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플레이어, 검정 교복, 불량 식품, 필름 카메라, 만화 잡지 등 ‘레트로(retro)’는 과거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문화적 소품이나 콘텐츠를 지칭한다. 예능과 다큐는 물론 영화, 드라마에서도 이런 소품이나 콘텐츠를 마치 레트로의 본질적인 것인 양 부각한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지나치게 지엽적이다. 그것들 사이를 관통하고 있는 보편적인 코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사치일 수도 있겠다. 레트로가 제대로 복권(復權)된 것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복고는 온갖 비난과 폄하를 당해왔다. 특히 고성장기에는 무조건 앞으로 전진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한때 레트로는 단순 복고로 여겨져 세 가지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아직도 이런 분위기가 남아 있다. 이런 시선을 밟고 나가야 레트로의 본질에 닿을 것이다. 우선 문화 지체로 보는 시선이 있었다. 복고는 취향과 선택이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지 못하다고 진단되었다. 복고 소재를 다루는 문화 콘텐츠의 경우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고 답습하고 우려먹기 식으로 제작한다고 비판했다. 다른 하나는 현실 도피로 보는 시선이었다.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과거로 퇴행한다는 비판이었다. 이 때문에 정신병리학적 측면의 진단이 내려지기도 했다. 미래 전망이 불투명할 때 매번 복고 열풍이 일어난다는 규정이었다. 마지막은 복고를 일시적 트렌드로 보는 시선이었다. 그래서 복고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묻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복고는 항구적이다. 다만 시기와 대상이 달라질 뿐이다. 1970~80년대 문화가 1990년대로 이동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실제로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줬다. 얼마 안 있으면 2000년대가 레트로의 시공간으로 등장할 것이다.
레트로에는 단순한 추억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본질적인 맥락은 복고풍에 있다. 즉 복고 스타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레트로가 단순히 옛날에 사용하거나 즐겼던 대상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옛날에 쓰던 물건이나 즐기던 문화 활동이 다시 등장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똑같은 음악이나 옷, 가구가 아닌 과거의 스타일을 현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다. 옛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차별화된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젊은 세대에 레트로는 재발견의 대상이다. 필름 카메라와 현상 사진은 새롭게 재발견되어 개인 취향이 된다. 그런데 필름 카메라는 단순히 옛날에 쓰던 물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디지털의 장점을 결합시켜 새로운 디자인을 보여준다. 궁궐이나 한옥마을에서 입는 한복도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젊은 세대가 입는 한복은 기성세대가 입던 한복보다 더 화려하고 블링블링하다. 중년 세대에게 레트로는 추억이다. 그것도 아름답고 애틋함을 자아내게 만드는 황금 같은 기억들을 담고 있다. 친숙한 것들은 인지심리학적으로 편안함을 준다.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지 않아도 되어 뇌의 활동이 거의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과거 속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레트로는 자기진화를 하는 경향이 있다. 중년 이후의 세대가 복고에 관심을 갖는 것은 청춘기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도 젊게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그래서 과거의 시간을 데려와 현재의 시간과 융합시키려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라도 추억과 향수의 대상은 재창조되어야 한다.
젊은 세대의 재발견과 중년 세대의 추억을 변증법적으로 아우르는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바로 뉴트로(new-tro)다. 이는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로 복고를 새롭게 향유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과거 스타일로 보이지만, 현대적인 감각이 더해져 기성 세대에게는 익숙한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고, 새로운 세대에게는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이러한 뉴트로 제품은 새 것이면서도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빈티지한 느낌을 하나의 스타일로 가전제품, 가구, 포장지 디자인에 적용하는 것이 그 예라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유행, 즉 뉴트로 트렌드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물품이나 콘텐츠에서만 생겨나는 게 아니다. 뭔가 보편적 가치와 매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누구라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 코드가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뉴트로’라는 신조어가 생겨나지 않았을 때는 리메이크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왔다. 일반 생활용품에만 적용되지 않았을 뿐이다. 영화나 음악작품의 리메이크는 과거의 콘텐츠를 새로운 감각에 맞게 재창작하는 것이다. 이때 레트로는 새로운 창조의 수원지 역할을 한다. 세대 교감과 통합의 매개 역할도 한다. ‘불후의 명곡’이나 ‘히든 싱어’에 나오는 노래들은 과거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작품으로 자리매김됐다. 이것들은 더 이상 낡은 것이 아니고 새로운 유행의 시작이다.
중년 세대만이 친숙하게 생각할 것 같은 복고는 레트로를 통해 하나의 트렌드를 만들어낸다. 레트로는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경험의 문을 열어준다. 또한 가벼운 트렌드가 아닌 깊이와 품격을 지닌 고급문화를 알게 해준다. 신구 세대의 만남이 레트로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그래서 세대 간의 문화적 갈등은 줄고 미래지향적 흐름이 존재하게 된다. 레트로는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다. 끊임없는 콘텐츠로 다시 태어난다. 그것은 분명 젊은 세대의 감각과 융합 기술이 있기에 가능하다.
다만, 한국의 레트로는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형성, 창조되지 않는 면이 있다. 대중매체와 대기업이 대형 마케팅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레트로의 창조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유명 장소, 유행 콘텐츠를 따라 하거나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레트로 스타일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레트로의 생명력이 세대 간을 가로질러 미래에도 존재할 수 있다.
2018년 1월 1일. 짝지의 60세 생일이다. 이제는 헤아리기도 버거운 시간을 지내왔다는 사실이 낯설다. 그 많은 시간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어쩌다 보니 같이한 세월도 34년이다. ‘인생 금방’이라는 선배들의 푸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그 시절 데이트는 대부분 ‘두 발로 뚜벅뚜벅’이었다. 좋아서 걷고, 작업하려고 걷고, 돈이 없어서 걷고, 사색하느라 걷고. 애꿎은 다리만 중노동하듯 시달렸다. 남자 친구가 학교에서 여자 친구를 만나 집까지 데려다 주다가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잤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남산, 능동 어린이대공원, 경복궁, 덕수궁, 동숭동, 인사동, 명동, 북한산, 수락산, 소요산 등등 참 많이도 걸었다. 그중 최고는 조국순례대행진! 8월 1일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대학생들이 한곳에 집결해 광복절 기념식을 하는 국가적 행사였다. 학교당 4인 1조로 참여하는 이 걷기순례에서 많은 추억과 인연이 만들어졌다.
필자 팀은 김천에서 출발해 청주까지 꼬박 14박 15일을 걸었다.
8월 한여름 태양을 머리에 이고 걷던 수많은 청춘의 진한 땀 냄새가 가득했다. 필자 인생에서 더 이상 가보지 못한 길들이다. 50대에 시작한 등산에는 그 시절에 대한 로망이 묻어 있음을 본다. 특히 지리산 종주 산행은 그때의 용기를 떠올리게 하는 자조의 시간이기도 했다.
조국순례대행진 때 추억을 만들어준 몇몇 인연이 58년 개띠였다. 아삼삼한 기억을 돌려보면 온통 개판이다. 참가자들의 학번이 대부분 77, 78이었으니 말이다. 두 발 데이트에 딱 어울리는 것은 영화와 연극 관람이다. 국도극장, 대한극장, 명보극장,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동숭동 소극장, 덕수궁 옆 창고극장, 명동 소극장, 장충동 국립극장. 그 이름만으로도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DJ의 에코 멘트와 리퀘스트가 있던 음악다방. 어둠침침했던 레스토랑! 서양 필이 나던 커피 맛! 공강시간이면 내 아지트처럼 달려갔던 구석진 그곳! 학교 주변 호프집과 시장통 선술집 기억은 거의 없다. 그 주님(?)과 친하지 못한 관계로 특별한 에피소드도 없다.
그 시절 인기 있는 장소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또 있다. 바로 동네마다 들어서 있던 작은 서점과 만화방이다. 서점도 데이트 장소로 인기였다. 필자의 취미이자 특기인 독서는 만화책 읽기와 연애시집 사기에서 시작됐다. 가끔씩 집 정리를 하다가 발견되는, 자식 나이보다 더 오래된 누런 책을 아이에게 권해본다.
