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나이가 곧 경험이고 지혜여서 ‘나이 든 사람’이 ‘어른’이었다. 5060세대가 ‘동네 어른’을 추억하는 이유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2024년 우리가 생각하는 어른의 기준은 무엇일까? 어떨 때 어른이 되었다 느낄까? 좋은 어른은 어떤 어른일까? 세 명의 전문가와 함께 이 시대의 어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대담 참여자 강용수 작가·백종화 리더십 코치·최영희 메타연구소 소장 진행 이연지·문혜진 기자
◇강용수 작가(56세,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교수)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한다. 최근 낸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백종화 리더십 코치(45세, 그로플 대표)
18년 직장생활 후 회사 그로플을 설립, 리더십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대기업 CEO·임원·팀장 등의 리더십 코칭을 한다.
◇최영희 메타연구소 소장(67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건강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돕는 전문가다. 약물 치료를 선호하지 않아 인지행동·스키마·마음챙김 치료 등을 하고 있다.
진행자 본지에서 진행한 ‘세대 간 존경-존중에 대한 인식조사’(2024)에 따르면 ‘어른 하면 떠오르는 단어’로 ‘책임감 있는’이 꼽혔어요. 2014년 조사에서는 ‘윤리’가 중요한 키워드였는데, 2024년에는 ‘책임감’이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른 이유가 뭘까요?
강용수 책임이라는 말이 조금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니체는 타인을 책임져야 한다는 걸 기대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도 해요. 그렇기 때문에 주권적 개인이라는 말을 하는데요. 어떤 공동체를 아우르는 책임이라기보다,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죠.
백종화 사람마다 책임감에 대한 정의가 다를 것 같아요. 저는 신뢰와 실력 두 가지를 갖춘 사람을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보는데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에 집중하고, 점점 어려운 일을 맡게 될 때 잘해내기 위해 전문성을 끊임없이 확보하는 게 책임감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영희 그러니까 책임이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을 때 결과를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과거 결핍의 시대를 살았던 세대가 부모가 되어 내 자식에게 결핍을 물려주려 하지 않다 보니, 젊은 친구들은 의사결정할 일이 별로 없어요.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부모가 깨워주고 옷 입혀주고 밥 먹여서 정해준 학원에 보내고, 집에 오면 이 닦고 잠자리에 드는 식이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언젠가 스스로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좋든 싫든 올 텐데, 해본 적이 없다 보니 굉장히 불안해하죠. 책임져야 한다는 건 알지만, 어렵고 두려울 수밖에요.
백종화 조직에서도 의사결정 경험이 중요해요. 리더들이 결정해왔기 때문에 결정하지 않은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데에 구성원들은 의문을 가지고, 반대로 리더는 구성원 자신의 일인데 왜 책임지지 않느냐며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거든요.
진행자 일상에서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책임지는 경험을 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의미네요. 그래서인지 설문조사에서도 나 자신을 책임질 수 있을 때,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책임질 수 있을 때 어른이 되었다고 보는 듯한 결과가 나왔어요.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는/느낄 것 같은 순간’을 물었을 때 2030은 ‘경제적으로 자립했을 때’를, 5060은 ‘일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때’를 꼽았거든요.
최영희 나 혼자도 벅찬데 누구를 돌보겠어요. 하버드대학교에서 사회적 관계를 70년 넘게 연구한 것이 있는데요.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가 좋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관계는 어떤 사람이 고통받는다면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고,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나누는 관계를 의미하는데요. 개인주의와는 반대라고 볼 수 있죠. 시대에 따라 우리가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의 기본적인 기준, 뭐랄까 도덕의 의미가 변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백종화 우리라는 개념이 희미해진 것도 있어요. 5060세대는 ‘우리’가 익숙해서 ‘우리 안에서 내가 이 정도는 해야 돼’라는 생각이 있거든요. 그런데 2030세대는 우리 가족, 우리 회사가 아니라 나의 가족, 나의 회사라는 개념이라 충돌이 생기는 것 같아요.
진행자 요즘에는 많은 분들이 책·강연·영상 등으로 정보만 얻는 것이 아니라 고민에 대한 답도 찾고 위로도 받는 것 같아요. 비대면으로 어른을 찾는 셈이랄까요?
강용수 사실 제 나이쯤 되면 주변에서 어른을 찾는 것도, 어른이 되는 것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듣는 사람이 상대를 존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어른이라면 쓴소리도 좀 해야 하죠. 다만 남을 가르치려 하고 “내가 겪어봤는데 말이야”라며 나서는 게 아니라, 타인이 어른으로서 인정해야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종화 요즘 세대는 유튜브로 모든 걸 배우잖아요. 어른한테 고민을 공유할 필요가 없어져버린 거예요. 지식과 경험이 온라인에 다 있으니까요. 세대 이슈가 아니라 이제는 시대 이슈라고 봐야 해요. 모두가 똑똑해진 시대라 오히려 젊은 꼰대가 훨씬 많아요. “내가 아는 게 많으니까 내가 맞는데 왜 엉뚱한 소리 하세요?”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아는 것과 행동하는 건 다른 건데 말이죠. 그런데 SNS에서 보는 것들은 다 결과거든요. 성공한 모습만 보는 거잖아요.
최영희 옛날에는 사회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우리가 어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자세히 보면 뭐 단점도 있고 그래요. 요즘은 인터넷으로 개인의 사생활이 실시간으로 비치잖아요. 그러니 소위 신화적인 존재가 나오기 어렵죠. 이걸 다시 말한다면, 그렇게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겠느냐는 거예요. 어른을 정의할 때 아주 완벽한 기준을 들이대는 접근 방법은 옳지 않은 것 같아요.
강용수 공감합니다. 완벽한 어른은 없어요. 고통과 실패를 보여주는 게 어른인 것 같아요. 무언가를 성취하려는데 잘 안 되잖아요? 그런 경험이 오히려 성숙해지는 기회 같거든요. 쇼펜하우어 역시 40대에 많은 실패를 경험했는데요. 외부에서 깨져보면서 남들의 시선과 평가를 벗어나 온전한 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패를 거쳐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과정을 보는 게 중요한데, 요즘은 결과로만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최영희 멀리서 대단한 노력을 하는 사람을 찾아내 따르려고 할 게 아니라, 매일 만나서 부딪히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찾는 게 좋죠. 모방할 수 있는 모델이 가까이 있으면 학습이 쉬워요. 누군가를 흉내 내겠다는 게 내가 변화하겠다는 강력한 동기가 되거든요. 거창하진 않아도 나름의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 인간다움이 있는 사람을 어른으로 삼아야 하는 거죠. 삶은 고통이잖아요. 예상치 못한 좌절들이 올 때 넘어졌다가도 잘 일어나는 것, 즉 회복 탄력성이 좋을수록 건강한 어른이라고 봅니다.
진행자 결과 중심적인 사회이다 보니 주변에 있는 어른들을 미처 보지 못하는 것 같네요. 그럼에도 세대를 불문하고 우리는 어른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설문조사에서도 ‘가까이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83.8%가 그렇다고 했거든요.
백종화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다만 과정이 중요해요. 어려움도, 고난도, 극복하는 것도 볼 수 있거든요. 어른이라면 그런 걸 보여주는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의 과정을 도와주는 사람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어른은 나이와 상관없이 그에게 배울 점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해요. 좋은 어른, 나쁜 어른이 아니라 나와 맞는 어른을 찾아야 하는 거죠.
최영희 그리스 신전에도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이 적혀 있다고 해요. 세대 차이는 계속됐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거예요. 요즘에는 20대도 10대를 이해 못 해요. 그러니 내가 옳고 내가 항상 중심이라는 생각을 깨야 합니다. 그냥 다른 거거든요.
백종화 맞아요. 나와 상대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려면 먼저 나를 이해해야 해요. 그래서 나다움이 먼저인 거죠. 리더십의 핵심 역시 ‘자기 인식’(Self Awareness)입니다.
강용수 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차이를 알고 인정하는 과정인데요.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개성이라고 봅니다. 부·명예와 같은 외부의 나다움이 있고, 건강·성격 같은 내부의 나다움이 있다고 하는데요. 자기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인식하는 게 필요하죠. 그걸 알아가는 노력이 어른이 되는 과정 아닐까 싶습니다.
진행자 어른이 되는 건 결국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거네요. 다음으로는 나와 상대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거고요. 그렇다면 어른이 되는 걸 훈련할 수 있을까요?
백종화 조직에서의 어른을 리더라고 본다면 리더는 태어나는 걸까요, 만들어지는 걸까요? 과거에는 태어났습니다. 영향력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교육을 받아 리더로 성장하는 거라, 그 말이 맞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부모, 팀장, 매니저, 선배 어떤 역할이든 리더에 포함됩니다. 태어난 대로 사는 게 아니라 훈련으로 더 다양한 영향력을 키울 필요가 있죠.
강용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면 남과의 차이도 알게 되죠.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은 의식하든 하지 않든 우주에서 가장 개성이 도드라진 존재라고 해요. 내가 개성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의욕의 차원으로 넘어가면 나와 타인은 다르다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그가 고독을 통해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죠. 쇼펜하우어는 시행착오와 실패를 통한 경험과 학습으로 새롭게 획득되는 성격이 있다고 봐요. 물론 유전적인 성격은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기에, 새로운 성격은 아주 어렵게 얻어진다고 합니다.(웃음)그래서 글쓰기, 책읽기 등을 좋은 습관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죠.
최영희 프로이트는 우리 인간의 모든 선택이나 행동의 결정이 무의식 안에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 무의식의 영역을 찾아내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죠. 그런데 깨달았다고 쉽게 변하지는 않아요.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또 다릅니다. 매일 다니는 산책길을 생각해볼까요. 기존에 있는 길을 걸어요. 그런데 지름길을 내려면 풀숲을 헤치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하죠.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요즘 효율적인 방법이 많이 개발되어 있으니 얼마든지 훈련할 수 있습니다.
백종화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는 건 결국 행동이거든요. 행동의 시작은 성격이라고 봅니다.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기질과 후천적으로 받은 영향으로 생긴 성격인데요. 이 과정에서 반복되는 행동이 있고, 그것에 익숙해져요. 이를테면 평생 오른손으로 젓가락질하는 것과 같아요. 왼손으로 젓가락질하려면 어색하죠. 그런데 평생 하던 행동과 반대되는 어색한 행동을 훈련할 때부터 영향력이 달라집니다.
