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니까 늘 감싸주는 바다가 있다. 마을마다 바람막이처럼 산이 든든하다. 너른 평야는 풍요한 사계절을 보여준다. 긴 역사를 품은 유적과 숨 쉬는 자연의 강화 섬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거길 걷기만 해도 이름이 붙는 여행길이 반기는 곳, 강화 나들길이다.
강화나들길은 20개 코스가 있다. 여행자들을 위한 각 코스별 특색이 담긴 도보여행 길을 걷는 맛은 가히 중독이다. 무엇 하나 지루할 틈 없다. 코스마다 오랜 시간이 담긴 자연 속으로 사람이 걸어간다. 지형상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던 돈대와 유구한 역사 이야기, 고인돌이나 옛 건축물, 갯벌 위로 저어새가 나는 생태 이야기, 들녘의 바람길 따라 해가 지는 포구마을까지 이 땅의 멋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걸을 수 있는 도보여행 길이 펼쳐진다.
가을이다. 이번에는 강화나들길 16코스인 서해황금들녘길이다. 가을 길이라면 누렇게 곡식이 익어가고 갈대숲이 일렁이고 온 누리에 뿌려지는 가을 햇살과 기왕이면 시원한 바닷바람까지 불어주는 곳을 떠올려 본다. 그런 곳이 있을까 싶지만 이곳 서해황금들녘길이 가을 길로 딱 맞춤 코스다. 걸으며 강화 스탬프 투어를 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course16. 서해황금들녘길 -창후리 선착장- 망월돈대- 계룡 돈대- 용두레 마을- 황청 저수지- 망양 돈대- 외포 여객터미널 - 거리 13.5km / 소요시간 대략 4시간 / 난이도: 하
가을 하늘 아래 청정자연, 창후리 포구의 힐링
창후리 포구 가까이 갈수록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갯내음이 반긴다. 예전엔 강화의 교동섬을 가려면 이곳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이제는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왕래가 편리해졌지만, 창후리 앞바다가 삶의 터전이던 주민들에겐 뱃길이 끊겨 상권의 하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인적이 뜸해진 창후리 작은 포구엔 가을을 맞아 가게마다 갓 잡아 쏟아낸 생새우가 산더미였고 소금에 버무리는 풍경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다. 반쯤 물이 빠진 한적한 앞바다에서는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의 뒷모습만으로도 여유롭다.
황금빛 너른 들 따라 망월돈대와 계룡 돈대
가을 들녘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길이 눈앞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다. 넓디넓은 강화 들판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망월돈대와 계룡 돈대가 자리 잡았는데 그 길 끄트머리에 망월돈대가 있다. 하점면의 망월돈대는 드넓은 망월 평야 속에 놓여있어서 찾아가는 길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사실 망월 평야는 애초엔 바다였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 천도가 이루어졌고 갑작스러운 이주로 늘어난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바다를 메우기 시작했다. 망월 평야 역시 간척을 한 땅이다.
황금들녘을 마음껏 누리며 지나다 보면 가끔씩 도보여행자들이 좀머 씨처럼 묵묵히 걷는 걸 본다. 어쩌다 그 사이로 라이딩족들이 휙휙 지나가기도 한다. 논 옆으로 드문드문 정미소나 미곡창고와 같은 커다란 건물이 들녘의 풍경으로 한 몫 한다. 아예 들판에서 바로 탈곡을 하고 도정을 하느라 분주히 기계가 돌아가는 걸 볼 수도 있다. 강화의 너른 들판에서 밥맛 좋기로 이름난 강화 섬쌀이 이렇게 생산되는 것이었다.
망월돈대는 들판의 둑 옆으로 자리 잡았다. 대부분의 돈대가 약간의 높이가 있는 해안가의 언덕쯤에 놓인 것과는 달리 갯가 낮은 지역에 설치되었다. 외적이 수로를 타고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방비책이다.
가을에 망월돈대에 가면 강화의 가을을 모두 맛볼 수 있다. 들판은 물론이고 천혜의 갯벌이 어찌나 고스란한지. 그 갯벌 위로 꽃처럼 자라난 염생식물이 붉게 퍼져있다. 갈대와 가을꽃으로 뒤덮인 한적한 그 제방으론 도보 여행자들이 서너 명 걸어오는 게 보인다. 돈대 좌우로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둑은 강화 나들길 16코스인 창후리 선착장과 황청리 용두레 마을로 이어진다.
