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윤영미(60). 그녀의 제주도 집 이름은 ‘무모한 집’이다. 직접 작명했다는 윤영미는 “제 인생을 돌이켜보니 저는 굉장히 무모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무모하다’는 꼭 부정적인 말은 아니다. 누군가의 무모한 도전과 열정이 그를 성공으로 이끌기도 한다.
윤영미 역시 무모한 성격 덕에 아나운서가 됐고, 더 나아가 ‘여성 최초’라는 이름 아래 여러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윤영미의 무모하지만 아름다운 도전은 60대에 접어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윤영미에게 아나운서는 오랜 꿈이었다. 초등학생 때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우연히 방송반 아나운서를 맡은 그녀는 진행의 매력에 푹 빠졌고, 아나운서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예 아나운서 명찰을 달고 다니던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윤영미 아나운서’라고 불렀다.
윤영미는 반드시 아나운서가 되어야만 했다. 목표를 정한 그녀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었다. 방법이 없다면 찾아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윤영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청량리역 역장을 찾아가 “왜 여자는 방송을 안 하냐”고 물으며 방송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에 한 달여 동안 안내 방송을 한 그녀는 ‘최초의 지하철 방송 여자 아나운서’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윤영미는 대학 졸업 후 춘천MBC 사장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당시 춘천MBC에는 공채 제도가 없었는데, 아나운서 시험을 볼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패기 덕에 윤영미는 1985년 춘천MBC 아나운서가 되면서 꿈을 이뤘다. 이어 그녀는 1991년 SBS 개국 당시 경력직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SBS 입사 후에도 ‘최초의 여성 프로야구 캐스터’, ‘최초의 아나테이너’(아나운서+엔터테이너)라는 수식어를 갖게 됐다.
“제가 워낙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는데 방법을 알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요. 저는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걸 직접 해보고, 뭐라도 시도해보려는 편이에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이기도 했고요. 저희 어머니도 늘 ‘안 되면 끝까지 해봐라. 분명히 길이 보인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어라’는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그런 말들이 많은 힘이 된 것 같아요.”
이런 아나운서 처음이라고?
춘천을 벗어나 SBS라는 큰물로 옮겨가니 고충이 따랐다. 윤영미는 “SBS에 들어가서 한 3년 동안은 TV 방송을 못 했다. 제 자리가 없었던 거다”라면서 “당시 아나운서 중에 순위를 매기자면 저는 거의 꼴찌였다”라고 말했다. 쟁쟁한 아나운서들 사이에서 위기의식을 크게 느낀 윤영미. 그녀의 성격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윤영미가 찾은 돌파구는 ‘야구’였다. 당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여자 캐스터가 없던 시절이었다. 윤영미는 자신이 길을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야구를 좋아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야구의 ‘야’자도 몰랐기에 그녀는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당시에는 야구에 미쳐 살았던 것 같아요. 매일 근무 끝나면 야구장에 가서 야구를 봤어요. 당시에는 신문밖에 없으니까 스포츠신문을 탐독하고, 야구 중계를 켜놓고 따라 하면서 중계 연습을 했죠. 1년 동안 고시 공부하듯 공부했더니 야구가 조금씩 보이더라고요.”
당시 아나운서 국장이었던 이계진은 윤영미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 캐스터 오디션 기회를 줬다. 윤영미는 당당히 합격하며 마침내 ‘여성 최초 야구 캐스터’가 됐다. 그렇게 그녀는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야구 캐스터로 활약하며 이름도 널리 알렸다. 지금도 그녀는 1994년 4월 7일 광주 첫 중계부터 한국시리즈 중계 등 영광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이후 2000년대 윤영미는 또 한 번 주목받았다. 추석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녀는 신신애의 ‘세상은 요지경’ 무대를 선보였다. 아나운서라는 고정관념을 깬 혼신의 무대는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이후 윤영미는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손님이 됐다. 신신애와 이박사 성대모사는 물론 시원한 입담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최초의 아나테이너 탄생이었다.
“당시 ‘엽기 아나운서’라고 주목받았는데, 요즘 같았으면 짤이 엄청 돌아다녔을 거예요.(웃음) 그런데 사실 아나운서실에서는 품위가 떨어진다면서 별로 안 좋아했어요. 저는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도, 인지도가 높은 아나운서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미지 실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고, 이왕 할 거면 어설프게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즐겼을 뿐이에요. 시청자분들도 처음에는 제 모습을 낯설게 느끼다가 아나운서도 저렇게 할 수 있구나라고 받아들이신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때 아나테이너라는 말이 처음 나온 거죠.”
