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서른 바퀴 넘는 길을 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여행가 김찬삼은 ‘동양의 마르코 폴로’라 불릴 만큼 한국 해외여행의 선구자라고 일컫는다. 1958년부터 시작한 세계여행으로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160여 개국 1000여 개 도시에 이른다. 당시는 해외에 나가는 것이 어려웠던 때일 뿐 아니라 세계여행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인 걸 생각하면 가히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예나 지금이나 두말이 필요 없는 독보적인 여행의 아이콘이다. 하늘도시 영종에 그가 있다.
여신(旅神)이 내게 있어 내게 무슨 특혜를 베풀어준 것은 아니지만 매양 새로운 것을 보는 기쁨이 둘도 없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수난은 인간 수업에 있어서 고귀한 경험들이었습니다. -김찬삼의 ‘끝없는 여로’ 18쪽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을 기억하다
여행가 김찬삼 교수(1926~2003)는 인천인이며 세계인이다. 황해도에서 태어났지만 본적인 인천시 중구에서 성장하고 생을 마쳤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 지리 교사와 대학에서 지리학과 교수를 지내면서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죽은 지식”이라며 세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웠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김찬삼 교수의 여행 이야기를 인천의 하늘도시 영종에서 만날 수 있다.
바다와 공원이 어우러진 영종역사관은 봄을 코앞에 둔 계절에 여행가의 기획전시를 보여주는 중이다. 영종역사관 3층에서 열리는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특별기획전’은 3부로 나뉘어 전시된다.
1부는 ‘세계를 꿈꾸다’ 편으로 김찬삼 교수가 세계인의 꿈을 키웠던 인천에서의 성장 과정을 담았다. 학자와 저술가로서의 면모와 여행가로서 세계를 향한 도전 정신이 피부로 느껴진다. 2부는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가’ 편. 세계여행의 경로와 여정이 담긴 기록들을 귀한 자료들과 함께 소개했다. 세계일주의 첫 여행지 알래스카를 시작으로 40여 년 동안의 여행 이야기가 펼쳐진다. 3부는 ‘만인의 스승 김찬삼’으로 세계의 현장을 바탕으로 교육자로서 직접 보고 느낀 여정을 보여준다. 또한 그가 성장해온 인천과 후반기의 안식처였던 영종과 영종인으로서의 인연을 조명했다.
전시품 중 김 교수와 늘 함께했던 낡은 배낭과 모자와 신발은 특히 보는 이들에게 여행을 향한 강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마르코 폴로와 슈바이처를 사랑한 그는 여정 중에 슈바이처 박사도 만났다. 여행 중 굶주리다시피 해도 무한한 힘이 솟구치는 것은 매양 새로운 나라 사람들과 자연을 보는 기쁨이 둘도 없는 영양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출간되었던 책과 포스터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하다. 카메라와 낡은 지도, 꼼꼼히 기록한 여행일지와 수만 장의 슬라이드 필름. 그중에 세계를 돌아다니며 몰았던 빨간색 딱정벌레차도 인상적이다. 1970년 독일 여행 중 독일인 친구에게 선물받았다는 폭스바겐이다. 또한 지도가방은 지도를 고정하는 형태의 캔버스 가방으로, 아크릴 덮개가 있어 비나 눈이 오는 경우에도 지도를 확인할 수 있다. 여행가에게 지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1960년대 중남미와 아프리카 여행 전에 친구에게 맡긴 유서는 여행가로서, 가장으로서 진중하다. “내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도 기쁘게 받으련다. 설령 내가 무슨 사고로 죽더라도 서러워 말고, 운명이라고 체념하고 부모에게 위로하여 줄 것이며 애들의 교육을 잘 부탁한다.”
그는 말한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인간 수업에 있어 여행처럼 좋은 것은 없다고 보인다. 세계 언어는 2000여 종, 이를 다 배우는 것보다는 소박하고 어진 미소가 무엇보다도 고귀한 것이 아닐까.” 전시장의 모든 사진마다 밝은 얼굴로 환하게 웃는 김찬삼 교수는 진정 세계의 나그네였다. (전시 기간 5월 31일까지)
하늘도시 영종과 김찬삼
우리에게 영종도는 듣기만 해도 먼 곳을 향한 그리움으로 짜릿해지는 곳이다. 그곳 어디쯤에서든 머리 위로 비행기가 날고 여행의 열망이 솟구친다. 그 옛날부터 영종도는 공항터가 될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이야기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영종도의 옛 이름은 자연도(紫燕島)였다. 섬에 제비가 많이 날아 붙여진, 문자 그대로 자줏빛 제비섬이다. 제비는 그렇다 치고 자줏빛은 해 저무는 영종섬의 붉다 못해 자줏빛이었던 하늘을 말함이라. 일몰에 물든 자줏빛 제비의 모습으로 명명된 자연도라 하니, 옛사람들의 지명 정하기의 기지와 운치는 멋스럽기 그지없다. 영종 또한 긴 마루를 가진 섬이란 뜻으로, 오늘날 활주로가 펼쳐진 공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현재 그곳엔 몇 분 간격으로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영종도는 김찬삼 교수에게 특별한 곳이다. 세계여행가 김찬삼 교수의 여행 책은 당시 손꼽히는 베스트셀러였다. 그 시절 웬만한 집의 책꽂이에는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집이 있었다. 인천인인 그는 책의 인세로 영종도 구읍나루터 인근 바다 언덕에 공간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휴식을 하고 여행 원고 집필에 몰두했다. 또한 여행문화원과 여행도서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더 많은 이들에게 세계여행의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픈 마음이었다. 하지만 영종국제도시가 생기면서 터를 잃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부근에 세계로 통하는 첫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이 자리 잡았고 이곳에 영종역사관이 들어섰다.
영종역사관 밖으로
영종역사관은 영종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알리기 위한 공간이다. 실내는 물론이고 외부에서 유적과 유물을 만나볼 수 있는 전통정원이 앞마당이다. 정원을 몇 걸음 거닐다 보면 숲을 이룬 메타세쿼이아가 빽빽하다. 영종진공원은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일본의 급습으로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던 아픔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 역사적 상징물인 전몰영령추모비와 태평루라는 누각을 설치해서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메모리얼 정원으로 조성했다.
바다 옆으로 난 영종둘레길을 따라 건강백년길, 치유하늘길, 힐링바닷길의 산책 코스 또한 자연스럽다. 영종역사관을 둘러싼 시사이드파크는 영종하늘도시 인근의 공원으로 8㎞의 해변공원이 일품이다. 해변길을 따라 조성된 왕복 5.6㎞의 레일바이크도 신나고, 캠핑장과 하늘구름광장, 스카이데크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저녁 무렵이면 갯벌 풍경과 어우러지는 일몰이 신비롭다.
