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안개’로 유명한 원로가수 현미(본명 김명선)가 4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5세.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37분께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에 현미가 쓰러져 있는 것을 팬클럽 회장 김모(73) 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현미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 판정을 받았다.
경찰은 고인의 지병 여부와 신고자인 팬클럽 회장과 유족 등을 조사해 정확한 사인을 규명할 계획이다. 빈소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현미는 지난 1938년 평양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1·4후퇴 때 부모·6남매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 과정에서 어린 두 동생과 헤어졌다가 60여 년이 지난 뒤에서야 동생들과 평양에서 재회하기도 했다.
우리 나이로 스무 살 때인 지난 1957년, 현미는 미 8군 무대 칼춤 무용수로 활동하던 중 스케줄 펑크를 낸 여가수의 대타로 무대에 오르면서 가요계에 데뷔했다. 이때부터 그를 눈여겨본 작곡가 고(故) 이봉조와 3년간 연애한 뒤 결혼했다.
1962년 발표한 '밤안개'로 큰 인기를 누렸으며, 남편 이봉조와 콤비를 이뤄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 없이', '몽땅 내 사랑', '무작정 좋았어요' 등 연이어 히트곡을 발표했다. 현미는 이미자, 패티 김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디바로 꼽힌다.
현미는 지난 2007년 데뷔 50주년을 맞아 연 기자회견에서 “오늘날까지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겐 큰 축복이다. 저에겐 은퇴란 없다. 80년이든 90년이든 이가 확 빠질 때까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노래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여줬다.
반짝이는 것은 늙지 않는다. 일을 향한 열정,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반짝이는 이 역시 늙지 않는다. 춘삼월 여린 잎 같던 목소리는 푸르다 못해 영글었고, 소년은 단단한 어른이 되었지만 반짝이는 두 눈은 24년 전과 다르지 않다. 예술과 사람을 사랑하며 오래도록 푸른 청년(靑年)으로 남을 임형주(37)의 이야기다.
한 단어로 요약하면 ‘최연소’, 하나 덧댄다면 ‘최초’를 꼽겠다. 2003년 만 17세 나이로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 헌정사상 최연소 애국가 독창자가 됐다. 같은 해에 세계 남성 성악가 사상 최연소로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단독 데뷔 독창회를 가졌다. 국내 3대 공연장에서 독창회를 여는 대기록은 10년 전에 세웠다. 데뷔 15주년에는 앨범 누적 판매량 100만 장을 돌파했고, 최근에는 스승의 날을 기념한 독창회를 열면서 세종문화회관의 모든 무대(대극장, M씨어터, S씨어터, 체임버홀)에 서본 최초의 음악가가 되었다. 음악가로서 세울 수 있는 기록은 전부 휩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두 살 소년이 상상 못한 숫자들
수집하듯 온갖 기록을 쓸어 담은 세월이 24년이다. 지금의 임형주는 데뷔 25주년을 앞둔 대한민국 대표 팝페라 테너지만, 1998년 데뷔 당시 열두 살 소년은 이 모든 기록적인 숫자를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지난 24년이 ‘꽃길만 걷는’ 시간이었을 것 같지만, 그는 스스로 ‘영광과 고난의 역사’를 거쳐왔다고 평가한다. 선배가 없는 팝페라 장르에서 활동하는 건 흙길에 아스팔트를 까는 작업과도 같았다.
지쳤던 걸까. 언제부터인가 국가 기념식이나 올림픽, 월드컵 같은 세계적인 스포츠 행사에만 등장했다.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노래하는 모습조차 보이고 싶지 않았다. 유명세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뜬소문에 지쳤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로마시립예술대학 성악과 석좌교수, 미국 그래미상 심사위원, 음악평론가 임형주로 살았다. 대중과 멀어지면서 ‘세월호 추모곡 가수’, ‘애국가 소년’쯤으로 이미지가 축소됐다.
