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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 중년의 성생활, 터놓고 말합시다!
-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에 만족하고 있는가? 혹시 알음알음 퍼진 부정확한 기준과 정보 탓에 서로를 질책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쪽만의 문제, 하나의 이유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까지 알던 섹스는 잊고 인생 2막, 3막을 위해 다시금 사랑의 도움닫기를 해보자. 섹스를 둘러싼 사회적 인식은 예전에 비해 완화됐지만 아직 사람들은 ‘이 주제’를 스스럼없이 말하길 꺼린다. “에이, 결혼한 지도 꽤 됐는데 나이 들어서 가족끼리 왜 그래? 주책이야”라며 서로를 등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섹스는 단순히 쾌락만 추구하는 행위가 아니라 ‘성’과 ‘관계’ 두 가지가 유기적으로 합쳐진 삶의 소중한 자원이다. 전문가들은 성적으로 친밀할수록 두 사람 사이가 건강하다고 이야기한다. 개인의 자아 존중감 회복, 삶의 의욕 증가 등 정서적 효과를 누리는 건 덤이다. 성생활을 슬기롭게 지속하기 위해서는 우선 몇 가지 오해를 바로잡고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섹스=거시기하다’는 인식의 오류 우리는 부모의 사랑과 섹스로부터 태어났다. 2차 성징을 겪은 뒤 어른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며 섹스를 한다. 성은 요람부터 무덤까지 삶의 모든 과정을 포괄하는 개념이자 인간의 근원인 셈이다. ‘거시기하다’며 민망하고 쑥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또한 ‘거시기’(성기)를 통한 삽입 성교만이 전부라 여기기도 하지만, 이는 섹스의 한 종류일 뿐이다. 애무, 오럴섹스, 키스, 포옹, 손잡기 등도 모두 섹스다. 건강한 섹스 경험의 부재 ‘나이 들수록 호르몬의 변화와 신체적 제약으로 인해 성행위에 어려움이 있다’고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발기부전이나 질 윤활액 분비 감소, 감각 둔화 등으로 한계를 느낄 때도 있지만, 의학 기술의 발달로 치료를 통해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보통 과거의 정서와 경험이 현재와 미래의 성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쉽게 말해 75세 노인이라도 청년 시절 행복한 섹스를 했다면 이를 바탕으로 향후 기대와 욕구가 커지고, 25세 청년이라도 관련된 트라우마나 혐오가 있다면 몸과 마음이 섹스를 거부하는 상태가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더불어 현대로 오면서 유튜브,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쾌락이 늘어난 까닭에 점점 섹스를 경험할 기회가 줄었다. 배정원 행복한성문화센터 대표는 “현재 한국은 성관계를 적게 하는 섹스리스를 넘어 아예 성관계를 하지 않는 섹스오프 상태에 봉착했다”며 “코로나 시대와 불경기를 지내면서 연애나 사랑이 필수라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다”라고 말했다. 이런 현상이 이어진다면 개인뿐 아니라 저출산·고령화 사회의 갈등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풀리지 않는 매듭은 없다 ‘섹스에는 정년이 없다’는 말, 이제는 흔한 표현이다. 그러나 여러 원인으로 성생활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오랜 시간을 한 상대와, 같은 방식으로, 매번 만족할 만한 섹스를 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젊을 땐 좋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서 반복되는 패턴에 만족도가 떨어진 사람, 특정 이유로 사이가 소원해져 성생활까지 타격받은 사람, 사소한 습관이나 외모 결함 때문에 몸의 대화 자체가 단절된 사람 등 사례는 매우 다양하다. 사실 좋은 섹스는 침대 밖에서부터 시작된다. 함께 멋진 식당에서 밥을 먹고, 좋아하는 꽃을 선물하고, 애정 어린 농담을 주고받는 태도가 선행돼야 한다. 관계 시에도 오르가슴을 경험하는 섹스만이 쾌감을 주는 건 아니다. 섹스는 몸과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스한 온기, 떨리는 마음, 촉촉하고 매끄러운 느낌 등으로도 행복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원하는 횟수나 시간대, 자극받고 싶은 부위, 성적 취향 등이 있다면 솔직하게 요구해야 한다. 서로의 신체적·정신적 유대를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단계다. 유외숙 상담21 성건강연구소장은 “연애·결혼 초기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데도 오랜 시간 불만이나 욕구를 참으며 한쪽 또는 둘 다 불만족스러운 섹스를 하는 사람이 많다”며 “좋으면 좋고, 안 맞으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며 ‘모 아니면 도’라 여긴다”고 말했다. 여기서 관계의 주체는 언제나 나여야 한다. 자신의 욕구를 인지하고 만족을 위해 열심이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대화와 소통으로 중간중간 점검하며 개선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유 소장은 “너무 늦었다고 포기하지 말고 건강한 노후를 위해 욕구와 방식을 조율하며 서로 잘 싸워야 한다”며 “한 꺼풀, 두 꺼풀 덜어내다 보면 사람 관계의 본질은 같다”고 조언했다. 중년 이후의 행복한 성을 위해 알아야 할 8가지 ●부부 사이 성생활의 질은 서로의 친밀감이 좌우한다. 문제가 있을 때는 섹스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대화 방법을 개선하는 등 친밀감을 회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규칙적인 성생활은 중년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규칙적인 섹스가 면역력 향상, 노화 방지, 통증 감소, 심장질환 예방, 자궁질환과 전립선질환 예방,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고 수명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중년 이후 성기능 장애 예방을 위해서는 운동이 중요하다. 운동은 남녀 모두의 성기능 장애를 예방할 수 있다. 남성의 걷기·달리기 등 유산소 운동은 발기부전 예방에, 여성의 케겔운동은 실금을 줄이고 성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발기부전 같은 남성 성기능 문제는 반드시 전문의와 상담하도록 하자. 중년 이후 발기부전은 당뇨, 심장질환, 고지혈증 등의 첫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어 성인병의 신호탄이다. 발기부전이 있으면 혼자 고민하거나 친구와 상의하지 말고 전문의와 상담하자. 먹는 약이나 주사제로 발기부전을 해결할 수 있고, 성인병 동반 여부도 확인 가능하다. ●중년 여성에게 나타나는 성교 시 통증은 해결할 수 있다. 중년이 되면 질 윤활액 분비가 감소해 성교통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때 윤활제를 사용하면 된다. 이후에도 성교통이 계속된다면 전문의의 상담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충분한 애무를 할 때 만족도가 높아진다. 여성은 삽입 성교만으로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힘들다. 성행위 시 충분한 시간을 들여 여유 있게 애무해야 여성의 성적 만족이 높아진다. 가장 예민한 성감대는 질 속이 아니라 음핵(클리토리스)이다. 애무는 길게, 삽입은 늦게, 삽입 시기 결정은 여성에게 맡기기를 권한다. ●성적 호기심이 유발되도록 창조적인 변화를 시도하자. 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체위, 새로운 장소와 분위기는 활력을 주기도 한다. 부부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멋진 장소에서 섹스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등 판타지를 이용하는 방법도 좋다. ●용불용설(用不用說), 규칙적인 성생활 여부에 따라 성기능이 유지되거나 퇴화한다. 중년 이후에도 꾸준한 성생활을 통해 성기능이 향상되고, 성적 만족도 높아질 수 있다. 중년 이후 많은 부부가 젊을 때보다 더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즐기고 있다. 출처 ‘2015 대한성학회 추계학술대회’, 정리 이범석 가톨릭관동대학교 국제성모병원 교수
- 2024-03-1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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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온 사랑의 계절, 중년도 다시 시작해도 될까요?
