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깊숙한 곳에 있는 셔츠, 철 지난 바지도 얼마든지 멋지게 입을 수 있다. 10년, 20년 뒤를 꿈꾸게 하는 ‘취향 저격’ 멋쟁이를 발견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좋다. 취향 앞에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면, 노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김동현 사진작가의 사진과 감상의 일부를 옮겨 싣는다. 네 번째 주제는 ‘액세서리’다.
1 ‘낙원상가 아버님’. 꽃과 반짝이는 버클, 그리고 직접 만든 듯한 인형이 달린 모자까지. 그 모든 것의 조화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사진 요청에 아버님은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해주셨다. 나중에 내 책을 본 독자를 통해 아버님이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쩐지….
2 ‘구찌 아버님’. 티셔츠뿐만 아니라 목걸이, 벨트 모두 명품 브랜드 구찌 제품이다. 젊은이 같은 아버님의 패션 센스가 돋보인다.
3 ‘블링블링 아버님’. 화려한 액세서리 때문에 아버님의 손으로 시선이 집중됐다. 열 손가락에 전부 착용한 각기 다른 모양의 반지. 그 많은 반지는 어디서 구하셨을까. 손목에 찬 진주알의 팔찌도 강렬하다.
4 ‘해병대 아버님’. 한국인의 자긍심이 느껴지는 패션이다. 해병대 모자와 베스트를 빛나게 하는 동양적인 패턴의 팔찌와 넥타이핀이 눈길을 끈다.
5 ‘개량한복 어머님’. 개량한복을 캐주얼하게 소화하신 어머님. 옥으로 된 팔찌마저 트렌디해 보인다.
진공관 앰프, 턴테이블, 카세트테이프…. 지금은 자주 쓰이지 않는 음향기기의 가치를 되살리고, 그때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던 아날로그의 향취를 전하는 곳이 있다.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2층 ‘수리수리협동조합’이다. 2017년 낙후한 세운상가를 되살리는 ‘다시·세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설립된 수리수리협동조합은 ‘추억을 고쳐드립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연식이 오래돼 고장 난 음향기기를 수리한다. 겉보기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 같은 기기도 이승근(75) 수리수리협동조합 이사장의 손길을 거치면 다시 태어난다. 아날로그 음악과 기계가 좋아 55년째 이곳에서 오래된 음향기기를 고치고 있다는 이 이사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언제부터 음향기기에 관심을 가지셨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아버지랑 청계천 길을 따라 자주 걸어 다녔어요. 길가에 노점 많았는데, 대부분 ‘하꼬방’(판잣집)이라 어수룩했죠. 거기에 있는 음향 시스템을 구경하는데, 신기하더라고요. 소리가 나니까. 길가에 떨어진 거 주워서 장난도 해보고 놀았죠. 그런 순간들이 동기가 돼서 전기·전자 계통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어요. 그 후 1964년쯤 고등학교 막 졸업하고 이곳에 왔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예요.
Q. 기기 수리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나요?
먼저 홈페이지에 문의를 해요. 문의는 한 달에 100건 정도, 혹은 그 이상 들어올 때도 있어요. 근데 기술자라고 그걸 다 고칠 수 있는 건 아녜요. 수리가 불가능한 것들도 있죠. 그중에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예요. 그래도 한 60~70% 정도는 다 고쳐요. 기간이나 가격은 기계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보통은 10일 이상 걸린다고 보면 돼요. 지방에 사는 분들은 택배로도 많이 보내요.
Q. 수리를 요청하는 이들의 연령대는요?
빈티지 오디오를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이에요. 60대나 70대 정도죠. 나하고 연배가 비슷해요. 반대로 젊은 친구들 중에서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젊었을 때 애지중지하던 유품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아요. 부모님 생각이 나니까 잘 안 되고 고장이 났어도 버리기가 아까운 거죠. 그러다가 그 기기로 음악을 들어보니, 본인들이 듣던 거랑 또 다른 느낌이 드나 봐요. 그래서 더 좋아하고 신기해하는 것 같아요. 이것도 복고 열풍 중 하나라고 해야 할까요.
Q. 한층 위에 있는 음악 감상실도 운영하신다고요.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요?
‘다시·세운’ 프로젝트 준비할 때 무얼 해볼까 하다가, 옛날에 다니던 음악 감상실이 생각났어요. 그땐 여기 종로 바닥에 음악 감상실이 많았거든요. 뒤시네, 세시봉, 카네기, 메트로 이런 곳들이 다 전문 음악 감상실이었죠. 그 후에 발전된 형태가 다방이고요. 젊었을 땐 반 정도 미쳐있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고, 그 이후에도 음향기기 만지는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옛 음악 감상실을 표방한 청음실을 운영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음악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와서 쉬다 가라고 만든 거죠.
Q. 아날로그 음악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빈티지 오디오만의 감성이 있어요. 디지털 음원은 소리가 깨끗하긴 해도 날카롭거든요. 반면 빈티지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는 편안하고 구수하죠. 무엇보다 소장 가치가 있잖아요. 옛날 생각은 나는데, 옛날 것들은 자꾸만 사라지니까. 과거는 흘러갔어도 지워지는 건 아니잖아요. 좋고 나쁨을 떠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으니 옛것을 애호하게 되는 거죠.
Q. 동년배 시니어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요?
해리 제임스의 ‘잠자는 호수’, 앤디 윌리엄스의 ‘문 리버’를 좋아해요. 해리 제임스는 몇 안 되는 백인 트럼펫 연주자죠. 또 중국 영화중에 ‘스잔나’라고 있는데, 여기에 나온 주제곡들이 다 좋아요. 영화 주인공인 리칭이 부른 곡도 있죠. 이런 노래 들으면 옛날 생각 많이 나요. 내 또래들은 아마 들으면 다 알 거예요.
재즈를 아는 이가 드문 시절이었으니 당연하게도 물심양면의 외로움이 많았겠다.
“아예 무대를 얻지 못해 무교동 주점을 찾아가 무료 연주를 자청하기도 했다. 근데, 그냥 가라 하더라고. 재즈는 필요 없다는 거였다.(웃음) 집에선 와이프의 원성이 자자했지. ‘제발 월급이라는 걸 가져와보라’고 다그쳤다. 결국 TBC(과거 동양방송)의 ‘이봉조 악단’이나 KBS ‘길옥윤 관현악단’에 들어가 일하며 월급을 받았지. 그러나 허구한 날 가수들의 반주나 하자니 자존심이 상해 견디기 힘들더라고.”
결국은 뛰쳐나왔다는?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베이시스트로 꼽히는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는 한동안 활동을 중단하고 우체국 직원으로 살았더군. 그는 예술적 자존심의 손상을 감내하면서까지 클럽의 주정뱅이들을 상대로 연주하긴 싫었던 거다.
“재즈 뮤지션들은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다. 그런데 나에겐 삶의 자유보다 더 지배적인 욕망이 있었다. 나만의 연주 스타일을 확보하고 싶다는 거! 그러자면 맹렬한 연습이 필요했다. 방송국 악단을 뛰쳐나온 건 월급봉투보다 연습을 통한 기량 향상이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게 재즈 뮤지션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기도 했다.”
