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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해 49재 추모공연’ 후배 문화예술인과 함께 개최
- 27일 오후 1시 30분 방송인 고(故) 송해의 49재 추모공연이 서울 종로구 모두의극장(허리우드극장 5층)에서 열린다. 이번 공연은 이상벽, 조영남, 현숙, 심형래 등 생전 고인을 따랐던 후배 문화예술인 12인이 한마음으로 준비해 그 의미를 더했다. 지난달 8일 갑작스러운 비보에 각계각층의 추모가 이어졌고, 49재가 열리는 현재까지도 종로 송해길 주변 상인과 시민들의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고 있다. 생전 고인은 KBS1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받은 사랑을 보답하기 위해 ‘문화 1번지 종로’의 부활을 알리는 극장식 추억의 쇼를 기획 단계부터 직접 참여했고, 종로 거리에서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 축제를 여는 등 평소 종로에 대한 깊은 열정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2019년 본지와의 만남에서도 “송해길에 자주 나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맛있는 것도 즐기면서 사는 재미를 느끼시라”며 종로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전하기도 했다. 당시 건강한 모습으로 길거리 담소도 마다치 않으며 시민들과 유대해온 그이기에 빈자리는 더욱 컸다. 이에 이번 추모공연을 기획하고 무대를 제공한 ㈜추억을파는극장 김은주 대표는 “송해 선생님은 생전 실버영화관 홍보대사로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후배를 양성하며 양질의 무대를 위해 힘써오셨다”며 “그게 종로를 찾는 어르신은 물론 국민들에게 받은 사랑을 보답하는 길이라 여기셨다. 하늘에서도 분명 후배 문화예술인들이 준비한 무대를 흐뭇하게 지켜보시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이 더욱 뜻 깊은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과거 고 이주일이 폐암으로 고통받던 본인의 모습을 공개하며 대한민국 흡연률 감소에 기여했듯, 고 송해의 죽음은 ‘어르신 낙상사고 예방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주최측은 고인의 뜻을 이어받아 매주 월요일 ‘모두의 극장’을 무료로 대관하는 한편, 수익금 일부로 어르신 관객에게 미끄럼방지매트를 제공한다. 아울러 독거노인이 화장실 낙상사고로 고독사하지 않도록 관련 캠페인을 널리 알릴 계획이다. 한편 송해는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후 끝내 눈을 뜨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추모공연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오늘 오전 11시 30분부터 선착순으로 현장 접수한다(300명까지). 평소 송해를 따랐던 후배 문화예술인 이상벽, 조영남, 전원주, 최주봉, 김성환, 박일준, 현숙, 배일호, 조항조, 이용식, 심형래, 김은주((주)추억을파는극장 대표)가 무대에 오른다. 공연 관람을 통해 얻어지는 수익금은 전액 기부 예정이다.
- 2022-07-2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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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 궤짝에서 카네기홀까지!
- 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를 꺼내보는 페이지입니다. 가수 남궁옥분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나도 그랬어, 그랬지!’라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넘겨보는 마당입니다. 글 사진 남궁옥분 어릴 적 동네 사람들이 저를 사과 궤짝 위에 올려놓고 노래를 시키면 곧잘 불러 뜨거운 반응을 받았다는 어머니의 증언! 시작은 미미하고 초라했으나 유년 시절의 그런 일들이 밑거름이 되었던지, 데뷔 후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를 만나 방송국과 국내외 무대를 종횡무진했지요. 하루에 12군데 스케줄을 소화해내며 달리던 1981년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 최초’라는 기록들도 세우며 운 좋게 아직 현역으로 남아 무대를 지키고 있습니다. 40년의 세월 속에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웠던 기억 몇 가지를 꺼내봅니다. 1983년 봄! ‘귀국서약서’를 비롯한 수십 장의 서류를 작성해 통과해야만 출국이 가능하던 시절, 첫 해외 공연을 앞두고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겨서 취소되는 건 아닐까 조바심 내던 때가 생각납니다. 대한항공이 주최하는 미주 공연이었기에 생애 첫 국제선 비행기는 퍼스트 클래스였습니다. 지상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수준의 식사와 서비스는 지금 생각해도 황홀합니다. 처음 타보는 국제선에 처음 밟아보는 미국 땅은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했을 때만큼의 기쁨이라 해도 좋을 만큼 설렘 가득했습니다. 외국에 대한 동경이 컸던 시절이라, 쌀쌀한 초봄에 서울을 떠나 날짜변경선을 경험하고 만난 사계절 여름인 하와이는 가히 충격적이었지요. 당시 교포들도 고국의 소식조차 여러 날을 두고 시간차로 접하던 미국에서 고국의 많은 가수들을 만난다는 건 꿈같은 일이었을 겁니다. 대한민국 당대 최고의 연예인으로 구성된 공연단이 워싱턴DC의 ‘케네디센터’,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가든’,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을 순회 공연하는 일정이었지요. 첫 도착지 하와이에서 동부 뉴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가수 최초의 대형 공연장에서의 공연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답니다. 이미자, 김상국, 조영남, 하춘화, 바니걸스, 국악인 조상현, 이춘희 등 대중가요와 국악계를 빛낸 국내 최고의 가수들이 밴드까지 이끌고 미국 최고의 공연장에서 노래한다는 것은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었습니다. 현지 교민들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감동이었다 할 정도였으니, 그때 막내였던 저로서도 꿈에 그리던 큰 무대에서의 공연을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당시 국내엔 큰 공연장이 없었던지라 무대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한참을 달려야 도달하는 ‘메디슨 스퀘어가든’은 명성만큼이나 저를 주눅 들게 했는데, 훗날 다시 서보니 그때보다는 많이 작아져 있었습니다. ‘케네디센터’는 주변의 모든 시설들까지 대리석으로 완성돼 눈에 띄는 아무 곳에나 대고 셔터를 눌러도 그냥 작품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최초로 공연을 했다는 자부심은 이 글을 쓰면서 되살려본 기억 속에서도 여전히 뿌듯한 기쁨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감동도 ‘카네기홀’을 넘어설 수는 없을 듯합니다. 1989년인가? ‘조영남의 카네기홀 콘서트’를 함께하자 해서 무작정 따라나섰던 일이 제 생애 가장 잊지 못할 영광스런 일이 되었습니다. 메인홀 최초 공연자는 조영남이 아닌 패티김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니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메인홀 공연자는 패티김, 조영남, 남궁옥분뿐이었습니다. 콘서트홀이 아닌 메인홀! 노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며 서고 싶어 하는 가장 영광된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전 충분히 행복합니다. 대한민국의 예술인 의전이 최악이던 시절, 미니 칵테일바까지 있는 하얀 리무진이 뉴욕 시내를 돌아 카네기홀에 내려놓을 땐 이곳을 다녀간 예술가들의 모습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그곳을 거쳐간 영혼들이 지켜준다는 전설 덕분인지, 리허설 때의 긴장감은 아랑곳없이 정말 무언가에 이끌리듯 아주 편히 노래를 했던 기억이 나네요. 