멀지 않은 곳의 계룡 돈대도 들녘에 위치해 있다. 계룡 돈대는 망월 평야의 독립된 고지 위에 있어서 전망이 좋다. 현재 강화도에는 53개소의 돈대가 남아있는데 계룡 돈대는 조선 숙종 때 설치된 구조물이다. 돈대 위에 서면 양쪽으로 바다와 평야가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조망이다. 바다에서 작업하는 어민의 모습과 갯벌 위 군락지를 이루어 피어난 붉게 물든 칠면초, 서해의 가을 풍경이 잔잔하고 평화롭다. 이곳에서 조금 전 망월돈대에서 만났던 일행들을 또 만났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인사는 즐겁다. 황금 들녘은 끝없고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난 갈대와 들꽃은 반짝이는 가을볕에 더없이 예쁘다.
호젓한 마을에 잠기다, 용두레마을과 황청 저수지
할아버지들의 구수한 전승민요 용두레질 노랫가락이 들녘으로 퍼지고 예부터 맑은 물이 흘러 큰 인물이 난다는 용두레 마을, 주변으로 석모도와 서해가 보인다. 마을에서 보는 노을이 일품인 마을이다. 들판의 농로엔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몇 마리 학이 이삭을 쪼고 있다.
곧 이어지는 내가면의 황청 저수지는 낚시터로 조성되어 짜릿한 손맛을 즐기는 강태공들을 위한 좌대가 즐비하다. 깊은 산과 노송들로 아늑한 저수지 제방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을과 들판이 고즈넉하다.
언덕 위 숲 속 망양 돈대와 외포항의 갯내음
이제 강화나들길 16코스 서해황금들녘의 막바지다. 외포항을 내려다보는 곳에 세워진 망양 돈대는 고려 삼별초와 인연이 깊다. 역사적으로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를 예속화하려는 몽고의 정책과 종속적 위치로 특권을 유지하려던 일파들에게 항거한 병사들의 항쟁이다. 결국 진도로 떠나가는 것은 쫓겨가는 길이었고 거기서 다시 제주로 떠나면서 항쟁의 불꽃은 꺼져만 갔다. 그렇게 삼별초가 떠났던 외포항에 400년이 넘어서 들어선 돈대가 망양 돈대다.
망양 돈대 오르는 길에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라고 새겨진 삼별초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뒤에는 비석을 세운 취지가 새겨져 있다. 그 옆으로 제주와 진도를 상징하는 돌하르방과 진돗개 조형물이 우뚝하다. 진도군이 삼별초 호국 항몽의 역사를 바탕으로 자매결연을 맺고 진도군민이 진돗개상을 기증했다.
유허비 뒤편 경사진 언덕길을 올라가면 정사각형에 가까운 널찍한 망양 돈대가 숲에 둘러싸여 있다. 이제 외침의 불안 따윈 없지만 역사적 의의를 알게 하는 돈대와 강화나들길의 의미를 이렇게라도 되새겨 본다. 그 옛날 삼별초가 출항했던 물 빠진 앞바다에 갈매기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돈대 저편 외포항 바닷가 마을엔 오늘을 살고 있는 여행자들이 오간다. 선선한 가을을 맞아 해산물과 젓갈을 찾는 이들로 외포리 수산물 직판장이 분주한 모습이다.
새소리 바람 소리를 들으며 들녘을 걷고 살아있는 갯벌을 곁에 둔 생태마을을 지났다. 가끔씩 바다와 논둑 사이 풀숲에 앉아 몸과 마음을 열고 자연과 소통을 하던 한나절, 강화의 자연이 나를 보듬어주고 역사가 말을 건네 오던 시간들. 오롯하게 강화를 만끽할 수 있는 하루다. 창후리 여객터미널부터 외포 여객터미널에 이르는 비순환형 강화나들길 16코스 서해황금들녘길의 종료 스탬프를 찍는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1925년 간행된 김소월 시인의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시이지요. 봄가을 없이 돋는 달이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땅에서 자라는 풀·나무를 하나하나 알아가기 전에는 그토록 많은 꽃이 산과 들에서 피고 지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특히 야생 난초의 존재는 경이, 그 자체였습니다. 난초는 으레 ‘잘 빠진’ 화분에 담겨 집 안이나 사무실 등 실내에서 감상하는 원예종이라고 생각해온 탓이지요.
