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보자! 지루함을 날려줄 이달의 문화행사를 소개한다.
에쿠우스
일정 3월 1일~4월 29일 장소 대학로 TOM 1관 출연 장두이, 안석환, 전박찬, 오승훈 등
라틴어로 말[馬]을 뜻하는 ‘에쿠우스’는 17세 소년이 자신이 사랑하던 말 여섯 마리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르고 법정에 선 엽기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이다. 기독교인 어머니와 사회주의자 아버지 사이에서 잘못된 사랑과 가치관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소년 ‘알런’과 그를 치료하는 정신과의사 ‘다이사트’의 이야기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과 함께 인간의 잠재된 욕망을 보여준다.
명성황후
일정 3월 6일~4월 15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출연 김소현, 최현주, 양준모, 손준호 등
1995년 대한민국 초연 이후 국내 최초로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에 진출한 뮤지컬 ‘명성황후’.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왕비이자 대한제국의 첫 황후였던 명성황후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2015년 ‘명성황후’ 20주년 공연에 처음 출연했던 김소현이 다시 ‘조선의 국모’로 분한다. 그의 남편 뮤지컬 배우 손준호가 극 중 명성황후 남편 ‘고종’ 역할로 출연해 기대를 모은다.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일정 3월 9~18일 장소 강원도 평창, 정선, 강릉
세 번의 도전 끝에 대한민국 평창이 동계올림픽 및 패럴림픽 개최지로 선정됐다. 3월 9일 오후 8시 평창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펼쳐지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18일까지 10일간 설상 4종목(알파인 스키, 바이애슬론, 크로스컨트리 스키, 스노보드), 빙상 2종목(아이스하키, 휠체어 컬링) 등 총 6종목을 두고 금빛 사냥을 펼친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개봉 3월 14일 장르 멜로, 로맨스 감독 이장훈 출연 소지섭, 손예진 등
1년 후 비가 내리는 날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세상을 떠난 아내. 기적처럼 1년 뒤 죽었던 아내가 기억을 모두 잃은 채 남편과 아들 앞에 나타나는데…. 판매 부수 100만 부를 기록한 이치카와 다쿠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소지섭이 남편 ‘우진’ 역을, 손예진이 아내 ‘수아’ 역을 맡았다.
마마 돈 크라이
일정 3월 23일~7월 1일 장소 아트원씨어터 1관 출연 송용진, 허규, 조형균 등
사랑을 얻기 위해 뱀파이어가 되고 싶은 인간vs불멸의 삶을 끝내고자 하는 뱀파이어. 서로 다른 욕망을 좇는 두 남자의 치밀하고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다뤘다. 다섯 번째 시즌 공연을 앞두고 공개한 뮤직비디오 4편은 온라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피카소를 그린 화가, 샤넬을 그린 여자’. 얼마나 대단하기에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을 그려냈을까? 한국 최초로 선보이는 프랑스 여성 작가의 전시회는 이렇듯 가벼운 궁금증으로 문을 두드리게 한다. 전시장에서 첫 인사를 나누듯 초기작을 접하고 생애 마지막 작품까지 감상하니 점점 그 이름이 각인된다.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화가, 사랑에 기뻐하고 아파한 여인의 대서사시가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展’을 통해 펼쳐진다.
마리 로랑생에 대해…
최근 입소문을 타면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展’. 우선 마리 로랑생의 그림을 보기에 앞서 그의 인생 이야기와 연애담을 조금이라도 알면 좋겠다.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단서이자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시대 상황과 맞물린 마리 로랑생 감정 변화는 깊이가 더해지며 다양한 색채로 화폭에 담겨갔다. 1·2차 세계대전 시대를 산 인물로서 누구보다 극적인 삶을 살아왔던 예술가, 바로 마리 로랑생이다.
여성 화가가 드물던 100여 년 전, 마리 로랑생은 미술교육기관인 ‘아카데미 앙베르’에서 교육받았다. 입체파 창시자로 불리는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본격적으로 화가가 된다. 이후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작업실이자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인 세탁선(洗濯船, Bateau-Lavoir)에 다니며 활동했고 ‘입체파의 소녀’, ‘몽마르트의 뮤즈’로 불리며 사랑받았다. 이곳에서 피카소의 소개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5년 여 뜨거운 열애를 나눴던 이들은 기욤 아폴리네르가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도난사건에 연루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후 독일인 남작과 결혼했지만 순탄치 않은 생활을 이어가다 이혼한다. 이후 마리 로랑생은 색채에 대한 섬세한 감각과 독특한 기법을 통해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해나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10년간 그는 예술 활동에 집중했다. 명사들의 초상화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의상과 무대디자인은 물론 도서와 잡지 표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1956년 6월 8일,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숨을 거둔 마리 로랑생은 오스카 와일드와 쇼팽 등이 잠든 페르 라셰즈 묘지(Pere Lachaise Cemetery)에 안장됐다.
파리지엥 작가의 인생 궤적을 쫓다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展’은 마리 로랑생의 20대 무명 시절부터 73세 대가로 죽기 직전까지 작품과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다섯 개의 섹션이 친절하다고 생각될 만큼 깔끔하게 구성돼 작품을 이해하기 쉽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마리 로랑생의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옛 추억을 엿볼 수 있는 사진 19점이 전시 돼 있다. 1부 ‘청춘시대’ 섹션에서는 마리 로랑생이 파리의 아카데미 앙베르에 다니던 시절 그렸던 풍경화와 정물화, 자화상과 피카소의 초상화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열애시대’로 구별한 2부. 입체파와 야수파의 흔적을 보이면서도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마리 로랑생의 고유한 스타일이 드러난 작품을 공개하고 있다. 3부 ‘망명시대’는 마리 로랑생 인생 중 역경의 페이지라고 할 수 있다. 사랑했던 기욤 아폴리네르와 헤어진 뒤 급하게 독일인 남작과 결혼, 신혼생활을 하기도 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난 시기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프랑스에 있을 수 없어 택한 망명길이었다. 이 시기 작가가 느낀 고통과 비애, 외로움을 자신만의 색깔로 더욱 강하게 작품 안에 표현했다.
4부 ‘열정시대’에서는 이혼한 뒤 프랑스 파리로 돌아가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친 시기다. 유럽은 물론 미국에까지 그녀의 이름을 알리게 된 유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특히 1924년 마리 로랑생이 의상과 무대디자인을 담당해 성공을 거둔 발레 ‘암사슴들’의 공연 영상과 의상 도안 등을 살펴볼 수 있다. 5부 ‘콜라보레이션’에는 작가 앙드레 지드의 ‘사랑의 시도’, 오페라 ‘춘희’,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잡지 ‘보그’ 등 마리 로랑생이 북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할 때 발표된 작품 38점이 전시돼 있다. 이밖에 마리 로랑생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과 마리 로랑생의 시집 겸 수필집 ‘밤의 수첩’ 등이 있고, 그의 시를 직접 필사해보는 코너도 마련돼 있다.