레코드판도 서점에서 구입했던 것 같다. 용돈 아껴 한 장씩 사 모았던 LP판. 이제는 골동품이 되었다. 서점 한쪽에 LP판을 매입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추억을 팔 수는 없다! 하고 간직하고 있지만 보관이 어려워 애물단지다. 최근 턴테이블을 찾아 모양을 갖춰봤다. 어느 날 한 번은 꼭 틀어볼 셈이다. 옷과 가방을 구입할 때는 명동이나 이대 앞, 동대문시장이 최고였다. 전자제품은 세운상가나 용산전자상가로 갔다. 그러고 보니 당시 핫 아이템이었던 소니 워크맨을 사러 신촌 미제시장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우연히 들어갔던 당구장은 남자들과 담배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금녀의 공간이라기에 분위기가 어떨지 조금 궁금했는데 딱히 충격적이거나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없었다. 40대 초반에 배운 포켓볼. 담배 냄새 없는 집 근처 당구장을 찾아 열공했던 시절도 있다. 주인장은 온종일 당구장에서 큐대를 들고 낑낑대는 필자를 보고 “아줌마! 밥하러 안 가세요?” 했다. 그러면 “밥 미리 해놓고 왔어요~” 했다. 그것도 벌써 20년 전 일이다.
그 시절은 포크송이 대세였다. 송승환과 왕영은이 사회를 보던 1980년대 인기 음악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에서 이어진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해변가요제의 등장으로 누구나 한 번쯤은 통기타 메고 가요제 참가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필자도 길거리에서 밴드 보컬 제안을 받은 쑥스러운 기억이 있다. 교내 축제 공연이 있던 날, 술자리에서 급조된 짝지네 팀 밴드는 딕패밀리의 곡 중에서 신중하게 ‘나는 못난이’를 간택(?)해 참가했다. 공연하는데 전기가 나가 비록 앰프와 마이크는 꺼졌지만 젊은 혈기는 청춘의 생목으로 끝까지 완창하는 투지를 발휘했다. 과 동기의 의리로 베이스 담당 짝지에게 꽃다발 들고 응원을 갔건만 노래 제목처럼 되어버린 기억은 지금 떠올려도 재미나다. 결과와 무관하게 지난 시간들은 모두 그리운 추억이 된다.
이제 그 청년은 한쪽 어깨에 통기타를 메고 ‘동해 하조대해수욕장’이라는 간판을 배경으로 빛바랜 사진 속에 서 있다. 나팔바지에 청재킷을 걸치고 긴 머리를 쓸어 올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고혈압을 조심하는 육순의 장년이 되어 있다.
필자는 견공(犬公) 세 분과 산다. 12세 레드 닥스훈트와 2세 믹스 유기견, 그리고 58개띠 짝지 그분이다. 34년을 동고동락한 그분과의 세월보다 선한 눈빛과 따스한 체온, 변함없는 신뢰의 견공 두 마리에게 더 맘이 간다.
‘호모 사피엔스 짝지 vs 거의 호모 멍멍이우스’
필자와 동종이신 그분은 두 마리 견공에게 질투와 부러움을 대놓고 내비친다. 무엇을 해도 ‘개판’이 된다며 툴툴대는 58개띠 짝지님의 씩씩 건재함에 감사를 보낸다.
“저기요~ 앞으로 남은 시간 사이좋게 지내봅시다!”
오디오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은 진공관 오디오를 위한 기술적 에세이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다.
저자 오디오 장인 서병익은 13살에 처음 광석라디오를 제작하며 오디오 세계를 접했다. 그는 오디오 업계에서 직업인으로서의 삶을 보낸 후,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건 서병익오디오를 설립하여 오디오를 만들고 있다. 그의 오디오 제작 지론은 ‘대를 이어 물려줄 오디오를 제작한다’였다.
오디오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알려진 이름이었던 서병익이 대중에게도 알려질 수 있었던 계기는 드라마 를 통해서였다. 드라마에서 김수현이 연기한 도민준은 LP카페를 단골로 다니는 빈티지 마니아였다. 그리고 그의 방에 있었던 오디오 시스템이 바로 서병익오디오의 앰프와 스피커들이었다. 이후로도 서병익오디오의 오디오는 , , 등 여러 드라마와 영화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셀러브리티적인 면을 차치하고라도 서병익오디오가 국내 하이파이 오디오 업계에서 갖는 위치는 독자적이다. KT120 같은 새로운 진공관을 채용한 앰프, RIAA(미국레코드협회)가 표준을 제시한 1955년보다 이전에 나온 모노 음반들을 제대로 재생할 수 있는 포노앰프 등등의 특별한 모델들은 회로에서부터 자신만의 노하우로 설계가 가능하기에 만들 수 있는 서병익식 오디오의 기술적 강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저한 기술인으로서 오디오에 대해 말한다는 점에서 자연인 서병익의 강점이 있다.
보다 좋은 소리, 좋은 음악과 함께 하길
기술집약적인 오디오 세계에서 어떤 사실은 기술자들끼리의 노하우로, 어떤 사실은 엉뚱하게 변형된 낭만적 풍문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출판사 필요한책(대표 유정훈)은 때로는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지만 때로는 황당하고 엉뚱한 수업료를 내게 만드는 오디오의 화두들에 대하여 제대로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오디오 장인 서병익 저자는 그러한 내용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동시에 사람들이 제대로 된 오디오의 원리와 결과를 알게 되어 보다 좋은 소리, 좋은 음악과 함께 하길 갈망하고 있다. 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만들게 됐다.
필요한책에서 만든 은 50여 년 동안 오디오와 접했던 기술인의 입장에서 그동안 잘못 알려진 정보들을 바로잡고 더 나은 소리와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한 결과물이다. 그래서 다소 어려울 수도 있는 내용을 풀기 위해 에세이 형식을 취했으며 오디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연스럽게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주제들을 위주로 구성했다. 그리고 주로 진공관 오디오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전반적인 오디오의 사정도 알 수 있게끔 돕는 책으로서 만들어졌다.
한 극장이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지금까지 힘없는 연극인들은 도시 개발, 상권 확장에 쉽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기억 속으로 사라진 극장만도 헤아릴 수 없는 요즘, 부산의 가마골소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소극장의 옛 추억을 간직한 시니어 세대와 무대를 지키고 싶은 젊은 연극인의 꿈이 담겨 있는 공간 가마골 소극장에 다녀왔다.
오늘도 내일도 극장문은 활짝 열린다
지난 7월 7일, 부산시 기장군 일광면. 조용했던 마을에 풍악이 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낯익은 배우가 박자에 맞춰 덩실덩실 춤추고 모두의 얼굴은 상기돼 기쁜 모습이었다. 한산했던 시골 동네에 부산 연극의 중심이던 가마골소극장이 들어섰다. 6층짜리 화려한 건물 안에는 공연장을 비롯해 주점, 카페 등 연극인과 시민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채워졌다. 1986년 부산 광장동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가마골소극장은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산실을 담당하던 곳이다. 연희단거리패의 활동 무대가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졌을 때도 꾸준히 실험연극을 비롯해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면서 시민의 사랑을 받았다. 중앙동과 광안리, 다시 광복동을 거쳐서 거제리로 무대를 옮겨 다니면서도 다수 공연의 매진 행렬과 최대 유료객석 점유율을 기록한 내실 있는 극장이었다. 그러나 시대 기류에 못 이겨 폐관이 기로에 서기도 했다. 결국 길고 길었던 셋방살이 30년에 종지부를 찍고 100년 길이 남을 극장으로 기장군에 세워졌다.
역사와 추억을 품다
“현재 부산 기장군에 신축 중인 6층짜리 가마골소극장의 건물 1층은 포장마차로, 2층은 카페 오아시스로 꾸밀 생각이라고 한다. 위층은 극장과 극단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될 것….”(2017년 7월호 브라보가 만난 사람, 연극연출가 이윤택 인터뷰 中)
가마골소극장에 관한 계획은 작년 7월 연희단거리패의 꼭두쇠 이윤택 인터뷰를 통해 본지에 소개된 바 있다. 막연한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을 극장 건립을 통해 보여준 것. 1층에는 목로주점 양산박이 있다. 이윤택이 신문기자이던 시절 한 시인을 돕기 위해 부산일보 기자 네 명과 함께 출자해 부산시 광복동 입구에 차렸다던 ‘양산박’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2층은 부산 국제시장 근처에 있던 클래식 음악 카페 오아시스의 향수가 묻어나는 곳으로 꾸몄다. 이윤택이 20대이던 시절 당시 돈 80원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음악 듣고 시 쓰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곳이 바로 카페 오아시스였다고. 그때처럼 LP판은 아니지만 지금의 카페 오아시스도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 천장에는 지금까지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했던 작품의 포스터가 촘촘하게 붙어 있다. 극단과 극장의 세월을 가늠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 콘서트, 세미나, 북콘서트를 통해 시민과 교류하는 만남의 장소로 이용할 계획이다.
