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와 피로가 쌓였을 땐 하루쯤 쉬어가도 좋다. 특별히 고요한 쉼터를 찾는다면 ‘템플스테이’ 만 한 것이 없다. 사찰로 가는 첫 번째 문인 일주문(一柱門)에 들어서는 찰나, 속세를 뒤로하고 불계와 만나게 된다. 굴레와 속박의 시계는 잠시 멈추고, 오롯이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 흐른다. 비움을 실천하는 불계의 하루를 지나 다시 일주문을 나서면 어제와는 또 다른 속세가 펼쳐질 것이다.
2002년 시작된 템플스테이는 2022년 기준 누적 참여자 수가 600만 명을 넘어섰을 정도로 그 인기가 높아졌다. 고즈넉한 자연 속에서 내면의 성찰을 꾀할 수 있어 정적인 휴식을 원하는 이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일상의 고민을 해소하고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 찾아오는 중장년도 적지 않다. 불교 신자만 가능하다는 오해도 있는데, 템플스테이는 종교와 무관하게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다만 스님들과 함께하는 만큼 몇 가지 유의사항이 따른다. 음주 및 흡연이 금지되고, 채식 공양을 하며, 식사 시간에 말을 하지 않는 것 등이다. 사찰 내에서는 손을 엇갈리게 잡는 차수(叉手) 자세로 다니거나, 대웅전 등 법당에 드나들기 전 잠시 서서 합장 반배를 하는 등 예의도 갖추면 좋다. 이렇듯 일상에서 행하던 것들을 삼가거나 낯선 것을 익히는 과정 등을 통해 잠시나마 자기 수련의 기회를 얻기도 한다. 이 또한 템플스테이에서만 누릴 수 있는 귀한 경험이다.
템플스테이, 어디로 가서 무얼 할까?
템플스테이에 참여하고 싶다면 먼저 방문할 사찰을 정해야 한다. 2024년 4월 기준 전국에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는 사찰은 158곳이다. 매년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서 엄격한 심사를 통해 템플스테이 공식 운영 사찰을 선정하고 있다. 평균 숙박 요금은 7만 원대로, 독방부터 2~4인방, 단체방 등 규모는 사찰별로 상이하다. 만약 오롯이 홀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방 구성도 사전에 점검해보면 좋다. 운영하는 프로그램도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크게 3가지 유형(당일형·체험형·휴식형)으로 나뉜다.
템플스테이가 처음인 경우 108배 등을 경험하고 싶다면 체험형을 권한다. 그밖에 발우공양, 연등 만들기 등도 즐길 수 있다. 계절 또는 참가자 특성에 따라 사찰마다 다른 프로그램을 기획하는데, 주변 자연환경을 이용한 숲 체험이나 갯벌 탐사, 야생 녹차 만들기 등을 제공하기도 한다. 자율적으로 고요하게 쉬어가고 싶다면 휴식형이 알맞다. 말 그대로 휴식을 돕는 프로그램으로, 일과 중 예불과 공양, 사찰 안내 및 예절 교육 이외 시간은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 숙박이 여의치 않은 이들을 위한 당일형 프로그램도 맛보기로 해볼 만하다.
사찰마다 운영하는 템플스테이 유형과 세부 프로그램이 다르기 때문에 사전 정보 확인은 필수다. 이때 일일이 사찰별로 알아볼 것 없이,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서 운영하는 템플스테이 홈페이지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서 지도 형태로 지역별 템플스테이 사찰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 사찰별 운영 프로그램 확인 및 템플스테이 예약도 해당 홈페이지에서 가능하다.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했다면, 템플스테이를 간접 경험해볼 수 있는 VR 및 영상, 웹진 등 다양한 콘텐츠를 둘러보며 가볼 만한 사찰을 찾아봐도 좋다.
홀연히 떠나 ‘인연처’를 만나는 기쁨
온라인을 통한 템플스테이 정보 검색 및 예약이 어려운 중장년이라면 오프라인 ‘템플스테이 홍보관’을 찾아가 보자. 서울 종로구 조계사 건너편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전국 템플스테이 운영 사찰 소개 및 참가 예약 방법 등을 안내하고 있다. 아울러 템플스테이를 통해 즐길 수 있는 스님과의 차담, 합장주 만들기, 연꽃등 만들기 등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도 상시로 운영한다.(전화 문의 및 예약 가능)
템플스테이 홍보관 부관장으로 방문객들을 만나온 선주스님은 “템플스테이 참여자 대다수가 ‘절에 오니 마음이 편하다’고 이야기한다. 현대인의 삶은 빡빡하고 여유가 부족하다. 반면 속세를 벗어난 사찰이라는 공간은 여백이 많다. 그로부터 얻는 여유와 비움이 쉼을 주는 것 같다. 그런 오랜 고요함 속에서 삶을 관조하는 계기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홍보관 방문객 중에는 사찰 추천을 부탁하는 이가 종종 있다. 선주스님은 “유명하고 인기 있는 곳도 많지만, 우연히 발견했거나 나에게 어떤 끌림이 주는 곳을 찾아가도 좋다. 그러면 그게 곧 나의 ‘인연처’가 된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사람이 없으면 없는 대로 그곳만의 멋과 즐거움이 존재한다. 특별히 준비할 건 없다. 어떠한 상황도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마음만 가져가면 된다. 계획을 세우고 기대를 갖기보다는 홀연히 떠나보길 권한다. 그리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과의 대화를 많이 해보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템플스테이 홍보관
ㆍ위치 :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56 템플스테이 통합정보센터 1층
ㆍ운영 : 월~금요일 09:00~19:00 토·일요일 및 공휴일 09:00~18:00
도심에서 즐기는 템플스테이 ‘화계사’를 가다
‘가장 바쁜 곳(서울)에서의 진정한 휴식’, ‘도심 속 힐링’. ‘화계사 템플스테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이라는 질문에 참여자들이 남긴 글이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화계사는 도심 속에서 템플스테이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다. 접근성이 용이한 서울시민뿐 아니라 지방 및 해외 방문객에게도 인기가 높아 매달 예약 인원이 금세 마감된다.
수유역에서 20분 정도 걸어가다 보면 화계중학교 옆 언덕배기에 화계사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을 기준으로 속세와 법계가 나뉜다는데, 이곳은 실제 풍경도 그러하다. 문 바깥으로는 도심이, 안쪽으로는 자연이 펼쳐진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오른쪽에 ‘화계사 템플스테이’ 건물이 보인다. 참여자들은 이쪽에서 방 배정과 간단한 프로그램 안내를 받는다. 화계사에서는 체험형 프로그램 ‘나를 위한 행복여행’과 휴식형 프로그램 ‘오직 쉴 뿐!’을 운영한다. 기자가 방문한 날은 휴식형이 진행됐다.
참여자들은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뒤 지도 법사인 혜량스님과 함께 도량을 산책한다. 이후 일정은 공양인데, 템플스테이에서의 저녁 식사는 다소 이른 오후 4시에 시작된다. 잘 차려진 사찰음식을 먹을 만큼 덜어 남김없이 먹는 것이 원칙이다. 묵언 수행도 이뤄진다. 식사 후에는 사용한 식기를 설거지하는 것으로 공양이 끝난다. 이른 저녁 식사로 출출할 참여자들을 위해 숙소 건물에는 주전부리가 놓여 있다. 마지막 일정인 저녁 예불을 마치면 오후 9시에 소등하고 취침하는 것으로 첫날이 마무리된다.
한 중년 남성 참여자(49)는 “직장에서 중견 역할을 하다 보니 고민도 많고 피로감도 크다.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홀로 휴식을 즐기고 싶어 템플스테이를 찾았다”며 “무조건 내달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한 번쯤 이렇게 쉬어가기도 하고, 한 발짝 떨어져서 자신을 바라보기도 해야 한다. 그런 기회를 템플스테이를 통해 얻었다. 동년배인 아내에게도 권하고 싶다. 체험형 프로그램은 초등학생 아이들과 함께 와도 좋겠다”며 소감을 들려줬다.
이튿날에는 보통 새벽 예불과 아침 공양, 스님과의 차담 등이 이뤄진다. 특히 스님과의 차담은 참여자들의 만족도가 높은 편. 은은하게 우린 차 한잔 곁들이며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인생의 혜안을 얻기도 하고,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내기도 한다.
