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기억이 흐릿해지는 것 같다가도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풍기는 장소에 방문하거나, 음악을 들으면 학창 시절이 어제처럼 생생해진다. 오늘날 ‘라떼(나 때)는 말이야’가 과거의 무용담을 밥 먹듯이 늘어놓는 이들을 비아냥대는 유행어로 쓰이고 있지만, 사실 한창때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라떼’가 그리운 이들을 위해 옛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쎄시봉 (C'est Si Bon, 2015)
오늘날 가요계를 주름잡는 대표 가수로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가 꼽힌다면 1960~70년대에는 트윈폴리오가 있었다. 한국 포크 음악계의 전설 송창식과 윤형주가 1967년 결성한 듀오다.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쎄시봉’은 트윈폴리오에 숨겨진 제3의 멤버 오근태가 있었다는 설정으로 출발해 ‘트리오 쎄시봉’의 탄생 비화와 이들의 얽히고설킨 첫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종로구 무교동 음악감상실 ‘쎄시봉’과 주인공들이 만들어나가는 음악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시니어라면 반가울 만한 에피소드를 군데군데 갖춰 놓는다. 특히 근태(정우)와 자영(한효주)이 늦은 시간까지 데이트를 하다 ‘통금’시간에 맞춰 도로를 질주하는 장면, 자영을 미니스커트 단속에서 지켜주기 위해 자영의 짧은 치마를 대신 입은 근태의 모습 등은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낭만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여기에 ‘하얀 손수건’, ‘담배가게 아가씨’, ‘딜라일라’, ‘웨딩케이크’ 등 세월을 관통하는 명곡들은 덤. 신파적인 감성이 과하다는 평이 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추억 여행을 떠나기엔 충분하다.
2. 써니 (Sunny, 2011)
파란만장한 학창 시절을 추억할 때면, 세월이 흘러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바로 질풍노도의 시기 함께 울고 웃었던 친구들이다. 1980년대 여고를 배경으로 한 영화 ‘써니’는 그 시절 시끌벅적한 학창 시절과 학급 분위기를 상기시킨다. 영화는 평범한 주부 나미(유호정)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고교 동창 춘화(진희경)를 위해 옛 친구들을 찾아 나서며 벌어지는 내용을 담는다.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전개 방식을 따르며, 수줍은 전학생 나미가 써니 멤버를 만나 추억을 쌓아가는 모습을 통해 때 묻지 않은 10대의 우정을 풋풋하게 그린다. 한편 중년이 된 써니 멤버들은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는 친구들을 통해 잃어버렸던 정체성을 되찾고, 다 함께 모여 춤 연습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여고 시절로 되돌아간다. 영화는 그 자체로 타임머신 역할을 하면서, 나미의 ‘빙글빙글’, 영화 ‘라붐’의 주제곡 ‘리얼리티’ 등 타이밍 좋게 흘러나오는 추억의 음악으로 향수를 더욱 자극한다. 보니 엠의 ‘써니’를 흥얼거리며, 먼지 쌓인 졸업앨범을 펼쳐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다.
3. 그대 이름은 장미 (Rosebud, 2018)
‘써니’가 여고 동창들의 우정을 이야기한다면, 영화 ‘그대 이름은 장미’는 한 여성의 찬란했던 옛꿈과 사랑을 그린다. 주인공은 고등학생 딸을 키우며 하루하루 전쟁처럼 살아가는 싱글맘 장미(유호정)다. 지금은 영락없는 주부의 모습이지만, 그녀에게도 가수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녹록치 않은 현실로 꿈을 포기하고, 딸 현아(채수빈)를 낳은 이후부터는 흐르는 세월을 잊으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사고로 옛 연인 명환(박성웅)을 마주치게 되면서 마음속에 묻어둔 추억을 하나둘 꺼내보기 시작한다. 전반적인 코드가 ‘써니’와 비슷한 듯하지만,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된다. 또 과거보다는 현재 시점을 위주로 보여주며, 엄마로서의 고단함, 딸과의 갈등 등 현실적인 내용에 집중해 밝고 활기찬 과거 장면과 톤을 달리한다. 서로 다른 두 영화를 합친 듯한 구성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극적인 대비를 통해 누군가의 부모로 살아가는 이들도 한때 장미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잘하고, 똑 부러지는 여고 시절을 보냈다. 누군가의 자랑, 반듯함을 넘어서는 행동은 용납하지 않았을 명문여고 출신.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육십이 넘어 거추장스런 무게를 벗어던지게 될 줄 말이다. 이화여고 출신 여성 시니어 록밴드 루비밴드. 그녀들의 드라마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토요일 오후, 잠실의 한 합주실. 밴드 활동을 즐기는 젊은이들 사이에 만 64세 이화여고 동창 5인조 그룹사운드 루비밴드가 매주 자리를 잡고 합주한다. 리더이자 드럼인 박혜홍을 주축으로 문윤실(일렉 기타), 박순희(베이스 기타), 류은순(건반), 이오옥(보컬)이 루비밴드의 멤버다.
루비밴드. 붉은 빛이 강렬한 보석 루비를 뜻할 뿐만 아니라 ‘생기 있고(Refresh) 흔하지 않은(Uncommon) 아름다움(Beautiful)과 젊음(Young)을 간직한 밴드’라고 자신들을 당차게 설명한다. 시니어의 안정감 위에 신선함과 도전정신을 덧발라 세상이 없던 색깔로 거듭나고자 노력한다고 했다. 현재 이들이 완벽하게 연주하는 곡은 ‘Bad Case of Loving You’, ‘누구 없소’, ‘바운스’, ‘Keep on Running’ 등 총 8곡이고 현재 2곡 등을 더 연습하고 있다. 박자가 서로 맞지 않으면 연주를 멈추고 상의도 한다. 루비밴드의 대표 커버곡인 ‘Bad Case of Loving You’는 좀 더 완벽한 연주를 위해 반복해서 연습했다.
특히 이날은 류은순 씨가 합류하는 날이었다. 현재 부산 부경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인 류은순 씨는 한 달에 한 번 상경해 멤버들과 합을 맞춘다.
“루비밴드 최초 공연을 같이했고 최근에 다시 합류했어요. 마침 제가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영화를 보고 살짝 록 음악에 대한 판타지에 빠져 있었는데 루비밴드의 건반 자리가 비었다고 들어오라더군요. 훗날 밴드 활동으로 봉사도 해보자고 친구들이 말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매달 올라오지만 정년 후에는 밴드 활동을 더 열심히 할 수 있겠죠.(웃음)”
금강산 놀순이에서 탄생한 루비밴드
이 여성 밴드의 탄생은 5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화여고 개교 40주년을 앞두고 뭔가 의미있고 재미있는 것을 하자며 1974년도 졸업생 몇몇이 머리를 맞댔다고 베이시스트 박순희 씨가 말을 꺼냈다.
“동창 중에 ‘금강산 놀순이 팀’이라고 있어요. 내금강에 같이 갔다 온 친구들이 뭔가 일을 꾸며보자고 입을 모았어요.”
밴드를 해보자는 아이디어는 중학교 교사 출신이자 학생들과 다수의 합주 경험이 있었던 박혜홍 씨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때 친구들을 쓱 둘러봤습니다. 마침 클래식 기타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윤실이가 있었어요. 피아노를 친다는 은순이도 생각났고요. 지금은 베이시스트이지만 노래 잘하는 순희도 밴드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렇게 밴드를 구성해서 이화여고 개교 40주년 모임에서 공연했어요. 두 곡을 불렀는데 가발 쓰고 옷도 요란하게 입고 난리를 쳤어요. 기대 이상으로 호응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니 뜸해지더라고요.(웃음)”
난생처음 느껴보는 환호와 박수의 무대였지만 밴드 활동은 잦아들었다. 그 무렵 각자의 자녀들이 결혼하고, 손자손녀가 태어나다 보니 육아의 일부분을 챙기는 멤버들도 생겨났다.
시니어 밴드로 무대에 오르다
그냥 잊힐 뻔한 루비밴드의 이름이 다시금 수면 위로 오르게 된 계기가 있었다고 박혜홍 씨가 말했다.
