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은 행정구역상으로 충청북도다. 하지만 북쪽으로 강원도 영월군, 동쪽으로 경상북도 영주시, 남쪽으로 경상북도 예천군과 문경시, 서쪽으로 충청북도 제천시와 접해 있어서 주변과 연계한 여행을 계획할 때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단양의 자연은 짓누르던 일상의 무게를 날려버리고 지친 마음을 위로받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단양의 깊은 산과 계곡이 주는 힐링이 더할 나위 없다. 계절이 바뀌어가는 자연 속에서 한시름 내려놓고 푹 쉴 수 있는 푸근함 그 자체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가게 주인이나 지나가는 분들 모두 선량하고 친절해서, 이런 게 사람 사는 맛인 듯 느끼게 해주었다.
태풍, 시루섬의 기적
우리가 살아가면서 언제나 순항만 이어질 수 있을까. 지난여름의 장마와 더위, 그리고 무시무시한 태풍은 평온했던 일상을 바꿔놓고 사라졌다. 이처럼 해마다 맞닥뜨리는 장마와 태풍으로 무수한 아픔이 기억 속에 남겨진다. 1972년 8월 이곳 단양의 남한강 유역에 위치한 시루섬 마을에도 태풍이 강타했다.
당시 25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던 시루섬을 삼킨 태풍 ‘베티’. 남한강의 갑작스러운 범람이 시작되자 마을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빗줄기는 멈추지 않았고, 결국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모두 피신했다. 높이 6m, 지름 5m짜리 물탱크에 올라선 마을 주민은 198명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서로 팔짱을 낀 채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게 고립된 상태로 14시간을 버텼다. 이때 엄마가 안고 있던 백일이 지난 아기가 압박에 못 이겨 끝내 숨을 거뒀다. 사람들이 동요하면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는 처지여서 혼자만 슬픔을 삼키던 아기 엄마의 이야기를 시루섬은 기억한다.
어쩌면 살아남기 어려울 수도 있었던 14시간의 절박한 사투였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서로 손을 잡고 버텨낸 협동·단결·인내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단양군에서는 시루섬의 기적을 콘텐츠화했다. 이제는 시루섬의 차분해진 자연 속에서 되짚어보는 안타까운 이야기와 함께 현재를 본다. 부근에 이끼터널과 수양개빛터널, 잔도길과 만천하스카이워크가 있다. 느림보 강물 길을 따라 천천히 돌아보며 조용히 자연을 즐겨볼 산책 코스다.
신선이 노닐던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이어서 단양 8경 중 제1경인 하선암, 제2경인 중선암, 제3경인 상선암을 돌아볼 차례다. 자동차로 달리면 바로바로 이어져 있어서 느긋하게 단양의 비경을 구경할 수 있다. 조약돌 탑이 즐비한 하선암 계곡의 느릿한 물 흐름을 바라보는 여행자들이 마냥 여유롭기만 하다. 출렁다리가 이어져 있는 중선암 숲은 고요하다. 출렁다리 앞 벤치에 앉아 가게 주인과 단양의 자연에 대해 몇 마디 이야기하기도 하고 중선암을 찾는 이들과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참 쉴 수도 있으니, 이 아니 느긋할 수가.
중선암에서 상선암으로 가는 길목에 특이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산 아래 길 옆으로 소형 동물 옹벽 탈출 시설이다. 도로 건설 등으로 많은 소형 동물이 측구 등에 빠져 죽기도 한다. 이때 소형 동물의 탈출이 어려워, 배수관에 경사로를 설치하여 소형 동물의 탈출을 도와주는 시설이다. 도로를 횡단하는 동물이 높은 옹벽에 막혀 탈출하지 못해 로드킬당한 모습을 가끔 본 적 있다. 이렇게 섬세하고 친절한 인공 구조물이라니, 고마울 따름이다.
상선암 계곡에서 마을로 오르면 집집마다 마당에 널어놓은 고추가 빨갛게 잘 마르고 있다. 이런 태양초라면 김치도 맛있고 어떤 요리든 맛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옆 마당의 평상에 고사리, 다래순, 오미자 진액, 취나물 등을 소쿠리에 담아놓고 가격을 적어놓았다. 3000원, 5000원… 이른바 무인 상점이다. 시골 분들의 정성이 담긴 식재료 맛은 남다를 듯하다. 지나던 마을 어르신이 앞산을 바라보면서 예부터 신선이 머물렀다는 전설의 상선암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신다. 덕분에 단양의 산천에 얽힌 구수한 이야기도 듣는다. 자신이 사는 곳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자신 있게 들려줄 수 있는 자부심은 매우 멋지다.
오랜 시간 속의 풍경, 사인암
단원 김홍도가 이곳 겹겹의 격자무늬인 사인암을 그리려고 붓을 잡고 1년여를 고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절경을 보여준다. 흔히 말하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배경을 이룬다. 사인암은 약 50m 높이의 멋진 바위 아래 남조천이라는 못이 함께하고 있어서, 바라만 보는 게 아니라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그 안에 들어가서 물장구도 치고 물고기도 잡는다. 거기에 산 정상의 소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단양 8경 중 4경에 속한다.
바로 옆으로 출렁다리를 건너기 전 청련암을 둘러보아야 한다. 청련암은 사인암과 맞닿은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속리산의 말사다. 팔작지붕 구조의 극락 칠성각이 차분히 맞는다. 무엇보다 사인암 뒤편 암반지대 사이의 삼성각이 눈에 들어온다. 가파른 계단 옆으로 많은 이들의 염원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단양 도담삼봉(島潭三峰)의 풍류
단양 여행 중이라면 도담삼봉은 기본 코스인 양 당연히 들를 곳으로 생각한다. 많이 알려져 있고 몇 번씩 보았던 곳이어도 단양 시내에서 가까워 다시 한번 들러보지 않을 수 없다. 남한강이 휘도는 곳에 세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반영을 이루어 그 형상만으로도 눈에 담아둘 만하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할 만큼 이곳을 사랑했다 하니, 옛 시절의 풍류도 떠올려본다. 도담삼봉 하류의 석문까지 돌아보고, 여유롭다면 유람선과 모터보트의 즐거움도 챙겨보자.
참고로 단양팔경은 단양군의 8군데 명승지로, 단양을 중심으로 12km 내외에 모두 자리 잡고 있다.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 사인암, 구담봉, 옥순봉, 도담삼봉, 석문이다.
구경(九景)시장의 마늘 맛 이야기
숙소로 가는 길에 단양 구경시장을 지나칠 수 없다. 단양팔경에 이은 아홉 번째 볼거리라는 뜻의 구경(九景)시장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이 오간다. 구경시장은 상가건물형의 중형 시장으로, 장날은 매월 1일과 6일이다. 길 건너 맞은편에 주차장이 있다. 시장 근처에 드니 마늘 냄새가 확 풍긴다. 마늘로 유명한 단양임을 절로 실감한다. 입구부터 마늘이 주렁주렁, 마늘순대, 마늘만두, 마늘닭강정, 마늘빵, 마늘전병 등 끝도 없는 마늘 먹거리다. 몇 군데는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풍경을 이루고 있다.
숙소, 소선암 자연휴양림으로
자연휴양림은 각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PC나 모바일 앱으로 ‘숲나들e’ 사이트에서 예약 가능하다. 비용이 대체로 저렴해 매월 예약창이 열리면 재빨리 예약해야 한다. 각기 차이는 있지만 신청 시 경쟁률이 높다.
단양 선암계곡 가장자리에 자리한 소선암 자연휴양림은 숲속의 집이다. 숲으로 둘러싸인 산중이어서 숙소로 들어가는 길이 마치 속세를 벗어나는 기분이다. 자연의 풍경 속에 잠겨 마음껏 몸에 생기를 집어넣을 기회다. 울창한 숲과 깊은 계곡은 자연스럽게 숲 놀이터와 물놀이장이 된다. 휴양림 안에 두악산 등산로가 연결되었고, 유아숲체험관과 목재체험관도 있다. 숲 내부의 다양한 시설을 이용하며 평온하게 이곳에서만 시간을 보내도 문제없다. 피톤치드를 온몸으로 받으며 고요한 숲에 푹 잠겼다.
“아무도 없다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히고 세상이 무채색이 되었다가 누군가 날 알아주면, 단 한 명이라도, 갑자기 숨이 쉬어지고 세상이 색깔을 입게 돼. 그제야 살아볼까 하지.”
가정의 달을 맞아 5월호 주제를 일찌감치 ‘날 알아주는 한 사람의 힘’으로 잡고 여유를 부리던 필자는 마감이 점점 다가오면서 여러 목소리와 이야기 사이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차,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애만 태우다가 시댁 형님들과 나눈 대화방에서 글머리를 찾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큰형님!
‘하늘꽃’ 지고 ‘땅꽃’ 피는 계절
모진 서너 해, 역병 맞은 세상 꿋꿋하게 견디더니 긴 세월 품었던 설움 한꺼번에 폭발한 올봄. 산수유, 벚꽃이 천지사방 만발했습니다. 그동안 자기 순서 지키며 차례로 피던 봄꽃이 너나 할 것 없이 꽃망울 펑 펑 펑 터트렸으니까요. 긴 겨울 메마른 가지 애써 외면하면서 덩달아 하늘 볼 일 마다했는데, 마을마다 거리마다 천변(川邊) 따라 펼쳐진 꽃 대궐 덕분에 하늘 한껏 올려다보며 봄을 만끽했습니다. 필 때도 갑자기, 질 때도 후두둑 하더니 행여 아쉬울세라 영산홍, 철쭉, 민들레, 오랑캐꽃, 할미꽃까지 땅꽃이 뒤를 이었습니다. 하늘만 쳐다본다고 시샘이나 하듯 노랑, 보라, 진분홍, 연분홍 색색 향연을 펼치지 뭡니까. 독자분들이 이 글을 읽을 5월엔 아마도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담쟁이덩굴, 등나무 잎겨드랑이에서 주렁주렁 앙증맞은 꽃을 피우겠지요.
우울하고 기운 없는 날
하늘 기운과 땅 기운을 연결해 가득 충전해주는 존재가 바로 부모 아닐까요. 이름 모를 혹은 이름 없던 꽃에 일일이 이름 붙여 불러주면 내게 다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에 낳아 이름 지어 명자야, 경희야, 향순아, 옥임아, 종섭아 부르고 또 부르던 부모.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부모.
우울하고 기운 없는 날, 필자는 부모님 뵈러 갑니다. 결혼하고 처음 맞은 어버이날, 스물넷 어린 새댁이던 필자는 같이 살던 시부모님 몰래 친정에 다니러 갔습니다. ‘힘들다, 시어른과 같이 지내기 참 무섭다, 엄마 아버지 너무 보고 싶다’ 입 밖으로 하소연이 시작되려던 찰나 한 말씀 하셨습니다. “얼른 집에 가거라. 어른들 걱정하실라.”
