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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큰 곳집,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궁남지’
- 백제의 고도(古都) 부여로 가는 여행은 즐겁다. 유적을 볼 수 있어서다. 야박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뭐 볼 게 있다고 부여를 여행하나?’ 백제의 왕도였지만 남아 있는 유적이 많지 않은 걸 아쉬워하는 촌평이 그렇다. 물론 이는 단견에 불과하다. 부여는 유형의 유산과 무형의 정신적 유산이 겹친 역사의 큰 곳집이다.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한 이후 백제의 국력은 강성했다. 문화 융성의 절정기였다. 그러나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패망의 상처와 비운의 망국사, 그리고 전란의 파괴적인 횡포를 간신히 모면한 유적들을 남긴 채. 부여 읍내에 있는 정림사지로 들어선다. 백제시대에는 불교 문화가 번성했다. 절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찰이 정림사다.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한 직후 지은 절이다. 지금은 절터에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만 남아 과거를 웅변한다. 너른 절터 복판에 우뚝 선 이 석탑의 체구는 웅장하다. 백제의 풍성한 문화 양상을 너끈히 대변하고도 남을 만큼 고품격 이미지를 풍겨 당당하다. 이는 백제를 알리는 부여의 사실적인 유적 중 지상에 현존하는 유일한 건축물이다. 왕궁지나 왕릉 등 나머지 유적은 지하에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선 고독한 탑이다. 홀로 눈부신 해 아래에 서서 망국의 어두운 역사를 읊조릴 수밖에 없는 배역이 주어졌으니.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오늘날 우리가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여느 오층석탑들과 유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재의 많은 석탑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형상을 닮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불탑은 한국 석탑의 시조다. 고대 불탑의 특징이던 목탑 중심에서 석탑으로 바뀌는 과정의 경위를 알려주는 가장 유력한 탑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오층석탑 역시 동일한 반열에 놓여 있다. 무왕은 왜 석탑을 구현했을까? 삼국시대 불교는 중국을 통해 전래되었다. 백제는 중국식 불교를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백제만의 기법으로 소화해 일련의 개성을 돋우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백제에서 시작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석탑 문화다. 중국에서 흘러들어온 목탑은 화재를 견딜 만한 재간이 없는 등 내구성에 문제가 많다. 그래 석재를 동원해 탑을 만들었다. 단단한 돌을 깎아 섬세한 불탑을 만드는 일이 쉬웠으랴. 그러나 백제엔 난처한 일도 아니었다. 부여 천도를 위한 계획도시를 만들면서, 또는 왕가의 석실 무덤들을 조성하면서 이미 능란하게 습득한 기술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높이는 약 9m에 달한다. 탑의 기단부터 상륜부까지 탑신 전체에 발휘된 세부 수법조차 세련돼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이 탑은 목탑의 조형미를 석재로 빚어냈다. 돌을 나무 다루듯이 해 전례가 없던 석탑을 만들었으니 비범한 창의의 산물이다. 특히 버선코처럼 살짝 들어 올린 옥개석의 모습이 아름답다. 일찍이 한국 미술사 연구의 기반을 닦은 우현 고유섭은 이 탑을 ‘소재 정리의 규율성과 율동적인 아름다움이 잘 표현된 최고의 석탑’으로 꼽았다. 탑의 피부는 검게 그을린 자국으로 톤이 어둡다. 탑을 후려친 세월의 자국이다. 나당연합군의 공격 때 부여는 무려 7일 밤낮에 걸쳐 불에 탔다고 한다. 이때 번진 불길이 석탑을 휘감으면서 생긴 상흔으로 추정된다. 이는 소소한 수난에 불과하다. 더욱 기막힌 건 석탑의 1층 몸돌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을 지닌 ‘大唐平百濟國碑銘’(대당평백제국비명)을 새겨 넣었다는 데에 있다. 소정방은 승전의 기세를 몰아쳐 부여에 딱 부러지는 전공비를 건립하는 대신, 백제의 정신적 심장부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비석 삼아 얼렁뚱땅 글을 새겼다. 이후 석탑은 오랫동안 평제탑(‘대당평백제국비명’의 약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심지어 이 탑을 소정방이 만든 것으로 오인하기도 했다. 석탑이 겪은 오욕이 이렇게 자심하다. 백제의 역사가 왜곡된 사례는 소수에 그치지 않는다. 가령 ‘낙화암 삼천 궁녀 얘기’는 팩트를 찾을 수 없는 허구에 불과하다. 