인천의 작은 올레길 예단포둘레길
영종도의 예단포항 둘레길은 작은 올레길이라 할 만큼 예쁘다. 기왕 영종도에 갔다면 한 번쯤 가볍게 걸어보는 것도 좋다. 선착장에 주차하고 출발하면 입구의 대나무숲과 잠깐 쉴 수 있는 정자를 만난다. 언덕을 오르면 눈앞에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물이 빠졌을 때는 갯벌이 진득하다. 길 옆으로 손톱만 한 야생화가 반짝이고, 오래된 나무가 여름이면 울창한 숲을 이룬다. 바다와 산이 공존하는 시원한 풍경으로 가슴이 탁 트인다. 왕복 30분 정도 길이어서 가뿐히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영종도의 해변과 공항전망대
서해에 왔으면 바다를 따라 한 바퀴 달려보자. 마시안해변과 선녀바위해수욕장, 을왕리해수욕장과 왕산해변이 멀지 않은 간격으로 이어져 있으니 시원하게 돌아보면 된다. 해변가 주변으로 출렁다리와 숲도 있어서 시간이 여유롭다면 차분히 숲길을 걸어보는 맛도 운치 있다.
영종도 나들이길에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면 좋을 듯하다. 공항 서쪽 오성산 자락에 인천공항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의 해발고도는 172m지만 막상 올라보면 높은 느낌은 아니다. 오성산과 공항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활주로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발아래로 공항철도가 지나가는 풍경은 덤이다.
배우 변희봉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변희봉은 췌장암이 재발해 투병한 끝에 18일 사망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장례식장 17호실에 마련됐다.
변희봉은 앞서 지난 2018년 방송된 tvN ‘나 이거 참’에서 “지난해 ‘미스터 션샤인’ 캐스팅 요청을 받으면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그때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며, 이후 관리를 통해 건강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밝힌 바 있다.
변희봉은 1963년 DBS 동아방송 성우 1기로 데뷔했으며, 이후 1966년 MBC 2기 공채 성우로 이적했다. 1970년 MBC 드라마 '홍콩 101번지'로 연기를 시작한 그는 드라마 ‘욕망’ ‘질주’ ‘1%의 어떤 것’ ‘늑대’ ‘위대한 유산’ ‘하얀거탑’ ‘공부의 신’ ‘울랄라 부부’ ‘오로라 공주’ ‘불어라 미풍아’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또한 변희봉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옥자’ 등에 출연하며 인기를 끌었다. 이에 그는 봉준호 감독의 페르소나로 불렸다.
변희봉은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로 제21회 백상예술대회 TV부문 인기상을 받았으며, 영화 ‘괴물’로 제27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대중문화 각계에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발인은 오는 20일이며 장지는 서울추모공원이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뉴욕 911 메모리얼파크, 체르노빌 원전사고 지역 등은 연간 수백만 명이 다녀가는 세계적인 명소다. 같은 장소라도 눈으로만 보는 관광에 치중하기보다는 비극의 역사를 조명하고 마음에 되새긴다면 다크 투어리즘의 교훈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우리 역사와 연관됐거나 인접한 지역이라면 그 효과는 더 크게 나타난다. 이에 착안한 해외 다크 투어리즘 스폿 두 곳을 소개한다.
[1] 독일: 베를린, 분단의 아픔을 기억하다
분단의 상처를 지녔다는 점에서 독일은 한국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그런 독일의 역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구조물이 바로 ‘베를린 장벽’이다. 이 베를린 장벽 동쪽에 조성된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서는 1990년 전 세계 예술가들이 참여한 100여 점의 벽화를 만날 수 있다. 얼핏 보면 장난스러운 그림들 같지만 저마다 아픔과 희망, 평화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관광객들은 벽화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그림 속 포즈를 따라 하는 등(특히 ‘형제의 키스’가 유명하다) 야외 갤러리를 즐긴다. 다만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반달리즘의 영향도 적지 않아, 2009년부터는 복원과 보존을 위한 작업을 병행 중이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서 멀지 않은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유대인 대학살 추모공원)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유대인 600만 명을 기리는 공간으로, 추모의 의미로 각기 다른 높이의 콘크리트 비석 2700여 개를 조성했다. 미로처럼 느껴지는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비석 위에 걸터앉거나 눕는 등 자유로운 모습이다.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행동으로 보이지만, 오랜 시간 머물며 역사를 되새기게끔 몇몇 비석의 단을 의도적으로 낮췄다고 한다. 때문에 (무덤도 아닐뿐더러) 에티켓에는 어긋나지 않는다고. 그밖에도 독일은 ‘발길 닿는 곳곳이 다크 투어리즘 스폿’이라 할 정도로, 거리마다 역사를 기리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장소가 즐비하다.
[2] 일본: 나가사키, 원폭의 잔해로부터 참상과 마주하다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는 핵무기가 폭발한 지점이나 피복 중심지를 뜻하는 용어다. 최근에는 뉴욕에서 발생한 9·11테러로 붕괴된 세계무역센터를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그라운드 제로’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원폭) 피복 지점을 가리키면서였다. 당시 1945년 8월 12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일본은 9월 2일 정식 항복했다. 전쟁은 종료됐지만, 원폭으로 인한 고통과 상흔은 오래 남았다. 그 참상을 기록하고 추모하기 위한 공간이 바로 나가사키 원폭낙하중심지공원과 평화공원 그리고 원폭자료관이다.
원폭낙하중심지공원 한쪽에는 피복 당시 지층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고열로 녹아내린 유리병이나 식기 등이 눈에 띈다. 인근 원폭자료관에는 폭격 당시 피해를 실감케 하는 자료들이 보관돼 있다. 공원과 자료관 사이에는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도 보인다. 당시 사망한 조선인은 1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낙하중심지의 북쪽 언덕에는 평화공원이 조성됐다. 전쟁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맹세와 세계 평화를 위한 소망이 담겼다. 한편 한국인으로서는 원폭을 계기로 해방과 독립을 맞았기에, 참상의 잔해를 마주할 때 마음이 불편한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을 잘 소화하고 곱씹어보는 과정도 중요하다.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 가슴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 그것이 시공간을 넘어 다크 투어리즘이 주는 교훈이다.
유형별 해외 다크 투어리즘 스폿
ㆍ전쟁 일본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미국 게티즈버그 국립군사공원, 베트남전쟁박물관, 태국 칸차나부리 국립묘지, 하와이 USS 애리조나 국립기념관 등
ㆍ항쟁·학살 체코 바츨라프 광장, 사이판 만세절벽, 캄보디아 투올슬랭 대학살박물관, 중국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 아르메니아 인종학살추모관 등
ㆍ노동 역사 세네갈 고레섬, 노르웨이 산업노동자박물관, 영국 셀라필드 원자력단지, 프랑스 노르파드칼레 광산,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소금광산 등
ㆍ재난·재해 일본 고베항 지진 메모리얼파크,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사고 지역, 미국 시애틀 언더그라운드 투어, 아일랜드 타이타닉 벨파스트 박물관 등
ㆍ격리·수용 싱가포르 창이교도소와 박물관, 미국 알카트라즈 감옥, 인도 바라나시 화장터, 호주 교도소 유적, 남아프리카공화국 로벤섬 등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댈러스. 이날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발생한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은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진범이 따로 있는지, 배후에 누가 있는지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궁금증을 마음에 담은 관광객들은 아직도 이곳을 찾는다. 암살범인 오스왈드가 저격했던 딜리 플라자의 그 자리는 ‘6층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이 현상을 관찰한 영국의 연구자들은 ‘다크 투어리즘’이란 개념을 착안해냈다.