아버지는 딸내미 옷차림새만으로도 허락 없이 왔다는 게 보이는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때는 참 서운하고 서러웠는데 철이 조금 든 지금 생각해보니 시어른들 눈 밖에 날까 봐 애틋한 마음 숨기고 서둘러 시댁으로 보내셨다는 걸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내 편’ 응원이 필요할 때면 필자는 부모님 뵈러 갑니다. 좋아하는 배추전 잔뜩 부쳐주시면 손으로 주욱 찢어 양념장 콕 찍어 맛나게 먹습니다. 사랑 한가득 충전해 배부르면 그제야 웃음 찾아 돌아오곤 합니다.
아름다운 신부, 두봉 주교
올해 93세를 맞은 두봉(杜峰, 본명 르네 뒤퐁) 주교는 1969년부터 1990년 정년까지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을 지냈습니다.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난 그의 한국식 이름 두봉(杜峰)을 풀면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라는군요. 극빈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6.25전쟁이 끝난 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나라였던 한국에 파견된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선교사에게 가장 어려운 나라로 가는 것만큼 기쁘고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고 반문하는 그는 마음 그릇 크기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꼬박 두 달 반 배를 타고 도착한 한국에서 스물여섯부터 구순이 넘은 지금까지 헌신하고 봉사한 두봉 주교.
전쟁으로 폐허가 된 당시 한국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그 시절 한국 사람은 좋았다며, 그렇게 참담한 지경에 처했음에도 참 떳떳하고 친절하고 인간다운 인간이랄까 한국 사람이 풍기는 인상이 좋았다고 회고합니다. 불우한 청소년과 농민을 돌보고 교육하고 인권을 신장하는 일에 한평생 헌신해온 그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집니다.
기쁘고 떳떳한 삶의 원동력
한국으로 선교 온 32년간 신부가 된 아들에게 매주 편지를 보내온 아버지.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자식을 한국에 바치는 입장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며 편지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두봉 주교 품에는 아버지의 편지가 있습니다.
“일어나서 편지를 쓴다. 친애하는 나의 작은 르네야. 나는 어둡고 흔들리는 외로움 속에 서서 편지를 쓰고 있단다. 여긴 비가 너무 많고, 한국에는 비가 너무 적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하늘에서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니.”
어머니도 떠난 텅 빈 집, 병상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아들에게 삐뚤빼뚤 써 내려간 편지를 생전 아버지 대하듯 귀하게 여기는 두봉 주교. 특히 1986년 5월 9일 아흔이 되신 아버지가 부친 마지막 편지를 자주 꺼내봅니다. 보름에 한 번 프랑스로 답장을 보내던, 이제는 구십 훌쩍 넘긴 아들이 1986년 구십 아버지한테 시간여행하듯 답장을 합니다.
“아빠, 고마워요. 내가 아빠 엄마로부터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았다는 것을. 이 편지 30년 동안 계속 보내주신 것 고마워요. 난 아빠 엄마 너무 좋아. 하늘나라에서 기쁘게 영원히 행복하게 사실 거예요. 나도 언젠가 따라갈 거예요. 따라갈 때까지는 돌봐주시고, 그 다음에도 함께 기뻐할 거예요. 고마워요, 고마워.”
누군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두봉 주교는 생전이나 돌아가신 뒤나 아버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요. 그 힘이 70년 가까이 낯선 땅에서 사랑을 나누고 헌신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일상에서 누군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느끼나요. 곁에 가족이 있어도 고립과 단절로 외로워하는 게 요즘 우리 모습입니다. 각자 방문 쾅 닫고 마음도 굳게 닫아걸고 말입니다. 열려고 있는 문인지, 닫으려고 있는 문인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두드립니다. 문도 두드리고 맘도 두드려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숨통 트이고 휴, 살 만해지니까요.
진정 난 몰랐었네
다리가 불편한 아들에게 곁을 주지도, 다정하게 대하지도 않은 엄마. 학교에서 직장에서 불구라고 차별받으며 서러움만 켜켜이 쌓여가던 아들. 남편마저 일찍 여읜 엄마는 아들이 약해질까 하는 노파심에 되레 강하게 키우려 했지만, 평생 아들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아파합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jtbc)에 등장하는 엄마와 아들 이야기입니다. 그런 엄마가 덜컥 치매에 걸리면서 가족의 갈등이 점점 커지고 고통은 증폭됩니다. 치매로 기억을 잃은 엄마가 어느 날 요양원에서 사라집니다. 불편한 다리로 주변을 찾던 아들은 저만치 요양원 마당에 쌓인 눈을 빗자루로 치우는 엄마를 발견합니다. 자식 고생시키는 엄마에게 버럭 화가 났다가 불현듯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릅니다.
내 앞의 눈을 쓸어준 사람
가난했던 그때 달동네 꼭대기에 살던 모자는 한겨울 내리는 눈 때문에 엄청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등교할 때마다 누군가 깨끗하게 쓸어놓은 덕에 눈길을 넘어지지 않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랫집 아저씨가 눈 쓰는 모습을 본 아들은 ‘아, 저분이 그동안 눈을 쓸어주셨구나’ 합니다. 치매로 모든 기억을 잃은 엄마가 습관처럼 눈이 오는 날이면 빗자루로 눈을 치우는 모습을 보고서야 아들은 깨닫습니다.
‘내가 비탈길에서 넘어질까 봐 엄마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눈을 쓸었던 거구나.’
아들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엄마는 또 눈을 쓸러 나갔던 것입니다. 그제야 얼어붙은 아들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엄마를 향한 원망과 서러움과 미움이 한순간에 눈물로 녹아내립니다.
버림받은 마음에 새살 돋도록
자녀의 경제적 독립과 출세, 아니 취업과 결혼이 힘겨운 최근엔 사람 노릇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비는 게 부모 심정입니다. 내 자식 걱정에만 우리가 안달할 때, 사회 한편에서는 부모 학대와 유기로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이 시설 보호를 마치고 해마다 2000~3000명씩 ‘자립준비청년’(예전에 ‘보호종료아동’으로 불렸던)이란 이름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2023년 현재 보육원 졸업할 때 지급되는 정착금(1000만 원)과 자립수당(5년간 월 40만 원)이 조금씩 올라서 경제적으로 힘이 된다지만, 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 불안과 무력감이 삶을 포기하도록 몰고 가는 경우도 많은 게 현실입니다. 비슷하게 힘든 상황에서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한 청년의 경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다고 합니다. 소통하고 의논하고 연락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있고 없고가 생사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는 사례가 참 많다네요. 보육원 원장님이나, 시설 프로그램에서 만난 멘토나, 그 누구든 고민을 들어주고 모르는 것 물어보면 가르쳐줄 수 있는 어른 한 명만 있어도 비극을 막을 수 있다는 겁니다. 나를 지켜줘야 할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마음에 새살이 차오르도록 저부터 움직여야겠습니다.
내가 당신 받침이 될게요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고, 귀 기울이고, 가슴으로 안아줄 때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갓난아기 업을 때 포대기 두르고 아기 엉덩이를 손으로 받쳐주면 한결 가볍습니다. 책이며 서류며 물건이며 온갖 것 가득 넣은 가방을 어깨에 멜 때도 한 손으로 아래를 살짝만 받쳐줘도 아프던 어깨가 훨씬 가볍습니다. 공책에 교과서에 연필로 볼펜으로 꾹꾹 눌러쓰면 뒷장에 우툴두툴 글자가 튀어나오고 물듭니다. 그럴 때 플라스틱 책받침 하나 끼우면 뒤탈이 없어 속상하지 않습니다. 살짝만 받쳐주어도 우리 짐은 가벼워지고 삶의 무게는 덜어지고 아팠던 어깨는 견딜 만해집니다. 서로 받쳐주며 손 잡고 맘 잡고 살아볼까요?
어릴 적 주입식 교육의 힘은 아주 세다. 우리 모두가 흔히들 아는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말고도 그 시절엔 각 지역의 특색이나 지역명은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지 않았나 싶다. 그중에 영주도 있었다. 영주라 하면 무조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부석사 무량수전이 따라붙었다. 강산이 무수히 바뀌고 세상은 달라졌어도 부석사 무량수전의 고장, 경북 영주다.
또는 영주 사과일까. 선비의 고장답게 사찰이나 서원은 당연하다. 추억의 풍경이 곳곳에 남겨져 있어 도심과 골목길에서 가슴 뭉클한 그리움도 솟는다. 그리고 무섬마을을 지키며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둘러보면 어디서든 수백 년 혹은 수십 년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영주 여행은 옛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해도 괜찮을 듯하다.
물 위에 뜬 섬,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
영주의 내성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너른 모래톱, 그 위로 S라인의 곡선이 길게 이어진 무섬마을 외나무다리의 풍경이 무심하다.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고 해서 무섬마을이다. 물 수(水), 섬 도(島). 수도리의 물섬이 무섬이 되었고,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가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다. 외나무다리 저편으로 수도교라는 콘크리트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300년 넘도록 무섬마을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이 다리였다.
홍수라도 나면 다리는 강물에 잠겼고 휩쓸려 내려가, 그럴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다리를 다시 놓곤 했다.
폭 20~30cm, 높이 60cm, 총길이 150m. 폭이 좁아 걸을 때면 아슬아슬해서 장대에 의지하기도 했다. 한 사람만 걸을 수 있는 폭이어서 예전에는 건너편에서 오는 사람이 보이면 지레 모래톱에 앉아 기다렸다고 한다. 지금은 외나무다리 중간의 몇 군데에 마주 오는 이를 피할 수 있는 ‘비껴다리’가 놓여 있다. 걷다가 어질하거나 자칫 기우뚱하다가는 물에 빠질 듯한 두려움도 생긴다. 다리 위를 걷는 발끝만 보며 걷다가 강의 물결에 취하면 낭패다. 그래서 강 건너를 잇는 이 다리는 그 옛날엔 시집올 때 가마 한 번 타고, 죽어서야 상여 타고 한 번 지나간다는 애환이 서려 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물돌이 마을, 무섬의 느린 시간 속에 잠겨 모래톱에 주저앉아 저편을 바라보면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랫빛…’ 이 노래가 절로 입안에 맴돈다.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운 외나무다리는 이제 영화나 드라마, TV 예능과 CF 등의 촬영지로 알려지고 있다.
잠시 숨을 고르며, 무섬마을
“십 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에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시인 조지훈은 서울로 유학을 떠나면서 무섬에 남겨둔 아내와의 이별을 ‘별리’(別離)라는 시에 담았다. 조지훈 시인의 처가로 알려진 김뢰진 가옥은 마을 첫머리쯤에 있었다.