“작년에 시니어 밴드를 찾는 한 기업의 모집 공고를 보게 됐습니다. 일상에 젖어 살고 있었는데 뭔가 불끈하며 가슴을 때렸어요. 멤버들을 찾아서 의견을 모으고 이제 정말 제대로 해보자고 말했습니다. 기타 잘 치는 윤실이랑은 지속적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딱 눈에 들어왔어요.”
10년 넘게 치던 클래식 기타를 과감하게 내려놓고 일렉 기타로 전향했다는 문윤실 씨는 루비밴드를 묵묵하게 이끌어온 대표 멤버다.
“저는 클래식 기타 팀에서 오랜 시간 활동했어요. 일렉 기타를 제대로 연주하고 싶어서 학원에 다녔습니다. 물론 다들 각자의 기량을 높이기 위해 실용음악학원에는 다니더군요. 클래식 기타 연주로 봉사 많이 다녔어요. 클래식은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이 매력이죠. 그런데 밴드 음악은 사람들에게 흥과 즐거움을 주더라고요. 박수도 치고 기분 좋게 웃는 얼굴들을 보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물 만난 보컬과 천재 베이시스트의 등장
때마침 루비밴드의 보컬이 될 인재(?) 이오옥 씨가 불쑥 나타났다. 이화여고 출신 중에는 보기 드문(?) 캐릭터라고 할까? 화장을 곱게 하고 알록달록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밴드에 적합한 인물이다.
“개교 42주년 송년회 때 행운권 당첨이 되어서 무대에 나갔어요. 노래를 부르라기에 목청껏 불렀습니다. 그런데 혜홍이가 제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했어요. ‘밴드를 재결성할 건데 너 보컬 할래?’ 해서 당연히 ‘OK!’라고 했어요.”
그리고 첫 공연 때 보컬을 담당했던 박순희에게 베이스 기타를 권유했다. 노력파에 박자감각이 뛰어났기에 베이시스트로서 멤버들의 몰표를 받았다.
“제가 원래 대한약사회 합창단 출신입니다. 그런데 연락이 왔어요. 베이스는 ‘둥둥둥둥’치기만 하면 된다고 했어요. 사실 베이스 기타는 여자가 치기가 힘들어요. 연락 받자마자 베이스를 배우려고 기타 학원에 등록했어요. 작년 4월이었어요. 학원 선생님이 이런 천재가 어디 숨어 있었냐고 했습니다.”
팀을 결성하고 멤버들은 피나는 노력을 했다. 연습 3개월 후 시니어를 위한 공연 무대에 올라 6곡을 완벽하게 연주했고 앙코르곡도 소화해냈다. 여고 동창들 앞에 섰던 무대를 발판으로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이후 방송과 언론 매체에 시니어 여성 록밴드로 소개되면서 각종 축제에 초청돼 연주 여행을 가기도 했다. 작년 말에는 보컬 이오옥 씨의 아들 결혼식에서 축하 공연을 했다고. 곱게 한복을 입고 혼주석에 앉아 있던 이오옥이 나와서 밴드와 함께 춤을 추자 결혼식장이 콘서트장으로 변했다는 후문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니 자신들보다 더 나이 많은 분들을 찾아다니며 봉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젊은 사람들처럼 빠르게 많은 음악을 섭렵할 수는 없지만 자신들의 실력에 맞춰 록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다.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루비밴드는 언젠가 한국 시니어 여성 밴드의 힘을 알리며 세계를 누비고 싶다고 했다. 눈부신 활약을 기대해본다.
중학교 도덕 선생 출신에 생활지도부장으로 명예퇴직했다는 ‘루비밴드’ 리더이자 드러머 박혜홍 씨. 교사 시절 학생들과 함께 밴드를 만들어 합주했던 경험이 밴드 탄생에 크게 도움이 됐다.
“젊을 때는 제가 교사로서 굉장히 인기가 많았어요. 유머감각도 많았고요. 그런데 아이들은 역시 젊은 선생님을 좋아하더군요. 나이 들고 도덕 선생이다 보니 잔소리가 늘고 그래서 학생들과 점점 멀어졌습니다. 크리스마스카드도 조금씩 줄더라고요.”
다시 한번 인기를 되찾아볼까(?) 싶어서 학교 주위를 둘러보니 밴드활동하는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고 했다.
“그래서 사제(師弟)밴드를 만들었어요. 선생님과 학생이 함께하는 밴드. 당시는 획기적인 일이었어요. 드럼을 쳐보고 싶어 학원에 가서 기초부터 배웠습니다. 쉬운 줄 알고 덤빈 제 잘못이죠. 그렇게 사제밴드를 만들고 두 달 만에 버즈의 ‘가시’라는 곡을 축제에서 연주했어요.”
여건이 되는 한 매년 한 곡씩 학생들과 함께 공연을 했다. 다른 학교에 가서도 꾸준히 밴드를 조직했다.
“루비밴드를 만든 계기는 중학교 교사 시절에 학생들과 밴드를 만들었던 기억이 강렬했기 때문이에요. 이화여고 개교 40주년이 됐는데 의미있는 활동이 없을까 하다가 그럼 밴드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겁니다.”
그때 그녀 눈에 클래식 기타를 치는 문윤실이 들어왔다.
“제가 윤실이에게 그랬습니다. 일렉 기타라는 것이 있다. 그걸 아느냐? 뭔가 느꼈는지 바로 밴드에 들어왔습니다. 독일 병정보다 더 단단한 이미지의 친구가 루비밴드의 기타를 맡아주니 든든했어요. 개교 42주년 동창모임에서 오옥이를 만난 것도 신의 한 수였죠. 일단 제가 사람 보는 눈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람은 잘 잡아요.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단원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사고 있습니다.”
건반 류은순 씨가 들어와 지금의 완전체를 이루기까지 멤버가 여러 번 바뀌었다. 이 과정을 통해 루비밴드 색깔에 맞는 보컬도 찾아냈고 천재적인 기량을 발휘하는 베이시스트도 찾아냈다.
“저희가 좀 신선하잖아요.(웃음) 시니어 여성 밴드이다 보니 관심 가져주는 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저희 또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 밴드 경연대회에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올해 송년 모임에서 공연해 달라는 곳이 꽤 됩니다. 어떤 사람들 눈에는 저희가 할머니일지 모르지만 마음은 여전히 꽃다운 소녀이자 청춘임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고2 때 친구들과 남산에 올라갔어요. 서울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여고 동창생들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학생, 사진 좀 찍어줄래?’ 하며 카메라를 내밀더라고요.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이라서 언감생심 만져보지도 못한 카메라였어요. 친구들끼리 서로 미루다가 그분들이 일러준 대로 셔터를 눌렀죠. ‘찰칵’ 하는 소리가 기막히더라고요.”
까까머리 소년은 그날 손끝으로 느꼈던 셔터 음의 짜릿함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칠순을 넘긴 지금까지도 카메라와 함께 살고 있다. 사진을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들까지 가르치느라 하루도 쉴 틈이 없다는 한국사진작가협회 교육이사 문제민(文濟珉·76) 씨. 현역 시절보다 더 바쁘고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바쁜 시간을 쪼개 만나기로 한 날, 그가 들고 온 가방에는 노트북과 각종 자료들이 가득했다.
“법무부 산하 기관에서 공무원 생활을 끝낼 무렵 퇴직 후의 시간을 생각해봤어요. 평생 카메라를 끼고 다녔으니 디피점이나 열어볼까 했죠. 그런데 그 무렵 디지털카메라가 막 나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저는 사진 관련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잠깐씩 사진 강의도 했던 터라 자연스럽게 사진 교육 강의를 하게 됐어요.”
은퇴 후의 시간을 고민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준비되어 있는 사진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공무원 시절 국비유학으로 일본 연수를 떠났을 때도 시간만 나면 도쿄의 책방을 드나들며 사진 책을 봤다.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귀국할 땐 사진 관련 서적을 한아름 안고 돌아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진 공부는 그에게 일상이다.