- ‘연애’는 사전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익히 떠올리는 연애(戀愛),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서로 좋아하여 사귐. 그리고 연애(煙靄), 봄날 햇빛이 강하게 쬘 때 공기가 공중에서 아른아른 움직이는 현상. 즉 봄에 만나는 아지랑이를 말한다. 뜻은 다르지만, 몽글몽글한 사랑의 감정을 떠올리면 어쩐지 의미가 통하는 듯하다. 감정은 늙지 않는다는 말처럼, 사랑도 마찬가지다. 다시 돌아온 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사랑의 감정은 중년에도 충분히 찾아올 수 있다. 2022년 통계청 혼인인구 조사에서 부부 5쌍 중 1쌍(22.6%)은 재혼자가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남녀 중 한쪽만 재혼인 경우(9.8%)보다는 양쪽 모두 재혼인 경우(12.3%)가 더 많았다. 지속해서 10년 넘게 혼인인구가 줄며 재혼자 수도 감소했지만, 그 비율(재혼자/혼인인구)은 소폭 상승한 상황이다. 고령화 흐름에 따라 황혼이혼 등이 늘며 중장년 재혼율이 앞으로 더 증가하리라는 예측도 나온다. 수치뿐만 아니라 최근의 변화 중 하나는 이혼·재혼 사실을 숨기던 문화가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당사자들도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고 있다. 상담 현장에서 신혼, 이혼, 재혼 등 수많은 부부 사례를 경험한 김숙기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장은 “과거엔 이혼·재혼을 쉬쉬했다. 이혼한 지 20년 넘었는데 가족 외엔 아무도 모른다는 분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좋은 사람을 소개받기는커녕 외로움과 어려움을 나눌 길이 없었던 것”이라며 “100세 시대, 중년에 함께할 사랑을 찾지 않는다면 더 오랜 세월 홀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당사자들도 체감하는 듯하다. 죽을 때까지 혼자 살기보다는 새로운 사랑을 꿈꾸는 게 오히려 현실적인 태도”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때는 자녀에게 새아빠·새엄마를 만들어주고 내조나 외조를 바라며 재혼을 많이 했지만, 요즘은 그런 이유로 재혼을 수용하지 않는다. 오롯이 ‘사랑’의 감정으로 재혼을 결심하는 사례가 많아졌다”고 덧붙였다. 초혼은 실패? 만회하려는 마음은 독! “돌싱(돌아온 싱글)이 되어도 정상적인 연애 가능할까요?” 한 이혼법률사무소 카페에 올라온 글이다. 협의이혼을 진행 중인 작성자는 이혼 후 혼자 살기 외로울까 걱정하면서도 이전 같은 결혼생활은 무섭다며 트라우마를 호소했다. 한 번의 아픔을 겪은 중년들은 종종 양가감정을 지닌다. 사랑을 원하지만, 한편으론 사랑이 두렵기도 한 것이다. 때문에 어렵사리 사랑의 감정을 허락했을 땐 그만큼 더 절실한 마음에 노력을 기한다. 다만 상대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무언가를 숨기거나 문제를 덮으려는 행동은 훗날 독이 될 수 있다. 김숙기 원장은 “초혼을 스스로 실패라고 여겨 그걸 만회하려고 본모습과 다르게 포장하거나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 처음부터 자신의 흠이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상대가 안 좋게 보고 관계가 깨질까 봐 일단 감추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 문제가 발목을 잡게 되고, 뜻하지 않게 드러났을 땐 더 신뢰를 잃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패를 만회하려다 생겨나는 또 하나의 오류가 있다. 전 배우자가 지닌 특성이나 문제를 배제한 상대를 고르려 하고, 계속해서 두 사람을 비교한다는 것이다. 가령 전남편이 술을 많이 마셔서 고충이었다면, 새 배우자는 ‘술 안 마시는 남자’를 조건으로 하는 식이다. 물론 큰 갈등이 있었다면 고려는 해야겠지만, 그 기준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김 원장은 “가끔 전 배우자의 영향으로 ‘OO 지역 사람들은 성격이 별로’라거나 ‘OO대학 나온 사람들은 문제가 많다’ 등 혐오성 발언을 하는 분들이 있다. 이는 일반화의 오류다. 전 배우자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재혼을 결정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야만 이전과 같은 문제가 안 생기고 재혼에 실패하지 않으리라 여기는데, 이 또한 현명한 판단은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아울러 “어떤 분들은 나름 칭찬이랍시고 ‘전남편은 무뚝뚝했는데 당신은 다정해서 좋아’, ‘전부인은 씀씀이가 헤펐는데 당신은 알뜰해서 마음에 들어’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더라. 가끔은 기분 좋게 들릴지언정, 계속해서 전 배우자와 비교되는 상황이 달가울 리 없다. 한편으로 그런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것은 아직 이전 결혼생활의 갈등이나 감정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혼 후 법적인 것은 물론 심(心)적인 정리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마음·관계 정리, 어렵다면 함께 다뤄야 가급적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전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이를 함께 해결해가는 것도 방법이다. 가령 “내가 아직 이런 부분은 마음에 남아서 자꾸 말을 하게 되는데, 노력해보겠다”라든지 “전 결혼생활이 큰 상처였는지 쉽게 괜찮아지지 않는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등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김숙기 원장은 “어떤 문제에 대해 ‘다뤘다’는 것과 ‘다루지 않았다’는 건 나중에 큰 차이를 불러온다”며 “어떤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더라도 함께 이야기하고 다뤄본 경험이 중요하다. 한번 다룬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대화하고 조정해볼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묵인했을 때는 ‘왜 말하지 않았냐’, ‘나를 속였다’며 오해가 불거지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재혼을 앞두고 상담을 청하는 이들 중에는 “아직 애인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이런 얘기를 하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결혼 안 한다면 어쩌나”라며 물어오는 경우가 많단다. 이에 김 원장은 “그분에게 직접 말씀해보시라. 이런 얘기도 못 할 단계라면 어떻게 결혼을 하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서로가 마음의 정리와 준비가 됐다는 건 “대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 된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가령 재혼 커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전 결혼생활이나 자녀 문제 등에 대해 언급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단어들이 나오는 걸 껄끄러워하거나 금기하는 등 대화가 부자연스럽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얘기다. 위기는 기회, 성숙한 어른들의 사랑 기왕이면 소통하는 과정에서 특정 상황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두면 더 좋다. 재혼자들에게 특별히 권하는 항목이 있다면, 이전 배우자로부터 생겨난 관계에 대한 처세다. 다툼이나 사건 등으로 인해 이혼했다면 덜 어렵겠으나, 사별의 경우라면 전 배우자의 부모·형제·지인 등과의 관계를 쉽게 정리하지 못한다고. 김 원장은 “재혼을 했다면 새로운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 어영부영 전 배우자와 관계된 인연을 부여잡고 있으면 서로가 난처해진다. 새 배우자와 ‘어느 부분까지 허용할 것인가’를 논의해보길 바란다. 가령 자녀가 있으니 자녀를 조부모(전 배우자 쪽)에게 1년에 두 번은 보여준다든지, 사별한 배우자의 기일에는 그의 가족들을 만난다든지 재혼 전 함께 가이드라인을 정해둬야 큰 불찰이 생기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까다로운 주제를 두고 이야기하다 보면 때론 다툼도 생기고 위기가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도 기회로 보고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게 좋다. 김 원장은 “문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해나가느냐를 통해 상대의 성품과 인격도 확인해볼 수 있다. 가령 위기가 닥쳤을 때 폭언이나 폭행을 한다든지, 그동안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젊은 시절과 차원이 다른, 더 어려운 문제를 겪을 수도 있다. 어려서는 연애에 대한 환상을 깨기 싫어서, 경험이 부족해서 그러한 문제들을 미숙하게 다루기도 한다. 서로의 경험과 혜안을 빌려 위기를 극복하면서도 얼마든지 사랑의 낭만을 누릴 수 있다는 게 중년기 연애의 장점이다. 인생에서 잘 무르익어 인격이 성숙해졌을 즈음, 중년에야말로 진정한 어른들의 연애가 가능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언제나 사랑을 꿈꾸시라”며 응원했다.