미국 스태프들이 공연 중 카메라 촬영도 불허하는 바람에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한 점이 정말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일에 별로 관심 없던 조영남 선배의 성향 때문에 결국 허접한 사진 두 장만이 카네기홀의 그 영광스런 순간을 이야기해주네요. “이게 정말 카네기홀이야?”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평범한 사진이기에 좀 억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많은 예술 거장들이 실황음반을 남기며 사랑했던 역사적인 문화 현장,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 한 귀퉁이를 지키는 남궁옥분에게도 그곳에 설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사진을 찾다가 카네기홀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게 옷에 붙이는 백스테이지 스티커를 만나니 감회가 새롭네요. 이렇듯 살아가면서 ‘최고’, ‘최초’를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입니다. 가수를 직업으로 삼아 살아오면서 참 많은 특혜를 누리고 참 많은 곳에서 대우를 받은 지난 시절이 생각할수록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번엔 호주로 가봅니다. 1987년 호주 공연은 연예인 공식 초청 1호였고, 우리 연예인단은 모두 이민 비자를 받아 입국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민을 꿈꾸던 그 시절! 그곳에 그냥 눌러앉아도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마도 외국을 동경했다면 합법적인 호주 이민이 될 수도 있었겠지요. 정말 모든 게 지금에 비해 허술했던 아날로그 시대의 추억입니다. 호주에서의 잊지 못할 또 다른 추억 하나는, 교민들이 우리에게 건네준 어마어마한 선물들 때문에 공연단 일행 모두가 당시 100달러 남짓 추가 운임을 지불해야 했던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답니다. 그렇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정이 있었고 따뜻한 마음이 넘쳐났지요. 공연 마지막에는 언제나 태극기를 흔들며 ‘고향의 봄’을 함께 불렀습니다. 우리를 보내는 아쉬운 마음에 무대를 향해 눈물을 훔치며 한없이 손을 저어주시는 모습은 어디서든 똑같은 풍경이었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유년 시절을 함께 지켜준 사람들! 평범하게 고무줄놀이, 공기놀이를 하고 가끔 풍금 치며 노래하던 남궁옥분이 이렇게 최고의 경험을 하며 최초의 역사를 간직하고 살 거라는 건 감히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저도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니…. 그렇게 준비 없이 등 떠밀려 뛰어들었던 가요계에서 이렇듯 좋은 추억이 많다는 건 축복이고 행운입니다. 언제나 제 삶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빛날 것이기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 2021-03-0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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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흔드는 말 한마디
- 나이를 먹다 보니 나도 모르게 소심해지고 쩨쩨해지는 것 같다. 나는 어언 76년이나 풍진세상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런 나의 쪼잔함과 졸렬함이 아주 실망스러운건 아니다. 아주 작은 자부심과 기쁨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알아먹기 쉽게 예를 들어보겠다. 우선 나는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상대의 입에서 버릇처럼 튀어나오는 ‘솔직히 말해서’라는 어휘를 끔찍이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럼 ‘솔직히 말해서’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의 얘기는 솔직한 얘기가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쩨쩨한 의구심이다. 나이가 나보다 많은 사람한테서 그런 어휘가 나왔다면 하는 수 없이 어물쩍 넘어가지만 내 나이 또래나 밑의 사람이 그 어휘를 썼을 때는 내가 유독 싫어하는 말이니 나와 얘기할 때는 그 단어를 쓰지 말거나 다른 어휘나 용어를 구사해주길 특별히 부탁하곤 한다. 지금까지는 이 치사스런 요구가 그런대로 잘 먹혀온 것 같다. 만약 후배가 그걸 어기는 경우, 귀퉁배기를 가격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귀퉁배기를 갈기며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 시캬, 이건 영남이 형이 네 평생에 건네준 선물이다. 죽을 때까지 ‘솔직히 말해서’라는 말은 쓰지 마. 안 쓸수록 좋은 거다.” 내가 이렇게 심하게 주의를 주는 이유는 경험상 그 어휘가 주로 솔직하지 않은 사람 또는 사기꾼들이 특별히 주문처럼 써먹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음엔 나의 꼰대 같은 찌질한 짓거리가 무엇일지 솔직히 말해서(?) 걱정스럽다. 나이 들어가면서 내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이 또 있다. 딸에 관한 얘기다. 내 딸은 유난히 아버지의 입을 통해 자신이 거론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데 행여 인터뷰나 연예 프로그램에서 자연스럽게 슬쩍 얘기가 나와도 생난리 법석이다. 아예 자기 얘기를 하지 말아달라는 게 간절한 요구사항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치매 초기 상황에 들어선 이 아빠는 딸이 참으로 기특하고 예쁘게 보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딸 자랑이 흘러나오는 걸 주체할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심하게 구박을 받고 다시는 안 그러겠노라고 싹싹 빌며 넘어가곤 한다. 살금살금 위기에서 빠져나오기는 하지만, 그러나 글쎄 앞으로 그런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딸 자랑은 노인이 되어가면서 누리는 쓸쓸한 기쁨이라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딸한테 맞아 죽어도 할 말은 해야겠다. 우리 부녀 사이엔 구속이라는 언어나 어휘가 없다. 언제 들고 나는지 쌍방이 모르는 채 일상이 흘러간다. 그런 와중에도 아빠 사랑과 딸 사랑은 세상 어느 부녀 못지않게 넉넉히 유지해가면서 말이다. 크게 자랑할 만한 얘기는 아니지만 나는 이따금씩 룸살롱이라는 곳을 다녀오곤 한다. 많은 사람이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딸, 오늘은 아빠와 함께 룸살롱에 갈까?” 하고 제의를 하기도 한다. 언젠가 덤덤하게 내뱉는 딸의 한마디가 매우 인상적으로 들려온 적이 있다. “오늘 저녁 아빠 룸살롱 갔다 올게” 하자 이렇게 받는 것이었다. “아빠, 우리나라에서 룸살롱에 간다고 딸한테 말하는 사람은 아빠밖에 없을 거야.” 와, 역시 내 딸이다. 내 딸답다. 전국의 딸 가진 아빠들아, 이토록 이쁘게 통 큰 딸 가진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구요. 나이 듦이나 소심함 혹은 쩨쩨함이 다 수치스럽거나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때때로 그것이 총체적으로 훨씬 더 나은 결과를 낼 수도 있다. 가령 나는 5년간의 긴 미술대작 사건을 마치고 기자들한테 속 좁은 내 마음을 이렇게 드러냈다. “국가가 5년간 국비로 평범한 미술 애호가를 정식 화가로 격상시켜주었다.” 그런데 이 말이 어느 주요 일간지에서 2020년 한 해의 중요한 말로 언급되기도 했다. 또 있다. 나는 긴 재판의 끝 장면, 소위 조영남 미술대작 사건 전국 공청회의 마지막 순간 최후의 진술을 부여받았는데 어쩌고저쩌고 진술을 쏟아낸 다음 이런 식으로 끝을 맺었다. “대법관님, 옛 어르신들 말씀에 화투를 가지고 놀면 패가망신한다 그랬는데 제가 너무 오래 화투를 가지고 놀았나봅니다.” 참으로 노인스러움과 소심함의 극치였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보다도 더 그윽한 행복감에 젖어 하루하루 익어가고 있는 중이다.
