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으로 들어오는 풍경이 보기 좋다. 비경이 펼쳐져서가 아니다. 새파란 하늘과 금빛으로 일렁거리는 가을 논, 그리고 저 멀리 있는 초록 산….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관이지만 안락감을 불러일으키며 눈에 살갑게 다가온다. 여긴 충북 괴산군 소수면에 위치한 카페의 창가다. 오가는 이도, 차량도 드물어 종일 고즈넉한 시골에, 조막만 한 동네에 모던한 카페라니. 대체 무슨 묘한 역발상에 이끌려 차린 찻집일까? 다들 눈을 끔벅거리며 의아해하기 십상이다. 카페 주인은 2020년에 이 지역으로 귀촌한 이지영(66, ‘카페 산이다’ 대표)이다. 지난 5월 개업했다. 그러니까 아직 반년도 지나지 않았다. 장사는 잘되나? 잘된다. 이지영 본인조차 예상하지 못한 호조다.
이지영에게 시골은 낯설지 않다. 그는 서울에서 주로 살았지만 한때 남편과 함께 전북 무주군으로 내려가 시골살이를 했다. 부부가 합심해 산골에 대안학교를 설립하고서였다. 남편 김경남 목사는 교장직을 맡았고, 이지영은 조역처럼 뒤에서 거들었으며 때로는 농부처럼 논밭에서 일했다. 그러다 불운이 닥쳤다. 2019년 김경남 목사가 심혈관 질환으로 타계한 것. 이지영의 고통이 자심해 더 이상 무주에 머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대안학교 교사들의 심적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나. 미국에 사는 자식들은 어머니를 불러들여 함께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지영은 오랫동안 해온 일을 지속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일본을 드나드는 걸로 전환점을 삼았다. 일본은 그에게 익숙한 나라다. 오랫동안 해온 일이란 사회운동이다. 그는 일찍이 민주화운동의 전위에 섰던 김경남 목사와 가치관을 공유하며 노동, 인권, 복지 분야 활동가로 활약했다. 일본 여성 활동가들과 연대해 위안부 문제나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공동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남편과 사별한 뒤에도 일본을 빈번히 드나들었던 거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에 가로막혀 일본행이 어려워졌고, 그는 숙고 끝에 이곳 괴산 땅을 정처로 삼아 무주에 이은 두 번째 귀촌을 했다.
숱하게 생긴 좋은 인연들
“괴산 소수면엔 귀촌을 원하는 지인들의 공동체 단지가 이미 마련돼 있어 이주가 쉬웠다. 집터에다 집을 짓기만 하면 됐으니까. 공동체 구성원들은 모두 김경남 목사가 만든 ‘들꽃마을 협동조합’ 멤버들이다. 대부분 서울에서 사회운동을 했던 사람들로, 귀촌을 통해 자연과 함께 살고 싶다는 동일한 의도를 가지고 하나둘 이곳에 내려왔다. 현재 11가구가 거주한다. 앞으로 더 늘어나 30가구가 모여 살게 될 것이다. 난 3번 타자로 입주했다.”
공동체라면 입주자마다 지켜야 할 기본 룰이 있겠지?
“하나가 있다. 집에 대문과 담장을 설치하지 말자는 거. 나머지는 다 자유롭다.”
귀촌 직후엔 어떤 일을 했나? 살아온 이력으로 보면 산골에 홀로 산다 해도 아무 일 없이 지낼 것 같지는 않은데.
“처음부터 바쁘게 살았다. 그게 성향에 맞는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 공동체에 먼저 들어온 아낙들이 있어 지루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더라.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라. 넌 이제 우리가 지켜줄 테니까!’(웃음) 그들과 함께 텃밭에서 웃고 떠들다 보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고는 했다.”
사별의 아픔은 깊은 곳에 새겨져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짝을 잃은 상심은 대부분 오래간다.
“가슴 한쪽이 텅 빈 것 같고, 원망도 생기고, 심란한 게 있긴 했다. 반면 뭔가 새로운 기분에 들썩이기도 했다. 왜 사람에게는 이런 거 있지 않나? 혼자 좀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 말이다. 여행가방 하나 들고 떠돌이처럼 살까? 그런 생각도 잠깐 했었다.”
떠돌이 대신 텃밭을 택했다? 처음엔 텃밭 농사를 즐길 만하지만 시간이 가면 귀찮아질 수 있다. 늘 풀을 뽑아야 하니까.(웃음)
“내겐 여전히 즐겁다.(웃음) 지난봄엔 강낭콩 씨앗 3000원어치를 사다 심었다. 그런데 엄청나게 많은 수확이 나와 놀랐다.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고도 남더라. 야, 이거야말로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구나! 속으로 찬탄했다. 그런데 텃밭 농사는 일상의 일부일 뿐 내겐 더 분주한 스케줄이 있었다
어떤 일을 했기에?
“평생학습매니저 자격증을 딴 뒤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학습과 상담 활동을 했다. ‘식생활교육국민네트워크’를 통한 공부 역시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이어졌다. 초등학생부터 노인대학 어르신들까지, 2년여 동안 참 많은 이들에게 강의를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오히려 그들에게 많은 걸 배웠다. 괴산 전역을 샅샅이 알게 되었고. 더 즐거웠던 건 좋은 인연이 숱하게 생겼다는 데 있다.”
노력으로도 쉬 얻을 수 없는 게 좋은 인연이다. 그러나 이지영에겐 인연이 자주 맺어진다. 순해 보이는 인상의 후원을 받은 덕분일까? 아니면 타고난 사교성으로 상대를 일거에 무장 해제시키나? 그의 얘긴 이렇다. “내겐 왠지 사람이 잘 꼬인다.” 괴산뿐만이 아니라 좋은 지인들이 멀고 가까운 곳에 원래 많단다. 그는 24평짜리 집에 산다. 집 앞으로 냇물이 흘러 졸졸졸 명랑하게 노래한다. 기분이 밝아지는 집이다. 하지만 그는 좀 후회스럽다. 왜 더 작은 집을 짓지 않았나,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가급적 단순하게, 가급적 소박하게, 가급적 실용적으로 살자 했건만 다소 오버해서 집을 지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집엔 작은 방이 여럿이다. 화장실도 두 개다. 이건 지인들의 방문을 고려한 구성이다. 좋은 인간관계를 위한 좋은 배려가 좋은 삶의 비결이라고 여기는 이지영의 신념이 반영된 집인 셈이다.
그는 귀촌의 날들을 웃음과 함께 느긋하게 누리고 있다. 이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타자를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선의로 자연스럽게 거둔 결실일지도 모른다. 그가 카페를 차려 단기간에 일군 안정적인 상황도 평소의 좋은 인간관계가 데리고 온 행운의 산물일 테다. 지인이 측근이 되고, 조력자가 되는 법이며, 그들은 어떤 일에든 관심과 지지를 보내 힘을 실어주지 않던가. 그런데 카페를 차린 연유가 궁금하다.
“이곳 소수면 소재지엔 지난날 다방이 네댓 개나 있었다지만 주민 수가 급감하면서 다 사라졌다. 그렇다면 뭔가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할 만한 공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카페 운영을 구상했다. 나에게도 좋고 주민들에게도 좋은 일일 수 있다고 판단해서. 마침 한 식품회사 건물에 적당한 공간이 있어 오래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었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을 중심에 둔 건 아니었나?
