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앞다투어 봄꽃 개화 시기를 전하고 있다. 매화, 개나리, 진달래, 철쭉, 산수유, 수선화, 튤립... 그리고 벚꽃엔딩까지 친절한 안내가 줄을 잇는다. 그야말로 꽃철이다. 멀리 남녘 지방까지 가지 않아도 주변에서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의 기운을 맞을 수 있는 곳, 날마다 꽃이 피어나고 있는 수도권 부천의 꽃 이야기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사정에 따른 변동으로 꽃 축제와 입장 가능 여부를 미리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필수다.)
부천 원미산 진달래 꽃동산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이런 시 한 소절이 아니어도 봄을 떠올리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진달래꽃이다. 부천 원미산(富川 遠美山)은 진달래 군락지로 유명하다. 봄이 되면 원미산을 뒤덮는 진달래가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만개한 꽃물결 속에 파묻혀 봄을 누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초입에 세워진 김소월 님의 진달래꽃 시비(詩碑)를 지나 능선을 조금 오르다 보면 발아래로 저 멀리 부천 FC 스타디움이 보인다. 원미산 167m에 올라 정상의 원미정에서 내려다보는 부천 시가지와 종합운동장, 역동적인 축구장을 진달래 동산이 에워싸는 포인트에 서면 봄을 만끽하는 순간이 된다. 3월 중순경부터 약 한 달 남짓 만발한 진달래를 볼 수 있다.
♤가는 길: 지하철 7호선 부천 종합운동장 2번 출구로 나와서 500m 정도 거리에 있다. 참고로 1번 출구로 나와 직진하면 우측 놀이동산을 끼고 부천 순환 둘레길이 나온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둘레길 걷기의 시작이 된다. 특히 1구간의 향토 유적 숲길은 운치 있다.
부천 자연생태공원 튤립 정원
사월과 오월 중순쯤까지 가장 화려한 색감으로 온 누리를 빛내주는 튤립을 볼 수 있는 곳, 부천 자연생태공원이다. 이곳은 부천식물원, 자연생태박물관, 부천 무릉도원 수목원, 농경유물전시관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무엇보다도 테마 정원과 유아 숲 체험관, 힐링쉼터가 잘 조성되어 있어서 아이 어른 상관없이 다양한 볼거리가 가능한 문화휴식 공간이다. 코로나로 훌쩍 떠나지 못하는 수도권 시민들이 찾아드는 곳이기도 하다.
부천 무릉도원 수목원의 튤립은 고결하고 우아한 자태로 봄 햇살을 받으며 가장 강렬한 색감으로 최상의 멋을 보여준다. 놓치기 아까운 풍경이다. 튤립 꽃길을 걸으며 선명한 빨강, 노랑과 보라, 하양, 핑크 등의 화사한 꽃들을 들여다보는 행복은 오직 이때뿐이다. 이 무렵 담장 너머 목련은 이미 지는 중이고, 춘덕산에서는 부천을 상징하는 복사꽃 피는 마을답게 춘덕산 복사꽃 축제가 이어졌었다.
튤립 정원을 지나 나타나는 수목원은 편백 군락지 산책로와 연결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힐링의 숲이다. 천천히 걷거나 곳곳의 벤치에 앉아 봄의 정취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주상절리를 연상케 하는 폭포, 생태연못 쪽으로 가면 수생식물들과 시원하게 내뿜는 분수의 물바람을 맛볼 수 있다. 나비정원, 풍차, 귀여운 토끼나 공작새의 미니 동물원은 튤립을 보러 왔다가 자연 속의 풍경에 푹 빠지는 시간이 된다. 출구로 나가면 주변에 맛집도 즐비하다.
♤경기도 부천시 길주로 660(춘의동)
7호선 까치울역 1번 출구에서 3분 정도 직진
내비게이션 명칭 검색 : 부천식물원 또는 자연생태박물관
☏부천 자연생태공원 공원 조성과(032-625-3502)로 연락
백만 송이 장미원의 화려한 봄날
해마다 오월이면 장미가 온 천지에 가득했던 부천 백만 송이 장미원, 올해도 여전히 피어나겠지만 문이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혹시라도 아쉬움에 찾아가 장미원 둘레 담장 너머로 먼발치의 장미꽃들을 바라볼 만도 하다. 돌아보면서 군데군데 나타나는 장미 터널과 예쁜 포토존이 행복감을 주는 장미원이다.
부천 백만 송이 장미원은 부천시에서 1998년 150000여 그루의 장미나무를 심으면서 시작되었다. 장미 한 그루에서 7~10송이의 꽃이 피어나기에 백만 송이의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벚꽃이 눈부시게 피어나는 주변의 도당산이 에워싸고 장미를 비롯한 야생화 단지와 분수대, 체력장 등의 시설들이 갖추어진 장미꽃 테마공원이다. 오월과 칠월 사이에 절정을 이루는 백만 송이 장미를 풍성하게 볼 수 있다.
♤경기도 부천시 도당동 산 34
지하철 역곡역이나 까치울역에 내려 마을버스 013-3번
☏부천시청 공원관리과 공원관리 2팀(032-625-4854)
부천 상동호수공원의 꽃양귀비
계절별 꽃 경관을 즐길 수 있는 상동호수공원. 그중에서 5~6월이면 붉은 꽃양귀비가 피어나 짙은 아름다움 속에서 힐링의 시간을 준다. 부천시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공원으로 호수 근처로 나무 데크 길이 길게 연결되어 있어서 바람 쐬며 걷는 맛이 최고다. 또한 체육 시설과 놀이시설, 휴식 공간이 두루 잘 갖추어져 있어서 산책길에 한나절쯤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원이다.