2층에는 가마골소극장과 연희단거리패를 대표하는 여배우이자 연출가였던 故 이윤주의 기념관과 북카페 ‘책굽는 가마’가 함께 자리했다. 2015년 투병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꽃같이 사라진 배우이자 연출가 이윤주를 기리는 이윤주기념관에서는 그녀 연극생활의 시작과 끝을 만날 수 있다. 가마골소극장의 대표로서 서울보다는 부산 연극무대를 지켜왔던 이윤주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비한 몸짓과 목소리를 가졌던 배우이자 연극쟁이였다. 아동극 연출과 연극 에서 배우를 마지막으로 영영 사라진 그녀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북카페 ‘책굽는 가마’에는 연희단거리패가 지금까지 출판했던 도서와 연희단거리패 연극 200선을 구비해놓고 판매도 한다. 조용히 책을 읽고 차를 마시기에 좋다.
3층과 4층이 바로 가마골소극장이다. 120석 규모의 극장은 작은 무대이지만 높이와 경사각이 깊어 무대가 답답해 보이지 않는 장점이 있다. 5층과 6층은 배우들의 숙소와 연희단거리패의 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아카이브도 마련돼 있다.
배우와 스태프가 직접 만들고 운영까지 하는 곳
가마골소극장에는 남다른 시스템이 있다. 바로 극단의 모든 구성원이 운영 주체다. 1층과 2층의 주점과 카페에서 일하는 종업원들도 배우들과 스태프다. 분장을 하고 커피를 만들거나 서빙을 하고, 셔틀버스를 운행한 배우가 곧바로 무대에 올라가기도 한다. 극장의 무대, 조명, 음향, 객석 등 사람들이 오가는 곳곳에도 극단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이 서려 있다.
연희단거리패 조명감독 겸 가마골소극장 대표인 조인곤씨는 “가마골소극장은 연희단거리패와 극단가마골, 가마골소극장의 역사 저장창고라고 생각한다”며 “시간이 지나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역사적 유물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기장에는 미역도 있고 멸치도 있고 해수욕장도 있다. 그리고 가마골소극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라!
지독하게 더웠던 2016년 여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올해도 그 끔찍한 시간이 어느새 성큼 다가왔다. 무더위를 피해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무더위의 고통에서 벗어나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곳은 의외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것도 책과 함께 지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공간들이, 알고 보면 근처 한 시간 거리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북캉스’로 하루 보낼 곳을 기웃거려볼까.
*북캉스: 책을 뜻하는 영어 단어 ‘북’에 ‘바캉스’를 결합시켜 만든 신조어
책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TV, 영화 등 화려한 영상 문화와 게임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조류에 밀려 문화의 중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책이었다. 우리들에게 지금 책은 영상과 말의 과잉으로 넘쳐나는 일상을 힐링하는 촉매로서 그 역할을 되찾고 있다.
선진국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의 도서관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 현실 속에서 일상을 힐링하는 책의 공공기능적 역할을 간파한 기업들은 너도나도 도서관을 중심으로 한 문화 공간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이제 젊은 시절처럼 산으로 바다로 가지 않아도 여름을 시원하게 날 수 있는 기회들이 늘어났다. 여름휴가를 떠나는 대신 도서관이나 동주민센터, 백화점 북카페, 서점 등에서 책을 읽으며 더위를 식히는 이른바 ‘북캉스’ 문화가 시니어들에게도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 곳곳에 위치한 책 향기 그윽한 서점과 강연과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복합공간의 도서관은 무더위를 식히는 도심 속 정자마루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 순화동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한길사 ‘순화동천’
책 좀 읽었다는 시니어들에게 인문학 중심 도서들을 주로 펴낸 한길사라는 출판사가 만들어내는 무게감은 각별하다. 그 한길사가 오랜 준비 끝에 지난 4월 말에 인문예술공간 ‘순화동천’의 문을 열었다. 한길사가 창업 초기 자리했던 서울 중구 순화동에 만들어진 순화동천은 3만여 권의 책이 즐비한 550평 규모의 공간이며 책 박물관, 갤러리, 강의실, 회의실, 서점으로 구성됐다.
한길사는 오래전부터 독자가 중심이 된 ‘책 놀이터’를 마련하고자 했으며 순화동의 ‘순화’와 노장사상에 나오는 이상향인 ‘동천’을 더해 ‘순화동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문·예술적 삶을 지향하는 이들의 ‘평화를 순례하는 유토피아’가 되겠다는 의미다.
책 박물관은 근·현대출판문화사에 빛나는 아름다운 고서들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또한 작은 음악회를 열 수 있어 음악과 미술을 함께 즐길 수 있다. 강의실과 회의실로 사용할 수 있는 4개의 공간은 각각 ‘퍼스트아트’, ‘한나 아렌트 방’, ‘윌리엄 모리스 방’, ‘플라톤 방’으로 불린다. 전시회나 출판기념회, 8~15명이 참석하는 소규모 회의, 50~70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강연을 진행할 수 있으며 인터넷으로 접수를 받는다.
아트갤러리와 한길책방은 60m에 이르는 긴 복도로 이뤄져 있다. 복도의 한쪽 벽은 아름다운 미술 작품들이 걸린 아트갤러리로, 다른 쪽 벽은 한길사가 지난 40년 동안 펴낸 고품격 인문·예술도서가 들어찬 한길책방이다. 복도 중간에는 ‘카페뮤지엄’이 있어 커피와 함께 잠시 쉬며 책과 미술 작품을 즐길 수 있다.
◇ 도심 한복판에서 만나는 시원한 자유, 신세계 ‘별마당 도서관’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코엑스 안에 초대형 도서관이 있다? 사실이다. 신세계가 지난 5월 말에 문을 연 ‘별마당 도서관’은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열린 도서관’이다. 회원카드도 따로 없다. 오래 머물러도 된다. 음료를 가지고 와도 괜찮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책과 함께 누릴 수 있는 자유다.
별마당 도서관은 총면적 2800㎡에 2개 층으로 구성돼 있다. 도서관 내부에는 13m 높이의 대형 서가 3개를 중심으로 소파형·계단형 등 총 200석의 의자와 책상을 배치했다. 또 은은한 간접조명을 설치해 개인 서재 분위기를 냈고, 곳곳에 콘센트와 USB 단자를 구비해 노트북과 휴대전화 충전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는 5만여 권의 장서와 600여 권의 잡지가 준비되어 있는데, 잡지 코너만 보면 국내 최대 규모다. 고객들의 도서 기증도 받고 있기에 집에 보관해둔 책을 기증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별마당 도서관은 대출은 불가능하며 열람만 가능하다. 또한 도난방지 장치가 없다. 도서관과 쇼핑몰 사이에 출입구가 따로 없이 사방으로 열려 있는 구조이지만, 도난경보기 등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사람의 마음을 믿는 구조다.
별마당 도서관은 문화와 휴식을 갖춘 열린 도서관을 찾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어 도서관이 지역 상권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시설이라고 판단해 만들어졌다. 별마당 도서관의 모델은 인구 5만 명의 소도시인 일본 다케오 시의 ‘다케오 시립 도서관’이다. 다케오 시립 도서관은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열린 도서관 콘셉트로 2013년에 리뉴얼한 이후 연간 1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 키덜트 겨냥한 예스24 ‘홍대던전’
인터넷 서점들의 오프라인 서점 진출이 줄을 잇고 있다. 그동안 인터넷 서점들이 오프라인 거점을 주로 중고서점 중심으로 만든 것과는 달리, 예스24는 콘셉트 서점을 기획해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에 서브컬처(하위문화) 복합문화공간인 ‘홍대던전’을 열었다.