그러다 가수 임형주가 지난 5월 JTBC ‘뜨거운 씽어즈’로 안방극장에 얼굴을 비췄다. 출연자도, 시청자도 예상 못 한 깜짝 등장이었다. “음정, 박자, 테크닉은 다 차치하고 진정성을 전하는 노래가 최고의 노래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출연진의 도전을 응원한 그는 시니어 합창단과 함께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불렀다. 겸손한 자세와 청아한 목소리가 갖는 힘은 여전했다. ‘뜨거운 씽어즈’에서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함께 부르는 장면의 유튜브 동영상은 두 달 만에 134만 회에 달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대중의 관심이 전보다 덜하리라는 예상을 뒤엎은 수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가수로서 노래하는 제 모습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데뷔한 지 오래되다 보니 ‘왕년의 스타’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어느 순간부터 방송에도 잘 출연하지 않았으니 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그의 데뷔 무대이자 첫 방송 출연이었던 KBS 2TV ‘이소라의 프로포즈’ 영상은 ‘온라인 탑골공원’(1990~2000년대에 유행한 콘텐츠를 올리는 유튜브 계정을 총칭하는 신조어)에 게재됐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는데 너무하지 않느냐며 너스레 떨지만, 대중의 애정과 관심에서 비롯됐음을 알고 있는 그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사람, 사랑을 위한 노래
그는 노래를 고를 때도 대중을 생각한다. 스스로 청중이 되어보고, ‘팝페라 테너’라는 정체성을 되새기며, 이 시대의 대중이 무얼 가장 원하고 듣고 싶어 하는지 고민한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곡들로 그는 사랑을 노래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친구 사이의 사랑이 주제가 되기도 한다. 연인의 애정보다는 인류애에 가깝다.
“연인의 사랑을 다루는 가수는 워낙 많잖아요. 그래서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 휴머니티를 다루었어요. 대중이 가장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음악인 팝을 통해서 인간애를 노래하죠. 사실 예술은 무한하기 때문에 장르로 구분 지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예술의 본질적인 의미는 향유, 즐기는 데 있거든요. 저는 세상에 듣기 좋은 음악과 듣기 싫은 음악, 딱 두 가지 음악만 있다고 이야기해요. 예술가는 대다수가 공감하고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할 줄 알아야 하죠.”
고고하고 우아한 음악을 한다는 생각에 괜히 으스대는 클래식 전공자들을 종종 봤다. 그 역시 정통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그들만의 음악’을 하기 싫었기에 팝페라 테너로 전향했다. 정치·경제만큼이나 문화예술의 중요성이 커지는 요즘, 그는 뿌듯한 한편으로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전부터 ‘문화예술의 일상화’를 주장하던 입장에서,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전하기 위함이다. 즐기기 위해선 공부해야 하는 ‘어려운’ 콘텐츠가 일상에 스며들 자리는 없으니까.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예술을 향유하며 영감을 얻는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 감상은 물론,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로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고, 활자중독이라 할 정도로 책을 읽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쓰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 등. 좋아하는 작가를 묻자 기다렸다는 듯 세계 유수의 작가와 작품명이 쏟아졌다. 최근 그의 마음을 동하게 한 책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다. 지난해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도 그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했다. “타인을 돌보는 마음, 그 사랑이 있기에 사람은 오늘도 살아 있다.” 인간애를 노래하는 가수다운 모습이다.
숲을 만드는 일을 꿈꾸다
올해로 서른일곱의 나이지만, 데뷔한 지 24년이 지났다. 인생의 3분의 2를 올곧이 음악에 바친 셈이다. 인간 임형주의 삶은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지만 흘러간 과거가 아쉽지는 않다. ‘음악과 이혼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도 몇 시간 지나면 새로운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앨범 제작 작업은 뼈를 깎는 고통 그 자체지만, 사람은 죽어도 앨범은 세상에 남아 있을 걸 생각하면 열심히 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요즘 들어 점점 은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굉장히 일찍 데뷔했기 때문에 다른 음악가들보다 조금 이르게 은퇴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커리어상 최정상을 누리는 시기는 이미 지났고, 지금이 제 목소리의 전성기임이 느껴지거든요.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른 뒤에는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에 순응하려고 해요. 돌이켜보니 데뷔하던 때도 왠지 ‘나는 일찍 은퇴할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네요.”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끝을 떠올리자니 가수 임형주를 기다리고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그런데도 아쉬움은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목소리에서 단호함이 묻어났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태도다.
