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해본 사람은 없다는 스포츠, 바로 골프다. 골프는 사실 중년 남성들이 즐기는 스포츠로 인식됐다. 그러나 현재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스포츠로 통한다.
이 같은 변화는 여러 방송 매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TV조선에서는 김국진의 '골프왕', JTBC에서는 박세리의 JTBC '시니어클럽'이 각각 방송 중이다. SBS 이경규의 '편 먹고 공치리'는 시즌2가 방영을 앞두고 있다. 고정 출연진뿐만 아니라 게스트 또한 화려하다. 배우 이성경, 이완, 엄지원, 이연희, 최수영 등, 취미 생활과 관련된 예능이기 때문에 부담감을 내려놓고 출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연예계를 대표하는 골프왕으로는 개그맨 김국진과 배우 박선영이 뽑힌다. 김국진은 골프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연예계 골프왕으로 꼽힐 정도의 실력자다. 프로 못지않은 실력을 갖고 있다고 전해진다. 박선영은 지난 2000년부터 골프를 시작한 경력 21년 차의 베테랑이다. 그는 "비거리로 최대 230m를 친다"고 밝힌 바 있다. 워낙 여러 운동을 섭렵해서 체력이 좋은 것이 그의 비법. 골프지도사 자격증까지 갖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주변뿐만 아니라 TV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골프를 쉽게 접할 수 있자 골프를 즐기는 인원도 늘어나고 있다. 골프가 그간 중년층에게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아마 고급 스포츠라는 인식 때문으로 풀이된다. 골프 장비를 사다 보면 돈이 많이 들 것 같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느낌이 강하게 든다.
현재는 그러한 편견이 많이 녹아내렸고, 전 세대를 사로잡은 골프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바로 연습한 만큼 실력이 나온다는 점이 아닐까. 골프는 특히 꾸준한 연습 없이는 실력이 늘 수가 없다. 그래서 목표를 갖고 연습하다 보면 일정한 루틴이 생기고, 점점 골프에 진심으로 몰두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둘 이상이 하면 승부를 위한 경기도 할 수 있다.
이처럼 노력에 비례하는 특징 덕분에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더욱 골프를 즐기기 좋은 여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시니어 세대에게도 골프는 취미 생활로 확대되고 있다. 골프를 하던 중년층이 나이를 먹은 것일 수도 있지만, 이제 시작하는 시니어들도 많다고 전해진다.
시니어 골프 대회도 쏠쏠한 인기를 끌고 있다. 독일의 베른하르트 랑거(64)는 시니어 골퍼 최강자로 통한다. 그는 지난 10월 PGA투어 챔피언스에서 만 64세로 역대 최고령 우승을 차지했다. 챔피언스는 만 50세를 넘긴 선수만 출전할 수 있는데, 랑거는 노령의 힘을 보여준 것. 한국에서는 김종덕(60) 선수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또한 전문가들은 시니어들에게는 '파크골프'를 추천한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공원에서 치는 골프로, 푸른 자연을 보면서 부담스러운 장비 없이 쉽게 골프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특히 여럿이서 함께 하기 때문에 무료함을 잊고 즐거움을 배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 그리고 먼저 해 본 시니어들의 말처럼 시니어들은 파크골프부터 골프를 접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앞서 말한 대로 시니어에게 골프가 좋은 이유는 시간적 여유가 있고, 육체적으로 무리가 가지 않아 취미 생활로 즐기기 좋은 스포츠라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100세 시대에 스포츠 취미 생활로 심신의 건강을 찾아보자.
대표적인 50+ 시니어 골프 선수인 최경주(51)가 한국 남자 골프 역사를 새롭게 썼다. 한국 선수 최초로 시니어 무대인 미국프로골프(PGA) 챔피언스 투어에서 우승했다.
최경주는 27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페블비치 골프 링크스에서 열린 PGA 챔피언스 투어 퓨어 인슈어런스 챔피언십 최종 3라운드에서 버디 5개와 보기 1개로 4언더파 68타를 쳤다. 1라운드부터 3라운드까지 합산 결과 13언더파를 기록한 최경주는 공동 2위인 베른하르트 랑거와 알렉스 체카를 2타 차로 앞서며 우승을 차지했다.
최경주는 지난해 8월부터 만 50세 이상이 뛰는 챔피언스 투어에 나서, 지난주 샌퍼드 인터내셔널에서 첫 우승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연장전 끝에 준우승에 머물렀다. 하지만 일주일 뒤인 이날 1위에 오르며, 한국 선수 최초로 챔피언스 투어 우승이라는 한국 남자 골프 역사를 새로 썼다.
최경주는 2002년 한국 선수 최초로 PGA 투어 컴팩 클래식에서 우승하며 한국 남자 골프 역사를 새롭게 쓰기 시작했고, 지난해까지 PGA 투어에서 아시아 선수 최다인 통산 8승을 기록했다.
최윤수 프로가 남녀노소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스포츠인 골프의 매력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골프는 남녀노소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스포츠라는 장점을 갖고 있다. 신한동해오픈 1라운드에서 손자뻘 선수와 플레이를 펼친 최윤수 프로가 이런 골프 매력을 다시 보여줬다.
지난 9일 인천 베어즈베스트 청라 골프클럽에서 제37회 신한동해오픈이 막을 올렸다. 최윤수는 버디 1개와 보기 9개를 묶어 8오버파 79타를 치며 공동 133위를 기록했다. 성적은 최하위권이었지만 그는 이번 대회 출전으로 2018년 KPGA 선수권에서 작성했던 코리안투어 최고령 출전 기록을 다시 갈아치웠다.
1948년생으로 올해 73세인 그는 서른에 프로가 된 뒤 코리안투어에서 11승을 올린 전설적인 선수다. 시니어 무대인 챔피언스투어에선 26승, 만 60세 이상이 참가하는 그랜드시니어 부문에선 19승을 기록하고 있다.