홍대던전은 청소년에서 키덜트까지를 주 고객으로 하는 라이트노벨(가벼운 느낌의 장르소설)·애니메이션·게임 등 ‘서브컬처’ 맞춤문화공간을 지향한다. 5월에 문을 연 예스24 중고서점 홍대점과 아래위층으로 연결돼 있다. ‘홍대던전’에는 누구나 무료로 라이트노벨을 읽을 수 있는 열람공간, 피규어와 퍼즐 등 캐릭터 상품과 코스프레 전문용품을 모아둔 판매공간, 애니메이션과 게임 속 메뉴를 모티브로 한 음식을 판매하는 매점 등이 마련되어 있다.
◇ 지적 세계로의 여행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현대카드는 ‘혁신’을 기업 이미지로 삼으면서 아날로그와의 적극적인 결합을 꾸준히 지향했다. 서울 도심의 네 곳에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세워진 ‘현대카드 라이브러리’는 아날로그의 대표적 콘텐츠인 책에 주목한 현대카드의 또 다른 실험이다. 공연과 문화공간 등을 통해 컬처 브랜딩의 선두주자로 각인된 현대카드에서 책을 통해 지적 브랜딩의 출발점을 잡은 것이다.
가회동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에는 디자인 서적들이, 이태원 ‘뮤직 라이브러리’에는 음악 관련 서적들이 있다. 뮤직 라이브러리에는 책과 함께 1950년대 이후에 나온 1만여 장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LP들이 구비되어 있어서 LP를 통한 음악의 역사를 직접 체험하게 하고 있다. 심지어 계속 업데이트하는 중이다. 신사동 ‘쿠킹 라이브러리’는 음식 관련 서적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어 있다. 재료 카드를 사면 현장에서 요리도 가능하다고 한다. 청담동 ‘트래블 라이브러리’는 독서를 여행과 동일하다고 여기고 1만5000여 권에 달하는 여행 관련 서적들뿐만 아니라 책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문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는 여행을 ‘일상의 경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모든 형태의 지적 활동’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 사회취약 계층과 함께하는 ‘네이버 라이브러리’
분당구 정자동의 네이버 사옥 로비에 자리한 네이버 라이브러리는 도서관, 서점, 북카페를 결합시켜 책이 있는 공간의 장점들을 모두 경험하도록 하는 데 목적을 뒀다. 디자인과 IT에 특화된 네이버 라이브러리는 디자인 장서 1만7000여 권, IT 장서 7000여 권, 전 세계의 전문 백과사전 1300여 권, 국내외 잡지 250여 종이 준비되어 있다. IT 기업이 운영하는 도서관이라는 특색을 살리면서 개인이 구매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비싼 디자인과 IT 분야의 책들을 접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책을 고르기 쉽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반적인 도서관들과는 달리 ‘절대 정숙’ 문화가 아닌 대화하고 토론하는 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네이버 라이브러리는 네이버의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성격을 살리기 위해 사회취약 계층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사서는 시니어들이 맡고 있으며 안에 위치한 카페는 발달장애인의 일터를 만드는 회사 베어베터와 함께 운영되며 지적장애나 자폐를 가진 청년들이 커피를 만든다.
◇ 도심 속 한옥 도서관 ‘청운문학도서관’
종로구 청운동,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청운문학도서관은 종로구에서 16번째로 만들어진 도서관이자 최초로 한옥으로 만들어진 공공 도서관이다. 지붕은 전통 방식의 수제 기와를 사용했고 담 위에 얹은 기와는 돈의문 뉴타운 지역에서 철거된 한옥의 기와 3000여 장을 가져와 사용했다. 그야말로 전통 한옥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건물이다.
청운문학도서관 1층은 한옥이며 지하는 반지하식 양옥 건물이다. 1층에서는 시, 문학 창작교실, 문화예술교육, 인문학 콘서트 등이 열린다. 지하층은 시, 소설, 수필 위주의 문학 도서를 만날 수 있는 자료실과 책을 읽을 수 있는 열람실이 있다. 또한 온돌식 독서공간도 마련되어 한옥 도서관이라는 콘셉트를 충실하게 살리고 있다. 물론 여름에는 에어컨을 통해시원하게 유지된다고 하니 냉방은 합리적인 현대기술을 이용했겠다.
도서관 같은 서점 인터파크 ‘북파크’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2, 3층 총 2000㎡ 공간에 자리 잡은 ‘북파크’는 북카페나 도서관처럼 이용할 수 있는 서점이다. 50여 개의 테이블과 200여 개의 의자, 앉아서 책 읽기가 가능한 계단 등이 마련돼 있다. 독서공간의 분위기도 다락방 스타일, 테라스 스타일, 응접실 스타일 등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고를 수 있다. 또 계단 밑이나 서가 뒤 숨은 공간에서 아늑한 분위기를 즐기며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어린이책 코너 부근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뒹굴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일곱 곳이나 있다. ‘보신 책은 북박스에 넣어주시면 직원이 정리한다’는 안내문구까지 있으니, 책의 구매 여부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서점이다.
북파크는 인터파크의 과학재단인 카오스재단이 2016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카오스재단의 설립 목적인 ‘과학의 대중화와 과학지식의 공유’ 취지에 맞춰 총 10만여 권의 보유 서적 중 절반 정도가 과학 관련 책이다. 서점 안에는 35석 규모의 다윈룸과 8석 규모의 뉴턴룸 등 모임 장소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북파크는 이태원이나 경리단길 유명 맛집과 가깝고 공연장이 같은 건물에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다. 여름방학이 되면 손주 손을 잡고 다녀와도 좋겠다.
이밖에도 CJ CGV와 쉐라톤워커힐 호텔도 도서관을 만들었다. 금융계에서도 KEB 하나은행 본점인 을지로 사옥에도 도서관이 들어설 예정이고 대신증권도 명동 사옥에 도서관을 열었다. 기업들이 앞다퉈 사회공헌 차원에서 도서관을 개장하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과거에는 한 노인의 죽음을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에 비유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식의 총량이 매일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막대하게 늘어나고 있다. 때문에 인생 경륜을 어설프게 드러내는 것은 자칫 뭘 모르면서 꼰대 노릇하는 걸로 비치기 십상인 세상이 됐다.
나이 듦에 따라 정신과 지식의 세계도 변모하기에 품위 있게 늙는 일은 중요하다. 문화지성인으로서의 비움과 채움이 필요한 시니어에게 도서관은 여전히 매력적인 공간이자 여행지다. 다시 찾아온 무더운 여름, 어디를 갈까 고민 말고 가까운 도서관에 놀러 가보자.
거창한 표현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이다. 김흥국(59)은 현재 대한민국 문화계의 어떤 현상이다. 세상에 환갑을 바라보고 있는 가수가 ‘대세’라 불리우며 방송가의 블루칩으로 신출귀몰 활동하는 장면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심지어 얼마 전에는 그가 1994년에 내놓은 희귀 ‘레게’ 앨범이 LP로 복각되어 발매되기까지 했다.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보장하는 ‘예능 치트키’ 김흥국. 그러나 모든 웃음의 이면에는 사람들이 쉬 보지 못하는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예능에서 볼 수 없었던 ‘가수협회장’ 김흥국이 직접 말하는 약간 진지한 이야기, 그리고 인생에 대한 시선을 들어보자.
2016년 방송 예능계는 김흥국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장된 ‘예능 치트키’이자 네티즌에게는 ‘흥궈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김흥국 ‘가수협회장’은 나오는 방송마다 터뜨렸고 들이댔다. 환갑을 코앞에 두고 있는 방송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인기와 실적. 그러나 그는 아직 기획사가 없는 소위 ‘외로운 늑대’였다.
“평생을 혼자 해와서… (방송에) 많이 나가는 거 자체가 손해예요. 자기가 관리 못하면 그냥 ‘가는’ 거니까요. 돈에 미치고 방송에 미치고… 그런 거 좋아했으면 이 나이에 이렇게 올 수 없었어요. 관리하는 사람 없이 혼자 다하는데.”
바닥까지 경험해야 꼭대기가 보인다
홀로 무명 시절에서부터 시작해 ‘호랑나비’로 가요계 정상에 서봤다. 그리고 지금 젊은 세대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예능인으로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이제 곧 60세인데 실감은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이 그런 거 없잖아. 이 나이에 유재석, 김구라, 신동엽과 함께 프로그램할 수 있는 연예계 선배가 많지 않아요. 제가 방송 역사에 하나의 새로운 장을 쓰고 있는지도 몰라요.”
