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라는 책이 있을 만큼 떡볶이는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음식이다. 궁중의 격식 있는 명절요리에서 서민의 음식이 되기까지 이 변화의 뼈대에는 서민의 삶과 문화가 함께했다. 대한민국과 더불어 산전수전을 겪으며 변화하고, 더 나아가 세계에서 사랑을 받는 K떡볶이. 떡볶이의 역사와 함께한 시니어들의 추억을 따라 K떡볶이의 모든 것을 살펴본다.
“너 떡볶이 또 주문했어? 요즘 떡볶이는 채소도 하나 없고, 왜 이렇게 비싸기만 해?”
60대 A 씨는 딸이 시킨 떡볶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육수 맛을 풍부하게 돕는 채소도 없고, 식감을 살리는 각종 사리도 몇천 원씩 돈을 내고 추가해야 한다. 자극적인 매운맛에 영양가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30대 딸에 따르면 요즘 사람들이 이런 떡볶이를 많으면 일주일에 두세 번씩 먹는다고 하니 신기하기만 하다.
떡볶이는 원래 빨갛지 않았다
60대 A 씨는 옛날과 많이 다른 ‘요즘 떡볶이’를 보며 그 시절을 회상한다. A 씨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있는 떡볶이는 신당동에서 먹었던 고추장 떡볶이다. 가스버너에 얹힌 프라이팬, 동그랗게 올라오는 육수 거품, 다양한 야채들, 빨간 양념.
그런데 떡볶이의 과거를 조선 시대까지 거슬러가면, A 씨 기억과도 차이가 크게 나는 떡볶이를 만날 수 있다. 원래 떡볶이는 붉은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떡볶이에 대한 최초 기록은 ‘시의전서’로 남아 있는데, 궁중에서 흰떡과 등심살, 참기름, 간장, 파, 석이버섯, 잣, 깨소금 등을 재료로 사용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떡볶이에는 평민들이 구하기 어려운 비싼 식자재들이 사용됐으며, 간장으로 간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 당시에는 떡볶이라는 이름 대신 떡찜, 떡잡채, 떡전골 등으로 불렀다.
즉 과거 떡볶이는 가래떡을 기본으로 갖가지 비싼 재료를 넣고 간장으로 볶았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궁중 떡볶이’라고 부른다. 궁중 떡볶이는 잡채를 만드는 방식과도 비슷해 잡채에서 떡볶이가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고추장 떡볶이의 살아있는 역사, 마복림 떡볶이
명확한 유래를 알기는 어려우나 매콤한 고추장 떡볶이는 6·25 휴전 직후 1953년 마복림 할머니 손에서 탄생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전쟁 피난살이에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 마복림 할머니는 집안의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당시 개업한 한 중국 음식점을 찾았다. 맛있게 먹는 식구들을 보던 할머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중국 요리에 손을 대지 못했다. 대신 가장 만만해 보이는 개업식 떡을 먹다가 실수로 짜장면 그릇에 떡을 빠뜨린다.
춘장이 묻은 떡은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마복림 할머니는 비싼 춘장 대신 고추장을 이용해 '고추장 떡볶이'를 개발했다. 이날의 실수가 ‘국민 간식’ 고추장 떡볶이를 만들어 낸 셈이다.
처음에는 연탄불에다 큼직한 떡을 고추장에 범벅을 해서 한 개씩 팔았다. 어느 날 한 여학생이 라면을 가져와 끓여 먹는 걸 보고 라면도 넣었다. 그리고 가스가 들어오면서 지금과 같이 떡과 채소, 각종 사리를 넣고 뽀글뽀글 끓이는 신당동 즉석 떡볶이로 변신했다.
그 시절 청춘들의 무대, 신당동 떡볶이 골목
마복림 할머니 가게를 선두로 신당동에 떡볶이집이 늘어나면서 본격적으로 떡볶이 골목이 조성됐다. 중구청 자료집에 따르면 이 시기 신당동 골목에는 떡볶이집이 40여 개 있었다. 학생들은 허름한 골목 안 누추한 가게에 빼곡히 들어차 떡볶이를 즐겼다.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 유명해진 것은 MBC ‘임국희의 여성 살롱’이란 프로그램에 소개된 뒤부터다. 1970년대 중반 떡볶이집 한 곳이 뮤직박스를 설치하고 DJ를 고용해 인기를 끌면서 신청곡을 받아 음악을 들려주는 DJ 문화까지 상륙한다. 당시 DJ는 어린 소녀들에게 아이돌과 같은 우상이었고, 심지어 라디오에 소개되기도 했다.