- 2024-03-04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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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늘어나는 노인일자리… 6년 만에 수당도 인상
- 다가오는 새해, 시니어를 위한 정책들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그중 하나로는 노인일자리 및 수당 확대가 있다. 이에 대해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24년 예산안을 바탕으로 알아보자. 기획재정부 ‘2024년 예산안 20대 핵심과제’에 따르면 노인일자리 수와 수당이 대폭 확대된다.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지속적으로 노인인구가 늘어나는 가운데 2024년에는 1000만 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노인인구: (`22) 901.8만 명 → (`23) 950만 명 → (`24) 1,000.8만 명) 더불어 기초수급자 중 노인가구 비중 또한 날로 늘어나며 저소득 노인 지원 강화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됐다. *기초수급자 중 노인가구 비중: (`19) 37.4% → (`20) 38.1% → (`21) 43.2% → (`22) 45.3% 이에 반해 노인일자리 사업 규모(84.5만 명)는 희망자(93만 명, 노인 인구의 10.3% 수준)에 비해 여전히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 2024년에는 103만 명 규모의 노인일자리(+14.7만 명)를 마련, 역대 최고 수준에 이를 예정이다. 아울러 일자리 수당 또한 2만~4만 원(+7% 수준) 더해질 방침이다. 2018년 이후 6년 만에 인상이다. 전반적인 규모와 금액 상향이 예상되는 가운데, 양질의 민간·사회서비스형 노인일자리의 확대가 중점적으로 일어날 계획이다. 공익형 노인일자리(노노케어, 교통도우미 등)는 월 27만 원(60.8만 명)에서 29만 원(65.4만 명)으로, 사회서비스형 노인일자리(보육교사보조, 공공행정 업무지원 등)는 월 59.4만 원(8.5만 명)에서 월 63.4만 원(15.1만 명)으로 늘어난다. 민간형 노인일자리(실버카페, 지하철 택배 등) 규모도 19만 명에서 22.5만 명으로 증가가 기대된다. 한편 올해 12월 29일까지 2024년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지원사업 참여자를 모집한다. 65세 이상(일부 사업은 60세 이상) 참여 가능하며, 모집 분야는 공익활동형, 사회서비스형, 시장형사업단으로 나뉜다. 참여를 원한다면 지역별 행정복지센터(구 동사무소) 또는 노인복지관·대한노인회·시니어클럽 등 사업 수행기관을 찾아 신청하면 된다. 또는 ‘노인일자리 여기’, '복지로', '정부24' 홈페이지를 통해 온라인 신청도 가능하다. 그밖에 중장년이 알아둘 만한 2024년 예산안 관련 변경 및 신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기초연금은 월 32.3만 원에서 33.4만원으로 인상 △ 신체제약이 큰 독거노인(중점군 5.7만 명)을 위한 돌봄시간 확대(일반군 월 5시간, 중점군 월 16시간→20시간) △생계급여 역대 최고수준 13.2% 인상(4인 가구 기준 162.0만 원→183.4만 원, 수급선정기준 2015년 이후 최초 상향, 중위 30% 이하→32% 이하) △소규모 농어가 직불금 단가 상향(120만 원→130만원) 및 고령농 은퇴직불금(600만 원/ha) 신설 △독거노인 조손가구 등 응급안전 관리요원 확충(696명→766명) △참전 명예수당(6·25전쟁 및 월남전 참전유공자) 상향(월 39만 원→42만 원) 및 보훈 트라우마센터 신규 설립 △소상공인·자영업자 고효율 냉난방설비 6.4만대 보급 및 취약차주 고리(평균 11%) 대출 저리(평균 4%) 정책자금으로 대환(이자 비용 1인당 연 390만 원 경감, 총 1만 명)
- 2023-12-2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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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담은 서툰 그림, 영화로 빛을 발하다
- 동화책 삽화처럼 알록달록한 그림과 아이에게 옛이야기 들려주듯 담담한 내레이션은 5·18 민주화운동, 노인, 장애라는 주제를 훑는다. 약자에 대한 배려를 입버릇처럼 들먹이지만 정작 시선 주는 데는 박한 세상,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펼쳐 보이는 시도가 빛날 수밖에. 영화 ‘양림동 소녀’가 2023 서울국제노인영화제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영화제의 막이 내린 대한극장 한켠에서 임영희, 오재형 감독을 만났다. 기나긴 코로나 시국, 아들은 집에만 있느라 답답해하는 어머니에게 크레파스와 사인펜을 선물했다. 그림으로나마 답답함을 풀고 세상과 소통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된 어머니는 왼손으로 펜을 쥐었다. 진도에서 태어나 광주로 이사 왔을 때의 기억들이 한 장, 두 장 그림이 되어 쌓였다. 미술을 전공한 아들은 삐뚤빼뚤한 그림에서 가능성을 엿봤고 영화 제작을 제안했다. “왼손으로도 괜찮을까?” 자신 없어 하는 어머니를 아들은 꾸준히 격려하고 설득했다. 어머니의 생애를 영화로 제작하는 것은 영화감독 아들의 오랜 꿈이었다.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약 7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그림을 그렸고, 아들은 그런 어머니를 촬영했다. 어머니의 인터뷰 영상을 편집하고, 직접 연주한 배경음악을 삽입했다. 딸은 영어 자막을 위한 번역을, 아버지는 영화 타이틀 로고 제작을 맡았다. 분류는 다큐메이션(다큐멘터리+애니메이션). 글자 그대로 ‘독립영화’인 30분 08초 분량의 ‘양림동 소녀’는 이렇게 탄생했다. 빛나는 소녀 뒤엔 양림동이 있었다 영화는 온전히 어머니 임영희 씨의 기억에 의존해 만들어졌다. 영화의 다른 요소는 모두 배제하고 그림으로만 밀고 나갔다. 어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편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영화도 어머니의 그림으로 승부할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절대 잊지 못할 사건은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유년 시절의 추억은 대체로 오래 기억되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벌써 40년이 지났지만, 제가 광주에서의 기억을 어떻게 잊겠어요? 영광스러운 한때로, 또 트라우마를 남긴 끔찍한 순간으로 죽는 날까지 품고 갈 수밖에 없죠. 나이 들어 마주하게 된 장애인의 삶은 또 어떻고요. 남들은 이 영화를 보고 어쩌면 기억력이 이렇게 좋냐 묻는데 사실 그렇지 않거든요. 절대 잊을 수 없는 인생의 장면들만 영화에 담았을 뿐이에요.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순간이니 당연히 기억하는 거고요.” (임영희 감독)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은 임 감독이 생애 가장 주체적이던 시기의 배경이었다. 제목이 ‘진도 소녀’, ‘광주 소녀’가 아닌 ‘양림동 소녀’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출생지인 진도는 옛 추억거리가 있고, 어린 시절 광주로 이사 온 것도 맞다. 하지만 문인의 꿈을 키우던 중고등학교 시절 사회운동과 5·18 민주화운동을 겪은 지역은 양림동이다. 남편을 만난 곳, 아들 오재형 감독이 태어난 곳 또한 양림동이다. 정체성을 결정지은 순간이 거리에 즐비하다. 그중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지 임 감독에게 물었다. ‘보프룩 까페’를 드나들던 20대 시절을 꼽는 목소리에 망설임이 없었다. “보프룩 까페는 프랑스 소설가이자 시민운동가 시몬 드 보부아르의 ‘보’, 미국 여성학자 베티 프리단의 ‘프’, 폴란드 철학자 로자 룩셈부르크의 ‘룩’을 따온 별명이에요. 제가 지었죠. 실제 카페는 아니었고, 제가 20대 당시 동경하던 언니의 집이었어요. 당시 마음 맞는 친구들과 모여 저 여성 학자들의 책을 읽으며 생각을 나누곤 했습니다. 보프룩 까페에는 언제나 뜨거운 커피와 사과 한 조각이 있었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어요. 제겐 가장 이상적인 공간이었죠.” (임영희 감독) 그 밖에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학교에서 상을 받거나, 아버지와 남편이 옷을 만들어줬던 것 등. 떠올리면 즐거워지는 순간은 많다. 다만 영화에서 주가 되는 것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기억이다. 임 감독은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밤중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5·18민주광장(구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이웃이 국가권력에 의해 죽임당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와 남편 오정묵 씨는 황석영 작가의 집 2층 거실에서 담요를 둘러쓴 채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첫 테이프 녹음에 참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고통스러웠으리라는 추측과 달리 임 감독은 영광이라 표현한다. 난리통에 누구 하나 싸우거나 도둑질하지 않았고, 서로를 챙기고 보살피는 ‘신성한 공동체’를 몸소 체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약자를 통합시킨 양림동 소녀의 이야기 어머니의 걱정과는 달리, 아들의 기대대로 혹은 그 이상이다. ‘양림동 소녀’는 서울국제노인영화제에서 상영 후 GV(영화 상영 후 감독이나 배우가 관객들과 갖는 대화)가 시작되기 전 기립박수를 받았다. 서울국제노인영화제 대상을 수상하기 전에는 2022년 제13회 광주 여성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는 쾌거를 안았다. 김영우 서울국제노인영화제 한국단편경쟁 본심 심사위원은 “노인이라는 단어에 따라다니는 편견과 한계에 갇히지 않고, 노인에 대한 인식과 관점의 변화, 태도의 확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어르신이 직접 창작의 주체로 나서 기획, 촬영, 편집까지 맡아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냈다는 사실이 특히나 감동적이었다”는 심사평을 대표로 전했다. 두 감독이 스스로 평가하는 영화의 강점은 무엇일까. “어머니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말이 어눌하고 오른쪽 손을 쓰지 못하세요. 그래서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셔야 했죠. 그 때문인지 선이 삐뚤빼뚤한데, 보통의 경우 약점이 되는 부분이 어머니의 그림과 영화에서는 강점으로 작용했어요. 이게 미술 전공자가 봐도 흥미로운 부분이었죠. 무엇보다 작화가 수준급이었고요. 덕분에 영화의 장르를 애니메이션으로 결정했죠.” (오재형 감독) “요즘 세상은 약자를 어린이, 청소년, 여성, 노인, 장애인으로 잘게 구분해 갈라내고 있죠. 그런데 ‘양림동 소녀’에는 이들 모두가 들어 있어요. 