최영희 정신과 진단에 ‘성격장애’라는 게 있어요. 20여 년 전에는 치료가 안 된다고 했어요. 오늘날 보면 말이 안 되는 거죠. 지금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많습니다. 스키마 치료도 그런 맥락인데요. 스키마는 자극과 반응 세트의 총합입니다. 백 코치님이 말한 익숙한 행동이라는 게 스키마 이론으로 보면 자극이 왔을 때 내가 하는 반응이 자동화된 거예요. 그대로 살아도 되는데, 그게 자신에게 고통을 주거나 타인과의 관계에 문제를 일으킨다면 나를 위해서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명상 등으로 내 안에 있는 걸 끌어내는 훈련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사랑하는 능력을 훈련할 수 있어요. 내 성격은 나 외엔 절대 바꿀 수 없습니다.
백종화 어른이 된다는 것에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정답을 고민하는 사이에 시대도 상황도 바뀔 거예요. 결국 기존에 하던 익숙한 행동을 그대로 하게 됩니다. 이전과 다른 행동을 해야 변화가 있잖아요. 어색하고 불편하고 실패하겠지만, 그조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훈련하다 보면 어른이 되어가지 않을까요?
가치 있는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모습. 허송세월의 정의다. 새해를 허송세월로 지내고 싶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보다는 매 순간 의미 있는 일들로 꽉 찬 한 해를 바랄 테다. 윤정구(64) 이화여자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는 이를 위해선 체험하는 시간의 개념인 ‘카이로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카이로스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기회의 신’으로도 불린다. 인생의 기회는 경험의 시간을 사는 가운데 맞이하는 선물과도 같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일정한 속도와 방향을 갖고 기계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크로노스(Kronos)라 한다. 윤정구 교수가 언급한 카이로스(Kairos)는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특별한 시간이다. 가령 똑같은 10년이라도 허송세월로 보내는 이에게는 마치 100년처럼 길게 느껴지겠지만, 다채로운 경험을 통해 바삐 사는 이에게는 1년처럼 짧게 여겨질 수 있다. 절대적인 시간(크로노스)은 10년이더라도, 상대적 시간(카이로스)이 저마다 다른 것이다. 즉 크로노스는 양적인 시간,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인사조직 전략, 조직경영 개발 등을 연구해온 윤 교수는 이런 차원에서 접근할 때, 현재 노동 현장에서 적용하는 시간의 개념도 달라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세상이 바뀌는데, 여전히 시간 개념은 산업화 시대 생산 노동자에게 적용했던 방식에 머물러 있어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를 벗어나지 못한 거죠. 아직은 주 5일 근무가 일반적인데요. 가령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활용해 회사에 약속한 일을 끝내는 데 4일이 걸렸다고 쳐요. 주 5일이라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채우지 않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으로는 목표를 달성한 거잖아요. 그런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혁신은 일어날 수 없어요. 시간으로 산정한 임금이 책정되는데, 근로자가 애써 생산성을 늘리는 혁신을 감행할 이유가 있나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재택근무 등 일터에서의 논쟁 대부분이 본질을 벗어났다는 걸 알 수 있죠.”
기술의 민주화 시대, 나이의 한계를 뛰어넘다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현재, 일자리 이슈 중 하나는 ‘정년 연장’이다. 윤 교수는 카이로스의 개념에서 볼 때 은퇴 기준점을 ‘나이’로 책정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라 지적했다.
“양적인 시간으로 책정된 나이만 고려한 거예요. 개인의 경험이나 노력 등 질적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카이로스 개념에서의 나이는 다를 수 있죠. 결국 회사가 고객에게 약속한 가치를 자신의 인적 자원을 통해 누가 더 많이 창출하느냐가 관건이잖아요. 한때는 젊은 직원들이 기술을 습득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나 인정받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생성형 AI나 로봇 등이 보편적으로 보급되면서 누구나 기술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죠. 코딩, 알고리즘 등에 대한 지식이나 전문 자격증이 없어도 챗GPT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처럼요. 이러한 기술의 민주화, 전문성의 민주화로 나이와 같은 태생적 요인이 인적 자본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줄었어요.”
최근 인공지능의 발달로 수많은 직업이 사라지거나 대체되리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고령자 일자리가 더욱 위협을 받으리라는 예측도 있었다. 그러나 윤 교수는 이러한 시대 변화가 고령자에겐 기회라고 역설했다. 카이로스의 또 다른 이름(기회)처럼 말이다.
“그동안 기술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수단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왔다면, 이제는 조직의 공유된 목적을 위해 기술과 인간이 협업하는 관계로 설정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이와 무관하게 생산 프로세스를 최적화하는 대안적 방법들이 마련될 수 있죠. 이때의 기술은 고령자에게 오히려 득이 됩니다. 고령 인력이 지닌 체력이나 모빌리티(기동성·유동성)의 한계를 상당 부분 해결해주니까요. 즉 정년을 따질 것 없이 기술과 잘 협력하면 장기간 안정적인 직장생활도 가능하리라 예상해요.”
대한민국의 미래는 고령 인력에 달렸다
지난해 말 한국고용정보원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 부양비(20~64세 100명당 65세 이상 인구)는 날로 증가하며, 2075년에는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한편 고령 경제활동 참가율은 OECD 주요국을 웃도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급증하는 노인 부양비를 감당하긴 쉽지 않아 보인다. 이렇듯 우리 사회의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대해 윤 교수는 고령 인력 활용이 단초 역할을 해낼 수 있으리라 진단했다.
“당장 저출산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그 아이들이 경제활동 인구로 성장하려면 20년을 기다려야 해요.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이 고령자 중 아직 활용되지 않은 인력을 동원하는 겁니다. 최근 매킨지 보고서를 보면 정년퇴임을 했는데 일을 안 하거나, 정년퇴임을 준비하는 이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하면 GDP가 얼마나 올라갈지를 예측했어요. 그 결과 우리나라의 경우 GDP의 14.7%가 성장한다고 나와요. 비교된 20여 개 국가 중 1위를 차지했을 만큼(일본 8.6%, 미국 7.2%, 영국 4.8% 등) 월등히 높은 수치죠. 우리가 매년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경제성장률이 2% 미만이잖아요. 고령 인력의 활용이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얘기예요. 그렇게 당분간 대한민국의 미래는 고령 인력에서 찾아야 합니다.”
고령 인력은 조직원으로 일하기도 하지만 리더의 위치에 놓인 이가 상당수다. 저서 ‘진성 리더십’을 펴내고 대한리더십학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리더십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온 윤 교수는 중장년·고령 리더들이 거버넌스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 세계적으로 거버넌스가 역피라미드 구조로 바뀌고 있어요. 가령 글로벌 기업 리더들은 조직원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요. 회사는 일종의 플랫폼이고, 리더는 그런 플랫폼을 디자인하는 사람이고, 이것들을 이용해서 네가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 증명해보라는 식이죠. 즉 회사보다는 개인의 성장을 위한다는 취지인데, 이렇게 말해도 직원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토로하는 분들도 있어요. 솔직히 말해 그건 진정성이 없어서일 가능성이 큽니다. 속으로는 회사의 성장과 이익을 우선하면서 겉으로만 그 직원을 위하는 것처럼 포장했기 때문이죠. 말뿐인 독려라는 걸 직원들도 느낄 텐데,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 수밖에요.”
리더 입장에서 진정성을 갖기 힘든 건 직원에 대한 신뢰가 영글지 않은 탓도 있겠다. 신뢰라는 건 상호의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윤 교수는 서로 간의 ‘신뢰 자본’을 만드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A라는 사람이 내게 100만 원을 빌려달라 했을 때 그 돈을 못 받을 걸 전제로 손해를 감수하고 빌려준다면, 신뢰 자본 100만 원이 생긴 셈이에요. 반대로 A도 나에게 그렇게 해준다면 둘 사이의 신뢰 자본은 200만 원이 되죠. 그렇게 신뢰라는 건 서로가 상처받을 개연성에 대해 인정하는 거예요. 그러니 손해를 전혀 안 보겠다고 생각하는 관계에서는 신뢰가 생길 방법이 없어요. 그런 신뢰의 결여 때문에 요즘 젊은 조직원 중에는 공정성 같은 덕목을 따지는 이들이 많은 편입니다. 서로가 손익 계산기를 두드리는 거죠. 결국 그런 상황에서는 건강한 조직을 기대하기 어려워요. 이럴 때 리더가 할 수 있는 일은 긍휼감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긍휼감은 공감이나 연민을 넘어서는 행동 지향의 도덕적 정서인데요. 긍휼감을 가진 리더는 조직원의 고통도 자신의 것으로 내재화해 함께 풀어가려 하죠. 이런 태도를 보였을 때 조직원들도 리더에게 진정성과 신뢰를 느낄 수 있다고 봐요.”
우리 사회 빙산의 밑동을 복원하는 시간
현실적으로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 앞에 윤 교수의 정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건강한 조직과 리더십, 지속 가능한 기업에 대한 연구를 이어갈 예정이다. 그는 특히 기업의 근간이 되는 조직원들의 고통을 눈여겨보고자 한다.
“조직에서 직면한 거의 모든 문제는,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해결하지 않고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결과예요. 돌봄을 받지 못한 고통이 문제로 터져 나왔을 때, 많은 리더가 원인인 ‘고통’을 해결하지 않고 밖으로 드러난 ‘결과’만 봉합하려 하죠. 일단 그렇게 문제를 덮고 시작하기 때문에 근원적 해결이 불가능하고, 반복되는 거예요. 조직과 경영을 연구한 학자로서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그는 빙산의 형상에 비유해 설명을 이어갔다. 기업의 경우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 즉 핵심 사업이나 수익을 키우는 데 주목한다. 그러나 이러한 빙산의 윗동이 잘 성장하려면 이를 잘 지탱하는 수면 아래 밑동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 밑동에 비유할 수 있는 게 바로 조직원이다.
“눈에 보이는 비즈니스 모델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밑동을 이루는 조직원들의 고충이나 아픔에 대해 인정하고 치유하는 노력이 필요해요. 이러한 현상은 기업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정치•종교 등 우리 사회 전 분야에서 이런 밑동을 간과한다고 생각해요. 정년퇴임 후에는 잃어버린 밑동을 어떻게 복원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하며 카이로스의 시간을 채워가려 합니다.”
