많고 싼값에 볼 수 있는 공연이나 이벤트도 풍성한 게 요즘의 지방이다.”
성공한 귀농인이라는 얘기를 듣는다지? 이제 농원에 무엇을 더 보탤 계획인가?
“2023년 매출이 약 9000만 원이다. 이쯤이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차후 게스트하우스를 하나 지을까 생각 중이지만 사실 얻을 건 이미 다 얻었다. 부부가 노후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고, 자식들이 놀러 와 맘껏 놀다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니까. 무엇보다 그토록 바랐던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어 기쁘다.”
원했던 곳에서 원했던 삶을 발굴해 지속한다는 건 아마도 인생의 최고봉이다. 섣부른 귀농으로 인생이 외려 꼬이는 수도 있지만 과욕 없는 열렬한 행보라면? 김화자의 방식엔 은근히 개성과 패기가 박혀 있다.
김화자가 주는 귀농 Tip
•마음을 비우고 귀농하자. 꽉 채워진 마음엔 새로운 게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향이나 기질이 농촌 생활과 어울릴지 면밀히 점검하고 귀농 여부를 결정하자.
•귀농 초기의 고생은 통과의례로 여기고 귀농하자. 5년 차까진 수련기로 작정하는 게 현명하다.
•처음엔 집을 빌려 쓰라고들 하지만 아예 내 소유 집부터 짓는 게 좋을 수 있다. 초기의 어려움에 질려 너무 쉽게 역귀농하는 사례를 볼 수 있는데, 집을 지어놨을 경우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인내하며 활로를 찾아가기도 한다.
•작목은 가급적 지역 특산물을 선택하자. 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생산물 유통의 이점이 크기 때문이다.
•남자만의 귀농은 금물이다. 부부가 함께 귀농하자.
창으로 들어오는 풍경이 보기 좋다. 비경이 펼쳐져서가 아니다. 새파란 하늘과 금빛으로 일렁거리는 가을 논, 그리고 저 멀리 있는 초록 산….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관이지만 안락감을 불러일으키며 눈에 살갑게 다가온다. 여긴 충북 괴산군 소수면에 위치한 카페의 창가다. 오가는 이도, 차량도 드물어 종일 고즈넉한 시골에, 조막만 한 동네에 모던한 카페라니. 대체 무슨 묘한 역발상에 이끌려 차린 찻집일까? 다들 눈을 끔벅거리며 의아해하기 십상이다. 카페 주인은 2020년에 이 지역으로 귀촌한 이지영(66, ‘카페 산이다’ 대표)이다. 지난 5월 개업했다. 그러니까 아직 반년도 지나지 않았다. 장사는 잘되나? 잘된다. 이지영 본인조차 예상하지 못한 호조다.
이지영에게 시골은 낯설지 않다. 그는 서울에서 주로 살았지만 한때 남편과 함께 전북 무주군으로 내려가 시골살이를 했다. 부부가 합심해 산골에 대안학교를 설립하고서였다. 남편 김경남 목사는 교장직을 맡았고, 이지영은 조역처럼 뒤에서 거들었으며 때로는 농부처럼 논밭에서 일했다. 그러다 불운이 닥쳤다. 2019년 김경남 목사가 심혈관 질환으로 타계한 것. 이지영의 고통이 자심해 더 이상 무주에 머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대안학교 교사들의 심적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나. 미국에 사는 자식들은 어머니를 불러들여 함께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지영은 오랫동안 해온 일을 지속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일본을 드나드는 걸로 전환점을 삼았다. 일본은 그에게 익숙한 나라다. 오랫동안 해온 일이란 사회운동이다. 그는 일찍이 민주화운동의 전위에 섰던 김경남 목사와 가치관을 공유하며 노동, 인권, 복지 분야 활동가로 활약했다. 일본 여성 활동가들과 연대해 위안부 문제나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공동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남편과 사별한 뒤에도 일본을 빈번히 드나들었던 거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에 가로막혀 일본행이 어려워졌고, 그는 숙고 끝에 이곳 괴산 땅을 정처로 삼아 무주에 이은 두 번째 귀촌을 했다.
숱하게 생긴 좋은 인연들
“괴산 소수면엔 귀촌을 원하는 지인들의 공동체 단지가 이미 마련돼 있어 이주가 쉬웠다. 집터에다 집을 짓기만 하면 됐으니까. 공동체 구성원들은 모두 김경남 목사가 만든 ‘들꽃마을 협동조합’ 멤버들이다. 대부분 서울에서 사회운동을 했던 사람들로, 귀촌을 통해 자연과 함께 살고 싶다는 동일한 의도를 가지고 하나둘 이곳에 내려왔다. 현재 11가구가 거주한다. 앞으로 더 늘어나 30가구가 모여 살게 될 것이다. 난 3번 타자로 입주했다.”
공동체라면 입주자마다 지켜야 할 기본 룰이 있겠지?
“하나가 있다. 집에 대문과 담장을 설치하지 말자는 거. 나머지는 다 자유롭다.”
귀촌 직후엔 어떤 일을 했나? 살아온 이력으로 보면 산골에 홀로 산다 해도 아무 일 없이 지낼 것 같지는 않은데.
“처음부터 바쁘게 살았다. 그게 성향에 맞는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 공동체에 먼저 들어온 아낙들이 있어 지루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더라.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라. 넌 이제 우리가 지켜줄 테니까!’(웃음) 그들과 함께 텃밭에서 웃고 떠들다 보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고는 했다.”
사별의 아픔은 깊은 곳에 새겨져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짝을 잃은 상심은 대부분 오래간다.
“가슴 한쪽이 텅 빈 것 같고, 원망도 생기고, 심란한 게 있긴 했다. 반면 뭔가 새로운 기분에 들썩이기도 했다. 왜 사람에게는 이런 거 있지 않나? 혼자 좀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 말이다. 여행가방 하나 들고 떠돌이처럼 살까? 그런 생각도 잠깐 했었다.”
떠돌이 대신 텃밭을 택했다? 처음엔 텃밭 농사를 즐길 만하지만 시간이 가면 귀찮아질 수 있다. 늘 풀을 뽑아야 하니까.(웃음)
“내겐 여전히 즐겁다.(웃음) 지난봄엔 강낭콩 씨앗 3000원어치를 사다 심었다. 그런데 엄청나게 많은 수확이 나와 놀랐다.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고도 남더라. 야, 이거야말로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구나! 속으로 찬탄했다. 그런데 텃밭 농사는 일상의 일부일 뿐 내겐 더 분주한 스케줄이 있었다
어떤 일을 했기에?
“평생학습매니저 자격증을 딴 뒤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학습과 상담 활동을 했다. ‘식생활교육국민네트워크’를 통한 공부 역시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이어졌다. 초등학생부터 노인대학 어르신들까지, 2년여 동안 참 많은 이들에게 강의를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오히려 그들에게 많은 걸 배웠다. 괴산 전역을 샅샅이 알게 되었고. 더 즐거웠던 건 좋은 인연이 숱하게 생겼다는 데 있다.”
노력으로도 쉬 얻을 수 없는 게 좋은 인연이다. 그러나 이지영에겐 인연이 자주 맺어진다. 순해 보이는 인상의 후원을 받은 덕분일까? 아니면 타고난 사교성으로 상대를 일거에 무장 해제시키나? 그의 얘긴 이렇다. “내겐 왠지 사람이 잘 꼬인다.” 괴산뿐만이 아니라 좋은 지인들이 멀고 가까운 곳에 원래 많단다. 그는 24평짜리 집에 산다. 집 앞으로 냇물이 흘러 졸졸졸 명랑하게 노래한다. 기분이 밝아지는 집이다. 하지만 그는 좀 후회스럽다. 왜 더 작은 집을 짓지 않았나,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가급적 단순하게, 가급적 소박하게, 가급적 실용적으로 살자 했건만 다소 오버해서 집을 지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집엔 작은 방이 여럿이다. 화장실도 두 개다. 이건 지인들의 방문을 고려한 구성이다. 좋은 인간관계를 위한 좋은 배려가 좋은 삶의 비결이라고 여기는 이지영의 신념이 반영된 집인 셈이다.
그는 귀촌의 날들을 웃음과 함께 느긋하게 누리고 있다. 이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타자를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선의로 자연스럽게 거둔 결실일지도 모른다. 그가 카페를 차려 단기간에 일군 안정적인 상황도 평소의 좋은 인간관계가 데리고 온 행운의 산물일 테다. 지인이 측근이 되고, 조력자가 되는 법이며, 그들은 어떤 일에든 관심과 지지를 보내 힘을 실어주지 않던가. 그런데 카페를 차린 연유가 궁금하다.
“이곳 소수면 소재지엔 지난날 다방이 네댓 개나 있었다지만 주민 수가 급감하면서 다 사라졌다. 그렇다면 뭔가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할 만한 공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카페 운영을 구상했다. 나에게도 좋고 주민들에게도 좋은 일일 수 있다고 판단해서. 마침 한 식품회사 건물에 적당한 공간이 있어 오래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었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을 중심에 둔 건 아니었나?
“수입원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장사가 될지 미지수였기 때문에 기대를 걸진 않았다. 뭐든 머리 싸매고 궁리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좋은 쪽으로만 생각을 모았다. 그런데 예상대로 잘 돌아가지 않더라. 손님이 별로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처음 두어 달에 그친 부진이었을 뿐이다. 뜻밖에도 손님이 늘면서 석 달째부터 수익이 늘기 시작했다. 빠르게 자리 잡은 셈이다. 오픈한 지 반년이 지난 현재는 직원 두 사람과 함께 일하고 있다.”
소수면 인구는 겨우 2000여 명에 불과하다. 괴산군청 소재지는 멀리 있고, 인근에 사람들이 몰리는 관광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로 어떤 이들이 카페에 오나?
