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알았다. 인간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참 좋은 울음터다, 이곳에서 한바탕 울고 싶구나!”
‘열하일기’에 나오는 한 대목, 그 유명한 ‘호곡장’(好哭場, 울기 좋은 곳)이다. 건륭 황제 축하 사절단으로 따라가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광활한 요동벌판을 마주하면서 전율하듯 탄성을 터뜨리자 일행 중 한 명이 “이렇게 훤하게 터진 곳에서 별안간 통곡을 생각하다니, 무슨 말씀이신가?” 하고 묻는다. 이에 연암이 말한다.
“사람들은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중에서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 아는데 기쁨이 넘쳐도 울고, 노여움이 차올라도 울고, 즐거움과 사랑에 사무쳐도 울고, 욕심이 가득해도 울게 된다네. 왜 그런 줄 아는가? 가슴이 답답하고 꽉 막힐 땐 소리 내는 것만큼 좋은 게 없거든. 통곡이란 우레와 같아 지극한 감정에서 터져 나오고 그 소리는 사리에 절실할 테니 울음이나 웃음이나 뭐가 다르겠는가.”
열흘 내내 걸어도 지평선만 보이는 끝없는 평원 앞에서 인간이란 한낱 고독한 존재일 뿐임을 깨닫기라도 한 것일까. 요동벌판을 바라보며 울음터를 연상한 이 기막힌 역설의 아포리즘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흠모와 질투를 유발하고 있다.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삶
연암은 조선시대 최고의 작가였다. 문장이 단단하고 빈틈이 없다는 예찬이 자자하다. 사마천과 장자와 소동파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솜씨 좋은 기술로 독자들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노니는 그를 셰익스피어, 괴테에 못지않은 대문호로 봐야 한다는 학자들도 있다. 연암 스스로도, 자신의 문장에 장점은 없지만 세상 물정을 표현해내는 재주만큼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낫다고 슬쩍 자랑을 한다. 또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은 글이 맺고 끊음 없이 너저분하고 길기만 하다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묻곤 했다.
홍대용 박제가와 함께 북학파로 불리고 ‘호질’, ‘양반전’, ‘허생전’ 등의 한문소설을 쓴 연암은 높은 학문적 식견은 물론이고 유머의 천재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의 웃음과 해학에는 언제나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가 가득했다. 특히 ‘열하일기’는 그만의 철학적 사유와 해학, 익살의 표현을 풍부하게 담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737년 한양에서 태어난 박지원의 집안은 명문세가였지만 그가 자랄 때의 살림은 30냥짜리 집 한 채와 작은 밭뙈기밖에 없을 정도로 곤궁했다. 하지만 검소한 삶을 자부심으로 여기며 살았다. 조선 지식인의 틀에서 벗어나려 무던히도 애썼던 연암은 젊은 시절 출세의 길을 일찌감치 단념했다. 영조와 정조 두 임금이 주목할 만큼 실력이 빼어났으나 과거시험을 보러 가면 백지 답안을 내놓거나 그림을 그려 넣는 등의 기행을 저지르곤 했다. 혹자는 예민했던 영조가 조선 임금에 대한 폄하의 글이 들어 있던 청나라의 역사책 명기집략(明紀輯略)을 읽거나 소지한 사람들을 다 잡아들이는 것을 본 뒤 그가 벼슬길을 접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연암은 이후 아무런 직업도 없이 지내며 중년을 맞이한다. 이를테면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삶이었다.
조선의 베스트셀러 ‘열하일기’
8촌 형의 제안을 받고 청나라 황제 생일 축하 사절단을 따라 북경엘 간 건 1780년. 그의 나이 마흔네 살 때였다. 그런데 북경에 도착했을 때 청의 황제가 열하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다시 700리를 가야 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연암에게는 일생에서 가장 큰 경험을 하게 해준 행운(?)의 날들이었다. 한양에서 열하까지 왕복 약 2400㎞(6000여 리)나 되는 긴 여정을 끝내고 돌아온 연암은
3년여에 걸쳐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를 쓴다. 소위 선진문화의 보고라 일컬어지는 이 기행문은 당대의 베스트셀러라 불릴 만큼 인기였다.
