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안개’로 유명한 원로가수 현미(본명 김명선)가 4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5세.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37분께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에 현미가 쓰러져 있는 것을 팬클럽 회장 김모(73) 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현미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 판정을 받았다.
경찰은 고인의 지병 여부와 신고자인 팬클럽 회장과 유족 등을 조사해 정확한 사인을 규명할 계획이다. 빈소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현미는 지난 1938년 평양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1·4후퇴 때 부모·6남매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 과정에서 어린 두 동생과 헤어졌다가 60여 년이 지난 뒤에서야 동생들과 평양에서 재회하기도 했다.
우리 나이로 스무 살 때인 지난 1957년, 현미는 미 8군 무대 칼춤 무용수로 활동하던 중 스케줄 펑크를 낸 여가수의 대타로 무대에 오르면서 가요계에 데뷔했다. 이때부터 그를 눈여겨본 작곡가 고(故) 이봉조와 3년간 연애한 뒤 결혼했다.
1962년 발표한 '밤안개'로 큰 인기를 누렸으며, 남편 이봉조와 콤비를 이뤄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 없이', '몽땅 내 사랑', '무작정 좋았어요' 등 연이어 히트곡을 발표했다. 현미는 이미자, 패티 김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디바로 꼽힌다.
현미는 지난 2007년 데뷔 50주년을 맞아 연 기자회견에서 “오늘날까지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겐 큰 축복이다. 저에겐 은퇴란 없다. 80년이든 90년이든 이가 확 빠질 때까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노래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여줬다.
‘원조 팝페라 월드스타’이자 국민 애창곡 ‘천개의 바람이 되어’의 원곡 가수로 알려진 세계적 팝페라 테너 임형주가 단독 콘서트를 개최한다. 라는 타이틀로 이달 12일(수) 저녁 7시 30분에 열리는 이번 콘서트에는 뉴저지 신포니에타 음악감독 출신의 마에스트로 이태영의 지휘와 코리안 내셔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함께 할 예정이다.
이번 음악회는 서울특별시 산하 25개 자치구에 거주 중인 코로나19 관련 의료진, 자원봉사자, 구급대원, 관계공무원 등의 ‘국민 영웅’들에게 티켓 기부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천주교서울대교구와 (재)한마음한몸운동본부의 총괄후원을 통해 진행되는 이번 기부는 이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자 마련되었으며, 공연 관람을 원하는 신청자에 한해 티켓을 제공할 예정이다.
임형주의 소속사 ㈜디지엔콤은 공연의 제목을 ‘평화콘서트’로 정한 점에 대해 “완벽히 종식되지 않은 코로나19 대감염 사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가 혼란스러운 요즘”이라며 “오랜기간 대한적십자사,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 열매, UN,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친선대사로 활약한 바 있는 임형주가 수많은 이들에게 ‘힐링’을 선사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했다”고 밝혔다. 이달 말 발매될 자신의 팝페라 정규 8집 ‘Lost In Memory’(잃어버린 추억 속으로)와 동명의 타이틀을 부제로 붙임으로서 새 앨범의 발매를 기념하는 의미도 함께 살렸다는 후문이다.
임형주는 이번 공연에서 이태영 마에스트로의 지휘와 50인조의 ‘코리안 내셔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완벽한 호흡을 자랑할 예정이다. 1960~1980년대 한국음악계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패티김, 펄 시스터즈(배인숙), 트윈폴리오(윤형주, 송창식) 등과 같은 국민 가수들의 대표 대중가요들을 선보인다. 이와 더불어 ‘선구자’, ‘비목’ 등 정규 8집의 수록곡들은 물론 임형주를 위해 작곡된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 ‘꽃 한 송이’까지 첫 선을 보일 예정이다. 클래식, 팝, 재즈, 뮤지컬 등 장르를 총 망라한 팝페라의 세계로 관객들을 안내할 것으로 알려져 뜨거운 호응이 예상된다.
이번 공연에는 이탈리아의 ‘2022 산레모 국제 신인 가요제’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팝페라가수이자 테너 박종수(HUNKTENOR)와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이 배출한 예능인 겸 작곡가 유재환(UL)이 스페셜 게스트로 출연한다. 더불어 해당 콘서트 티켓 판매 수익금의 일부는 세계평화를 위한 기금으로 지정 기부 될 예정으로 밝혀져, 관객들에게 여러모로 가슴 따뜻하고 훈훈한 음악회로 기억될 것으로 기대된다.
총괄후원을 담당한 천주교서울대교구 산하 (재)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천주교서울대교구 산하의 비영리 NGO 단체로서 해외 원조 및 국내 각종 불우이웃 지원사업, 장기기증, 자살예방 등 생명 존중을 위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운영해오고 있다. (재)한마음한몸운동본부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유경촌 주교는 “코로나 시기에 사회취약계층을 지원하고,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한 긴급 모금과 지원을 진행해왔다”라며 “이번 기회로 마음을 위로하는 ‘천상의 목소리’의 소유자 임형주와 함께 코로나 극복을 위해 애쓰고 있는 분들을 초대하는 ‘평화콘서트’를 총괄후원하고, 서울시청과 협의해 공연 티켓 기부를 진행하여 감사와 위로를 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현재 해당 공연의 티켓은 인터파크, 예스24, 예술의전당 공식 홈페이지에서 절찬 예매 중에 있다.
한편, 임형주는 지난 2021년 5월 개신교 신자에서 천주교 신자로 개종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바 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4월부터 현재까지 cpbc 가톨릭평화방송 FM 라디오 종합음악프로그램 ‘임형주의 너에게 주는 노래’의 메인 DJ 로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2~4시에 팬들을 만나고 있다.
반짝이는 것은 늙지 않는다. 일을 향한 열정,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반짝이는 이 역시 늙지 않는다. 춘삼월 여린 잎 같던 목소리는 푸르다 못해 영글었고, 소년은 단단한 어른이 되었지만 반짝이는 두 눈은 24년 전과 다르지 않다. 예술과 사람을 사랑하며 오래도록 푸른 청년(靑年)으로 남을 임형주(37)의 이야기다.
한 단어로 요약하면 ‘최연소’, 하나 덧댄다면 ‘최초’를 꼽겠다. 2003년 만 17세 나이로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서 헌정사상 최연소 애국가 독창자가 됐다. 같은 해에 세계 남성 성악가 사상 최연소로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단독 데뷔 독창회를 가졌다. 국내 3대 공연장에서 독창회를 여는 대기록은 10년 전에 세웠다. 데뷔 15주년에는 앨범 누적 판매량 100만 장을 돌파했고, 최근에는 스승의 날을 기념한 독창회를 열면서 세종문화회관의 모든 무대(대극장, M씨어터, S씨어터, 체임버홀)에 서본 최초의 음악가가 되었다. 음악가로서 세울 수 있는 기록은 전부 휩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두 살 소년이 상상 못한 숫자들
수집하듯 온갖 기록을 쓸어 담은 세월이 24년이다. 지금의 임형주는 데뷔 25주년을 앞둔 대한민국 대표 팝페라 테너지만, 1998년 데뷔 당시 열두 살 소년은 이 모든 기록적인 숫자를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지난 24년이 ‘꽃길만 걷는’ 시간이었을 것 같지만, 그는 스스로 ‘영광과 고난의 역사’를 거쳐왔다고 평가한다. 선배가 없는 팝페라 장르에서 활동하는 건 흙길에 아스팔트를 까는 작업과도 같았다.
지쳤던 걸까. 언제부터인가 국가 기념식이나 올림픽, 월드컵 같은 세계적인 스포츠 행사에만 등장했다.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노래하는 모습조차 보이고 싶지 않았다. 유명세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뜬소문에 지쳤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로마시립예술대학 성악과 석좌교수, 미국 그래미상 심사위원, 음악평론가 임형주로 살았다. 대중과 멀어지면서 ‘세월호 추모곡 가수’, ‘애국가 소년’쯤으로 이미지가 축소됐다.
그러다 가수 임형주가 지난 5월 JTBC ‘뜨거운 씽어즈’로 안방극장에 얼굴을 비췄다. 출연자도, 시청자도 예상 못 한 깜짝 등장이었다. “음정, 박자, 테크닉은 다 차치하고 진정성을 전하는 노래가 최고의 노래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출연진의 도전을 응원한 그는 시니어 합창단과 함께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불렀다. 겸손한 자세와 청아한 목소리가 갖는 힘은 여전했다. ‘뜨거운 씽어즈’에서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함께 부르는 장면의 유튜브 동영상은 두 달 만에 134만 회에 달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대중의 관심이 전보다 덜하리라는 예상을 뒤엎은 수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가수로서 노래하는 제 모습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데뷔한 지 오래되다 보니 ‘왕년의 스타’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어느 순간부터 방송에도 잘 출연하지 않았으니 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그의 데뷔 무대이자 첫 방송 출연이었던 KBS 2TV ‘이소라의 프로포즈’ 영상은 ‘온라인 탑골공원’(1990~2000년대에 유행한 콘텐츠를 올리는 유튜브 계정을 총칭하는 신조어)에 게재됐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는데 너무하지 않느냐며 너스레 떨지만, 대중의 애정과 관심에서 비롯됐음을 알고 있는 그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사람, 사랑을 위한 노래
그는 노래를 고를 때도 대중을 생각한다. 스스로 청중이 되어보고, ‘팝페라 테너’라는 정체성을 되새기며, 이 시대의 대중이 무얼 가장 원하고 듣고 싶어 하는지 고민한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곡들로 그는 사랑을 노래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친구 사이의 사랑이 주제가 되기도 한다. 연인의 애정보다는 인류애에 가깝다.
“연인의 사랑을 다루는 가수는 워낙 많잖아요. 그래서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 휴머니티를 다루었어요. 대중이 가장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음악인 팝을 통해서 인간애를 노래하죠. 사실 예술은 무한하기 때문에 장르로 구분 지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예술의 본질적인 의미는 향유, 즐기는 데 있거든요. 저는 세상에 듣기 좋은 음악과 듣기 싫은 음악, 딱 두 가지 음악만 있다고 이야기해요. 예술가는 대다수가 공감하고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할 줄 알아야 하죠.”