“대부분 면내 주민들이다. 동네 중년과 노년들이 찾아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데, 분위기가 매우 화기애애하다. 요즘은 읍내나 먼 곳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도 늘고 있다. 입소문이 나는 것 같다. 얼마 전엔 시골에서 좀체 볼 수 없는 차림새를 한 청년이 혼자 들어와 노트북을 펼치고 커피를 마시더라. 그건 내게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웃음) 머잖아 청년들을 자주 볼 수 있으리라는 예감도 들었다.”
불편을 불편하지 않게 받아들여
이지영은 카페의 매력과 개성을 돋워 문화공간으로 가꿔나갈 참이다. 시골 사람들도 문화 향유 욕구가 강하다는 걸 확인하기도 했다. 이미 두 차례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영화 상영을 위한 스크린도 설치했다. 미술 전시회나 북 콘서트도 준비하고 있다. 지역민이 생산한 농산물이나 공예품 등을 판매하기 위한 마케팅 채널로 카페를 개방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판이 커질 조짐이 완연하다.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함께 이루고 함께 걸어가는 일의 기쁨을 추구하는 이지영은 카페의 활력에 힘입어 물 만난 고기처럼 생동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귀촌 생활에 만족을 느낀다. 만족은커녕 귀촌을 통해 우울증에 걸려 고생하는 경우까지 있지만 그는 차원이 다르다.
시골에 적응하지 못해 원점으로 돌아가는 귀촌인들도 있다. 원주민과 불화하는 최악의 사태를 맞아 고통을 겪기도 한다. 어떤 조언을 하고 싶나?
“자세를 좀 낮추면 된다. 내가 먼저 낮추면 상대방도 낮추게 마련이다. 이건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이지 않던가? 내 경험으로 보면 시골의 인심엔 여전히 순박성이 깔려 있다.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 단순하고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게 시골이다.”
독신 여성의 귀촌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위험요소가 적지 않은데.
“상황을 헤쳐나갈 강한 의지가 있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 그러나 심사숙고하는 게 좋다. 가능하다면 지인이 있는 곳으로, 또는 친구나 선후배와 동반 귀촌을 하는 게 한결 안전하다.”
물신을 주님으로 섬기는 세상이다. 이건 시골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흔히 소박한 시골살이를 권장하지만, 믿을 만한 자금력이 없을 경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적은 소유로도 좋은 시골 생활이 지속 가능하다고 보나?
“가능하지 않을 이유가 뭘까. 자연에서 느끼는 행복감이라든가,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정서적 만족감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시골이다. 난 물질이든 욕망이든 덜 가지고자 했다. 그게 정직하게 사는 방법이라 믿는다. 내겐 오랫동안 통장과 휴대폰이 없었다. 이런 나를 두고 아이들은 ‘대책 없이 사는 엄마’라며 걱정한다. 아닌 게 아니라 가끔은 아하, 내가 너무 허당으로 살았나? 이건 좀 그렇네!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다.(웃음) 하지만 이미 몸에 붙은 생활방식이다. 적게 가진 불편을 불편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능력도 생긴 것 같고.”
이미 가졌으면서도 더 가지기 위해 진땀 빼다가 무너지는 게 인생이다. ‘모름지기 소박한 길을 따라 느긋하게 걷는 게 어떤가?’ 이지영의 얘기를 난 그런 제안으로 들었다.
이지영이 주는 귀농•귀촌 Tip
•낭만적인 전원생활에 관한 동경은 버려라. 시골 역시 냉정한 삶의 현장이다.
•귀농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기 쉽지 않다. 풍부한 자금력과 강인한 도전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귀농보다 귀촌을 하는 게 현명하다.
•귀농•귀촌지를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자. 후보지에서 미리 살아보고 정해야 리스크를 예방할 수 있다. 지자체들이 운영하는 ‘한 달 살아보기’ 같은 프로그램을 활용해 시골살이의 물정부터 익히는 게 필요하다.
•귀농•귀촌에 따른 사전준비는 철저할수록 정착이 쉬워진다. 특히 귀농의 경우엔 농산물 유통에 관한 공부를 미리 해두는 게 중요하다.
•시골 생활은 당당한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보는 사람’에서 ‘하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
그가 귀농한 지 어언 15년이 지났지만, 처음이나 지금이나 농장의 모습은 변한 게 없단다. 처음부터 그냥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농사를 지었는데, 지금도 그냥 그렇게 자연의 생리를 좇아 일을 지속하고 있다는 거다. 한 가지 변한 건 있다. 처음 몇 가지 소소하게 길렀던 채소, 과일, 화초의 수가 자그마치 300여 종으로 늘었다. 그 많은 식물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지? 그다지 넓지 않은 농장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려도 단박에 알아보기는 불가능하다. 비정형적으로 또는 제멋대로 작물이 산재하고 있거니와, 그마저도 수북이 자란 풀들과 동거하기 때문이다. 얼추 야생의 풀밭을 연상시키는 농장이다. 그렇다면 이건 지리멸렬한 농사의 산물? 아니다. 농장주 한은영(59, 아르아르농장 대표)은 옥천군에서 알아주는 이가 많은 선진농업 경영인이다. 매우 독특한 농법으로 순풍을 돛에 매단 배처럼 질주하고 있다.
서울에서 살았던 한은영이 이곳 옥천군 외진 시골로 내려와 관심을 가진 건 양봉이었다. 과천시 변두리에서 양봉을 했던 부모님의 어깨너머로 좀 익힌 양봉 기술이 있어서였다. 그래 벌통 몇 개를 놓고 소규모 양봉 농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진정한 관심사는 자급자족에 있었다. 이왕 시골살이를 할 거라면 내가 먹을 건 내 손으로 길러 취하자는 생각으로 텃밭 농사 스타일의 농장을 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겐 수칙 하나가 있었다. 농약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농법을 시종일관 유지하겠다는 기본 방향을 설정한 것이다. 농장은 한적하고 조용한 야산 아래에 있다. 저 멀리 사방에도 나지막한 산들이 펼쳐져 싱그럽다.
“이곳에 터를 잡은 건 아늑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아, 좋다! 우연히 지나가다 만난 곳이지만 첫눈에 호감을 갖고 탄성을 터뜨렸다. 양봉을 할 만한 밀원(蜜源)도 있어 적격이었다. 무엇보다 먹거리를 자급하며 재미있게 살 수 있는 산골이라는 생각에 즐거웠다.”
여기에서 산 15년 가운데 절반의 세월이 흐르기까지는 자급자족을 위한 작은 농사를 했을 뿐, 계획적인 생산이나 판매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지?
“그렇다. 애초 무슨 구상을 가지고 귀농을 한 게 아니었다. 그저 농약 치지 않은 깨끗한 먹거리를 길러 건강한 밥상을 차리고, 거둔 것들을 친지나 이웃들과 나누자는 데 가치를 두었다. 따라서 비닐하우스 두 동 외에 농업 시설이나 장비를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시작한 귀농의 나날은 정신적으로 여유로웠다.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아 유쾌했다. 작물을 가꾸고 꽃을 키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농사 초심자였던 만큼 유기농에 필요한 기술 습득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초기엔 씨앗이 싹을 틔우고 싱싱하게 잘 자라는 재미에 빠져 무엇이든 갖다가 잔뜩 심었다. 한 평 땅에 20여 가지 채소류를 가꾸기도 했다. 서툰 재배 기술은 마을 어르신들에게 여쭈어 보완했다. 그런데 농업기관에서 나온 이들이 작물마다 특화된 농약과 비료가 있다며 만류하더라. 자칫 다 죽을 수 있다면서. 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 얘기였다. 있는 그대로 자연조건을 고려해 심은 식물들이 잘 자라는 걸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수확량은 관행 농사보다 적을망정 생태농업을 통해 깨끗한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게 너무도 좋았다.”
이곳에서처럼 무농약농업, 생태농업을 하는 농가가 드물지 않다. 그러나 수익성이 낮아 흔히 고전한다.
“무농약농업은 제초 작업부터 버거운 게 사실이다. 나는 풀을 베어 거름을 만들거나, 발로 밟아 쓰러뜨려놓거나, 그냥 그대로 놔둔다. 농토를 최대한 자연 상태 그대로 두고 식물을 기르는 게 사리에 맞다는 생각에서다. 한때는 소 한 마리를 기를 생각도 했다. 기계장비로 밭을 가는 것보다 소 쟁기질로 일을 처리하는 게 땅이라는 자연을 존중하는 길이라고 봤는데, 소 한 마리 사육을 위한 축사 허가가 불가능한 걸 알고 포기했다.”
생계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나? 먹거리 자급자족만으로는 생활 유지에 한계가 있었을 텐데.
“소득원이 있었다. 서울에서 해왔던 직업 활동의 일부를 이곳에서도 틈틈이 계속해 문제를 해결했다. 경제적 불확실성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판매 목적의 농사 방식을 선택했을 것 같다. 농사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고 살지는 않았다.”
긍정적인 신호로 가득한 나날들
한은영에겐 서울에 근거를 두고 활동했던 직업이 있었다. 그는 국악을 전공했다. 비파라는 전통 현악기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활동했다. 한동안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비파를 복원한 유공자이기도 한 그는 강의를 했고, 제자를 양성했다. 이와 같은 경륜과 재능 일부를 시골 생활에 접목했다. 이를테면 원데이 클래스 같은 걸로 일정한 수입을 얻으며 긍정적인 신호로 가득한 나날을 꾸려왔던 것이다.