“수입원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장사가 될지 미지수였기 때문에 기대를 걸진 않았다. 뭐든 머리 싸매고 궁리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좋은 쪽으로만 생각을 모았다. 그런데 예상대로 잘 돌아가지 않더라. 손님이 별로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처음 두어 달에 그친 부진이었을 뿐이다. 뜻밖에도 손님이 늘면서 석 달째부터 수익이 늘기 시작했다. 빠르게 자리 잡은 셈이다. 오픈한 지 반년이 지난 현재는 직원 두 사람과 함께 일하고 있다.”
소수면 인구는 겨우 2000여 명에 불과하다. 괴산군청 소재지는 멀리 있고, 인근에 사람들이 몰리는 관광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로 어떤 이들이 카페에 오나?
“대부분 면내 주민들이다. 동네 중년과 노년들이 찾아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데, 분위기가 매우 화기애애하다. 요즘은 읍내나 먼 곳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도 늘고 있다. 입소문이 나는 것 같다. 얼마 전엔 시골에서 좀체 볼 수 없는 차림새를 한 청년이 혼자 들어와 노트북을 펼치고 커피를 마시더라. 그건 내게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웃음) 머잖아 청년들을 자주 볼 수 있으리라는 예감도 들었다.”
불편을 불편하지 않게 받아들여
이지영은 카페의 매력과 개성을 돋워 문화공간으로 가꿔나갈 참이다. 시골 사람들도 문화 향유 욕구가 강하다는 걸 확인하기도 했다. 이미 두 차례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영화 상영을 위한 스크린도 설치했다. 미술 전시회나 북 콘서트도 준비하고 있다. 지역민이 생산한 농산물이나 공예품 등을 판매하기 위한 마케팅 채널로 카페를 개방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판이 커질 조짐이 완연하다.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함께 이루고 함께 걸어가는 일의 기쁨을 추구하는 이지영은 카페의 활력에 힘입어 물 만난 고기처럼 생동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귀촌 생활에 만족을 느낀다. 만족은커녕 귀촌을 통해 우울증에 걸려 고생하는 경우까지 있지만 그는 차원이 다르다.
시골에 적응하지 못해 원점으로 돌아가는 귀촌인들도 있다. 원주민과 불화하는 최악의 사태를 맞아 고통을 겪기도 한다. 어떤 조언을 하고 싶나?
“자세를 좀 낮추면 된다. 내가 먼저 낮추면 상대방도 낮추게 마련이다. 이건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이지 않던가? 내 경험으로 보면 시골의 인심엔 여전히 순박성이 깔려 있다. 좋은 인간관계를 맺어 단순하고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게 시골이다.”
독신 여성의 귀촌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위험요소가 적지 않은데.
“상황을 헤쳐나갈 강한 의지가 있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 그러나 심사숙고하는 게 좋다. 가능하다면 지인이 있는 곳으로, 또는 친구나 선후배와 동반 귀촌을 하는 게 한결 안전하다.”
물신을 주님으로 섬기는 세상이다. 이건 시골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흔히 소박한 시골살이를 권장하지만, 믿을 만한 자금력이 없을 경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적은 소유로도 좋은 시골 생활이 지속 가능하다고 보나?
“가능하지 않을 이유가 뭘까. 자연에서 느끼는 행복감이라든가,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정서적 만족감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시골이다. 난 물질이든 욕망이든 덜 가지고자 했다. 그게 정직하게 사는 방법이라 믿는다. 내겐 오랫동안 통장과 휴대폰이 없었다. 이런 나를 두고 아이들은 ‘대책 없이 사는 엄마’라며 걱정한다. 아닌 게 아니라 가끔은 아하, 내가 너무 허당으로 살았나? 이건 좀 그렇네!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다.(웃음) 하지만 이미 몸에 붙은 생활방식이다. 적게 가진 불편을 불편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능력도 생긴 것 같고.”
이미 가졌으면서도 더 가지기 위해 진땀 빼다가 무너지는 게 인생이다. ‘모름지기 소박한 길을 따라 느긋하게 걷는 게 어떤가?’ 이지영의 얘기를 난 그런 제안으로 들었다.
이지영이 주는 귀농•귀촌 Tip
•낭만적인 전원생활에 관한 동경은 버려라. 시골 역시 냉정한 삶의 현장이다.
•귀농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기 쉽지 않다. 풍부한 자금력과 강인한 도전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귀농보다 귀촌을 하는 게 현명하다.
•귀농•귀촌지를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자. 후보지에서 미리 살아보고 정해야 리스크를 예방할 수 있다. 지자체들이 운영하는 ‘한 달 살아보기’ 같은 프로그램을 활용해 시골살이의 물정부터 익히는 게 필요하다.
•귀농•귀촌에 따른 사전준비는 철저할수록 정착이 쉬워진다. 특히 귀농의 경우엔 농산물 유통에 관한 공부를 미리 해두는 게 중요하다.
•시골 생활은 당당한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보는 사람’에서 ‘하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
다크 투어리즘은 여러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전 세계적인 핵심 테마는 전쟁과 항쟁(식민지)이다. 한국의 경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들 수 있다. 아직 생소한 개념인 다크 투어리즘을 어떻게 계획하고 즐길지 모르겠다면, 위의 두 역사를 중심으로 명소를 찾는 것도 방법이다.
PART1. 항쟁의 역사 : 일제강점기
[1] 남산 국치의 길
남산은 낭만적인 야경이 돋보이는 명소로 유명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를 드러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강화도조약(1876) 이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남산 자락에 조선 통치를 위한 시설들이 자리 잡았다. 당시의 상흔을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해 조성된 길이 바로 ‘남산 국치의 길’이다.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한국통감관저 터에는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기억의 터’가 마련돼 있다. 이곳에 도착하면 ‘거꾸로 세운 동상’이 눈에 띈다. 과거 일제는 을사늑약을 체결한 공을 인정해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을 통감관저 앞에 설치했다. 해방 후 당시의 치욕스러움을 기억하고자 사라진 동상의 잔해를 모아 거꾸로 세운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이어 리라초교와 숭의여대로 향해 노기신사와 경성신사 터를 둘러본 뒤에는 케이블카 탑승장 인근 한양공원을 찾는다. 1910년 일본인들이 조성한 곳으로, 당시 공원 입구에 세웠던 비석도 볼 수 있다. 계속해서 남산을 향해 걷다 보면 옛 조선신궁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일부가 나온다. 조선신궁은 조선총독부가 조성한 신사로, 해방 후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철거되며 현재 우리가 아는 남산공원으로 탈바꿈했다. 한때 연인과의 데이트나 가족 나들이로 남산을 찾았다면, 한 번쯤 이러한 역사를 한발 한발 따라가 보길 추천한다.
[코스] 명동역 1번 출구 ▶ 한국통감관저 터·기억의 터(현 서울유스호스텔 아래) ▶ 한국통감부(서울애니메이션센터) ▶ 노기신사(리라초교 내 남산원) ▶ 경성신사(숭의여대) ▶ 한양공원 ▶ 조선신궁(한양도성 발굴지) *상당 구간이 언덕길이니 이 점 참고하자. 반대 방향으로 돌아봐도 괜찮다.