전시 정보
일정 3월 11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관람시간 2월 오전 11시~오후 7시 (입장 마감: 오후 6시) /
3월 오전 11시~오후 8시 (입장 마감: 오후 7시)
입장권 성인 1만 3000원 / 청소년 1만 원 / 어린이 8000원
MBC 탤런트 극단이 창단하면서 올린 첫 연극 시연회에 기자 자격으로 초대 받아 갔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쥐덫이었다. 최안규 각색, 정세호 연출, 안지홍 음악으로 되어 있다. 이 연극은 1952년 런던 앰배서더 극장에서 초연한 이래 세인트 마틴 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연하는 작품이란다. 올해 66년째이다. 최장기 연극 공연이며 매일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로 SH 아트홀 앞에는 낯익은 연예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연극이 MBC 탤런트 극단이 마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시연회 이다 보니 이번 출연진 뿐 아니라 복수 캐스팅 되어 있는 다른 배우들도 총 출동한 모양이었다. 극장은 소극장보다는 규모가 커서 안락했다. 맨 앞줄에는 쟁쟁한 MBC탤런트들이 자리 잡고 바로 뒷줄에 앉았다. 2월1일부터 3월25일까지 목금토일에 2회씩 공연되므로 주인공 역은 무려 6명이 교대로 출연한단다.
쥐덫의 스토리는 미리 알고 가면 재미없다. 추리극은 결말을 모르고 같이 추리하면서 몰입해야 재미가 있는 것이다. 런던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폭설이 쏟아진 작은 호텔에 8명이 갇힌다. 형사가 나타나고 주인집 부부는 물론 투숙객 모두가 용의자가 된다. 그 와중에 한 명이 살해된다. 범인은 누구일까로 궁금해진다. 다음 희생자는 또 누구일까 분위기가 긴장된다. 이런 추리극은 초반에 졸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반전이 일어나는 결말도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출연진은 양희경, 임채원, 박형준, 윤순흥, 장보규 등 현역 탤런트들이므로 쟁쟁하다. 연기력 면에서는 나무랄 것이 없다. 다만 TV드라마와 연극의 차이가 있기는 있다. TV 드라마는 카메라에 맞춰 돌아가므로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다른 배우들은 안 보인다. 그러나 연극에서는 한눈에 전 출연진이 다 보이는 몹 씬이므로 관객들은 한눈에 다 본다. 이 점은 시연회가 끝나고 1시간 정도 가진 평론가와 기자들에 의해 옥의 티로 지적되었다.
MBC탤런트는 15년 전 공채에서 끝났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미 막내 기수가 40대 중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인 사람들이 450명 정도 된다고 했다. 15년 전 공채가 끝나고는 연기도 기본적으로 배우는 아이돌 스타 등이 특채로 들어오면서 공채 시스템이 무너진 것이다. 출연 드라마가 늘 있는 것도 아니고 평생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연극이라고 결론지었다는 것이다. 연극 계 출신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지만, 연극무대야 말로 탤런트 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대학로 연극이 좋은 연기자들도 떠나고 좋은 관객도 많이 잃었다고 자평했다. 이런 때에 프로 연기자들이 아마추어리즘으로 다시 연극계에 들어 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입장료가 너무 비싸 보였다. VIP 66,000원, R석 5만원은 대학로 평균 입장료의 배 수준이다. 물론 중견 연기자들의 무대이니 그만큼은 받아야겠다며 책정된 금액이겠지만, 비싼 것은 사실이다. 영화 한편 보고 식사까지 할 수 있는 금액이다. 출연 배우들은 이 공연에서 출연료도 책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연극이 좋아서 연기할 뿐이라고 했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임진·정유 국란의 왜군 출진기지는 규슈(九州) 서북 해안 나고야(名護屋) 성이다. 일본 중부의 중심도시 나고야(名古屋)와 구별하려고 히젠(肥前)이란 옛 지명을 붙여 ‘히젠 나고야’라 불리는 곳이다.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40여 분 달리면 닿는 요부코(呼子) 포구 언덕 위에 있다.
굴곡이 심한 해안선 깊숙한 만(灣)에 얼마든지 배를 숨길 수 있고, 조선과의 거리가 제일 가까운 지리(地利)를 고루 갖추어 옛날부터 왜구의 소굴로 유명했던 곳이다.
26년 만에 다시 찾아본 나고야 성은 그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흘러간 옛 노래 ‘황성옛터’를 연상시키는 무너진 성벽이 옛날 그대로였다. 일본이 군신으로 떠받드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글씨로 ‘名護屋城址’라고 쓴 비석도 같은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헛꿈을 조롱한 쇼와(昭和) 시대 하이쿠 시인 아오키 겟토(靑木月斗)의 시비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수십 년이 걸린 성터 발굴·복원사업이 끝났다지만 겉보기에 변한 것은 없었다. 주말 낮인데도 탐방객 발길이 뜸해 적막하기만 했다. 성터 입구에 자리 잡은 박물관과 그 앞에 조성된 상가만이 옛날에 없었던 건물이다.
도고 헤이하치로 글씨로 된 성적(城跡·성터) 비는 1930년, 겟토의 시비는 1940년에 세워졌다. 그러나 두 돌의 언어는 사뭇 다르다. 도고의 비에는 옛 성터라는 글자뿐이지만, 그것이 세워진 시대와 세운 자의 뜻에 히데요시의 대륙 정복 야망을 그리는 마음이 오롯이 드러나 보인다.
1930년이라면 일본의 만주 침략 야욕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다. 내무성이 그 돌을 세우면서 러일전쟁 영웅에게 글씨를 부탁한 가슴 밑바닥에는 일본인들이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존숭하는 뜻이 꿈틀거렸으리라.
1940년에 세워진 겟토 시비는 히데요시의 망상을 비웃는 것 같다. “다이코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지만 바다에는 안개만 자욱해.” ‘다이코(太閤)’란 천황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관백(關白) 자리를 아랫사람에게 물려주고 상왕처럼 물러앉은 이를 말한다. 히데요시는 조카(秀次·히데쓰구)에게 양위한 뒤에도 만사를 제멋대로 한 사람이다.
그런 권력자가 아무리 대륙 진출 야망으로 용을 써도 그 꿈은 안갯속에 가물가물하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가. 실제로 성터에서 바라본 현해탄 바다에는 쓰시마의(對馬島) 모습조차 어렴풋했다.
26년 만의 탐방객을 놀라게 한 것은 성터에 우거진 고목나무 가지에 달려 있는 올레길 리본이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천수각 가는 길가 나뭇가지에 달린 것이었다. 반가워 카메라를 들이대니 일본인 탐방객이 “그게 무엇이기에 사진을 찍느냐”고 물었다. 한국 제주도 올레길 표시라는 말에 그들은 “천수대 터에도 많다”고 알려줬다. ‘제주 올레가 일본과 몽골에 수출되었다더니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너무 반가웠다.
그의 말이 맞았다. 금빛 찬란한 천수각이 있었다는 천수대 터에는 쇠막대기로 만들어 세운 올레 표지물도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가라쓰에서 규슈 서북단 히라도(平戶) 섬에 이르는 해안선 구간에 올레길이 조성되어 한국인 여행객에게 인기가 있다 한다. 나고야 성을 찾아가는 도로표지판마다 한글이 병기된 것도 그래서구나 싶었다. 7년 동안 나라를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했던 왜란 출진기지가 평화의 길이 된 것을 400여 년 세월의 작용이라고만 보아 넘기기에는 좀 미진한 뒷맛이 남았다.