“은퇴 후에는 누구든 한동안 공허함 속에 있게 돼요. 그러나 이 무렵의 위기는 성장을 견인하는 시간이기도 하죠. 매일이 소중하고 가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려면 미리미리 조금씩 준비하는 게 중요해요.”
집념의 한 우물이 열어준 인생 2막
요즘도 그는 사진 수업 준비를 하느라 컴퓨터 작업에 여념이 없다. 나날이 도약하는 제자들의 실력에 용기를 주는 것도 큰 일과다. 그의 인터넷 카페엔 제자들 사진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그래서 매일 아침 일어나면 두 시간 정도 올라온 사진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감상평을 남긴다.
그는 늘 긍정적이다. 학생들 사진을 보며 절대 부정적 평가를 하지 않는다. 다양한 삶을 살아온 이들의 특성을 존중한다. 이런 태도는 오랜 직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법무부에서 청소년 보호 관찰 업무를 담당할 때도 비행청소년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문책을 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단점은 감싸주고 장점은 열심히 칭찬해주는 것이 오히려 재발 방지에 효과적이더라고요. 그렇게 지낸 40년의 사회생활이 퇴직 후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준 셈이죠.”
물론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도 있다.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 대부분은 연륜이 있는 시니어. 자기 삶의 방식으로 오랜 세월 지내온 이들이라 자아가 강한 사람도 더러 있다. 그렇지만 그런 딜레마조차 약으로 삼고 보람으로 채운다. 그는 특히 제자들의 개인전 초대장을 받았을 때, 함께 단체전을 기획하는 모습을 볼 때 행복하다. 사진 작업을 통해 멋진 인생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더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받는 위로가 참 좋아요. 사진을 통한 교류는 예술 감각도 키워주고, 자연 속으로 돌아다니며 풍경을 찍으니 건강에도 도움이 돼요. 사진 활동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멋지게 살아가는 제자들을 보면 뿌듯합니다.”
별명은 제비콩, 콩샘
‘제비콩’은 그의 별명이다. 문제민이라는 이름의 ‘제’ 자를 따 어린 시절 친구들이 지어줬다. 그때는 그 별명이 왜 그렇게 싫던지 친구들에게 화를 내며 못 부르게 했다. 그런데 한참 세월이 지나 사진 관련 사이트를 만들게 됐을 때, 닉네임을 무엇으로 만들까 고민하다가 어릴 적 친구들이 만들어준 별명이 문득 생각났다. 그 호칭이 이제는 제자들에게까지 사랑스럽게 불리게 됐다. ‘콩샘’이라는 귀여운 애칭까지 생겼다.
그에게서 강의를 들은 한 제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해 겨울, 교외로 출사를 나간 적이 있어요. 쨍! 하고 얼음이 갈라질 만큼 추웠던 날이었는데 그날따라 장갑을 안 가지고 나갔어요. 셔터만 누르면 되는데 ‘추워봤자 얼마나 춥겠어’ 하는 배짱으로 나갔다가 손가락이 떨어져나가는 줄 알았어요. 손이 너무 시려 더 이상 사진을 찍지 못할 정도였어요. 그때 지도교수로 오셨던 콩샘이 차를 세워둔 주차장까지 한참을 걸어가셔서 장갑을 가져다주셨어요. 제 손에는 커서 헐렁거렸지만 그렇게 따뜻한 장갑은 처음이었어요. 그날의 기억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누구나 은퇴 후의 삶을 걱정합니다. 더구나 콩샘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제2의 업으로 삼기는 쉽지 않죠. 그런 면에서 콩샘이 너무너무 부럽습니다.”
문제민 씨는 제2의 인생을 쉽게 맞이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운명처럼 카메라를 만났을 때 미친 듯이 빠져들었고, 거짓말을 하고 사진을 찍으러 가느라 돌아가신 어르신을 또 한 번 돌아가시게 했다고 말하며 웃는다. 박봉의 공무원 월급에서 조금씩 떼어내 적금을 들고 그 돈으로 아내 몰래 카메라와 렌즈를 구입하면서 그때마다 들키지 않으려 숨겼던 일도 있었단다.
“그 비싼 필름을 사서 정신없이 찍었어요. 그야말로 카메라에 미쳤던 거지요.(웃음)”
칠순이 되었을 때 지인들이 잔치를 해라, 개인전을 해라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의 사진과 십수 년간 가르친 제자들의 사진 500점을 정리해 함께 실은 사진집을 출간했다. 그동안 나눈 대화와 댓글 내용도 실었다. 그리고 300여 명의 제자들과 출판기념 자리도 마련했다.
“이 책은 나의 역사입니다. 은퇴 후 건강한 삶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수강자 몰리는 인기 강사
지금도 그가 강의하는 수업을 들으려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문화원 수강 신청은 금방 마감된다. 주부, 퇴직자, 젊은이, 심지어 아픈 환자도 그의 강의를 듣고 싶어 한다. 한때는 신청자가 너무 많아 큰 강당을 빌려야 했다. 입소문을 타며 인기 강사가 된 그는 백화점 문화센터와 다양한 지역에서 강의를 한다. 17년 동안 가르친 제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요즘은 사진 출사만을 위해 오는 수강생들도 있다고 한다. 전국의 풍광 좋은 자연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으니 소문이 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관심사로만 사진을 대하는 사람들이 안타깝다고 했다.
“물론 그렇게라도 사진을 찍으면 좋아요. 그런데 컴퓨터도 배우고 사진 폴더 관리도 할 줄 알면 더 좋아요. 포토샵도 배우고 인터넷 카페를 통해 서로 정보를 나누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시니어는 디지털 퍼스트 시대의 순기능을 적극 이용해야 해요. 컴퓨터는 여러 가지로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놀이기구이거든요. 더불어 테마를 정해 자신만의 사진 세계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해요. 그래야 실력이 향상되고 오랫동안 사진을 즐길 수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어느 신문에서 “예술가 중 가장 오래 사는 사람들은 사진가”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연 속에서 잡념을 버리고 즐길 수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안개 속 몽환적 풍경, 계절의 변화를 담아내는 셔터 소리는 짜릿함의 끝판왕이다.
그는 지금도 1960년대의 풍경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나라 각 지방은 물론이고 중국의 오지 차마고도, 티베트 등지로 출사를 다녀오곤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 중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는지 물었다.
“잘 찍은 사진요? 그런 거 없어요. 앞으로 찍어야죠. 건강하게 계속, 강의도 하고요.”
그가 추구하는 삶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사진을 통한 건강한 삶은 그의 모토다. 그리고 언제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여고 동창생, 특히나 여고 졸업반 친구들은 아련하고 각별하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갈피갈피를 같이하는 게 고교 친구가 아닐까. 방과 후 수다를 조잘조잘 나누던 여고 동창생들이 이제는 며느리, 사위 볼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었다. ‘거울 앞에 선 누이’가 된 적잖은 나이이지만, 함께 모이면 여전히 단발머리, 교복 입었던 그 시절로 달음질친다. 추억은 돌아보는 것이지만 만들기도 해야 한다는 소신 하에 계를 부어 여행을 계속 떠나며 추억을 만들어온 지 어언 12년째다. 서로를 안 지 40년 남짓. 강산은 네 번이나 변했지만 우정은 한결같다.
도화진, 오은경, 이소윤, 김성회. 우리 4명의 가장 큰 공통점은 모두 헛똑똑이, 허당이라는 점. 방향 감각이 엄청 떨어지는 길치란 점도 그렇다. 해외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같은 길을 몇 번씩 돌아갔다 원점으로 돌아올 때, 지하도 출구를 몇 번씩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할 때 서로를 보며 깔깔거린다. “어쩌면 우린 이런 것까지 똑같니? 요즘 세상에 이렇게 만나기도 힘들다. 이렇게 덜떨어진 우리 같은 사람들끼리 만나는 것은 우연이니? 필연이니?” 하면서.
우리 여고 동창들은 대학교 다닐 때 함께 국내 여행을 다니다가 해외로 여행 영역을 넓혔다.
