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식은 취업이 안 돼 애가 타는데 대기업에 취직했다는 둥, 의사 며느리를 봤다는 둥 묻지도 않은 자기 새끼 자랑하는 동창 녀석이 나를 욱하게 한다. 심지어 자랑질하면서 술값도 밥값도 안 내니 더욱 욱한다.
좋은 대학 졸업시켜놨더니 일할 궁리는 안 하고 독립은커녕 내 연금 타 먹으며 같이 살겠다는 딸이 나를 욱하게 한다.
‘삼식이’ 노릇도 징글징글한데 비만 오면 술 한잔 걸칠 생각에 부침개 부치라고 독촉하는 남편이 나를 욱하게 한다.
육십 평생 뼈 빠지게 일하고 은퇴했더니 내가 번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처자식이 나를 욱하게 한다.
내 얘기에 집중하지 않고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는 친구가 나를 욱하게 한다. 무시당한 것 같아 속에서 천불이 난다.
화장실 휴지가 떨어졌는데 다음 사람 생각도 안 하고 근처에 있는 새 휴지 갈아 끼우지 않고 나간 앞사람이 나를 욱하게 한다.
안톤 슈낙(Anton Schnack, 1892~ 1973)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수필을 썼다면, 필자는 ‘우리를 욱하게 하는 것들’을 씁니다.
인디언 추장 이야기
옛날 어느 인디언 추장이 손주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우리 마음 안에는 두 마리 늑대가 살고 있단다. 한 마리는 하얀 늑대로 용기, 희망, 자신감, 신념, 확신 등을 먹고살지. 또 한 마리는 까만 늑대로 분노, 좌절, 공포, 짜증 등을 먹고살아.”
그러자 어린 손주는 “그럼 두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라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추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긴단다.”
툭하면 욱하는 사람들
하루에도 몇 번씩 욱하고 화내는 이놈의 성질머리를 고치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없냐는 75세 사례자 질문에, 법륜스님은 ‘즉문즉설’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그 성질 고치지 말고 그냥 살라고 답변합니다. 그래도 꼭 고치고 싶다는 애원에 스님은 주저하다 비방 두 가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는 바로 전기충격기를 사서 욱하고 화가 치밀어오를 때마다 몸에 갖다 대는 것입니다. 죽었다 깨어나지 않으면 그 오랜 습관 고치지 못한다고 하면서요. 다른 한 가지는 화가 날 때마다 3000번 절을 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왜 화가 날까요 : 기대와 영역 그리고 비교
화는 보통 상식을 넘어선 말이나 행동, 경우에 맞지 않은 행위를 할 때 일어납니다.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를 하지 않았을 때도 화가 솟구칩니다. 그렇다면 상식이나 경우, 도리는 누구의 기준일까요? 사람마다 시대마다 상황마다 기준이 달라 갈등이 생기고 화가 납니다. 내 기준과 기대치를 상대가 충족하지 못할 때,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가 해주지 않을 때 우리는 욱하고, 화내고, 분노합니다. 상대에게 묻지도 않고 나 혼자 세워놓은 기준과 기대를 요구합니다. 또 자신은 바꾸기 싫으면서 상대만 바꾸려고 합니다. 내 영역만 소중하고 상대 영역은 무단침입하려 합니다. 친구와 친척, 이웃과 비교하고 저울질당할 때도 욱합니다.
화(火)의 실체
화는 실체가 있을까요? 화는 실체가 따로 없다고 합니다. 도로에서 앞차가 신호 없이 끼어들 때 어떤 사람은 차를 세워 몽둥이로 상대 운전자를 때리거나 차량을 부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많이 급한가 보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사람, 똑같은 말인데 누구는 격분하고, 누구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그냥 넘깁니다.
화는 오로지 내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말은 내가 화를 만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화가 났을 때 화내지 않고 꾹 참는 것은 좋은 것일까요? 가족이나 친구, 곁에 있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니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화를 참는 것은 화를 내는 것과 똑같은 에너지, 그 독기(毒氣)와 살기(殺氣)가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가 언젠가는 남에게 폭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참기보다 잘 달래야 합니다.
객기(客氣)와 정기(精氣)
화는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반쯤 미쳐 있는 상태입니다. 제정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화는 손님, 객식구입니다. 손님은 잘 대접하고 고이 보내야 하듯 ‘객기’(客氣)인 화도 잘 달래고 풀어줘서 보내야 합니다. 손님을 보내고 ‘정기’(精氣)인 나 자신으로 돌아와 주인 노릇을 해야 합니다. 화는 캔에 든 콜라와 같습니다. 당장의 조갈(燥渴)은 해소하겠지만 좀 있으면 또 목이 마릅니다. 쏟으면 얼룩이 지고 흔들면 폭발합니다. 정기는 맑은 물과 같습니다. 갈증 해소는 물론 쏟아도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화를 잘 다스리지 못할 때 오히려 우리는 마음의 주인이 아니라 화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화가 나의 주인 행세를 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을까요.
울화병에 대한 ‘동의보감’ 처방전
욱하고 성내고 화내는 게 잦고 깊어지면 화병(火病)이 되기 쉽습니다. 한의학에서 울화병(鬱火病)으로 불리는 화병은 ‘Hwa-byung’이라는 병명으로 등재될 만큼 공식적인 용어로 자리 잡은 듯합니다. ‘동의보감’(東醫寶鑑) 잡병(雜病)편 화문(火門)에 ‘화를 조절하는 방법’(制火有方)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마음을 기르라고 강조한 것은, 화가 함부로 동하고 날뛰는 것을 막는 근본적인 처방이기 때문입니다. 화가 동하는 것은 마음에 그 원인이 있기에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 바로 화라는 불길을 끄는 방책이라는 것입니다. 화 일기 쓰기로 그 어렵다는 마음을 다스려볼까요.
화 일기 1
저는 이혼하고 혼자가 된 뒤 오빠 집에 같이 사는데 친정엄마가 밤 10시에 시작하는 ‘미스터 트롯’을 보시는 거예요. 조카들 숙제하고 독서하는 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아 올케언니 눈치가 보여서 화가 났어요. 아이들이 실제 공부하는 시간대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버럭 화가 치밀어 엄마한테 막 해댔어요.
저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제가 엄마의 여가와 즐거움에 대해 인정도 이해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드라마 보는 것은 죄악이고 성경 읽기만 바람직한 행위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를 통해서든 대중가요를 통해서든 종교적 깨달음을 통해서든 삶의 여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또 내가 엄마 인생에 개입해왔네요. 함부로 단죄하고 평가하기를 일삼고 엄마만의 즐거움에 대해 무시하고 모른 체하면서요.
엄마의 사생활과 삶의 즐거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내 기준으로 엄마의 삶을 좌지우지하지 않고 판단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올케 눈치라는 핑곗거리를 내세울 게 아니라 엄마는 엄마대로, 조카는 조카대로 지켜보며 간섭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몇 년 전 필자가 분노 조절 수업에서 같이 나누었던 사례입니다. 화 일기를 쓰면서 화난 자신을 바라보고, 왜 화가 났을까 스스로 분석하다 보면 나와 상대방을 조금은 더 이해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마치 유체이탈(遺體離脫)하듯이 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셈입니다. 또 다른 화 일기를 볼까요.
화 일기 2
많이 베풀어도 고마움을 모르는 시동생과 동서 때문에 화가 납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분노가 치밀까 생각해봤습니다.
‘난 왜 꼭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하지. 내가 뭔가 대가나 보상을 바란 것은 아닐까. 시동생네 살아가는 모습과 내 모습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괴로워하는구나.’
지금 형편이 많이 여유로워졌는데도 나는 자신을 위해 돈을 쓰지 못하는 반면, 시동생네와 시어머니는 내가 베푼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것 같아 못마땅해하고 있었네요.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내가 간섭할 영역이 아닌데 자꾸 내 잣대로만 평가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해서 베풀었으면서도 고맙다는 말이나 보상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사례는 실제 우리 주변에서 비근하게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다행히 당사자는 화가 났다는 것을 얼른 알아차렸고,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봄으로써 시댁 식구들을 이해하게 된 거죠.
국수 삶기에서 배우는 분노 조절
분노, 화는 글자 그대로 불같은 감정입니다. 불이 타는 듯, 폭발할 듯 끓어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분노 조절에는 두 가지 등급, 고수와 중수의 처방이 있습니다. 국수 삶을 때 물이 끓어 넘치면 어떻게 하나요? 바로 옆에 둔 찬물을 한 사발 붓습니다. 그것도 잠시, 금방 또 끓어오릅니다. 다시 찬물을 붓고 이렇게 세 번쯤은 해야 국수가 쫄깃하니 맛나게 삶아집니다. 내 안의 화도 같지 않을까요. 나만의 찬물이 필요합니다. 심호흡, 1부터 10까지 세기, 산책, 무엇이든 좋습니다.