임진왜란 400주년 기획 시리즈 취재 차 나고야 성에 갔던 1991년에는 유적지 발굴사업이 한창이었다. 옛 성터를 정비해 관광자원으로 삼기 시작한 때여서 일본인 관광객 발길이 잦았다. 그 르포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차츰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 규슈 관광의 인기 코스가 되었으니, 세월의 두께를 새삼 음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모습 그대로 두는 것이 역사의 참뜻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무너진 성을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특파원을 안내해준 진제이(鎭西) 초(町·일본의 행정구역 단위) 직원은 복원사업이 현상을 그대로 두고 발굴만 하는 것이라 했다. 히데요시 이후 염전·반전사상의 결과로 폐허가 된 성을 그대로 두는 것도 역사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정작 옛 자취를 찾게 된 것은 나고야 성 주변에 촘촘히 자리 잡았던 130여 개 번국(藩國)의 진터다. 독재자 히데요시는 휘하 영주[大名]들에게 전쟁기간 중 출진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 아래 대기하도록 요구했다. 출진 후의 병력보충 병참 등 임무를 강제했기 때문에 전국의 영주들은 수많은 예비 병력을 거느리고 눌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진터들은 전후 폐허가 되었다가 사유지로 바뀌어 흔적마저 감추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복원사업의 큰 틀은 그 땅을 사들여 옛 모습의 윤곽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물관을 지어 전쟁의 배경과 경과, 그리고 양국 평화의 지향점을 모색하고 홍보하자는 것이었다.
나고야 성은 축성과 폐성이 모두 전광석화 같았다. 인구 20~30만 명의 거대한 병영도시 나고야 성은 번개같이 건설되어, 또 그렇게 해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최고 권력자가 사라지고 세상이 바뀌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건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처럼 철저하게 무참하게 파괴된 일은 흔하지 않으리라.
일본 통일의 꿈을 이룬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를 손아귀에 넣어 동아시아 패권을 잡겠다는 망상으로 1590년부터 대륙 침략을 꿈꾸기 시작한다.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영토를 넓혀 부하들에게 봉토를 나눠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 계획에 비판적이던 동생 히데나가(秀長)가 죽고, 천금보다 귀히 여기던 외아들 쓰루마쓰(鶴松)마저 잃어 심신이 극도로 피폐했던 1591년 8월, 그는 규슈 지방 영주들에게 ‘대륙 경영 사업’ 개시를 선언하고 적지에 출진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한다.
당시 일본에 와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에는 그때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관백(히데요시)이 조선으로 가장 쉽게 건너갈 수 있는 항구가 어디인지를 묻자 가신들은 나고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가 있는데, 수천 척의 선박이 안전하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국의 영주들을 나고야에 집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각자의 부담으로 궁전과 해자와 저택으로 꾸려진 화려하고 넓은 성채들을 조속히 축조하되, 교토에 지은 것보다 뒤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문장에서 주목할 것은 교토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궁전과 성채를 영주들 각자의 부담으로 건설하라는 ‘후신(普請) 명령’이다. 후신이란 불교에서 민간에 널리 시주를 청해 불당이나 탑을 짓거나 수선하는 사업이란 뜻이지만, 절대 권력자가 영주들에게 갖가지 토목·건축사업을 시킨 일을 뜻했다. 나랏돈은 10원도 쓰지 않고 국책사업의 돈과 인력을 영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아무리 봉건시대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횡포와 전제가 있었는지 흥미롭다.
프로이스는 영주들이 꼼짝 못하고 명령을 수행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영주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이었다. 작업 중 사소한 부주의를 저지르면 감독들에게 공개적으로 질책을 당하게 되고, 그것이 관백에게 무능력자로 낙인찍혀 추방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축성 책임자는 히데요시의 오른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공사 책임자는 뒷날 이 지역 영주가 된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澤廣高)였다. 원래 있었던 가키조에(垣添) 성을 헐어 규모를 크게 확장하고, 사방 3km 이내에 130여 번국 영주들의 진영(陣營)을 건설하는 일본 역사상 초유의 대토목 공사였다. 성 공사는 착공 6개월 만에 완공되었고, 영주들의 진영이 완성되는 데는 8개월이 걸렸다니 얼마나 공사를 서둘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본성 공사는 규슈 지역 20여 명의 영주들이 비용과 공력을 분담했고, 나머지 공사는 각 영주들 책임 아래 시행되었다. 해발 89m 나지막한 구릉 꼭대기에 혼마루(本丸)를 짓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5층 규모의 천수각을 세웠다. 그 아래로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 부속시설과 병사를 배치하고, 주변에 견고한 석축을 쌓아올려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외성은 주변에 해자를 둘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전형적인 왜성이었다. 성의 총면적 50만 평은 일본 최대의 오사카 성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성의 크기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시대 인구 30만을 가진 도시는 오사카 말고는 없었다. 성내에는 히데요시의 측실(廁室)을 위한 사찰과 다실, 전통 가무극 ‘노(能)’ 공연장까지 있었다. 그 시대에 그려진 병풍도에는 성내의 건물 약 70여 동, 그 아래 조카마치(城下町)의 일반 백성 주택과 점포 260여 동, 진영 시설 70여 동 등 400여 동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나고야는 외국인 왕래가 잦은 국제도시이기도 했다. 병풍도에는 명나라 사절단 40여 명과 포르투갈인 등 260여 명의 통행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는 조선에서 잡혀온 포로들을 사들여 해외로 팔아넘기는 노예 상인들도 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정희득(鄭希得)은 실기(實記) 에 “나고야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의 반 이상이 조선인”이라고 썼다. 그들 대다수가 붙잡혀간 사람들이었다.
통행인 가운데는 남자들 소매를 잡아끄는 유녀(遊女)의 모습도 보인다. 해안 거리에는 유곽과 술집이 줄지어 있고, 각 번의 진에서는 수많은 사졸이 할 일 없이 소일하고 있었다. 노예장사로 재미를 본 외국인들도 돈을 풀어 즐거움을 샀을 것이다.
발굴 작업 중 천수각 주변에서는 금박기와편이 많이 출토되었다. 벽면뿐 아니라 기와에도 금박을 입혀 금빛으로 번쩍이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성의 건설과 전쟁 수행에 시달린 일본 민중의 고난이 기록으로 남았다. 병력 1만5000명을 할당받은 사쓰마(薩摩) 번(藩·제후가 통치하는 영지)의 경우 7000명이 넘는 아시가루(足輕·보병)와 6000명이 넘는 인부를 징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모두 농·어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었다. 갖가지 무기와 장비, 병량과 말먹이, 군수품 및 병선 조달과 운용도 백성들 몫이었다.
백성들 고난은 그것으로도 모자랐다. 히데요시는 곧 조선으로 건너가겠다면서 중간에 머물 이키(壹岐) 섬과 쓰시마(對馬島)에도 성을 쌓고 궁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려 부하들과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키 섬에는 아직도 그때의 성터가 뚜렷이 남아 있다. 백성들의 피땀을 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아방궁’을 지은 것이다.
침략군 출진은 1592년 3월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 대부터 하시바 히데카쓰(羽柴秀勝)의 9번 대까지 총출진 병력 15만8800명, 출진을 도운 예비부대와 병참요원 등을 합친 총인원은 30만5300명으로 기록돼 있다(역사군상 시리즈 ). 비탈진 구릉 도시에 인파가 북적거렸을 날에 비해 오늘의 정적(靜寂)과 정일(靜逸)은 너무 대조적이다.
히데요시는 침략군이 떠난 3월 26일 교토를 떠나 4월 25일 나고야에 착진(着陣), 1년을 머물며 전쟁을 지휘했다. 그 기간 협상 사절로 온 명나라 유격 심유경(沈維敬)을 접견하기도 하고, 여러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내오는 보고서와 진귀한 전리품을 받아들고 천하를 얻은 듯 기고만장했다. 심유경의 거소는 명군 유격이 머물던 곳이라 ‘유게키마루(遊撃丸)’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런 영화의 무대였던 나고야 성은 전후 곧바로 참담하게 해체되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가스미가세키 패권 전쟁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전투에 공을 세운 데라자와 히로타카에게 히젠 나고야 땅을 영지로 주었다. 성을 축조할 때 공사 총감독으로 기여하고 조선에 출병한 공로까지 인정한 것이다.