어린이 임영희, 청소년 임영희, 여성 임영희, 노인 임영희, 장애인 임영희의 모습으로요.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을 거예요. 노인뿐 아니라 모든 약자를 대통합시켰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엄마가 아들의 도움을 받고, 온 가족이 힘을 합쳐 만든 영화라는 점도 한몫했을 것 같네요.(웃음)” (임영희 감독) 귀여운 그림체와 담담하게 과거를 되짚는 목소리는 불행한 이 한 명 없는 동화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완성된 영화는 생존 기록에 가깝다. 이 부조화가 관객으로 하여금 여운을 느끼게 한다. 영화 제작자가 되면서 임 감독은 영화 한 편을 봐도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풀이 죽어 있던 어린 시절의 임 감독을 응원하기 위해 직접 옷을 지어줬던 아버지와의 행복한 기억을 다룬 장면에서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 ‘잊고 지냈던 아버지의 사랑이 떠올라서’가 이유였다. ‘양림동 소녀’는 여성 인물이 사회의 갈등과 구조를 해결해나가는 ‘여성 서사’라는 점에서도 호응을 얻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실제 증언,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픽션 작품은 남성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 대부분이다. 또 비극적 참상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애도하고 슬퍼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죄책감을 느끼게끔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 나이가 어리거나 심신 미약자라면 접하기 꺼려할 수 있다. 잔혹한 참상까지 담담하게 귀여운 그림으로 풀어낸 영화 ‘양림동 소녀’는 그 지점을 비껴간다. 덕분에 더 여운이 남고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게 됐다. 우리 사회에는 턱없이 부족한 장애 서사에 대한 갈증도 해소해준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성공으로 한 차례 이목이 집중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장애 극복으로 흐르면 편견만 가중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임 감독은 장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덤덤한 태도를 유지한다. 장애를 한계로 받아들이고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대신, 장애를 가진 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시인이자 화가인 자신이 이번 영화를 통해 영화감독으로도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는 점을 기뻐할 뿐이다. 이웃과 사회, 공동체에 보탬이 되기 위해 아들 오재형 감독은 영화를 만들며 그의 어머니가 국가폭력, 장애의 관점에서 ‘생존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단다. 자라면서 어머니의 생애를 접할 기회는 많았지만, 그림을 매개로 하니 느껴지는 바가 달랐다는 것. 말로 전해 들을 때와는 또 다른 상흔이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영화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지금은 어머니의 생애가 앞으로 오래,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대상 수상작 감독이라면 으레 가질 법한 차기작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두 감독 모두 고개를 저었다. 5월 18일에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맞아 전남 순천시 ‘골목책방 서성이다’에서 영화 상영회 및 GV 행사를 소소히 가졌다. 아직 세상에 한 권뿐인 ‘양림동 소녀’ 그림책은 올해 안에 삽화 위주의 에세이로 정식 출판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어머니의 생애를 널리 알리는 데 굳이 영화 상영 만을 고집할 생각은 없다. 오 감독은 다음 일정이 잡히거든 연락드리겠다며 웃었다. 임영희 감독은 누룽지 같은 노년을 보내고 싶단다.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조각내는 세상이지만, 누렇게 눌어붙는 한이 있어도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노년을 보내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임 감독이 생의 마지막까지 지킬 가치는 단 하나다. ‘내가 이웃과 사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는가?’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지만 여성과 장애인, 공동체 문화를 위한 활동이지 않을까 싶다. 섬초롱 꽃에/ 시원하고 달콤하게 왔어/ 고양이는 웃고/ 까치는 종종거려/ 물 마시는 산/ 춤추는 빗방울/ 나는 단비를 마시며/ 아침을 맞는다 ‘양림동 소녀’ 마지막 장면에서 임영희 감독이 낭독한 시로 글을 마무리한다. 임 감독의 이야기가 수많은 마음을 아침 단비처럼 시원하고 달콤하게 적실 수 있길 기원한다.
- 2023-06-07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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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이 우리 사랑을 갈라놓았을지라도…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단기적으로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신이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더 많이 후회하는 것이 사람이라지? 죽음 앞에서라면 더더욱. 삶의 마지막에는 한 것보다 하지 않은 것에 회한이 든다지 않나. 어느 책에서 읽은 대로, ‘죽을 만큼 마음껏 사랑해볼걸’, ‘조금만 더 일찍 용서할걸’, ‘걱정은 내려놓고 행복을 만끽할걸’, ‘마음을 열고 포용할걸’, ‘한 번뿐인 인생, 열정적으로 살아볼걸’, ‘아등바등 말고 여유를 가지고 살걸’,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면서 살걸’ 등 말이다. 그도 그랬을까? 지난달 죽은 그도 하지 않은 그 무엇을 후회했을까? 무엇보다 우리의 사랑에 솔직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을까? 오늘도 그의 묘지에 다녀왔다. 그는 수목장을 했기 때문에 반나절 공원을 산책하듯, 바람을 쐬듯 발걸음을 하게 된다. 그의 나무는 아직 어린 묘목이다. 가녀린 묘목 밑에서 다 큰 성인이 의지하여 잠자고 있다. 나무 밑에 묻혀 있다 해도 그의 육신이 곧장 나무를 키우는 자양분이 될 수는 없다. 그의 육신의 재는 나무 상자에 담겨 땅속에 있으니 그 육신이 상자와 함께 시나브로 흙이 되어 나무를 키우는 것은 멀고도 먼 훗날의 일일 것이다. 묘목 앞에 나붓이 꿇어앉아 그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는지 모르죠? 알았다고 해도 당신과 나를 죽음이 곧장 갈라놓았을 테지만…. 이제 이렇게 나무 아래 쉬고 있는 당신이나마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어 나는 차라리 지금이 행복하네요.” 단 석 달을 사랑하고 죽을 때까지 그리워한다면 그 사랑은 너무 밑지는 장사 아닌가? 어떤 사랑이든 진실했다면 가슴에, 영혼에 아름다운 상흔을 남긴다는 점에서 모든 사랑은 남는 장사라고들 하지만. 유부남과의 동거 6개월 나는 아내 있는 남자와 6개월을 살았다. 그 사실을 몰랐으니 속아 산 것이다. 나는 그와 결혼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다. 나는 그의 아내로, 그는 나의 남편으로 그렇게 부부처럼 살았다. 투병 중이었으니 결혼식은 할 형편이 못 된다 해도 혼인신고라도 하자는 말조차 못 들은 척할 때 낌새를 느꼈어야 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는데야 어쩌랴. 한 1년 몸을 보양한 후에 결혼식을 올리든가 혼인신고를 하자는 남편(이 아닌 내연남)을 몰아붙일 수는 없지 않나. 나로서는 불안함과 서운함이 없지 않았으나, 내 곁에 그가 있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을까 하고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마흔 살이었던 그는 국토 남단 이름도 모를 섬에 아내와 일곱 살짜리 딸 하나를 둔 한 집안의 가장이자 섬과 가까운 뭍의 초등학교 교사였다. 섬에서 나고 자랐고, 섬 반경 내에서 직업을 구했고, 인근 섬 여자와 결혼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따분함,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권태감이 봄철 아지랑이처럼 사철 피어오르는 삶이었을 것이다. 눈앞이 확 열리는 뭔가가 찾아오지 않는 한, 고만고만하게 살다 고만고만하게 생을 마칠 운명이었을 그에게 숨통은 뜻밖에도 암과 함께 트였다. 그가 폐암에 걸린 것이다. 다른 암도 아니고 폐암이라니! 그것도 공기 청정한 어촌에서 폐암이라니, 그야말로 ‘운명의 암’이라 할 수밖에. 허파에 바람 들듯 병은 그를 서울로 데려왔다. ‘서울 큰 병원’에 입원을 한 것이다. 본격적인 암 치료가 시작되었고, 수술 후 나는 간병인으로 처음 그를 만났다. 환자와 간병인, 환자와 간호사만큼은 아니라 해도 로맨틱한 구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남편, 아니 내연남은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하기야 상대의 환심을 사지 못하는 사기꾼이 있으랴. 결혼 사기극을 벌이는 판에 여자 마음 홀리는 것쯤이야. 버젓이 살아 있는 아내와 딸을 3년 전 배가 뒤집히는 사고로 죽었다고 말하면서,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결국 암에 걸린 것 같다며 내게 동정과 연민을 끌어낸 사람. 퇴원을 해도 아무도 없는 섬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나만 좋다면 학교를 옮기거나, 그게 여의치 않다면 다른 일을 하면서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던 열아홉 살에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동갑내기 남자와 동거하다, 1년도 못 살고 헤어진 후 20년 가까이 혼자 지내고 있었다. 퇴원 후에도 학교를 옮기거나 다른 직장을 구하는 일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나의 단칸방이 신혼방이 되었고 나의 간병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런데 어떻게 6개월이 넘도록 그의 아내가 한 번도 병원을 오거나 그를 찾는 일이 없었을까? 아무리 먼 곳에 산다고 해도. 나중에 들으니 그의 아내는 시어머니 병 수발로 꼼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암 수술을 하는 남편을 어떻게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다. 