●Exhibition
◇제10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일정 11월 7일까지 장소 광주비엔날레전시관
광주광역시가 주최하고 광주디자인진흥원이 주관하는 ‘제10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가 11월 7일까지 광주 시내 일원에서 열린다. 2005년 창설된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이하 디자인비엔날레)는 세계 40여 개국이 참여하는 등 세계적인 종합 디자인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디자인비엔날레는 나건 홍익대 교수가 총감독을 맡았으며, ‘Meet Design’(디자인을 만나다)을 주제로 한다. 국내외 작품 2718점을 전시, 역대 최대 작품 수를 기록했다.
광주비엔날레전시관에서 진행되는 본전시는 4개(테크놀로지·라이프스타일·컬처·비즈니스) 주제로 구성됐다. 1관 ‘테크놀로지’에서는 AI, IoT 가전 등 4차 산업 기술과 접목된 새로운 미래 디자인을 소개한다. 2관 ‘라이프스타일’에는 인간이 살아가는 생활 방식을 디자인으로 표현한 작품이 전시됐다. 3관 'K-컬처'에서는 K-조형, K-팝, K-뷰티, K-웹툰 등 다양한 주제와 관점의 디자인을 만날 수 있다. 4관 ‘비즈니스’는 디자인이 경제, 산업, 문화 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대전엑스포´93 : 과학 신화가 현실로
일정 11월 5일 장소 서울역사박물관 1층 로비 전시실
대전시와 서울역사박물관이 공동 기획했으며, 대덕특구 50주년 및 대전엑스포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됐다. 전시에서는 당시 엑스포 준비 과정과 시대 배경을 소개한다. 대전엑스포 개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한 국내 첫 즉석식 복권, 행사장에서 직접 관람객과 소통했던 인공지능 이동 로봇 케어-투(CAIR-2)와 그 기술을 발전시킨 인간형 로봇 아미(AMI) 등을 만날 수 있다. 지난 30년간 과학 발전을 이루며 달라진 한국의 위상 또한 확인 가능하다. 김용석 서울역사박물관장은 “대전 시민의 염원을 넘어 전 국민의 열렬한 응원이 담겼던 1993년 대전엑스포의 열기와 추억을 공유하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Stage
◇레미제라블
일정 10월 15일 ~ 11월 19일
장소 부산 드림씨어터
연출 크로스토퍼 키
출연 민우혁, 최재림, 김우형, 카이, 조정은, 린아 등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10주년 기념 공연을 펼친다. 2013년 초연, 2015년 재연을 통해 약 60만 명의 누적 관객을 동원했고, 2013년 ‘제7회 더뮤지컬어워즈’ 5개 부문 수상, ‘제19회 한국뮤지컬대상’ 4개 부문을 수상하며 대중과 평단의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이번 세 번째 시즌은 무려 8년 만의 공연이다. 더욱이 제작사는 “1년여 동안 까다롭고 철저한 오디션을 거쳐 최고의 캐스팅을 완성했다”고 자신해 기대감을 높였다.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레미제라블’은 19세기 비참한 삶을 사는 소시민들이 프랑스혁명을 일으키는 과정을 그린다. 부산 이후 서울, 대구로 무대를 이어간다.
◇마리 퀴리
일정 11월 24일 ~ 2024년 2월 18일
장소 서울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김태형
출연 김소현, 이정화, 유리아가, 강혜인, 효은, 최지혜 등
2020년 초연과 재연을 거친 뮤지컬 ‘마리 퀴리’가 3년 만에 세 번째 시즌으로 돌아온다. 한국뮤지컬어워즈 대상 수상작으로, 최근 일본 라이선스 공연이 호평을 받았다. 10월 부산, 11월 대구(11~12일) 이후 서울에서 공연을 펼친다. 최초로 노벨상을 2회 수상한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의 삶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마리 퀴리는 라듐을 발견해 명성을 얻지만 자신의 연구가 초래한 비극적인 진실을 목도한 후 고민에 빠진다. 마리 퀴리 역에 뮤지컬 배우 김소현이 캐스팅됐다. 오랜만에 무대에 복귀하는 그가 보여줄 연기가 기대를 모은다.
◇카페 쥬에네스
일정 11월 26일까지
장소 대학로 TOM(티오엠) 2관
연출 오인하
출연 차용학, 최정헌, 랑연, 조윤영, 이봉준 등
연극 ‘카페 쥬에네스’는 1920년대 말 일제강점기의 경성을 배경으로 한다. 제목의 ‘쥬에네스’는 프랑스어로 ‘청춘’(Jeunesse)이라는 뜻이다. 극에서는 애국과 매국을 강요받고 혹은 선택하며,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삶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청춘들의 희생과 그 속에 담긴 사랑을 이야기한다.
극본 및 연출은 배우 출신 오인하 작가가 맡았다. 연극 ‘B클래스’, ‘Memory in dream’(메모리 인 드림), ‘그때도 오늘’ 등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주목받은 오인하 작가는 장르작에 처음 도전한다.
●Exhibition
◇삼국의 여인들, 새로운 세계를 열다
일정 10월 29일까지 장소 은평역사한옥박물관
국립한국문학관(이하 한국문학관)이 주최한 전시로, 삼국시대 고전문학에 등장하는 ‘여신’, ‘여왕과 왕후’, ‘신비로운 여인’ 등 여러 유형의 여성상을 살펴보는 기획전이다. 1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다’에서는 단군신화 속 웅녀, 고구려 주몽의 어머니 유화 등 건국 설화 속 어머니의 모습을 만나본다. 2부 ‘운명을 개척하다’에서는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 삼국통일에 기여한 문희 등 삼국시대 여성들의 진취적인 목소리를 들어본다. 3부 ‘낯선 존재와 만나다’에서는 수로 부인, 처용의 아내 등 현실 세계를 넘어 낯선 존재와 조우했던 신비로운 여성들을 통해 고전문학의 상상력을 엿본다. 4부 ‘이야기를 남기다’에서는 한국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역옹패설’ 등 중요한 문학 원본 자료와 향가 및 설화를 모티브로 재해석한 근현대 작품 등을 볼 수 있다. 문정희 한국문학관장은 “고대 사회 여성의 힘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2025년 개관될 한국문학관의 중요한 컬렉션을 엿볼 수 있다”라고 전했다.
◇회화 아닌(Not Paingtings)
일정 10월 9일까지 장소 대구미술관
‘모던 라이프’(2021년), ‘나를 만나는 계절’(2022년)을 잇는 대구미술관의 소장품 기획전이다. 미술과 기술 매체의 만남이 가지고 온 미술 형식의 새로운 변화를 살펴본다. 개관 준비기부터 현재까지 수집한 작품 중 비디오 매체의 특성을 탐색한 미디어아트 초기 작품, 동시대 예술가의 뉴미디어, 사진작품 등 34점을 ‘확장하는 눈’, ‘펼쳐진 시간’, ‘경계 없는 세계’의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조명한다. 최근 현대미술의 동향 또한 소개한다. 이강소, 박현기, 김구림 등의 대구 작가들과 백남준, 김순기, 김해민 등으로 계승돼온 국내 미디어 1세대 작가들의 관계뿐만 아니라 최근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시대 작가들을 두루 만나볼 수 있다.
●Stage
◇벤허
일정 9월 2일 ~ 11월 19일
장소 LG아트센터 서울
연출 왕용범
출연 박은태, 신성록, 규현, 이지훈, 박민성, 서경수, 윤공주, 이정화, 최지혜 등
뮤지컬 ‘벤허’는 루 윌러스가 1880년 발표한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유다 벤허’라는 한 남성의 삶을 통해 고난과 역경, 사랑과 헌신 등 숭고한 휴먼 스토리를 담았다. 역동적인 액션, 홀로그램을 활용한 무대 영상, 전차 경주 장면 등이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번 세 번째 시즌에는 뮤지컬 ‘마타하리’, ‘웃는 남자’ 등 대작을 빚어낸 EMK가 제작에 나서 높은 완성도를 예고한다. 벤허 역에는 박은태, 신성록, 규현이 캐스팅됐으며, 메셀라 역은 이지훈, 박민성, 서경수가 연기한다. 에스더 역은 윤공주, 이정화, 최지혜 등이 함께한다.
◇삼총사
일정 9월 15일 ~ 11월 19일
장소 한전아트센터
연출 신성우·강봉훈
출연 박장현, 후이, 렌, 유태양, 민규, 이건명, 최대철, 김형균 등
뮤지컬 ‘삼총사’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2004년 체코에서 처음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17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왕실 총사가 되기를 꿈꾸는 청년 달타냥과 전설적인 총사 아토스, 포르토스, 아라미스가 루이 13세를 둘러싼 음모를 밝혀내는 과정을 담았다. 국내에서는 2009년 초연 이후 꾸준히 공연되며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번에는 9번째 시즌으로 초연부터 배우로 참여해온 신성우와 강봉훈 연출이 공동 연출을 맡는다. 달타냥 역에는 박장현, 후이(펜타곤), 렌, 유태양(SF9), 민규(DKZ)가 캐스팅됐다.
◇렛미플라이
일정 9월 26일 ~ 12월 10일
장소 예스24 스테이지 1관
연출 이대웅
출연 박보검, 안지환, 신재범, 김태한, 김도빈, 이형훈, 윤공주, 최수진, 방진의 등
‘제7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3개 부문을 석권하며 2022년 최고의 창작 뮤지컬로 꼽힌 ‘렛미플라이’가 돌아온다. 1969년 보름달이 밝게 빛나던 어느 날 밤, 라디오 주파수의 영향으로 70살 할아버지가 된 남원이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미래 탐사 작업에 돌입하며 벌어지는 좌충우돌 일상을 그린다. 무엇보다 이번 시즌은 배우 박보검이 청년 남원 역할에 합류해 기대를 모은다. 데뷔 후 12년 만에 뮤지컬에 첫 도전한 그는 연기 스펙트럼을 한 단계 넓힐 예정이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명사들은 어떻게 우리 사회를 움직이며 우리 의식 세계를 지배하는가? 그들이 말하는 명성의 본질과 가치는 무엇이며, 우리는 명성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김정섭 성신여자대학교 문화산업예술학과 교수는 지난 3년간 인간의 ‘명성’(名聲)과 각계의 ‘명사’(名士)를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이 주제를 깊이 연구했다. 그는 관련 이론·데이터 분석, 수양·실천 컨설팅 전략의 발굴 제시는 물론, 각계 명사들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함으로써 학술적 통찰을 끌어냈다. 본지가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입수해 창간 특집으로 독점 게재한다. 연구 결과물은 ‘셀럽시대’(한울엠플러스)란 책으로 오는 5월 출간될 예정이다.
