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음악이야기에서 고2 때인 1960년에 팝송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필자의 음악세계가 바뀌었다고 썼지만 일곱 번째 이야기를 쓰고 나서야 그동안 완전히 잊고 있던 음악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필자가 중3이던 1958년 한국은행에 근무하던 막내고모부가 1년간의 미국연수를 끝내고 귀국했다. 그 집에서 처음으로 전축과 TV를 보았다.
우리나라의 첫 TV방송이 1956년에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시험방송 정도의 수준이어서 그랬는지 고모부는 주로 미군방송(AFKN)을 보는 것 같았다. 전축으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비롯한 몇 장의 LP판을 들었을 때 너무 맑고 아름다운 소리에 완전히 매료됐다. 특히 왈츠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은 처음 들었음에도 매우 친숙하게 다가왔고, 마치 천상의 소리 같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후에 빈이나 부다페스트에 갔을 때에는 그 멜로디가 귀에서 맴도는 듯했다. 또 클래식은 아니지만 일본가수 프랭크 나가이의 ‘유락정에서 만나요’나 ‘밤안개 낀 제2국도’ 등도 매력적인 저음이 너무 좋아 그 후에도 종종 듣곤 하였다.
1959년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고성능 오디오시설을 갖춘 새 음악당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음악시간에는 이론보다 주로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등의 교향곡, 협주곡 등과 같은 기본적인 클래식 음악들을 감상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마 필자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기초가 다져졌을 것이다.
그러던 그해 가을 어느 날 음악선생님께서 LP 한 장을 들고 들어오셔서 마리오 란자라는 테너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정통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않아 그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재능은 뛰어나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얼마 전에 갑자기 사망했다면서 그의 노래를 들려주셨다. 오페라 토스카 중에서 ‘별은 빛나건만’, 리골레토 중에서 ‘여자의 마음’, 사랑의 묘약 중에서 ‘남 몰래 흘리는 눈물’ 등과 같은 오페라 아리아들은 나중에는 꽤 친숙해졌지만 처음 듣는 순간에는 엄청난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그 후 그가 주연한 두 편의 영화를 단체로 관람하였다. 하나는 라는 영화로, 그는 중에서 ‘공주는 잠 못 이루고’, 중에서 ‘저 타오르는 불꽃을 보라’, 중에서 ‘오 사랑스런 아가씨여’ 등의 오페라 아리아들과 함께 ‘세레나데’, ‘돌아오라 쏘렌토로’,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등과 같은 가곡들도 불렀다. 또 하나는 으로서 여기에서는 중에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딸이여’, 중에서 ‘청아한 아이다’, 중에서 ‘의상을 입어라’ 등의 아리아들과 함께 ‘코메 프리마(Come Prima)’, ‘오 솔레 미오’ 등과 같은 가곡들을 불렀다.
그 외에 라는 영화도 단체로 관람하였다. 이 영화에서는 16세의 상큼한 소녀 디아나 더빈이 중 ‘축배의 노래’를 열창하였다. 그리고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직접 출연하여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 제2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4악장’, 그리고 바그너의 ‘로엔그린 3막 서곡’ 등을 연주하였다.
또 지금의 집사람과 대학 때 함께 본 라는 영화는 주연배우인 20대 초반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배경이 된 스위스의 취리히, 생 모리츠도 아름다웠지만 영화 속에서 연주되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제2번’과 사라사테의 ‘치고이네르바이젠(Gypsy Air)’의 선율도 너무 아름다웠다.
그 외에 제1회 국제 차이코프스키 음악경연대회 피아노부문에서 우승했던 반 클라이번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제1번’, 실비 바르탕이 부른 ‘친애하는 모차르트(Caro Mozart)’라는 샹송으로 인해 익숙해진 ‘모차르트 교향곡 40번’과 의 주제가였던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제21번’ 등이 상당히 유행했다.
지난달까지 여러 가지 음악이야기를 했지만 음악의 기본은 역시 클래식이다. 그래서 대학시절에도 경음악실보다는 르네상스나 아폴로 같은 클래식 홀을 훨씬 더 자주 갔었다. 또 1974년의 어느 요일에는 오전에 공릉동에 있던 서울대 공대, 오후에는 흑석동의 중앙대, 그리고 저녁에는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야간강의를 했는데 이동 중 남는 시간에는 명동에 있던 필하모니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클래식 중에서는 ‘베토벤 피아노소나타’를 많이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특히 ‘열정’(Appassionata)을 좋아해서 루돌프 제르킨, 아르투어 루빈슈타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등 연주자별로 9장 정도의 판을 가지고 들었다. 군복무 중에는 청소하다가 실내스피커에서 이 곡이 흘러나와 필자도 모르게 멍하게 서서 듣는 바람에 기합을 받기도 했었다. 그리고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제5번 ‘황제’도 많이 좋아했다.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와 ‘파리의 아메리카인’,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 ‘보로딘의 교향곡 2번’과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In The Steppes Of Central Asia)’가 들어 있는 ‘Russian Impressions’라는 LP판도 자주 들었다. 헌 책방에서 구한 조셉 매클리스(Joseph Machlis)의 보면서 주요한 곡들의 판을 구해 듣기도 했다.
또 음악 연주에도 욕심을 부려 피아노는 체르니까지, 기타는 종로2가에 있던 세계기타학원에서 가요 몇 곡 칠 정도까지, 그리고 선친의 아코디언에도 손을 좀 댔었으나 연주에는 워낙 소질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푸른 파도여 언제까지나’라는 영화는 필자가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집사람과 대학교에 들어가 다시 데이트를 시작한 후 두 번째인가 세 번째로 함께 본 영화이다. 1963년 6월 스카라 극장에서 상영한 이 영화에는 최고의 칸초네가수 도메니코 모두뇨가 주인공으로 출연해 여러 곡의 칸초네를 불렀다.
그리고 미녀가수 미나가 주제가 ‘행복은 가득히(Il Cielo In Una Stanza)’라는 칸초네를 불렀는데, 그 후 C.C.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여배우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주연하는 ‘가방을 든 여인’(1961)이라는 영화의 배경음악으로도 사용될 만큼 인기가 높았다. ‘푸른 파도여 언제까지나’의 원제목은 ‘이스키아 섬의 약속’. 이탈리아 남부의 유명한 휴양지 이스키아 섬에서 촬영했다. ‘태양은 가득히’(1960)라는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필자는 ‘푸른 파도여 언제까지나’를 통해 칸초네라는 음악을 알게 되었다. 샹송이 특별한 음악이 아니라 프랑스어로 ‘노래’를 뜻하듯 칸초네 역시 이탈리아어로 그냥 노래라는 뜻이다. 그래서 팝송도 샹송도 이탈리아에 가면 다 칸초네가 되지만 우리는 이탈리아의 노래를 칸초네라고 부른다.
칸초네는 초기에는 주로 오 솔레미오, 산타루치아 등 나폴리 민요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나 ‘산레모 가요제’가 시작되면서 레코드회사나 악보출판사 등의 입김이 작용하여 많이 상업화되었다고 한다.
당시 유행하던 칸초네는 이 영화의 주인공 도메니코 모두뇨의 볼라레와 차오 차오 밤비나, 그리고 토니 달라라의 코메 프리마와 라 노비아, 질리올라 칭게티의 노노레타와 비, 마리사 산니아의 카사비앙카, 루치아노 타요리의 알·디·라 등 주로 산레모 가요제의 입상곡들이 많았다. 그 외에 알리다 켓리가 구슬픈 목소리로 부르는 ‘형사’라는 영화의 주제가 죽도록 사랑해서(Sinno Me Moro), 그리고 밀바, 나다 등 여러 가수가 부른 물망초, 로마여 안녕(Arrivederci Roma), 마음은 집시, 검은 고양이 네로 등과 같은 곡들이 상당히 큰 히트를 했다. 베니스에 가서 곤돌라를 타고 곤돌리에(곤돌라의 사공)에게 노래를 청하면 이들 중 몇 곡은 들을 수 있었다.