혜량스님은 “차담을 해보면 연륜 있는 분일수록 불교의 철학과 교리에 대한 흡수가 빠르다. 그동안 산전수전 겪어왔을 중장년들은 인간관계의 고충,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생각 등을 털어놓는다”며 “이곳에서 도심을 바라보면, 조금 전까지도 내가 씨름하던 속세가 멀찍이 느껴지고 어떤 풍경처럼 다가온다. 이렇듯 나라는 존재 또한 분리하고 대상화해서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면 죽을 듯 괴로웠던 문제들도 무언가의 일부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거나 손쉽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등 삶의 통찰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취재 협조 및 사진 제공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화계사 템플스테이
국적, 나이, 성별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 만날 수 있다. 온라인 세상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즉각적인 소통이 가능하지만, 서로의 감정이나 반응을 깊게 이해하며 인연을 이어가기는 쉽지 않다. 오해가 쌓여 오히려 관계를 해친다는 지적도 나온다. 새로운 환경에서 내 생각과 취향을 공유하며 유대감은 쌓되, 타인과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네이버 밴드,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처럼 다양한 SNS로 나를 표현하고 남들과 교류하는 이들이 늘었다. 소통 방식은 각자 천차만별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공유하고 싶어 하는 반면, 누군가는 이런 행동을 질색하며 경조사나 업무 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소통하려 한다. 개성 있고 자유로운 SNS 활동도 중요하지만 타인을 배려하며 예의를 지킨다면 더 돈독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한 번 더 짚어야 할 예절
누군가를 만날 때는 늘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한다. 온라인 환경도 다르지 않다. 말이나 행동은 우리의 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게시물이나 댓글이 타인에게 나의 가치관과 성격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처음부터 잘못된 행동이나 무례한 말투로 부정적인 인상을 남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SNS는 글 형태의 메시지가 주된 소통 수단이기 때문에 애매모호한 표현이나 과도한 외래어, 전문 용어 대신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사용하는 편이 좋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나 개인적인 소식을 무분별하게 공유하는 행위도 지양해야 한다. 급한 용건이 아니라면 밤늦은 시간이나 새벽에 직접 혹은 단체 공간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더욱 피하자. 개인 채널에 게재하는 사진이나 글이 상대방에게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가 고민해봐야 한다. 폭력성·음란성을 띠거나 차별적인 콘텐츠는 타인에게 상처로 남기 십상이다. 모임의 성격에 따라 이야기의 수위와 완급을 조절하듯 SNS에서도 마찬가지다.
관계 맺은 친구와 내가 무조건 같은 이용 행태를 보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룹이나 페이지에 동의 없이 초대하거나, 좋아요 버튼을 누르라고 강요하거나, 바로 댓글 달기를 바라면 안 된다. 가장 가까운 가족도 포함이다. 관계의 확장이나 활동 주기는 스스로 정하도록 하는 존중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직장에 출근한 시간대에만 SNS나 모바일 메신저를 활발하게 주고받는 ‘출근 친구’ 사이도 등장했다. 퇴근 시간이나 주말에는 최대한 인간관계의 피로감을 줄이고 개인 시간을 지켜주는 셈이다.
저작권 침해 및 개인정보 노출 주의
만남과 소통, 정보 교류, 문화 창조가 이루어지는 무궁무진한 공간이지만 사생활을 침해받거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높아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생년월일, 주소, 휴대폰 번호 등 필요 이상의 개인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프로필 공개 범위를 신중하게 설정하자. 모르는 사람이 친구를 신청한다고 해서 함부로 수락하면 보이스 피싱이나 로맨스 스캠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의심스러운 링크나 첨부파일을 클릭하지 말고,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사람은 경계해야 한다. 이종구 SNS소통연구소 대표는 안티바이러스, 방화벽, 경찰청 사이버캅, 시티즌코난 등 보안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할 것을 권했다.
SNS 활동에 일정 수준 이상의 시간을 할애하면서 오히려 소외감, 뒤처짐, 외로움에 직면하기도 한다. SNS 사용으로 직접 만남을 통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다. ‘중년 여성의 스마트폰을 통한 SNS 사용 경험’ 보고서에 따르면, 42~52세 여성 10명을 심층 조사한 결과 스마트폰을 통한 타인의 사생활 엿보기는 면대면 상호작용 없이도 생활을 공유한다고 오해해 직접적인 연락 횟수가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일과 가정의 경계가 불분명해져 나만의 시간 확보가 어려워졌다는 반응도 있었다.
이 대표는 “트렌드 파악뿐 아니라 인맥 관리, 비즈니스 관계 맺기, 멘토링 받기 등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지만 과도한 이용은 금물”이라며 “개인적인 공격이나 비방을 삼가고 최대한 침착하고 예의 바르게 소통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전주에서 진안으로 이어지는 소태정 고개 국도변에 아담한 카페가 있다. 외벽에 진분홍색을 입혀 로맨틱한 멋을 풍기는 가게다. 과하지 않게 잔잔한 인테리어로 개성을 돋운 내부는 봄 햇살 내려앉은 듯 상쾌하다. 통유리창 너머에선 연둣빛 숲이 서성거린다. 이 카페는 귀촌인 임진이(48, 카페 ‘비꽃’ 대표)가 폐허처럼 방치됐던 건물을 임대받아 재생했다. 셀프 리모델링으로 되살렸다. 미술을 전공한 그에겐 결혼 전 미술학원을 운영한 이력이 있다. 카페 한쪽 벽면에 흑백 모노톤으로 그린 벽화가 있는데 그의 작품이다. 카페를 차린 건 4년 전이었다.
전주시에서 살았던 임진이는 2014년 이곳 산 많은 고원지구 진안군으로 귀촌했다. 그에겐 세 자녀가 있는데 초등학생이던 딸 둘의 아토피 치료를 위해 시골 생활에 입문했다. 아토피는 겪어본 사람만이 그 고통과 불편의 강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난치성 질환이다. 그러니 엄마로서 심정이 오죽했으랴. 해볼 건 다 해본 것 같다. 그러다가 시골의 자연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자유롭게 기르는 게 유력한 대안이라고 여겨 시골에 들어왔다. 남편은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내세워 귀촌을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이는 밀어붙여 뜻을 이루었다. 남편은 전주에 머물러 하던 사업을 차질 없이 계속하고, 나머지 가족은 귀촌하는 것으로 합의점을 찾은 것.
이렇게 주말부부가 됐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로 서슴없이 뛰어들었다. 익숙한 도시를 떠나 낯설고 고즈넉한 시골로 삶을 이동한다는 게, 시간이라는 유한한 자원을 시골살이에 쏟아붓는다는 게 쉬운 일인가. 그만큼 딸들의 아토피 치유에 대한 바람이 간절했다. 그래서인가, 지성이면 감천인가, 마침내 아이들이 피부 건강을 회복했다.
“시골의 좋은 자연환경과 깨끗한 먹거리가 가져다준 성과였다. 정서적인 면에서도 아이들은 바람직하게 성장했다. 매우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자랐으니까. 아이들이 시골 생활에 대해 자주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오히려 의젓하게 성숙한 셈이다. 과외를 받지 않고도 학교 성적을 유지할 수 있을지 우려했으나 그마저 기우에 불과했다. 딸들이 자랑스럽다.”
아이들의 건강 회복을 계기로 다시 도시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나?
“우리는 시골 생활에 적응하며 잘 정착했다. 초기 한때 힘에 부쳐 돌아갈 궁리도 했지만 아이들을 고려해 마음을 다잡았다. 어려운 상황을 겪을 때마다 오히려 나 자신이 한결 단단해지는 걸 느끼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귀농·귀촌인 대상으로 멘토 역할도 한다지?
“그렇다. 서서히 일의 범주가 확장되면서 성과가 주어졌고, 자연스럽게 시골살이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처음엔 어려운 게 많았다. 전주 친구들이 이런 얘길 할 정도였다. ‘그것 봐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난 시골에 가지 않는 거야!’ 그랬던 친구들의 말이 언제부턴가 바뀌었다. ‘어! 나도 촌에서 살아볼까?’로.”(웃음)
어떤 일이 가장 힘들었나?
“귀촌 직후 집을 지으려다 실패한 경험을 꼽아야겠다. 주민과 진입로를 놓고 분쟁이 빚어져 결국 건축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곤 주택을 임대해 사는 것으로 귀촌 생활을 시작했다. 집의 상태가 허술해 여름엔 몹시 더웠고, 겨울엔 몹시 추웠다. 그렇게 초기 4년을 이모저모 불편하게 살다 마을과 좀 떨어진 산 아래에 비로소 집을 지어 이사했다.”
