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충, 오가피 등을 주요 약재로 하는 약침액 ‘신바로2(SHINBARO2)’가 허리디스크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한방 척추질환 치료의 유효성이 재차 인정받고 있다.
자생한방병원 척추관절연구소(하인혁 소장)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이상국 교수 연구팀과 공동 연구를 통해 신바로2의 허리디스크 치료 기전을 규명하고 운동 능력 개선 효과를 입증했다고 3일 밝혔다. 해당 논문은 SCI(E)급 국제학술지 ‘신경학최신연구(Frontiers in Neurology, IF=4.086)’ 3월호에 게재됐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허리디스크(요추추간판탈출증) 환자는 197만 5853명으로 약 200만 명에 육박한다. 이로 인해 현대인의 고질병이라고 불리며 척추전방전위증, 척추관협착증과 함께 3대 척추질환으로 꼽힌다.
허리디스크의 원인으로는 바르지 못한 자세, 외상, 과체중 등이 있다. 이 같은 요인들로 척추에 과도한 부담이 누적될 경우 척추뼈와 뼈 사이에 있는 디스크(추간판)가 손상되거나 탈출하며 염증 및 통증을 유발한다. 이는 보행에 지장을 주는 등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조기에 전문적인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허리디스크에 활용되는 비침습적 치료법으로는 스테로이드를 비롯한 일반 약물과 천연물 약재를 이용한 약침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스테로이드 주사의 경우 반복적으로 맞으면 척추 주변 근육과 인대가 약화되고 감각이 저하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이와 달리 약침은 천연물 한약재 유효성분을 인체에 무해하게 정제한 뒤 사용해 화학 약물보다 부작용이 거의 없다.
특히 두충, 오가피 등을 주요 약재로 하는 약침액 ‘신바로2(SHINBARO2)’는 통증의 원인이 되는 염증을 빠르게 해소하는 효과가 있어 임상에서 활발하게 처방되는 중이다. 실제로 신바로2의 기반이 되는 GCSB-5(청파전)의 근골격계 질환 치료 효과는 다수 연구 논문을 통해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바 있다. 이러한 가운데 자생한방병원 척추관절연구소(하인혁 소장)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이상국 교수 연구팀의 공동 연구 결과가 나왔다.
연구팀은 허리디스크 상태를 유도하기 위해 쥐 꼬리의 디스크에서 분리한 자가수핵을 쥐의 요추 5번 신경근과 가까운 부위에 이식했다. 이어 쥐 그룹을 △정상 집단 △허리디스크 유도 집단 △신바로2 근육투여 집단(2, 10, 20mg/kg) △신바로2 구강투여 집단(20, 200mg/kg) 등으로 나눠 실험을 진행했다.
이후 연구팀은 산화 스트레스와 관련된 신호전달물질인 종양괴사인자-알파(TNF-α)와 인터루킨-베타(IL-1β)의 발현을 분석했다. 산화 스트레스는 활성산소가 체내에 과도하게 누적돼 산화 균형이 무너진 상태를 말하며 염증 반응을 유발한다. 이는 노화와 더불어 근골격계 질환, 신경 손상, 대사증후군 등의 원인이 된다.
실험 결과 허리디스크 유도 후 증가했던 TNF-α와 IL-1β는 신바로2 투여로 발현량이 유의미하게 감소했다. 근육투여 집단과 경구투여 집단 모두 신바로2의 농도가 높아질수록 발현량이 더욱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연구팀은 산화 스트레스를 감소시킴으로써 허리 통증의 원인인 염증을 해소하는 신바로2 의 치료기전이 입증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뿐만 아니라 연구팀은 신바로2가 디스크 퇴행 관련 인자의 발현도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신바로2를 투여한 집단의 ADAMTS-5(A Disintegrin and Metalloproteinase with Thrombospondin Motifs 5) 증감을 살펴본 결과 허리디스크 유도에 의해 증가했다가 신바로2에 농도 의존적으로 감소됐다. ADAMTS-5는 연골을 파괴하는 효소로 디스크 퇴행에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신바로2는 동물 행동실험에서도 운동능력 개선 효과를 보였다. 쥐가 쳇바퀴를 돌게 한 뒤 움직임을 관찰하는 검사를 진행한 결과 신바로2를 근육 및 구강 투여한 지 10일 차부터 뒷발 사용량이 유의미하게 늘어났다. 또한 신바로2를 투여한 농도가 높을수록 운동기능이 더욱 크게 개선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해당 연구를 주도한 자생한방병원 척추관절연구소 홍진영 선임연구원은 “이번 연구를 통해 신바로2의 허리디스크 치료 기전을 최초로 확인할 수 있었다”며 “허리디스크 치료에 있어 천연물 유래 한방치료가 스테로이드와 같은 화학성 약물의 대안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편 자생한방병원 척추관절연구소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과의 지속적인 협력관계를 통해 꾸준히 공동 연구 논문을 발표하며 한의학의 과학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2017년에는 근골격계 질환 치료에 활용되는 한약재 천수근의 항골다공증∙항염증 효과를 입증해 천연물 치료제 개발의 가능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원시의 인간이 언어를 시작했을 때 해, 달, 별, 풀, 불, 숲, 너, 나처럼 한 음절의 말을 툭툭 뱉으며 무엇인가를 가리키기 시작했다. 한 음절로 된 말들에는 대개 인간이 우주와 사물을 처음 대하던 때의 낯섬과 놀라움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 가장 긴급한 것부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저게 뭐지? 그 질문에 응답해야 하는 것.
그런데 결이란 말은 즉흥적으로 생각해내고 단호하게 붙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인간의 시선이 정교해지고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힘이 갖춰지기 시작했을 때 생겼음직한 명사다. 그런데 왜 한 음절일까. 그것도 약간 혀를 굴려 음을 흐르게 하는 듯한 소릿값을 지닌 한 음절. 아마도 이 말은 ‘두 음절 명사 시대’(지금도 여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로 진입한 이후에 무엇인가를 빠뜨린 기분으로 두리번거리다 문득 찾아낸 개념이 아닐까. 찾아낸 뒤 그 본능적이고 본질적이며 생의 원천을 이루는 느낌 때문에 애써 한 음절 시대로 돌아가 딱 한 글자로 언어화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말이다.
원시의 일상 속에서 만난 첫 결은 나무와 파도가 아닐까 싶다. 나무 속에는 무엇인가가 마치 흘러간 듯한 자국들이 켜를 이루며 짜여 있다. 가로로 자르면 나이테가 결을 이루고 세로로 자르면 그 나이테의 원무를 그리며 나아간 무수한 줄들이 결을 이룬다. 나무껍질도 결을 이루며 나무뿌리와 잎들도 스스로의 결을 지니고 있다. 물은 흘러가는 지형이나 출렁이는 양상에 따라 결을 만들어낸다. 물결은 부드럽고 순하고 감미로운 것도 있지만, 때로 성난 감정이라도 있는 것처럼 무섭게 흔들리며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것도 있다.