그런데 서울, 경기, 강원 등 겨울이면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곳에서도 봄이 되면 감자난초, 은대난초, 나도제비란 등이 돋아나 희거나 노랗거나 붉은 꽃을 저마다 피워낸다는 사실을 알고는 1차로 크게 놀랐습니다. 이어 많은 사람이 보고 싶은 1순위 야생화로 꼽는 광릉요강꽃을 비롯해 복주머니란, 보춘화 등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친숙한 이름의 난초들과 으름난초, 흑난초, 무엽란처럼 다소 생소한 이름의 난초 등 무려 90여 종의 야생 난초가 이 땅에서 저절로 자란다는 걸 알고는 두 번째로 놀랐습니다.
자주색, 즉 ‘짙은 남색을 띠는 붉은 색’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어 자(紫)와 난초 난(蘭)의 의미가 더해진 자란(紫蘭). 군더더기 없이 단출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의 야생 난초는 이에 더해 또 다른 놀라움을 선사합니다. 처음 보는 순간 강렬하고 진한 홍자색 꽃 색으로 인해 열대 지역이나, 고온의 온실에서 자라는 이국적인 난초일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자란이 우리 땅에서 저절로 나고 자라는 야생 난초라는 걸 알고는 놀라움과 반가움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나아가 한 야생화 애호가가 썼듯 “발에 밟힌다고 할 정도로 흔하게 자생”하는 걸 보는 순간 더 큰 기쁨과 놀라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2018년 5월 5일 차마 건너기를 주저했던 진도대교를 지나 진도(珍島)의 남쪽 바닷가에 도착해 갯바위를 밟았습니다. 그새 무성해진 산기슭을 살피니 군데군데 불쑥불쑥 돋아난 홍자색 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초록의 숲에 홍자색 꽃이 피니 눈에 확 뜨입니다. 자란이란 단순명료한 이름의 연유를 알 것 같습니다. 자생 난의 화려한 개화 현장을 확인한 것만도 감격스러운데, 조금 뒤 더 놀라운 장면을 만났습니다. 수백 촉의 자란이 바다와 섬이 한눈에 보이는 해안 평지에 한데 뭉쳐서 홍자색 꽃잎을 일제히 벌리고 선 장관을 본 것이지요. ‘어린이날 교통 체증’을 무릅쓰고 서울에서부터 500km 가까이 달려온 보람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Where is it?
전라남도 무안, 신안, 진도, 해남, 완도, 고흥, 그리고 제주도가 자생지다. 남쪽 바닷가와 제주에서 자란다는 것은 자란이 열대식물까지는 아니지만 추위에 약하다는 걸 보여준다. 남쪽에서 자라다 보니, 다른 야생 난초들에 비해 키도 크고 꽃도 큰 편이다. 50cm 안팎의 꽃대를 포함해 키가 60cm 정도까지 자란다. 길이 20~30cm, 너비 2~5cm의 길쭉한 타원형 잎이 5~6장이나 나와 줄기를 감싸며 위로 뻗는다. 5~6월 잎 사이에서 나와 50cm까지 자라는 꽃대 끝에 3cm 크기의 홍자색 꽃이 6~7개까지 달린다. 남서해안 10여 곳 미만의 한정된 지역에서만 자생하지만, 개체 수는 지천이어서 진도나 해남 등 자생지 야산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
진도 남단의 조그마한 어촌 마을에 팽목항이 있다.
선착장엔 주변의 섬으로 입출항하는 배들이 정박해 있고 그 위로 갈매기들이 날고 있는 평화로운 항구마을이다. 지난 3년 동안 이 마을엔 슬픔과 아픔이 가득 담긴 채 아직도 무거운 공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입구의 어판장은 찾는 사람 없이 꽃게 손질하고 있는 몇몇 상인들만 눈에 들어온다.
아픈 현실 부정하고 싶지만 그 앞엔 여전히 무수히 많은 노란 리본이 겨울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두 손 모아 기도하며 울부짖던 부모형제들의 슬픔이 고스란히 다가온다.