데라자와는 1602년 나고야 성을 허물고 가라쓰 해변에 자신의 성을 축조했다. 조선 침략의 상징물인 그 성을 허문 것은 일개 영주의 결정이 아니었다. 조선과의 무역 재개와 친선관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이에야스는 성을 허물어 전쟁에 반대했던 자신의 뜻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전쟁 기간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었거나 오래 빼앗겼던 민중은 전쟁에 치를 떨었다. 7년 동안 헐벗고 굶주린 것이 모두 전쟁 탓이라 여겼던 민중의 염전사상(厭戰思想)은 하늘을 찔렀다. 반전사상과 염전사상은 지금 허물어진 성터 위에 아기 불상의 모습으로 남았다.
데라자와는 그렇게 허문 성석과 건물의 자재를 고스란히 자신의 성 쌓기에 사용했다. 마쓰우라(松浦)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 한껏 멋을 부려 쌓아올린 가라쓰 성은 멀리서 보면 학이 나래를 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무학성(舞鶴城)이라 불린다.
그렇게 헐린 나고야 성은 얼마 후 일반 민중의 공격으로 또 한 번 상처를 입는다. 163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독교 탄압과 가혹한 조세가 원인이었던 시마바라(島原) 민란 때였다.
성터 입구 ‘나고야 성 박물관’ 현관 앞에는 제주도 돌하르방 부자가 서서 탐방객을 맞아준다. 일본인들은 이 낯선 ‘수문장’ 앞에서 반드시 발길을 멈추고, 더러는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 박물관의 성격이 ‘일본열도와 조선반도의 교류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전시물이 한국 고미술의 상징인 반가사유상 복제품이다. 7세기 중국과 조선반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 처음 율령 국가가 세워졌다는 설명문이 그 아래 붙어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이 거북선 모형이다. 실물보다 많이 축소된 것이지만 여수나 통영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다. 문을 들어서 처음 맞닥뜨리는 공간에 자리한 거북선 옆에는 당시의 일본 전함 아타케부네(安宅船) 모형과 두 나라 병기, 무복, 전황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전쟁을 조명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exhibition
다빈치 얼라이브: 천재의 공간
일정 2018년 3월 4일까지 장소 용산 전쟁기념관 기획전시실
예술, 과학, 음악, 해부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류사적 업적을 남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를 색과 빛, 음향으로 재조명한다. 전시는 ‘르네상스, 다빈치의 세계’, ‘살아있는 다빈치를 만나다’, ‘신비한 미소, 모나리자의 비밀이 열린다’ 등 총 3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제1섹션에서는 실물 크기로 재현한 다빈치의 발명품을 직접 만지고 체험할 수 있다. 이밖에 베네치아에 보관된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도’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영상을 볼 수 있다. 다빈치의 걸작으로 꼽히는 ‘모나리자’에 관심이 있다면 제3섹션을 확인하자. 세계적 미술 감정 기업인 뤼미에르 테크놀로지가 모나리자 원화를 10년간 분석해 밝혀낸 25개의 비밀을 공개한다. 당시의 색감을 그대로 복원해 재현한 진짜 모나리자를 감상해보자.
더 아트 오브 더 브릭
일정 2018년 2월 4일까지 장소 아라아트센터
전시회의 주인공인 네이선 사와야는 세계 최초로 오직 ‘레고’만을 사용해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다. 지구본, 전화기 등 아기자기한 생활 소품부터 인체의 다양한 움직임을 표현한 작품까지 약 100만 개의 레고를 사용해 제작한 총 1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연인(키스)’,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등 유명 예술가들의 대표작도 만나볼 수 있다.
전시품 관람 이후엔 레고를 활용해 작품을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디 아트 오브 더 브릭’전은 세계에서 꼭 봐야 하는 10개의 예술 전시 중 하나로 소개되었으며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했다.
◇book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저·나무생각)
늙은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가 매일 100개의 도토리를 심으며 기적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황량했던 언덕이 생기를 되찾고, 말라버린 하천에 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진정으로 옳다고 믿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언가를 처음 시도하는 사람의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닫게 해준다.
환자 혁명 (조한경 저·에디터)
현직 의사가 기존의 의료 상식에 반기를 들었다. 환자를 향해 ‘자기 병에 더 큰 관심을 가지라’고 잔소리하는 저자는 ‘약과 병원에 의존하지 말고 건강 주권을 회복하라’고 주장한다. 성인병 치료의 열쇠는 환자에게 달려 있다며 스스로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쉬우면서도 다양한 ‘혁명’을 제시한다.
◇movie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스타워즈’ 시리즈가 첫선을 보인 지 40년이 되는 올해 또 하나의 시리즈가 탄생했다. “선과 악의 전쟁, 거대한 운명이 결정된다”는 문구가 눈에 띄는 이번 영화는 비밀의 열쇠를 쥔 ‘레이’를 필두로 ‘핀’, ‘포’ 등 새로운 세대가 중심이 되어 운명을 결정지을 빛과 어둠, 선과 악의 대결을 보여준다.
이번 영화는 ‘레아 공주’ 역으로 얼굴을 알린 캐리 피셔가 지난해 작고하기 전 연기한 시리즈로 그의 마지막 ‘레아 공주’를 감상할 수 있다. 전편에서 감독으로 활약한 J.J. 에이브럼스가 제작에 참여하고 향후 시리즈 3부작 연출이 확정된 라이언 존슨이 연출을 맡았다.
개봉 12월 14일 장르 액션, SF 감독 라이언 존슨 출연 마크 해밀, 캐리 피셔, 아담 드라이버 등
아들에게 가는 길
코다(CODA, 청각장애인의 정상인 아이) 가정의 한 장애인 부부가 아들을 키우면서 겪는 문제를 다룬다. 아들의 미래를 위해 시골 할머니 댁에 보내지만 떨어져 지내는 만큼 아이와의 거리도 멀어진다. 진심으로 다가서려 하는 부모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부모가 답답한 아이.
자식은 어떤 존재이고 부모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묻고 가족 해체가 가속화하고 있는 이 시대에 가족의 소중함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이 영화로 2016년 제17회 장애인영화제에서 우수상, 관객심사단상을 수상한 최위안 감독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개봉 11월 30일 장르 드라마 감독 최위안 출연 김은주, 서성광, 이로운 등
◇stage
빌리 엘리어트
2010년 한국에서 최초로 초연된 뮤지컬 가 7년 만에 다시 한국 무대에 오른다. 1980년대 영국 북부 탄광촌이 배경이다. 복싱 수업 중 우연히 접한 발레를 통해 꿈을 이뤄가는 소년 ‘빌리’의 여정을 보여준다.
장소 디큐브아트센터 일정 2018년 5월 7일까지 연출 스테판 달드리 출연 천우진, 김갑수, 최정원 등
블라인드
시각을 잃은 후 세상과 단절된 청년 ‘루벤’과 몸과 마음이 상처로 가득한 여자 ‘마리’가 만나 마음으로 서로를 느끼며 교감을 해나가는 사랑 이야기다. 오로지 마음으로만 교감하는 둘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봐야 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장소 수현재씨어터 일정 2018년 2월 4일까지 연출 오세혁 출연 박은석, 이재균, 김정민, 정운선 등
거미여인의 키스
남성 2인극으로, 이념이 다른 두 주인공인 몰리나와 발렌틴이 감옥에서 만나 서로를 이해하며 다가가는 슬픈 사랑을 연기한다. 몰리나 역은 배우 이명행과 김호영이, 발렌틴 역은 송용진과 김선호가 지난 공연에 이어 재연을 확정했다.