꽃양귀비 정원에 들면 화려하고 강렬한 색상의 붉은 양귀비와 함께 청보리가 자라나고 있다. 두 가지의 어울림을 조화롭게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 혹시 코로나의 여파로 꽃밭 가까이 갈 수 없을 수도 있으니 촬영하려면 망원렌즈를 지참해야 한다. 멀리 꽃구경 가기 어렵다고 생각된다면 부천 상동호수공원은 수도권에서 쉽게 나설만한 곳이다.
♤지하철 7호선 삼산체육관역 1번, 5번 출구 역
경기 부천시 길주로 16 복사
부천 중앙공원 능소화 터널
한때는 능소화를 찾아서 저 아랫녘까지 가기도 했다. 이제는 길거리나 동네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그 옛날 구중궁궐 속에서 다시 찾지 않는 임금이 하도 그리워 궁녀 소화는 날마다 임금의 발자국 소리에 오매불망 귀를 기울였다. 죽으면서도 담장 아래에 묻혀 님을 기다리겠다는 애절한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궁녀 소화, 님의 발소리를 들으려 귀를 활짝 열어놓은 듯 피어난다. 기다림의 세월이 능소화로 곱게 다시 피어났다는 전설의 꽃이다.
부천 중앙공원에 가면 능소화가 터널을 이루어 피어난다. 6월 말부터 7월 중하순까지 흐드러지게 만개했다가 툭툭 떨어지며 진다. 꽃이 지는 모습도 볼만해서 능소화 터널 아래 낙화가 뿌려져 있을 때 다시 가기도 한다. 더위와 비바람에도 흐트러진 남루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꽃잎 하나씩 날리며 지는 게 아니고 미련 없이 꽃 한 송이 통째로 떨어뜨리는 게 능소화의 마지막 모습이다.
♤경기 부천시 중동 1177(부천 시청 뒤편)
고전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인류의 보물창고입니다. 사람은 짧은 생을 살다 가지만 축적된 지혜는 면면히 이어집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사람의 생각과 정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고전에 담긴 지혜는 삶의 고갱이가 되어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 ‘영혼의 혼밥’을 짓는 신아연 작가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을 위해 동양 고전을 재료로 솥단지를 걸었습니다.
“집에 글쎄 도둑이 들었지 뭐예요. 얼마나 놀랐는지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어요.”
요즘 하고 있는 어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재기발랄한 아가씨가 데이트 상대에게 던진 대사입니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젊은 층에서 딴에는 재치로 하는 말, 단순 유행어라고 하기엔 그 철없음에 민망하여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어디 비교할 데가 없어서 일상의 자잘한 사건 사고를 장난삼아 6.25 난리를 끌어들여 말할까요. 6.25를 직접 겪은 세대가 이 말을 들을 때 느낌이 어떨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거겠지요. 그저 재미있고 유쾌하면 그만인 거지요. 하지만 전쟁의 상흔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괴리, 허탈, 상처, 분노를 더해 세대 간의 정서적 공감력 단절에서 오는 잔인한 슬픔이 가슴에 멍울질지도 모릅니다.
‘도덕경’을 쓴 노자는 전쟁의 참상을 이렇게 애곡하고 있습니다.
군대가 머문 곳에는 가시덤불만 자라고, 큰 전쟁이 있은 후에는 땅이 피로 저주받아 흉년이 들며, 만물을 낳는 흙조차 모성을 잃어버린다고. 무고한 백성들뿐 아니라 전쟁터에 끌려간 말이 전선에서 새끼를 낳는다고. 그러니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하며, 이겼다 해도 승리를 미화하지 않고 상례(喪禮)로 처리해야 한다고. 그것은 흉사이기 때문에 나쁜 일을 기리는 자리, 즉 오른쪽에 최고 지휘관이 서야 한다고.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는 사람은 살인을 즐기는 사람이며
살인을 즐기는 사람은 결코 큰 뜻을 펼칠 수 없다.
길한 일이 있을 때는 왼쪽을 높이고 흉한 일이 있을 때는 오른쪽을 높인다.
둘째로 높은 장군은 왼쪽에 서고 제일 높은 장군은 오른쪽에 위치한다.
이는 상례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을 살상하였으므로 이를 애도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상례로 치러야 한다.
-노자 ‘도덕경’ 31장
올해로 6.25전쟁 71주년을 맞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함께 시작됐으니 전쟁의 참혹함을 새삼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6.25전쟁은 분단의 고통과 함께 여전히 살아 있는 슬픔입니다. 그 슬픔을 함께 아파하지는 못할망정 조롱하는 듯한 유행어를 듣는 것은 언짢고 화가 납니다.
‘전쟁이 나쁘지, 농담이 나쁜가’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해학과 촌철의 달인 장자의 비유를 들어볼까요?
‘장자’ 칙양편에는 인간사를 달팽이 뿔 위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비유한 글이 나옵니다.
달팽이 머리 위에 뿔이 두 개 나 있는데
각각이 하나의 나라다.
왼쪽 뿔은 촉나라고, 오른쪽 뿔은 만나라다.
이 두 나라는 서로 땅을 빼앗기 위해
틈만 나면 전쟁을 벌였다.
그 싸움이 워낙 치열해서
널브러진 병사의 시체가 수만 구나 되고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면
15일이나 걸려야 돌아왔다.