현역에서 은퇴한다 해도 문화예술계에 일조하려는 계획은 확고하다. 그는 예술감독으로 행사를 직접 연출해보고 싶다고 했다. 노래가 꽃이자 나무라면, 가수로서 노래 부르는 것은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가꾸는 일이다. 예술감독은 행사에 쓰이는 모든 음악을 심고 가꾸며 배치한다. 국가 기념식이나 올림픽 개·폐막식이라는 하나의 숲을 만드는 작업이다.
숲을 울창하게 만들어줄 묘목을 가꿀지도 모른다. 그는 최근 국내 대학에서 제안한 교수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팝페라’의 길을 걸을 후배들이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또한 풍부한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예술행정가로도 활약하고 싶다. 인생 2막에 대한 계획을 늘어놓는 모습이 장래 희망이 너무 많아 고민인 어린아이를 닮았다.
바빠 나이 들 시간조차 없는 청년
차차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지만, 당장은 9월에 발매될 정규 앨범 8집 ‘Lost In Memory’를 제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번 앨범에는 1970~1980년대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 시기 대중가요를 담을 예정이다. 독립군 애국가나 ‘봉선화’, ‘사의 찬미’ 등 1920~1960년대 노래를 수록한 정규 7집 ‘Lost In Time’과 시대적으로 연결되는 앨범이다.
“지난 앨범에서 1920년대부터 1960년대의 음악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았으니, 이번에는 ‘잃어버린 추억’에 대해 다뤄보려고 해요. 1970~198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에는 트로트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작곡가 길옥윤, 박춘석, 이봉조와 그들의 뮤즈인 패티김, 혜은이, 정훈희나 이미자의 가요를 녹음하고 있어요. 패티김의 ‘이별’이나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 정훈희의 ‘안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빠질 수 없죠.”
10월 12일에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신보와 같은 이름의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이다. 8집에 실린 노래 외에도 가을에 어울리는 추억의 팝송이나 연주곡을 함께 선보이려 한다고. 50인조 오케스트라 반주를 곁들일 예정이라, ‘사랑은 생명의 꽃’(패티김)처럼 음역대가 굉장히 넓은 곡을 듣다 보면 특히나 코끝이 찡해질 것이라는 전언이다.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우선 첫 베스트 앨범을 내려고 한다. 그의 모든 대표곡을 앨범 한 장에 담을 예정이고, 앨범 발매 기념 독창회 역시 진행하려 한다. 내년에 코로나19가 완화되면 국내나 해외 순회공연도 떠날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전국 25개 도시를 돌아보고 싶어요. 숫자 맞추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TV 프로그램이나 매체 인터뷰 등 섭외 제안이 들어오면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해요. 순회공연을 돌다 보면 한 해가 다 지난 뒤겠지만, 내년은 인간 임형주이자 음악가 임형주로서 제 인생을 결산하는 시기가 되지 않을까요?”
그의 계획을 듣고 있자니 “바빠서 나이 들 시간이 없다”던 유명 배우의 발언이 떠올랐다. 임형주는 배움을 멈추고 안주하려 할 때 사람이 비로소 ‘늙는다’고 생각한다. 고로 꿈이 있는 자는 늙지 않는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 잠을 설치고,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받고 싶은 상이 남았는가”라고 물으면 “당연히”라고 대답한다. 오래도록 푸르를 청년일 수밖에.
재즈를 아는 이가 드문 시절이었으니 당연하게도 물심양면의 외로움이 많았겠다.