진입로를 둘러싼 외지인과 원주민 사이의 마찰은 하나의 풍속처럼 흔해졌다. 역귀농의 주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해법은 무엇이라 보나?
“희한하게도 현재 살고 있는 두 번째 집 역시 진입로 문제가 있어 아직까지 고충을 겪고 있다. 사전에 법적인 문제를 충분히 점검했지만, 저 멀찍이 있는 진입로 일부의 소유권을 가진 주민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진입로가 폭우에 망가져도 아예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 귀농·귀촌을 하려는 분들에게 조언하고 싶다. 시골의 토지를 살 때 법적인 문제를 점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마을에 믿을 만한 지인 하나쯤 미리 만들어 해당 토지의 현황을 상세히 파악함으로써 불운을 예방하라는 걸.”
원주민의 텃세가 두려워 귀농·귀촌을 주저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합리적인 판단일까?
“텃세로 곤욕을 치른 사례가 있을망정 그걸로 마을 인심 전체를 측정할 일은 아니다. 한두 사람에 의해 발생하는 불상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난 주민들의 따뜻한 인정을 실감하며 살았다. 서로 돕고 나누는 관계를 추구할 때 정착이 수월해진다.”
임진이는 아침 일찍 카페로 출근해 문을 연다. 카페 앞 국도를 통해 전주로 출근하는 직장인 중 카페에 들러 샌드위치 같은 아침 간편식이나 차를 주문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아서다. 운영은 순조로울까?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 팬데믹이 들이닥쳐 전반적으로 여의치 않았다. 주변 일대에 카페들이 급속히 늘어 경쟁도 심화됐다. 진안에서 생산되는 청정 농산물로 만든 음료와 간편식을 팔았지만 수요가 많지 않았다. 식재료의 원가 대비 마진도 기대치 이하였다.”
어떤 방법으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고 보나?
“심기일전의 기회로 삼아 다시 뛰고 있다. 얼마 전 리모델링을 해 공간의 구색을 바꾸었다. 진안 홍삼이나 벨기에 와플이 들어가는 브런치 메뉴도 개발했다. 국도를 오가는 관광객을 타깃으로 한 메뉴도 만들었다. 으쌰으쌰, 이제 새로 출발한다! 그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는 거다.(웃음) 좋은 반향이 있을 거라 예상한다.”
뜻밖에 얻은 벽화 그리기 직업
삶이 원래 그렇듯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 질주를 했으나 돌아보면 우습게도 원래 자리 그대로다. 그렇다고 무슨 악마의 계략이 거기에 개입됐을 리 있으랴. 관점을 바꾸어 바라보면 시련도 강을 건너게 하는 징검다리다. 임진이는 부진했던 카페의 상황을 그렇게 긍정의 눈으로 읽어낸다. 사실 귀촌의 날들 속에서 그에게 닥쳐온 고통과 불편의 가짓수가 한둘에 그치지 않았단다. 그러나 그걸 위기가 아닌 충전의 기회로 간주해 허들을 넘어서길 거듭한 것 같다. 고생이 오히려 정신을 단련시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게 해준다는 걸 깨달으며 살아왔다는 게 아닌가. 그래 결과적으로 그의 귀촌 생활은 순항을 위주로 펼쳐졌다. 바야흐로 이젠 지역사회에서 알아주는 이가 많은 존재로 부상했다. 그럴 수 있게끔 부지런히 뛰었다.
“카페 일만 본업은 아니다. 사회복지사로서 일감을 갖는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가장 보람차고 즐거운 일은 마을 벽화 그리기다. 이건 재능기부 차원에서 시작했는데 뜻밖에도 일이 커졌다.”
마을 벽화를 그려 수익을 얻는가?
“그렇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그려준 마을 벽화가 맘에 든다며 행정 쪽에서 아예 사업을 위탁해주더라. 그래 주민들과 협업해 본격적으로 벽화 작업에 나섰다. 지금까지 진안군 관내 20여 개 마을에 100여 점의 벽화를 그렸다.”
원래 가지고 있던 재능을 발휘해 일자리를 창출한 셈이다. 신선한 얘기다.
“내가 미술을 전공했지만 누가 미술 공부를 하고 싶어 할 경우엔 뜯어말렸다. 그림으로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에. 사실 시골에 살면서 미술 관련 작업을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발상 자체를 해보지 않았다. 그랬는데 직업적으로 그릴 수 있는 기회가 우연히 주어졌다. 보수는 많지 않지만 돈보다 값진 보람이 크다. 마을 벽화 역시 일종의 창작 행위이기 때문에 작품성을 부여하기 위해 정성을 쏟는다. 벽화를 완성한 뒤 밝고 깨끗하게 변한 마을의 모습에서 희열을 느낀다.”
지역주민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시골에서 잘 살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얘기가 있다. 주민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당신의 비결은 무엇인가?
“대접받기보다 먼저 대접하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이웃에게 도움이 될 일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가령 고령층이 다수인 시골에선 꼭 필요한 민원조차 넣지 않는 걸 알고 내가 나섰다. 가로등이나 과속방지턱 설치에 관한 민원 신청을 해 해결하는 식으로.”
실로 치열하게 살았다
임진이에겐 동네 주민들이 붙여준 별명이 하나 있다. ‘민다리’라 불리는데 ‘민원의 다리’라는 의미라고 한다. 관심 갖고 찾아보면 나에겐 물론 남에게도 좋은 일은 시골에서도 얼마든지 많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진안군 정책자문위원을 맡아 주민 편익에 관련한 의견 제시도 한다. 이렇게 생활상의 활동 반경을 넓혀나갔다. 그러자 도시에 살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열리지 않던 안목이 열리더란다. 아울러 소극적이었던 성격이 능동적으로 변했고.
“내가 참여하는 공공활동은 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돈이 들어가는 일도 아니다. 소소한 일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공익에 관심 갖고 움직이다 보면 얻는 게 많다. 우선 인적 자산이 형성된다. 나 자신의 자존감이 높아지는 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선한 사람이 아니건만 남들이 선한 사람이라고 할 때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럴 땐 정말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다지곤 한다. 이런 감정은 도시에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시골도 자본주의의 흐름을 타고 돌아간다. 경제적인 면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나?
“귀촌 이후 남편의 사업 부도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부를 누린 적도 있지만 졸지에 정반대 상황과 직면한 셈이다. 하지만 돈이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거 아닌가? 낙심하진 않았다. 다만 귀촌 10년 중 절반 이상은 실로 치열하게 살았다. 시골이라는 한정된 조건 안에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덕분에 상황이 많이 개선됐다. 경제적인 면의 성공? 글쎄, 돈보다 남을 도울 수 있는 선한 삶에 더 큰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귀촌을 통해 비로소 삶의 진정성 있는 방향을 잡았다는 얘기로 들린다. 산다는 건 복잡한 퍼즐 맞추기와 닮았지만 희로애락을 거쳐 마침내 완성으로 가는 드라마인가? 솔깃한 이야기에 즐거웠다.
임진이가 주는 귀촌·귀농 Tip
•땅을 사거나 집을 짓는 일을 서두르지 말자. 적어도 2년 정도 집을 임대해 살면서 마을의 물정을 익히고 풍토를 파악, 과연 나의 성향과 어울리는 동네인지 판단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땅을 구입할 때는 진입로에 따른 원주민과의 분쟁 소지가 없는지 사전에 철저하게 확인하자.
•시골에 가면 관의 많은 지원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이 있지만 오산이다. 자립 의지를 가지고 뛰어들어야 한다.
•시골의 제도권 교육 환경은 오히려 도시보다 나은 측면이 있다. 승마, 골프, 사격까지 거의 무료로 배울 수 있다. 자녀 교육에 차질이 생길까봐 우려해 시골 생활을 꺼려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이들은 시골의 자연환경 속에서 한결 듬직하게 성숙한다.
•재력에 의지한 과시적 처신은 금물이다. 원주민과 갈등을 빚고 외로운 처지에 몰리기 십상이니까.
2023 실버문화페스티벌에서 만난 중년의 직장인은 이렇게 말했다. “시니어 비즈니스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고령화가 진행되는 상황에 자본이 중장년에게 있으니 앞으로 시니어 시장이 커지는 건 불 보듯 뻔한 거 아닙니까?”
일리 있는 분석이다. 우리나라는 빠른 고령화를 겪고 있다. 2025년 초고령 사회에 진입하고, 2028년에는 1차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 세대가 모두 고령인구에 포함된다. 향후 매년 80~90만 명 내외의 베이비부머가 고령층에 유입될 예정이다.