윤영미는 50대 진입을 앞두고 또 한 번의 도전을 했다. 2010년 12월 SBS를 퇴사하고 프리랜서를 선언한 것. 그 이유에 대해 그녀는 “방송국에서는 50세가 되면 방송 진행보다 교육 등 다른 것을 하기를 원한다. 활동에 제약이 생긴다는 것이다. 저는 필드에 계속 있기를 원했다”고 설명했다. 여전히 아나운서로 빛나는 윤영미. 그녀가 생각하는 아나운서로서 자신의 강점은 무엇일까.
“저는 특별히 비주얼적으로 뛰어난 것도, 대단한 특기를 가진 것도 아니에요. 제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건 성실성밖에 없는 것 같아요. 누구나 다 성실하겠지만 저는 굉장히 프로의식이 강해서 평생 지각, 결석을 해본 적이 없어요. 천재지변이 있을 때는 아침 방송에 늦을까봐 전날 출근해 책상에서 잔 적도 있고요. 항상 미리 가서 준비하니까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 믿음을 준 것 같아요.”
제주도, 그리고 가족
윤영미는 프리랜서가 된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종편 채널은 물론 홈쇼핑 채널에도 출연하고, 강연도 하고, 책도 쓴다. 연기에 대한 열정은 늘 가슴에 품고 있다. 현재 그녀는 제주도를 오가면서 살고 있다. 책을 쓰기 위해 제주도를 찾았다가 제주도의 매력에 이끌려 정착하게 됐다.
제주도 살이를 한 지 벌써 3년째. 윤영미는 올해 종달리로 이사했다. 그 집이 바로 ‘무모한 집’이다. 그녀는 유튜브 채널 ‘윤영미의 무모한 집’도 운영한다. 이사를 하고 수리·인테리어 과정을 거쳐 집이 재탄생하는 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제주도의 전통 양식을 살리면서 모던함을 가미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돌 부엌과 돌 인덕션, 찻장 등 윤영미의 감각이 녹아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저는 방송이 있기 때문에 서울을 왔다 갔다 해요. 그래도 한 달에 반은 제주도에서 사는 것 같아요. 남편은 제주도에 계속 있고요. 제주도 집에 있다 보면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많이 행복해요. 평생 생각만 하고 못 해봤던 일을 짧게나마 실현한 것 같아서 또 다른 꿈을 이룬 듯한 느낌이 들고 뿌듯해요.”
그런데 무모한 집은 정확히 말하면 윤영미가 산 집이 아니다. 6년 반 동안 장기 렌털한 집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 집도 아닌데 대대적인 수리를 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윤영미 역시 생각보다 많은 돈을 썼지만 후회는 없다. 그녀는 “저는 남들과 다르다. 내가 행복한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에 살던 제주도 집은 ‘체리집’이었어요. 벚꽃(체리 블러섬)이 굉장히 아름다운 집이었거든요. 이번 집은 감나무가 있어 ‘감나무집’이라고 하려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왜 남의 집에 그렇게 억대의 돈을 투자하느냐, 무모한 짓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저도 돈이 그렇게 많이 들 줄 몰랐는데, 무모한 짓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제 인생 자체를 돌이켜보니 저는 굉장히 무모한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무모한 집’이라고 이름 지었죠.”
윤영미는 자신의 무모한 삶에 관해 얘기하면서 ‘결혼’을 언급했다. 결혼 또한 무모했다는 생각이다. 그녀는 서른다섯 살에 출판사 직원이었던 황능준 씨와 결혼했다. 화려한 아나운서였던 윤영미의 선택은 다소 의외였다. 결혼 전 소개팅, 선을 많이 봤는데, 황능준 씨만큼 자신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단다.