백제 멸망을 초래한 의자왕 깎아내리기 역시 가혹하고도 집요하게 자행됐다. 근래 들어 의자왕이 무능한 것만은 아님을 증명하는 기록에 입각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해진 건 그나마 다행이다. 역사는 흔히 승자의 입맛대로 윤색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패자의 역사는? 당연히 되살려야 한다. 역사는 특정 세력의 전유물일 수 없기 때문이다. 땅을 파기만 하면 유물이 나와 발길은 이제 궁남지에 닿는다. 이건 백제 무왕 때 조성한 한국 최고(最古)의 인공 연못이자 정원이다. 다음과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추정한 요지가 그렇다. ‘백제 무왕 35년(634)에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웠다.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한다.’ ‘삼국사기’의 다른 페이지에도 궁남지 소식이 나온다. ‘3월에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기록한 것. 이는 이 연못이 궁원지(宮苑池)임을 알게 하는 단서다. 연못 동쪽 언덕에선 백제 때의 초석과 기와 파편 등이 출토됐는데, 이곳은 왕궁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이궁(離宮, 태자궁이나 세자궁을 달리 이르던 말)의 옛터로 추정된다. 이렇게 궁남지의 조성 내력과 형태는 대체로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무왕의 탄생 설화가 등장한다. ‘무왕의 어머니는 남지(南池, 궁남지) 둑에서 혼자 살다가 그 못의 용과 상관하여 아기를 낳았다. 그 아이가 서동인데 그의 재능과 도량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서동은 신라의 선화공주를 아내로 삼기 위해 발칙한 향가 ‘서동요’를 지어 신라에 유포, 성공적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으며 마침내 왕위에 오른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이다. 이런 내력으로 궁남지는 서동요의 배경지이자 무왕의 행적을 더듬을 수 있는 역사 명소로 또렷이 부각돼 오늘날에 이르렀다. 궁남지의 진면목은 다 드러나지 않았다. 미처 설명되지 않은 틈이 많아 이견과 논란이 잦다. 앞으로의 발굴 결과에 따라서는 동아시아 원지 조경사 연구의 표준 유적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건 궁남지만의 일은 아니다. 부여에선 땅을 파면 수시로 유물이 나온다. 부여의 역사는 하룻밤 사이에 달라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정찬국 부여문화원 원장 “유물, 어디서 또 나올지 알 수 없어” 백제 26대 성왕부터 31대 의자왕까지 123년간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의 지하엔 많은 유물이 매장돼 있는 걸로 추정된다. 이에 대한 발굴 작업이 거듭되었으며, 현재에도 왕궁터 발굴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어디에 얼마나 더 많은 유물이 묻혀 있는지 아직 알 수 없다. 계속 발굴해야 한다.” 정찬국 부여문화원 원장의 얘기다. 백제는 문화 강국으로서 찬란한 역사를 남겼다. 그러나 전란 속에서 많은 유적이 사라지거나 땅에 묻혔다. 이를 발굴해 보존하는 게 지역사회의 숙원이자 숙제다. “백제 패망 때 부여가 불길에 휩싸이면서 목조 건축물은 대부분 사라졌다. 백제 문화의 원형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매장 문화재 발굴 작업이 필연적이다. 뜻밖의 상황에서 유물이 나오기도 한다. 1993년 왕릉원 주차장 공사를 하던 중에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경우가 그렇다. 이는 우연히 출토된 것이지만 반향이 엄청났다. 완벽한 예술성과 사상성이 담긴 세계적 작품이자 백제 문화의 정수로 평가되었으니까.” 백제의 고도라는 역사성과 관련한 지역 정서의 특질이 있다면? “백제의 후예로서 주민들의 자긍심이 완연한 지역이다. 긍지를 가지고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약하는 이들도 많다. 비록 군 단위 농촌 지역이지만 문화 역량은 어느 지역보다 뛰어나다. 한편 갑작스럽게 백제가 멸망하면서 초래된 한(恨)의 정서가 지역 저변에 깔려 있기도 하다. 특히 승자의 입장에서 쓴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폄하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폄하의 사례를 하나 든다면? “백제는 문화 강국에 그치지 않았다. 해상 강국으로서 국제 교류도 매우 활발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록물에는 그런 사실이 축소돼 있다.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에 관련 기록이 더 많다.” 역사적 가치에 비해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유적은? “한국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대규모 취락 유적인 ‘송국리 선사유적’을 꼽을 수 있다. 