▶ 2022년 기준, 전체 가계 자산의 27% 보유
▶ 2025년 초고령 사회 진입
▶ 2028년 1차 베이비부머 모두 고령인구 포함
고령화에 따른 시니어 보유 자산의 확대는 다양한 시니어 비즈니스의 성장을 촉진하고 있다. 하나은행 하나금융경영연구소의 ‘시니어케어 시장의 확대와 금융회사의 대응’에 따르면, 2030년 시니어 시장은 215조 원 규모까지 커질 전망이다.
▶ 2030년 시니어 시장 215조 원 규모로 확대 전망
시니어 업계에는 그야말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고령화에 따른 인구절벽, 돌봄 등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면서 이를 돌파구로 삼기 위한 업계의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효과적인 대처를 위해 전문가들은 머리를 맞대는 중이다. 기업 멤버십 서비스 ‘브라보 시니어 프렌즈’도 그중 하나. 오는 6월 5일에는 중장년 소비자를 대상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기업, 기관 대표자, 실무자를 초대해 런칭 기념 세미나를 진행할 예정이다.
실버 산업계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지금, 중장년 소비자를 대상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에디터 조형애 디자인 유영현
사실 인간관계의 본질은 같다. 1936년에 출간된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이 지금까지 자기 계발 분야 베스트셀러에 자리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시대를 거듭할수록 사회적·문화적 변화와 함께 사람들 사이 소통 방식과 관계의 범위 등 많은 것이 달라졌다.
새로운 사람과 만났을 때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를 한 번에 완화할 수 있는 한국 사회 속 ‘필승 전략’이 있다. 학연, 지연, 혈연이다. 우연히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걸 알았을 때 주변 맛집, 교내 명소, 동아리 등으로 대화의 물꼬를 트다 보면 금세 친해진 기분이 든다. 지연이나 혈연은 말할 것도 없이 서로를 이끄는 매력 중 하나다.
속상한 일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세 요소 중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상대와 거리를 좁히긴 쉽지 않다고 여긴다. 공통점을 찾거나 재미있을 만한 주제를 꺼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 내다 결국 출신 성분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 때도 있다. 그러나 최근 인간관계의 지평이 흔들리고 있다. 흐름을 파악해 또 다른 필승 전략을 찾아 적용해보는 건 어떨까.
◇취향을 통한 ‘모임 속 모임’
전염병이 도래하면서 3여 년 동안 사람들의 교류가 일시적으로 단절됐다. 서로 간 소통의 빈도와 강도는 단박에 복구되기 어려웠다. 그 사이 취향을 중심으로 인간관계가 재편되기 시작했다. ‘2023 트렌드 모니터’에 따르면 나이, 사회적 지위, 의례 강요와 같은 견고한 전통적 기준을 통한 관계 맺기를 탈피하고자 하는 정서가 짙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크로밀 엠브레인이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조사한 결과, 취향이 비슷하면 관계가 더 돈독해질 수 있다고 말한 비율이 84.7%에 달했다.
일부는 익숙한 관계와 개인의 취향이 결합한 모임을 선호하기도 한다. 자신의 과거를 고려한 동창회나 회사라는 익숙한 공간에서 취향 맞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려 한다는 의미다. 직장 내 살롱문화(책, 와인, 스포츠, 맛집)가 그 예다. 수평적 형태만 유지된다면 한 번의 모임으로 사내 인맥 관리와 취미를 동시에 취할 수 있다. 가벼운 경험 공유 소재 외에 자신의 가치관과 사회적 의미(비건, 환경보호, 정치 성향)를 공유하고자 하는 모임도 생기고 있다.
◇찐친과 겉친 사이
‘2024 트렌드 모니터’에 따르면 무조건 인맥을 확장하려는 욕구는 줄고, 좁고 깊은 관계를 통해 관계의 효율을 추구하는 추세다. 일부는 SNS도 폐쇄형식으로 운영한다. 최근 개인 SNS의 공개나 운영은 대체로 이미 ‘잘 아는 관계’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었고(65.8%), 해당 관계끼리만 소통을 시도하는 편이었다.(65.3%) 반면, ‘찐친’ 외에는 필요할 때만 찾는 일회성 관계로 여기기도 한다.
‘티슈 인맥’이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는 목적과 친밀도, 중요도에 따라 의도적으로 색인을 붙여 분류하는 ‘인덱스 관계’를 소개했다. 이명수 연세라이프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온라인 만남이 익숙해진 만큼 다양한 관계를 맺게 될 기회도 급격히 늘었기 때문에 목적을 기반으로 인맥을 관리하는 경우가 나타난 것”이라며 “다만 활동 기록이나 메시지 답장 시기가 실시간으로 노출되기 때문에 서로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상식? MBTI
“MBTI가 어떻게 되세요?”는 처음 본 사람에게 서먹함을 깨는 용도로 빠지지 않고 사용된다. 최근 온라인에 간이 검사법이 확산되면서 광풍이 불었다. MBTI는 심리학자 칼 융의 심리 유형론을 토대로 개발된 성격 유형 검사다. 여러 문항을 통해 외향(E)과 내향(I), 감각(S)과 직관(N), 사고(T)와 감정(F), 판단(J)과 인식(P) 4가지 지표 중 각각 어떤 특성에 가까운지 분류한 뒤 해당 지표를 조합해 총 16가지 유형 중 하나로 성격을 구분한다.
SNS나 유튜브뿐 아니라 방송에서도 MBTI 유형별 연애·공부·관계법 등의 콘텐츠를 제공한다. 특히 주목받는 지표는 T와 F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고 흐름과 반응 양상에 큰 차이가 있다. 만약 친구가 “나 우울해서 미용실 가서 머리했어”라고 말했을 때 T 유형은 “어떤 스타일로 했어?”, F 유형은 “무슨 일 있는 거야?”로 반응이 나뉜다고 한다.
이명수 원장은 “MBTI는 원래 팀 프로젝트를 할 때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협업 능력을 높이고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라며 “타인과 대화할 때 나라는 사람이 어떤 성향인지, 상대와 다른 점은 무엇인지 재미로 파악해볼 수는 있지만 그 특성 안에만 갇히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은퇴 후 소원해지는 인간관계에 실망하는 이가 적지 않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안부도 주고받고 종종 식사도 했던 사이인데, 회사를 나오니 연락도 만남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누군가는 ‘내가 명함이 없다고 얕보나’, ‘내가 돈을 안 번다고 무시하나’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자. 혹시 ‘내가’ 스스로에게 그런 편견을 갖고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만약 그렇다면 주변은 잠시 제쳐두고 나와의 관계부터 돌아봐야 할 때다.
퇴직 이후의 삶이 길어지며, 노후 대인관계가 중요하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 다만 원활하고 지속적인 관계 형성을 위해서는 자신과의 관계를 다지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매일 은퇴를 꿈꾼다’, ‘은퇴의 말’, ‘은퇴의 맛’ 등의 저서를 펴내며 수많은 베이비붐 세대 은퇴자들을 만나온 한혜경 전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은퇴 후 얼마나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는 자신과의 관계에 달렸다”고 언급했다. 그는 “직장 생활로 생겨난 공적 관계망은 보통 퇴직 후 6개월 이내 소멸된다. 특히나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명성을 얻은 분일수록 이러한 변화에 취약하다. ‘그동안 나를 잘 따랐던 부하 직원들이 연락하겠지’ 같은 기대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어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크고, 실망이 쌓이면 절망하게 된다. 점점 위축되고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작은 일에도 버럭 하고 화를 내는 등 이른바 ‘앵그리 올드’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 모습을 보이면 주변에서는 회피하고 멀리하게 마련인데, 결국 대인관계가 더 나빠지는 악순환이 생긴다”고 덧붙였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들 좋아할까
한혜경 교수의 경험에 의하면 은퇴 후 화가 많아지고 이를 표출하는 중장년이 적지 않다고. 겉으로는 타인을 향해 화를 내는 것 같지만, 이는 결국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과 같단다. 스스로에게 답답하고 불만스러운 심정을 그러한 방식으로 토로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과의 관계가 평온하고 긍정적인 이들은 타인과의 관계 또한 순조로운 편이다. 한 교수는 “최근 뇌과학 분야 연구 중에 흥미로운 결과가 있었다. 나에 대한 정보처리와 타인에 대한 정보처리가 동일한 뇌 신경망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풀어 설명하자면 나를 좋게 보는 사람이 남도 좋게 보고, 나를 존중하는 사람이 남도 존중한다는 얘기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좋아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와의 관계, 자기 내면과의 소통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것이 곧 타인과의 관계에도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나와의 관계가 편안하고 능숙한 사람들은 웬만한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회복탄력성 또한 높다. 반대로 자신에게 불만이 많고 소통이 어려운 이들은 사소한 일도 크게 힘들어하고, 회복에 어려움을 호소한다. 한 교수는 “살다 보면 유난히 사람들이 미워지거나 괜히 무시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땐 혹시 내가 나를 미워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봐야 한다. 마치 거울처럼 누군가에게 갖는 나의 마음이 알고 보면 나를 향한 마음은 아닐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인정중독에서 벗어나 ‘셀프 칭찬’ 필요해
경쟁과 성취를 강조해온 한국 사회에서 현재의 중장년 세대는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다. 어떤 이들은 타인에게 인정받아야 잘 사는 삶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가령 어느 대학과 직장을 다닐지, 얼마만큼의 집을 사고 무슨 차를 타야 할지 등 자신보다 타인의 인정이나 평가를 따르는 경향이 적지 않다.