고고하고 우아한 음악을 한다는 생각에 괜히 으스대는 클래식 전공자들을 종종 봤다. 그 역시 정통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그들만의 음악’을 하기 싫었기에 팝페라 테너로 전향했다. 정치·경제만큼이나 문화예술의 중요성이 커지는 요즘, 그는 뿌듯한 한편으로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전부터 ‘문화예술의 일상화’를 주장하던 입장에서,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전하기 위함이다. 즐기기 위해선 공부해야 하는 ‘어려운’ 콘텐츠가 일상에 스며들 자리는 없으니까.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예술을 향유하며 영감을 얻는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 감상은 물론,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로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고, 활자중독이라 할 정도로 책을 읽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쓰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 등. 좋아하는 작가를 묻자 기다렸다는 듯 세계 유수의 작가와 작품명이 쏟아졌다. 최근 그의 마음을 동하게 한 책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다. 지난해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도 그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했다. “타인을 돌보는 마음, 그 사랑이 있기에 사람은 오늘도 살아 있다.” 인간애를 노래하는 가수다운 모습이다.
숲을 만드는 일을 꿈꾸다
올해로 서른일곱의 나이지만, 데뷔한 지 24년이 지났다. 인생의 3분의 2를 올곧이 음악에 바친 셈이다. 인간 임형주의 삶은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지만 흘러간 과거가 아쉽지는 않다. ‘음악과 이혼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도 몇 시간 지나면 새로운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앨범 제작 작업은 뼈를 깎는 고통 그 자체지만, 사람은 죽어도 앨범은 세상에 남아 있을 걸 생각하면 열심히 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요즘 들어 점점 은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굉장히 일찍 데뷔했기 때문에 다른 음악가들보다 조금 이르게 은퇴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커리어상 최정상을 누리는 시기는 이미 지났고, 지금이 제 목소리의 전성기임이 느껴지거든요.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른 뒤에는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에 순응하려고 해요. 돌이켜보니 데뷔하던 때도 왠지 ‘나는 일찍 은퇴할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네요.”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끝을 떠올리자니 가수 임형주를 기다리고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그런데도 아쉬움은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목소리에서 단호함이 묻어났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태도다.
현역에서 은퇴한다 해도 문화예술계에 일조하려는 계획은 확고하다. 그는 예술감독으로 행사를 직접 연출해보고 싶다고 했다. 노래가 꽃이자 나무라면, 가수로서 노래 부르는 것은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가꾸는 일이다. 예술감독은 행사에 쓰이는 모든 음악을 심고 가꾸며 배치한다. 국가 기념식이나 올림픽 개·폐막식이라는 하나의 숲을 만드는 작업이다.
숲을 울창하게 만들어줄 묘목을 가꿀지도 모른다. 그는 최근 국내 대학에서 제안한 교수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팝페라’의 길을 걸을 후배들이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또한 풍부한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예술행정가로도 활약하고 싶다. 인생 2막에 대한 계획을 늘어놓는 모습이 장래 희망이 너무 많아 고민인 어린아이를 닮았다.
바빠 나이 들 시간조차 없는 청년
차차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지만, 당장은 9월에 발매될 정규 앨범 8집 ‘Lost In Memory’를 제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번 앨범에는 1970~1980년대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 시기 대중가요를 담을 예정이다. 독립군 애국가나 ‘봉선화’, ‘사의 찬미’ 등 1920~1960년대 노래를 수록한 정규 7집 ‘Lost In Time’과 시대적으로 연결되는 앨범이다.
“지난 앨범에서 1920년대부터 1960년대의 음악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았으니, 이번에는 ‘잃어버린 추억’에 대해 다뤄보려고 해요. 1970~198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에는 트로트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작곡가 길옥윤, 박춘석, 이봉조와 그들의 뮤즈인 패티김, 혜은이, 정훈희나 이미자의 가요를 녹음하고 있어요. 패티김의 ‘이별’이나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 정훈희의 ‘안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빠질 수 없죠.”
10월 12일에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신보와 같은 이름의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이다. 8집에 실린 노래 외에도 가을에 어울리는 추억의 팝송이나 연주곡을 함께 선보이려 한다고. 50인조 오케스트라 반주를 곁들일 예정이라, ‘사랑은 생명의 꽃’(패티김)처럼 음역대가 굉장히 넓은 곡을 듣다 보면 특히나 코끝이 찡해질 것이라는 전언이다.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우선 첫 베스트 앨범을 내려고 한다. 그의 모든 대표곡을 앨범 한 장에 담을 예정이고, 앨범 발매 기념 독창회 역시 진행하려 한다. 내년에 코로나19가 완화되면 국내나 해외 순회공연도 떠날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전국 25개 도시를 돌아보고 싶어요. 숫자 맞추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TV 프로그램이나 매체 인터뷰 등 섭외 제안이 들어오면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해요. 순회공연을 돌다 보면 한 해가 다 지난 뒤겠지만, 내년은 인간 임형주이자 음악가 임형주로서 제 인생을 결산하는 시기가 되지 않을까요?”
그의 계획을 듣고 있자니 “바빠서 나이 들 시간이 없다”던 유명 배우의 발언이 떠올랐다. 임형주는 배움을 멈추고 안주하려 할 때 사람이 비로소 ‘늙는다’고 생각한다. 고로 꿈이 있는 자는 늙지 않는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 잠을 설치고,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받고 싶은 상이 남았는가”라고 물으면 “당연히”라고 대답한다. 오래도록 푸르를 청년일 수밖에.
3학년 2반 수업은 현재진행형
덕포진교육박물관 1층의 난로 옆에 앉아서 이인숙 선생님을 기다리며 남편이신 김동선 관장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적함이 적당히 어울리는 박물관 외부와는 달리 전시관 내부는 아주 오래전 아이들의 이야깃거리가 와글거리는 듯하다.
“박물관이 조용하지요. 코로나19 이전엔 동창회 모임이나 학생들이 단체로 많이 왔는데 요즘은 모든 게 뜸해요.”
덕포진교육박물관은 이인숙 선생님의 교직 생활 마지막 담임 반이었던 3학년 2반 교실이 있는 1층 인성교육관, 일제강점기부터의 교육과정 관련 사료가 전시된 2층, 3층의 농경문화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전의 방대한 교육 자료들이 새록새록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감성 문화공간이다.
“우린 부부 교사였지요. 어느 날부터인지 아내가 자꾸 눈이 침침하다고 해요. 그래서 병원을 갔다가 시력이 아주 많이 나빠진 걸 알았어요. 한 6년 정도 병원을 계속 다니다가 더 이상 회복 불능… 의사가 그만 와도 된다고 해요. 그래서 빨리 사표를 내게 했어요. 시력을 잃고 평생 천직이었던 일을 그만두는데 그 좌절감에 난리가 났지. 그 기분을 이해하죠. 그래서 살고 있던 대치동 아파트를 팔고 이 박물관을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마지막 담임 반이었던 3학년 2반 교실도 재현해서 지금도 아내의 수업은 진행 중인 듯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녀의 풍금 소리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전시관 입구를 향해 이인숙 선생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슬로 모션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동시에 들려오는 콧노래가 봄바람처럼 부드럽다.
“반가워요. 여긴 처음인가?” 하이톤 목소리가 힘차다. 오래전에 놀러 온 적이 있는데 선생님께서 풍금 치며 ‘오빠 생각’을 들려주었다고 했더니 “그럼 노래 먼저 불러줄까?” 하면서 풍금 앞에 앉아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를 시작으로 “솔솔 부는 봄바람 쌓인 눈 녹이고 잔디밭에 새싹이 파릇파릇 나고요 시냇물은 졸졸졸 노래하며 흐른다~”를 불러주신다.
3학년 2반 교실에 퍼지는 풍금 소리가 마법처럼 금방 추억 속으로 데려간다. 그러고는 “전에 들었다던 ‘오빠 생각’도 불러줄게요” 하면서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늪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실 제~♪” 순식간에 기분이 경쾌해졌다. 그리고 따뜻하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함께 있을 때 새로움이 보인다
마주 앉은 이인숙 선생님의 가꾸지 않은 머리에 희끗희끗 흰머리가 보인다. 어느덧 70대 중반을 넘겼다.
박물관을 둘러보니 이전과 다름없이 여전한 듯, 그런데 잘 살펴보면 좀 바뀐 듯도 합니다.
“바뀌어야지.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고 생각해요. 그대로인 것만 좋은 것은 아니잖아. 그대로이면 고리타분해져요. 디지털과 섞어놔야 추억의 새로운 면도 보이거든.”
요즘은 영국에서 박물관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아들이 덕포진교육박물관 일을 함께 한다. 젊은 세대인 아들 덕분에 새롭게 바뀌는 부분이 있다고 덧붙였다.
“동심이라는 추억이 늘 기억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기억력도 더 좋아져요. 살다 보면 오래된 것들을 소홀하게 생각하는데 이것들을 디딤돌로 삼아 가꾸어진 것에 나는 자부심을 갖습니다. 요즘은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것을 좋아하지만 현재의 디지털 밑거름이 아날로그입니다. 고생 없는 성공을 사상누각이라고 하듯 어르신들의 역사는 오늘의 든든한 밑거름입니다. 뿌리를 단단하게 해야 튼튼한 나무로 키울 수 있어요. 이 박물관에 저장된 모든 것이 지금까지의 내 삶이고 행복한 추억입니다.”
인정하기와 경청
그렇다면 시니어들과 젊은 세대의 간격을 잘 유지하기 위해 경계해야 할 일이나 어떤 해법이 있을까요.
“난 어르신이나 실버란 말보다는 선배라는 말이 좋아요. 노인대학보다는 선배대학이 어떨지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선배와 후배잖아요. ‘라테는…’으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젊은 그들을 인정해야 해요. 도움을 주고 싶다면 짧고 임팩트 있게 전해야겠지요.
특히 시니어들에겐 경청이 중요해요. 독불장군처럼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들에겐 치매나 우울증도 빨리 온다는군요. 성경에도 있잖아요. 귀 있는 자 들을지어다.”