장소 아트원씨어터 2관 일정 2018년 2월 25일까지 연출 문삼화 출연 이명행, 이이림, 김주헌 등
타이타닉
타이타닉 사건이 발생한 지 105년, 브로드웨이 초연 20년 만에 한국 무대에 상륙한다. 영화가 이 사건의 비극적인 사랑에 집중했다면 영화보다 앞서 제작된 뮤지컬 은 배가 항해하는 5일 동안의 사건과 인물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장소 샤롯데씨어터 일정 2018년 2월 11일까지 연출 에릭 셰퍼 출연 김용수 왕시명 이상욱 등
요즘 사람들은 ‘김유정’ 하면 아역배우에서 여배우로 잘 자란 김유정을 생각하겠지만 시니어 세대는 단연 소설 과 의 작가 김유정(1908~1937)을 떠올린다. 그 김유정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믿겠는가? 경춘선 김유정역에 내려 유정반점과 유정부동산을 지나 오른편에 김유정우체국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김유정문학촌이 나타난다. 여인의 사랑 대신 만인의 사랑을 지금까지도 흠뻑 받고 있는 작가 김유정이 지금 그곳에 살아 있다.
강원도 실레마을에 김유정이 살고 있다
김유정역에 내려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김유정문학촌이 있다. 김유정문학촌이 자리하고 있는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은 과거에 ‘실레마을’로 불리던 작은 마을로 김유정이 나고 자란 고향이다.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떡시루 같다 해서 강원도 말로 ‘떡시루’를 뜻하는 ‘실레’가 마을 이름으로 불렸다. 8만 평 규모의 문학촌 안에는 복원된 김유정의 생가터는 물론 소설 속 배경이 됐던 장소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무엇보다 이 동네가 재밌는 것은 모든 것이 김유정으로 통한다는 점. 전국을 통틀어 사람 이름으로 지어진 역은 김유정역이 유일하다. 또한 ‘봄·봄’, ‘이쁜네’ 등 동네 안의 상점, 음식점, 소소하게 이름 붙여진 모든 것이 김유정과 연관됐다. 작고 조용했던 실레마을은 김유정과 그의 소설들이 살아 숨 쉬는 풍요의 공간이 됐다. 작가들을 기리는 대부분의 공간은 ‘문학관’이라고 불리지만 이곳은 ‘문학촌’이라 이름 붙였다. 사실 이곳에 김유정이 남긴 유품은 따로 없다. 휘문고보 시절부터 절친으로 알려진 작가 안회남(1909~?)이 월북하면서 김유정의 유품도 함께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작가의 물건이 없기 때문에 생가터를 복원하고 체험관을 열어 일종의 김유정 테마공원으로 조성했다.
김유정의 동백은 노란색이다.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왼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 김유정의 중에서
지금까지 김유정의 소설 에 나오는 동백꽃이 흔히 아는 빨간색이라고 생각했다면 소설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 동백꽃 하면 익히 남쪽에 피는 꽃만 연상해왔는데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색과 형태를 가진 동백꽃이었다. 강원도 사람들은 노란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 아니면 산동백으로 불렀다. 김유정이 말하는 동백꽃은 노란색 별꽃같이 생긴 것이 촘촘하게 핀 것이다. 언뜻 보면 산수유처럼 생겼는데 꽃 향을 맡아보면 생강 냄새가 난다. 김유정의 동백나무가 궁금하면 동백꽃이 피는 3월과 4월에 꼭 김유정 문학촌에 가보시라. ‘한창 피어 퍼드러진’ 동백꽃의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
29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김유정은 살아생전 두 명의 여자를 짝사랑했다. 인간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명창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였던 박녹주(1904~1979)와 시인 박용철의 누이동생이자 시인인 박봉자(1909~1988)였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윈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한 해 어머니를 닮은 박녹주를 만난다. 소위 갓 대학에 들어간 남학생이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에게 도를 넘어선 구애를 펼친 것. 2년여에 걸쳐 박녹주에게 사랑을 넘어서 집착에 가까운 행동을 했지만 완강한 박녹주의 거절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인 실레마을로 돌아와 주옥같은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자 박봉자가 있다. 1936년 5월호에 ‘그분들의 결혼플랜-어떠한 남편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라는 제목으로 김유정과 박봉자가 나란히 글을 올렸다. 일면식도 없던 그녀에게 빠지게 된 것. 30통의 편지를 보냈으나 박봉자는 김유정과 알고 지내던 문화평론가 김환태와 혼인했다. 이후 10개월 후 김유정은 세상을 떠난다. 죽기 전까지 아픈 몸을 이끌고 , , 등을 발표하며 창작에 열을 올렸다. 김유정이야기집에 마련된 오래된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가까이 대면 김유정의 구애를 거절하는 한 여성의 단호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문학계에서는 김유정이 누구와 사랑을 이루었다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연간 100만 명가량이 방문하는 김유정문학촌은 김유정 문학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행사와 공연을 열어 관람객들의 발길을 모은다. 특히 5월의 김유정문학제 ‘봄·봄’이 가장 큰 행사라고. ‘봄·봄’, ‘동백꽃’의 점순이 찾기 대회와 ‘실레마을 닭싸움’ 등이 인기 프로그램. 닭싸움은 실제 닭들이 겨루는 행사였으나 동물학대 논란이 있어 올해부터 사람들이 닭싸움을 하는 놀이로 바뀌었다. 매년 3월부터 10월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김유정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호흡하는 ‘김유정문학촌’이다.