그 무렵 부부 사이에 석연치 않은 일이 있었던 건 분명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여하간 서울로 올라간 남편과 그간 전화 통화만 하다 6개월이 지나 만나고 보니 나라는 여자가 떡하니 옆에 있었으니 그 아내의 충격은 또 얼마나 컸으랴. 고백도 못 한 연인의 죽음 그 길로 그는 내 곁을 떠났다. 아내의 치마꼬리를 잡고 다시 섬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암에 걸렸으니 망정이지 어떤 아내가 그런 황당한 상황을 그냥 넘어갈 수 있었으랴. 죽었던 남편이 살아온 셈 치겠다며 크게 봐준 것 같았다. 암이 그를 두 번 살렸다. 그럼 나는? 그 여자에게 머리끄덩이 안 잡힌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억울하고 황당하기야 그의 아내 못지않았지만, 그 남자와 사는 동안 소소한 빚도 생겨 억지로라도 마음을 수습하고 생계를 위해 다시 일을 나가야 했다. 다니던 병원에 이미 소문이 돌아 일자리를 옮길 생각에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갔는데, 그 남자가 떠난 침상에 다른 환자가 누워 있었다. 차트를 보니 52세였다. 운명의 내 사랑이, 석달 만에 나를 떠난 사랑이 그렇게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간암 환자였다. 내 눈에도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나를 본 담당 간호사가 일손이 부족하다며 어지간하면 병원에 그냥 있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 주저앉았지만 전의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필요한 접촉 외에는 거리를 두고 지냈다. 공교롭게도 그 또한 찾아오는 가족이 아무도 없다는 것에 더욱 경계심을 갖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내게 ‘마지막 부탁’을 해왔다. 마지막 부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후 그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인데, 거꾸로 우리 사이는 그 일을 계기로 급격히 가까워졌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20년 동안 만나지 못한 딸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고 했다. 그의 구술을 내가 받아쓰는 형식의 편지였다. 신혼 때부터 삐걱대던 아내와 이혼한 후 세 살이던 딸을 혼자 키우던 어느 날, 퇴근해 돌아와 보니 아내가 딸을 데려갔더라고. 작정하고 데려갔으니 연락이 닿지 않아 애가 탔지만,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어 엄마가 키우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며 이 악물고 포기했다고. 하지만 양육비라도 보내주려고 간간이 수소문을 했지만 도통 불통이었고, 그는 그대로 해외 취업을 나간 사이 애 엄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혼한 아내가 죽은 것은 딸을 데리고 간 지 얼마 안 돼서였고, 그 길로 딸은 해외로 입양되었다고 했다. 아빠가 버젓이 있는데 어떻게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이라고. 그는 그대로 사정이 있었는 데다 그 모든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터라, 현재 딸과의 재회를 위해 입양기관을 통해 절차를 밟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의 병이 깊어지고 있어 딸을 못 본 채 세상을 떠날 것에 대비해 편지를 써두고 싶다고 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가까워졌다. 기운이 달려 몇 차례 편지를 나눠 쓰는 사이, 내 쪽에서 급격히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보육원 출신인 내 처지와 그의 딸이 겹쳐졌고, 평생 외로움과 벗 삼고 살아온 나와 그가 한마음이 된 듯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기에 내게 거리낌 없이 다가오지 못했고, 그것이 그를 향한 내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딸에게 주는 그의 편지와 마음은 얼굴도 모르는 내 부모의 것인 것만 같아 나는 그를 통해 부성을 느꼈다. 그가 딸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얼마나 그리워했으며, 얼마나 미안해했는지 절절한 그의 마음을 한자 한자 써 내려가면서 나는 그의 딸이 되어 그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는 마지막 석 달을 나로 인해 행복했고, 나는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는 결국 딸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벌 받을 각오로 말하건대 나는 내심 안도했다. 그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고 그와 나의 사랑이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편지를 간직하고 있고, 그를 대신해 그의 딸과의 접촉을 이제 시도하려고 한다.
- 2023-05-30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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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크 투어리즘, 그곳을 찾는 이유
-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댈러스. 이날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발생한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은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진범이 따로 있는지, 배후에 누가 있는지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궁금증을 마음에 담은 관광객들은 아직도 이곳을 찾는다. 암살범인 오스왈드가 저격했던 딜리 플라자의 그 자리는 ‘6층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이 현상을 관찰한 영국의 연구자들은 ‘다크 투어리즘’이란 개념을 착안해냈다. 다크 투어리즘은 재난이나 역사적으로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반성과 교훈을 얻는 형태의 여행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역사교훈 여행’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크 투어리즘이 주창된 초창기에는 위험한 장소를 탐사한다는 인식이 많았다. 체르노빌 같은 핵 재난 지역이나 국제적인 분쟁 지역 인근에 접근하는 형태까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익히고, 인간의 잔혹함이나 고통에 대해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스릴과 모험을 추구하는 이들이 몰리면서, 희생자들의 고통을 재밋거리로 희화화한다는 비난도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내전으로 홍역을 앓은 시리아다. 인구의 절반이 전쟁을 피해 나라를 떠난 이곳의 전흔을 일부 여행사들이 ‘볼거리’로 홍보했다가 비난의 화살을 맞았다. 관광자원 활성화 수단으로 활용 최근에는 다크 투어리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변화하고 있다. 다크 투어리즘을 지역의 관광자원을 살리는 가치 부여 과정, 즉 스토리텔링 수단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기념관 등 관련 시설의 정비를 통해 ‘여순사건’을 정확히 알리면서 관광자원으로 삼은 여수시가 대표적이다. 여수시는 2021년부터 ‘여순사건 다크 투어리즘 및 남해안 명품 전망 공간 조성 등 관광자원개발 사업’을 통해 관광 상품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의 아픔으로 남아 있는 역사적 사건이나 참사가 일어난 장소를 묻고 잊어버리려 애쓰기보다는 계속해서 애도하며 과거를 이해하고 반성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선영 홍익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과거 우리 사회는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장소는 철거해버리고 없애버리는 것, 잊어버리는 것이 더 옳다는 관념이 지배했지만, 최근에는 다크 투어리즘을 통해 반면교사의 계기로 삼고, 지속 가능한 관광 대상으로 만들어 관심 있는 여행자들이 끊이지 않도록 하는 순기능에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크 투어리즘은 관광객에게만 가치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다크 투어리즘 목적지의 보존과 발전에도 기여한다. 관광 수입이나 자원봉사를 통해 장소 복원과 유지 비용을 지원하거나, 사회적인 인식과 관심을 높여서 장소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전파하고, 희생자들을 지원하는 역할까지 맡는다. 가장 대표적인 장소는 제주4·3평화공원이다. 제주 4·3사건은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통해 진상조사가 이뤄졌음에도 최근까지 일부 정치세력을 통해 왜곡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제주4.3평화공원은 희생자 유족의 트라우마를 회복하고,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리는 중심지이자 관광지로 기능하고 있다. 다크 투어리즘을 통해 나타난 이러한 이념적 갈등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호기심을 더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국가가 베트남이다. 호찌민의 독립궁이나 메콩강의 구찌터널 등 그곳의 다크 투어리즘 관광지들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국이나 우리나라 입장에선 패전의 기록인 셈이지만, 베트남인들에게는 승전의 기록이자 전리품으로 남아 있다. 승전국 입장에서 작성된 현장의 기록을 읽는 경험은 미국 관점의 역사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생경한 경험이 된다. 지나친 엄숙주의 경계해야 특별한 장소를 찾는 만큼, 현장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도 특별한 태도가 필요할까? 전문가들은 단순한 여가활동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갖춰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선영 교수는 “당초 목적이 비극의 역사를 느끼고 다시 생각하기 위해 찾는 여행이기 때문에 가볍게 즐기기보다는 진지하고 숙연해질 필요는 있지만, 말 그대로 관광의 한 과정이므로 지나친 엄숙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고 조언했다.