이채로운 건 또 있다. 그는 여동생 한은미(57)와 이곳에서 함께 산다. 즉 이 농장은 자매가 지향점을 공유하며 공동으로 일군 노력의 소산이다. 한은미도 예술을 전공했다. 금속공예로 기량을 발휘했다. 이런 한은미 역시 텃밭 농사를 즐기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지역에서 공예 관련 일을 함으로써 수입원으로 삼았다. 언니와 마찬가지로 인근 학교 아이들에게, 또는 농장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재능을 나누며 생활에 지장 없는 수준의 소득을 올렸다. 농장에선 자매의 컬래버레이션으로 기획된 예술적 프로그램이 자주 펼쳐졌던 것 같다. 어쩌면 농장이 통째 두 사람의 예술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날갯짓하는 오픈 스튜디오, 혹은 꿈의 공간일지도. 한은미는 요즘 인근 학교의 도서관 사서로 일한다. 이날도 출근해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삶이란 묘한 것이다. 사람을 미처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데려가기도 하니까. 변신이랄까, 한은영은 귀농 중기에 이르러 완전한 농부가 됐다. 직업으로 농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먹거리를 스스로 해결하는 한편 이웃들과 결실을 나누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나, 시나브로 농장 상황에 한결 긍정적인 변화가 오면서 판매 활동에 나서게 됐다.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풀들과 함께
본격적인 농사, 그러니까 남들에게 생산물을 팔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나?
“7~8년 전부터다. 당초 농작물 판매는 계획에도 없었고 예감하지도 못했다. 일찍부터 우리 농장엔 방문객이 많았다. 구경 삼아, 체험 삼아 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풀밭에서 자라나는 온갖 식물들을 신기해했다. 단장을 하지 않아 농장은 어수선했지만, 말 그대로 ‘자연이 준 선물’에 가까운 친환경 생산물을 거둔다는 데 관심을 갖고 지지해줬다. ‘정신 나간 농사’라는 말도 들었지만 말이다.(웃음) 그러나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조차 우리가 나누어준 먹거리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구매를 원했고, 그 수가 날로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 부응해 상업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저절로 고객층이 형성되다니. 이는 흔히 보기 어려운 신개념 판매 루트에 가까울 것 같다. 농민들에게 가장 어려운 판로 문제가 선행적으로 자동 해소된 ‘넘사벽’ 마케팅이다.
“구매를 원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입소문도 덩달아 나서 주문이 잦았다. 그런 상황 변화에 따라 농장 일이 한결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택배 꾸러미를 만들어 배송을 하거나 로컬푸드 마켓을 통한 판매 활동 같은 게 일상화된 지 이미 오래됐다. 소규모 농장이라 생산 물량은 많지 않다. 매출도 크진 않지만 일찌감치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했다. 읍내 재래시장 안에 작은 가게도 차렸다.”
가게까지? 어떤 물건을 판매하나?
“식당 겸 농산물 매장을 겸한 공간이다. 먹을 수 있는 약용 꽃들을 콩처럼 넣어서 지은 밥으로 만든 ‘꽃김밥’이 주력 상품이다. 모든 상품이 자연농법으로 거둔 청결한 것들이라 인기가 있다.”
농장 연매출액은 얼마나 될까?
“농산물 판매와 체험 교육으로 얻는 수입, 그리고 식당에서 나오는 매출 등을 합해 1억 원 이상이다.”
적지 않은 매출이다. 한은영은 애초 생태농업에 관한 인식조차 없이 그저 당연지사처럼 자연환경에 순응하는 농사를 시작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풀들과 공생하는 농사를 지속하고 있다. 이런 생활이 그는 즐겁다. 소농이지만 상당한 수준의 이득을 내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어쩌면 불안하거나 순진한 농사라 할 수 있는 생태농업의 가치와 지속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얻는 자신감과 보람 역시 크기만 하다. 그의 농사를 두고 ‘이상적인 미래 농업의 모델’이라 하는 평하는 사람도 있다. 한은영의 농사법엔 인상적인 게 더 있다. 주변 농가들과 협업하는 방식이 그렇다.
“농사에 욕심부릴 것 없다는 생각이다. 가령 토마토 3개를 수확했다고 가정할 경우, 그중 하나는 내가 먹고, 하나는 이웃과 나누고, 나머지 하나는 자연에 돌려주는 게 옳다는 생각으로 농사를 지어왔다. 특히 나의 농장 일이 이웃 농민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마음을 썼다. 예컨대 마을 분들을 나의 고객들과 연결시켜 농산물 판매를 적극 거들곤 했다. 이렇게 하면 그들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 농장 일을 돕는다.”
농사는 물론 식당 일까지 하느라 일상이 매우 분주할 것 같다. 한 이틀쯤 완전한 자유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
“이걸 어쩌나? 난 자유에 갈증을 느낀 적이 없다.(웃음) 내 딴엔 즐거운 일상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식당 일도 어렵지 않다. 시장 할머니들과 사이가 좋아 사나흘 가게에 못 나가도 그분들이 알아서 척척 장사를 대신 해주신다. 행운처럼 난 귀농 이후 많은 주민들과 좋은 인연을 맺었다. 이 역시 즐거운 생활의 원천이다.”
10년 후 당신의 농장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10년 전 과거의 모습과 현재가 다르지 않듯이, 10년 뒤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풀들은 여전히 가득하고, 새들과 곤충들이 지천이고, 그냥 지금처럼 그렇게.”
현실에 만족이 커서 미래에도 별다른 기대가 없다는 얘기다. 현재 그가 지닌 고민은 딱 한 가지. 어떤 방법으로 지역 친환경 농가들의 이익 창출에 이바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자신의 농사는 이미 자리를 잡았으니, 이젠 남들을 도울 차례라는 것이다.
한은영이 주는 귀농 Tip
•시골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귀농 생활로 만족을 누리려면 우선 소박한 삶의 방식을 기획하자.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감성을 끌어내 마음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다. 그게 ‘소확행’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농사로 성공하기 쉽지 않다. 치밀한 준비 없이 귀농해 큰돈을 벌 욕심에 사로잡힐 경우 실족할 가능성이 높다. 생계유지조차 버거울 수 있는 게 농사라는 걸 유념하자. 큰돈을 벌고 싶다면 차라리 도시에서 사업을 하는 게 낫다.
•과도한 투자를 하지 마라. 농토도 가급적 작게 확보해 농사를 시작하는 게 안전하다.
•그림 같은 집보다 편안한 집을 지어라.
•좋은 풍경만 보고 산속 외진 곳에 터를 잡는 건 좋지 않다. 밤마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질려 떠날 수밖에 없는 불운을 초래할 수 있다.
건강을 잃고서야 절절한 심정으로 세상과 자신을 돌아보는 게 사람이다. 위중한 병을 얻었을 때 인생의 유한함을, 시간의 소중함을 비로소 뼈저리게 절감하며 새롭게 눈을 뜬다. 함지애(58, ‘지애의 봄향기’ 대표)는 40대 때 폐암 1기 선고를 받고 투병을 했다. 용케 조기에 발견된 암인 데다 수술이 잘돼 예후가 좋았다. 천운으로 병마를 다스렸으니 정상적인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 듯싶었다. 하지만 얼마 뒤 폐암보다 무섭다는 폐섬유증(폐가 굳어지면서 심각한 호흡 장애를 불러일으키는 질환)이 다시 기습했단다. 어이하나? 어떻게 일어서야 하나? 폐섬유증 수술을 마친 함지애는 고심 끝에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김제로 내려갔다. 그건 요양을 위한 낙향이었지만 귀농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남은 인생을 덤으로 여기고, 이제 시골에서 제대로 한번 잘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는 점에선 당찬 투신이자 기꺼운 모험이었다.
서울에 살 때 그는 의류유통업을 했다. 중년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을 동대문 상가, 남대문 상가에서 뛰었다. 뛰더라도 그냥 뛴 게 아니라 경주마처럼 열렬한 질주를 했나? 그의 가게엔 자주 고객들이 줄을 섰다지. 아마도 그의 천성일 패기와 근성이 성과를 불러들였던 것 같다. 마침내 자수성가로 우뚝하게 일어선 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이르렀다. 몸에 중병이 찾아와 위세를 부리는 일이 없었다면 서울을 뜰 일이 없었으리라. 시골살이? 그건 그의 사전에 아예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시골 생활은 무섭고 싫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을 통과하면서 생각이 변했다. 삶의 방향이 확 바뀌었다. 이렇게 뜻밖에 찾아온 변곡점은 차라리 하나의 기쁜 선물이었다. 낙향 이후의 삶이 한결 새롭고 만족스럽다는 게 아닌가. 시골에 내려와 비로소 인생의 향긋한 열매를 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이왕 삶을 바꿀 거라면 다 내려놓고 가자!”
낙향 때 그의 머리에서 나부낀 기치가 그랬다. 인생을 레이스하는 데 쓸모가 큰 방편으로 여겼던 욕심과 경쟁심을 모두 내려놓기로 했다. 물질이든 행복이든 가급적 손아귀에 한가득 움켜쥐고자 했던 지난날의 타성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생존의 정글에서 지친 노루가 쉴 만한 물가를 찾아가듯이 마음을 비우고 낙향했다. 사람이 마을을 비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지만,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무가치한 것들을 종량제 봉투에 담아 내다 버렸다. 그게 병에서 벗어나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유력한 길이라고 봤다. 함지애가 김제로 내려간 건 2012년. 초기 한동안은 요양에 전념했다.