무섬의 집들은 새롭게 조성된 한옥마을과는 달리 늘 그 자리에 있던 풍경이다. 한때 100여 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50여 가구만 사는 작은 마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무섬마을은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다. 우리나라에서 일곱 번째라고 한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선정되었다. 만죽재(晩竹齋), 해우당(海愚堂)을 비롯해 지정문화재가 10곳이고, 100년 넘는 고택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울 밑에 선 봉숭아도, 풀숲 가득한 곳에 피어난 들꽃들도 물씬한 그리움을 소환한다. 수백 년 켜켜이 쌓인 깊은 역사가 그대로 전해지는 옛집들이 고스란히 무섬마을이었다.
마을이 어찌 이리도 조용할까. 발소리조차 민망하다. 걷다가 호박이 매달린 담장을 향해 셔터를 누르니, 마당에서 일하시던 어르신이 “그게 뭐 볼 게 있기나 한가. 쓸데 있으면 그 호박 따가”란다. 그래도 되는지 싶어서 괜찮다고 하니 직접 두 개나 따주셔서 황송한 마음에 보물처럼 잘 모시고 왔다.
영주라 하면 부석사
유홍준 교수는 자연과 건축이 제자리를 지키며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문화유산 부석사는 그 어떤 표현으로도 나타내지 못한다고, 오직 한마디 위대한 건축이라고 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조선 땅 최고의 명상로’라 칭송한 부석사 당간지주 인근 은행나무 산책로는 여전하고, 그 길 위에서 홀로 명상에 잠겨볼 만하다.
천년고찰 부석사의 하이라이트 무량수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다.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그 앞으로 펼쳐진 백두대간 능선의 풍광에 넋을 잃어보는 것도 부석사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온통 경사진 경내를 돌기엔 다리가 뻐근하고 숨찰 때도 있다. 하지만 영주까지 와서 어찌 유구한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는 목조건물 부석사에 들지 않을 수가 있을까.
마음 내려놓고, 소수서원과 선비촌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인정받았던 곳이다.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당시 향교나 서원은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는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국립인 반면 서원은 사립학교라 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한 소수서원의 역사와 향기가 물씬하다.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때맞추어 선비 복장으로 글을 읽는 이들의 소리도 들을 수 있고, 하얀 고무신이 가지런한 그 뜰에 앉아 가만히 옛 선비들의 기운을 전해 받을 수도 있다. 선비교를 따라 너른 뜰을 지나면 선비촌으로 접어든다. 옛 선비정신과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고래등 같은 양반님네 고택의 안마당과 대청마루, 담 너머로 철 따라 피어나는 꽃들과 배롱나무, 그리고 강학 시설과 저잣거리도 조성되어 있어 옛 선비마을의 풍취가 가득하다.
오래된 골목길을 걷다, 근대역사문화거리
현대 일상에서 찬찬히 되돌아보기 좋은 곳으로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가 있다. 영주 원도심에 가면 근대 생활 모습과 건축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근대 산업 시기의 양곡가공업을 짐작해볼 만한 풍국정미소, 문을 밀고 들어가니 여전히 동네 주민의 머리를 깎고 계시던 80년 전통의 영광이발소, 몇 걸음 건너편에 고딕 건축양식의 영주 제일교회가 붙어 있고, 근대 시기의 주거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영주동 근대 한옥은 주변으로 풀밭이 무성하다.
또한 관사마을은 역사문화의 공간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에 영주-안동 간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고 철도 역무원들의 관사가 지어지면서 형성된 마을이 바로 이곳이다. 그래서 불리게 된 관사골은 반세기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칠이 벗겨지고 낡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일식 목조 관사 주택의 전형인 5호와 7호 관사를 볼 수 있었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니 집주인이 수리를 하는 중이다. 예전에는 집 안에 욕실과 화장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신기해하던 집이었지만, 근대 건축이라고 지정만 되면 뭐하냐 넋두리 한다. 낡고 헐어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수리를 할 수밖에 없다는데 곤란한 점이 많은 모양이다. 도시생활사적 가치가 크다지만 변화에 따른 관사골 주민들의 환경과 지속 가능한 삶의 여건도 염두에 둘 일인 듯하다. 그럼에도 낡은 지붕과 담벼락, 포도가 주렁주렁 달리던 안마당의 텃밭에서 정 깊은 추억이 솟는다. 관사골 저편 언덕 위로 부용공원이 내려다보고 있다. 흑백 필름 같은 풍경 속에서도 현재와 이어지는 스토리텔링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인생을 바꿔야지!” 새벽 2시, 야근 후 돌아와 죽어도 농부가 되겠다는 남편의 아우성에 아내는 결단을 내렸다. 그렇게 어제까지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던 남편은 청바지를 입고 밭으로 향했다. 땅에 심은 건 포도나무였지만, 부부는 꿈을 심었노라 말한다. 그들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남편은 뭐든 이뤄진다 하고, 아내는 뭐든 이뤄지지 않아도 괜찮다 한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들의 꿈은 자연히, 그리고 자연이 이뤄가리라는 것이다.
테루아(Terroir)는 프랑스어로 ‘땅’을 의미한다. 와인이 만들어진 땅을 가리킬 때 흔히 사용한다. 충주의 와이너리 ‘작은 알자스 레돔 테루아’(이하 작은 알자스)는 소설가 아내 신이현(57)과 농부 남편 도미니크 레몽 에으케(53)의 꿈을 심은 땅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직접 과일을 농사지어 ‘내추럴 와인’을 만든다. 작은 알자스에 도착했을 때, 부부는 ‘웰컴 드링크’처럼 내추럴 와인을 내왔다. 풋사과 시드르였다. ‘폭’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더니, ‘꼬르르르’ 미세한 탄산이 잔을 타고 미끄러졌다. 그 맛은 어떤가 하니, 마치 와인계의 평양냉면이라고 할까? 깔끔하면서도 은은하게 산뜻함이 감돌았다. 단순히 ‘맛있다’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했다. 걸맞은 단어를 고르던 차, 아내 신이현이 제대로 설명에 나섰다.
“내추럴 와인은 유기농 과일을 수확해 착즙한 뒤 필터링이나 살균 등을 거치지 않고 만든 와인입니다. 흔히 ‘맛있다’고 표현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려 인위적인 첨가물을 넣지 않고 자연이 준 그대로 발효해서 만든 거예요. 즉 그 과일이 자란 땅이나 한 해의 기후 등에 대한 솔직한 설명과 같죠. 가령 비옥하지 못한 땅에서 나온 와인은 심플한 맛이 나기도 하는데, 그 역시 나름의 개성으로 보는 거예요. 고로 세상에 맛없는 내추럴 와인은 없습니다. 과일이 자라던 땅과 나무, 바람과 햇볕을 느끼고 즐기면 그뿐이죠.”
열매가 좋아하는 날을 기다리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술, 내추럴 와인을 한잔 마시는 것은 한 움큼의 땅을 먹는 것과 같다고 했다. 와인 맛이 다른 것은 땅이 다르기 때문이고, 땅이 다른 것은 땅마다 스며 있는 농부의 땀방울이 다름일 테다. 더군다나 오롯이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내추럴 와인의 경우엔 가히 그 땅에 농부의 철학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미니크는 어떤 농부라 말할 수 있을까? 그는 “땅을 키우는 농부”라 일컬었다.
“농부는 나무만 키우는 게 아니라 땅도 함께 키워야 해요. 일반적으로 포도밭을 한다고 하면 포도가 주렁주렁 많이 열리고, 그것을 수확해 큰돈을 얻는 게 목적이겠죠.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다릅니다. 나무와 땅이 있다면, 우린 땅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지금 당장 열매가 많이 열리는 것보다 땅을 살리는 기쁨이 더 크거든요. 그렇다 보니 농사짓는 방법도 다른 거죠.”
땅을 키우는 차별화된 농법으로 도미니크는 ‘생명역동농법’을 택했다. 생명역동농법이란 한마디로 우주의 기운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다. 식물에 영향을 주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기록한 달력을 농사에 적극 반영한다. 꽃식물이나 잎식물, 열매식물 등 각기 다른 식물은 저마다 좋은 기운이 있는 날엔 활짝 생명을 펼치지만, 그렇지 않은 날엔 조용히 웅크리고 움직이지 않는단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도미니크는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옮길 때 항상 별자리 달력을 펼쳐놓고 식물에게 좋은 날을 찾는다. 와인 역시 같은 방법으로 만든다. 가령 포도를 따거나 착즙할 때는 열매에게 좋은 날을 골라 작업한다. 씨를 뿌려 열매를 수확하고 내추럴 와인이 탄생하기까지, 모든 과정에 인간은 ‘돕는 자’의 역할을 할 뿐 그밖의 모든 것은 자연의 힘에 맡긴다. 그 이름처럼 ‘내추럴’(Natural)하게 말이다. 애당초 땅에 그러한 철학을 심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들의 삶에도 그러한 양식이 깃들었기에 가능했다. 혹자는 이런 부부를 보고 마치 물 따라 바람 따라 유유자적 산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이에 아내 신이현은 “그저 가만히 내버려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살아지는 건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가령 농사에서 ‘자연스러운’ 것은 수확을 위해 인간의 손이 가장 덜 가게 하는 거죠. 그런데 그게 가능하려면 실제로는 초반에 아주 많은 손길이 필요해요. 농부의 상당한 노력을 투여해야만 결국 자연스럽게 식물이 자라고 열매 맺는 시간이 찾아오죠. 물론 몸은 고단하고 힘들어요. 그런데도 자연에 맞춰 산다는 게 엄청난 철학이 있어서는 아닌 것 같아요. 그보다는 우리는 그냥 그게 좋더라고요. 자연에 해가 되지 않는 일이 나에게도 즐거움이 되고, 그것을 목표로 삼으니 소소하지만 매 순간 성공하는 듯한 기분도 들고요.”
농업의 꽃 술, 농부의 손으로부터
부부는 매 순간 성공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정신승리라 하겠다. 물론 그들에게는 그 말이 진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타자로서 일련의 과정을 듣노라면 매 순간 결코 녹록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그 위대한(?) 서막은 그들이 프랑스에서 한국에 오고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익히 알듯 포도농사와 와인 양조라면 프랑스의 여건이 더 나았을 테다. 농사에 관해선 고집스런 도미니크지만, 한국행을 택한 데에는 아내의 의견이 컸다. 사실 도미니크는 농사만 지을 수 있다면 어느 땅이라도 좋다고 했지만 말이다.
