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청춘스타로 인기를 끌었는데, 정작 자신은 “시기를 잘 타고났다”면서 겸손하게 말한다.
“과거 젊은 시절의 인기를 좋게 말해주는 분들도 많지만, 사실 그때 저는 연기에 대해 하나도 몰랐어요. 그래서 당시가 전성기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현재 40대 중반의 그는 배우로서 과도기에 있다고 본다. 지금을 잘 보내야 노년까지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연기 변신을 꾀하고 싶다.
“새로운 연기로 스스로를 테스트해 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해본 적 없는 제대로 된 악역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최정윤은 책임져야 하는 가족, 딸 지우가 있어 더욱 열심히 일하려고 한다. 그에게는 배우 박진희, 피아노 선생님 등 ‘또 다른 가족’도 존재한다.
“가족 이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보물 같은 사람들이 옆에 있어줘서 감사해요. 가족이 꼭 혈연으로만 이뤄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어떤 일에도 스트레스받지 않는 성격을 지닌 최정윤.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그의 앞날이 기대된다.
To. 브라보 독자
“지나간 시간은 흘려보내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사세요!”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활발한 활동을 펼친 최정윤(46). 청순한 미모와 출중한 연기력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는 예뻤던 것 같다.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라 젊음이 예뻤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가 전성기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의 인기를 좋게 말해주는 분들도 많지만, 정작 나는 연기가 뭔지 하나도 몰랐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나만의 전성기는 아직 보지 못했다”는 최정윤의 행보가 주목된다.
SBS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 MBC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 등의 캐릭터 때문인지 최정윤은 새침데기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세상 털털한 사람이다. 과거 뜨거운 관심을 받은 것에 대해 “시기를 잘 타고났다”라면서 “일찍 데뷔해서 천만다행이다. 요즘 같은 시기였다면, 어디 가서 배우라고 명함도 못 내밀었을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배우로 데뷔한 것도 우연한 계기였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재미 삼아 찍은 프로필 사진 덕에 공익 광고에 출연하게 된 그는 당시로서 큰돈인 50만 원을 벌었다. 재밌는 경험이었지만 배우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광고와 사진을 본 소속사 관계자로부터 제의를 받아 배우의 삶을 살게 됐다.
“저도 모르게 배우의 길로 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신인 시절 저는 겁이 좀 없었어요. 연기 욕심은커녕 연기가 뭔지도 몰랐으니까 카메라 앞에서도 무서운 게 없었던 거죠.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래서 지금까지 배우를 할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처음부터 너무 연기 욕심을 부리고, 배우로서의 인정이나 성공이 간절했다면 일을 즐기면서 하지 못했을 것 같거든요. 저는 모든 촬영 현장이 늘 재밌었고, 힘들어서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큰 욕심 없이 살았던 것이 제가 이 세계에서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청춘스타에서 ‘아침드라마 퀸’으로
데뷔 작품은 1996년 SBS 드라마 ‘아름다운 그녀’로 기록된다. 27년 차 배우인 최정윤은 대표작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잠시 고민에 빠졌던 그는 이내 “대표작은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얘기해주시는 작품”이라면서 MBC 드라마 ‘태릉선수촌’(2005), 영화 ‘라디오스타’(2006), SBS 드라마 ‘청담동 스캔들’(2014~2015)을 꼽았다.
최정윤은 “대중들이 ‘라디오스타’는 PD 역할로 잘 기억해준다. ‘청담동 스캔들’은 인지도가 높아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태릉선수촌’에 대해서는 연기의 매력을 깨닫게 해준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태릉선수촌’은 엘리트 체육인들의 운동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다룬 8부작 드라마로, 최정윤은 양궁 선수 역을 소화했다.
“연기를 하면서 처음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가진 작품이에요. 그 전까지는 쫓기듯이 연기를 했다면, 그때는 본연의 나로서 진심을 다해 드라마를 찍었죠. 감독님부터 배우들, 현장 분위기까지 모든 것이 좋았어요. 만약 당일 예정된 분량대로 촬영이 진행되지 않으면, ‘술이나 한잔 하자’라면서 서로 위로하고 같이 고민하고 그랬죠. 배우들끼리 워낙 끈끈해서 이윤정 감독님의 차기작 ‘커피 프린스 1호점’ 촬영 때, 다 같이 현장에 놀러 가기도 했어요.”
최정윤은 ‘청담동 스캔들’에 이어 2021년 ‘아모르 파티-사랑하라, 지금’(이하 ‘아모르 파티’)에 출연하면서 ‘아침드라마 퀸’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그러나 이제 그 수식어를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아모르 파티’를 끝으로 방송 3사 KBS·SBS·MBC의 아침드라마가 폐지됐기 때문. 최정윤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아침드라마에 출연한 여주인공으로 남았고, 책임감을 통감했다.
더욱이 ‘아모르 파티’는 ‘청담동 스캔들’ 이후 오랜만의 드라마 작품으로 아쉬움을 더했다. 긴 공백 사이, 드라마 제작 현장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촬영 환경이 정말 좋아졌더라고요. 일정이 빠듯하지도 않고, 밤샐 일도 없어졌죠. 과거에는 밤새고 첫 신을 찍을 때도 많았어요. 지금은 상상도 안 되는 일이죠.”