즉 사랑 하나만 보고 결혼한 것인데, 결혼 생활은 예상보다 힘들었다. 윤영미는 가장의 무게까지 짊어져야 했다. 황능준 씨가 결혼 후 3년 만에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전업주부가 됐기 때문. 졸지에 가장이 된 그녀는 악착같이 일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윤영미는 지난해 한 방송을 통해 그동안 쌓였던 가장의 스트레스를 털어놓았다. 늘 밝고 당당한 그녀의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더욱이 윤영미는 남편과 ‘졸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냐고 묻자 그녀는 “지금 남편과 거의 떨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에 졸혼이나 마찬가지다. 30년 정도 같이 살았으면 많이 산 거다”라고 말했다.
“남편의 장점은 밝고 긍정적이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점이에요. 결혼할 당시 ‘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만 좋으면 됐지’라고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그건 아니더라고요.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것 같아요. 가장으로서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보면 결혼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윤영미가 오랜 시간을 버티면서 산 이유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들 때문이었다. 현재 20대인 두 아들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다. 특히 첫째 아들은 미국 아이비리그에 편입한 바 있다.
“첫째는 경영을 전공해서 월스트리트 쪽으로 진출하고 싶어 하고, 둘째는 건축가가 되고 싶어 해요. 나중에 정말 우리 집을 지어줄지도 모르죠.(웃음) 저는 아이들이 무엇이 됐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애들을 속박하며 공부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그렇게 하니까 오히려 애들이 알아서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아요.”
윤영미는 어느덧 60대 시니어가 됐다. 동안 소리도, 젊게 산다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정작 자신은 잘 모르겠단다. 그냥 자신의 방식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을 뿐이라고. 윤영미는 나이를 먹을수록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해야겠다고 느낀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방송과 여행을 죽을 때까지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 과정에서 무모한 도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뛰어들 그녀다.
“앞으로 2년 동안은 우리 애들 학비를 대는 것이 목표예요. 그리고 제주도 집을 6년 반 계약했으니 잘 살아야죠. 또 욕심이 있다면 강원도나 전라남도에 새집을 얻어 제주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살고 싶어요. 인생의 목표는 오늘을 재밌게 살고, 하고 싶은 대로 살자예요. 독자 여러분도 마음에 어떤 갈망이 있다면 앞뒤 보지 말고 무조건 행하면서 즐기며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국내에 프로스포츠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여러 가지 전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런 영웅담 중에서도 최고의 전설을 꼽자면 아마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두껍게 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흑색과 적색의 유니폼을 입은 그들이 나타나면 상대 팀 선수들은 기가 죽고, 상대 팀 팬들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상대의 전의마저 상실케 했던 해태 타이거즈 군단의 맨 앞에는 1번 타자 이순철(60)이 있었다.
“당시엔 사실 잘 몰랐어요. 해태 타이거즈에게 상대 팀들이 그렇게 기가 죽었는지를요. 그 공포의 유니폼은 우리에게는 그냥 촌스럽고 덥기만 한 존재였는데.(웃음) 현역 때는 모르다가 나중에 알게 됐죠. 술자리 같은 사석에서 다른 팀 출신 동료들이 이야기하더라고요. 그 유니폼이 그렇게 무서웠다고 말이죠.”
사실 해태 타이거즈의 우승 공식은 아주 단순했다. 타자들이 상대 팀보다 앞서 점수를 내면, 투수들이 막아 승리를 지킨다. 1번 타자 이순철이 시작하면 마무리투수 선동열이 지키는 공식이다.
홈런이 귀했던 시대에 1번 타자가 10개 이상 홈런을 치고 50개 이상 도루를 밥 먹듯 하니, 상대 팀 입장에선 맞설 수도, 내보낼 수도 없는 골치 아픈 타자, 그가 이순철이었다.
“상대는 경기를 시작하면 무조건 선취점을 내려고 했죠. 선동열이 못 나오도록 해야 하니까. 그렇게 무리하다 보면 게임은 꼬이게 되죠.”
함께 흘렸던 목포의 눈물
1980년대 호남 사람들에게 해태 타이거즈는 억눌린 울분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들이 겪었던 상처는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이 승수를 쌓아갈 때마다 조금씩 아물어갔다. 그래서 팬들은 관중석에 앉아 ‘목포의 눈물’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그런 감정은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이순철 위원은 이야기한다.
“지금과 달리 당시엔 선수들도 대부분 호남 출신이었죠. 팀 내에서 민주화 운동에 대한 말은 아끼는 편이었지만, 그 응어리나 한이 없을 수 없죠.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경기 일정부터 달랐어요. 해태 타이거즈는 한동안 5월 18일이 다가오면 전후 일주일 정도는 원정경기만 잡혔어요. 기념일에 광주 구장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하지만 원정을 가도 전라도 분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계속 뜨거운 응원을 보내주셨죠.”