촉만지쟁, 와각지쟁으로 불리는 장자가 만든 우화입니다. 두 나라 간의 싸움이 처절하기 그지없지만 기껏해야 달팽이 뿔 위에서의 일이니 그야말로 하찮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하늘이나 우주에서 내려다본다면 인간들끼리의 전쟁이 달팽이 뿔 위에서 벌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겠지요. 더 중요한 것은 달팽이의 두 뿔은 한 몸에 달려 있다는 거지요. 두 뿔 중 하나를 잃게 되면 달팽이는 부상을 입거나 죽음을 맞게 되겠지요.
결국 전쟁은 승자가 없습니다. 노자 말씀대로 오른쪽을 높인들, 상례로 치른들 모두가 희생자요, 부질없는 일인 거지요. 병법가인 손자조차 이익을 얻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 해도 감정이나 기분이 앞서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지혜의 대가들은 입을 모아 전쟁은 가급적 치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지구상 어딘가에서는 지금도 전쟁 중이니….
이익이 아니면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가능성이 높지 않으면 군사를 쓰지 않으며, 위험이 없으면 결코 싸우지 않는다. 군주는 분노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되고, 장군은 화 때문에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망한 나라는 다시 살릴 수 없고,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릴 수 없다. 그래서 밝은 군주는 전쟁에 신중하고, 뛰어난 장군은 깊이 경계한다. 이것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군대를 온전히 하는 길이다.
- 신정근 ‘공자와 손자’
해마다 6월이 되면 우리 가족은 60년 전 납북된 시아버지를 떠올리며 착잡한 마음에 휩싸이게 된다. 한국전쟁 발발 뒤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지는 북으로 납치됐다. 여태껏 한 번도 시아버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살아 계셨다면 지금 아마 100세는 넘기셨을 텐데. 살아계실 거라는 기대를 뒤로하고 5년 전 향년 95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시어머니 기일에 맞춰 시아버지 제사도 지내고 있다.
시부모님은 일제 강점기 동경에서 유학하던 중에 만났다. 당시로써 보기 드물게 자유연애하고 결혼한 신식 커플이었다. 시어머니는 조선말 높은 벼슬에 재력까지 겸비한 외할아버지 덕분에 일본 음악대학에서 공부하셨다. 많은 여성이 한글 한 자 못 깨우치고 까막눈으로 살던 시절, 만석꾼의 막내 외손녀였던 시어머니는 몸종 하나 데리고 오빠가 유학 중인 동경으로 쫓아간 것이다. 그리고 일본 어느 전철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시아버지, 그리고 떠들썩한(?) 연애! 결국 자살 소동까지 벌이며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골인한 당찬 개화기 신여성이었다. 소문난 잉꼬부부로 서로 다른 부분을 인정하며 현명한 사랑을 하셨다. 외출해 나갔다가도 식성이 다른 탓에 서로 좋아하는 식당에서 각자 먹고 다시 만났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두 분 다 개성 강하고 깨어있던 연인이자 부부였다.
이쯤해서 시아버지의 외모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봐도 보기 드물다 싶을 정도로 미남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 시아버지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설명을 못 하지만, 시어머니 친구들 증언에 의하면 유명한 꽃미남이란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신혼 초 이화여자대학교 근처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는데 미남 사는 집으로 소문이 났었단다. 지나가던 이대생들이 열린 대문 사이로 빠끔히 들여다보았다는 등의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3남 1녀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가 싶었더니 한국전쟁이 터졌다. 처음에는 원래 시아버지가 아닌 시어머니가 인민군에게 잡혀 당시 서울 국립도서관에 갇혔다. 이 소식을 듣고 시아버지가 찾아가셨다가 그 자리에서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셨다고 했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 공무원 계급 납치 작전으로 시아버지가 인민군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시아버님은 당시 통계청에서 일하시고 계셨다.
당시 시어머니 나이 서른여섯. 부잣집 딸로 태어나 이 땅의 전형적인 양반가 부인이었던 시어머니는 젊은 나이 남편을 빼앗겨 혼자되시고 말았다. 요즘 같았으면 결혼도 하지 않았을 나이에 4남매를 혼자 키우고 교육하느라 고생 많이 하셨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살아생전 말씀하셨다. 그렇게 힘든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시어머니의 자존심을 세워준 것은 아버지를 닮아 인물 좋고 똑똑한 자식들이었다. 언젠가 통일이 돼서 시아버지를 만나면 ‘당신 없어도 내가 이렇게 애들을 잘 키웠어’ 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도 시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납북자 가족은 심적인 고통 이외에도 또 다른 것이 있었다.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신원조회를 당해야 했다. 특히 1970년대 언론계에서 직장 생활을 했던 남편은 해외 출장 때마다 출국 절차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혹시라도 외국 출장에서 납북된 아버지와 연락을 할까 봐서 정부 당국에서 의심을 했다. 우리나라의 해외여행 자유화되기 전이라 일반인의 해외 방문 힘든 마당에 납북자 가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머님은 “납북된 것도 억울한데 나라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의심까지 해야 하냐?”며 무척 억울해하셨던 기억이 난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이후 속속 낭보가 전해진다. 815 이산가족 상봉이 추진되고 있고, 한국전쟁 당시 미국 전사자 유해 송환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국내외적인 훈풍과 함께 납북 피해 가족에 대한 정부로부터 합당한 위로나 배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은근히 기대해 본다.