“텃밭 농사로 거둔 깨끗한 채소류를 먹거나, 산야에서 약초를 얻어 섭취했다. 도시에 비할 수 없이 맑은 공기도 몸에 좋았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시골 생활이 주는 평온함이었다. 마음이 그토록 편안해지다니, 예상과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맛보며 안도했다. 건강도 좋아졌다. 빠른 속도로. 웃음을 달고 살다시피 했으며, 이웃들과 좋은 사이로 지냈다. 아, 시골에 오기를 잘했어. 좀 더 빨리 내려올걸!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유능한 강소농 모델로 떠올라
잃었던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으면서 함지애는 슬슬 농사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고즈넉한 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을 해야 성장한다는 게, ‘일에 대한 불타오르는 열정이 있어야 즐거울 수 있다’는 게 그가 인생에서 배운 일종의 공리다. 농사에 뛰어드는 방식은 다분히 조직적이었다. 여러 농업 교육기관을 통해 공부부터 충실히 하는 한편, 대담하게도 5000여 평의 전답까지 마련해 바닥을 다졌다.
“농토에 벼, 찹쌀, 보리, 콩 등을 재배했다. 농사 방법은 친환경 농업을 추구하기로 했다. 안전하고 깨끗한 농산물로 고추장, 된장, 청국장, 간장을 만들자는 게 기본 방향이었다.”
혼자서 5000평이나 되는 너른 전답에 농사를?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주로 위탁영농 방식으로 농사를 했다. 이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 봄철의 논밭 갈이부터 가을철 수확까지 전 과정을 대행해주니까. 그런데 귀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교육이다. 사전에 부지런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 난 나름대로 열심히 농업을 공부했다. 건강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면서 농사에 뛰어들었지만, 사실 초기 5~6년은 수련기였다. 거의 공부 기간이었다. 이때 다수의 농업 관련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았나?
“전주에 있는 한국농수산대학 가공학과에 적을 두고 배웠다. 버섯과 화훼 공부도 병행했다. 김제에 있는 농업기술센터를 통해서도 배운 게 많았다. 전통장류, 조청, 꽃차 등에 관한 이론과 실재를 교육받았으니까. 이렇게 공부하며 농어촌체험지도사, 전통장류제조사, 꽃차 소믈리에, 천연발효식초 제조관리사 등 자격증 여러 개를 취득했다.”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판로 부문이다. 판로와 관련해서도 사전에 공부해둔 게 있었나?
“판로 문제야말로 농업 경제의 핵심이라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정보화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덕분에 농사 시작과 동시에 SNS 마케팅을 위해 블로그를 운영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농사의 출발은 식초 사업으로 열었다지?
“2018년에 식초 생산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다. 작업장과 체험장을 지어 생산과 체험 교육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가공 분야 가운데 식초를 선택한 이유는?
“아까 말했지만 난 농업 관련 공부에 많은 시간을 썼다. 딴엔 제법 공부를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어느 수준인지, 뭐 좀 실력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 테스트할 필요가 있었다. 테스트 수단으로 식초 사업을 택한 건 식초가 사람 몸에 가장 좋은 식품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나의 건강을 위해서도, 남의 건강을 위해서도 식초만큼 좋은 게 없다고 봤으니까.”
촘촘한 사전 준비에 힘입어 식초 사업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특유의 현미식초를 만들어 특허 등록을 냈으며, 연잎식초라는 희귀한 제품을 만들어 역시 특허를 받았다. 스스로 설정한 테스트를 좋은 성적으로 통과한 셈이다. 이후 그는 식초의 이웃사촌인 술 만들기에 뛰어들었다. 전통주에 관한 공부를 미리 해둔 상황에서였다. 따라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일단 필이 꽂히면 냅다 덤벼들어 몰두하는 평소의 습성과 기량을 풀가동해 전통주 개발과 생산에 주력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가 주어졌다. 각종 경연대회에 출품한 그의 술이 큰 상을 연달아 받으며 일약 알아보는 눈이 꽤 많은 실력자로 부상했다는 게 아닌가. 그는 2019년 충남도 농업기술원이 후원한 ‘우리 발효술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2021년엔 ‘대한민국 명주대상’ 경연에서 청주 부문 대상을, 2022년엔 광주MBC가 주관한 ‘우리 술 어워즈’에서 ‘왕중왕’상을 거머쥐었다. 전통주 초심자가 거둔 만만치 않은 성취였으니 이변이라 말 못 할 것도 없겠다. 이제 그는 술과 더불어 유능한 강소농의 모델로 떠올랐다.
투병 이후의 삶은 덤으로 주어진 것
“난 술에 미친 여자다.(웃음) 좋은 전통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양조엔 디테일한 기술력이 필수다. 누룩에서 발생하는 미생물 효모로 단맛과 신맛 등 풍미를 지닌 술을 빚어내기 위해선 반복적 실험이 선행돼야 한다. 술맛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도 쉽지 않다. 미치지 않고선 도달할 수 없는 게 양조다.”
어떤 술들을 만들고 있나? 가장 자부하는 술을 꼽는다면?
“현재 6종류의 술을 생산한다. 대표 상품은 ‘초야’(初夜)라는 청주다. 신혼 첫날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술에 담았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탁주인 ‘순애보’ 역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술이다.”
시중에 수많은 민속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당신의 술은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있나?
“남들은 흔히 말한다. 여러 가지 꽃을 양조 재료로 삼은 꽃술은 함지애의 것이 뛰어나다고. 민속주를 만드는 이라면 누구나 ‘이게 바로 한국의 술이야!’라고 자신할 만한 술을 만들고자 노력할 텐데, 나 역시 그렇다. 그런데 술의 풍미 수준을 가르는 건 기술력보다 정성스러운 마음과 손길에 달렸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먹일 음식을 만들 때처럼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마음. 그게 좋은 양조의 비결이라 믿는다.”
양조란 창의적 감각이 요구되는 난해한 장르다. 자력으로 단기간에 일정한 성취를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궁금하다. 누군가에게 도제식 수업을 받은 적은 없었나?
“운 좋게도 좋은 스승들을 만났다. 명품 전통주 ‘호산춘’의 명인 이연호 선생님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한국전통주연구소 소장인 박록담 선생님을 통해서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이 스승들 덕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사실 시골에 내려온 이후 나는 이렇다 할 실패나 착오를 겪지 않았다. 이건 순전히 좋은 인간관계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좋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좋은 걸 배웠고, 배운 걸 토대로 일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일뿐만이 아니다. 삶의 질 자체가 아등바등 살았던 서울에서보다 훨씬 좋아졌다.”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로 일과 생활, 양면에서 선순환을 해왔다는 얘기다. 남의 가르침과 의견을 경청해 피드백으로 삼기. 이웃과 도타운 우정을 나누는 일에도 사업 이상의 정성을 쏟아 감흥을 누리기. 이쯤이면 결함 없는 생활이다. 인생의 중세시대라 할 만한 투병기는 어느덧 종료됐다. 여러 측면에서 서울에 살 때와 완연하게 변했다. 이제 그가 지닌 지배적인 감정은 만족감, 그 하나란다.
다만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지되고 있는 양상이 있으니, 여전히 바쁘게 산다는 게 그렇다. 함지애가 만드는 건 식초와 전통주만이 아니다. 들에선 곡물을 생산하며 장류 사업도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대파에서 피어나는 보랏빛 꽃을 부재료로 가미한 이색 꽃두부도 생산한다. 마을 부녀회장을 맡기도 했던 그다. 김제 시내에 오픈 스튜디오를 두고 대표를 맡고 있는 ‘징게맹갱 우리술 협동조합’의 기지로 활용하고 있기도. 독거노인과 결손가정을 돌보는 자선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시내의 침체된 구역 일부를 놀이문화 공간으로 재생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일의 가짓수가 이토록 넘치다니. 그는 남몰래 비명을 지르는 건 아닐까? 일에 치여 부질없이 소비되는 뭔가가 있는 건 아닐까?
“투병 이후의 삶은 덤으로 주어진 거라고 생각하자 모든 게 감사하게 다가왔다. 희로애락은 여전하고 때로 눈물도 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걸 비로소 하고 있다는 실감으로 행복하다. 돈을 벌려고 바동거렸던 과거에서 벗어난 것만도 어딘가? 밝고 에너지 넘치는 본성을 회복한 건 또 어떻고? 욕심을 내려놓고, 짧고 굵게 살다 가면 된다는 생각이다.”
돈보다 소중한 가치를 가진 게 많다는 걸 알면서도 흔히들 까먹고 산다. ‘욕심에 휘둘리는 삶은 이제 싫어!’ 함지애의 드라마를 난 그런 외침으로 새겨두기로 했다.
함지애가 주는 귀농 Tip
•땅과 집을 마련하기 이전에 귀농 교육부터 충분히 하라. 지자체마다 운영하는 ‘1년 살아보기 프로그램’ 같은 걸 통해 농촌 생활을 미리 경험하는 것도 좋다. 그 과정에서 나의 숨겨진 역량을 발굴할 수 있으며, 과연 귀농을 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귀농 초기 3년 정도는 성공을 위한 수련기로 삼아 나를 알아가는 시간 내지는 농사의 방향을 모색하는 기간으로 활용하자. 농업의 경제 효과는 현명한 운영을 했을 경우에도 대체로 귀농 5년 이후에나 발생한다고 보면 된다.
•도시에서 쌓은 경륜이나 특기를 살려 재활용하라. 이를테면 꽃에 조예가 있다면 꽃차 사업에 도전하는 식으로.
•여성의 단독 귀농을 두려워하지 마라. 다만 남다른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귀농 초기엔 소득 발생이 전혀 없을 가능성이 많다. 예비비 확보가 필수다.
육군에서 30년간 복무한 뒤 중령으로 전역한 김준한(63)이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신 귀농한 데엔 그럴 만한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건강을 회복하자!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신념이 그의 푯대였던 것. 인간만큼 다양한 재능을 지닌 생명체가 드물다. 그러나 육신의 구슬픈 비명 앞에선? 비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자구책을 모색하기 마련이다. 김준한은 귀농을 치유 방편으로 삼았다. 농사에 쏟는 정당한 근로와 산골의 자연환경에 잠재한 갖가지 치료제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보았다. 그가 내심 비상 사이렌을 켜고 찾아든 귀농지는 경북 예천군 감천면의 산골. 올해로 귀농 12년 차다.