김흥국과 함께 대체할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의 MC 송해.
“물론 송해 선생님 같은 경우는 있을 수 없는, 연예계의 아주 귀중한 일이고 저의 좋은 본보기죠. 같은 국민 프로그램을 90이 넘어서 한다는 건 방송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잖아요. 라디오에는 가 있고 강석이라는 분이 있고요. 이분처럼 한 프로에서 30년 이상 한다는 것은, 청와대나 국민이 주는 상을 줘야 해요. 그분들에게 감사해야 해요.”
그는 그런 것도 못해준다면 대한민국이 문화강국으로 불릴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자연스럽게 ‘가수협회장’ 김흥국이 나오는 순간이다.
“한류 따지는 것도 훌륭하지만… 한류가 지금 최고라고 하는데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그 안에 몇 배의 시너지가 있어요. 브랜드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걸 발굴하지 않고 맨 있는 것만 갖고 우려먹고 있어요.”
가수끼리 똘똘 뭉쳐보자
그러고 보면 작년 한 해 동안 김흥국은 어느 방송에 나오든 ‘가수협회장’이라는 타이틀을 무게감 있게 들이댔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대한가수협회는 원래 한국연예협회의 분과로 배치되어 운영되다가, 2006년에 창립총회를 갖고 사단법인으로 인가받고 독립했다. 김흥국은 가수협회장으로서의 삶에 대해 “쉽지 않다”며 그간의 역경을 토로했다. 방송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엄청나게 홍보를 했죠. 국민들이 우리 단체를 잘 알죠. 그래도 해보니까 허허허…(웃음). 책임감이 무겁죠. 무명가수나 원로가수들은 ‘김흥국 대단하다’ 하면서 기대를 많이 갖고 있는데, 정작 히트곡을 가진 가수의 마음이 변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분들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팬들에게만 사랑을 돌려줄 게 아니라 선후배들이 이렇게 어렵게 활동하는지를 알고 복지를 위한 활동도 해주셨으면 해요.”
그는 복지란 게 어려운 게 아니라고 밝혔다.
“정치적인 게 아닙니다. 각 분야의 구호복지기관 많잖아요? 그분들이 열심히 하듯이 우리도 뒤늦게 출범했지만 같은 가수로서 진짜 똘똘 뭉쳐야 해요. 한목소리를 내려면 선후배 가수들이 인기가 있든 없든 가족이라 생각할 적에 힘이 생기는 거죠. 누구 하나 열심히 해서 된다고 보진 않아요. 우리도 보면 열심히 노래만 했지 다른 것은 신경을 안 썼잖아요. 이제 그런 것을 해놔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원로가수는 나에게 부모와 같은 존재
앞서 말했듯 대한가수협회는 원래 연예협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연예협회 자체가 너무 오래됐고 다섯 개 분과가 있다 보니 너무 의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분과로 가면 안 된다, 우리도 협회가 있어야지 않냐’ 하는 자각에 의해 만들어진 게 대한가수협회다.
“대한민국 스타들 의 모임을 나 몰라라 한다는 건 이건… 정부 예산이 하나도 없잖아요. 명색이 사단법인인데. 그런데 우리가 뭉쳐서 문화를 정착시켜야 하니….”
그가 복지에 눈을 돌리게 된 이유는 명백했다.
“원로가수 분들은 제 입장에선 부모예요. 그런 부모 같은 존재가 연세 드셔서 몸도 아프고 형편이 좋지 않아요. 옛날 분들은 그냥 노래가 좋아서 국민들 위로를 해드렸지 돈 보고 노래하고 그런 게 아니었단 말예요. 그런 분들을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보나 싶죠. 그래서 우선 어른들부터 챙겼으면 하고, 어려움에 처한 유가족이나 무명가수들도 챙겼으면 합니다.”
그래서 그는 가수협회장을 맡는 3년 동안 노래를 부르지 않기로 했다.
“이나 에 안 나가고 있어요. 오퍼가 와요. 그러면 미안하다고 하죠. 회장으로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저보다는 ‘ 출연가수를 원로 한 분이라도 새로운 분으로 초대해달라’고 해요. 저야 예능에 나가고 있으니까(웃음).”
그는 이미 올해 계획 생각에 분주하다.
“5월에 가수의 날 행사를 해야 하고… 우리 협회 재정이 열악하니까 튼튼해져야 하고, 그리고 유명한 가수들 있잖아요? 그분들의 가요제가 전국 여러 곳에서 열리더군요. 그런 것도 찾아서 기획해야 하고요. 그분들도 우리와 함께 공동체로 가면 보기도 좋은데… 그걸 먼저 했던 단체들이 독점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게 가장 마음 아파요.”
인생도 축구처럼 플레이해야
김흥국에게 정말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다. 바로 “가수가 안 됐으면?”이다.
“푸하하하! 저도 그 생각할 때가 있어요. 무명생활을 십 년 했고 워낙 안 풀려서 서른 넘어서야 데뷔했죠. 돌아가신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많았고. 다행히 제가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을 보고 돌아가셨습니다만. 어머니가 제게 ‘가수 안 되면 뭐할 거냐?’라고 묻곤 했어요. 그런데 사실 저는 해병대 나온 정신으로 무명생활도 즐겼어요. 이게 한탄이나 원망을 한다고 풀릴 사안도 아니고 내가 더 부지런하게 노력을 안 해서 늦는 것 아닌가 싶었죠.”
그러나 그는 막상 정상에 서보니 본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축구에서도 나만 잘하면 좋은 플레이가 될 수 없어요.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하거든요. 축구경기를 할 때 우리 팀이 강팀이고 상대가 아주 약한 팀이면 팬들은 재미없어 합니다. 방송, 라디오도 그런걸요.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아도 반응이 없으면 재미가 없는 거예요. 축구는 플레이가 되는 날이 있고 안 되는 날이 있어요. 왜 제가 작년에 조세호를 히트시켰느냐. 이게 바로 축구에서 나온 나의 생각입니다. 연예계, 방송계의 어시스트가 있었던 겁니다. 그것을 조금만 건드려주면 바로 될 수 있는데, 못 보는 거예요.”
그는 ‘가만히 보면 배운 사람이나 있는 사람이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자기가 죽을까봐, 다 뺏길까봐, 탄로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면 안 돼요. 정치하는 사람이나 지도자나 선생님이나 왜 그리 힘들게 해요. (능력이 있지만) 어려운 사람이 보이는데. 옛날 기업인들을 봐요. 뭔가 생각을 하면 그날 밤을 새서 끝을 내죠. 그런데 미루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차이예요.”
간절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들이댐’
가수 김흥국은 ‘십 년 무명가수’였다. 간절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행동에는 절박함이 없으면 안 되는 ‘들이댐’이 있었다.
“이야, 오늘 스님이 부채에다 적어둔 얘기를 하시네. 날 보더니 ‘그대 간절한가’ 하시더만. 그게 없으면 누가 도와주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이거예요.”
절박해야 깨닫고 보이는 것이라고.
김흥국은 자주 웃었다. 그의 기질에서 비롯된 면도 있지만, 그의 삶이 성공적으로 흘러와서이기도 할 것이다. 한때 ‘기러기 아빠’의 아이콘이기도 했던 그는 얼마 전 아들딸과 함께 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기도 했다.
“아들이 잘 컸다고 말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 아버지를 생각하는 게 다르고 속이 깊다고. 외국생활을 해서 한국말이 어눌하긴 하지만 기러기 생활을 한 보람이 있어요.”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는 기러기 아빠로서의 삶은 절대 반대한다. 누구에게 추천하지도 않으며 더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고 딱 잘라서 말했다.
“아내가 힘들었죠. 나야 돈이나 부치는 거지, 말도 안 통했을 텐데.”
요즘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화제가 된 그의 딸 김주현에게는 벌써부터 기획사들이 계약하자는 연락을 해오는 모양이다.
“아내는 안 된다고 하죠. 주현이는 좋아하는데. 대학 가서 해도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에요. 나야 뭐…(웃음).”