스페인음악에 대한 사랑은 몇 장의 LP에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는 아코디온 연주자 Charles Magnante의 Spanish Spectacular라는 판으로서 안달루시아, 라 쿰파르시타, 질투(Jalousie), 스페인 월츠, 에스파냐 카니 등은 팝송이나 샹송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필자에게 또 한 번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 뒤에 구한 스탠리 블랙 악단의 ‘스페인’이라는 판 역시 듣기가 매우 좋았다. 그래서 좀 더 관심을 가지다 보니 스페인음악의 진수는 기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 세고비아로, 바흐와 같은 작곡가들의 하프시코드 음악을 150곡 이상 기타곡으로 편곡하고, 빌라 로보스 등과 같은 작곡가들에게 기타곡을 작곡하도록 함으로써 레퍼토리를 늘려 기타를 연주회용 악기로 확립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타레가의 알함브라궁전의 추억,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 등 수많은 기타 명곡들이 필자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스페인음악 하면 또 플라멩코(Flamenco)를 빼놓을 수 없다. 플라멩코는 정열의 나라 스페인의 심장이라고 하는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애수가 담긴 전통 민요와 향토 무용, 그리고 플라멩코 기타 반주 세 가지가 어우러지는 이 지역 특유의 민속예술이다.
그러나 이 지역 사람들이 이를 소홀히 할 때 집시가 대신하여 전승과 발전에 힘썼기 때문에, 그 형식에는 집시적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순수한 플라멩코는 캐스터네츠를 쓰지 않고 사파테아드(구두 소리), 팔마(손뼉 치는 소리), 피트(손가락 튕기는 소리)로 구성되며, 할레오(관중이 장단에 맞추어 지르는 소리, 우리의 추임새와 비슷함)도 섞여 열광적인 광경을 전개한다.
필자는 2002년 7월 29일 집사람과 함께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후 약 한 달간 주로 유레일패스를 이용하여 스페인 여행을 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1992년 제25회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마라톤 우승을 했던 몬 주익 언덕의 경기장을 비롯하여 가우디가 설계하고 100년이 지나도록 건설 중인 성가족 성당(sagrada familia) 등을 관광했다. 다음에 도착한 도시가 그라나다였다. 음악으로만 듣던 알함브라궁전을 직접 방문하여 트레몰로로 연주되는 그 음악을 들으며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바로 황홀, 그 자체였다. 또 저녁때는 식사 후 알함브라궁전 서쪽의 계곡 건너편에 있는 집시촌 싸크로 몬테에 가서 정열적인 춤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본산지의 플라멩코를 감상할 수 있는 즐거운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뒤이어 코르도바, 세비야를 두루 관광한 후 바다호스에 가서 필자가 주례를 섰고 현지에서 침구(鍼灸)학원을 하는 O씨 집에 묵으며 그들과 함께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다음 톨레도에서 엘 그레코의 집 등을 구경하고 아랑훼스에 가서 아담하지만 매우 아름다운 스페인왕의 여름별궁을 관광할 때에는 ‘아랑훼스협주곡’의 제2악장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마드리드에서 왕궁, 미술관 등을 관람한 후 세계무용대회가 열리는 오렌세와 다음 대회 장소인 카나리아군도의 테네리페에 가서 나흘간에 걸쳐 세계 각국의 민속음악과 무용을 관람한 것도 쉽게 가지기 어려운 즐거운 기회였다. 아직도 활동 중인 그 섬의 화산이 인상적이었고, 나체촌이 있는 해수욕장도 정말 아름다웠다.
음악 듣기 딱 좋은 계절이다. 떨어지는 낙엽과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바람은 감수성을 자극한다.
괜스레 천천히 걷게 되고, 먼 곳을 바라보게 된다. 한참 주위를 바라보고 있으면 익숙한 한 곡조를 흥얼거리기 마련이다. 이렇게 친숙한 노랫가락은 애쓰지 않아도 술술 나오는 것 같은데, 정작 노래 한 곡 듣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요즘 음악 듣는 법은 복잡하다. 음악을 파일로 휴대폰에 넣으면 들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아는데, 이젠 그 방법도 아니란다.
그 흔했던 레코드점은 2015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귀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LP가 테이프가 되고, CD에서 MP3로 듣는 미디어가 변화하는 것은 받아들일 만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녹음하거나 재생하는 기술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하지만 최근의 변화는 당황스럽다. 언제부터인가 레코드점은 귀한 장소가 되더니, 서점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그나마 애써 그곳을 찾아간다 하더라도 어쩐 일인지 신곡 CD 찾기가 쉽지 않다. 가수들이 이제 온라인에서 음원 판매에만 힘쓸 뿐 CD와 같은 미디어의 대량 제작은 꺼리기 때문이다. 지금 CD는 소수 열성 팬들의 차지다.
50대 동안(童顔) 가수로 불리는 이승환씨는 얼마 전 방송을 통해 “이제 음악은 소유하는 것에서 소비하는 것으로 변모했다”고 정의 내렸다. 한 장 한 장 앨범을 사 모으고, 앨범 하나하나마다 의미를 부여하던 것은 안타깝게도 이젠 옛날 추억이 되어 버렸다는 선언이다. 미래 기술에 매달리는 기술자도, 판매에 목맨 장사치의 이야기가 아닌, 한때 LP 레코드와 CD로 수익을 얻던 현직 가수의 이런 이야기는 무게감이 다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하자면 요즘 음악 시장 ‘소비’의 축은 스트리밍이라는 기술이다. 주변에서 가장 쉽게 보는 유사 기술은 ‘TV 다시보기’ 기술이다. 이는 마치 커다란 도서관에서 음악이나 영화를 TV나 스마트폰으로 꺼내보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LP나 CD와 같은 별도의 미디어를 소유할 필요 없이, 돈을 지불한 회사에서 통신망을 통해 필요할 때마다 재생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전용 앱을 통해 스마트폰에서 재생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PC를 오디오와 연결하는 경우도 있다.
소유에서 소비로
중년들은 이런 음악의 ‘무소유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시대적 변화에 대해 前 편집장이자, 오디오 평론가로 활동 중인 오승영씨는 이렇게 조언한다.
“음악을 파일로 재생하는 방식은 관련업계에 종사하거나 스스로 관심을 갖고 다루어 온 경우가 아니라면 많이 낯설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현상이 음악재생산업의 큰 축이 되어 움직인다는 것은 분명한 현실입니다. 관심을 갖고 크고 작은 재생 기기와 시스템을 접하려는 활동은 중요합니다. 현상 자체를 무시하면 스스로가 주류에서 멀어진 시각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기존의 LP가 그랬듯이 CD재생 시스템도 주류의 자리를 넘겨줄 뿐, 별도의 노선을 통해 생존을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기에 병행하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인켈과 태광, 삼성에서 엔지니어로 활동하다 이제는 오디오 팟캐스트를 운영 중인 윤종민 소장은 제조사들의 적극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시니어들에게 음악을 듣는 과정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최근 만들어지고 있는 제품들의 인터페이스, 즉 조작방법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젊은이들에게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입니다. 제조사들이 먼저 이러한 장벽을 제거한다면, 보다 쉽게 시니어들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반에서 음원으로
하지만 윤 소장도 시니어들의 변화와 디지털 환경에 대한 적응을 촉구한다.
“평생 갖고 있는 음반만 고집하겠다면 기존 시스템만으로 충분하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미디어로의 전환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갖고 있는 음반을 디지털화한다면 좀 더 편안한 음악감상과 소유 두 가지 모두를 효율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앞서 설명한 ‘도서관’을 나만의 도서관으로 만들어 집 안으로 끌어들이자는 이야기다. 요즘 유행하는 NAS(개인용 파일서버)가 이런 식이다. 일반인이 NAS를 구축하려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일단 구축해 놓으면 인터넷이 연결된 곳 어디서든 꺼내 들을 수 있다.
아날로그 미디어의 디지털로의 ‘복각’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영구적인 보존이다.
가 실시한 오디오점 만족도 조사에서 수년간 1위를 지켜냈던 금강전자 고태환 대표는 보존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잘 보존된 앨범 한 장은 미술품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화재 등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음악을 장기적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디지털화는 중요합니다. 다만 진동에너지가 전기에너지로 변환되는 소리를 오롯이 담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장비가 필요합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그렇다면 앞으로의 음악감상은 어떤 모습일까? 오승영 평론가는 앞으로의 음악감상에 대해 이런 예상을 밝힌다.