김준한의 거처는 거듭 휘어지는 농로의 끝, 살짝 외진 산기슭에 있다. 머리카락 보일라 장독 뒤에 숨듯이, 야트막한 야산의 품에 폭신하게 안긴 터전이다. 다소 은밀하면서 매우 아늑하다. 이른바 명당이란다. 그는 지관을 대동하고 예천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이곳을 찾아냈다. 처음엔 경기도 양평 지역에서 터를 물색했다. 그러나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지. 그래 고향인 예천에서 정착지를 찾았으며, 용케도 이곳을 발견하고 환호작약했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좋은 터와 인연이 되다니.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그는 사람의 기운을 돋우는 땅이 따로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이곳에 살면서 건강을 완연하게 되살렸다. 다시 말해 그에게 풍수는 아리송한 신비주의가 아니다.
여하튼 대뜸 편안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푸른 소나무 즐비한 야산이 두 팔을 벌려 집과 마당을 포옹하고 있으니 산이 보호자 역할을 하는 형국이다. 자연과 교류하며 은연중에 받을 수 있는 ‘인생 레슨’도 많을 환경이다. 이렇게 썩 이상적인 곳에서 김준한은 고독한 ‘나 홀로 귀농’의 막을 올렸다. 컨테이너 박스에서 숙식하며 고추, 감자, 옥수수, 고구마, 메밀 등을 심는 것으로 농사를 시작했다. 이후 자두 농사로 전환했다. 사전 준비는 충실했다. 전역 3년 전부터 귀농이라는 거사를 위해 차근차근 대비했다. 중도에 퇴장하는 불상사만큼은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귀농을 하면 내 손으로 집을 짓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주관하는 전통공예건축학교에 등록했다. 2년간 대목장 신응수 선생의 강의와 실습에 참여해 집짓기의 기본을 배웠다. 전역 직전에 ‘제대 군인을 위한 귀농 교육’도 받았다. 이곳에 내려와서는 예천군 농업기술센터에서 많은 걸 배웠다. 그 외에도 다종다양한 농업 교육을 받았다. 귀농 교육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초심자가 믿을 만한 매우 유력한 기회라 본다. 수년간 열성껏 교육을 받자 마인드 자체가 달라지더라.”
자신감이 붙던가?
“자신감은 물론 성격마저 바뀌는 걸 경험했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쪽으로 변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안도했다.”
흔히들 재배 작목 선정에 귀농 성패의 관건이 달려 있다고 본다. 자두를 주 작목으로 정한 이유가 있겠지?
“처음엔 채소류를 소소하게 길렀으나 포기하고 자두 농사 하나에 집중했다. 집 앞의 밭 450평을 자두 과수원으로 꾸린 게 출발점이었다. 애초 블루베리 농사를 구상했었다. 그런데 예천군 농업기술센터에서 만류했다. 가격변동이 심해 안전하지 않은 작목이라는 얘기였지. 그러면서 권장한 게 자두였다. 이건 예천의 특산물 가운데 하나라서 유리한 요소가 많다는 설명에 이끌려 자두 농사에 뛰어들었다.”
귀농 이후 10여 년째 자두 농사만 하고 있다. 좋은 선택이었나? 아무리 작목 선정을 잘하더라도 이상하게 돌아갈 수 있는 게 농사인데.
“주변을 보면 귀농에 실패하고 역귀농을 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그 원인 중에 가장 큰 건 영농 실패이며, 이는 주로 작목 선택의 오류에서 기인한다. 그런 점에서 난 매우 좋은 선택을 한 셈이다. 자두의 전망이 좋아 농장을 2300여 평으로 확대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혼자 능히 운영할 만한 이상적인 규모라 생각한다.”
소득은 어느 정도 올리나?
“연매출 평균이 3500만 원 내지 4000만 원이다. 이 중 순소득은 70% 정도다. 물론 날씨에 따른 기복은 있다. 어느 해엔 너무 이르게 내린 서리 피해로 매출 제로를 경험하기도 했다. 자두나무 하나에 온전히 남아난 자두가 겨우 두어 개에 불과했다. 난 흙의 진리를, 땀 흘린 만큼 대가가 돌아올 거라는 진실을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하늘이 하는 일을 어떻게 방어할 수 있겠나? 그럼에도 자두 농사는 여느 작물에 비해 장점이 많아, 심지어 고행에 가깝다는 귀농 생활을 무난하게 이끌어왔다.”
스트레스 사라지자 건강도 좋아져
김준한의 귀농 이력은 어언 12년 차. 10년이 지나고서도 수렁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는 귀농인들이 숱하지만 그의 자두 농사는 일찌감치 궤도에 올라섰다. 온갖 교육을 섭렵하면서 얻은 식견, 날이면 날마다 농장으로 달려가는 근면성, 그리고 자두나무의 비위를 맞출 줄 아는 머리와 감성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는 셈이다. 대단한 매출은 아니지만 혼자 생활하기엔 섭섭할 게 없는 수입이라, 이쯤이면 자리가 잡힌 거라고 그는 자족한다. 무엇보다 귀농 목적을 이미 완수했다는 점이 그는 기쁘다. 농업 수익보다 건강 회복을 목표로 한 귀농이었는데 서서히 건강이 좋아지더라는 게 아닌가.
마음은 물론 몸이 아플 때 삶이 비로소 소중하게 다가온다. 따라서 아픔이, 고통이 지름길로 데려다준다는 소식이 고래(古來)로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쏟아진다. 불굴의 의지로 병든 몸을 추슬러 농사는 물론 건강까지 부양한 김준한의 행장은 고통을 차라리 견인차로 삼아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삶의 묘미를 웅변한다. 그는 중증 당뇨병으로 고초를 겪었으나, 어라, 농사에 병약한 육신을 투입하자 바뀌었다.
“오죽 암담했으면 아내의 격렬한 반대를 외면하고 달아나듯이 홀로 귀농을 했겠는가. 당수치가 600까지 올라가면서 시력이 나빠져 실명까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써야 했다. 그런데 서서히 당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안경을 벗었다. 당뇨병은 물론 전반적으로 문제가 많았던 건강 상태가 현저하게 좋아졌다.”
귀농의 무엇이 치유 효과를 가져왔다고 보나?
“내 병은 군대 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 누적에서 온 것이었다. 지시가 주어지면 임무 기간 안에 종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매우 컸다. 이건 고질적인 것이었으나, 정서적 안정을 누릴 수 있는 조용한 산골로 귀농하면서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됐다. 깨끗이 벗어났다. 과도한 노동이 필요하지 않은 소규모 농사라서 즐거운 기분으로 일했던 점도 몸을 정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좋은 공기와 물, 산야에 흔한 약초와 나물들을 섭취한 것도 득이 된 것 같다.”
일취월장일까? 이젠 예천 관내에서 알아주는 농가로 부상했다지?
“자두 농사에 관한 한 달인 소리를 들을 때가 됐다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다. 전국 각지에서 견학을 오는 농부들도 많다. 자두 품질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재배 시설인 ‘Y자 다주지 방식’을 공부하러 오는 이들이다.”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Y자 다주지 방식’은 Y자 파이프 프레임에 자두 가지들을 가지런히 펼쳐 재배하는 기술로, 자두 생산량이 최대 5배에 달하는 등 이점이 많다. 그는 이미 안전한 수준에 올라선 탄력으로 머잖아 매출이 더욱 늘 거라 예측한다. 귀농 이후 드센 파도를 겪는 일 없이 행진해왔으며, 향후 탕탕 질주할 가능성이 열렸다고 상황을 읽는 것이다. 그러나 과욕을 경계한다. 돈 버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다. 스스로 분수를 가늠해 매사 소박하고 조화로운 삶을 꾸려가고 싶은 것이다. 그게 귀농의 목적 중 한 가지이기도 했다. 그리 살자고 집도 자그맣게 지었다. 흙과 나무로 지은 15평짜리 한옥이다.
“자금 사정도 고려했지만 소탈하게 사는 게 좋다는 생각으로 간소하게 지었다. 내가 도연명을 좋아한다. 그의 ‘귀거래사’를 보면 소박한 생활 정경이 나오더라. 작은 초가를 짓고, 작은 텃밭을 만들고, 뜰엔 복숭아와 자두나무를 심어 자족하는 옛사람의 모습에서 감흥을 느꼈다. 감히 위인을 흉내 낼 수야 없지만, 나 역시 소소한 것에서 만족을 누리는 삶을 맛보고 싶었다.”
손수 집을 지었다지? 한옥 건축엔 까다로운 공정이 많은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게다가 건강도 좋지 않았는데.
“미장이나 조적 등 난해한 부분은 기술자를 불러 썼다. 하지만 설계 초안을 비롯해 많은 부분을 직접 처리했다. 원목 껍질을 벗기고 대패질을 해 서까래 164개를 손수 만드는 식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업자에게 맡기면 두 달 안짝에 완공하겠지만 난 2년 반 만에 완료했다. 실로 고달팠다. 그런데 집을 완성하자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어떤 일이?
“아내가 비로소 나의 귀농에 동의를 표했다. 애초 귀농의 ‘귀’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던 사람인데 집 지은 걸 보고 생각이 바뀐 것이지. 내가 귀농한 후 이곳에 아예 오질 않았던 아내였으나, ‘이젠 주말마다 내려오겠다!’고 하더라고.(웃음) 비로소 어둡고 추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그의 아내는 안양시에서 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한다. 남편의 도발적인 귀농에 오만정이 떨어졌었나? 빗장을 건 마음을 풀어놓기까지 긴 세월이 걸린 셈이다.