사람들을 위한 문화공간 만들고 싶어
누가 봐도 영원한 현역으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김흥국. 그러나 그에게도 흐르는 시간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일 년 일 년 바뀔 때마다 ‘내가 언제까지 방송에 매달려야 하지?’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도 뭔가 해야겠다 싶은데 엄두를 못 내겠어요. 그쪽은 경험이 없으니까. ‘얼굴만 빌려주면 우리가 다 해주겠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믿어요? 그런데 ‘이때 해야 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혹시 준비해서 하고 싶은 것은 있는 걸까?
“손해 안 보는 거(웃음). 어려운 거 말고 쉬운 거.”
정말 김흥국다운 대답이었다.
“김흥국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와서 아지트식으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술도 한잔 할 수 있는 문화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면… 어유, 좋죠. 꿈이죠, 꿈.”
하고 싶은 일만 해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판타지를 그가 꼭 보여주면 참 좋겠다.
부득이 이사를 하면서 더 이상 책을 수납할 공간이 없어서, 아니면 부모님이 소장하고 계시던 유품들을 정리하다가 남게 된 책들, 이러한 책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끼던 책, 다 읽은 책, 필요가 없어진 책, 기증 받은 책들 중 한 권 한 권 정리하며 내놓았다. 쌓을 대로 쌓아 놓고 보니 어마어마하다. 가물가물 새록새록, 기억의 조각을 더듬어 열어 본 책 틈에 낀 먼지에서 청춘이 흩날린다.
좋은 책, 나쁜 책, 이상한 책에 따라 사고파는 가치가 달라진다. 괴테의 말에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은 책들이 너를 말해 준다’처럼 그 사람의 마음을 가늠하기 어려울 때 그 사람의 책장을 보면 된다. 수십 년 소중하게 보관해 왔던 책을 팔아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차곡차곡 박스에 담아 고생해서 헌책방에 가져갔지만, 주인의 짠 가격 매김에 다시 들고 돌아와야 하나 아니면 울며 겨자 먹기로 책을 넘길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한 번쯤 고민해 봤을지 싶다. 그 책의 가치를 아는 것은 자신이고, 자신만큼 그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제대로 값을 쳐 주고 새로운 주인에게 책을 내어 주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을 텐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지 살펴보자. 분명한 것은 같은 책이라도 파는 이의 정보력에 따라 다른 값에 팔린다는 점이다.
첫째, 책의 상태를 점검한다.
중고 책의 값을 결정할 때 당연히 책의 상태가 중요하다. CD와 DVD 등의 부속품이 딸린 책이라면 그게 없을 경우 거래 가격은 뚝 떨어진다. 인기 작가의 소설과 유명 인사의 저작 등의 단행본이라면 책 띠까지 갖춘 미품(美品) 상태라면 그렇지 않은 책보다는 높이 평가받을 수 있으며, 초판본의 경우엔 그 희소성 때문에 더 주목을 받을 것이다. 또한 영화화한 작품이라든지 문학상 수상작품, 그리고 화제의 인물과 관련된 책 등 시대와 유행에 따라 책의 희소가치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으니 그런 점들도 눈여겨봐야 하겠다.
그밖에도 읽으면서 밑줄을 친 곳은 없는지, 혹시 저자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는 책은 아닌지 팔기 전에 우선 꼼꼼히 책의 상태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집이라면 당연히 완질 상태, 시리즈라면 전부 갖춘 상태라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 잡지의 경우라도 창간호부터 있거나 화제의 인물과 기사가 실려 있으면 수집가 혹은 연구자들에게 그 가치를 평가 받을 것이다.
둘째, 중고 책의 가격대를 알아야 한다.
인기 있는 책은 당연히 비싼 가격에 팔린다. 아울러 재고량과 희귀품인지 아닌지도 거래 가격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소장한 책의 현재 거래 가격 내지 적절한 가격을 알아 두는 건 큰 도움이 된다.
셋째, 해당 분야의 전문 책방을 이용한다.
책값을 매기는 것은 그 책의 상태와 가치이다. 상태야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꼼꼼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그 책의 가치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사실 알기 힘든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책이지만 업자에 따라서 값이 들쑥날쑥한 법이다.
음악과 미술 서적은 예술 계통의 전문 책방에, 의학서라면 의학 관계 서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서점에 가져가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팔기 전에 조금 수고스럽겠지만, 그 분야의 지인들 혹은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뒤 사전 지식을 갖는 자세가 필요하겠다.
넷째, 온라인 전문 사이트를 이용한다.
처분할 책이 많거나 헌책방까지 갈 시간이 없을 경우 등등 그 밖의 이유로 온라인 전문 사이트를 이용할 경우가 있다. 사이트에 따라 책 점검과 가격 결정, 그리고 판매 대금 입금 방법 등 차이가 있으며, 차별화된 서비스와 장·단점을 서로 비교해 봐야 한다. 또한장르별로 전문적 지식과 경험이 있는 경우도 있으니 온라인 전문 사이트가 헌책방보다 더 싸게 거래된다는 생각은 편견일 수도 있다.
특히, 판매하지 않더라도 온라인 전문 사이트를 통해 값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자신의 책이 어느 정도 값이 매겨지는지 사전 조사 차원에서도 이용하면 좋을 것이다.
다섯째, 인맥과 SNS를 이용한다.
헌책방이나 온라인 전문 사이트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필요한 사람에게 파는 직거래야말로 책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아껴줄 사람에게 책을 처분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어떻게 알야 봐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게 대부분이다. 그럴 때는 자신의 인맥과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게 효율적이다. 판매자, 즉 책을 소장한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기에 처분할 책을 구입하려는 사람도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다는 장점과 함께 책 거래를 통해 새로운 인맥이 형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섯째, 중고 및 경매 사이트를 이용한다.
내가 처분할 책의 값을 직접 매길 수 있는 중고나라, 벼룩시장 등의 중고 사이트를 이용하는 방법도 좋겠다. 또한, 처분할 책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여러 명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서면 옥션 등 경매 사이트를 이용하면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인해 판매 가격이 올라갈 것이다.
출간된 지 50년 이상 된 책이거나 유명 작가와 저명인사의 사인이 들어 있는 책 등 소장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책이라면 고서 및 골동품이나 예술품 등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경매 사이트를 이용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결과를 얻을수도 있겠다.
1. 개똥이네 www.littlemom.co.kr 중고서적 전문 사이트, 중고 및 새책 판매, 가격비교, 이벤트 등 정보 제공.
2. 북코아 www.bookoa.com인터넷 헌책방, 교과서, 전공서적 구입 및 판매, 오픈마켓 제공.
3. 코베이 www.kobay.co.kr 고문서, 고서, 헌책, 근현대사, 우표, 화폐, 미술품, 골동품, 영화, 만화, LP음반.
4. 광개토골동품경매 www.curiomart.co.kr 고서, 고문서, 간찰, 헌책, 고문헌, 고미술품, 민속품, 근현대사 자료 안내
5. 제이옥션 www.jauction.co.kr 화폐, 우표, 골동품, 도자기, 그림, 영화, DVD, 음반, 만화, 수석, 근현대사, 고서, 사주, 경매.
6. 한옥션 www.hanauction.com 고서, 고문서, 간찰, 헌책, 고문헌, 고미술품, 골동품, 민속품, 근현대사 자료, 온라인 경매.
7. 코아트 www.koarts.com 서양화, 판화, 한국화, 조각, 서예, 골동품, 도자기, 서적,
[TIP]중고 책 구매를 피해야 하는 책
1. 최근의 트렌드를 반영하고 있는 책
2. CD등의 부록이 있는 책
3. 시간의 제약을 받는 몇몇 실용도서
4. 시리즈나 일련번호의 도서
대전의 보문산(寶文山) 사정(沙亭)공원에는 시비(詩碑)들이 있어, 언제 가도 느리고 깊은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1879~1944)의 이란 시가 발길을 붙잡는다. ‘출세의 해탈도 꿈입니다.’ 가슴에 꽂히는 구절을 새기며 추수 김관식(秋水 金冠植·1934~1980)의 를 읽는다. ‘저는 항상 꽃잎처럼 겹겹이 에워싸인 마음의 푸른 창문을 열어 놓고,’ 하늘을 바라본다.