“아예 무대를 얻지 못해 무교동 주점을 찾아가 무료 연주를 자청하기도 했다. 근데, 그냥 가라 하더라고. 재즈는 필요 없다는 거였다.(웃음) 집에선 와이프의 원성이 자자했지. ‘제발 월급이라는 걸 가져와보라’고 다그쳤다. 결국 TBC(과거 동양방송)의 ‘이봉조 악단’이나 KBS ‘길옥윤 관현악단’에 들어가 일하며 월급을 받았지. 그러나 허구한 날 가수들의 반주나 하자니 자존심이 상해 견디기 힘들더라고.”
결국은 뛰쳐나왔다는?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베이시스트로 꼽히는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는 한동안 활동을 중단하고 우체국 직원으로 살았더군. 그는 예술적 자존심의 손상을 감내하면서까지 클럽의 주정뱅이들을 상대로 연주하긴 싫었던 거다.
“재즈 뮤지션들은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다. 그런데 나에겐 삶의 자유보다 더 지배적인 욕망이 있었다. 나만의 연주 스타일을 확보하고 싶다는 거! 그러자면 맹렬한 연습이 필요했다. 방송국 악단을 뛰쳐나온 건 월급봉투보다 연습을 통한 기량 향상이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게 재즈 뮤지션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기도 했다.”
내심 독을 품은 연습벌레로 살았다는 얘기이겠다. 엉덩이가 물러터지도록 내내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난타하고, 그러다 지겨워 마신 술에 취해서도 두드리고, 재즈 LP를 들으며 채보(採譜)를 하고, 필이 떠오르면 작곡을 하고…. 그는 피아노에 육신을 내던지는 부단한 연습과 학습으로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져나갔다. 그리고 실존적 경제적 기반 확보를 위한 하나의 유력한 조치를 취했다. 서울 홍대 앞에 재즈클럽 ‘문 글로우’(Moon Glow)를 차렸던 것. 이곳은 신관웅이 주도해 만든 빅밴드(열 명 이상의 뮤지션으로 편성한 앙상블 형태의 밴드)의 주둔지였다. 김준(보컬), 김수열(색소폰), 강대관(트럼펫), 류복성(봉고), 이판근(베이스), 조상국(드럼), 홍덕표(트롬본) 등 신관웅과 함께 미8군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1세대 재즈 뮤지션들이 참여했다. 다시 말해, ‘문 글로우’는 한국 재즈의 요람이자 플랫폼이었다.
“‘문 글로우’에선 날마다 공연이 펼쳐졌다. 재즈 마니아들이 즐겨 찾아들면서 명소로 부각됐고. 그러나 운영난에 봉착하게 되더군. 임대료조차 감당하기 어려워 폐업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지. 그러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언론들이 보도를 하고, ‘문사모’(문 글로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후원모임이 지원을 해 간신히 지속해나갔다. 하지만 결국은 문을 닫았다. 개업 15년 만에.”
폐업에 이른 동인은 재즈가 대중화하지 못한 탓?
“그렇다. 사람들은 재즈를 낯설어한다. 어렵다고들 투덜거린다. 이건 과거나 요즘이나 마찬가지다.”
요즘도? 비주얼과 스펙을 겸비한 젊고 유능한 재즈 연주자들이 속속 등장하는데도?
“재즈 연주자는 시중에 넘치지만 감상자들은 밋밋하게 증가했을 뿐이거든. 아이돌 뮤직과 트로트의 돌풍을 보라. 대중을 모조리 쓸어가는 게 아닌가. 재즈는 여전히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어떤 방법으로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보나?
“재즈의 본질적 성향인 클로스오버로 파고를 넘어서야 한다. 난 이미 오래전부터 재즈와 국악을 접목한 공연을 시도해왔다. K-재즈! 여기에 답이 있다고 보는 거다. 재즈란 원래 흑인들의 한을 정서적 근간으로 한 장르다. 국악 역시 한을 정조로 하기에 양자의 결합은 절묘한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거든. 국악+재즈 빅밴드를 결성하는 게 나의 꿈이다.”