더불어 정부에서는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밀가루 장려 운동'을 펼친다. 이때부터 밀가루를 사용한 떡볶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밀가루로 만든 떡볶이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를 형성했다.
연예인 못지않은 DJ가 음악을 틀어주던 문화공간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었던 떡볶이. 젊은 학생들의 호응을 크게 받으며 국민 간식으로 거듭났다. 70·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떡볶이는 돌이키고픈 청춘의 한 페이지다.
바람이 서늘해지자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건 인지상정인가보다. 지인들과 서울 곰탕 맛집 정보를 공유하다 멀리 나주곰탕 이야기로 흘렀다. 꿀꺽 군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주곰탕, 돼지국밥처럼 향토색 강한 음식은 타지역에서 먹으면 왠지 그 맛이 안 난다. 곰탕 먹으러 나주에 갈 거라는 내 말에 지인들이 숟가락을 얹었다. “나주곰탕 포장 부탁해.” 말은 이래도 그들도 안다. 나주곰탕은 나주에서 먹어야 제맛인 것을.
3味로는 부족한 맛의 고장
나주가 호남 물류 중심지였던 호시절이 있다. 영산강 유역의 비옥한 나주평야와 뱃길 교통이 편리한 영산강을 품은 지리적 여건 덕이었다. 100여 년 전 영산강 나루터에는 특산물과 산해진미가 넘쳐났다. 사람이 몰려드는 만큼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그 문화가 ‘나주 3味’라 불리는 ‘나주곰탕’, ‘영산포 홍어’, ‘구진포 장어’로 이어졌다.
나주곰탕은 우시장에서 나오는 머리 고기와 뼈, 내장 등을 푹 고아낸 장터국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예부터 조선시대 관아인 금성관 앞에 큰 장이 섰다는데,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과 구경꾼들이 밥에 고깃국을 말아 후루룩 먹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군납용 소고기 통조림 공장에서 나온 소 부산물로 국을 끓인 것이 나주곰탕의 시초라는 설도 있다. 시초가 무엇이든 맛있는 곰탕을 지금 시대에도 맛볼 수 있으니, 식탐 많은 나 같은 여행자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나주 사는 지인이 “나주에 오면 곰탕보다 홍어를 먹어야죠” 하며 홍어 자부심을 드러냈다. 물론이다. 나주 3味에 연탄돼지불고기까지 야무지게 맛볼 생각이었다.
나주 여행의 시작은 곰탕으로
서울에서 아침 일찍 나주행 KTX를 타면 아침 식사로 곰탕을 먹을 수 있다. 나주역에서 구도심의 나주곰탕거리까지는 차로 약 5분 거리다. 많은 곰탕집 중에서 주로 가는 곳이 하얀집, 노안집, 남평할매집이다. 하얀집은 개업한 지 110년이나 되었고, 노안집과 남평할매집은 60년 정도 되었다. 동네 주민에게 최고 맛집을 물어도 똑 부러진 대답을 듣기 어렵다. “어느 집에서 먹어도 맛있어요. 다만, 식당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요. 서울 사람이 좋아하는 식당이 있고, 나주 사람이 좋아하는 식당이 있어요” 한다. 결국 직접 맛을 보고 비교할 수밖에 없다.
나주곰탕은 설렁탕과 달리 국물 색이 맑다. 나주곰탕과 설렁탕 모두 소뼈와 고기를 푹 고아내는 방식은 같지만, 나주곰탕은 소뼈를 적게 넣고 양지나 사태로 육수를 내기 때문이다. 밥은 말아져 나온다. 밥이 담긴 뚝배기에 가마솥에서 펄펄 끓은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몇 차례 토렴한다. 밥알에 짭조름한 간이 배고, 뚝배기가 뜨끈해지면 살코기, 달걀지단, 대파를 올려 손님상에 낸다.