다크 투어리즘은 재난이나 역사적으로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반성과 교훈을 얻는 형태의 여행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역사교훈 여행’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크 투어리즘이 주창된 초창기에는 위험한 장소를 탐사한다는 인식이 많았다. 체르노빌 같은 핵 재난 지역이나 국제적인 분쟁 지역 인근에 접근하는 형태까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익히고, 인간의 잔혹함이나 고통에 대해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스릴과 모험을 추구하는 이들이 몰리면서, 희생자들의 고통을 재밋거리로 희화화한다는 비난도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내전으로 홍역을 앓은 시리아다. 인구의 절반이 전쟁을 피해 나라를 떠난 이곳의 전흔을 일부 여행사들이 ‘볼거리’로 홍보했다가 비난의 화살을 맞았다.
관광자원 활성화 수단으로 활용
최근에는 다크 투어리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변화하고 있다. 다크 투어리즘을 지역의 관광자원을 살리는 가치 부여 과정, 즉 스토리텔링 수단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기념관 등 관련 시설의 정비를 통해 ‘여순사건’을 정확히 알리면서 관광자원으로 삼은 여수시가 대표적이다. 여수시는 2021년부터 ‘여순사건 다크 투어리즘 및 남해안 명품 전망 공간 조성 등 관광자원개발 사업’을 통해 관광 상품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의 아픔으로 남아 있는 역사적 사건이나 참사가 일어난 장소를 묻고 잊어버리려 애쓰기보다는 계속해서 애도하며 과거를 이해하고 반성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선영 홍익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과거 우리 사회는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장소는 철거해버리고 없애버리는 것, 잊어버리는 것이 더 옳다는 관념이 지배했지만, 최근에는 다크 투어리즘을 통해 반면교사의 계기로 삼고, 지속 가능한 관광 대상으로 만들어 관심 있는 여행자들이 끊이지 않도록 하는 순기능에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크 투어리즘은 관광객에게만 가치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다크 투어리즘 목적지의 보존과 발전에도 기여한다. 관광 수입이나 자원봉사를 통해 장소 복원과 유지 비용을 지원하거나, 사회적인 인식과 관심을 높여서 장소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전파하고, 희생자들을 지원하는 역할까지 맡는다.
가장 대표적인 장소는 제주4·3평화공원이다. 제주 4·3사건은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통해 진상조사가 이뤄졌음에도 최근까지 일부 정치세력을 통해 왜곡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제주4.3평화공원은 희생자 유족의 트라우마를 회복하고,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리는 중심지이자 관광지로 기능하고 있다.
다크 투어리즘을 통해 나타난 이러한 이념적 갈등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호기심을 더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국가가 베트남이다. 호찌민의 독립궁이나 메콩강의 구찌터널 등 그곳의 다크 투어리즘 관광지들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국이나 우리나라 입장에선 패전의 기록인 셈이지만, 베트남인들에게는 승전의 기록이자 전리품으로 남아 있다. 승전국 입장에서 작성된 현장의 기록을 읽는 경험은 미국 관점의 역사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생경한 경험이 된다.
지나친 엄숙주의 경계해야
특별한 장소를 찾는 만큼, 현장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도 특별한 태도가 필요할까? 전문가들은 단순한 여가활동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갖춰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선영 교수는 “당초 목적이 비극의 역사를 느끼고 다시 생각하기 위해 찾는 여행이기 때문에 가볍게 즐기기보다는 진지하고 숙연해질 필요는 있지만, 말 그대로 관광의 한 과정이므로 지나친 엄숙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고 조언했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당한다. 가족이 오래 병을 앓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다 해도 죽음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잠든 새, 간병 중, 짧은 순간에 닥친다.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그 아득한 단절감 앞에 우리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가족이 떠난 후 우리는 장례식이라는 열차에 올라탄다. 별일 없다면 대개 3일 동안 정신없이 달려야 한다. 그동안 정신을 차려야 고인과 제대로 이별하고 충분히 애도할 수 있다. 그 방법을 알아보자.
【임종 전】 사전상담을 받아놓는 것이 좋다. 가족이 장례 전 과정을 소상히 알고 직접 실행할 것이 아니라면 전문 장례지도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생전에 상조회사를 정해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격이 너무 비싸지 않고, 그동안의 이력을 볼 때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곳을 선택한다. 사전상담을 통해 매장이나 화장 여부, 봉안당이나 장지, 전국 장례식장 현황과 사용료, 조문객 식음료대, 제단 꽃장식, 제사 음식 등을 알아보고 정해야 한다.
【1일 차】 의료기관에서 임종할 경우 병원 원무과에서 사망진단서를 7부 정도 발급받는다. 자택에서 임종할 경우에는 지체 없이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고 검사지휘서를 수령해야 한다. 장례업체 콜센터에 연락해 안내받을 수도 있다.
조치를 취한 후 장례지도사와의 상담을 통해 장례식장을 정하고 운구 차량으로 고인을 이송한다. 화장, 매장 등 장법에 따라 장지를 결정하는데, 화장 시 화장 예약을, 매장 시 장지 예약을 한다. 그 후 장례 일정(입관 및 발인 시간 등)을 정하고 견적을 확인한다. 또 빈소에 차릴 영정사진, 제단, 제사상 등을 결정하고 가족, 친지, 지인에게 부고 문자를 발송한다.
【2일 차】 장례지도사 및 장례관리사(도우미)와 협의해 음식을 정한 후 조문객을 맞이한다. 입관식은 고인의 몸을 깨끗이 씻겨드리고 수의를 입힌 후 관에 모시는 절차다. 입관실에서 진행되며 보통 1시간 정도 걸린다. 고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입관식이 끝나면 제사를 지낸다. 종교의식을 진행할 수도 있다. 차량, 운구 인원, 발인제 지낼 장소 등 장지로 이동하기 전에 필요한 사항을 점검한다.
【3일 차】 발인 전 장례식장 비용을 정산한다. 미사용 물품은 반납하고 상조회사 비용도 정산한다. 개인 물품을 챙기고 빈소를 정돈하며 개인 짐을 정리한다. 발인은 장례식장에서 장지로 떠나는 과정이다. 발인 전 제사상을 차려 추모의식을 갖는다. 종교마다 발인식과 함께 종교 예식을 진행하거나, 영결식장으로 이동해 별도로 진행하기도 한다. 발인식을 마치면 관을 운구하여 장의차량에 모신다. 유족의 규모에 따라 버스와 리무진을 다 쓰거나 버스 혹은 리무진만 쓸 수도 있다. 장지에 따라 화장장 또는 묘소로 이동한다.
화장하는 경우 예약 시간 30분 전까지 화장장에 도착해 접수 절차를 마쳐야 한다. 사망진단서(시체검안서), 검사지휘서, 고인의 주민등록등본을 각 1부씩 준비한다. 화장이 시작되면 유족대기실에서 대기한다. 소요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인데, 이때 종교별 추모의식을 지내기도 한다. 화장이 끝나면 유골을 한지로 감싸 준비한 유골함에 모신다. 그 후 유골 안치를 위해 이동한다. 안치 방법은 봉안당, 봉안담, 봉안묘, 수목장, 해양장 등이 있다.