이용 정보
주소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김유정로 1430-14
전화 033) 261-4650
관람시간 동절기 9:30~17:00 /하절기 09:00~18: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입장료 개인 2000원 / 단체(20인 이상) 1500원
사람이 서로 알아갈 때 인사라는 과정을 통한다. 잠깐 동안의 첫인상. 목소리에서 기운을 느낀다. 표정을 읽는다. 차차 친해진다. 이 모든 과정이 있었나 싶다. 마음은 허락한 적 없는데 친숙하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없다. 반칙처럼 이름도 모르고 “나, 이 사람 알아!”를 외친 사람 손들어보시라. 이제 알 때도 됐다. 그의 이름 석 자 김유석(金有碩), 배우 김유석. 안방극장 터줏대감으로 익숙한 그가 은막(銀幕)에 모습을 드러냈다. 7년 만에… 돌아왔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같은 배우다
친해질 기회를 언제 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너무 친숙하다. 이름 대면 알만 한 배우만큼 참 가깝다. 주위 사람에게도 물어봤다. “배우 김유석을 알아요?” 고개를 갸우뚱함과 동시에 사진을 보여준다. 그러면 안다고 백이면 백 대답한다. 사극에서 봤다던가, 찌질(?)한 연기가 좋았다던가. 연기 경력 20년이 훌쩍 넘은 배우 김유석은 이름보다는 얼굴 자체가 이름이고 또 얼굴인 셈. 사람들 대부분이 “어!” 하며 연예인으로 알아차리지만 세 단계쯤은 거쳐야 저 배우가 누군지 감을 잡는다. “제가 나온 작품을 재밌게 보신 분이 길을 지나다가 어디서 봤죠? 초등학교? 우리 동네? 아! 대학교? 연예인 누구 닮았는데? 그러면 제가 ‘그게 저인데요(웃음)’ 그래요. 이런 경우가 종종 있어요. 특별하게 눈에 확 띄지는 않는데 뭔가는 있었고. 그렇게 기억해주시는 것 같아요. 물론 좋죠. 제가 누군지 그 사람이 알고 나면 ‘정말 그 연기 좋았어요’, ‘팬이에요’라고 말씀해주세요.” 배우란 인기를 먹고 사는 직업이다. 대중 앞에 선 그들은 사랑받기 시작하면 자리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쓴다. 배우 김유석도 같은 과정을 밟으며 살아왔겠지만 집중해보거나 느낀 적이 없다. 그저 어느 샌가 스며서 젖어버렸다. 어디에도 흔치 않다. 안정적이고 기복 없이 늘 있는 배우 말이다. “등산 같아요. 내가 나를 돌이켜보면. 저 위까지 가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밟아서 올라야 하잖아요? 단 한 번도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쑥 하고 올라간 적 없어요. 그냥 한 발짝, 한 발짝. 그렇게 걷다가 ‘어, 좀 올라왔네’ 그래요. 한참 아래 있던 친구가 갑자기 올라가는 것도 보고 말이죠.” 고등학교 때까지 아무런 꿈이 없던 김유석은 우연히 본 연극 한 편으로 배우가 됐다. 대단한 성공 스토리는 없지만 행복한 삶의 형태 속에서 다른 것 안 하고 원하는 연기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제가 배우를 하면서 한 가지 색깔만 사용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일반적으로 배우를 하면 비슷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잖아요. 제가 안정적으로 보인다고 하셨는데 꽤 독특한 연기도 했어요. 대박 난 작품이 없는 게 아쉬운 거죠(웃음)”
영화 , 스크린으로 돌아오다
김유석을 처음 만난 장소는 4월 말 전주국제영화제 현장이었다. 그가 출연한 영화 (허철 감독)가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관객과 첫 상견례를 가졌다. 김유석은 TV 탤런트로서 인상이 깊지만 데뷔 초 김기덕과 홍상수의 대표 영화에 출연해 주목 받았다. 2000년대 후반까지 틈틈이 독립영화에 출연하다 한동안 TV 드라마에만 몰두했다. 마지막 영화 이후 7년 만에 선택한, 아니 선택받은(?) 작품이 바로 이다. “이 영화를 감독한 허철이와는 사회 친구예요. 지금은 정치를 하지만 민변이던 송호창, 진선미 의원, 한지승 영화 감독 등이랑 어울려 친한데 지승이가 철이를 데리고 왔어요. 10년 전쯤 만나서 친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극영화를 하겠다는 겁니다. 다큐멘터리를 하던 친구가요. 어떤 연극을 봤는데 5000만원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이라더군요.” 허철 감독의 말에 김유석은 그저 친구가 잘되기만을 바랐다. 미국에서 잘나가던 교수 허철이 한국에 와서 갖은 상황 속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성 있고 뚝심 있게 영화 만드는 허철 감독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네가 영화를 만들면 내가 뭐든지 할게. 필요한 거 있으면 묻지도 말고 시키기만 해. 네가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지 할게. 그냥 써. 그랬더니 ‘네가 그냥 그걸 해야겠다’ 그러더군요.” 허철 감독은 김유석에게 의 주인공인 변사장 역을 줬다. 이미 감독에게 선택당했던 것이다.
예술은 ‘얘’랑 ‘술’ 먹는 거
사실 김유석에게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었다. “예술영화는 이제 그만. 데뷔 초에 예술영화로 시작했더니 정말 대안영화나 독립영화 아이콘처럼 제가 그렇게 돼 있더라고요. 예술은 ‘얘’와 ‘술’ 먹는 거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좀 더 다양하고 보편적이고 편한 영화, 한마디로 흥행이 되는 영화를 하고 싶었어요. 일단은 시나리오나 좀 보자고 말했어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진정하고 읽고 또 읽다가 세 번이나 눈물이 터졌다. 순간적인 감정일지 몰라서 다음 날 또 읽었는데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관객들도 같은 감정을 느끼면 영화가 잘될 거란 확신이 생겼다. 개런티에 대한 생각은 애초에 접고 시작했다. “몇천만원으로 영화를 만드는데요, 무슨. 당연히 그래야 했어요. 영화를 만드는 것만도 고마운 거잖아요. 작년 3월에 만나 미팅하고 6월에 촬영 들어갔습니다. 영화 찍는 내내 정말…정말 행복했습니다.” 최근 방송 드라마 시스템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사전 제작을 도입했지만 모든 제작 환경이 바뀐 것은 아니다. 대본을 받아 외우기가 바쁘게 빨리 찍어 내보내는 속도전의 연속이다. 줄곧 브라운관에서만 활동했던 김유석은 영화 촬영 하는 동안 기운을 얻고 더욱 특별한 경험도 했다. “매번 영화를 할 때마다 느끼긴 했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제 나름 영화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 영화 팀이 주는 에너지가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영화 찍는 내내 허철 감독을 다시 알게 됐어요. 영화 현장에서 철이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정석대로 잘 배운 감독님이었습니다. 흔히 보지 않았던 노하우를 쏟아내는 그런 감독이었죠.” 함께 영화에
출연했던 연기 후배들은 김유석이 팀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했다며 입을 모았다. 이에 손사래를 치며 함께한 후배들에게 고마움을 돌렸다. 이 영화는 연극 를 영화화한 것으로 연극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대부분 주역을 맡았다.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허철 감독이 연극을 보고 그 배우들과 작품 만들겠다고 시작한 영화잖아요. 내가 아니고 연극배우들이 중심이죠. 연극에도 출연했던 리우진, 정연심, 이황의, 김곽경희, 강유미 같은 배우가 탄탄하게 잡고 있었어요. 내 나이가 조금 많은 관계로…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하겠어요? 같이 술 한잔 마시고 그러는 거죠. 제가 슬쩍 낀 건데 이질감 안 느끼고 받아줘서 고맙죠.”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영화 는 전회 매진을 기록했고, 영화계와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오랜만에 출연한 영화를 가지고 영화제 레드카펫에 오른 것도 뜻깊었다. “영화에 대한 마음이 절실했어요. 어느 순간 드라마 방송만 하다 보니 영화가 굉장한 동경의 대상이 돼 있더라고요. 심지어 영화하는 친한 친구도 저를 방송 연기자로만 생각해서 당황한 적이 있어요.” 애써 외면했다. 영화제나 시상식이 TV에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좋은 한국 영화가 개봉돼도 찾아보지 않았다. 영화제에도 가지 않았다. 이번 영화를 찍고 나서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을 TV로 챙겨봤다. “무명배우 33명의 축하공연이 인상적이었어요. 시상식에 앉아 있는 배우들이 모두 울더라고요. 배우 심정이 다 그런 거 같아요. 충분히 재능 있는 연극배우나, 안정적이지만 뜨지 못한 배우나, 연기를 막 시작한 배우나 각자 위치는 다르지만 말입니다.”