곰탕 맛은 국물 빛깔처럼 맑고 개운하다. 다진 양념을 풀면 칼칼해진다. 숭덩숭덩 썰어 넣은 고기는 새콤달콤한 초고추장 양념장에 찍어 먹으면 더 맛있다. 곰탕 맛을 북돋는 김치도 중요하다. 숟가락 위에 밥, 고기, 잘 익은 배추김치 또는 깍두기를 올려 먹어야 제대로 먹은 것 같다. 노안집의 배추김치는 감칠맛과 시원한 뒷맛이 일품이다. 사장에게 비결을 물었다. “김치 담글 때 여러 가지를 섞은 잡젓을 넣어요. 봄배추를 싹둑싹둑 썰어서 잘 익힌 김치가 최고 맛있지요. 봄에 또 오세요.”
곰탕 먹고 나주읍성 산책
곰탕거리 일대에는 고려시대 초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호남의 중심지였던 ‘나주목’의 사적지들이 모여 있다. 조선시대 객사이자 나주목의 중심 관청이었던 금성관, 나주 관아의 정문 정수루, 나주목을 다스렸던 목사들의 살림집 목사내아, 고려시대 때 세운 나주향교 등을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왜구 방어를 위해 축조한 고려시대 읍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문과 성곽이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1993년부터 나주읍성 사대문 복원 사업을 추진, 2018년 완공해 나주읍성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최근 나주향교 옆에 ‘39-17마중’이 들어서 구도심에 활기를 더한다. 39-17마중은 카페&와인바, 게스트하우스, 공연장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이곳은 원래 나주 의병장 난파 정석진의 손자 정덕중이 1939년에 어머니를 위해 지은 난파 고택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이 집을 한 젊은 부부가 매입해 ‘1939년의 근대문화를 2017년에 마중하다’라는 뜻을 지닌 39-17마중을 조성한 것이다. 부부의 눈에는 한·일·양의 건축 양식이 결합한 근대 건축물과 마당의 아름드리 금목서가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고 한다. 영화 세트장 같은 난파 고택은 게스트하우스로, 마당의 큰 창고는 벽면을 통유리로 마감한 카페로 탈바꿈해 손님을 맞는다. 향교 담장이 카페 창가에 앉아 나주산 농산물로 만든 음료를 마시노라면 진짜 나주 여행하는 것 같다.
홍어 튀김 먹을 줄 알아야 홍어 고수
“홍어앳국 드셨나봐요.” 택시기사가 딱 알아본다. 홍어앳국 첫 경험을 이야기하자 “제대로 만든 홍어앳국을 드셨네요. 홍어 숙성도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데 손님이 드신 앳국이 가장 많이 삭힌 등급 같아요. 나주 사람들은 그 정도 삭힌 걸 좋아해요. 앳국에는 4~5월에 나는 여린 보리 순을 넣어야 제맛이 나죠”라며 거든다.
홍어앳국은 홍어 뼈 육수에 된장을 풀고, 삭힌 홍어 내장과 보리 순을 넣어 얼큰하게 끓인다. 홍어 애는 홍어 간이다. 생 홍어 애는 연두부처럼 부드럽고 고소해 기름장에 찍어 먹는다. 삭힌 홍어 애를 넣은 홍어앳국은 암모니아 향이 매우 강하다. 알싸한 냄새에 막혔던 코가 뻥 뚫린다. 처음에는 냄새 때문에 먹기 힘들지만 후각이 조금 마비되면 얼큰하고 구수한 맛이 느껴진다.
삭힌 홍어가 나주의 별미가 된 사연은 이러하다. 고려시대 말 공민왕 때 왜구 침략을 피하고자 흑산도 사람들을 나주 영산포로 이주시킨 적이 있다. 흑산도 사람들이 생선을 잡아 배에 싣고 며칠 동안 나주로 건너오는 사이 생선들이 상하고 말았다. 그런데 상한 생선을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고 맛있는 생선은 홍어뿐이었다고 한다. 그 뒤로 영산포에 정착한 사람들이 홍어를 삭혀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산포는 곰탕거리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영산포 선창가에 40여 개의 홍어 식당과 홍어 판매장이 자리해 있다. 거리에서부터 홍어 삭히는 냄새가 풍긴다. 홍어요리 전문점에서 홍어정식을 주문하면 홍어삼합, 홍어튀김, 홍어무침, 홍어찜, 홍어전 등이 한 상 차려진다. 삭힌 홍어는 열을 가할수록 향이 강해지므로 차가운 음식부터 나온다. 홍어무침, 홍어삼합, 홍어전, 홍어찜, 홍어앳국, 홍어튀김 순으로 먹어야 삭힌 홍어 맛에 차차 적응할 수 있다. 마지막에 등장한 홍어튀김은 홍어 고수라고 자부했던 내게 굴욕감을 안겼다. 한입 먹었을 뿐인데 입천장이 까져 젓가락을 내려놓아야 했다.