병자호란 이후 효종과 북벌에 공감하는 글을 나눈 백강 이강여 선생의 행적이 서린 규암면의 ‘대재각’(大哉閣)과 ‘부산각서석’(浮山刻書石)도 소중한 유적이다.” 문화원 사업의 중요 프로그램과 성과엔 어떤 게 있나? 부여는 국악 등 전통문화가 발달한 반면 현대 문화 측면은 취약하다. 그래서 2014년에 ‘부여청소년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반응이 좋아 성인 단원으로 구성한 ‘부여팝스오케스트라’도 추가로 운영하고 있다. 유홍준 교수, 나태주 시인, 김용택 시인 등을 초청한 바 있는 ‘명사와 함께하는 부여 문화 투어’도 인기를 끌고 있다. 유 교수의 경우 신청자가 몰려들어 47초 만에 접수를 마감했다.” 유홍준 교수는 부여군에 유물 다수를 기증했다지? “10여 년 전부터 부여 역사를 빈번히 탐방한 그는 부여에 깊은 유대감을 갖고 있다. 퇴직 후 부여에 살기 위해 이미 거주지도 마련해두었다. 이런 인연을 계기로 민속공예품과 서화류 등 소장 유물 600여 점을 우리 군에 기증했다.”
- 2024-10-1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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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숨결 숨쉬는 익산 왕궁리 유적지
- 왕궁리 유적지로 들어가면서 ‘여유롭다’란 말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유적지든 공원이든 시설물로 가득가득 채워지고 볼거리가 많음을 보여주려는 듯한 복잡한 풍경이 늘 아쉬웠던 터다. 널찍한 익산의 왕궁리 옛터엔 휑한 여백의 미가 팍팍, 신선한 바람 맞으며 헐렁한 여유감으로 벅차기까지 하다. 물씬한 황량함이 어쩐지 더욱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그 넓은 터에 혼자 온 듯한 여행자 두 사람만이 각자 이쪽저쪽에서 뚝 떨어져 호젓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유난스러운 유적지의 시스템이 있을 법한데 여긴 그렇지도 않다. 딱히 꾸며진 모습 없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널널한 풍경이 된 역사 속을 걷는다. 관람 동선 안내문이 있지만 이 넓은 공간을 그냥 발걸음 닿는 대로 자유롭게 오가면 된다. 입구에서 호위하듯 고목이 숲을 이룬 길을 산책하듯 홀린 듯 걸으며 유적지를 돌아보는 맛,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멀리서도 홀로 오롯한 왕궁리 오층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포토존 프레임 안으로 바라보는 석탑 또한 기품 있다. 오랜 세월 너른 터에 우뚝 서서 품격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왕궁터를 돌아보건대 세련되고 웅장했을 백제 옛터다. 끊임없는 보존 노력으로 이제는 풍경이 된 역사 속에 서본다. 주변으로 몇 개의 건물터, 금당터가 자리를 지키고, 왕궁 둘레를 감아 도는 길에 단을 높인 대형 배수로의 흔적도 보인다. 왕이 휴식하던 후원과 공방, 화장실까지 옛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도록 조성했다는 설명서를 읽으니 그 시절 장인들의 디테일한 기술이 놀랍다. 이런 길을 따라 궁궐과 정원의 멋을 누렸을 백제 시대의 영화를 마음의 눈으로 그려보고 상상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공주, 부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지구로 당당히 자리 잡은 후에도 여전히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천년 넘는 역사 속의 백제 문화유산은 무궁무진할 터. 왕궁리 유적 옛터에 내리는 노을을 보러 저녁 시간에 다시 와볼 생각이었는데 딴전 피우다 결국 그러지 못했다. 일몰이든 일출이든 천년이 훨씬 넘는 왕궁터가 배경이 되어준다면 그 풍경은 더 말할 게 없을 듯하다. 푸른 하늘과 늦가을 왕궁리의 조화가 이렇게나 멋진데, 날씨 따라 변화하는 백제 옛터 왕궁리의 사계는 또 어떨까. 미륵사지 석탑이 품은 이야기 왕궁리 유적지에서 미륵사지 석탑까지는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다. 정문에 들기 전에 ‘미륵사지 미디어아트 쇼’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게 뭐지’ 하면서 보고 있는데 이 지역 주민인 듯한 분이 지나다가 얼마 전에 진행된 행사라면서 참 볼 만한 쇼였다고 말해준다. 미륵사지 석탑 동·서쪽에 프로젝션 매핑 및 드론을 이용해서 다양한 빛과 형상을 표현하고 음악을 활용한 종합 미디어 쇼로 구현된 행사였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익산 지역의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인 미륵사지 석탑의 가치 확산과 관광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입구에 들면서부터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이렇게 너른 대지에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모습이 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보았던 미륵사지 석탑, 백제 시대 최대 사찰이던 미륵사지는 국보 제11호다. 