청나라에 대한 기록은 매우 상세했다. 연암은 감명 깊게 본 코끼리와 벽돌과 수레 등이 청나라의 힘이라고 생각했고 조선에 부족한 것들을 지적하면서 그 원인이 무능한 사대부들에게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앞다퉈 읽었다. 출간도 되기 전에 필사본이 나돌 정도로 연암의 글은 막강한 위력을 떨쳤다. 하지만 정조는 그의 글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문체가 유교적 질서를 흐트러뜨린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연암의 문체를 흉내 낸 공문서까지 올라오자 경박하고 잡된 책이 많이 나온 데서 말미암은 것이라 경고하며 그 주범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한다. 이후 연암은 반성문까지 썼고 그의 책은 100여 년간 금서가 됐다.
연암은 ‘열하일기’를 쓰고 난 후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여전히 가난했다. 때때로 끼니 걱정을 했고 지인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결국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구했지만 그래봐야 나이 오십에 미관말직을 얻어 15년간 일했을 뿐이다. 짧은 공직생활이었음에도 연암이 현감을 맡았던 고을의 백성들은 그를 오랫동안 그리워했다고 한다.
자신을 소소(笑笑) 선생이라 불러 달라 했던 연암. 그의 웃음소리를 듣고 귀신도 놀라 도망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는 유쾌하고 호방했다. 문체가 순정하지 않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서로 묶여 있었던 ‘열하일기’에서 당대에는 불온하게 보였을 그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본다.
그가 생애 처음 압록강을 건너며 “그대, 길을 아는가?”라고 물었다던 질문은 “그대, 길을 잃었는가?”로 바뀌었고 연암은 서화담의 일화를 빌려 답을 마무리한다.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그는 1805년 6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시인은 시를 품은 인식으로 산다”고 말하는 이규리(李珪里·64) 시인. 그런 그에게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인식을 심어준 문장은 바로 ‘종이는 종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다’(틱낫한)이다. 종이는 종이 그 자체가 아닌 물, 나무, 바람, 햇빛 등 수많은 요소로 이뤄졌다는 것. ‘종이’와 ‘종이 아닌 것’이 같다는 걸 알고 난 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렇듯 시로써 다 말하지 못했던 깨달음을 모아 그는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에 담았다.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이후 5년 만에 펴낸 이규리 시인의 새 책은 시가 아닌 아포리즘(격언, 경구 등의 글귀)으로 채워졌다. 책에는 오랜 세월 시인이 삶과 자신에게 던져온 숱한 질문과 대답의 흔적들이 녹아 있다. 아포리즘의 형태를 가져왔지만, 책을 읽다 보면 시인다운 표현들이 눈에 띈다. 어쩌면 시를 통해서도 같은 의미를 전할 수 있었으리라. 특별히 아포리즘으로 일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시라는 건 굉장히 압축되고 비유되고 또 감춰져 있어서 정작 저자의 의도를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그에 비해 아포리즘은 말하려는 바를 더 논리적으로 드러낼 수 있죠. 그동안 살면서 제가 품었던 궁금증이나 질문들은 책과 사람을 통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어요.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독자가 있다면 내가 정리한 답이 도움 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런 이야기를 보다 명징하게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포리즘이 적합하다고 봤어요.”
뒤를 바라보며 지나는 삶
독자에게도 도움을 주는 글들이겠지만, 그는 집필기간 무엇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책을 위해 단기간에 글감을 찾아 모은 것은 아니다. 지난 10년여 동안 메모노트에 적어둔 글들을 바탕으로 3년 정도 엮는 과정을 거쳤다. 아주 오래전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할 메모노트는 그에게 ‘재산’과 같단다.