1980년대에만 해태 타이거즈는 5번의 시리즈 우승을 이뤘다. 전체 우승컵의 절반을 가져온 셈이다. 대체 어떤 부분이 해태 타이거즈를 그렇게 강하게 만든 것일까? 이순철 위원은 그 비결로 3가지를 꼽았다. 강한 위계질서와 헝그리 정신 그리고 선수 개개인의 능력이다.
“워낙 좋은 선수들이 많았고, 이 선수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위계질서가 있었죠. 선배들이 짓누르니까 후배들은 압박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추억담처럼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아마 프로야구 구단 중에서 OB(구단 출신 은퇴선수) 모임이 가장 활성화된 곳이 해태 타이거즈일 거예요. 그만큼 서로 사이가 좋아요. 또 구단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노릴 수밖에 없었어요. 보너스로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려면 말이죠.(웃음)”
사실 강한 위계질서는 후에 그가 해태 타이거즈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타이거즈의 상징과도 같았던 김응용 감독에 대한 항명 사건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이후 비슷한 사건을 겪는다. 43세 젊은 감독으로 LG 트윈스에 부임하자마자 팀의 고참 선수였던 이상훈과 갈등을 빚었고, 에이스인 그를 당시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를 보내게 된 사건이다. 한 번은 선수 입장에서, 한 번은 감독 입장에서 항명 사건과 맞닥뜨린 셈이다. 이 위원은 “철이 없었다”고 정리했다.
“철없던 짓이죠. 김응용 감독과의 갈등은 제가 철이 없었어요. 또 이상훈 선수와의 갈등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선배로서 더 아우를 수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죠. 이상훈 선수하고는 나중에 한잔하면서 갈등을 풀었어요. 직접 소통했어야 하는데, 가운데 누군가를 거쳐 말이 전해지다 보니 생긴 오해였더라고요. 김 감독님하고도 마찬가지예요. 얼마 전 감독님 팔순 잔치도 제가 주도해서 준비했을 만큼 지금은 모두와 잘 지내고 있어요.”
숙명의 라이벌과 한 팀으로
사실 이순철 위원이 처음 시작한 운동은 야구가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축구부에 들어가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축구부가 해체되면서 다른 인생이 펼쳐졌다.
“축구부 다음으로 육상부에 들어갔죠. 그러다 핸드볼을 잠깐 하고 나서 야구로 전향하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부모님의 응원은 받지 못했어요. 당시만 해도 운동선수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은 시절은 아니었으니까요. 공부하기를 원하셨지만, 먹고살기 바쁘니까 적극적으로 막진 않으셨죠. 저도 공부보다는 운동이 좋았으니까 계속 열심히 했고요. 운동부에서도 쉽진 않았어요. 당시 운동부는 지금 기준으론 범죄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체벌이 심했으니까요. 운동을 말리는 부모님에게 체벌 흔적을 들키지 않으려고 감추기도 하고, 상처 때문에 엎드려 자야 하는 날도 많았어요. 자식이 학교에서 맞고 다닌다면 누가 운동을 시키려 하겠어요.”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진가는 빛났다. 광주상고의 에이스로 발전해 광주일고 선동열과 맞서는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관계는 대학 때까지 이어져 연세대학교 81학번으로 같은 학번의 고려대학교 선동열과 계속 맞서야 했다.
대학 졸업 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을 때 세간의 관심은 1985년 신인왕을 어느 팀이 배출하느냐가 아니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누가 가져가느냐였다. 결국 신인왕은 0.304의 타율과 12홈런, 31도루를 기록한 이순철의 것이었다. 이 기록은 지난 시즌 기아 타이거즈에 입단한 이의리 선수가 신인상을 받을 때까지 36년간 이어졌다.
10시간의 비행이 만든 프러포즈
1989년 어느 날, 이미 팀의 주전으로 자리 잡은 이순철은 스위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12시간이 넘는 비행이었지만 생경했던 기내식도 먹는 둥 마는 둥이었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허락할까?’
