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5년 일제강점기 속에서 민족의 문화를 지키고자 탄생한 동춘서커스가 100주년을 맞았다. 한 세기를 거치는 동안 대중예술의 중심에 서기도 했고, 위기를 겪으며 명맥을 이어오기도 했다. “동춘서커스는 내 인생”이라고 말하는 박세환 단장. 60년간 자나 깨나 동춘서커스만 생각하며 살아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국 대중예술의 시발점이자 중심
한국인의 흥과 열정을 담은 동춘서커스는 목포의 사업가 박동수 씨가 창설했다. ‘동춘’이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봄은 동쪽에서 찾아온다는 의미다. 지금 생각해보면 겨울을 지내고 찾아오는 봄, 결국 희망이 있는 곳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라고 박세환 단장은 그 의미를 해석했다.
동춘서커스는 1925년 창설 이후 1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대한민국 대중예술의 최전선에서 관객들과 함께했다. 특히 TV, 영화 등이 대중화되기 전인 1960~1970년대에는 한국 대중예술을 대표하는 공연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곳곳을 순회하면서 연극, 쇼, 국악, 마술, 체조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대중과 희로애락을 나눴다. 대중의 유일한 오락이자 종합예술 무대 역할은 물론, 그들의 문화적 쉼터였던 셈이다.
그 시절 동춘서커스를 거쳐간 배우 장항선, 작곡가 이봉조, 코미디언 서영춘, 가수 하춘화, 정훈희 같은 스타들은 지금도 한국 문화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동춘서커스는 내 인생
젊은 시절 가수를 꿈꿨던 박세환 단장은 1963년 입단해 이들과 동고동락했다.
“당시에는 서커스가 종합 엔터테인먼트 그 자체였어요. 쇼 1시간, 서커스 1시간, 신파극 1시간 구성인데, 이걸 보려고 십 리(약 4㎞)를 걸어오는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정말 대단했죠.”
하지만 TV가 대중화되면서 상당수는 방송으로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박 단장은 사회자, 연극배우, 코미디언, 가수 등 다양한 역할을 하면서 동춘을 지켰다. 게다가 시대가 변하면서 점점 쇠락해가는 서커스가 안타까워, 1987년 아파트 세 채 값을 지불하고 직접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자그마치 38년, 단원 시기까지 합치면 60년의 세월을 동춘과 함께한 셈이다.
“동춘은 단순한 공연이 아니에요.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산실이자, 한 시대의 문화적 구심점 역할을 한 전통이죠. 게다가 제 청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인데,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게 너무 안타까웠어요. 동춘이 사라지면 공연예술 장르가 끊기는 것과 다름없는데 어떡해요. 저라도 인수해서 명맥을 이어가야죠.”
경주의 밀양 박씨 종가 장손이었던 박 단장은 그를 향한 부모의 기대를 뒤로하고, 오로지 동춘서커스를 악착같이 지키는 데만 골몰했다. 동춘에 대한 그의 애정이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었다. 현재 동춘서커스는 코로나19가 극심했던 한 달을 제외하고 13년간 주 6일 공연의 막을 올린다.

꺾이지 않는 악착같은 마음
1970년대만 해도 국내 서커스단은 15개 남짓으로 성황을 이뤘고, 동춘서커스 단원만 30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그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1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IMF 외환위기, 신종플루, 코로나19 등 겪은 우여곡절만 해도 수만 가지. 가장 큰 타격은 TV를 비롯한 문화산업의 급격한 발전이었다. 대중의 관심이 분산되면서 시들해졌고, 서커스는 점차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럼에도 정부의 지원은 미미했고, 전국을 순회하며 흥행을 이어가기에는 재정적 어려움이 컸다. 박 단장은 서커스가 처한 현실에 대해 끌탕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여름에는 태풍, 겨울에는 한파 걱정….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죠. 신종플루가 극심할 때는 동춘을 없앨 결정을 하고 고별 공연도 준비했어요. 그때 제 심정은 진짜 말로 다 못 해요. 서커스를 문화산업으로 육성하고자 하는 정부의 노력이 있었더라면 이런 고민은 덜하지 않았을까요? 중국은 전국에 600개 넘는 서커스단을 전부 지원해주는데… 우리는 왜 안 될까요? 너무 안타까워요.”