돌도 결이 있다. 돌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무늬와 금은 단단히 박혀 있는 경우가 많지만 한때는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출렁거렸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돌은 단단하지만 결은 그 속에서도 부드러운 활성(活性)을 드러낸다. 조개 무늬도 결이며 그 결이 옮겨온 자개 무늬도 결이다. 결은 인간이 짓는 공예(工藝)에도 스며들었다. 찰랑이며 흩어지는 비단결이 그것이다. 실오라기가 가지런히 눕는 것도 결이다.
그런데 결은 인간의 삶 속에 깊이 들어오면서 스스로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말이 되었다. 숨결은 숨이 물결치고 무늬지듯 흐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시도 멈출 수 없는 생명의 오롯한 펌프질인 숨은 그 결이 곧 생명이다. 숨결이 부드럽고 고르고 온기가 있으면 잘 살아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위험한 것이다. 죽음을 숨이 졌다고 하는데, 지는 것은 숨결이 꺼지는 것이다.
또 인간은 스스로의 몸을 이루는 살의 결들을 가끔 애틋한 기분으로 내려다본다. 살결은 마치 물결처럼 흘러간다. 언제나 어리고 젊은 살결 그대로 있지 않고, 늘어나고 처지고 물컹해지는 살결로 흘러간다. 생체시계는 이 결 속에도 숨어 있다. 어린 시절의 얼굴과 늙어가는 얼굴을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보며 비교해본 사람이라면, 늙은 얼굴이 들어와 앉은 게 아니라 어린 시절 얼굴의 살결이 흘러내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살결은 수많은 감정을 실어내면서 조금씩 흘러온 것이다.
숨과 몸을 이루는 결에 마음을 두었던 인간은, 마침내 마음에도 결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결이 고운 경우가 있고, 그 결이 부드럽게 흐르고 따뜻하게 물결치는 경우가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음을 알게 된다. 눈으로 뚜렷이 볼 수 있던 결과는 달리, 마음결은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파도치는 결인지라 훨씬 높은 수준의 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린 심청이나 흥부의 착한 마음결을 들어서 알고 있고, 스스로도 가능한 한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결이 고우면 마음도 고와진다고 믿는 ‘결의 신앙’을 갖고 있다. 그 사람은 ‘결’이 다르더라. 이 말보다 더 확실하게 그 사람의 삶과 내면을 규정하는 말이 또 있을까.
결은 묘하게도 ‘겨를’이란 말과 닮아서 가끔 넘나들기도 한다. 겨를은 무엇인가를 하다가 잠시 생각이나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말한다. 틈과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 ‘무심결에’나 ‘얼떨결에’ 같은 말에 쓰이는 결은 겨를을 가리키는 말 같기도 하고, 파도나 흐름의 결을 가리키는 말 같기도 하다. 무심과 같은 결을 타고 가는 것이나 얼떨떨함의 결을 타고 가는 것이나, 모두 그런 묘한 결의 맛이 끼어든다. 바람결이란 말도 바람이 불 때를 가리키는 맛도 있고, 바람의 흐름 자체를 가리키는 느낌도 있다. 또 꿈결도 그런데, 이것은 꿈의 흐름이란 뜻보다 꿈을 꾸던 겨를의 뉘앙스가 조금 더 강하게 느껴진다.
결에는 운동성(運動性)이 있고, 그 운동이 기입되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시간성(時間性)이 있다. 결은 생동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 내면의 잘 제어된 흐름을 말하기도 한다. 결에서 느끼는 의식과 무의식은, 생명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타고난 존재들이 공유하는 깊은 공감일지 모른다. 지속적인 움직임은 삶의 낌새이며 자국이다. 결은 그 꿈틀거림을 직조(織造)해나간 물성(物性)의 긴박하고 또렷한 자취라고도 할 수 있다.
화가 김덕용 선생의 ‘결’로 이룬 작품들을 보면서 몹시 매료되었다. 그 이미지에 매료되었다기보다는, 그 이미지에 흐르고 있는 익숙하고도 정겨운 결에 매료되었다고 말하는 게 옳을지 모른다. 어린 시절 늘 보고 자랐던 장농이나 화장대의 무늬들, 대청의 천장과 벽에 드러나 있던 무늬들. 그 결의 흐름을 한동안 잊어버린 듯했는데, 그림들이 마치 무의식처럼 형상의 안으로 흐르게 해놓았다.
그 결이 형상을 이룬 것도 아니다. 형상이 마치 스스로 결을 지닌 것처럼 얼비칠 뿐이다. 나무의 질감이 형상을 품고 있는 서늘하고 우묵한 기분이 나를 황홀하게 했다. 결이 왜 이토록 마음을 상기시키며 안정시키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결들과 우리의 목숨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왜 우리는 결에서 비로소 안심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알 수 없음이 일으키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 내 안에 흐르는 결, 내 눈앞에 늘 흐르던 결을 복원시켜주고 복각시켜준 어느 예술의 원형적 통찰. 신비란 신의 비밀이라고 한 사람은 다석 류영모였다. 신비는 도처에, 아니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이미 저절로 다 들어 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유종순 시인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40년 만에 편지라는 것을 써봅니다. 젊은 시절 교도소에서 부모님께 올렸던 불효자의 안부편지 외에는 여태껏 편지라곤 써본 적이 없습니다. 고민 끝에 오늘 그대에게 편지를 쓰기로 하였습니다. 40년 전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부모님이었다면 지금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그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편지는 깊은 병마와 싸우고 있는 그대에게, 그래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그대에게 아마 배달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대에게 위로와 격려와 감사의 편지를 쓰겠습니다. 동가숙 서가식하던 가난한 운동권 시인을 지아비로 삼아 수십 년 동안 사랑과 헌신으로 보듬어주어서 고맙다고,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아픈 몸, 아픈 마음 잘 추스르면서 여기까지 잘 견뎌왔다고 말입니다. 돌이켜보니 그동안 그대가 손놓아버린 집안일,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핑계 삼아 아픈 그대에게 따스한 위로의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넨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씩 나는 약에 취해 깊이 잠든 그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떠올립니다. 그대가 마치 마녀가 준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잠이 든 공주처럼 느껴집니다. 동화 속 공주는 백마 탄 왕자의 입맞춤에 깨어났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대를 잠 속에서 구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백마 탄 왕자를 흉내 내며 입맞춤 대신 그대가 좋아하는 ‘체 게바라 평전’이나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몇 구절을 읽어주거나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이상국 선생의 시 ‘혜화역 4번 출구’를 읊어주곤 합니다. 훌훌 털고 어서 빨리 일어나라고요. 그러나 깊은 잠에 빠진 공주는 왕자의 기대를 저버리고 깨어나지 못합니다. 동화는 동화이고 현실은 현실인가봅니다. 마음이 많이 아프고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가 만나 서로 사랑한 날들과 우리가 함께 세상을 향해 걸어갔던 날들을 추억하곤 합니다.