숙연해지는 마음으로 빼곡한 기다림의 문구들을 조심스레 하나하나 읽으며 울컥 눈물이 솟는다.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아비규환의 대형참사를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니 미치도록 아프고 억장이 무너진다. 그리고 이 지경이 되도록 시간만 보낸 사람들에게 분통 터지고 한스럽다. 그럼에도 이제야 와 본다. 어린 영혼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미안하고 아픈 마음에 아직도 국민들이 이곳을 찾기에는 심리적 장벽이 생겨서 선뜻 오지 못하기도 한다. 구해주지 못하고 지켜주지 못한 한스러움에 차마 발걸음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월호 대참사 이후 진도 어민들의 일상이 많이 침체된 이야기를 지난번 에서 유시민 님이 언급했다.
"아직 그 아픔을 기억하기에 진도대교를 못 건너는 마음은 이해하나 이대로 계속되어도 괜찮은 것인가, 이것만이 정말 최선의 위로 방법인가, 말로만 하는 위로가 아닌 원래 일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혹시나 거길 찾지 못하는 것이 괜한 배려이고 외면일 수도 있는 건 나 또한 이런 이유가 또 다른 희생자를 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든 건 마을 입구의 텅 빈 어판장을 들러서 올 때부터 느꼈다. 모든 분들이 조용했다. 생활이 힘겨울지라도 희생자 가족들의 아픔을 알기에 차마 말할 수 없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세월호의 아픔 속에 그분들도 갇혀있는 것이었다. 당연히 희생자나 유가족들도 이런 현실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도 사람들의 원래의 일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유시민 님의 생각에 유희열이 '시인과 촌장'의 노래 '풍경'으로 멋지게 마무리를 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벌써 하루하루 기온이 뚝 떨어지고 있지만 다행히도 팽목항의 고요한 바다 위엔 따사로운 겨울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모든 것들은 제자리로 돌아가고 부디 물속 깊이 따스해지길 바라며 무수한 노란 리본 가슴에 가득 품고 그곳을 떠나왔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명량대첩의 기적은 기울어져가던 조선의 운명을 건져 올렸다. 서해안을 타고 올라가 한강하구로 도성을 도모하려던 왜군의 계획을 보기 좋게 좌절시킨 것이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으로부터 꼭 2개월, 13척의 전선으로 300척이 넘는 왜선을 격퇴한 기적 같은 승첩이었다. 이순신 장군 스스로 천행이었다고 기록한 전투였다.
후세 역사가들은 이 승전을 세계 4대 해전사의 하나로 등재했다. 150척이 넘는 전선이 수몰되고, 장수도 군졸도 죽고 흩어져 전력 제로 상태의 조선수군이 어떻게 그런 기적을 이루어낸 것인가. 믿을 수 없는 이 전투의 경과는 여러 나라 해군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러일전쟁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자신을 군신(軍神)이라고 떠받드는 말에 “진정한 군신은 이순신 정도다. 그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 정도도 못 되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옥에서 풀려나 백의종군 길에 오른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된 것이 기적의 단초였다. 8월 3일 진주에서 복직교서는 받았지만 달랑 종이 한 장뿐이었다. 군영도, 병력도, 군량도, 전선도 없는 완전 제로였다. 그래서 기적이었고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히는 것이다.
그날부터 이순신은 전라도 해안 지역과 내륙 지방을 순회하면서 수군 재건을 서둘렀다. 그가 다시 수군을 이끌게 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숨었던 군관들과 군졸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모두가 한심한 패전에 분을 품었던 모양이다. 배흥립(裵興立), 송희립(宋希立), 이몽구(李夢龜), 최대성(崔大晟) 등 옛 측근들이 상사를 찾아와 진용이 갖추어지자, 거제 현령, 발포 만호 등 지방관들도 낯을 내놓았다. 다시 옛날과 같은 권한을 쥐게 된 사람과 관계를 수복하려는 것이었다.
순천, 보성, 장흥 땅을 거쳐 전선의 소재를 찾아가는 동안 군관 군졸이 120여 명으로 늘었고, 보성에서는 창, 칼, 활, 화살 등 무기류에 약간의 군량미까지 손에 넣게 되었다. 피란민들도 이순신 가까이로 몰려들어 든든한 배후가 되어줬다. 배설(裵楔)이 끌고 도망쳤던 12척의 전선은 우여곡절 끝에 8월 19일 장흥 회진포에서 인수되었다. 이순신이 무서웠던 경상우수사 배설은 주저주저 현장에 나타나 전선을 넘겨주고는 명량회전이 임박하자 도망쳤다.