용문사 가는 도로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도로 양 편으로 길게도 이어진다. 우수수 낙엽이 떨어져 만추의 여정이 가득한, 휘어진 길. 그 뒤로 아스라이 옛 추억 한 자락이 떨어지는 낙엽 위로 오버랩된다. 형형색색으로 변한 산야 속에 유난히 노란 단풍잎이 눈을 시리게 한다. 이렇게 도로변에 은행나무를 심어 놓은 것은 용문사에 노거수 은행나무가 성성하게 버티고 있음을 알려주려 함이었으리라.
◇ 단풍 든 한적한 산길에서 만난 정지국사부도
용문사의 가을은 화려하다. 해마다 이곳의 아름다운 가을을 만나기 위해 많은 행락객들이 찾아든다. 주차비(소형 3000원)와 입장료(성인 2000원)를 내고부터는 누구나 걸어야 한다. 입구 쪽에 단풍 든 공원 앞으로 2007년에 개관한 양평 친환경 농업박물관(용문면 신점리 508-10, 070-7715-3796, http://sam.go.kr)이 있다. 옛 성루를 연상케 하는 한옥 모양의 박물관 앞으로 분수가 솟구친다. 유치원생들은 그 모습을 보고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아이들 눈 속에는 감성이 많이도 묻어 있는 듯하다. 실내에는 양평역사실과 친환경농업실이 있고 사찰요리를 만들어보는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주변의 공원에는 아이들 취향인, 귀여운 조형물과 시비 등이 많이 눈에 띈다. 사자상 양 귀 쪽으로 수도꼭지를 달아 놓은 모습도 해학적이다.
다리를 건너면 일주문이지만 이번 여행길에는 곧추 정지(正智)국사부도 팻말(0.5㎞)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산길은 큰 도로와는 달리 한적하다. 아직 걸음이 서투른 유치원생들과의 눈높이 대화가 싱그럽다. 부도까지 올라가야 하는 길목은 붉은 단풍이 에워싸고 있다.
우선 정지국사탑비를 만난다. 비문은 권근이 지은 것이라지만 글자가 거의 마모되어 버렸다. 80m 정도 오르면 정지국사부도(보물 제531호)가 홀로 있다. 정지국사(1324∼1395)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고려 충숙왕 복위 1년(1332), 8세 때 장수산 현암사로 동진출가(童眞出家)했다. 바로 선을 닦다가 능엄경을 배워 깊은 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공민왕 2년(1353)에는 무학과 함께 원나라로 가서 지공을 스승으로 한 나옹의 제자가 되었다. 1356년, 귀국해서는 은둔하면서 수행에만 힘썼다고 한다. 천마산 적멸암에서 “나는 간다”는 말을 남기고 법랍 54세로 입적했다. 제자 조안이 이곳에 부도와 비를 세웠고, 나라에서는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생전에 개풍 영천사의 대장경을 용문사로 옮겨 봉안했다고 한다.
사찰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는 무수한 돌탑이 있다. 넓은 터에는 ‘산사무공(山寺武功)’이라는 손 글씨가 쓰여 있다. 무공 템플스테이가 펼쳐지는 곳이며 108탑을 조성하는 듯하다.
◇ 국내에서 가장 큰 용문사 은행나무는 단풍 들기도 더뎌
조금 더 내려오면 용문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다. 경내의 건축물과 함께 단풍 든 용문산(1,157m)이 한눈에 조망되는데, 무엇보다 커다란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 높이 50m, 둘레 12.3m)에 눈길이 머문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뿌리가 내려 이처럼 성장한 것이라고 전해오는 국내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다. 수령이 대략 1100여 년에서 1500여 년으로 추정된다. 정미의병 때 톱을 댔더니 피가 났고, 불을 질렀을 때도 이 은행나무만 타지 않았던 신목(神木). 노익장을 과시하듯 잎이 무성하고 주변 나무들보다 단풍도 더디 든다.
경내 약수에 목을 축이고 잠시 둘러본다. 이 사찰은 진덕여왕 3년(649)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진성여왕 6년(892)에는 도선국사가, 고려 공민왕 때는 나옹선사가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세종 29년(1447)에는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의 원찰로 삼으면서 대대적으로 중건했다. 조선 초기에는 절집이 304칸이나 들어서고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일 만큼 번성했다고 한다. 그 후 왜군이 전소시켰고 6·25 때도 파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을 비켜날 즈음, 찻집 솔내음, 다래향에서 맛있는 대추약차의 그윽한 향내에 취해보거나 용문산 정상까지 산행을 해도 된다.
◇ 상원사에 오르면 속세의 번뇌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
굳이 산행을 안 해도 된다. 찻길이 잘 나 있기 때문. 상원사 입구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석불부터는 민가가 사라진다. 울창한 숲 사이로 차 한 대가 갈 수 있는 임도 운전이 아슬아슬하지만 잠시 차를 멈출 수 있는 공간이 반갑다. 시원한 물줄기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그곳에도 아름답게 단풍이 들었다. 물소리, 새소리, 단풍 숲까지 어우러져 사랑스러운 길이다. ‘무릉도원’이 여기구나 싶을 생각이 절로 드는 곳. 찻길이 끊어지는 곳에서 누군가 정성스레 가꿔 놓은 텃밭, 작은 연못, 깎아지른 듯한 언덕에 잘 쌓은 돌담이 해사한 웃음으로 반긴다.
돌계단을 따라 경내에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 3층석탑을 에둘러 대웅전, 선방으로 이용되는 청운당, 요사채인 제월당이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는 삼성각이다. 절 마당, 트인 공간 저 멀리 용문산 능선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상원사는 창건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 보우선사(1301∼1382)가 여기 머물며 정진했다고 전해온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조안선사가 중창했으며 무학대사(1327~1405)가 왕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수행했다.