- 2021-02-0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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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찬원, '찬또왔어요' 시청자 11만+하트 9천만 달성
- 시니어 세대를 비롯해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미스터트롯’ 입상자 이찬원이 V 라이브를 통해 솔직한 매력을 뽐내며 팬들과 소통했다. 이찬원은 지난 27일 '미스터트롯' 공식 V 라이브 채널에서 ‘매력 톡톡 찬또왔어요’를 진행했다. ‘매력 톡톡 찬또왔어요’는 누적 시청자 수 11만9000명과 9000만 하트를 달성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날 이찬원은 “오늘 월요일이라 힘들지 않으셨나 모르겠어요. 월요일은 ‘원래 힘든 날’이라고들 하던데 ‘원래 사랑하는 날’로 생각하시면 좋을 거 같네요”라는 멘트로 방송을 시작했다. 이어 이찬원은 주현미의 ‘잠깐만’, 조영남의 ‘화개장터’, 최석준의 ‘꽃을 든 남자’ 등 팬들의 요청에 라이브를 부르는 모습으로 미니콘서트장을 만들었다. 이찬원은 장갑을 끼고 팬들에게 선물할 그립톡을 직접 만드는 이벤트도 준비했다. 그립톡을 만드는 중에도 댓글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소통을 이어가 팬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특히 이찬원은 “저의 롤모델은 엄마”라며 “일찍 결혼하셔서 고생 많이 하셨는데, 이젠 자기 삶을 사셨으면 좋겠다”고 말한 뒤 눈시울을 붉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다. 한편 김희재에 이어 이찬원까지 성공적인 방송을 이어가고 있는 ‘미스터트롯’ 입상자 6인(임영웅, 영탁, 이찬원, 정동원, 장민호, 김희재)의 V 라이브 세 번째 주자는 장민호로, 28일 오후 8시 ‘미스터트롯’ 공식 V라이브 채널에서 만날 수 있다.
- 2020-04-28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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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 바쳐서’ 이룬 의리와 우정을 노래하다
- 1983년,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려오던 노래가 있었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제목을 몰라도 “몸~ 바쳐서~ 몸 바쳐서~”라는 후렴구만은 기억할 수밖에 없는 그 노래, 바로 ‘논개’다. ‘논개’ 돌풍을 일으켰던 주인공 이동기(65)는 현재 2700여 명이 가입한 한국방송가수노동조합 위원장이다. 가수들을 위한 노동운동가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올해로 14년째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무려 32년 만에 10집 앨범 타이틀곡 ‘약국집 딸’을 내놓았다. 지나간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보기 위해, 일단 그가 처음 이름을 날린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1983년에 발표한 노래 ‘논개’는 4집 앨범에 실렸어요. 1집은 1978년에 나왔죠. 그런데 내 1집, 2집, 3집 앨범들에 관심이 많았던 임정수 지구레코드 사 대표가 서라벌레코드 사에 있던 나를 데려와서는 3년 전속으로 계약을 맺었어요.” 일단 계약을 했으니 노래를 만들어야 했던 이동기는 친하게 지내던 작사가 이건우에게 가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가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곡을 붙여 만든 곡이 바로 ‘논개’였다. 이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논개’에 대한 기대치가 전혀 없었다. 4집 앨범에 실린 11곡들 중 맨 뒤에 ‘논개’를 밀어 넣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10분도 안 걸려 만든 노래 ‘논개’ 4집 앨범을 발표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처자식도 있었다. 3집 앨범까지 낸 6년 차 가수였지만 그는 그리 잘나가는 가수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4집을 들고 라디오 공개방송의 일인자였던 KBS 신광철 PD를 만난 사건으로 삶을 뒤바꾼다. “신광철 PD가 나한테 ‘그만해, 노래. 가서 농사나 지어’라고 말하더군요. 그분이 마음속으로 저를 아껴서 밀어줬는데 해도 해도 안 되니까 그리 말한 거였어요. ‘네가 백이 있냐, 돈이 있냐, 얼굴이 있냐. 그만해’라고 말하는데, 몇십 장 가져간 음반을 그 자리에서 떨구고 무지하게 울었어요. 그리고 ‘그래, 난 안될 거야’ 하고 포기했죠. 그러고선 곧바로 고향 음성으로 내려갔어요.” 4집을 가장 완성도 있게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30대를 코앞에 두고 처자식까지 있었는데, 노골적인 비아냥을 들어야 했던 자신의 처지가 그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리라. 그러나 얘기가 여기서 끝났으면 지금의 이동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침 신 PD 옆에 있던 사람이 ‘이 사람아, 판 만들어 왔는데 울게 만들면 어떡해’ 하며 그를 나무랐고, 신 PD는 이동기가 놓고 간 4집 앨범에서 ‘논개’를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그리고 그는 그 곡을 집중적으로 틀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TV에서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려오는 거예요. 그게 내 노래인 줄도 몰랐죠. 아무래도 이상했어요. 지구레코드 사에 6개월 만에 전화를 했더니 ‘너 빨리 올라와라, 노래 뜨고 있다’ 하더군요. 가봤더니 짐차에 내 앨범들이 막 실려 나가고 있더라고요.” 순식간에 슈퍼스타가 되다 이동기의 ‘논개’는 불같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한사코 TV 출연을 피했다. 외모에 자신이 없었고, 전에 발표한 노래들도 어느 정도 뜨다가 그가 TV에만 나가면 인기가 떨어졌던 걸 기억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MBC의 신종인 PD는 집요했다. “자기가 PD로 입봉하는 첫 프로그램인 ‘영 일레븐’에 내가 출연하면 좋겠다 하더군요. 피했지만 세 번째 찾아왔을 때 ‘대신 얼굴을 잡지 말고 멀리서 잡아라, 그 약속만 하면 나가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영 일레븐’에 출연했는데, 이 양반이 바스트만 잡은 거예요. ‘왜 약속을 어겼느냐’고 항의하러 갔죠. 그런데 방송국 가는 길에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알아보더라고요. 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바뀔 수 있나 싶었죠.(웃음)” 1985년, 망하다 ‘논개’가 대박 난 이후에도 그의 성공은 한동안 이어졌다. 다음 해인 1984년에 낸 5집에서는 ‘바보 바보’가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그의 발목을 잡게 된 일이 터졌다. 그 일은 조영남과 관계가 있었다. “제가 당시 5대 도시 콘서트를 했는데 기획자에게 조영남 씨를 게스트로 추천했어요. 그때 인연이 되어 친해졌죠. 그런데 조영남 씨가 가사를 쓴 곡 중에 ‘숨겨진 노래’가 있었어요. 내가 그걸 듣고 완전히 반한 거예요. 그래서 1985년에 발표한 6집 앨범에 넣었죠.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어요. 나는 젊은 취향이었는데 그 노래는 성인가요였던 거예요. 나와는 안 맞았어요. 