지금도 그때 그 시절 사진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서로의 옷을 바꿔 입고 나름 예쁜 척하며 바닷가에서 찍은 모습들이란… 촌스럽지만 풋풋하다. 이후 한 친구는 유학을 갔고, 한 친구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모두 모이지 못하는 소강기간도 있었다. 그러다가 마흔 넘어 비로소 네 명의 아귀가 채워질 수 있었다. 2010년 처음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갔고, 2013년엔 스페인으로 패키지여행을, 그다음 2016년엔 조금 더 용기를 내서 크로아티아로 에어텔을 예약,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올해 5월 11~20일 네덜란드-벨기에로 여행을 다녀왔다. 해외여행으론 네 번째다. 좌충우돌 알콩달콩 네덜란드-벨기에 자유여행 이야기를 공개한다. 3회로 나누어 연재할 예정이며 그 첫번째를 싣는다.
암스테르담 교외 전원마을 히트호른 직행
우리는 해외여행을 갈 때 되도록 밤비행기를 이용한다. 호텔비 1박을 아끼는 이점, 그리고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활동, 시차적응이 쉽다는 양수겸장의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저녁은 간단히 먹고 기내식으로 푸짐하게 배를 채운 뒤 와인 한 잔까지 걸치고 푹 잤다. 좁은 이코노미석 새우잠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는 뒤척뒤척 잠을 못 이뤘다. 11시간의 비행 후 새벽 5시(현지 시간)에 네덜란드 스히폴공항에 도착했다. 높다란 천장, 히딩크처럼 큼직큼직 건장하게 생긴 외국인들…. 네덜란드에 왔음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공항 화장실에서 간단히 세수를 하고 화장을 했다. 우리나라의 이마트쯤에 해당하는 알버트하인 마트에서 수프와 빵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곧바로 네덜란드의 동화마을 히트호른을 향했다. 히트호른은 염소의 뿔이란 뜻이다.
도착하니 오전 9시 30분가량. 거의 일착이다. 우리가 마을 전체를 완전 전세 낸 것처럼 고적해서 더욱 좋았다. ‘네덜란드의 베니스’란 별칭에 어울리는 강가에 예쁜 집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배들이 그림처럼 정박해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눈앞에 펼쳐진 쨍한 하늘과 전원, 강 옆의 억새지붕을 한 집들이 오순도순 동화처럼 아름답게 늘어서 있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창문에 스탠드이든, 인형이든 쌍으로 놓는 게 인테리어의 기본 법칙이다. 그래야 균형이 맞는다고 생각한단다. 반 고흐의 작품 ‘아를의 반 고흐의 방’을 보면 침대 오른쪽 벽에 그림액자 2개가 나란히 걸려 있는데 네덜란드의 독특한 풍속이 미친 영향이다. 집 앞의 강에는 집집마다 작은 배를 정박해놓았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청량한 공기…. 모두들 피곤함도 잊고 탄성을 연발하며 “이런 예쁜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가 급격히 말을 거뒀다. 햇빛이 아쉬운 네덜란드의 환경상, 이곳의 가옥구조는 한 벽이 다 창문이라 할 정도로 창문이 많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창문이 얼룩진 곳 하나 없이 반짝반짝한 게 아닌가. 또 집 안도 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다. 이런 집에서 살려면 늘 청결하고 인테리어도 안목이 있어야 할 텐데 자신이 없었다. 어쨌든 파란 하늘, 초록 풀밭, 흐르는 강, 그림 같은 집 등…. 네덜란드는 포토제닉 국가 그 자체다. 실제 풍경도 아름답지만 사진으로 보는 경치가 더 아름답다.
프리워킹투어+마차 관광과 숙박
암스테르담 시내는 프리워킹투어를 이용했다. 미리 한국에서 신청해놓아 만남의 장소인 담 광장을 향했다. 우리 팀을 인솔할 사람은 아랍인 용모를 한 중년 남자. 네덜란드로 이민 온 지 오래된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네덜란드 역사관광 가이드를 외국인이 맡은 것이 신기했다. 가령 경복궁 안내를 푸른 눈의 외국인이 안내하며 한국 역사를 설명한다면? 암스테르담이 이민자의 도시라서 가능한지도 모른다. 암스테르담 궁전, 벼룩시장 등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돌다가 자신이 아는 카페로 관광객을 인도, 아니 유도했다. 그리고 무료 관광이며 자신은 별도로 공공기관에서 돈을 받는 것도 아니라고 구구한 설명을 하며 팁을 유도해서 피곤했다. 더구나 행인들과 차가 다니는 길거리에서 영어 설명을 들으려니 청해는 고사하고 청취도 힘들었다. 중간에 들른 카페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먹으며 간단히 요기를 한 후 “다음 일정이 바빠 어쩔 수 없이 중도에 빠지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우리끼리 시내를 돌기로 했다.
우선 길을 다니며 조심해야 할 것은 자전거들. 자전거들이 씽씽 달려 부딪힐까봐 늘 경계해야 했다. 마침 우리나라 유학생이 스마트폰으로 길을 찾던 중에 자전거와 부딪혀 크게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들어 더 긴장하고 조심했다. 종일 걸으니 다리가 아팠다. 길치라서 헤매는 거리까지 합하면 통상 표시된 거리의 1.5~2배. 만보계로 체크해보니 하루 평균 2만 보는 걸었다. 마차를 타고 암스테르담 시내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마차가 따각따각 소리를 내며 포장된 도로를 도는데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거나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손 흔드는 법을 연습해둘걸.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민망했다. 재미있는 것은 트램이나 자동차, 마차 모두 같은 도로를 이용한다는 것. 앞에는 마차가 달리고, 그 뒤에서 자동차가 천천히 따라오고…. 그런데도 클랙슨 한 번 울리지 않고 기다리는 게 신기했다.
암스테르담 시내에서 주의할 것 중 하나는 커피숍과 카페의 구별이다. 카페는 우리나라에서처럼 커피를 마시는 곳이다. 그런데 커피숍 간판이 붙은 곳은 대마초를 피우는 장소란다. 어쩌다 간판만 보고 들어가면 큰코다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네덜란드의 커피숍(coffee shop)은 관용정책(gedoogbeleid)의 아편법에 따라 일정 금액의 판매 소지가 허용된 소프트 드러그(soft drug, 중독성 없는 마약)의 대마초를 포함한 제품을 판매하는 소매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마초를 공식 허용하는 정책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덜 갖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지에서 만난 네덜란드 교민은 “암스테르담에서 이런 곳을 출입하는 사람은 주로 외국인이지, 네덜란드인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네덜란드인은 보수에 가깝다”는 말을 들려줬다. 자유로운 사람이 오든, 오면 자유로워지든, 암스테르담은 자유인을 위한 도시다.
이곳은 물가가 비싸서 호텔은 역세권 아파트형 호텔로 정했다.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 아침, 저녁을 해결했다. 한결 비용이 절약됐다. 빵에 주스, 요구르트, 견과류, 과일을 곁들여 먹으니 특급 호텔 조식 못지않았다.
건축도시 로테르담과 마르크트할, 유로마스트
암스테르담을 떠나 다음 목적지인 로테르담으로 향했다. 산더미만 한 캐리어백을 낑낑대고 끌며 겨우 로테르담행 기차에 올랐다. 캐리어가 커서 객석으로 끌고 들어가기도 힘들고, 기차 선반에 올리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차 연결 부분에 짐칸이 있었지만 멀리 두자니 도난이 걱정됐다. 어쩔 수 없이 짐을 지키느라 짐칸 옆에서 한 명씩 돌아가며 경비(?)를 볼 수밖에 없었다. 짐을 끌며 역에 겨우 도착했는데 호텔 찾아가기가 난망이었다. 구글맵으론 도보 5분 거리라는데 아무리 뱅뱅 돌아도 나오지 않았다. 짐은 무겁고, 길은 못 찾겠고….