또 효령대군(1396~1486)은 원찰로 삼았다. 세조 8년(1462)에는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러 찾아왔다가 중창불사를 했다고 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 순종 원년(1907)에 왜병이 이 지역에 집결해 있던 의병을 소탕하기 위해 불을 질러 법당만 남겨놓고 모두 타 버렸다가 1918년에 복원했으나 6·25 때 모두 불타 버렸다. 이후 1969년이 되어서야 주지 덕송이 초막삼간을 짓고 복원에 착수, 1970년에 주지 경한니가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원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사자석상을 닮았지만, 정확한 형태가 아닌, 예사롭지 않은 조형물이다. 땅속에서 나온 유물들을 한데 조합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란다. 또 사찰 내에는 철조 여래좌상(경기문화재자료 제119호)이 있다. 상원사 가까이 있는 윤필암은 고려 중엽 모덕이 창건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다.
◇ 보릿고개 연수리 정보화 체험마을의 돌담 따라 걷기
상원사에서 내려오면 ‘연수리 보릿고개 정보화 체험마을’을 만난다. 연수리는 연안마을과 장수마을을 합해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예로부터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장수골’이라고 불렸다. 현재 보릿고개마을은 성공한 정보화마을이다. 다양한 체험거리는 계절에 맞추어진다. 봄에는 산나물 채취, 냉이 캐기를 하고 여름에는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긴다. 가을에는 밤 줍기와 등산을, 겨울에는 청국장 만들기 등의 체험을 한다.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고, 돌담장에 형형색색으로 색칠해 볼거리를 준다. 사계절 체험객들이 줄을 잇는다. 특히 슬로푸드 음식체험이 인기다. 보리떡 직접 만들어보기, 지천에 난 쑥을 직접 뜯어 쑥떡 만들기, 농민들이 재배한 국산 콩으로 두부 만들기, 잘 익은 호박으로 호박밥 지어 먹기 등. 체험객들이 늘 찾는, 성공한 체험마을이다.
마을을 비켜 용문으로 오는 동안에도 눈이 시리다. 곳곳에 멋지게 지은 전원주택들이 구슬처럼 박혀 이국적인 모습을 자아낸다. 그리고 경기도 영어마을 양평캠프도 있다. 실제 미국 버지니아의 마을을 재현한 이국적인 캠퍼스다. 그래서 와 등 드라마 촬영지로도 이용되었다. 학습 목적이 아닌 관광객들은 6000원이라는 입장료를 감수해야 한다.
용문면에도 할 거리가 있다. 레일바이크(031-775-9911, http://www.yprailbike.com)를 탈 수 있다. 용문면 삼성리∼양평읍 원덕리까지 왕복 6.4㎞ 구간이다. 또 용문장날(5일, 10일)도 볼만하다. 국철이 생기면서 장날은 제법 구색을 갖춰가고 있다. 지역에서 나오는 가을 특산물을 파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Travel Tip
- 주소
용문사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문의 : 031-773-3797, http://www.yongmunsa.org
상원사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220-5, 문의 : 031-773-4634
보리울체험마을 문의 031-774-7786, http://borigoge.invil.org
기타 문의 양평군청 문화관광과 : 031-773-5101
- 찾아가는 방법
자가용 서울 → 6번국도 이용 → 마룡교차로에서 341지방도로로 좌회전 → 덕촌삼거리에서 직진 → 용문산 관광단지 주차장
대중교통 수도권전철 중앙선이 용문까지 운행(2009년 12월 개통)되고 있다. 용산역~용문역(05:20~22:58) 약 1시간 30분 소요. 용문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용문사, 연수리행 등 각 방향 농어촌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문의 용문시외버스터미널 : 031-773-3100, 용문역 : 031-773-7788
- 추천 맛집
용문산 입구에 중앙식당(031-773-3422), 한마당식당(031-773-5678), 용문산식당(031-773-3434) 등 산채요리 음식점이 있다. 그외 용문에서 다소 떨어져 있지만 무쇠솥에 오랫동안 달여 낸, 국물 진하고 고기 넉넉한 고바우집(031-771-0702, 설렁탕)을 비롯하여, 이북식 만두가 맛있는 회령만두국(031-775-2955)이 괜찮다. 용문읍에 있는 강원식당(031-773-4459, 막국수, 묵채밥 등)도 괜찮다.
- 주변 볼거리
용문산에는 용계, 조계골(신점1리)이 있다. 또 용문면에서는 레일바이크(031-775-9911, http://www.yprailbike.com)를 탈 수 있다. 2010년 5월 3일 개장되었고 용문면 삼성리에서 양평읍 원덕리까지 왕복 6.4㎞ 구간이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차라리 악몽이었다면 꿈에서 깨기라도 했을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그 날은 꿈이 아니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중학생부터 신체 건강한 남성이라면 모조리 사선을 넘나들어야했다. 떨리는 손으로 총을 잡았고, 밤하늘의 별 속에 가족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 후로 6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들이 피 흘려가며 지켜낸 그 땅에서 올림픽과 월드컵이 성공적으로 열렸다. 또한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이제는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그들이 일궈낸 토양에서 값진 결실을 수확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국가를 수호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제 ‘영웅’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영웅들은 자신들이 수호한 국가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미소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 영웅들의 모습이 밝아 보이지 만은 않았다. 10일 서울 종로의 6ㆍ25전쟁유공자회에서 만난 그들의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다.
◇ “영웅이라는 기장을 택배로 받았습니다. 이게 영웅을 대접하는 방법입니까?”
전국 약 18만 명, 서울시 3만540명. 6ㆍ25참전유공자의 수다.