내심 독을 품은 연습벌레로 살았다는 얘기이겠다. 엉덩이가 물러터지도록 내내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난타하고, 그러다 지겨워 마신 술에 취해서도 두드리고, 재즈 LP를 들으며 채보(採譜)를 하고, 필이 떠오르면 작곡을 하고…. 그는 피아노에 육신을 내던지는 부단한 연습과 학습으로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져나갔다. 그리고 실존적 경제적 기반 확보를 위한 하나의 유력한 조치를 취했다. 서울 홍대 앞에 재즈클럽 ‘문 글로우’(Moon Glow)를 차렸던 것. 이곳은 신관웅이 주도해 만든 빅밴드(열 명 이상의 뮤지션으로 편성한 앙상블 형태의 밴드)의 주둔지였다. 김준(보컬), 김수열(색소폰), 강대관(트럼펫), 류복성(봉고), 이판근(베이스), 조상국(드럼), 홍덕표(트롬본) 등 신관웅과 함께 미8군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1세대 재즈 뮤지션들이 참여했다. 다시 말해, ‘문 글로우’는 한국 재즈의 요람이자 플랫폼이었다.
“‘문 글로우’에선 날마다 공연이 펼쳐졌다. 재즈 마니아들이 즐겨 찾아들면서 명소로 부각됐고. 그러나 운영난에 봉착하게 되더군. 임대료조차 감당하기 어려워 폐업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지. 그러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언론들이 보도를 하고, ‘문사모’(문 글로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후원모임이 지원을 해 간신히 지속해나갔다. 하지만 결국은 문을 닫았다. 개업 15년 만에.”
폐업에 이른 동인은 재즈가 대중화하지 못한 탓?
“그렇다. 사람들은 재즈를 낯설어한다. 어렵다고들 투덜거린다. 이건 과거나 요즘이나 마찬가지다.”
요즘도? 비주얼과 스펙을 겸비한 젊고 유능한 재즈 연주자들이 속속 등장하는데도?
“재즈 연주자는 시중에 넘치지만 감상자들은 밋밋하게 증가했을 뿐이거든. 아이돌 뮤직과 트로트의 돌풍을 보라. 대중을 모조리 쓸어가는 게 아닌가. 재즈는 여전히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어떤 방법으로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보나?
“재즈의 본질적 성향인 클로스오버로 파고를 넘어서야 한다. 난 이미 오래전부터 재즈와 국악을 접목한 공연을 시도해왔다. K-재즈! 여기에 답이 있다고 보는 거다. 재즈란 원래 흑인들의 한을 정서적 근간으로 한 장르다. 국악 역시 한을 정조로 하기에 양자의 결합은 절묘한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거든. 국악+재즈 빅밴드를 결성하는 게 나의 꿈이다.”
재즈의 모든 기법 구사해
신관웅의 재즈 인생 고백엔 낙심과 낙관이 교차한다. 번번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무대에 섰던 기억은 악몽처럼 쓰라리나 값진 단련의 기회였다고 한다. 검불 몇 조각 펄럭이는 황무지와도 같았던 한국의 척박한 재즈 토양에 씨를 뿌렸다는 자부심은 노년의 그에게 정당성을 제공한다. 하여, 그는 자신에게 여전한 현역의 자격을 부여한다. 그의 재즈 선율에는 이와 같은 긍정과 자신감 또는 가라앉지 않은 갈증의 심상이 아롱질 터다. 서정적인 멜로디, 수려한 레가토주법(둘 이상의 음을 사이가 끊어지지 않도록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는 주법), 호쾌한 건반 두드림, 그리고 ‘끼’의 분출에 의한 쇼맨십까지, 신관웅의 연주엔 재즈의 모든 기법들이 동원된다.
“서정적인 면과 폭발적인 면, 나는 이 둘의 조화로운 표출을 연주 목표로 삼아왔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좀 변하더라. 과거엔 기법 중심의 화려한 연주였다면 요샌 감성의 흐름을 중시해 다분히 정적이거든.”
심금을 울리는 음악은 영혼을 다한 자만이 가능하다지?
“내 안에도 한이라는 게 있다. 한이야말로 영혼의 움직임이지 않을까? 나는 낱낱의 음에 한의 정서를 실어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기를 갈망한다.”
재즈 정신에는 사회모순과 금제에의 도전이라는 측면도 있다. 일단의 재즈 뮤지션들은 자유를 숭상하는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당신의 성향은 어떤가?
“내가 생각하는 현대 재즈는 하나의 독특한 제도권 문화다. 청중과 교감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하고도 강력한 장르이기도 하다. 더 넓게 보자면 인격 완성의 수단이기도 하지. 알다시피 재즈는 즉흥연주를 기본으로 삼는다. 하지만 밴드 멤버들 각자의 선율이 어울려 고도의 하모니를 이루지 않고선 성립할 수 없는 음악 행위다. 즉, 연주곡 하나하나가 모두 인격체의 산물인 거다. 나의 성향? 둥글둥글하다. 꽤나 온화하거든. 뭐 과음을 즐기는 버릇이 있긴 하지만 취중에도 모난 짓을 하진 않는다.(웃음)”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지?
“나를 내려다보시는 신의 눈길을 가끔 느낀다. 한번은 재즈 성가를 녹음했는데, 일을 마치고 보니 녹음의 절반이 날아갔더라. 기술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대번에 영감이 떠오르더군. ‘넌 아직 멀었다! 어디서 감히 성가를?’ 그런 하늘의 음성을 들은 기분이었다.”
어디서 감히! 신의 음성이 아니더라도 가슴을 치는 일갈이다. 나 잘난 ‘자뻑’도, 카랑카랑한 논리도 지나치면 실족한다. 신관웅의 개성이라면 그저 무덤덤한 유연함? 이는 ‘어디서 감히!’의 진실을 알고 사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절제의 폭을 웅변할지도.
각종 송년회가 줄을 잇는다. 올해도 송년 모임이 14개 정도 된다. 저녁 약속이 많은 것은 별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저녁 자리의 술이다. 한창때만큼 마시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업 될 정도로는 마신다. 분위기 좋은 날은 좀 오버할 때도 있다.
문제는 내가 술 마시는 것을 아내가 싫어한다는 거다. 지난 시절 술로 인해 몇 번 아내의 속을 태웠던 원죄가 있어 아내의 이해 부족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유일한 해결 방법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되는 것인데, 그렇다고 사느라 안간힘을 다해 붙잡고 있는 이성의 질긴 밧줄을 잠시 야들야들하게 해주는 이 묘약을 완전히 놓아버릴 수가...
이틀 전 초등학교 동창 송년회 때 마신 술 때문에 아내가 화가 잔뜩 났다. 그런 상태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한국-덴마크 수교 60주년 기념 ‘덴마크 로열 오케스트라’ 초청 공연에 아내와 함께 갔다. 썰렁한 작은 불편함을 마음 한구석에 담아 놓은 채 객석에 앉았다.
57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와 세계적인 지휘자 ‘토마스 손더가드’의 첫 내한 공연이었다. 거기에 유명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자리였다.
먼저 ‘헬리오스 서곡(Helios overture), Op.17’로 무대를 열었다. 어둠과 고요 속에서 서서히 호른, 현악기와 목관 악기들의 선율이 등장한 후 트럼펫의 팡파르가 울리며 연주는 신화의 이야기들을 풀어나갔다.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인용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곡이 연상되었다. 오케스트라는 지구별 빛과 어둠이 닿기 시작하는 새벽에서부터 코발트 빛 하늘이 오렌지빛 석양으로 물들어갈 때까지 에게 해의 하루 풍경을 영혼이 울리는 소리의 빛깔로 그렸다. 밤의 여신이 살포시 고개를 들면서 첫 번째 프로그램 연주는 끝났다.