최윤수는 이번 대회에 주최자인 신한금융그룹의 초청을 받고 고심 끝에 출전했다. 그는 “KPGA선수권대회도 3년 전에 마감해 나가야 하나 망설였다”며 “어렵게 결정을 하고 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경기에서 아마추어 국가대표인 17세 송민혁과 함께 플레이해 더 화제가 됐다. 송민혁과 최윤수의 나이차는 55년으로, 2018년 제61회 KPGA선수권대회 최윤수-정태양의 51년10개월을 넘는 역대 KPGA 투어 최다 나이차 동반 라운드 기록이다. 송민혁은 “대선배님과 함께 해 영광이었다”며 “선배님의 조언에 제 플레이 스타일을 되돌아보게 됐다”고 소감을 말했다.
최윤수는 손자뻘 후배의 기량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잘 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체격도 그렇게 크지 않은데 공이 얼마나 멀리 가는지 나와 100m 이상 차이가 난 것 같다”며 “이런 선수들이 있기에 우리나라 골프가 세계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나 싶다”고 감탄했다.
진즉 함께 나누고 싶었다. 미국 PGA 투어 챔피언스(시니어 투어)에서 뛰고 있는 더그 배런(Doug Barron)이 내게 일깨워준 그 교훈을. 무명(無名)임을 한탄하지 말라는 얘기 말이다. 재미있는 사연 같은데 왜 이제야 꺼내느냐고? 음, 여태 사진을 못 구했다. 더그 배런 사진을. 없는 것은 아닌데 쓸 만한 게 없다. 그냥 뱁새 김용준 프로처럼 평범하게 생겼다고 상상하면 된다. 정 궁금한 독자는 검색해보기를.
더그 배런을 처음 본 것은 2019년 8월에 열린 ‘PGA 투어 챔피언스 딕스 스포팅 구즈 오픈’ 때다. 나는 그 대회 해설을 맡았다. 대회 마지막 날 서너 홀을 남기고 방송 카메라는 더그 배런과 프레드 커플스(Fred Couples)를 번갈아 비췄다. 그렇다. 그 백전노장 프레드 커플스 말이다. 마스터스를 포함해 PGA 투어에서만 15승을 올리고 PGA 투어 챔피언스에서도 13승을 올린. 더그 배런은 누구냐고? 알 수가 없었다. 그 대회도 월요 예선(먼데이)을 거쳐 출전한 철저한 무명 선수였다. 그런 더그 배런이 세 홀 남기고 한 타 차 선두로 나섰다. 이어지는 16번 홀은 원온(한 번에 그린에 올리는 것)을 할 수 있는 홀이었지만 파로 마쳤다. 이제 17홀과 18홀 두 홀만 남았다. 그러자 프레드 커플스가 드라이빙레인지로 이동했다. 연장전으로 갈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승 경험이 없는 더그 배런이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실수해서 연장전으로 가지 않을까’라고 나도 속으로 예상했다. 마지막 날 무려 아홉 타를 줄여놓고 기다리는 프레드 커플스의 얼굴도 오랜만에 살짝 달아올랐다.
17번 홀은 길고 그린 주변도 까다로운 파3. 아차 하면 보기를 할 수도 있었다. 1992년 프로 골퍼가 됐지만 아직 단 1승도 올리지 못한 더그 배런이 그 티에 섰다. 그랬다. 그는 완벽한 무명이었다. PGA 투어는 물론이고 콘페리 투어(PGA 2부 투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PGA 투어 시절에는 시드도 꾸준히 유지하지 못했다. 번번이 시드를 잃고 큐스쿨을 다시 치렀다. 심지어 최근 7년간은 2부 투어 풀 시드도 얻지 못해 간간이 예선을 치르고서야 나갔다. 그런 그가 만 쉰 살에 PGA 투어 챔피언스에 얼굴을 내민 것은 불과 몇 주 전. 더그 배런이 그 대회 첫날 ‘꽁지머리’ 미구엘 앙헬 히메네스와 공동 선두로 경기를 마칠 때만 해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름 없는 선수가 하루 반짝 성적을 내고 이튿날 리더보드에서 사라지는 일은 허다하지 않은가? 그런데 더그 배런은 조금 달랐다. 이틀째도 선두로 마쳤다. 이틀째 중반 그는 대회 첫 보기를 기록하더니 갑자기 흔들렸다. 나는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딱 그 시점에 낙뢰 탓에 경기가 중단됐다. 당시 공동 선두 히메네스는 샷이 막 살아나고 있었는데. 낙뢰는 폭우를 몰고 오더니 결국 그날은 경기를 재개하지 못했다. 더그 배런은 마지막 날 잔여 경기를 치르고 최종 라운드에 나섰다. 놀랍게도 그는 잔여 경기 때 타수를 줄였다. 전날 흔들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마지막 날 더그 배런과 챔피언 조에서 함께 경기한 선수는 스콧 매캐런과 스콧 파렐이었다. 각각 당시 PGA 투어 챔피언스 상금 랭킹 1위와 4위의 강자였다. 이 두 선수 틈에서 더그 배런은 주눅 든 모습이 전혀 없었다. 그의 드라이버 티 샷은 번번이 페어웨이를 지켰다. 12번 홀에서 프레드 커플스와 공동 선두가 된 것을 본 뒤로 그의 버디 퍼팅이 두 차례나 살짝 빗나갔다. ‘저러다 무너지는 건가’ 하고 나는 걱정을 했다. 어느 틈에 그를 응원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제법 먼 거리 버디 퍼팅 하나를 홀에 떨구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들 보라고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스스로 확신을 갖는 몸짓이었다. 그렇게 선두에 선 채로 맞은 승부처 17번 홀. 200야드 남짓한 긴 파3에서 그의 아이언 샷은 아주 매끄러웠다. 볼은 한 번 튀고 조금 구르더니 홀에 네댓 발짝 떨어져 멈췄다. 이어진 퍼팅 스트로크가 아주 간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볼은 홀로 떨어졌다. 버디. 2위 커플스와 두 타 차 선두가 됐다. 마지막 홀 티 샷은 살짝 불안했다. 하지만 깊지 않은 러프에 떨어졌다. 같은 시간 커플스가 드라이빙레인지에서 철수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승부가 난 것이다. 마지막 홀을 파로 마친 배런은 우승을 거머쥐었다.