“사람들은 식당에서 사진을 보고 경탄하며 ‘칠리치즈 프렌치프라이’를 주문해요. 그런데 실제로 나오면 양념이 풍부하고 느끼한 그걸 다 먹어야 하냐는 부담감을 느껴요. 그때 ‘일반 감자튀김’을 시켰다면 더 행복했을 거라고 후회하죠. 인간에게 명성이란 바로 이런 존재예요.”
‘그릿’(Grit, 2016)의 저자이자 심리학자인 앤절라 더크워스(Angela Duckworth)가 2021년 2월 28일 미국 팟캐스트 ‘프리코노믹스 라디오’에 나와서 한 얘기다. ‘명성’은 자아실현 욕구를 지닌 인간의 본능이자 인생의 성공 가도에서 간절하게 그리는 꿈이다. 동시에 앤절라 더크워스의 말처럼 ‘약’과 ‘독’이란 양면성을 지녔다. 명성은 인생 경험과 성과의 소산이자 자신을 웃고 울게 만든 가치이기에 깊은 통찰력과 혜안을 지닌 시니어들에게 더욱 친숙한 어휘다. 명성은 사회적으로 신뢰와 참여를 촉진하고, 정치적으로는 투표율과 지지를 견인하며, 경제적으로는 그 존재량이 희소해 ‘관심경제’는 물론 명성에 대한 선망, 추종, 숭배를 극소수에 집중시키는 ‘슈퍼스타 경제학’을 구성한다. 인터뷰에서 문인·철학자는 대체로 명성을 경계하고, 정치인·경제인·의료인은 능력과 신뢰에 바탕을 둔 적극 활용론을 강조했으며, 예술인·체육인은 조건부 활용론에 방점을 두었다.
명성은 ‘약’과 ‘독’ 양면성 지녀 경계해야
‘풀꽃 시인’ 나태주는 2015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로 꼽은 바 있는 ‘풀꽃(1)’을 썼다. 시구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인데, 그는 이 시에 대한 폭넓은 사랑으로 ‘국민시인’으로 떠올랐다. 나태주 시인은 ‘명성’에 대해 “전적으로 남이 알아주고 평가해주는 고귀한 가치”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명성을 위해 자신의 존엄성을 버리고 아첨하고, 반칙하며, 사술(詐術)을 부리며 아등바등하는 것은 거부했다. 심지어 신춘문예 당선이나 등단에 조급증을 갖거나 빨리 쓰려고 하는 문단 후배들까지 꾸짖었다.
그는 “명성은 유효기간이 매우 짧은 데다 그것에 집착하다 보면 영혼을 망가뜨리기 쉬우므로 존엄과 품위가 가미되어 더 가치가 있는 ‘명예’를 중시한다. 명성은 물로 씻으면 금방 지워져버리는 젊은이의 ‘화장’과 같고, 명예는 경륜 있는 노인들이 갖는 가슴속 숨겨진 ‘흉터’처럼 잘 드러나지도 않고 잘 지워지지 않아 영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철학자 강신주는 철학과 인문학을 인간의 삶에 투영해 저술과 강연을 통해 날이 선 언어로 소통을 확대해왔다. 그는 명성을 절대 추구해서는 안 될 ‘노예의 가치’로 보았다. 그는 “철학과 인문학의 견지에서 명성 추구는 주인인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방법이 아닌, 타인이 원하는 삶을 따라가야 하는 ‘노예의 전략’”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명성을 추구하는 삶은 자기 목소리를 잃고, 자신의 삶도 없고, 허깨비 같은 것을 좇는 것이기에 결국은 꼭두각시의 삶을 사는 것”이라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초래하는 부작용에 초점을 두었다.
정치인 정세균(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국내 헌정사 최초로 여야의 정당 대표, 국회의장, 국무총리를 모두 역임해 ‘대통령만 빼고 다 해본 정치인’으로 통한다. 국회의원(6선), 장관(산업자원부), 원내대표도 지냈다. 그는 “‘명성’은 국민이 어떻게 바라보느냐와 같은 일종의 세평(世評)이지만, 명예는 본인 성과에 대한 자신의 가치판단과 자부심의 척도다. 명성은 반드시 공적으로 좋은 의미를 지닌 일에 열정을 발휘해 얻는 경우에만 가치가 있다”라고 말했다. 국회 ‘한보청문회’(1997년)에서 한보의 로비 자금을 거절한 유일한 국회의원으로 밝혀져 일약 명사로 부상한 이후 지금껏 겪은 성찰을 집약한 것이다. 그는 “국민이 우러러보는 ‘정치인 명사’가 되려면 이해관계를 배제하고 맡은 공직의 무게를 온전히 떠안으며 일하는 ‘책임의식’, 정성과 투명성을 기본으로 국민을 받드는 ‘신뢰성’, 매사 분별력을 발휘하며 신사 숙녀처럼 처신하는 ‘품격’이 몸에 배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김종인, “정직해야 명성 쌓아”
‘카리스마 리더’ 김종인(대한발전전략연구원 이사장)은 내로라하는 경세가다. 5선 국회의원 출신으로 정·관·학의 풍부한 경험 축적은 물론 ‘차르’란 별칭, ‘직업이 비대위원장’이란 비유가 말해주듯 강한 소신과 뚝심으로 진보에서 보수를 망라하는 정당을 모두 이끌었다. 그는 “명성은 국민을 상대로 하는 정치인에게 목숨과 같고, 국민 앞에 서서 정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라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정치인이 명성을 갖고 이를 드높여 성공하려면 기본적으로 일을 잘하고 국민에게 믿음을 주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능력이 없으면 국민에게 피해만 준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치인의 명성 축적과 유지의 기본 요소는 정직성, 일관성, 신뢰성인데, 그중에서도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정직”이라고 강조했다.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정치적 경륜과 지략이 풍부해 ‘정치 9단’으로 불린다. 그는 “정치인은 오늘을 잘해서 내일을 사는 사람이다. 국민의 인정(認定)을 받아야 명성을 얻고, 그 명성을 기반으로 정치력을 발휘하고 정치생명을 이어가기 때문에, 명성은 정치인에게 존재 자체이자 전부”라고 정의했다. 그는 “정치인이 명성을 얻으려면 철두철미하게 지식을 쌓고, 국가 사회와 국민의 관심사를 파악하고, 미래 상황 변화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등의 자기계발을 하고, 하루에 만나는 사람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영향력, 기능, 효과 면에서 가장 효율적인 매개체인 언론을 하늘같이 알고 받들어야 목표를 이룰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나는 신혼여행 이후로는 아내와 여행 한번 같이 못 갔을 정도로 정치 행위 그 자체를 즐기며 사적 자아와 공적 자아를 아예 동일시(同一視)하며 살았다”라고 회고했다.
김세연 전 의원(청년정치학교 운영자, 3선 의원)은 ‘36살의 집권당 최연소 당선’이란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정계에 입문해 개혁보수와 우파혁신을 주창한 ‘청년정치 리더’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명성은 오직 정치인 본인의 의도나 의사와 무관하게 공직에 대한 열정적· 헌신적인 봉사를 통해 그 결과물로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정치인은 외려 명성과 거리를 둘 때 좋은 정치가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치인이 명성을 위해 일하면 공적인 의사결정에 중대한 왜곡이 생기기 때문에 그것을 지향하는 정치를 하면 안 되고, 그런 욕망이나 의도를 가진 사람은 정치를 해서는 절대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한시적으로 위임된 권한과 권력을 사유물인 양 착각한 나머지 여의도 정가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명성 지향’, ‘명예 지향’의 정치를 단호히 배격하고 거부한다”라고 덧붙였다.
“일관된 목표·방향성 갖고 혁신경영”
차석용 LG생활건강 전 대표이사 부회장은 평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어 조직, 제품, 서비스 혁신 분야에서 남다른 역량을 발휘해 2022년 말 은퇴하기 전까지 무려 18년간이나 최고경영자(CEO)를 지냈다. 그는 “기업과 CEO의 명성은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서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소비자들의 명민한 감각과 반응으로 시시각각 정확하게 측정되는, 영예롭고도 두려운 양면적 존재”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그는 “기업과 CEO는 소비자를 ‘진정한 보스’로 모시고 기업의 증진을 위해 분명하고 일관된 목표와 방향성을 갖고 혁신경영에 몰두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그가 CEO로서 LG생활건강에서 강조한 기업과 제품의 명성 증진 전략은 정직, 진정성, 신뢰, 디테일(세심함과 정확함)이었다.
이종천 ‘다나딸기농장’ 대표(충남 논산시 부적면 마구평리)는 독보적인 반전의 귀농 성공신화를 쓴 ‘딸기왕’으로 농업계와 지역사회에서 명성이 높다. 이종천 대표는 “농민의 명성은 자신이 재배한 작물이 말해준다. 저에겐 풋풋하고 탐스러운 저 딸기가 그걸 상징한다. 온갖 정성, 노력, 풍상, 고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농사의 묘미는 자연과 함께 인생을 즐기며 향긋한 결과물을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딸기 특구’이자 딸기 수출 전진기지인 충남 논산의 성공한 농업인이자, 농림축산식품부가 지정·위촉한 농업 후계자를 교육하는 현장의 교수로 활동하며 농촌의 미래를 가꾸는 데 헌신하고 있다. 건설사 임원 출신인 그는 퇴직하고 시작한 통신 서비스 사업의 실패 후 무작정 귀농해 8년간 딸기 농사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현재 비닐하우스 딸기 재배동 7개 동과 딸기 육묘장 2곳, 청년귀농장기교육장과 딸기현장실습교육장을 함께 운영하며 연 7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명성은 존재감 뚜렷한 불편함”
서울 용산의 ‘메이플라워/술술상점 용산’ 정미희 대표는 최근 SNS에서 매우 뜨거운 유명인사다. MZ세대 CEO로서 뛰어난 외적 매력을 바탕으로 최근 10년간 미식 탐방, 새벽시장 장보기, 술 시음과 술집 탐방, 여행과 골프 체험기 같은 일상적 콘텐츠를 페이스북에 게시해 인기를 끌면서 ‘SNS 셀럽’으로 떠올랐다. SNS를 한 시대의 문화로 보고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다. 정 대표는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스’(NYT, 2022년 1월 20일 자)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는 “명성은 불편함도 크지만, ‘존재감 미약한 편안함’보다 ‘존재감 뚜렷한 불편함’이란 나의 취향을 충족시킨다. 사업보다 친교에 도움이 된다. 수상한 접근을 하는 ‘가짜 친구’도 많이 생기긴 하지만 일생을 함께할 친구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김형석 미래본병원 대표 원장(신경외과 전문의, 서울 잠실)은 ‘경추·요추 부위 내시경 수술(수술 경력 9000건)의 명인’이다. 김 원장은 “의사의 명성은 환자를 사랑으로 극진히 돌봤는지에 대한 자화상 같은 척도다. 그것은 오직 환자와 직결되며, 환자를 떼놓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사는 신뢰와 사랑을 토대로 사력을 다해 환자를 보살펴야 한다. ‘좋은 의사’, ‘훌륭한 의사’, ‘명예로운 의사’의 출발점도 이와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울러 “의사가 명의(名醫)란 명성을 얻으려면 환자의 아픔을 깊이 헤아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는 ‘공감 능력’과 ‘좋은 인품’, 환자를 제때 제대로 치료하는 ‘뛰어난 실력’, 환자에 대한 ‘치료 의지와 자신감 표출’이 꼭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아주대 의대 출신으로 군의관 시절 선구적인 내시경술 수련과 아프간 의무부대 참전, 척추 전문 병원인 우리들병원 수련원장과 의무원장, 우리들의료재단 부이사장을 거쳤다. 그는 “높은 명성을 지닌 의사가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은 자만과 오만, 그리고 그것의 연쇄반응으로 나타나는 게으름과 나태함”이라고 지적했다.