재즈의 모든 기법 구사해
신관웅의 재즈 인생 고백엔 낙심과 낙관이 교차한다. 번번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무대에 섰던 기억은 악몽처럼 쓰라리나 값진 단련의 기회였다고 한다. 검불 몇 조각 펄럭이는 황무지와도 같았던 한국의 척박한 재즈 토양에 씨를 뿌렸다는 자부심은 노년의 그에게 정당성을 제공한다. 하여, 그는 자신에게 여전한 현역의 자격을 부여한다. 그의 재즈 선율에는 이와 같은 긍정과 자신감 또는 가라앉지 않은 갈증의 심상이 아롱질 터다. 서정적인 멜로디, 수려한 레가토주법(둘 이상의 음을 사이가 끊어지지 않도록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는 주법), 호쾌한 건반 두드림, 그리고 ‘끼’의 분출에 의한 쇼맨십까지, 신관웅의 연주엔 재즈의 모든 기법들이 동원된다.
“서정적인 면과 폭발적인 면, 나는 이 둘의 조화로운 표출을 연주 목표로 삼아왔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좀 변하더라. 과거엔 기법 중심의 화려한 연주였다면 요샌 감성의 흐름을 중시해 다분히 정적이거든.”
심금을 울리는 음악은 영혼을 다한 자만이 가능하다지?
“내 안에도 한이라는 게 있다. 한이야말로 영혼의 움직임이지 않을까? 나는 낱낱의 음에 한의 정서를 실어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기를 갈망한다.”
재즈 정신에는 사회모순과 금제에의 도전이라는 측면도 있다. 일단의 재즈 뮤지션들은 자유를 숭상하는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당신의 성향은 어떤가?
“내가 생각하는 현대 재즈는 하나의 독특한 제도권 문화다. 청중과 교감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하고도 강력한 장르이기도 하다. 더 넓게 보자면 인격 완성의 수단이기도 하지. 알다시피 재즈는 즉흥연주를 기본으로 삼는다. 하지만 밴드 멤버들 각자의 선율이 어울려 고도의 하모니를 이루지 않고선 성립할 수 없는 음악 행위다. 즉, 연주곡 하나하나가 모두 인격체의 산물인 거다. 나의 성향? 둥글둥글하다. 꽤나 온화하거든. 뭐 과음을 즐기는 버릇이 있긴 하지만 취중에도 모난 짓을 하진 않는다.(웃음)”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지?
“나를 내려다보시는 신의 눈길을 가끔 느낀다. 한번은 재즈 성가를 녹음했는데, 일을 마치고 보니 녹음의 절반이 날아갔더라. 기술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대번에 영감이 떠오르더군. ‘넌 아직 멀었다! 어디서 감히 성가를?’ 그런 하늘의 음성을 들은 기분이었다.”
어디서 감히! 신의 음성이 아니더라도 가슴을 치는 일갈이다. 나 잘난 ‘자뻑’도, 카랑카랑한 논리도 지나치면 실족한다. 신관웅의 개성이라면 그저 무덤덤한 유연함? 이는 ‘어디서 감히!’의 진실을 알고 사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절제의 폭을 웅변할지도.
몇 달 전, 어느 술자리에서 그녀와 처음 마주쳤다. “반갑습니다. 윤승희입니다” 하고 인사하는 멋진 중년 여인의 인사에 “아니 그럼 당신이 ‘제비처럼~’의 그 윤승희 씨?” 하며 한량 이봉규의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명색이 나도 TV 출연 꽤나 한 방송인이지만, 이 왕년의 섹시가수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청소년기에 윤승희의 광팬이던 내가 환갑 나이에 그녀를 코앞에서 마주쳤기에 ‘꿈이야 생시야~’하는 기분이었다. 둘째는 내 기억으로 분명 나보다 최소한 5~6세 이상은 나이가 위였던 스타였는데 ‘어찌 이토록 젊고 섹시하나?’ 하는 감탄이었다. 감히 나이를 묻지 않았다. 아니 내가 실망할까봐 일부러 묻지 않았다. 윤승희가 히트할 당시의 시대와 내 나이를 얼추 계산해보니 그녀는 최소한 60대 중후반 정도는 되었다. 그런 여성이 이토록 섹시해 보이다니 나로서는 무척 드문 감정이었다.