[2]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하 서대문형무소)은 일제강점기 시절 4만여 명에 달하는 독립운동가가 수감됐던 곳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철거 논의도 이뤄졌으나, 교육의 현장으로 기능하기 위해 현재의 역사관 형태로 복원됐다. 서대문형무소 하면 붉은 벽돌로 이뤄진 외관이 상징적이다. 계절마다 바뀌는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기자가 방문했을 당시에도 따스한 봄볕 아래 그림 동호회 회원들이 모여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외관과 비교해 내부는 삭막하고 음울한 기운이 느껴진다. 독방과 고문실, 시구문 등을 복원해 당시의 참혹한 현실을 생생히 드러냈다. 당시의 수형기록표나 사진들을 보노라면, 독립투사들의 모진 세월이 전해져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든다. 서대문형무소는 올 한 해 ‘이달의 독립운동가 시민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누구나 참여 가능하며, 온라인을 통해 예약하면 된다. 방문 당시에는 ‘한국 독립운동을 이끈 청년 독립운동가들의 외교’를 주제로 강의가 열렸다. 이날 소개된 독립운동가는 황기환, 이희경, 나용균이었다. 강의에 참여한 한 시민은 “김구나 윤봉길처럼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처음엔 생소했다. 세 분의 역사를 들으면서 나의 무지함을 깨달았고, 반성하는 마음도 들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강의를 준비한 김철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학예사는 “과거 서대문형무소는 인왕산, 안산, 무악재 고개로 둘러싸여 있어 수감자들의 탈출이 용이하지 않다는 점에 현저동에 자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산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 때문에 중장년 방문객들이 등산을 겸해 오시기도 한다. 아울러 실제 수감자들의 후손이나 가족들이 오기도 하고,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 모임을 꾸려 자체적으로 투어를 즐기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역사교훈여행(다크 투어리즘의 우리말)의 측면에서 볼 때, 많은 분들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추구했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신념을 느껴보셨으면 한다. 또한, 서대문형무소를 둘러보신 후에는 근처의 독립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 등도 찾아도 좋겠다”고 조언했다.
[코스] 독립문역 5번 출구 ▶ 서대문독립공원 입구 ▶ 독립문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집(독립문 맞은편) *독립문을 기점으로 왕복하는 코스로, 역사적 사건 순으로 둘러볼 수 있다.
PART2. 전쟁의 역사 : 한국전쟁
[1] 피란수도 부산 소막마을
지난해 ‘피란수도 부산 유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가 확정됐다. 현재 부산시는 2028년 등재를 목표로 지속 연구와 관리에 힘쓰고 있다. 부산에는 유독 가파른 언덕에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광경이 눈에 띄는데, 이 또한 피란기의 흔적이다. 한국전쟁 후 40만 명이던 부산 인구는 100만 명까지 늘어났다. 몰려든 피란민들은 생존과 생계를 위해 높은 언덕까지 판잣집을 지어 올렸던 것이다.
선별된 ‘피란수도 부산 유산’은 총 9곳으로, 그중 ‘우암동 소막 피란주거지’도 피란민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했다.(2018,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715호 지정) 소막마을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으로 소를 수출하기 위한 검역소와 소막사가 있었던 곳이다. 1960년대 이후에는 공업화·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여러 형태의 집들로 변모해 현재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한국의 근대화 과정 등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산물인 셈이다.
[코스] ‘피란수도 부산 유산’은 경무대(임시수도 대통령 관저), 임시중앙청(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국립중앙관상대(옛 부산측후소),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부산근대역사관), 부산항 제1부두, 하야리아 기지(부산시민공원), 유엔묘지, 우암동 소막 피란주거지 등 총 9곳이다. 하루에 몽땅 급하게 둘러보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피란민들의 삶을 음미하며 살펴보길 바란다.
[2] DMZ 평화의 길
시간을 두고 여러 날에 걸쳐 다크 투어리즘을 계획한다면, ‘DMZ 평화의 길’을 추천한다. 도보 여행가들 사이에서 주목받는 테마 코스 중 하나로 문화체육관광부, 환경부, 국방부, 행정안전부, 통일부 등 5개 부처가 합동으로 조성한 길이다. 2018년 4월 27일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꼬박 1년 뒤인 2019년 4월 27일 강원도 고성 구간이 처음으로 개방됐다. 이로써 일반 시민들도 DMZ(비무장지대)를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철원, 파주, 양구 등 구간이 속속 개방되며 현재 총 11개 코스가 마련됐다. 전 구간 예약탐방제(두루누비 사이트 이용)로 운영되며, 올해는 대체로 4월 하순부터 예약을 시작해 11월 전후로 마감될 예정이다.(여름 혹서기 및 장마 기간 임시중단)
[코스] 강화 코스, 김포 코스, 고양 코스, 파주 코스, 연천 코스, 철원 코스, 화천 코스, 양구 코스, 인제 코스, 고성 A코스, 고성 B코스 *현재 고성B코스는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해 한시적으로 중단됐다.
[Interview] 김민주 리드앤리더 대표 “어두운 역사의 흔적에서 오늘의 교훈을 얻길”
최근 유행인 ‘다크 투어리즘’을 오래 전부터 주목하해온 이가 있다. 2017년 출간 도서 ‘다크투어’의 저자 김민주 리드앤리더 대표다. 서울대학교와 시카고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던 그는 책을 쓴다는 핑계로 곳곳을 여행하다 다크 투어리즘에 눈을 떴다. 현재 그는 역사문화 여행 모임 ‘컬처클럽’을 7년째 운영 중이다. 모임을 통해 국내외를 누비며 직접 도보여행 길도 발굴한다. 저서에 소개된 '대한 제국의 길', '서대문의 길', '용산의 길' 등도 직접 개발한 다크 투어리즘 루트다. 그런 김 대표를 통해 다크 투어리즘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해봤다.
Q. 중장년들에게 다크 투어리즘을 권하는 이유가 있다면요?
A. 사람은 나이가 들며 자연스럽게 역사가가 됩니다. 각자 역사의 증인이고, 역사평론가가 되며, 아마추어 역사가가 되지요. 어떤 의미에서든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역사관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관광을 하면 화려한 곳, 훌륭한 곳, 멋진 곳을 가기 쉽습니다. 이런 것을 그랜드투어(grand tour)라고 하죠. 하지만 다소 불편하더라도 과거의 어두운 곳을 찾아 역사의 교훈을 얻는 다크 투어(dark tour)도 필요합니다. 이런 곳에서 피해자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이 현장에 없었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기도 합니다. 또, 역사의 교훈을 얻어 앞으로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도 합니다. 실패에서 얻는 교훈, 재발방지 다짐을 하게 되는 거죠.
Q. 다크 투어리즘 현장에서 유념해야 할 에티켓이 있을까요?
A. 장소의 역사적 의미를 모르면 자신의 단견으로 이해해버리거나 현지에서 가볍게 말하기 쉽니다. 즉 공부가 필요하죠. 사건과 관련된 주민들도 만날 수 있는데 역사를 모르면 섣부른 행동으로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이념에 치우치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현장에서 겸허하게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큰 목소리는 삼가는 게 좋습니다.