중년 배우 과도기 잘 넘겨야
호전된 제작 환경은 배우로 오랜 시간 연기하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배우로서 역할이 달라질 때도 세월이 체감된다. 청춘스타로 이름을 알린 최정윤은 2013년 방송된 MBC 단막극 ‘소년, 소녀를 다시 만나다’를 시작으로 엄마 연기를 하게 됐다.
“그때 당시는 제가 실제로도 엄마가 아니었어요. 처음 제안이 들어왔을 때 걱정을 많이 했고, 그래서 출연을 거절했어요. 엄마 연기를 할 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게 아니에요. 스스로 엄마 역할을 잘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됐던 거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연기 연습도 할 수 있고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의사를 번복해 출연했는데, 엄마 연기가 생각보다 재밌었던 거죠. 이제는 엄마 역할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어요. 아역 배우들이 성인이 된 모습을 보면 신기할 뿐이에요.”
40대 중반의 최정윤은 현재 배우로서 과도기에 있다고 본다. 연기를 하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찬 그는 “지금 이 시기가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기로 스스로를 테스트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주로 착한 역할을 연기했는데, 해본 적 없는 제대로 된 악역을 통해 연기 변신을 하고 싶다. 연기가 재밌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연기든 소화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뿐이다.
무엇보다 현재 중년 배우로서 시간을 잘 보내야 노년까지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최정윤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글을 읽고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연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때가 되면 선배 배우들에게서 보았던 연륜과 삶의 태도를 갖출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청담동 스캔들’에 출연한 배우들과 지금까지 연락하고 주기적으로 자주 만나요. 반효정 선생님도 만나는데, 제가 선생님을 참 좋아합니다. 지금도 안주하지 않고 배우로서 고민을 계속하시는 모습이 정말 멋져 보여요. 반효정 선생님을 포함해 좋은 선배님들과 함께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은 배우로서 정말 큰 복이라고 느낍니다.”
딸 지우, 그리고 또 다른 가족
책임져야 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에 최정윤은 더욱 열심히 일하려고 한다. 그의 슬하에는 2016년 태어난 딸 지우가 있다. 엄마를 꼭 빼닮은 지우는 벌써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요즘 훈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다는 최정윤은 자신을 ‘적당한 엄마’라고 표현했다.
“좋거나 나쁜 엄마의 기준을 잘 모르겠지만, 엄마로서 저는 적당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지 않고, 아이가 스트레스받지 않게 하죠. 그런데 예의, 사회성 교육은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성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거든요. 또 잘못한 게 있으면 혼나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섭섭함을 느껴 투정 부릴 때도 있지만, 저는 안 받아줘요. 나중에 엄마가 왜 그랬는지 알아줄 거라고 생각해요.”
작품 활동으로 바쁠 때는 어머니와 피아노 선생님이 지우를 돌봐줬다. 피아노 선생님과 최정윤의 관계는 참 특별하다. 여섯 살 때 피아노 선생님과 제자로 만난 두 사람은 40년간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우리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나이 많은 친구, 조금 어린 친구. 선생님이 항상 곁에 있었기 때문에 저한테는 너무나 당연한 관계였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40년 우정의 피아노 선생님과 함께 연예계 절친으로 유명한 배우 박진희에 대해 최정윤은 ‘나의 또 다른 가족’이라고 표현했다.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과는 진짜 친구가 되기 어렵다고 하는데, 최정윤과 박진희는 벌써 20년 넘게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최정윤은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래가고, 의리가 넘쳤다.
“만약 내가 죽으면 지우는 어떻게 하지 걱정이 된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박)진희가 자기가 무조건 데려가서 키우겠다고 한 거예요. 진희는 정말 일하면서 얻은 보물이에요. 주변에 친구가 많아도, 이렇게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나기는 힘들거든요. 진희, 피아노 선생님처럼 가족 이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해요. 가족이라는 게 꼭 혈연으로만 이뤄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정윤에게는 평온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크든 작든 어떤 일에도 스트레스받지 않는 성격 덕분일 것.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그의 앞날에는 당연히 꽃길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누군가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면 어떨 것 같아?’라고 물어볼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저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답해요. 지금 삶도 좋은 점이 많은데 왜 과거로 돌아가서 힘들었던 순간을 반복하나요? 과거를 후회해봤자 시간만 아깝고 아무런 발전도 없어요. 우리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재밌게 살아요!”
40년간 ‘종이학’, ‘날개 잃은 천사’, ‘아모르파티’ 등 1200여 곡의 주옥같은 노래를 탄생시켜온 이건우(60) 작사가. 여러 히트곡을 만든 그는 정작 “내가 쓴 가사는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그저 자신이 만나온 수많은 인연이 들려준 이야기를 녹이고 정리했을 뿐이라고. 개인이 아닌 대중의 언어를 담은 가사가 빛을 발했다는 의미일 테다. 그래서일까? 이건우의 가사는 평범한 일상 언어들의 부딪힘 속에서 공감과 위로의 노랫말로 경이롭게 배열된다. 그렇게 지난날 영감을 줬던 사람들과 가사에 얽힌 에피소드를 담아 그는 첫 작품집 ‘아모르파티’를 펴냈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이건우가 작사하고 김연자가 불러 세대를 넘나들며 대박을 터뜨린 곡이다. 특히 “인생은 지금이야”,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등의 가사는 중장년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작사가 인생 40주년을 기념하는 도서에도 동명의 제목을 달았다.