“음악감상이라는 고유의 취미성은 대중화와 고급화가 동시에 진행될 거라 봅니다. 소프트웨어와 그 서비스 시스템, 재생 하드웨어 등이 결합된 음악 재생품질의 향상은 음악을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기기들과 폭넓은 사용환경에서 청취할 수 있게 할 것으로 보입니다. 자동차나 지하철에서도 고음질을 손실 없이 감상하고 있습니다. 오디오 마니아들은 네트워크와 컴퓨터에 대한 공부를 강화해야 하겠지만, 오디오 마니아에 대해 스노비즘(속물근성)을 들이대던 대중적 시선도 스트리밍의 음질적 차이에 대한 자각을 통해 경계심이 완화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원 전용 재생기기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거실의 오디오 시장까지 넘보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주자는 아스텔앤컨이다. 아스텔앤컨은 한때 MP3로 명성을 높였던 아이리버의 고급제품 라인이다. 이들은 고음질 음원재생기기 시장에서 독보적 지위를 얻은 상태로, 최근에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하이파이(고음질 오디오) 오디오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아이리버 제품기획담당 안지현 과장은 음악감상의 미래를 이렇게 예상한다.
“네트워크 기반의 음악감상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향후에는 이보다 더 발전해서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IOT(사물인터넷)와 연계되어 지금보다 더 편리하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사용자의 음악 패턴을 특정 알고리즘으로 파악해서 그날의 날씨 등과 연계한 음악을 조명이 켜지면서 들려주는 방법 등 실생활과 더 가까워질 것이라 봅니다.”
그리고 다시 음악감상실로
그래도 음악듣기가 어렵다면 기존의 방식을 따르면 된다.
물론 집에 뱅앤올룹슨이나 매킨토시와 같은 좋은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면 그대로 감상하면 되지만, 여의치 않다면 음악감상실이 대안이다. 음악감상실은 최근 들어 되레 늘어나는 추세다. 음악감상실은 양평이나 파주, 성북동 등 중년들이 자주 찾는 지역을 중심으로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는데, 오디오 마니아들이 본격적으로 전업하는 경우도 많다. 아이리버도 이태원에 그룹 청취실과 루프탑 라운지 등을 갖춘 4층 규모의 음악감상 공간 스트라디움을 최근 오픈했는데, 유명 평론가나 큐레이터들의 해설을 통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국민 DJ로 사랑받았던 황인용씨가 개설한 파주 헤이리의 카메라타는 클래식 음악감상실로 유명하다.
“젊은 분들도 오시긴 하지만 아무래도 중년층이 많이 찾는 편입니다. 좋은 음질로 클래식을 감상하고자 하는 분들이 찾아 주십니다” 라고 관계자는 이야기한다. 역시 중년은 음악감상실에 익숙한 세대인 것이다.
요즘의 대중가요는 4분을 넘기는 게 거의 없다. 지루한 것을 못 참는 세대에게는 4분도 길다며 3분 10초 내외로 상품을 내놓는다. 작품이 아니다. 그러고는 음원의 순위를 고가에 거래하는 일들이 폭로되기도 한다.
커다란 스피커 앞에 자세를 고쳐 앉고, 음반 속지의 해설을 꼼꼼하게 읽던 세대 입장에선 혼란스러울 수 있다. 지금의 기술적 진보가, 아버지 사랑방의 독수리표 전축보다 나은 소리를 들려준다는 보장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음악듣기는 달라졌고, 그 변화는 진보에 대한 욕망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이런 세상에서 더 나아진 음악감상을, 변화된 환경을 조금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보는 것은 어떨까?
LP 레코드를 디지털로 복각하는 방법
LP 레코드를 복각하는 것은 용도에 따라 그 방법이 다양하다. 전문적인 음질을 보장받고자 한다면 큰 비용의 지출을 각오해야 하지만, 기록을 위해 남기는 용도라면 낮은 가격으로도 가능하다.
1. 디지털 변환장치를 기존 오디오 시스템에 연결하는 방법
LP의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변환해 주는 ADC를 구매해서, 기존 오디오의 LP나 프리엠프에 연결하는 방법이다. ADC는 Analog-Digital Converter의 약자로 말 그대로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변환해 주는 장치다. 고가의 턴테이블과 고성능의 ADC가 만나면 CD에 버금가는 소리를 들려주기도 한다. 오디오 마니아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며, 대부분의 경우 기존 오디오 시스템에 적용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2. 복각 전문 업체에 맡기는 방법
LP 복각으로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여러 업체를 찾을 수 있다. 개인적인 기념 앨범이나 복각하고자 하는 앨범이 몇 장 되지 않을 때 추천한다. 시중에 4~5개 업체가 활동 중이며, 앨범 한 장 복각 가격은 5만원 내외.
3. USB 턴테이블을 구매해 활용하는 방법
직접 USB를 꼽아 MP3와 같은 컴퓨터용 파일을 만들어 주는 장치들이 시중에 많이 등장했다. 다만 대부분의 장비들이 전문적인 오디오 장비가 아니라, 아이디어 상품 수준이어서 음질이나 만듦새가 조악한 경우가 많다. 저가의 바늘(카트리지)은 LP 레코드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대신 기존 오디오와의 연결 없이 자체적으로 복각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4. PC 사운드카드를 사용하는 방법
PC의 사운드카드를 활용한 방식. 사운드카드의 입력단자에 LP의 신호를 입력해 PC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MP3 파일 등을 제작할 수 있다. 수년 전 디지털 오디오의 저렴한 대안으로 선호되었으나, 최근에는 효용이 떨어진다고 평가된다.
국내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 현황
국내 음원 스트리밍 시장은 통신사를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각 통신사의 멤버십 서비스는 데이터 요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이용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편. 이밖에도 애플과 삼성이 자사 기기에 갖춘 어플을 통해 음악 서비스를 하고 있으며, 국내 포털에서 애플 뮤직으로 검색하면 등장하는 사이트는 아이폰 제조사 애플과는 무관하다.
1. 멜론 www.melon.com, SK텔레콤 사용자는 스트리밍 무제한.
2. 벅스 www.bugs.co.kr, SK텔레콤 사용자는 스트리밍 무제한.
3. 지니 www.genie.co.kr, KT올레 사용자는 스트리밍 무제한.
4. 엠넷 www.mnet.com, LGU+사용자는 스트리밍 무제한.
5. 네이버뮤직 music.naver.com, PC 사용자에게 유리.
6. 그루버스 www.soribada.com, 고음질 MQS 스트리밍 서비스.
1960년대 당시 유행하던 음악 중에는 미국 팝송같이 많지는 않았지만 샹송이나 칸초네, 그리고 라틴음악도 있었다. 필자가 샹송을 처음 접한 것은 1962년 9월쯤이었나, 당시 대한무역진흥공사 이사로 근무하시던 선친과 명동 국립극장(현 예술극장)에서 샹송가수 이베트 지로의 공연을 본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그녀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의 혼’, ‘미라보 다리’ 등을 불렀다. 특히 ‘포르투갈의 빨래하는 여인’이라는 노래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노래가 상당히 감미로웠다는 느낌 외에 샹송에 대한 별다른 매력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전에 이미 샹송을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6·25 전에 집에 있던 유성기 판 중 일본 여가수가 일본말로 불렀던 노래가 사실은 다미아라는 샹송가수가 부른 ‘그렇게 남의 속도 모르고(Tu Ne Sais Pas Aimer)’라는 샹송이었던 것이다. 다미아는 ‘우울한 일요일(Sombre Dimanche)’로도 유명한데, 10여 년 전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이 노래는 본래 헝가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영화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이 노래 때문에 자살자가 많아 헝가리에서는 금지한 것을 다미아가 프랑스어로 부른 것이다. 그 후 미국의 재즈가수 빌리 할리데이가 영어로도 불러,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 노래를 듣고 도쿄에서만 20만 명 이상이 자살했다고 한다.
