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툭 던져놔도 잘 살 사람의 괴롭고도 유쾌한 귀촌

기사입력 2025-01-17 08:46 기사수정 2025-01-17 08:46

[박원식이 만난 귀촌 사람들] 충북 음성군 소이면에 사는 권정아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올해로 시골살이 15년 차. 권정아(55, ‘지구네 밤농원’ 운영)의 농사 이력이 길다. 전공인 밤농사에 관한 한 답답하거나 헤맬 게 없을 정도로 노련하다. 오랜 세월을 자식 기르듯 지극정성으로 밤농사에 매달려 살았으니 어련하랴. 그러나 알다가도 모를 게 농사다. 좋은 작황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초라한 결산표가 돌아오는 식의 시행착오가 드물지 않았다. 특히 귀농 초기에 이모저모 쓴맛을 본 대목이 많았다. 농사를 버리고 도시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단다. 하지만 권정아는 물렁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파도가 세차면 세찬 대로 대차게 견딘다. 여하튼 한 뼘이라도 더 앞으로 배를 끌고 나아간다. 권정아의 돛을 밀어주는 힘은 아마도 남다른 패기에 있는 것 같다. 그의 얘긴 이렇다.

“난 어디에 툭 던져놓아도 너끈히 살아갈 수 있다. 원래 기질이 그렇다.”

권정아는 인천에서 살다 충북 음성군 소이면 농촌으로 내려왔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도시를 벗어나 농사꾼으로 살기를 원한 남편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여 함께 귀농했다. 이곳은 남편의 고향이다. 남편의 전직은 지구과학 교사로 서울과 인천에서 다년간 학원을 경영했다. 학원 운영은 순조로웠다고 한다. 덕분에 뭐 하나 남부러울 게 없이 안락하게 살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은 삶을 바랄 필요조차 없는 호시절이 이어졌던 거다. 마냥 그렇게 만족스레 지속될 걸로 믿었던 도시의 삶이 졸지에 시골로 옮겨질 줄 권정아는 미처 몰랐다. 농사에 관심도 취향도 없었던 그는 남편의 귀향 제안에 놀라 까무러칠 지경의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간단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머리를 싸매고 끙끙 고민하는 대신 남편의 뜻을 존중하는 게 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무턱대고 남편을 따라 시골에 들어온 셈이다. 아직 아이도 어리고, 농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로선 농사짓자는 얘기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하지만 남편의 간절한 눈빛과 뜻을 외면할 순 없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억지 수업을 날마다 반복하는 생활에 지친 그에게 귀향이 하나의 활로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은 주저 없이 즉시 받아들이는 게 좋다는 평소의 소신대로 남편의 의사를 바로 수용했다.”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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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해보는 시골살이의 첫 장면은 어떤 모습이었나?

“남편의 고향인 덕분에 친척들의 조언과 조력을 받아 물정을 익혀나갈 수 있었다. 모든 게 낯선 시골이지만 다행히 기댈 만한 언덕은 있었던 셈이다. 집은 나중에 짓기로 하고 우선 친척이 살았던 빈집에 들어가 살림을 시작했다. 낡고 비좁은 공간이라 불편한 점이 많았다. 가령 사랑채에 대충 쟁여놓은 이삿짐을 쥐들이 수시로 방문해 꼼꼼히 물어뜯곤 했다.(웃음) 무엇보다 난감한 건 저녁이 되자마자 마을을 뒤덮는 깜깜한 밤이었다. 도시에서 화려한 불빛만 보고 살았던 나로서는 좀체 적응이 되지 않더라. 어둠이 무서워서라기보다 막막한 외로움 같은 게 밀려들어 싫었다.”


시골에 귀농인이 등장하면 원주민들의 시선이 쏠리기 마련이다. 마치 무대에 오른 배우를 주시하듯이. 이 역시 도시와 다른 불편한 풍속일 수 있다. 이웃과 교제하는 데엔 어려움이 없었나?

“주민들이 궁금증 이상의 관심을 가진 걸 알고 처음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한동안 아예 문을 닫아걸고 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좋은 교류를 하게 됐지만 말이다. 그런데 도시나 시골이나 유별난 이들은 있기 마련이다. 일종의 텃세에 고충도 겪었다는 얘기다.”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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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나? 원주민에게 일단 수굿한 태도를 취하는 게 현명하단 얘기가 있는데.