한혜경 교수는 “이러한 삶이 계속되다 보면 인정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거부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타인 때문에 상처받으며 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았을 때만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라며 “30~40대에는 타인의 관심과 인정이 성장의 디딤돌이 되기도 하지만, 50대 이후까지 이에 얽매이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와의 관계를 더 행복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주파수에 나를 맞추지 말아야 한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엔 차이가 존재한다. 그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나아가 잘난 척, 괜찮은 척이 아닌 솔직한 나를 드러낼 수 있을 때 개인적으로도 더 성장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한편으로는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하면서도 실제 자신을 향한 칭찬에는 의구심을 갖거나 거부감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엄격하고, 스스로의 능력과 장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반응이다. 한 교수는 자신의 좋은 점과 강점 등을 발견하는 과정이 매우 가치 있기에, 때때로 스스로를 칭찬해보는 시간도 마련해보길 권했다.
나를 위한 삶, 건강한 자기중심성 갖기
은퇴 후 또는 자녀 출가 후에도 끊임없는 희생을 감수하는 부모들이 있다. 가령 노후자금이 부족한데도 자녀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준다거나, 몸이 아프고 힘든데도 손주 육아를 돕는 등 자신보다는 자녀를 중심으로 노후를 살아가는 것이다. 타인 중에서도 자녀가 주는 기쁨이 상당하지만, 결국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지속적인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지키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자녀의 요구를 다 들어주면서 정작 자신의 인생을 누리지 못하고, 나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한다면 행복한 노후를 가꿔가기 어렵다.
한혜경 교수는 “초고령사회, 수명은 길어지고 1인 노인 가구가 증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어떻게 혼자 잘 살 수 있을까’, ‘누가 끝까지 나를 돌봐줄까’, ‘누가 내게 삶의 기쁨이 남아 있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꼭 해봐야 한다. 경제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독립돼야만 자신을 스스로 돌보며 잘 지낼 수 있고, 자신을 잘 돌볼 수 있어야 자식이나 가족을 포함한 타인과도 건강한 관계를 오래오래 유지하면서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결국 나를 위하고 사랑해줄 사람, 내게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할 사람은 곧 나 자신이다. 스스로를 위하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인본주의 심리학자로 유명한 로저스(C. Rogers)는 말년에 나이가 들수록 자신을 더 많이 돌보게 됐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나는 나를 좋아한다. 나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보았고, 그것을 충족시키려고 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삶을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내가 매우 아프지만 내 삶을 사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한 교수는 “로저스의 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결국 나이 들수록 ‘건강한 자기중심성’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건강한 자기중심성은 본인의 가치와 독특성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돌보는 태도다. 스스로를 홀대하고 혹사하는 건 짧고 굵게 살던 시대의 논리다. 100세 넘게 사는 요즘 시대에 필요한 건 자기중심적인 삶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스스로의 고유한 가치와 개성을 존중하고 사랑할 때, 타인도 나를 그렇게 존중하고 사랑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나의 역사 쓰기’로 회복하는 나와의 관계
교수 은퇴 후 현장에서 중장년을 대상으로 ‘나의 역사 쓰기’를 운영하고 있는 한혜경 교수는 글쓰기를 통해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나의 역사를 쓴다고 해서 유명인이 자서전을 내듯 거창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글쓰기가 어렵다면 나의 삶을 한 권의 책이라 여기고 목차를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은퇴 후에는 대인관계를 비롯해 여러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내 인생의 해답 또한 내 안에 있는 법. 찬찬히 과거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스스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발견하게 된다.
한 교수는 “나의 역사 쓰기란 내가 나에게 나에 대해서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다. 현역 시절 이력서에 보기 좋게 썼던 나의 모습과 달리,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적어보는 것이다. 퇴직 이후 인생 2막 또는 3막을 준비하려면 과거와 현재의 나를 잘 이해해야 한다. 나를 헤아리는 과정 속에서 자신과의 갈등 고리를 풀어내기도 하고, 과거의 나와 화해하는 경험도 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나의 역사 쓰기도 너무 말년에 했다가는, 과오를 발견하고도 ‘이제 와서 달라질까’, ‘너무 늦었구나’라며 개선할 시간이 없다고 여겨 절망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나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나의 역사를 꼭 한번 써보시길 바란다”고 권했다.
도움말 한혜경 전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기꺼이 오십, 나를 다시 배워야 할 시간' 저 , '나의 역사 쓰기' 운영)
은퇴 후 밥줄은 대부분 네트워킹으로 연결된다. 인맥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퇴직하고 나면 일로 만난 사이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줄어든 수입 탓에 있던 인맥도 줄어드는 게 현실이다. 이럴 때일수록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하는 일’은 더 중요해진다. 모든 관계를 깊게 유지할 수 없는 시기지만, 역설적이게도 기회는 사람을 통해서 오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 마케팅팀 대리입니다.”
이 인사말에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회사명으로 어느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지 유추할 수 있고, 마케팅팀에 있다고 했으니 그의 직무가 무엇일지도 추측해볼 수 있다. ‘대리’라는 직함이라면 회사에서 일한 지 몇 년 차쯤 되었을 것이고, 어떤 정도의 일을 해봤을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직업도 마찬가지다. 회계사, 가정주부, 자영업자 등 직업을 나타내는 단어는 그가 대략 어떤 종류의 일을 하고 있는지 가늠하게 한다.
하지만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 나를 나타내는 직함이 없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현재 딱히 하고 있는 일이 없어 내 역량을 표현할 직업이 없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은퇴 후에는 공식적인 채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일자리가 많지 않다. ‘알음알음’ 채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트워킹을 하려면 인간관계가 더욱 중요해지는 시기지만 동시에 더 넓은 관계를 형성하기가 부담스러운 시기이기도 하다.
처음 만난 사람과 깊은 관계를 이어가기 어렵다면, 상대가 나를 한 번만 봤더라도 오래 기억하게 할 수는 없을까? 무소속인 나를 어떻게 소개하면 사람들의 인상에 깊이 남을 수 있을지 방법을 알아봤다.
1. 개인 명함 만들기
“아, 제가 지금은 명함이 없어서요….”
은퇴 후 사람을 소개받을 때 상대에게 명함을 받으면 열에 아홉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왠지 작은 목소리로 말끝도 흐리고 ‘지금은’ 없다는 말을 변명처럼 덧붙이게 된다고. 직장인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명함이 소중해지는 순간이다.
명함은 자기소개서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소속, 직함, 이메일, 전화번호, 주소 등 많은 정보가 담기기 때문이다. 별다른 설명 없이 명함 한 장으로 나를 소개할 수 있는 효과적인 매개체가 된다. 현재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개인 명함을 만들어보자.
회사·직무·직급을 소개하는 명함이 아니기 때문에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네잎클로버나 꽃을 말려 코팅한 명함, 한지로 만든 명함 등 나의 취향이나 특징이 나타나도록 만들어도 좋다. 오히려 보통 명함과 달라 기억에 남는 효과가 있다. 직함은 내가 꿈꾸는 것, 혹은 나를 표현하고 싶은 것으로 적어보자. 자유인, 기업 성장 코디네이터 등 무엇이든 좋다. 내가 규정하는 나, 앞으로 되고 싶은 나를 나타내는 단어면 충분하다.
2. 동물로 표현하기
“안녕하세요, 독수리가 되고 싶은 곰입니다.”