왜적이 자신을 찾아나선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이순신은 즉시 회진포를 떠나 서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안전한 포구를 찾아 진용을 정비하고 교육·훈련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왜적에게 쫓기며 수군 재건에 노심초사 과로한 탓인지, 토사곽란이 일어 꼬박 사흘을 앓았지만 편히 누워 쉴 수가 없었다.
이진(梨津·해남군 북평면), 어란포(於蘭浦·해남군 송지면)에 진을 치자 왜적이 알고 달려왔다. 전의와 실력을 떠보려는 것이었다. 어란포에 닻을 내린 8월 28일 새벽 왜 척후선 8척이 포구 안으로 돌입해왔다. 칠천량 이후 사기가 오른 탓도 있겠으나, 전선이 10여 척뿐이라는 것을 알고 얕잡아보는 것 같았다. 이순신은 즉시 출동 명령을 내렸다. 우리 전선이 마주 나가 싸움을 걸자 적은 황급히 달아났다.
야습을 우려한 이순신은 즉시 진도 벽파진(碧波津)으로 진을 옮겨갔다. 그곳에서 보름 동안 머물며 참모들과 함께 왜의 대군을 맞아 싸울 궁리에 머리를 싸맸던 이순신은 마침내 울돌목을 최후의 결전장으로 선택하기에 이른다. 15일자에 그 까닭이 적혀 있다. “벽파진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효 적은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라 했다.
진도와 해남 땅 화원반도를 가르는 좁은 해협은 옛날부터 물길이 사납기로 유명한 곳이다. 진도대교가 놓인 곳은 폭 300여 m에 불과한데 수중에 날카로운 암초가 많아, 조류가 바뀔 때면 회오리 물결이 일어 물소리가 20리를 간다고 울돌목이란 이름을 지녔다.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진도읍에서 고속버스를 내려 되돌아 나와 도보로 대교를 건너면서 실감할 수 있었다. 물목이 300m 정도인 바닷속에 수심이 20m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뾰족뾰족한 한 암초가 숨었다니, 조류가 바뀔 때 물살이 울고 돌지 않고 어쩌랴! 특히 해남 쪽 물길이 크게 울었다.
흰 거품을 뿜어내며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당시의 통쾌한 전황이 떠올랐다. 조류가 한창 빠를 때는 해남 쪽 해안에서 뜰채를 들고 있다가,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숭어를 잡는다는 말도 이해되었다.
결전의 날이 왔다. 9월 16일 별망군(별도로 조직된 정탐조)이 보고하기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우리 배를 향해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어란포와 그 부근에 진을 쳤던 무리들이다. 이순신을 따라온 해상 피란민들이 벽파진 인근 야산에 올라 헤아린 바로는 왜선이 300척이 훨씬 넘는다 했다. 초고에도 330척으로 기록돼 있다.
적 선봉장은 해전의 천재라는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였다. 마다시(馬多時)라 불리던 그는 임진년 당항포 해전에서 왜군 함대를 이끌다 전사한 지휘관의 친동생으로, 안골포에 진을 두고 있었다. 그는 “내 손으로 이순신의 수급을 베어 형의 원수를 갚고 서해를 통해 경강(京江·한강)으로 항진하겠다”고 나선 인물이었다.
이 이야기는 14일자 기록으로 입증된다. 이날 탐망군관 임준영(任俊英)이 왜적선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어란에 들어왔다는 보고 끝에 “왜적에게 붙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김중걸(金仲傑)이 말하기를, 왜적이 각처의 배를 불러 모아 합세해서 조선수군을 섬멸하고 경강으로 올라가기로 의논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적혀 있다. 연합선단을 꾸려 어떻게든 서해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확인된 셈이다.
왜군은 수군 총사령관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였다. 그 휘하에 해전에 능하다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구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 등 제장이 총동원되었다. 현지 해역에 330척을 비롯해 남서 해안 곳곳에 숨겨놓은 것을 다 합치면 적세는 1000척으로 추산되었다.