더그 배런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다가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가 시니어 투어 데뷔한 지 단 두 번째 대회 만에 첫 우승을 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50세 25일’로 PGA 투어 챔피언스 최연소 우승 기록을 갈아치웠기 때문도 아니었다. 175cm에 77kg으로 다른 시니어 투어 멤버보다 전혀 나을 것 없는 신체 조건을 딛고 우승을 일궈낸 것 때문도 아니었다. 그가 그때까지 무려 27년 넘는 세월 동안 단 1승도 없이 버텨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무명(無名). 이름이 없다는 뜻이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어떻게 혹독한 외로움과 빈곤을 견뎌냈을까? 그가 직전까지 투어에서 평생 벌어들인 상금은 그 한 대회 우승 상금보다 적었다. 더그 배런은 우승을 확정짓고 나서도, 또 우승컵을 받을 때도 울지 않았다. 그리고 올 시즌(2020~2021)에도 톱10에 여러 번 들면서 상금 랭킹 20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어엿하게 PGA 투어 챔피언스 붙박이 멤버가 된 것이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좌절하고 있는 독자라면 더그 배런을 보고 힘을 얻기 바란다. 내가 그에게서 용기를 얻은 것처럼.
설 연휴를 앞둔 초저녁이었다.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황현서 프로가 문자를 보냈다. ‘파3 티 샷 할 때 생수 병뚜껑을 티(tee)로 쓰는 게 가능한가요?’라고. ‘이상한 남성 프로 골퍼를 만나서요’라는 말과 함께.
황현서 프로는 나처럼 늦깎이로 골프를 시작해 지금은 KLPGA 챔피언스투어를 뛰고 있다. 골프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는 견주지도 못할 정도다. 내가 골프를 가르치는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겸임교수와 대학원생으로 만났다. 말이 교수와 학생이지 누가 누구에게 가르친단 말인가? 둘이 골프 얘기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혹시 대전에서 골프를 배울 생각이라면 나는 그녀를 자신 있게 추천한다. 아차 얘기가 딴 길로 샜다. 그녀가 한 질문에 나는 웃음부터 나왔다.
병뚜껑이라니?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코리안투어 경기위원이다 보니 골프 규칙에 대한 질문을 받는 일은 내겐 일상사다. 별별 해괴한 상황을 다 들어봤지만 ‘생수 병뚜껑 사건’은 처음이었다. 파3 홀에서 누군가 티 샷을 했는데 생수 병뚜껑이 휘익 날아오는 모습이라니. 나는 순식간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서 ‘일단 안 될 것 같은데요. 생각 좀 더 해보고요. 혹시 놓치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니’라고 답을 했다. 그러곤 골프 장비에 관한 규칙을 떠올렸다.
참고로 말하면 ‘골프 장비 규격’을 다루는 부분은 골프 규칙 본문에는 없다. 따로 있다. ‘장비 표준에 관한 규칙’인데 영국왕립골프협회(R&A) 홈페이지에 가야 비로소 찾을 수 있다. 손쉽게 접할 수 없다 보니 골프 규칙을 착실히 공부하는 골퍼조차 장비 규격에 대해서는 놓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내가 ‘티는 길이가 4인치(101.6mm)를 넘지 않아야 하고, 방향을 표시하는 기능이 있으면 안 되고, 다른 이득을 플레이어에게 주면 안 되고’ 따위를 떠올리는 동안 황 프로가 문자를 또 보냈다. ‘퍼팅 그린에서 마크도 생수 병뚜껑으로 했어요. 그 뚜껑에 다른 플레이어 공이 맞아서 튀어나가기도 하고.’ 점입가경이었다. 병뚜껑을 티로 써도 문제가 없는지에 대한 최종 결론도 미처 내놓지 못한 나는 순간 멍했다. 그래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마커(퍼팅 그린에서 볼 위치를 표시하는 장비)는 동전 또는 동전 비슷한 것을 쓰라고 하긴 하지요. 티로 마크를 해도 규칙에 어긋나지는 않으니까 병뚜껑으로 마크를 해도 규칙 위반은 아니지요. 그래도 매너가 엉터리인 골퍼네요’라고 답을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가 길이가 5~10cm 정도 되는 신발 모양 물건도 마커로 쓰더란다. 나는 쓴웃음이 나왔다.
서로 웃고 즐기는 레크리에이션 플레이 때야 얼마든지 재미로 할 수 있다. 손바닥만 한 동전이면 어떤가? 웃고 넘어가면 그만이지. 그런데 황 프로가 그날 평생 처음 봤다는 그 골퍼는 자신도 프로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생수 병뚜껑을 티로 써도 되는지 여부를 고민하다 말고 나는 ‘그가 KPGA 회원이냐’고 황 프로에게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협회를 망신 준 책임을 따져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어느 단체 소속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틈에 나는 장비 표준에 관한 규칙을 내려받아 티에 관한 규정을 번개처럼 일독했다. 그런데도 결론을 못 내렸다. 바로 ‘부당하게 볼 움직임에 영향을 주면 안 된다’는 조항과 ‘플레이에 다른 도움이 되면 안 된다’는 조항 탓이었다. 생수 병뚜껑에 볼을 얹어놓고 치면 혹시 볼이 옆으로 휘는 것을 줄여주는 효과를 얻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갸웃거린 것이다. 솔직히 그 짓을 한 골퍼가 밉다는 생각이 드니 자꾸 규칙 위반으로 몰아가려고 따져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테스트 장비도 없이 생수 병뚜껑이 슬라이스(혹은 훅)를 줄여주는지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생수 병뚜껑을 티로 쓸 수 있다’고 잠정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퍼팅 그린에서 생수 병뚜껑으로 마크를 하는 것도 규칙에 어긋나지는 않는다는 답은 이미 내린 상태고.
황 프로는 내 답을 듣더니 ‘혼내줄 방법이 없군요’라며 씁쓸해했다. 나는 황 프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얘기가 조금 길어서다.
내가 한 얘기는 다음과 같다. 골프 조상들은 잔디 조각을 뭉쳐서 그 위에 볼을 올려놓고 티 샷을 했다. 지금도 세상 어디엔가 그 옛날 방식을 고집하는 골퍼가 있을 수 있다. 그런 역사가 있으니 R&A가 꼭 못처럼 생긴 티를 써야만 한다고 규칙에 못 박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프로 골퍼라면, 아니 골프를 스포츠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골퍼를 불쾌하게 만드는 행동을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이 매너다. 진짜 멋진 골퍼라면 골프 규칙 본문 맨 앞 페이지에 나오는 ‘플레이어의 행동 기준’을 지켜야 한다.