긍정의 힘은 아주 세다
어려움이 많은 요즘입니다. 흔들림 없이 현재를 잘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언한다면.
“이런 말이 있어요. ‘행운은 지각은 하되 결석은 하지 않는다.’ 언제든 온다는 말이죠. 무엇을 이루려면 연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습, 연습, 죽도록 연습입니다. 죽도록 연습해도 죽지는 않아요. 하하. 그리하여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현실 탓, 환경 탓 하기 전에 너 자신을 바꾸어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일상에서 염두에 두는 가치나 마음가짐이 있을까요.
“간단하죠. 내겐 긍정의 힘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 살림집에 화장실이 없고 문 밖에 있어요. 밤중에 화장실에 가려면 다시 양말을 신고 주섬주섬 옷을 잔뜩 입고 머플러로 얼굴을 감싸고 걸어 나와야 해요. 귀찮다고 생각 않고 운동하러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앞을 못 보니까 캄캄한 밤이어도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노래하면서 나옵니다. 하하하. 내 불편을 배우자나 자식이 대신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은 나 자신의 일입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어려움을 넘어선 힘이 있을 것 같습니다.
“눈이 안 보이니까 한탄스러웠지만 빠르게 긍정적으로 바뀌려고 노력했습니다. 말로만으로는 될 리 없어요. 방법을 찾았죠. 좋은 말 외우기입니다. 가장 최고는 노래죠. 내가 생각할 때 대부분의 노랫말은 가장 맞는 말입니다. 노래가 암흑기의 내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뀌게 했지요.”
그러면서 갑자기 “노래 한번 해볼까” 하더니 벌떡 일어나서 “사랑의 노래 들려온다, 옛날을 말하는가 기쁜 우리 젊은 날~” 토셀리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이어서 패티김의 “사랑이란 두 글자는 외롭고 흐뭇하고~”, 가곡 그네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까지 부르신다. 타고난 출중한 노래 실력이었다. 당당하고 거침이 없다. 그뿐 아니라 이야기하는 도중에 틈틈이 들려준 노래가 10곡이 넘었다.
여전히 목소리에 힘이 있고 맑은 소프라노여서 들으면서 즐거운 기운을 얻는다. 매사 자신감 넘치고 씩씩하다. 노래와 함께 즐기는 것이 시 외우기라고 말한다. ‘나만의 두뇌 스포츠’라면서 150편의 시를 외우고 있다니 놀랍다. 그러면서 윤동주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을 줄줄이 읊는다.
나 자신을 가르치면서 산다
이처럼 시종일관 긍정적이고 기운찬 시간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위해 시도 외우고 노래도 하고, 운동 삼아 박물관 3층을 오르내려요. 그러다 보면 주변도 보입니다. 내 앞가림만 하려고 하지 말고 소외된 사람을 찾아보고 마음을 나누다 보면 이게 내 행복이다 생각되고 마음이 열리죠. 시니어라면 그러다가 하고 싶은 일자리가 생길 수도 있고요. 무심히 시간을 보내는 셀프 킬링이 아닌 셀프 힐링이 된다는 거죠.”
이화여대 초등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직 22년, 시력을 잃고 교직을 떠났다.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고, 지금도 찾아오는 관람객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그렇지만 외부에 기대할 만한 세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산다.
그래서 자신만의 멘털 스포츠라는 생각으로 하루에 한 번씩 좋은 일 하고, 10번 웃고, 100자 쓰고, 1000자 읽고, 10000보 걷기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앞이 안 보이는 여건상 쉽지 않다.
“하루 100자 쓰기는 어느 노래든 1절 가사를 꼭꼭 눌러 쓰면 얼추 100자 됩니다. ‘비 내리는 호남선’ 몇 줄 가사 쓰기 쉽잖아요. 나 그게 하고 싶어요. 또 요즘엔 없으면 불편한 스마트폰과 운전면허… 이 두 가지, 내가 그게 없어요.”
유쾌하다가 간간이 쓸쓸할 때도 있다.
선생님께 박물관은 시간 여행이나 마음 나누기 말고도 또 어떤 의미일까요.
“내 마음의 보물입니다. 질 바이든 여사가 백악관에 들어가서도 교직을 유지하잖아요. ‘남을 가르치는 것은 나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다’라면서요. 덕포진교육박물관의 3학년 2반 교실이 있어서 지금도 나 자신을 가르치고 깨우치며 살게 합니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첫 구절만 들어도 바로 떠오르는 ‘나성에 가면’이라는 노래를 부른 세샘트리오. 그 세샘트리오의 보컬이었던 권성희(66) 씨는 누구나 기억하는 노래의 주인공인데도 그 삶에 대해선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외부에 자신을 드러내는 걸 꺼리는 성격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에 자주 보이지 않아도 그녀는 가수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연예인 자원봉사단체인 한마음회 회장, 건강보험공단 홍보대사, CEO클럽 회장까지 맡으며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활발한 사회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올해로 데뷔 45년을 맞이한 그녀의 남다른 소회를 들어봤다.
“권성희라는 사람은 멋있는 가수였다고 기억되고 싶어요. 그래서인지 가정사를 많이 오픈하지 않고 살았죠. 예능에 나와달라는 연락은 많이 받았는데, 남편도 오픈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방송에 나와도 재미없을 거라고 해요.(웃음)”
권성희 씨의 남편은 배우 박병훈 씨. MBC 공채 탤런트 8기 출신으로 ‘제5공화국’, ‘연개소문’ 등의 드라마에 출연한 중견 배우다. 두 사람은 1985년에 결혼했다. 아내가 서른두 살, 한 살 연하였던 남편은 서른한 살이었다.
“남편과는 친구 소개로 만나 연애를 해서 결혼했어요. 착하고 성실해 보여서. 그리고 당시에는 제 나이 서른이 넘으니까 주변에 총각이 없더라고요.(웃음)”
결혼하기 전까지는 연하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결혼을 한 후에야 남편 주민등록증을 보고 나이를 알았다고 하니, 남편이 연하인지도 모른 채 결혼한 셈이다.
“요즘처럼 SNS도 없었고, 방송하고 연습하고 야간 무대 하고 집에 오는 바쁜 생활이었으니 제가 인기 있는 줄도 몰랐어요. 나중에 솔로로 나오고 팬들도 만나니 그때 체감되더군요. 그래서 쉬고 싶다는 생각에 결혼한 것도 있었죠.”
성악가를 꿈꾸던 소녀, 대중 가수가 되다
소녀 권성희는 마리아 칼라스 같은 프리마돈나가 되겠다고 다짐한 성악 꿈나무였다. 하지만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일까. 합격하리라 자신했던 연세대 입시에서 낙방했다. 친구들과 부모님 볼 낯이 없어서 그대로 잠수를 탔다. 그러다 생각을 고쳐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후기 동덕여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낙방의 아픔이 흉터처럼 남은 탓인지, 막상 대학 생활을 해도 학업에 열중하기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방송국의 아는 분들에게서 프로그램에 나와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죠. 그래서 방송을 ‘살랑살랑’ 했어요. 그런데 방송을 알게 되니 재밌더라고요. 성악을 했지만 현미 씨나 패티김 씨 노래를 즐겨 부르기도 했고요. 저쪽으로 가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죠.”
대학교 2학년 때부터는 야간 무대에 서게 됐다. 당시 가수들의 야간 무대는 지금과 달리 자연스러운 무대 활동이었다. 성악을 기본으로 한 탄탄한 가창력으로 주로 스탠더드 팝과 패티김 노래를 부르는 그녀를 찾는 무대가 점점 늘어났다.
“수입이 좋았죠. 월급쟁이가 3만~4만 원 받던 시절에 하루 4만~5만 원을 벌었으니까요. 어느 무대에서는 10만 원, 15만 원을 받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한 달에 몇 백만 원씩 벌었죠. 아직 무명이었는데도요. 그때 연예계가 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라틴 대중가요, 세샘트리오 결성
야간 무대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경희대 성악과 출신의 전항 씨를 알게 된다.
“‘너나 나나 클래식을 했던 사람인데 뭔가 팝이면서도 고급스러운 음악을 불러보자’면서 라틴 음악을 제안하셨죠. 들어보니 멋지더라고요. 그리고 그분이 기타를 잘 치던 홍신복 씨를 섭외했어요. 그렇게 셋이 같이 로스 판초스 같은 혼성 트리오를 결성하기로 해서 만들어진 게 세샘트리오였어요.”
그러나 라틴 음악은 세샘트리오 자신들에게도 새로운 음악이었다. 3개월 동안 매일 아침 만나서 연습을 해야 했다. 저녁이 되면 야간 무대에 섰다. 그러면서 레퍼토리를 늘리고 계속 공부했다.
“카바사, 마라카스, 탬버린 등 라틴 악기들도 다루기 시작했죠. 노래 연습보다 그게 더 힘들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익숙해지니 그게 없으면 노래가 안 되더라고요.(웃음)”
결성 1년 만에 길옥윤 씨가 작곡한 ‘나성에 가면’이 나왔다. 보사노바 장르로 당시 대중가요에선 없던 노래였다. 그러나 엄혹한 시대를 밝히는 밝은 분위기의 노래였던 덕분일까, 홍보를 거의 안 했는데도 대박을 쳤다.
“바쁘니까 제가 스타인 줄도 몰랐는데 어느 날엔가 되어 있더라고요. 1978년부터 1983년까지 세샘트리오의 전성기였죠. 일도 많이 하고 미국 공연도 하고. 그렇게 잘나가다가 남자 멤버들이 외국으로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되었어요.”