지난해 11월 서울시를 포함해 전국 지자체에서는 이들에게 ‘호국영웅기장’을 수여했다. 서울시는 시의 3만540명의 참전유공자 중 참전유공자회 250명을 포함, 총 350명의 참전유공자를 시에 초청해 ‘호국영웅기장’을 수여했다. 전수식에 참여하지 못한 참전유공자들에겐 서울지방보훈청에서 따로 전달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전수식에 참여하지 못한 참전유공자에게 ‘호국영웅기장’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생겼다. 이들에게는 우체국 ‘택배’로 기장을 수여 했기 때문이다. 서울시뿐만 아니다. 전국 지방지자체 또한 직접 수여하지 못한 참전유공자에게 일제히 택배로 기장을 배달했다. 기장을 택배로 받은 6ㆍ25 참전유공자회의 신영식(80)씨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국가에서 6ㆍ25참전용사를 기리는 방식입니까? 어떻게 영웅의 상징인 기장을 택배로 보낼 수 있어요. 이것은 영웅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영웅을 욕보이게 하는 겁니다. 서울시에서 많은 인원들을 수용 못한다면 구 단위에서라도 단체의 장이 직접 전달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서울시가 지난해 11월 21일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호국영웅기장’에 대해 이렇게 써 있다.
‘호국영웅기장은 정전 60주년을 기념해 6ㆍ25참전유공자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고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처음으로 제작됐다.’
기장을 수여함으로써 6ㆍ25참전유공자에 대한 희생과 공헌을 기린다는 국가보훈처 취지는 뜻 깊다. 그러나 자리를 빛내지 못한 참전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방식은 일부 참전유공자들의 공분을 사기 충분했다. 택배로 기장을 받은 신씨도 실망감이 큰 듯, 기장에 대한 넋두리를 이어갔다.
“영웅이라는 호칭은 나라를 위해 애쓴 사람한테 쓰는 것이에요. 저는 이번에 6ㆍ25참전유공자에 대한 국가의 처세가 잘못된 것 같아요.”
수여식에 참여하지 못한 6ㆍ25 참전유공자에게 택배로 기장을 보낸 보훈처의 선택은 불가피했을지도 모른다. 약 3만명이나 되는 인원을 모두 수용하기에 벅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훈처에서 선택한 택배라는 방식은 많은 유공자들을 화나게 했다. 꼭 택배여야만 했을까? 신씨의 말대로 시에서 수여하지 못하면 '구' 또는 '동' 단위 지자체에서 수여하는 정성이라도 보였다면 어땠을까?
◇“명예수당 18만원으로는 손자 과자 값도 안돼”
6ㆍ25참전유공자회에서 만난 참전유공자들은 한 목소리를 냈다. 국가를 위해 사선을 넘나든 사람들을 홀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20세 때 군대에 입대해 5년 동안 군생활을 하면서 6ㆍ25전쟁을 겪은 장인준(83)씨. 장씨도 불만을 털어놨다.
“사실 보훈정책만으로도 고맙긴 해요. 그러나 항상 어떻게 보상을 해주겠다는 말만했지 실질적인 보상이 없어요. 물론 월 18만원이라는 명예수당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것 가지고는 손자들 과자 값도 안돼요. 저희는 건강해서 여기에 나오기라도 하지. 사실 보면 건강이 안 좋은 사람들이 더 수두룩하다니까.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기초 생활 정도만 될 수 있게 보상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장씨가 제안한 수당은 약 50만원이었다. 손에 잡히는 월급이나 수당 없이 사선을 넘었던 전쟁 당시를 생각해 보면 장씨가 제안한 액수는 그들에게 정당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6ㆍ25참전용사는 할인 혜택 해당이 안 됩니다.”
장인준 씨와 마찬가지로 20세에 입대해 5년간 군복무를 한 이동진(83)씨. 지난해 대구에서 6ㆍ25참전용사로서 자존심에 상처가 난 기억이 있다. 국가 유공자 할인이 된다고 들어간 음식점에서 6ㆍ25참전용사는 할인혜택에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그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6ㆍ25참전유공자가 혜택이 안 된다면 누가 되냐고 물어봤더니, 4ㆍ19나 5ㆍ18 유공자가 해당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었나 생각해 본 순간이었습니다. 과연 6ㆍ25때 국가를 빼앗겼다면 4ㆍ19나 5ㆍ18이 있었을까요?”
실제로 6ㆍ25참전유공자들이 사회적으로 명예와 대우 그리고 자긍심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입장료나 교통수단 할인과 같은 기본적 혜택이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통이라도 할인이 됐으면 좋겠어요. 버스, 열차, 공원에서도 아무 혜택이 없는데 이게 무슨 유공자에요? 지하철에서 6ㆍ25참전유공자입니다. 표 주세요라고 하면 어리둥절하게 직원이 쳐다봐요. 참 허무합니다.”
장인준 씨는 이 정도의 대우라면 후세대들이 국가를 위해 몸 바쳐 헌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을 보는 젊은 세대들의 시선에서도 존경심이나 따뜻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6ㆍ25참전유공자들은 국가를 수호한 결과가 허무하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보훈 가족들을 섬기겠다는 취지에서 만든 국가 보훈처. 국가 보훈처의 공식블로그 ‘훈터’에 게재돼 있는 글이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 말이다. 과거가 없이는 현재가 없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에 보답하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 정부와 사회가 살아있는 역사를 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도 말이다.
“인생이 열 배는 더 재밌어진 것 같아요.”