1963년, 해외에 다녀오신 선친이 LP를 몇 장 사오셨다. 당시는 외화가 무척 귀할 때라 한번에 10장 이상은 반입이 불가능했고, 그것도 시중에 판매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표지에 일일이 서명을 하도록 했었다. 그 대부분은 클래식이었으나 그중 한 장이 Holiday in France라는 판이었다. 이 판에 있는 파리의 하늘밑, 고엽, 파리의 아가씨, 아이 러브 파리, 파리의 다리 밑, 매혹의 왈츠, 바다 등은 나중에는 자주 듣다보니 많이 익숙해졌지만 처음 들었을 때는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구나 하고 황홀하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샹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당시 국내에는 샹송 판이 거의 없었다. 다행히 ‘이것이 샹송이다’라는 판을 구했고, 거기서 앞에 소개한 이베트 지로, 질베르 베코 등의 노래와 특히 이브 몽땅의 고엽(Les Feuilles Mortes/Autumn Leaves)을 들을 수 있었다. 이 판은 고교 동창인 박명도 군이 특히 좋아해서 그가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마다 거의 이 판을 들었다. 그리고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이진섭씨가 쓴 샹송을 주제로 한 라디오 드라마 ‘장밋빛 인생’을 통해서 당대 최고의 샹송가수 에디뜨 피아프의 일생, 비참했던 어린 시절과 6년 연하의 이브 몽땅을 발굴해서 일류가수, 배우로 성장시켰으나 시몬 시뇨레에게 빼앗긴 사연, 그녀의 노래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과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 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대의상은 물론,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스카프와 스타킹조차 살 수 없었고 세탁도 자주 할 형편이 못 되어 목이 긴 검정 스웨터와 검정 바지를 입고,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했던 줄리엣 그레꼬의 이야기, 그리고 그녀가 가수로 크게 성공하자 그녀의 의상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다는 이야기와 그녀의 노래, 고엽과 빨간 풍차(Moulin Rouge)도 이 드라마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샹송과 친해지면서 파리를 여행할 때면 어떻게 하든 틈을 내어 몽마르뜨르 언덕에 올라가 거리 화가들을 한 번 둘러본 후 집사람이 기념품가게를 구경 다니는 동안 그 옆에 있는 카페에서 옛 샹송들을 들으며 생맥주를 몇 잔 마신다. 그 후 날이 어둑해지면 언덕 아래에 있는 물랭 루즈에 입장하여 아직도 복도에 걸려 있는 로트렉의 포스터들을 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식전(食前) 연주를 들으며 기분이 나면 춤도 몇 곡 춘다. 그러다가 시간이 되면 프렌치 캉캉으로 끝나는 유명한 물랭 루즈쇼를 보면서 저녁을 먹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절차가 되었다.
일제 때 선친은 제1고보, 이진섭씨는 제2고보로 학교는 달랐으나 같은 학년으로서 고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 댁에서 5년간 같은 방에서 하숙을 해, 친형제 이상 친했다고 한다. 그리고 옆방에는 얼마간인지 모르지만 조병옥(趙炳玉) 박사가 하숙을 했다고 한다. 이진섭씨는 작가이자 기자, 아나운서, PD를 겸직하셨고 샹송에도 정통하셨다.
필자가 학교 다닐 때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가 이진섭씨의 번역으로 중학교인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하였다. 그분은 술에 취해서 명동파출소 앞을 지나갈 때면 순경을 향해 소변을 보셨다고 한다. 순경이 미워서가 아니라 자유당 독재정권에 대한 힘없는 문화인의 상징적인 항거였던 것이다.
우리 집에 자주 오셔서 술을 드셨고 필자도 혜화동인가에 있던 그분 댁에 심부름을 자주 가서 친아저씨처럼 지냈다. 선친은 워낙 예술과 친구, 그리고 술을 좋아해 환도 후 명동에서 조그만 무역상을 할 때 돈이 좀 생기면 집보다는 친구들 뒷바라지가 우선이었다. 당시 어울리던 분들로는 이진섭씨 외에 박용구씨, 박인환씨, 송지영씨, 심연섭씨, 이봉구씨 등이 기억에 남는다. 이 가운데 올해 101세인 박용구씨 외에는 이미 모두 고인이 되셨다.
1956년 3월, 선친은 당신의 중학교 후배가 되어 입학식을 기다리고 있는 장남이 자랑스러워 명동에 있던 은성주점에 필자를 데리고 가셔서 친구들에게 마냥 자랑을 하셨다. 그곳에서 술을 마시던 박인환씨가 냅킨에 시를 쓰셨고 그 옆에 계시던 이진섭씨가 역시 냅킨에 작곡을 하셨는데 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그 자리에 나애심씨가 있어 노래를 불렀다고 하지만 그것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중에 박인희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감회가 새로웠다.
언제부터인가 필자에게 음악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필자의 집에는 영국의 B사 제품인 Wave 라디오가 2대 있다. 이 라디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에 실린 광고를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나 당시에는 국내에서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2001년 초 청계산 추모공원 관련 자료 수집 및 시찰로 미국 LA에 갔을 때 이 라디오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틀어보니 과연 B사가 자랑하던 대로 소리가 전 공간에 울려 퍼지는 것같이 듣기가 매우 좋아 한 대를 구입하여 집에서 듣게 되었다.
그 후 같은 라디오에 CD플레이어가 부착된 모델이 출시되었을 때에는 국내에서도 구입이 가능하여 이를 한 대 사서 새 것은 2층 침실에 두고 먼저 것은 아래층 부엌에 놓아두었다. 음악은 CD를 듣는 경우도 종종 있으나 주로 KBS 제2(클래식)FM 방송을 들으며 TV 볼 때를 제외하고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항상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따라서 어쩌다 한밤중에 잠이라도 깨게 되면 다시 잠이 들 때까지 심야의 음악 감상 시간이 된다. 운전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여서 시동을 걸고 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FM 라디오를 트는 일이다. 따라서 약속시간만 임박하지 않다면 차가 밀리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더라도 즐거운 음악감상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전에는 라디오보다는 주로 필자가 좋아하는 음악을 중심으로 LP나 CD를 많이 들었다.
음악을 좋아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관심은 있었지만 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가정이 라디오 한 대 가지기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거의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래서 그저 가끔 친구 Y군의 집에 놀러 가면 그가 아끼던 제니스 라디오로 미국의 소리(VOA)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이나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고 2때, 친구들과 가끔 들르던 혜화동 로터리의 아카데미 빵집에서 듣게 된 폴 앵카의 , 등과 닐 세다카의 , 이나 진 빈센트의 등은 필자의 음악세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말하자면 이때 처음으로 Pop이나 Rock에 귀를 뜨게 된 것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시내만 나갔다 하면 당시 종로 근처에 있던 뉴·월드나 디·쉐네, 명동에 있던 쎄·시·봉 중 적어도 한 군데 정도는 들렀고, 종로와 광화문 사이에 있던 르네상스라든지 을지로 입구의 아폴로 같은 클래식 음악실에도 자주 다녔다. 그리고 이때쯤은 필자의 집도 약간의 경제적인 여유가 생겨 방에 라디오가 붙은 전축도 한 대 들여놓았고 레코드판도 살 수 있어서 좀 더 폭넓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는 음악이 한번 유행했다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크게 유행을 하다가 어느 틈에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기도 하였다. 한동안 브렌다 리가 와 뒤이은 등으로 크게 히트를 했고 그 다음 브라이언 하일랜드의 라는 노래는 가사나 멜로디가 다 재미있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 했다. 또 상당히 튀는 듯한 목소리를 가졌던 수 톰슨의 나 꽤나 섹시하게 흐느적거리던 앤 마가렛의 와 , 그리고 스키터 데이비스의 , 짐 리브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른 , 브라더스 포의 등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퍼시 페이스가 연주하는 의 주제가, 클리프 리차드가 주연한 에서 그가 부른 와 라는 제목이 꽤 긴 노래, 그리스를 대표하는 영화배우이자 국회의원과 문화부장관을 역임한 정치인 멜리나 메르쿠리가 주연한 에서 그녀가 부른 주제가, 코니 프란시스가 출연도 하고 노래도 부른 의 주제가 등도 상당히 유행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 방송들은 음악방송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서 음악을 들으려면 LP를 사서 듣거나, 아니면 미군방송(AFKN)을 듣거나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미군방송에서 기가 막힌 곡들이 흘러나왔다. 하나는 애커 빌크라는 사람이 클라리넷으로 연주하는 라는 곡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에서도 크게 히트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그는 그 곡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또 하나는 영국 보컬그룹 애니멀스가 부른 으로서 가사내용은 별로인데도 얼마 후 역시 크게 히트해서 지금까지도 종종 들을 수 있다.