만약 공식 경기에서 생수 병뚜껑을 티나 마커로 쓰고 다른 플레이어가 따지는데도 고치지 않는 선수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경기위원으로서 나는 ‘골프 규칙 1-2 플레이어의 행동 기준’을 어긴 책임을 물어 그 선수에게 페널티를 부과할 것이다. 그 페널티는 실격이다. 황 프로는 그가 어느 프로 단체 소속인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제발 내가 몸담은 KPGA 소속이 아니기를 빌고 있다.
2020년 골프 월드는 뒤죽박죽이었다. 매년 4월에 열던 ‘마스터스’를 84년 만에 처음으로 11월에 연 것이 대표적이다. 그 바람에 덕을 본 선수가 두 명 나왔다. 한 명은 최저 타수 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더스틴 존슨이다. 더스틴 존슨은 늦가을에 촉촉하게 젖은 오거스타 내셔널(마스터스를 매년 여는 골프장) 그린을 장타와 날카로운 아이언 샷으로 공략해 나흘 합계 20언더파를 기록했다. 종전 최저타 기록은 타이거 우즈와 조던 스피스가 갖고 있던 18언더파다. 더스틴 존슨의 기록은 늦가을에 비가 흠뻑 내려 그 악명 높은 오거스타 그린이 딱딱함을 잃은 덕분임이 분명했다.
참, 내 정신 좀 보라. 제목은 최고령 기록 어쩌고 해놓고 엉뚱한 길로 새서 한참 가고 있다. 새해 첫 글의 주제는 독자도 보다시피 ‘최고령 기록과 에이지 슈팅’이다. 더스틴 존슨이 대회 중계 화면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그 대회에서 내가 눈여겨본 선수는 따로 있다. 언뜻언뜻 비칠 때마다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는 바로 베른하르트 랑거다. 나는 2019년 마스터스에서 만 62세로 컷 통과를 한 그가 2020년에도 선전하기를 바란 것이다. 결과는 어땠냐고? 그는 내 바람을 훌쩍 뛰어넘어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바로 마스터스 역사상 최고령 컷 통과 기록을 세운 것이다. 만 63세로. 랑거는 1957년생이다. 나흘간 합산한 최종 성적도 빼어났다. 공동 29위. 2019년에는 컷 통과 후 맥이 풀렸는지 컷 통과자 중 최하위를 기록했는데 말이다. 랑거 또한 더스틴 존슨과 마찬가지로 ‘11월에 열린 마스터스’의 수혜자다. 왜냐고? 마스터스를 예정대로 4월에 열었다면 랑거가 컷 통과를 해도 최고령 기록을 달성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랑거의 최고령 마스터스 컷 통과 기록에 내가 환호한 이유는 또 있다. 랑거는 2019년 주로 활동하는 미국 PGA 투어 챔피언스(시니어 투어)에서 시즌 중반 갑자기 부진에 빠졌다. 그는 그해 마스터스 컷 통과를 한 직후 대회부터 몇 개 대회에서 죽을 쒔다. 마스터스에 진을 뺀 후유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때 ‘시니어 투어를 지배하던 랑거의 시대가 끝났다’는 내용의 칼럼을 여러 골프 칼럼니스트가 썼다. 그때 내 생각은 어떠했는지는 애독자라면 잘 알 것이다. 모른다고? 흑. 애독자가 아니거나 내가 아직도 철저하게 무명이라는 얘기다. 나는 ‘랑거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큰소리를 친 칼럼을 바로 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썼다. 못 믿겠다면 2020년 3월호 베른하르트 랑거 편을 찾아보기 바란다.
2020년에는 마스터스가 열리기 직전 다른 미국 프로골프(PGA) 투어 대회에서도 멋진 기록이 나왔다. 1956년생 프레드 펑크가 버뮤다 챔피언십에서 컷 통과를 한 것이다. 세상에 만 64세에 말이다. 64세 이상일 때 PGA 투어 대회에서 컷 통과를 한 선수는 프레드 펑크를 빼면 딱 세 명뿐이다. 누구누구냐고? 모두 다 내가 이 칼럼에 소개한 이들이다. 바로 잭 니클라우스와 샘 스니드, 그리고 톰 왓슨이다.
놀라운 선전을 거둔 베른하르트 랑거와 프레드 펑크가 밝힌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독자도 이미 알 것이다. 바로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꿈을 꾼 것이다. 꾸준한 운동이 비결 아니냐고? 맞다. 그런데 꿈을 꾸면 훨씬 더 꾸준하게 운동하게 된다. 만 60세로 한국과 일본 시니어 투어 무대에서 뛰는 김종덕 프로는 40세 때 체력 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은 뒤 20년째 근력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한 적 있다. 집에서 TV를 보더라도 아령을 든다고 말이다.