“메모노트는 늘 가지고 다녀요. 노트 중간에 간지를 끼우고 절반은 제 생각이나 글을 쓰고, 나머지 절반은 독서나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얻은 것들을 적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좋은 글인데 이게 내 생각인지, 다른 데서 들은 이야기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있거든요. 그렇게 쓴 메모노트 내용 중 시로 탄생한 것도 있고, 아포리즘으로 풀어낸 것도 있죠.”
이규리는 서두 ‘작가의 말’에 “오래전부터 메모되었던 글들이 모였을 때 그 흔적이 아픔이고 견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썼다. 많은 것을 견디며 살았다는 그는 책에서 ‘견디고 있다’와 ‘지나고 있다’는 두 말을 ‘결혼시키고 싶다’고 표현했다. 그 독특한 문장이 지닌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누가 ‘어떻게 지내?’라고 물었는데 ‘견디고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곱씹어보니 견딘다고 하면 내가 뭔가 수고했다는 게 포함된 말 같은 거예요. 그보다 더 적확한 표현이 없을까 생각하니 ‘지나고 있다’가 떠오르더라고요. 물론 둘 다 좋고 아름다운 말이에요. 이런 말들을 새기고 산다면 경멸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와도 잘 견디고 지날 수 있죠. 그때가 지나면 언젠가 말할 기회가 찾아오는데도 우리는 늘 성급해서 먼저 얘기해버리고 후회를 하잖아요. 견디고 지나며 살아갈 때 인간은 성숙해지고, 세상은 평화로우리라 생각하니 두 말이 참 아름답게 느껴져 짝지어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누군가가 견디고 지나는 모습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처럼 그는 보이지 않는 ‘뒤’라는 존재에 대해 오래전부터 고찰했고, 그 생각들은 이번 아포리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의 3부에는 “뒷모습은 정확함보다 정직함에 가깝다”는 문장이 나온다. 그는 특히 시인이라면 겉이나 앞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그 내면과 뒤의 모습까지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우리는 즐거움을 느끼죠. 그 음식을 내놓기 위해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수고했는지까지는 생각하지는 않아요. 어쩌면 그날 해고된 직원이 식당 뒤에서 울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단순히 잘 차려진 식탁만 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 특히 시인은 보이지 않는 삶과 세계까지 살피고 이해해야 해요. 그런 점에서 앞보다는 뒤, 밝음보다는 어둠, 만복보다는 공복 쪽에 서서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완성은 과정이 머물다 멈추는 지점
이규리 시인은 불안(不安), 불리(不利), 부족(不足) 등 ‘아니 부(不)’를 지닌 단어들도 가까이하고 좋아한다. 그렇다고 ‘부’가 들어간 단어 모두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不正), 불법(不法), 불신(不信) 등은 멀리한다. 어떤 기준으로 단어들의 호불호가 나뉘는지 고민하던 그는 결국 해답을 찾았다.
“칼날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불안, 불리, 부족 등은 내가 불편하고 손해를 보기 때문에 칼날이 나를 향하지만 부정, 불법, 불신 등은 칼날이 상대를 가리키고 다치게 하죠. 그걸 발견한 뒤부터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면 칼날의 방향을 따져보고 판단해요.”
그렇게 인생을 알아가고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나가는 동안에도 고민과 물음은 끊이지 않았다. 젊은 시절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해답을 고요히 스스로 찾을 수 있게 해주는 연륜이 생겼다는 것. 자신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삶을 살아낸 중장년이라면 대부분의 문제는 자기 인생 안에서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린 답은 모두 정답일까? 그는 몇 번이고 다시 묻고, 부정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내가 어떤 답을 내렸을 때, ‘그래 이게 맞아’라고 끝내기보다는 ‘과연 내 답이 맞을까?’라고 의문했을 때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어떤 일을 할 때도 ‘완성했다’고 여기지 않으려 합니다. 화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마지막 초상화를 그릴 때 완성에 가까운 작품인데도 18일 동안 지우고 또 지우며 다시 그렸다고 해요. 그렇게 완성이란 무언가를 계속하는 과정 속에서 멈추는 지점일 뿐이지, 완벽한 완성은 없다고 봐요. 같은 맥락에서 우리 인생 역시 죽음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완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살아 있는 한 삶은 미완성일 수밖에 없고,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의문하고 부정해야 합니다.”