“나에겐 매사 나긋나긋하게 바라볼 줄 아는 너그러움은 부족하다. 말도 안 되는 횡포나 무례를 만나면 가만히 삭이질 못한다. 꽤나 불같은 데가 있어 따질 건 따지고, 할 말은 하고 사는 편이다.(웃음) 한번은 마을의 대표 노릇을 하는 이와 갈등을 겪는 일이 발생했다. 그의 처신은 여러모로 부당했다. 결국 격하게 싸운 뒤 깨끗하게 외면하는 쪽으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웃들에게 좋지 않은 평을 듣고 사는 이였다. 무조건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귀농을 하고 싶어도 텃세가 두려워 망설이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귀농 초기에 나에게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텃세였다. 친척들이 방패막이가 돼주었지만 원만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텃세 때문에 시골 생활을 망설일 것까지는 없다고 본다. 그건 부분적인 일에 불과하며,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은 어디나 불화가 있기 마련이다. 문제에 직면할 경우엔 공정하고 당당하게 해결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내가 경험한 시골은 아직 인심이 살아 있는 곳이다. 순박한 정을 느끼게 한다.”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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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진한 수익성을 개선한 비결

이제 밤농사 얘길 들어볼까. 비록 사전에 귀농교육을 받아둔 게 없어 농사에 어두웠지만 많고 많은 작물 중 밤농사를 택한 연유만큼은 뚜렷하다. 마을에 사는 친척들이 밤농사를 짓고 있어 자연스럽게 입문했으니까.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밤농사의 기술과 요령을 배우면 안착이 쉬울 거라 판단했다. 당시 밤 가격도 좋은 수준으로 형성돼 호감을 갖기도 했단다.

“뒷산 높은 지대에 있는 밤나무밭을 사들여 농사를 시작했다. 도움받을 수 있는 친척들 있지, 성실하고 유능한 남편 있지, 열심히 일하면 조기에 기반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전망했다. 그러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친척들이 하는 방법을 따라 하고,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작목반에도 들어갔지만, 초기 여러 해 동안 매출이 매우 부진했다. 농사가 굉장한 숙련을 요구하는 직업이라는 걸 실감한 날들이었다. ‘뭐 그냥 농사나 한번 지어볼까?’ 이런 식의 안일한 자세로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게 농사라는 걸 절감한 수련기였다.”


귀농인들은 흔히 초기에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마치 통과의례처럼. 문제는 부진한 상황에서 빠져나올 정신적 체력마저 저하될 수 있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당신의 경우는 어땠나?

“매우 고달팠다. 육체와 정신이 함께 지치고, 농사를 아예 접고 싶었다. 남모를 눈물을 흘리게 되고, 부부 싸움조차 흔해지고, 한마디로 우왕좌왕이 잦았다. 무엇보다 소득이 나오지 않아 힘들었다.”


어떤 방법으로 상황을 개선했나?

“그간의 문제점을 점검해 새로 농사의 맥락을 잡아나가기로 했다. 농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걸 알고 농업교육장을 드나들며 미친 듯이 열심히 배웠다. 농업의 관건은 효율적인 판로 확보에 달렸다는 데 착안, 블로그 마케팅에도 나섰다. 블로그에 문외한이었지만 조카를 통해 방법을 습득했다. 일기를 쓰듯 소상한 일상을 담은 글과 사진을 올려 블로그 이웃들과 소통했다. 글을 제대로 쓰기 위해 틈틈이 독서도 했다. 블로그가 주는 재미와 보람이 실로 크더라. 밤 판매 루트로도 한몫 해주고 있다. 블로그 방문객들이 단골 고객으로 발전하는 일이 흔해졌으니까.”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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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마케팅에 힘입어 부진한 상황을 개선한 셈인가?

“그렇다. 밤 농가들은 보통 산림조합에 생산물을 출하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물량을 블로그를 중심으로 한 직거래망을 통해 판매한다. 그게 수익성 면에서 한결 유리하다. 결국 블로그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의 밤이 지닌 뛰어난 능력이 하나 있다.”


그게 뭔가?

“밤은 저장성이 떨어져 가을철 햇과 보관을 잘하지 못할 경우 바로 벌레가 생기거나 곰팡이가 슨다. 맛의 수준도 낮은 게 햇과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을 저온 창고에서 한두 달 익혀 만든 숙성 밤을 판매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러자 매출이 늘고,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이 돌아왔다. 밤의 주성분은 전분이다. 숙성 과정을 거치면 엿당이 발생, 햇과에 비할 수 없이 훨씬 달콤한 맛을 낸다. 이 특유의 매력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됐다. 결국 블로그를 통한 홍보와 숙성 밤의 효과, 이 둘에 의해 수익성 개선이 가능했다.”