찬물 처방이 중수라면 끓어 넘치지 않게 국수를 삶는 사람이 바로 고수입니다. 찬물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크고 깊고 넓은 그릇만 있으면 됩니다. 필자가 직접 실험해봤으니 믿으셔도 됩니다. 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찬물 없이도 내 마음 그릇을 키우면 화를 줄이고 분노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분노 조절의 최종 목표
해와 달은 서로를 비교하는 법이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시간대에서 빛날 뿐입니다. 타인의 삶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제 노릇만 그저 할 뿐 비난하거나 평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교하지 않고, 지나치게 기대하지 않고,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화가 훨씬 덜 납니다. 나아가 상대를 대할 때 거리낌이 없고 거스름이 없고 막힘이 없는 상태, 화를 안 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 화가 안 나는 단계가 분노 조절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하나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평화로울까요. 거창하거나 어렵지 않게 안정과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같이 해보실까요.
▶ “그렇겠네”, “그랬구나” 맞장구치면서 있는 그대로 들어줍니다.
▶ “그러니까 내 말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합니다.
▶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말 끊지 않고 궁금해하며 충분히 말하게 합니다.
“성냄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화해야 하는 것이다.”
- 토머스 애덤스
“분노에 집착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던지기 위해 뜨거운 숯을 움켜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 석가모니
삼복(三伏) 중 두 번째 복날인 중복은 일 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긴 절기인 하지 중 제4경일을 말한다. 복날에 사람들은 여름철 고온다습한 날씨로 인해 떨어진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보양식을 먹는다.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는 콩국수는 삼계탕 못지않은 보양식이다. 다가오는 무더위를 대비하기 위해 건강하게 콩국수를 즐길 방법은 없을까? 자생한방병원 홍순성 원장의 도움말로 콩국수의 한의학적ㆍ영양학적 효능을 알아보자.
콩국수의 주재료이면서 ‘밭에서 나는 소고기’라 불리는 콩은 식물성 단백질 식품이다. 칼슘, 철분, 마그네슘 등 영양소가 풍부해 체력 보충과 피로 회복에 도움을 준다. 특히 콩의 이소플라본 성분은 암세포 분열과 확장을 억제하고 소멸을 촉진한다.
또한 콩에 함유된 레시틴, 식이섬유 등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 고혈압, 당뇨병, 동맥경화 예방에 효과적이다.
한의학에서 콩은 ‘대두’라 한다. 대두는 달거나 짜고 성질이 평해 오장을 보하고 십이경락의 순환을 도와준다. 콩의 효능은 동의보감에도 나와 있다. 울화에 효과가 있으므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콩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가라앉는 진정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콩은 소화가 잘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는데, 콩물이 이를 보완해준다. 콩을 삶고 갈아서 만든 콩물은 소화 흡수가 훨씬 빠르다. 여기에 열을 내려주는 밀가루가 더해진 콩국수는 여름에 먹기 좋은 보양식이다.
하지만 단백질이 풍부한 콩물은 식중독균이 자라기가 쉽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샐러드, 김밥과 함께 콩국수를 식중독 위험이 큰 식품군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실제로 식중독균은 섭씨 35도에서 2~3시간 만에 100배, 4~7시간이 지나면 1만 배까지 증가한다.
따라서 콩국수는 조리를 마친 후 바로 섭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온에 2시간 이상 두지 않아야 하고, 바로 먹지 못한다면 냉장보관을 해야 한다. 또한 조리할 때에는 얼음을 채운 차가운 물에 뜨거운 콩물을 담가 규칙적으로 저어주며 신속하게 식히는 것이 중요하다.
자생한방병원 홍순성 원장은 “콩국수는 콩의 이로운 성분을 가장 완전하게 섭취할 수 있는 완전영양식품”이라며 “콩국수 한 그릇의 열량은 500~600kcal 정도로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되고 저지방 고단백 식품이기 때문에 숙취 해소에도 탁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깨나 오이 등을 함께 곁들여 먹으면 콩국수에 부족한 영양소인 비타민C와 비타민E를 섭취할 수 있다”며 “요즘과 같은 복날에 뜨거운 삼계탕도 좋지만, 시원하고 영양 만점인 콩국수로 무더운 여름을 건강하게 이겨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각종 미디어나 언론의 콘텐츠를 접하다 보면 때때로 마음이 불편해지는 때가 있다. 분노와 짜증, 호통 등이 너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학폭 가해자 박연진 역을 맡았던 배우 임지연은 분노 연기로 인해 미간에 주름이 생기고 촬영 후에도 예민함이 지속돼 어려움을 겪었음을 밝혔다. 또한 호통으로 인해 논란이 됐던 정치인들의 태도도 이슈가 된 바 있다. 바야흐로 ‘호통의 시대’다.
미디어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사소한 일에 쉽게 화를 내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내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때로는 가까운 친구, 가족들에게 화풀이하기도 한다.
물론 적정한 수준의 분노 해소는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막상 감정이 가라앉으면 후회와 죄책감 탓에 힘들어질 수 있어 분노의 감정을 잘 다뤄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자생한방병원 김환 원장(한방신경정신과 전문의)의 도움말로 분노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부정적인 감정을 잘 관리하기 위한 건강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욱’하고 올라오는 분노…참아야 할까, 표현해야 할까?
사람들은 긍정적인 감정만을 드러내고자 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억누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내적 갈등을 침묵하다 보면 불안과 걱정이 쌓여 ‘울화(鬱火)’와 같은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마냥 참기보다는 적절한 감정 해소법을 찾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한방에서 울화는 억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해 생긴 화증을 의미한다. 가슴이 답답해지거나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이 특징이다. 병명 속의 화(火)라는 글자가 말해주듯 신체의 열감이 심해지며, 가야금 줄을 누를 때의 느낌처럼 맥이 빠르게 뛰는 것을 일컫는 맥현삭 등의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맥박이 빨라지는 증상은 심혈관계 질환을 유발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한데 이 같은 사실은 연구 논문을 통해 입증되기도 했다. 독일 예나 대학에서 60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분노를 참는 사람은 맥박이 빨라져 신체와 정신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를 주도한 마르쿠스 문트 박사는 맥박 상승이 반복될 경우 혈압이 높아져 심혈관질환, 암 등으로 이어질 위험이 커지며 수명 또한 단축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적절한 감정 해소는 건강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지나친 분노를 터뜨릴 경우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분노의 호르몬이라고도 불리는 노르아드레날린은 기쁠 때 분비되면 활력을 높이지만 화가 난 상황에서는 근육을 수축해 긴장 상태를 유발한다. 이로 인해 어깨와 목 등에 근육통이 발생할 수 있으며 심할 경우 근육 경련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또한 분노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 분비를 증가해 면역기능을 약화한다.
김환 자생한방병원 원장은 “분노를 지나치게 해소하거나 감정을 억제하는 것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매번 참다가 터지는 악순환을 반복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적절하게 해소하며 감정 조절 능력을 향상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단중혈(膻中穴)’ 지압, 침, 도움
누적된 분노를 해소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로는 운동이 있다. 특히 대표적인 유산소 운동인 달리기를 30분 이상 실천하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행복감이 드는 효과가 있다. 이는 이른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불리는 상태로, 부정적인 감정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미 부정적인 감정이 논쟁이나 다툼 등으로 이어진 상황이라면 잠시 대화를 멈추고 감정을 다스리는 데 충분한 시간을 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노르아드레날린 수치는 분비된 지 15초 만에 최고조에 이르지만 2분 전후로 서서히 수치가 떨어진다. 이어 15분이 지나면 정상 범위까지 감소하므로 감정이 진정된 후에 대화를 다시 이어나가는 것이 현명하다.
스스로 해결이 힘들 정도로 화를 다스리기가 어렵다면 전문적인 진료를 받는 것이 현명하다. 한방에서는 울화의 원인을 기의 순환이 막힌 것으로 보고 침 치료와 뜸, 한약 처방 등을 활용해 치료한다. 먼저 침 치료를 실시해 마음을 편안하게 안정시키고 긴장을 완화한다. 이어 뜸을 놓아 뭉쳐 있는 기를 원활하게 순환한다.
여기에 우황청심원과 같은 한약 처방을 병행하면 신경 안정과 불안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 실제 한국한의학연구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황청심원이 만성 스트레스에 의해 분비되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코스테론과 아드레날린 분비를 각각 86.9%, 75.2%가량 억제해 뇌 손상을 예방한 것으로 밝혀졌다.
치료와 함께 ‘단중혈(膻中穴)’과 같은 혈자리를 틈틈이 지압하는 것도 스트레스와 긴장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 단중혈은 한방에서 ‘화(火)가 쌓이는 자리’라고 불린다. 명치 약간 위쪽에 위치해 있어 화가 나고 답답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쿵쿵 내려치게 되기도 한다. 단중혈을 검지와 중지로 지그시 누른 채 10초간 문지르면 화를 가라앉히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데 효과적이다. 지압뿐만 아니라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의 분비를 촉진하는 다크 초콜릿이나 바나나를 섭취하는 것도 부정적인 감정을 완화하는 데 좋다.
자생한방병원 김환 원장은 “분노를 억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적절한 방법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도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화를 없애려 노력하기보다는 다스리는 법을 터득해 가는 것이 삶의 지혜이자 건강법일 것”이라고 말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남편의 장례식에 그 여자가 왔다. 경황이 없던 터라 옆에 있던 친구가 “혹시 저 여자 아니냐?”며 귀엣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상주에게 인사를 건네기는 고사하고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안개처럼 스며들어 소리 없이 조문을 하고는 그림자처럼 홀연히 자리를 떴으니. 나중에 부의금을 챙길 때도 그 여자 것은 없었다. 철저히 존재를 감춘다는 것이 오히려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할지. 다녀간 걸 알고 나니 부의금을 내지 않은 이유가 짐작되면서, 꽁꽁 감춘다고 감춘 것이 티를 낸 꼴이라 피식 웃음이 났다.