그래 김용준 프로 당신 얘기가 다 맞다고 치자. 그렇다면 “시니어 골퍼인 우리는 무슨 꿈을 꾸면 좋을까?” 하고 묻는 독자가 분명 있을 것이다. 순전히 참고하라고 내 목표를 살짝 밝힌다. 골프에서 내 목표는 에이지 슈터(age shooter, 나이보다 더 적은 타수를 기록한 골퍼)가 되는 것이다. 명색이 프로 골퍼라면서 목표가 우승이 아니고 에이지 슈팅(age shooting, 나이보다 더 적은 타수를 기록하는 것)이냐고? 흑! 맞다. 나이보다 더 적은 타수로 한 라운드를 마치는 그 에이지 슈팅 말이다. 에이, 김 프로 당신이야 프로 골퍼니까 에이지 슈팅이 가능할지 몰라도 어디 우리 같은 레크리에이션 골퍼가 가능하겠냐고? 일단 에이지 슈팅은 나도 장담 못한다. 그리고 독자에게는 ‘변형 에이지 슈팅 기준’을 소개한다. 변형 에이지 슈팅 기준이라고? 첨 들어본다고? 당연하다. 내가 세계 최초로 내놓는 것이니까. 변형 에이지 슈팅이란 바로 ‘전성기 핸디캡을 현재 나이에 더하고 그 점수보다 더 낮게 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창때 핸디캡이 ‘12’이고 지금 나이가 칠십이라면 ‘82’를 에이지 슈팅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어떤가? 세계 최초로 제안하는 ‘변형 에이지 슈팅’이라는 콘셉트가. 혹시 변형 에이지 슈팅을 하고 나서 옆 사람이 그런 게 어디 있냐고 깎아내리기라도 하면 꼭 김용준 프로가 만든 개념이라고 당당하게 말해주기 바란다. 변형 에이지 슈팅. 영어로는 ‘모디파이드 에이지 슈팅’(modified age-shooting)쯤 되려나? 그 기록을 달성하면 ‘변형 에이지 슈터’이고.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
“이번 주 토요일에 함께 라운드합시다.” 수천 명이나 되는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회원 중에 딱 한 명뿐인 대학 선배이자 지금은 함께 코리안투어 경기위원이기도 한 최병복 프로가 전화를 한 것은 3년 전쯤 어느 나른한 날 오후였다. 마침 약속이 없던 나는 ‘얼씨구나’ 했다. 그러곤 물었다. “티업 시간 알려주시면 달려가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은 누구신지요?”라고. “최상호 프로님이 오시기로 했어.” 황새 최천호 프로(2020 코리안투어 멤버) 아버지이자 스승이기도 한 선배 최 프로가 답했다. 눈이 번쩍 뜨인 내가 물었다. “그 최상호 프로님 말씀인가요?”라고. “누가 또 있겠어. 그 최상호 프로님이지. 내 사부셔. 이번에 한 사람 데리고 오라고 하셨는데 후배님 생각이 나서 말이야.” 선배 최 프로가 사연을 털어놨다. ‘살아 있는 전설 최상호 프로와 뱁새 김용준 프로의 대결’은 그렇게 이뤄졌다. 얼씨구? 대결이라니?
코리안투어에서만 43승. 50세 이상이 참여하는 시니어 투어에서 15승. 다시 60세 이상이 겨루는 그랜드 시니어부에서 10승. 국내에서만 총 68승을 거둬 최다승 기록을 갖고 있는 최상호 프로. 한국 골프에서 이 기록을 깰 선수가 있을까? 내 생애에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성기 최상호 프로만큼 경쟁자를 압도할 기량을 가진 선수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기적처럼 그런 선수가 나온다면 더 큰 무대로 진출하기도 할 테고. 미국 PGA투어에서는 1940년대를 지배한 샘 스니드가 세운 PGA투어 최다승 기록을 ‘외계인’ 타이거 우즈가 마침내 달성하기는 했다.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던 82승 기록과 동률을 이룬 것이다. 그러니까 최상호 프로는 한국의 ‘샘 스니드’인 셈이다.
살아 있는 전설과의 대결은 어떻게 됐냐고? 라운드가 끝나고 클럽하우스 식당에서 뜨거운 음식을 먹으면서 나는 최상호 프로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선배님, 저는 어떻게 하면 볼을 좀 더 잘 칠 수 있을까요?”라고. 전설이 잠깐 생각하더니 답했다. “볼을 너무 세게만 치다가는 실수를 하기 쉬워요. 조금 더 부드럽게 치면 어떨까요”라고. 그랬다. 나는 하이브리드로 페어웨이 한가운데 갖다 놓은 파5 첫 홀 티샷을 빼고는 모든 샷을 강력하게 했다. 아니 힘이 잔뜩 들어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러고는 숱한 위기를 자초했다. 티샷이 벙커나 러프 같은 고약한 자리에 들어간 적이 많았다. 세컨샷이 그린을 훌쩍 지나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심지어 티샷한 볼이 하늘 높이 떴다가 한참 있다 툭 떨어지는 이른바 ‘뽕샷’도 나왔다. 그래도 그날 나는 퍼터 하나만큼은 전설에 버금가게 했다. 내가 그날 스크램블(그린을 놓치고도 파를 하는 것)을 대여섯 개나 한 것은 순전히 퍼터 덕분이었다. 물론 그 전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티샷이나 세컨샷 탓이기도 했고.
그날의 대결은 아니 도전은 결국 두 타 차 뱁새의 패배로 끝났다. 최상호 프로 71타, 뱁새 73타였다. 안간힘을 쓴 내가 초반에 기적처럼 한 타 앞서간 적도 있었다. 에이, 설마? 진짜다. 그러나 내가 제풀에 무너지는 동안 전설이 침착하게 경기를 풀어가며 승부를 뒤집었다. 나는 마지막 파5 홀에서도 투 온을 시키는 등 막판까지 완력으로 어찌해보려고 했으나 절정 고수를 상대로 한 번 기운 승부의 추를 돌리지는 못했다. “퍼터를 어떻게 그렇게 잘해요?”라는 전설의 칭찬은 한편으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위기상황을 만드느냐’는 질책이기도 했다. 전설과 라운드를 한 뒤로 내 샷은 크게 변했을까? 그의 조언을 듣고 부드러워졌을까? 흐흐. 그날로부터 3년 가까이 지난 어제서야 문득 ‘정말 부드럽게 샷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떠먹여줘도 못 먹으니 내가 발전이 더딜 수밖에.
전설을 오랜만에 다시 본 것은 몇 주 전 챔피언스 투어 대회에 경기위원으로 근무하러 갔을 때였다. 첫 홀 그린 옆에서 일부러 기다렸다가 그와 인사를 나눴다. 스물두 살에 프로 골퍼가 돼 지금까지 40년 넘게 뛰고 있는 전설이지만 여전히 꼿꼿하고 단정했다. 최상호 프로는 올해 65세다. 3년 전인 만 62세에 매경오픈 컷 오프를 통과해 코리안투어 최고령 컷 통과 기록을 경신한 그다. 미국 PGA투어에서도 베른하르트 랑거가 2019년에 마스터스(메이저 대회 중 하나)에서 62세로 컷 통과한 것이 기록이니 대단한 일이다.