이때 비로소 우리 여행은 심각한 갈등 속에 빠지기 시작됐다. 택시를 타자는 입장, 아니면 좀 더 찾아보자는 입장의 대립이었다. 역에서 최대한 가까운 호텔을 찾아 예약하느라 애를 쓴 친구는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택시기사는 호텔 이름을 듣더니 “아니 코앞인데 이곳을 택시로?” 하는 표정이었지만 우리는 너무 지쳐 있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가주세요” 했다. 그리고 호텔 고고(Go Go!!).
로테르담은 네덜란드 제2의 도시. 쭉쭉 올라간 고층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풍스런 암스테르담과 확 달라진 분위기. 오히려 우리 눈에는 낯설지 않아 서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공습으로 중심부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전후의 부흥에 따라 현대도시로 재생됐다. 이곳의 명물인 큐브 하우스를 보고 마르크트할로 향했다. 큐브 하우스는 건축가 피트 블롬(1934~1999년)이 로테르담의 블락 역에서 광장을 가로지르는 보행자용 다리 위에 주택을 세운 것. 54° 기울어졌고, 바닥부터 위를 향해 육각기둥이 세워져 있다. 노란색의 추상적인 숲 형태의 집이다. 어떤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도 잘 나오고 독특해 발상의 전환에 대해 경탄했지만 살고 싶지 않다는 데는 우리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내부로 들어가 보니 가파른 계단이 굽이굽이 달팽이 모양으로 설치돼 있어 오르기가 쉽지는 않아 보였다. 경험 삼아 1박 예약도 고려했었는데 캐리어 들고 이 계단 오르락내리락했을 것 생각하니 보기만 해도 진땀이 주르르 흘렀다. 암스테르담에서 묵은 아파트형 호텔도 가파른 계단이었지만 옥외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곳은 그마저도 없으니… 우리 여기서 묵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곳 유스호스텔은 늘 예약이 꽉 차 있다니 그런 걱정은 기우인 셈이다. 역시 아름다운 것은 불편한 걸까?
로테르담 일정은 주로 도보관광으로 여유롭게 잡았다. 도서관을 구경하고 에라스무스 다리 등을 걸으며 유유하게 보냈다. 마르크트할에서 시장 음식을 조금씩 사서 주전부리로 먹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간단하게 식사를 한 후 그다음은 네덜란드의 남산타워라 불리는 유로 마스트에서 정찬을 즐겨보기로 했다. 유로마스트는 로테르담을 한눈에 360° 전망할 수 있는, 높이 185m의 회전 전망대로 레스토랑도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오후 7시 30분으로 디너 예약을 했다. 아줌마의 알뜰 본성을 속일 수 없어, 식사비 지출을 너무 하는 건 아닌지, 차라리 그 돈으로 마켓할에서 맛있는 음식 사먹는 게 낫지 않느냐며 난상토론을 벌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최고의 식사’였다. 네덜란드는 오후 9시는 돼야 해가 진다. 7시 30분에 예약한 덕에 해가 지기 전 경치와 일몰 풍경, 그리고 해가 진 후의 야경까지 두루 즐길 수 있었다. 안 오면 정말 후회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을 곁들여 먹었는데도 4명 식사 총액이 170유로(한화 23만 원)밖에 안 나왔다. 우리나라의 호텔 식사비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가격이 좋은 편이었다. 단, 서비스 속도가 느려 애피타이저에서 디저트까지 나오는 데 무려 3시간여가 걸렸다.
불덩이 같은 해가 지는 것을 보며 모네의 그림 ‘해넘이’ 풍경을 연상한 것도 잠시, 다시 도시의 야경으로 경치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360° 원형으로 바라보는 전경의 아름다움, 그곳에 온 선남선녀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앞 테이블의 노부부도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서로를 부축해주며 일어나 옷깃을 매만져주는 모습을 보며 순간 뭉클해졌다. 다른 친구들도 같은 마음을 느꼈는지 “우리, 한국에 있는 식구들에게 문자 한번 보낼까?” 한다. 그래, 여행의 가장 좋은 점은 떠남 그 자체보다 현재를 되돌아보고 감사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여행도 그렇게 무르익어 갔다.
농구스타 박찬숙은 필자보다 한 학년 아래였기 때문에 그녀의 성장기를 통째로 외우고 있다. 박찬숙은 고1 때 국가대표로 선발된 이후 한 시대를 풍미한 대한민국 최고의 농구스타였다. 특히 1984년 LA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농구 사상 전무후무한 은메달을 획득했을 때의 쾌거는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당시 천하무적 미국이 상대 팀이었기 때문에 결승전에 오르는 순간 이미 금메달을 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후 농구 대표팀이 세계 무대에서 빛을 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지금은 간신히 세계 무대에 나간다고 해도 거의 꼴찌 수준이다. 박찬숙을 필두로 한 당시 한국 여자농구를 세계 언론들은 “예술이다”라고 극찬했다. 미국이나 유럽 선수들의 키는 대부분 2m에 가깝거나 그보다 훌쩍 넘는 선수가 많았기에 키 작은 한국 대표팀의 빠르고 조직적인 예술 농구에 세계가 반한 것이다. 박찬숙의 키는 188cm로 한국 선수 중에서는 큰 키였지만 서구 센터들과 비교하면 한 뼘 정도 작았다. 그러나 언제나 유연하고 빠른 몸놀림으로 상대 팀을 무력화해버렸다.
큰 키에 어울리지 않는 예쁜 외모 덕분에 당시 남학생들에게 배우 임예진과 쌍벽을 이루는 스타였다고 한량 이봉규가 치켜세우자 숭의여고 동창인 탤런트 김미숙도 있었다고 말을 거든다. 숭의여고는 예나 지금이나 농구의 명문이다. 지금도 우승을 한다며 모교 자랑도 잊지 않는다.
박찬숙은 필자 여동생과 행당여중 6개월 동창이었기 때문에 더욱 잘 기억하고 있다. 여동생은 중학교 입학 때 “박찬숙이 우리 학교에 들어왔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후 박찬숙은 농구를 위해 숭의여고로 전학했다. 축구에 차범근, 복싱에 홍수환, 프로레슬링에 김일 선수와 비견되는 역대급 농구스타가 박찬숙이다.
큰 키 때문에 외출을 싫어했다
비슷한 나이로 함께 이 시대를 살아온 이봉규가 슈퍼스타를 만나기 위해 WKBL Korea 3대3 국제농구대회가 열리고 있는 고양 스타필드를 찾았다. 3대3 농구는 한국에선 이제 시작이지만 서구에선 인기종목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길거리 농구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박찬숙을 인터뷰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그곳으로 찾아갔지만, 3대3 농구 경기에 홀려버려 한참을 구경하느라 박찬숙과의 인터뷰는 나중이었다. 공격과 수비가 쉴 틈 없이 바뀌기 때문에 박진감이 넘쳤고, 남자 농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미가 덜하다는 편견이 깨져버릴 만큼 격렬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아차!” 하고는 박찬숙을 찾기 시작했다. 본부석에서 하얀색 운동복을 입고 앉아 있는 그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큰 키도 큰 키이지만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배어나오는 포즈로 앉아 있는 박찬숙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그런데 현역 시절에는 얼마나 눈에 띄었을까 생각해보았다. 요즘 한창 예능 프로그램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서장훈이 방송에서 “큰 키 때문에 사람들 눈에 잘 띄었다. 그 시선이 괴로워 외출도 꺼렸다”고 푸념한 적이 있다.
박찬숙을 마주해보니 서장훈 말이 실감이 났다. 174cm인 이봉규가 188cm의 박찬숙의 옆에 서니까 느티나무에 매미가 붙어 있는 느낌이어서 몹시 위축되었다. 그녀에게 잽싸게 의자에 앉기를 권하고는 내가 먼저 주저앉아버렸다. 앉아 있으니까 조금 안정이 되었다. 큰 키로 압도하는 분위기가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명랑하고 예쁜 꽃중년 여성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위축된 나를 배려해서 편안하고 밝게 미소를 지으면서 너스레까지 떨어주었다.