그대와 나는 추운 겨울 삼전동 반지하 자취방을 선점한 처제를 피해 골목에 주차된 남의 봉고에 들어가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녹이면서 밤을 지새웠지요. 경기도 수동이었던가요, 단체수련회 때는 새벽에 몰래 둘이 빠져나와 뜨거운 입맞춤을 하기도 했고요. 또 최루탄 가스 뒤덮인 저 80년대의 광화문과 종로 거리를 우리는 손을 잡고 백골단을 피해 내달리기도 했지요. 그리고 우리의 두 아이를 얻은 그날, 정말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그 감동은 절대로 잊을 수 없어요. 추억하다 보면 고마운 사람은 지금 아픈 그대를 돌보고 있는 내가 아니라, 나의 모자람을 채워주고 보듬어준 바로 그대라는 것을 깨닫게 돼요. 그대의 사랑과 헌신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존재할 수 있게 한 힘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참으로 그대에게 감사드려요.
그대와 함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함께 가꾸어야 할 삶에 대한 꿈을 꾸던 그 시절로 말입니다. 돌아보니 그대와 나 참 많이 변했습니다. 나는 세상과의 투쟁을 피해 이리 숨고 저리 피하면서 사는 동안 어느덧 경멸스러운 꼰대가 되어버렸고, 그대는 게으른 병자가 되어 자기 안에 갇힌 채 세상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 초심을 잃은 것이지요. 내가 잠든 그대에게 체 게바라와 조나단 리빙스턴을 읽어주는 것은 다시 좋은 꿈 꾸자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대, 기억하나요?
우리의 꿈과 이상은 무엇이었는지, 꿈과 이상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주었으며,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기억하나요. 꿈을 꾸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었는지 기억하나요. 그래요. 꿈은 우리를 희망으로 이끄는 힘이었지요.
꿈이 있기에 사람들은 어제의 절망과 고단을 이겨내고 내일의 희망을 향해 전진할 수 있지요. 그러나 꿈만으로는 희망을 이룰 수 없어요. 좋은 꿈에 걸맞은 부단한 노력과 실천이 있을 때 꿈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요. 그래서 꿈과 희망을 이루려면 정말로 간절한 염원과 함께 부단한 노력과 실천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꿈과 희망을 꿋꿋하게 사랑해야만 해요. 그래야 열악하고 왜소한 현실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지켜낼 수 있어요.
이제 훌훌 털고 일어나요, 그대.
나는 항상 그대 옆에 있을 테니, 어서 일어나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꿈은 다시 꿀 수 있어요.
유종순 시인
시인, 문화평론가. 1987년 무크지 ‘문학과 역사’, 1988년 ‘창작과 비평’ 복간호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한국작가회의 평화통일위원장, 이사, 인터넷저널 대표이사 등 역임. 마로니에시낭송회 회장. 시집 ‘고척동의 밤’, 저항음악평론집 ‘노래, 세상을 바꾸다’가 있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이빈섬 시인이 작고하신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날 나는 휴대폰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었지요.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던 곳은, 분재목(盆栽木)을 경매하는 인터넷 사이트였습니다. 마음에 드는 매화나무 몇 개를 찾아 비딩(bidding)해놓고 수시로 응찰하는 경쟁자들과 가격 경합을 벌이고 있었죠. 저녁답부터 시작했는데 자정 무렵까지 계속됐습니다. 막판엔 응찰 속도도 빨라져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죠. 문득 엉덩이 쪽이 배겨서 자세를 바꿔 앉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전까지 끊임없이 들려오던 잔기침 소리가 멎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내가 앉아 있었던 곳은 병상 옆 의자였고, 어느새 아버지는 상체를 일으켜 앉아 계셨지요. 어둑한 자리에서 희끄무레한 벽을 응시한 채 나무토막처럼 움직임이 없었죠. “아버지, 잠이 깨셨어요?” 막, 잘생긴 매화나무 한 그루가 내 것이 되기 직전이었는지라, 건성으로 말을 건넸습니다. “그래.” 아버지는 나직이 대답했죠.
“혹시 화장실 가고 싶으셔요?” 링거 줄들이 어른거리는 쪽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니다, 아니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시는 그 얼굴을 흘깃 본 뒤, 내 눈은 급히 휴대폰 모니터로 향했고 나는 버들처럼 늘어지는 수양매화 한 그루를 낙찰받았습니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건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아내와 교대를 하고 집에서 쉬고 있다가 화장실을 다녀오던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전화를 받았죠. 호흡곤란이 왔는데, 병원에서는 막힌 식도(食道)를 넓히려 넣은 스텐트(stent)가 뒤쪽 기도(氣道)를 압박해 숨 쉬는 통로가 좁아진 탓이라고 설명하더군요. 음식이 들어가는 길과 공기가 드나드는 길이 하나의 벽을 두고 그렇게 뚫려 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투명 주머니와 연결된 비닐 줄들을 달고 의식도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더군요. “너무 걱정 마십시오. 며칠 지나면 호전될 거예요. 그 뒤엔 다시 병실로 올라갈 수 있어요.”
그러나 며칠 뒤 의사도 당황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호흡기를 뗐는데 갑작스럽게 숨이 꺼져버리고 만 거죠. 인턴들이 미친 듯이 아버지의 가슴을 눌러댔지만 호흡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숨지다’라는 말이, 얼마나 사무치는 말인지,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생전의 어머니(아버지에 이어 몇 달 뒤 어머니도 돌아가셨죠)는 아버지에게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요. “아이고, 우리 영감. 작은아들 때문에 이때껏 사는 건 줄 아쇼.” 그때 어머니 눈앞엔 8년 전의 일이 스쳐지나갔을 겁니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식도암 판정을 받았다며, 서울의 큰 병원을 알아보라며 숨넘어갈 듯 내게 전화하신 어머니. ‘평생 웬수’라며 끌탕하던 평소와는 달리, 몹시 떨리는 음성이었죠. 그해 말 아동댁네(어머니의 택호(宅號)) 식구들이 동해안 포구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행여 아버지가 우리와 좋은 한때도 없이 훌쩍 가실까봐 걱정한 형의 제안으로 급조한 행사였지요.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당신이 암인 걸 모르셨기에, 얘들이 갑자기 왜 이러나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온 가족이 모인 것이 그저 좋아서 연신 껄껄 웃으셨고… 아버지 웃음에 어머니는 슬쩍슬쩍 고개를 돌려 눈시울을 닦아내셨습니다. “천지를 모르는 영감 같으니라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시면서요.
당신도 모르는 이별여행을 하고 온 뒤, 놀랍게도 아버지의 식도암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최신 기술이 좋았나봅니다. 엑스레이 치료로 암종(癌腫)을 태워 없애는 데 성공한 것이죠. 서울에서 병원생활을 마치고 경주로 귀향한 아버지는 다시 게이트볼장으로 나가셨고, 날마다 막걸리에 불콰해진 얼굴로 귀가하시곤 했죠. 그렇게 6년 여 동안 평화로운 시절이 흘러갔습니다. 그 뒤의 상황은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하니 그만 떠오르고 마네요. 어느 날 아버지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식도가 막혀 일주일가량 음식을 삼킬 수 없었기 때문이죠. 서울역에서 뼈만 남은 손을 쥐었습니다. 마른 하회탈 같은 얼굴로 아버지는 웃고 있었지만, 둔한 내 마음에도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죠. 그날 저녁, 우리 집에서 아무리 씹고 꿀꺽여도 삼켜지지 않는 음식 한 숟가락을 식도 저 안쪽으로 밀어 넣기 위해 아파트 복도를 몇 차례나 왔다 갔다 하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내려가지 않는 음식을 끝내 뱉어내며 미안해하시던 그 얼굴. 옆에 앉은 자식은 아무 말도 건넬 수 없었습니다. 이후 실낱같은 희망과 대못 같은 절망이 교차한 뒤 경황도 없이 아버지를 보냈습니다.