남편 장례식에 그 여자의 등장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딱히 나쁠 것도 없었다. 이제 와서 좋다 나쁘다 할 게 뭔가. 이미 남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두 여자의 심리적 줄다리기도 남편의 사망으로 맥없이 끝이 나버렸으니. 한쪽 줄은 남편과의 내연 관계인 그 여자가, 다른 쪽 줄은 아내인 내가 잡고 있던 줄다리기.
간호사와 환자로 만나 결혼
위암 판정을 받은 남편은 꼬박 1년을 투병한 후 세상을 떠났다. 47세였다. 평소 소화가 잘 안 되고 속이 더부룩한 증상이 잦아 소화제로 버티다 못해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고, 결과는 암이었다. 남편은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암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 치료는 하되 아울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도 “사람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니까요” 하는 말로 대꾸했을 뿐이었다. 문학청년, 아니 문학장년다운 말이었다고 할지.
감정적 동요를 거의 보이지 않는 그를 보며 ‘이이가 이 정도로 담대한 사람이었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아니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실감을 못 하는 건가?’ 하고 놀란 건 되레 나였다. 아니면 본인이 진단받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내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의연함을 가장하는 건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남편의 암 진단 후에도 나는 계속 일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겠나. 현실은 더 힘들어졌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야속했던 건 남편이 아니라 오히려 나였던 것 같다. 결혼 전부터 해오던 일을 결혼 후 아이 출산하고 산후조리 때 잠깐 쉬었을 뿐 20년 넘게 해오면서, 막말로 죽을 날 받아놓은 남편이건만 그때조차 옆에 있어 주질 못했으니. 남편을 떠나보낸 지금, 만약 옆에 있어 주느라 생활비에 치료비도 감당하지 못했다면 그나마 1년 투병도 채우지 못했을 수도 있다며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나는 간호사다. 30대 초반에 일을 시작해 경력 따라 연륜 따라 52세인 지금은 중간급 병원의 수간호사로 근무 중이다. 남편은 나의 환자였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로맨틱한 설정의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간호사와 환자 관계에서 부부가 된 경우였다. 우리 부부의 결혼 생활은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무난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 무난함을 지탱해준 것은 두말할 여지 없이 내가 가지고 오는 일정한 수입이었고. 결혼 후 지금까지 돈을 벌어본 적 없는 남편이 묵묵히 가사와 살림을 꾸려온 것도 우리 결혼의 무난함에 일조했음을 물론 인정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녀의 전통적 역할을 바꾼, 바깥일하는 아내 집안일하는 남편 구도의 가정이었던 것이다.
다만 남편은 나 말고 다른 여자를 또 하나의 아내처럼 의지하며 지냈고, 나는 그런 두 사람 관계를 묵인한 채 결국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정리되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렇다. 무난했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처음부터 결코 무난할 수 없었던 결혼 생활이었음을 인정한다. 애초 우리의 결혼은 세 사람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문학폐인 단짝이 내연녀로
그해 추석 명절 연휴 마지막날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밤늦게 병원에 온 30대 후반의 남자. 그날 나는 야간 근무 중이었다. 미혼인 데다 뒤늦게 간호학을 전공한 나이 많은 새내기 간호사였던 나는 명절마다 당직이나 야간 근무에 배정됐다. 가정을 가진 선배 간호사들을 대신해 당연한 양보라고 생각했기에 딱히 불만도 없었다. 명절이라 봤자 갈 곳도 없었기에 더욱.
오빠 집에 갈 수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안 계신 친정은 이미 친정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연이어 돌아가신 지 2년, 3년 정도밖에 안 되었던 때라 명절에 간다고 해도 눈치나 푸대접을 받지는 않았겠지만, 오빠는 몰라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을 올케 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다. 교회에 다녔던 우리 집은 차례도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차례 핑계를 대고 찾아갈 명분도 없었다. 세상 아래 피붙이라곤 오빠와 나 남매뿐이었지만,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도 그다지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으니 부모님이 떠나신 마당에 새삼 가까이 지내지도 않았다.
이래저래 명절 근무는 갈 곳 없는 나를 편하게 해주었다. 연휴에는 환자가 많을 때도 있고 아주 없을 때도 있다. 그야말로 환자 마음. 그해 추석 명절은 환자가 없는 편에 속했다. 밤 11시경 응급처치를 받은 그 남자, 미래의 내 남편은 장염에 걸렸던 것이다. 그는 다음 날 정식으로 치료를 받고 며칠 입원하는 정도로 회복되었는데, 그 며칠 사이에 그와 나는 상당히 가까워져서 1년 만에 결혼을 했다. 내 나이 40을 넘긴 때였다.
내가 남편 내연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결혼 후 5년 만이었다. 두 사람은 대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 연인 중 한쪽이 결혼을 하자 둘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채 결혼하지 않은 여자 쪽이 내연녀로 자리를 옮겨 앉은 것이었다. 내 입장에서 남편은 애인이 있는 남자, 그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채 결혼한 남자였던 것이다. 둘은 왜 결혼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단순했다. 남편의 무능력 탓이었다. 돈 벌 재주가 없었던 사람, 어쩌면 돈 벌 생각이 없었던 사람이니 두 사람은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 쪽에서도 돈 벌 능력이 없었을 테고.
두 사람은 작가 지망생이었다. 둘 다 대학 문예창작과를 다니던 중에 어느 문학 단체에서 만났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갔지만 두 사람 모두 글은 써지지 않았고, 그럴수록 서로 간의 연민과 공감대가 깊어갔을 것이다. 고시폐인, 공시폐인 등 폐인증후군 중에서 이른바 ‘문학폐인’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 경제력 있는 내가 남편 눈에 띄었고 남편은 운 좋게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다. 물론 그는 결혼과 동시에 그 여자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안 됐을 뿐. 나는 병원 일로 정신없다 보니 남편의 정서적 빈자리는 풋풋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그 여자가 메워주었을 것이다.
남편의 죽음으로 관계 정리
만약 남편이 자기 일이 있었다면, 규칙적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이 있었다면 결혼과 함께 그 여자와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은 그러지 못했다. 마흔 살이 넘으면서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졌고, 그럴수록 그 여자와의 유대는 더 깊어졌을 것이다. 그 여자로선 어차피 결혼 상대가 없을 바에야 남편만큼 편한 사람이 또 있으랴. 내가 번 돈이 그 여자한테로 쏠쏠이 넘어갔을 걸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 때가 있지만 그 또한 다 지나간 일이다.
둘 사이를 알게 된 것은 소설을 쓴답시고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인터넷 메시지를 통해서였다. 어느 날 내가 퇴근하기 직전까지 둘이 속닥거리다가 미처 컴퓨터를 끄지 못한 상태에서 들켜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병원에 있는 낮 시간 동안 두 사람은 SNS나 전화로 늘 교류해왔던 것인데, 핑곗거리로도 얼마나 좋은가. 글에 관한 대화 중이었다고. 자기들 스스로도 단지 글 이야기를 하는 거라며 관계를 합리화했을 테고. 돌이켜보면 남편이 그 오랜 세월 묵묵히 살림을 맡아 꾸려준 것도 내가 출근한 사이에 가지는 그 여자와의 밀회 덕이었으리라.
내가 알게 된 이상 두 사람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정리되었다.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 쪽에서 그 여자를 만나 헤어져달라고 말한 것도 정리에 대한 경고의 몸짓은 되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이혼하지 않는 이상 어쩔 것인가. 남편을 믿을 수밖에. 그러나 내 쪽에서 다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다. 그랬다. 나는 묵인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3년 후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내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안 후에도 두 사람이 계속 만났는지, 아니면 관계를 정리했는지 나는 모른다.
남편이 떠난 지금 남편과의 추억을 그 여자와 나눠 가진다고 해서 억울할 것도 없다. 다만 추억의 부피로나 깊이로나 나보다 그 여자의 것이 훨씬 두껍고 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를 쓰라리게 한다. 그의 아내는 내가 아니라 그 여자이고 내 인생은 두 사람을 먹여 살리느라 흘러간 게 아닐까 하는 자학적 망상에 빠져들 때도 있지만, 어쨌든 세 사람의 인연은 이걸로 끝이 나게 됐으니….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분노사회’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세상이다. 특히 한국 중장년의 경우 ‘한이 많은 세대’라 불릴 만큼, 노여움과 울분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한 이가 대다수다. 누군가는 화를 참지 못해, 또 누군가는 화를 내뱉지 못해 마음의 병을 앓는 것이다. 이러한 화가 자칫 ‘분노증후군’이나 ‘분노조절장애’로 이어진다면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해를 끼칠 수 있다. 분노도 주변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말 김동철 심리학 박사(김동철심리케어 원장)
흔히 ‘화병’(火病) 또는 ‘울화병’(鬱火病)으로 잘 알려진 ‘분노증후군’은 오랜 시간 축적된 화를 표출하지 못해 생기는 증상이다. 이와 반대로 ‘분노조절장애’는 느닷없이 욕을 하거나 폭력을 행하는 등 화를 분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분노조절장애의 경우 지하철에서 학생에게 시비를 거는 노인이나 묻지마폭행을 가하는 중년남성 등이 표면적 이슈가 되어 이러한 증상을 가진 시니어가 많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억압받으며 생계와 가정을 위해 자신을 억누르고 살아온 한국 중장년의 특성상 분노증후군을 겪는 이가 훨씬 많다(분노조절장애는 해외에서, 또 청소년이나 청년 세대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나타남). 다만, 가족도 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드러나는 증상이 거의 없어 그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조증상이 덜한 암일수록 늦게 발견돼 치료가 어렵고 위험하듯, 분노증후군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나도 꿈이 있었는데… 엄마의 울화
# 70대 여성 A 씨는 젊은 시절의 사회 분위기와 가정 사정 등으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 한을 자녀 교육을 통해 풀고자 했고, 온갖 정성으로 아이들은 고학력에 좋은 직장까지 얻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자녀들은 번번이 어머니의 무지(無知)함을 들먹이며 무시를 일삼았다. 이에 A 씨는 소외감과 우울함으로 지난 세월을 한탄했고, 급기야 극단적 시도까지 생각하게 됐다.