“인생의 콘셉트랄까? 그게 바로 ‘아모르파티’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그 제목을 썼다면 모호했겠지만, 제 책이다 보니 상징적으로 바로 와 닿는 게 있는 것 같아요. 60이라는 나이나, 40주년을 기념하는 제목으로도 잘 어울리고요.”
작사가 역시 글을 짓는 사람일진대, 40년을 활동하며 이제야 첫 책을 냈다니 좀 의외였다. 그러나 그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권, 그리고 지금이 딱 좋다고 말했다.
“자기 분야에 몰입해도 모자랄 사람이 책을 내거나 다른 일을 하는 게 별로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전부터 내 인생의 책은 단 한 권으로 끝내야겠다고 결심했죠. 왜 특별히 40주년에 출간했느냐 묻는다면, 30주년은 좀 덜 익은 것 같고, 50주년은 솔직히 그때까지 가사를 쓰고 있을지 모르겠더라고요. 어느덧 40주년이 됐고, 이제는 제 노래를 한 번 정리해도 괜찮겠다 싶었죠.”
“나는 천재 작사가가 아니다”
이건우는 최근 한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유산슬(유재석)의 ‘합정역 5번 출구’를 작사하며 젊은 세대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작신’(작사의 신)이라는 별명까지 생겼을 정도로 그를 각인시킨 것이다. 식을 줄 모르는 인기 속에서 과거 그가 작사한 곡들이 자연스럽게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옛 노래의 가사를 보면 스스로도 ‘내가 어떻게 이런 가사를 썼지?’ 하며 감탄할 때가 있단다.
“제가 쓴 가사가 좋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이 살아왔어요. 남의 떡이 더 커 보였죠. 그러다 요즘 제삼자의 눈으로 보니 남다르더라고요. 막 훌륭하다기보다는 ‘아, 40년 동안 나도 참 열심히 했구나’ 싶었죠.”
40년을 히트곡 메이커로 달려올 수 있었던 데에는 부단한 노력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우는 최근에서야 그것이 노력의 산물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예술가를 만드는 건 99%가 천재성이라 생각해왔어요. 언젠가 한 학생이 노래 부르는 걸 보고, 가수는 안 되겠다 판단한 적 있죠. 그러고 얼마 전 그 애를 다시 봤는데, 실력이 확 좋아진 거예요. 그때 깨달았죠. 아, 노력이 타고난 것을 이길 수 있구나. 돌아보니, 나 역시 타고난 사람이 아닌데 은연중에 천재성이 있다고 착각했던 거죠. 현재 작사가로 활동하는 데 내가 가진 천재성과 노력의 비율이 3대 7 정도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아마 나이가 들수록 노력의 비율이 점점 10에 가까워지겠죠. 아무리 천재라도 노력 없이 평생 창작할 순 없을 테니까요.”
그런 그가 가장 노력하는 일 중 하나는 바로 사람과의 만남이다. 그는 평소 주변 사람과의 평범한 대화 속에서 영감을 받기 때문이다. 아무리 타인의 이야기를 쓴다고 하지만, 작사가의 인생철학도 가사에 꽤 투영되지 않았을까? 그는 결과적으로 쉽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가령 패티김 40주년을 기념해 쓴 ‘인연’처럼, 대부분의 곡은 가수가 정해지면 작업을 시작해요. 그러면 그 가수에게 어울리는 얘기가 주로 담기죠. 또, 시나 그림 같은 창작물과 다르게, 대중가요는 작곡가, 프로듀서, 편곡가 등 여러 명의 합작품이잖아요. 자기만족만으로 완성할 수 없죠. 물론 일부분 제 인생을 녹이기도 하지만, 오롯이 그것이 드러나긴 어렵습니다.”
중년의 플로리스트를 꿈꾸며
노래가 주는 힘은 ‘위로’와 ‘공감’일 것이다. 이건우 역시 이에 주안점을 두고 가사를 쓴다. 아울러 그는 여기에 한 가지가 요소가 더해져야 진정 ‘좋은 노래’가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노래를 왜 들을까요? 저는 세 가지라고 생각해요. 먼저 나를 위로해 달라, 그리고 내게 감동을 달라, 마지막으로 나를 생각하게 해 달라. 그중 앞의 두 가지를 노래에 담는 게 쉽지 않아요. 세 가지를 다 만족시키긴 아주 어렵다는 거죠. 그러나 생각거리까지 줘야 정말 좋은 노래고, 좋은 가사라고 봐요. 메시지가 중요하단 얘긴데, 그렇다고 노랫말이 무겁고 거창하면 안 되거든요. 가수가 부르기 편하게, 대중이 듣기 쉽게, 최대한 가사의 힘은 빼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렇게 잘 만들어진 노래는 대중에게 감동을 주지만, 이를 위해서는 누구보다 작사가가 먼저 감동을 해야 한단다. 그래서인지 임진모 음악평론가가 이건우를 가리켜 ‘먼저 (자신이) 감동하는 인간’이라 표현한 데에 대해 그는 당연한 얘기라며 수긍했다.
“‘신이시여, 정말 제가 쓴 가사가 맞습니까? 정말 나 미친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제가 쓴 가사를 보고 감동의 클라이맥스까지 가봐야 비로소 작품을 발표하는 거예요. 그 정도는 돼야 대중이 알아줄까 말까 하겠죠. 그런데 나조차도 흔들어놓지 못하는 가사를 내놓으면 과연 누가 그 노래를 듣고 감동을 할까요?”