30년 직장 생활을 하며 장착한 내 능력과 이력을 어떻게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화려한 경력을 줄줄 늘어놓다 보면 ‘왕년에~’로 시작하는 자기 자랑이 될 수 있다. 자기소개에서 중요한 점은 상대로 하여금 ‘나를 궁금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비유나 은유는 꽤나 인상적인 자기소개 방법이 될 수 있다.
현재 나의 모습을 닮은 동물과 5~10년 뒤 되고 싶은 나를 닮은 동물을 떠올려 소개해보자. 앞서 예시로 든 문장은 ‘곰처럼 우직한 면이 있는데, 앞으로는 독수리처럼 자유롭게 살고자 한다’는 의미를 담은 소개다.
동물이 아니어도 좋다. 물건, 색깔, 계절, 노래 등을 활용해 나를 표현해보자. 조금은 유치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상대에게는 ‘왜 독수리가 되고 싶지?’라는 호기심을 일으키는 소재가 되기도 한다. 특히 은퇴 이후라면 과거에 무엇을 했는가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도 중요하기에 미래 지향적인 자기소개로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3. 나 활용법 소개하기
비즈니스를 위한 자기소개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나 활용법’을 안내하는 것도 방법이다. ‘나 활용법’이란 내가 과거에 무엇을 했고 어떤 점이 강점이어서 앞으로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즉 상대가 나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알리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 PR(홍보)인 셈이다.
이때 주의할 점은 일방적인 소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부분까지 짚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과거에 했던 일들을 정리해서 나의 강점을 도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의 전문성이 무엇인지 정리됐다면, 만나는 상대에 따라 어떤 협업을 할 수 있을지 소개한다. 나의 전문성이 어떤 성과를 낼 것인지, 어떻게 도움이 될지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30년 동안 전업주부로 생활했다면 정리 정돈, 요리, 청소 등 자신이 잘하는 분야를 전문성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시간이 없는 맞벌이 부부의 자녀를 위해 도시락으로 건강과 시간을 다 잡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거나, 집 안 정리 컨설팅으로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도록 돕는 데 적격이라는 등의 PR을 해볼 수 있다. ‘나 활용법’은 내 이야기를 들은 상대가 필요한 순간에 나를 떠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도움말 앙코르브라보노 협동조합 김창렬 이사, 박영록 이사, 박경임 이사장, 윤서진 코칭경영원 파트너 코치, 임정민 임파워에듀케이션 대표
중년의 인간관계가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낀 세대’이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는 부장급 위치인 그들은 베이비붐 세대 상사와 MZ세대 후배들의 눈치를 보며 일하고, 가정 내에서는 부모와 자녀의 부양 부담을 동시에 안고 있다. 직장과 가정에서 발생한 스트레스는 양쪽에 악영향을 끼치며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기도 한다.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방법은 과연 없을까.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 주변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패션·음악 등 취향을 드러내며 ‘나’를 표현하고자 했던 그들. 지금의 ‘낀 세대’는 1990년대 20·30대를 보낸 X세대(1965~1979년)다. 대한민국에 등장한 첫 개인주의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화려했던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현재는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사회에 진출하던 시기 IMF 직격탄을 맞은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조직에 순응했고,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기성세대가 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구독자 19만 명의 유튜브 채널 ‘유세미의 직장수업’을 운영하는 유세미 작가는 “낀 세대라는 표현은 애처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본전을 찾겠다는 ‘본전의식’이 강한 X세대는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마지막 세대다. 기성세대와 생각이 비슷한 그들은 후배인 MZ세대와의 관계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MZ세대는 관계에 있어 당연히 개인이 중요하다. 그런 그들에게 충성심을 요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공정하고 합리적이지 않으면 바로 거부 반응을 보인다”면서 “이러한 괴리감이 X세대를 번번이 당황하게 만든다. ‘나는 안 그랬는데’라며 억울함을 표현해봤자 세대 차이만 확인하고 마음만 공허해질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X세대 마음의 짐
1974년생인 김재완 작가는 2021년 X세대 헌정 에세이 ‘나 아직 안 죽었다’를 펴냈다. 어른들의 말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고 취직해 일했더니 어느덧 ‘꼰대’ 소리 듣는 나이가 된 그는 지난 인생을 돌아본다. 어느 날 갑자기 팀장에서 좌천되면서 공황장애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아 다시 일어섰고, 그의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야기는 동년배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한다. X세대를 대표하는 김재완 작가와 소통 전문가 유세미 작가와 이야기를 나눠봤다.
2024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중위 연령은 46.1세다. X세대는 사회·경제적으로나 중심부를 차지하는 허리 세대다. 김재완 작가는 X세대 마음의 짐 첫 번째로 ‘부모에게 가진 부채감’을 언급했다. “X세대는 부모 부양에 대한 경제적·심리적 책임감이 크며, 제사를 지내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 같다”라는 그는 부채감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재완 작가의 어머니는 고향인 경북 상주에 홀로 거주한다. 김 작가는 효도하겠다는 생각에 어머니를 자주 찾아뵈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는데, 막상 집에 가면 피곤해져서 괜히 어머니에게 짜증을 내는 자신을 발견했단다. 그는 “나도 부채감을 갖고 있었던 것인데, 몇 년 전 내려놓았다. 그랬더니 어머니와의 관계가 오히려 좋아졌다. 자주 못 찾아뵙는 대신 한 번 갔을 때 얘기를 더 나누려고 하고, 전화도 자주 드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더 잘 통하더라”라면서 “표면적으로는 불효자 같아 보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효자가 된 셈"이라고 말했다.
대홍기획 데이터 인사이트 팀의 책 ‘세대 욕망’에서는 “X세대가 우리 사회에 가져온 가장 혁명적인 변화가 있다면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는 관념을 형성한 것”이라면서 “X세대는 친구 같은 부모가 되고 싶다는 로망을 대체적으로 실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기중심주의가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은 부모에게 경제적이든 정서적이든 충분히 지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녀에게는 자신이 받지 못한 것을 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와 관련해 김재완 작가는 “우리는 자녀 교육과 관련해 오만감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짚었다. 39세에 결혼해 딩크족이라는 그는 다소 조심스러워하면서, 사회와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세상의 풍파로부터 애들을 막으려고 할 게 아니라, 세상의 풍파를 헤쳐나가는 지혜를 가르쳐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생각을 전했다. 유세미 작가는 자녀와의 소통법에 대해 “과거가 아닌 미래를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어떻게 너를 키웠는데’가 아니라, 앞으로의 꿈이나 계획에 대해 얘기해야 가족 관계가 좋아진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재완 작가는 회사에서는 ‘격차감’을 내려놓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봤다. ‘라떼는 말야’(나 때는 말야)라면서 꼰대같이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 김 작가는 “핵개인화 시대라는 것을 인정하고, MZ세대 후배들과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인 소통을 해야 한다”면서 “책, 야구, 고양이 등 무엇이든 좋다. 그들의 취향과 관심사를 파악하고 얘기를 나누어보는 것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유세미 작가도 조언을 전했다. MZ세대는 과거와 달리 직장 상사를 명령과 통제하는 윗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의 코치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유 작가는 “자신의 역할을 코치라고 정립하면, MZ세대를 이해하게 되고 소통이 훨씬 수월해진다. MZ세대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다가오는 상사에게 마음을 열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나에게 달린 솔루션
낀 세대가 인간관계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김재완 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라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전했다. 김 작가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세 가지 순간이 있다. 첫 번째는 군대 제대했을 때, 두 번째는 결혼했을 때, 세 번째는 43세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았을 때다”라고 밝혔다. 당시 ‘글을 써보라’는 아내의 추천에 온라인 커뮤니티에 역사 관련 글을 쓴 그는 딴지일보에 연재하게 됐고, 이후 책도 펴냈다. 그러면서 ‘작가’라는 부캐(부캐릭터)를 갖게 됐고,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긍정적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본캐는 남들이 가는 길만 따라가다 선택당했지만, 부캐는 내가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김재완 작가는 60대가 되기 전에 부캐를 만들 것을 추천했다. 사실 김 작가는 한 달 전 퇴사했다. 회사 생활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잘했지만, 더 늦기 전에 꿈을 펼쳐보고자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올해까지는 여유롭게 글을 쓰며 부캐가 본캐가 될 수 있을지 알아볼 계획이다. 김 작가는 “앞으로는 70대, 80대까지 일해야 한다고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면, 이것저것 해보면서 찾아야 한다”면서 “내가 행복해야 가정에도 평화가 찾아오고, 모든 인간관계도 좋아진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취향을 찾아 취미활동 또는 봉사활동 등을 하다 보면 마음 맞는 친구가 자연스럽게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유세미 작가는 무조건적으로 새로운 관계 맺기에 매달리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 작가는 “별 의미 없는 모임, 단톡방, 각종 경조사를 챙기느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라.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족, 친구, 동료들을 더 귀하게 챙기고 돌봐야 한다”라면서 “나이 들수록 넓고 얕은 인맥보다는 좁고 깊은 인맥이 중년의 안정감과 만족감에 더 영향을 끼친다”고 인간관계 솔루션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의 중심이 ‘나’여야 한다는 점이다. 유세미 작가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관계의 스트레스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 신경 쓰면서부터 발생한다. 효도하는 자녀, 자랑스러운 부모, 일 잘하는 부장이 되고 싶은 마음이 낀 세대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관계에서 편안해질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만약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편이라고 스스로 판단된다면 좀 더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작은 목표라도 세워보세요. 목표를 달성하면서 성취감을 느껴보는 거죠. 점점 더 주도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남에게 휘둘리면 재미없습니다. 휘둘리면 그게 인간관계의 스트레스죠. 그것을 피하려면 타인의 평가나 시선이 아닌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일상의 방식을 고수하세요.”