한국의 중장년 여성들은 자기 뜻과 다르게 학력 단절을 겪거나 사회 참여 기회를 박탈당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전업주부로서 소임을 다했고, 못다 이룬 꿈을 대신 펼쳐줄 자녀들에게 헌신하며 살았다. 그러나 장성한 자녀들은 그런 어머니의 공(功)을 인정하기는커녕 자신의 지식수준과 비교하면서 종종 무시하거나 소외시킨다. 물론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본의 아니게 내뱉은 말 등으로도 상처를 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중장년이 박탈감을 갖게 되고 비참한 심정이 되어 분노하게 된다고 한다(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많다). 여기에 배우자와의 사별이나 번아웃증후군(소진증후군)까지 겹치면 심한 우울 증세가 나타나고, 상태가 악화하면 극단적인 시도까지 감행한다.
이렇듯 위험한 병이지만, 안타깝게도 자가 확인이 쉽지 않아 예방이 어렵다. 몇 가지의 체크리스트만으로 진단할 수 있는 단순한 심리·정신질환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와 같은 상황에서 최선의 예방책은 자녀들 손에 달렸다. 보통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과거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고 불편해한다. 그러나 이럴 때 자녀가 따뜻하게 공감해주고 인정하고 칭찬해주면 부모의 울화는 조금씩 누그러진다. 시니어 입장에서는 자녀에게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기가 쉽지 않겠지만 묻어둔 고충을 털어놓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게 좋다.
내가 왜 화를 냈지? 분노 컨트롤이 어려워
#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60대 남성 B 씨는 최근 들어 자괴감이 많이 든다. 자신도 모르게 욱하는 심정이 들어 가족과 주변 사람에게 자주 역정을 내곤 한다. 심할 땐 욕설에 소리까지 지르면서 폭력적으로 변한다. 그러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희한할 만큼 기분이 가라앉는데, B 씨는 분노조절이 안 될 때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가 몰려와 괴롭기만 하다.
분노조절장애는 뇌신경이나 호르몬 등의 문제로 스스로 감정 조절이 어려워 뜻하지 않게 폭발적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마치 조울증처럼, 심하게 화를 냈다가 이내 미안해지는 마음이 들곤 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자주 반복되면 본인은 물론 주변인까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마음을 다스린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므로 증상이 의심되면 반드시 정신과 진료와 약물치료 등을 받아야 한다.
특히 과거에 조현병, 우울증, 공황장애를 앓았거나 파킨슨, 치매 등 뇌 질환 환자인 경우는 분노조절장애가 생길 가능성이 더 크다. 또, 교통사고 등으로 인한 뇌수술 후유증으로, 감정조절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망가져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때때로 분노조절장애가 지속되다가 우울증이 오거나, 과격한 행동으로 인한 주변과의 소통 단절을 겪어 분노증후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중장년은 면역력이 떨어지는 시기에 증상이 더 심해지므로 환절기나 추운 계절엔 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제어할 수 없을 만큼 화를 낸다면(주변에서 점검해주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분노조절장애를 의심해보고 정신과 상담과 치료를 병행하길 권한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나는 산수 땜에 철저하고 처절하게 망한 놈이다. 학교 다니는 동안 그놈의 산수가 날 어떻게 망가뜨리고 괴롭혔는지는 이미 12년 전에 자세히 쓴 바 있다.
https://blog.naver.com/fusedtree/221961749149
그런데 최근에 또 망신당한 일이 있다. 나는 구성원이 10명인 어느 모임의 회장인지 총무인지를 20년간(정확하지 않음) 맡고 있다. 4월의 월례모임 때 참석자 수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음식점에 대충 여섯 명 자리를 예약하고, 카톡방에 참여를 선동했다. 그랬더니 “6분의 2입니다.” 하는 신고가 첫 번째로 올라왔다. 자기랑 나랑 둘이라는 이야기. 곧 “6분의 3은 채워야제.”라며 한 명이 또 나섰다. 그러자 참가번호 1번이 “성님꺼정 오면 가분수 되것네.”라며 반겼다. 평소 안 오던 사람까지 온다니 여섯 명을 넘을 거 같다는 말이었다.
가분수라구? 여기서부터 내 두뇌 회로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좌우간 “6분의 4 되겠습니다.”라는 댓글에 이어 두 명이 더 늘어 참석자는 여섯 명이 채워졌다. 더 이상은 없었다. 그러자 참가번호 1번이 “아깝다. 가분수”라고 했다. 이에 대해 내가 틀렸다고 지적질하고 싶은 교정본능을 더 참지 못하고 “6명 됐네요. 근디 가분수가 뭐지요? 과분수 말하는 거 아님?” 했다. 다음은 그 뒤 오고간 대화-. “와, 임 머시기 셈본 실력은 나도 못 따라가겠네. 假分數가 아니고 過分數라고라?” “아니야요? 그런 말 웁나? 예상치인 6명보다 더 오면 과분수가 아니라고라고요?” “아이고 헷갈려! 누가 좀 말려 주~!” “3분의 8, 4분의 5, 이런 게 다 가분수야요?”
나의 이의 제기에 대해 “한자에 과도하게 심취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 사람이 있었지만, 너무나 한심했던지 내 마지막 질문에는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식사 중 놀림을 당하다가 아무래도 내가 틀린 거 같아 살짝 검색해보니 세상에 네상에, 과분수라는 말은 있지도 않았다. 착각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망신스러운 사실을 소문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뒤, 집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니 분수에는 진분수, 가분수, 대분수 세 가지가 있었다. 분자가 분모보다 큰 게 가분수, 분모보다 작은 게 진분수다. 진분수의 크기는 항상 0보다 크고 1보다 작다. 진분수 중 분자가 1인 분수를 단위분수라고 한다(이런 걸 왜 따져?).
대분수는 자연수와 진분수의 합으로 나타낸 분수인데, 진분수 앞에 쓰인 자연수가 허리띠를 두른 것처럼 보인다고 ‘띠 대(帶)’를 써 대분수라고 부른다. 나는 가분수를 잘못 알고 있었지만, 대분수도 내가 짐작했던 代分數나 大分數가 아니라 帶分數였다. ‘자연수와 진분수의 합‘이라는 말도 이상했다. 그게 왜 합이지? ’자연수와 진분수로 구성된 분수’라고 해야 정확하지 않나?
다시 설명을 읽어보면 분자의 절댓값이 분모의 절댓값보다 크거나, 분자의 절댓값과 분모의 절댓값이 같은 게 가분수다. 가분수의 가(假)는 거짓, 임시, 가령, 빌려줌 이런 뜻의 글자 아닌가. 그러니 가분수라면 가짜 분수나 임시 분수가 되는데, 분자가 분모보다 큰 걸 가분수라고 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분자와 분모가 같은 것도 가분수라고 하는 이유가 대체 나변(那邊)에 있는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런 주장을 폈더니 그는 한술 더 떠 나를 약 올렸다. 대분수를 읽을 때 3‘과’ 2분의 1 또는 7‘과’ 5분의 3 이러는데, 거기 나오는 ‘과’를 착각해 과분수라고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골프 칠 때 그린과 그린 사이에 ‘과’가 있다더니…. 난 이렇게 반격했다. 그러면 5‘와’ 6분의 1, 9‘와’ 4분의 3은 과분수가 아니라 와분수라고 해야겠네? 내가 언제 와분수라고 하디? 내 착각은 그런 차원 낮은 일이 아니야.
몸에 비해 머리가 큰 아이를 어려서 대갈장군이라고 했다. 그 대갈장군이 바로 가분수인데, 나는 입때껏 과분수로 알고 있었다. 과(過)는 지나치다, 분수를 잃다, 낫다, 잘못하다 이런 글자이니 개념상 과가 맞지. 그래서 ‘가분수’라는 글자를 보면서도 오자라고 생각했다. 이쁜 마누라를 얻은 남편을 놀릴 때 그 아내가 과분하다고 그러지 가분하다고 그러냐? 남들이 막 추켜올릴 때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하지 가분한 칭찬이라고 하남? 경상도 사람 일부는 어차피 그 발음이 그 발음이겠지만.