고개를 돌리니 수많은 별 중 지구별에서, 수많은 사람 중에서 인연이 된 유일한 한 사람이 옆에 있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에는 러시아풍의 우수적 정서가 잔뜩 담겨있다 보니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좋아한다. 이날 두 번째 프로그램인 ‘피아노 협주곡 제2번 다단조, Op.18’도 예외 없었다. 처음 부분의 묵직한 베이스 음부터 한국인의 정서에 짝 맞았다. 이어지는 러시아풍 리듬과 차이콥스키의 협주곡 같은 템포와 선율에 이르러서는 점점 깊이 소리에 빠져들어 갔다. 피아니스트의 현란한 연주에 몰입돼있을 때 오케스트라의 격앙된 합주가 정신을 깨웠다. 그 밝고 환한 기세를 몰아 장쾌한 화음으로 연주가 끝났다.
‘인연이 된 유일한 사람을 위해 못 할 게 뭐가 있을까? 한창 연애할 때였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술로 인해 불편한 아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마지막 연주는 무소르그스키의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이었다. 스케치와 수채화에서 받은 인상과 감흥을 바탕으로 작곡한 이 음악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곡이 연주되는 동안 수십 편의 디즈니 만화영화를 보는 듯한 행복에 빠졌다. 그 소리에는 ‘톰과 제리’ ‘알라딘’ ‘라푼젤’ ‘라이온 킹’등 내가 알고 있는 만화영화의 주인공들이 다 있었다. ‘마음의 정화’ 그렇다! 마음이 정화되는 연주였다. 특히 내게 의미 있었던 소리는 종소리였다. 12월에 들리는 소리로 잘 어울렸다. 연주에서 들은 종소리는 끝을 알림과 동시에 시작을 알리는 의미의 소리였다.
당분간 술을 안 마실 생각이다. 아직 유일한 인연인 사람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은 가슴에 남아있는 것 같다. '전람회의 그림' 연주에서 울린 종소리는 누구에게 울린 종소리였을까? 술에게? 나에게?
“오늘은 먼 곳에서 특별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멀리 미국 유타주에서 오신 존 고 조이(John Ko Joy) 씨입니다. 이 분은 한국 전쟁 중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56년 만에 한국에 오셨습니다. 힘찬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6월 3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 신수교회 주일 예배시간. 트럼펫을 든 한 남자가 성가대와 함께 나와 협연했다. 듬직한 체구에 웃음 밴 얼굴의 조이 씨. 그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 입양 이후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미스터 조이, 인터뷰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으니 “기쁜 마음으로 응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성사시키지 않으면 평생 할 수 없는 인터뷰였다.
이별을 직감한 조이의 선택
조이 씨의 어머니는 16세 어린 나이에 조이를 출산했다. 미숙아로 태어난 조이는 잔병치레가 많았지만 미군이던 생부 덕에 미군 야전병원에서 진료 혜택을 받으며 치료받았다고 했다. 조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생부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소식이 곧 끊겼다. 생각지 못한 임신과 어려운 가정 형편. 조이를 한국에서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한 생모는 아들을 해외로 입양 보내기로 한다. 그렇게 조이 씨는 부산에서 일본 도쿄를 거쳐 하와이를 지나 미국 본토로 갔다. 어린 나이에도 험난한 사회에서 안 굶고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고 했다. 차라리 모국에서 버림받아 미국행 위그선에 탑승한 것이 노아의 방주에 승선한 행운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고 밥을 굶고 있을 가족이 걱정됐다고 회상했다.
“‘플라잉 타이거’라는 비행기 모양의 ‘위그선’을 타고 떠났습니다. 미국으로 가는 일주일 동안 햄버거와 오트밀 수프만 먹었습니다. 그동안 먹었던 된장찌개와 김치가 갑자기 그립기도 했죠. 아니 김치를 찢어 숟가락에 올려주던 엄마가 그리웠습니다. 굶어도 엄마 옆에 있는 것이 좋았다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위그선에는 500명 정도의 영·유아가 베이비 박스에 담겨 배 3층까지 정렬돼 있었다. 얼굴 부분은 열려있었고 가슴 부분에는 양부모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있었다고 했다. 마치 “과수원에서 과일을 포장하여 출하하는 모습이었다”고 그 당시를 회고했다. 위그선 안에서는 수십 명의 간호사가 아기를 돌봤다. 입양이 생모와 영원한 이별임을 직감했던 조이 씨는 훗날 혈연을 찾 는데 도움될까 싶어 이름을 아버지의 성 ‘존’, 어머니의 성 ‘고’ 그리고 자기 이름 ‘조이’를 사용했다고도 덧붙였다.
인생의 친구 트럼펫을 만나다
조이 씨는 미국 유타주에 사는 좋은 양부모를 만났다. 1953년생으로 조이 씨가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1958년 12월 19일. 조이 씨의 입양일인 동시에 새로운 생일날이 됐다. 처음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자기가 잘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잘 못 했는지를 몰라 모든 일에 자신이 없어 했다.
“시간이 갈수록 내성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던 중 9살 되던 해에 평생을 같이할 동반자를 만났습니다. 슬프기 전에 먼저 다가와 울어주고 기쁜 일 있으면 가장 기뻐해 주는 트럼펫이었죠.”
[IMG::CENTER]유타주의 한 음악대학에 진학해 재즈 트럼펫을 전공한 조이씨는 LA와 휴스턴, 텍사스를 돌아다니며 음악활동을 했다고. 예배 도중 성가대와 피아노 반주자와 예행연습 없이 연주한 영화 미션의 주제곡 ‘가브리엘 오보에’는 실제 연주보다 더 아름다웠다. 음악을 전공했지만 그의 현재 직업은 버스 운전기사다. 미국 LA에 살면서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여러 명의 음악인과 협연을 하며 음악 봉사를 한다. 한국 교회에서의 협연도 미국 교회에서의 인연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미국 생활 초반 영어를 할 줄 모르던 조이 씨지만 이제는 한국말을 모르는 미국 사람으로 성장했다. 필리핀 출신의 부인과 슬하에 자녀 3명이 있었으나 암으로 사별했다고. 그리고 3년 전 지금의 중국인 부인을 만나 여생을 함께하고 있다.
그리운 어머니의 나라 대한민국
인터뷰는 예정된 시간보다 많이 지났다. 마지막 질문을 했다. 일곱 살 어린아이를 국가가 보호하지 못하고 입양 보낸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조이 씨는 대답했다. 불평이나 원망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너무 어려서 그런 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웃음) 한국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아와서 엄마의 나라를 살갑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말이죠. 그래도 한국은 내 어머니의 나라입니다.”
인터뷰 도중 ‘어머니의 나라’라는 말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어머니를 만날 희망으로 모국을 찾았지만 만남은 뒤로 미뤄야 했다. 한국 방문한 두 주 동안 입양되기 전까지 살던 의정부 집과 보육원, 어머니의 이름은 알아냈지만 말이다. 다음을 기약하며 어머니를 찾기 위해 DNA 신고를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기회가 된다면 눈물의 모자 상봉 장면을 내 카메라에 꼭 담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누구도 관심 두지 않는 이야기에 관심 둬 줘서 고맙다”고 했다. 차마 부끄러워 감추고 싶은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은 인터뷰가 끝날 무렵 친절함과 화기애애함이 담긴 미소와 함께 눈가에는 눈물 가득 고였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악수하는 손은 서로가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유독 중후한 가을의 정취와 잘 어울리는 클래식. 잔잔한 선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때론 리드미컬한 멜로디가 일상의 생기를 더한다. 그러나 클래식은 어렵다는 편견이 적지 않다. 공부하려 작곡가와 노래 제목을 외우더라도 정작 그 곡을 듣지 않는다면 헛수고. 책을 읽으며 손쉽게 음악까지 감상할 수 있는 ‘이지 클래식’을 책방에서 만나봤다.