실패했죠. 그때부터 고전하기 시작했어요.” 6집 앨범이 잘 안된 것도 문제였지만 그는 ‘논개’의 인기에도 돈을 벌지는 못했다. 속사정을 들어보니 그 시절다운 일이었다. “대한민국 군부대가 정말 많았던 시대잖아요. 게다가 군사 정권이었고요. 아주 적은 돈을 주고 봉사 차원이라며 전방이고 후방이고 데리고 다녔어요. 그래서 어마어마하게 바쁘긴 했는데 돈은 못 벌었죠. 그렇다고 안 돌면 방송 출연이 금지되니까 어쩔 수 없이 갔거든요. 기름 값도 없고 운전기사에게 돈 줄 형편도 못 됐어요.” 우연히 이루어진 일본 진출 9집 앨범을 낸 1987년, 돈은 못 벌면서 계속 실패한 그에게 앞날은 어둡기만 했다. 그때 홀리데이 인 서울 무대에서 공연을 하던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와세다대학교를 나온 엘리트 재일교포 2세 출신의 야쿠자 두목이 그를 발견하고 일본에 초대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나는 돈을 벌고 싶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정식으로 초대를 받아 일본에 갔어요. 당시는 15일짜리 관광비자밖에 안 나오던 때였는데, 13일 만에 2000만 원을 벌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한 달에 겨우 300만 원을 받고 그것을 소속사와 나누던 때였는데….” 그래서 그는 4년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한국에서는 꿈에도 생각 못한 액수의 돈을 벌었다. “일본에서도 ‘논개’가 유명했죠. 논개가 사연이 있잖아요? 노래를 부르기 전에 그 얘기를 먼저 했죠. 일본 사람들은 비록 논개가 임진왜란 때 일본 장군을 죽인 기생이지만 역사적 사연이 아름답다는 점을 높이 샀어요.” 가수들의 권리를 위한 활동 오랜 일본 활동을 마치고 철수한 그는 한국에서 컴백을 위한 음반을 준비했다. 그런데 기획사를 하는 친구가 시장 환경이 안 좋으니 음반을 내지 말라고 조언했다. 작업을 멈춘 그는 그 후로도 앨범을 내려고 했지만 마음에 드는 곡이 나오지 않아 계속 미뤄야만 했다. 그러던 중 2005년에 가수들을 위한 노동운동가로 변신한다. “우리나라 가수들은 참 사회적 약자예요. 당시 가수들의 권리와 권익을 대변하는 곳은 한국연예예술인협회 가수분과밖에 없었거든요. 방송국이 매년 그곳과 협상을 하긴 하지만 갑을관계가 강했죠. 부위원장 입장으로 협상에 참여할 때마다 일방적 양보를 요구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2005년에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위원장 이경호 씨를 만나게 됐어요. 알고 보니 연기자들은 이미 28년 전에 노동조합을 만들어 방송사와 동등한 파트너십으로 일하고 있더라고요. 노동조합이 있으면 방송사가 가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갑을관계가 아니라 상생할 수 있으니 반드시 만들라고 강력하게 권하더군요.” 그는 그 말을 듣고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는 가수들을 만났다. 남진, 나훈아, 정훈희, 김도향, 김수희 등등 선배 가수들은 그의 설명을 듣더니 일리 있는 얘기라고 동의해줬다. 그래서 2005년 7월 1일 교원공제회관에서 300여 명이 모여 한국방송가수노동조합을 만들었고 그를 초대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로부터 그는 14년간 위원장 활동을 해왔다. 가수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그가 볼 때 연기자들은 자기권리를 위해 수많은 투쟁을 했다. 노동조합이 중심이 돼서 모두가 적극적으로 연대했다. 그러나 가수들은 그렇지 못했다. “딱 한 번 2009년에 MBC에서 연기자들과 함께 연대 파업을 했어요.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했고 관철됐죠. 그러나 그 후에도 투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호소했지만 이뤄지지 않았어요.” 그는 가수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고 했다. 바로 TV 프로그램이 사라지는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안타까워한다는 점이다. “다른 나라는 우리나라처럼 정기적으로 가수들이 공연하는 쇼 프로그램이 없어요. 미국도 일본도 중국도 다 폐지했어요. 프로그램이 사라져도 그 시대의 대중가요는 꼭 히트하게 되어 있죠. 매체가 있든 없든 노래는 유행하는 거예요. 반드시 방송사 프로그램이 있어야 히트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는 방송사의 쇼 프로그램이 사라져야 가요계가 살아난다고 주장했다. 다른 나라 가수들은 음원 저작권과 공연이 수입원인데 우리나라는 그걸 TV와 지역 행사에서 무료로 제공하니 음원과 티켓이 안 팔린다는 진단이다. TV에서 볼 수 없는 가수가 된 이유 사실 이동기가 새 앨범을 못 낸 이유에는 가수들의 권익과 관련한 문제들도 있다. “음반을 내놓으면 방송사 PD들 찾아다니며 PR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노조위원장이면서 그러고 다니면 조합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섭외가 들어오면 “얼마 줄 겁니까?” 하고 물어본 뒤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안 갔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레 TV에서 볼 수 없는 가수가 되었다. “히트곡은 달랑 ‘논개’밖에 없는데 그래도 되냐고 염려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래도 ‘이렇게라도 권리를 찾는 모습을 보여줘야 다른 가수들에게 롤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말했어요. PD들에게도 그런 속내를 설명하니 존중해주더군요. 사실 일선에 있는 PD들은 저희들 출연료 처우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협상할 때는 PD들과 하는 게 아니라 방송국 노무 담당자들과 하니까 거기서 갭이 생기는 거죠.” 요즘은 자꾸 고향 생각이 난다 그렇게 불도저, ‘무데뽀 투쟁’의 화신이었던 이동기가 새 앨범을 낸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활동해온 위원장직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그는 새 노래 ‘약국집 딸’을 내놓은 가수로서 활동해야 한다. “열정과 사명감이 있는 후배에게 넘겨줘야죠. 한국방송가수노동조합 위원장직은 내년 5월 30일에 임기가 끝나요. 이번 앨범은 예전처럼 저돌적으로 PR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직까지 이동기가 가요계에서 노래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진솔한 이야기를 내놓는 거죠. 히트와는 상관없이.” 그는 요즘 자꾸 고향이 그리워진다고 했다. 산속에 들어가 자연과 더불어 나머지 인생을 보내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담대함을 가진 동시에 굉장히 인간적이고 소탈한 뚝심으로 살아온 그는 이제 칩거의 꿈을 꾸고 있다. 그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처음 노동운동을 할 때는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났어요. 사나운 매파였죠. 그런데 나이를 먹고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하다 보니 전략적 평화주의가 됐어요. 이제는 노사관계를 대화로 풀죠. 노동운동 초창기보다 지금 사람들이 더 많이 따라요.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구나 싶어서 감격스럽죠.” 가수는 자기 노래를 닮는다고 했던가. 이동기는 사랑보다는 의리와 우정을 위해 ‘몸 바쳐서’ 살았다. 그가 몸을 바침으로써 조금 더 나아진 세상에서 가수들이 누릴 평화가 있길 기원해본다.