이건우는 처음 비행기를 탔던 감격의 순간을 담아 ‘황홀한 고백’을 작사했다. 이후론 아무리 비행기를 타도 더 이상 그만한 가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경험이 선사하는 감동이 대단하다는 걸 알기에 늘 도전을 마다치 않는다.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라고 쓴 ‘아모르파티’의 가사처럼, 그는 가슴을 뛰게 할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꽃꽂이와 수화를 배울 거예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죠. 취미 정도가 아니라 준전문가가 될 정도로 해보려고요. 갑자기 유명세를 타는 바람에, 유독 정신없는 한 해를 보냈어요. 알다시피 인기는 한때잖아요. 내년쯤 잘 정리하고, 계획했던 일들을 해나갈 거예요. 예쁜 꽃을 잘 꽂아서 선물도 하고,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수화로 노래를 전달하고 싶어요. 요즘은 그런 의미 있는 일로 누군가가 즐거워할 모습을 상상할 때 가장 설레고 가슴이 뜁니다.”
일본 최대 규모의 극단 ‘사계’ 출신으로 검증된 실력을 자랑하는 뮤지컬 배우 이기동(50) 씨. 국내 대중들에게는 생소한 배우이지만, 1989년 뮤지컬 ‘쉘부르의 우산’으로 데뷔한 뒤 지금껏 60여 개의 작품에 참여했다. 최근에는 뮤지컬 ‘아모르파티’에서 70대의 나이에 사랑을 꽃피우는 ‘박만돌’ 역을 맡아 노년의 사랑을 풀어내고 있다.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파티의 뜻처럼 무대가 자신의 ‘운명’ 같다는 이기동 씨. 오랜 무명생활 속에서도 꿈을 놓지 않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만돌’은 어떤 캐릭터인가?
사연이 많은 인물이에요. 초등학교 때 6·25전쟁을 겪었고, 휴전 후에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책임지기 위해 탄광에서 일하다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고막을 다쳤죠. 결혼한 뒤에는 부인에 이어 자식까지 먼저 떠나보내게 돼요. 그렇게 평생을 외롭게 살다 70대의 나이에 ‘금옥분’이란 사람을 만나 사랑의 불씨를 피우기 시작해요.
노년의 사랑을 연기하며 무엇을 느꼈는지?
젊었을 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다음 사랑이 찾아올 거라 믿는 경우가 많잖아요. 근데 나이가 들면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지금의 사랑이 마지막이라고 여기게 되거든요. 실제로 노년에는 진정으로 마음 가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기도 하고요. 그래서 젊었을 때 하는 사랑보다 노년의 사랑이 애틋함이 더 큰 것 같아요.
작품 속 유독 와 닿았던 장면이 있다면?
아마 대부분의 나이 많은 한국 남자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표현을 잘 못해요. 물론 저도 그렇고요. 말 안 해도 어련히 알겠지 해요. 박만돌도 마찬가지예요. 옥분이가 떠난 뒤 그녀가 쓴 편지를 읽으며 후회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씩씩한 박만돌 씨 보세요” 하고 글이 시작되는데, 매번 그 편지를 읊을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프고 먹먹해요.
뮤지컬 넘버 중 가장 공감 갔던 노래는?
오승근의 ‘있을 때 잘해’라는 곡이 있어요. 노래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가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요. 작품을 하고 나니 너무 공감되더라고요.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이 노래 가사는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사랑 이야기에 필요한 말 같아요. 저와 옥분이의 듀엣곡인 노사연의 ‘사랑’도 참 좋아하는데요.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못해본 두 사람의 상황을 대변하는 가사라 부를 때마다 늘 슬퍼요.
또래인 중장년층에게 들려주고픈 곡이 있다면?
중장년층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언제나 가족 걱정부터 하고 정작 자기 자신을 돌볼 시간은 없죠. 가끔씩이라도 스스로에게 아모르파티에 나오는 가사처럼 응원의 말을 건네면 어떨까 싶어요.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개인적으로 활동하며 힘들었던 순간은?
일본에서 활동할 때는 극단에 소속돼 있어서 주기적으로 공연을 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뒤 다시 이기동이란 이름을 알리기가 힘들더라고요. 발로 뛰면서 오디션을 보러 다녔죠. 그 과정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요. 자리 잡는 데 한 4년 걸린 것 같아요.
오랜 무명 생활에도 무대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이 질문이 가장 어려운데요. 고등학교 연극반에서 연기를 처음 시작했고, 서울예대에서 연기를 전공했어요.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인생을 배우로 시작해 배우로 마감하자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정해진 운명처럼 느껴졌다고 할까요? 근데 나이가 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해요.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이 있다면?
30년 가까이 활동을 했지만 아직도 저는 미완성인 것 같아요. 언제 완성될지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내년, 내후년에는 더 나은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또 다른 꿈이 있다면,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서 관객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게 바람 중 하나입니다.
뮤지컬 '아모르파티'
일정 11월 29일까지 장소 JTN 아트홀 1관
연출 이영수 출연 이기동, 이보라, 오산하, 이경수 등
트로트 바람이 뜨겁다.
한동안 침체 됐던 트로트를 향한 대 국민적 관심을 끌어냈던 ‘미스트롯’은 시니어들에게 큰 감동을 안겼다. 트로트가 중장년층의 추억을 되살리는 것은 물론 젊은 세대들에게까지 트로트의 새로운 맛을 안기며, 생기를 불어넣으면서 음악계 전체가 주목하고 있다.