참고 도서 ‘이지 클래식’ 류인하 저 자료 제공 42미디어콘텐츠
일상에서 만나는 클래식 거장들의 음악
모차르트, 베토벤, 바흐 등 클래식 대표 음악가를 중심으로 영화, 드라마, CF, 만화 등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그들의 곡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개된 클래식을 바로 들어볼 수 있도록 동영상 링크가 연결된 QR코드를 수록했다. 글을 읽기 전후로 음악을 감상하면 그 내용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데 수월할 것이다. 음악가의 삶과 작품 탄생의 비화, 당대 작곡가들의 얽히고설킨 사랑과 우정 등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알차게 담았다.
작곡가별 대표 음악과 추천 음악 알아보기
제목과 음악가는 몰라도 귀에 익숙한 클래식 몇 곡 정도는 있을 것이다. 앞서 도입부에서 클래식의 제목, 작곡가 등을 매치했다면, 그다음은 각 음악가의 또 다른 대표곡과 저자의 추천 음악을 알아볼 차례다. 작품명에는 영문과 작품 번호 등을 함께 실어 유튜브나 해외 사이트 등에서도 쉽게 검색하도록 정리했다. 추천 음악의 경우 유명 연주자나 지휘자의 공연 영상이 QR코드로 연결돼 훌륭한 연주가 어우러진 명곡을 감상할 수 있다.
클래식과 더불어 즐기는 당대의 예술
클래식 관련 지식과 감상에만 치중하지 않고, 음악가들의 삶과 당대의 예술을 엿볼 수 있도록 다양한 이미지를 담아낸 것이 특징이다. 각 음악가의 초상화나 사진, 명화 속에 담긴 모습, 기념 동상, 악보, 악기뿐만 아니라 그들이 태어난 곳과 묘지 등 풍부한 자료가 더해져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장과 장 사이 ‘인터미션’ 코너를 마련해 클래식의 장르, 공연 감상 에티켓, 세계음악축제, 오케스트라의 종류 포지션 등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책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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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R코드(Quick Response Code)란 세로줄 형태로 정보를 저장하는 바코드(Bar Code)와 달리 가로줄이 더해지며 격자무늬 형태로 나타나는 2차원 코드를 말한다. 스마트폰을 통해 쉽게 정보를 읽어내 활용도가 높다. 앱 스토어에서 ‘QR코드’를 검색하면 ‘QR코드리더’, ‘QR코드스캐너’ 등 관련 앱을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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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을 자주 듣고, 관련 지식을 쌓다 보면 자연스럽게 악기에도 관심이 가게 마련이다. 책에는 오케스트라 편성 포지션과 더불어 클래식 연주에 사용되는 악기 종류가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익히 알고 있는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트럼펫은 물론 마림바, 피콜로, 비브라폰 등 생소한 악기들까지 그 모양과 특징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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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9월엔 한국을 넘어 전 세계를 대표하는 소프라노 조수미의 무대를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 프랑스 파리를 테마로 한 ‘원 나이트 인 파리(One Night in Paris)’는 9월 5일 예술의전당(서울)을 시작으로, 7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전라)에 이어 8일 대전예술의전당(대전)에서 펼쳐진다. 이 외에도 ‘조수미 콘서트 판타지아’(9월 2일, 김해문화의전당), ‘조수미 파크 콘서트’(9월 9일, 올림픽공원 내 88잔디마당) 등의 공연이 다채롭게 마련돼 있다.
시대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예술이다. 토양의 기운과 그 땅을 디디고 사는 사람들의 기질이 조화를 이뤄내는 것은 전통예술이다. 역사의 질곡에 이은 현대사회 전환기에 살았던 한 소년. 그는 음악에 눈뜨면서 막중한 임무처럼 국악계의 문을 두드렸다. 전통음악의 한계를 허물고 한국 예술 전반에 주춧돌을 쌓다 보니 어느덧 30여 년 세월. 우리 음악이고 예술이고 하고 싶은 것이 여전히 많다고 말하는 KBS국악관현악단 이준호(李準鎬·59) 상임지휘자. 대금과 소금 연주자를 거쳐, 작곡가 그리고 대한민국 예술의 중심에서 명성 높은 국악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국악, 문턱 낮추고 저변을 넓히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던 7월의 어느 날, 여의도 너른 길을 걸어 한국방송공사(KBS)로 향했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방송사. 일하러 오는 사람과 그들을 보러 오는 사람으로 매일 인산인해인 곳. 여기에 KBS국악관현악단이 있다. 오전 연주 연습을 마치고 단원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준호 상임지휘자와 마주했다.
KBS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로 살아온 지 올해로 14년째. 국악기를 손에 쥔 사람들 정중앙에서 음악이 갈 길을 제시하고 함께 호흡한다. 1985년 소금 연주자이자 창단 단원으로 KBS국악관현악단과 처음 인연을 맺었으며, 같은 해에는 국악실내악단 ‘슬기둥’을 결성해 대중과 눈 맞춤하기에 앞장섰다. 대금과 소금 연주자로서 활약은 물론, 작곡가로서 친근한 국악 창작을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이다. 한국청소년국악관현악단(1988)과 경기도립국악단(1996) 창단에도 힘을 보탰다. 두 단체에서 또한 상임지휘자를 맡아 활동했다. 지난 6월에는 대금연구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우리 고유의 악기 대금 보존과 계승, 발전에 한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슬기둥’, 국악이 변화하다
지금은 소규모 국악 그룹이 넘쳐나지만 ‘슬기둥’의 등장은 파격 그 자체였다. 이준호 지휘자와 함께 KBS국악관현악단 창단 동기인 강호중, 김영동, 민의식 등 20대 국악 연주가들은 경계 없는 신선한 음악을 해보자는 마음에 ‘슬기둥’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가 공감하고 나누는 친숙한 예술을 선보이려고 애썼다. 특히 ‘슬기둥’이 세상에 나오면서 국악은 관객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던 옛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슬기둥 1집에 발표된 ‘산도깨비’와 ‘소금장수’는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슬기둥을 창단했던 저와 제 친구들의 선택이 맞았습니다. 모두가 국악의 정통성을 외칠 때였어요. 그런 역할은 국립국악원에서 충분히 하고 있잖아요. 영산회상(조선시대 후기 기악곡 형태의 풍류음악)이나 수제천(관악합주곡, 원곡명 ‘정읍(井邑)’)으로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어요. 일반 대중이 국악을 쉽게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뭘까 생각했습니다. 국악가요 같은 것을 따라 부르면 더 편하지 않나요? 민요도 전통음악이잖아요. 슬기둥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제가 작곡에 열을 올게 된 것이죠. 198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이준호 지휘자는 지금까지 국악을 바탕으로 1000곡 가까이 창작해왔다. 무용극, 뮤지컬, 연극, 창극, 마당극에 사용하는 공연음악과 TV드라마 음악 등 국악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국악의 대중화에 발 벗고 나섰다. 20여 편 되는 MBC마당극 중 일곱 개의 작품도 작곡가 이준호의 손에서 탄생했다. 국악과 현대음악을 접목시키고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노력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후배들이 설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새로운 장르를 개발해서 국악에 몸담고 있는 후배들이 갈 길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길이 있어야 젊은 친구들이 국악을 공부하며 열정을 보일 거 아니에요. 전통음악이든 현대음악이든 음악계 전체가 풍성해져야죠.”
새로운 국악을 주창했던 슬기둥 원년 멤버들은 모두 국악과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이준호 지휘자도 4년 전부터 모교인 추계예술대학교에서 대금과 작곡, 지휘를 가르치고 있다.