이춘계 씨는 지금 택시기사다. 하지만 그의 지난 경력은 삼성전관(현 삼성SDI)에서 부장, 삼성SDS에서는 금융개발팀 팀장, 그리고 삼성에서의 마지막 경력을 삼성SDS의 협력사인 화이넥스의 CEO로 현역을 마친 소위 삼성맨, 그것도 아주 뼈가 굵은 삼성맨이었다. 자신이 택시기사임을 밝히는 그의 목소리는 밝고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아주 시원하게 자신이 하는 일이 재밌다고 말했다. 1953년 생, 서울대 출신 삼성맨, 올해로 예순 두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와 꾸준하게 쌓아 올린 탄탄한 경력을 가진 이 남자가 택시기사를 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이춘계 씨는 30년에 걸친 삼성과의 인연을 정리하고 2009년 1월 1일부터 백수 생활을 시작했다. 항상 시간에 쫓기던 생활만 겪다가 한가롭게 시간을 낚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게 되니 너무도 좋았다. 그러나 유유자적도 한 두 달이 지나 3개월이 되니 지루함으로 변했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백수도 하루 이틀이지… 인생을 다시 시작해보자”
“저는 사범대 물리교육과를 나왔어요. 그런데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는 바람에 한 번도 교사를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교사를 해보자, 싶어서 공부를 했죠. 그런데 교장을 하는 친구에게 ‘내가 기간제 교사로 과학 선생을 할 수 없겠느냐’ 물어봤더니 이 친구가 단칼에 자르는 거예요. 친구는 ‘너가 하는 얘기는 알겠고 인정한다, 그러나 요즘 학교 풍토가 기간제 교사들도 다 젊은 교사들만 뽑는다. 학교의 소비자는 학생이잖느냐. 이 학생들이 나이 든 교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일 없이 집에서 지내던 이 씨. 그러던 어느 날 2009년 5월 1일 오후 9시 KBS뉴스에 시선을 확 끄는 뉴스가 등장했다. 외국인관광택시(International Taxi) 발대식에 오세훈 서울시장이 택시기사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었다.
서울을 찾는 외국인이 년 500만 명에 달하고 그 중 130만 명이 택시를 이용하는데 가장 불편사항이 언어 소통 문제라고 한다. 영어 또는 일어 소통이 가능한 운전자를 선발하여 외국인관광택시를 운행하게 함으로써 언어소통을 원활히 하고 부당요금 과속난폭운전을 근절하여 외국인들에게 편리한 서비스를 제고한다는 취지였다.
택시기사로의 첫걸음, 녹록치 않았다
이 씨는 삼성에서 근무할 때 일본NEC와 교류가 많아 일본어는 어느 정도 가능했기에 딱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다음날 외국인관광택시 운전 자격 취득 절차를 물어 보았다. 3개월 이상 영업용 택시 운전 경력이 있어야 하고 서울시에서 위탁한 회사에서 실시하는 영어 또는 일어 구술 시험과 인성 면접에 합격하면 된다고 했다.
2009년 7월 1일, 이 씨는 드디어 6개월간의 백수 생활을 마감하고 택시기사로서의 인생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인사가 잘 안 나왔다. 그래서 매일 운행 시작하기 전 10번쯤 큰 목소리로 구령 조정을 했다.
이 씨는 택시기사가 수입에 비해 근무여건이 너무 열악하다는 걸 인정했다. ‘항상 사고위험을 안고 근무한다(Dangerous). 매주 주야간 교대 근무로 밤과 낮이 바뀌는 생활에 신체가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Difficult). 가끔 술 취한 손님이 주정부리거나 토하거나 하면 대책이 없다(Dirty)’는 점에서 택시기사는 3D 업종이었다.
“서울 250여 개 택시회사에서 운영하는 차량대수가 23,000대 정도 됩니다. 대부분의 회사가 택시기사 부족으로 5~10%는 가동을 못하고 있습니다. 근무여건이 이렇게 열악한데 누가 하려고 할까요? 신규로 택시운전자가 100명이 취업을 하면 한 달 이내에 50명이 퇴직하고 3개월까지 다시 25명이 퇴직합니다. 택시기사로 입문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택시운전을 계속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씨는 지난해 개인택시로 전환하면서 5년째 택시기사를 하고 있다. 눈높이를 조금 낮추고 즐겁게 할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을 찾아보기로 한 결과다.
“‘가만히 놀고 있으면 100만 원이 거저 생기나? 150만 원도 황송하다.’ 이 정도로 낮춰야 합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저희 집사람도 같은 생각입니다.”
“150만 원도 황송하다”
이 씨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새롭게 얻게 된 3D에 대해 설명했다.
첫 번째 즐겁다(Delightful). 택시기사는 상사나 부하 직원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없다. 혼자서 일하기 때문이다. 고객을 만들고 유지시키는데 힘들 일이 없다. 수주 매출 수금이 대부분 한 시간 이내 이루어진다. 보험설계사 같은 경우 한 사람의 고객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이 만나야 하고 공을 들여야 하는지 비교해 보라. 만나는 것 차체를 부담스러워하고 다른 약속 있다고 핑계 대는 일이 다반사 아닌가.
두 번째 역동적(Dynamic)이다. 대부분 회사 생활이 사무실내 몇 평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택시기사가 일하는 공간은 서울시 전체 면적 625평방킬로미터이다. 한 밤중에 예술작품과도 같은 찬란한 한강 다리 조명을 바라보며 달리는 올림픽대로는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라는 게 이 씨의 설명이었다.