원래는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절반 이상이 붕괴된 모습이다. 그동안 꾸준히 보강하고 섬세한 복원 작업을 해온 결과, 지금은 미완의 6층 석탑으로 우뚝 서 있다. 복원 작업 중 해체 수리하면서 내부에서 사리장엄구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현재 내부는 입장할 수 없다. 우리의 기술로 거의 완벽하게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 옛 석탑을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개방해 들어가 보았더니 시원하다. 그 서늘함이 그 옛날의 기운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길 양옆의 연못이 차분하다. 연못 속으로 비치는 석탑의 반영이 오랜 세월 속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거길 지나 미륵사지 앞마당에는 동·서 방향으로 당간지주 두 기가 서 있다. 다가가 보니 생각보다 매우 크다.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당간은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놓는 돌기둥이다. 미륵사지 주변으로는 큼직한 돌이나 파편들이 몇 군데 자리 잡고 있는데 석탑의 노반 덮기 돌이라고 한다. 동원 금당터가 있고 몇 군데 터마다 목탑이나 석탑이 있었지만 화재로 사라지기도 하고 지금은 이렇게 기단만 남아 있는 상태다. 집에 와서 사진을 정리하다 유적지를 돌아보는 젊은 커플이 내 사진 속에 몇 번씩 담긴 걸 보았다. 널찍널찍한 터에 스며 있는 역사적 사실을 꼼꼼히 살피며 다니는 모습을 보며 참 예쁘구나 했다. 한적한 미륵사지 터를 돌며 데이트하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그저 그림이다. 백제 유적지의 풍경 속에서 그들만의 하루는 참 멋진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그뿐일까.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지나가는 가족의 모습 또한 아름답다. 이렇게 가족과 나들이하며 우리의 문화유산을 접해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즐거움일 것이다. 특히 백제 무왕의 흔적이 가득한 익산의 모습을 보려면 이곳 미륵사지를 빠뜨릴 수 없다. 한옥마을에서 호젓하게 하루 익산으로 떠나면서 그곳의 숙소를 검색했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어찌된 게 이 시기에 빈방이 없다고 나오는 곳도 제법 있다. 시내를 벗어난 곳의 숙소를 클릭해보았더니 한옥 숙소가 있다. 이름도 낯선 ‘함라’라는 곳에 위치했다. 일단 통화를 해보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예약을 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익산시에서 20~30분 정도 달려 해질 무렵에 도착한 ‘함라마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통 보이지 않는다. 한적하고 조용하다. 체크인하고 밖으로 나와해 저무는마을 골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농촌 지형을 그대로 살린 울퉁불퉁 돌담길의 자연스러움, 토담에 매달린 주먹만 한 호박과 노란 호박꽃, 가을을 알리는 담쟁이들의 뒤엉킴…. 알고 보니 토석담이 주를 이루는 함라마을의 이런 토담, 돌담, 화초담 등의 전통 담장이 등록문화재 제263호라고 한다. 그리고 시·도문화재로 지정된 함라 삼부자집의 조해영 고가, 김안규 가옥, 이배원 가옥 사랑채는 오래된 전통 가옥으로, 토석 담장과 한옥 기와지붕이 어우러진 전통적 경관이 볼 만한 곳이다. 함라 삼부자가 베푼 인심은 호남을 대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숟가락 하나만 있으면 배고픔을 면할 수 있고 노잣돈까지 얻어 갔다는데, 당시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들이었다고 전한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떠 아무도 없는 마당에 서니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정원의 꽃들이 선명하다. 풀잎에 아침 이슬이 송송송… 잔디 마당을 걸으니 운동화가 촉촉해진다. 관리동 어르신이 지나가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시며 이 먼 데까지 뭐하러왔냐신다.이렇게 조용한 거 처음이라니까, “조용하기로야 예가 절간이지 뭐” 하신다. 더러 시끄러울 수도 있을 테지만 하루 있는 동안 정말이지 한 점 소음이 없었다. 마을 바로 위쪽으로 함라향교가 마을을 품듯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조선 세종 19년에 세워진 함라향교는 겉으로 보기에도 아주 오래된 느낌이다.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쌓였지만 여전히 실용적인 향교로 건재한 채 지금껏 이어져오는 듯했다. 