“음악 만들면서 현장에 있는 게 좋지, 학교에 있는 걸 원하지는 않았어요. 이제 제가 나이를 꽤 먹었다는 거겠죠.(웃음)”
트럼펫 대신 대금을 손에 쥐다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이준호 지휘자는 음악 하는 외삼촌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특히 외삼촌 주변에 학교 다니면서 브라스 밴드 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동네에서 행진곡 합주를 들을 기회가 많았는데 영향이 저한테 굉장했죠.”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브라스 밴드에 들어갔다. 다양한 서양악기를 접했고 트럼펫을 배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립국악원 연수를 한 달 정도 다녀온 음악선생님으로 인해 국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밤낚시를 가자고 하시더군요. 그곳에서 국악에 대한 깊이와 역사를 이야기하시면서 ‘국악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습니다. 듣고 잊어버려야 했는데 그 말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대전환이었다. 그때부터 트럼펫을 내려놓고 국립국악고등학교를 목표로 고입 준비를 해 입학했다. 대금과의 인연도 국립국악고등학고 입학과 함께였다.
“국악을 처음 접하는 거라 뭐든 생소했어요. 악기 주법과 모양새도 그랬고요. 국악기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이 학교에 들어갔어요. 결국에는 대금을 선택했는데 나하고 잘 맞았던 거죠.”
젊음으로 한바탕 놀다
이준호 지휘자가 추구하고 생각하는 국악의 장점은 언제든 변형 가능하고 다른 장르와도 잘 어우러진다는 점이다. 국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부터 다양한 음악, 예술 장르와의 협연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KBS국악관현악단 혹은 슬기둥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해외 여러 나라에 나갔다. 그리고 우리 가락의 흥을 가지각색 협연 무대로 펼쳐 보이기도 했다. 사물놀이패는 물론이고 비보잉, 재즈, 록 등 국악과 접목할 수 있다면 뭐든 함께 무대에 세우고 실험을 이어갔다.
“언젠가 카자흐스탄에 한국어과가 있는 대학교에서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아무리 통역을 붙여 강의한다고 해도 재미없을 것 같아서 비보잉 그룹과 함께 갔습니다. ‘10분에서 15분만 내가 할 테니까 나머지는 너희들이 해라!’ 하고요.(웃음)”
우리나라 문화를 잠깐 소개하고 비보잉 그룹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 곳에서도 비보잉이 인기가 있었는지 20여 명되는 팬이 몰렸다. 우리 가락에 맞춰 한국 비보이에게 동작을 배웠다.
“그때 국악과 비보잉의 결합은 새로운 방식의 문화 융합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열리는 하라레축제에 갔을 때는 기타리스트 김도균과 색소폰 연주자 이정식과 함께 공연했습니다. 그들에게 국악과 록의 접목을 보여주고 싶었죠. 그런데 공연 끝나고 뒤풀이가 더 오래 걸렸어요. 우리 예술인과 깜짝 협연이 열린거죠. 아프리카 사람들이 리듬을 좀 알잖아요. 우리 것을 다른 나라에 알리고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의미 있고 좋은 일입니다.”
창작은 멈추지 않는다
인터뷰를 하면서 인상적이었던 공간은 바로 국악관현악단의 연습실이었다. 방송 전파를 위해 존재하는 방송사 공간에 공연을 준비하는 이들의 아지트가 있다는 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KBS국악관현악단이 생기고 30년 동안 제대로 된 연습실이 없었어요. 라디오 공개홀에서 본관 뉴스센터, KBS별관으로 옮겨 다녔어요. 제가 여기 창단 멤버이고 오래 활동해서 아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3년 전에 공간 좀 제발 마련해 달라고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그때까지 국악관현악단 명의로 된 연습실이 없었답니다.”
방송사 건물이 한정적인 데다 사람과 장비가 늘어나 이해는 했지만 오랜 세월을 참고 참다 큰맘 먹고 연습실 문제를 알렸던 것이다.
“사실 방송사 내에 사무실 없는 분들도 있으니 그 사정은 지금도 이해가 돼요. 어쨌든 요즘은 연습이 중단되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일이 없어서 단원들이 좋아해요. 대신 저희는 열심히 뛰어야겠죠. 연주회도 하고 좋은 레퍼토리도 만들고요. 한국음악을 접하지 못하는 소외 지역이나 교도소, 군부대 등도 저희가 찾아가서 음악회를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공연으로 국민들에게 보답하면 됩니다.”
KBS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라는 높은 위치가 늘 행복하고 달가운 자리만은 아니다. 현재 이끌고 있는 악단과 단원들을 위해서 책임지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나서야 했다. 정권이 바뀔 때 생각지도 못한 오해를 받거나 힘든 일을 겪기도 했다. 국민의 시선이 쏠려 있는 공영방송사 한 분야의 수장으로서 말을 아끼는 것이 ‘최고의 수’라는 것도 나이가 익어가면서 알아갔다. 그래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옆에 있는 단원들과 함께하는 예술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앞으로 어떤 것을 더 하고 싶냐고 물으니 당연히 국악 얘기로 다시 돌아온다.
“곡 써야죠. 작곡가니까. 판소리 5마당 중에서 심청가만 남았어요. 판소리만 한 대목 한 대목 연주해왔는데 그걸 전체 다 오케스트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산회상 전 바탕, 종묘제례악 합창가….”
지금까지 1000곡 가까이 작곡했다는 분이 아직도 정리할 곡도 많고 할 일이 많단다. 시간이 나면 KBS 신관 길 건너 연구동 5층 사무실에서 곡 쓰는 것이 낙이라고 한다. 이 열정을 어찌 말릴 수 있을까 모르겠다. 언젠가 휴식의 시간이 찾아온다면 펜도, 지휘봉도, 대금도 다 내려놓고 좀 쉬시기를 간청드려본다.
만나고 보니 꽤나 독특한 삶이다. 마치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완벽하게 전문적이고 색다른 인생담. 전생과 현생을 말하는 듯 세대를 넘나드는 사건 전개. “내가 무슨 인터뷰할 게 있어”로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특별하고 치열한 역사 드라마를 고스란히 감상한 느낌이랄까? ‘선데이서울’ 전 방송사 출입기자이자 MBC 전 복싱 해설위원, 등단 1년 차 신인 소설가 한보영(韓寶榮·82) 작가를 만났다. 대한민국 1960~70년대를 주름잡았던 별들의 야사와 링 위의 전쟁이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보영 작가를 만난 곳은 서울시 중구 서울신문 사옥 내 한 커피숍. 세련된 모습으로 단장한 서울 중심부이지만 옛 시절부터 발을 디뎌온 기자 선배의 눈에만 보이는 아지트가 숨어 있다고 했다.
“한국체육언론인회가 이 근방에 있어요. 체육기자 출신 모임은 여기에서 하거든. 전 직장인 서울신문 사우회도 여기에 있고, 자주 가는 기원도 이곳이니까 벗어나지 못해요. 아무래도 내가 가는 단골집도 많고요. 교통편도 좋고 나는 광화문이 편해요.”
한보영 작가는 매일 아침 일찍 배낭 하나 메고 되도록 빨리 집을 나선다.
“생활에도 리듬이 있고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밋밋한 건 딱 질색이거든. 그러니 집에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시간을 벌어 글을 쓰고 오랜 지인들 만나 얘기하고 또 짬을 내서 글을 쓴다. 한보영 작가는 작년 4월 손자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단편소설 ‘너와 나의 끈’으로 월간 문예지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꾸준하게 단편소설을 문예지에 게재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로운 삶을 그려가는 중이다.