야구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스위스로 향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연인 이미경 씨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위원은 부인 이미경 씨를 연세대학교 학창 시절 처음 만났다. 그가 대학 시절 이미경 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골인한 것은 야구계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아내 키가 170cm가 넘어요. 제가 좀 작은 편이라 키 큰 여자를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미인인 아내를 보는 순간 한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만나서 계속 구애를 했죠. 그리고 연애를 10년이나 했어요. 아내가 승마 선수로 스위스에 유학을 가 있을 때 프러포즈를 했어요. 그전까지는 전화카드를 잔뜩 쌓아놓고 공중전화로 장거리 연애를 했죠. 그러다 저도 혼기가 돼서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겠더라고요. 스위스행 비행기에 올라서 어떤 말을 할지, 과연 승낙을 해줄지 이런저런 생각에 긴장이 돼서 기내식도 제대로 소화가 안 될 정도였어요. 걱정과 달리 순순히 허락을 해줘서 기뻤죠. 그리고 다음 해 바로 결혼했어요. 저 때문에 승마를 그만두게 되었다고 아직도 가끔 불평을 해요.”
‘모두까기’의 야구 사랑
야구 골수팬들에게 이순철이란 이름 석 자는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엄청난 기록의 선수였지만 말년의 기복 있던 모습이나 감독으로서는 좋지 않았던 성적, 방송이라도 입바른 소리는 뱉고 말아야 하는 성격 탓에 ‘모두까기’란 별명까지 얻은 해설위원으로서의 모습. 그러나 불만을 가진 팬들도 인정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야구에 대한 그의 사랑이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나서, 그는 단 1년도 야구계를 떠나본 적이 없다. 프로팀 코치나 감독 혹은 대표팀의 코치를 맡기도 했고,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한다. 이런 모습을 팬들이 인정해주는 것이다.
“제 인생에는 야구밖에 없어요. 인생의 다른 기술이 없어요. 다른 것을 할 용기도 없고,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까 야구에 몰두하는 것뿐이죠. 어릴 때부터 야구에 매달려 살았고, 야구를 하는 것이 가장 즐거워요. 편하고요. 그래서 인생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야구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요.”
실제로 그는 인터뷰를 위해 사진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어색해하다가 소품으로 준비한 배트를 손에 쥐자 표정이 달라졌다. 타격 자세를 취하고는 “이제야 좀 편해진다”며 웃었다.
이제 그에게는 선수 혹은 감독이라는 호칭보다 해설위원이라는 직함이 더 편안하게 들릴 정도가 됐다. 2007년 MBC를 시작으로 활동을 해오다 지금은 SBS 스포츠에서 해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사실 선수 출신 해설위원은 대표적인 ‘파리목숨’으로 불리는 자리다. 방송사에서는 매년 스타 출신의 선수가 은퇴하면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 위해 해설위원으로 스카우트하지만, 시청자들 반응이 좋지 않거나 약간의 구설이 발생하면 바로 계약을 해지한다. 실제로 우리가 알 만한 레전드들이 2~3년을 채우지 못하고 방송을 떠난 사례가 부지기수다. 그 가운데 방송국을 옮겨가며 장수하고 있는 이순철 해설위원은 이제 모두가 인정하는 ‘스타 해설가’인 셈이다.
“어릴 때부터 종이신문을 읽는 습관을 들였어요. 특히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신문 사설을 많이 읽었죠. 당시 신문들마다 한자 사용이 많았던 탓에 웬만한 한자는 읽을 수 있게 되었을 정도니까요. 프로선수가 되고 나서도 이 습관은 바꾸지 않았어요. 팀 매니저들에게 중앙 일간지는 꼭 로커 룸에 넣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니까요. 덕분에 해설위원이 되고 나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지식도 많이 쌓고요.”
그가 해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MBC의 제안이 있기 훨씬 전부터였다고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야구 해설의 전설 하일성 선배에게 사석에서 해설에 대한 이야기를 묻기도 했다고. 그래서 첫 제안을 받았을 때 고민 없이 “하겠다”고 답할 수 있었다. 물론 해설은 평생 운동만 한 선수 출신에게는 쉬운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이 위원에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많은 공부가 필요하죠. 제가 처음 해설을 시작할 때는 일본 용어가 많이 사용됐어요. 시합, 계투, 데드볼 같은 용어들이요. 일본도 미국에서 야구를 받아들이면서 본인들 쓰기 편하게 바꾼 것이 많아요. 야구는 미국에서 시작된 스포츠니까 외래어를 쓰려면 미국식 용어를 쓰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고, 관련 자료들을 보면서 하나씩 고쳐나갔죠. 많이 변화시킨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어요.”