세 번째 자기개발(Developable)이다. 택시에서는 일하면서 외국어 공부가 가능하다.
새벽에 중국어 카세트를 들으며 홍대 앞 삼거리포차에 가면 밤새 술 마시고 집에 가는 대학생이나 젊은 직장인이 탄다. 머리가 허연 택시기사가 중국어 공부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 자기는 밤새 술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데 노인이 택시로 일을 하며 중국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이제부터 각오를 새로이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일도 있었다.
즐길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얻은 수많은 즐거움들
“월 소득에 대한 눈높이를 낮추면 택시기사도 할 만 합니다. 단순 노동이라 골치 아플 일이 없습니다. 건설 노동자처럼 육체적으로 힘든 일도 아닙니다. 손님이 내릴 때마다 택시요금 계산을 하니 치매 예방도 됩니다. 여러 곳을 다니며 길을 많이 알게 됩니다. 여러 사람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인생을 배우게 되는 건 덤입니다. 회사택시를 무사고 3년 이상 하게 되면 개인택시를 할 수 있는 자격이 되죠. 개인택시는 이틀을 일하고 하루를 쉽니다.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거죠. 정년도 없습니다. 건강이 허용한다면 80세까지도 할 수 있어요. 나이가 들어도 일이 있는 게 좋은 겁니다.”
요즘 댄스스포츠를 부인과 함께 복지센타에서 배우고 있다는 그는 아내가 가장 든든한 후원자라 자부했다.
“부부는 공동의 취미생활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부가 같이 댄스스포츠를 다니며 취미를 즐기니까, 스킨십과 대화가 잦아지고 눈을 마주치니까 자연스레 서로 더 의지하게 되데요. 부부 금슬 비결은 같이 삶을 즐기는데 있는 것 같아요.”
이 씨는 선뜻 무언가를 하지 못하는 시니어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을 전했다.
“100세 시대의 준비가 필요하잖아요? 60세 이후의 삶에 대하여 은퇴 후 무위도식한다고 하면 너무 시간이 많이 남습니다. 뭔가를 해야 하죠. 그래서 후회하지 않도록 즐기는 일을 하는 게 좋아요. 제가 삼성에 있을 때 일을 좋아는 했지만 즐긴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지금 택시기사 일은 즐기고 있어요.”
‘知者不如好者(지자불여호자) 好者不如樂者(호자불여락자) 아무리 많이 아는자라 할지라도
그것을 좋아하는 자만 같지 못하고 아무리 좋아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것을 즐기는 자를 따를 수 없다’라는 논어 옹야편 구절을 직접 써 주면서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 하는 것이야말로 노후를 즐기는 지혜라고 그는 강조했다.
택시기사 이춘계 씨가 20년이 지나면 82세가 된다. 그때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그땐 댄스스포츠를 전파하러 다녀야죠. 또 한편으로는 어릴 적 꿈인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겠죠. 아마도 기업이나 사람들에게 제 인생을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러 강사가 되어있지 않을까요? 매력적이지 않나요. 이게 자유로운 인생 3막 아닐까요?”(웃음)
한국도로공사가 2014년 신입(수습)사원 공개채용을 실시한다.
이번 채용은 일반 및 사회형평공채와 고졸공채로 나눠 진행한다.
일반ㆍ사회형평공채는 크게 사무직과 기술직으로 나눠 인력을 채용한다. 사무직에는 경영ㆍ행정ㆍ법률 분야로, 기술직에는 토목ㆍ전기ㆍ조경ㆍ기계ㆍ정보통신 분야로 각각 세분화해 채용할 계획이다.
이 분야 공채는 일반공채와 사회형평공채(취업지원, 장애인)로 구분된다.
채용직급은 수습사원이다. 공채인턴 신분으로 현장실습(5개월 내외, 단 인력수급여건에 따라 연장가능)기간 종료 후 특별한 결격사유 없을 경우 정규직(5급)으로 임용된다.
두 분야 모두 학력ㆍ연령 등에 대해 제한이 없다. 또 채용일(2014년 3월중 예정)로부터 근무 가능자 및 지방근무 가능자만 지원이 가능하다.
다만 일반공채 및 사회형평공채 중복 지원이 불가하다.
자격사항에는 필수 어학기준과 필수 자격증기준이 있다. 어학기준으로는 TOEIC 700점, TEPS 625점, TOEFL(IBT)71점 이상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또 기술직은 해당분야 기사 이상의 자격증을 소지해야 한다.
고졸공채는 △사무(회계) △토목 △전기 △기계설비 △정보통신(전산·전자) 분야에서 인재를 채용할 예정이다.
채용직급은 수습사원으로 공채인턴 신분으로 현장실습(5개월 내외, 단 인력수급여건에 따라 연장가능)기간 종료 후 특별한 결격사유 없을 경우 정규직(8급)으로 임용된다.
지원자격은 최종학력이 고등학교 졸업(예정)자 및 고졸 검정고시 합격자여야 한다.
또 자격사항으로는 선발분야 기능사 이상 자격증을 소지해야 하고 고졸자는 고등학교 전 학년 내신 평균 5.00등급 이내, 내신 등급 학교장 확인서가 있어야 한다. 또한 고졸 검정고시 합격자는 전과목 성적 평균 80점 이상의 자격은 갖춰야 한다.
일반 및 사회형평공채와 고졸공채의 접수기한은 오는 7일 오후 3시까지며 당사 홈페이지(www.ex.co.kr)를 이용해 접수하면 된다.
접수 후 필기전형이 실시되기 때문에 당사 홈페이를 필히 참고해야 한다고 회사 측은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