다시는 못 올 눈물의 서정시인 박용래(朴龍來·1925~1980)의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시비를 어루만지며 시혼(詩魂)에 젖어든다. 멧새의 울음 따라 후드득 아침이슬이 떨어진다. 화강석이나 오석(烏石)을 잘 다듬고 깎아 예인(藝人)들의 글씨로 새긴 전아(典雅)한 시비는 눈을 트이게 하고 마음까지 맑게 한다.
“박용래 시인의 시비 위에는 선생님의 브론즈 소녀상이 있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워낙 순진무구한 시인인지라, 항상 하늘을 바라보는 순수한 소녀상을 빗돌에 더하고 싶었어요.” 대전시립미술관 찻집에서 최종태(崔鍾泰·1932~ )조각가와 나눈 대화였다. 전에도 전시장에서 여러 번 뵙고 인사는 드렸으나 그날은 선생 부부와 우리 부부가 전화로 약속을 하고 만난 뜻 깊은 자리였다. 마침 그해(2005년) 7월 20일부터 9월 7일까지 그곳에서 전작전(全作展) 형식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초기작부터 나무 돌 브론즈의 조각들은 물론 파스텔화, 드로잉, 매직화(magic pen으로 그린 그림), 조각의 구상 단계의 연필 스케치까지 미술관 전체에서 한 예술가의 모든 숨결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선생의 조각 작품은 수집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현대나 가나화랑에 부탁해도 일이년 기다리기가 다반사였다. 작품이 완성도에 이르기까지 오래 걸리고 과작(寡作)일 뿐더러 미술품 경매시장에도 작품이 나오지 않아 몇 년에 한 번 열리는 전시회만 기다려야 비로소 선생의 작품을 소장할 수가 있다. 선생의 작품을 수집하려 돈을 모으다가 다른 미술품을 수집하곤 하였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판화, 드로잉, 매직그림들부터 사 모았다. 지금 생각해도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뜻을 세우고 기다린 끝에 지금은 몇 점의 조각 작품도 수집하게 되었다. 이 파스텔화는 인사동 노화랑에서 을 열 때 오백만원을 주고 바로 구입한 작품이다. 이 그림이 큰 사진으로 일간지에 소개되는 바람에 예서제서 구입하고자 해서 오픈 날 바로 떼어왔다. 선생은 수상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 아주 깜깜한 지경에, 파스텔로 그림그리기를 하므로 그 어려움을 견디어냈다.”고 술회한 바 있다. 1984년에는 파스텔화만으로 전시회를 열어 국내외의 큰 호평을 받았다.
“나는 남자 그림은 네 명만 그렸다. 예수, 아기예수, 요셉, 그리고 내 손자뿐이다.”고 한 걸 보면 이 그림은 아기예수와 성모일 테지만, 성화(聖畵)가 아닌 여느 엄마가 아들을 기꺼워하는 모습으로도 읽힌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애수와 명상에 잠긴 눈망울에서 깊은 고요와 환희를 감지하게 된다.
조치원 인근 야산 기슭, 허름한 작업장에서 유영교(劉永敎·1946~2006) 조각가를 만났다. 잔설 위로 햇빛이 부서지고 바람이 제법 맵게 불었다. 40kg짜리 LP가스 빈 통으로 만든 난로에서는 장작불이 이글거리고 여기저기 색을 달리하는 대리석덩이가 흩어져 있었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대리석 산지 카라라(Carara)에서 수입했다고 했다. 오전 작업을 끝내고 티 타임이라며 녹차를 따라 주었다. 흙에 뒹구는 저 돌덩이를 보며 얼마나 많은 사색과 명상으로 형상을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고뇌의 흔적으로 가득 찬 밑그림들이 벽에 빼곡하게 붙어 문풍지처럼 나부꼈다.
유영교 조각가는 1976년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78년 이탈리아로 유학하여 2년간 국립미술아카데미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조각가 에밀리오 그레코(Emillio Greco·1913~1995)와 페리클레 파치니(Pericle Fazzini ·1913~1983)를 사사했으며 그 후는 대리석 산지인 카라라 지역으로 옮겨 6,7년간 조각 작업을 하며 돌의 성격을 파악하고 국제적 미술 감각을 익혔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의 명작들도 카라라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유서 깊은 그곳에서의 작품 활동이 우리나라 많은 후학들의 카라라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다.
1986년 귀국하고 대학에도 출강하면서 열정적으로 빼어난 대리석 작품을 탄생시켰다. 1996년 개인전에서는 초기의 소박한 여인상, 모자상 가족상에서 합(合)형태의 반추상과 구도자(求道者) 선승(禪僧) 등 심오한 인간 내면의 정신을 표출하고자 노력하였다.
“나의 작품들의 모티브는 자연에서 찾는다. 자연을 볼 때 바쁜 우리 눈으로 보지 말고 매우 느리게 돌아가는 자연의 시간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의 얼굴이 나타나는데, 그 고운 형상은 침잠의 미소를 짓게 한다.”고 작가노트에 쓰고 있다. 50세 이후로는 조각을 환경의 매체라 인식, 건축공간과 하나 되는 움직이는 조각을 시도하여 등의 역작을 남겼다.
이 천재 조각가의 서거 소식을 듣고는 먹먹한 가슴으로 하늘만 바라보았다. 아 아 무심한 하늘이시여!
이 은 대리석 작업이 무르익던 1992년 작으로, ‘이 애가 내 아들이에요!’ 엄마의 대견해하는 표정만으로 더없는 기쁨을 준다. 엄마의 풍만한 미소가 잔뜩 찌푸린 아들의 얼굴과 대조되어 웃음을 자아낸다.
여름의 한가운데, 배롱꽃을 바라볼 수 있음은 크나큰 축복이다. 긴 꽃타래에 꽃망울이 다투어 터지며 백 일간 피고 지고 한다 하여 나무 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 담홍색, 보라, 흰색의 꽃은 그 기품 또한 맑고 깊다. 고창의 선운사나 안동 병산서원에 가시거든 수백 년 한자리에서 꿋꿋이 풍상을 견디어 온 배롱나무 꽃그늘에 서서, 굽은 둥지에 살며시 귀를 대고 영겁의 소리를 들어보시라.
“얘야, 나는 저 나무 백일홍이 활짝 필 때, 저승 가는 등불로 삼았으면 좋겠구나.” 하시던 어머니가 엄동의 눈꽃 속에 저승으로 가셨기에 더욱 안타까운 꽃, 긴긴 여름을 애틋하게 한다.
어머니에게 과연 나는 기껍고 대견한 아들인 적이 있었을까.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레코드판에는 욕심이 많았으나 오디오 기기에는 욕심을 부릴 형편이 못 되어 결혼 후 얼마간은 야외휴대용 전축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당시 국산 중에서는 가장 낫다는 ‘별표 전축’을 구입했다. 이것을 들여놓은 날은 마치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필자가 이 별표 전축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뉴욕대학교 폴리테크닉대(Polytechnic Institute of New York)의 방문교수로서 1985년에 미국으로 건너갈 때였다. 이때쯤은 전축도 상당히 낡았고 또 아들 넷을 동반하자니 짐이 많아 도저히 이것까지 가져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뉴저지에 얻은 셋집에서 모처럼 음악이 없는 삶을 살던 어느 날, 뉴욕의 5번가를 따라 한인상점들이 많은 지역을 걷고 있는데 ‘Fisher Audio Sale!’이라는 광고가 필자의 눈을 때렸다. 당시까지 필자는 외제 오디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지만 지도교수이셨던 C교수께서 항상 자랑하시던 것이 바로 ‘Fisher 오디오’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점포에 들어가 보니 물론 교수님 댁 것과 같은 고급 모델은 아니었지만 성능이나 모양도 그럴듯하고 가격도 큰 무리 없이 살 수 있는 정도여서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했다. 이 오디오는 귀국 후에도 친구들이 ‘서린 카페’라고 부르던 필자의 서린아파트 거실을 차지하고 가족들은 물론 놀러오는 친구들에게 많은 음악을 선사하였다.