매장하는 경우 관을 장지로 운구한다. 공원묘지 등을 이용할 경우 서류 접수 후 직원의 안내를 받는다. 정해진 묘역으로 이동해 미리 파놓은 묘지 광중(구덩이)에 관을 모신다. 광중과 관 사이를 흙으로 채워 평지와 같은 높이가 되도록 한다. 그 후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든다. 평토제, 성분제 같은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봉분 조성 후 종교별로 추모의식을 진행한다. 매장의 경우 봉분묘, 평장묘, 문중묘, 공원묘원 등에 고인을 모신다.
【장례 후】 자택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초우제, 재우제, 삼우제를 치른다. 사망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사망자의 주소지와 관할 읍면동 행정복지센터에 신고한다. 개인묘를 설치할 경우 30일 이내에 사후 신고해야 한다. 가족묘, 문중묘, 법인묘는 설치 전 사전허가를 받아야 한다.
사망자의 상속 재산은 ‘안심상속 원스톱서비스’를 신청하면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방문록이나 SNS 등을 확인한 후 조문이나 위로를 전한 분들에게 답례 문자를 발송하고, 고인의 유품을 정리한다. 경우에 따라 전문 청소업체를 쓰기도 한다.
장례와 행정 절차를 마쳤다고 해서 고인에 대한 기억이나 흔적조차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고인은 마음속에 있다. 사랑의 기억은 남기고 나쁜 기억은 털어버린다. 슬픔을 살아갈 힘으로 만드는 것은 오직 남은 이의 몫이다.
사별의 슬픔 속 유족들은 장례를 치러야 한다. 자칫 경황이 없고 경험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지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준비할 사항들에 대해 알아보자.
가족이 직접 장례 전 과정을 직접 실행하지 않는다면 전문 장례지도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경우 생전에 상담을 통해 상조회사를 정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병원 또는 관할 경찰서에서 사망진단서를 7부 정도 발급받는다. 화장 시 화장 예약을, 매장 시 장지 예약을 한다. 장례 일정을 정하고 견적을 확인한다. 부고 문자를 발송한다.
장례지도사와 협의해 음식을 정한 후 조문객을 맞는다. 이날 입관식이 진행된다. 이후 제사나 종교의식을 치른다. 차량, 운구 인원 등 장지로 이동 전 필요 사항을 점검한다.
발인 전 장례식장 및 상조회사 비용을 정산한다(미사용 물품 반납). 발인 전 추모의식을 갖는다. 매장의 경우 관을 장지로 운구한다. 공원묘지 이용 시 서류 접수 후 직원의 안내를 받아 고인을 모신다.
화장하는 경우 예약 30분 전에 도착해 접수를 마친다. 사망진단서, 검사지휘서, 고인의 주민등록등본을 준비한다. 화장이 끝나면 유골을 함에 모시고 안치를 위해 봉안당, 수목장 등으로 이동한다.
자택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초우제, 재우제, 삼우제를 치른다. 사망일로부터 30일 내 고인의 주소지와 관할 읍면동 행정복지센터에 신고한다. 개인묘 설치 시 30일 이내에 알려야 한다.
사망자의 상속 재산은 ‘안심상속 원스톱 서비스’로 알 수 있다. 방문록이나 SNS 등을 확인 후 조문이나 위로를 전한 주변인에게 답례 문자를 발송하고, 고인의 유품을 정리한다(필요 시 전문청소업체 요청).
새파란 가을 하늘 아래 녹색 공원이 있고, 호수가 있고, 산책로가 있다. 안산시 외곽 개활지에 있는 화랑유원지다. 시월 한낮의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산책 삼아 한가하게 거니는 이들이 많다. 이름은 유원지지만 왁자한 분위기가 아니라서 안락하다. 경기도미술관은 화랑유원지 안에 있다. 자리 한번 기차게 잘 잡았다. 풍경과 산책과 미술품 감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미술관이라니. 접근성이 매우 뛰어난 입지이기도 하다.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미술관 관람의 목적을 호주머니에 담았을지도 모른다.
미술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미술관 보기를 소가 닭 보듯 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소란스러운 세상을 생동감 넘치는 감성으로 수용하는 눈을 얻을 수 있는 게 미술관이다. 하지만 따분하고 난해하다는 선입견으로 외면한다. 미술관 운영자들은 이런 현실이 야속하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관심과 호감을 살 수 있을까. 오나가나 골똘히 고민하는 문제가 그렇다.
얼마 전에 종료됐지만, 경기도미술관을 찾아간 날엔 ‘미술관의 입구: 생태통로’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는 고민의 한 결과물이다. 미술관의 진입장벽을 낮춰 관람객을 불러들일 방법을 모색해 꾸린 기획전이니까. 유원지를 가로지르는 통행로이기도 한 미술관 야외 길에 설치작품 다수를 전시했다. 하나같이 쉽고 재미있었다. 미술은 어렵다는 통념이 오해에 불과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미술이 지닌 위계와 경계를 철거해 관람객들을 포용하고자 했다. 사람들에게 한결 친절하고 살갑게 다가가고자 하는 미술관 측의 선한 의도가 완연해 인상적이었다. 환경 악화로 고립된 동물들의 활로로 쓰이는 ‘생태통로’처럼, 외부 전시물 전체가 공감과 소통의 가교로 기능하고 있었다.
경기도미술관은 2006년 경기도가 설립했다. 운영은 경기문화재단이 맡았다. 공립미술관답게 건물 규모부터 크고 훤칠하다. 안산시에 사는 미술 애호가들은 언제든 찾아가 무료로 손쉽게 예술을 즐길 수 있는 환경 형성에 반색했겠다. 나는 경기도미술관에 관한 작은 기억 하나를 가지고 있다. 이 미술관은 세월호 침몰 때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안산 단원고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결 절절한 애도 분위기에 이끌린 건 그래서였을까. 세월호 2주기인 2016년 4월, 경기도미술관 측은 희생자들을 추념하는 ‘사월의 동행’ 전을 열었다.
당시 정치권에선 세월호 사고 원인 규명 문제 등을 놓고 두꺼비씨름을 하고 있었다. 사립미술관도 아닌 공립미술관이 앞장서서 추모 전람회를 들고 나서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문학계에서는 추모시가, 음악계에서는 추모곡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술계의 반응은 상대적으로 미지근하던 때였다. 따라서 경기도미술관의 추념 미술전이 야기한 반향이 작지 않았다. 햐! 미술관이 진정 아름다운 레퀴엠을 헌정했구나! ‘사월의 동행’ 전소식을 듣고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눈앞에 있는 현상과 형상을 넘어 무한으로 달려가는 게 예술이다. 그러나 현실의 거대한 아픔과 슬픔에 무디다면? 눈치를 보고 공기만 살핀다면? 그건 예술이 아니라 정치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사월의 동행’전은 예술의 역할이 무엇인지 새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전람회이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작가들은 무엇을 표현할 것인지, 세상에 만연한 모순과 고통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졌던 셈이다.