- 2023-05-01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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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치 못한 순간에 '쾅'… 머릿속 숨은 지뢰, 트리거
- 올해 10월, 대국민의 애도로 번진 ‘이태원 참사’가 있었다. 현장에 있지 않았더라도 다수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사건과 이별의 기억은 쉽게 잊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한 사건이나 경험으로 트라우마(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경험하기도 한다. 트라우마는 ‘트리거’에 의한 것이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트리거에 눌렸다’고 표현한다. 방아쇠의 역할이 파도가 되다 넷플릭스 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13 Reasons Why)’가 한때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이 드라마에는 자살, 중독성 물질 남용, 성폭력 등의 장면이 나온다. 미국 전국어린이병원(NCH) 자살연구가 제프 브리지 박사는 해당 드라마의 영향이 크다고 발표했다. 첫 번째 시리즈가 방영된 2017년에는 한 달간 190명의 청소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논란이 불거지자, 자살 장면은 삭제됐다. 일찍이 생을 마감한 청소년들은 부정적인 감정인 트라우마가 먼저 일어났을 것으로 분석된다. 이 트라우마의 촉발제가 바로 ‘트리거’다. 트리거는 개인이 겪는 한 사건의 충격에 따라 생기고, 정신적 트라우마와 함께 붙어 다닌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사냥개에 물렸다고 치자. 이후에 지나가는 강아지가 짖는 것만 봐도 두려움에 떨게 된다. 사냥개에 물렸던 기억이 재생되면서 트라우마가 형성되는데, 강아지가 짖는 것이 A에게 트리거 역할을 한 셈이다. 트라우마를 일으킬 우려가 있는 작품의 경우 ‘트리거 워닝(Trigger warning)’을 표기해야 한다. 트리거 워닝은 해당 콘텐츠가 불건전한 소재를 담고 있어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경고문이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도 이슈가 생기자, 뒤늦게 오프닝에 ‘트리거 워닝’ 문구를 삽입했다. 트리거 워닝은 갑각류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음을 표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개인에 따라 해당 문구를 보고 시청을 중단하는 등 정신적 피해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간접적 경험도 심각한 트라우마 일으켜 전쟁, 자연재해 등의 사회적으로 심각한 사건을 통해서도 트라우마가 일어나기 쉽다. ‘한국임상심리학회’는 개인이 갑작스러운 사고나 재난을 경험하면 불면증, 피로감 등의 신체적 반응이 나타나고 심리적으로는 불안, 공포, 죄책감 등이 나타난다고 했다. 사회적으로 인한 트리거가 개인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이태원 참사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중 하나로 ‘여과 없이 사고 당시의 현장 영상과 사진을 퍼뜨리는 행동을 중단해야’한다고 말했다. ‘고인과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2차, 3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이태원 참사 당시에도, 현장을 담아낸 영상을 본 것만으로 정신적 충격을 호소한 사람이 많았다. 화면 속에 너무나 생생했던 현장이 심리적 트라우마를 유발한 것이다. 트라우마는 한 번 머릿속에 틀어박히면 떨쳐내기 어렵다. 만약 안 좋은 기억이 자신을 괴롭히고 일상을 방해한다면 반드시 주변에 도움을 청해야 한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고 있다. ‘국가트라우마센터’는 예기치 못한 재난과 사고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에게 치료 프로그램, 정신건강 교육 등을 진행한다. 홈페이지를 접속하면 더욱 상세한 정보를 볼 수 있다. 긍정적 의미의 트리거 트리거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세계 최고의 리더십 전문가라고 불리는 마셜 골드스미스는 ‘트리거’(Triggers)를 집필했다. 책의 주제는 트리거를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심리적 자극을 트리거라고 본다. 목표를 이루고 변화하고 싶은 이들에게 다양한 방법을 알려준다. 골드스미스는 하루 질문 22가지를 만들어 자신이 최선을 다했는지 숫자로 1부터 10까지 점수를 매긴다. 그러고 나서 각 22가지 질문마다 일주일 평균 점수를 낸다고 한다. 이 책의 많은 독자가 일의 효율성과 자신의 행동 점검에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 2022-12-05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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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이태원 참사,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 곁에 선다는 것
- 허휴정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한 편의 칼럼을 보내왔다. 지난 29일 있었던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희생자의 주변인들과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허휴정 교수는 본지의 ‘브라보 헬스콘서트’ 행사에 참여해 독자들에게 갱년기 이후의 정신건강과 우울증에 대해 조언한 바 있다. “내가 조금만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그 친구가 죽지 않았을까요?” 그녀는 여행 중에 교통사고로 친한 친구를 잃었다. 사고 이후, 그녀의 머리 속은 마치 고장 난 라디오처럼 그날 하지 말았어야 했던 행동과 했어야 했던 행동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사고가 난 지 십 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생존자의 죄책감(Survivor’s guilt)’으로 고통받고 있다. 지난 30일 새벽 이태원 참사에 대한 속보를 보며 나는 진료실에서 만났던 그녀를 떠올렸다. 소중한 친구를 잃어버린 사람, 정신없이 몇 시간 동안 CPR(심폐소생술)을 하고도 죽음을 허망하게 목도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대원들과 시민들, 그저 멍한 채로 얼어붙어 꼼짝달싹하지 못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들도 그녀처럼 그날 하지 말았어야 했던 행동과 했어야 했던 행동들을 수없이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생존자의 죄책감은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The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에서도 트라우마 이후에 나타날 수 있는 주요한 증상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어떤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자신이 살아남은 것 자체에 죄책감을 느끼고, 누군가를 구하지 못한 것을 지나치게 자책하기도 한다. 이러한 죄책감은 트라우마로부터의 회복에 큰 방해가 되기도 하고, 때로 자살과 같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지속적인 심리 지원과 돌봄이 매우 중요한 이유다. 생존자의 죄책감으로 괴로운 사람들에게 누군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는 평생을 괴롭히기도 한다. “왜 하필 거기에 갔나”, “철없이 놀다 죽은 것을 애도해야 하나”, “스스로 선택해서 간 것인데”라는 등의 댓글은 벼랑 끝에 있는 생존자들을 더 큰 고통의 나락으로 내몬다. 누구나 살다 보면 결과가 좋지 않았던 선택을 할 수 있고, 삶과 죽음이 내 능력 밖의 일임을 절감하는 상황을 마주하곤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기치 않은 죽음 앞에 더 신중해지고,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통계에 의하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살아가면서 트라우마라고 불릴만한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기에 누구나 살면서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예상하지 못한 죽음과 슬픔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각자도생의 방법만으로는 도저히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 전체가 트라우마로부터 회복하는 길이 무엇인지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 곁에 진정으로 같이 서있는 법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결국 공감 어린 연대만이 우리를 살아남게 할 것이다. 살아남아 자책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우리가 곁에서 함께 있겠다고.”
- 2022-11-0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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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생활의 유일한 탈출구는 시골이다!