사심 가득한 나주 4味 연탄돼지불고기
영산포 선창가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구진포 장어거리가 있다. 1981년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기 전에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던 곳이라 민물장어가 흔했다. 당시에는 장어 식당 열댓 채가 성업했다. 지금은 다섯 채 정도만 남아 장어거리의 명맥을 유지한다. 구진포 장어 원조집으로 알려진 신흥장어도 이제는 타지역 장어를 사용하지만, 오랜 내력의 깊은 손맛은 여전해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나주 3味에 별미 하나를 추가한다면 송현불고기집의 연탄돼지불고기를 손꼽는다. 외지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오래된 맛집이다. 8년 전 송현불고기집에 처음 갔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길가 허름한 식당 안에 손님이 많아 놀랐고, 주인이 연탄불 앞에 앉아 석쇠 위 삼겹살을 쉴 새 없이 굽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번듯한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고기 맛이 바뀌었을까봐 걱정했는데, 고기 표면에 기름이 번드르르하고, 달고 짭조름한 맛은 그대로다. 가위로 고기를 직접 잘라 먹어야 하는 번거로움은 맛으로 상쇄하고도 남는다. 싼값에 배불리 한 끼 먹었으니 가성비와 가심비를 다 잡았다.
◇ 이색 명소 & 맛집 ◇
나주목사내아(금학헌) 목사내아는 조선시대 나주목 최고 수장인 목사의 살림집이다. 건물 이름이 금학헌이다. 1825년에 건립된 ‘ㄷ’자형 전통한옥으로서 내아 1동과 행랑채 1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사 의복 무료체험과 한옥 숙박체험을 할 수 있다. 성정을 베푼 목사들의 이름을 딴 온돌방에는 옛집에 걸맞은 전통가구와 침구가 갖춰져 있다. 나주시에서 운영해 숙박료가 저렴한 편이다. 나주시 금성관길 13-8, 09:00~18:00 관람료 무료, 061-332-6565
영산강 황포돛배와 영산포등대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면서 농수산물을 실어 나르던 황포돛배가 사라졌다가 30여 년 만에 관광용으로 부활했다. 영산포 선착장을 출발해 다시면 회진리 천연염색문화관 앞 풍호나루터까지 약 5km 구간을 왕복 운항한다. 영산포등대는 내륙 하천에 남아 있는 유일한 등대다. 지금은 등대 기능을 상실했지만, 밤마다 불을 밝혀 옛 추억을 되살려준다. 나주시 등대길 80, 10:00~17:00 월요일 휴무, 영산포 선착장 매표소 061-332-1755
전라남도 산림자원연구소와 도래한옥마을 산포수목원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에는 명품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있다. 수목원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풍산 홍 씨 집성촌인 도래한옥마을도 둘러볼 만하다.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홍기응 가옥과 홍기헌 가옥, 한국 내셔널트러스트의 시민유산 제4호로 선정된 도래마을옛집 등 조선시대 양반집이 많다. 나주시 산포면 산제리 산23-7, 09:00~17:00 입장료 무료, 061-336-6300
옥돔은 몸길이가 30~50cm 가량의 옥돔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다. 제주도에서는 '솔래기'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에 분포하고 제주도 근해에서 많이 잡힌다. 제주 옥돔은 생선의 황제, 또는 도미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클수록 맛있고 옥돔찜, 옥돔구이, 옥돔 미역국 등으로 조리한다. 제주도에서는 귀한 손님을 맞을 때 내놓고 잔칫상, 제사상에 옥돔구이를 올린다.
옥돔을 바다에서 잡아서 반찬이나 안주용으로 식탁에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본다.