출진 전날 이순신은 장수들에게 유명한 정신무장 훈화를 남겼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 하였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족히 1000명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16일 오전 9시쯤 명량해협에 나타난 적은 진도 해안에 머물다가 유속이 느려지기 시작한 정오 가까이 되어 울돌목에 나타났다. 이에 맞추어 이순신 함대도 우수영을 떠나 울돌목 동북쪽, 우수영 포구를 감싸고 있는 양도 앞 바다에서 전투대형을 이루고 기다렸다. 맨 앞에 이순신의 기함, 그다음이 김응함(金應諴)의 중군선단, 그 뒤가 김억추(金億秋)의 후군선단, 그 배후에 전선으로 위장한 피란민 어선 100여 척이 포진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는 많은 적을 대적할 수 없다 없다고 낙심하면서 모두 회피할 꾀만 냈다. 그 와중에 김억추는 벌써 2마장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면서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아 탄환이 폭풍우같이 쏟아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늘어서 화살을 빗발같이 쏘니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16일자 에 적힌 초기 상황은 이렇게 위태로웠다.
겁을 먹은 중군과 후군이 멀찌감치 물러서 있고 이순신만이 고군분투하는 장면이다.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려 해도 적이 대들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초요기(부르는 깃발)를 세웠다. 중군장 김응함과 거제 현령 안위(安衛)가 다가왔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친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통제사의 질책을 받은 안위가 마지못해 적진으로 돌입했다. 김응함에게도 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대장을 구원하지 않는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두 장수가 적진으로 뛰어들자 다른 배들도 용기를 내어 본격적으로 해전이 시작되었다. 적 대장선과 휘하 두 척의 군사들이 안위의 배에 오르려고 개미 붙듯 한 것을 보고 이순신이 달려가 총통과 화살을 마구 날렸다.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淙),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도 달려와 합세했다. 지자, 현자 총통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고 화살이 빗발처럼 날았다.
왜군이 남긴 명량해전도에는 조선수군이 쇠뇌를 발사하는 장면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쇠뇌는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화살이 발사되는 장치로, 5~10초당 한 발씩 쏠 수 있어 왜적이 무서워한 무기다.
한창 교전 중 기함에 타고 있던 준사(俊沙)라는 항왜(降倭)가 “적장 다마시가 바다에 빠졌다”고 말했다. 총통이 대장선 층루에 맞아 선교가 통째로 부서져 바다에 떨어진 것이었다. 이순신이 물 긷는 병사 김돌손(金乭孫)을 시켜 갈고리로 적장을 낚아 올렸다. 준사는 “그래, 다마시 맞다!” 하며 좋아 날뛰었다. 그의 시신이 토막토막 잘려 대장선에 효수되자 갑자기 적진이 조용해졌다.
그 틈에 조선함대는 북을 크게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돌진해 들어가 적선을 만나는 대로 부딪쳐 깨트리고 불화살을 쏘았다. 삽시간에 31척이 분멸되었다. 때마침 조류의 방향이 바뀌어 적진은 우왕좌왕했다. 어쩔 수 없었던지 적은 남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조류에 떠밀려 북쪽으로 흘러든 적선들은 후위의 어선들에게 협공을 당해 흩어졌다.
우리 측 인명과 전선은 전혀 피해가 없었고, 부상자는 기함에서 5명, 전체로는 100명이 안 되었다. 13척의 전선으로 300척이 넘는 적 함대를 물리친 전대미문의 승첩이었다.
유성룡의 에는 이때 조선수군 병력이 8000명이라 했다. 불과 2개월 전 120명을 거느렸던 ‘회령포 결의’ 때와 비교하면 믿어지지 않는 숫자다. 유성룡은 이순신이 통행첩을 발행해 막대한 전비를 충당했다고 썼다. 바다로 피란 온 백성들에게 큰 배는 쌀 3섬, 중간 배는 2섬, 작은 배는 1섬씩을 받고 통행첩을 발행해주었다는 것이다. 또 백성들이 갖고 있는 구리와 쇠 등을 모아 대포를 주조하고,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었다. 이순신에게 의지해 난리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성안에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실정으로 보아 병력 자원 해결이 어렵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왜적 함대가 그토록 허무하게 깨진 데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세키부네(關船)라는 전선이 조선 판옥선보다 몸체가 작아 충돌에 약한 탓이었다. 임진년 연전연패에 충격을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선 대형화를 명해 정유년에는 몸체가 큰 아다케부네(安宅船)가 많이 왔다. 그러나 폭이 좁은 해협에 들어설 수가 없어 뒤에 물러서 있다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쫓겨간 것이다.