트롯가수 양성, 시니어모델 양성, 시니어뮤지컬 배우를 양성하고 있는 남예종예술실용전문학교(대표 차은선)가 시니어 여성6인조 세미트롯댄스그룹을 결성하기 위해 공개모집을 실시한다.
‘레이디돌’ 가수 공개모집 오디션 일자는 11월 29일(금) 오후 1시 남예종 아트홀에서 개최된다. 참가대상은 4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가수를 희망하고 음악적 감각이 있는 여성들이며, 접수기간은 10월 25일(금)부터 11월 26일(화)까지다. 접수는 남예종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번 공개모집 오디션에서는 MBC ‘놀면뭐하니’에서 유재석의 작사 멘토로 유명한 1200곡의 ‘히트곡제조기’ 이건우 작사가가 심사하며, 선발된 인원에 대해서는 데뷔의 길이 열린다.
남예종 관계자는 “이번 오디션 분야는 보컬, 댄스, 특기 등을 심사하며 최종합격자는 국내 최초 세미트롯댄스그룹으로 활동할 예정이며, 노래, 춤, 끼가 다분한 5060세대 여성들로 멤버를 구축한다”고 전했다.
‘레이디돌’ 제작자는 시니어뮤지컬 감독인 안수현 총감독이 진두지휘할 예정이며, 아모르 파티 작사가인 이건우 교수가 직접 곡을 선물할 예정이다.
안수현 총감독은 “이번 레이디돌 오디션에서 음악을 사랑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시니어들의 도당찬 도전을 기대해본다”며 “활기차고 건강한 50대 꽃중년들의 예능의 꿈을 펼쳐보시라”고 말했다.
전에 알지 못했기에 몇 년 전에 발표된 줄도 몰랐는데 요즘 내 마음 속으로 쏙 들어온 노래가 있다. 나는 음악이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젊을 때는 트로트를 듣지 않았다. 아니,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트로트를 들으면 무식해 보일 것 같은 편견까지 있었다.
당시 어른들이 말했다. 나이 들면 음악 성향도 다 바뀐다고, 그러나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큰소리쳤다. 그런데 옛말 그른 것 하나 없다는 말처럼 나이가 드니 내게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 그렇게 무시했던 가수 남진, 나훈아가 지금은 너무 섹시해 보이고 노래도 멋지게 들리는 것이다.
최근 유튜브를 보다가 한 영상에 눈길이 꽂혔다. 선남선녀의 결혼식에서 우아한 한복 차림의 친정어머니가 축가를 부르는 모습이었다. 신나는 반주에 맞춰 열창하는 노래가 너무나 매력적으로 들려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노래 제목은 바로 ‘아모르파티(amor fati)’. 아모르파티에서 파티는 우리가 흔히 아는 ‘party’가 아니라 ‘fati’로 운명이라는 라틴어라고 한다. '아모르파티'는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뜻이어서 축가로서도 손색이 없는 노래다.
역주행이라는 말이 있다. 오래전에 발표되었지만 당시에는 인기를 얻지 못하다가 다시 유행이 되는 역주행 노래가 있다. 가수 김연자의 노래 ‘아모르파티’도 그렇다. 리듬이 경쾌해 들으면 이토록 신이 나는데 왜 이제야 듣게 되었는지 의아하다. 가사도 의미 있다. “쏜 화살처럼 사랑도 지나갔지만 그 추억들 눈이 부시면서도 슬펐던 행복이여”라는 구절이 내 가슴을 울린다. 생각해보니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내용 같다. 나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옛 추억이 가슴 아파 슬프게 느껴지는 행복이 있다. 유행가 가사는 어찌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잘 표현하는지 놀랍다.
유튜브 동영상에 나오는 매력적인 친정어머니는 무대 위에 나란히 선 딸과 사위를 향해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 뛰는 대로 살라”고 노래했다. 신혼부부에게 할 얘기는 아닌 듯하지만 장면이 재미있어 웃으며 감상했다. 그 영상을 본 후 나도 아모르파티를 배워 멋지게 불러보고 싶어졌다. 한때 가수가 되려 한 적도 있으므로 금방 배워 잘 부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휴대폰을 켜놓고 따라 불러보니 만만치 않은 노래였다. 몇 시간을 연습해도 가수 김연자처럼 감칠맛 나게 부르기가 힘들었다. 리듬을 따라가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잘 불러보려고 열심히 연습 중이다.
누구나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소설 같은 이야기를 써가며 산다. 자신에게 실망하지 말자.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되고 인생은 지금이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트로트 가사에 다 녹아 있다.
아모르파티! 우리 모두 운명을 사랑하고 지금을 멋지게 살아보자.