나는 분수를 소수로 고치거나 대분수를 가분수로 바꾸는 문제에 부닥치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60년 만에야 틀린 걸 알고 보니 개념을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은 선생님들이나 수학용어에 ‘올바른’ 말을 붙이지 않은 사람들이 원망스럽고 한심스러웠다. 어디 말해보라. 수학문제는 결국 국어문제 아니던가?
내가 1963년 겨울에 치른 1964학년도 중학입시의 출제과목은 국어 산수 딱 두 가지였다. 산수가 빵점인 나는 그래서 폭망했다. 그런데 그 해괴하고 가증스러운 입시제도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맏딸 근혜를 위해 변경된 것이라는 게 아닌가. 가분수로 망신당한 나를 위로하려고 어떤 이가 보내온 기사에 그렇게 나와 있었다. 난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고, 4년 전에 나온 그 기사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래 기사:
https://news.mt.co.kr/mtview.php?no=2016112915561451878
이런 기사가 왜 [단독]인지 모르겠지만, 읽고 나니 열통 뻗치고 울화통 화통 터져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 휴지통 깡통 빨래통이라도 걷어차야 화가 풀릴 거 같았다. 박근혜는 이과였지? 그런 시험 치르고 중학교 입학한 뒤, 나중에 서강대 전자공학과 들어갔잖아? 수학을 잘하는데 수학 점수의 비중을 더 높여주려고 그랬던 건가? 나 같은 ‘수포자들’의 한 맺힌 피눈물은 생각지도 않고….
이제 와서 뭘 어쩌겠는가. 다만 내가 산수를 좀 하고 가분수를 옳게 납득했더라면 내 삶에 다른 변수나 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60년 동안 잘못 알아온 게 수학이나 수학 외의 다른 분야에 또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 해도 과분수라는 말의 타당성과 정확성은 양보하지 않겠다. 자리와 감투에 걸맞지 않은 자질과 처신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는 자들, 분모보다 분자가 훨씬 큰 자들이 다 과분수다. 과분수는 지우거나 덮을 말이 결코 아니다.
조선 원림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원림 양옆으로는 너르디너른 다원(茶園)들이 펼쳐져 풍경에 이색을 보탠다. 월출산 등산과 연계해 답사하기에도 적격이며, 원림 지척엔 천년고찰 무위사가 있다.
옛 선비들에게 자연은 배워야 할 경전이거나 미더운 연인이었다. 벼슬을 살며 지지고 볶을 때에도 늘 산수(山水)의 뜻을 되새겨 경책으로 삼았다. 언젠간 나 산야에 묻힐래! 그런 기약도 그들의 생필품에 가까웠다. 산수가 멀리 있더라도 그들의 머리와 감관에는 자연이 들어 있었다. 그래 늙어 흰 터럭이 갓 아래로 삐져나올 즈음엔 흔히 낙향을 해 자연을 벗 삼았다. 못 말릴 산야의 기질, 그게 옛사람만의 것은 아니다. 어제에서 면면히 전승되어 내일로 승계될 산천 애호의 민간 유전자. 우리의 뿌리에는 그런 뜨거운 게 들어 있다.
산림 선비의 살림살이에도 경향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청빈해 몸에 걸친 것만으로도 자족했다. 토방 하나에 뜯어먹을 고사리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이름깨나 날린 이들은 경관을 골라 원림(園林)을 지어 이름값을 치렀다. 전국 곳곳에 그런 원림들이 의외로 많이 남아 있다. 강진 백운동(白雲洞) 원림은 담양 소쇄원, 완도 보길도의 부용동과 함께 ‘호남의 3대 원림’으로 꼽힌다. 월출산 옥판봉을 뒷배로 삼은 이 아름다운 원림은 조선시대 중기의 선비 이담로가 꾸렸다.
자연에 결례가 되지 않게끔 가급적 인위를 자제해 만든 게 원림이다. 집과 뜰, 누정, 연못 등속을 조영해 담장을 두른 내원과, 굳이 과욕을 부릴 거 없이 그저 자연숲 상태로 가만히 놔둔 외원으로 이루어진다. 백운동 원림은 그 전형이다. 슬그머니 자연에 편승해 유유자적 생의 하오를 살고자 했던 선비들의 꿈이 가시화된 공간의 표본이다.
쾌청한 한낮이다. 그러나 백운동 원림 숲 안은 어스레하다. 빼곡 들어찬 갖가지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서다. 한줌 햇살이라도 더 움켜쥐기 위해 까치발로 지내는 어린 나무들은 진땀을 빼리라. 저희끼리 마주보고 선 큰 나무들은 유년의 풍상을 얘기하려나. 나무들은 죽마고우로 자라 서로의 속사정을 잘 안다. 대나무는 곁에 있는 비자나무네의 살림 형편에 환하다. 비자나무는 옆집 소나무와 은근히 사귀는 사이일 수 있다. 숲속에 이미 파다하게 소문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동백꽃 개화 뉴스에 묻혀 입들을 닫았나? 숲이 고요하다. 동백나무들만 부산히 붉은 물감을 툭툭 찍어 제 몸에 칠한다. 이럴 줄 몰랐다. 여느 해보다 이르게 만개한 동백꽃을 볼 줄을.
동백꽃이 아니더라도 “이럴 줄 몰랐어!”라고 찬탄할 수밖에 없는 풍치의 연쇄다. 양껏 품을 벌려주는 대숲 사이 오솔길은 다정해 누이의 살가운 눈짓을 생각나게 한다. 예사로이 작은 숲이지만 능선과 계곡이 감각적으로 얼크러져 깊은 맛을 풍긴다. 계곡에 늘어선 나무들은 웅덩이의 명경지수에 홀렸구나. 물속으로 투신한 제 그림자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으니.
내원의 별서(別墅) 경관도 어엿하다. 초당과 정자, 담과 수로 등 근래에 복원한 게 많지만 원형을 충실히 재현해냈다. 지난 2001년, 백운동 원림의 전모를 알게 하는 ‘백운첩’(白雲帖)이 발견돼 이를 복원의 근거로 취한 덕분이다. ‘백운첩’은 강진 만덕산의 다산초당에서 유배를 살았던 정약용이 백운동 원림의 승경을 둘러본 뒤 흥에 겨워 만든 서첩이다.
귀양살이란 고독을 벗 삼을 수밖에 없는 것. 가끔은 산에라도 올라 갈증과 울화를 달래야 했을 게다. 어느 가을날 다산은 해남 일지암의 초의선사와 함께 월출산을 등산했다. 하산을 해서는 백운동 원림에서 하룻밤 묵으며 풍정을 누렸다. 이후에도 찾아가 재차 정취를 즐기고 풍색을 눈에 쏙 넣었을 테지. 이렇게 되면 뭐라도 써서 헌정하게 마련이다. ‘백운동 12승사(勝事)’라, 이는 백운동 원림 12경(景)을 연작시로 읊은 다산의 선물이다. 그러고서도 아쉬웠던 걸까. 초의에게 백운동 실경을 그리게 해 ‘백운동도’(白雲洞圖)를 얻었다. 이 둘을 집어넣은 게 ‘백운첩’이다.
백운동 원림 답사의 즐거움은 ‘백운첩’으로 용케 남아 전해진 다산 시의 안내를 받을 수 있어 한결 특별하다. 원림에 비치된 초의의 그림을 보며 과거의 백운동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 떠나 여기에서 다산과 초의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숲을 흔드는 솔바람처럼.
원림과 작별하는 길목엔 붉은 땅거죽. 떨어진 동백꽃들 나뒹굴며 선혈을 흘렸다. 어떻게 살아왔기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끌어안고 낙화했기에 저토록 처연한가. 아서라, 동백에게 물을 일 아니다. 꽃 피어 절정의 일순에 서럽게 저무는 게 동백의 일이기만 하던가.
지리산 근처 산골이다. 높은 산봉우리들이 사방에 첩첩하다. 그렇지만 궁벽할 게 없다. 좌청룡 우백호로 어우러진 전면의 산세가 빼어나서다. 우람하면서도 부드럽다. 운무 한자락 눈썹처럼 걸려 그윽하다. 한유창(60) 씨가 이곳으로 귀촌한 건 산야초 때문이다. 지리산 권역에 자생하는 야생초에, 그는 깊은 신뢰를 품고 산다. 한때 그는 죽음과 맞닥뜨렸다. 말기 암 환자였으니까. 단 한 번 주어진 목숨. 그는 그 희귀하고도 소중한 걸 야생초로 살려냈다.
“이봐! 그대는 도적이야! 절이 들어설 자리를 훔친 게 아닌가!”
집터를 둘러본 해인사 노스님의 얘기가 그랬더란다. 명당을 선점했다는 뜻이다. 정작 한유창 씨는 굳이 명당을 찾은 바가 없었다. 풍수에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다. 정붙이면 그게 좋은 자리려니, 그뿐이었다. 그저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를 통해 사들인 집터였다. 집이야 어떻든, 그는 겹겹이 늘어선 산야에 사는 자체로 귀촌의 목적을 이룬 걸로 친다. 지리산의 입김을 마시고 자라는 산야초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 남원시 인월면에 둥지를 튼 건 2015년. 그 이전엔 함양 산골에서 두 해를 살았다. 지리산 천왕봉 곁 산중턱에서였다. 산야에 삶을 두기로 작정하며 과욕은 이미 눌러놓았을 테지. 그래 그 첫 산중살림도 두루두루 원만했단다. 딱 하나, 겨울철 눈 내려 미끄러운 비탈길이 문제였다. 그래 이곳으로 옮겼다.