- 2019-11-28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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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의 노래
- 요즘은 노래방에 가서 “가을이니까, 가을 노래를 하나 부르겠다”라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가을이니까 가을 노래를 하면 분위기 상 어울릴 것 같은데 노래방이 워낙 확산되다보니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한 여름에 이루의 ‘흰 눈’을 부른다고 해서 이상하게 보지 않는 것이다. 계절을 따지지 않고 그냥 여러 노래 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방송에서는 선곡을 계절에 맞춰 하는 편이다. 10월이면 꼭 듣게 되는 노래가 있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인데 노래 제목을 ‘10월의 마지막 밤’이라고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가사 첫 줄에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로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노래방에서 제목을 ‘10월의 마지막 밤‘으로 찾으면 못 찾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 노래는 슬로 고고 풍으로 10월 마지막 주 쯤 잘 어울리는 노래이다. 달맞이꽃이 마지막 꽃을 피울 무렵이다. 밤에 야외에 나가면 기승을 부리던 모기도 어느 덧 사라지고 덥지도 춥지도 않으면서 달빛이 좋은 계절이다. 이 노래는 박건호 작사, 이범희 작곡인데 원래 조영남 씨에게 건네졌다가 이용씨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이용씨를 매년 10월이면 이 노래로 각종 행사에 초청되게 하는 노래이다. 원래 가사는 10월이 아니라 9월이었다는 설도 있다. 조영남씨도 노래를 잘 부르지만, 이용씨가 불러 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 오리지널 키는 C 키인데 이용씨 조차도 나이 들면서 고음이 힘들어 보인다. 일반인 남자들은 A 키 정도면 무난하다. ‘어머나’가 주현미씨에게 먼저 건네진 노래였는데 장윤정 씨에게 넘어가 장윤정씨를 트로트의 여왕으로 만들었듯이 노래와 가수의 운명이란 묘하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도 10월이면 많이 들리는 노래이다. 바리톤 김동규씨 노래로 유명하다. 가사 맨 끝에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들어 있다. 이 곡은 원래 노르웨이 음악 그룹 ‘시크릿 가든’의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원곡은 ‘봄의 세레나데’라는 것이다. 김동규씨가 워낙 저음으로 불러 오리지널 Ab 키 그대로 따라 불러도 무난하다. 외국 곡이고 왈츠 곡이라 약간 생소한 박자에 주의해야 한다. 김동규씨의 바리톤이 워낙 강하게 박혀 있어 어지간한 소리통이 아니면 김동규씨 맛이 안 나는 게 흠이다. ‘가을 타는 여자’도 좋은 노래이다. 박현진 작곡, 온누리 작사, 이영희 노래이다.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로 알고 있는데 요즘은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빨간 단풍잎, 노란 은행잎을 보며 누구나 옛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 모양이다. 성별에 따라 남자가 부르면 ‘가을타는 남자’로 개사해서 부르기도 한다. 이 노래를 부른 이영희씨는 여자이므로 노래방 음정 세팅이 Bb 여자 키로 되어 있다. 남자가 부를 때는 남자 음정으로 필히 바꿔 놓고 불러야 한다. 남자들은 F 키가 대부분 맞는다. 노래방에 어떤 사람들과 같이 가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워낙 트로트가 대세이다. 노래가 대부분 비슷하고 박자도 맞추기 쉽기 때문이다. 귀에 익숙하며 분위기를 돋우는데 그만이다. 그래서 ‘잊혀진 계절’,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가을 타는 여자’ 등 발라드풍의 노래들은 조심해서 불러야 한다. 분위기를 가라앉게 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작 때쯤이면 주목을 받아 좋고, 트로트 노래를 계속하다 보니 지쳐 있을 때 마지막 시간 쯤 부르는 것이 요령이다.
- 2017-10-27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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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모든 아내는…
- 꾸미는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걸 좋아하는 편이다. TV 드라마도 너무 만든 이야기가 들어 있어나 판타지물보다는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즉 작가 김수현식 드라마를 좋아한다. 글도 단순하고 꾸밈없는 글을 좋아한다. 흔히들 기가 막힌 경치를 보면 한 장의 그림엽서 같다고들 하는데, 필자는 이런 표현도 별로다. 엽서 한 장으로 어찌 광대한 풍경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냥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정도가 좋다. 사람도 자연스런 사람을 좋아하는데 예를 들면 조영남씨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반대로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미친 ×만 좋아한다고 흉을 본다. 또 솔직하고 담백한 말을 좋아해서 솔직하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를 즐기지 않는다. 뭔가 감추고 있는 듯한 사람과의 대화는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어렸을 때 잠깐 알고 지내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돈을 많이 벌고 아들은 미국에 남기고 부부만 역이민을 온 아들 친구 부모가 있다. 그 부부는 가끔 우리에게 전화해서 식사나 하자고 하는데 몇 번 만나보니 자기네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지 않고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때운다. 도대체 우릴 왜 만나자고 했는지 모를 정도다. 그러면서도 우리 이야기엔 경청을 한다. 지난번에도 만나자고 전화를 해와 아들 체면을 봐서 웬만하면 나가자고 했지만 남편은 칼같이 끊고 거절을 했다. 우리 나이에 싫은 사람 만날 일 없다며…. 보수적이면서 반듯한 남편은 자신과 성향이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 남편이 필자를 이야기할 때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표현한다. 필자는 숫자에 대한 기억력이 좋아 아직까지도 아들네를 포함한 온가족의 주민번호, 통장번호도 등 별의별 것들을 다 기억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깜빡깜빡하는 병이 있어 돌아서면 잘 잊는다. 물 먹으러 가다가 안경 벗어놓고 못 찾고, 신발 신다가 꼭 쓰고 나가야 할 선글라스는 잊어버리고 나가는 등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런 건망증이 늙어서 생긴 게 아니라 초년 시절부터 그랬다. 이 병 때문에 평생 동안 잃어버린 물건도 많다. 어릴 때부터 구박도 많이 받았다. 신은 하나를 주면서 다른 하나는 빼앗아가는 것 같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맞나보다. 깜빡병 때문에 남편한테 잔소리도 많이 듣고 구박도 많이 받는다. 우스갯소리로 우리 집 도우미 이모가 “아저씨, 언니 너무 구박하면 내가 장애인센터에 ‘장애인 학대’로 신고할 거예요”라고 말할 정도다(나는 10여 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 후유증으로 장애인이 되었다). 혹시라도 애인이 그랬다면 다~ 용서가 될 텐데 말이다. 세상의 모든 애인은 애처롭고, 모든 아내는 억척스럽다는 말이 있는데 난 애인이 아니고 아내다. 그렇게 심한 구박(?)을 받고도 건재하니 말이다.