1년 8개월의 짧고 굵은 가수활동
특별히 한량 이봉규만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 당시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남학생에게 윤승희는 최고의 섹시 스타였다. 여배우로는 당시 학생으로 나이가 나보다 한 살 어린 임예진이 청초하고 깜찍한 매력으로 남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윤승희는 피 끓는 청춘들의 애간장을 녹였던 섹시한 누나였다. 그 윤승희와 수차례 만나 얘기를 나눈 뒤에 한 첫 질문이 “그동안 뭐하셨어요?”다. ‘제비처럼’으로 한창 인기를 구가하던 그녀가 홀연히 브라운관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1년 8개월 동안 짧고 굵게 활동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그녀는 곧바로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노래를 하기로 남편과 약속을 했지만 임신하고 애 키우느라 자연스럽게 공백기가 길어졌다. 15년 정도 노래를 듣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노래를 들으면 노래하고 싶어서 튀어 나갈까봐 일부러 노래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토록 좋아하는 노래를 버릴 정도로 남편이 좋았는지 궁금했다. 결혼과 남편 얘기로 화제를 옮겼다. 친한 언니가 남편을 소개해줬다. 세칭 소개팅으로 몇 번 만나 식사하고 데이트를 하던 중에 남편에게 갑자기 납치 당했다. 키스하면 결혼해야 되는 줄 알았던 당시 문화 때문에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인기 절정의 윤승희가 갑자기 브라운관에서 사라지니까 기자들이 취재하려고 난리가 났었다. 건설업을 해서 재력도 있고 터프한 남편은 기자들에게 술을 사주거나 밥을 사주면서 “윤승희는 내 꺼다!”라며 나쁜 기사를 못 쓰게 설득했다. 지금이야 어림도 없지만 당시 그 정도는 통했던 시절이다. 그렇게 시작된 결혼생활. 10년 정도 알콩달콩 살다가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났다. 이후 자연스럽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졸혼’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뭐든지 유행의 첨단을 걷는다”라고 애써 웃으며 안경을 닦는 표정이 복잡해 보인다.
신나게 놀다가 지치면 내게 오라
현재 남편은 부산에서 살고 윤승희는 서울에서 살며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통화한다. 친구 같은 사이다. 남편은 “내가 그동안 실컷 놀면서 할 짓 못할 짓 다하며 살았으니까 너도 신나게 놀다가 지치면 내게 오라!”고 말한다. 그녀의 남편은 이봉규보다 더 한량으로 살았나보다. 윤승희는 “억울하다”며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다. “애들 다 키우고 남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니까 어느덧 늙어버렸다”며 목소리를 높였다가, 곧바로 “이제는 애인 같은 친구가 필요하다. 괜찮은 노인네 있으면 소개해 달라!”며 애써 차분해진다. 그녀의 외모와 어울리려면 연하의 남성이 맞을 것 같아서 물었더니 “나이는 많아도 마인드가 젊고 코드가 맞으면 된다. 요즘 그런 남자들이 많은데 내 주위에만 없다”고 심각하게 토로한다. 외로운 사람들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어느덧 노년의 나이로 접어든 왕년의 섹시 스타 윤승희에게도 스며든다. ‘졸혼’으로 남편과 헤어져 살지만 그 좋아했던 가수생활을 이어가지 못하고 도중에 그만둔 세월이 억울하고 야속해서 더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판단된다. “내 성격이 전형적인 혈액형 O형의 성격으로 낙천적이라 그나마 지금까지 잘 버티고 살아왔다. 만약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 죽었을 것. 파란만장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결혼과 함께 사라진 추억 속 윤승희
건축업도 했고 그동안 별별 장사 다 해봤다.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해 가수로 인기절정을 누리다가 생활전선의 여장부로 살면서 단맛 쓴맛 다 본 인생이다. 부산에서 해운업을 하던 아버지가 풍랑을 만나 행방불명되며 집안이 무너졌고, 이후 서울 이모의 집으로 올라와 살던 중 한 의상실 사장님의 권유로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됐다. 1975년 12월에 TBC에서 방영된 각 분야별 노래자랑 성격의 프로인 ‘가요올림픽’에 모델 대표로 출연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작곡가 이봉조 선생이 윤승희의 노래 실력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알아채고 “저 친구는 모델하고 붙이지 말고 전영록하고 붙여라!”고 주문했던 것. 그 결과 10 대 0으로 전영록을 간단히 제압하고 서라벌레코드사에 스카우트되면서 가수 인생이 시작된다.