애당초 한결 매력적인 설득과 회유로 부인과 동행하는 귀농을 할 수는 없었을까? 인생의 가을에 부부가 유유상종하며 흘러가는 모습처럼 진실한 드라마가 드문데.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낄 따름이다. 병을 안은 채 농사와 집짓기를 함께 했던 초기 2, 3년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내가 자청한 지옥이다. 그런데 아내가 건져준 게 아닌가. 머잖아 아내는 퇴직한다. 이후엔 이곳에 내려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살 날보다 산 날이 더 많아진 나이다. 귀농 12년 세월을 낭비라 느낀 적은 없었나?
“시간을 아껴 쓰며 살았다. 덕분에 건강을 되살렸고, 아내의 인정을 받았다. 여기서 무엇을 더 바라겠나? 이 정도에 만족한다. 더도 덜도 필요 없다는 거.”
더도 덜도 말고 딱 지금처럼만! 인생을 통째 긍정하는 짧은 언설이 바윗장처럼 묵직하다.
김준한이 주는 귀농 Tip
•귀농으로 낭만적인 전원생활이 가능할 거라는 환상을 버리자. 이상향의 크기를 줄이라는 얘기다.
•기술집약적이고 소득 수준이 높은 작물을 찾아내자. 그러자면 갖가지 귀농 교육을 충실히 받아 물정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귀농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초기 자본 투자에 무리하지 말자. 길게 보고 서서히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매스컴이 떠드는 귀농 성공 사례를 그대로 믿지 마라.
•혼자 하는 과수 농사의 경우 2000평 규모가 적당하다.
•농업 장비들은 가급적 임대해 사용하자.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서다.
•잦은 음주는 금물이다. 무질서와 방황의 첩경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매력과 환멸이 공존하는 도시에 마냥 정을 느끼며 살기는 어렵다. 오나가나 생기를 머금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밥벌이의 피로를 면제받을 수 없으니 묵묵히 견디며 산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살며 경제활동을 했던 김완중(58, ‘내일을 여는 책’ 대표) 역시 그랬던가 보다. 언젠가는 도시를 뜰 생각을 했던 것. 그러다 쉰 살을 코앞에 두었던 2013년, 마침내 도시를 벗어났다. 인파와 소음이, 꿍꿍이와 풍문이 넘실거리는 서울과 결별하고 시골로 달려갔다. 유난히 싱싱한 산수를 막대하게 보유해 차라리 이방(異邦)인 전북 장수군의 외진 산골로 귀농했다.
김완중이 처음 손을 댄 작물은 오미자였다. 농사 물정을 잘 모르는 귀농인에게 그나마 용이한 작물은 지역 특산물이다. 오미자는 사과·한우와 함께 장수군의 특산물에 꼽힌다. 김완중은 도시에 살며 이른바 ‘도시농부’를 경험한 적이 있다. 텃밭 수준의 농사를 재미 삼아 체험하며 농업과 흙을 살짝 맛보았다. 이건 귀농의 싹눈이 튼 계기였다. 그러나 농사 경험이라고 내세우기엔 소소한 것에 불과했다. 즉 오미자 재배를 통해 농사와 본격적으로 맞닥뜨린 그에게 닥쳐온 애환의 수효가 한둘이 아니었을 거라는 얘기다. 매사 신입사원처럼 서툴러 진땀을 뺐을 게 아닌가. 하지만 요상하게도 거둔 성과가 만만치 않았다.
“농업 자체가 워낙 힘들다. 농가들이 흔히 애를 먹는 게 판로다. 좋은 농산물을 생산해놓고도 유통 문제의 벽에 부닥쳐 기존 농가들조차 농사를 접는 경우가 있더라. 그러나 난 오미자 판매를 잘했다. 도시 쪽에 네트워크가 있어서였지. 내가 생산한 물량이 바닥나 다른 농가의 오미자를 사다 팔기도 했다.”
귀농을 할 적에 그는 그냥 쓱 내려왔다. 마치 등을 미는 바람에 떠밀린 듯이. 그 무슨 그럴싸한 구상을 미리 해두지 않았던 것. 농사를 머릿속에 넣고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리며 숙고하는 식의 방식은 아마도 성향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골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만히 두고 보는 게 흥미를 배가하는 길이라 보았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무가치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좀은 자유롭게, 좀은 태평하게, 좀은 재미있게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런데 군에서 임대해준 밭에 기른 오미자 판매가 뜻밖에도 잘된 게 아닌가. 본격적인 농부의 대열에 올라설 수 있는 자격증을 자신에게 수여해도 무방할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초보 귀농인으로서는 자못 웅장한 성과를 거둔 셈? 그러나 속사정은 영 달랐다. 오미자 농사를 지어 잘 팔았으나 막상 수입은 실로 보잘 게 없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재배 면적이 겨우 800평에 불과했던 거다. 대규모 오미자 농가들도 수익 구조에 끙끙대는 판에 소농으로 무슨 재미를 볼 수 있으랴. 그의 농사는 소박한 미덕에 충만했으나 호구 대책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햐! 이러다 굶어 죽겠더라!(웃음) 농사에 들어가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점도 싫었다. 결국 오미자 농사를 접었다. 다 뽑아내고 손이 덜 가는 두릅과 엄나무를 심었다. 이 역시 농사다운 농사라 할 게 없다. 결국 5년 만에 농사를 포기한 셈이다. 농사로 먹고살려면 최소한 5000평 이상은 지어야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내 실력으로는 가당치 않았다.”
나의 철학을 책에 담아내는 매력
시골 생활에 관한 사전 구상보다 시골에서 과연 어떤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던 김완중에게 비로소 흥미로운 상황이 발생했다. 무엇으로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이건 절박한 숙제라는 점에서, 상상력과 모색을 다한 궁리로 길을 찾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일견 흥미로운 과목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는 답을 찾았다. 1인 출판사를 차리기로 한 것. 전에 도시에서 신문사 편집기자와 출판사 직원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어디에도 없는 산중 독립출판사를 열기로 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할 줄 아는 건 출판 일뿐이더라. 인생 후반을 시골에서 보내려고 내려온 만큼 지속 가능한 일을 찾아야 했는데 그게 출판이었다. 쉽지 않겠지만 하나하나 맞춰가며 길게 보고 달려가자는 생각이었다. 그래 집 한쪽에 작은 흙집 사무실을 지어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적막한 산속에 차린 1인 출판사라니. 거북이를 끌고 산책하는 장면을 보는 것처럼 생소해 오히려 흥미롭다.
“사업성만 따질 경우 시골에서 출판사를 하는 건 바보짓이나 다름없다. 좋게 말하면 용감한 짓이지만, 상식적으로 보면 무모하고 미친 짓이다. 그러나 가치 있는 삶의 한 방편이 출판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사업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도시적 습성에서 벗어나 나만의 철학을 담은 좋은 책을 만든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출판업은 사양사업이지 않나?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책을 절대적으로 읽지 않는 풍조가 만연했다. 이를테면 유튜브 왕국에서 누가 활자 매체를 보겠나. 하지만 책의 콘텐츠가 좋을 경우엔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거라 봤다. 시장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내 색깔을 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자립하고자 했다.”
기획, 편집, 교정, 인쇄, 유통 등 모든 걸 혼자 처리하는 게 가능한가?
“초심자라면 어려운 대목이겠지. 내겐 일련의 경력이 있어 헤쳐나갈 수 있었다. 도시에 살 때 회계사무실에서 근무했던 아내가 서류 정리 등의 일을 맡아줘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부부가 함께 원하는 곳에 살며,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만족스럽다.”
출판업자들의 머리를 지배하는 생각은 한 가지로 보인다. 어떻게 해서든 팔릴 수 있는 책을 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해방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는 반증이겠고.
“인간이 사는 곳 어디든, 어떤 일이든 피곤하지 않은 게 있던가. 그게 운명이다. 맞부딪혀 이겨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출판은 하나의 언론이다. 나를 표현하고, 내 철학을 표방하는 매우 매력적인 장르다. 그러니 괴로울 리가 없다. 자주 보람을 느낀다.”
어떤 분야의 책들을 출판했지?
“인문사회 분야 책에 집중했으며, 아이들을 대상으로 삼은 동화책도 다수 출판했다. 혐오와 사회적 편견, 생명의 경외심에 관한 문제를 다룬 첫 동화책 ‘보신탕집 물결이의 비밀’에 지향점이 드러나 있다. 2019년에 낸 ‘가짜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역시 동화책이다. 아동들에게 가짜뉴스라는 게 과연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게 인간과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주는지 보여주었다.”
어린이들에게 무거운 사회문제를 들려주는 이유가 있겠지?
“그들은 내일의 주인공이며, 미래의 유권자이지 않은가. 그러나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정치, 환경, 인권, 노동, 평화 문제 등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출판을 통해 아이들이 생각을 키울 기회를 제공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참 잘사는 것 같지?”
요즘 출판계 현실을 보면 흉년도 이런 흉년이 없다. 쓰러지고 자빠지는 출판사들이 흔하다. 그나마 승산이 있는 게 동화책 출간이다. 선하고 아름답고 몽환적인 주제를 담은 동화책 시장은 그나마 숨을 쉰다. 그런데 속세와 동떨어진 산골에 출판사를 차린 김완중은 무겁고 딱딱하고 골치 아픈 사회문제를 동화책으로도 출판한다. 이게 장사가 될까? 그는 일종의 언론 행위로 책을 만들어 세상사에 가담한다. 횃대에 올라앉은 새벽 수탉처럼 한번 호기롭게 목청을 돋워 세상의 둔감과 일탈을 일깨우고 싶은 것이다. 이런 의도에 무슨 결함이 있을까마는 책이 팔리긴 할까? 팔린다. 얼핏 물심양면의 불황이 자심할 것 같지만 나름 탄력을 가지고 굴러간다. 출판계에 만연한 부진을 고려하면 결코 적은 부수가 아닌 2만 부쯤 팔린 책이 드물지 않았다고 하니 이미 서광이 들이친 형국이다. 어쩌면 나는 오늘 출판계 변방에 잠재한 천하장사를 만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뭔가 대단한 성과를 거둔 건 아니다. 하지만 자리는 잡혔다. 매년 10권 이상의 책을 꾸준히 출판하면서 작지만 소중한 결과를 거두었고 자신감도 얻었다.”