“열심히 쓰고 있어요. 작년에 4편을 발표했습니다. 제가 등단했던 ‘조선문학’ 6월호에 작품 하나가 나왔고. 7월은 한국소설가협회에서 나오는 월간지 ‘한국소설’에 신작이 나옵니다. 올해 말까지 한 5개 정도 쓰고 내년 초에 지금까지 썼던 단편소설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내려고 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틈틈이 글을 쓰고 있는 신참내기 소설가. 참 안타까운 현실은 이렇게 정성들여 월간 문예지에 게재를 해도 원고료 주는 곳이 많지 않다. 돈을 염두에 두고 이 일을 했다간 한 글자도 못 쓸 것이 빤하니 금전적 보상은 단념하고 작품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지고 호흡을 고르면서 써야 돼, 쉬엄쉬엄. 그 대신 뭐 시간이 꼭 정해진 건 아니지만 조금씩 쓰다가 나중에 싹 지워버리고 다시 쓰고 그럽니다. 예전에 한 번은 컴퓨터 조작을 잘못해서 다 없어지는 바람에 처음부터 새로 썼다고. 얼마 전에 발표를 했는데 디테일한 점은 좀 모자라는 대신 구성은 오히려 마음에 들더라고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는 거죠. 글은 쓸 때마다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뭐든 마음에 들면 들이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전주에서 고교 시절을 보낸 한보영 작가는 배구선수로 활약했다. 문제는 한보영 작가가 운동에만 몰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관심 분야가 생기면 일단 발부터 담가보기를 반복했다.
“배구부에 있을 때 트럼펫에 관심이 생겨서 밴드부에 들어갔더니 한 선생님이 ‘운동하는 애가 왜 여기에 있냐’며 저를 쫓아냈습니다. 문예부에도 들어갔었어요. 글재주가 있었으니까요. 교지 만들 때 일조했습니다. 대부분 운동부라고 하면 수업시간에 안 들어가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중학교 3학년 때 교실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어요. 운동만 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배구가 싫었습니다.”
배구도 곧잘 해 서울 소재 대학에서 배구선수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하고 입시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대학교를 안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학한 곳이 바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였다.
“글을 제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갔습니다. 김동리 선생과 서정주 선생이 저희 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한보영 작가는 특히 김동리 교수와 가깝게 지냈는데 하루는 자신이 쓴 습작을 봐주십사 부탁했다. ‘선데이서울’ 기자도 MBC 복싱 해설위원도 아닌 어린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할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를 중요한 순간이었다.
“한창때 실존주의 이론에 빠져 있었어요. 젊은 패기에 선생님이 해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김동리 선생이 저와 별 상의 없이 습작에 관한 심사평을 ‘현대문학’에 내신 거예요. 문장과 구성은 다 좋은데 주제와 내용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셨더라고요. 시골 동네에서 벌어지는 근친상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동리 선생 취향과 너무나 동떨어졌던 것이죠. 화가 나서 찾아갔더니 본인과 주제가 잘 맞지 않으니 다른 소설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에 충격받아서 두 번 다시는 소설 안 쓰겠다고 하고 집어치워버렸습니다. 그때는 어깨에 왜 그렇게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웃음)”
당시에 만약 김동리 선생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더라면 한보영 작가의 삶은 어떻게 전개가 됐을까? 대작을 쓰는 작가로 거듭났을까? 소설에 대한 희망을 접고 선택한 한보영 작가의 첫 번째 직업은 선생님이었다. 경기도 포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 사무치도록 좋았지만 몇 개월 지나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눈이 내렸다 하면 허리까지 차올랐다. 월급은 보리와 쌀 반 가마니. 그나마 현찰로 지급되는 돈은 학교운영회에서 거친 회비를 조금 얻어 쓰는 정도였다. 하숙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힘든 시간을 좀 이겨내나 싶었을 때 영국 민요 ‘오 데니 보이’를 여학생들에게 가르치다 교장에게 발각됐다. 노래 속에 사랑 얘기가 들어 있다는 게 화근이었다. 왈가왈부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송사 출입기자로 방송가를 누비다
“나는 잡지 출신이야. 신문사 출신이라는 말 잘 안 해.”
‘선데이서울’이 ‘서울신문’에서 나오는 주간지였고, 복싱 해설위원으로 모습을 바꿀 때도 ‘서울신문’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인물검색을 하면 전 신문인으로 뜬다. 하지만 한보영 작가는 우리나라 초창기 잡지를 꿰고 있는 잡지사 기자 출신이 맞다. 초등학교 교사직을 내려놓고 들어간 곳이 월간 ‘여성계’였다. 피란 시절 대구에서 창간했던 월간 ‘여성계’를 시작으로 ‘교육평론’이라는 잡지사에서도 일했다. 책이 나오는 달만 월급이 나오는 상황인지라 돈도 없고, 잘 챙겨먹지 못해 급기야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김동리 선생이랑 싸우고 소설도 안 써지니까 위장병에 걸렸던 것 같아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밖에서 밥을 사 먹다 보니 나아질 기색이 없었어요. 결국 위장병이 있는 상태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건강을 되찾고 난 다음 군에 있는 동안 프리랜서로 글을 꽤 썼습니다. 다른 월급쟁이들보다 낫다 싶을 정도였죠.”
제대 후에는 당시 인기 잡지였던 ‘아리랑’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방송사 출입 기자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예부나 문화부 기자로 방송사에 드나드는 기자를 말한다. 예전에는 방송사마다 탤런트와 개그맨, 성우를 매년 정기적으로 뽑았다. 특히 탤런트의 경우 소속 방송사의 드라마와 프로그램에만 등장할 수 있었다. 방송사 소속 아나운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심은하, 장동건을 보려면 MBC를 찾아가야 했던 시절이 있다. 방송사 출입기자는 연기자와의 끈끈한 인맥과 유대감은 물론이고 방송사 관계자와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하는 힘든 분야 중 하나였다.
“‘아리랑’은 글씨를 세로가 아닌 가로로 표기한 최초의 잡지였습니다. 연예인 주변 이야기, 스포츠, 만화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아낸 세련된 책이었죠. ‘아리랑’에 있을 때 배우 신성일과도 친해졌습니다. 그때는 방송사 소속 탤런트들이 조금 딱했습니다. 기획사를 차리는 게 꿈이었는데 잡지 사업에 발을 들이고 말았습니다. 뜻대로 안됐죠.”
‘아리랑’에 있는 동안 음악 전문지를 만들어볼 생각에 ‘청춘’이라는 소규모 잡지를 인수했다. 젊은 세대를 위한 음악 잡지로 만들려고 했는데 1970년대 초 유신시대가 도래해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두 달여 공을 들였지만 사회 상황과 잡지 성향이 맞지 않아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큰 손해를 봤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남들처럼 술 먹고 울분을 토하고 그런 성격이 또 제가 못됩니다. 극장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산업경제신문’에서 연예부 기자로 오란 연락을 받았습니다. 물불 가릴 것이 없었어요.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퇴직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나왔거든요. 그곳에 있다가 서울시청에 납품하는 ‘주간 시민’으로 옮겼고 그다음이 ‘서울신문’ 대표 매거진인 ‘선데이서울’이었죠.”
한보영 작가가 방송사 출입기자로서 활약하고 성과를 낸 매체는 ‘선데이서울’이다. 본격적인 방송계 출입기자 삶을 산 시간이 이때였다고도 자평했다.