알고 보면 프리티 우먼
그녀는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와는 달리 깜찍하고 귀여운 캐릭터의 여인이었다. “현역 시절에는 팬들이 어마어마하게 찾아왔는데 이제는 팬들을 찾아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최근에는 야구나 축구에 비해 여자 농구는 인기가 없다. 평생 농구인으로 살아왔기에 예전의 농구에 대한 팬들의 인기를 되찾는 데 본인이 할 일이 있으면 어디든 찾아갈 계획이라는 것. “농구가 이렇다! 재미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길거리 농구가 활성화되는 걸 보니 감회가 새롭다”고 주먹을 불끈 쥔다. 박찬숙은 엘리트 선수로 발탁되어 자신은 좋든 말든 죽기 살기로 농구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시대에는 농구를 좋아하면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대중화되어야 한다고 그녀는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3대3 길거리 농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좋아서 취미로 하는 것이 생활체육이라는 얘기다.
예전에는 엘리트 선수들을 국가대표로 키우고 ‘죽기 살기’식으로 훈련을 시켜 경기장에 내보냈지만, 지금은 즐기는 스포츠를 해야 한다는 것. 생활체육에 대한 그녀의 사명감이 커 보였다. 그러면서 엘리트 선수인 박지수 선수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부탁한다.
예전의 박찬숙처럼 박지수 선수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한국 여자농구의 대들보이자 10년을 이끌어갈 재목이란 찬사를 받아왔다. 198cm의 장신이면서 몸놀림도 좋아서 2018년 미국 프로농구 WNBA에서 활동하고 있다.
박찬숙은 고등학생 때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너무 받아 싫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과분한 대접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박지수가 예전의 저나 남자 선수들처럼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고 기자들 볼 때마다 얘기한다”면서 내게도 거듭 당부를 한다. 농구 발전에 대한 생각뿐이다.
당시 박찬숙은 세계적인 미녀 스타로 인기 절정이었다. 농구선수 중에서 제일 미녀를 뽑는 미스월드바스켓(7회 세계선수권대회)에 뽑힐 정도였다. 얼굴도 예쁘고 농구도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더욱 혼련에 집중했다는 그녀는 너무 힘들어서 눈물로 일기를 썼던 그 시절을 잠깐 회상한다. 눈물이 하도 흘러내려 일기를 쓸 수 없었던 날도 있었다고 한다.
재혼은 싫지만 남자 친구 하나 있으면 좋겠다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급히 화제를 돌렸다. “피부가 곱다, 열 살은 어려 보인다”면서 몸매와 미모 관리에 관해 물었더니, 숨쉬기운동 하는 것 외에 별로 하는 것이 없다고 재치 있게 받아친다. 그 틈에 어느새 동행한 내 아내와 살빼기와 피부 관리에 관해 수다를 늘어놓는다. 박찬숙은 운동할 때보다 5kg 이상 쪘다고 불만이지만, 은퇴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현역 선수 버금가는 몸매와 열 살 이상 어려 보이는 피부를 소유하고 있다. 아마도 긍정적인 마인드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연예계에 종사하는 아들과 딸에 관해 물었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키 크고 운동 잘하는 남자 만나서 다섯 명쯤 낳았으면 그중에 최소한 두 명 정도는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을 것”이라며 농담한다. “당시 인기가 너무 많아서 데이트 신청이나 프러포즈를 많이 받았을 텐데?”라고 떠봤더니 “운동선수 중매도 많이 들어왔다”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어떤 선수? 누구냐?”고 집요하게 물어봤지만, “그건 비밀!”이라고 한다. 아마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사람이라서 그러는 듯싶다. 궁금했지만 그녀만의 추억을 훼방하고 싶지 않아 넘어갔다.
남편과 사별하고 단 한 번도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다 하길래, 대뜸 “내가 좋은 사람 소개해줄 테니까 재혼 생각이 있나?” 하고 물었더니 “재혼은 하기 싫고 그냥 남자 친구나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주위에 편안한 아저씨는 많은데 전혀 느낌이 없다면서 소개를 하려면 본인보다 키가 크면 절대 안 되고 편안하고 대화하기 좋은 남자로 해달라고 한다. 그러고는 연하도 괜찮다는 말을 슬쩍 끼워넣는다. 자신이 키가 커서 어지간한 한국 남자들은 주눅이 든다고 말하기에 “외국 사람은 어때?” 하고 도발했더니 “부담스럽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박찬숙은 큰 키만큼 시원시원했다. 한량 이봉규와 왠지 느낌이 통하고 코드가 맞아 보여 조만간 술자리를 갖기로 의기투합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고민이 깊어진다. 박찬숙과 어울리는 남자가 누구일까? 예쁘고 순진하고 명랑한 박찬숙. 60세에도 멋진 남자 친구를 만나 제3의 인생 행복하게 살 자격이 충분하다.
늘 고민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특히 제2 인생을 가장 보람 있고 의미 있게 보낼 방법은 무엇일까? 장수 시대에 접어들면 하릴없이 무료하게 보내는 고통도 큰 어려움 중 하나가 된다. 인생에 주어진 노후를 아무렇게 보낼 수 없다. 요즘 신조어,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의 의미처럼 남은 세월을 멋지게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는 이유다.
얼마 전 아내가 여고 동창을 만났다. 정기적으로 네 명이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동창 한 명이 직접 만들어준 윗도리 티셔츠와 간편 바지를 선물로 받아왔다. 다른 세 사람에게도 똑같은 선물을 만들어주었다. 선물을 주면서 이런 이야기를 곁들였다고 전한다. “밤늦게까지 옷을 만들면서 선물을 받고 즐거워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만들었다.”
마음이 기쁘니 옷을 만드는 일이 즐거워졌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솜씨가 있어서 기쁨이 되었다. 일종의 재능 기부다.
그 동창은 바느질과 옷을 만드는 일에 소질이 있다. 아예 재봉틀을 사서 방 하나를 작업실로 꾸몄다. 집안 살림을 하고 여유가 있을 때면 그 곳에서 옷 재단과 재봉질을 하면서 바쁘게 보낸다. 가끔 이웃에게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소품을 만들어 준다. 정성으로 만들고 솜씨가 있어 만든 소품이 작품에 가깝다. 받는 이웃은 모두 기뻐하고 고마워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에 고마워한다.
인생 2막에서 가치 있는 일 중 하나가 경험을 살린 재능기부다. 자신의 재능을 살려 소일도 하면서 남을 기쁘게 하는 일로 전환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될 수 있다.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로 주어진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이웃이나 사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면 행복한 인생의 후반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재능을 살려 보자. 지금 당장 자기의 재능을 찾아 다듬어 보자. 첫술에 배부르지는 않다. 시간이 걸려도 재능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다. 시작이 반이다.
봄비에 적신 웃음이 꽃잎처럼 퍼지는 것 같았다. 2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 지난 5월 12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정동에 소재한 이화여자고등학교 유관순기념관이 그러했다. 그 안에는 기쁨, 반가움, 감격과 같은 밝은 감정들이 발랄하게 소용돌이쳤다.
1988년에 이화여고를 졸업한 88졸업생들은 준비된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마치 어제도 본 듯한 환한 표정으로 반갑게 악수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저마다 30년 전 여고생으로 돌아갔다. 어언 3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이들은 추억을 더듬으며 각자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은사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등장할 때마다 설레는 마음이 담긴 뜨거운 박수와 환호성으로 반겼다.
웃음과 추억과 설렘이 어우러졌던 시간
이날 열린 이화여고 졸업 30주년 재상봉 기념식에는 88년 졸업 동창과 은사 등 200여 명이 참여해 총동창회와 모교의 발전에 기여하는 화합의 장을 만들었다. 또 이화라는 이름 안에서 특별한 시절을 누렸던 88한 배꽃들이 당시 담임과 학과목을 담당했던 스승 40여 명을 초대해 이벤트를 열고 선물과 함께 식사를 대접했다.
1986년 국제적 대행사였던 아시안게임을 치르고 1987년에는 민주항쟁이라는 격렬한 변혁의 과정을 겪고 대한민국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88년 졸업생들. 그들은 폭발적인 경제성장 속에서 소비문화의 정점이 된 1990년대에 20대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사방에서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들려오던 IMF 금융위기 속에서 30대를 맞이해야 했다. 그야말로 격동의 세대였다. 그렇게 쌓인 세월 속 할 얘기들이 어찌 한두 보따리만 될까.