“배우에게 명성은 삶의 기적과 고귀”
‘대장금 한류’의 주역 양미경 배우는 MBC 드라마 ‘대장금’에서 ‘한 상궁’ 역을 맡아 드라마가 국내는 물론 동남아·중동 지역까지 크게 히트하면서 스타로 부상했다. 양미경 배우는 “‘명성’은 삶의 기적이며 고귀(高貴) 그 자체다”라고 말했다. 그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명성(名聲)은 이름이 소리가 나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 소리는 선(善)함을 바탕으로 인고의 노력과 울림을 통해 영롱한 새벽이슬처럼 만들어진 것이기에 ‘명성은 고귀’하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40년간 연기를 통해 맑고 선한 성정, 곱고 단아한 이미지를 각인하는 독보적인 페르소나를 구축해온 명성과 관록에서 나온 통찰이다. 라마단(Ramadan) 기간에도 ‘대장금’을 시청할 정도로 경이적인 시청률(90%)을 나타낸 이란에서 2009년 5월 그를 ‘국빈’(國賓)으로 공식 초대했다. ‘대장금’이 2015년 홍콩에서 방영되었을 때 시민의 약 절반인 328만 명이 시청(최종회 최고 시청점유율 50%)해 홍콩을 방문할 때마다 엄청난 팬들이 몰렸다. 그는 “‘대장금’ 출연 당시 홀연히 찾아온 에너지처럼 새로운 차원의 명성을 느꼈다. 그것은 매우 강한, 삶에서 흔히 만날 수는 없는 특별한 에너지였다”라고 술회했다.
‘골프 여신’ 최나연 프로는 우리나라 ‘여성 골퍼 황금시대’를 이끈 주역이다. 그는 “세계적인 선수라는 명성을 안겨준 원동력은 전적으로 태생적 자질인 강력한 도전정신과 성취욕이다. 나는 일관성과 꾸준함을 가장 잘 보여준 프로 골퍼로 골프사에 기억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실력·매력·저력’을 완비한 골퍼로 ‘롱 아이언 샷의 명수’이자 ‘골프계 최고 얼짱 스타’로 불렸다. 2004년 11월 데뷔 후 18년간 미국여자골프(LPGA) 최고의 대회인 ‘US여자오픈’ 우승(2012)은 물론 LPGA 대회에서만 우승 9회, 준우승 12회, 3위 7회의 저력을 보여준 뒤 2022년 말 전격 은퇴했다. 그는 “‘우승’과 ‘준우승’의 차이는 집중력, 경험, 실력, 운(運)이란 4가지 요소가 경기 당일 어떻게 최적의 조합을 이뤄 경기력으로 구현되느냐에 달려 있다. 골프를 잘하려면 기본기에 충실하면서 4가지 요소를 최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스타 골퍼’들이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려면 겸손한 성품, 끊임없는 실력 증진 노력, 선수 자신에 대한 믿음이란 3가지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명성, 긴장시키고 겸손하게 만들어”
최상훈 ‘뉴욕타임스’ 서울지국장은 한국인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명성을 갖고 있다. 그는 “명성이란 사람을 끊임없이 긴장시키고 겸손하게 만드는 두려운 것이다. 내가 기자로서 유명해졌다는 것을 처음 느낀 순간은 이메일과 SNS를 통해 내가 쓴 기사에 대한 공감과 긍·부정의 평가가 쏟아지던 순간이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저널리스트로의 명성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두려움이 앞서 균형감각 유지에 대한 강박감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32년 차 기자로서 ‘AP통신’ 기자 시절인 1999년 9월 30일 영구적으로 묻힐 뻔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특종 보도해 2000년 한국인 기자로는 처음으로 서구 언론계에서 ‘언론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퓰리처상’(탐사보도 부문)을 받아 명사가 되었다. 그는 “오늘날 나를 만든 힘은 강한 성취욕과 성실성이다. 노근리 사건의 취재는 어떤 피해자가 쓴 논픽션 실록의 출판이 당시의 참상을 구체적으로 담은 책 내용에 두려움을 느낀 출판사에 의해 거부되고, 한미 양국이 피해자들을 외면해 항의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라고 밝혔다.
KBS 박지원 아나운서는 방송계에서 경쾌한 에너지와 톡톡 튀는 매력을 갖춘 ‘MZ세대 아이콘 뉴스앵커’로 통한다. 그는 “나에게 명성은 방송사에서 일을 더 열심히, 더 잘하게 하는 동기부여 요인이자 원동력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2019년 11월부터 공영방송 KBS의 ‘KBS 뉴스 9’(주말) 뉴스 진행을 맡고 있다. 박지원 아나운서는 “방송을 하는 사람에게는 누가 프로그램을 봐주고 인정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나한테도 그것이 일할 때 항상 열정을 잃지 않게 해주는 힘이 된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명사로 인정받을 만한 유능한 앵커가 되려면 첫째 기사를 보고 핵심을 파악하고 한 걸음 더 들어가 깊게 질문하는 능력, 둘째 명쾌하고 유려한 전달력, 셋째 진행 능력과 같은 퍼포먼스”라고 말했다.
BTS, “기본적인 것, 결과에 따른 신뢰”
한편 세계 음악 시장을 석권한 그룹 방탄소년단(BTS)과 ‘국민 여동생’으로 사랑을 한몸에 받은 피겨 스타 김연아는 언론 매체를 통해 명성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방탄소년단은 2019년 11월 미국 패션 잡지 ‘페이퍼’(PAPER)와의 화보 인터뷰에서 글로벌 스타로 유명해지면서 점점 높아진 명성에 뒤따르는 부담감을 고백했다. ‘멤버들은 명성이 주는 부담감이 큰가?’란 질문에 대해 “아니라곤 할 수 없지만, 저는 요즘 사명감으로 살고 있어요. ‘완벽해야 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진짜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들, 결과에 따라오는 신뢰를 기억하며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죠”(제이홉), “완벽에 가까운 공연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어요”(지민), “압박감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또한 삶의 일부라고 생각해요”(슈가), “여전히 우리는 무대 위에서 정말 잘하고 싶어요”(리더 RM)라고 각각 답했다.
김연아는 명성의 유무에 대해 극명하게 대비되는 경험을 털어놓음으로써 운동선수가 갖는 명성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역설적으로 보여줬다. 그는 19세 때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3년 전 (나에 대한) 관심이 없었을 때는 혼자 외롭게 싸웠다”라고 울먹였다. 그러나 좋은 성적을 거둬 명사가 된 후에는 “유명해지고 사람들이 알아보고 그러다 보니까 좀 불편한 건 피해갈 수 없는 것 같다. 그런 것 때문에 고민하다가도, ‘그래도 행복한 거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라고 소회를 내비쳤다.
외로움 수업
김민식·생각정원
드라마 ‘뉴논스톱’과 ‘내조의 여왕’으로 유명한 김민식 PD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인생의 파도를 어떻게 넘나들고 있는지, 삶에서 한발 나아가고 깊어지도록 이끈 50가지 지혜를 책에 담았다.
죽음의 키보드
미하엘 초코스·에쎄
독일의 유명한 법의학자인 저자는 법의학자의 능력을 ‘죽음의 키보드’라고 말한다. 특히 범죄 사건이 발생했을 때 법의학자의 키보드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 전달하는 주요한 매개가 된다.
운이란 무엇인가
스티븐 D. 헤일스·소소의책
운이란 무엇일까. 철학과 교수인 저자는 신화적 이야기부터 현대의 이론까지 운의 역사를 짚었다. 이를 통해 운의 실체를 밝혀낸 그는 ‘운은 인지적 착각이며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깃털 달린 여행자
멜리사 마인츠·도서출판가지
저자는 35년 넘게 철새의 여정을 쫓은 조류학자로서 새의 이주를 총망라한 책을 펴냈다. 이주를 해야 하는 새의 종류, 다양한 이주 형태, 철새들이 하늘에서 길을 찾는 법 등을 알 수 있다.
노인의 삶을 수치화한 통계자료가 발표될 때면 우리나라 노인은 ‘OECD 회원국 중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된다. 늙는 것도 서러운데 돈이 없어 우울하기 짝이 없는 여생을 보내는 모양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노인이 서러운 삶을 산다고 결론짓기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젊은 세대는 내 집 마련을 꿈도 못 꾼다는데 노인은 자가에서 거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노인은 과연 빈곤한가, 부유한가?
‘부동산 불패 신화’의 주역, 60세 이상 노인은 여전히 노후 대비용 자산으로 부동산을 가장 선호한다. ‘2021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자산 중 80.9%가 부동산이었으며, 저축은 13.8%에 불과해 다른 연령대에 비해서도 낮은 비율을 보였다. 또한 국토교통부의 주거실태조사를 보면 2020년 기준 고령 가구가 보유한 주택에서 거주하는 비율(자가점유율)은 75.4%로, 다른 가구 형태에 비해 유독 높다.
부동산 가진 노인은 부유하다?