오빠냐, 아저씨냐 그것이 문제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특히 한국사람) 상대방 이름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나이에 대해 궁금해한다. 새파랗게 어려보이는 김유석이지만 사실 반백(?)을 넘긴 중년의 남자.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외국인과 함께한 자리에서 그가 영어로 “My first son is twenty years old(내 큰아들은 스무 살입니다)”라고 했을 때 ‘twenty(스무 살)’란 단어 자체가 해석이 안 됐다. 너무나 젊어 보이는 외모 때문이었다. 오빠로 느껴야 할지, 아저씨라 해야 할지 그것이 문제였다. “오십? 네? 물리적인 나이는 그렇지만 나의 생각과 신체적인 나이는 아닌 거 같아요. 가끔 제 친구들을 보면 놀라요(웃음). 언제부터 그랬냐면 스물일곱 살 때 러시아에 유학 가서 서른두 살에 왔어요. 그리고 서른세 살에 데뷔를 했는데 지금도 그때랑 마음이 똑같아요.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요. 7년 만에 영화를 했는데 이렇게 세월이 금방 갔나. 큰아들 키가 제 키를 훌쩍 넘었는데 이렇게 애가 컸나 싶죠.” 데뷔 초와 비교했을 때 달라진 것이 사실 별로 없다. 신체 중 노화가 빠른 것 중에 목소리가 있다는데 예전 그대로다. 달라진 게 있다면 젊은 외모에 중년의 멋이 가미된 정도.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냐고 물었더니 한참을 생각한다. “젊음을 유지하기보다 잘 늙고 싶은 게 맞을 것 같아요. 그런 노력 중 하나가 불편한 것은 안 해요. 불편한 사람과 술 안 마셔요. 제가 술을 좋아하지만 그런 사람들이랑 술을 먹으면 한두 잔에 취하다 체해요. 물론 피할 수 없을 때는 버텨보지만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고, 하고 싶지 않아요.” 김유석은 어느 순간 살아온 모습이 고스란히 얼굴에 담기길 바란다고 했다. 여태까지 믿고 살아왔던 삶이나 연기가 퇴색, 변색, 탈색되지 않으면 좋겠단다. “그렇다고 어떻게 늙고 싶은지가 지금 당장의 고민은 아닙니다. 할 게 많아서 그런 고민할 여지가 없거든요. 사람들이 나이 먹다 보면 자기가 바뀌는 모습을 못 느끼더라고요. 나도 저럴까 걱정은 하죠. 편안해지고 옛것 얘기하고 남에게 가르치려 하는 거 말입니다.”
중년의 배우, 나이 앞에 유연해지다
언제쯤 자신의 실제 나이와 비슷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가 만들어내는 극 중 배역에 녹을 수 있는 여유가 중요하다고 했다. “배우는 자기 나이를 중심으로 위아래 열 살 정도는 연기할 수 있어야 해요. 나이를 유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 또한 이번 영화처럼 나이 많은 연기도 가능하고 또 젊은 역할도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웃음)” 혹시 인생에서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을까 싶어 물어봤다. 지금까지 못해본 캐릭터를 연기해보는 것 말고는 별로 없단다. 마흔을 넘겨보니 대충이라도 알 수 있었다. 무엇인가를 해서 이루고 채우는 것만큼 비워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느낀다. “연기하는 것도 힘들어요. 그냥 소소하게 놀고 술 마시고 힐링하고 비우는 시간이 필요해요. 비워야 또 무엇이 들어올 수 있어요. 가끔씩 작품이 끝나면 일주일이건 한 달이건 절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오거든요.” 김유석은 배우로서 일상에 대한 호기심,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식지 않길 바란다. “제가 맡는 캐릭터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요.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이 하루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잘 보내고 싶습니다.”
한밤중 나타났다가 아침이면 사라지는 도깨비처럼, 비밀스러운 거래가 일어나던 도떼기시장을 이른바 ‘도깨비시장’이라 부르곤 했다. 이처럼 특정한 날과 시간이 되면 열리는 장이 있다. 바로 ‘서울밤도깨비야시장’이다. 청계천과 한강공원 등 물가 인근에서 열려 밤공기가 선선한 6월이면 산책 삼아 거닐기 제격이다.
서울밤도깨비야시장(이하 야시장)은 서울시에서 출범해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하는 행사다. 3월부터 10월까지 금·토요일(청계천은 토·일요일) 저녁마다 여의도·반포 한강공원과 청계천, 동대문디자인프라자(DDP)에서 열린다. 청년 상인들이 운영하는 각양각색 푸드트럭과 핸드메이드 숍, 다채로운 공연 무대 등을 만날 수 있다.
‘월드나이트마켓’이라 부르는 여의도 야시장은 한강의 유람선과 마포대교, 쌍둥이빌딩 등에서 비추는 조명이 별처럼 반짝이는 야경을 자랑한다. 잔잔한 강 물결과 어울리는 버스킹(길거리 연주) 공연과 더불어 아시아·유럽·남미의 전통 공연까지 다양하게 펼쳐진다. 한강공원의 너른 잔디밭에는 텐트와 돗자리를 펴고 야시장을 즐기는 이들로 가득하다. 인근 자전거도로와 산책로를 다니다가 반짝이는 야시장의 불빛을 보고 발걸음하기도 한다. 한여름에는 열대야에 더위를 식히기 위해 찾는 방문객이 주를 이룬다. 돗자리만 챙겨간다면 도시락을 싸가지 않고도 여름밤 가족 나들이를 즐길 수 있다.
동대문디자인프라자 ‘청춘런웨이마켓’에서는 신나는 DJ공연과 함께 패션쇼가 열린다. 다른 야시장보다 젊은 층의 비율이 높아 신선하고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다. 패션의 거리인 만큼 신진 디자이너들의 패션쇼와 더불어 개성 넘치는 아이디어 상품과 디자인 소품들을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패션 트렌드와 젊은 세대 문화를 느껴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도심의 야경과 분수, 빛과 음악이 흐르는 반포 야시장 ‘낭만달빛마켓’에서는 로맨틱한 재즈, 팝페라, 어쿠스틱 음악 공연이 열린다. 해질 무렵 찾아가면, 붉게 물든 석양 아래 무지갯빛 물줄기가 쏟아지는 낭만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 인근 반포대교와 한남대교 등 도심의 야경을 배경으로 이색적인 음식과 시원한 맥주를 곁들이는 이가 많다.
청계천을 따라 펼쳐지는 ‘타임슬립마켓’은 사랑의 자물쇠와 소원의 나무, 도깨비 퍼레이드 등 다양한 이벤트를 운영한다. 평소에는 광통교 일대에서 열리지만, 시즌별로 특정한 날에는 청계광장에서도 야시장을 만날 수 있다(여름 시즌 8월 18~20일). 도심 속 시민들의 쉼터로 자리 잡은 청계천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색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각 지역 야시장 종합 안내소 겸 상황실에는 의료지원 본부가 마련돼 있어 응급상황 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푸드트럭, 점포 정보 및 공연 안내는 서울밤도깨비야시장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당신이 날 살릴 수 없으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요.”
죽어가는 비올레타가 그토록 간절히 그리던 알프레도의 품에서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공연된 유럽 오페라가 주세페 베르디의 라고 한다. 1948년 명동의 시공관에서 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다. 뒤마의 소설 '동백꽃 연인'(La Dame aux Camelias) 이 원작인데 베네치아에서는 1853년 3월 6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 되었다고 하니 우리나라에서 초연되기 95년 전이다.
한국초연 오페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 한국에서 가장 많이 올려진 오페라, 여성성악가가 가장 부르고 싶어 하는 오페라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작품의 시놉시스는 18~9세기 중엽으로 원 제목은 이며 는 여주인공 비올레타의 애칭이다.
그녀는 한 달의 25일은 흰 동백꽃, 나머지 5일은 붉은 동백꽃을 들고 사교계나 극장에 귀부인처럼 화려하게 나타난다. 이는 그녀가 몸을 판 대가였다. 이런 그녀에게 양가의 순수한 청년 알프레도가 나타나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는 그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정열적인 사랑에서 참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깊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파리 교외의 보금자리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그 3개월이 그들에게 허락된 사랑의 전부였다. 그녀는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의 간곡한 부탁으로 알프레도와 헤어질 것을 결심하고 다시 파리로 떠난다. 사랑하는 알프레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결정을 내리지만 이를 오해한 알프레도는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복수심에 불타 방랑의 길을 떠난다. 뒤늦게 아버지에게서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를 만나러 달려오지만 이미 그녀는 폐병이 심해져서 더 살기 힘들 것이라는 주치의의 말을 들은 후였다.