어르신도 말하신다. “이게 우리 아버지 때도 있었던 향교지요. 그때도 지내던 제를 지금까지 빠짐없이 이렇게 지냅니다.” 점잖고 선한 인상으로 꼭 존대어를 하신다. 한옥 숙소엔 도문대작이라는 식당이 있다. 허균(許筠)이 함열 유배 시절인 광해군 3년, 전국 팔도의 식품과 명산지에 관해 정리한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저술했다고 한다. 함열관아 객사터 가까운 곳이 허균 선생의 유배 생활공간이었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바탕으로 이곳 함라 숙소의 식당 이름이 ‘도문대작’이다. 정이 넘치는 마을분들이 차려주신 수수한 한 상으로 흐믓했던 아침 시간이다. 그냥 시내의 흔한 숙소에서 묵었다면, 따끈한 온돌의 맛도 모르고 덜컹거리는이중 창호문여닫이도 못 해봤을 것이다. 아침 이슬 촉촉한 담장이 이어진 멋진 아침 산책도, 새벽 정원의 이슬도, 정다운 아침밥상도, 점잖으신 향교 어르신도 못 뵈었을 텐데. 교외로 조금 더 달려가서 묵은 조용한 한옥마을의 하루가 기억 속에 이렇게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호젓해보기의 진수, 익산 여행은 확실한 힐링이었다.
- 2022-01-1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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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佛千塔 이야기 ⑧ 서산 보원사(普願寺) 터
-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첫눈이 내리더니 대설(大雪)을 넘어 동지(冬至)가 다가오기도 전에 매서운 추위가 들이닥쳤다. 이렇게 되면 야외활동이 많이 위축되고 문화유산 답사도 지장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산과 들이 낙엽 지고 썰렁하다 못해 가슴 한가운데로 찬바람이 뚫고 지나가는 계절적 처연함이 가득한 늦가을과 초겨울이 엉겨 붙는 이때가 폐사지 답사에는 제격이다. 폐사지가 처량하면서도 아름답고 황량하면서도 존재감이 드는 것은 그곳이 한때는 번성하던 절터였기 때문이다. 말없이 우리를 대하는듯하지만 궁금한 것들은 차근차근 일러주는 미덕이 있으며 감추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보여주는 사실과 증거가 널려있다. 충남 서산 보원사 터 (사적 제316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계곡은 내포(內浦) 지방의 진산 가야산(677m) 줄기 북쪽 봉우리 상왕산(象王山) 자락을 마주하고 서쪽으로는 개심사(開心寺)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산줄기 동쪽으로 깊은 계곡이 흐르는 곳이다. 지금은 국립용현자연휴양림이 있지만 그 옛날 이곳에는 100개의 절집과 1,000명이 넘는 승려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백제가 공주를 지나 부여에 자리를 잡고 있을 때 당진(唐津)을 통하여 중국과 왕래하던 중간지점쯤 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통일신라 말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웅주 가야협의 보원사가 화엄 10찰이다'라고 기록되어 이즈음 창건된 사찰로 보기도 하지만 백제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는 등 백제 때의 절일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원사가 상왕산에 있다’는 기록을 볼 때 16세기까지 그 사세가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서산과 태안의 지방지 격인 호산록(湖山錄)에 보원사가 강당사(講堂寺)로 바뀌었다거나 철불의 양손이 없다는 기록 등이 있어 이때부터 사세가 기울어진 것으로 보이며 일제강점기 때 사진에는 석조물만 남아있을 뿐 절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1959년 근처에서 백제의 미소라 부르는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이 발견되었으며, 1968년에는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고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대규모 발굴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현재 사적 제316호로 지정되었으며 102,886㎡의 웅장한 규모의 절터에는 당간지주, 석조, 오층석탑, 법인국사 승탑과 탑비 등 보물 5점이 있다. 당간지주 (보물 제103호)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둔다. 이 깃발을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세월이 흘러 깃발(幢,당)이나 깃대(幢竿,당간)는 남아있지 않지만 돌로 된 기둥(支柱,지주)만 남아있으니 우리가 폐사지나 현존하는 절집 초입에서 자주 만나는 유적이다. 