그즈음 필자는 또, 지금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인 의 내용과 지중해를 무대로 한 영상, 니노 로타의 애절한 주제가, 그리고 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이기도 한 주연여우 마리 라포레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그래서 영상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클로드 모네의 그림과 일본 영화잡지에서 잘라낸 마리 라포레의 사진을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놓고 그 주제가에 젖어들곤 했다. 또 이라는 영화에도 심취하여 전부터 좋아하던 오드리 헵번의 사진도 역시 벽에 걸어놓고 주제가 을 앙드레 류의 기가 막히는 바이올린 연주로 자주 듣곤 하였다.
광복 70년의 역사에서 대중음악은 어떤 분야보다도 일반 대중의 정서와 우리 사회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포착하고 반영하면서 문화의 선두에 서왔다. 한국 사회의 발전상을 축약하면서 우리의 여러 세대와 계층이 알고 기억하는 가장 많은 스타들을 내놓은 곳이 대중가요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글 임진모 음악평론가
광복과 함께 대중음악은 산업적 덩치를 키운 것은 물론 서구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수용한 갖가지 스타일을 만들어내면서 예술적 성장과 성숙을 거듭했다. 대중음악은 광복 이후 70년의 역사 속에서 찬란히 꽃을 피운 것이다.
광복 이전에도 대중이 사랑한 음악은 있었다. 이난영, 남인수, 현인, 고복수 등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가수들은 애초 세련된 음악이었으나 갈수록 서민대중의 호흡과 동행한 음악으로 남은 것은 이후 성인가요로 불린 트로트였다.
조금은 저학력과 가난 혹은 단순한 재미로 연결되는 음악이지만 트로트는 꾸준하게 서민대중의 희로애락을 반영하면서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다.
광복 이후에 트로트는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가 출현하면서 다시금 힘찬 날갯짓을 했다. 1964년 발표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역사상 최초로 100만장에 준하는 가공할 판매고를 수립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미자는 특히 1960-70년대 경제성장의 뒤안길에서 한과 설움을 삼킨 여인들을 대변한 비가(悲歌)를 많이 부르면서 한국 최고의 여가수, 세기의 가수라는 명예를 지키고 있다.
이미자와 남진 나훈아 라이벌전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 우리 대중문화 사상 가장 치열한 라이벌전을 전개한 남진과 나훈아는 이미자를 잇는 트로트의 별이었다. 전국을 삼킨 두 가수의 인기대결은 국민 전체가 둘로 나뉘어 설전을 벌일 만큼 살벌했다. ‘님과 함께’를 비롯한 조금은 밝은 톤의 노래를 한 남진이 경제성장 시기의 빛이었다면 ‘물레방아 도는데’와 같은 구슬픈 노래로 이농(離農)의 고통을 표현한 나훈아는 경제성장 시기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단은 그러나 남진과 나훈아가 겨뤘던 때를 트로트의 마지막 전성기로 규정한다. 그때까지 어떤 장르들보다도 드높은 위용을 자랑했으나 이후에는 시장의 헤게모니를 다른 스타일에 넘겨주게 됐다는 것이다. 1970년대의 하춘화, 1980년대 주현미와 현철, 1990년대 태진아와 송대관, 그리고 2000년대 ‘어머나’의 장윤정으로 트로트계보는 쉼 없이 이어졌지만 위력은 갈수록 떨어졌다.
1960년대 중반까지 독점적 위력을 행사한 트로트는 광복 후 전국에 미군이 주둔하고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문화가 물밀듯 유입되면서 불가피하게 외국의 영향을 받은 음악들과 경쟁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용산 동두천 부평 대구 등 이른바 미8군 지역의 영내와 영외에는 우리 음악가들의 미군을 위한 공연활동이 러시를 이뤘고 이후 그들은 국내 무대에 진출해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송두리째 바꿨다.
트로트 일색이었던 음악계에 그들이 들여놓은 음악은 미국의 재즈와 팝에 기초한 소위 ‘스탠더드 팝’이란 것이었다. 아직도 용어가 불분명한 이 스타일의 음악은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진 해에 히트한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시작으로 현미, 김상국, 최희준, 위키리, 패티김, 정훈희 등의 스타를 배출했다. 발라드를 잘 소화한 스탠더드 팝가수들은 미8군 출신답게 팝송도 자주 불렀으며 노래에 영어를 자주 썼다. 이 가운데 ‘하숙생’의 최희준과 ‘서울의 찬가’의 패티김이 특급스타였다.
서구음악인 스탠더드 팝은 기조와 성격에 있어서 트로트와 대치되는 음악이었지만 국내 방송의 ‘10대 가수가요제’와 같은 프로그램에 의해 트로트와 병치되면서 같은 ‘어덜트(adult) 음악’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베이비붐 세대 이전의 전쟁세대라고 할 1930-40년대 생 인구의 음악에 머무르고 말았다고 할까.
‘록’ 신중현과 ‘포크’ 김민기
미8군을 통해 국내 소개된 음악 중 1950년대 생 이후의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는 청춘의 뜨거운 피를 담은 로큰롤, 즉 록으로(그때 말로는 ‘그룹사운드’) 궁합을 맞췄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는 청춘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키보이스’를 위시한 그룹사운드가 판을 쳤다. 하지만 역사는 국내 최초의 록밴드 ‘애드포’를 결성한 신중현을 ‘한국 록의 대부’로, ‘한국 대중음악의 총설계자’로 상찬하며 고평을 집중한다. 블루스와 싸이키델릭 등 서구의 음악문법을 창조적으로 가공해 우리식 록의 프레임을 주조해냈다는 역사적 평가는 지금도 유효하다.
스스로 ‘아름다운 강산’, ‘미인’과 같은 명곡을 부른 가수인 한편 펄시스터즈, 김추자, 장현, 박인수, 김정미 등에게 ‘커피 한 잔’, ‘임은 먼 곳에’, ‘미련’, ‘봄비’, ‘봄’ 등 요즘 기준에서도 빼어난 수준의 음악을 잇달아 써준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그의 도움을 받은 스타가수들을 언론은 ‘신중현사단’으로 일컬었다. 하지만 1975년 유신시대의 대마초와 금지곡 파동에 활동이 급정지된 그와 함께 한국의 록은 침체기로 접어든다.
록만이 아니라 베이비붐 세대의 또 다른 사운드트랙인 포크도 독재통치의 철퇴를 맞는다. ‘청통맥’ 즉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표현된 베이비붐 세대들의 꿈과 도약, 아픔과 좌절을 창의적으로 그려낸 많은 포크송 가수들이 활동금지를 당하거나 은둔의 처지에 몰렸다. 김민기, 한대수,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서유석, 이장희, 김정호 등이 한국 포크의 기수들이었다. 이들 음악은 전쟁세대보다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은 베이비붐 세대의 대학생들에게 어필했다.
포크 가수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곡을 만들어 통기타와 하모니카로 연주하고 노래하며 이전의 악단과 전문 작곡가가 지배한 풍토에서 탈피, 소위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 시대를 개척했다. 대부분 자기가 쓴 곡을 담은 LP를 최초로 출반한 김민기에 자극받아 동시대의 많은 가수들이 자작곡을 내놓은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김민기는 록의 신중현과 같은 인물이다.
‘아침이슬’ ‘백구’ 등 그가 작곡해준 곡을 불러 유명해진 양희은은 김민기의 페르소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음악의 자가발전을 이뤘다는 점에서 포크를 ‘한국 음악민주주의의 시작’으로 정의하는 관계자들이 많다. 하지만 포크는 베이비붐 세대의 정서라 할 청춘스피릿이 당시 군사정부와 충돌하면서 대마초 파동이라는 암흑기를 초래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네 범주 가운데 어덜트 음악인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이 1980년대에 들어 정체상태를 맞은 반면 시련을 맞은 영(Young) 음악인 록은 1977년 대학가요제와 밴드 ‘산울림’의 등장으로 힘차게 재도약한다. 참신하고 재기에 넘치는 가사와 실험적인 곡 전개를 특징으로 한 산울림은 흑인음악인 펑크(funk)를 실험한 ‘사랑과 평화’와 함께 록의 기운을 되살렸다. 포크는 1970년대 중·후반 이정선, 조동진, 정태춘을 거친 뒤 시대를 고발하는 민중가요를 낳았고, 1990년대에는 김광석이 활약했지만 장르의 파괴력은 2000년대 들어서 현저히 후퇴했다.