Q. 해외와 비교해 국내 다크 투어리즘이 지니는 특징이 있나요?
A. 예전에는 한국에서 다크 투어리즘 장소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현장에 가면 안내판이 없고, 유적, 유물이 제대로 보존돼 있지 않았지요. 근래에는 다크 투어리즘 관련 문화 유적을 많이 발굴하고, 기념관, 유적지, 친절한 안내판, 간단한 표지석 등을 두어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현재는 외국과 수준이 비슷해졌습니다. 다만 몇몇 장소는 지나치게 엄숙하고 어둡게 만들어져 있어 과도한 긴장감을 주기도 합니다.
Q. 다크 투어리즘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요?
A. 다크 투어를 할 때에는 진정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열 군데, 스무 군데 리스트를 만들어 많이 다녀왔다한들 큰 의미는 없습니다. 현장을 제대로 알려는 호기심, 진정성이 바탕이지요. 다크 투어리즘이 좋다고 너무 연달아 가는 것도 추천하지 않습니다. 너무 몰입하면 우울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밝은 여행지와 섞어서 다니길 권합니다.
※ 자료 제공 및 도움말 한국관광공사, 서울관광재단,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한반도 전체가 독립의 외침으로 물들었던 3.1절이 3일 앞으로 다가왔다. 매년 3.1절에는 각종 지자체 및 공공기관에서 각종 기념행사를 열곤 했지만, 올해는 대부분 온라인으로 진행될 계획이다. 거리에서 만세 삼창을 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으로나마 기념하고 싶다면 영화를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시대적 정신을 돌이켜보는 것은 어떨까.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3.1절에 볼 만한 가슴 벅찬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항거:유관순 이야기 (A Resistance, 2019)
‘3.1운동’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인물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가. 누구나 그러하듯 ‘유관순’이라는 이름 석 자는 빼놓고 논할 수 없다.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는 1919년 3.1운동 이후 서대문 감옥 8호실에 갇힌 유관순 열사(고아성)와 여성 독립운동가의 1년간의 이야기를 다룬다. 30여 명 가까이 되는 여성 수감인의 투옥 생활은 처참하다. 세 평도 안 되는 좁은 방에서 다리가 부을까 다 같이 빙글빙글 돌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감내하고, 모진 고문과 핍박도 이를 깨물고 견뎌낸다. 그럼에도 “하나뿐인 목숨 내가 바라는 것에 맘껏 쓰다 죽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는다. 영화는 유관순 열사의 삶과 함께 유관순 열사의 선배 ‘권애라’(김예은), 산모 ‘임명애’(김지성), 다방직원 ‘이옥이’(정하담), 기생 ‘김향화’(김새벽) 등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서사도 재조명한다. 극적인 연출, 혹은 흥행을 위해 3.1운동 당일의 내용을 담을 수도 있었지만, 영화는 그날의 뒷이야기만을 과장 없이 정직하고 묵직하게 담았다. 그래서 더욱 깊고 진한 울림을 남긴다.
2. 박열 (Anarchist from Colony, 2017)
건들건들한 걸음걸이에 정리되지 않은 머리, 무엇 하나 두려운 것 없다는 표정. 겉모습만 보면 패싸움을 하며 온갖 사고를 칠 것 같은 이 남자는 조직폭력배의 우두머리가 아닌 항일운동단체 ‘불령사’의 리더 박열이다. 진짜 건달은 아니지만, 사고를 치긴 한다.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서다. 영화 ‘박열’은 관동대지진 후 발생한 조선인 대학살에 정면으로 맞선 청년 박열(이제훈)과 그의 동지 겸 연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의 이야기를 다룬다. 박열이 일제에 저항하는 방식은 거친 외양처럼 저돌적이다. 끔찍한 현실에서는 감옥이 더 안전할 거라며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가고,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국왕 암살 계획을 자백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자살폭탄 역할을 자처하면서도 한 치의 두려움이 없었던 그는 재판대에 서는 순간까지 한복을 입고 등장하며 독립에 대한 기개와 의지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성냥처럼 활활 타올랐던 박열의 삶은 시대를 막론하고 불의에 맞설 정의와 용기가 있는지 반문하게 만든다. 배우 이제훈의 밀도 높은 연기가 몰입도를 더한다.
3. 허스토리 (Herstory, 2017)
과거를 되새기고 기억하는 것만큼 현재를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나가는 것 또한 모든 국민의 역사적 숙제이다. 영화 ‘허스토리’는 이 같은 메시지를 평범한 인물 ‘정숙’(김희애)의 시선으로 풀어나간다. 영화는 1992년부터 6년간 일본과 부산을 오가며 힘겨운 법적투쟁을 벌인 위안부 할머니와 승소를 위해 함께 싸운 정숙의 이야기를 다룬다. 부산에서 큰 여행사를 운영하는 정숙은 역사보다는 먹고사는 일, 혹은 눈앞의 현실에 더 관심이 많은 인물이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여행사 사무실에 위안부 피해 신고 전화를 설치하면서 사건의 심각성을 깨닫고, 정부의 안일한 태도에 분노하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돕기로 나선다. 자신밖에 몰랐던 그녀가 재산을 털어 할머니들의 조력자가 된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혼자 잘 먹고 잘살았던 게 부끄러워서”다. 영화는 주변 인물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을 바로잡고, 지워질 수 없는 아픔에 귀 기울이며 연대할 것을 호소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유명한 말을 새삼스레, 계속해서 곱씹게 되는 영화다.
‘호박 고구마’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이름, 나문희. 올해로 데뷔 60주년을 맞은 배우 나문희는 모두가 인정하는 자타공인 국민배우다. 1961년 MBC 라디오 공채 성우 1기로 이름을 알린 나문희는 60년간 영화 22편, 드라마 91편에 참여하며 살아온 세월의 절반 이상을 연기 활동으로 보냈다. 최근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영화 ‘오!문희’에 출연해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 연기를 펼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시트콤에서의 유쾌한 모습부터 눈물샘을 자극하는 연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오랜 세월 관객을 웃고 울린 나문희.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시니어를 대표하는 배우 나문희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를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하모니 (Harmony, 2009)
임신 중 교도소에 수감된 '정혜'(김윤진)는 그곳에서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교정 시설에서 출산한 경우 생후 18개월이 지나면 입양을 보내야 한다는 법에 따라 품에 안은 아이와 이별을 준비한다. 마지막으로 아이와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싶은 정혜는 합창단 결성을 떠올리고, 정혜의 제안으로 다양한 사연을 가진 수용자가 한데 모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개봉 당시 극장가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영화 ‘하모니’는 여성 수용자들이 합창을 통해 하나가 돼 가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영화에서 나문희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사형수 ‘문옥’역을 완벽하게 연기해 보는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특히 전직 음대 교수였던 문옥의 지휘 아래 도저히 어울릴 수 없을 것 같던 오합지졸 합창단이 화음을 맞춰가는 순간은 작품의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2. 수상한 그녀 (Miss Granny, 2014)
아들 자랑이 유일한 낙인 ‘오말순’(나문희)은 어느 날 가족들이 자신을 요양원으로 보내려 한다는 사실을 듣고 상념에 빠진다. 싱숭생숭한 마음에 밤길을 거닐던 말순은 우연히 발견한 ‘청춘사진관’에 들어가 영정사진을 찍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말순은 창밖에 비친 낯선 얼굴에 경악한다. ‘할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앳된 얼굴로 변해버린 것. 스무 살의 모습으로 돌아간 말순은 당황하기도 잠시, 돌아온 청춘을 제대로 누려보기로 한다.