유명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해
미술관 건물 입구로 다가가자 최정화의 설치작품 ‘꽃꽂이’가 눈길을 잡아당긴다. 플라스틱으로 꽃들과 열매를 만들어 설치한 작품이다. 원색의 붉은 인조 꽃떨기가 밤에 쓴 성급한 연애편지처럼 격정적이라 강렬하다. 최정화는 한국에서 요즘 가장 바쁜 화가다. 자칭 ‘설치작품으로 설치는 사람’이다. 그는 플라스틱 폐품 등 ‘눈부시게 하찮은 것들’을 모아 이를테면 꽃처럼 특별할 것 없는 외적 형상을 조형한다.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저급한 모방’이다. 그러나 대중은 그의 메시지를 지체 없이 수신한다. 최정화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정말 그럴까? 플라스틱도 제2의 자연 아닐까?” 그는 아까 얘기한 세월호 추념 전시회에선 10m 높이의 대형 설치작품 ‘검은 꽃’을 선보였다. 공기주입기로 작품에 공기를 넣어 꽃잎이 피었다 졌다 반복하게 해 세월호 희생자들의 부활을 기원했다.
먼 과거에 경기도미술관 일대는 바다였다. 이후 바닷물을 밀어낸 간척지였다. 지금도 호수가 있지만 원래 물이 머문 자리였던 것. 이와 같은 역사성과 장소성에 착안해 물 공간을 디자인 요소의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설정하고 건축 설계를 했다. 미술관의 남쪽과 동쪽 면에 사각의 대형 수조를 만들어 물을 채움으로써 저만치에 있는 호수 경관과 연계성을 갖도록 했다. 나아가 건물을 통째 물 위에 뜬 배로 간주하고 심벌을 입혔다. 거대한 철골 프레임에 유리판을 끼워 돛대 형상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예술을 싣고 삶의 대양을 항해하는 중?
국내 미술관 가운데 거의 최초로 시도된 자동 개폐식 천창(天窓) 시스템도 비범하다. 전시실에 자연광을 뿌리기 위한 채광 장치다.
설계자는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다. 일찍이 30대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설계해 세계 건축계에 표나게 데뷔한 인물이다. 국내에도 이미 이름난 사람이다. 경기도미술관 건물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건축에 자연 요소를 적극 융합한다. 세련된 기술로 추상적인 건축 언어를 발신한다.
지하 공간으로 건축을 끌어들인 데다 ‘빛의 계곡’까지 구현한 ‘이화여대 캠퍼스센터’(ECC)는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2021년에 착공한 지하 건물 ‘영동대교 광역복합환승센터’도 페로의 작품인데, 태양광을 흡수해 반사하는 초대형 라이트 빔을 쏴 지하 깊은 곳까지 자연광을 배급하는 시스템이라니 흥미롭다.
전시 공간은 2층에 있다. 방문 당시 ‘당신의 가장 찬란한 순간’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디지털 문명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욕망을 무한 소비하는 풍속을 돌아보게 하는 전시회다. 경기도미술관의 컬렉션 중에 ‘감각적인 작품’ 22점을 골라 선보이는 ‘소장품으로 움직이기’전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재미있기론 지구 곳곳에 이름을 알린 강익중의 대형 벽화 ‘오만의 창, 미래의 벽’이다. 미술관 1, 2층 벽면 한쪽을 통째 점유한 가로 72m, 세로 10m 크기의 대형 벽화다. 전국의 어린이 5만 명이 3×3인치짜리 나무판에 그린 그림 5만 점을 모둠으로 엮은 대작이다. 강익중은 뉴욕에서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습작을 했다. 퇴근길 지하철이 유일한 작업실이었으며, 지하철에서의 짧은 이동시간 중에 그림을 한 점씩 그렸다. 그렇게 해서 강익중표 ‘3×3인치 미니 캔버스 작품’이 나오게 됐다. 그는 5만 어린이들의 작은 그림들이 모여 뿜는 웅장한 에너지에 심취했나? 동어 반복적인 벽화 작업을 연달아 해왔다. 작은 그림들이, 작은 꿈들이 모여 삼라만상과 우주를 이루는 장관을 보라! 강익중의 메시지가 그렇다. 그는 백남준이 제자로 인정한 유일한 화가다. 명성과 감흥은 겉돌지 않는다.
2020년 우리나라의 화장률은 전국 평균 90%를 넘어섰다. 일부 시골 지역을 제외하면 대도시 지역은 95% 이상으로, 국민 대부분이 고인을 화장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장이라는 장법은 화장 이후 유해를 봉안 또는 자연장 하기 때문에 2차 장지가 필수적이다. 이번 편은 ‘장례 비용 얼마나 들까’의 마지막으로 화장장 비용과 2차 장지 비용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다.
화장장 비용
화장 비용은 지자체의 복지 성격이 강하다. 한 분의 고인을 화장하는 데 필요한 원가가 33만 원 정도인데 관내 주민들의 화장 비용으로 5만~15만 원을 받고 있다. 그래서 고인이 거주하던 주소지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화장장일 경우 적은 비용으로 화장을 할 수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 화장할 경우에는 훨씬 비싸다. 예를 들어 주소지가 서울로 되어 있는 분이 서울시 화장장(서울시립승화원,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을 하면 12만 원인데, 성남이나 인천에서 하면 100만 원을 내야 한다.
만약 지자체에서 화장장을 운영하지 않는 경우에는 화장장려금을 지원하기도 한다. 또한 기초생활수급자와 국가유공자는 관할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화장장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공설 봉안당, 자연장지
화장 이후 유해를 모시는 봉안당과 자연장지 역시 지자체에서 공설로 운영하여 지역민들은 적은 비용으로 시설을 사용할 수 있다. 화장장을 운영하지 않는 안산, 양주, 광명 등에서도 공설 봉안당이나 자연장지를 운영하고 있다. 예전에는 공설이 사설에 비해 시설이 열악한 경우가 있었으나, 근래에는 시설이 많이 좋아져 사설과 차이가 거의 없다. 다만 사설은 봉안당이나 수목장의 위치나 크기를 직접 선택할 수 있지만, 공설은 순서대로 모셔야 하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곳에 모셔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서울의 경우 공설 자연장(수목장, 잔디장)은 일반 시민들도 이용할 수 있지만, 봉안당은 이미 만장되었기 때문에 국가유공자와 기초생활수급자만 모실 수 있다.
사설 봉안당, 자연장지
사설 봉안당은 서울 공설 봉안당이 만장될 때쯤 서울 근교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도 서울 외곽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사설 봉안당의 특징은 같은 모양이지만 선호하는 높이에 따라 가격 차이가 크다. 흔히 아파트에서 로열층이라고 하는 것처럼 봉안당에서는 눈높이 쪽을 로열단이라 부르고 가격도 가장 비싸다. 제일 아랫단이나 윗단에 비해 3배 넘게 차이가 나기도 한다. 서울 근교 봉안당의 로열단 가격은 일반실 기준으로 600만~800만 원 정도다.
사설 자연장지는 수목장이 유행하면서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산이나 공원 같은 곳에 널찍널찍 심어져 있는 나무에 유해를 모시는 곳은 극히 일부이고, 대부분의 사설 수목장지는 공원묘지처럼 작은 나무들을 줄 세워 식재하고 분양하는 방식이다. 쉽게 생각하면 공원묘지에 봉분 대신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형상이다. 공동목, 개인목, 부부목, 가족목 등 다양한 크기의 나무들을 선택할 수 있으며, 보통 성인 크기의 가족목 분양 가격은 1000만 원이 넘어간다.