“기자는 많은데 방송사를 제대로 찾아다니는 기자가 의외로 적었습니다. ‘선데이서울’에 있을 때는 정말 탤런트, 연예인들 일에 제가 많이 좌지우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대면 쉽게 알 만한 연예인 사생활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연예사를 들춰내는 종합편성채널 TV 프로그램 출연이 잦았다. 한 여성 탤런트는 한보영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선생님, 그런 방송에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네기도 했단다.
“요새는 방송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저보다 순발력 있는 다른 사람을 구해보라며 거절해요. 누구 부탁 때문이 아니고, 그게 좀 더 방송이 살 것 같아서죠.”
복싱 해설위원으로 다른 삶을 살다
방송국 출입기자로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을 두루 섭렵하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어쩌다 돌연 스포츠 분야로 눈을 돌려 복싱 해설위원으로도 이름을 알리게 됐을까.
“1972년 3월 ‘선데이서울’에 방송사 출입기자로 들어가 오랜 시간 연예계 기사를 썼습니다. ‘서울신문’에서 ‘주간스포츠’를 창간해 왔다 갔다 하면서 복싱 관련 기사를 쓰다가 1980년대 초에 ‘주간스포츠’로 완전히 옮겨가 복싱 담당기자가 됐습니다. 당시 복싱 인기가 정말 대단했어요. 그런데 복싱 담당기자가 자꾸 나가버리니까 하루는 국장이 불러서 복싱을 맡으라니 어쩌겠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배우와 탤런트를 위한 기획사를 차리는 것과 방송 극본을 쓰는 것이 나름의 목표였다. 스포츠 분야로 가라는 말에 회사를 관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국장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같은 회사니까 복싱 담당을 하다가 연예부 쪽에서 일하라 하면 그쪽으로 가서 취재했죠. 나중에는 스포츠 쪽에 남기로 했습니다. MBC와 해설위원 이야기도 된 상태였고요.”
한국 복싱 전성기, 최고의 명승부에는 늘 MBC 복싱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던 한보영 작가의 예리한 분석이 뒤따랐다. 방송사 출입기자에서 복싱 담당기자, 이를 바탕으로 복싱 해설위원으로 살아온 삶. 기간이 좀 길어서 그렇지 듣고 보니 납득이 가는 인과관계가 있다. 새로운 격변이 아닌 삶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따른 결과였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뭐든지 억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조금은 그렇게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최전성기 복싱 해설을 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남들 은퇴하는 55세에 종이매체와 이별하고 MBC와 해설위원으로 정식 계약을 맺었습니다. 70에는 고희기념 출판기념회를 열었고요.”
복싱의 인기가 사그라지면서 방송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다. 2003년 MBC와계약을 만료하고 MBC스포츠로 옮겨 2007년까지 간간이 복싱 해설을 했다.
“그런데 지금도 저는 복싱 해설을 합니다. 어디서 하는 줄 아세요? 유튜브에서요. 오픈게임부터 끝까지 제가 도맡아서 합니다. 훨씬 힘든 대신 신바람은 납니다. 복싱 해설도 내 인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일부분이고 제가 좋아하는 일이죠. 1년 차 소설가이면서 현역 복싱 해설위원 입니다.”
한참 복싱과 관련한 얘기를 하다가 현실로 돌아오듯 소설 이야기로 돌아온다. 최근 집필한 ‘친부(親父)의 꿈’은 어디엔가 살아 있을 전설의 파이터 김득구 아들을 상상하며 썼다고 했다.
“김득구 아들이 지금 살아 있으면 34세쯤 됐을 거예요. 그런데 왜 복싱에 데뷔하느냐면 말이지….”
이야기 보따리가 온몸 구석구석 한아름이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3시간 꼬박 앉아서 참 많은 얘기를 끄집어낸다. 아무리 봐도 적당한 시기에 자기 진로를 잘 선택했다. 지금이 딱 소설 쓰기 좋은 나이라고나 할까? 대학 시절 김동리 선생과의 일화는 새삼 한보영 작가 인생의 중대한 복선이 된 것만 같다. 그 후 방송계와 복싱계를 누비며 쌓아놓은 기억은 소설가 한보영에게 좋은 자양분이 됐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원래 바라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상념에 잠겨 있을 한보영 작가에게 한마디 건네고 싶다. 언제나 브라보 유어 라이프.
폴란드 남부에 자리한 크라쿠프는 옛 폴란드의 수도다. 17세기 바르샤바로 천도하기 전까지 유럽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 바르샤바는 세계대전 때 완전 파괴되어 온 도시를 새로 복원했지만 크라쿠프는 옛 유적지가 고스란히 남은 고도다. 구시가지는 세계유산 등재가 시작된 첫해(1978)에 지정되었다. 매력이 폴폴 넘치는 그곳엔 동양적인 것들도 남아 있다. 13세기 타타르족에게 굴복당했던 이 도시에는 만두를 닮은 ‘피에로기’가 전통음식으로 남았다.
글·사진 이신화(여행작가, ‘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피아스트 왕조와 야기에워 왕조가 남긴 위대한 업적
체코 프라하에서 폴란드로 가는 중요한 목적은 아우슈비츠를 보기 위함이다. 침대열차를 타고 승무원에게 오비시엥침 역에서 깨워 달라 부탁하고 깊은 잠에 빠진다. 덜컹거리는 기차의 움직임도 기적소리도 못 느낀 채 깊은 잠에 빠진 그날. 친절한 승무원이 일부러 깨우러 왔지만 잠에 취해버렸다. 어쩔 수 없이 크라쿠프 역에 내린다. 첫새벽이라 검표원도 없다. 부산하던 사람들의 발자국이 사라진 역사에 우두커니 한참 서 있다가 빠져나온다. 요새 역할로 성을 에둘러 심은 숲 정원을 넘어서자 바로 구시가지다.
도시는 기대 이상으로 고풍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크라쿠프는 그 역사가 깊다. 폴란드의 첫 번째 피아스트 왕조(960년경~1370년)가 410년간 통치했다. 피아스트 마지막 왕이었던 카지미에시 3세는 폴란드의 역대 왕들 중에서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피아스트 왕조 이후 야기에워 왕조(1386∼1572)가 186년간 통치한다. 야기에워 왕조는 리투아니아의 대공작이었던 요가일라가 야드비가 여왕과 정략결혼(1386)하면서부터다. 이 결혼으로 폴란드 사상 가장 빛나는 황금시대가 출현한다. 역 앞에서 만난 야기에워 기마상(1910, 그룬발트 전쟁 500주년 기념)이 힘차 보이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1410년, 독일 기사단을 격파한 그룬발트(타넨베르크) 전투는 대단한 일이었다.
500여 년의 중세 유럽 문화의 중심지, 유적으로 남아
도심을 에두른 방어벽인 바비칸(누문, 망루, 1498년경)이 남아 눈길을 끈다. 바비칸은 성 플로리안의 성문을 통과하고 도시에 들어온 모든 사람의 검문소 역할을 했다. 성문을 통과하면 겨우 마차 두 대가 지날 수 있는, 돌로 포장된 좁은 플로리안스카 길이 펼쳐진다. 올드 타운의 메인 광장은 리네크 글로브니(마켓 광장)다. 근 500년 넘게 크라쿠프 상징의 장소다. 언제나 많은 사람으로 활기가 넘치는 광장엔 골목을 누빌 관광마차가 대기해 있고 카페, 레스토랑은 물론 난전도 펼쳐진다. 광장에는 14세기에 지어졌다가 1555년 재건된,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직물 길드관(sukiennice)이 있고 그 앞에는 19세기 폴란드의 위대한 작가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동상이 있다. 그의 명성은 셰익스피어에 비교될 정도다.