사회는 모두가 어우러져 살아야
세샘트리오 이후 솔로 활동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권성희의 삶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한국연예인협회 한마음회에서의 일도 그것이다. 한마음회는 연예인 자원봉사단체로 1981년에 설립되어 2000년에 사단법인이 되었고, 벌써 40여 년이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오랜 역사를 지닌 단체다. 권성희 씨는 2009년부터 회장직을 맡아 다양한 봉사활동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작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비대면으로 활동했죠. 장충체육관에서 4000~5000명씩 모셔서 하는 행사는 어려우니 올해는 찾아가는 봉사를 계획하고 있어요. 4월부터 각 구청의 노인복지과와 연계해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녀는 시간적·재정적 여유가 있으면 봉사는 누구나 해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
“사회란 모두가 어우러져야지 누구는 너무 잘 살고 누구는 너무 못 살면 안 되잖아요. 우리가 받은 것을 조금이나마 되돌려준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어요. 그분들 덕에 우리 일도 유지되는 거니까요. 한마음회 사람들이라면 모두 그런 생각으로 일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통합되어 있기에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었겠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여전히 이어지는 코로나19 상황은 조금 나아지나 싶다가도 집단감염이 거듭 발생함에 따라 위기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권성희 씨는 이런 어두운 시절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회의적으로 생각할 때도 있었죠. 바쁘게 살 때는 행복이 뭔지 모른 채 살았고, 지금은 나른함과 좌절감이 함께 오는 시기죠. 그러나 그런 중에도 행복은 있다고 봐요. 작은 데서 행복을 찾게 되고요.”
그녀는 요즘 시간 여유가 있으니 강아지를 데리고 집 앞을 산책한다. 강아지에게 정이 들어보기만 해도 힐링이 된다고. 처음에는 지금의 언택트 상황이 힘들었지만, 이제는 힘든 와중에도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포인트를 찾아야 한다는 게 그녀의 말이다.
“사실 외로움은 못 느끼고 살죠.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별로 없으니까요. 그런데다 저는 주부면서 사회생활도 하기 때문에…. 여자는 자신을 갖춰야 할 필요가 있어서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런데 남자들은 그게 안 되나 봐요. 코로나19 이전에는 외부 활동을 많이 해서 그런 걸 못 느꼈는데, 집 안에서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완전히 ‘삼식이’들이 됐어요. 그리고 저는 집에 오면 도우미 아줌마가 되죠.(웃음)”
봉사를 넘어 진짜 나눔 펼쳐
뭐든지 열심히 하는 모범생 스타일이라서 그런지 그녀는 올해 9년째 국민건강보험공단 홍보대사를 맡고 있기도 하다.
“홍보대사를 맡으며 각 지역 지사의 행사에 참여하는데 굉장히 보람 있어요. 전국을 다녀보면 재밌게 사는 어르신들이 많아요, 그리고 서울보다 서울 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되레 건강하고 음악을 즐기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걸 보면서 백 원을 가져서 행복한 사람이 있고 백 원을 가져서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가 떠오르더군요. 욕심 없이 살면 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지 않을까…. 코로나19도 그렇죠. 마이너스만 된 게 아니라 인생을 성찰하는 시간을 준 거라고 생각해요. 내려놓는 시간으로 말이죠.”
한마음회 회장, 국민건강보험공단 홍보대사와 함께 그녀는 MBC리더스포럼의 CEO클럽에서 회장직도 맡고 있다.
“사람들이 뭘 계속 시켜요.(웃음) 사람 한명 한명이 참 좋아서 애착이 많고, 배울 점도 많은 모임이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은 중요해요. 그래서 사람은 가정에만 있어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톱스타였던 연예인이 막상 일을 그만두거나 인기가 떨어지면 외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동안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막상 뭘 하려고 하면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안 되려면 끊임없이 사람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그녀는 돈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하고 행복하게 더불어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과 만나서 무슨 이득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사람 관계를 이어가기 어렵죠.”
중년 부부의 솔직한 관계
그녀는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아이를 가졌을 때, 그리고 잠정 은퇴를 했을 때라고 말한다.
“우리 때는 야간 무대 도는 게 당연했어요. 그래서 하긴 하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이제는 야간 무대에서 노래하기 싫으니 쉬어야겠다, 50 먹으면 안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쉰 살이 되었을 때 3년 정도 쉬었죠. 정말 행복했어요. 그런데 3년 정도 지나니 지루해지더라고요. 어느 순간 ‘내가 뭐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속에선 항상 연예계가 그리웠던 거죠. 그래서 앨범을 내고 다시 가수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걸 보면 가정이 있기 때문에 항상 안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혼자였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기도 해요.”
그녀에게 부부란 확고한 동반자다. 서로 아플 때 챙겨줄 수 있는 존재다.
“나이 들면 기저질환이 생기잖아요. 부부라면 그런 걸 서로 챙겨줘야 하죠. 혼자 사는 사람이 가장 서러울 때가 아플 때라고 하잖아요. 부부는 옆에 동반자가 있으니까 그보다 낫죠.”
그래서 그녀는 요즘 유행하는 졸혼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건 이혼이나 마찬가진데, 누가 아이디어를 냈는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관계예요. 불합리해 보이고 나중에는 사라질 거 같네요.”
물론 부부 생활에서 갈등이 없는 부부란 있을 수 없다. 그녀 또한 안 좋았던 시기도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걸 잘 넘어간 이유는 제 덕분인 거 같아요. 그런 상황이 되면 지고 들어갔거든요. 뭐 내가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 거 같은데.(웃음) 그리고 평소에 성질을 안 부리던 사람이 성질을 벌컥 내면 싸우지 않는 게 맞잖아요. 물론 정말로 싫었다면 헤어졌겠죠. 하지만 그보다 좋은 부분이 많기 때문에 상쇄가 됐어요.”
서로 기 싸움하지 말고 내려놔야 한다. 그녀가 말하는 부부 관계의 해법이다.
“남편의 교통사고도 있었고, 모은 돈을 날리기도 했고, 아이 입시 문제도 그렇고.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데 그때는 잠 못 자고 엎치락뒤치락했죠. 이제는 뭐든 잘되겠지 하는 마인드로 살아가요.”
그녀는 요즘 재즈를 배우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생활에 치여 못 했던 도전이지만 예순이 넘어 드디어 하게 되면서 자신이 가수로서 나태하게 산 게 아닌가 반성했다고도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주부로서의 권성희, 사회인으로서의 권성희도 소중하지만, 그녀가 가장 자신 있고 가장 영향을 받는 영역은 역시 가수로서가 아닐까 싶다. 그녀의 방식대로 온전하게 자신에게 집중하며 새로운 즐거움을 실행하는 시간, 그 모든 과정이 인생의 축복이고 봄 햇살처럼 찬란하다.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현재와 호흡하는 그녀의 열정과 삶이 담긴 재즈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본다.
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를 꺼내보는 페이지입니다. 가수 남궁옥분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나도 그랬어, 그랬지!’라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넘겨보는 마당입니다. 글 사진 남궁옥분
어릴 적 동네 사람들이 저를 사과 궤짝 위에 올려놓고 노래를 시키면 곧잘 불러 뜨거운 반응을 받았다는 어머니의 증언!
시작은 미미하고 초라했으나 유년 시절의 그런 일들이 밑거름이 되었던지, 데뷔 후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를 만나 방송국과 국내외 무대를 종횡무진했지요. 하루에 12군데 스케줄을 소화해내며 달리던 1981년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 최초’라는 기록들도 세우며 운 좋게 아직 현역으로 남아 무대를 지키고 있습니다.
40년의 세월 속에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웠던 기억 몇 가지를 꺼내봅니다.
1983년 봄! ‘귀국서약서’를 비롯한 수십 장의 서류를 작성해 통과해야만 출국이 가능하던 시절, 첫 해외 공연을 앞두고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겨서 취소되는 건 아닐까 조바심 내던 때가 생각납니다.
대한항공이 주최하는 미주 공연이었기에 생애 첫 국제선 비행기는 퍼스트 클래스였습니다. 지상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수준의 식사와 서비스는 지금 생각해도 황홀합니다.
처음 타보는 국제선에 처음 밟아보는 미국 땅은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했을 때만큼의 기쁨이라 해도 좋을 만큼 설렘 가득했습니다. 외국에 대한 동경이 컸던 시절이라, 쌀쌀한 초봄에 서울을 떠나 날짜변경선을 경험하고 만난 사계절 여름인 하와이는 가히 충격적이었지요.
당시 교포들도 고국의 소식조차 여러 날을 두고 시간차로 접하던 미국에서 고국의 많은 가수들을 만난다는 건 꿈같은 일이었을 겁니다.
대한민국 당대 최고의 연예인으로 구성된 공연단이 워싱턴DC의 ‘케네디센터’,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가든’,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을 순회 공연하는 일정이었지요. 첫 도착지 하와이에서 동부 뉴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가수 최초의 대형 공연장에서의 공연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답니다.
이미자, 김상국, 조영남, 하춘화, 바니걸스, 국악인 조상현, 이춘희 등 대중가요와 국악계를 빛낸 국내 최고의 가수들이 밴드까지 이끌고 미국 최고의 공연장에서 노래한다는 것은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었습니다.
현지 교민들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감동이었다 할 정도였으니, 그때 막내였던 저로서도 꿈에 그리던 큰 무대에서의 공연을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당시 국내엔 큰 공연장이 없었던지라 무대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한참을 달려야 도달하는 ‘메디슨 스퀘어가든’은 명성만큼이나 저를 주눅 들게 했는데, 훗날 다시 서보니 그때보다는 많이 작아져 있었습니다.
‘케네디센터’는 주변의 모든 시설들까지 대리석으로 완성돼 눈에 띄는 아무 곳에나 대고 셔터를 눌러도 그냥 작품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최초로 공연을 했다는 자부심은 이 글을 쓰면서 되살려본 기억 속에서도 여전히 뿌듯한 기쁨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감동도 ‘카네기홀’을 넘어설 수는 없을 듯합니다.
1989년인가? ‘조영남의 카네기홀 콘서트’를 함께하자 해서 무작정 따라나섰던 일이 제 생애 가장 잊지 못할 영광스런 일이 되었습니다.
메인홀 최초 공연자는 조영남이 아닌 패티김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니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메인홀 공연자는 패티김, 조영남, 남궁옥분뿐이었습니다.
콘서트홀이 아닌 메인홀!
노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며 서고 싶어 하는 가장 영광된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전 충분히 행복합니다.