하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2011년 안산 대부도에 상설 공연장을 마련했고, 매일 공연을 올리는 등 새로운 운영 방식을 도입했다. 그 덕분에 지금은 일 년에 10만~15만 명이 즐기는 공연이 되었다. 이렇게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십시일반 돕고자 했던 대중들이 있었기 때문이라 그는 이야기했다.
“전국 순회공연도 하고 상설 공연장에서도 하다 보니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동춘을 찾는 분들이 있으니 멈출 수 없어요. 서커스단을 해체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우리나라 마지막 서커스단의 회생을 돕겠다’며 기업체 등에서 연말을 맞아 단체관람을 와주는 경우도 많아요. 일부러 찾아와서 서커스를 보는 젊은 관객들도 있고요.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도 관객들이 저희를 찾아와 주기에 이렇게 버틸 수 있었죠. 기적이나 다름없어요.”
요즘은 어린아이부터 추억을 잊지 못하는 어르신까지 천막 극장을 찾아주어 동춘서커스의 미래를 기대하게 된다는 말을 덧붙이며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새로운 100년을 향해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동춘서커스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서커스에 평생을 바친 박 단장은 “가장 먼저 이뤄져야 할 것은 서커스 전용 극장 설립”이라며 태양의 서커스를 예로 들었다.
“캐나다에서 시작한 태양의 서커스는 코로나19로 주춤해지기 전까지 연 매출이 1조 5000억 원에 달했습니다. 이건 전용 극장, 서커스 전용 아카데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극장과 아카데미가 갖춰진다면, 관광산업도 연계할 수 있죠. 중국이나 유럽에서 국빈 초청 공연으로 서커스를 선택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서커스가 관광산업 발전에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국가가 발 벗고 나서는 거예요. 실력으로 보나 공연 내용으로 보나 우리가 해외 서커스보다 훨씬 잘하는데…. 세계적인 서커스단으로 크지 못한 건 지원 체계가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이 점이 늘 아쉽죠.”
결국 그는 다시 한번 사비를 털어 상설 공연장에서 2km 떨어진 곳에 서커스 전용 극장을 짓기 위한 땅 3036㎡(약 1000평)를 확보했다. “비용 문제가 걸려 있는 터라 속도가 느리다”면서도 연내 착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연출과 무대 기술, 젊은 단원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과 훈련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는 체계적인 후진 양성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기 때문이다. 공연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데 교육까지 신경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그는 “지금 30명의 단원 대부분이 중국 출신”이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서커스는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훈련을 바탕으로 하는 공연예술이에요. 체조처럼 8~10살 때부터 수련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지원해야 훌륭한 단원을 배출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는 하나도 없지만 중국의 경우 서커스를 배울 수 있는 학교가 300개가 넘어요. 이제라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공연단원 육성은 물론, 기획·연출까지 할 수 있는 교육 및 훈련기관을 설립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지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단원이 늘고 전용 극장이 생겨도 관객이 찾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이듯, 관객이 꾸준히 찾는 공연이 되기 위한 서커스의 지속적인 혁신도 필요하다. 동춘서커스는 전통 공연예술만 고집하지 않고 현대적인 콘텐츠로 변모하기 위해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을 활용한 무대 연출을 도입할 계획도 있다.
박 단장은 “서커스는 온 가족이 함께 보는 것이 제일 재미있는 법”이라며 “저렴한 입장료로 온 가족이 결코 후회 없이 스릴과 재미를 느끼며 돌아갈 수 있는 공연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관객들에게 더욱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고민하고 있어요. 해외 시장 개척도 준비 중이고요. 우리나라에선 서커스를 보는 관객층이 한정적이어서 해외 투어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 도전할 계획입니다.”
박세환 단장은 동춘서커스는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니라 한국 대중예술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며, 동춘서커스의 100년 역사를 잇고 브랜드를 키워나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서커스는 단순한 묘기가 아니라 체력과 예술성이 결합된 고도의 무대예술입니다. 대중의 관심과 지지가 있다면 동춘서커스는 100년을 넘어 200년, 300년까지도 성장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늘 관객 곁에서 함께하는 동춘서커스가 되는 것이 저의 마지막 바람이에요.”
공연 일정 화·수·목·금 1회 토·일 3회(월요일 휴무)
공연 시간 화·수·목·금 오후 2시 / 토·일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4시 30분
*4월 14일부터 평일 2회 공연으로 오전 11시 공연이 추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