귀촌 이전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뜻한 길로, 혹은 뜻밖의 길로 좌충우돌, 서울이라는 생존의 들판을 격렬하게 뛰었던 모양이다. 암 진단을 받은 건 마흔다섯 살 때였다지. 설마 중증이랴, 대수롭지 않은 복통이라 여기고 병원을 찾았다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삶이란 예상보다 더 잔인한 것. 예고 없이 방문한 불행의 전령이 사람을 폭풍 속으로 내던진다.
“왜 이제야 왔냐, 이미 늦었다, 의사의 말이 그랬어요. 절망적인 진단이었죠. 이미 전이가 심해 수술도 의미 없다는 거예요. 남은 생존기간은 3개월 정도라며. 실감나지 않았어요. 마치 남의 일처럼. 병원을 나온 뒤에야 혼란이 엄습하더라고요. 이제 죽을 일만 남았구나, 죽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고통스러운 생각들이 밀려들었죠.”
죽음이 돌연 현관을 노크할 걸 예감이나 했겠는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떠나라는 이주 통고. 그 황당한 쓰나미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의 고독이 극한에 달했겠지. 그러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엔 생존본능이 있다. 어떻게든 살길을 찾게 마련이다. 살기 위해 해볼 건 다 해보는 게 본성이다. 그는 자연요법으로 자신의 몸을 구조하기로 했다.
“약초로 살길을 찾기로 했지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죽을 작정을 하고 산에 들어가 풀만 뜯어먹었더니 기적처럼 암이 사라졌다는 식의 소문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싶었지만, 절박한 상황에 몰리자 기대를 갖게 되더군요.”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게 마련이죠. 제 주변에도 병원에서 포기한 중병을 산골에 들어가 고친 사람들이 있어요. 야생초 섭취 외에 자연에서 얻은 마음의 안정도 효과적이었던 같아요.”
“한 줄기 희망, 거기에서 나오는 안간힘. 그마저 상실하면 이젠 죽음이겠죠. 산야초로 고칠 수도 있겠다는, 아니 반드시 좋은 끝을 보겠다는 신념을 품었어요.”
결국 산야초가 그를 살렸다. 약초 요법을 극진히 실천한 지 7개월 만에 암세포가 완전히 소멸했다는 병원 판정을 받은 게 아닌가. 의사가 두 손 든 말기 암을 기어이 물리쳤으니 놀랍다. 삶을 견딜 수 있는 건 이런 기적적 이변이 일어나기도 해서다.
몸소 거듭한 산야초 실험
뭐든 하나에 간절히 전념하면 통달한다.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도약한다. 암이라는 사나운 놈을 밀쳐내느라 온갖 약초를 다루는 사이 그의 안목과 요령에 힘이 붙었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유명 약초만이 아니라 이름 없는 풀들조차 약리 작용을 합니다. 제가 실로 많은 무명초에게 신세를 졌어요. 자연스레 산야초의 고귀함에 외경을 갖게 되었고요. 그러면서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에게 이로울 약초를 찾아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도래했다!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암을 완치한 그는 또 하나의 허준이 되겠다는 양 남모를 야심을 품고 약재 개발에 나섰던 것이다. 산야초의 치유력에 관한 확신. 그간의 공부와 체험을 살리면 충분히 독보적인 약재를 개발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이 양자가 그를 추동했던 것 같다. 처음엔 고혈압, 당뇨, 탈모증 등에 탁월한 약초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피부질환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많다는 걸 알고 아토피를 정복할 산야초 발굴에 전념했다.
이후 결과물로 나온 게 ‘야초(野草)’다. ‘야초’를 사용해본 환자들은 열광한다. 치유 효과가 명백해서다. 중증 아토피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환자마저 있다. 너무도 슬픈 질환이다. 그럼에도 특별한 약이 없다. 그 와중에 ‘야초’가 위력을 과시하며 등장한 것. 이 기발한 약재는 단숨에 얻어진 게 아니다. 자그마치 7년을 진력해 얻은 성과물이라는 게 아닌가. 그의 거처는 서울이었으나 산야초를 찾아 7년간 전국 오지 산야를 누볐던 거다.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고.
“피부질환의 고통은 일단 가려움증에서 옵니다. 가려움증을 잡아줄 풀부터 찾는 게 급선무였죠. 피부병에 좋다고 이미 알려진 산야초부터 갖가지 잡초까지, 하나하나 차례로 효험을 테스트했어요.”
“어떤 방식으로?”
“일테면, 제가 모기 소굴에 들어가 온몸을 모기에 뜯긴 뒤 채집한 산야초 즙을 발라보는 겁니다. 어느 풀이 가장 탁월한가, 그걸 찾아내기 위해 장기간 연속 실험을 해 드디어 한 가지 약초를 정립하게 되는 거죠. 그다음으로는 피부 염증을 해결할 풀을, 또 그다음엔 피부 재생에 뛰어난 풀을 찾았고요. 7년간의 이런 과정을 거쳐 다섯 가지 산야초를 최종 정선했어요. 그 다섯을 조합한 게 ‘야초’예요.”
“검증되지 않은 엉터리 약재를 파는 장사꾼이 수두룩해요. 당신의 ‘야초’도 의심을 사지 않았을까?”
“처음엔 코웃음들을 쳤어요. 이미 속아본 환자가 많으니까. 그러나 서서히 인정을 받게 되었지요. 무료로 ‘야초’를 공급받은 중증 환자들이 완치에 이르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환자와 만나기 위해 현재 두 곳의 한의원 한의사들과 협업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치유 사례들은 투명하게 공개되고요.”
‘야초’를 개발하기까지 7년여 동안 그는 굶주렸다. 풀을 뜯어먹으며 배를 채웠단다. 생업이 없는 채로 미치광이처럼 야생초에 빠져 살았던 것. 이 우직하거나 용맹한 사내의 삶은 이제 완연히 변했다. ‘야초’의 성공이 물심양면의 안정을 가져온 거다. 산야를 연구실 삼아 심혈을 기울인 덕분이다. 그 집요한 노력의 결과물에 응분의 관심도 쇄도했다. 국내 유수의 모 제약사로부터 모종의 제안을 받았으며, 유럽이나 중국의 신약 기업들도 관심을 표명해왔다. 그러나 그는 거대 자본과 제휴할 생각이 없다. 언젠가는 악어 같은 자본력에 먹히기 십상이니까. 현재 강진군과 손잡고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외국인 아토피 환자들을 유치할 세계적 수준의 아토피 치료 센터를 건립할 목적으로.
숙원은 아토피 치유센터 건립
한유창 씨의 집은 해발 470m 산기슭에 있다. 사람이 거주하기에 가장 이상적이라는 해발고도다. 모기가 없으며 열대야도 비켜간다. 그가 귀촌한 건 양질의 ‘야초’ 재료를 조달하고, 실험도 계속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암 재발을 예방하기 위한 요양 차원의 귀촌이기도 하니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일찍부터 자연 속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선망이 웃자랐다는 게 아닌가. 정적인 성향의 아내 역시 산골을 동경했다지. 마침내 부부가 오순도순 살 수 있는 기반을 잡은 셈이다.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인상은 야무지지만 알고 보면 순진남인가? 그는 맹지를 속아 사는 식의 땅 사기를 세 번이나 당했다.
“군청에 가서 서류 몇 장 확인하면 속을 일이 없다는 걸 몰랐어요. 중개인 말만 믿었던 거죠. 이 집의 터 역시 문제가 많았어요. 묵혀둔 논을 산 건데, 집을 짓기 위해서는 복토 작업이 필요하더라고요. 엄청난 양의 흙을 사다 퍼붓고 성형 작업을 했지요. 땅값보다 훨씬 많은 자금이 들어갔어요.(웃음)”
너른 마당엔 뽐낸 게 없다. 울타리를 두르고 나무를 좀 심었을 뿐이다. 뒤뜰엔 연못을 파 잉어를 넣었다. 그러나 멋부린 태없이 농수용 웅덩이처럼 수수하다. 자연스레 뭐든 내버려두는 게 구미에 맞아서겠지. 그래도 집짓기엔 공을 들였다.
“단순하나 견고한 구조, 그게 좋아 노출 콘크리트 집을 지었습니다. 회색 외벽이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잘 어울릴 거라 봤고요. 설계부터 제 취향을 반영했지요. 계획한 건축 형태에 차질이 없도록 공사도 직영했어요.”
“산중의 외딴집이에요. 일부러 외진 곳을 찾았어요?”
“산야초와 동행하는 사람이니 산속에 살아야죠. 그 이유가 아니라도 외딴집의 장점이 많지요. 우선 원주민과의 갈등 소지가 적다는 게 이점입니다.”
“대부분의 귀촌인들이 원주민과의 관계 문제를 최대 이슈로 꼽죠.”
“불화를 야기하면 배겨날 수 없으니까요. 외딴집에 살 경우엔 주민 접촉 기회가 적어 홀가분한 편입니다. 물론 적당한 교류마저 회피할 일은 아니에요. 시골 사람들은 단순합니다. 쉽게 토라지기도 하지만 금방 정들 수도 있어요. 어쩌다 농사일을 잠깐만 거들어줘도 진심으로 고마워들 해요. 그 역시 귀촌생활의 재미로 삼아야죠.”