대한민국의 예술인 의전이 최악이던 시절, 미니 칵테일바까지 있는 하얀 리무진이 뉴욕 시내를 돌아 카네기홀에 내려놓을 땐 이곳을 다녀간 예술가들의 모습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그곳을 거쳐간 영혼들이 지켜준다는 전설 덕분인지, 리허설 때의 긴장감은 아랑곳없이 정말 무언가에 이끌리듯 아주 편히 노래를 했던 기억이 나네요.
미국 스태프들이 공연 중 카메라 촬영도 불허하는 바람에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한 점이 정말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일에 별로 관심 없던 조영남 선배의 성향 때문에 결국 허접한 사진 두 장만이 카네기홀의 그 영광스런 순간을 이야기해주네요. “이게 정말 카네기홀이야?”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평범한 사진이기에 좀 억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많은 예술 거장들이 실황음반을 남기며 사랑했던 역사적인 문화 현장,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 한 귀퉁이를 지키는 남궁옥분에게도 그곳에 설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사진을 찾다가 카네기홀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게 옷에 붙이는 백스테이지 스티커를 만나니 감회가 새롭네요.
이렇듯 살아가면서 ‘최고’, ‘최초’를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입니다.
가수를 직업으로 삼아 살아오면서 참 많은 특혜를 누리고 참 많은 곳에서 대우를 받은 지난 시절이 생각할수록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번엔 호주로 가봅니다.
1987년 호주 공연은 연예인 공식 초청 1호였고, 우리 연예인단은 모두 이민 비자를 받아 입국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민을 꿈꾸던 그 시절! 그곳에 그냥 눌러앉아도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마도 외국을 동경했다면 합법적인 호주 이민이 될 수도 있었겠지요.
정말 모든 게 지금에 비해 허술했던 아날로그 시대의 추억입니다.
호주에서의 잊지 못할 또 다른 추억 하나는, 교민들이 우리에게 건네준 어마어마한 선물들 때문에 공연단 일행 모두가 당시 100달러 남짓 추가 운임을 지불해야 했던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답니다.
그렇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정이 있었고 따뜻한 마음이 넘쳐났지요.
공연 마지막에는 언제나 태극기를 흔들며 ‘고향의 봄’을 함께 불렀습니다. 우리를 보내는 아쉬운 마음에 무대를 향해 눈물을 훔치며 한없이 손을 저어주시는 모습은 어디서든 똑같은 풍경이었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유년 시절을 함께 지켜준 사람들! 평범하게 고무줄놀이, 공기놀이를 하고 가끔 풍금 치며 노래하던 남궁옥분이 이렇게 최고의 경험을 하며 최초의 역사를 간직하고 살 거라는 건 감히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저도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니….
그렇게 준비 없이 등 떠밀려 뛰어들었던 가요계에서 이렇듯 좋은 추억이 많다는 건 축복이고 행운입니다.
언제나 제 삶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빛날 것이기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40년간 ‘종이학’, ‘날개 잃은 천사’, ‘아모르파티’ 등 1200여 곡의 주옥같은 노래를 탄생시켜온 이건우(60) 작사가. 여러 히트곡을 만든 그는 정작 “내가 쓴 가사는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그저 자신이 만나온 수많은 인연이 들려준 이야기를 녹이고 정리했을 뿐이라고. 개인이 아닌 대중의 언어를 담은 가사가 빛을 발했다는 의미일 테다. 그래서일까? 이건우의 가사는 평범한 일상 언어들의 부딪힘 속에서 공감과 위로의 노랫말로 경이롭게 배열된다. 그렇게 지난날 영감을 줬던 사람들과 가사에 얽힌 에피소드를 담아 그는 첫 작품집 ‘아모르파티’를 펴냈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이건우가 작사하고 김연자가 불러 세대를 넘나들며 대박을 터뜨린 곡이다. 특히 “인생은 지금이야”,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등의 가사는 중장년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작사가 인생 40주년을 기념하는 도서에도 동명의 제목을 달았다.
“인생의 콘셉트랄까? 그게 바로 ‘아모르파티’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그 제목을 썼다면 모호했겠지만, 제 책이다 보니 상징적으로 바로 와 닿는 게 있는 것 같아요. 60이라는 나이나, 40주년을 기념하는 제목으로도 잘 어울리고요.”
작사가 역시 글을 짓는 사람일진대, 40년을 활동하며 이제야 첫 책을 냈다니 좀 의외였다. 그러나 그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권, 그리고 지금이 딱 좋다고 말했다.
“자기 분야에 몰입해도 모자랄 사람이 책을 내거나 다른 일을 하는 게 별로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전부터 내 인생의 책은 단 한 권으로 끝내야겠다고 결심했죠. 왜 특별히 40주년에 출간했느냐 묻는다면, 30주년은 좀 덜 익은 것 같고, 50주년은 솔직히 그때까지 가사를 쓰고 있을지 모르겠더라고요. 어느덧 40주년이 됐고, 이제는 제 노래를 한 번 정리해도 괜찮겠다 싶었죠.”
“나는 천재 작사가가 아니다”
이건우는 최근 한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유산슬(유재석)의 ‘합정역 5번 출구’를 작사하며 젊은 세대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작신’(작사의 신)이라는 별명까지 생겼을 정도로 그를 각인시킨 것이다. 식을 줄 모르는 인기 속에서 과거 그가 작사한 곡들이 자연스럽게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옛 노래의 가사를 보면 스스로도 ‘내가 어떻게 이런 가사를 썼지?’ 하며 감탄할 때가 있단다.
“제가 쓴 가사가 좋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이 살아왔어요. 남의 떡이 더 커 보였죠. 그러다 요즘 제삼자의 눈으로 보니 남다르더라고요. 막 훌륭하다기보다는 ‘아, 40년 동안 나도 참 열심히 했구나’ 싶었죠.”
40년을 히트곡 메이커로 달려올 수 있었던 데에는 부단한 노력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우는 최근에서야 그것이 노력의 산물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예술가를 만드는 건 99%가 천재성이라 생각해왔어요. 언젠가 한 학생이 노래 부르는 걸 보고, 가수는 안 되겠다 판단한 적 있죠. 그러고 얼마 전 그 애를 다시 봤는데, 실력이 확 좋아진 거예요. 그때 깨달았죠. 아, 노력이 타고난 것을 이길 수 있구나. 돌아보니, 나 역시 타고난 사람이 아닌데 은연중에 천재성이 있다고 착각했던 거죠. 현재 작사가로 활동하는 데 내가 가진 천재성과 노력의 비율이 3대 7 정도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아마 나이가 들수록 노력의 비율이 점점 10에 가까워지겠죠. 아무리 천재라도 노력 없이 평생 창작할 순 없을 테니까요.”
그런 그가 가장 노력하는 일 중 하나는 바로 사람과의 만남이다. 그는 평소 주변 사람과의 평범한 대화 속에서 영감을 받기 때문이다. 아무리 타인의 이야기를 쓴다고 하지만, 작사가의 인생철학도 가사에 꽤 투영되지 않았을까? 그는 결과적으로 쉽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가령 패티김 40주년을 기념해 쓴 ‘인연’처럼, 대부분의 곡은 가수가 정해지면 작업을 시작해요. 그러면 그 가수에게 어울리는 얘기가 주로 담기죠. 또, 시나 그림 같은 창작물과 다르게, 대중가요는 작곡가, 프로듀서, 편곡가 등 여러 명의 합작품이잖아요. 자기만족만으로 완성할 수 없죠. 물론 일부분 제 인생을 녹이기도 하지만, 오롯이 그것이 드러나긴 어렵습니다.”
중년의 플로리스트를 꿈꾸며
노래가 주는 힘은 ‘위로’와 ‘공감’일 것이다. 이건우 역시 이에 주안점을 두고 가사를 쓴다. 아울러 그는 여기에 한 가지가 요소가 더해져야 진정 ‘좋은 노래’가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노래를 왜 들을까요? 저는 세 가지라고 생각해요. 먼저 나를 위로해 달라, 그리고 내게 감동을 달라, 마지막으로 나를 생각하게 해 달라. 그중 앞의 두 가지를 노래에 담는 게 쉽지 않아요. 세 가지를 다 만족시키긴 아주 어렵다는 거죠. 그러나 생각거리까지 줘야 정말 좋은 노래고, 좋은 가사라고 봐요. 메시지가 중요하단 얘긴데, 그렇다고 노랫말이 무겁고 거창하면 안 되거든요. 가수가 부르기 편하게, 대중이 듣기 쉽게, 최대한 가사의 힘은 빼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렇게 잘 만들어진 노래는 대중에게 감동을 주지만, 이를 위해서는 누구보다 작사가가 먼저 감동을 해야 한단다. 그래서인지 임진모 음악평론가가 이건우를 가리켜 ‘먼저 (자신이) 감동하는 인간’이라 표현한 데에 대해 그는 당연한 얘기라며 수긍했다.
“‘신이시여, 정말 제가 쓴 가사가 맞습니까? 정말 나 미친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제가 쓴 가사를 보고 감동의 클라이맥스까지 가봐야 비로소 작품을 발표하는 거예요. 그 정도는 돼야 대중이 알아줄까 말까 하겠죠. 그런데 나조차도 흔들어놓지 못하는 가사를 내놓으면 과연 누가 그 노래를 듣고 감동을 할까요?”
이건우는 처음 비행기를 탔던 감격의 순간을 담아 ‘황홀한 고백’을 작사했다. 이후론 아무리 비행기를 타도 더 이상 그만한 가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경험이 선사하는 감동이 대단하다는 걸 알기에 늘 도전을 마다치 않는다.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라고 쓴 ‘아모르파티’의 가사처럼, 그는 가슴을 뛰게 할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꽃꽂이와 수화를 배울 거예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죠. 취미 정도가 아니라 준전문가가 될 정도로 해보려고요. 갑자기 유명세를 타는 바람에, 유독 정신없는 한 해를 보냈어요. 알다시피 인기는 한때잖아요. 내년쯤 잘 정리하고, 계획했던 일들을 해나갈 거예요. 예쁜 꽃을 잘 꽂아서 선물도 하고,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수화로 노래를 전달하고 싶어요. 요즘은 그런 의미 있는 일로 누군가가 즐거워할 모습을 상상할 때 가장 설레고 가슴이 뜁니다.”