유세미 작가의 상황별 꿀팁
회사 스트레스, 집에 가져가지 않기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혼자 삭히다 보니 화병이 생기죠. 그렇지만 스트레스를 집에 가져가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임원한테 매출 때문에 온갖 모욕적인 잔소리를 들은 김 부장이 있다고 가정해보죠. 그는 저녁 먹는 와중에도, 자려고 침대에 누워서도 마음속에 품어온 검은 봉지를 열어 회사 쓰레기를 봅니다. 임원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나한테 실망해서였을까? 아니면 나가라는 시그널인가? 별생각을 다 하죠. 그러나 그 시간에 임원은 뭘 하고 있을까요? 예능 프로그램을 신나게 웃고 떠들며 보다가 기분 좋게 잠들었을 겁니다. 김 부장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도 못 한 채 말이죠. 결론은 회사 쓰레기를 가슴에 품고 집에 와서 꺼내보고 또 꺼내본 김 부장만 손해라는 겁니다. 회사 쓰레기는 회사에 두고 오세요. 집에 와서 회사에서 있었던 부정적인 일이 생각나면 ‘아, 내가 또 회사 쓰레기를 가지고 왔구나’ 떠올리고 거기서 멈추는 마음 훈련을 해보세요. 한두 번으로 되지는 않지만 자꾸 연습하면 회사 쓰레기를 버리고 집에 가게 됩니다. 회사와 집을 분리하는 연습이 스트레스를 막는 데 가장 좋습니다.
신뢰받는 ‘일잘러’식 말하기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직장에서 선배로서, 후배로서 상대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면 직장 생활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습니다. 첫째,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말하세요. 누가 들어도 오해하지 않게 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세요. 두괄식으로 표현하면 더 효과적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에게 보고할 때 ‘상무님, OO업체 미팅 결과를 보고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거죠. 그리고 세부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3가지 정도로 묶어서 명확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둘째, 애매하게 피드백하지 마세요. 핵심과 근거를 들어 명확하게 이야기하세요. 셋째, 시니컬한 말투는 버리세요. ‘그거 어차피 안 돼’, ‘하기는 하겠는데 되겠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과 누가 일하고 싶을까요? ‘어떻게 하면 더 개선할 수 있을까’, ‘더 잘할 수 있을까’를 이야기하는 사람을 신뢰하기 마련입니다.
1
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 은행나무
“하버드를 졸업한 저자는 안정된 직업을 갖지 않고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 소박한 생활을 담은 책입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 소박하고 검소한 삶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는 메시지가 담긴 이 책은 인생이 흔들릴 때 떠올리기만 해도 영점 조절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2
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스콧 니어링 / 보리출판사
“《단순 생활자》를 쓰면서 가장 자주 떠올린 책입니다. 저자 부부는 서구 문명이 안전한 생활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고 여겨 뉴욕을 떠나요. 그리고 버몬트 시골 마을에서 서로 돕고 기대며 지냈죠. 그들처럼 자급자족하며 살 순 없겠지만, 단순하고 조화롭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3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문학동네
“어떤 책을 읽고 나면 ‘인생이 다 담겨 있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사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자는 평범하고 매끈해 보이는 사람들의 이면에 마주하기 힘든 치부가 있다는 데 주목합니다. 그걸 견디는 게 인생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요.”
4
스토너
존 윌리엄스 / 알에이치코리아
“스토너는 농업을 배우러 대학에 갔다가 문학에 빠집니다. 영문학도가 된 그는 가정을 이루고, 교육자로 살죠. 출세보다는 학문과 가정에 충실하려 했지만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세상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요. 읽은 분께 묻고 싶어요. 스토너가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황보름
소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로 전 세계 독자들에게 따뜻한 응원을 건넨 작가.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LG전자에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다 글을 쓰고 싶어 일을 그만뒀다. 그 후 작가처럼 살았고, 정말 작가가 됐다. 지은 책으로는 ⟪단순 생활자⟫, ⟪매일 읽겠습니다⟫ 등이 있다.
에디터 조형애 취재 문혜진 디자인 유영현
옥상훈 네이버클라우드 AI SaaS 비즈니스 리더
온라인 게임에서 통용되는 단어인 본캐와 부캐. ‘본캐’는 주로 사용하는 본래 캐릭터, ‘부캐’는 본캐 생성 이후 만든 부차 캐릭터를 말한다. 근래 유명인들이 기존과는 다른 활동명과 캐릭터로 대중의 인기를 끌며 ‘부캐 열풍’이 일기도 했다. AI 전화 돌봄 서비스 ‘클로바 케어콜’을 성공적으로 이끈 옥상훈(53) 네이버클라우드 AI SaaS 비즈니스 리더에게도 그런 부캐가 있다. 바로 인스타그래머 ‘컵누들러’다. 아직 본캐만큼 왕성하진 않지만, 여러 가능성을 품고 일상의 감칠맛을 더하는 존재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부캐를 일컬어 ‘히든캐’(숨겨진 캐릭터)라고도 부른다.
먼저 본캐 이야기부터 해보자. 본캐 타이틀은 ‘네이버클라우드 AI SaaS 비즈니스 리더’. 얼핏 앞뒤 키워드만 떼어 보더라도 국내 굴지의 IT 기업인 네이버에서 특정 사업의 리더인 셈인데, 일단 본캐의 레벨도 심상찮게 느껴진다. 참고로 사스(SaaS)는 서비스형 소프트웨어를 뜻하는데,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네이버클라우드’다. 옥상훈 리더는 한마디로 자신의 역할을 ‘BD’라고 소개했다. 여기에도 본래 뜻과 그만의 숨은 뜻이 담겨 있었다.
“흔히 업계에서 BD라고 하면 비즈니스 디벨로퍼(Business Developer)를 말합니다. 직역하면 사업 개발자인데, 대개 새로운 사업에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담당하죠. 그것도 맞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비즈니스 디자이너(Business Designer)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AI 생태계를 만들어 클라우드 사업을 키우고 파트너로 성장시키는 과정이 비즈니스를 디자인하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같은 단어지만, 제 나름대로는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요.”
본캐의 전환, 본업 모먼트 시작
옥상훈 리더의 대학 시절로 거슬러가 보면, 그때도 본캐와 부캐가 있었지 싶다. 한양대학교 90학번으로 입학한 그는 생물학이 전공임에도 늘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더랬다. 그러다 졸업할 즈음 IT 소프트웨어 교육을 받았는데, 마침 관련 업계에서 개발자를 양산하던 분위기였다. 부캐도 쏠쏠히 키운 덕에 그는 IT 세계로 진입해 SI(System Integration) 개발자가 될 수 있었다. 부캐가 본캐로 전향된 것이다.
이후 본캐를 성장시키며 네이버와 인연을 맺었다. 2011년 입사 후에는 소프트웨어 개발이 아닌, 관련 사업을 만들고 제휴 맺는 업무를 맡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10여 년간 네이버 개발자센터 개편, 오픈 API 표준 제작, 네이버 D2 스타트업 팩토리 론칭 등 수많은 프로젝트를 담당해왔다. 최근 그가 집중하는 사업은 전화 돌봄 서비스 ‘클로바 케어콜’이다. AI 기술을 적용해 어르신의 말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기억까지 해내는 혁신적인 서비스로 주목받고 있다.