보원사 터 당간지주는 4m가 넘는 큰 석물이지만 전혀 위압적이지 않고 화려한 조각 없이 밋밋해 보이지만 찬찬이 살펴보노라면 의외로 멋진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하단이 상단보다 넓어서 안정적이며 기둥 안쪽은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바깥쪽으로는 띠를 두르듯이 조각하였다. 윗부분은 둥글게 궁굴려서 부드럽게 마감하였으며 마주 보는 기둥의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했다. 상단의 고정 부분은 열린 형태로 파내었고, 당간 받침대는 나중에 따로 만든 듯하며 큼직한 안상을 시원스레 조각했다. 중간에는 당간을 세울 때 받치는 자리, 즉 간대(杆臺)는 옛 모습 그대로 놓여있다. 저 넓은 3만 평 넘는 부지에 절집이 번성하던 시절, 이 당간지주에 힘차게 휘날리던 화려한 깃발(幢,당)을 생각해보면 참 멋지다. 주변에 사하촌 마을까지 들어차 얼마나 번화했을까. 오층석탑 (보물 제104호) 당간지주를 지나면 절터 중간을 횡단하여 흐르는 개울이 있다. 예전에는 징검다리로 불안하게 건너 다녔는데 최근에는 간이 철제 다리를 놓아 편리하다. 생각해보면 그 옛날 이곳에는 멋진 돌난간을 두른 큼직한 극락교나 해탈교 등이 놓여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다리를 건너 절집 안으로 들어서면 길게 높지 않은 축대가 쌓여있다. 그 중앙에 계단이 놓여있으며 위로 올라서면 중앙에 오층석탑 하나 서 있다. 멀리서부터 눈에 띄는 자태가 멋스러운 석탑은 상륜부를 치장하였던 찰주가 비죽 나와 있을 뿐 전체적으로 온전한 모습이다. 기단 위에 1층 몸돌이 얹히는데 그 사이에 굄대를 올린 것이 특이하며 충청도 지역 고려석탑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1층 몸돌의 각 면에 문비를 새겼으며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어 솟아오름이 강조되지만 지붕돌이 넓고 평탄하여 안정감을 준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있지만 1945년 광복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복발, 앙화, 보륜, 보개, 보주 등의 부재가 완전하게 남아있었다고 한다. 1968년 완전 해체, 복원 시 나온 부장품들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 전시 중이다. 법인국사탑과 탑비 (보물 제105호, 제106호) 오층석탑 뒤로는 금당 터가 발굴되었으며 중앙에 불대좌로 보이는 흔적이 있다. 그 뒤로 산자락에 연하여 다소 높직한 축대가 쌓인 곳에는 법인국사의 승탑과 탑비가 있다. 법인국사 탄문 스님은 고려 4대 임금 광종(光宗)을 위한 불사에 앞장섰으며 968년에는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975년에 보원사로 돌아와 76세에 입적하였다. 스님이 타계하자 국왕은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그러면 승탑은 보승탑(寶乘塔)이라 불러야 맞는데 그냥 법인국사승탑이라 적었다. 승탑은 지대석 위의 기단부 8각 면마다 안상 모양을 파내고 그 안에 다양한 모습의 사자를 한 마리씩 돋을새김으로 새겼다. 중대석 받침돌은 8각이 다소 둥글게 보이는데 구름과 용무늬, 즉 운용문(雲龍紋)을 사실적으로 새겼다. 중대석은 아무 장식 없이 높고 큰 배흘림기둥이며 상대석은 연꽃무늬가 화려하고 그 위로는 난간을 조각하였다. 승탑의 몸돌은 8각의 앞뒷면에는 문비를 새겼고 나머지 6면에는 사천왕상과 알 수 없는 인물상 둘이 새겨져 있는데 설명이 아쉽다. 팔각의 지붕돌은 아깝게도 귀꽃이 많이 깨어진 상태이며 상륜부에는 연꽃을 새긴 복발 위로 보륜이 있다. 왼쪽에 세워진 탑비에는 법인국사(法印國師)가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된 후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다고 하니 비슷한 시기에 승탑도 세운 듯하다. 용 네 마리를 새긴 탑비의 이수 중앙에는 伽倻山 普願寺 故國師 制贈諡 法印三重大師之碑題額(가야산 보원사 고국사 제증시 법인삼중대사지비)라고 제액(題額)이 씌어 있으며 비석에는 모두 4천5백여 글자를 새겼다. 석조(石槽) (보물 제102호) 석조는 절집에서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통돌을 파내서 만드는데 보원사지 석조는 현존하는 국내 최대 크기로 약 4톤의 물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철불(鐵佛) 보원사 절터에서는 지난 1968년에 9.3cm의 자그마한 백제 금동불이 나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인 1910년경 이곳에서 출토된 철불 2구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백제의 미소,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국보 제84호) 보원사 폐사지를 둘러보고 용현계곡을 빠져나오다 보면 오른쪽 개울 건너 작은 산 중턱에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국보 마애불이 있다. 1958년 한 나무꾼 제보로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우리나라 마애불 중 최고로 손꼽힌다. 특히 벙글벙글 웃는 모습이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햇빛에 따라 변하는 것이 특이하다. 최고의 국보 마애불을 보러 갔다가 폐사지를 둘러보든지, 쓸쓸한 폐사지를 둘러보러 갔다가 나오는 길에 국보 마애불을 만나보든지 아무튼 이 가을철에 가볼만한 답사지이다.