오랜만에 전설을 다시 본 날 나는 최병복 프로에게 전설 얘기를 하나 들었다. 전성기 때 전설이 대회를 마치고 부인에게 전화를 할 때 “오늘은 잘했어요”라고 조용히 얘기한 날은 우승한 날이라고. “오늘은 조금 잘 안 됐어요”라고 한 날은 준우승한 날이라고. 그렇게 많은 우승을 했으니 준우승도 얼마나 많이 했겠는가? 톱10에 든 적은?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우승은 잘한 것이고 준우승은 조금 잘 안 된 것이라니? 최병복 프로에 따르면, 전설은 전성기 시절 대회에 나가면 ‘우승하러 왔다’고 생각했단다. 헉! 아직도 한 홀 한 홀 풀어가기 급급한 뱁새와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전설과 같은 마인드와 실력을 한 번이라도 가질 수 있을까?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
독자는 악동을 좋아하는가? 나는 어떠냐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 좋아하지 않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니 그 예측 불가함이 불편해서다. 나와 달리 악동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서 열렬한 팬이 되는 이도 있고. 이런 이는 악동이 보여주는 ‘파격’을 높게 치는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골프 세상에도 악동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 선수 얘기를 하려고 한다.
몇 년 전 일이다. “혹시 잔 데일리라는 선수를 아시나요?” 그 무렵 나를 후원하던 골프용품 업체 대표가 전화를 걸어 대뜸 물었다. “잔 데일리요?” 나는 ‘잔 데일리’가 누군지 선뜻 떠오르지 않아 되물었다. “네, 미국 에이전트가 잔 데일리 선수를 후원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서요.” 그가 내게 물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제야 나는 그가 말하는 선수가 ‘존 댈리’임을 알 수 있었다. “혹시 존 댈리를 말씀하시나요?” 내가 물었다. “그런 것 같은데요.” 골프용품 사업에 뛰어든 지 얼마 안 돼 해외 선수들까지 꿰고 있지 못한 그가 답했다. 한국계 미국인인 현지 에이전트가 존 댈리(John Daly)를 그렇게 발음한 것이 틀림없었다.
“존 댈리는 유명한 선수입니다. 지금은 PGA 시니어 투어인 챔피언스 투어에서 뛰고 있습니다. 최근에 챔피언스 투어에서 1승을 거뒀구요. 젊어서도 장타자로 유명했는데 지금도 챔피언스 투어에서 최장타자입니다.”
나는 아는 대로 존 댈리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존 댈리’ 하면 떠오르는 많은 얘기는 꿀꺽 삼킨 채 말이다.
“존 댈리에게 연간 30만 달러 정도 후원하고 우리 용품을 쓰게 하면 어떨까요? 물론 경기에 나갈 때는 우리 로고를 달고요.”
그는 에이전트가 제안한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말했다. 나는 얼핏 생각하기에 일리 있다고 느꼈다. 존 댈리를 후원하는 것 말이다. 그 골프용품 업체는 그 해 미국 시장에 막 진출한 참이었다. 그러니 브랜드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을 거다. 물론 상업적으로만 따졌을 때 말이다. 그런데 내게 존 댈리에 대해 물은 대표는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함께 일하면서 충실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존 댈리라는 사내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줄 수밖에 없었다. 꿀꺽 삼켰던 것을 되새김질해서 말이다.
나는 존 댈리가 천재적 골퍼인 것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1966년생인 그는 대학을 마치고 스물한 살에 프로로 전향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991년에 메이저 대회인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그것도 출전이 확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차를
8시간이나 몰아 대회장 근처에서 기다리다 얻은 출전 기회를 살려서 말이다. 이어 1995년에는 ‘디 오픈 챔피언십’도 거머쥐면서 PGA 챔피언십 우승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그런 존 댈리이지만 스윙만 볼 때는 도무지 메이저 대회를 두 번이나 우승한 선수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내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 그는 클럽 헤드가 머리 뒤를 넘어 땅에 닿을 것 같은 오버 스윙을 한다. 이런 스윙으로 PGA에 장타 시대를 열었다는 사실은 더 믿을 수 없다. 존 댈리는 1997년 PGA 투어 최초로 시즌 평균 드라이버 거리 300야드를 넘겼다. 이어 1999년부터 2008년까지 다시 10년 연속 시즌 평균 드라이버 거리 300야드 이상을 기록했다. 2003년까지 시즌 평균 드라이버 거리 300야드를 넘긴 선수는 존 댈리가 유일했다. 작은 키 탓에 ‘땅콩’이라고 불리는 LPGA 선수 김미현은 거리를 늘리기 위해 존 댈리 스윙을 모방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존 댈리는 골프 팬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PGA 투어에서는 단 5승뿐이다. 5승이 대단하지 않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그의 재능이나 인지도로 따지면 훨씬 더 많이 우승했을 것 같은데 아니라는 말이다. 같은 시대 선수들보다 어마어마하게 멀리 치던 그의 파워로만 따져도 그보다 우승 기록이 많았어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그렇지 못했을까? 아마 골프 자체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알코올에 심각하게 의존했다. 대회 때도 종이 봉지에 술을 담아가지고 다니며 몰래 홀짝거리거나 혹은 대놓고 마시며 경기를 치른 경우가 숱했다. 그를 무명에서 영웅으로 만들어준 1991년 PGA 챔피언십 때도 나흘 내내 술을 마시며 경기했다. 도박 중독도 심각했다. 대회장 근처에 카지노가 있으면 어김없이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경기를 했다. 잠이 부족하면 어떻던가? 내 경우엔 숏 게임과 퍼팅이 안 된다. 술과 도박에 빠져 있었으니 성적이 들쑥날쑥한 건 당연했다. 성격이라도 좋았으면 조금 나았을지 모른다. 그는 갤러리하고도 이따금 다퉜다. 경기가 뜻대로 안 풀리면 라운드 중에 클럽을 내던지는 일도 잦았다. 갑자기 기권하고 백을 싸서 떠나는 일도 흔했고.