그러나 ‘노인은 부동산을 가졌으니 부유하다’는 판단은 섣부르다.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이 아니라 부동산에 묶여 있고, 사회안전망이 부족하다고 인식해 실제로 노인들 역시 불안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65~74세 노인 1000명을 재산 규모별로 ‘1500만 원 미만’부터 ‘10억 원 이상’까지 6개 집단으로 나눠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노인들이 느끼는 사회적 불안은 5억~10억 원 미만 집단으로 갈수록 줄어들다가 10억 원 이상 집단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정도가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곽윤경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보고서에서 “돈을 더 벌고 재산이 늘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불안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라며 “재산 중에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 비상시 쓸 수 있는 현금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해석했다.
곧 노인이 될 4050세대까지 시야를 확장시키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2020 KIDI 은퇴시장 리포트’에 따르면, 우리나라 4050세대의 실물자산 90% 이상이 부동산에 몰려 있다. 이들의 노후 자금 유동성에 제약이 생겨 노인 빈곤을 더욱 심화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미 불붙은 노인 빈곤 문제에 부채질하지 않기 위해서는, 4050세대가 나이 들기 전 공적연금과 더불어 부동산 같은 자산을 유동화(현금화)하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함을 시사한다.
간혹 집을 팔고 집값이 비교적 싼 지방으로 이사하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의 ‘2020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노인의 83.8%가 건강할 때 현재 집에서 거주하기를 원했다.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56.5%가 거동이 불편해져도 재가 서비스를 받으며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계속 살기를 희망했을 정도. 집이 노인에게 거주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거주하던 집을 팔아 노후 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우리나라 노인이 가장 빈곤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66세 이상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이하 빈곤율)은 40.4%다. 빈곤율은 소득이 빈곤선 이하인 사람의 비율을 의미하는데, 2020년 기준 66세 이상 인구의 균등화 중위소득(처분가능소득 기준)은 1809만 원이다. 이보다 소득이 적은 노인이 열 명 중 네 명이라는 뜻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에 달하는 기록이다.
높은 빈곤율의 원인으로는 △부동산 자산을 고려하지 않은 빈곤율 산출 방식 △공적연금의 미성숙 등에 따른 불충분한 노후 준비 △가구 분화(자녀 분가, 황혼 이혼 등) 등이 있다.
소득만을 기준으로 산정하는 노인 빈곤율 계산법은 줄곧 문제로 지적돼왔다. 노인 빈곤율을 지나치게 높아 보이도록 왜곡해, 실제로는 빈곤하지 않은 고령층을 빈곤층에 포함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강성호 보험연구원 고령화연구센터장은 “경우에 따라 집이나 자동차 등 재산을 소득으로 환산한 뒤 실제 월소득과 합산해 계산하는 소득인정액 등을 현금화한다면 더 정확하게 빈곤 상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성숙한 공적연금 역시 노인 빈곤율을 높이는 주범 취급을 받는다. 공적연금이 일찍이 도입돼 운영된 선진국의 경우 연금 가입자 수가 많고, 가입 시기가 길다. 그만큼 연금에 기여하는 금액이 커서 추후 수령하는 연금소득이 충분하다. 반면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시행된 지 23년밖에 지나지 않아 상대적으로 미성숙할 수밖에 없다. 강 센터장은 “만족할 만큼의 연금소득을 수령하려면 가입 기간이 30~40년은 돼야 한다”라며 “우리나라는 공적연금 도입이 늦어 선진국에 비해 가입 기간이 짧고, 사각지대 문제 등으로 충분한 가입이 이뤄지지 않아 연금소득이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자녀 분가나 황혼 이혼 등 사회적 인식, 문화의 변화로 인한 가구 분화도 빈곤율에 영향을 미친다. 보험연구원 ‘가구 분화에 따른 노인 빈곤과 시사점’ 연구에 따르면 노인과 자녀 세대로 구성된 가구의 월 소득은 407만 원이나, 자녀 세대가 분가하고 나면 월 87만 원까지 떨어진다. 황혼 이혼의 경우 노인 빈곤에 직면할 위험성이 더욱 높아진다.
게다가 그나마 모아둔 노후 자금으로는 자녀의 교육비나 결혼비 등을 충당한다. 조기 퇴직 후 받는 퇴직급여나 공적연금으로는 버거운 수준이다. 이른 시기에 분가가 이뤄지는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중장년들이 노후 준비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가구 분화는 70세 이후 고령층에서 주로 발생한다. 나이가 들면 빈곤의 늪으로 추락할 가능성이 높아져만 간다.
주택연금·주거복지, 빈곤 해결 열쇠 되나
노후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선 개인연금에 세제 혜택을 주거나, 양질의 노인 일자리 확보 등 사회적 측면에서 노후 소득 원천을 마련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최근에는 높은 주택 보유율과 선호 탓에, 부동산이 노후 빈곤의 단기적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이 제기됐다.
지난달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발간한 ‘노후 소득 형성을 위한 조세지원정책’ 보고서는 주택연금을 노후 빈곤의 해법으로 제시한다. 주택연금은 개인연금에 비해 연금 수령까지의 시간이 훨씬 짧으며, 개인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에 비해 적은 비용으로 빈곤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 보고서에 따르면 주택 공시가격 3억 원 주택을 소유한 60세 주택연금 가입자가 평생 수급할 월 연금액은 63만 6940원, 연간 764만 원이다. 연간 300만 원씩 20년을 기여한 뒤 10년간 수령할 연간 개인연금 소득 744만 원과 큰 차이가 없다.
현재 역모기지 제도(주택연금·농지연금)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두 연금제도 가입자를 합쳐도 65세 이상 대상자 중 2~3%만이 가입한 상황. 전병목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과거에 국민연금 제도 미비 등을 이유로 연금 가입을 하지 않은 노인, 소득은 낮지만 자가를 보유한 노인 같은 ‘빈곤의 차상위층’을 대상으로 주택연금 가입을 지원하면 현재의 노인 빈곤 상황을 비교적 빠르게 비용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주택연금은 어디까지나 주택을 보유한 이들만 활용 가능한 제도다. 주택을 보유하지 못한 노인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절대적 빈곤층의 문제는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주보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주거복지가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통적 방식인 월세를 지원하는 것 외에 공공임대주택과 같은 임대주택, 고령자복지주택, 복지·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원주택을 예로 들 수 있다. 주 부연구위원은 “이미 알려진 미국과 일본의 ‘노인 그룹홈’처럼 노인이 살던 지역을 최대한 벗어나지 않고, 같은 지역 내에 거주할 수 있게 하면서 노인이 지역사회와 최대한 분리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삶의 터전을 벗어나 새로운 주거 시설로 이주하는 것을 노인이 원치 않기 때문이다. 정부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부담이 크다.
현 노인 주거복지 정책 역시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인식이 보다 보편화된 미국에서는 저소득 노인을 위해 ‘서비스 연계 주택’이라는 대안적 주거 모델을 활용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공통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입주 노인의 독립성·자율성이 보장되도록 1인 1실을 지원하며, 서비스 코디네이터를 통해 일상생활 지원 서비스를 연계한다. 주택 자체적으로도 공동 식사 및 건강 증진, 사회적 교류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노인에게 경제적 빈곤뿐 아니라 마음 빈곤까지 아우를 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자명해 보인다.
별은 어둠 속에서 더 또렷하다. 광공해가 없는 맑은 대기여야 선명하다. 그러기에 도심에서 반짝이는 별을 보기는 쉽지 않다. 첨단의 문명이 별 보기를 더 어렵게 만든 셈이다. 별 볼 일 없는 세상이란 말, 따지고 보면 초고도 현대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팍팍해진 세상에서 별 볼 일을 찾아 떠나보는 일, 해볼 만하다.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과 태백시 경계의 함백산. 서울에서 밤 10시에 출발하면 새벽 2시 무렵에 도착한다. 산 정상 가까이 자동차로 접근할 수 있어서 야간 산행의 난이도는 어렵지 않게 적응된다. 하지만 일부 걸어서 올라가는 산길은 경사가 가파르다. 숨차게 1572m 정상에 오르니 한낮의 날씨는 간데없이 뚝 떨어진 기온에 한기가 온몸을 휩싼다.
별이 빛나는 밤에
발아래로 굽어보는 세상, 멀리 낭떠러지 같은 산 아래로 가끔씩 밤길을 달리는 자동차 궤적이 빛을 낸다. 산꼭대기 봉수대 아래의 고사목 앞에서 바라보는 산의 웅장함. 숲 내음과 눈앞에 펼쳐진 산세에 놀라고, 흐르는 은하수를 보며 전율할 수밖에 없는 밤 풍경이다. 함백산은 하늘과 가까이 맞닿은 곳에서 별을 관찰할 수 있다. 이윽고 별이 지고 나면 산등성이 사이로 멋지게 밝아오는 여명을 맞을 수 있는 산이다.
완벽한 어둠 속에 서서 바라보는 밤하늘. 하늘이 이렇게나 넓었던가. 이 우주 안에서 작아진 자신의 모습을 단박에 확인한다. 쏟아질 듯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검푸른 하늘에서 별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고도가 높은 산 정상에서 육안으로 올려다보는 별, 비로소 우주와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이젠 신화 속의 별자리를 찾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별 궤적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붙잡고 조급해하거나 연연하지도 않는다. 머리 위로 별을 가득 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주 어린 시절 여름이었나. 저녁을 먹은 뒤 마당에 자리를 펴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아득한 기억이 있다. 그때 어린 눈에 들어오던 또렷한 별들이 선명히 기억난다. 어릴 적 집 앞마당에서 올려다보았던 별을 어른이 되어 이렇게 멀리 달려 나와 밤하늘의 보석을 대하듯 감탄하면서 마주한다. 밤바람이 차서 미리 준비한 두꺼운 겨울 패딩에 털장갑을 끼고도 몸이 떨리는 산중의 밤이다. 추위 속에서도 스스로 들떠서 행복하다.
어느 순간 서서히 어둠이 걷히는 게 느껴진다. 여명의 신비로움에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건 당연하다. 운해 위로 불그스레 조금씩 떠오르는 일출이 물들이는 세상, 저 아래로 굽어보는 능선 사이사이 스며드는 운해, 온 산하에 여명이 번지는 뭉클한 순간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가히 선계의 풍광이다.
바람을 맞으며 밤을 보낸 눈앞의 고사목은 얼마나 무수한 일출을 마주했을까. 빳빳하게 선 채로 생명의 힘을 그대로 전한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더니 저 나무는 지금 어느 세월쯤에 있는 걸까.