옥돔은 음력으로 9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주로 잡힌다. 제주산 옥돔은 겉면인 머리와 등 쪽이 붉은 기가, 돌고 눈이 선명하며 꼬리부분에 노란색 선이 5~6개 있고 배쪽은 희고 고운 색을 띄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수입산으로 분류한다. 제주도 연안에서 어선들이 주낙 낚시로 고기를 잡고 있다. 어획량도 적고 잡는 방법도 까다로운 생선이다.
배에서 꺼내기 전에 용도에 맞게 장만해 나오거나 아니면 그대로 고기를 가지고 나와서 거래처나 식당 등에 넘기기도 한다. 조림이나 국거리용을 만들 때 배에서 만들어 내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비늘을 제거하고 내장을 뺀 후 고기를 토막을 낸다. 구이용이나 튀김용은 비늘과 내장을 제거하고 고기를 반으로 펴 싸서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이 잘 드는 집 마당이나 올레 돌담 등 깨끗한 곳에 널어서 건조시킨다. 좋은 날 이틀 정도 말리면 고기에 물끼가 없을 정도로 마르게 된다. 자연 바람으로 고기를 말리는 것이 특징이다.
1970년대 이전 옥돔 거래가 활성화되기 전까지는 제주도 어촌 해변 작은 골목가게나 오일장에서 주로 판매를 하였고 지금은 어시장과 오일시장은 물론 마트나 백화점 등 전국 어디에서나 구입할 수 있다. 집까지 배달도 된다.
옥돔은 찜이나 국보다 구이로 많이 먹는다. 굽는 방법은 1970년대 이전에는 검질(짚) 불에서 구웠고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는 장작불,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는 연탄불, 2010년대에 들어서서 가스불을 이용하여 굽는다.
그러나 옥돔구이의 제맛은 검질 불이나 장작불로 구울 때 난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편하게 구우려고 토막을 내고 꽁지를 짤라 버리곤 하는데 그렇게 구우면 맛이 없다. 통째로 머리와 꼬리가 붙은 채로 구워야 한다.
먹는 방법도 통째로 구운 고기를 칼로 자르지 않고 손으로 적당히 쪼개야 제 맛이 난다. 모든 부위가 각각 제 맛을 낸다. 살은 살대로 먹고 머리와 꼬리도 다 씹으면 제맛이 난다. 제주도 옛 어른들은 옥돔 머리 하나면 다른 반찬이 필요없다고 했을 정도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옥돔 고기의 살은 애들을 주고 부모들은 머리를 먹기도 했다.
최근 바다의 수온이 올라가 바닷물의 오염 등으로 옥돔의 질이 다소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수입산 옥돔의 보급으로 옥돔의 이미지가 떨어지고도 있다. 제주 옥돔이 제주를 상징하는 고기로서 손색이 없도록 하기 위해 잘 보전하는 노력이 긴요해 보인다.
2019년 마지막 날 오후 서울에서 친구 부부와 함께 태백으로 출발했다. 함백산에서 일출을 보고 내려와 아침을 먹고 태백산을 오르기로 했다.
5년 전 태백산 해돋이를 보려고 오를 때 체감온도 영하 30도의 맹추위와 맞닥뜨려 카메라 한번 꺼내지 못하고 내려왔던 기억이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태백의 주목나무 눈꽃이 아직도 눈에 선해 다시 마주할 그 절경에 마음이 설레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는 내내 차에서 바라본 풍경엔 눈은 없었다.
3시간 반 남짓 달려 땅거미가 내려올 때쯤 태백에 도착했다. 저녁 6시가 가까운 시간에 태백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민박촌으로 올라갈 요량으로 한우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태백실비식당’을 찾았다. 이 식당은 연탄불에 구워 먹는 한우 갈빗살이 소문난 집이다. 한우 갈빗살을 시켰다. 때깔 좋은 한우가 뚝딱 한 상 차려졌다. 반쯤 불이 붙은 연탄이 등장하고 이어 석쇠에 올려진 태백 한우의 지글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미 눈과 가슴은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고소한 한우의 맛에 취해 세 명이 5인분을 먹고도 모자라 추가로 1인분을 더 시켰다.
2020년 새해를 여는 첫날, 어둠을 헤치고 달려간 발걸음 아래 함백산이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 불어오는 칼바람에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간간이 눈발이 흩날리는 동녘 하늘에서 붉게 물들어오는 미지의 세상이 열리고 있었다. 예로부터 민초들이 소원을 빌었다던 함백산에서 우리 일행은 경자년 첫날의 일출을 간절히 기다렸다.