가슴이 너무 뜨거웠던 탓일까? 그는 개인사도 순탄치 않았다. 네 번이나 결혼했고 네 번 다 헤어졌다. 그 때문인지 2004년 뷰익 인비테이셔널에서 통산 다섯 번째 우승한 뒤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래서 2007년부터 PGA 시드권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그인데도 골프 팬은 그를 경기장에서 이따금 볼 수 있다. 초청 선수로 가끔 불러주기 때문이다. 누가 그를 부르냐고? 당연히 대회 스폰서다. 그와 같은 악동도 골프 월드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는 시대가 한국 골프에도 올까?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골프용품 업체는 존 댈리를 후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
2008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연장전 첫 홀. 두 선수가 파3인 17번 홀에 들어섰다. ‘제5의 메이저’로 불리는 이 대회 우승컵을 놓고 벌이는 연장전이었다. 두 선수 중 한 명은 가르시아였다. 그렇다. 홀에 침을 뱉기도 하고 퍼팅 그린을 퍼터로 찍기도 한 ‘버르장머리 없는’ 세르지오 가르시아 말이다. 다른 한 선수는? 이름 없는 선수다. 누군지 몰라도 그가 가르시아 콧대를 꺾어놓으면 좋겠다. 그가 먼저 티샷을 한다. 그가 친 볼이 멋지게 날아서 홀 바로 옆에 꽂히면 얼마나 좋을까? 언감생심. 그의 볼은 패널티 구역(당시로는 해저드)에 빠지고 만다. 그렇게 2008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우승컵은 악당 가르시아 손에 들어갔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못 외우면 맞던 시절에 외운 시라 그런지 지금도 생각이 난다. 원숙한 아름다움을 국화꽃에 비유했다는 설명을 듣고 그때는 고개만 끄덕였다. 가슴으로는 그 뜻을 몰랐다. 그런데 30년도 더 지나 다시 떠올리는 것은 이 구절에 걸맞은 사람을 봤기 때문이다. 바로 PGA 투어 챔피언스에서 뛰고 있는 폴 고이도스(Paul Goydos)다. 2008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연장전에서 가르시아에게 아쉽게 패한 사람이 바로 그다.
내가 골프채널에서 미국 PGA 투어 챔피언스 경기를 해설할 때다. 유난히 묵묵히 플레이를 하는 선수가 눈에 들어왔다. 기가 막힌 아이언샷으로 볼을 핀에 바싹 붙여도 기쁜 내색을 별로 안 한다. 반대로 대여섯 발짝짜리 퍼팅을 몇 번이나 놓쳐도 마찬가지다. 탄식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리더 보드 상단에는 매번 이름이 올라온다. 저 선수가 도대체 누군지 궁금해졌다.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다가 나는 눈이 커졌다. 2015년 투어 챔피언스에 들어온 뒤 꾸준히 우승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 정도면 젊은 시절 PGA 투어에서도 한가락 했을 법해서 찾아봤다. 그런데 웬걸? 단 2승뿐이다. 스물아홉 살에 PGA 투어 시드를 처음 받은 뒤 무려 21년간이나 뛰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2승도 쉽지 않다. 스타플레이어와 비교하면 덜 화려하다는 얘기다. ‘이거 싱거운걸’ 하고 마음을 닫으려다가 깜짝 놀랐다. 그가 한 라운드에 59타를 기록한 몇 안 되는 선수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PGA 투어에서 59타를 기록한 선수는 지금까지 단 아홉 명뿐이다. 말이 쉬워서 59타이지 68타가 최고기록인 내게는 꿈같은 숫자다. ‘뱁새 김용준 프로, 골프 좀 치는 줄 알았더니 겨우 68타가 최고기록이냐’고 비웃지 말기 바란다. 어디까지나 풀백티에서 대회 규칙에 따라 친 점수다. 그래도 59타 발끝에도 못 미친다.
아차! 얘기가 딴 길로 샜다. 폴 고이도스로 돌아가자. 폴 고이도스는 2010년 존 디어 클래식 1라운드에서 59타를 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59타를 기록한 선수는 단 네 명뿐이었다. 그를 포함해서. 그 뒤로 다섯 명이 더 늘었다. 총 아홉 명 중에 대기록을 수립할 당시 나이가 가장 많은 선수가 바로 폴 고이도스다. 그는 마흔여섯 살 때 59타를 쳤다. 믿어지는가? 마흔여섯 살에 잭 티클라우스가 마스터즈를 우승했을 때 골프 세상은 얼마나 놀랐는지. 노장의 승리라고 말이다. 폴 고이도스도 노장으로 불리는 나이에 59타 대기록을 작성한 것이다. 그가 꽃길만 걸었다면 나도 ‘국화꽃’을 들먹이지 않았을 거다.
그는 골프를 일찍 배우기는 했다. 어려서 입문해 고교 시절 지역 대회에서 우승도 한 모양이다. 제법 잘 친 덕에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도 진학했다. 그런데 곧바로 프로로 전향하지 못했다. 내 짐작엔 조금 부족한 기량과 가정 형편 탓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기간제 교사로 몇 년간 일했다.
끓는 피를 참을 수 없었던 걸까? ‘끓는 피’라니? 아까는 그의 경기 스타일이 차분하다고 칭찬하더니. 하여간 뱁새 칼럼은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많다.
하여간 그는 스물일곱 살에 다시 골프채를 잡았다. 1991년과 1992년 벤 호건 투어를 뛴 것이다. 지금은 콘 페리 투어로 부르는 미국 PGA 2부 투어 말이다. 그러다 이듬해 PGA 큐스쿨(PGA 투어 참가 자격을 얻기 위해 치르는 시험으로 흔히 지옥 같은 대회라고 한다)을 가까스로 통과했다. 그리고 그의 스타일대로 묵묵히 3년을 도전한 끝에 1996년 마침내 첫 우승을 거뒀다. ‘베이힐 인비테이셔널’에서였다.
그런데 다음 우승은 무려 11년을 기다려야 했다. 2007년 소니 오픈까지. 이 무렵 그의 샷 감이 절정이었나보다. 글을 시작할 때 얘기한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연장전에 나간 것이 바로 그다음 해였으니까.