아포리즘에 영감을 준 도서 by 이규리
◇ 카프카와의 대화 (구스타프 야누흐 저)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에게 영혼과 인생을 사로잡혔던 한 청년의 이야기. 저자는 17세 당시 37세의 카프카를 만났다. 이후 카프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4년여 동안 그와 나눈 대화와 정신적 교류에 대해 기록했다.
◇ 작가수첩 (알베르 카뮈 저)
알베르 카뮈가 22세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기록한 총 7권의 노트 내용을 모아 엮었다. 작품을 구상하면서 떠올린 단상과 창작계획, 초고, 독서메모 등으로 구성돼 작가 특유의 예민한 감성과 성찰을 엿볼 수 있다.
◇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울라브 하우게 저)
평생 정원사로 일하며 400여 편의 시를 쓰고 200여 편의 시를 번역한 노르웨이 시인 울라브 하우게의 대표 시 30선을 담았다. 쉬운 언어로 담담하게 표현한 그의 시들은 담백하게 읽히면서도 강한 깨달음을 선사한다.
◇ 소유하지 않는 사랑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저)
장미를 사랑했으나 장미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 릴케. 그런 모순과 방황 속에서 살았던 시인의 작품을 초기, 중기, 후기로 분류해 정리했다. 마지막 4부에서는 릴케의 시작노트와 헌시, 그리고 미발표 원고를 공개한다.
어느 날 인생 이모작을 잘 준비했다는 지인을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의견의 일치를 본 부분이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엔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또 죽을 때까지 공부를 멈추면 안 된다는 것. 하기 싫은 일이나 시험을 위해 하던 공부에서 해방되었으니 허락된 시간을 누리자는 생각이었다.
인문학 책을 함께 읽고 나눌 그룹을 찾다가 독서클럽은 아니지만, 글 쓰는 훈련을 하는 그룹이 있어 탐색 겸 백화점 문화센터에 갔다. 보통은 말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쓰지만, 글을 잘 쓰는 사람 모두가 말을 잘하는 것 같지는 않다. 가끔 글은 좋은데 강의는 엉망인, 작가 반열에 오른 분을 만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잠깐 들어본 강의가 맘에 척 달라붙어서 계속 듣게 되었다. 입을 벌릴 때마다 주옥같은 박식함이 무슨 보석처럼 인생의 경험에 녹아 나오면 수업 내내 행복한 마음으로 강의를 경청하곤 했다. 3개월 12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주 1회 1시간 30분씩 듣는 강의였다.
수필을 쓰고 퇴고를 거치며 글쓰기를 연마하는데 인간이 살아가며 경험하는 솔직한 표현들이 좋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따스함으로 가만가만 스밀 때는 저절로 눈이 감긴다. 게다가 마음에 드는 수필을 외워서 문학회의 ‘연간 행사’로 무대에 올라 낭송하게 되었다. 원하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처음엔 외운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요령은 그냥 반복해서 읽는 수밖에 없다. 어느 단계가 되면 저절로 외워진다. 외우다 보면 작품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고 또 독자에게 그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좀 힘들어도 얻는 것은 그 이상이다. 좋은 작품을 외우게 되면 글쓰기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부수적으로 발성, 호흡에 대해서도 기본 훈련을 하게 되어 발음이 정확해진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느낌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고, 무대 울렁증이 있는 사람도 있어서 열심히 외웠어도 보통 7분 정도 소요되는 중간에 잊어버리거나 어색해져서 진땀을 흘리기도 하지만 곧 익숙해진다. 한번은 남여 듀엣으로 아포리즘 고전 수필 낭송을 했었다. 조선 인조 때 문신으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인 ‘신흠’의 아름다운 수필이었다. ‘숨어 사는 선비의 즐거움’으로 한가로움과 풍류를 전하는 내용이었다.