영화 ‘수상한 그녀’는 나문희와 심은경의 2인 1역 캐스팅으로 개봉 당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나문희는 70대 말순을, 심은경은 20대로 돌아간 말순을 연기하며 환상의 호흡을 자랑한다. 특히 심은경은 ‘욕쟁이 할매’를 연상케 하는 구수하고 찰진 사투리를 구사해 나문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완벽한 싱크로율을 선보인다.
3. 아이 캔 스피크 (I Can Speak, 2017)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옥분'(나문희)은 온 동네를 휘저으며 8000건에 달하는 민원을 넣은 '프로민원러'이자 뒤늦게 영어 공부에 푹 빠진 늦깎이 학생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구청에 간 옥분은 새로 전근 온 '민재'(이제훈)를 만나는데, 다른 직원과 달리 까다롭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민재는 옥분의 민원을 연신 거절한다. 하지만 이에 질 리 없는 옥분은 민재를 따라다니기 시작하고, 어느 날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민재의 모습을 본 옥분은 민재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 색다른 민원(?)을 제기한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공무원에게 영어를 배운 할머니의 가슴 아픈 사연을 다룬 내용으로, 실화를 각색해 만든 작품이다. 2007년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고 김군자 할머니가 미국 의회 청문회에 올라 증언한 것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나문희는 이 작품으로 대종상·청룡영화상·백상예술대상 등 3대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국민배우로서의 저력을 입증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대홍수가 끝난 후 ‘노아의 방주’가 멈춘 곳은 해발 5000여m 높이의 아라라트 산이다. 노아는 비둘기를 이용해 세상으로 나올 때를 확인한 뒤 제단을 쌓고 첫 포도원을 가꾸는 등 새로운 삶을 이곳에서 시작했다. ‘아라라트’라는 명칭은 ‘우라르투’(Urartu)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우라르투 왕국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 국가 아시리아와 대적하기도 했으나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했다. 그 후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총독을 파견해 이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우라르투는 ‘아르메니아’(Armenia)로 불렸다. 이렇게 노아의 후손들이 지켜온 땅 아르메니아는 오랜 시간을 버텨오며 생긴 슬픔의 생채기를 처연한 바람의 아름다운 숨결로 들려주는 곳이다.
가장 오래된 도시 예레반의 품격
아르메니아는 한글보다 1000년 이상 앞서 만든 그들만의 고유문자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3분의 1 정도 되는 2만9000㎢ 면적에 해발 1000m가 넘는 산악지대가 전체의 90%를 차지한다. 총인구는 300만 명.
이 중 35%인 106만 명이 수도 ‘예레반’(Yerevan)에서 살고 있다. 이곳에서는 어디서든 아라라트 산이 보인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이 산은 삶의 시작이자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될 아름다운 보금자리다. 그리고 영혼을 치유해주는 곳이다. 치유는 밝은 곳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빛과 어둠이 서로 만나는 곳에서 시작되며 그런 곳에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수천 년의 슬픔을 덮어온, 자신들의 시작이자 끝인 아라라트 산을 언제나 보고 싶어 한다. ‘베르니사시 시장’ 한복판, 화가의 거리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그림은 아라라트 산과 노아의 방주를 그렸다. 아르메니아에 입국할 때 출입국 심사대에서 여권에 찍어준 스탬프에도 아라라트 산을 의미하는 산 모양이 선명하다.
인간이 살아온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한 곳인 예레반은, 구 소련의 건축가 ‘알렉산더 타마니안’(Alexander Tamanyan)이 아르메니아가 소비에트 지배하에 있을 때 설계한 계획도시다. ‘공화국 광장’에서 ‘자유 광장’을 거쳐 ‘캐스케이드’에 이르는 시내 거리는 신고전주의풍 건물들로 장식해 마치 파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여행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예레반은 잃어버린 낭만을 되찾아줄 것만 같은 분홍색 빛을 띤 도시다.
해외 유명 브랜드숍과 유럽풍 분위기의 레스토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은 광장과 광장을 연결해준다. 노천카페에는 까맣고 짙은 눈썹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누군가를 하루 종일 그리워하는 것 같은 눈길로 지나가는 여행자를 바라본다. 원형 형태의 오페라 극장에서 흘러나오는, 체리빛 노을 색을 띤 바이올린의 흐느낌은 이방인의 발걸음을 잡는다. 수업시간을 기다리던 발레 아카데미의 청소년들은 수줍어하면서도 주차 요금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 외부인을 위해 기꺼이 무언의 손길을 내민다. 국민소득이 낮은 국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문화적 품격이 돋보인다. 무엇을 흉내 낸 가벼움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만의 자연스러움과 자존감이 스며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르메니아에 다시 가고 싶어 하고, 예레반을 오래 머물고 싶은 도시로 꼽는다.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아르메니아 국화는 ‘물망초’다. 6000년의 역사를 가진 그들에게는 20세기에도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 제국에 의해 행해진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다. 오스만 제국에서 살고 있던 250만여 명의 아르메니아인들 중 150만여 명이 살해당했다. 이 참화는 1973년 유엔에 의해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규정됐다. 이어서 많은 나라가 공식적으로 제노사이드(genocide, 국민·인종·민족·종교의 차이 등으로 집단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로 인정했다. 이 역사를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건 야만과 폭력으로부터 우리와 후손들의 삶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레반의 서쪽 언덕에는 ‘제노사이드 추모 공원’이 있다. 아르메니아를 방문하는 다른 나라 정상들도 이 공원에 꼭 들러 기념식수를 한다. 추모탑 밑에는 절대로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365일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다. 상처를 극복하는 길이 무조건적인 망각은 아니기에 물망초를 국화로 선택한 아르메니아의 아픔에 공감이 된다.
제노사이드 때 학살을 피한 난민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교포)를 형성했다. 현재 해외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은 800만 명으로 아르메니아 인구보다 많다. 해외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 상당수는 성공한 기업가들이다. 이들은 아르메니아에 도움을 주기도 하는데 그 힘이 막강하다. 미국에서도 유대인만큼은 아니지만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가 정치,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동병상련일까. 미국 L.A. 글렌데일의 위안부 소녀상 건립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계 디아스포라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줬다.
세계 최초 기독교 공인 국가
아르메니아인들이 특별하게 생각하는 아라라트 산. 그러나 현재 아르메니아인들은 갈 수 없다. 과거 스탈린이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를 억압하고 무력화하기 위해 이 산을 터키에 분할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아라라트 산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은 산자락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코르 비랍’(Khor Virap)’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에는 지하 20m 깊이의 동굴이 있다.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그레고리’(St. Gregory)가 왕의 명을 거역해 13년 동안 갇혀 있던 곳이다. 그가 기적적으로 살아나 왕의 병을 고치자 왕은 크게 감동해 기독교로 개종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다. 이때가 301년. 로마보다 91년이나 빨랐다. 코르 비랍 수도원은 7세기 때 동굴 위에 세웠다.