너무나 아쉬운 연장전 패배 뒤에 폴 고이도스가 권토중래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악재가 겹쳤다. 팔목 수술을 하고 부비강 수술도 하고.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골프채를 잡았다. 그렇게 도전한 끝에 만들어 낸 대기록이 바로 2010년에 친 59타다. 파71 코스에서 버디 12개에 파6개. 버디 12개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폴 고이도스는 키가 175cm로 그리 큰 축에 들지도 않다. 드라이버 비거리도 260야드로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거포들 틈에서 묵묵히 자기 경기를 하고 있다. 가을에 피는 국화처럼 기품 있게 말이다. 내 골프도, 그리고 내 삶도 그처럼 원숙함을 갖게 될 날이 오기를.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
부모 혹은 조부모 그림자는 평생 우리를 따라다닌다. 서양처럼 ‘누구누구 2세’ 혹은 ‘아무개 3세’ 하는 식으로 이름을 짓지 않아도 말이다. 특히 부모나 조부모가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라면? 그 그림자는 훨씬 크고 무겁다. 부모나 조부모가 잘했으니 자식이나 손주도 당연히 잘할 것이라고 세상이 기대하기 때문이다. 자식이나 손주가 상당히 잘해도 때론 세상 사람들이 깎아내리기도 한다. 조상 덕을 본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질투하는 것이다. 조상이 주는, 아니 정확히는 세상이 주는 부담이나 시샘을 이겨내고 큰 꿈을 이루기는 쉽지 않다. 큰 나무 밑에서는 다른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는 속담은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일까?
무슨 말을 하려고 서론이 이렇게 기냐고? 토미 아머(Tommy Armour) 3세 얘기를 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 토미 아머 3세는 전설의 골퍼 토미 아머(별명 실버 스콧)의 손자다. 토미 아머가 누구냐고? 앗! 이 질문은 예상 못했다. 그의 이름을 딴 골프 용품이 있을 정도이니 골프를 모르는 독자들도 위상만큼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용품업체는 뱁새 김용준 프로와는 아직까지 인연이 전혀 없음을 밝힌다. 아직까지는.
할아버지 토미 아머는 PGA 투어에서 25승을 거뒀다. 마스터즈를 제외한 3대 메이저 대회를 모두 석권한 골퍼로도 유명하다. 마스터즈까지 우승했다면 그랜드 슬램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토미 아머는 바비 존스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다. 그의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갈 것이다.
손자 토미 아머 3세는 PGA 투어 챔피언스(시니어 투어)를 벌써 10년 넘게 뛰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 PGA 투어에서는 2승을 거뒀다. 아니, 너무 싱거운 얘기 아냐? 하고 실망하기엔 이르다. 나도 기록을 찾아보고 나서야 알았다. 그가 엄청난 기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불과 얼마 전까지 ‘PGA 투어 72홀 최저타 기록’을 토미 아머 3세가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72홀에 254타(26언더파). 이 기록은 그가 2003년에 PGA 발레로 텍사스 오픈 때 세운 것이다. 발레로 텍사스 오픈? 오랜 골프 팬이라면 들어봤을 것이다. 최경주 선수가 2라운드 때 선두 턱밑까지 치고 올라갔다가 공동 7위를 기록한 대회다.
토미 아머 3세는 이 대회 때 첫날 ‘64타’, 이튿날 ‘62타’ 그리고 사흗날 ‘63타’를 기록했다. 마지막 날엔 ‘65타’를 쳤는데 이날은 보기가 두 개나 나왔다. 사흗날까지는 보기 없이 플레이를 하던 그였다. 역사에 남을 기록에 대한 부담이 보기로 이어졌을까? 할아버지 토미 아머가 세운 대기록과 나란히 할 만한 업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까?
토미 아머 3세는 ‘티에이쓰리’(T.A.3)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할아버지 토미 아머의 별명에 3이라는 숫자를 더한 것이다. 할아버지의 후광이 너무 강했다. 큰 부상으로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하고 당시로서는 가장 비싼 레슨비를 받는 교습가로 변신한 할아버지 토미 아머. 그 거장이 손자에게 골프를 기초부터 탄탄하게 가르쳤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기 쉽다. 나도 넘겨짚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토미 아머 3세는 1960년생이다. 할아버지인 토미 아머는 1968년에 세상을 떠났다. 여덟 살에 할아버지를 잃은 것이다. 그랬으니 시간당 50달러나 했다는 토미 아머의 레슨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겨우 시간당 50달러라고 얕보지 말기를. 1950년대 레슨비다. 지금으로 치면? 뱁새 김 프로 한 달 레슨비보다 더 많을 것 같다.
토미 아머 3세가 할아버지에게 골프를 배우지 못했을 거라고 짐작되는 부분이 또 있다. 둘의 스윙이 전혀 다른 점이다. 남아 있는 영상을 보면 토미 아머는 클래식컬한 스윙을 했다. 당연한 일이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자라고 그곳에서 골프의 거장이 된 토미 아머 아닌가? 그에 비해 손자 토미 아머 3세는 원 플레인 스윙을 한다. 둘은 그립을 잡는 방법부터 다르다. 토미 아머는 핑거 그립을 잡았다. 손가락으로 잡는 그립 말이다. 토미 아머 3세는 팜 그립을 잡는다. 손바닥으로 잡는 그립이다. 이 스윙으로 토미 아머 3세는 PGA에서 2승을 거뒀다. 그중 하나가 바로 대기록을 세운 발레로 텍사스 오픈이다.
그는 이 기록으로도 만족하지 못한 것 같다. 할아버지의 명성에 필적할 만한 업적을 남기고 싶었던 걸까? 토미 아머 3세는 PGA 투어에 끝까지 도전했다. 성적을 내지 못해 투어에서 밀려 내려온 뒤에도 큐스쿨(투어에서 뛸 선수를 정하는 테스트)에 나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PGA 큐스쿨에 나간 건 2012년. 그의 나이 만 52세 때였다. 당시 참가자 중 나이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마흔네 살에 프로 선발전에 합격해 프로 동기 90명 중 나이가 가장 많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다.
190cm에 육박하는 큰 키에 짧은 백스윙과 내던지는 듯한 팔로 스로우를 가진 토미 아머 3세. 그가 세운 72홀 역대 최저타 기록. 전설이 된 할아버지의 명성에 결코 부끄럽지 않은 대기록이다. 이 기록은 2017년 조던 스피스가 253타를 기록하면서 14년 만에 깨졌다. 나는 토미 아머 3세가 은퇴하기 전 챔피언스 투어에서 꼭 1승을 거두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부모나 조부모 명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누군가의 도전도 응원하고 싶다.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