필자와 남자는 함께 호흡과 감정을 조절하며 연습을 여러 번 했다. 작은 몸짓까지도 맞추며 우린 무대 위 완벽한 커플로 탄생할 참이었다. 그는 감청색 양복을, 필자는 양반가의 여인답게 하늘색 모시 저고리와 연청색 모시 치마를 기품 있게 받쳐 입고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무대에 섰다. 인사도 맵시 나게 연습한 대로 잘했다.
이제 마이크를 숨소리 같은 부담스러운 잡음이 나지 않도록 조절하며 낭창거리는 소리로 낭송을 시작했다. 그와 필자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선비의 멋스러움과 풍류를 살려가며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켜나갔다. 필자의 대사가 끝나고 그가 할 차례가 되었다. 시작을 잘하는가 싶었는데 아뿔싸! 이상하게 같은 대사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두 번쯤 그러더니 소리가 끊겼다. 난감했다. 필자는 그의 대사까지 외우지 못했다. 스토리가 연결되는 글은 잊어먹어도 비슷한 내용으로 이어나갈 수 있지만 이런 수필은 단락이 끊어져 있어 외우기도 어렵고 중간에 잊어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 20개 정도의 단락을 각자 외우고 있었는데 단락의 시작을 찾아야 꼬이지 않고 술술 나오게 되어 있다. 그는 순간 당황했는지 단락의 처음부터 다시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을 맺었지만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혹시 잊었으면 자연스럽게 다시 시작해도 사람들은 반복이겠거니 생각하기도 한다. 당황하지만 않으면 그럴 일은 별로 없다.
묵독이 아닌 낭독의 문화 즐기기
시는 글이 짧고 은유가 많아 청취자에게 전달이 쉽지 않을 때도 있지만 수필은 작가의 체험에서 나온 글이라 이해가 쉽고 공감이 잘된다. 그 대신 시보다는 외워야 할 분량이 많다는 어려움이 있다. 시와 비교해서 감정을 잘 살리면 즐거운 시간이지만 아니면 지루한 시간이 되기도 쉽다.
작품에 따라 무대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효과음악을 고르고 표정과 작은 몸짓도 연구하고 무대에 오른다. 작품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와 마치 새로운 연인을 만나듯 가슴이 뛰고 활기가 넘친다.
필자는 4년째 기획, 연출, 낭송을 즐겁게 하고 있다. 함께하는 회원(10명)과 1년에 두 번씩 공식무대를 만들고 외부 초청 낭송에도 응한다. 작가의 강연 때 그의 작품을 낭송해 강의를 풍요롭게 하기도 한다.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효과가 있다.
꼭 문학단체가 아니라도 격조 있는 모임에서 옛 선비들이 시조를 읊듯 시나 수필 낭송을 원할 때도 있다. 종종 감동한 관객이 끝나도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보람이다. 얼마 전 어떤 문학회 출판기념회에서 초청, 낭송을 했는데 70명 정도 모이는 조촐한 모임이었다. 그 모임 지도교수님의 대표작 낭송이 끝나자 교수님은 벌떡 일어나 젖은 눈으로 다가와 필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고맙다, 잘했다, 문우들은 그 작품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 작품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고 말했다. 낭송하는 시간은 마치 앞에 앉은 사람이 필자에게 눈을 맞추고 자신의 얘기를 진솔하게 털어놓는 듯하다. 그래서 몰입하면 깊은 내면을 함께 여행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수입은 낭송 작품당 보통 20~30만원을 받는다. 외우는 데 걸리는 시간이나 노력을 생각해서 그리 주시는 것 같다. 필자는 현재 두 개의 작품이 예약되어 있다. 하나는 피천득 기념 강좌에서 선생님의 작품 ‘보스턴 심포니’를 낭송하고, 또 하나는 일현수필문학회 송년회에서 손광성 선생님의 ‘누나의 붓꽃’을 낭송하기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