- 2018-12-13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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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佛千塔 이야기① 공주 마곡사(麻谷寺)
- 지난 6월 30일(현지시각),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의 산사(山寺) 7곳이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열세 번째 유네스코 세계 유산을 갖게 되었으니 7곳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다. 당초 통도사와 부석사, 법주사, 대흥사 등 4곳만 등재될 듯하였고, 봉정사, 마곡사, 선암사 등 3곳은 보류될 처지였으나 세계유산위원회의 21개 위원국이 만장일치로 한국이 신청한 7곳 모두를 받아들여 등재되었다.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등재된 7개 산사 외에도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대단한 절집들, 예컨대 송광사나 해인사, 화엄사, 직지사, 수덕사 등은 왜 누락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하기 위하여 전국의 절집들을 대상으로 전통사찰, 산지입지,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여부 등을 1차 선별기준으로 적용하여보니 전통사찰법에 의거 인정된 곳이 952곳이었으며, 이중 산지입지 조건을 충족시킨 곳이 785곳, 여기에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기준을 대입하니 63곳이 일차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7~9세기 창건 여부와 창건 시기를 증빙할 자료를 확인해본 결과 다음 25곳으로 압축되었으니 관룡사, 귀신사, 금산사, 기림사, 내소사, 대흥사, 마곡사, 무량사, 무위사, 범어사, 법주사, 봉암사, 봉정사, 부석사, 불영사, 쌍계사, 선암사, 선운사, 수덕사, 용문사, 운문사, 장곡사, 전등사, 직지사, 통도사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원(禪院)의 운영과 원래 지형을 유지하는지 여부 등을 확인하니 최종적으로 위 7곳이 선정되어 등재 신청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쟁쟁한 사찰들이 누락된 이유는 무엇인가.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경우, 9세기 무렵 길상사라는 암자로 시작하였으나 지금의 대찰은 12세기 후반 보조국사 지눌에 의한 것이다. 7~9세기 창건에 한참 늦었으며 삼보사찰 중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법보사찰 해인사의 경우 9세기 창건의 기록은 확인되었으나 이후 고려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다. 팔만대장경은 조선시대에 해인사로 옮겨진 것이며 특히나 근래 사찰의 원형을 변형시킬 만큼 많은 공사가 있었음이 그 이유였다. 또한 화엄사의 경우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사찰의 중수나 중창 자료가 불충분하며 직지사나 범어사, 선운사 등은 건물의 상당 부분이 변형되거나 원형 유지가 애매한 점 등이 그 이유였다. 여기서 최근 유서 깊은 절집들의 무분별한 중창불사나 대규모 확장 건설공사가 역사성이나 문화적 가치에 반하는 일임이 드러났으니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을 하나씩 답사해보기로 한다. 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의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 본사이다.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고려 명종 때인 1172년 보조국사가 중수하고 범일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신라 보철화상 때 설법을 듣기 위해 계곡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형태가 삼밭의 삼대, 즉 마(麻)와 같다 해서 마곡사(麻谷寺)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도선국사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세조가 이 절에 들려 ‘만세에 망하지 않을 땅(萬世不忘之地)’이라 평가하고 영산전(靈山殿) 현판을 사액한 일도 있었다. 마곡사가 위치한 공주 유구 지역은 정감록 등 각종 비결서(秘訣書)에 전해오는 ‘십승지지(十勝之地)’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만큼 명당이라는 얘기이며,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라고 하여 봄날 생기 움트는 나무와 봄꽃들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이다. 