“자연을 벗삼아 재미와 평온을 맛보고 싶다는 것. 이는 귀촌인들이 공통으로 밝히는 귀촌 동기예요. 자연과의 만남을, 무심히 방치했던 자아를 돌볼 기회로 삼는 거죠.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찾기도 하고요.”
“도시에서는 바쁜 일상에 쫓겨 자기변화를 꾀하기 어렵죠. 눈에 보이는 풍경들조차 늘 변화 없는 잿빛이고요. 그에 비해 귀촌생활은 신선합니다. 사계절 따라 확연하게 변모하는 자연이 긍정적 자극을 주니까요. 어딜 가거나 어딜 보거나 항상 변화하는 풍경들. 이런 환경에서 살다 보면 일상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죠. 그러면서 너그러워지고요.”
그는 성경 전체 필사를 세 번이나 했다. 좋은 삶에 대한 간절한 기구(祈求)를 담은 필사였겠지. 나긋하고 싹싹한 언사. 곧잘 번지는 미소. 사람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여유가 서려 있다. 서울에 살 땐 달랐다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때로 통제가 어려웠다. 술 체질이 아니라 들입다 마셔 풀 수도 없었다. 대신에 울화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여과 없이 터뜨렸다. 그러나 암으로 고난을 경험한 데다 귀촌까지 한 뒤엔 변화가 왔다.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생각에도 따뜻한 기운이 채워졌다.
그는 아홉 마리의 개를 기른다. 두 마리는 데려온 유기견이다. 개가 많아 즐거움이 많지만 불편도 많다. 일테면 부부 여행조차 엄두내기 힘들다. 아내는 그게 억울하다. 제발 더 이상은 늘리지 마옵소서! 그렇게 자주 호소하는 것 같다. 아내의 환심을 사려면 오나가나 진돗개처럼 충성해야 한다. 하지만 개 문제에 관한 한 그는 양보할 생각이 거의 없다. 개 역시 사람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고귀한 생명체라는 인식에서다.
“원래 개를 무척 좋아했어요. 요즘은 애착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 암 투병으로 생사 갈림길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느낄 겁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틋함이 커지는 기분을. 제 경우엔 피부질환자들의 처절한 고통마저 일상으로 접하며 살지요. 연민의 감정이 커질 수밖에요. 과거엔 모든 걸 ‘나’ 중심으로 바라봤다면, 이젠 남을 중심에 둡니다.”
그의 숙원은 아토피 치유센터 건립을 차질 없이 진행하는 데에 있다. 머잖아 유기견들을 위한 대규모 치유 시설도 만들 계획이고.
◇ 한유창 씨가 주는 귀촌 Tip ◇
•맘에 드는 땅이라도, 자금력이 넘치더라도, 시세를 너무 상회하는 매물 구입을 자제하자. 두고두고 욕먹을 수 있어서다. 마을 땅값을 올려놓을 경우, 원주민들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농부가 농지를 매입하고 싶어도 비싸져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집 지을 대지 크기는 300평 미만이 적당하다. 그 이상 되면 관리가 어렵다. 특히 풀이 문제다. 비 온 뒤에는 밀림처럼 풀밭이 우거진다.
•이왕 시골에 사는 김에 산야초에 관심을 가지라. 이름난 약초만을 찾을 거 없다. 그저 흔한 들풀들의 약성도 탁월하니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1980년대 대표 국민 앵커로 불렸던 여자, 신은경. 차의과학대학교 의료미디어홍보학과 교수이자 동기부여 강사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그녀는 오랜만에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책을 내놨다. 자신을 알고 나이를 알고 삶을 긍정하는 방법이 실린 그녀의 에세이 ‘내 나이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는 환갑이 된 지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녀와의 인터뷰를 통해 삶의 흐름과 인생의 주름에 대한 조언들을 들어봤다.
1981년부터 1992년까지 12년 넘는 시간 동안 KBS 앵커로 사람들을 찾았던 신은경 전 앵커는 그야말로 국민 앵커로서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KBS 보도본부 본부장이었던 박성범 앵커와의 결혼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은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에 책을 펴냈다. 제목은 ‘내 나이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문장이 주는 따스한 힘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 상냥한 톤, 기품 있는 언어로 모범생 오라를 뿜어내며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반듯하고 맑은 눈빛으로 말없이 꿰뚫어보는 그녀가 더욱 반갑고 설레는 이유다. 온 국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나운서를 꿈꾸던 모든 여자들의 우상이었던 그녀의 이름은 ‘여 앵커’의 대명사였다. 이제는 우아하고 품위가 더해진 중년의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나이 드는 게 뭐가 나빠요!
“나이가 드는 게 왜 불편할까요? 저는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거든요. 예를 들어 설익은 예쁨보다 무르익은 아름다움이 얼마나 좋은지요…. 예쁜 것에 가치를 두면 나이 들어가는 앞으로의 모든 나날이 두려워지잖아요. 스스로를 두렵게 만드는 그런 것에 가치를 둘 필요가 있을까요?”
당연한 얘기이지만 학교를 막 졸업한 20대 초반보다는 30대가 훨씬 능숙하게 일을 잘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이 듦은 나쁜 게 아니다.
“나쁜 게 아니라 ‘성숙하다, 능숙해졌다, 멋있어졌다’라는 의미로 나이를 받아들였으면 해요. 제가 예순 살이 넘어보니 스스로에 대해 믿음이 생긴다고나 할까요. 이제는 글, 말하기, 소통, 강연 등을 할 때 잘해야겠다고 노력하면 아무리 못해도 어느 정도는 해냈다고 말할 수 있는 결과가 나와요. 저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삶은 한 번, 사람은 각양각색
그녀는 ‘나이 들수록 운동을 해야 한다, 사람을 만나라’ 등등의 조언들이 많지만 들여다보면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그렇게 살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어떤 사람은 건강해지려다 너무 걸어 족저근막염에 걸릴 수도 있고, 재산을 아이들에게 다 물려줬다가 자식에게 병원비 좀 내달라 하면서 눈치 보는 일도 생길 수 있거든요.”
그녀 말대로 사람마다 처지와 상황에 따라 나이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관계에 대한 태도라고 강조한다. 그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녀는 57세에 루게릭병을 앓게 된 작가 닐 셀린거의 말을 가져온다.
내 근육이 약해질수록, 나의 글은 강해졌다. 나는 점차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나의 목소리를 얻었다. 몸은 점점 쪼그라들지만, 나는 성장했다. 너무 많은 것을 잃었지만, 마침내 나는 나 자신을 찾게 됐다.
그렇다면 신은경이라는 사람은 언제부터 나이를 편안히 받아들인 걸까?
“저는 마흔 넘어서 그게 가능했어요. 마흔 살 초반에 아이를 낳으면서부터죠. 결혼할까 말까, 아이를 낳을까 말까 하던 고민들이 사라지고 큰 욕심이 사그라들며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거예요.”
그녀가 평화를 찾은 것은 어쩌면 큰 갈등의 시기를 겪음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 그 이후의 삶도 그녀에게 오롯이 평온과 행복만을 전해주지는 않았던 듯싶다. 그녀의 삶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KBS 앵커 시절 이후 그녀가 정치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걸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쉰 살쯤 됐을 때 제 인생이 바닥을 쳤습니다. 남편의 정치활동이 끝나고, 제가 섣불리 선거에 나갔다가 실패했을 때죠. 세상이 나를 거부했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돌아보면서 이제 뭐하면서 살아야 하나 고민했어요.”
인생 후반전을 위한 하프타임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의 절망감은 겪어본 사람이나 이해할 수 있는 고통일 것이다. 그런 위기에 빠져 있었던 그녀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하프타임 세미나였다.
“5주짜리 프로그램이었어요. 인생을 전반과 후반으로 나눈다면, 후반 삶에 들어가기 전에 하프타임을 가져야 한다는 개념의 세미나였죠. 하프타임에는 물도 마시고 전략도 짜잖아요? 저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거죠.”
세미나를 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고 해답을 모색했다. 재정, 인간관계, 잘하는 일, 건강 등 현재를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리된 내용들을 갖고 후반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인생의 전반전을 돈을 위해 살았다면 후반전은 의미를 찾으며 살아야 한다고들 하죠. 그만큼 인생 후반은 중요한 시기예요. 제 경우는 지난 삶이 후반전을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생 사명 선언서’를 작성하면서 ‘말하기’가 내 사명임을 깨달았죠. 딴짓하지 말고 말하기를 더 연구하고, 방송도 하고 책도 쓰자 했습니다.”
의미 있는 인생 후반전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데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변화하도록 돕고 싶었다. 한 명이든 천 명이든 간에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게 옳은 길이라는 결론이었다.
행복해도 될까 싶을 만큼 행복해요
그녀는 요즘 차의과학대학교 의료미디어홍보학과 교수이자 동기부여 강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자신이 ‘사명’대로 살고 있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릴 때 꾸었던 꿈을 실현하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생물 과목을 정말 좋아했어요. 그런데 물리, 화학, 수학이 안 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이과는 못 가고 문과를 선택했죠. 나중에 보니 제가 이과 성향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여전히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아픈 사람 치료해주고 낫게 해주는 일에 관심이 많았어요. 결혼 후 침과 뜸을 배웠는데 남편과 같이 봉사도 다니곤 해요.”