그날 밤, 매화를 구하려 그토록 경매에 열중했던 내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생각해봅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아버지를 외면하려, 꽃 피는 생명을 희구한 엉뚱한 입덧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때 사들인 매화는 그 겨울을 넘기고 해사한 흰 꽃을 피웠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찬란한 봄날에 다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는 영천 국립묘지의 작은 분(盆)에 든 채, 생전의 속 좋은 그 웃음을 흩고 계셨지요. 매화는 다시 피지만 사람은 다시 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토록 아프게 깨달으라고…. 그날 나는 왜 실없는 해찰을 하며 어둠 속 아버지 얼굴을 한 번 더 살펴보지 못했을까요.
막 군대를 다녀온 막내아들이 어쩐지 버거운 느낌이 들 때, 내게 그토록 과묵하게 대했던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며느리보다도 더 어색해했던 아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무거운 공기가 있었습니다. 뭐랄까, 우리는 어느 날부터 서로의 마음을 불러낼 화제(話題)의 실마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죠. 오래전 아버지의 인생 실패를 굳이 꺼낼 생각은 없습니다. 그 때문에 늘그막에 어머니에게 죄지은 사람으로 사죄하듯 사신 것도 압니다. 먹고사는 일보다 고통스러웠던 건, 주변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시선의 납덩이같은 무게였습니다.
얼마 전 벌초를 갔을 때, 주위를 떠나지 않던 호랑나비 한 마리를 생각합니다. 나비는 사람의 영혼을 품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그날 어쩐지 아버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이승의 모든 것 다 내려놓으셨을까요. 나비처럼 가벼이, 또 다른 시간의 허공을 나붓나붓 날고 계신 걸까요. 아닙니다. 아버진 아무래도 여기 계신 듯합니다. 내 안에 말입니다. 여기 내가 있다는 것. 이것이 나비보다 더한 아버지의 화현(化顯)이 아닐는지요. 내년 봄날 매화꽃 피는 날, 호랑나비로 다시 오셔도 좋습니다.
이빈섬 시인
1961년 경북 경주 태생, 본명은 이상국이며, ‘이빈섬’이라는 필명으로 등단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기자를 지낸 언론인이자 시인, 스토리텔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옛사람들의 걷기’, ‘눈물이 빗물처럼’, ‘추사에 미치다’ 등이 있다.
어머니, 대추꽃이 여물고 원추리꽃이 피었어요.
그간 잘 계셨는지요.
지난해 추석 지나 애들이 집을 장만했다고 해서 보고도 할 겸 찾아뵙고는 꽤 여러 달이 지났어요. 그때 선산에는 검불이 내렸고 큰 소나무 가지에서 부엉이가 귀를 쫑긋거리며 내려다보고 있었지요.
두 분이 생전 그렇게 불화했는데 나란히 누워 산천을 바라보고 계시는 걸 보면 많은 생각이 나지요. 끌끌한 아들을 삼형제나 두었고 전답도 있었고 당시 농가치고는 제법 큰 언덕배기 집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며 살았는데 두 분은 무엇 때문에 열흘이 멀다 하고 큰 소리를 냈는지요.
싸움이랬자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트집을 잡고 당신은 대꾸를 좀 하시다가 심상치 않으면 옆집으로 피해 가시고는 했는데, 그럴 때면 엄습해오는 불안으로 제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지요. 심한 날은 물 사발이 날아가고 밥상이 엎어지기도 했지요. 대개 싸움은 저녁에 시작되었는데 아버지의 언성이 높아지면 형들은 슬그머니 숟가락을 놓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저만 남았지요. 저는 늘 두 분 사이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는 했지요. 유사시 어머니를 보호해야 했으니까요. 아버지의 재떨이를 씻어온다든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물을 떠다 드리는 등 어떻게든 아버지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쓰곤 했지요.
손찌검이라도 당하신 날 저녁에는 혹시 어머니가 저를 버리고 집을 나갈까봐 마루 끝에 앉아서 부엌일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리곤 했지요. 막무가내로 밀려오는 졸음에 벽에다 머리를 찧기도 했는데 그런 나를 마구간의 소가 푸우푸우 하품을 하며 건너다보곤 했지요. 어떤 날은 어머니의 치마끈을 손목에 감고 잤는데 당신은 그런 저를 꼭 안아주곤 했지요. 당신도 기억하시겠지만 제가 한참 커서도 당신 젖을 만지며 자는 버릇이 있었지요. 어머니는 한창 바쁜 가을거두미할 때 낳아 젖을 충분히 못 먹여서 그렇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당신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애착이자 막내의 권리 같은 것이기도 했지요.
어려서는 아버지가 죽어버리거나 집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형들에 대한 원망도 대단했지요. 두 분이 싸우거나 말거나 저만 남겨두고 사라져버렸다가 아침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대하는 형들이 얼마나 미웠던지요. 그러나 열 살 위인 큰형과 덩달아 한패가 된 작은형은 그게 별일 아닌 두 분의 일상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겠지요.
사서를 읽고 주역까지 공부해 근동에서는 유식자로 소문난 아버지가 당신을 왜 그렇게 못살게 굴었을까요? 아버지는 늘 당신을 소처럼 미련하다고 했는데 일테면 붓끝처럼 예민한 아버지와 일자무식인 당신 사이에 요즘 말로 하자면 소통이 안 되었던 걸까요? 아니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래서 당신은 늘 이런 말씀을 했지요. “난 죽어도 경주 이 씨네 산엔 안 간다. 똑때기 들어두거라” 하고 당부하셨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지켜드리지 못했고 그런 일로 훗날 저는 ‘성묘’라는 시를 쓴 적이 있어요.
야덜아 내 죽거든 태워서 물치 바다에나 뿌려다오.
어머니는 살아생전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선산이 수만 평이나 있고 아들자식이 이름 석 자는 쓰고 사는 집에서 될 법이나 한 일이냐고 감동골 솔밭 속의 아버지와 합장을 해드렸습니다.
30촉짜리 전등이나 하나 넣어드릴걸,
평생 어두운 집에서 사시던 분들.
그때는 스님들 아니면 화장도 안 할 때였는데 아무튼 아버지와는 무덤 속에서라도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말씀인 줄은 알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죽고 없는 사람의 말을 누가 들어주겠습니까.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두 분 다 돌아가시고도 아버지를 미워했던 감정은 오래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시기에 이르러 제 시 속에 당신의 이야기는 여러 번 나오는데 아버지 이야기는 한 번도 안 했다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저도 아이들을 낳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의 삶과 인생에 대한 슬픔과 고통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죄송하고 미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 후로는 일부러라도 작품 속에서 아버지를 만나곤 했지요.