흩날리는 눈발이 카메라 렌즈에 올랐다. 연신 렌즈를 닦아내며 “과연 경자년 첫날의 일출을 볼 수 있을까?”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오르락내리락 급하게 흘러가는 구름 너머 보일 듯 말 듯 숨바꼭질하던 경자년 (庚子年)의 첫 일출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7시 40분쯤, 어스름 능선 용광로처럼 펼쳐진 붉은 주단 가운데로 연붉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햇무리를 동반한 해가 서서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눈발이 휘날리는 와중에도 장엄하게 솟아오르는 경자년의 첫날 일출!
숨이 멎을 듯 멋진 일출 앞에 경건한 마음으로 두 손 모으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아침을 먹고 태백산을 오르기 위해 유일사 쪽으로 이동했다. 초입을 지나 유일사 쉼터에 도착하니 다리에 전해지는 무거운 하중으로 온몸이 뻐근하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등에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할 때쯤 주목 군락지가 나타났다. 천 년 주목에 내려앉은 눈꽃이 그야말로 환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 역시 태백산이로구나!” 쉴새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굽이굽이 눈 터널을 오르다 보니 장
군봉 옆으로 천제단이 성곽처럼 불쑥 나타났다. 사람들이 천제단 앞에서 허리를 굽혀 무언가를 빌고 있었다.
태백산 표지석 앞에는 인증샷을 하려는 인파가 줄을 서고 있었다. 인증샷을 마치고 하산을 시작했다. 유일사 쪽에서 출발한 지 5시간여 만에 다시 유일사쪽으로 내려왔다.
광부들이 즐겨 먹었다던 태백 닭 물 갈빗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광부들이 갱에서 작업하면서 마셨던 탄가루를 청소하기 위해 즐겨 이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뜨끈뜨끈한 국물에 뭉게뭉게 올라오는 김 서린 닭갈비는 얼었던 몸을 이내 녹여주었다.
경자년 첫날에 찾은 함백산 일출과 태백산 눈꽃 산행이 올 한 해를 잘 살아내는 힘으로 작용해주기를 기대해본다.
온실 속 동백꽃이 피었다기에 갔는데, 화려한 조명 속에서 낮보다 더 아름다운 식물원을 만났다.
신구대학 식물원에서 꽃빛축제가 열리고 있다. 2019년 11월 30일(토)부터 2020년 2월 16일(일)까지 주말과 휴일에 야간개장(17:00~21:00)을 해 사람들을 맞는다. 입장료는 성인 5,000원 65세 이상은 3,000원이다.
식물원 온실에 들어서면 동백꽃이 붉은 꽃잎을 열고 있고 다정큼나무가 하얗게 터지기 시작했다. 향기가 백 리까지 간다는 제주도 곶자왈에 자생하는 백서향도 곧 꽃잎을 열 것 같다. 특히 남쪽지방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식물들이 많다. 곳곳에 나무줄기를 타고 오른 소국이 분재처럼 전시되어 있어 감상의 재미를 더한다. 꽃과 푸른 잎, 겨울 속 싱그러움이다.
식물원을 한 바퀴 돌며 겨울눈을 달고 있는 나무들의 겨울나기를 들여다보느라 춥다 싶으면 가든 카페에 들어가 보자. 해가 뉘엿뉘엿 져가고 환상적인 조명이 불을 밝히면 꽃처럼 피어나는 빛의 축제에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꽃빛축제의 하이라이트를 감상하면서 차 한 잔을 앞에 둔 겨울밤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찾아가는 방법 : 지하철 분당선 모란역 5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11-1번을 탑승하여 상적 1동. 신구대학식물원 앞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180m를 걸으면 식물원에 도착한다.
주변 맛집 : 걸어서 갈만한 거리에 생선구이가 맛있는 집이 있다. 는 상호처럼 연탄불에 생선을 구워낸다. 꽁치, 고등어, 삼치, 조기 등 인원수에 따라 나오는 생선 종류가 늘어난다. 보쌈, 배추전까지 나오는 모둠생선구이 메뉴가 1인 1만1000원. 2인 이상만 주문받는다.