“남편이 농부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프랑스 남쪽으로 밭을 보러 다녔어요. 피레네산맥 근처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진 곳이었는데, 비싸지도 않고 환경도 괜찮았죠. 그런데 제게는 너무나 낯설었어요. 남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포도 따는 외로운 동양 할머니로 늙어갈 걸 상상하니 그건 싫더라고요. 마침 한국에 포도 와인은 많지만 사과로 만든 시드르는 없길래, 도미니크에게 한국은 어떠냐고 권했죠. 그렇게 파리의 아파트를 팔고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단순히 남편은 농사를 짓고 싶고, 아내는 한국에 살고 싶어 무작정 삶의 터전을 바꿨다. 한국의 땅값이 얼마인지, 양조장을 짓는 데 얼마가 들지, 생활비는 어떻게 벌지 등등 구체적인 계획도 대책도 없었다. 원대한 꿈만 가득했다.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 망해도 좋다. 적어도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했다는 말은 할 수 있겠지”라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렇게 중고차 한 대를 구입해 새 터를 잡기 위해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농업기술센터에 찾아가 자신들의 처지를 털어놓기도 했고, 공공기관에 도움도 요청했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사과연구소도 가보고 포도작목반에도 갔다.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특히 과일을 직접 농사지어 와인을 만들겠다고 하자 반응은 더욱 냉랭했다. 근처에서 과일을 구입해 양조하는 것이 돈과 수고가 덜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의 훈수가 더해질수록 도미니크의 철학은 되레 견고해졌다.
“농업의 꽃은 술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좋은 술은 농부의 손에서 시작됩니다. 때문에 와이너리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기본이라고 봐요. 농부가 뙤약볕 아래 허리를 구부려 일하는 것은 배를 채우기 위함, 즉 생존을 위한 것이죠. 그러나 농업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술은 휴식과 즐거움을 위한 액체니까요. 우리가 먹는 쌀, 밀 같은 농산물은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그 농산물로 만든 술은 온전히 즐거움을 위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술을 만드는 일 속에서 가장 인간다운 가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애처롭고도 숭고한 농부의 삶
아쉽지만 첫해 사과 농사는 망했다. 안타깝지만 두 번째 농사도 망했다. 그 후로도 장마, 가뭄, 병충해 등 고난은 계속됐다. 자연의 힘에 맞서기 위해 다른 농부들은 관수를 대고, 비닐을 깔고, 농약을 치기도 했지만, 내추럴 와인을 고집하는 도미니크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자연의 섭리대로 땅을 일궈온 것처럼, 야속할지언정 편법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쓰라린 경험은 고스란히 초보 농부에게 귀한 밑거름이 됐다.
“점점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 같아요. 흉년이든 풍년이든 자연이 주는 것을 우리가 너무 슬퍼할 필요도 없고, 또 너무 기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건데, 그럴수록 나무가 깊게 뿌리 내릴 수 있는 좋은 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땅이 좋고 뿌리가 깊이 나면 나무들도 어려운 환경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거든요. 당장은 좀 힘들더라도 먼 훗날을 위해 그 토대를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온종일 땅과 씨름하는 도미니크를 보고 있노라면 아내는 뭉클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애처로운 마음마저 든다. 남편이야 꿈을 이루느라 그렇다 하지만, 소설가 신이현의 꿈이 ‘농부의 아내’는 아니었을 터. 그러나 한국 생활이 서툰 남편의 뒷바라지는 고스란히 아내의 몫이 됐다. 생명역동농법을 위해 소똥이며 꿀벌이며 안 구해본 것이 없고, 갖가지 서류 준비며 비즈니스며 고객 응대며 자신도 처음 해보는 일들을 해내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옳고 가치 있는 일임을 알기에 그녀는 오늘도 기꺼이 꿈의 조력자가 된다.
“도미니크가 만약 다른 일을 한다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돕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 사람이 하는 일이 굉장히 뜻깊다는 걸 느꼈고, 때론 그 모습이 감동적이기도 해요. 남편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옆에서 보면 ‘아, 저 사람이 하는 일이 굉장히 숭고하다’는 생각이 들죠. 물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집안에서는 인정을 못 받는 것처럼 저도 바가지를 긁곤 해요. 그러고 나면 또 미안하고, 힘들어도 도와주게 되고. 사실 이 나이에 제게 새로운 꿈이랄 건 없지만, 차차 땅과 일이 안정되면 양조장을 떠나 조용한 곳에 가서 판타지 소설이나 써볼까 상상해봅니다.(웃음)”
포도밭에서 피어나는 예술
부부가 그리는 ‘작은 알자스’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물었다. 이에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고 했다. 그저 하루하루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주어진 일을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하자는 마음가짐 정도?
“시골에 산다고 하면 ‘힘들게 어떻게 사느냐’며 촌이 가진 소외감을 떠올리는 이도 있고, 전원주택 짓고 제2의 인생을 여유롭게 사는 모습을 그리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식으로 시골이 주는 어떤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는데, 우리 생각은 달라요. 가령 문화, 예술 이런 걸 왜 도시에서, 갤러리에서만 해야 한다고 여기는지 모르겠어요. 최근 양조장에서 ‘농부 요리사 예술가’라는 작은 축제를 열었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거든요. 예술가를 비롯해 마을분들도 오시고 함께 기타 치며 노래도 불렀는데 활기가 넘쳤죠. 그렇게 밭은 수확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얼마든지 예술을 위한 창작의 장으로도 쓰임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그렇게 자연을 향유할 때 땅도 더 즐겁지 않을까요?”
작은 알자스의 첫 와인이 출시된 지 이제 5년 차. 아직 농부로서도 사업가로서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부부는 서두르지 않는다. 와인 사업이 대박 나서 돈방석에 앉는 것이 목표가 아니기에 그렇다. 그저 현재처럼 원하는 방식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그뿐, 수익은 나중 몫이다. 그런데도 주변 이들은 흔히 “대박 나시라! 성공하시라”는 말로 그들을 재촉한다. 이에 그들은 말한다.
“그런 응원은 사실 별 의미 없습니다. 이미 원하는 인생을 사는걸요. 어쩌면 남들 눈에는 불안해 보일지라도 지금이 나쁘지 않거든요. 그러니 제발 그런 걱정은 넣어두셨으면 해요.(웃음) 적어도 우리는 지금 후회 없이 꿈꾸고 있다 말할 수 있으니까요.”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법률가 브리야 사바랭이 1825년 발간한 ‘미각의 생리학’(원제, 한국어판 제목 ‘미식 예찬’)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다. ‘미식과 식도락’의 경전이라 할 이 책은 인류 역사에서 음식을 학문적으로 살펴본 미식 담론의 첫 번째 책으로 꼽히고 있다.
전 세계에서 위드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담론들이 쏟아지고 있다. 우리가 매일 섭취하는 음식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게다가 질병 저항력을 높여주는 신체 면역력이 집중 조명되면서 면역력 향상을 통해 자연 치유력을 높이는 음식과 조리법 등을 너도나도 소개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찬찬히 듣다 보면 건강하게 면역력을 높이고 자연 치유력을 기를 수 있는 식단이란 결국 공통적인 몇 가지로 압축된다. 건강한 식재료 사용, 가공 과정 최소화, 인공 조미료나 방부제, 풍미를 위한 착색제나 인공 향신료 사용 절제 등이다.
이런 담론을 거쳐 새롭게 부상하는 것이 유기농 재료로 구성된 친환경 생채식이다. 환자들이 먹는 특수한 식이요법이라고 생각했던 채식이 유기농과 친환경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관심을 받고 있다. 또한 코로나19로 인한 면역력 체질 강화를 위해 유기농 식재료를 구매하고 채식을 하려는 가정이 늘고 있다.
백화점 식품매장의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던 친환경, 유기농 코너가 그 면적을 넓혀가고 있는 것은 물론, 1인 가구용 유기농 맞춤 밀키트 배송까지 오프라인과 온라인에 걸쳐 친환경과 유기농을 향한 마케팅이 뜨겁다.
채식이 유행이라지만 그다지 맛도 없고 만들기 번거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곳을 방문해보기를 권한다. 생채식 전문 식당 ‘날일달월’이다. 각종 신선한 채소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이곳은 몸속 독소를 배출하고 면역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친환경 유기농 식재료를 기본으로 한 생채식으로 구성한다. 여기에 맛까지 훌륭해 소리 소문 없이 진화 중이다.
유기농 친환경 채소들의 집합소
생채식 식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재료인 채소일 것이다. 어느 친환경 유기농 농장에서 구매하는 것일까? 궁금해서 물어봤다. 어찌 보면 영업 비밀이랄 수도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다 같이 건강하게 맛있게 먹고 행복하게 살겠다는데 영업 비밀이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날일달월의 초록초록 반짝이는 채소들의 원산지를 차례차례 들여다본다.
•쌈채소 전북 남원 사회적협동조합에서 배송
•파프리카 전북 무주와 남원 지지팜에서 배송
•잎줄기 채소 충남 홍성 젊은협업농장에서 배송
•표고버섯 경남 거창 빛솔농장에서 배송
•밤 충북 충주에 위치한 보늬숲농장에서 배송
•당근 & 깻잎 제주도 평대리 부석희 님이 농사지은 당근과 깻잎
•양배추 & 버섯 충북 괴산 박달마을에 위치한 꿈꾸는느티나무농장에서 배송
•양파 & 마늘 경남 창녕 낙붕이네농장에서 배송
•자색양파 & 청오이 전북 부안 총각네농장에서 기른 토종 청오이와 자색양파
•김치 생채소는 아니지만 배추를 발효시킨 김치 역시 채식의 주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음식이다. 날일달월에서는 경남 진주의 법성사 스님이 직접 농사짓고 담근 김치를 배송받고 있다. 종종 경주 김호 장군 종가집 종부의 김치도 테이블에 올라온다. 이밖에도 여희숙 대표가 회장으로 있는 전국의 도서관 친구들이 인근 로컬 농장에서 추천하는 건강한 채소를 필요할 때마다 배송받고 있다. 이외 채소류는 생활협동조합 ‘한살림’과 ‘자연드림’에서 신선한 것으로 구입한다.
몸속 독소 빼주고 면역력 높여주는 해조류 맛 일품
재료가 신선하면 그 자체가 훌륭한 음식이 되는 대표적인 식재료, 해조류. 그래서 해조류는 재료를 걷고 손질하는 정성이 더욱 중요하다. 날일달월에서 사용하는 해조류는 김, 미역, 다시마, 톳, 꼬시래기 등으로 다양하다.
•김 전남 장흥 김양진 님이 생산하는 무산 김
•미역 자연식 식재료 청미래의 자연산 미역
•다시마 전남 장흥 이승호 님이 청정 해역에서 채취한 다시마
•톳 & 꼬시래기 전남 장흥에 위치한 에벤수산의 제품
생채식에서 빠질 수 없는 식물성 단백질 보고, 두부와 콩물
생채식 메뉴에서 빠질 수 없는 두부는 생식에 알맞은 식물성 단백질 보고다. 전북 전주에 위치한 함씨네에서 직접 만든 토종 콩물과 두부, 순두부를 날일달월에서 선보인다. 또한 각종 소스 만드는 데 요긴하게 쓰이는 발효효소들도 전국 각지에서 배송된 제품을 엄선해 사용한다.