천상의 화원 만항재
폐부 가득 새벽 찬 공기를 담고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뿌듯하다. 하룻밤의 꿈이었던가. 추위 속에 떨면서 밤을 새우며 바라본 은하수와 별, 세찬 밤바람도, 운해와 여명도, 함백산의 능선도, 아름다운 일출도, 대자연의 선물이다. 선물을 가슴 가득 안고 내려온 함백산의 새벽길. 밤새워 별을 보고 차 안에서 꾸벅꾸벅 쪽잠을 잘지언정 내내 잊지 못할 밤마실이다.
함백산의 만항재는 조선 초기 고향을 떠나 산속 깊은 곳에 터전을 잡은 옛 고려인들이 고향에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원했다는 ‘망향’에서 유래한 어원을 지닌 고갯길이다.
이 지역은 강원도 정선, 고한, 영월, 산동읍과 태백시를 잇는 지점이다. 우리나라의 포장도로가 놓인 길 중에서 자동차로 달릴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다(1330m). 그래서 드라이브의 재미와 함께 깊은 자연 속의 풍성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만항재는 천상의 화원으로 알려져 있듯이 울창한 산림이 자연스럽게 우거져 있다. 매해 우리나라 최대의 야생화 축제가 열릴 정도로 야생화 천국이다. 산상의 꽃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자연의 기운을 듬뿍 얻는다. 희귀한 야생화와 풀꽃들이 지천이다. 특히 호랑나비, 산제비나비 등 예쁘고 다양한 나비가 많아 어디서나 나비의 날갯짓을 본다. 때 묻지 않은 빽빽한 숲 그늘에 파묻히는 기쁨을 마음껏 누린다. 원 없는 ‘숲멍’의 시간이다. 넉넉한 마음으로 편히 한나절 쉬어가도 좋을 청정 자연이다.
숨 쉬는 다리, 영월군 주천리 섶다리
산으로 둘러싸인 맑은 물이 흐르는 마을에 추수가 끝나는 늦가을이면 매년 다리가 놓이곤 한다. 여름에 물이 불어나 떠내려갈 때까지 사용되는 다리. 영월군 주천리 판운면에 가면 건너보고 싶은 섶다리가 있다. 강을 사이에 둔 밤뒤마을과 건너편 미다리마을의 왕래를 이어주는 정겨운 전통 다리다.
통나무로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참나무와 소나무 가지를 얹어 진흙으로 만들었다. 섶다리 위로 발걸음을 옮기면 약간의 흔들거림과 탄력적인 푹신함이 전해진다. 요즘 곳곳에 유행처럼 만들어지고 있는 출렁다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옛 맛의 신비한 감흥이다. 잔잔한 주천강을 건너 섶다리를 향해 앉아 느긋한 한낮, 잠깐이나마 아날로그 감성에 빠져보는 시간이다. 마을 옆으로는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는 밭고랑 사이마다 농작물들이 여물어간다.
예전의 산천을 그대로 간직한 시골 마을에서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유유자적한 기분, 세상 부러울 게 없다. 몸의 감각을 되찾고 편안하게 마음 정리할 만한 곳이 바로 여기구나 싶다. 은은하고 따사로운 볕에 빛나는 시골 풍경이 아스라하다. 돌아오는 길에 섶다리에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이상한 바위들의 모임, 요선암도 그냥 지나치면 섭섭한 곳이다.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 요선암 앞에 서면 마치 공룡 시대에 온 듯 신비롭다.
하루나 이틀쯤 깊은 자연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 살면서 가끔은 자라고 싶은 대로 자라는 야생 식물들의 풍경에 취하고 산꼭대기의 운무에 마음을 빼앗겨볼 만하다. 하루 이틀로 도시의 때가 벗겨질 리 없지만, 물질과 소유욕에 잠식당한 현실에서 잠깐 떨어져 나올 수 있는 기회다. 속세를 떠난 듯 일상을 잊어보는 시간, 자연의 따뜻한 본성을 만나고 오면 새록새록 가슴을 두드리며 알려준다. 이 땅의 깊숙한 곳으로 찾아가는 일은 이토록 근사하다는 걸.
책은 누군가에게 부족했던 영감을 주고, 뜻밖의 인연이 닿게끔 돕기도 한다. 삼성전자 재직 시절부터 퇴직 후 지금까지 희귀 광물을 수집해온 이지섭 민자연사연구소 소장도 마찬가지다. 책을 통해 고인 생각을 정리하고, 지구과학의 대중화를 위한 초석을 다듬었다. 또한 직접 펴낸 책 ‘광물, 그 호기심의 문을 열다’로 독자들과 만나며 수집과 연구에 대한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약 150평 규모의 민자연사연구소에는 다양한 빛과 보기 드문 기하학적 형태의 희귀 광물이 전시돼 있다. 이 남다른 3000여 점의 ‘돌덩이’들은 이지섭 소장이 40년 넘는 시간 동안 직접 모은 소중한 예술품이다. 멕시코, 케냐, 페루, 콩고, 모로코 등 원산지도 다양하다. 2010년 개장 이후 광물자원공사 임직원, 고려대학교 지구과학 전공학부 대학원생, 국립과학관 관계자 등 다양한 전문가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LED 빛을 받고 있는 그의 수집품들은 가공되지 않은, 자연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남다른 분위기를 내뿜는다.
이 소장은 삼성전자에 36년간 몸담으며 대한민국 기업의 신화를 함께 쓴 인물이다. 흑백 TV를 만들던 때부터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로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겪었다. “삼성전자에서 새로 개발한 전자레인지의 품질 관리를 위해 미팅을 다녔습니다. 기획과 설계, 개발만 기업이 진행하고 협력업체가 생산하는 방식이긴 했지만,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발한 제품이었어요. 좋은 품질 덕에 세계적 기업들의 수요가 높아 수출이 원활하게 이루어졌고, 자연스레 저는 해외 출장이 잦았죠. 그러던 중 1981년 우연히 뉴욕 자연사박물관에 들렀는데, 살면서 보지 못했던 희귀 원석과 광물이 가득하더군요.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돌 부자’가 된 삼성맨
금속공학을 전공했기에 원석과 광물을 책으로는 자주 봐왔던 그였다. 하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돌들을 직접 보니 완전히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가난하던 어릴 적 냇가에서 반짝이는 돌을 주워 모으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 길로 뉴욕 자연사박물관을 나와 인근 기념품점에서 60달러를 주고 ‘쌍둥이 눈사람’ 모양의 마노(석영과 옥수가 혼합된 보석)를 샀다. 그 후로도 5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짬이 날 때마다 광물 시장이나 광산 인근 지방에서 표본을 구했다. 가벼운 산책길에서도 작은 돌, 바위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월급의 절반 이상을 원석 수집에 사용했어요. 적지 않은 비용 탓에 아내와 마찰도 있었죠. 하지만 제가 퇴근 후 집에서 원석을 보고 미소 짓는 걸 보더니 아내도 이해해주더라고요. 지금은 아내와 자녀들도 원석 수집을 돕고 있어요. 수집품 중 일부는 아내와 가족들이 사서 선물로 준 것입니다.”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더 심도 깊은 취미활동을 위해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광물을 향한 지극한 사랑에 전국 방방곡곡의 각종 소모임이나 연구 단체를 꾸준히 찾았고, 관련 서적을 수십 권 독파했다. 광물을 더 자세히 관찰하고 직접 표현해보기 위해 그림도 배웠다. 민자연사연구소를 찾는 사람들에게 모든 전시물에 대한 역사와 과학적인 유래를 어렵지 않게 설명해주기 위함이다.
그는 대한민국이 여전히 자연과학에 대한 투자나 관심이 부족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자연과학은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의 안내 책자에는 건축에 사용된 재료에 대한 설명이 면밀히 적혀 있습니다. 웬만한 과학 교과서보다 훌륭하더군요. 내부의 예술품들을 보기 전 외관의 요소부터 이해하는 것이 순서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광물은 그 무엇보다 인간의 역사와 생활에 밀접한 대상이거든요.”
미국 혹은 유럽처럼 대중이 지구과학을 친근하게 느끼도록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힘써야 한다는 설명이다. “우선 접근성을 높여 사람들이 다양한 광물을 접할 수 있도록 250개의 표본을 모두 모았어요. 아름다운 원석을 보면 ‘신기한 빛깔과 결정 모양은 어떤 원리로 만들어진 걸까?’ 궁금해하고, 자연스레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도 늘어날 테니까요.”
‘격물치지’ 위한 광물 이야기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등으로 젊은 시절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문학가로 알려졌지만, 광물학 연구에도 상당히 힘썼다. 지질 현상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소설이나 영화로 널리 알려진 ‘폼페이 최후의 날’ 들끓던 베수비오 화산을 네 번이나 등반했을 정도니 말이다. 이 소장 역시 어릴 적부터 동네의 유명한 ‘알고잽이’였다. 뭐든 알고 싶어 한다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다. 평상에 누워 밤하늘을 보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본 다음 날이면 그것을 줍겠다며 아침 일찍 집을 뛰쳐나가기도 했다. 그와 괴테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은 다름 아닌 호기심과 그에 따른 행동력이었다.
이 소장은 제대로 된 환경만 만들어주면 한국에도 괴테가 많이 탄생할 것이라 힘줘 말했다. “꿈은 박물관에서 자랍니다.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수집의 세계로 뛰어든 저처럼 말이죠. 학생들의 질문에 시달린 지구과학 선생님이나 꼬마 광물 박사의 성화에 연구소로 오는 부모님들을 보면 내심 뿌듯하기도 해요. 광물을 눈에 담으면서 설명을 듣는 것은 사진으로만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떤 것이 계기가 되든 간에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거라는 건 확실해요. 단순한 궁금증에서 시작되지만, 길가의 흔한 돌에도 지구의 시간과 우주의 신비가 켜켜이 쌓여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생각의 초석을 다질 수 있는 책
by 이지섭
돌의 사전 (야하기 치하루 저)
“긴 세월 돌과 인류는 항상 함께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공간이 돌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몰라요. 이 책은 광물이 어떻게 생성되고 발견됐는지, 어떤 성분으로 이뤄졌는지, 또 우리 주변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돌이 만들어지고 순환되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어요. 특히 리엘가, 쿤자이트와 같이 연관성을 유추하기 어려운 돌 이름에 얽힌 신화와 전설은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너무 학술적이지 않아 광물과 원석, 보석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기 좋을 것 같습니다.”