데뷔한 지 1년 6개월 만에 ‘제비처럼’이 크게 히트하면서 대형 가수로 발돋움할 때 갑자기 결혼과 함께 브라운관에서 사라졌다. 팬들은 그저 추억 속 스타의 섹시하고 아름다웠던 모습만을 기억하지 그들 삶의 흔적은 제대로 알 수 없다. 중년을 넘어 노년까지 꾸준하게 활동하는 가수들도 많지만 젊은 시절 반짝 하고 활동을 중단해 팬들의 추억 속에서만 남아 있는 연예인들이 꽤 된다. 윤승희를 비롯해서 남성 듀엣 어니언스의 이수영, 여배우 정윤희 등이 대표적이다. 팬들 입장에 그들 삶의 궤적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단지 추억 속의 연예인이기에 더 그리운 것일까? 아니면 팬들 스스로 나이를 먹어가고 청춘 시절이 그립기에 추억을 떠올리며 당시의 노래와 스타를 대입시키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걸까? 아무튼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사라진 스타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노래주점에서 마이크를 들고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며 불렀던 노래가 바로 윤승희의 ‘제비처럼’이다.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과 지나간 일들을 돌이키며 그리워하는 ‘추억’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이 노래를 주인공 송강호에게 부르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부르는 ‘제비처럼’은 극중 인물의 심리 상태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노래 ‘제비처럼’이 주는 메시지
꽃피는 봄이 오면 내 곁으로 온다고 말했지 노래하는 제비처럼 언덕에 올라보면 지저귀는 즐거운 노래 소리 꽃이 피는 봄을 알리네 그러나 당신은 소식이 없고 오늘도 언덕에 혼자 서 있네 푸르른 하늘 보면 당신이 생각나서 한 마리 제비처럼 마음만 날라가네 당신은 제비처럼 반짝이는 날개를 가졌나 다시 오지 않는 님이여~
꼭 범인을 잡고야 말겠다는 형사의 집념은 어느새 범인에 대한 집착으로 발전한다. 묘하게 ‘제비’라는 단어도 범인의 이미지와 오버랩 된다.
‘제비’는 몸매가 날씬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비유한 말이지만 당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이른바 ‘제비족’을 연상케 해서 아름답지만 야비한 이미지다. 실제로 윤승희의 ‘제비처럼’도 당시 사회적 경종을 울리기 위해 가사를 지었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물 찬 제비’ 이미지의 아름다움과 ‘제비족’의 야비한 이중적 느낌으로 한 시대를 강타한 노래가 ‘제비처럼’이다. 가사 마지막 부분에 “당신은 제비처럼 반짝이는 날개를 가졌나 다시 오지 않는 님이여~”를 고쳐 윤승희 인생 3막에서는 팬들에게 “다시 오는 님이여~”가 되길 고대한다. 위에서 설명한 부정적인 의미의 ‘제비’가 아닌 흥부전에 나오는 긍정적인 의미의 ‘제비’ 말이다. 몇 년 안에 ‘70대 섹시 가수 윤승희’의 대박 씨앗을 가져다주는 ‘제비’가 오길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