“코로나를 계기로 시작된 사업이에요. 당시 코로나 감염자에게 발열 여부 확인 전화를 사람이 일일이 했는데, 어느 순간 확진자가 대폭 늘어나며 인력으로는 감당이 안 됐던 거죠. 처음에는 성남시와 협력해 전화 업무를 AI로 대체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후 코로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도입하는 지자체가 더 많아졌어요. 그러다 보니 서비스를 이용하는 지자체 쪽에서 아이디어를 주시더군요. 발열 여부만이 아니라 독거노인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서비스로도 가능하겠느냐고요. 그렇게 부산 해운대구랑 도모해 처음 케어콜을 선보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초반 성적은 저조했다. 실제 사용자인 독거노인들이 보인 만족도는 50% 남짓이었다. 옥상훈 리더는 실패에 가까웠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기술을 고도화해나갔고, 생성형 AI와 하이퍼 클로바 기술 등을 적용했다. 초기 버전에서는 AI와의 자연스러운 대화가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를 극복해나가며 발전을 이뤄온 것이다.
“아무래도 대상자가 어르신이다 보니 AI 기술에 익숙하지 않으셨죠. 때문에 최대한 AI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 덕분인지 업그레이드한 서비스로 조사했을 때는 90% 정도의 만족도를 나타냈습니다. 놀라운 성장이죠. 그런데 이런 피드백이 있더라고요. AI가 말귀도 알아듣고 공감해주는 건 좋은데, 이전 대화를 기억 못 하니 얘기를 반복해야 한다는 문제였죠. 결국 2022년에 기억하기 기능을 탑재해 출시했어요. AI가 질환이나 병원 이력 같은 걸 기억해주는 덕분에, 이제는 케어로봇처럼 어르신들의 건강관리 쪽으로 발전 가능성을 보고 있어요. 아직은 독거노인이나 취약계층으로 대상자가 한정되지만, 장차 누구나 자기 편의에 맞게 맞춤형으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으리라 전망합니다.”
상극의 맛을 더할 때 최고의 궁합
본업 이야기를 한창 하던 중에도 그의 시선은 호시탐탐 한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촬영 소품으로 기자가 준비한 컵라면. 비닐봉지라는 베일에 가려진 컵라면들에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이제 본캐는 접고 부캐 이야기를 해보자고 운을 떼자,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까부터 계속 여기에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웃음) 좀 꺼내봐도 될까요? 이야, 다 새로 나온 것들이네요. 아직 못 먹어본 것들이에요. 어떻게 이렇게 골라오셨어요?”
옥상훈 리더는 신기한 듯 물었지만, 방법은 간단했다. 그의 인스타그램을 봤기 때문이다. 그의 인스타그램에는 400여 가지 컵라면 리뷰가 올라와 있는데, 첫 사진은 늘 위에서 찍은 컵라면 뚜껑이다. 메인 페이지만 봐도 그가 어떤 컵라면들을 먹었는지 한눈에 보인다. 리뷰도 간단명료하다. 면발, 맵기, 염도 등을 5점 만점으로 표기하고, 총평도 한두 줄 정도로 짤막하게 남긴다. 올리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편리한 방식이지만, 한 가지 아쉬움은 있었다. 컵라면 종류가 워낙 많아 특정 제품의 리뷰가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쉽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맞습니다. 저도 늘 새로운 컵라면을 사려고 하는데, 가끔은 ‘이걸 내가 먹어봤던가?’ 헷갈릴 때가 있어요. 오죽하면 아예 내가 컵라면 검색 엔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그런데 뭐 마음만 먹고 아직 시도는 못 해봤습니다.”
지금의 컵라면 리뷰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시점도 클로바 케어콜이 탄생한 시기와 맞물린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며 바깥에서 타인과 식사하는 일이 어려워진 터였다. 혼자 먹는 식사이니 간편하면서도 기왕이면 요리다운 메뉴였으면 했다. 그 두 가지 요구사항을 충족시키는 게 컵라면이었던 것이다.
“그 전까지는 컵라면을 잘 안 먹었어요. 그런데 계속 먹다 보니 나름의 철학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항상 이야기하는 건 ‘컵라면은 요리’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저 인스턴트식품 정도로 치부하지만 저는 하나의 요리로 인정해야 한다고 봐요. 궁극의 맛을 잘 응축해서 편리성을 극대화한 형태잖아요. 물만 부으면 끝나니까요. 게다가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면발 상태나 수프, 건더기 맛도 다양하고 훌륭해졌어요. 또 컵라면끼리 조합해서 먹어보는 것도 흥미롭죠. 가령 짜장과 짬뽕, 크림소스와 매운소스처럼 상극의 맛을 더할 때 의외로 궁합이 잘 맞아요. 또 이건 저만의 팁인데 짜장컵라면에 콜라를 한 숟갈 정도 넣어보세요. 단맛이 확 우러나서 훨씬 풍부한 맛을 느낄 수 있어요. 그거 말고도 팁은 무궁무진해요.”
컵라면 이야기라면 밤을 새도 모자라다는 옥상훈 리더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며 컵라면 먹는 일도 줄었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부캐의 장점 중 하나는 표면적인 성과가 없더라도 큰 타격이 없다는 것 아닐까. 본캐처럼 책임이나 강박을 느낄 필요도 없다. 마음이 동하는 대로 이따금씩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자기만족이 된다. 그 과정에서 얻는 일상의 즐거움과 신선함은 덤이다.
“가장 재미있는 순간은 새로운 컵라면을 찾았을 때예요. 라임 향 나는 컵라면이나 침대 회사에서 사은품으로 특별 제작한 컵라면을 손에 쥐었을 때의 기쁨도 잊을 수 없네요. 그렇게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맛을 찾아가는 게 참 흥미로워요. 편의점을 가더라도 컵라면 코너부터 둘러보고, 해외나 낯선 지역에 가도 컵라면부터 확인하죠.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게 편의점이고 컵라면인데, 손쉽게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또 그런 경험을 기록해가는 재미도 쏠쏠하고요. 나름 잘 정리해놓은 거라 라면 회사에서 제안이라도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아직 깜깜 무소식이네요.(웃음)”
본캐를 성장시키는 힘, ‘통찰력’
언젠가는 본격적으로 부캐를 키워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은퇴 이후쯤이 될 테다. 아직은 본업에서 할 일이 많고, 아직 학생인 아이들을 키우려면 더 오래 현업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다. 늘 선도하고 혁신을 일으키는 분야다 보니, 그에 따른 고충도 있으리라. 실제 그와 동년배인 50대 직장인들은 새로운 기술이나 MZ세대의 문화를 따라잡는 데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물론 그도 때때로 버거움을 느끼지만 독서와 학습을 통해 그 간극을 좁혀나가는 편이다. 일련의 노력을 통해 그가 본업에서 이루려는 목표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이 분야에서 좀 더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가령 클로바 케어콜의 경우에도 지자체로 치면 100곳, 사용자로 치면 2만 명 정도 되는데요. 더 다양한 범위로 확장해서 사업적 성과를 이루는 동시에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사실 기술이라는 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과 도구이지, 어떤 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기술들이 합리적인 비용으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면 꽤 의미 있는 성과가 아닐까 합니다.”
옥상훈 리더는 IT나 신기술 관련한 책뿐 아니라 새로운 분야의 식견을 넓힐 수 있는 책도 고루 섭렵 중이다. 꾸준한 독서를 통해 인생에서 중요한 건 결국 ‘통찰력’이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끝으로 그에게 다소 엉뚱한 말을 던져봤다. ‘자신의 인생과 컵라면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이윽고 우문현답이 나왔다. 그간의 통찰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생이든 컵라면이든 결국 ‘맛’이 중요한 것 같아요. 잘 숙성되고, 그것이 우러나야 진가를 발휘할 수 있죠. 정말 괜찮은 컵라면은 물을 붓기 전에도 그 가치가 느껴질 때가 있어요. 뜯기 쉬운 포장, 친절한 설명글, 풍부한 건더기 등. 역시나 먹어보면 맛도 진국이죠. 반면에 별로인 컵라면은 겉으로 보나 맛으로 보나 ‘정말 대충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인생도 마찬가지 같아요. 스스로가 만든 인생의 가치를 정성스럽게 담아내고, 잘 표현해야 하니까요. 제가 지금까지 너무 맛없어서 못 먹고 버린 컵라면이 딱 두 개 있는데요. 제 인생도 잘 가꿔서 누군가에게 버려지지 않고, 좀 먹을 만한 컵라면 같은 존재가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