세월이 비켜간 듯한 목소리, 과거와 똑같은 외모. 30대 중반처럼 보이지만, 올해 그녀의 나이는 만56세. 믿기지 않는다. 절대 동안의 외모, 청아하면서도 파워풀한 목소리로 ‘난 너에게’, ‘내 사랑을 본 적이 있나요’, ‘환희’ 등을 히트시키며 19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군림했던 정수라가 바로 그녀다. 작년에 데뷔 35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치르고 올해 초 신곡 ‘업고! 업고!’를 발표한 후 활동 중인 그녀는 11월에 있을 공연을 준비하며 쉼 없이 바쁘게 살고 있었다. 여전한 카리스마와 놀라운 가창력으로 무대를 휘어잡으며 오늘 현재를 철저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인생관, 그리고 가수로서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업고! 업고!’는 ‘업고 신나게 놀면서 우리 기운을 상승시키자’는 의미예요. 원래는 제목을 영어 그대로 ‘Up Go’(유피 고)로 하려 했는데 작사가 이건우 씨가 ‘영어로 하면 너무 아이돌 노래 같아서 우리 세대는 낯설 수 있으니까 한글로 가자’고 해서 그렇게 됐죠.”
정수라의 신곡 ‘업고! 업고!’를 들어보니 EDM(전자음악을 통칭하는 용어)이 가미된 남진의 노래를 정수라가 부르는 듯한 신나는 곡이었다. 정수라의 대표곡들이 워낙 듣는 사람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노래가 많기에 그런 이미지와도 부합했다.
“‘업고! 업고!’가 나오기 전에는 발라드곡을 발표했어요. 그런데 발라드보다는 힘찬 노래가 어울린다는 피드백이 오더군요. 물론 그런 반응들만 따라가는 건 아니지만, ‘환희’ 이후에 사람들을 업시킬 수 있는 노래를 만들었죠.”
‘아! 대한민국’으로 최고 인기가수
사실 대중이 아는 정수라는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청아한 창법이 특징인 가수다. 이런 이미지를 만든 노래가 바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 번 이상 들어봤을 ‘아! 대한민국’이다. 원래는 타이틀곡도 아니었고 음반에 의무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전가요로 만들어진 노래였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공전의 히트를 치며 제2의 애국가라는 별명까지 갖게 됐다. 지금도 대학가와 운동 경기장을 가면 자주 듣는다. 젊은 사람들도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정수라인 걸 알면 놀라면서 신선하게 느끼지 않을까.
“‘아! 대한민국’은 그 시대에 만들어야 했고 불러야 했던 노래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빵 뜬 거예요.(웃음) 정말 의외였어요. 그래서 정수라는 강하고 씩씩하고, 건전가요에 어울리는 가수라는 인상을 갖게 됐죠. 개인적으론 마음에 안 들어요. 덕분에 쎄 보인다는 말도 듣는데, 저 엄청 여려요.(웃음)”
엄혹한 시대에 숙명처럼 얽혀 슈퍼스타가 된 정수라였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 대한민국’의 대성공 이후로도 꾸준하게 히트곡을 발표하며 1980년대를 상징하는 가수가 됐다. 또 ‘가요톱10’에서 총 21번 1위를 기록하며 역대 세 번째로 1위를 많이 수상한 가수가 되었다. 1980년대에 우리는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살았던 것이다.
다른 세대와의 소통도 필요해
정수라는 중학교 3학년 때 연예계 데뷔를 했다. 어렸을 때부터 독특한 목소리를 인정받은 그녀는 일찌감치 광고음악을 통해 대중과 만났다. 학교보다 스튜디오를 더 많이 다녔다는 그 시절, 그녀를 가수의 세계로 이끌어준 사람은 ‘바람이었나’, ‘풀잎 이슬’ 등의 노래를 만들어준 작사가 박건호였다. 그 후로 36년간 연예계에서 활동한 그녀이지만, 젊은이들 위주의 프로그램이 많은 요즘 방송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다. 혹시 그녀도 대중에게 잊힌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을까?
“무대 위에 올라가면 못 느껴요. 무대에서 내려와 일반 생활을 할 때, 내 연배들은 나를 알지만 그보다 연하인 사람들이 못 알아볼 때는 조금 느끼긴 하죠. 사실 저는 너무 숨어 있었어요. 예능도 안 하고 토크쇼도 안 하고. 카메라를 의식하는 방송울렁증이 있어서, 그리고 뻔한 게 싫어서 그랬죠. 그런데 요즘은 ‘내가 다른 세대와의 소통에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차피 오래 노래하려면 나를 아는 세대하고만 만날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와 어울릴 수 있는 방법도 찾아봐야 하지 않나?’ 하며 되묻긴 하죠.”
얘기를 좀 하다 보니 그녀에게서 가수는 물론 방송인으로서의 욕심 또한 느껴졌다.
“‘불타는 청춘’에 나온 후에는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나를 만난다는 게 얘깃거리가 된 거죠.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저를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나가고 싶어요. 요리 예능요? 내가 요리를 못해. 그것보다는 요리를 배워보는 게 좋겠어요.(웃음)”
노래 안 했으면 연기했을 것
예능 얘기를 하다 보니 천생 가수인 그녀가 만약 노래를 안 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했다. 그녀는 단숨에 ‘연기자’라고 대답했다.
“연기를 하면 다양한 인생을 살 수 있잖아요. 저는 너무 단순해요. 56세이지만 나를 다 못 보여준 거 같아서요. 사람들은 저에 대해 무대 위에서의 파워풀한 느낌만 기억하는 것 같아요. 원래 제 성격은 천방지축이거든요. 이젠 다양한 내면을 드러내고 싶어요”
정수라는 (매니저에게) “너 영화 쪽에 아는 사람 좀 없니?” 하며 웃었다. 요즘 아이돌은 데뷔 전 연기 교육도 기본으로 받는다. 아이돌 가수생활을 발판으로 삼아 향후 연기자로서의 미래까지 염두에 두고 하는 준비다.
“요즘 아이돌, 인정해야죠. 그런 가수들이 성공하는 시대가 된 거예요. 저도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시대를 만나게 된 거고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디제잉하는 친구와 조인해서 EDM을 하고 싶어요. 마돈나처럼, 그리고 인순이 선배가 조PD와 한 것처럼 말이죠. 일단 재밌잖아요.”
멀티플레이어 정수라의 욕심
대화를 나눌수록 그녀가 멀티플레이어 욕심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문득 가수 권인하가 최근 유튜브에 채널을 열어 독보적인 가창력을 뽐내며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요즘에는 노래가 성공하려면 유튜브를 반드시 해야 한다. 가창력 하면 정수라도 결코 뒤지지 않는 가수인데 유튜브를 시도해보면 어떨까?
“유튜브는 와 닿질 않아요. 내가 걸어가는 길이 있는데 굳이 거기에 맞추다가 자칫 잘못하면 마이너스가 될까 걱정되기도 하고요. 일단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게 중요하죠.”
뜻밖의 보수적인 면모가 보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녀의 그런 반응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젊었을 때 근거 없는 악성 루머에 오래 시달렸고, 곧 가수 데뷔 40주년이 될 만큼 오래 연예계에서 일했지만 아직도 방송울렁증이 있다. 그런 경험이 있는 그녀에게 무턱대고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을 여과 없이 노출하는 유튜브는 당연히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수로서의 재능을 생각해봤을 때 유튜브야말로 그녀에게 최적화된 포맷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녀의 향후 행보가 궁금해진다.
하루를 충실하고 행복하게
“젊게 보인다는 것은 저에게는 플러스죠. 필라테스를 6년째 하는 중이에요. ‘내가 힘들 때 뭐하고 있었더라?’ 생각해보니 운동을 하고 있었더라고요.(웃음) 땀 흘리는 게 좋아요”
정수라는 기본적으로 승부근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녀의 노래들이 그렇듯이, 그녀는 지난 몇 년 동안 인생에서 벌어졌던 어려웠던 일들을 하나씩 극복해냈다.
“요즘 몇 년 동안 나 자신에게 ‘정말 대단한 정수라야’ 하며 스스로를 칭찬했어요. 저에게 내일은 없는 날짜이고, 어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에요. 그래서 오늘이 가장 중요해요. 최선을 다하는 게 행복한 하루죠.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내 노래를 듣고 행복해하는 사람들 얼굴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아요. 저는 살면서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게 문제였죠. 바쁘게 주어진 일만 했고 세상 물정을 몰랐고 꼭두각시처럼 일만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세상에 치이고 사람에 휘둘려서 힘들었어요. 나이가 드니 나를 잘 챙기면서 하루를 충실하게 보내는 게 가장 행복한 일 같아요.”
아직 내려놓을 때가 아니더라
정수라의 롤 모델은 패티김, 남진, 조용필 등이다. 그들처럼 기억되는 게 그녀의 꿈이다.
“제가 음악적 자질은 그분들에 비해 많이 모자라요. 더 열심히 해야 했어요. 그래서 롱런하려면 공부를 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선배님들이 롱런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요. 나이를 받아들이고, 정말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멋진 가수로 기억되고 싶어요. 스스로 ‘여기까지가 딱이다’ 할 때가 있을 거예요. 그때 내려놓으려고 해요. 그런데 아직은 아닌 거 같아.(웃음)”
훌훌 털어버리고 살자 하는 그녀에게 요즘은 큰 고민이 없다. 오로지 곧 있을 11월 공연에만 신경 쓰고 있다.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 공연 연출을 위한 팀을 선정했고 아이디어와 연출을 더해가며 준비 중이다. 그런 하루하루가 그녀에게는 앞서 말한 행복의 이유들이 된다. 89세 어머니, 언니, 오빠와 사는 그녀에게 힘들지 않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어, 참 철없이, 열심히 살고 있어요.(웃음)”
허공을 보며 꾹꾹 눌러 웃는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박건호 작사가 주제로 열린 ‘가요무대’ 대기실에서의 만남은 짧았지만 여운은 길었다.