1990년 초, D건설에 근무하던 친구 K군이 동대문운동장 옆 민자 지하주차장 건설 현상공모를 위한 기본계획 수립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다행히 이 작품이 당선되자 그 친구는 음악을 좋아하는 필자가 제대로 된 오디오 하나 없는 것이 늘 아쉬웠다며 돈 대신 오디오를 한 세트 기증하고 싶다고 제안하였다. 당시 필자는 전설적인 DJ 최동욱씨와 몇 번 방송을 같이 한 적이 있어서 상의해보니 영국의 B사 제품을 추천하며 용산 전자상가에 있던 ‘태양오디오’라는 B사 대리점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B사 오디오보다 기기별로 특성이 있는 컴포넌트들을 모아서 꾸며보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프리앰프 분리형 Audio Innovation 진공관앰프, Thorens 턴테이블, Sony CD플레이어, Teac 카세트데크, Elac 스피커 등 최고급은 아니지만 매우 실용적인 컴포넌트로 구성된 본격적인 오디오 시스템을 처음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Fisher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이 오디오로 인하여 ‘서린 카페’의 격은 한층 더 높아졌으며 친구들도 더 자주 찾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용인으로 이사 온 후인 2000년대 중반까지도 가끔씩은 친구들을 불러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곤 하였다. 최근에는 이 오디오를 쓰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그 대신 수년 전에 구입한 Teac 소형 올인원 오디오로 종종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이 오디오는 LP나 카세트테이프의 음악을 CD에 녹음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옛날에 좋아하던 LP음악을 차에서 들을 수 있도록 CD에 녹음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필자와 매우 가까운 친구인 (재)월드뮤직센터의 강선대 이사장은 필자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음악 수집광으로, LP나 CD만 해도 필자의 10배 정도인 수 만장을 가지고 있다. 또 음악을 비롯한 각종 문화예술 관련 책자, 외국의 각종 민속악기 등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그는 특히 세계 각국의 민속음악에 많은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다.
필자는 명지대 교양학부에 ‘세계의 민속음악’이라는 과목을 개설하고 그를 겸임교수로 초빙하도록 하였다. 이 강좌는 수년간 인기리에 운영되었다. 우리들은 현재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을 토대로 전 세계 음악자료의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아카이브와 국내외 음악 관련 학술 연구 지원 및 세계음악의 대중적 보급을 위한 세계음악문화연구소 등의 설립을 추진해 나가는 한편, 다문화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에서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하고 나눔과 소통을 도모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법인을 설립할 필요가 있음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2009년 7월, 강 이사장을 중심으로 필자와 몇몇 사람이 모여 월드뮤직센터 설립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그리고 약수동에 사무실을 얻어 소장품을 옮겨온 후 정리를 시작하였고, 2011년에는 국내외 월드뮤직 전문가 및 활동단체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후 2012년 11월에는 (재)월드뮤직센터를 정식으로 설립하였고 세계 음악학회와 공동으로 “다문화 사회와 음악: 글로벌 현황과 우리의 실천적 과제”라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2013년에는 아카이브 구축을 시작하였고, 북촌우리음악축제를 후원하기도 했다.
2014년 3월에는 국민대 김희선 교수를 소장으로 세계음악문화연구소를 설립했고, 4월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여러 단체의 후원을 받아 Asia Society와 공동으로 ‘뉴욕 한국음악 페스티벌:산조와 판소리’(New York Korean Music Festival: Sanjo and Pansori)를 주최하였다.
또 9월부터 11월까지는 매주 월요일 오후 3시부터 90분간씩 국민대학교 명원민속관(한규설 대감댁)에서 강 이사장, 음악평론가 황우창, 세계음악학회장 박미경 등의 강의로 월드뮤직 가깝게 듣기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비엔날레로 개최되는 아시아 월드뮤직 어워드를 제정하여 제 1회 수상자로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와 그가 이끄는 실크로드 앙상블을 선정하고 10월 27일 13시 30분에 예술의전당 푸치니 홀에서 시상식을 가졌다. 그 다음 날은 관계자들과 더불어 그들의 공연을 만끽하기도 하였다.
이태문 동경 통신원 gounsege@gmail.com
2020년 올림픽을 앞둔 도쿄( 東京)는 현재 변신 중이다. 여기저기 재개발이 추진중이며, 올림픽에 맞춰 새 경기장 건설과 거리 조성도 한창이다. 지금도 속속 새로운 명소가 등장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가운데 도쿄역 왼쪽에 새로 지은 JP타워는 도쿄중앙우체국과 각종 점포, 레스토랑 등이 가득 들어선 공공시설로 인기를 얻고 있다.
과거·현재·미래의 융합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우편주식회사와 도쿄대학 종합연구박물관이 협력해 2013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학술종합뮤지엄 인터미디어테크이다. 지상 2층과 3층을 연결해 2996m²의 널찍한 전시 공간과 강의 시설 등을 자랑하는 이곳은 산학협동의 롤모델로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도쿄대학이 1877년 개교한 이래 수집해온 각종 학술 표본과 연구 자료 등 ‘학술문화재’로 불리는 귀중한 자료들이 상설 전시중이다. 특별 전시와 기획 행사에서는 최첨단 과학의 성과와 각종 표현 미디어의 독특한 창조물도 선보이고 있다. 일본은 물론 지구촌 구석구석 다양한 장르의 학문 분야를 한자리에서 살필 수 있으며, 과거와 현재, 미래의 색다른 융합도 맛볼 수 있다.
특히 렉처 시어터로 불리는 ‘아카데미아(ACADEMIA)’의 공간에서는 귀중한 영상 및 음성 자료가 학예사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정기적으로 소개돼 많은 마니아층과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월 26일 오후 6시부터 1시간 가량 열린 그래모폰(Gramophone) 기획 26회차 행사는 재즈의 집대성으로 알토편이 진행됐다. 아카데미아에는 1925~1928년에 만들어진 빅토롤라(Victrola)사의 명품, 캐나다제 크레덴자(Credenza) VV8-30 과 일본의 악기 설계자 히라바야시 이사무(平林勇, 1904~1938)가 1931~1932년경 제작한 독자적인 음성 증폭 시스템이 달린 축음기 등 2대의 축음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날 행사에서는 빅토로라의 크레덴자로 1942년 데카(Decca)사에서 출시된 앨범 ‘알토 섹소로지(Alto Saxology)’에 수록된 지미 도시(Jimmy Dorsey)와 1939년 5월 26일 녹음한 ‘로망스(Romance)’를 비롯해서 도시 형제의 ‘테일스핀(Tailspin)’, 알 쿠퍼(Al Cooper)의 ‘(When I GrowToo Old to Dream’ 등 주옥 같은 재즈 명곡 10곡이 축음기를 통해 당시의 생생한 음을 되살려냈다.
도쿄의 야경과 추억을…
깔끔한 디지털 사운드가 아닌 인간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음역대에서 재현되는 축음기의 아날로그 사운드는 LP판의 굴곡과 함께 숨결처럼 떨리는 잡음 속에서 마치 이야기를 걸듯 귓속으로 다가왔다. 이날 주제인 알토에 걸맞은 색소폰이 이끄는 재즈 리듬이 70여 명의 참가자들로 가득 찬 아카데미아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때로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속 우울한 대도시의 그늘을 묵직하게 그려내기도 했으며, 경쾌한 스윙풍의 재즈로 흥을 돋우기도 했다.
이날 행사는 창밖의 도쿄역 야경과 함께 추억의 한 페이지를 수놓기에 충분한 시간 여행이었으며, 축음기가 지닌 소박한 휴머니즘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행사였다. 귀에 거슬리는 LP판의 잡음이 아니라 기억을 긁어 잠자던 감각을 일깨우는 느낌이라고 할까, 따뜻한 인정미마저 느껴지는 색다른 체험이었다.
현역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회사원 요시다 쇼타로 씨(62세)는 “대학 시절 재즈에 빠져 친구들과 밴드도 꾸려 연주 활동도 했지만, 직장 생활에 쫓겨 재즈와 거리를 두고 살았다. 재즈의 집대성 시리즈 행사로 모처럼 재즈의 매력에 젖을 수 있어 자주 이곳을 찾는다”며 “여기 설치된 축음기와 소장된 희귀 음반은 웬만한 집 한 채 값을 훨씬 넘을 텐데, 공짜로 매달 좋아하는 재즈와 해후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밝혔다.
인터미디어테크 전시 공간과 아카데미아의 기획 행사는 모두 입장 무료이다. 일본 도쿄를 출장 혹은 여행으로 찾는 기회가 있다면 한번쯤 JP타워를 방문해 색다른 추억을 만들어 봄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