아르메니아는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독교를 지켜왔다. 심지어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도 아르메니아의 정체성을 지켜주고 통일을 시킨 힘은 신앙이었다. 동방정교회, 서방 가톨릭, 개신교가 아닌 ‘아르메니아 사도회’라는 그들만의 독특한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들의 엄숙한 신앙에는 초기 기독교의 순수함과 절제, 소박함이 많이 남아 있다. 아르메니아에서 기독교의 비중이 커진 주요 원인은 그들만의 고유문자로 성경을 번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은 중요한 예술, 문학, 교육센터이자 ‘카트치카’(khatchkars, 십자가 문양을 판 돌비석)의 완성처가 됐다.
아르메니아에서 가볼 만한 여행지
에치미아진 (Echmiadzin)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중심지로 300년경에 세워진 아르메니아 최초의 교회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고 추정되는 창이 보관돼 있다.
가르니(Garni) 신전, 아자트(Azat) 계곡 헬레니즘시대에서 로마시대에 걸쳐 태양신 미트라를 숭배하기 위해 이오니아 양식으로 세운 신전. 신전 밑 아자트 계곡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주상절리가 있다.
게하르트 수도원 (Geghard Monastery) 고대 아르메니아의 동굴 수도원으로 예수님을 찌른 창이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계곡의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
타테브 수도원(Tatev Monastery) 해발 2000m 높이에 위치한 수도원. 외부에서 침입을 하면 말발굽 소리에 기둥이 흔들렸다고 한다. 고즈넉한 풍광과 코카서스 최고의 경치를 자랑한다.
세반 호수(Sevan Lake) 바다가 없는 아르메니아에서 유명한 호수. 해발 1900m에 위치한 이 호수는 물이 맑고 깨끗해 가재도 잡힐 정도라고. 세반 호수의 송어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한평생 덧난 고통의 기억을 꺼내는 일은 아픔과 함께 크나큰 두려움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뻔뻔한 일본의 만행을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김복동 할머니.
"우리가 죽으면 진실이 잊힐까 두려웠다. 나이 골 백 살을 먹어도 잊히지 않아, 이건 알려야겠다.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끝까지 싸우다 갈 거야." 심장에 박힌 기억은 지워지지도 않고 지울 수도 없는 만 14살 여자아이의 참혹했던 기억을 꺼내 보이기로 마음먹었다.
일본의 사죄를 받기 위해 투쟁했던 김복동 할머니의 27년간의 여정을 담은 영화는 관객들을 울컥하게 한다. 위안부 피해자의 고단한 삶을 돌아보고 역사적 맥락 속에서 김복동 할머니의 활동과 고뇌를 보면서 마음이 매우 아프다. 살면서 때론 덤덤하고 무심했을 자신이 부끄럽고 죄송하다. 90세가 넘는 고령에도 일본의 역사 왜곡과 사죄 없는 행태에 전 세계를 돌며 피해 사실과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한다.
여성인권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였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는 1992년부터 올해 1월, 생의 마지막까지 이것이 내가 할 일이란 생각으로 모든 힘을 쏟았다. 또한, 전 세계 전쟁 피해 여성들의 인권 신장과 지원을 위해 '나비기금'을 발족하는 등 인권 운동가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 발자취는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감동을 안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선언한다. 무능한 합의 대가는 10억엔. 누구를 위한 합의인가. 몇 푼의 돈으로 해결될 거란 얄팍한 생각은 역시 일본답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해결되었다고 지금껏 큰소리치고 있다.
그리고 치유와 화해 재단 설립을 한다. 일방적인 짓을 해 놓고 누구를 치유하고 누구와 화해를 하는가. 분노하고 절규하는. 대학생들이 정부에 맞서 재단 설립에 반대하며 막아설 때는 함께 분통 터진다. 결국, 무력 앞에 가로막혀 눈물을 쏟는다. 그렇게 일본 정부에 분노하지만 만나주지도 않고 외면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는 정부에 할 말을 잊는다.
이 합의에 암 투병 중이던 김복동 할머니는 비 맞고 있는 소녀상 앞에 섰다. "드러누워 있다가 속이 상해서 나왔다. 그건 우리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우리가 바라는 건 사과다. 10억 엔이 아니다. 천억을 줘도 받을 수 없다. 돌려보내라. 그깟 위로금 주고 소녀상 철거한다고? 미친개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우리가 그 돈 받으려고 싸워온 줄 아나. 피해를 본 사람이 여기 있다. 증인이 왔으니 문 열어라." 감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일본에 소리친다.
김복동 할머니의 이야기는 단지 반일 이야기만이 아니다. 여성 문제이고 국제적인 인권 문제이기도 하다.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돈과 권력으로 사실을 부정하고 기억을 날조하는 그들의 뻔뻔함은 갈수록 강도가 거세진다.
"사죄의 말을 하면 나는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할머니는 끊임없이 되뇐다. “나이는 아흔넷, 이름은 김복동입니다" 지난 1월 28일에 세상을 떠난 김복동 할머니의 말씀이 관객들에게 메아리 되어 울린다.
한일갈등이 첨예화한 이즈음 그들의 본성을 제대로 알게 하는 영화다. 우리가 알아야 하고 또 알려야 하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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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윤미래 씨가 영화의 마지막에 흐르는 헌정 곡 ‘꽃’을 불렀다. "빈 들에 마른풀 같다 해도 꽃으로 다시 피어날 거예요. 누군가 꽃이 진다고 말해도 난 다시 씨앗이 될 테니까요. 그땐 행복 할래요. 고단했던 날들, 이젠 잠시 쉬어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박희채 박사가 일본에 사는 한국인 친구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김 형,
입추와 말복이 지났으니 여름이 계절의 방을 빼야 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네. 유독 더웠던 작년 여름과는 달리 올여름은 그래도 수월하게 넘어가는 것 같아 다행이네. 가는 여름이 아쉬워서일까. 오늘따라 매미 우는 소리가 애처롭게 들리는군.
김 형이 정년퇴직하고 한일 관계에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면서 동경으로 간 지 벌써 3년이나 되었군. 시간이 어찌나 빠르게 지나갔는지 오늘 문득 헤아려보고 놀랐네.
조금 전, 다음 달에 동경에서 열기로 했던 문화행사가 갑자기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네. 현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아쉬움이 남네.
한일 간의 문제는 문제 그 자체로 역사가 이뤄져왔다는 생각이 드네.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등 어느 것 하나 쉽게 해결할 수 없기에 그 자체가 바로 역사가 되었다는 말이지. 우리나 그들이나 조상들이 저질러놓은 사건의 파편들 때문에 후손들이 아픈 형국이 되었군그래.