조선수군 승인의 하나로 거북선의 역할이 거론되기도 하는데, 이 부분은 더 고증되어야 할 문제다. 8월 19일 배설에게서 12척을 인수하고 1개월도 못 되는 사이 거북선을 건조할 시간이 있었겠냐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다. , , 같은 신빙성 높은 기록에 거북선이 출전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 한 가지는 ‘쇠사슬’론이다. 조선수군이 울돌목 바다 밑에 쇠사슬을 가설해 적선이 걸려 항진할 수 없었다는 학설인데, 이 역시 기록이 없어 증빙이 되지 않는다. 쇠사슬은 임진년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해역에 설치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는 항만 방어용이었지 실전에 이용된 기록이 없다. 다수 학자들은 물살이 센 울돌목에는 무게가 몇십 톤이나 되는 쇠사슬 설치가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진도대교를 건너기 직전인 해남 땅에 국민관광지 명량대첩 기념공원이 있다. 작년에 개관한 기념관에는 거북선과 판옥선 실물대 모형선과 전쟁 경과 등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눈에 띄는 유물은 없다. 진짜 유물은 거기서 2km쯤 떨어진 우수영 마을에 있는 명량대첩비다.
숙종 때(1688년) 건립된 이 비석 상단에 새겨진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 전액 12자는 의 작가 서포 김만중(金萬重)의 전서체로 유명하다. 1942년 일제가 강제 철거해 조선총독부청사 뒤편에 방치했던 것을 1950년 우수영 지역 유지들이 되찾아 세웠다. 처음에는 우수영성 밖에 이건했다가, 2011년 도로공사 관계로 처음 자리로 되돌아왔다.
1964년 우수영 마을에 건립된 사당 충무사도 지난 5월 비석 옆으로 이전 건립되어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비석을 둘러보다가 현지 주민에게서 기막힌 수난사를 들었다.
“왜놈 헌병 둘이 비석 앞에 와서 권총을 꺼내 몇 발이고 비석을 쏘아버리두만. 비석이 무슨 죄라고. 그때의 파편이 저기 저렇게 남아 있소.”
철거 당시 일곱 살이었다는 노인은 지금도 그 심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비석 상단을 유심히 보니 어린애 주먹 크기의 총탄 자국이 몇 개 식별되었다.
대승첩 직후 이순신은 빠른 조류를 타고 당사도(唐沙島·신안군 암태면), 어의도(於義島·신안군 지도읍), 법성포를 거쳐 전북 고군산 열도까지 진출했다. 명량승첩과 이순신의 건재를 알려 피란민들을 안심시키려는 행보였는데, 왜군의 추적을 따돌리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왜군은 어디에 숨었을지 모를 조선함대가 두려워 서해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신출귀몰하는 이순신의 전법에 또 어떤 수모를 당할지 모를 일 아닌가. 참패의 원수는 갚아야겠는데 바다는 무서웠다. 그래서 택한 것이 뭍에 있는 이순신의 고향집이었다.
10월 14일, 일단의 무리가 아산 금성촌 이순신 본가에 불을 지르고 분탕질을 쳤다. 막내아들 면(葂)이 그 와중에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영내에 있는 민가에 들어 밤새 통곡했다. 그날 밤 코피를 한 되 넘게 흘렸다는 기록도 남았다. 영웅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가!
일본 홋카이도 어느 온천 마을에 있는 주민에게 늘 지진 위험이 있는데 왜 이사를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들의 보금자리는 우리가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향을 떠나 행복하게 살아갈 자신도 없고, 온천이라는 관광 수입원을 놓칠 수 없기에 그냥 살아간다는 말이 기억난다.