•발효효소 변산공동체에서 만든 생강청과 자하생강가루, 경남 하동에서 만든 매실효소, 경남 함양의 오미자청과 양파효소, 버섯균사체 발효 특허품인 현미와 17곡물 발효효소 등이 소스에 사용된다.
디저트를 책임지는 견과류
•생견과 충북상회 광희네 작품이다. 해바라기씨와 호박씨, 아몬드를 72시간 정제해 만들었다.
•잣 경기도 가평은 한국의 유명한 잣 생산 가공지다. 날일달월의 디저트에 들어가는 잣은 경기도 가평 살구재에서 생산된 으뜸 잣을 사용하고 있다.
•대추 충북 보은 국악대추농원에는 유기농 대추가 주렁주렁 열린다. 열린 대추를 날일달월에서 맛볼 수 있다.
전국 제철 과일
•포도 경기도 가평 아름농장
•사과 충북 괴산 가을농원 선녀와 나뭇꾼의 껍질째 먹는 사과
•깐 밤 충북 충주 보늬숲 밤농장
•유기농 감귤 제주도 응모루농장 / 제주도 김건호농장 / 제주도 서귀포 김상현농장
•바나나 자연드림
•단감 & 블루베리 경남 의령군 고상근농장
재료 고유의 맛, 샐러드는 이렇게 만들어요
1 샐러드는 잎채소, 줄기채소, 뿌리채소가 10가지 이상 골고루 들어가게 한다. 요즘 만드는 샐러드에는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전국에서 공수해온 치커리, 적근대, 적치커리, 케일, 깻잎, 양배추, 트레비소, 겨자채, 뉴그린, 고구마, 당근, 양파 등이 들어간다.
2 먼저 양배추와 적양배추를 채썰어 깨끗이 씻어 물기를 빼놓는다. 양배추 물기 빼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준비해야 한다.
3 양배추 다음에는 잎채소들을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놓는다.
4 물기가 마르는 동안 고구마와 당근을 잘게 채썰어둔다.
5 양배추와 고구마, 당근이 준비되면 씻어놓은 잎채소에 남은 물기를 깨끗한 행주로 닦는다. 맛있는 샐러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물기 제거가 가장 중요하므로 잎채소 한장 한장 깨끗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준 후 잘게 채썰어놓는다.
6 큰 볼에 잘게 채썰어놓은 채소를 모두 넣어 골고루 섞어준다. 7 양파는 따로 채썰어두었다가 샐러드 먹기 바로 전에 섞는 것이 좋다.
샐러드소스
1 무는 무쌈처럼 얇게 썰어놓고 일부는 깍둑썰기한다.
2 유기농 황설탕, 자연드림 현미식초와 물을 1:1:1 비율로 섞고 빛소금은 1큰스푼 넣는다.
3 2~3주 숙성시킨 후, 무쌈은 건져내 해조류나 채소를 싸 먹는 쌈으로 준비하고, 숙성시킨 액체는 잘 섞어 샐러드소스로 사용한다.
오행현미죽과 오행현미밥 만들기
1 영산농원의 신선한 오행현미를 발아시키고 깨끗이 씻어 그늘에서 일주일 이상 잘 말린다.
2 천천히 충분히 말린 오행현미를 방앗간에서 살짝 빻아 가루로 만든다.
3 찬물에 가루를 풀어 잘 저어가며 빠른 시간에 살짝 끓여 빛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4 정제한 견과류와 참깨를 얹어 오행현미죽을 완성한다.
✽오행현미밥은 오행현미와 찰현미를 섞어 밥을 짓는다.
맛있는 채식의 조건, 채소 맛을 깊게 해주는 레시피
▶쌈된장 만들기
1 오래 숙성시킨 약된장에 양파효소, 매실청, 생강청을 넣는다. 2 현미와 17가지 곡물 발효효소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상온에서 하루 동안 발효시킨다. 3 충분히 발효된 된장에 수수조청과 원당으로 맛을 낸다. 4 상에 내기 전 마지막에 참기름과 통깨를 넣어 섞는다.
▶초고추장 만들기
1 오래 숙성한 전통 고추장에 고춧가루와 매실효소, 양파효소, 오미자청, 생강청을 넣는다. 2 현미와 17가지 곡물 발효효소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상온에서 이틀 동안 숙성시킨다. 3 충분히 숙성된 초고추장에 수수조청과 원당, 현미식초와 빛소금으로 간을 맞춘 뒤, 통깨를 넣어 섞는다.
▶양념간장 만들기
1 숙성된 죽염 약간장에 양조간장을 반반 넣고 고춧가루를 넣은 후, 매실효소와 양파효소, 생강청을 더한다. 2 현미와 17가지 곡물 발효효소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상온에서 하루 동안 숙성시킨다. 3 충분히 숙성된 간장에 수수조청과 원당, 빛소금으로 맛을 낸다. 4 여기에 다진 파, 생들기름, 통깨를 넣어 양념간장을 완성한다.
‘덜커덩’ 캐리어 끄는 소리와 활주로에서 대기 중인 비행기, 어딘가 바삐 움직이는 승무원의 발걸음. 그리고 손에 쥔 비행기 표까지. 공항이란 장소는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 가슴을 한껏 웅장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공간이다. 그 설렘을 잊고 지낸 지 어느덧 2년째다. 여행이 멈춘 세상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휴가철이 되면 하늘 위로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그런 이들이 주목할 만한 곳이 있다. 국립항공박물관이다.
서울 강서구 하늘길 177. 내비게이션에 적힌 주소에 도착하자 드넓은 평지 아래 자리 잡은 거대한 원통형 건축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가가 살펴보니 빗살무늬 구조물이 건물을 둘러싸고 반복되는 패턴을 그려낸다. 그 모습이 비행기의 동력 장치인 ‘터빈’을 연상케 한다.
비행기의 심장을 닮은 역동적인 외관에서부터 항공의 모든 것을 담아내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이곳은 지난해 7월 개관한 국립항공박물관이다. 연면적 1만8593㎡,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에 이르는 규모로, 그 이름처럼 하늘에서 펼쳐지는 거의 모든 이야기를 아우른다. 새의 날개에서 영감을 받아 글라이더를 띄우던 시대의 역사부터 우리나라를 오늘날 항공 강국으로 만든 각종 산업과 에어택시 가 날아다닐 공항의 미래상까지, 항공 분야의 면면을 다양한 전시물과 체험 시설로 소개한다. ‘하늘길’이라는 도로명 주소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상공에서 만난 민족의 얼
박물관의 정체성을 나타내던 외관의 구조물이 내부에서는 또 다른 각도로 존재감을 뽐낸다. 안으로 입장해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면, 둥그런 천장이 빗살무늬로 퍼지는 채광과 만나 제트 엔진의 형상을 그대로 재현한다. 본격적인 여행은 지금부터라는 듯, 천장 주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거대한 항공기가 관람객을 반긴다.
전시는 국내외 비행의 기원과 발전을 살펴볼 수 있는 1층 ‘항공역사관’부터 시작된다. ‘인간에게 하늘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서 출발해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면서도 갈망했던 옛 조상의 염원을 각종 유물과 문헌으로 소개한다.
다양한 전시물 가운데 라이트 형제보다 300여 년 앞서 우리나라에 이미 ‘하늘을 나는 수레’가 존재했다는 역사적 기록물은 가히 인상 깊다. 임진왜란 당시 무관 정평구가 발명한 유인 비행체 ‘비거’(飛車)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저작에 따르면, 왜군에 의해 진주성이 고립되었을 때 정평구가 오늘날의 글라이더와 유사한 비행체를 날려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고 전해진다. 비거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란이 분분하지만, 우리 항공 역사에 새로운 연구 과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우리 국민에게 비행은 하늘을 난다는 일차원적 의미, 그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되찾는 ‘구국’의 수단이자 전쟁 중 ‘호국’을 위한 무기였고, 첨단 기술을 활용한 각종 산업으로 ‘부국’을 이루는 계기였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는 한인비행학교가 있다.
1920년 7월 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항일 운동을 목적으로 설립한 한인비행학교는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담긴 곳이자 오늘날 공군의 뿌리가 된 역사적인 활동이다. 국립항공박물관이 코로나19라는 악조건을 무릅쓰고 개관 날짜를 지난해 7월 5일로 고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때 당시 훈련기로 사용했던 2인승 복엽기 ‘스탠더드 J-1’은 박물관을 대표하는 전시물 중 하나다. 스탠더드 항공사가 개발한 이 훈련기는 우리나라가 소유한 최초의 비행기로, 수직 날개에 태극 문양이 진하게 새겨 있다.
그로부터 2년 뒤 한국인을 태우고 우리나라 상공을 최초로 비행했던 ‘금강호’도 박물관의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전시물이다. 조선 최초 비행사 안창남 선생이 몰았던 복엽기로, 당시 서울 여의도와 창덕궁 일대를 자유롭게 날던 금강호의 모습은 조국을 빼앗긴 우리 민족에게 긍지를 일깨웠다. 박물관에 설치된 금강호는 복원 모형이지만, 실물 크기를 그대로 재현해 그 압도적 규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나라가 어려웠던 시절 국민의 성금을 모아 사들인 최초의 공군 전투기 ‘T-6 건국기’부터 영화 ‘빨간 마후라’에 등장한 한국전쟁의 영웅 ‘F-86 세이버’, 우리 자체 기술로 만든 초음속고등훈련기 ‘T-50 골든이글’ 등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항공기를 실물로 만나볼 수 있다.
하늘 위로 꿈을 펼치다
한 층 위로 올라가 볼까. 2층으로 향하는 길목에 설치된 ‘에어워크’는 나선형 경사로로 관람객을 부드럽게 안내하며, 걸어 올라가면서도 실물 비행기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해 이동 과정에서 생겨나는 시간의 공백까지 촘촘히 메운다. 보딩 브리지(Boarding Bridge)를 통해 비행기에 오르는 느낌과 비슷해 여행 전의 설렘도 선사한다.
아이를 데리고 방문한 관람객은 2층에 다다르는 순간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짐 찾는 곳부터 입국 심사대, 세관 신고장 등 공항의 각종 시설이 재현돼 있다. 항공 운송 및 항공기 제작, 정비 등 오늘날 항공산업 전반을 다루는 ‘항공산업관’이다. 이곳에서는 수화물 이동 과정, 비행기 이착륙 원리 등 공항과 기내에서 느꼈던 크고 작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다.