글 배국남 논설위원 겸 대중문화 전문기자 knbae@etoday.co.kr
“제가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해 주위에서 책 쓰는 것을 권했지만, 저술은 작가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해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시간이 흘러 제 살아온 날들을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책을 써봤는데 제 삶을 더 열심히 살게 됐어요. 책 쓰는 것이 저의 삶을 더 알차게 살게 해주는 것 같아요. 제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이고요.” , , 등 에세이, 소설, 요리책 등 8권의 책을 쓴 중견 연기자 김수미(64)가 밝힌 책 쓴 배경과 책 쓰기의 긍정적 영향이다.
요즘 김수미처럼 책을 쓰는 연예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책을 쓰는 연예인들은 빅뱅, 구하라 등 젊은 아이돌가수부터 최불암, 김혜자를 비롯한 원로 연예인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쓰는 책도 요리를 비롯한 좋아하는 취미나 사회 활동과 관련한 에세이, 연예인 삶과 생활을 담은 수필집, 연예인과 밀접한 뷰티와 패션 정보서, 그리고 소설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다. 과거에는 대필 작가에게 의뢰해 책을 쓰는 연예인들이 적지 않았으나 이제는 원고 쓰는 일부터 사진, 삽화 등 직접 작업하는 연예인까지 생겨나고 있다.
최불암, 김수미, 김혜자 등 중장년 연예인에서부터 김병만, 하정우, 유준상, 빅뱅에 이르기까지 연예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책은 연예인의 삶과 생활, 일상에 대한 생각을 담은 에세이다. 연예인들은 에세이를 통해 연예인의 삶과 생활, 연예인에 관련된 다양한 정보뿐만 아니라 인생의 교훈이나 삶의 지혜를 전달하고 있다. 최불암의 에는 배우 입문에서 연기자로 살아오면서 겪었던 어려움, 연기자로 활동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30만 부가 넘게 팔린 김혜자의 는 전 세계 기아 현장과 빈민 지역을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들에 대한 느낌과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해 이 책을 읽은 수많은 사람이 사랑 나눔에 동참하는 아름다운 역할도 했다. 김수미의 는 급증하는 청소년 자살 문제를 다루면서 이를 극복할 방법을 자신의 경험과 사례를 들어 제시했다.
드라마, 뮤지컬, 영화를 넘나들며 맹활약을 펼치는 유준상은 최근 펴낸 에세이집 을 통해 20년차 배우로서의 소소한 삶을 그렸고 사회적 활동을 많이 하는 연기자 김여진은 에세이집 에 사회운동을 했던 대학 시절부터 2011년 홍익대와 한진중공업 노동자 해고사태 등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기록, 배우로서 겪었던 일과 사랑을 담았다. 스타 하정우는 연기에 대한 단상과 연기자의 길을 먼저 걸었던 아버지 김용건을 비롯한 가족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를 펴냈다. 개그맨 김병만은 자전적 에세이집 를 통해 어려운 집안 형편과 기나긴 무명생활을 딛고 달인으로 우뚝 서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통해 용기를 얻었다는 의견을 쏟아냈다. 요즘 10~30대에게 인기가 높은 아이돌그룹 빅뱅의 는 부제, ‘꿈으로의 질주, 빅뱅 13,140일의 도전’이 알려주듯 연습생 시절부터 데뷔해 스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멤버별로 진솔하게 담아 학부모와 청소년들의 높은 호응을 얻었다.
이미자, 장미희, 김미화, 서갑숙, 패티김, 조영남 등도 자신의 일상과 연예 활동과 관련한 수필집을 출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병만은 “제가 힘들게 살았고 어렵게 연예인이 됐지만 꿈을 잃지 않고 살았기에 지금의 제가 있었습니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과 용기를 주고 싶어 책을 썼어요”라고 책 쓴 이유를 말한다.
연예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야인 패션, 뷰티, 다이어트에 대한 연예인 책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고현정이 쓴 은 연기자로서의 삶과 생활, 그리고 여성들이 가장 관심이 많은 피부 관리에 대한 다양한 요령 등이 담겨 있다. 뷰티 프로그램을 진행한 바 있는 연기자 유진의 과 연기자 박수진의 , 연기자 이혜영의 , 가수 옥주현의 등이 대표적이다. 카라 멤버 구하라의 네일북 , 소녀시대 효연의 패션 스타일에 관련된 등도 독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 연예인 뷰티, 패션 관련 서적이다.
연예인들이 많이 쓰는 책은 바로 자신이 하는 취미 생활이나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에 대한 것들이다. 취미를 넘어 그림 그리기가 직업이 된 가수 조영남은 미술 관련 책을 연달아내고 있다. 조영남은 , 등을 통해 미술과 그림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요리 잘하기로 소문난 탤런트 김호진은 을 출간해 화제가 됐으며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하희라, 진미령, 류시원 등도 요리책을 냈다. 가구 만들기가 전문가 수준인 탤런트 이천희는 최근 출간한 에 가구 만드는 법부터 가구 만들기가 삶에 활력소를 주는 이유 등을 담았다.
유기견 보호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이효리는 최근 반려동물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를 펴냈는데 이 책에는 이효리의 사진과 함께 그가 키우는 동물들과 유기견 보호소의 현실, 모피 동물들의 고통이 담겨 있다. 재테크를 잘하기로 유명한 방송인 현영은 를 출간했는데 15만 부가 팔리는 열기를 연출했다.
또한, 연예인들이 만나 진행한 인터뷰를 담은 인터뷰집도 속속 책으로 출간되고 있다. 여성과 주부의 삶에 관심이 많은 박경림은 여성으로, 그리고 엄마와 아내로 성공한 여성들의 인터뷰집 을 펴냈고 방송인 김제동은 시인 김용택, 소설가 조정래, 홍명보 전 축구대표 감독 등 25명을 만나 진행한 인터뷰 에세이집 를 출간했다.
최근 들어 연예인들이 쓰는 책 중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전문성과 높은 글쓰기의 수준이 요구돼 진입장벽이 높은 소설이다. 가수 이적의 , 타블로의 , 차인표의 , , 구혜선의 등은 바로 연예인들이 쓴 대표적인 소설들이다. 이들 연예인이 쓴 소설들은 차이가 있지만 3만~10만 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문학평론가 강유정씨는 ‘패션으로서의 문학’이라는 글을 통해 “연예인이 쓴 소설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제공하는 글쓰기다. 상품으로서의 문학, 연예인 소설의 동시대적 의미는 상품성이 출판의 중요한 잣대가 된 현실, 그리고 팬시한 상품으로서 소설을 선택하는 독자의 경향이 만들어 낸 시대적 산물이다”고 분석했지만 연예인이 쓴 소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독자들도 적지 않다. 직장인 정다정씨(43)는 “차인표씨가 쓴 를 봤는데 ‘자살은 삶의 목록에 없다’는 의미 있는 메시지를 소설을 통해 잘 전달해줬다”고 말했다.
연예인들이 내는 책에 대해 유명성과 인지도만을 내세운 마케팅용으로 내용이 부실하다는 평가 등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 하지만 진솔한 이야기이고 접해보기 힘든 내용인 데다 삶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 주류여서 좋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많다.
책을 내는 연예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책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책을 쓰면서 자신을 돌아보기 때문에 삶을 열심히 살게 된다.”
최불암, 김수미, 조영남 등 책을 3~20권을 낸 중장년 연예인들은 사람들, 특히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신중년 세대에게 책 쓰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책을 쓰게 되면 지나온 인생 1막을 정리하게 되고 앞으로 살 인생 2막에선 오류를 줄이면서 가치 있게 사는 길을 찾게 된다”고 말하면서.
조영남은 책을 쓰게 되면 여생이 훨씬 가치 있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또한, 취미와 사회활동에 대한 책을 쓴 젊은 연예인들은 “자신이 하는 취미생활과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책을 쓰게 되면 직장에서 얻지 못한 생활의 활력을 얻게 되고 직업 이외의 다른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할 수 있어 삶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고 책 쓰기를 권한다.
광복 70년의 역사에서 대중음악은 어떤 분야보다도 일반 대중의 정서와 우리 사회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포착하고 반영하면서 문화의 선두에 서왔다. 한국 사회의 발전상을 축약하면서 우리의 여러 세대와 계층이 알고 기억하는 가장 많은 스타들을 내놓은 곳이 대중가요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글 임진모 음악평론가
광복과 함께 대중음악은 산업적 덩치를 키운 것은 물론 서구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수용한 갖가지 스타일을 만들어내면서 예술적 성장과 성숙을 거듭했다. 대중음악은 광복 이후 70년의 역사 속에서 찬란히 꽃을 피운 것이다.
광복 이전에도 대중이 사랑한 음악은 있었다. 이난영, 남인수, 현인, 고복수 등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가수들은 애초 세련된 음악이었으나 갈수록 서민대중의 호흡과 동행한 음악으로 남은 것은 이후 성인가요로 불린 트로트였다.
조금은 저학력과 가난 혹은 단순한 재미로 연결되는 음악이지만 트로트는 꾸준하게 서민대중의 희로애락을 반영하면서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다.
광복 이후에 트로트는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가 출현하면서 다시금 힘찬 날갯짓을 했다. 1964년 발표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역사상 최초로 100만장에 준하는 가공할 판매고를 수립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미자는 특히 1960-70년대 경제성장의 뒤안길에서 한과 설움을 삼킨 여인들을 대변한 비가(悲歌)를 많이 부르면서 한국 최고의 여가수, 세기의 가수라는 명예를 지키고 있다.
이미자와 남진 나훈아 라이벌전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 우리 대중문화 사상 가장 치열한 라이벌전을 전개한 남진과 나훈아는 이미자를 잇는 트로트의 별이었다. 전국을 삼킨 두 가수의 인기대결은 국민 전체가 둘로 나뉘어 설전을 벌일 만큼 살벌했다. ‘님과 함께’를 비롯한 조금은 밝은 톤의 노래를 한 남진이 경제성장 시기의 빛이었다면 ‘물레방아 도는데’와 같은 구슬픈 노래로 이농(離農)의 고통을 표현한 나훈아는 경제성장 시기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단은 그러나 남진과 나훈아가 겨뤘던 때를 트로트의 마지막 전성기로 규정한다. 그때까지 어떤 장르들보다도 드높은 위용을 자랑했으나 이후에는 시장의 헤게모니를 다른 스타일에 넘겨주게 됐다는 것이다. 1970년대의 하춘화, 1980년대 주현미와 현철, 1990년대 태진아와 송대관, 그리고 2000년대 ‘어머나’의 장윤정으로 트로트계보는 쉼 없이 이어졌지만 위력은 갈수록 떨어졌다.