42년 전통 ‘대전갈비집’
가족 외식 단골 메뉴인 돼지갈비가 ‘대전갈비집’ 주인장 이점순(63) 씨에겐 가족의 생계수단이었다. 40여 년 전 삼 남매를 키우기 위해 다섯 평 남짓한 공간에서 연탄불 두 개를 놓고 시작했던 가게는 어느덧 200석이 넘는 규모에 이르렀다. 격세지감을 느낄 법도 한데 주인장은 오히려 별다를 것이 없고, 세월도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단다. 그건 아마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살아왔기 때문일 테고, 초심을 잃지 않았기에 그러할 것이다.
“특별히 돼지갈비가 자신 있어서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처음엔 제 식대로 양념을 해서 내놓았다가 손님이 짜다고 하면 간을 적게 하고, 달다고 하면 설탕 좀 덜 넣고 해가면서 맛을 맞춰간 거죠. 그렇게 수십 년에 걸쳐 손님들에게 배워가며 현재의 레시피가 완성된 셈이에요. 대신 정직하고 좋은 재료 쓰자는 건 철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수많은 손님의 입맛으로 만들어낸 돼지갈비이지만, 어떤 이들은 그 겉모습이 다소 낯설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우리가 익히 떠올리는 돼지갈비는 짙은 갈색을 띠지만, 이곳은 거의 생고기 빛깔에 가깝다. 자칫 싱겁지 않을까 싶지만, 주인장은 “일단 구워 드셔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우리 집 고기가 겉보기엔 희멀거니까(?) 맛이 없겠거니 여기는 분들도 있죠. 근데 한입 드시면 그런 생각이 싹 바뀌나봐요.(웃음) 짭짤하고 달달하고 돼지갈비 특유의 맛도 나는데 마치 생고기 먹는 것처럼 깔끔하다고 좋아들 하시죠. 대부분 판매하는 돼지갈비 양념은 색소가 들어간 경우가 많아요. 또, 고기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진한 색으로 감추려는 의도도 있죠. 저희는 양념에 색소를 절대 쓰지 않고, 고기도 매일 신선하고 품질 좋은 것으로 골라와 직접 손질해 사용해요. 속이고 감추지 않는 건 손님과의 의리이고 약속입니다.”
주인장이 이토록 신뢰를 중시하는 건, 어렵던 시절 생계의 버팀목이 되어준 고마운 발길들에 대한 보답과도 같다. 재료의 품질이나 들이는 정성에 비해 음식 가격이 높지 않은 것도 그러한 마음에서 비롯됐다.
“큰애가 중학생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났어요. 애들 먹여 살리느라 고생한다고 찾아와주신 분들이 지금도 갈비 드시러 오세요. 우리 삼 남매가 한의사, 양의사, 검사로 다들 훌륭하게 잘 자라줬는데, 그건 나 혼자가 아니라 대전갈비집을 다녀가신 손님들이 함께 키워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어떻게 가격을 올리고 음식을 허투루 만들겠어요.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건강이 닿는 한 오래오래 좋은 갈비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대전1호선 중앙로역 1번 출구 도보 9분
주소 대전시 중구 대전천서로 419-8
영업시간 11:00~22:30
대표메뉴 돼지갈비, 콩나물돌솥밥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창경궁에서 숲 해설과 왕실 역사 강의가 있다 하여 갔다. 그런데 창경궁을 창덕궁으로 잘못 알고 갔다. 종로3가에서 내려 돈화문 쪽으로 10분 정도 걸었다. 입장료 3000원을 내고 창덕궁에 들어갔으나 창경궁은 창덕궁 안쪽으로 가서 다시 표를 끊고 가야 한다 하여 대략 둘러보고 바로 나왔다. 시간이 늦어 빨리 가야 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담장을 끼고 원남동 정문인 홍화문으로 갔다. 담장이 꽤 길었다. 빠른 걸음으로도 20분 정도 걸렸다.