한 시대를 풍미하고 아스라이 손 흔들며 사라졌던 대형 가수가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와 198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던 가수, 바로 김연자(金蓮子·58)다. 오랜 시간 일본에서 ‘엔카(えんか)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그녀. 한국으로 돌아와 조용히 활동하는가 싶더니 8년 만에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트로트도 엔카도 아닌 강렬한 사운드의 댄스음악 이른바 EDM으로 말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젊은이들의 마음까지 단숨에 사로잡은 김연자와의 만남. 수은등 불빛 아래를 지나 찬란한 인생을 다시금 맞이한 그녀는 이렇게 외친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김연자는 몰라도 ‘아모르파티’는 안다
가수 김연자가 부른 ‘아모르파티’의 인기는 대단하다. 좋아하는 연령대도 어린이에서부터 시니어 세대까지 다양하다. TV는 말할 것도 없고 거리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아모르파티’가 흘러나온다. 한 번 들으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전자악기 리듬에 몸을 맡기다가 결국에는 가사의 매력에 더 빠져버리고 마는 노래가 ‘아모르파티’다.
“이 곡을 쓴 작곡가 윤일상씨가 어떤 음악을 만들고 싶냐고 묻더라고요. 지금까지 내가 굴곡진 인생을 살았지만 이 모든 것이 앞으로 다가올 내 인생을 위해서 있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후회하지 않고 앞만 보고 살겠다는 ‘인생 찬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탄생한 곡이 ‘아모르파티’입니다. 가사는 ‘철이와 미애’의 신철씨가 써줬어요. 아모르파티란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라 하더군요.”
‘아모르파티’는 2013년 발표곡이다. 윤일상씨는 이 노래가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놓아야 할 대박곡이라고 예견했지만 지금과 같이 폭발적이지 않았다. 노래가 빠르다 보니 따라 부르기 힘들어 중년 팬들에게 어려운 곡이었다. 4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 곡의 매력 포인트를 찾아낸 이들은 중년 팬이 아닌 10대 팬들. 올해 TV의 한 음악 프로그램을 방청한 10대들이 김연자가 부르는 ‘아모르파티’를 듣고 SNS에 퍼트린 것. 신나고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찾아내 그들의 문화로 김연자와 ‘아모르파티’를 끌어당긴 것이다. 음악 순위 역주행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어제 무주 구천동에서 노래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는데 학생들이 ‘꺅! 언니!’ 하고 난리가 났어요. 저인 줄 몰랐는데 시선이 저를 향하고 있더라고요. 어머니들이 환호해 주시는 건 있었어도 이런 기분 처음이죠.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거든요. 근데 어쩜 그렇게 꺅 하고 소리를 잘 내요(웃음)? 육십을 바라보는 나한테 언니래요. 근데 너무 좋더라고요. 새로운 행복감에 젖어 있어요.”
국보급 가수 한류 열풍 초석을 다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김연자의 인기는 톱스타란 말로 부족했다. TV만 틀면 안 나오는 곳이 없었다. 가요 프로그램이며 합동 공연이며 대미는 늘 김연자 차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간드러지면서도 폭발적인 목소리는 국보급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홀연히 사라졌다. 너무 갑작스러운 행보. 대스타가 한순간에 떠나는 일이 있었던가.
“사라진 게 아니에요. 시댁이 일본이었고, 속으로 늘 그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 우리나라에서 계속 일이 잘되니까 갈 기회를 놓치고 있었던 거죠. 마침 무슨 사정인지 당시 매니저가 일본에 가도 된다고 했어요. 이때다 싶어 얼른 간 거죠. 그런데 그때가 일본에 처음 간 것은 아니었어요.”
이발소를 하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가요계에 데뷔한 김연자는 일본 음반회사 오디션을 통해 일본에 진출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 나이가 열여덟이었다.
“제가 운이 좋은지 주위 사람들 도움으로 좋은 기획사에 들어갔어요. 월급이 꽤 괜찮았던 곳입니다. 25만엔을 벌면 집으로 20만엔을 보냈어요. 엔화 가치가 높을 때라 그런지 한국에 갈 때마다 집이 바뀌더라고요.”
김포공항으로 가족이 마중 나오지 않으면 집을 찾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 일본 생활을 접고 들어갔을 때는 작은 연립주택을 장만했다. 일본에서 보낸 돈을 어머니께서 열심히 모아주신 덕이다.
“3년 동안의 일본 생활이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제 인생에는 많은 도움이 됐어요. 실패의 원인을 생각해봤는데 일본을 갈 때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고요. 진짜 몸만 갔죠. 일본에 다시 가려면 일본에 대해서 알아야겠다 싶어서 일본어와 일본 문화, 한문 등을 따로 공부했어요. 스물아홉 살에 다시 갔을 때는 마음이 참 편했어요.”
한류의 원조, 20년 생활의 막을 열다
서울올림픽 찬가였던 ‘아침의 나라에서’를 일본어로 번안해 부르며 자연스럽게 일본 음악계에 진출했다. 각종 공연이며 TV며 행사며 한국에서는 대형 가수였지만 신인의 자세로 매사 임했다. 언어의 장벽도 내려앉았다. 일본인들도 감탄하면서 그녀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고 응원해줬다.
“다 내려놓고 마음만은 스타라는 생각으로 갔어요. 캠페인에도 나가고요, 일본 신인들하고 똑같이 했죠.”
유독 공연 무대가 많은 일본에서는 노래 가사를 완벽하게 외우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엔카 가수이지만 탱고, 블루스, 발라드 등 다양한 노래를 배우고 관객 앞에서 선보이는 것이 일상이었다. 무대에서 최소 20곡은 소화해야 하는 강행군. 한국어도 아니고 일본어로 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솔직히 어려운 일이었다.