(주민욱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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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놔둬도 도마뱀과 잘 놀 사람

물심양면의 불황으로 오랫동안 고생했지만 권정아는 이를 극복했다. 그의 농원에서 나오는 밤을 최상품 밤으로 치는 이들이 많다는 얘기로 보자면 이미 성공한 귀농인 반열에 올라선 셈이다. 모든 농사가 그렇듯 밤농사 역시 어려운 대목이 많다. 허리 휘어질 노역은 물론, 지독한 근성과 나름대로 참신한 기법을 동원하지 않고선 트랙에서 밀려날 수 있다. 반면 민첩한 머리와 성실성으로 난항을 반전시킬 여지 역시 많은 게 농사다. 얼마든지 질주가 가능한 것이다. 권정아의 경우는 그 본보기에 속한다.

“작물을 기르는 건 자식을 키우는 것과 같다. 자식같이 여기려 해서 그런 게 아니고 자연스레 애지중지하게 된다. 하지만 밤농사가 즐겁진 않다. 할 일이 너무도 많거니와 작업 하나하나마다 만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부부만의 노동력으로는 수확기의 작업량을 감당할 수 없어 인력을 40여 명씩 부르기도 하는데, 인력 조달과 관리에 진을 빼야 한다. 똘똘하게 굴지 않으면 즉시 문제가 발생하기에, 내가 다혈질 기질을 발휘해 분발한다.(웃음) 뱀이나 벌에게 당할 수도 있다. 한번은 벌한테 22방이나 물려 아주 괴로웠다. 뭐 봉침 한번 잘 맞았네! 그리 웃어넘겼지만 말이다. ‘당신은 사막에 혼자 놔둬도 도마뱀과 놀며 잘 지낼 사람이다.’ 시쳇말로 눈탱이가 밤탱이 된 나를 두고 남편이 던진 말이 그랬다.”(웃음)


시골의 즐거움엔 어떤 게 있나?

“텃밭에서 기른 푸성귀로 유쾌한 식사를 할 수 있어 즐겁다. 사계의 순환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자연을 바라볼 때면 마음에 여유가 생겨 좋다. 그런데 늘 농사일이 밀려 바쁘다. 벚꽃이 피는 호수를 찾아갔다가도 10분 만에 돌아오고 만다.”


만약 사나흘쯤 완전한 자유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슨 일을 하고 싶나?

“음, 그냥 집에서 푹 쉬며 밀린 잠을 보충하겠다. 이건 너무 따분한 생각일까?(웃음) 그런데 오해는 마라. 일의 노예로 사는 건 아니니까. 사실 시골에 와서 얻을 건 이미 다 얻었다. 아이는 믿음직한 인격체로 성장했다. 천성적으로 착하고 성실한 남편은 여전히 따뜻한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이쯤이면 된 거 아닐까.”

단란한 가정의 지속에 권정아는 행복한 것이다. 이보다 나은 삶이 흔하랴. 그의 낯에 가득한 밝은 기운에 겨울 한기가 녹는다.


권정아가 주는 귀농 Tip

•귀농을 계획하는 이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귀농하지 마! 도시에서 그냥 살아!” 이건 정말 귀농을 만류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신중한 고려와 꼼꼼한 준비부터 먼저 하지 않으면 고생길로 접어드는 꼴이라 던지는 역설이다.

•책상 앞에 앉아 책이나 유튜브를 보고 정보를 수집하는 정도로는 부족한 게 귀농 공부다. 농촌 현장의 농가를 찾아가 미리 견학을 해두는 게 유리하다. 요즘 지자체마다 운영하는 ‘시골에서 미리 살아보기’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농장 알바를 하며 농사 물정을 익히는 진취적인 방법도 좋다. 이를 통해 자신이 농사에 관한 적성과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귀농 교육기관에서 들을 수 있는 강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마라. 이론에 밝지만 현장 경험을 결여한 강사도 드물지 않다. 귀농 컨설팅을 받을 경우엔 업체를 신중하게 선정하자. 돈 벌 목적 하나로 허구적인 컨설팅을 해주는 업체도 있다는 걸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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