이러한 사설 봉안당이나 자연장지의 경우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20~40% 정도의 리베이트를 제공한다. 1000만 원짜리 봉안당을 할인 없이 소개할 경우 400만 원 정도의 리베이트가 발생하는데, 이것을 장지 소개 업체와 장례지도사들이 3:7 정도로 나눠 갖는다.
산골, 해양장
산골은 유골을 뿌리는 장법이다. 산골이 불법이다 아니다 논란이 많은데, 정확히 말하면 불법은 아니다. 우리나라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는 산골에 대한 조항이나 규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뿌려도 되는 것은 아니다. 국유지나 타인의 사유지에 허락 없이 뿌리는 것은 당연히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화장장에는 유택동산이라는 산골장이 있다. 이곳과 개인 사유지에 산골하는 것 외에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근래에는 바다에 유골을 뿌리는 해양장도 유행하고 있다. 인천, 강릉, 부산 등에서 허가받은 업체들이 운영하고 있는데, 해안가에서 5km 이상 떨어진 곳에 부표를 설치해 그곳에 유골을 뿌리는 방식이다. 일본의 경우 해양장이 굉장히 고급스럽고 다양한 의식을 진행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해양장은 산골한 후 유족이 원할 경우 간단한 제례의식을 진행하는 정도로 아직 많은 서비스 개발이 필요하다. 비용은 50만 원 내외다.
장법을 결정하고 장지를 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전문가가 조언을 해주느냐는 것이다. 괜찮은 공설 시설에 모실 수 있는 자격이 되더라도 되도록이면 알선 수수료를 주는 곳으로 안내하는 장례업자나 장례지도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가지 쓰지 않고 적절한 장지를 선정할 수 있도록 사전 상담 등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반짝이는 것은 늙지 않는다. 일을 향한 열정,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반짝이는 이 역시 늙지 않는다. 춘삼월 여린 잎 같던 목소리는 푸르다 못해 영글었고, 소년은 단단한 어른이 되었지만 반짝이는 두 눈은 24년 전과 다르지 않다. 예술과 사람을 사랑하며 오래도록 푸른 청년(靑年)으로 남을 임형주(37)의 이야기다.
한 단어로 요약하면 ‘최연소’, 하나 덧댄다면 ‘최초’를 꼽겠다. 2003년 만 17세 나이로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 헌정사상 최연소 애국가 독창자가 됐다. 같은 해에 세계 남성 성악가 사상 최연소로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단독 데뷔 독창회를 가졌다. 국내 3대 공연장에서 독창회를 여는 대기록은 10년 전에 세웠다. 데뷔 15주년에는 앨범 누적 판매량 100만 장을 돌파했고, 최근에는 스승의 날을 기념한 독창회를 열면서 세종문화회관의 모든 무대(대극장, M씨어터, S씨어터, 체임버홀)에 서본 최초의 음악가가 되었다. 음악가로서 세울 수 있는 기록은 전부 휩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두 살 소년이 상상 못한 숫자들
수집하듯 온갖 기록을 쓸어 담은 세월이 24년이다. 지금의 임형주는 데뷔 25주년을 앞둔 대한민국 대표 팝페라 테너지만, 1998년 데뷔 당시 열두 살 소년은 이 모든 기록적인 숫자를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지난 24년이 ‘꽃길만 걷는’ 시간이었을 것 같지만, 그는 스스로 ‘영광과 고난의 역사’를 거쳐왔다고 평가한다. 선배가 없는 팝페라 장르에서 활동하는 건 흙길에 아스팔트를 까는 작업과도 같았다.
지쳤던 걸까. 언제부터인가 국가 기념식이나 올림픽, 월드컵 같은 세계적인 스포츠 행사에만 등장했다.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노래하는 모습조차 보이고 싶지 않았다. 유명세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뜬소문에 지쳤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로마시립예술대학 성악과 석좌교수, 미국 그래미상 심사위원, 음악평론가 임형주로 살았다. 대중과 멀어지면서 ‘세월호 추모곡 가수’, ‘애국가 소년’쯤으로 이미지가 축소됐다.
그러다 가수 임형주가 지난 5월 JTBC ‘뜨거운 씽어즈’로 안방극장에 얼굴을 비췄다. 출연자도, 시청자도 예상 못 한 깜짝 등장이었다. “음정, 박자, 테크닉은 다 차치하고 진정성을 전하는 노래가 최고의 노래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출연진의 도전을 응원한 그는 시니어 합창단과 함께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불렀다. 겸손한 자세와 청아한 목소리가 갖는 힘은 여전했다. ‘뜨거운 씽어즈’에서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함께 부르는 장면의 유튜브 동영상은 두 달 만에 134만 회에 달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대중의 관심이 전보다 덜하리라는 예상을 뒤엎은 수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가수로서 노래하는 제 모습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데뷔한 지 오래되다 보니 ‘왕년의 스타’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어느 순간부터 방송에도 잘 출연하지 않았으니 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그의 데뷔 무대이자 첫 방송 출연이었던 KBS 2TV ‘이소라의 프로포즈’ 영상은 ‘온라인 탑골공원’(1990~2000년대에 유행한 콘텐츠를 올리는 유튜브 계정을 총칭하는 신조어)에 게재됐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는데 너무하지 않느냐며 너스레 떨지만, 대중의 애정과 관심에서 비롯됐음을 알고 있는 그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사람, 사랑을 위한 노래
그는 노래를 고를 때도 대중을 생각한다. 스스로 청중이 되어보고, ‘팝페라 테너’라는 정체성을 되새기며, 이 시대의 대중이 무얼 가장 원하고 듣고 싶어 하는지 고민한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곡들로 그는 사랑을 노래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친구 사이의 사랑이 주제가 되기도 한다. 연인의 애정보다는 인류애에 가깝다.
“연인의 사랑을 다루는 가수는 워낙 많잖아요. 그래서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 휴머니티를 다루었어요. 대중이 가장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음악인 팝을 통해서 인간애를 노래하죠. 사실 예술은 무한하기 때문에 장르로 구분 지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예술의 본질적인 의미는 향유, 즐기는 데 있거든요. 저는 세상에 듣기 좋은 음악과 듣기 싫은 음악, 딱 두 가지 음악만 있다고 이야기해요. 예술가는 대다수가 공감하고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할 줄 알아야 하죠.”
고고하고 우아한 음악을 한다는 생각에 괜히 으스대는 클래식 전공자들을 종종 봤다. 그 역시 정통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그들만의 음악’을 하기 싫었기에 팝페라 테너로 전향했다. 정치·경제만큼이나 문화예술의 중요성이 커지는 요즘, 그는 뿌듯한 한편으로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전부터 ‘문화예술의 일상화’를 주장하던 입장에서,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전하기 위함이다. 즐기기 위해선 공부해야 하는 ‘어려운’ 콘텐츠가 일상에 스며들 자리는 없으니까.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예술을 향유하며 영감을 얻는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 감상은 물론,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로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고, 활자중독이라 할 정도로 책을 읽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쓰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 등. 좋아하는 작가를 묻자 기다렸다는 듯 세계 유수의 작가와 작품명이 쏟아졌다. 최근 그의 마음을 동하게 한 책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다. 지난해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도 그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했다. “타인을 돌보는 마음, 그 사랑이 있기에 사람은 오늘도 살아 있다.” 인간애를 노래하는 가수다운 모습이다.