2층을 둘러보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더 먼 미래, 인류는 무엇을 타고 이동할까? 비행기 그 이상의 것이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이에 대한 해답이 3층 ‘항공생활관’에서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자율비행 드론과 자율비행 개인항공기(OPPAV), 수직 이착륙과 고속비행이 가능한 스마트 무인기 ‘TR-100’ 등 현재 개발 단계에 있거나 완료된 최첨단 교통수단을 전시하고, 미래 인류의 생활상을 예견한다. 이로써 항공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우르는 공간이 완성된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박물관의 하이라이트가 남아 있다. 최첨단 항공 시설로 생생한 비행 경험을 제공하는 체험형 교육·문화 공간이다. 관람객은 기내 방송으로만 듣던 안전교육을 전·현직 승무원에게 배워보고, 가상현실(VR)과 360도 회전 장비를 활용한 기기로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의 부조종석에 탑승하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
5곳의 체험관 중 단연 인기인 것은 ‘조종·관제 체험’이다. 인천공항의 관제탑과 보잉 747기 조종실을 재현한 시뮬레이터에서 비행기 이착륙을 관장하며 관제사와 조종사가 되어보는 시간이다. ‘체험’일지언정 생생함은 실제와 견줄 만하다. 조종실 부기장석에서 이륙을 알리는 기장의 사인과 귓가를 멍멍하게 만드는 엔진 소리, 눈앞에 펼쳐지는 광활한 하늘을 온몸으로 느끼다 보면 앉아 있는 곳이 지상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게 된다.
체험관을 비롯해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 ‘항공다빈치클럽’ 등 박물관 곳곳에 아이들을 위한 콘텐츠가 눈에 띈다. 이는 어린이에게 항공인의 꿈을 키워주고자 한 최정호 국립항공박물관장의 소망이 반영된 결과다. 최정호 국립항공박물관장은 “박물관을 찾는 어린이들은 앞으로 항공 기술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며 “아이들이 이곳을 통해 꿈을 꾸고, 이루어가고, 먼 훗날 항공인이 되어 돌아와 꿈을 확인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매시 30분마다 조종사 또는 승무원 출신 도슨트가 전시 해설을 진행한다. 더욱 흥미롭게 관람하고 싶다면 시간을 맞춰 방문하는 것이 좋다.
국립항공박물관
관람 시간 매일 오전 10시~오후 6시, 월요일 휴무
입장료 무료(체험 비용 별도)
가는 길 지하철 5호선, 9호선, 공항철도를 이용해 김포공항역 하차. 김포공항 국내선 1층 국립항공박물관 안내표지를 따라 제2주차장 방면 게이트로 나와서 직진, 박물관까지 약 400m. 또는 국내선 1층 4번 게이트에서 공항순환버스 이용.
※블랙이글스 탑승 체험을 제외한 전 체험은 홈페이지(aviation.or.kr)에서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먹방이 단연코 대세다. TV를 틀면 맛있게 먹는 화면들이 이제는 식상할 정도다. 그런데도 식생활은 중요하기에 간간이 요리 프로그램을 본다. 농어민을 응원하는 프로그램이나 소규모 자영업자 식당을 찾아가 애환을 듣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방송을 보면서 식재료 정보나 요리법의 깨알 팁을 얻기도 한다. 요즘에는 맛을 잘 아는 스타들이 그들만의 환경에서 만들어내는 요리의 필살기가 인기다.
연예인들의 주방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은 과연 주방일을 어떻게 할까. 그릇을 좋아하는 나는 그들이 어떤 감각으로 플레이팅을 하는지도 눈여겨본다. 스타들이 만들어낸 요리를 평가단들이 평가하고, 승리하면 편의점에서 출시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신상 출시 편스토랑'은 요리 정보는 물론이고 이런 호기심들을 해소해준다.
스타들이 만들어내는 요리는 다양하다. 또 간단한 듯하면서도 일반인들이 쉽게 구하기 어려운 희귀 재료가 나올 때도 많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괴리감이 들 만큼 유난한 주방 도구와 호화로운 인테리어는 그저 눈요깃감으로만 좋을 뿐이다. 버터나 치즈가 넘쳐나는 요리 과정을 보면서 출연자들이 “오, 맛있겠다”를 연발할 때는 느끼한 음식에 진저리치는 나와는 너무 달라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트로트 가수 진성이 이 프로그램에 나왔다. 생각 외로 소박하고 진솔한 일상을 보여줬다. 처음에는 별 관심 없이 무심코 봤는데 볼수록 식생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놀랄 만큼 특별했다. 그의 일상이 차츰 눈에 들어왔다.
진성은 ‘면역력 밥상’이라는 주제로 요리를 했다. 대부분의 재료는 그가 가꾸는 텃밭에서 가져왔다. 바쁜 스케줄에 쫓기면서도 텃밭을 가꿔 채소를 키워내고 직접 장까지 담그는 걸 보고 놀랐다. 생소하고 진귀한 약재로 발효시킨 발효액들은 자연 조미료가 됐다. 밀짚모자를 쓰고 밭에 들어가 주렁주렁 달린 토마토를 따서 크게 한입 베어 물더니 “신선도 A++급 무공해니까 밭에서 따 바로 먹는다”고 말했다. 신선한 식재료가 풍성한 텃밭과 거기서 수확한 채소들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부러울 정도였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요리 솜씨였다. 텃밭에서 따온 몇 가지 재료로 직접 담근 효소를 이용해 부추 돌나물 샐러드, 오가피순 간장 무침, 돼지감자 물김치 등 건강 밥상을 뚝딱 만들어냈다. 한때 식당을 운영한 경험도 있었다는데, 요리를 해내는 노련한 손놀림이 역시 남달랐다.
진성이 자연식을 하기 시작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한때 림프종 혈액암과 심장판막증을 동시에 진단받아 한 달에 체중이 20kg이나 줄고 걷지도 못할 만큼 힘들었다고 한다. 고통스런 수술과 투병생활을 하면서 우리 자연에서 나고 자란 식재료를 찾아서 먹게 됐고, 그로 인해 다시 건강을 회복한 사연을 들려줬다. 그 시절 아내는 남편을 위해 항암에 좋다는 약초를 따다가 절벽에서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단다.
그는 눈물겨운 아내의 헌신과 항암 비법이 담긴 자연 밥상을 소개하면서 “이제 이 모든 것을 필요한 이들에게 알려드리고자 한다”고 말했다. 함께 출연한 개그맨 이경규가 그에게서 살짝 허준이 느껴진다고 농담할 정도로 식재료에 훤한 지식을 자랑했다. 진성은 건강식의 아이콘이 되어 좋은 나눔을 하고 싶다고 했다. 아픈 분들에게 직접 담근 발효액을 보내주고 지인들과는 청국장을 나누기도 한다.
요리를 하며 구수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에는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이의 깨달음과 여유와 너그러움이 묻어났다. 간간이 특유의 사투리를 쓰며 던지는 긍정의 유머는 음식 맛을 돋우는 조미료가 됐다. 그는 가수로서도 신화 같은 존재이지만, 소탈한 웃음과 함께 건강 정보까지 선사하는 건강 전도사로서도 손색없어 보였다.
여유롭게 유기농 간식을 먹던 그가 문득 옆에 있던 잡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 “나 이런 사람이야” 하는 식으로 자화자찬을 하며 익살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순간 잡지 표지에 나온 사진이 낯익다. 아니, ‘브라보 마이 라이프’ 아냐? 지난 8월호의 모델로 표지를 멋있게 장식했는데, TV로 다시 보다니! 그러고 보니 그의 나이 61세, 액티브 시니어다.
동서양 구별 없는 글로벌한 음식을 우리는 날마다 접한다. 이럴 때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먹거리로 투병을 이겨냈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태풍이 서너 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농가의 시름이 한가득이다. 누구라도 우리 농산물 소비 촉진에 참여할 때다. 신선한 우리 농산물이 건강의 첫걸음이다. 괜히 신토불이(身土不二)가 아니다.
안녕, 시골아, 드디어 내가 너에게 왔노라! 그에겐 그렇게 흐뭇한 인사말을 읊을 겨를이 없었다. 경기도 화성시에서 사업을 하다 귀농한 김열홍(60) 씨. 그의 귀는 얇은 귀였나? 그는 “농지며 집이며 거저 쓸 수 있으니 몸만 오라”는 지인의 달짝지근한 권유를 받고 설레어 달려 내려간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가서 보니 상황이 영 달랐단다.
믿었던 사람에게 된통 당한 셈이다. 그러나 열홍 씨는 부아를 가라앉히고 얌전히 눌러앉기로 작정했다. 속인 건 지인이지만 홀린 건 나 자신이지 않은가, 내가 나에게 속은 꼴이지 않은가, 남 탓할 것 없다! 그냥 그렇게 여기고 후루룩 상황을 넘어서기로 했던 모양이다.
약간 요상한 귀농 시발이었다. 진즉부터 시골살이에 뜻을 두었기에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왕 내친김에 한바탕 열심히 뛰어보기로 다짐하자 새삼 흥미가 동했던가보다. 한 방 얻어맞고서야 귀농에 본격적인 발동이 걸렸던 거다. 이렇게 뒤늦게 엄청 진지해진 열홍 씨, 일단 도시에 있는 부동산을 싹 처분해 7억 원쯤의 귀농자금을 만들었다. 그건 그가 믿을 만한 가장 유력한 ‘실탄’이었다.
돈을 일컬어 ‘요물’이라고도 하고 ‘웬수’라고도 하지만, 그는 비장하게도 ‘실탄’이라 부른다. 내가 쥔 자금이 떨어지면 성벽을 넘어 거침없이 돌진해오는 세파의 기총소사에 대응할 길이 없다는 인식에서다. 그래 실없이 실탄을 낭비하지 않고 가급적 효율적이고도 참신한 전투에 임하기로 결심한 병정처럼, 열홍 씨는 최대치의 슬기를 발휘해 자금을 잘 운용하기로 하고 귀농열차를 집어탔던 것이다.
그 결과는? 귀농 10여 년이 흘렀으나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건 그의 목숨이 다하는 날에 따져볼 사안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는 귀농생활에 인생의 모든 것을 쏟기로 결정했으며, 실로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다고 자부하기 전에 도출되는 대차대조표는 잠정적인 결과물에 해당하거나 무의미한 문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생이란 뜨거운 프라이팬에서 3도 화상을 입으며, 또는 자주 뒤집어지며 익어가는 빈대떡과 이웃사촌. 용을 쓰더라도 엎치락뒤치락, 삶이란 굴곡과 파란으로 점철되는 꽤나 허무맹랑한 레이스라는 걸 그도 잘 알지 않겠는가. 일희일비하지 않고 갈 때까지 가보리라! 이게 열홍 씨의 생각인 것 같다. 그렇더라도 지금까지의 추세라는 게 있을 텐데, 한마디로 오랫동안 주로 죽을 쑤었다.