그를 만날 수 없어 차라리 죽기를 기다렸던 비올레타는 알프레도를 만나자 더 살 이유가 생겼다며 잠시 희망을 갖는다. 알프레도는 변함없는 사랑을 보이고, 같이 행복한 시간을 갖자며 청혼한다.
“당신이 날 살릴 수 없으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요.”
이 말을 들으며 알프레도는 이제야 만나게 된 자신을 원망하며 오열한다. 애통하는 알프레도의 가슴에서 그녀는 숨을 거둔다.
이 소설은 파리의 고급 창녀이며 미모로 당시 이름을 떨쳤던 마리 뒤프레시를 모델로 소설화했다고 한다.
비올레타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거짓사랑을 놀이삼아 고급 창녀로 살던 그녀에게 진실한 사랑이라니. 그러나 그녀는 막상 진실하고 열정적인 사랑 앞에선 너무 쉽게 무너졌다. 한 번도 사랑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첫사랑을 시작하며 자신을 온전히 내던졌다. 재산도 건강도 명예도 모두가 진실한 사랑에 견주기엔 무가치했기 때문인가. 사랑에 빠질 때면 그 사랑은 언제나 첫사랑이 되는 것인가 보다.
봄의 정서와 딱 맞는 오페라여서인지 주옥같은 아리아와 비올레타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봄이면 언제나 새롭게 느껴진다.
뭔가를 늘 계산하는 현대인들은 이런 맹목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기 쉽지 않다. 별로 내세울 것 없어도 가문이나 재산이나 학벌이나 가족이나 따지고 계산할 것이 많다. 그래서 열정적인 사랑의 갈망을 이런 대리 만족을 통해 털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절절한 사랑의 느낌, 애절한 보고픔에 괴로워하는 연인, 사랑하므로 증오하는 애증 등이 전달되어 필자에게도 4월의 어느 멋진 날이 되었다.
◇ 전시
YOUTH: 청춘의 열병, 그 못다 한 이야기
일정 5월 28일까지 장소 디뮤지엄
자유, 반항, 순수, 열정 등 유스컬처(Youth Culture)의 다양한 감성을 선보이는 대규모 사진전이다. 래리 클락, 라이언 맥긴리, 고샤 루브킨스키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크리에이티브 아티스트 28명의 사진, 그래픽, 영상, 그라피티 작품 240여 점을 총망라한다. 일탈과 자유, 반항과 열정 등 청춘의 내면에 공존하는 다면적인 감정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유스컬처의 역동적인 작품들을 통해 청춘의 불안이 기쁨과 환희로 승화됐던 순간들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다.
사임당, 그녀의 화원: Saimdang, Her Garden
일정 6월 11일까지 장소 서울미술관 제3전시실
최근 TV 프로그램, 드라마, 도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체적인 여성의 시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는 조선시대 여류 예술가 신사임당의 기획 전시다.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자기계발에 매진했던 예술가로서의 신사임당의 면모와 생애를 재조명한다. ‘초충도’를 비롯한 그의 대표 수묵화를 통해 뛰어난 미의식과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느낄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개관 이래 처음으로 ‘묵란도’를 소개한다. 화폭에 자연의 이치를 담고자 했던 그녀의 예술정신이 농묵과 담묵의 절묘한 조화로 발휘됐다.
◇ 도서
두 번째 서른 살: 사랑을 이야기할 나이(마리 드 에느젤 저·베가북스)
프랑스 심리학자 마리 드 에느젤이 10여 년간의 상담과 치료를 통해 얻은 성(性)에 대한 통찰을 담았다. 저자는 시니어의 성생활에 대한 이상주의를 경계하면서 다양한 연구와 인터뷰, 대담 사례를 통해 사랑과 성을 추구하는 노년의 삶에 대해 피력한다.
어쩌다 보니 50살이네요(히로세 유코 저·인디고)
50세가 되면서 달라진 낯선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저자의 산뜻한 시선과 경험이 담긴 에세이다. 몸과 마음의 변화,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는 방법,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등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느낀 점들을 담담하고 편안한 어조로 풀어냈다.
◇ 영화
눈길
일제강점기 말, 전혀 다른 운명을 타고났지만 위안부라는 비극을 함께 겪은 두 소녀의 가슴 시린 우정을 그렸다.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데 이어 제24회 중국 금계백화장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작품이다. 2월 3일 와디즈에서 크라우드펀딩을 오픈해 30분 만에 목표금액(4000만원)을 달성하며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영화 수익금 일부는 위안부 피해자 시민단체에 기부될 예정이다.
개봉 3월 1일 장르 드라마 감독 이나정 출연 김영옥, 김향기, 김새론, 장영남 등
아빠는 나의 여신
가상의 동네 오가와에 있는 작은 술집 ‘사요코’를 배경으로 트랜스젠더 아빠와 딸의 특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트랜스젠더라는 자칫 자극적일 수 있는 소재를 일본 영화 특유의 따스하고 잔잔한 분위기로 연출했다. “착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케이노스케 감독은 낡은 술집에 다녀가는 손님들의 인간미 넘치는 사연을 통해 따스한 위로의 메시지를 건넨다. 유쾌한 에피소드와 더불어 애틋한 가족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담아냈다.
개봉 3월 예정 장르 드라마 감독 하라 케이노스케 출연 스도 리사, 후지모토 이즈미 등
◇ 공연
유도소년
2014년 초연, 2015년 재연 당시 전 회차 매진 기록을 세운 흥행작이다. 유도선수 경찬이 고교전국체전 출전을 위해 서울로 상경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유도·복싱·배드민턴 훈련을 거친 배우들이 실제 경기를 방불케 하는 연기를 펼친다.
장소 수현재씨어터 일정 3월 4일~5월 14일 연출 이재준 출연 허정민, 박정복, 신성민 등
혜은이 콘서트 '열정'
가수 혜은이가 데뷔 45주년을 맞아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콘서트를 연다. 팬들과 더 가까이에서 호흡하기 위해 대학로 소극장에서 한 달간 공연을 이어간다. ‘당신은 모르실 거야’, ‘제3 한강교’, ‘열정’ 등을 마음껏 들어볼 기회다.
장소 대학로 SH아트홀 일정 3월 3일~4월 2일 출연 혜은이
머더 포 투
뉴욕타임스가 주목한 코미디 뮤지컬 의 국내 라이선스 첫 무대다. 두 명의 배우가 13명의 인물을 연기하며, 형사와 용의자 간의 실랑이를 그린 2인극이다. 의문의 총격 살인사건 범인을 찾아가는 추리극으로 빠른 전개가 흡입력을 높인다.
장소 DCF대명문화공장2관 일정 3월 14일~5월 28일 연출 황재헌 출연 김승용, 안창용, 박인배 등
윤동주, 달을 쏘다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창작가무극이다. 일제강점기, 비극의 역사 속에서 자유와 독립을 꿈꾸었던 청년 윤동주와 송몽규의 순수한 애국심을 노래한다. 윤동주의 대표 시 8편이 독백 대사와 노래가사 속에 담겨 있다.
장소 예술의전당 일정 3월 21일~4월 2일 연출 권호성 출연 온주완, 박영수, 김도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