‘가왕’ 조용필, ‘10대 대통령’ 서태지
1980년대의 특급 스타들인 조용필, 윤수일, 김수철, 구창모 등은 대부분 록의 세례를 받은 가수들이었고 실제로 상당수가 밴드를 거느리며 대중적 록의 위용을 뽐냈다. 밴드 송골매와 벗님들은 TV에서도 맹활약했다. 하지만 1980년대는 훗날 ‘가왕’으로 통한 조용필의 것이었다. 그는 ‘단발머리’, ‘못 찾겠다 꾀꼬리’ 등 발랄한 록으로 10대 오빠부대를 이끄는 동시에 ‘허공’ 등 트로트 성향의 노래도 불러 다세대를 망라한 국민가수의 면모를 과시했다. 또한 앨범마다 혁신을 불어넣어 단일 곡이 아닌 앨범 전체의 미학과 음악적 완성도가 중요해진 흐름을 견인했다.
아마도 베이비붐 세대와 1960년대 중반 생 이후의 포스트 베이비붐을 함께 묶는 유일한 가수가 조용필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활약하던 1980년대는 가요계의 규모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던 때라서 이전 음악계에는 없던 갖가지 장르의 음악이 용암이 분출하듯 솟아올랐다. 김현식, 한영애, 들국화와 같은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젊은이들이 찾았고 ‘봄여름가을겨울’과 김현철은 재즈를 실험했으며 ‘신촌블루스’처럼 블루스를 시도한 음악가도 나왔다.
이문세에 곡을 준 이영훈과 비운의 천재 유재하는 뽕짝 즉 트로트 느낌을 완전 배제한 팝 발라드의 꽃을 피웠다. 이 음악과 함께 고학력 여성들도 시장의 소비자로 참여하게 됐지만 음악의 주도권은 하이틴으로 넘어가 나미, 김완선, 소방차 등 10대가 좋아하는 댄스음악이 각광을 받았다. 중심이 ‘10대’와 ‘댄스음악’이라는 트렌드를 정확히 간파해 시대를 가른 인물은 1992년 광풍을 야기한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글로벌 시장에서 점프한 케이팝
새로운 음악인 랩을 가요에 접목한 서태지는 신세대인 X세대의 공격성을 노골화한 음악을 구사해 10대대통령 또는 문화대통령으로 불렸다. 그가 랩을 끌어들이고 잠시 후 김건모가 ‘레게’를 유행시키고 듀엣 ‘듀스’가 ‘힙합’을 퍼뜨리면서 1990년대 국내음악 판은 과거에는 홀대된 흑인음악으로 쏠려갔다. 한 사회학자는 “요즘 젊은이들이 흑인음악에 열광하는 것은 백인음악에 압도적으로 경도된 기성세대에 대한 은근한 반란”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서태지가 은퇴를 선언한 1996년부터 음악계는 댄스와 비주얼을 내건 대형기획사의 아이돌 가수들이 판세를 장악했다. 동아시아에 한류 붐을 터뜨린 ‘에쵸티’(H.O.T.)를 시작으로 2세대라고 할 ‘동방신기’, ‘빅뱅’,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투애니원’ 등 아이돌 댄스음악은 20년 가까이 된 지금도 대세를 몰이하며 장수하고 있다. ‘애들 음악은 5년을 못 간다!’는 속설을 깼을 뿐 아니라 ‘텔 미’의 걸 그룹 원더걸스가 등장한 2007년부터는 케이팝(K-Pop)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간 우리의 아이돌음악은 세계에 ‘다이내믹 코리아’의 문화이미지를 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상업적인 아이돌 댄스의 주류음악에 반발해 독립을 외친 인디음악이 소생하기도 했다. 크라잉 넛의 ‘말달리자’는 IMF 시절 넥타이부대의 찬가로 등장, 인디의 가능성을 알렸다.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요원했던 빌보드 차트에서 5주간 2위를 차지, 케이팝의 지평을 크게 올려놓았다. “케이팝 때문에 한국을 알았다”는 세계인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각 세대와 계층의 정서를 담아내면서 대중의식을 이끌어온 대중음악이 광복 70년 역사의 내공을 발휘하며 이제 내수시장이 아닌 지구촌 곳곳에서 찬란한 성공스토리를 써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케이팝이란 깃발 아래 우리 역사의 사운드트랙은 시제를 미래로 맞추고 있다.
△ 임진모 음악 평론가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후 경향신문과 내외경제신문기자를 거쳐 1991년부터 음악평론.
라디오 출연 등 전파. 인쇄매체에서 폭넓게 활동중이다.
안경을 쓴 모습이 카리스마 있어 보이지만, 그 속에 보이는 정동기 본부장의 눈빛은 꽤나 깊이 있다. 40년 가곡 감상으로 다져진 남다른 감성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게다. 그가 운영하는 국내 최대 가곡 감상 사이트 이름도 ‘내 마음의 노래(www.krsong.com)’일 만큼 가곡은 이미 그의 삶을 대변한다. 이제 가곡을 떼어 놓고는 그의 삶을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 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길 잡이 목련화는 / 새 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
백화점 스피커를 타고 가곡 ‘목련화’가 매장 구석구석을 수놓는다. 백화점 구경을 하러 온 한 고등학생 소년의 귀가 그 음악을 향한다. 소년은 무엇인가에 홀린 듯 발걸음을 멈추고 그 곡을 음미하기 시작한다. 5분 남짓 노래의 최면에 흠뻑 빠져 있던 소년은 노래의 마침표가 찍히자 최면에서 깨어난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차비 500원을 꺼낸다. 차비를 모두 쓰면 집까지 걸어가야 하지만 음반을 구입하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집으로 오는 길에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가곡 ‘목련화’가 담긴 커다란 LP판. 그때 그의 나이 18세, 실버타운 ‘더 클래식 500’ 정동기 본부장의 가곡 음반 수집 인생의 시작이었다.
◇가곡 3000장
“장르를 불문하고 제가 가지고 있는 LP가 모두 3000장, CD가 3000~4000장 정도 됩니다. 그중 한국 가곡 LP가 500장, 한국 가곡 CD가 2500장 정도이고요. 가곡 음반만 3000장가량 되는 셈이죠. 제가 운영하는 가곡 감상 사이트 ‘내 마음의 노래(www.krsong.com)’에도 1만여 곡의 가곡이 올려져 있습니다.”
가곡 음반 수집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정 씨. 요즘도 틈이 날 때마다 명동과 회현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가곡 음반을 탐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웬만한 한국 가곡 음반은 모두 가지고 있어 음반 시장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새로운 음반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그의 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방송사에서도 가곡 음원이 필요할 때 그에게 대여를 요청할 정도다.
그가 일명 ‘도너츠 판’이라고 불리는 10인치 LP판 다섯 개를 꺼내들었다. ‘방첩의 노래’, ‘저축의 노래’, ‘새마을 노래’, ‘고속도로의 노래’, ‘축구의 노래’라는 음반이었다. 그 제목부터 음반의 표지까지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그 음반들은 시대의 상황을 대변해 주는 일종의 역사다. 정 씨는 가곡이 아니더라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음반들도 그때마다 모았다고 했다.
“예전에는 국가에서 하는 사업을 홍보하기 위해 관련 홍보물을 음반으로 제작하기도 했죠. ‘저축의 노래’는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고속도로의 노래’는 경부고속도로 완공 기념으로 만들어진 음반입니다. 이 곡들은 가곡은 아니지만 가곡 작곡가들이 직접 곡을 만들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음반 ‘나그네의 노래’와 ‘길은 멀어도’의 기억
“잊고 있던 노래가 몇 년, 몇십 년이 흐른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20세 때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즐겨 듣던 가곡 ‘나그네의 노래(이호섭 곡)’라는 곡이 있었어요. 30대부터 그 음반을 찾으려고 수소문을 했는데도 찾기 힘들더군요. 그렇게 수소문한 것만 20여 년이었어요. 그런데 50대가 돼서 그 곡 작곡가의 아들이라는 분이 제가 아버지의 자료를 수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저에게 연락을 해주어 그 음반을 우연히 얻게 된 적도 있습니다.”