나의 부친은 19세에 결혼하셨는데. 이듬해에 일본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네. 신혼의 단꿈을 꾸기도 전에 평양에 있는 일본 군사교육장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일본 이이치 현(愛知縣)에서 1년 넘게 고생을 하시다가 해방이 되어서야 돌아오셨다네.
올해 98세이신 아버지는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 판결이 있은 후, 가끔 후속 조치가
안 나왔느냐고,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을 했으면 그 이후는 우리 정부에서 처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으신다네. 답답하신 거지.
급부상한 중국으로 인해 3위로 밀려나기는 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으니, 여전히 경제대국 아닌가. 이런 나라가 우리를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면서 양국 관계는 최악의 국면을 맞고 있는 것 같네.
이 조치를 우리 정부는 경제보복이라고 하고, 일본 정부는 ‘신뢰관계의 훼손’이니 수출규제를 강화한다고 하네.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반발로 촉발된 이 경제보복에, 당장은 뾰쪽한 대책이 없는 것이 문제라네.
오늘날 글로벌 산업사슬의 구조상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에 따른 국제 분업체제에서 세계 기술대국 일본을 배제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지. 현재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첨단기술력은 우리가 어떤 비장한 각오를 한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뜻이야.
최선의 방법은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것인데, 그게 쉽지 않으니 차라리 사법적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드네. 즉, 청구권협정 제3조 분쟁해결 절차에 따라 중재위원회를 구성해 해결하거나, 유엔의 사법기관인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양국이 공동 제소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라고 보네.
물론 국제사법재판소 공동 제소는 일본이 응해야 가능하겠지만, 우리가 제소를 요청하면 현재 자기들의 결정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일본으로서는 당연히 응하지 않겠는가. 동일한 사안에 대해 양국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면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니 이해 당사자가 아닌 제3자로 하여금 공정한 결정을 하게 해보자는 것이지.
그리고 한일 관계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대상을 잘 분별하는 일이라고 보네. 일본 정부가 하는 짓은 미워도 일본 사람들을 미워해서는 안 되지 않겠나. 우리가 대항해야 할 대상은 아베 정권이지 일본 국민이 아니라는 말이야. 내가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고 지내는 일본인들은 정직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인데 어떻게 저런 옹졸한 정부가 탄생했는지 모르겠네.
이번 한일 간의 사건 대응 태도를 보면서 유태인들에게서 지혜를 얻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네. 나치에 학살당한 유태인들의 마음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자신들이 나치에게서 당한 과거를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것이라네.
세계를 움직이는 유태인들의 성숙하고 서늘한 지혜가 느껴지지 않나.
과연 우리는 유태인들이 나치의 만행을 용서한 것처럼 일본의 만행을 용서할 수 있을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겠지만, 대원칙에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나의 부친께서 피해 당사자이지만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양국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
그리고 일본과의 크고 작은 현안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단기적으로는 외교적으로 해야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친일파를 양성해 일본과의 관계를 대등한 관계로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네.
과거의 친일파가 청산의 대상이었다면 현재나 미래의 친일파는 육성해야 할 소중한 인적 자원이라는 말이지. 먼 미래를 내다보는 의연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의미일세.
여러 사정상 내가 일본에 가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 같으니, 알밤이 떨어질 때쯤 고향에 한번 다녀가게. 지난번 귀국 때 만나지 못했지만 부인께도 안부 전해주게.
박희채 마음디자인학교 대표
외교부에서 외무공무원으로 30년 이상 재직했으며, 프랑스, UAE, 가봉, 리비아, 헝가리, 캐나다, 수단 등의 국가에서 재외공관 근무를 했다. 현재 마음디자인학교 대표이사로 있다.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저서로는 ‘장자의 생명적 사유’, ‘다니니까 길이더라’ 등이 있다.
피서를 떠나고픈 8월, 이달의 추천 문화행사를 소개한다.
◇ 영화 '봉오동 전투'
개봉 8월 7일 출연 유해진, 류준열, 조우진 등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첫 대규모 승리를 쟁취한 1920년 봉오동 전투 실화를 최초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 하나의 뜻으로 목숨을 걸고 맞서 싸웠던 독립군들의 가슴 뜨거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 영화 '김복동'
일정 8월 8일 내레이션 한지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올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본의 사죄를 받기 위해 투쟁했던 27년의 여정을 그렸다. 그녀가 자신의 지난 고통을 드러내면서 되찾으려 했던 삶과 희망의 씨앗, 소녀상의 의미 등에 대해 들려준다.
◇ 영월 동강 뗏목축제
일정 8월 8~11일 장소 강원도 영월군 영월동강둔치 일원
남한강 상류 주민들의 생활수단이자 교통수단으로 숱한 애환을 간직한 뗏목을 테마로 23회째 개최되는 행사다. 천혜의 자연 동강의 아름다움을 만끽함과 동시에 문화 탐방, 래프팅, 패러글라이딩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 뮤지컬 '시라노'
일정 8월 10일~10월 13일 장소 광림아트센터 BBCH홀
독설의 대가이자 난폭한 검객, 그러나 사랑하는 이 앞에서만큼은 순수한 낭만을 지닌 한 남자 ‘시라노’의 러브스토리가 펼쳐진다. 매력 넘치는 주인공의 유려한 화술에 아름다운 선율이 더해지며 특유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클래식 '정명훈&원 코리아 오케스트라'
일정 8월 18일 장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과 그가 이끄는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가 모차르트 협주곡 23번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을 연주한다. ‘하나 되는 코리아’라는 비전을 관객과 공유하며 ‘비창’으로 분단의 아픔을 위로할 예정이다.
◇연극 '오만과 편견'
일정 8월 27일~10월 20일 장소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원작으로, 고전 특유의 매력에 유쾌함을 더했다. 성별과 연령, 직업 등 각기 다른 21명의 캐릭터를 단 두 명의 배우가 소화한다. 역할마다 달라지는 배우들의 개성 넘치는 연기와 의상, 소품의 변화가 극의 관전 포인트다.
잘 지내? 내 친구 고래에게 안부를 전해. 그 인사조차 전하기 미안해. 하루 중, 어둠이 따라 오는 저녁에, 사람이 불 밝힌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컴컴해지는 바다에 혼자 남은 친구를 생각하면 가슴이 사무쳐.
친구가 떠나버린 텅 빈, 이름만 거창한 ‘울산바다 고래바다’를 둘러보고 온 날 저녁에 더욱 그래. 친구가 ‘바다의 로또’라는 사행성 이름으로 사람의 그물에 생명을 잃어버린 뉴스가 보이면 더욱 그래. 미안해 정말. 절대 사람을 용서하지 마.
친구는 알고 있을 거야. 최근 일본이 IWC(International Whaling Commission, 국제포경위원회) 탈퇴를 선언했어. 그건 고래를 마구 살상하겠다는, 바다를 고래의 붉은 피로 다 적시겠다는 야만이야.
동해에 주소 두고 사는 친구의 생명이 더욱 위험해졌다는 이야기야. 일본이 동해 우리 고래까지 씨를 말리겠다는 속셈인 거야. 고래를 사랑하는 사람이 모여 지켜낸 바다 자원인 고래를 자기 밥상에 올리겠다는 ‘도둑질’이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어. 그러나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었어. 일본은 바다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생명’인 ‘고래와의 전쟁’을 오래전부터 계속하고 있었어. 친구도 알지? 우리나라 위안부 할머니와 강제징용 보상 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듯이.