- 2017-07-1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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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신이 편안해야 장수하지요” 삶의 고수 김세환, 변치 않는 삶에 대해 말하다
- 시대를 상징하는 목소리가 있다. 포크음악의 전설 세시봉의 막내인 김세환의 목소리가 바로 그렇다. 1970년대를 수놓았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노랫말과 귀공자 같은 외모와 함께 어우러져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화려하게 부활한 세시봉의 멤버로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이어가고 있는 그는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변치 않는 사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모습 그대로 천진난만한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했던 그와의 인터뷰. 관과 공연장에서 보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전혀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 놀랄 만한 동안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듣기도 싫어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내 마음, 내 현재가 중요하지.” 나이라는 숫자에 뭔가를 맞춰야 한다는 강박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 70대를 맞이하는 김세환의 철학이었다. 같은 70세라도 생각하는 게 다 다르잖냐는 그의 반문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바꿀 수 없지만 속은 바꿀 수 있잖아요? 칠십이 되면 그 나이에 맞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 그건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애들한테도 물어봐요. ‘나 이러는 거 이상하냐?’ 그러면 ‘아니, 아빠는 어울려’라는 대답이 돌아와요. 그럼 오케이죠.” 내 마음, 내 현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세환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이런 삶도 있구나 싶었다. 그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정의하자면 긍정과 해맑음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며 “감사하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저는 지금 꿈이 없어요. 하루하루가 즐거우니까요. 범사에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그리고 저는 정말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고민? 지금은 없어요. 굳이 찾자면 아이들인데, 아이들이 아직 직업이 없으니까. 하지만 푸시 안 해요. 다 지 팔자니까요. 제 아버지도 그랬거든요. 아버지도 저에게 큰소리 한 번 친 적 없어요. 그래야 내가 편하죠. 내가 편해야 애들도 편하고. 렛 잇 비.” “노래도 마이너는 싫다. 밝고 즐거운 노래가 좋다”고 말하는 그의 지론은 흡사 그의 노래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같은 삶의 태도다. “글쎄요. 난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자랐으니까. 가요계에 나같이 고생 안 하고 가수 된 사람 없어요. 신인상 받고 그다음에 대상 받고. 그때가 총각이었을 땐데 집도 사고. 얼마나 감사해.” 물론 그도 사람이다. 인생에서 무조건 즐겁고 좋은 일만 있을 리 없다. “저도 희로애락이 다 있죠. 그런데 슬프고 아픈 걸 굳이 계속 삭히는 건 싫어요. 빨리 잊어버려야지. 예를 들어 부부싸움 안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런데 부부싸움을 하면 내가 답답해. 그래서 내가 먼저 풀려고 해요. 난 비자금도 없어요. 비자금이 있다는 건 ‘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잖아요.”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르쳐주신 부모님 그는 자신이 긍정적인 성격이 된 것이 가족의 영향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100세까지 사셨던 어머니께 감사해요. 어렸을 때는 돈을 더 타내려고 어머니에게 거짓말도 하고 그러잖아요? 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예를 들어 어머니에게 ‘5000원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어머니는 옷장에 있는 가방에서 꺼내 가져가라고 해요. 그런데 애들 욕심에 6000원 가져가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어머니는 나중에 내가 더 달라고 하면 또 주실 거라는 확신을 주셨어요. 그래서 그런 욕심을 내본 적이 없어요.” “나도 널 믿을 테니 너도 양심의 가책 없게 행동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바른 삶에 대한 지침과도 같았다. 그의 어머니는 얼마 전 10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한복만 입는 분이셨죠. 그래서 저는 학교 다닐 때 스타킹만 봐도 이상했어요. 집에 여자 스타킹은 아예 없고 남자 형제 셋이니 남자 신발만 잔뜩 있었어요. 아내와의 관계요? 며느리 눈치 보셨었지(웃음). ‘딸 같다 얘’ 이러고.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시집살이 절대 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본인이 많이 고생하셨으니.” 그의 어머니는 피아노, 아버지는 성악을 했다. 그가 노래를 하게 된 데에도 두 사람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그의 아버지 김동원은 당대의 모든 상을 휩쓸었던 대배우였다. 그러나 집에 들어오면 그런 간판에 매달리는 일 없이 아들에게 “나 팝송 하나 가르쳐줘라” 하며 함께 어울리는 아버지였다. 김세환의 긍정적이고 해맑은 자유분방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를 보며 우는 남자 “우리 마누라 끝내주지.” 아내와는 어떻게 만났느냐고 묻자 나온 대답이다. 거두절미하고 아내를 ‘끝내준다’고 표현하다니 팔불출도 이런 팔불출이 없다. “아내와는 조병화 시인 딸의 결혼식 사회를 보게 되면서 만났어요. 한눈에 반했죠. ‘띠옹’ 하더라고. 첫사랑이었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말했죠. ‘나를 일단 사귀어보고 네가 선택해라. 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할게.’ 그리고 아직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고 있어요(웃음).”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첫사랑마저도 성공한 셈이다. “그러게. 그래서 막장 드라마가 싫어요. 누군가는 재밌다고 열심히 보는데 난 싫어요. 피하고 싶고. 그래도 감정이 많아 영화 보면 막 울기도 해요. 에서 우승하는 거 보고 울기도 하고. 그러면 애들이 ‘아빠 왜 그래?’ 묻고. 막 소리 내서 우니까(웃음).” 그는 매사 긍정적이고 해맑은 사람이지만 싫은 것은 절대 못 참는 사람이기도 하다. “싫은 사람과는 같이 숨쉬기도 싫다”는 그는 사람의 성장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했다. “똑같은 나무라도 자라는 모습이 다 달라요. 사람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배우고 느끼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안 되면 통제가 안 되니까요.” 그는 긍정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려면 상대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 “바꿔서 생각하면 편해요. 난 애들에게 ‘공부해’라고 말 못했어요. ‘만약 내가 자식이라면?’ 하는 생각을 하니까요. 제가 고3 때 텔레비전에 조영남이 나오면, 어머니는 나를 불러 ‘세환아, 조영남 나왔다. 이거 보고 공부해’라고 말씀하시곤 했죠. 나로선 참 고마웠지. 그렇게 느낀 고마움들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틈만 나면 자전거 탈 생각 김세환은 소문난 자전거광이다. 1986년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MTB를 타기 시작해서 벌써 30년 넘게 자전거를 타고 있다. 아니, 자전거에 대한 애착은 더 강해져서 요즘은 그가 속해 있는 자전거 클럽인 ‘한시반클럽’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자전거는 어느 면에서는 편해요. 헬멧 쓰고 안경 끼면 내가 김세환인 줄 아무도 모르니까요. 더구나 서 있을 일도 없으니. 그러니 나에게 딱 맞아요. 그리고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지. 땀은 나를 배신하지 않아요.” 그와 함께 자전거를 타던 사람들이 주말 오전에 볼일을 보고 한강에서 모이면 오후 한 시 반 정도가 되곤 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바로 한시반클럽이다. 1990년대 초부터 시작한 한시반클럽에는 40~60대에 속하는 스물다섯 명 정도가 모인다고 한다. 연령대로 보면 김세환이 가장 고참이다. “구멍이 나는 자전거가 있으면 주인보다 내가 고치는 게 더 빠르고 낫다”고 말하는 그를 중심으로 ‘형제보다도 더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다. 이 모임을 오랫동안 해올 수 있었던 것은 확고하게 짜인 규칙들 덕분이다. “아, 운동만 잘해선 안 되겠구나 싶을 때가 있었어요. 