“귀농에 만족하느냐고 내게 묻지 마라. 그 답을 나도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웃음) 때론 만족스럽다가도 때론 힘겨워 불만스럽다. 이곳에 자리 잡은 게 11년 전인데 5~6년 동안은 수익이 아예 나질 않더라고. 해마다 적자였지. 그럼에도 투자를 계속해왔다. 규모를 키우는 게 난관을 돌파할 길이라 판단하고서였다. 그러면서 ‘실탄’을 꽤나 허비했다. 다행스럽게도 4~5년 전부터는 ‘똔똔’이거나 약간의 흑자가 나고 있다.”
그는 처음 한동안 고추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완전한 실패를 보고 2000평 규모의 사과농장을 조성해 공을 쏟기 시작했다. 10여 마리에 불과했던 한우도 70여 마리로 늘려 사육하고 있다. 실로 모처럼 쏠쏠한 흑자를 본 작년의 경우, 사과로 올린 매출액이 5000만 원 정도. 이 가운데 60%쯤이 순수익이란다. 한우 사육에서도 비로소 자금회전이 시작되고 있다.
“뭐 하나 생각대로 되질 않았다”
자칫 적자를 보는 일에 도통하기 십상인 게 농업이다. 그렇다고 꼭 그러라는 법이 있겠나. 매사가 썩 이상하게 돌아갔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성난 얼굴로 현실을 돌아보길 거듭했으며, 활로를 찾기 위해 몸과 머리를 아낌없이 써왔던 것 같다. 염소 털처럼 허옇게 쇤 그의 턱수염은 분투의 소산일 게다. 그 결과 서광이 들이쳤나?
“이제 웬만히 자리가 잡혔다고 볼 수 있다. 그간 애환이 많았다. 뭐 하나 생각대로 되는 게 없었다.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나날들이었지. 공연히 거액의 자금만 날리기도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건 끔찍한 경험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귀농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내려왔다는 데에 있다.”
준비한 건 오직 자금뿐이었나?
“그렇다. 호밋자루 한 번 손에 쥔 경험이 없는 문외한이 겁 없이 농사에 덤벼든 꼴이었다. 뭐든 잘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거든. 이게 오산이었다. 기술 없이 농사에 뛰어들었으니 노력을 해본들 쉽게 풀릴 일이 아니더라. 뒤늦게 농업교육기관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배웠다. 1년 과정의 한우대학도 수료했다.”
귀농은 왜 했지? 목적이 뚜렷했다면 사전 준비도 부실하지 않았을 거 같아 묻는 얘기다.
“조용한 시골에 나만의 작은 낙원을 만들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꽤나 낭만적인 꿈이었다. 경치 좋은 곳에 원하는 집을 짓고,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농사 노동으로 떳떳한 시간을 보내고, 가끔 하루 이틀쯤 자유로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뭐 그런 소박한 기대가 있었으나 아직 낙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사실 인간사에 낙원이 어디 있겠나. 감상적으로 살 일이 아니더라.”
농사로 큰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돈벌이가 목적이라면 도시를 떠나지 않았겠지. 사업이 괜찮게 돼 가만 있어도 통장에 돈이 늘어나는 상황이었거든. 그런데 인생에는 돈벌이보다 중한 게 있지 않던가? 내 마음이 흘러가는 곳에 살며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 이게 좋은 인생이지 않을까. 난 귀농을 통해 한결 나은 삶이 가능할 거라 믿었다.”
귀농보다 귀촌이 이상적이지 않았을까? 텃밭 농사 정도나 하며 태평한 세월을 즐기는 귀촌 말이다. 당신은 독신이다. 7억 자금이면 놀면서 슬슬 까먹어도 평생을 살 수 있을 게 아닌가.
“아하. 특정한 직업 없이 지내는 무위도식은 내 적성에 맞지 않다. 일과 맞부딪쳐 뭔가 보람을 끌어낼 게 없는 생활에 무슨 활기가 있겠나, 무슨 재미가 있겠나.”
비록 고행과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지만 농업이 지닌 매력과 흥미를 과소평가할 수 없더라는 얘기로 들린다. 그에겐 피땀 흘려 생산한 사과가 팔리지 않아 숭숭 썰어 소 사료로 주는 식의 환장할 만한 혼선이 잦았다. 그러나 농사는 어디까지나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자유 직종이라는 것, 이상과 자질을 마음껏 실험하고 교정할 수 있는 인생교실이라는 것, 게다가 정년이 없어 무기력한 노년을 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등등, 열홍 씨는 농사가 지닌 긍정적 속성에 전적인 지지를 보낸다.
“가령 농산물이 안 팔리더라도 남 탓을 할 게 없다. 모든 게 나의 능력, 기술, 전문성의 여부에 따른 결과물이기 때문이지. 그러고 보면 농사란 가장 자립적인 형태의 직업이다.”
그는 ‘모든 게 나의 문제’라는 걸 자주 자신에게 세뇌하며 사는 사람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자기학습의 효과는 커 그를 좀체 실의에 잠기게 하지 않는다. 농사로 맞닥뜨리는 난관이 이를테면 어떤 외부의 흉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으로 한숨과 낙담에서 신속하게 벗어날 수 있는 힘과 깡을 끌어내는 것 같다. 저 잘난 농업정책의 협찬이나 선한 이웃의 과도한 헌신을 기대하는 따위도 그의 본성에 맞지 않아 남세스럽게 여길 따름이다.
진격에 취한 캐터필러
그런데 열홍 씨가 직면한 넘어야 할 산은 농사만은 아니라는 점을 얘기해야겠다. 그의 콩팥은 좀 서러운 콩팥이다. 기능을 상실한 탓에 그는 1주일에 사흘은 신장 투석을 한다. 월, 수, 금, 3일간은 거의 종일 병원에 누워 혈액을 걸러낸다.
“나이 들면 누구나 한두 가지 질병은 다 가지고 산다. 그저 내 복대로, 내 팔자대로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병원에선 의사에게 맘 편히 투석을 맡기고, 집에선 몸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일에 묻혀 산다.”
동네 이웃들은 당신을 ‘인간승리’의 주인공이라 칭찬한다.
“무슨 그런 과한 얘기를.(웃음) 남들은 수백 마리의 소도 기르고, 수만 평 규모의 사과밭을 경영하기도 한다. 난 그 반의반도 못 따라가고 있잖은가. 농사일에도 아직 서툴러 사실 그냥 시간만 때우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콩팥에 문제가 생긴 건 언제부터?
“40대 초반에 이상이 왔다. 플라스틱을 다루는 공장을 운영한 게 원인이었던 것 같다. 그래 한동안 일을 놓고 쉬었으나 결국은 신장이식을 받게 되었지.”
공기 좋은 시골에 살며 중한 병을 고친 이들도 있다.
“귀농하자마자 어쩔 수 없이 과도한 피로와 스트레스가 겹치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식받은 콩팥을 달고 산 지 12년 만에 완전히 망가지더군. 투석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게 형제 하나가 콩팥을 주겠다고 했으나 사양했다. 나 좋다고 형제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 시골에 들어와 병을 고친 사례는 나도 좀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병은 좋아질 병이 아니거든. 계속 끝까지 투석해야 하고 식이요법도 충실해야 한다.”
그런 건강 상태로 열심히 농사를 한다는 게 어디 쉬운가. ‘강철 인간’이라 불러도 무방하겠군.
“난 어릴 때 지금보다 훨씬 지독한 고난을 겪었다. 먹을 게 없어 사나흘씩 굶기를 자주 했고, 심지어 20일간 물만 마시며 견디기도 했지. 아마 그런 경험들이 나를 꽤나 강하게 만들고 독립적인 근성을 길러준 게 아닐까. 난 지금도 알몸으로 어디에 던져져도 밥을 벌어먹을 수 있는 사람이다.(웃음)”
자신을 완벽하게 통치하는 인간 유형? 열홍 씨는 차돌처럼 야무지다. 불편한 몸 상태에 희한하게도 거의 무심하거나 태연하다. 간혹 표정이 딱딱해지기도 하지만, 그건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사람의 버릇일망정 병세에 상심하는 징후로는 보이지 않는다. 피로, 두통, 요통 등 신장투석에 따르는 불편이 자심할 터이지만, “난 그런 거 몰라!” 하는 투로 유유한 게 아닌가.
그는 신장 투석을 시작하며 유능한 일손 하나를 고용했다. 축사며 과수원을 혼자 건사하기엔 역부족이라 동원한 인력이다. 도시에서 내려온 이 일손은 귀농 지망생으로 향후의 귀농을 위한 예행연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 셈이다. 열홍 씨로선 신통치 않은 재무구조에 월급이 나가 부담이야 되겠지만 한숨 돌릴 수 있었을 게다. 이렇게 그는 동갑내기 직원과 둘이 5년째 동거하며 일을 한다. 오직 끔벅거리는 눈으로 언어를 발하는 소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사과나무들이 간혹 청원하는 민원을 접수해 해결해준다. 그 와중에 그가 남몰래 해온 일이 또 하나 있다. 과수 농가들에게 쓸모가 많을 그 뭔가 새로운 도구들의 개발에 열을 내왔던 것인데 2017년, 마침내 ‘가지 유인(誘引) 철 클립’을 발명해 특허를 받았다.
“과수 농사에서 가지 유인 작업은 가장 중요한 과정의 하나다. 가지들을 적절히 늘어뜨리거나 구부려줘야 생산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지. 그동안 흔히들 콘크리트로 만든 추(錐)나 플라스틱 물병을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아 유인을 해줬다. 내가 만든 ‘철 클립’은 획기적으로 간소하고 효율적이다. 현재 농가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
창의(創意)의 산물이구나.
“도시에서의 오랜 전공이 기계설비였다. 농사를 짓더라도 전공을 살려 만든 장비나 기구를 도입하자는 생각이었지. 내겐 다종다양한 아이디어가 있으며 나름 연구를 해왔다. ‘가지 유인 철 클립’은 개발이 실현된 한 가지일 뿐이다.”
‘철 클립’ 매출액은 어느 정도?
“출시 이후 약 3000만 원의 소득을 올렸다. 이제 막 알려지고 있는 과정이라 차후의 매출 상승을 예감한다. 소비자들과 만나기까지 쉽지는 않았다. 특허를 내고 홍보를 하는 등 그간 1억 정도를 투자했지만 충분히 회수가 가능할 거라 본다.”
당신의 귀농 역시 결국은 안정적인 행복을 누리기 위한 방편이겠지?
“소들의 순한 눈망울, 새벽이슬을 매단 사과나무, 눈부신 아침 햇살, 이런 것들이 주는 짜릿한 전율이 행복의 감정일까. 한 사람의 월급을 주고, 나 먹고살 형편은 되고, 이 역시 행복이겠지. 그러나 행복은 순간에 왔다가 순간에 사라진다는 걸 안다. 과욕 없이 시간을 소중하게 쓰고 싶다. 몸 아픈 사람들에겐 시간이 한결 귀하다. 시간을 선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난 그쯤의 인간이길 바란다.”