제가 어머니에게 제일 죄송한 것은 결혼을 늦게 한 것이지요. 제가 방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면 늘 환쟁이 하면 비렁뱅이 된다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환쟁이와 유사한 글쟁이가 되어 오래도록 동가식서가숙했지요. 정처를 못 얻고 어쩌다 집에 들르면 “야야, 돈 아껴서 장가가라” 하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술이 점점 맛있다고 말벌처럼 웅웅거리곤 했지요. 저는 당신이 세상 버리고 10년도 더 지나 아주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어요. 당신의 막내며느리가 된 제 아내는 시부모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결혼을 한 셈이지요. 그리고 애들이 태어나고 친가나 처가의 왕래가 있을 때마다 제게 있어야 할 커다란 배후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곤 했지요. 그리고 결혼이든 뭐든 인생이 거쳐야 할 과정에 있어서 정상이 아닌 것은 많은 비정상을 낳는다는 것을 생각하곤 했지요.
그리운 어머니. 그동안 남의 나라를 다녀보기도 하고 하늘같이 높은 집에서 살아도 보고 맛있는 것들을 먹어보기도 했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든 저는 아직 당신 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때 먹은 음식보다 맛있는 음식도 없었고 어머니가 깔아주던 이부자리의 포근함, 그때 맡은 어머니 냄새보다 더 좋은 냄새도 없었어요.
이제 편지를 마쳐야 해요, 어머니. 아무도 없는 산중에 같이 계시는 세월이 얼만데 이제는 아버지가 뭐라 하시든 아무 대꾸도 하지 마시고 불쌍하게 여기셔요. 남자가 늙고 힘 빠지면 갈 데가 어디 있겠어요. 딸애가 결혼하면 모두 데리고 뵈러 갈게요. 편히 계셔요.
이상국(李相國)시인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뿔을 적시며’, ‘달은 아직 그 달이다’ 등이 있다.
박세리가 1998년 ‘맨발 투혼’을 발휘한 US 여자 오픈 우승을 비롯해 4승을 올리는 장면을 TV로 보고 골퍼의 꿈을 키운 박세리 키즈들은 2016년 현재 미국 여자 프로골프투어를 휩쓸고 있다.
오는 8월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에서 112년 만에 올림픽 무대로 돌아오는 골프 종목에서는 세계 랭킹 15위 안에 드는 선수는 한 나라에서 최다 4명까지 출전할 수 있다. 한국은 이변이 없는 한 여자부 4명의 출전이 확실시되고 있고 유력한 금메달 후보국이다. 박세리가 일궈 놓은 성과다.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금메달리스트 김연아의 뒤를 잇는 김연아 키즈들은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겠지만 현재 초등학교 5, 6학년들인 임은수(12, 서울 응봉초) 김예림(12, 군포 양정초) 유영(11, 과천 문원초) 등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성장할 가능성이 꽤 크다. 이들은 대체로 김연아의 초등학교 시절 기술 수준에 올라 있고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서 기량을 꽃피울 나이가 된다. 최근에는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로 이세돌 키즈들이 나올 터전이 마련됐다. 그런데 40여년 전에도 ○○○ 키즈가 있었다. 이제 그 ○○○을 찾아서 시간 여행을 떠나 보자.
‘이에리사 키즈’ 붐
1973년 한국 스포츠를 화려하게 장식한 건 여자 탁구였다. 1967년 여자 농구에 이어 한국은 여성을 앞세워 세계 무대에 다시 한 번 ‘스포츠 코리아’를 알렸다.
1973년 제 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4월 5일부터 15일까지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60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열렸다. 한국은 김창원 대한탁구협회 회장을 단장으로 총감독 이경호, 남자 코치 김창제, 여자 코치 천영석으로 코칭스태프를 구성했다. 남자 선수로는 홍종현 최승국 김은태 강문수 이상국이, 여자 선수로는 정현숙 이에리사 박미라 나인숙 김순옥이 출전했다.
여자 단체전은 예선 리그를 펼친 뒤 예선 A, B조를 통과한 4개국이 예선 전적을 안고 돌려 붙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B조에 속한 한국은 이에리사와 정현숙을 단식, 이에리사와 박미라를 복식에 기용하는 전략으로 스웨덴, 유고슬라비아, 서독을 잇따라 3-0으로 완파한 뒤 중국과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이게 됐다. 한국은 1, 2번 단식에서 이에리사와 정현숙이 중국의 정후아잉과 후유란을 각각 2-1로 꺾으며 기선을 제압했다. 한국은 3번 복식에서 이에리사-박미라 조가 중국의 정후아잉-장리 조에게 0-2로 졌으나 4번 단식에서 이에리사가 이 대회 단식 챔피언인 후유란을 2-0(21-15 21-18)으로 눌러 우승으로 가는 최대 고비를 넘었다.
결승 리그에서 한국은 헝가리와 일본을 각각 3-1로 물리치고 예선 리그를 포함해 8전 전승으로 세계 여자 탁구 정상에 올랐다. 1956년 제23회 도쿄대회에 처음 출전한 이후 17년 만에 거둔 값진 성과였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여자 단체전 우승 외에 여자 단식에서 박미라가 3위를 차지했다.
여자 탁구가 중국을 누르고 세계 정상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방방곡곡 탁구장은 탁구를 치려는 청소년들로 넘쳐 났다. 글쓴이가 살던 서울 변두리 동네에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가장 목이 좋은 네거리 빌딩 2층에 탁구장이 있었다.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 한복판 광화문에 ‘고려탁구장’이 있었는데 점심 시간에는 가볍게 땀을 흘리려는 직장인들로 빈 탁구대가 없었다.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우승의 주역 ‘이에리사 키즈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리사가 처음 라켓을 손에 잡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3남 5녀 가운데 일곱째인 이에리사는 일찌감치 뛰어난 탁구 실력을 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국선수권대회 초등부 우승을 차지하더니 충남 홍성여중 1학년 때 참가한 전국종별대회에서도 눈에 띄는 플레이를 펼쳤다. 서울 문영여중 손병수 코치는 이에리사를 눈여겨보고 서울로 전학을 권유했다. 아버지 이승규 씨는 딸의 서울행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곧 허락했다. 이에리사는 중학교 3학년 때인 1969년, 언니와 오빠가 있는 서울로 전학해 본격적으로 탁구를 시작했다. 언니가 싸다 준 점심, 저녁 도시락을 먹으면서 수업이 끝난 뒤 하루 6시간 강훈련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그해 5월 이에리사는 전국학생종별대회 개인전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그해 11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23회 전국남녀종합선수권대회에서 일어났다. 이에리사는 학생부에서 일찌감치 우승하더니 일반부에서도 연승 행진을 이어 갔다. 결승 상대는 베테랑 김인옥(한일은행)이었다. 두 선수는 경기 내내 접전을 펼쳤다. 이에리사는 1-1로 맞선 3세트에서 21-19로 이겨 세트 스코어 2-1로 승리했다. 15세 소녀가 자신보다 7, 8세 많은 선배들을 모두 누르고 종합선수권을 차지하자 탁구계는 발칵 뒤집혔다. 학생부에서 우승한 뒤 바로 다음 날 일반부에서 우승했으니 더욱 그럴 만했다.