- 초록으로 꽉 찬 산기슭이다. 널따란 농장 사방에 온갖 나무들이 길차게 자라 수려하다. 터의 가장자리로는 맑은 도랑물이 흐른다. 살짝 높은 지대다. 그래 세찬 골바람이 농장을 후려칠 일이 잦을 것 같지만 산의 품에 새 둥지처럼 깃들어 끄떡없다. 경관도 안전성도 결함이 없는 입지다. 적막감마저 깊으니 온갖 꿍꿍이와 아귀다툼으로 소란한 속세를 잊고 오붓하게 은거할 만한 피안(彼岸). 그러나 농장주 김기완(75, 평달교육농장)은 은거에 관심 없다. 가만히 눌러앉아 ‘멍 때리기’로 소일하는 건 도대체 그의 적성에 맞지 않다. 차라리 일벌레다. 해 뜨기 전부터 농장 일을 시작하는 식의 습성을 고수해 볼 것 많고 즐길 것 많은 체험교육농장을 꾸려 끌고 왔으니까. 김기완이 서울을 벗어나 이곳 충북 옥천군 산골짝에서 새로운 삶을 구가한 지 어언 20여 년. 귀농 왕고참이다. 그러니 얻은 경험이 많다. 덩달아 견해도 많다. 그가 지닌 견해의 요점을 미리 말하자면, 귀농이든 귀촌이든 귀향이든 시골에 넘실거리는 자연과 깊은 친선 관계를 맺을수록 삶의 품질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즉 그는 자연과 더불어 여생을 한바탕 재미있게 살아보겠다는 용무를 가지고 고향 산골로 이주했던 거다. 그리고 그 용무를 이미 완수했다는 게 그의 자평이다. 김기완은 서울에서 건축자재상을 해 기반을 야무지게 다졌다. 고향에서의 성장기는 곤궁하기 그지없었다지. 또래 연배들이 흔히 그랬듯 생일에나 겨우 미역국에 쌀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 얄궂은 운명의 횡포에 저항하기 위해 그는 15세에 상경, 닥치는 대로 일을 해 밥을 벌었다. 도둑질 말고는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지경으로 서울이라는 정글을 바지런히 누빈 결과 중년 즈음엔 어엿한 자수성가의 본을 이룰 수 있었다. 취미 하나 가질 겨를 없이, 돈 한 푼 허투루 쓴 일 없이 오직 경제적 기반을 잡기 위해 천신만고와 맞붙어 싸운 덕분이었다. 피땀을 쏟아 목표로 삼았던 산정에 올랐던 것. 산꼭대기에 오르면 비로소 산 아래가 훤히 보인다. 징글징글한 가난의 기억이 싫어 아예 잊었거나 잊어버리고 싶었던 고향의 산천과 풍정이 사물사물 가슴으로 스며든다. 그렇게 향수가 소리 소문 없이 그를 방문했다. 몹시 지독한 그리움으로 끙끙 앓았던 것 같다. 이제 가야 할 곳은 고향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마치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듯이 그는 흔쾌히 낙향했다. “귀향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거라는 얘기를 하더라. 출세한 사람은 제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현실을 떠나지 못하고, 망한 사람은 창피해서 못 내려간다는 것이다. 나는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 진달래꽃을 따 먹고 도랑에서 가재를 잡았던 고향이 너무도 그리웠으니까. 언젠가는 내려가겠어, 기어이 고향에서 살겠어, 그렇게 오랫동안 벼른 끝에 드디어 귀향했던 거다.” 객지보다 오히려 심적 부담이 클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가급적 고향을 피해 귀농하는 게 좋다는 얘기도 있던데. “처신하기 나름이다. 나도 처음엔 텃세 비슷한 걸 겪었다. 그러나 아량으로 포용하면 마찰이 생길 리 없거니와, 아하 이게 바로 고향 좋다는 거구나, 그렇게 안도할 만한 일은 더 많이 벌어진다.” 처음엔 혼자 내려왔다지? 부인은 서울에 머물고. 귀향 문제를 놓고 부부간에 이견이 있었나? “한창 일할 54세에 무슨 귀향? 아내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 이른 은퇴라 봤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일에서 스스로 퇴직시키고 귀향을 결심한 터라 혼자서라도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으로서 할 역할을 다했는데 망설일 게 뭐란 말인가. 게다가 뭔가에 수틀려 ‘자연인’처럼 살겠다는 것도 아니니 보류할 이유가 없었다.” ‘나 홀로 귀농’으로 부부 사이에 금이 가는 경우도 있더라. “난 성격상 매사 치밀하게 숙고해서 최선책을 찾은 뒤에 움직인다. 아내를 전적으로 존중하는 버릇도 있다. 따라서 아내와 억지 동행을 하는 대신 일단 내가 먼저 내려가서 아내를 맞이할 준비를 해두겠다는 쪽으로 일을 구상했다. 나 먼저 내려가겠으니 당신은 마음 내킬 때 천천히 내려오시오! 아내에게 선택권을 준 것이다.” 그토록 합리적인 처신을 하다니. 그렇더라도 부인이 마침내 내려올 거라 장담하긴 어려웠겠지? 세상의 아내들 대부분이 시골 생활에 호감을 갖지 않으니까. “아내의 마음에 쏙 들게 터전을 가꾸는 게 관건이라 봤다. 이건 새들의 행태에서 얻은 힌트다. 어느 날 TV에 수컷 새가 암컷 새를 유혹하기 위해 근사한 둥지를 짓는 장면이 나오더라. 죽기 살기로 멋진 집을 지어 마침내 마음에 드는 암컷을 짝으로 끌어들이더라고. 아, 바로 저거다! 농장을 제대로 꾸며놓으면 아내가 제 발로 내려올 거라는 생각을 한 건데 이건 적중했다.(웃음)” 화재로 공들여 지은 집을 잃기도 김기완이 귀향을 해 홀로 산골에서 보낸 세월은 자그마치 6년. 고독한 독신남도 아니면서, 끈 떨어진 홀아비도 아니면서 6년을 외롭게 정진했다. 정진? 아내를 한시 빨리 불러들이겠다는 생각 하나에 쏠린 채 오로지 농장 구축에 전념했으니 말 그대로 정진이며, 심지어 득도를 목표로 삼은 고행에 맞먹을 고달픈 행진이었을 게다. 술이나 담배는 애당초 입에 붙이질 않았으니 근로가 주 종목이었다. 터는 넓어도 겁나게 넓어 처음 사들인 1만 평에 나중에 사들인 것까지 도합 3만 5000평이나 된다. 허리 휠 신역이 자심했을 테다. 그러나 즐겁더란다. 매번 성취감을 맛보며 피곤하지 않더란다. 허풍이 아닌 게, 그는 스스로 기꺼이 뛰어든 일엔 뭐든 툴툴거리거나 남몰래 돌아앉아 한숨을 토해내는 나약한 성향의 소유자가 아니다. 요컨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처럼 행복한 게 없다’는 인생의 공리를 그는 몸소 실행하는 기쁨을 맛봤던 것 같다. 그는 결국 체험교육농장의 틀을 완비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아내가 합류했다. 아내를 각별히 사로잡은 건 김기완이 손수 밑그림을 그려 지은 살림집이었다. “아내를 위해 지은 크고 보기 좋은 캐나다식 2층 목조주택이었다. 차를 좋아하는 아내를 배려해 다실까지 만들었다. 암컷 새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의도가 가미된 집이었다.(웃음) 나중에 그 집이 누전 화재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지만.” 다시 지은 집 역시 2층으로 매우 크다. 굳이 커다란 집을 지은 이유가 있겠지? “자식들이나 친지들이 방문할 경우 편히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새집은 다시는 불이 나지 않게끔 나름의 대안을 가지고 지었다. 건물 골조를 불에 약한 목재 대신 콘크리트로 세웠고, 외벽도 불에 강한 벽돌을 마감재로 썼다. 지붕 역시 구리 자재를 도입해 화재를 단속하고자 했다. 팔각형 구조로 방들을 배치한 것도 만약의 화재 대비에 가장 뛰어나다고 판단해서였다. 이 모든 구조는 화재의 충격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싶어 동원한 방책이다.” 교육농장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 “당시 농업의 새로운 트렌드가 교육농장이었다. 주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갖가지 농사 체험과 놀이 프로그램을 마련해 운영하는 게 교육농장이다. 이건 부부가 함께 즐기며 일할 수 있는 괜찮은 분야라 판단했다. 하지만 운영이 힘들더라. 관내에 폐교되는 학교가 속출하고,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지금까지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다.”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해선 방향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닐까? “그냥 이대로 갈 참이다. 난 귀농을 통해 농업 현실을 다각도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귀농으로, 농사로 돈 벌기 어렵다는 걸 주변 농가들의 실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거다. 가끔 귀농 강의를 할 때면 빼먹지 않고 하는 얘기가 있다. 돈벌이를 목적으로 삼은 귀농은 위험하다는 걸, 돈을 벌려면 도시가 훨씬 낫다는 걸 말해줘야 하는 것이지.” 현실이 그럼에도 당신은 태연하다. “난 서울에서 실로 열심히 일했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는 신념 하나로 살았다. 덕분에 먹고사는 데엔 전혀 지장이 없다. 한편 아이들과 어울리는 농장 생활은 본질적으로 가치가 있고 재미가 있다. 운영은 부실하지만 불만이나 불안은 없다. 농장 잔디밭에서 깔깔거리며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보석처럼 아름답더라. 뜰에 심은 나무들이 자라는 걸 바라보며 자연의 순리와 교감하는 순간 역시 행복하다. 여기에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래서 그냥 이대로 지속하기로 했다.” 어라! 개와 멧돼지가 어울리더라 손에 쥔 것 없이 귀농했다면, 경제적 불확실성이 컸다면 김기완의 양상은 달랐으리라. 다시 말해 그는 충분히 자족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농업으로 더 이상의 부를 확장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냉철한 인식도 현실을 긍정하게 하는 배경이 됐을 테다. 즉 그는 오랫동안 삶의 주된 이슈였던 경제문제에서 벗어나, 이젠 자신과 아내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는 쪽으로 날랜 머리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막대한 매력 덩어리를 내면에 들여놓을 경우 행복을 거머쥐기가 더 쉽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단언하건대 인간관계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도시 생활의 유일한 탈출구는 시골이다. 정신마저 피폐해지는 과도한 인적 관계에서 자연과의 관계로 무게중심을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괴롭고 복잡한 삶에서 해방돼 자연과 소통하며, 생명 가진 것들을 존중하면서 한적하게 지내는 일보다 다행스러운 게 있을까?” 이른바 태평농법으로 농사를 한다지? 이건 자연을 존중하는 방식의 하나인가? “사람과 농작물이 싸우지 않고 서로 태평하게 공존하는 게 옳다는 생각에서 해온 농법이다. 농장에서 문득문득 깨닫는 게 많다. 내가 멧돼지를 퇴치하기 위해 개를 기른다. 그런데 가만 보니 개와 멧돼지가 어울려 놀더라고. 이거 재미있지 않나? 아, 저게 자연의 이치구나. 멧돼지 역시 원래 이 터전의 주민이었구나. 그런 값진 성찰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참다운 진수는 노경(老境)에 구현된다는 얘기가 있다. 황혼길을 걸어가는 당신의 초상이 어떤 것이길 바라나? “문전박대를 당하더라도 술 한잔 마시고 시 한 수 읊으며 홀연히 떠나가는 김삿갓의 풍모를 선망한다. 이건 욕심을 다 내려놔야 가능한 경지지만.” 그의 얘기는 자주 럭비공처럼 튀어 핵심에서 이탈했다. 이 역시 그가 보유한 생태 경관일 텐데, 반짝이는 뼈가 들어 있는 말이 드물지 않아 지루하진 않았다. ◆김기완이 주는 귀농 Tip◆ •농토를 구입할 경우 2년쯤은 벼르며 판단하라. 값이 싸다고 덜컥 샀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정이 가는 농토를 구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내 공간이 된다. •맹지 매물을 소개하면서 ‘차후 잘 협의하면 길을 낼 수 있다’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을 믿지 마라. 매입 후 곤욕을 치르기 십상이니까. •귀농 이전에 밑그림을 충실하게 구상하자. 목표 설정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 있어서다. •가급적 전답, 산, 냇물과 동시에 접한 토지를 사라. 그래야 활용도와 생산성이 높아진다. •국유림과 접한 농토는 이상적이다. 불필요한 개발 행위가 원천적으로 차단돼 한결 안정적인 농사를 할 수 있어서다.