비록 시련이 많지만, 지금 살아가는 방식,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열홍 씨는 별 유감이 없다. 아까운 시간을 선용해 현재보다 더 나아가고자 하는 갈증. 이건 뜨거운 목마름이다. 그렇기에 건강상의 한계나 노동의 과중함마저 그는 곧잘 무시하는 것 같다. 진격에 취한 캐터필러처럼.
김열홍 씨가 주는 Tip
•귀농하기 전에 철저한 준비를 하자. 기술 습득 없이 농업에 나섰다간 십중팔구 실패하기 때문이다. 시골 농가에 일꾼으로 1~2년쯤 취직해 살며 농사를 익힌 뒤 귀농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똑똑한 인재다.
•집부터 먼저 잘 지을 거 없다. 자금을 아껴 써야 살아남는다. 근사한 집을 지었더라도 나중에 팔 일이 생겼을 경우엔 낭패를 볼 수 있다. 좀체 팔리지 않는 게 전원주택이니까.
•깊은 산골의 집성촌으로 귀농하면 텃세에 시달릴 수 있다.
•귀농을 하면 일단 베풀며 어수룩하게 처신하라. 술자리, 회의자리 등에 적극 동참해 사교를 하라. 잘만 사귀면 원주민들이 결국엔 귀농인의 조력자가 된다.
에르메스, 루이비통과 함께 3대 명품 브랜드로 통하는 ‘샤넬’(Chanel)을 표현하자면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의 고급스런 디자인이 떠오른다. 하지만 샤넬이 여성을 과거의 정형화된 여성미로부터 해방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900~1910년대 유럽 여성의 옷은 중세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류층은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불편한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모자를 썼다. 여전히 전통 코르셋을 착용하는 여성도 있었다. 하류층 여성의 의복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편안하지 않으면 럭셔리 아니다”
“럭셔리는 편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럭셔리가 아니다.” 여성복의 표준을 바꾼 가브리엘 샤넬의 모토다. 여성들이 왜 비실용적이고, 쓸모없는 복장을 고수해야 하는지 회의를 느낀 그녀는 스포티하고 심플한 디자인의 현대 여성복 ‘샤넬 슈트’를 만들었다. 이 디자인은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이 화려한 옷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하는 실마리가 됐다. 샤넬은 주머니가 달린 재킷과 여성용 바지도 제작했다.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활동적인 샤넬 스타일은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다.
◇패션문화 바꾼 ‘리틀 블랙 드레스’
1926년 선보인 ‘리틀 블랙 드레스’는 패션문화를 바꾼 옷이다. 지금 보면 활동하기 편한 평범한 검은색 미니 드레스일 뿐인데, 그 명성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 검은색은 장례식에서나 입는 불길한 색이었다. 하지만 샤넬이 “변하지 않는 가치를 상징하는 검은색은 고전 그 자체”라며 자신의 옷에 과감히 사용한 뒤로 대중적인 패션이 됐다. 패션지 ‘보그’는 리틀 블랙 드레스를 포드의 대량생산 자동차 모델 T에 비유해 ‘샤넬의 포드’라고 불렀다. 훗날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지방시 리틀 블랙 드레스를 입고 연기해 패션 아이콘의 위치를 재확인해줬다.
◇실용적이고 우아한 ‘트위드 재킷’
‘트위드 재킷’은 1920년대에 출시됐지만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패션계를 떠나 있었던 가브리엘 샤넬이 1954년 복귀하며 리뉴얼해 유명해졌다. 트위드 재킷은 디자인 자체가 실용적이며 고전적인 우아함을 갖춘 덕분에 현재도 흉내 낸 옷이 많을 정도로 하나의 스타일이 됐다. 하지만 샤넬이 이 디자인을 들고 패션계에 돌아왔을 때 본국인 프랑스에서는 진부하고 고루하다며 온갖 혹평을 퍼부었다. 반면 미국에서는 패션의 혁명이라고 평가해 그녀의 디자인이 여전히 건재함을 알린 작품이 됐다.
◇반향 불러온 매혹적인 향기 ‘N˚5’
1920년대 초 가브리엘 샤넬은 자신의 이름을 건 향수를 만들기 위해 일랑일랑, 자스민, 장미 등 온갖 고품질의 재료를 집어넣었으나 향기가 너무 강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이후 유명 조향사인 에른스트 보가 발명한 인공향 알데하이드를 더하면서 N˚5가 탄생됐다. 알데하이드는 화학약품 냄새가 났지만 꽃향기와 조화된 향은 굉장히 매혹적이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시도인 데다, 그저 다섯 번째 샘플이었기 때문에 N˚5란 이름을 붙였을 뿐인데 반응은 엄청났다. 할리우드 배우 마릴린 먼로가 인터뷰에서 “침대에서 뭘 입고 주무세요?”라는 질문에 “샤넬 N˚5를 입는다”고 말한 일화는 꽤 유명하다.
◇샤넬을 대표하는 럭셔리한 가방들
‘클래식 백’은 어깨에 메는 최초의 가방으로 유명하다. 1955년 2월에 처음으로 만들어져 ‘2.55’라고 불린다. 손잡이도 당시에는 쓰지 않던 금속 재질로 만들었다. 잠금장치 부분은 마드무아젤 락을 사용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샤넬 로고의 락은 1980년대에 만들어졌다. ‘보이 백’은 권총 주머니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재질은 기본적인 소가죽과 양가죽 외에도 파이톤, 스팅레이(가오리), 데님, 트위드 등 다양하다. 한국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샤넬 가방이다. ‘빈티지 백’은 2005년 칼 라거펠드가 2.55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원래 모양대로 만든 가방이다. 겉에 샤넬 로고가 없는 게 특징이다.
◇샤넬이 공들인 사업 ‘화장품·시계’
샤넬 화장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제품은 빨간색 립스틱이다. 립스틱 외에 메이크업베이스인 ‘르 블랑’도 유명하다. 샤넬 제품에는 대부분 특유의 복숭아 향이 들어가기 때문에 일명 ‘복숭아향 메베(메이크업 베이스)’라고 불린다. 홀리데이 컬렉션으로 출시되는 리미티드 하이라이터 등도 꽤 인기가 많다. 시계 사업은 엄청난 투자와 노력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예술 책임자 자크 엘루가 7년의 준비 끝에 디자인한 ‘J12’는 이제 하나의 아이콘이 됐다. J12는 12m급 J클래스 요트경기에서 이름을 따온 스포츠 워치다. 샤넬의 컬러 코드인 블랙 혹은 화이트로 출시되고 있다.
사람들은 꽃철이 되면 아랫녘으로 떠나고 수목원을 찾지만 나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양천 향교에 간다. 서울시 강서구에 위치한 이곳에 가면 조용한 향교 담장 위로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다. 옛 교육기관에서 꽃과 함께 고즈넉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도심 속에서 옛 시간과 소통하는 양천 향교는 마을 골목길을 따라 잠깐 걸어 들어가 사찰 홍원사 뒤편으로 가면 있다. 산을 등지고 안정감 있게 들어앉은 모양새다. 향교는 옛 성현들의 덕을 기리고 제를 모시며 지방 향리들을 교육하던 기관이다. 현대적 교육기관이 생겨나면서 대부분 해체되었지만 아직도 전국적으로 230여 개의 향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유일하게 양천 향교만 남아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조선 태종 연간(서기 1411년경)에 설립된 양천 향교는 옛 선비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성인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미디어 시대에 맞는 생활예절 교육과 함께 다양한 소통 창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러나 현재는 코로나19 여파로 휴관 중이다. 그래서 더 조용해진 향교다.
담장을 둘러쌓았던 능소화도 예년에 비해 많이 줄어든 모습이다. 그래도 잊지 않고 피어나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듯 꽃잎을 활짝 열었다. 능소화의 전설 속에는 그 옛날 구중궁궐에 살던 소화라는 궁녀 이야기가 있다. 어여뻤던 소화는 임금의 사랑을 얻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어느 날부터 임금이 자신을 찾지 않자 그리움에 점점 병이 들어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담장 밑을 서성이고 내다보며 오매불망 임금만을 기다리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뜬 소화. 그녀는 “담장 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고 했고 그 영혼이 깃들었는지 소화가 지냈던 처소의 담장을 덮으며 꽃이 주렁주렁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능소화다.
능소화는 오래전 사신들이 중국을 드나들며 가져온 꽃으로 화사한 색상과 모습이 기품 있어 양반꽃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사대부 뜰에서만 볼 수 있었고 민가에서는 함부로 심지 못했다. 사람들은 능소화가 다 피고 질 때 미련 없이 꽃송이를 톡 하고 떨어트리는 모습이 마치 소화의 지조를 닮은듯하다고 풀이한다. 능소화의 꽃말은 '영광', '기다림', '명예'다.
예전에는 능소화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이맘때면 멀리 경상도까지 내려가 운치 있는 한옥 담장을 뒤덮으며 피어난 능소화를 촬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한강변 산책길에서 굵은 나무 기둥을 칭칭 감으며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고 고속도로변의 높은 벽을 뒤덮으며 피어난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능소화 터널을 이룬 신식풍 조경의 공원도 생겨났다. 어느덧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능소화는 역시 담장을 타고 피는 게 제일 어울린다. 마침 향교 관리인이 굳게 잠긴 문을 잠깐 열어주어 동재와 서재, 그리고 강학 공간이 있는 마당까지 들여다봤다. 향교 옆길로 한 걸음 옮기면 궁산 근린공원으로 이어진다. 울창한 숲길은 여름인데도 서늘하다. 길을 따라 나지막한 산책로를 걷는 즐거움이 있다. 아울러 겸재정선미술관과 궁산땅굴, 구암공원, 허준박물관으로 연결되는 강서 역사문화 둘레길을 알차게 돌아볼 수 있지만 생활 속 거리두기 때문에 실내 관람은 어렵다.
바이러스로 조심스러운 세상이다. 지금은 향교를 속속들이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주변 뜰을 거닐며 유생들의 선비정신과 능소화의 전설을 떠올리는 시간도 제법 괜찮다. 게다가 한적한 분위기가 유유자적 생활 속 거리 두기에 적당하다.
향교를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처럼 생각하기 전에 한 번쯤 옛 성현들의 흔적을 통해 차분한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지.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뜰에서의 담백한 어느 하루, 여름 햇살을 받은 능소화가 향교 담장 위에서 눈부시다.
주소: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34
△ 주변 볼거리
△서울식물원을 비롯해 겸재정선기념관, 구암공원, 허준박물관, 궁산땅굴이 이어져 있다. 향교 입구 부근에 위치한 사찰 홍원사와 전통 방식으로 면을 만들어 국수를 주렁주렁 널어놓은 ‘옛날국수’ 집 구경은 덤이다.
△이타제면소의 잔치국수(5000원)와 굴림만두(4000원)로 맛난 한 끼가 가능한 곳이 근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