지구 이야기 (로버트 M. 헤이즌 저)
“카네기연구소 산하 지구물리연구소 선임연구원인 저자는 특유의 상상력과 시각으로 우리 행성이 수없이 반복해온 일들을 설명합니다. 원자 수준의 변화들이 어떻게 지구 구조의 극적인 전환들로 번역되는지 생생하게 그려낸 거죠. 사실 무수히 많은 돌은 인류 이전, 지구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됐어요. 빅뱅 이후 원시 광물의 탄생, 태양과 지구의 형성 등 총체적인 우주의 역사를 이해하면 오늘날 광물의 가치가 더 특별하게 다가올 겁니다.”
광물, 그 호기심의 문을 열다 (이지섭 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쉽게 광물을 접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쓴 책이에요. 시중에 나온 책은 대부분 저자의 소장품 도록이 주된 내용이거나, 깊이 있는 전문 서적이었거든요. 배경지식이 없다면 이해하기 힘들죠. 광물에 대한 호기심을 끌어낼 수 있게끔 여행에서 만난 광물들, 그에 관련한 경험담을 많이 풀어냈어요. 우리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더 재밌잖아요.”
이탈리아 기행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저)
“광물 하나에만 집중하기보다, 관련된 다른 현상을 함께 바라보며 복합적인 시각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은 괴테인데요. ‘이탈리아 기행’은 그가 1786년 9월부터 1788년 6월까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지인들에게 보낸 서한과 일기, 메모와 보고를 손질하여 엮은 책입니다. 괴테는 자연환경, 사회, 그리고 예술 분야에 조예가 깊었어요. 특히 식물학, 기상학, 지질학, 광물학, 색채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연결성을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도 설정하며 세심한 관찰 기록을 남겼죠. 그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서 겉으로만 알던 지식을 직접 보았을 때의 진실한 기쁨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1989)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모든 시간이 머뭇거림과 탄식과 질투로 가득했다고 고백합니다. 끝없이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했지만 끝내 한순간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참회합니다. 혹시 질투의 불길 속에서 자신을 태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질투로 아파하는 모든 분과 마음 미장공 아홉 번째 이야기 함께하겠습니다.
아직도 질투에 사로잡힌 당신에게
살림하는 전업주부로 산 세월이 많던 시절, 무릎 나온 바지에 애들 안 입는 낡은 티셔츠 입고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든 날 아침, 승강기에 같이 탄 이웃을 나도 모르게 훔쳐보게 됩니다. 옷차림부터 머리 매무새며, 들고 있는 서류가방, 풍기는 향수 냄새까지. 저는 물론 세수도 하지 않은 채입니다. 머리부터 발끝, 아니 구두 끝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또래로 보이는 여인. 역한 냄새 나는 쓰레기봉투를 든 나와 예쁜 백을 단정하게 든 그녀.
‘아 저 여자는 무슨 일을 할까? 얼마나 전문적이고 근사한 직종에 있는 걸까? 출근해서는 얼마나 재미 있고 또 의미 있게 하루를 보내고 돌아올까?’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보던 때도 많았습니다. 시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아이들 챙기느라 자신을 가꿀 수 없었던 제 모습이 창피스럽기도 했습니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람들 모습, TV에 나오는 유명인이나 드라마 속 주인공을 보다가 당신은 시기와 질투, 시샘하는 마음이 올라온 적이 있습니까? 이 감정이 도대체 뭐길래 나를 초라하게 하고 내 신세를 형편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할까요.
질투의 대상과 거리 : 최소한 사촌은 돼야 배가 아프다
친구가 성공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는다.
-고어 비달, 미국 소설가
영성이 높은 한 수도사가 금식 기도하며 수련 중에 있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유혹하고 훼방하려 해도 안 통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오늘 교구 인사에서 당신 동생이 주교가 되었다고 하는데….” 말을 맺기도 전에 “진짜? 말도 안 돼” 하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질투의 대상은 질투의 거리와도 밀접합니다. 부부나 연인, 형제자매, 친구 사이처럼 그 사람이 나와 얼마나 가까운지가 관건입니다. 거론한 대상이 자신과 너무 동떨어지고 격이 차이가 나면 질투가 거의 생기지 않습니다. 또래일 경우 질투의 불길은 활활 타오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사돈의 팔촌이 아니라 나와 가까운 혈연 관계인 사촌이 땅을 샀기 때문에 내 배가 아픈 법입니다. 평생 일면식도 없던 먼 친척이라면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기 마련이니까요.
만만할수록 불붙는 질투심
수십조 혹은 수백억 달러를 상속받았다거나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일론 머스크한테 질투를 느끼는 경우는 매우 드물 것입니다. 막연히 부러워하거나 경탄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그러나 매일 같이 운동하는 이웃이 경매로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샀다거나, 내 옆자리 동료가 주식으로 3000만 원을 벌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상대가 성취한 부와 행복의 크기가 내가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할 때 질투가 솟구칩니다. 또 이미 세상을 떠난 과거의 예술가나 과학자에게 질투가 일어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고인(古人)과 경쟁을 하지는 않으니까요. 동시대를 사는,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질투가 한결 커집니다. 질투는 시간적이나 공간적으로 나와 가깝고, 내용이나 크기로도 만만할 때 더 폭발해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질투는 죄가 없다?
질투(嫉妬)라는 글자에서 질(嫉)의 핵심은 계집 녀(女)에 있는 게 아니라 병 질(疾)에 있습니다.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성급한 마음 때문에 근심하다 결국 나한테 독이 되고 남에게도 독이 되는 것. 이러한 괴로움이 질투에 들어 있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투(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돌을 던졌으니 병이 들 수밖에요. 말이나 행동, 관계 따위로 손해나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병든 상태가 질투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질투의 신은 누구일까요? 바로 젤로스(Zelos)입니다.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는 질투를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로 꼽을 만큼 여자한테만 덮어씌웠는데, 서양에서 질투를 맡은 젤로스가 남신이라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젤로스는 폭력의 신 비아와 권력과 힘의 신 크라토스를 형제로, 승리의 신 니케를 누이로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서양 문화권에서 젤로스는 질투의 개념보다는 경쟁, 열의, 전념 같은 긍정적인 뜻을 더 많이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질투의 이중주 : 스타 탄생과 몰락 이야기
1937년 ‘스타 탄생’이란 이름으로 처음 영화로 만들어졌고, 2018년 세 번째 리메이크된 ‘스타 이즈 본’(A Star Is Born)은 사랑 영화이자 음악 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질투가 주인공 못지않은 역할을 하는 작품입니다.
애리조나 하늘같이 타오르는
그대 눈동자
날 보는 그대 눈길에 불타고 싶어
내 영혼 깊숙이 캘리포니아
황금처럼 묻힌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빛을
찾아낸 그대
목이 메고 할 말을 찾지 못해
헤어질 때마다 가슴이 아파
해가 지고 밴드가 연주를 멈출 때
우리 모습 영원히 이대로
기억할 거야
(중략)
그대가 날 바라보면
온 세상이 사라지고
우리 모습 영원히 기억할 거야,
이대로
-OST ‘Always Remember Us This Way’(우리 모습 영원히 이대로 기억해)
중에서
나를 발견해주는 사람을 조심하라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외모가 걸림돌이 되어 낮에는 웨이트리스로, 밤에는 무명 가수로 무대에 오르던 앨리(레이디 가가 분). 천재 기타리스트이자 컨트리 뮤지션으로 명성을 날리는 슈퍼스타 잭 메인(브래들리 쿠퍼 분). 순회공연 중 우연히 찾은 바에서 노래하는 앨리를 보고 잭은 첫눈에 ‘캘리포니아 황금처럼 영혼 깊숙이 묻힌’, 그녀도 몰랐던 내면의 빛을 발견합니다. 나를 찾아내고, 무대에 세우고, 나를 키워주고 응원하는 사람과 결혼한 그녀. 내 진가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무대에서 직접 만든 노래를 부를 기회를 주었으니, 두 사람은 이제 사랑밖에 할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망쳤어. 당신이 부끄러워. 안쓰럽고 그래. 당신 더럽게 못생겼어. 얼굴에 자신이 없어서 남한테 잘 보이는 게 더럽게 중요하지.”
전성기에서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잭과 달리 앨리는 스타 시스템에 힘입어 대형 토크쇼에 초대되는가 하면, 그래미상 3개 부문 후보로 선정될 정도로 승승장구합니다. 기쁜 소식을 들은 바로 그날, 잭은 술과 마약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독설과 폭언을 퍼붓습니다. 심지어 신인상을 받게 되어 시상식에 초대된 날, 앨리가 수상 소감을 말하는 옆에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소변을 보고 맙니다. 그 뒤 마음을 다잡고 알코올 중독 치료도 하는가 싶더니, 아내 앨리의 대형 해외 투어를 앞두고 목을 매달아 세상을 등집니다. 한 여자를 살렸지만 자신은 살리지 못했던,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남자. 앞선 기형도 시인의 독백과 겹쳐집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죄
질투는 오로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부정적인 감정 상태로 자신을 방치해 병이 되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열의, 열정, 전념을 담당하는 젤로스 신을 불러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제가 처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게 된 것은 남편의 공이 큽니다. 그 옛날 원고지에 글 쓰던 시절, 시외삼촌의 권유로 타자를 배운 남편을 보면서 마음에 질투의 불씨가 당겨졌습니다. 하지만 질투에 굴복하지 않고 선의의 경쟁과 열정이란 긍정적인 감정으로 바꾸어 저도 당시 ‘한메타자교사’로 컴퓨터와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물리적으로 매우 가까이에 있는 친밀한 관계에서 생기는 질투를 내 삶의 좋은 에너지로 바꿀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뭔가를 해내는 것을 지켜보는 건 자신에게 굉장한 자극을 주기 때문입니다.
질투를 놓아주고 나부터 행복해집시다! : 마음의 주인 노릇
질투에 함몰되어 자기 비하와 자학으로 자신을 파괴할 것인지, 그 감정이 나를 옭아매지 않도록 방향을 선회해 자기 발전, 자존, 자족, 건강한 자극으로 동기를 부여할 것인지 그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주인이 나일 때만 가능합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그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질문해보세요. 질투는 남보다 나를 망칩니다. 내 화살로 나를 쏘는 것과 같습니다. 남을 질투할 시간에 나를 더욱 사랑해보면 어떨까요. 남과 견주며 끝없는 고통과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지 말고 나부터 행복해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