“매년 가을에 3400석 규모의 NHK홀에서 콘서트를 했어요. 공연을 위해서 여름에는 계속 노래 연습을 했어요. 가끔 쉴 때는 집 앞 공원으로 반려견들을 데리고 나가 산책하면서 노래 가사도 외우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없으면 노래 연습을 하느라 중얼중얼… 그때 당시 저희 집에 많을 때는 반려견이 다섯 마리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저를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겠어요(웃음). 일본에서의 여름은 그렇게 보냈습니다.”
나도 뮤지컬 배우였다!
일본에서의 다양한 활동 이야기를 하다 보니 뮤지컬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자연스럽게 김연자의 뮤지컬 도전기로 이어졌다.
“니나가와 유키오(1935~2016)라는 유명한 연출가가 계셨는데 제 목소리가 좋다고 불러주셨어요. 라는 작품에서 집시 역할을 맡았어요. 연기 진짜 어렵더라고요. 노래는 5절까지 이어져도 하나도 안 잊어버리는데 대사는 맨날 까먹는 거예요(웃음).”
역시 김연자의 이름에 걸맞게 개런티도 주연배우 다음으로 많이 받았다고. 그런데 개런티로 받은 돈을 의상비로 다 써버렸다는 톱스타 김연자.
“사실 말이 좋아 주인공 다음이지 뮤지컬 한 달 하고 받은 개런티가 제가 노래 하루 불러서 받는 개런티에도 못 미쳤어요. 원래 의상팀에서 의상을 다 준비해주기는 했는데 너무 값싸 보이는 거예요. 역할이 집시이지만 밍크도 가짜고, 자존심이 너무 상했어요. 그래서 선생님께 제 옷으로 다 하겠다고 허락받고 따로 준비했어요. 그랬더니 개런티가 그렇게 없어지더군요(웃음).”
동경과 오사카에서 공연하는 동안 동생들도 공연을 관람하러 왔다고.
“나 같지가 않았나봐요. 저는 노래 부를 때 외에는 저 같지가 않아요. 다른 거 하면 작아 보이고 불안해 보이고요. 아,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때 알았죠.”
단 한 번의 배우 체험 뒤 연기 분야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일본에서 한국 가수 그리고 한국 사람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김연자가 일본으로 무대를 옮겼을 때는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이었다. 문화·정치적으로 냉랭하던 시절을 버티고 이겨내 엔카 여왕의 자리에 앉은 김연자. 결코 쉬운 일도 아니었고 모두에게 허락된 일도 아니었다. 처음보다 마음이 편했다지만 한국인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은 물론이고 숱한 편견과 맞서야 했다.
“제가 그냥 보통 가수였다면 진작 문제 일으키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거예요.”
한창 일본에서 활동할 때 일이 힘들면 여권을 들고 길을 나서기도 했다는 충격 발언.
“한국에 가려고 공항으로 갈 택시를 잡는 거죠(웃음). 그런데 살던 동네가 시내와 너무 떨어져서 택시가 안 오는 거예요. 그러면 택시 기다리다 생각을 하는 거죠. 가수 김연자에 대한 것은 참겠는데 ‘한국 가수’ 김연자가 뭘 잘못했다는 기사는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내가 한국으로 가버리면 이런저런 매스컴에서 ‘한국 가수’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떠들어댈 것이 뻔하잖아요. 한국 사람으로서 어떤 부정적인 말 한마디도 듣기 싫었어요.”
길에 서서 망설였던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했다. 그때마다 다음 날 신문에 올라갈 지독한 기사 제목이 떠올랐다. ‘한국 가수 김연자가 스케줄 펑크 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 우리나라를 힘들게 하면 안 되겠지. 그러고는 마음 다잡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내 감정을 억누른 것 같아요. 그렇게 20년을 일본에서 생활했어요.”
아버지 때문에 한국행을 결심하다
“우리 아버지는 말이 안 통했어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련하게 말끝이 잦아든다. 광주에서 이발소를 하시던 아버지에게 노래 잘 부르는 딸은 그저 자랑이었다. 아버지의 “야! 너 서울 가서 가수 돼!” 한마디에 무대에 올라갔다가 아직도 그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아버지 때문에 가수가 된 거죠. 감사하죠. 가수 될 운명을 알아보시고 어린 시절에 빨리 뭔가를 겪게 해주셨죠. 한국 복귀도 아버지 때문이었고요.”
8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가족들은 바쁜 김연자에게 이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돌아가시고 열흘이 지난 다음에 엄마가 전화를 하셨어요. 스케줄이 있는지 물으셔서 없다고 했더니 그제야 아버지가 떠났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날 일본의 작은 고깃집에 앉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아버지도 공연 보러 일본에 많이 오셨었죠.”
아버지가 타계한 후 한국으로 돌아온 김연자는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오가며 활동 중이다. 그사이 재일교포 남편과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하고 헤어졌다. 김연자가 일본에서 거액의 돈을 벌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남겨진 재산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매니저 겸 밴드 단장이던 전 남편을 평생 동반자로 생각했기에 쓰지 않았던 계약서가 문제였다. 일본에서는 계약서를 쓰지 않은 김연자를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했다. 일본 팬들과 연예 관계자들을 마주하면서 사정을 얘기했고 조금씩 김연자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전 남편과 지낸 세월이 아깝지 않은지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거액은 숫자일 뿐이죠. 제 눈에 현금이 오가는 것도 아니고요. 사실 제가 후회를 별로 안 해요. 이 순간이 제일 중요해요. 지금이 이 순간이 있어야 내일도 있잖아요. 난 항상 그렇게 살기 때문에. 어떨 때는 좋은 기억이건 나쁜 기억이건 다 잊어버려요(웃음). 단념도 빠르고 꿈도 빨리 꾸고. 그런 거 없어요. 그리고 저는 부자는 아니지만 하루 삼시 세끼 잘 챙겨먹고 사니까 괜찮아요. 나름 부동산도 있고 집도 있어요.”