자극과 경쟁의 농도가 옅은 시골 환경에서 출판의 촉을 유지하기 어려운 면은 없던가?
“모든 걸 혼자 움직이며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자칫 고립될 수 있는 여건이긴 하다. 소통할 수 있는 출판업자가 주변에 없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그러나 장점이 많다. 무엇보다 시간의 여유가 있어 한나절을 멍때리며 지낼 수도 있는데, 이건 도시에선 누릴 수 없는 특혜가 아닐까 싶다. 마음에 여유를 부여하면 생각에도 한결 깊이가 생기는 것 같다. 따라서 서울에선 나올 수 없을 기획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한다. 서울을 벗어난 건 여러모로 내게 좋은 선택이었다.”
제한된 환경과 자원으로 원하는 퍼포먼스를 이끌어낸다는 게 어디 쉬운가. 김완중은 기획력으로 승부한다. 부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기획력의 천재’다.
지역주민들과 교류는 잦은가? 주민과 유대관계를 맺지 않을 경우 고독을 벗 삼아야 하는 게 시골 생활인데.
“농촌 사회에도 정치가 있고 조직이 있으며 이슈가 있다. 부당한 상황과 맞서 싸워야 할 일이 있을 때면 난 적극 나서는 편이다. 지역 사회단체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공동 대응한다. 어디에 살든 작은 외침일망정 외칠 땐 외쳐야 하지 않겠는가. 산골에 산다고 그마저 외면한다면 슬프지. 물론 나만의 자유를 침해당할 정도의 처신은 자제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텃세로 궁지에 몰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외교력을 발휘하는 게 좋겠다. 나를 포장할 것 없다. 시골 생활은 시골 사람들이 박사라는 걸 인정하고 함께 묻어가면 된다.”
경제 문제에 걱정은 없나?
“한때 불안했다. 가진 것 없이 내려와 빚만 잔뜩 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감에서 신속하게 벗어났다. 왜냐고? 자비로운 아내가 돈 문제에 관한 한 일언반구 불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웃음) 여전히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이지만, 부부 공히 굉장히 높은 만족도를 가지고 소복소복 살아간다. ‘우리, 참 잘사는 것 같지?’ 아내와 자주 하는 얘기가 그렇다.”
이제야 하는 얘기지만 그의 거처는 몹시 아름답다. 순수한 산릉과 녹색 언덕들이 장대한 성채를 이루고 집의 원경을 이루고 있어서다. 여기에 부부애까지 후끈하니 겹으로 절경이다.
김완중이 주는 귀농 Tip
•귀농 후보지에서 미리 반년 내지 1년은 살아보고 최종 결정을 하자. 지역의 속사정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수군에서는 ‘1년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중년 이후의 귀농엔 여유자금 확보가 필수다. 최소 3년 정도는 수입이 없어도 생활할 수 있는 기본 자금을 준비하라.
•집 장만이나 수리에 큰돈을 쓰지 마라. 만약 팔아야 할 경우 쉽지 않은 게 농촌 주택이다.
•남들의 귀농 성공 사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자. 전혀 만만치 않은 게 농사다.
•무리한 초기 투자는 금물이다.
•도시에서 쌓은 능력과 경륜을 활용해 농외소득을 개발하라.
•원주민의 간섭을 텃세로만 보지 말자. 귀농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 또는 걱정으로 하는 간섭일 수 있으니까.
초록으로 꽉 찬 산기슭이다. 널따란 농장 사방에 온갖 나무들이 길차게 자라 수려하다. 터의 가장자리로는 맑은 도랑물이 흐른다. 살짝 높은 지대다. 그래 세찬 골바람이 농장을 후려칠 일이 잦을 것 같지만 산의 품에 새 둥지처럼 깃들어 끄떡없다. 경관도 안전성도 결함이 없는 입지다. 적막감마저 깊으니 온갖 꿍꿍이와 아귀다툼으로 소란한 속세를 잊고 오붓하게 은거할 만한 피안(彼岸). 그러나 농장주 김기완(75, 평달교육농장)은 은거에 관심 없다. 가만히 눌러앉아 ‘멍 때리기’로 소일하는 건 도대체 그의 적성에 맞지 않다. 차라리 일벌레다. 해 뜨기 전부터 농장 일을 시작하는 식의 습성을 고수해 볼 것 많고 즐길 것 많은 체험교육농장을 꾸려 끌고 왔으니까.
김기완이 서울을 벗어나 이곳 충북 옥천군 산골짝에서 새로운 삶을 구가한 지 어언 20여 년. 귀농 왕고참이다. 그러니 얻은 경험이 많다. 덩달아 견해도 많다. 그가 지닌 견해의 요점을 미리 말하자면, 귀농이든 귀촌이든 귀향이든 시골에 넘실거리는 자연과 깊은 친선 관계를 맺을수록 삶의 품질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즉 그는 자연과 더불어 여생을 한바탕 재미있게 살아보겠다는 용무를 가지고 고향 산골로 이주했던 거다. 그리고 그 용무를 이미 완수했다는 게 그의 자평이다.
김기완은 서울에서 건축자재상을 해 기반을 야무지게 다졌다. 고향에서의 성장기는 곤궁하기 그지없었다지. 또래 연배들이 흔히 그랬듯 생일에나 겨우 미역국에 쌀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 얄궂은 운명의 횡포에 저항하기 위해 그는 15세에 상경, 닥치는 대로 일을 해 밥을 벌었다. 도둑질 말고는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지경으로 서울이라는 정글을 바지런히 누빈 결과 중년 즈음엔 어엿한 자수성가의 본을 이룰 수 있었다.
취미 하나 가질 겨를 없이, 돈 한 푼 허투루 쓴 일 없이 오직 경제적 기반을 잡기 위해 천신만고와 맞붙어 싸운 덕분이었다. 피땀을 쏟아 목표로 삼았던 산정에 올랐던 것. 산꼭대기에 오르면 비로소 산 아래가 훤히 보인다. 징글징글한 가난의 기억이 싫어 아예 잊었거나 잊어버리고 싶었던 고향의 산천과 풍정이 사물사물 가슴으로 스며든다. 그렇게 향수가 소리 소문 없이 그를 방문했다. 몹시 지독한 그리움으로 끙끙 앓았던 것 같다. 이제 가야 할 곳은 고향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마치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듯이 그는 흔쾌히 낙향했다.
“귀향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거라는 얘기를 하더라. 출세한 사람은 제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현실을 떠나지 못하고, 망한 사람은 창피해서 못 내려간다는 것이다. 나는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 진달래꽃을 따 먹고 도랑에서 가재를 잡았던 고향이 너무도 그리웠으니까. 언젠가는 내려가겠어, 기어이 고향에서 살겠어, 그렇게 오랫동안 벼른 끝에 드디어 귀향했던 거다.”
객지보다 오히려 심적 부담이 클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가급적 고향을 피해 귀농하는 게 좋다는 얘기도 있던데.
“처신하기 나름이다. 나도 처음엔 텃세 비슷한 걸 겪었다. 그러나 아량으로 포용하면 마찰이 생길 리 없거니와, 아하 이게 바로 고향 좋다는 거구나, 그렇게 안도할 만한 일은 더 많이 벌어진다.”
처음엔 혼자 내려왔다지? 부인은 서울에 머물고. 귀향 문제를 놓고 부부간에 이견이 있었나?
“한창 일할 54세에 무슨 귀향? 아내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 이른 은퇴라 봤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일에서 스스로 퇴직시키고 귀향을 결심한 터라 혼자서라도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으로서 할 역할을 다했는데 망설일 게 뭐란 말인가. 게다가 뭔가에 수틀려 ‘자연인’처럼 살겠다는 것도 아니니 보류할 이유가 없었다.”
‘나 홀로 귀농’으로 부부 사이에 금이 가는 경우도 있더라.
“난 성격상 매사 치밀하게 숙고해서 최선책을 찾은 뒤에 움직인다. 아내를 전적으로 존중하는 버릇도 있다. 따라서 아내와 억지 동행을 하는 대신 일단 내가 먼저 내려가서 아내를 맞이할 준비를 해두겠다는 쪽으로 일을 구상했다. 나 먼저 내려가겠으니 당신은 마음 내킬 때 천천히 내려오시오! 아내에게 선택권을 준 것이다.”
그토록 합리적인 처신을 하다니. 그렇더라도 부인이 마침내 내려올 거라 장담하긴 어려웠겠지? 세상의 아내들 대부분이 시골 생활에 호감을 갖지 않으니까.