탁구 올드 팬들은 기억하겠지만 이에리사의 플레이 스타일은 남자 선수로 보면 한참 후배인 김택수와 비슷했다. 여자 선수라고는 믿기 어려운 강력한 드라이브를 구사했다. 지금이야 드라이브가 일반적이지만 당시 여자 선수가 힘 있는 드라이브를 구사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었다. 이에리사는 드라이브를 앞세운 공격적인 탁구로 국내 무대를 휩쓸었다. 국내 선수권자가 된 이듬해인 1970년 국내 대회 7관왕에 오른 데 이어 국제 무대에서도 맹활약했다. 제10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주니어부 단식 우승을 차지했고 단체전 우승을 이끌었다. 어느새 이에리사는 한국 여자 탁구의 미래를 상징하게 됐다. 그리고 불과 3년 뒤 이에리사는 한국 여자 탁구를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어린 나이에 정상에 오른 뒤 쉽게 무너지는 선수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이에리사는 세계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우승한 뒤에도 국내 최강자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국내 최고 권위의 탁구 대회인 종합선수권대회에서 7연속 우승했다. 이에리사의 7연속 우승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국가대표선수로도 꾸준히 활약했다. 1975년 캘커타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단체전 준우승을 이끌었고 1976년에는 서독오픈에서 개인전 우승을 차지했다.
탁구인 이에리사가 위대한 까닭은 1973년 대회 이후 한국 선수가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 14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87년 제39회 뉴델리 대회에서 양영자-현정화 조가 여자 복식 정상에 오르면서 한국 여자 탁구의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 흐름이 이어졌다.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 단일팀 ‘코리아’가 여자 단체전에서 우승하기까지는 18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에리사는 남북 여자 탁구 선수들 모두에게 '우리도 세계 정상에 설 수 있다‘는 희망을 밝힌 대선배였다.
2003년 용인대학교 교수로 임용된 것을 시작으로 2005년 여성 스포츠인으로는 처음으로 태릉선수촌장을 맡았고 2014년에는 역시 한국 여성 체육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시아경기대회(인천) 선수촌장을 지냈다. 이에리사는 제19대 국회의원까지, 여성 체육인으로서 최초 기록을 여럿 갖고 있다.
탁구, 전국민이 열광한 생활스포츠
탁구만큼 국민들에게 친근한 스포츠가 있을까. 1973년 여자 단체전에서 세계 정상에 오르며 전국적으로 탁구 열풍이 일더니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탁구로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너도나도 탁구장으로 가거나 틈만 나면 드라이브를 하는 폼을 잡기도 했다. 서울 아시아경기대회가 초반의 열기를 뿜고 있던 1986년 9월 24일 서울대 체육관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탁구 남자 단체전 결승이 벌어졌다.
한국은 첫 두 단식에서 안재형(뒷날 중국 탁구 선수 자오즈민과 한중 수교 전에 결혼)과 김완이 천신화와 후이준을 나란히 2-0으로 꺾고 앞서 나가기 시작하더니 내처 4-1까지 리드를 이어 갔다. 그러나 6번 단식부터 내리 3게임을 내줘 게임 스코어 4-4로 역전 위기에 몰렸다. 9번 단식에서 후이준과 맞선 안재형은 첫 세트를 듀스 접전 끝에 25-23으로 딴 뒤 세트스코어 2-1로 이겼다. 한국은 4시간 30분이 넘는 대혈투 끝에 세계 최강 중국을 무너뜨렸다. 중국은 1985년 현재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단체전에서 3연속 우승을 포함해 통산 10번의 우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여자 단체전에서는 중국을 꺾었지만 남자 단체전에서 중국을 물리치리라고 내다본 이는 거의 없었다. 서울대 체육관은 열광의 도가니였고 숨 막히는 접전 끝에 세계 최강 중국을 꺾는 장면을 TV로 지켜본 국민들은 환호 또 환호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탁구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연 지 62년 만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서울 올림픽 여자 복식에서 양영자-현정화 조는 중국의 자오즈민-천징 조를 2-1로 꺾고 올림픽 여자 복식 초대 챔피언이 됐다. 남자 단식에서는 유남규가 김기택을 3-1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다시 한 번 전국적으로 탁구 열풍이 불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이재준(아호 송유재)
꼭 42년 전 이맘때, 설악산 장군봉의 금강굴에서 홀로 7일을 지낸 일이 있었다. 군 제대 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깊은 생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마등령을 오르내리며, 세찬 바람에 스쳐지나가는 운해(雲海)의 그림자 밑에 누워 마음을 비우려 안간힘을 다했다. 새벽마다 비선대까지 내려가 찬물에 얼굴을 담그고, 그 물빛만큼이나 맑디맑은 푸른 영혼을 꿈꾸기도 했다.
옛 선승(禪僧)들은 면벽(面壁) 십년으로 화두를 풀었다는데, 고작 이레 만에 어떤 경지에 이를 수는 없었으나 나름 마음 정리를 하기는 했다.
산을 바라보면 가까운 풍경에서 먼 정경까지 끊길 듯 이어지는 아스라한 능선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사계절 어느 때라도 아득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온해진다. 거친 심성이 순치(馴致)되고 아픔의 멍울이 서서히 풀린다. 산으로 들어가 한 발 두 발 걸어보면 걸음이 가뿐하고 머릿속이 맑아진다. 교만과 오만함을 내려놓게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자(賢者)들은 산 속에 머물며 인격을 도야(陶冶)해 왔다.
그래서 산 그림도 늘 인기가 좋다. 좁은 실내 그 어느 곳에다 산 그림을 걸어도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 마음이 열린다.
박고석(1917~2002) 화백은 산의 화가라 일컫는다. 우리나라 서양화의 1세대 작가로, 일본대학 예술학부 미술과에 입학한 1935년 무렵의 일본 화단은 이전의 아카데미즘에 반하는 새로운 양식이 물밀 듯 밀려와 구상파,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파, 추상파등 신사조에 빠르게 젖어들었다.
박고석은 1940년 대학 동창으로 구성된 격조전(格調展)으로 화단에 데뷔했다. 1943년 동경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8·15해방과 6·25 등 역사의 격랑을 그림과 함께 건너왔다. 1960년대에는 짧은 시기 추상에 머물기도 했으나 회화 작업에 회의를 느끼고 한동안 화필을 놓기도 했다. 1967년 창립된 구상전(具象展)을 통해 화단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산행을 하며 산 그림을 그렸다. 1974년 공간화랑의 개인전에서 산 그림 연작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화가의 산 그림은 여느 산 그림과 다른 특색이 있다. 화가 스스로 산으로 들어가서 깊은 산행을 하며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가벼운 스케치나 유채의 짙은 작품 모두 산중에서 완성된다. 산행도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 전문 산악인에 준하는 장비로 암벽 등반까지 했으며, 수년간 설악산에 거주하며 실경(實景)의 산 그림을 그렸다. 설악산에서 남녘 홍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산들을 화폭에 담았다.