또 가장 우아하고 화려한 두 개의 첨탑을 갖고 있는 성 마리 성당이 있다. 첨탑을 만든 형제의 불행한 전설이 흐르고 종탑에서는 매시간 ‘헤이날(Hejnal)’이라는 트럼펫 멜로디가 연주된다. 1241년, 몽골군(타타르족)의 침략을 알리던 노 나팔수를 기리기 위한 연주다. 이 성당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0년간 미사를 집전한 곳이다. 성 마리 성당 뒤에는 성 바바라 교회가 있고 중앙 광장 남쪽 끝에는 이 도시에서 가장 작고 오래된 성 아달베르트가 남아 있다. 유럽을 종단하던 중세 상인들의 예배처는 원래 10세기에 지어졌지만, 바로크양식의 지금 모습은 17세기에 재건축된 것. 이 작은 성당은 몽골 침략 때 시민들의 피난처였다.
긴 역사의 명문, 야기엘론스키대학교
크라쿠프 거리가 젊음이 넘치는 것은 야기엘론스키대학교 덕분일 것이다. 1364년, 카지미에시 대왕이 설립한 이 대학교는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됐다. 유럽 최초로 지어진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교를 본떴다. 그가 죽은 후 답보 상태에 있던 대학교는 야기웨어 왕조의 야드비가 여왕이 산후풍으로 죽으면서 남긴 보석과 유언을 받들어 재건(1400)했다. 1406년에 예술학부가 창설되어 많은 음악가가 이곳에서 수학했다. 15~16세기에 크게 발전했고 1817년 야기엘론스키대학교로 개명했다.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때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1918년에 폴란드가 해방된 후 눈부시게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동설의 코페르니쿠스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대학교 출신이다. 16세기에 파우스트 박사도 이 대학교에서 연구했다. 특히 관심이 가는 인물은 1996년 노벨상을 받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 시인이다. 그녀의 시어는 공감적이며 가슴을 폭 파고 들 정도로 매혹적이다. “이 땅 위에서의 삶은 꽤나 저렴해/예를 들어 넌 꿈을 꾸는 데 한 푼도 지불하지 않지/환상의 경우는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대가를 치르고/육신을 소유하는 건 육신의 노화로 갚아나가고 있어”(쉼보르스카 시 ‘여기’ 중).
‘북쪽의 로마’, 무수한 성당들과 바벨 궁전
메인 광장에서 곧추 직진해 카노니차 거리부터 바벨 성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교회들이 열 지어 모습을 드러낸다. 교회는 비스와 강변까지 이어진다. 17세기, 이 도시에는 수도원과 오래된 성당(약 65개소)이 워낙 많아 과거 ‘북쪽의 로마’로 불렸다. 도시 남쪽, 비스와 강 상류의 석회암 언덕(해발 228m)에는 바벨 성이 우뚝 서 있다. 바벨은 폴란드 왕조의 가장 중요한 궁이었으며, 폴란드 문화와 역사의 상징이자 기념물이다. 500여 년간 군주들의 대관식을 비롯한 중요 행사가 열리던 곳. 특히 돔으로 덮인 지그문트 예배당의 탑은 작고 소박하지만 예술미가 뛰어나다. 지그문트 종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곤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티칸으로 떠나기 전까지 봉직했던 성당이다. 그 외에도 유대인 지역인 게토가 남아 있다. 영화 ‘피아니스트’를 비롯 많은 명화를 만들어낸 로만 폴란스키가 8세 때 탈출한 곳이다. 또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의 영화 전반은 크라쿠프의 유대인 거주지였던 크라코브스카 거리가 배경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의 배경이 된 골목들이다.
셋째 주 월요일, 코엑스에서 공연하는 클래식 티켓이 생겼다.
클래식에 무식한 필자는 실은 그동안 몇 번 참석해 보았던 오케스트라의 웅장함이 연상되어 갈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지루할지 모른다는 전제로 공연 좋아하는 후배에게 연락했더니 흔쾌히 좋다고 해서 동행해 같이 가게 되었다.
공연을 좋아하는 후배가 즐거워하니 필자도 따라서 마음이 즐거워졌고 팸플릿의 프로그램을 보니 다 필자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선곡되어 있어 오늘 밤 공연은 매우 멋질 것이라는 기대로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음악적 언어를 마음껏 구사하는 크리에이티브한 재능을 가진 앙상블 팀 ‘DE CODA 디코다’가 첫 내한공연으로 우리 곁에 왔다.
우아함과 열정, 세련됨과 섬세함으로 클래식의 대중화를 위해 미국, 영국, 독일, 아이슬란드, 일본, 홍콩에서 매혹적인 무대를 선보였던 디코다 챔버 앙상블이 드디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코엑스의 오디토리움에서 피아노, 비올라, 바이올린, 첼로, 더블베이스, 클라리넷, 바순, 트럼펫, 프렌치 혼의 악기를 10명의 연주자가 아름답게 들려주었다.
한 명씩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며 자신의 악기로 들려줄 곡을 설명했고 리더인 듯한 클라리넷의 조원진 씨가 통역했다.
연주자 10명 중 한국인이 세 명 있는데 남자 바이올린 김시우는 5살 때 이민을 갔다는 데도 모국어를 아주 유창하게 했다.
또 다른 여자 바이올리니스트인 그레이스 박은 외국에서 태어나서 간단한 인사말 외는 영어로 설명했다.
음악이 흐르면서 필자는 하마터면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을 놓칠 뻔했다는 데 가슴이 철렁했다.
첫 번째 음악으로 비제의 카르멘 중 아주 야성적이고 열정적인 투우사의 노래가 울렸다.
행진곡으로도 많이 쓰이는 귀에 매우 익은 음악이다.
다음은 비발디의 사계 중 ‘가을 1악장’이 연주되었고, 젊은 날 가슴 조이며 좋아했던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가 필자의 가슴을 다시 물결치게 만들었다.
슈베르트의 ‘송어’도 좋았고 브람스의 ‘헝가리언 무곡’과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은 앉은 채로 어깨를 흔들게 했다.
그리그의 ‘아침 정경’의 아름다운 선율이 흐른 후 쇼스타코비치의 재즈모음곡이 울렸다.
재즈는 언제 들어도 끈끈하게 필자를 사로잡는데 다음 곡인 영화 ‘여인의 향기’에 나왔던 ‘포르 우나 카베사’에서는 영화 속에서 탱고를 추던 앞을 못 보는 노신사와 아름다운 여인이 떠올라 감동이 밀려와 눈물이 나기도 했다.
타이스의 명상곡으로 마음을 달래준 후 엘가의 ‘사랑의 인사’가 연주되었고 생상스의 백조가 울려 퍼졌다.
언제인가 어린 날 피아노를 배우면서 열심히 익혀 건반을 두드렸던 노래들이어서 자꾸만 그때가 생각나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인터미션이 지나고 2부에선 시네마 천국을 들려주었고 관객들이 앵콜! 을 외치자 미리 준비했던 듯 자기들은 뉴욕에서 온 팀이라며 ‘뉴욕뉴욕’ 그리고 빌리 조엘의 ‘뉴욕 스테이트 오브 마인드‘를 선사했다.
연주자와 관객 모두 흥이 나서 노래를 따라 부르며 환호했고 필자와 후배도 ‘앵콜’을 외치며 아름다운 곡들을 즐겼다.
마지막 앵콜곡 ‘시월의 멋진 어느 날’은 자막의 노랫말이 너무나 아름다워 가슴이 저려왔다.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같이 있어 줄 친구가 있는 이런 날이 있어 정말 살아볼 만한 아름다운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