사람이 삐딱해질 수가 있거든요. 한시반클럽만 봐도 강북 팀과 강남 팀이 생각하는 게 달라요. ‘그럼 오늘은 총무가 정한 대로 가자’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멤버의 관혼상제 때는 반드시 100% 참석하게끔 하고 있어요. 그러니 든든하죠. 또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잖아요. 우리 모임에는 죽음조와 보험조가 있어요. 죽음조는 엄청 달려요. 그 대신 일찍 가서 보험조가 올 때까지 기다리죠. 느림과 빠름이 있듯이 비우는 사람, 채우는 사람,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삶을 존중해주는 우리끼리의 규칙들이 생성되었어요. 이렇게 가다 보니 모임이 오래갈 수 있었다고 봐요.” 세시봉 멤버로서 받은 사랑 보답하고 싶어 김세환은 한시반클럽 외에도 해동방모임이라는 모임에도 참석하고 있다. 배우이자 연출가인 이해랑 가족들과 김세환의 아버지인 김동원 가족들, 그리고 연출가 윤방일의 가족들이 함께 만나는 모임이다. 연극계 거물들의 모임이 그들의 후손들 모임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참 드물다. 어쩌면 오랫동안 깊이 있게 모이는 사람들과의 꾸준한 관계가 김세환의 인간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 아닐까. “인생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라면 아버지와 형을 꼽을 수 있겠어요. 아버지는 땅, 형은 기둥이었죠. 음악을 알려준 게 형이었으니. 가수를 안 했으면? 제가 신방과를 졸업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세시봉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나밖에 없어(웃음). 아마 방송국 피디가 됐겠죠.” 세시봉 멤버로서 그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이 궁금해할 것이다. 그는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 사랑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조만간 시청 앞 광장에서 무료로 공연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MC 없이 우리만의 공연으로. 이 얘기를 하니 다들 좋다고 했어요. 송창식에게만 말하면 돼요.” 후회되는 일은 없다, 오직 감사할 뿐 그는 매일 열한 시 전에 잠든다고 한다. 그리고 새벽 세 시나 네 시께 일어난다. “그 새벽이 내 시간이에요. 인터넷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죠. 최고야 최고. 사진, 의상, 스키, 운동, 신문, 유튜브… 다 있어요. 그것만 해도 하루가 바빠요.” 단순히 그가 가수라서가 아니라, 그는 현재의 트렌드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나이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은 그러한 본능에 가까운 동시대성 덕분일 것이다. “나를 의식하면 불편해집니다.” 김세환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일관된 지론을 듣다 보니, 그가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늙어가는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 것 아닐까. “후회되는 거요? 하나도 없어요, 그저 감사할 뿐이지. 편한 대로 가는 게 삶이에요.”
- 2017-05-24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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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 잣대가 문제
- 2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 에는 중량감 있는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65세 사진작가 킨케이드 역으로 출연했고, 메릴 스트립은 가정주부 프란체스카 역을 맡았다. 남편과 아이들이 4일간 집을 비운 사이 킨케이드가 프란체스카의 집에 우연히 들렀다가 사랑에 빠져 정사를 나누고 갈등한다는 줄거리다. 중년의 외도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명화라며 칭찬하는 분위기다. 남녀 구분 없지만 특히 여성들이 더 열광한다. 언젠가 EBS에서 주말의 명화로 이 영화를 방영한다고 하자 주변 여성들이 꼭 보라며 단체 카톡방에 글을 올렸다. 안 본 사람은 꼭 봐야 하고 이미 본 사람도 다시 볼 만한 영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시큰둥해했다. 서부영화에서 카리스마를 보이며 멋진 총잡이로 나왔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너무 늙어 주름이 자글자글한 것도 보기 안쓰러웠고, 그런 나이의 남자에게 프란체스카의 마음이 움직여 정사까지 나누게 되는 전개도 큰 공감이 되질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며 같이 도망가서 살자는 킨케이드의 유혹도 도덕적으로 용서하기 어려웠다. 프란체스카는 남편과 별 불만 없이 살고 있었고 아이들까지 있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카가 가정을 버리고 킨케이드를 따라나섰다면 돌팔매를 당할 만한 줄거리였다. 여성들이 남편의 외도에 대해서는 ‘절대 불가’의 입장을 밝히면서도 이 영화에 대한 평가에 관대한 것을 보면 대리만족이 아닐까 한다. 영화에서는 되고 현실에서는 안 된다는 이중 잣대인 셈이다. 우리나라 성인 남녀의 외도에 대한 조사 자료는 많다. 남자들의 외도율은 매우 높다. 여성들도 남성들보다는 낮지만 꽤 높은 수준이다. 통계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신뢰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 주변의 남자들이 예외 없이 외도 경험이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들은 성 경험이 있어야 비로소 성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군대에 입대한, 성 경험이 없는 졸병들에게 부대 인근의 매춘부를 붙여줄 정도로 남자들은 ‘숫총각 딱지’를 떼도록 강요받는다. 요즘은 성매매를 강력히 단속하고 있어서 분위기가 좀 달라지기는 했지만, 남성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여자들과 섹스할 수 있는 기회는 널려 있는 편이다. 외도의 기준이 어디까지인지는 애매하다. 배우자 이외의 이성과 데이트 정도 한 것을 외도로 보는 사람도 있고, 정사를 나눈 것만 외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남자들은 외도 기준을 상당히 깊은 관계에 둔다. 매춘부와의 섹스 정도는 외도로 보지 않는 사람도 많다. 남자의 본능 차원에서 이해돼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도 섹스를 할 수 있으므로 마음을 주지 않으면 외도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종종 여성들도 마음을 주지 않은 섹스 정도는 눈감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편의 외도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니 외도를 하더라도 들키지 말아야 한다. 여성들은 폐경이 되면 성욕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남성들은 여전히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다. 섹스리스 부부 중 남편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 병이 생길 수 있다며 불만을 터뜨리지만 성욕이 떨어져버린 아내는 꿈쩍도 안 한다. 신혼부부라면 이혼 사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50대가 넘으면 애걸해봤자 “나이 들어 주책”이라는 소리만 들을 뿐이다. 가수 조영남씨가 쓴 책에 보면 5년마다 배우자를 바꾸는 공약을 내세우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개그가 있다. 남녀 모두 열렬히 동의하는데 특히 여자들이 더 뜨겁게 호응하더라는 얘기다. 생물학적으로 3년이 지나면 호르몬 작용에 의해 사랑하는 감정이 식는다고 한다. 그 무렵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가 가교 역할을 하게 되면서 부부의 정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미국 영화에는 정상적으로 부부생활을 하는 커플보다 이혼을 하거나 별거인 커플이 더 많이 등장한다. 전 남편과 현 남편이 같이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갖는 장면도 있다. 우리나라도 이혼율이 높아지면서 이혼에 대한 시각이 상당히 관대해졌다. 이제 혼인빙자간음죄에 이어 간통죄까지 폐지되었다. 개인의 사생활을 국가가 개입해 제재를 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섹스는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종족보존의 본능을 벗어나 섹스라는 쾌락을 즐길 줄 아는 동물이다. 그런 선물을 도덕적 잣대 때문에 억제하고 살아야 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각자가 알아서 처신할 일이지만, 외도는 ‘적당한 간식’이며 ‘삶의 활력소’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많다. 단, 배우자에게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 2017-03-1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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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라이프] 2017 정유년, 닭띠 연예인과 이들의 새해 포부는?