- 2022-10-25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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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락사 희망자와의 동행이 남긴 삶의 여행기
- 신아연 작가 조력사로 생을 마감하려는 사람과 스위스를 함께 가줄 수 있는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처한다면 본인도 조력사를 택하겠는가? 지난 8월, 두 가지 난제에 대한 대답을 담은 책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가 출간되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안락사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오가길 바라며 용기 있게 나선 신아연(60) 작가에게 되물었다. ‘왜? 어째서 안락사를 반대하는가?’ 2021년 7월 25일. 신아연 작가는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20년 전부터 그의 글을 즐겨 봤다는 얼굴 모를 애독자가 함께 스위스로 떠나줄 수 있겠냐고 정중하게 물어왔다. 비행기 삯부터 스위스에서 머물 호텔의 숙박 비용을 포함해 여정에 드는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과 함께. 그러나 제안에서 정작 파격적인 부분은 따로 있었다. 스위스행의 목적이 ‘조력사’였다는 점이다. 죽음의 여정이 일깨운 삶의 소중함 조력사는 안락사와 함께 인위적으로 생명을 중단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안락사는 타인에 의한 생명 중단으로, 의사가 약물을 투여하는 적극적 안락사와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로 나뉜다. 조력사의 경우 외부의 도움을 받되 스스로 치사량의 약물을 마시거나 주사를 놓는 자살 행위에 가깝다. 화두를 던지고 떠난 고인의 죽음은 조력사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8년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으로 소극적 안락사까지만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다. 섣불리 따라가도 되는 것일까. 국내에선 허가되지 않은 죽음을 방조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신 작가는 스위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스위스에 도착해서도, 죽음을 결심한 이와 함께 보낸 2박 3일 동안에도 고뇌는 계속됐다. 신 작가는 조력사 시행 직전까지 고인의 가족과 함께 고인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애썼다. 책 전반부에 일기처럼 전개되는 조력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독자까지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든다. 도리어 시종일관 마음 편해 보였던 건 죽음을 앞둔 고인뿐이었다. “고인에게 동행을 제안받았을 때부터 악몽에 시달렸어요. 직전까지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죠. 지인들도 모두 가지 말라고 말렸어요. 조력사 과정을 지켜보는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게 될까봐, 두렵고 무거운 기억으로만 남게 될까봐 걱정하는 마음이었죠.” 밸브를 돌림으로써 생을 마감하는 인간을 지켜보는 일은 실로 기가 막힌 경험이었다. 아직도 어젯밤 일처럼 생생해서 가슴팍에 통증을 느낄 정도라고.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행운으로 받아들인다. 주변 사람들과 스스로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 강렬한 경험은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낳았다. 죽음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잘 살기’만 하면 죽음을 그다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건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음은 결코 멀리 있지 않고, 죽음과 삶이 동전의 양면처럼 딱 붙어 닮았다는 점도 깨달았죠. 그러니 죽음에는 삶의 모양이 그대로 반영되리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아끼며 진실된 삶을 살아야 하고요.” 존엄한 선택? 되레 사회적 약자 내칠지도 고인이 원하던 대로, 신 작가는 고인과의 일을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출간 직후부터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다. 온라인 매체 ‘오마이뉴스’에 그가 직접 기고한 책 소개 글은 포털 사이트 네이버 메인에 소개돼 15만 회에 육박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해당 글과 카페나 블로그 등에 공유된 글까지 합쳐 700개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댓글 수도 놀랍지만, 신 작가는 거의 대부분의 댓글이 안락사 찬성으로 입을 모으고 있어 더욱 놀랐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 10명 중 8명이 안락사 허용을 원한다고 하던데, 제가 받은 댓글로만 보면 9.9명은 안락사 허용을 외치는 것 같더군요. 한 사안에 대해 이렇게까지 의견이 일치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기 그지없었습니다. 놀라운 한편으로 우려스럽기도 해요. 삶과 죽음을 논하는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는 만장일치가 아니라 적절한 비율로 찬성과 반대가 나뉘어야 옳다고 생각하거든요.” 안락사 찬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오는 이유를 그 역시 모르는 바 아니다.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기대수명 자체는 늘고 있지만 삶의 질은 장담할 수 없는 세상이다. 이로 인한 걱정과 우려, 더 나아가 불안과 공포가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신 작가의 생각이다. 무의미한 생명 연장으로 인해 받을 육체적·정신적 고통, 그에 따른 의료 비용 부담 등이 두려워 안락사 시행을 찬성한다는 거다.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안락사 시행 문제는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죽음에 대해 신중히 고민하고, 나아가 안락사 시행 반대 입장에 섰으면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에서다. 인간의 존엄성과 삶에 대해 선택할 권리를 위한다지만, 허용 기준이 모호해 악용될까 두려운 마음도 있다. “이미 안락사를 허용한 네덜란드에서는 가정을 가진 41세의 사업가가 불안장애와 우울증,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안락사를 선택해 사회에 충격을 안긴 바 있어요. ‘네덜란드의 안락사 법이 알코올 중독자를 죽이기 위해 쓰였다’며 비난이 들끓었죠. 캐나다에서도 최근 ‘만성질환으로 돈을 벌지 못하고 사회에서 멸시를 받고 있기에 죽기를 원한다’며 신청한 존엄사가 승인되어 논란이 일었다고 해요. 안락사가 사회적 약자를 제도적 죽음으로 몰아가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거죠. 우리나라라고 상황이 다를까요?” 다른 건 없다,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안락사 시행에 확고한 반대 입장에 선 그는 이 책을 계기로 안락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공론의 장이 펼쳐지길 기대하고 있다. 그가 안락사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건 호스피스 케어다. 말기 환자와 가족의 심리적·사회적 고통을 완화시켜 삶의 질을 향상하는 호스피스 케어를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로 경제적·사회적 비용을 낭비하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건이 된다면 인세의 일정 부분을 호스피스 시설 확충에 사용하고픈 마음도 있다.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부분도 있다. 조력사 현장에 동행한 사실이 알려진 후 신 작가는 세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나이와 안락사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각기 다른 세 사람이 고인과 같은 부탁을 해온 것이다. 그중 두 명은 이미 스위스 안락사 시행 단체에 가입한 상태였다. 이전처럼 결심을 바꾸려고 발 동동 구르는 대신, 그는 이들과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지금은 친구 사이에 하듯, 카카오톡 메시지나 이메일로 안부를 묻는다. 아프지 않은 사람이 아픈 사람에게 어떤 말을 건넨다는 행위 자체가 섣부를 수 있어 매사 조심스럽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메일 한 통, 메시지 한 줄만큼의 용기를 내고 있다. 신 작가는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웰빙’(Well-being)한다면 ‘웰다잉’(Well-dying)도 저절로 따라오리라고 믿는다. 여전히 죽음이 두렵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낯선 이들을 위해, 고인이 생전 신 작가에게 남긴 이야기 중 일부를 옮겨 적는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조력사를 앞두고 있는 저 또한 평소와 다른 무엇을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그럴 수 없네요. 그저 하던 대로의 일상 그 이상은 없더군요. 어느 책에서 시한부 젊은 주부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고 싶다고 대답하고, 그 소망을 이룬 며칠 후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주부로 살면서 밥하고 살림하는 일이 기쁘고 즐겁기만 했을 리 없을 텐데,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어쩌면 지겹기조차 한 그 일상이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 됩니다. 이 점에서 저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 2022-10-12 0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