마곡사에 아쉽게도 국보급 문화재는 없으나 5층 석탑(보물 제799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과 제6권(보물 제270호)이 있으며 범종과 청동향로 등 지방문화재와 세조가 타고 왔다가 두고 갔다는 연(輦)이 있어 오랜 전통과 유서 깊은 절임을 말해준다. 또한 마곡사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일본군 장교를 살해 후 숨어들어 승려로 지내기도 했던 곳으로 해방 후 찾아와 심은 향나무가 지금도 자라고 있어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는 곳이다. 불화(佛畵)를 그리는 화승(畵僧)들이 많이 활동하여 오늘날까지 화승들을 추모하는 다례제를 지내는 화소사찰(畵所寺刹)이다. 예전에 마곡사는 개울을 멀리 돌지 않고 허리를 뚝 잘라 옆구리로 진입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진입로를 잘 정비하고 주차장을 갖추어 놓아 누구나 자연스럽게 입구로 들어와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 북원 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됐다. 진입로 중간에 있는 일주문은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사실상 해탈문(충남문화재자료 제66호)이 마곡사의 첫 관문인 셈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중앙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면서 양편에는 금강역사상(인왕상)과 문수 및 보현동자상을 봉헌하였다. 해탈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충남문화재자료 제62호)이 나오는데 사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숭상하던 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수미산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마곡사 사천왕상은 조선 후기 소조불로 봉안되었으며 발밑에 악귀상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눈길을 끈다. 이렇게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왼쪽의 영산전 영역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계류를 흐르는 다리를 건너니 마곡사의 중심영역인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이 나타난다. 오층석탑(보물 제799호) 꼭대기에는 보기 드물게 청동제 머리 장식을 얹었는데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들의 라마탑을 본떠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층 남쪽에는 자물쇠 모양을 새겼으며, 2층에는 사방에 불상을 새겼고 지붕돌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5층 지붕돌에만 1개가 매달려 있다. 마곡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모셔져 있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 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세계의 주인으로 서쪽에 앉아계신다지만 비로자나불을 왜 서쪽에 앉혔는지는 알 수 없어 궁금하다. 대광보전 뒤에 솟아오른 2층 지붕은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인데 안에는 석가모니와 서쪽에 아미타, 동쪽에 약사여래를 모셨는데 약사여래불이 약합을 들지 않고 아미타여래와 같은 수인을 하고 있다. 마곡사의 중심 영역 서쪽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白凡堂)이 있으며 그 옆으로는 1946년 이곳을 다시 찾은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마곡사 개울가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삭발 바위가 있어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이렇듯 마곡사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에 돌아 나오는 길에 해탈문과 사천왕문 옆 영산전을 찾아본다. 영산전(보물 제800호)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러 찾아왔다가 못 만나자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마곡사. 승가 공동체의 생활과 전통양식을 잘 보전하여 ‘한국의 산사’ 7곳에 포함되었고 불화를 그리는 유명 화승(畵僧)들의 맥을 이어가는 절집이다.
- 2018-08-23 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