숲을 만드는 일을 꿈꾸다
올해로 서른일곱의 나이지만, 데뷔한 지 24년이 지났다. 인생의 3분의 2를 올곧이 음악에 바친 셈이다. 인간 임형주의 삶은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지만 흘러간 과거가 아쉽지는 않다. ‘음악과 이혼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도 몇 시간 지나면 새로운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앨범 제작 작업은 뼈를 깎는 고통 그 자체지만, 사람은 죽어도 앨범은 세상에 남아 있을 걸 생각하면 열심히 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요즘 들어 점점 은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굉장히 일찍 데뷔했기 때문에 다른 음악가들보다 조금 이르게 은퇴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커리어상 최정상을 누리는 시기는 이미 지났고, 지금이 제 목소리의 전성기임이 느껴지거든요.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른 뒤에는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에 순응하려고 해요. 돌이켜보니 데뷔하던 때도 왠지 ‘나는 일찍 은퇴할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네요.”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끝을 떠올리자니 가수 임형주를 기다리고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그런데도 아쉬움은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목소리에서 단호함이 묻어났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태도다.
현역에서 은퇴한다 해도 문화예술계에 일조하려는 계획은 확고하다. 그는 예술감독으로 행사를 직접 연출해보고 싶다고 했다. 노래가 꽃이자 나무라면, 가수로서 노래 부르는 것은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가꾸는 일이다. 예술감독은 행사에 쓰이는 모든 음악을 심고 가꾸며 배치한다. 국가 기념식이나 올림픽 개·폐막식이라는 하나의 숲을 만드는 작업이다.
숲을 울창하게 만들어줄 묘목을 가꿀지도 모른다. 그는 최근 국내 대학에서 제안한 교수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팝페라’의 길을 걸을 후배들이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또한 풍부한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예술행정가로도 활약하고 싶다. 인생 2막에 대한 계획을 늘어놓는 모습이 장래 희망이 너무 많아 고민인 어린아이를 닮았다.
바빠 나이 들 시간조차 없는 청년
차차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지만, 당장은 9월에 발매될 정규 앨범 8집 ‘Lost In Memory’를 제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번 앨범에는 1970~1980년대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 시기 대중가요를 담을 예정이다. 독립군 애국가나 ‘봉선화’, ‘사의 찬미’ 등 1920~1960년대 노래를 수록한 정규 7집 ‘Lost In Time’과 시대적으로 연결되는 앨범이다.
“지난 앨범에서 1920년대부터 1960년대의 음악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았으니, 이번에는 ‘잃어버린 추억’에 대해 다뤄보려고 해요. 1970~198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에는 트로트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작곡가 길옥윤, 박춘석, 이봉조와 그들의 뮤즈인 패티김, 혜은이, 정훈희나 이미자의 가요를 녹음하고 있어요. 패티김의 ‘이별’이나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 정훈희의 ‘안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빠질 수 없죠.”
10월 12일에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신보와 같은 이름의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이다. 8집에 실린 노래 외에도 가을에 어울리는 추억의 팝송이나 연주곡을 함께 선보이려 한다고. 50인조 오케스트라 반주를 곁들일 예정이라, ‘사랑은 생명의 꽃’(패티김)처럼 음역대가 굉장히 넓은 곡을 듣다 보면 특히나 코끝이 찡해질 것이라는 전언이다.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우선 첫 베스트 앨범을 내려고 한다. 그의 모든 대표곡을 앨범 한 장에 담을 예정이고, 앨범 발매 기념 독창회 역시 진행하려 한다. 내년에 코로나19가 완화되면 국내나 해외 순회공연도 떠날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전국 25개 도시를 돌아보고 싶어요. 숫자 맞추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TV 프로그램이나 매체 인터뷰 등 섭외 제안이 들어오면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해요. 순회공연을 돌다 보면 한 해가 다 지난 뒤겠지만, 내년은 인간 임형주이자 음악가 임형주로서 제 인생을 결산하는 시기가 되지 않을까요?”
그의 계획을 듣고 있자니 “바빠서 나이 들 시간이 없다”던 유명 배우의 발언이 떠올랐다. 임형주는 배움을 멈추고 안주하려 할 때 사람이 비로소 ‘늙는다’고 생각한다. 고로 꿈이 있는 자는 늙지 않는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 잠을 설치고,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받고 싶은 상이 남았는가”라고 물으면 “당연히”라고 대답한다. 오래도록 푸르를 청년일 수밖에.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언제나 그렇듯 추모공원 입구에 차를 세웠다. 1년마다 어김없이 해온 일이다. 특별히 나들이 철도 아니고 성묘객이 몰리는 명절도 아닌데 길이 막히는 것이 짜증스러웠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내색조차 못 했다. 평소에는 앞차가 시야를 가리고 브레이크를 자주 밟게 되면 구시렁거리며 불평을 내뱉곤 하지만 아내의 성묫길에는 교통체증에도 입을 꾹 다문다. 옹졸한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늘 통 큰 남편인 척하는 것도 솔직히 지겹다. 아내는 내가 통 큰 척하고 있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내가 통이 크든 작든 아내에게는 아무 상관도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내가 왜 이래야 하나. 벌써 20년째다. 이제는 그만둬도 되지 않나. 그런데 왜 나는 아내에게 이제 그만둘 수 없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걸까.
“조심해서 다녀와. 같이 갈까?”
“아니에요. 혼자 갈게요. 운전해줘서 고마워요. 쉬고 계세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무거울 텐데… 제수(祭需)만 들어다주고 난 내려올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늘 하던 일인데요, 뭐.”
그래, 늘 하던 일이지. 20년을 한결같이. 추모공원 앞에서 나누는 우리의 대화도 늘 똑같고. 그런데 왜 오늘따라 짜증 나고 답답하고 억울한가 말이다. 아니 억울할 것까진 없지만.
전남편 제사 지내는 아내
아내와 나는 20년 전에 재혼했다. 아내와 나 둘 다 30대 중반에 배우자와 사별했다. 혼자 지낸 지 3년쯤 지나 지인의 소개로 만났을 때 동병상련이 서로의 마음을 움직였다. 당시만 해도 이혼보다 사별이 재혼에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사별은 불가항력이니까. 그러나 이혼은 선택이니 사정이야 어쨌든 자기주장이 강하고 드센 사람이란 인상을 준다. 특히 여자에게는. 이렇게 생각하는 나를 보수적이라고 비난해도 하는 수 없다. 어쨌든 나는 그랬다.