일본은 친구에게 전쟁 시작을 알렸어. 그건 고래를 사랑하는 전 세계인에게 ‘선전포고’를 한 거야. 이건 침략이야. 고래가 사는 바다를 자신의 ‘바다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거지. 집단학살이 예고됐어. 친구를 위해 세계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세계의 많은 고래보호단체에서 일본을 규탄하고 바다에서 일본의 만행을 막을 거야. 울산에서 고래를 지키는 ‘고래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모임’도 행동에 나설 거야. 오랫동안 친구에게 사랑과 위로 시를 보내온 나 역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친구를 겨누는 포경선의 포를 더욱 조심해. 일본이 ‘연구선’이란 미명의 포경선에 ‘히노마루(일장기)’를 펄럭이며 나타날 거야. 아비를, 어미를, 아기를, 가족을 모두 죽일 거야. 그건 살생이야.
바다의 국경선을 모르고 사는 자유로운 고래가 일본의 바다에 들어서면, 고래 야만국 일본이 다이치에서 수천수만 마리 돌고래 떼를 학살하듯, 자신의 국기 색깔 같은 고래 피를 시뻘겋게 보여줄 거야.
친구는 참을 수 없는 소리로 항변하겠지. 우리 사이에 언제 평화로운 시절이 있었냐고. 그 말 맞아. 인류가 처음 고래를 잡기 위해 바다로 출항한 날부터 우리는 쫓고 쫓기는 사이가 되고 말았어.
하지만 뜻있는 사람이 많아져 무분별한 술래잡이를 용서하지 않은 지 오래됐어, 사람의 야만은 즉시 중단돼야 해. 사람은 바다의 주인이 고래라는 것을 알아야 해. 사람은 사람의 죄를 알아야 해. 바다를 향해 절하며 용서를 구해야 해.
지구는 바다 면적이 70%를 차지하는데, 30%의 면적을 받은 육지 사람은 너무 오만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바다는 지구의 면적 70.8%를 차지한다지. 면적으로 보면 2.43배이고, 부피로 보면 13억7000만㎦에 해당하지.
이 넓은 곳에서 친구와 나는 참으로 미세한 존재야. 미세하지만 우리가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포유류’이기 때문이라 생각해. 서로 새끼 낳고 젖 먹여 키우는, 자식의 아비이고 어미이기 때문인 거지.
고래와 사람은 친구가 돼야 해. 그것이 바다에서 우리가 함께 사는 유일한 방법이야. 사실 멸종보호동물인 친구를 여전히 해양수산부가 관리하는 ‘생선대접’에 화가 나. 친구는 ‘환경부’가 지켜줘야 하는 ‘바다의 주인’이야. 귀한 생명이야.
‘고래도시’라는 내가 사는 울산을 봐도 짜증이 나. 여전히 고래는 ‘고래 고기’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울산에 고래잡이가 성행했던 때와 고래잡이가 중단되고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을 비교하면 고래 고기를 파는 식당이 200배 이상 늘어났어.
바다는 사람에게 소금을 비롯해 참으로 많은 선물을 주고 있어. 친구도 큰 선물이지. 고래는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할 친구인데 ‘먹거리’로 생각해서는 절대 안 돼. 70년을 살며, 10개월을 임신해서, 자식을 낳아 젖을 먹여 키우는 고래는 우리의 바다 자화상이야. 고래의 멸종은 인류 멸종의 예상 시나리오가 될 거야.
친구 고래. 친구는 여러 해 내가 울산광역시 고래목측조사에 참여한 것을 알 거야. 바다에서 눈으로 친구를 찾는 일이지. 내 소원은 울산에 멋진 ‘고래보호조사선’이 생기는 거야. 그리고 예술가들이 함께 배를 타고 나가 고래를 찾는 거야. 고래를 만나는 즐거움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어.
음악가에게는 고래의 노래를 들려주고, 춤꾼에게는 고래의 춤을 보여주고 싶어. 화가에는 고래의 역동적인 힘을, 아동문학가에는 고래의 동심을, 시인에게는 고래의 에스프리를 다 보여주고 싶어. 예술가들이 진정으로 고래의 작품을 만들어 관객과 독자를 만난다면 너도나도 다투어 고래 친구가 되려고 할 거야. 그때 바다에서 만날 수 있겠지, 친구.
최근에 읽은 케이틀린 셰털리의 GMO(유전자조작식품) 위협에 대한 보고서 ‘슬픈 옥수수’에 이런 구절이 있어. “사실상 땅의 운명과 사람의 운명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바다를 오염하고 죽은 고래 뱃속에서 비닐이 무더기로 나오게 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말하고 싶어. “고래가 살아야 사람이 살 수 있어!”
친구 고래. 다시 만날 때까지 살아 있어. 온전하게 일흔 해 천수를 살며 다시 만나길.
정일근 시인
1984년 ‘실천문학’과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외 다수가 있다. 소월시문학상, 영랑문학상, 지훈문학상, 이육사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 수상. 1992년부터 고래도시 울산에서 살며 ‘고래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모임 대표 시인’으로, 고래보호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현재 경남대 석좌교수.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겪었던 역사를 기억하고 교육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는 공간입니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의 안내문-
박물관을 찾은 날, 초겨울의 날씨는 제법 쌀쌀하고 연일 미세먼지 탓인지 하늘은 회색빛이었다. 어쩌면 이 공간은 밝고 환한 날보다 이런 날씨가 더 어울린다는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많은 후원자의 힘으로 세워진 박물관은 2012년 문을 열었다. 역사관, 운동사관, 생애관, 기부자의 벽, 추모관 등 전시실의 내용은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해설을 위한 오디오 기기를 대여해 주어 해설을 들으며 자료를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가장 마음 아팠던 공간은 생애관이다. 자그마한 방 하나의 왼쪽 벽면에는 젊은 위안부의 사진이 있다. 오른쪽 벽에는 할머니가 된 그녀들의 주름진 모습이, 중앙의 벽에는 ‘위안부’시절의 사진이 있다. 소녀에서 할머니로 건너오는 인생의 과정에 위안소가 터억 버티고 있다. 너무나 아프고 큰 강을 건너온 그녀들이다. 보통의 우리들이 겪어 온 청춘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배움, 여러 경험 대신!
이 방의 기획의도가 그대로 전해진다. 모진 삶의 바퀴를 힘들게 이고 지고 끌고 왔을 게다. 짐작대로 생애관에는 ‘위안부’로 연행된 시기와 지역 등 피해 기록이 소개되어 있다. 해방 후 이어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굴곡진 삶을 한국 현대사의 연대표 위에 조명하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과 불행한 가족사가 펼쳐져 있어 마음 무겁다.
추모관에는 이제 고인이 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얼굴과 사망 날짜가 있다. 장미꽃 한 송이를 꽂아드렸다. 그녀들의 구겨진 청춘에 마음 아파하면서. 하루빨리 일본의 진상 규명과 진심 어린 공식 사죄, 법적 배상이 있어야겠다는 것을 강하게 느낀 박물관 탐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