“아내의 마음에 쏙 들게 터전을 가꾸는 게 관건이라 봤다. 이건 새들의 행태에서 얻은 힌트다. 어느 날 TV에 수컷 새가 암컷 새를 유혹하기 위해 근사한 둥지를 짓는 장면이 나오더라. 죽기 살기로 멋진 집을 지어 마침내 마음에 드는 암컷을 짝으로 끌어들이더라고. 아, 바로 저거다! 농장을 제대로 꾸며놓으면 아내가 제 발로 내려올 거라는 생각을 한 건데 이건 적중했다.(웃음)”
화재로 공들여 지은 집을 잃기도
김기완이 귀향을 해 홀로 산골에서 보낸 세월은 자그마치 6년. 고독한 독신남도 아니면서, 끈 떨어진 홀아비도 아니면서 6년을 외롭게 정진했다. 정진? 아내를 한시 빨리 불러들이겠다는 생각 하나에 쏠린 채 오로지 농장 구축에 전념했으니 말 그대로 정진이며, 심지어 득도를 목표로 삼은 고행에 맞먹을 고달픈 행진이었을 게다. 술이나 담배는 애당초 입에 붙이질 않았으니 근로가 주 종목이었다. 터는 넓어도 겁나게 넓어 처음 사들인 1만 평에 나중에 사들인 것까지 도합 3만 5000평이나 된다. 허리 휠 신역이 자심했을 테다. 그러나 즐겁더란다. 매번 성취감을 맛보며 피곤하지 않더란다. 허풍이 아닌 게, 그는 스스로 기꺼이 뛰어든 일엔 뭐든 툴툴거리거나 남몰래 돌아앉아 한숨을 토해내는 나약한 성향의 소유자가 아니다. 요컨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처럼 행복한 게 없다’는 인생의 공리를 그는 몸소 실행하는 기쁨을 맛봤던 것 같다. 그는 결국 체험교육농장의 틀을 완비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아내가 합류했다. 아내를 각별히 사로잡은 건 김기완이 손수 밑그림을 그려 지은 살림집이었다.
“아내를 위해 지은 크고 보기 좋은 캐나다식 2층 목조주택이었다. 차를 좋아하는 아내를 배려해 다실까지 만들었다. 암컷 새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의도가 가미된 집이었다.(웃음) 나중에 그 집이 누전 화재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지만.”
다시 지은 집 역시 2층으로 매우 크다. 굳이 커다란 집을 지은 이유가 있겠지?
“자식들이나 친지들이 방문할 경우 편히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새집은 다시는 불이 나지 않게끔 나름의 대안을 가지고 지었다. 건물 골조를 불에 약한 목재 대신 콘크리트로 세웠고, 외벽도 불에 강한 벽돌을 마감재로 썼다. 지붕 역시 구리 자재를 도입해 화재를 단속하고자 했다. 팔각형 구조로 방들을 배치한 것도 만약의 화재 대비에 가장 뛰어나다고 판단해서였다. 이 모든 구조는 화재의 충격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싶어 동원한 방책이다.”
교육농장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
“당시 농업의 새로운 트렌드가 교육농장이었다. 주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갖가지 농사 체험과 놀이 프로그램을 마련해 운영하는 게 교육농장이다. 이건 부부가 함께 즐기며 일할 수 있는 괜찮은 분야라 판단했다. 하지만 운영이 힘들더라. 관내에 폐교되는 학교가 속출하고,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지금까지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다.”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해선 방향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닐까?
“그냥 이대로 갈 참이다. 난 귀농을 통해 농업 현실을 다각도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귀농으로, 농사로 돈 벌기 어렵다는 걸 주변 농가들의 실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거다. 가끔 귀농 강의를 할 때면 빼먹지 않고 하는 얘기가 있다. 돈벌이를 목적으로 삼은 귀농은 위험하다는 걸, 돈을 벌려면 도시가 훨씬 낫다는 걸 말해줘야 하는 것이지.”
현실이 그럼에도 당신은 태연하다.
“난 서울에서 실로 열심히 일했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는 신념 하나로 살았다. 덕분에 먹고사는 데엔 전혀 지장이 없다. 한편 아이들과 어울리는 농장 생활은 본질적으로 가치가 있고 재미가 있다. 운영은 부실하지만 불만이나 불안은 없다. 농장 잔디밭에서 깔깔거리며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보석처럼 아름답더라. 뜰에 심은 나무들이 자라는 걸 바라보며 자연의 순리와 교감하는 순간 역시 행복하다. 여기에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래서 그냥 이대로 지속하기로 했다.”
어라! 개와 멧돼지가 어울리더라
손에 쥔 것 없이 귀농했다면, 경제적 불확실성이 컸다면 김기완의 양상은 달랐으리라. 다시 말해 그는 충분히 자족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농업으로 더 이상의 부를 확장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냉철한 인식도 현실을 긍정하게 하는 배경이 됐을 테다. 즉 그는 오랫동안 삶의 주된 이슈였던 경제문제에서 벗어나, 이젠 자신과 아내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는 쪽으로 날랜 머리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막대한 매력 덩어리를 내면에 들여놓을 경우 행복을 거머쥐기가 더 쉽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단언하건대 인간관계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도시 생활의 유일한 탈출구는 시골이다. 정신마저 피폐해지는 과도한 인적 관계에서 자연과의 관계로 무게중심을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괴롭고 복잡한 삶에서 해방돼 자연과 소통하며, 생명 가진 것들을 존중하면서 한적하게 지내는 일보다 다행스러운 게 있을까?”
이른바 태평농법으로 농사를 한다지? 이건 자연을 존중하는 방식의 하나인가?
“사람과 농작물이 싸우지 않고 서로 태평하게 공존하는 게 옳다는 생각에서 해온 농법이다. 농장에서 문득문득 깨닫는 게 많다. 내가 멧돼지를 퇴치하기 위해 개를 기른다. 그런데 가만 보니 개와 멧돼지가 어울려 놀더라고. 이거 재미있지 않나? 아, 저게 자연의 이치구나. 멧돼지 역시 원래 이 터전의 주민이었구나. 그런 값진 성찰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참다운 진수는 노경(老境)에 구현된다는 얘기가 있다. 황혼길을 걸어가는 당신의 초상이 어떤 것이길 바라나?
“문전박대를 당하더라도 술 한잔 마시고 시 한 수 읊으며 홀연히 떠나가는 김삿갓의 풍모를 선망한다. 이건 욕심을 다 내려놔야 가능한 경지지만.”
그의 얘기는 자주 럭비공처럼 튀어 핵심에서 이탈했다. 이 역시 그가 보유한 생태 경관일 텐데, 반짝이는 뼈가 들어 있는 말이 드물지 않아 지루하진 않았다.
◆김기완이 주는 귀농 Tip◆
•농토를 구입할 경우 2년쯤은 벼르며 판단하라. 값이 싸다고 덜컥 샀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정이 가는 농토를 구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내 공간이 된다.
•맹지 매물을 소개하면서 ‘차후 잘 협의하면 길을 낼 수 있다’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을 믿지 마라. 매입 후 곤욕을 치르기 십상이니까.
•귀농 이전에 밑그림을 충실하게 구상하자. 목표 설정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 있어서다.
•가급적 전답, 산, 냇물과 동시에 접한 토지를 사라. 그래야 활용도와 생산성이 높아진다.
•국유림과 접한 농토는 이상적이다. 불필요한 개발 행위가 원천적으로 차단돼 한결 안정적인 농사를 할 수 있어서다.
홍현섭(65) 씨는 경기도 연천군에서 작은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40년간 공직에 몸담았고, 5년 전 연천으로 귀촌했다. ‘은퇴 후 시골살이’라는 꿈을 이룬 홍현섭 씨는 자연이 주는 소소한 행복을 만끽하는 중이다.
홍 씨는 연천 통일교육원에서 조경기능사 교육을 진행한다는 정보를 듣고, 귀촌 생활에 도움을 얻고자 조경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로 결심했다. 올해 2월부터 5월까지 4개월간 수업이 진행됐고, 홍현섭 씨와 같은 50·60대들이 모여 열정을 불태웠다.
홍 씨는 조경기능사 자격증 취득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필기시험 공부를 하면서 두뇌 회전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꼈다. 그는 “나이 먹어서 공부하는 게 참 힘들더라. 공부는 때가 있다는 걸 많이 느꼈다”라고 말했다.
“책도 어마어마하게 두껍고, 시험 문제들이 쉽지가 않아요. 나무 종류는 물론 열매 색깔, 꽃 색깔 등을 다 외워야 해요. 문제는 열심히 공부해도 다음 날이 되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죠. 필기시험 합격률이 40%대라고 하던데, 60대는 30%도 안 될 것 같아요.”
실기시험도 60대인 그에게는 쉽지 않았다. 1차 시험은 설계 도면 그리기인데, 홍현섭 씨는 “눈이 잘 안 보여서 오랜 시간 집중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2차는 수목 감별, 3차는 작업형 시험이다. “3차 시험은 나무 식재, 수관 주사 놓기, 벽돌 포장 등을 하는 것인데, 평소에 농사지으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쉬웠다”고 그는 덧붙였다.
홍현섭 씨는 조경기능사 공부를 하면서 배운 바가 많다고 했다. 특히 귀촌인으로서 예상보다 훨씬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그는 “마당에 여러 나무를 심어놨는데, 나무를 심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병든 가지, 파고드는 가지마다 전정(가지 잘라주는 일) 방법이 다 다르더라. 비료 주는 것도 다 때가 있고 요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는 체계적으로 나무 관리를 해야겠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홍현섭 씨는 연천에 국립연천현충원이 조성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30만 평 규모라고 하는데, 조경 쪽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 꽤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도 자신에게 맞는 일이 있다면 일을 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더불어 조경기사 자격증 취득에도 도전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홍현섭 씨는 자신처럼 귀농·귀촌을 하고 싶은 50·60대에게 조경기능사 자격증 취득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귀농·귀촌해서 전원주택 짓고 살고 싶은 분들이 많을 거예요. 저는 모든 것의 마무리는 조경이라고 생각해요. 잔디와 나무를 잘 가꿔놓으면 집이 더욱 멋있어 보이죠. 그래서 저는 귀농·귀촌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조경기능사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더라도 자격증을 따놓으면 쓰일 곳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