어렸을 때 많이 의지했던 전 남편에 대해 그녀는 남은 감정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내보였다.
“솔직히 저나 전 남편이나 0에서 시작했죠. 오랜 시간 정신적으로 의지했어요. 일본 연예계에 대해서도 그 사람이 전부 알려줬어요. 서로 상부상조한 거죠 뭐.”
미국에 셰어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연자!
“어머니가 오래전 저에 관한 점을 보셨다는데 제가 일흔까지 노래를 부른대요.”
처음에 그 얘기를 우습게 들었는데 이제 슬슬 현실이 돼가는 느낌이 밀려온다고. 하고 싶은 공연만 하고 여유롭게 사는 것을 꿈꿨는데 젊은 가수들하고 똑같이 뛰고 있어 자기 모습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좋다.
김연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미국 가수 셰어(Cher)가 떠올랐다. 1960년대까지 포크 가수로 활약하던 셰어. 한참을 배우로 지내더니 1999년 ‘빌리브(Believe)’란 음악을 선보이며 전 세계를 전자 음악 열풍에 빠뜨렸다. 올해 71세인 셰어는 지난 5월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빌보드 아이콘 어워드를 수상했다.
김연자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성인 팬을 상대로 노래 부르다 어느 날 갑자기 세대를 뛰어넘어 EDM 열풍에 불을 지폈다. 71세의 셰어 언니도 망사옷 입고 무대를 누비고 있으니 한국 ‘EDM 대모’, ‘연자방아’로 거듭난 70세 김연자의 무대도 기대한다.
요즘 나이를 불문하고 유행하는 노래 중 하나이다. 중견가수 김연자가 부르는 폴카 풍의 노래로 신나는 곡이라 젊은 층이 주류를 이루는 클럽 등에서도 인기라는 것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에서 '아모르(Amore)'는 '사랑'이라는 뜻이다. ‘파티’는 ‘파티(Party)'로 오해 할 수 있는데 파티는 ’Fate‘ 즉 운명을 말한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주장했다고 한다. 아모르 파티는 운명에 대한 사랑, 즉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즉, 운명이란 타고 난 것이므로 운명을 바꾸려고 애써 봐야 소용없으니 운명대로 살면서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건우, 신철이라는 사람이 작사했고 수많은 히트곡을 만든 윤일상씨 작곡으로 되어 있다. 가사를 보면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대중가요의 히트 요소를 고루 갖춘 노래인 것이다.
가사 중에 사람들이 좋아할 요소들을 살펴보면 ‘인생은 지금이야’, ‘가슴이 뛰는 대로 하면 돼’는 요즘 한창 화두인 ‘카르페 디엠’과도 맞닿는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에서 소개했듯이 ‘오늘을 즐겨라’는 뜻이다.
‘왔다 갈 한 번의 인생아’, ‘다가올 사랑은 두렵지 않아’ 가사는 요즘 역시 화두인 ‘YOLO(You Only Live Once)’ 즉, 한 번뿐인 인생이니 현재를 즐기며 살자는 의미가 있다. 카르페 디엠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
‘자신에게 실망 하지 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는 오늘의 청년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위로가 되는 말이다. ‘노오력’이 노력해봐야 안되더라는 자조적인 말로 쓰이는 것을 보면 운명에 대해 좌절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눈물은 이별의 거품일 뿐이야’, ‘다가올 사랑은 두렵지 않아‘는 요즘 젊은이들의 풍조를 그대로 나타낸 가사이다. 이러니 결혼 안하는 사람이 많고 저 출산으로 이어진다.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사는 시니어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요즘 취업은 안 되고 따라서 결혼도 못하고 있는데 나이만 먹어간다고 푸념하는 젊은이들도 공감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다 보니 몸은 늙었으나 마음만은 아직 청춘이라는 시니어들이 많다. 오승근 노래 ‘내 나이가 어때서’가 히트한 것도 같은 배경일 것이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라며 거울에 비친 늙은 모습에 눈물이 난다는 것이다.
‘인생’은 사랑, 이별과 함께 대중가요 3대 단골 주제이다. ‘인생’이라는 같은 제목만으로도 여러 가수가 부른 서로 다른 노래가 많다. 안치환의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 주지 않았다’처럼 ‘인생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노래 제목까지 확대해보면 인생 주제의 노래가 정말 많다. 인순이의 ‘인생’이라는 노래에서는 ‘인생이란 잠시 쉬어 가는 우리 여행 길’이라고 했다.
우리가 태어나서 한번뿐인 인생이라며 열심히 살았다. 이제 인순이의 ‘인생’ 가사에서 ‘황혼 빛에 물드는 노을처럼만 아름답게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알 수 있는 거죠. 그게 바로 인생이란 걸’에서 이제 조용히 운명을 받아들이는 시기가 온 것 같다. 다시 아모르 파티 가사에서 ‘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에 지나간 추억을 아름답게 추억하며 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