“지나온 30년, 새로운 30년 가즈아!”
88졸업생 대표 고혜정 씨의 힘찬 목소리는 지난 세월 동안 짊어지고 왔던 어둠들을 날려 보내는 주문과도 같았다. 김혜정 현 이화여고 교장의 환영사로 시작된 1부 행사는 이자형 이화여고 총동창회장의 축하, 이화교회 이종용 목사의 축도로 이어졌다. 88졸업생 고혜정 대표가 장학기금과 동창기금, 학교발전기금을 각각 전달했다.
“창립 132주년을 맞은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졸업 30주년 재상봉 기념식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온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오래된 전통입니다. 올해 30주년 재상봉 행사에서 88년도에 졸업한 학생들이 첫 만남을 갖게 됐습니다. 추억과 옛 감정을 잘 나눌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정성껏 준비하고 모두 기쁜 마음으로 함께해서 너무 보기 좋습니다.”
30주년 재상봉 기념식에서 졸업생으로 참여한 이자형 총동창회장(1966년 졸업)의 목소리에는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1부 행사가 은사들이 제자들에게 보내는 덕담이었다면 2부는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50세 제자들이 스승에게 바치는 재롱잔치(?)였다. 올해 여든다섯 살을 맞이한 최종옥 전 교장의 격려로 시작된 2부에서는 88졸업생이 준비한 축하 영상, 플라멩코 댄스, 찬양 댄스, 오보에 연주, 동문 합창 등 다채로운 축하 공연으로 영원한 스승들에게 많은 웃음을 선사했다.
6개월 전부터 이 행사를 자체적으로 기획한 88졸업생들은 현수막부터 초대장, 은사님 선물꾸러미, 테이블 꽃꽂이, 꽃 코사지, 배너, 영상, PPT, 포토월, 크고 작은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각자가 가진 모든 재능들을 한데 모아 행사를 성황리에 끝마쳤다.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
이날 행사는 함께한 모두가 교정 곳곳에 묻어둔 아름다운 학창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는 동시에 은사들과의 재상봉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학생으로 돌아간 88졸업생들은 이화라는 큰 그늘 속에서 살아온 30년을 지나 이제 어느덧 허리는 구부정해지고 흰머리를 날리게 된 은사들을 보면서 추억과 감사함에 뭉클함을 느꼈다.
사회를 본 88졸업생 정성진 씨는 “건강하시고 정정하신 은사님들의 모습에 얼핏 보면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구분이 잘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저도 선생님처럼 가슴에 열정을 품고 남은 인생 활기 있게 살아가겠습니다” 하고 다짐했다.
88졸업생 한귀영 씨는 “나이 든 선생님들 모습을 보니 안쓰러움과 연대감이 함께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젠 선생님들과 맥주 한잔 하면서 ‘그 시절’을 회상하고 친구처럼 수다 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의 담임을 맡을 때 20대였던 선생님들도 여럿이었죠. 돌이켜보면, 20대에 우리들을 만나 선생님들도 많이 긴장되고 두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습니다.”
운영진으로 활동한 88졸업생은 “제 인생이 이화 덕분에 참 많이 빛났던 것 같아요. 너무 많이 웃고 떠들며 힐링하는 시간이 됐습니다. 이런 기회를 준 동창회와 모교 동문에게 너무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88졸업생 역시 “그동안 앞에서, 뒤에서 애써준 친구들 덕분에 너무 좋은 추억을 만들게 됐다”며 “88졸업생들이 너무 자랑스럽다.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라고 말하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30년의 세월을 보내고 맞이하는 새로운 인생
감동한 것은 88졸업생 동문뿐만이 아니었다. 여전히 교편을 잡고 있는 스승 한소연 선생님은 “정성을 다해 준비한 행사에 감사했어요. 이화의 정신은 여러분들의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과분한 대접에 미안하고 앞으로 남은 시간 가르치는 일에 좀 더 마음을 쏟겠다고 다짐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88한 배꽃들의 오늘 만남이 삶에 큰 활력이 되기를 바라며 50세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영원한 스승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토닥거리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다른 은사들도 홈커밍데이를 잘 치른 88졸업생에게 ‘모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으로 탄탄한 결속력을 보였다’며 한마디씩 치하했다.
지난해부터 88졸업생 대표로 뛰어다녔던 고혜정 씨는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해준 친구들에게 고맙습니다. 모교 사랑과 은사님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끼는 행사였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화라는 이름보다 더 큰 버팀목이 있을까 싶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30주년 재상봉을 시작으로 40주년, 50주년, 60주년까지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30년의 세월이란, 한 세대를 매듭짓고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하도록 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김성수 선생님은 사은회를 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에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스승으로서의 대견함과 소회, 그리고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삶의 동지로서의 감격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사느라 얼마나 많은 열정과 아픔과 정진의 인고가 있었겠는가? 자네들, 스스로의 힘으로 한 세대를 사느라 얼마나 애를 많이 쓰셨는가? 은사로서, 자랑스럽고 대견해서 가슴 벅찬 박수를 보내네.”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고인이 된 코미디언 이주일 씨의 유행어다. 못생긴 얼굴과 모자란 듯한 행동과 어눌한 듯한 말투 코미디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어찌 보면 관객들은 대리 만족을 느끼면서 좋아했지 싶다. 인간의 심리는 묘한 측면이 있음이다. 어떠한 모임의 경우라도 대화 중에 자기나 남편, 아내 또는 자식, 재산 자랑을 하면 상대는 은연중에 비교의식과 열등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대화가 부드럽게 이어지지 못한다. 어른들 사이에 손주 자랑을 하면 만 원 지폐 한 장을 내어놓고 나가라는 말이 생긴 이유다. 자랑하게 되면 심리적 거리를 멀게 만드나 자기의 허점이나 약점을 말하면 상대는 편안해지고 경계심이 줄어들어 친밀감을 느낀다.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온 고향 친구는 스스럼이 없이 가깝다. 비밀이나 약점이 노출되어 숨길 것이 없어서 그렇다.
필자의 안사람 여고 동창생 한 명은 동창생 모임과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도 남편과 싸운 이야기를 비롯한 남편 흉보기가 대표적인 화젯거리다. 다들 관심을 보이고 좋아한다. 물론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가는 선천적 입담이 재미를 더해주는 점도 있다. 반대로 안사람과 가끔 만나는 동네 부인들의 모임 중에 나오는 한 분은 입만 열었다 하면 남편 자랑, 애들 자랑, 집과 돈 자랑을 하는 경우가 많다. 좋아하는 사람이 줄어들어 그분은 왕따를 느낀다. 대체로 인간의 심리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측면도 존재한다.
조직리더십 코칭원의 김영기 교수는 자기의 허점을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대화 기법은 인간관계 고수들의 전략이라고 말한다. 아무렇지 않게 자기의 약점을 말하기는 쉽지 않음이다. 그렇다고 모든 약점을 말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사람 중에는 약점을 듣고서 다른 사람에게 퍼트리거나 약점을 이용하여 훗날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다. 약점 노출 자체가 더 가까운 친구를 만드는 방법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아무렇게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지 말고 나름의 방법을 택해야 한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지나치면 하지 않음만 못하다. 김 교수가 제안하는 약점 노출의 유의 사항 세 가지는 도움이 되지 싶다.
첫째, 약점 노출은 약한 것부터 시작해 상대의 호응을 보고 조금씩 확대함이 좋다.
예를 들면 “우리 애들이 요즘 말을 안 들어 고민이다” 등 가벼운 화제가 무난하며 상대방이 “우리 애들은 더 문제야!”라 호응을 보이면 다음 단계로 진행해도 좋다고 한다. 상대방이 전혀 호응하지 않고 듣기만 하면 더 이상의 약점 노출은 자제함이 바람직하다.