- 글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knbae24@hanmail.net) 2017년 정유년(丁酉年)의 새해가 밝았다. 힘찬 닭 울음소리로 새해를 희망차게 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닭띠 연예인들이다. 닭띠생은 지능과 지모에 뛰어나고 앞을 내다보는 예견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날카롭고 단정하며 체계적이고 결단력도 있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이 때문에 연예인 스타 중에는 닭띠가 유독 많다. 정유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겠다는 닭띠 연예인은 누구일까. 대중과 만나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2005년생 12세 아역 스타 김유빈에서부터 1933년생 84세 원로가수 명국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연예인이 닭띠다. 가장 어린 2005년생 12세 닭띠 연예인에는 아역 스타 김유빈, 김지영, 홍화리와 리틀 싸이 황민우 등이 있다. 1993년생 24세 닭띠 연예인은 드라마 , 으로 스타덤에 오른 박보검, 가수와 연기자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아이유·정은지, 국민 남동생으로 뛰어난 연기력을 펼치고 있는 유승호가 있다. 이 밖에 1993년생 닭띠 연예인에는 힙합 스타 비와이, 최고 아이돌 그룹 엑소의 디오,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로이킴과 백아연 등이 있다. 1981년생 36세 닭띠 연예인 중에는 대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 톱스타들이 아주 많다. 요즘 시청자들과 만나고 있는 드라마 에서 여자 주인공으로 나와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최고 인기를 얻고 있는 톱스타 전지현, 등 수많은 영화에서 강력한 흥행 파워를 자랑하고 있는 최고 미남 스타 강동원,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여성들의 절대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조인성이 대표적인 36세 닭띠 연예인이다. 뛰어난 가창력으로 사랑을 받으며 드라마 OST 여왕으로 등극한 거미와 린, 저음과 고음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목소리 하나로 대중을 감동시킨 9연승에 빛나는 록밴드 국카스텐의 하현우, 매력적인 목소리로 여성 팬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박효신과 케이윌, 여자 힙합 뮤지션 중 가장 인기가 높은 윤미래, god 출신으로 시원한 가창력이 강점인 김태우 등이 36세 닭띠 가수들이다. 원조 걸그룹 SES의 요정에서 연기자로 변신한 유진, 드라마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소유진, 예능과 드라마를 오가며 활동하는 송지효, 강렬한 연기로 존재감이 확실한 김래원, 부드러운 감성을 드러내는 이상윤, 훈남 이미지의 이동욱은 36세 닭띠 연기자이고 개그맨 허경환도 1981년생 닭띠 연예인이다. 1969년 48세 중년의 나이에도 대중에게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닭띠 연예인도 적지 않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코믹 연기는 물론 중후한 연기까지 해내며 다양한 캐릭터 연기를 소화하고 있는 김승우, 작곡가·가수·예능 프로그램 MC로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윤종신과 주영훈,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선도하는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대표, 모델 출신 연예인 이소라, 높은 인기를 누리며 연기자로 맹활약하고 있는 하희라, 신애라, 윤유선이 48세 닭띠 연예인이다. 신세대 스타를 능가하며 전방위 활동을 펼치고 있는 1957년생 60세 닭띠 연예인도 많다. 최근에도 신곡을 발표하며 가수로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노사연과 최진희, 이용, 김수철, 팔색조 연기로 시청자와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송승환, 김갑수, 강석우, 김보연 등이 대표적인 60세 닭띠 연예인이다.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영화, 무대 등을 통해 대중과 만나는 1954년생 72세 닭띠 연예인은 조영남, 임현식, 선우용녀, 현철, 이상해, 박인환, 박인희, 박일남, 장용, 최주봉, 김도향, 서유석 등이고 84세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여전히 무대에 서는 원로가수 명국환, 원로 코미디언 임희춘 등은 1933년생 닭띠 연예인이다. 2017년 정유년, 자신의 해를 맞은 닭띠 연예인들의 새해 포부는 무엇일까. “건강이 허락하는 한 무대와 방송에 계속 출연하겠다. 84세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가수로서 열정과 노래에 대한 애정, 그리고 팬이 존재하는 한 노래를 부르겠다. 2017년에는 닭띠 해인 만큼 더 많이 활동하겠다.” 원로가수 명국환의 새해 포부다. 조연 연기자로 최고의 위치에 오르며 수많은 드라마에서 감초 연기로 빛을 발하고 있는 중견 스타 임현식은 “1969년 MBC 공채 1기로 연기활동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연기를 하지 않은 해가 없었다. 지난 48년 동안 드라마와 영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시청자와 관객들을 만난 것처럼 올해도 드라마 등을 통해 시청자와 만나고 싶다. 특히 올해는 노년의 사랑을 멋지게 소화하는 멜로 연기에 도전하고 싶다”며 새해 바람을 피력했다. 여전히 청춘스타의 외모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60세의 강석우는 “나이 들어가면서 더 절감하게 되는 것은 가족의 소중함이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생활이 불규칙해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다. 올해는 라디오 DJ와 드라마 활동을 하면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많이 갖고 싶다. 연예인으로서뿐만 아니라 가장으로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소박한 소망을 밝혔다. 세 아이와 함께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48세의 신애라는 “미국 캘리포니아 히즈 유니버시티에서 밟고 있는 기독교 교육학 박사과정을 충실하게 공부하고 싶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밝게 자랄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도 소중한 일이다. 미국에서 부모를 잃는 한인 청소년들이 급증하고 있는데 한인들이 입양해서 맡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올해 더 열심히 노력해서 미국의 많은 한인들이 부모가 없는 한인 청소년들을 입양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새해 목표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왕성하게 펼쳤던 사랑 나눔을 미국에서도 여전히 실천하는 모습이었다. 지난해 2월 출산해 아이 엄마가 됐지만, 여전히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36세의 전지현은 “현재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 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새해 목표다”라고 말했고 여성 팬뿐만 아니라 남성 팬도 많은 조인성은 “올해는 이전과 다른 모습과 분위기를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나 작품을 선택해 시청자와 관객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많은 중년 여성 팬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국민 남동생 박보검은 “새해에도 좋은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 국내외 팬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작품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닭띠의 해인 2017년 정유년의 가장 큰 목표다”라며 원칙적이면서도 진정성 있는 바람을 드러냈다. 자신들의 해를 맞은 수많은 닭띠 연예인들이 2017년 정유년에 어떤 활동을 펼칠지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 2016-12-23 1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