원남동로터리가 보였다. 전철역이 멀어 교통이 불편한 곳이다. 이곳에서의 추억은 보신탕에 얽힌 얘기이다. 필자가 군 입대를 1년 미루는 바람에 친구들 군대 송별회를 필자가 다 해주었다. 그러나 막상 필자가 군 입대를 할 때에는 모두 군에 있어 송별회도 제대로 못 받고 입대했다. 그래서 필자가 제대할 때 친구들이 대대적으로 신세를 갚는다며 부른 곳이 원남동로터리 보신탕집이다. 그 당시 원남동로터리에 보신탕집이 몇 군데 있었다. 인근 동성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가 잘 안다며 데려간 곳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때 보신탕이 처음이었다. 전골로 나왔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깻잎만 건져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때의 경험 덕분에 나중에 중소기업 공장장으로 스카우트되어 일할 때 도움이 되었다. 기존 임원들이 젊은 공장장 기를 죽이자며 경기 성남시의 보신탕집에 데려 간 것이다. 두 번째 보신탕을 대하는 자리이므로 보신탕이 낯설지 않았다. 너무 맛있게 잘 먹으니 젊은 사람이 보신탕을 잘 먹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공장장이었으므로 여름 피크시즌이 지나면 생산부 전원이 인근 개울가에서 보신탕을 끓여 먹으며 노는 야유회에도 가야 했는데 거기서도 같은 칭찬 들었다.
창경궁의 추억은 필자가 군에서 제대한 바로 다음 해인 1976년에 이어졌다. 보신탕 덕분에 창경원을 생각해 낸 것이다. 복학하고 나니 1,2학년 여자 후배들과는 세대 차가 나서 같이 못 놀고 3,4학년 여학생들은 이미 임자가 있었다. 그런데 군 입대 전 가깝던 동아리 여자 후배가 근처 유치원에 배치받아 일을 하고 있었다. 몇 번 만나니 정도 들었는데 같이 창경원 밤 벚꽃놀이를 가게 된 것이다. 인파는 북적이고 흙먼지가 날려 분위기는 부산스러웠다. 그 여자 후배는 사실 집안에서 어릴 때 정해준 약혼자가 있으며 결혼하게 되면 시골로 내려가서 살 예정이라고 했다. 시골 내려가기 싫어 마음이 움직이던 중 필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일반전화를 사용할 때라서 전화할 때마다 원장이 받았다. 나랑 데이트하는 것을 눈치 챈 원장이 불러 제자리로 돌아가라며 조용히 타일렀다고 한다. 그래서 밤벚꽃놀이 하는 날 이별장을 받은 셈이다.
세 번째 추억은 어렸을 적, 창경원에는 동물원이 있었다. 주사가 심한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어디서 호랑이 똥이 술 끊는 데 효과가 있다 하여 어머니가 여기서 어렵게 호랑이 똥을 구해 오셨다. 연탄불에 대야를 얹고 호랑이 똥을 태워 가루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가루를 걸러 그 당시 귀하던 양주병에 소주와 함께 타서 진열장에 놓아두었다. 조니 워커 병에 든 빨간 술이 보기에도 좋았다. 그걸 드신 아버지는 여전히 주사가 심했고 같이 드신 작은아버지는 그 후로 이상하게 술이 안 받는다며 효과를 보였다.
그러니까 40년 만에 창경궁을 다시 가보게 된 것이다. 원남동로터리를 지나니 맞은편에 서울대 치과대학 건물과 암병동이 보였다. 창경궁 입장료는 1000원으로 창덕궁에 비해 쌌다. 화창한 봄날에 예쁘게 한복을 차려 입은 젊은 처녀들이 많이 보여 예뻤다. 알고 보니 근처에 1만5000 원 내외로 한복을 대여해주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들어서자마자 그 옛날 그렇게 많던 벚꽃나무를 찾아 봤으나 안 보였다.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벚꽃나무들은 서울대공원과 여의도 등지로 옮겨 심어졌다는 것이었다. 창경원은 원래 창경궁이었으나 일제가 왕실 권위의 훼손 목적으로 다수의 건물들을 허물고 동물원, 식물원을 짓고 벚꽃나무들을 대량으로 심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1909년부터 서울 시민들의 관광명소가 되었으나 역사 되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변화가 있었다. 1986년 식물원은 그대로 두었으나 동물원을 서울대공원을 옮기고 다시 창경궁으로 원 이름을 찾게 되었다.
창경궁은 음식물 반입이 안 된다. 숲속의 그늘이 조용한 데이트를 즐기기에 좋아 보인다. 나와서 북쪽으로 20분쯤 걸어가면 혜화역과 대학로가 나온다. 저녁식사 겸 맥주 한 잔 하기 좋은 코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