정 씨가 가곡 음반을 수집한 세월만 해도 40년이 다 돼 간다. 수집 과정 중에서 그가 선택한 가장 소장 가치가 있는 LP는 ‘저 구름 흘러가는 곳’이라는 곡이 들어 있는 영화 ‘길은 멀어도’ 10인치 음반이다. 그 음반을 구하기까지 나름의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가곡 대중화 운동’을 펼치곤 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뜻을 모아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기도 했는데, 10여 년 전에는 그 연주회에 가곡의 거장 김동진 선생을 모셔 온 적이 있었다. 김 씨가 작곡한 ‘저 구름 흘러가는 곳’이라는 곡을 직접 공연하기 위함이었다. 김 씨는 이곳에서 영화 ‘길은 멀어도’에 삽입된 적이 있는 이 곡을 직접 부르고 해석도 해줬는데, 이 곡과 영화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함께 설명했다고 한다.
“원래 영화에서 주인공인 최무룡 씨와 김지미 씨가 이 노래를 불렀어야 했는데, 최무룡 씨가 노래를 잘 못해서 김 선생님께서 직접 노래를 하셨다고 해요. 그 당시 영화는 모두 더빙이었으니 아무도 몰랐던 거죠. 최무룡 씨 부분은 김동진 선생님이 하셨고, 김지미 씨 부분은 바리톤 김동규 씨의 어머니인 성악가 박옥련(현재 ‘박석련’으로 개명) 씨가 불렀다고 합니다. 행사 때마다 얘기를 해주셔서 인터넷 LP 사이트를 뒤져 어렵게 구해 가치가 있는 음반입니다.”
◇저녁에 어울리는 음악
정 씨는 정통 클래식과는 달리 가곡은 아침이나 저녁에 어울리는 음악이라고 말한다. 가곡이 담고 있는 특유의 서정성이 하루 일을 시작하거나 마무리할 때 활력과 평안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한국 가곡의 80%는 한국인의 서정성을 담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속에 가곡과 같은 서정을 갖고 있어야 그 삶이 편안하고 여유로워진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 취미가 노후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근원이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는 가곡이야말로 신중년이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데 특효약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특히, 가곡을 합창해 보는 것은 음악적으로 자기표현능력을 키우면서도 서로 어우러지기 위한 집중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고 설명한다. 그가 10년이 넘게 가곡 합창과 발표회의 고삐를 놓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가곡은 신중년의 동심을 불러일으키고, 동심은 곧 젊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꿈꾸는 미래는 지금까지 해온 열정의 연장선에 있다. 지금의 직장인 실버타운 ‘더 클래식 500’에서 클래식한 한국문화가 더해지고, 고급스럽게 재창조돼 신중년이 이런 것을 향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말이다.
“오디오 감상실을 활용해 옛날 유료 음악감상실처럼 소장하고 있는 가곡 음반을 ‘더 클래식 500’ 회원들에게 들려 드리고 싶어요. 거기에 ‘음반으로 살펴보는 한국가곡사’ 등 더 클래식 500 특별전시회도 제가 가진 콘텐츠를 일터에 기여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클래식 500
학교법인 건국대학교가 설립한 도심 속의 미래형 복합문화주거공간 ‘더 클래식 500’은 세련되고 편안한 하우징 서비스와 고급스럽고 우아한 호텔 서비스를 제공한다.
더 클래식 500은 상위 1%를 위한 프라이빗 시니어 타운으로 소수만을 위한 하우징 서비스를 하고 있다. 프리미엄 레지던스 콘셉트의 호텔 ‘PENTAZ’ 는 오래 머물러도 내 집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맞춤 서비스를 진행한다.
연재를 시작하며
의 창간을 축하하며 글 쓸 기회를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제 삶에 큰 자리를 차지하는 영화, 음악, 등산, 여행, 운동 및 수련 등과, 직업과 직결된 서울의 교통, 교육 등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에피소드들을 곁들여 펼쳐볼까 합니다.
그러나 잡지나 신문 등에 글을 써 본 적이 별로 없어 서투른 점도 많으리라 생각되니 여러분의 격의 없는 지도편달을 바랍니다.
글 임성빈 명대 명예 교수
내가 만난 영화, 그 첫 번째 이야기
2012년도 다 저물어가던 10월 하순의 어느 날, 필자가 수천 개의 영화 DVD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면서도 한 번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던, 필자를 잘 따르는 후배 C씨가 “혹시 이라는 영화 가지고 계세요?”라고 물어왔다. 그 영화는 본 적은 없지만 주제가는 기억이 나서 집에 와 확인해 보니 역시 영화는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 유행했던 영화음악을 모아놓은 LP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영화여서 친근감을 가지고 있던 영화였다.
이런 경우 필자는 일반적으로 그냥 없다고 해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 해서 그 영화를 구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검색해 보니 이 영화가 국내에서는 출시된 적이 없는데도 국내의 어떤 인터넷 카페와 연결되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올드시네(Oldcine)’라고 하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수년 전부터 이곳에서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국내에 출시되지 않은 희귀영화의 원본을 구해 여기에 한글자막을 올려서 상영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3년 2월의 상영 예정작이 이라고 예고되어 있어 필자에게 검색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사실 영화를 많이 좋아하는 편이나 근년에는 극장 가기가 번거로워 거의 안 가고,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DVD나 인터넷에서 영화를 다운받아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 카페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극장에서는 물론, DVD로도 볼 수 없는 영화들이었다. 그래서 바로 그 카페에 가입하였고 그 해 12월에는 라는 주제가가 너무나 유명했던, 라는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영화상영 장소는 지하철 3, 4호선이 교차하는 충무로 역 안에 있는 ‘오재미동’이라는 소극장이었는데, 지하철 역 안에 그런 소극장이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즉 2013년 2월에는 물론 후배 C씨와 함께 도 감상하였고 그 다음 달인 3월에는 정기상영이 아닌 번개상영으로 필자가 무척 좋아했던 알랭 들롱의 도 감상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많은 희귀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2014년 10월에는 압구정동의 ‘무지크 바움’이라는 소극장에서 이라는 외국영화와 함께 국산영화 를 이장호 감독과 이 감독의 친동생이자 주인공의 한 사람이었던 이영호 씨와 같이 감상하고 뒤풀이도 함께 하는 이벤트도 있었다. 이 카페 몇몇 회원들의 영화에 대한 수준은 상상을 초월하여 그들이 카페에 올린 글들을 읽어가며 필자의 영화에 대한 안목을 몇 단계 높여가고 있는 중이다.
필자가 보유한 영화 중에는 국내에서 출시되지 않아 해외에서 구입한 것이 약 200 여 개 된다. 또 10여 년 전에는 수년간 TV에서 방영하는 영화 중 집에 없는 것은 거의 다 녹화한 적이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국내에 출시되지 않은 것들로서 그런 것들만도 400 여 개가 된다. ‘Oldcine’의 회원 중에 꽤 잘 알려진 영화감독 Y씨는 자신의 소극장을 마련하여 상영할 꿈을 가지고 희귀영화를 열심히 모으고 있었다. 그가 필자의 집을 방문하더니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수 년 동안 그렇게 애를 써도 구할 수 없었던 희귀영화들이, 그것도 수백 개가 한꺼번에 눈앞에 있으니 그야말로 노다지였던 것이다.
필자 역시 모처럼 소장품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 기뻐 아무 조건 없이 그가 원하는 모든 영화를 빌려 주었고 필자도 그동안 구하지 못했던 , , , 와 같은 영화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그 꿈을 이루어 2013년 11월, 강화도 동감도에 DRFA 365 예술극장을 완공하여 운영하고 있다.