어쩌면 그녀가 동기부여와 자존감을 키워주는 강연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지금은 마음의 치유를 해주고 있으니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그녀에게 울화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 물어봤다.
“힘든 것이 화로 나타나는 거죠. 예를 들어 고부갈등이 있으면 귀가 어두워졌을 때 굵직한 아들 목소리는 잘 들리는데 며느리가 내는 높은 고음은 잘 안 들린대요. 그러한 서로의 변화를 이해해야 해요. 그리고 또 몸이 힘들면 찡그리면서 말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또 화가 쌓이죠. 되도록 웃으면서 말하는 게 좋아요. 억지로라도 웃으면 좋은 호르몬이 나오거든요.”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싶을 만큼 행복합니다’라는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사람은 자기가 한 말대로 살게 된다
말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니만큼 그녀는 말의 가치를 매우 귀하게 여긴다.
“언어는 중요해요. 사람은자기가 한 말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더워 죽겠네’ 같은 부정적인 말, 자기비하의 말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감사, 칭찬, 격려 등 기왕이면 듣기 좋은 말만 하세요.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는 씨앗의 말을 해보세요. ‘상대에게 무슨 칭찬을 해줄까’ 생각하다 보면 먼저 나 자신을 성찰하게 되고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하게 돼요. 감사할 수 없는 일에도 감사하고, 미리 감사하는 마음도 가져가보세요.”
실제로 그녀는 100가지에 대한 감사를 한다고 한다. 잘 살펴보면 감사를 표시할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녀는 감사하는 마음이 지치지 않는 삶의 비결이 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녀가 말의 중요성을 전파하는 데 전념하는 이유도 인생 사명과 같은 맥락에 있다.
기품 있게, 의연하게 살기
여러 우회로를 거쳐 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자리에 온 신은경에게 과거는 어떤 의미일까. 그녀가 서 있었던 빛나는 자리와 그 이후의 삶에서 비롯된 아쉬움과 갈등은 없을까?
“1992년까지 뉴스 앵커를 하다가 영국 유학을 갔고, 남편이 정치인 생활을 할 때 뒷바라지까지는 뉴스에서 얘기가 됐죠. 그런데 요즘은 제가 잘 안 보이니까 궁금하실 분들이 있을 거예요. 말씀드린 것처럼 그동안에도 쉬지 않고 활동하고 일했어요. 왕년의 나를 버리고 싶지 않으면 숨어 살면 돼요. 나이 든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레타 가르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다면 변신을 해야죠.”
그녀는 나이 들고 변신을 하면서도 지키고 싶은 게 있다. 바로 기품이다.
“제가 좋아하는 말은 ‘기품 있게, 의연하게’예요. 어떤 상황에도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았으면 해요.”
마흔 초반에 낳은 딸은 어느새 대학생이다. 현재 동아시아 관련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새삼 세월이 정말 빠르다는 게 느껴졌다.
“아이에게 시시콜콜 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간섭하지 않았어요. 그저 아이가 원하는 대로 잘 가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죠. 어렸을 땐 책을 많이 봐야 할 것 같아서 독서를 권한 정도? 물론 요즘도 긴밀하게 대화하면서 조언은 하죠. 부모로서 자녀에 대한 생각을 잘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아이가 독립적이에요. 좋게 말하면 그런 거고 달리 말하면 부모가 해주는 게 없으니 혼자서 알아서 하는 거죠.(웃음)”
사람들이 일찍 행복해지면 좋겠다
어느새 결혼생활도 딸 나이만큼 해온 셈이다. 사실 이번 책은 남편이 권해서 나온 책이라고 한다. 그녀가 꾸준히 쓰는 글을 보고 묶어서 내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해준 것이다. 특히 남편은 그녀가 너무 신경을 써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적절하게 브레이크를 걸어줘 책을 완성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즐겁게 사연을 말하던 그녀에게 오랜 시간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봐요. ‘남자는 존경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고, 여자는 사랑을 받아야 존경할 수 있다’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저는 일정 부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둘이 동등하게 사랑하고 친구처럼 지내는 것도 좋지만 너무 선이 없다 보면 남편을 하대하게 되는 경우들도 있거든요. 그래도 행복할 수는 있겠지만, 저는 남편에겐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잘 안 되긴 하죠.(웃음)”
요즘 세태에 비춰 보면 다소 고전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그 전통적인 가치가 삶을 평화롭게 만들기도 한다. 나이가 자신을 포용으로 포옹하게 했다는 그녀의 말은 그런 믿음을 깨닫고 받아들였기에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번 책은 시니어 대상으로 썼는데 20대, 30대에게도 격려가 된다는 말을 들었어요. 젊은 사람들도 자신의 나이를 일찌감치 향유할 수 있게 되면, 앞으로 40년, 50년, 60년을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자신을 알고 부단히 가꿔 기품이 생기면 좋은 일이죠. 사람들이 일찍 그걸 깨달아 행복해지면 좋겠어요.”
신은경
1981년 KBS 8기 아나운서로 시작했다. 3개월 연수 후 첫 방송 날 곧바로 KBS 9시 뉴스 앵커로 발탁됐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진행했으며 88서울올림픽 메인 앵커를 맡았다. 영국 웨일스대학교에서 저널리즘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대학교수, 방송진행자, 동기부여 강사로 활동 중이며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 이사장을 지낸 바 있다. 현재 차의과학대학교 의료홍보미디어학과 교수로 있으며, 대한민국 대표 기독교 스마트 APP 방송, 라디오JOY에서 ‘성경 읽는 신은경 권사’로 방송 프로그램도 맡고 있다.
요즘 뉴스를 보면 분노로 인해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 홧김에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곳에 방화를 하고 울컥하는 마음에 폭력을 쓰거나 살인까지도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일으키는 감정을 분노조절장애 또는 충동조절장애라 진단한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장기간 노출되거나 가슴속에 화가 쌓이면 이 감정이 잠재되어 있다가 자극을 받는 상황이 오면 폭발하게 된다. 과거에는 분노 억압으로 인한 울화병이 많았지만, 요즘은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분노를 발산할 때는 잘 조절해서 서로가 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한다. 먼저 어떤 식으로든 분노를 몸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나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변에서 분노에 의한 폭언과 폭력을 많이 목격했다. 60대 후반의 연령대라면 분노와 관련해 직·간접적으로 다양한 경험이 있으리라고 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분노의 감정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다. 학교 친구들, 직장 동료들 그리고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만난 지인들 중 어느 누구도 내가 분노를 표출한 걸 본 적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분노조절에 있어서만큼은 뛰어난 능력을 갖춘 고수라 자처하고 싶다.
내 비법은, 일단 분노가 몸 안에 쌓이면 조절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분노를 낮추는 또 하나의 방법은 분노의 원인이 나의 내부 또는 바깥 모두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인이 잘못을 해 나를 화나게 하는 상황이 됐을 때, 그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지인을 사귄 내 잘못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화가 나는 상황을 바라보면 분노가 내 몸에서 자리 잡지 못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났다고 해보자. 이때 상대가 잘못했다며 언성을 높여 싸울 필요가 없다. 결국에는 보험 회사들이 판단해서 다 처리해준다. 목소리를 높여봤자 감정만 상한다. 감정을 빨리 추스르는 게 훨씬 이롭다. 더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었는데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라며 액땜한 셈 치면 된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도 자료를 잘 준비해 법의 심판을 받으면 되지 분노를 터트려 폭력을 행사하거나 해서 일을 더 꼬이게 만들 필요는 없다.
나는 전라북도 군산에서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님이 49세, 어머님이 42세에 나를 낳으셨다. 늦둥이로 태어나 부모님이 무척 귀여워해주셨지만, 아버님은 매사에 엄하시고 성질이 불같으셔서 어머님이 항상 아버님의 비위를 맞추셨다. 내가 어머님을 닮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 화를 내면 그걸 수습만 했지 화를 내본 경험이 없다. 더구나 집안에서의 서열이 제일 막내이다 보니 화는커녕 형과 누나들 눈치 보기 바빴다. 형제들이 일을 시켜도 윗사람 말은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만이 쌓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선천적으로는 어머님을 닮았고, 후천적으로는 가정에서의 서열 때문에 감정조절 능력이 자연스럽게 습득된 것 같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체득한 노하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분노란 주로 대인관계에서 발생한다. 관계를 만들기는 어려워도 허물어지는 것은 한순간이며, 허물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고수는 이런 상황에 처할 걱정이 없다. 고수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노력해야 한다. 자신이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고 여기면서 매일의 삶이 그 부족함을 채워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불화나 갈등의 상황이 와도 분노를 제어할 수 있다. 또 목표를 가지고 생활하는 게 중요하다. 어떠한 목표라도 좋다. 주간, 월간, 연간 계획을 세우고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다 보면 사소한 일에 분노할 겨를이 없다.
물론 내가 제시하는 분노 관리 방법이 편협한 것일 수도 있다. 각자에 맞는 보다 나은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조언한 방법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 폭언과 폭력이 없는, 보다 평화로운 사회가 되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