지리산 자락 ‘쌍계사 가는 길’의 벚꽃으로 짓이겨진 유화도 가히 이 작가만의 명작이라고 누구든 손꼽고 있다. 이 화가의 산 그림은 대부분 20호(72.7cmx60.6cm) 이하의 비교적 작은 화폭이지만 그림 앞에 서면 그 밀도 높은 구도와, 두터운 마티에르로 그려낸 산봉우리, 그리고 거대한 암반의 질감이 입체적, 구체적으로 다가선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작가는 산에 밀착하던 치열한 화풍을 벗어나 물감의 칠이 서서히 엷어지면서 그윽이 바라보는 시선의 폭이 넓어진다. 직접 산을 오르지 못하더라도 산자락에 화구를 펴고 관조(觀照)의 마음을 담뿍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 ‘북한산’은 그 무렵의 작품이다. 그림 수집가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박고석의 그림은 경매나 화랑가에 유통되는 숫자가 아주 적어서 수집 기회도 적고 또 그림을 만나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10호 산 그림 3000만~4000만원) 망설여진다. 몇 년간 돈을 모아오다 이 그림을 사고 말았다.
이상국(1947~2014) 화가의 산 그림은 구상을 벗어난 반추상의 작품들이 주조를 이룬다. “1980년대까지 나는 그림을 집짓기처럼 구축해가는 과정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최근 작품들, 특히 풍경화는 해체되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어요. 철거된 산동네 그림도 그런 식이지요. 그런 해체 과정에서 가슴 아픈 느낌과 동시에 어떤 새로운 에너지, 기(氣)를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서울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으나 졸업 후 서양화로 화풍이 바뀌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무당이 칼 위에 선 것같이 긴장된 일이다.”라고 마음을 다잡던 화가였다. 2011년 3월 11일부터 4월 3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렸던 그의 열두 번째 개인전이자 대학 졸업 40년간의 회고전은 이상국의 작품세계를 남김없이 펼쳐 보였다. 북한산, 인왕산, 홍제동의 달동네 등 서울 변두리 산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독특한 화풍의 그림을 남겼다. 7~8년의 암 투병 중에도 생의 마지막까지 화실을 지키며 그림을 그렸다.
나는 일찍이 ‘미술평론가 10인이 추천한 유망주’에 이상국을 ‘한국적인 것, 그 전통의 계승에 그는 내면을 파고 들어가 그 본성을 파악하려 한다. 요컨대 이상국은 박수근이나 이중섭이 걸어간 그 길을 걷고 있는 드문 작가의 한 사람이다.’라고 추천한 바 있다.
이 그림 ‘인왕산’은 겨울날 눈이 소복이 내린 정경을 그린 구상에 가까운 관념 풍경화에 속한다. 서울의 서촌 일대를 산책하다가 사간동의 단골 화랑에서 눈에 띄어 외상으로 구입한 작품이다. 평소 이 화가의 전시를 봐 왔고, 목판화를 구입한 바도 있어서 쉽게 결정하였다. 아내와 함께 택시에 싣고 와 거실에 놓고 몇 주 동안 눈 맞춤을 하였다. 가족 모두의 공동 감상평으로 눈 내린 삭막한 인왕산인데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포근하게 차오른다고 하였다. 바위틈마다 하나하나 눈을 얹으며 화가는 무슨 상념에 빠졌을까.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현실로 귀환하고 싶었다. 정말 나 자신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표현하고 싶었고, 울고 싶도록 깊숙이 파고드는 외로움을 그리고 싶었다.” 어느 미술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이 화가의 말이다.
두 해 전 3박 4일의 일정으로 옛 친구와 둘이서 지리산 종주(縱走)를 한 적이 있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거쳐 증산리로 하산하는 약 35km의 코스를 하염없이 걸었다. 눅진한 안개가 몸을 무겁게 하고, 갑자기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쳐도 묵묵히 걸어야만 했다. 날이 저물자 언제 그랬냐는 듯 둥근 달이 떠오르고, 달그림자에 휘감긴 산봉우리의 장중한 숨결이 피곤한 몸을 어루만졌다.
한 알의 풀씨도 소중히 키우고, 거친 눈보라 폭풍도 기꺼이 안으며, 언제나 그 자리에 의연한 산이 있기에 우리들은 산을 오른다. 비틀린 몸과 마음으로도 산문(山門)에 들어 한 발짝 두 발짝 발을 옮기며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볼 일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1960년대 서울운동장(뒷날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에 드나들던 중·장년 야구 팬들은 3루수와 유격수 등 내야수들의 송구를 코끼리가 비스킷을 넙죽넙죽 받아 먹듯 하던 한일은행(우리은행 전신) 1루수를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그때도 몸무게가 ‘0.1t’을 넘었던, 덩치 큰 이 선수가 뒷날 한국 프로 야구에서 당분간 깨지기 힘든 ‘한국시리즈 V10’을 거두는 지도자가 되리라고 내다본 야구 팬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김응룡(金應龍)은 20세기 초 이 땅에 야구가 들어온 이후 배출된 수많은 야구인 가운데 가장 명예로운 이력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추어 때는 선수로서 아시아선수권대회 정상에 올랐고 지도자로는 세계 규모 대회에서 한국을 처음으로 정상에 올려놓았다. 1960년대에 벌어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는 한국이 출전하는, 타이틀이 걸린 유일한 국제 대회였기에 스포츠 팬들에게는 지난해 11월 한국이 초대 챔피언이 된 프리미어 12나 2006년 4강, 2009년 준우승에 빛나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 그리고 올림픽(2000년 시드니 대회 동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 금메달)에 못지않은 관심을 모았다.
프로에서는 해태 타이거즈(9차례)와 삼성 라이온즈(1차례) 사령탑을 맡아 한국시리즈 10차례 우승의 놀라운 기록을 세웠으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프로와 아마추어 혼성 대표팀을 이끌고 출전해 동메달을 차지했다. 그라운드에서 물러난 뒤 경기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프로 야구단 사장에 올랐다. 야구인 김응룡은 지난날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든 영광스러운 길을 걸었다.
김응룡은 1939년 음력 3월 1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대부분의 프로필에는 1941년 9월 15일로 돼 있다. 지난해 음력 3월 1일은 양력 4월 19일, 일요일이었다. 평생 야구에 파묻혀 살아온 그는 자신의 생일조차 챙겨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지난해 생일은 달랐다. 감격할 만한 일이 있었다.
생일 하루 뒤인 4월 20일 낮 12시께,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 선동열 전 KIA 타이거즈 감독을 비롯한 ‘해태 왕조’의 주역들이 스승인 김응룡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는 김응룡을 행정적으로 보좌해 V9 신화를 이룬 이상국 전 해태 단장(전 KBO 사무총장)도 함께했다. 자리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선동열 등 제자들에겐 ‘영원한 우리들의 감독’일 수밖에 없는 스승 김응룡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김응룡은 이 자리에서 “이런 생일 자리를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다. 해마다 (4월이면) 시즌에 들어가 있어 (생일이) 며칠 지난 뒤 집으로 가 식구들과 늦은 생일 밥상을 받은 게 고작이었다”면서 제자들의 성의에 거듭 고마워했다.