우리 나이또래들이 대개 비슷했겠지만 필자가 영화를 본 것은 아마 국민학교 때 동네 주차장에서 본 무성영화 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이라는 영화를 보러 갔던 것도 기억이 난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학교 강당이나 단성사에서 심심찮게 단체관람을 시켜 주었는데 , , (나중에 이라는 제목으로 DVD가 나왔다), , , , , , , , 등과 같은 영화들이 떠오르지만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 같은 영화들을 대한극장에서 70㎜로 보았던 것 외에는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기는 4·19와 5·16의 북새통에 단체 관람할 여유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들 영화는 모두 다 어렸을 때의 즐거웠던 추억으로 남아 있으며 특히 가 많이 좋았던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위대한 재즈 코르넷 연주자이자 경음악단 화이브 페니스의 단장인 레드 니콜즈의 역할을 맡은 다니 케이는 시골뜨기 음악가 역할을 호들갑스럽게 잘 해 내고 있으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즈 음악가로 평가되고 있는 사치모(Satchmo; 입이 큰 사람이라는 뜻의 별명) 루이 암스트롱이 트럼펫 연주와 함께 그의 특이하게 구성진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여기에 당대 빅 밴드의 상징이었던 밥 크로스비, 레이 앤서니, 쉘리 맨 등이 합류하여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또 뒤에 미국의 인기 TV 연속극 ‘달라스’의 여주인공으로 인기 절정에 오른 바바라 벨 게즈와 뒤에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에 출연한 튜스데이 웰드가 10대로 데뷔하여 열연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20곡 이상의 재즈 명곡이 연주된다. 그중에서도 전설적인 스캣창법과 함께 루이 암스트롱과 다니 케이가 듀엣으로 연주하는 ‘성자들의 행진’은 잊지 못할 감흥을 준다. 이 영화는 또 정겹고 애틋한 부정(父情)을 그린 가족드라마이기도 한데 비디오로 다시 보아도 그때의 즐거움을 비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 소년 조디가 부모 잃은 아기사슴 플랙을 기르다가 사슴이 다 자라서 농작물을 훼손하게 되자 아버지가 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사살하게 되는 이라는 영화는 당시에는 굉장한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다시 보니 나이 탓인지 그때와 같은 감명은 느낄 수 없었다.
1944년 서울 출생.
아호 무애(無碍). 경기고, 서울대 토목공학과 졸. 서울대대학원 교통공학 박사. 서울대, 명지대 토목공학과 및 교통공학과 교수 역임. 현재 명지대 명예교수, 서울특별시 무술(우슈)협회 회장 홍익생명사랑회 회장, 월드뮤직센터 이사
'재즈의 명가' 블루노트가 창립 75주년 기념 컴필레이션 LP를 발매했다.
11일 공개된 ‘3LP’(Blue Note 75 Years Of The Finest In Jazz)는 총 세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LP별로 각 시대를 대표하는 명곡들이 수록됐다.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들의 명곡부터 떠오르는 신예들의 히트곡까지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첫 번째 LP에는 아몬즈와 루이스의 피아노곡을 비롯해 1939년에서 1957년까지의 블루스와 비밥을 담았다. 두 번째는 존 콜트레인의 걸작 '블루 트레인'과 1958년과 1965년 사이의 모던 재즈를, 세 번째는 노라 존스로 대표되는 20세기 후반과 21세기의 최신 곡들로 구성됐다.
'재즈의 명가'라고 불리는 미국 재즈 전문 레이블 '블루노트’는 독일 이민자 알프레드 라이온이 1939년 설립해 지난 75년간 부기우기, 스윙, 비밥, 하드밥, 솔 재즈, 퓨전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재즈 음악을 선보여 왔다.
음반유통사 유니버설뮤직 관계자는 "블루노트의 75년 역사를 한 앨범을 통해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별들이 넘치는 계곡으로 가요. 올 여름 바캉스에서 가족과 아내와 남편. 또는 애인과 달콤한 사랑을 속삭일 LP곡을 뽑아봤다. 우리 5060이 중고등학교 재학시절, 긴 머리 휘날리며 온 세상을 누비던 시절 들었던 추억의 곡들이다. 올 여름 바캉스에는 근사한 턴테이블 하나 들고 가는 것은 어떨까?
◇ 키보이스, 골드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여름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곡이 바로 이 ‘해변으로 가요’일 것이다. 한국의 비틀즈라는 별칭으로 국내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키보이스. 그들의 앨범 골드(Gold)는 여름을 위해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캉스에서 들을만한 LP를 추천해달라고하자 박 대표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앨범이다. ‘해변으로 가요’외에도 ‘바닷가의 추억’, ‘정든 배’ 등 주옥같은 곡이 있으니 가히 여름을 위한 LP라 할만하다.
◇ 한상일, 애창곡집
한상일의 애창곡집 중 ‘애모의 노래’는 노랫말이 몹시 구슬프다. 그러나 멜로디가 꽤나 감성을 자극하고 서정적이다. 박 대표는 바캉스에서 느지막한 저녁. 밤하늘의 별을 보며 들을 수 있는 노래로 한상일의 ‘애모의 노래’를 추천했다. ‘나는 짝 잃은 원앙새 나는 슬픔에 잠긴다’. 노랫말처럼 되지 말고, 바캉스에서 옆에 있는 짝과 앞날의 기쁨을 만끽했으면 좋겠다.
◇ 윤형주, 골든 포크 앨범
고개가 절로 흔들린다. 휘파람 소리와 통기타 소리가 신나게 어우러져 어깨가 들썩거린다. ‘쎄시봉’ 윤형주의 ‘즐거운 하이킹’이다. 통기타를 배운 사람이라면 가족들과 모닥불 피워놓고 부를 수 있는 노래다. 물론 기타가 없어도 걱정 없다. 감성을 자극하는 스크래치 음성이 들리는 LP가 있으니까. 통기타 대신 가족을 위해 또는 동행자를 위해 이 LP를 준비했다면 그날 만큼은 당신이 쎄시봉의 주인공이다.
◇ 은희, 골든 디럭스 20
분위기 잡기 좋은 노래다. 10대 20대의 자식들과 함께라면 우리 때는 이런 노래가 있었다고 자랑 할 수도 있다. 은희의 ‘물새우는 해변’이다. 드넓은 밤바다가 외로워 보인다면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지도 모른다. 바캉스의 여름밤이 즐거워야만 하랴. 슬픔의 눈물을 훔치며 옛 추억을 회상하는 것도 여러 여름 밤 중 하나이니. 사무치는 외로움을 만끽하고 싶다면 이 곡에 빠져 보길 추천한다.
◇ 4월과 5월, 베스트
7월과 8월 듣기 좋은 노래로 박 대표가 추천한 곡이다. 4월과 5월의 ‘바다의 여인’이다. 새로운 인연을 만날 것이란 기대감에 부풀었던 젊은 날의 바캉스. 그러나 그 기대는 한 줌의 모래알과 같았던 적이 많지 않은가. 그 설렘과 허무함이 이 곡에 담겨있다. 추억할 수 있다면 이 곡만 한 것도 없다. 노랫말 그대로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 바닷가에서 추억을 맺은 사람’들도 이제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 비치보이스 (The Beach Boys), 베스트 오브 더 비치 보이스(Best Of The Beach Boys)
자식들과 함께 들어라. 신나게 발을 땅에 비벼라. 몸을 흔들어라. ‘신난다’라는 표현은 약하다. 가족 사이에 웃음이 만개할 것이다. 비치보이스(The Beach Boys)의 ‘서핑 유에스에이(Surfing USA)’다. ‘외국곡 추천해도 돼죠?’. 박 대표가 물었다. ‘예’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추천했다. 이 곡을 듣자마자 여름곡이라는 확신이 생길 것이다. 다리도 저절로 움직일 것이고, 나도 모르게 ‘트위스트 킹’이 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 앞이라고 부끄러워 하지말라. 그들도 똑같을테니. 소통? 이 노래하나면 끝이다. 몸으로 말하면 된다.
◇박임선 대표 소개
동굴에 35년 동안 살고 있다. LP의 동굴이다. 황학동에 위치한 ‘장안레코드’의 대표인 박임선(55)씨는 LP와 음반의 산 증인이다. ‘지지직’ 소리가 나는 LP를 CD보다 더 좋아한다. 그야말로 음반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