1960년대 중반까지 독점적 위력을 행사한 트로트는 광복 후 전국에 미군이 주둔하고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문화가 물밀듯 유입되면서 불가피하게 외국의 영향을 받은 음악들과 경쟁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용산 동두천 부평 대구 등 이른바 미8군 지역의 영내와 영외에는 우리 음악가들의 미군을 위한 공연활동이 러시를 이뤘고 이후 그들은 국내 무대에 진출해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송두리째 바꿨다.
트로트 일색이었던 음악계에 그들이 들여놓은 음악은 미국의 재즈와 팝에 기초한 소위 ‘스탠더드 팝’이란 것이었다. 아직도 용어가 불분명한 이 스타일의 음악은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진 해에 히트한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시작으로 현미, 김상국, 최희준, 위키리, 패티김, 정훈희 등의 스타를 배출했다. 발라드를 잘 소화한 스탠더드 팝가수들은 미8군 출신답게 팝송도 자주 불렀으며 노래에 영어를 자주 썼다. 이 가운데 ‘하숙생’의 최희준과 ‘서울의 찬가’의 패티김이 특급스타였다.
서구음악인 스탠더드 팝은 기조와 성격에 있어서 트로트와 대치되는 음악이었지만 국내 방송의 ‘10대 가수가요제’와 같은 프로그램에 의해 트로트와 병치되면서 같은 ‘어덜트(adult) 음악’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베이비붐 세대 이전의 전쟁세대라고 할 1930-40년대 생 인구의 음악에 머무르고 말았다고 할까.
‘록’ 신중현과 ‘포크’ 김민기
미8군을 통해 국내 소개된 음악 중 1950년대 생 이후의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는 청춘의 뜨거운 피를 담은 로큰롤, 즉 록으로(그때 말로는 ‘그룹사운드’) 궁합을 맞췄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는 청춘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키보이스’를 위시한 그룹사운드가 판을 쳤다. 하지만 역사는 국내 최초의 록밴드 ‘애드포’를 결성한 신중현을 ‘한국 록의 대부’로, ‘한국 대중음악의 총설계자’로 상찬하며 고평을 집중한다. 블루스와 싸이키델릭 등 서구의 음악문법을 창조적으로 가공해 우리식 록의 프레임을 주조해냈다는 역사적 평가는 지금도 유효하다.
스스로 ‘아름다운 강산’, ‘미인’과 같은 명곡을 부른 가수인 한편 펄시스터즈, 김추자, 장현, 박인수, 김정미 등에게 ‘커피 한 잔’, ‘임은 먼 곳에’, ‘미련’, ‘봄비’, ‘봄’ 등 요즘 기준에서도 빼어난 수준의 음악을 잇달아 써준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그의 도움을 받은 스타가수들을 언론은 ‘신중현사단’으로 일컬었다. 하지만 1975년 유신시대의 대마초와 금지곡 파동에 활동이 급정지된 그와 함께 한국의 록은 침체기로 접어든다.
록만이 아니라 베이비붐 세대의 또 다른 사운드트랙인 포크도 독재통치의 철퇴를 맞는다. ‘청통맥’ 즉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표현된 베이비붐 세대들의 꿈과 도약, 아픔과 좌절을 창의적으로 그려낸 많은 포크송 가수들이 활동금지를 당하거나 은둔의 처지에 몰렸다. 김민기, 한대수,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서유석, 이장희, 김정호 등이 한국 포크의 기수들이었다. 이들 음악은 전쟁세대보다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은 베이비붐 세대의 대학생들에게 어필했다.
포크 가수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곡을 만들어 통기타와 하모니카로 연주하고 노래하며 이전의 악단과 전문 작곡가가 지배한 풍토에서 탈피, 소위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 시대를 개척했다. 대부분 자기가 쓴 곡을 담은 LP를 최초로 출반한 김민기에 자극받아 동시대의 많은 가수들이 자작곡을 내놓은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김민기는 록의 신중현과 같은 인물이다.
‘아침이슬’ ‘백구’ 등 그가 작곡해준 곡을 불러 유명해진 양희은은 김민기의 페르소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음악의 자가발전을 이뤘다는 점에서 포크를 ‘한국 음악민주주의의 시작’으로 정의하는 관계자들이 많다. 하지만 포크는 베이비붐 세대의 정서라 할 청춘스피릿이 당시 군사정부와 충돌하면서 대마초 파동이라는 암흑기를 초래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네 범주 가운데 어덜트 음악인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이 1980년대에 들어 정체상태를 맞은 반면 시련을 맞은 영(Young) 음악인 록은 1977년 대학가요제와 밴드 ‘산울림’의 등장으로 힘차게 재도약한다. 참신하고 재기에 넘치는 가사와 실험적인 곡 전개를 특징으로 한 산울림은 흑인음악인 펑크(funk)를 실험한 ‘사랑과 평화’와 함께 록의 기운을 되살렸다. 포크는 1970년대 중·후반 이정선, 조동진, 정태춘을 거친 뒤 시대를 고발하는 민중가요를 낳았고, 1990년대에는 김광석이 활약했지만 장르의 파괴력은 2000년대 들어서 현저히 후퇴했다.
‘가왕’ 조용필, ‘10대 대통령’ 서태지
1980년대의 특급 스타들인 조용필, 윤수일, 김수철, 구창모 등은 대부분 록의 세례를 받은 가수들이었고 실제로 상당수가 밴드를 거느리며 대중적 록의 위용을 뽐냈다. 밴드 송골매와 벗님들은 TV에서도 맹활약했다. 하지만 1980년대는 훗날 ‘가왕’으로 통한 조용필의 것이었다. 그는 ‘단발머리’, ‘못 찾겠다 꾀꼬리’ 등 발랄한 록으로 10대 오빠부대를 이끄는 동시에 ‘허공’ 등 트로트 성향의 노래도 불러 다세대를 망라한 국민가수의 면모를 과시했다. 또한 앨범마다 혁신을 불어넣어 단일 곡이 아닌 앨범 전체의 미학과 음악적 완성도가 중요해진 흐름을 견인했다.
아마도 베이비붐 세대와 1960년대 중반 생 이후의 포스트 베이비붐을 함께 묶는 유일한 가수가 조용필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활약하던 1980년대는 가요계의 규모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던 때라서 이전 음악계에는 없던 갖가지 장르의 음악이 용암이 분출하듯 솟아올랐다. 김현식, 한영애, 들국화와 같은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젊은이들이 찾았고 ‘봄여름가을겨울’과 김현철은 재즈를 실험했으며 ‘신촌블루스’처럼 블루스를 시도한 음악가도 나왔다.
이문세에 곡을 준 이영훈과 비운의 천재 유재하는 뽕짝 즉 트로트 느낌을 완전 배제한 팝 발라드의 꽃을 피웠다. 이 음악과 함께 고학력 여성들도 시장의 소비자로 참여하게 됐지만 음악의 주도권은 하이틴으로 넘어가 나미, 김완선, 소방차 등 10대가 좋아하는 댄스음악이 각광을 받았다. 중심이 ‘10대’와 ‘댄스음악’이라는 트렌드를 정확히 간파해 시대를 가른 인물은 1992년 광풍을 야기한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글로벌 시장에서 점프한 케이팝
새로운 음악인 랩을 가요에 접목한 서태지는 신세대인 X세대의 공격성을 노골화한 음악을 구사해 10대대통령 또는 문화대통령으로 불렸다. 그가 랩을 끌어들이고 잠시 후 김건모가 ‘레게’를 유행시키고 듀엣 ‘듀스’가 ‘힙합’을 퍼뜨리면서 1990년대 국내음악 판은 과거에는 홀대된 흑인음악으로 쏠려갔다. 한 사회학자는 “요즘 젊은이들이 흑인음악에 열광하는 것은 백인음악에 압도적으로 경도된 기성세대에 대한 은근한 반란”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서태지가 은퇴를 선언한 1996년부터 음악계는 댄스와 비주얼을 내건 대형기획사의 아이돌 가수들이 판세를 장악했다. 동아시아에 한류 붐을 터뜨린 ‘에쵸티’(H.O.T.)를 시작으로 2세대라고 할 ‘동방신기’, ‘빅뱅’,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투애니원’ 등 아이돌 댄스음악은 20년 가까이 된 지금도 대세를 몰이하며 장수하고 있다. ‘애들 음악은 5년을 못 간다!’는 속설을 깼을 뿐 아니라 ‘텔 미’의 걸 그룹 원더걸스가 등장한 2007년부터는 케이팝(K-Pop)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간 우리의 아이돌음악은 세계에 ‘다이내믹 코리아’의 문화이미지를 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상업적인 아이돌 댄스의 주류음악에 반발해 독립을 외친 인디음악이 소생하기도 했다. 크라잉 넛의 ‘말달리자’는 IMF 시절 넥타이부대의 찬가로 등장, 인디의 가능성을 알렸다.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요원했던 빌보드 차트에서 5주간 2위를 차지, 케이팝의 지평을 크게 올려놓았다. “케이팝 때문에 한국을 알았다”는 세계인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각 세대와 계층의 정서를 담아내면서 대중의식을 이끌어온 대중음악이 광복 70년 역사의 내공을 발휘하며 이제 내수시장이 아닌 지구촌 곳곳에서 찬란한 성공스토리를 써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케이팝이란 깃발 아래 우리 역사의 사운드트랙은 시제를 미래로 맞추고 있다.
△ 임진모 음악 평론가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후 경향신문과 내외경제신문기자를 거쳐 1991년부터 음악평론.
라디오 출연 등 전파. 인쇄매체에서 폭넓게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