혹자는 이혼은 자기 의지로 관계를 끊었기 때문에 전 배우자에 대한 미련이 더 이상 없지만, 사별은 생전에 사이가 나빴던 부부조차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이유로 애틋한 환상에 빠져 없던 사랑도 만들어내서 내내 잊지 못한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아내의 경우가 그랬던 것이다.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매해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으니. 그럼 나는?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때 죽은 아내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그리고 이따금 꿈에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냥 그뿐이었다. 아이들 엄마로서 아이들을 볼 때 떠오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 내 삶에서는 이미 떠나간 사람이었다.
아무튼 재혼 상대로 나온 여자가 전남편과 사별했다는 것이 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결혼 전 아내가 들고 나온 약간 이상한 조건도 상대에 대한 나의 호감을 더했으면 더했지 감하지는 않았다. 그 조건이란 재혼을 하더라도 전남편의 기일을 지키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내겠다는 건 아니고 성묘를 가고 싶다고 했다.
죽은 사람 못 이기는 산 사람
아내가 좋았기 때문에 무슨 부탁을 해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제안을 할 줄이야! 그토록 지고지순한 사람일 줄이야! 세상 떠난 남편에게 그 정도의 순정이라면 살아 있는 내게는 얼마나 정성스러우랴. 죽은 남편을 못 잊어 하는 것은 남이 들어도 그 자체로 칭찬받을 갸륵한 마음씨 아닌가. 그런 여자를 흔쾌히 받아들인 나는 더 넓은 마음씨의 소유자고. 이 모든 것이 나의 상상 속 이야기이자 착각이었다 해도 나는 통 큰 남자가 되기로 하고 그렇게 해온 지 20년째다. 그랬던 내가 뒤늦은 심술이 동한 것일까. 설마 죽은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일까. 왜 내 심사가 이리 꼬이냔 말이다. ‘죽은 남편을 죽도록 사랑했나 보지. 그렇다 해도 세월 앞에 장사 있나. 몇 년 그러다 말겠지.’ 처음부터 이런 마음을 먹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랬다면야 예상이 빗나간 게 약올라서 심통을 부릴 수도 있겠지만.
아내는 왜 전남편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 전남편과 산 기간보다 나와 함께 산 기간이 두 배나 긴데도. 세월조차 지우지 못하는 둘의 추억은 무엇일까. 물론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 걸 물어볼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다. 자존심이 있지. 그렇다고 아내와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다. 우리 둘은 잘 지낸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지만 재혼할 때 각자 데리고 온 남매들끼리도 무난하게 잘 지낸다. 이젠 모두 성인이 되어 자주 만날 일이 없지만 나도 아내도 내 자식, 네 자식 나눠서 서운한 마음이나 갈등을 겪은 일이 없다. 오히려 상대의 자녀들을 서로 잘 챙긴다.
우리는 건강한 편이며 돈도 아주 없지 않고 주변의 관계도 원만하다. 이만하면 노후를 대비해 부족함 없는 복 받은 중년 부부다.
문제는 아내의 전남편이다. 전남편이 우리 사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아니, 나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허,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죽은 사람이 산 사람 일에 끼어든다고? 하긴 산 사람은 결코 죽은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아내는 죽기 전까진 ‘저 짓’을 그만둘 의향이 없는 듯하다. 저러다 내가 먼저 죽으면 아내는 내 제사는 안 지내고 저 인간만 챙기는 거 아냐?
아내가 전남편을 못 잊는 이유
아내의 전남편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늦은 밤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에 치었다고 했다. 빨간색 보행자 신호등에서 건너간 남편 쪽 과실이었다고. 딴생각을 하다가 순간적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아니면 자투리 초록 신호등에서 무리하게 뛰어 건너다 변을 당한 것일지도. 남편은 즉사했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재혼 후 5년쯤 되었을 때 아내의 친구에게서 사고 당일 밤 부부가 크게 다투었다고 들었다. 화가 난 남편은 술이라도 마실 생각으로 집을 뛰쳐나간 것 같은데 진정되지 않은 마음에 보행자 신호등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다고.
그러면서 아내의 친구는 그 순간은 일부러라도 차에 뛰어들어 죽고 싶지 않았겠냐는 야릇한 여운을 남겼다. 아내의 전남편이 죽고 싶을 정도로 격렬했던 싸움의 원인은 뭐였을까. 내 얼굴에 어쩔 수 없는 궁금증이 피어오르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의 친구는 당시 아내가 잠깐 한눈을 판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아내의 외도 사실이 남편 귀에 들어가 부부가 대판 싸움을 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구태여 내게 말하는 이유를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고 말았다. 그 사실 자체로 불쾌했고, 무슨 속내인지는 몰라도 친구의 치부를 폭로하는 그 여자에게도 불쾌했다. 안달이 난 쪽은 아내의 친구, 그 여자였다. 하지만 나는 그 입을 더 이상 열게 하지 않았다. 불쾌를 넘어 불안했다. 아내에 대해 내가 모르는 무슨 말이 더 나올까 싶어서.
그냥 아내에 대한 시기 질투로 이해하기로 하고 마음을 정리했다. 그 친구는 아내가 사별한 비슷한 시기에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안정된 재혼 생활을 하는 아내가 부러울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더구나 캐묻고 싶지 않았다. 물론 아내는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모른다. 자존심을 지켜주고 오히려 아내를 이해하는 쪽으로 작용한 나머지 전남편의 기일 성묘를 이제 그만둘 수 없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영혼은 누구에게?
그랬다. 지난번 결혼에서 아내는 남편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의식으로 20년간 남편의 기일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나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일에, 그것도 아름답지 않은 일에, 따라서 보람도 없는 일에 나까지 발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남들이 이 일을 알면 나를 바보라고 할 테지. 무엇보다 저 여자는 너무 뻔뻔하지 않나. 아무리 내가 허락했고 약속했다고 해도 20년을 한결같이 그의 기일을 챙기고 있으니. 나를 무시하고 깔보는 마음이 없고서야 미안해서라도 스스로 알아서 그만뒀어야 하지 않나.
더구나 아내는 한 번도 나를 성묘에 참여시키지 않고 있다. 나를 위한 배려라고 하지만 현 남편인 나를 전남편에게 한 번쯤 인사를 시켜줄 법도 하건만. 이쯤 되면 전남편과 오붓한 시간을 갖겠다는 심사가 아니고 뭔가. 아내는 죽은 남편의 묘 앞에서 매해 무슨 말을 할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또 사과하며 용서를 비는 걸까. 만약 그날 그 사고가 없었다면 저 사람이 아닌 당신과 해로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눈물을 찍어내는 걸까. 그나저나 조신한 아내가 어쩌다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까.
자동차 사이드미러 저 멀리서 성묘를 마치고 내려오는 아내가 보인다. 가까워올수록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이 드러난다. 아까 올라갈 때의 스산한 표정이 아니다. 상념에서 깨어나, 시동을 걸어놓고 아내의 손에 들린 제사 음식 보따리를 받아들기 위해 차에서 내린다. 이제 아내는 다시 내게로 돌아오고 있다. 하지만 내가 차지하고 산 건 아내의 몸뚱이뿐이고 아내의 영혼은 늘 저곳, 저 남자에게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 몸조차 거기에 있고 지금 내게 오고 있는 여자는 아내의 모습을 한 허깨비가 아닐까. 내 아내는 여전히 묘 앞에서 전남편과 도란도란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건 아닐까.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