일본은 재해가 많은 국가다. 여기에 집값 폭락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복구비용은 250조 원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진에 대한 심리적 불안과 스트레스는 일본 전역을 강타했다. 이와 맞물려 우리나라 공항에서 가까운 인천 지역 빌딩에 일본인들이 관심을 갖는 바람에 가격 상승세가 일어나기도 했다. 1999년 몽골을 여행하던 중 관료로부터 일본이 지진 등 비상시에, 몽골로 이주해올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한 적도 있다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일본 문화는 이러한 자연재해 속에서 발달해왔다. 화산이 있어 온천문화가 생겨났고 지진이나 태풍, 대설에 대응하기 위해 건축물이 진화하면서 일본은 재난 대비 선진국이 되었다.
우리나라 내진설계율은 35% 정도에 불과해
예측하기 어려운 재난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 우리나라의 내진설계는 2005년 이후 건축허가를 받은 3층 이상의 주택에 대해 규정했고 이번 경주 지진으로 2층 이상으로 강화하기로 했다. 현재 초고층 아파트 등 일반 고층 건물은 진도 7 정도에 견디도록 설계된 원자력발전소 기준에 맞춰져 있다. 기존 건축물을 내진 보강할 경우는 건폐율, 용적률, 대지 안의 공지, 높이 기준 등을 완화할 수 있도록 하여 적극적인 인센티브를 부여하기로 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내진설계가 적용된 건축물은 약 35%에 불과하다. 앞으로 내진설계가 강화되면 공사비가 더 들어 분양가는 올라갈 전망이다. 내진 성능을 0.5 높일 때 분양가는 3~5% 더 상승한다고 한다. 소비자가 원하지 않을 때, 내진 설비를 특별 기준 이상으로 갖추는 건설업체는 드물다. 시장원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원전의 경우, 내진설계 기준을 6.5에서 7.0으로 높이는 데 1000억원이 더 든다고 한다. 무엇보다 기준을 어느 정도에 맞춰야 할지 예측이 어렵다. 우리나라 동쪽은 원전 밀집 지역이다. 이제는 원전의 안전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원전을 줄이면 전기 부족을 해결할 현실적인 대안이 없어 부담이 되고 또 원전에서 수도권으로 이어지는 고압선 문제는 지역 주민들의 불편사항으로 늘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우리가 정말 전기를 아껴 써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환경 문제와 재난에 대한 대비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기적인 조치가 필요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가 아닌 우리 후손들을 위해 준비하고 생각할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점에서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 다음 문제들을 풀어보세요
❶ 내진설계가 잘된 지역은 어디일까?
❷지진이 발생할 경우 고층이 안전할까, 저층이 안전할까?
❸우리나라에서 아픔과 교훈을 남긴 건축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 해설과 답
❶비교적 새롭게 조성된 도시인 세종(50.8%)과 울산(41%), 경남(40.8%)은 내진설계율이 높다. 하지만 이미 대도시로 조성된 지 오래된 부산(25.8%), 대구(27.2%), 서울(27.2%) 등의 내진설계율은 낮다.
❷지진에 따른 건축물 구조 안전성은 저층 건물보다 고층건물이 뛰어나다. 다만 저층은 외부 피난이 수월하다는 점과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❸(1) 1970년 서울 마포구 와우아파트가 무너졌다. 공사 자재를 아껴야 했기 때문에 철근 70개를 넣어야 튼튼하게 유지될 기둥에 고작 5개의 철근을 넣을 정도로 부실공사를 행했다. 그 결과 준공 4개월 만에 아파트 한 동이 무너지고 말았다.
(2)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1년 후인 1995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3) 예전에는 한강 둑이 무너진 적이 종종 있었다. 서울 상습 침수지역에서 다세대주택 저층이나 단독주택, 또 반지하에서 세를 살던 사람들은 물난리를 겪었다. 그때 그 지역에서 물나리를 겪은 사람들은 지금도 저층이나 저지대를 기피한다.
(4) 1980년대 말, 당시 정부는 아파트 200만 호를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연간 주택 공급물량은 50만 가구인데 일시에 네 배가 넘는 많은 아파트를 지었기에 원자재가 부족했다. 그 결과 바닷모래를 사용하기도 해서 새 아파트에 금이 가는 일이 벌어졌다. 다행히 1991년 부동산시장은 안정됐다.
>> 김정렬(金淨烈) 한국일반행정사협회 전임교수
국내 최초로 부동산 전문가들로 네트워크를 구성, RE멤버스를 설립하고 부동산써브 대표를 역임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자산신탁, 기업체, 금융기관 등에 부동산 자문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