둘째, 상대방이 호응하여 중요한 약점 노출을 하는 경우에도 한순간에 많은 것을 털어놓는 것은 좋지 않다. 서로를 깊이 모르는 단계에서 짧은 시간에 많은 약점을 말하고 나면 ‘이 사람은 내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사람은 아닐까’ 염려하게 되어서 그렇다 한다.
셋째, 믿을 만한 사람이라도 약점 노출의 범위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결혼 전의 애인 이야기를 지금의 배우자에게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모든 약점을 무한정 털어놓는 것이 좋을 리 없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간관계가 중요해진다. 만나는 사람과 소일거리가 줄어들기 마련이어서 외로워지는 경우가 많다. 인간관계의 핵심은 대화다. 인간관계를 멀리하는 대화법은 개선해야 한다. 과거의 직함, 손주, 재산, 돈 자랑 등에서 멀어져야 한다. 자기 약점을 수월하게 이야기하는 대화법도 연습해 볼 필요가 있다. 자랑을 주로 하던 말버릇을 금방 고치기는 쉽지 않다. 훈련이 필요하다. 적정한 선을 지키면서 자기 자랑 화제보다 약점을 화제로 이야기해보자. 친구들이 당신을 더 좋아하게 된다. 캔 블랜차드 씨의 이야기를 명심하자. “상대방의 환심을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의 무지나 약점을 솔직히 인정하는 일이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일명 ‘웰다잉법’에 따라 8월 4일부터 말기환자에 대한 호스피스가, 내년 2월부터는 임종기 환자의 연명의료 중단이 가능해졌다. 우리 삶의 일부인 ‘죽음’에 대한 법률임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그동안 ‘죽음’과 관련한 책을 출간하고 다양한 강연을 펼쳤던 서울아산병원 유은실(劉殷實·61) 교수는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녀는 최근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데이비드 케슬러의 을 우리말로 옮겼다.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웰다잉법을 이르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올해 8월 4일부터는 말기 암환자에 한해 시행되던 호스피스 서비스가 후천성면역결핍증·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만성간경화 말기 환자에게도 확대됐다.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해석도 중요하겠지만, 유 교수는 그보다 앞서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는 개개인의 마음가짐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 법률이 우리에게 왜 필요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답을 자연스레 찾아가게 될 것이라고. 이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겠지만, 무엇보다 죽음을 가까이하는 의사와 환자를 곁에 둔 가족에게 더욱 중요한 이야기다.
“사실 의사들은 늘 죽음을 가까이하기 때문에 의식하려 하지 않거나 고민할 겨를이 없어요. 또 주변에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이를 돌보는 분들이 읽으면 좋겠더라고요. 막상 자신이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은 이런 책을 읽게 되지 않아요. 오히려 아직 건강한 중장년이나, 환자를 둔 가족이 읽으면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죠.”
웰다잉법 시행, 죽음을 이야기해야 할 때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의미나 영적인 부분을 다루면서도 사전의료의향서 작성 등 우리가 준비해야 할 실질적 항목들을 소개한다. 유 교수는 일단 이러한 책을 사서 보는 것만으로도 죽음 준비의 첫 단추를 꿴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우리 여고 동창 중에는 의사가 꽤 많은 편이에요. 어느 날 그 친구들이 제가 어디서 강의하는 걸 들었는데, 다들 웬만큼 공부도 하고 알만 한데도 막상 자신들이 실천해온 게 없다고 털어놓더라고요. 그만큼 ‘죽음 준비’는 우리에게 낯설죠. 이제 웰다잉법이 시행되면서 여기저기서 강연도 열리고 관련 책도 쏟아져 나올 거예요. 그런 데 참여하고, 책 한 권이라도 찾는 분들은 이미 죽음 준비의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볼 수 있죠.”
은 유 교수의 번역을 통해 올해 국내에서 만났지만, 본래는 미국에서 라는 제목으로 1997년 출간됐다. 그리고 10년 뒤 현재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고, 그로부터 10년 뒤 유 교수가 우리말로 옮기게 된 것이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전의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교훈은 무엇일까? 혹시나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닐지 묻자, 유 교수는 오히려 시점이 잘 맞는다고 답변했다.
“책은 오래됐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 의미 등은 변함없이 통해요. 다만, 미국과 우리나라의 법적, 제도적 환경이 다르죠. 그동안 우리는 죽음에 대해 공론화할 기회가 없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 법이 만들어지고 시행되면서 상황이 바뀌었잖아요.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당시 미국의 모습이 현재 우리 형편에 실질적으로 들어맞는 부분이 있어요.”
유 교수는 무엇보다 법이 시행되면서 병원을 찾는 환자나 보호자가 똑똑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녀가 말하는 ‘똑똑함’이란 의료 행위나 질병 등에 대해 알고 싶은 부분을 의료진과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을 뜻한다.
“완화의료는 무엇인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어떻게 쓰는지, 호스피스 기관에는 어느 단계에서 가는 것인지 등 궁금증이 많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 환자나 보호자들은 이런 문제를 주치의와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더라고요. 왠지 그런 말을 하면 의사가 안 좋아할 것 같다는 등의 이유로 뒤로 딴 사람을 통해 알아보죠. 그런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큰 문제는, 그런 질문을 해도 속 시원히 대답해줄 수 있는 의사나 기관이 몇 안 된다는 거예요. 법 시행 전에 교육을 하고, 뒷받침하는 제도 등이 마련돼야 했는데 그게 이뤄지지 않아 보조를 못 맞추는 실정입니다. 참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죠.”
죽음의 질이 높아야 삶의 질이 높아진다
2010년 영국 가 OECD 40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죽음의 질’ 평가에서 한국은 32위에 머물렀다. 쉽게 말해 죽음의 질이 낮은 편. 그렇다면 죽음의 질이란 무엇일까?
“간단한 예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가 평생 쓸 의료비의 절반을 죽기 전 1년 사이에 쓰고, 그것의 절반 이상을 떠나기 석 달 안에 쓰고 간다고 해요. 대부분의 환자가 치료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이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시점부터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의 과정에서 삶의 질을 죽음의 질이라 말합니다. 그러니, 그때의 삶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죽음의 질이 좌우된다고 볼 수 있어요. 죽음의 질이 높은 나라의 경우를 보면 무의미한 치료보다는 스스로 주변을 정리하면서 더 의미 있게 보내는 편이죠.”
환자가 죽음을 앞두었을 때, 이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는 보호자들이 있다. 혹시 이런 행동이 환자의 죽음의 질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우려스러웠다.
“물론 당장 이야기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의사들도 자기 가족이 그런 상황에 처하면 쉽게 입을 떼지 못하니까요. 그러나 미루지 말고 단계적으로 본인과 신뢰하는 가족, 심지어는 문제가 될 만한 가족과도 사실을 공유해야 합니다. 당사자가 자기 죽음에 대해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존엄한 죽음이 가능해져요. 자기결정권을 행사해서 순간순간 선택해야 할 일이 많은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모든 게 엉켜버리고 말죠. 그러면 한 사람의 죽음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요.”
맞이하는 죽음을 위해 실천할 것들
유 교수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타인이 아닌 환자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전에 가족과 죽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유언장 등을 미리 써두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녀 역시 이러한 준비를 모두 끝내놓은 상태다. 이밖에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런 서류를 당장 어디에 제출하지 않더라도 한번 쓰려고 시도해보면 생각이 많이 달라질 거예요. 저도 죽음학회에서 나온 유언장 샘플을 채우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이게 하루아침에 쓸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깊은 고민과 성찰을 필요로 하죠. 그러니 꼭 죽음이 다가왔을 때보다는 해마다 연말연시나 생일 등 특정일을 정해서 써보면 어떨까 해요. 혹시 병을 앓고 있다면 막연히 치료를 받기보다는, 내가 왜 아프고 무슨 치료를 받고 어떤 약을 먹는지 한번 정리해볼 필요가 있어요. 또 시간을 내서 호스피스기관에서 봉사활동을 해볼 것을 권해요. 그렇게 간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하다 보면 나에게 맞는 실천 사항들이 하나둘씩 생겨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