김응룡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발발한 한국전쟁 여파로 아버지 손에 끌려 남쪽으로 왔다. 북한에 있을 때는 축구를 했다. 실업 야구 시절 이후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축구 선수’ 김응룡은 왠지 어색하다. 부산 개성중학교에서도 축구를 했으나 야구부 주장이 “넌 이제부터 야구 선수다”라는 한마디에 졸지에 야구인의 길을 걷게 됐다. 반세기 전 그때도 야구 도시였던 부산에서는 이런 일이 흔히 있었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그 무렵 사실상 프로인 실업 야구 강호 농업은행(오늘날의 농협) 야구단 입단이 불발된 건 김응룡의 야구 인생에 거의 유일한 좌절이었다. 이후 한국운수 야구단에 연습생으로 입단했고 한일은행에서 선수 생활의 절정기를 이뤘다.
호적상으로 22세 때인 1963년, 김응룡은 야구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해 9월 한국은 서울운동장에서 제 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재일동포 출신 투수 신용균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을 1차 리그에서 5-2, 2차 리그에서 3-0으로 꺾는 등 1, 2차 리그 합계 5승1패로 1954년 대회 창설 이후 처음으로 우승했다.
신용균 외에 역시 재일동포인 서정리와 배수찬, ‘아시아의 철인’으로 불린 박현식, 박영길, 최관수, 김청옥, 성기영, 박정일, 하일 등 이 대회 우승 멤버는 야구 올드 팬들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할 것이다. 마운드에 신용균이 있었다면 타격에서는 김응룡이 발군이었다. 김응룡은 23타수 9안타, 타율 3할9푼1리로 타격상을 받았고 사실상의 결승전이었던 2차 리그 마지막 경기인 일본 전에서 1회 선제 타점과 8회 승리에 쐐기를 박는 2점 홈런 등 혼자서 모든 점수를 뽑았다. 2000년대 ‘국민 타자’가 이승엽이면 1960년대 ‘국민 타자’는 김응룡이었다.
1960년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제 2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 이어 국내에서 벌어진 아시아 지역 구기 종목 선수권대회에서 거둔 두 번째 우승에 온 나라는 기쁨에 들썩였다. 이 대회 우승과 함께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특별 지시로 1966년 9월 서울운동장 야구장에 야간 경기를 할 수 있는 조명 시설이 설치됐다.
1966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한일은행 선수 겸 코치로 그라운드를 누비던 김응룡은 1977년 국가 대표팀 감독에 선임된 첫 번째 국제 대회에서 지도자로서 ‘대박’을 터뜨렸다. 거의 모든 야구 팬들이 알고 있는 슈퍼월드컵 우승이다. 한국 야구가 세계 규모 대회에서 처음으로 정상에 오른 이 대회에 김응룡은 코칭스태프로 유백만(한국화장품 감독)과 이재환(연세대학교 감독)을 거느리고 출전했다. 유남호(아마추어 롯데 자이언츠) 이선희 이해창(이상 육군) 최동원 김봉연(이상 연세대) 임호균(동아대) 심재원(한국화장품) 김재박(영남대) 배대웅(기업은행) 윤동균(기업은행) 장효조 김시진(이상 한양대/ 이상 당시 소속팀) 등 신세대 야구 팬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선수들이 주전이었다.
제 3회 슈퍼월드컵 세계야구대회는 1977년 11월 니카라과에서 열렸다. 한국은 9개국이 출전한 대회 예선 리그에서 숙적 일본에 0-1로 졌으나 개최국 니카라과를 8-1로 크게 물리치는 등 5승3패를 기록해 8전 전승의 미국에 이어 2위로 6개국이 겨루는 결승 리그에 올랐다. 한국은 결승 리그 첫 경기에서 미국에 0-2로 졌으나 니카라과를 13-3, 7회 콜드게임으로 물리친 데 이어 콜롬비아를 4-1로 제치고 상승세를 타더니 푸에르토리코와 연장 12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4-2로 이겨 3승1패로 최소한 3위를 확보했다.
한국은 5차전에서 일본과 다시 만나 이선희가 완투하며 3-2로 승리해 미국과 4승1패로 공동 1위가 됐다. 왼손잡이 이선희의 이 대회 호투는 이후 각종 국제 대회에서 일본이 한국의 왼손잡이 투수만 만나면 고전하는 시발점이 됐다. 애초 대회 규정은 승률로 순위를 가리게 돼 있었다. 규정에 따르면 한국과 미국의 공동 우승이었다. 그러나 대회 주최 측이 갑자기 우승 결정전을 갖는다고 발표해 한국과 미국은 이 대회에서만 3번째 경기를 갖게 됐다. 한국은 예선 리그에서는 미국에 4-5로 졌다.
미국은 대학 선발팀이었다. 한국은 프로가 출범하기 전이었으니 두 나라 아마추어 야구 최고 선수들이 기량을 겨룬 것이다. 한국은 2-3으로 뒤진 6회 초 김봉연의 솔로 홈런으로 3-3 동점을 만든 데 이어 2사 2, 3루에서 이해창이 2타점 중전 결승타를 터뜨려 5-4로 이겼다. 12월 2일 귀국한 선수단은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펼치며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지도자 김응룡의 금의환향이었다.
그리고 1983년, 1년 여의 미국 야구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해태 지휘봉을 잡은 김응룡은 그해 곧바로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면서 화려한 프로 시대의 막을 열었다.
선수 김응룡이 마지막으로 출전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는 1971년 제 9회 대회였다. 한국은 1963년 제 5회 대회에 이어 이 대회에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는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이 대회는 야구 올드 팬들에게는 ‘애국 판정’으로 특별히 기억된다. 호주가 처음으로 참가한 이 대회 1차 리그에서 한국은 고전을 거듭했다. 첫 경기에서는 필리핀을 2-0으로 잡았으나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과 0-0으로 비긴 데 이어 일본에 2-3으로 역전패했다. 이어 호주에도 4-5로 져 1승1무2패로 5개국 가운데 4위로 처졌다. 일본은 4전 전승으로 1차 리그 1위에 올랐다. 이 와중에 김영조 감독이 저조한 성적에 충격을 받고 입원하고 김영덕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은 2차 리그 첫 경기에서 필리핀을 5-1로 완파한 데 이어 자유중국을 9-1로 크게 이겼다. 한국은 순항하고 있었지만 2차 리그는 이변의 연속이었다. 일본은 첫 경기에서 필리핀을 7-2로 꺾었지만 이후 호주에 0-2, 자유중국에 2-3으로 연패했다. 주심으로 들어간 ‘빨간 장갑의 사나이’ 김동엽 등 한국 심판들의 스트라이크, 볼 판정에 일본 선수단이 아시아야구연맹에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한국은 호주를 4-0으로 눌러 4승1무2패를 기록하며 5승2패의 일본에 반 경기 차로 따라붙었다. 한국은 대회 마지막 날 일본을 8-3으로 대파하고 우승했다. 한국 심판들의 ‘애국 판정’ 논란이 있었지만 극적인 역전 우승에 야구 팬은 물론 많은 국민들이 열광했다. 이 대회에서 김응룡은 30타수 9안타(0.300)로 타율 5위에 올랐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