이 위원의 중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단짝 정우영 캐스터를 빼놓을 수 없다. MBC 스포츠플러스에서 함께 중계하다 SBS 스포츠에서 재회한 특별한 케이스. 이 위원은 “정우영이라는 좋은 캐스터 덕분에 해설위원이 빛나는 것 같다”며, “까칠한 성격도 이해하며 잘 받아주고, 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해 좋은 방송을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순철의 것이 아닌 이성곤의 야구
그가 야구에 대한 사랑을 쉽게 놓을 수 없게 하는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바로 아들 이성곤 선수다. 이제는 프로 9년 차의 베테랑 선수가 된 이성곤은 지난해 삼성 라이온즈에서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됐고, 현재는 주전 자리를 꿰차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위원과 이성곤 선수는 야구계에서 많은 에피소드를 낳았다. 이성곤이 1군 첫 홈런을 기록했을 때는 ‘비번’의 여유를 즐기다 방송국으로 호출당해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생방송에 출연해야 했다. 당시 선수 이성곤에게 늘 엄격한 해설을 날리던 이 위원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 야구팬들 사이에서 오래 회자됐다.
그는 아들 이성곤 선수가 “야구 실력에 비해 방송 출연이 잦다”며 투덜거리지만 동반 출연도 꽤 즐기는 모습이다. 최근에는 이순철 해설위원의 개인 유튜브 채널 ‘순Fe’(순페이)에 이성곤이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
“우리는 야구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는 부자 사이는 아니에요. 본인이 물어보면 그때 대답해주는 정도죠.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가 야구에 관해 깊숙하게 관여했으면 그것은 이순철의 야구지 나의 야구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그만큼 야구를 사랑하고 진지하게 대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바라보다 정 답답할 때만 문자 정도 주고받아요. 아직 대전에 마련한 집도 못 가봤는데, 올 시즌 대전에 내려가게 되면 어떻게 사는지 들러보려고요.(웃음)”
한 번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해본 사람은 없다는 스포츠, 바로 골프다. 골프는 사실 중년 남성들이 즐기는 스포츠로 인식됐다. 그러나 현재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스포츠로 통한다.
이 같은 변화는 여러 방송 매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TV조선에서는 김국진의 '골프왕', JTBC에서는 박세리의 JTBC '시니어클럽'이 각각 방송 중이다. SBS 이경규의 '편 먹고 공치리'는 시즌2가 방영을 앞두고 있다. 고정 출연진뿐만 아니라 게스트 또한 화려하다. 배우 이성경, 이완, 엄지원, 이연희, 최수영 등, 취미 생활과 관련된 예능이기 때문에 부담감을 내려놓고 출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연예계를 대표하는 골프왕으로는 개그맨 김국진과 배우 박선영이 뽑힌다. 김국진은 골프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연예계 골프왕으로 꼽힐 정도의 실력자다. 프로 못지않은 실력을 갖고 있다고 전해진다. 박선영은 지난 2000년부터 골프를 시작한 경력 21년 차의 베테랑이다. 그는 "비거리로 최대 230m를 친다"고 밝힌 바 있다. 워낙 여러 운동을 섭렵해서 체력이 좋은 것이 그의 비법. 골프지도사 자격증까지 갖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주변뿐만 아니라 TV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골프를 쉽게 접할 수 있자 골프를 즐기는 인원도 늘어나고 있다. 골프가 그간 중년층에게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아마 고급 스포츠라는 인식 때문으로 풀이된다. 골프 장비를 사다 보면 돈이 많이 들 것 같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느낌이 강하게 든다.
현재는 그러한 편견이 많이 녹아내렸고, 전 세대를 사로잡은 골프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바로 연습한 만큼 실력이 나온다는 점이 아닐까. 골프는 특히 꾸준한 연습 없이는 실력이 늘 수가 없다. 그래서 목표를 갖고 연습하다 보면 일정한 루틴이 생기고, 점점 골프에 진심으로 몰두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둘 이상이 하면 승부를 위한 경기도 할 수 있다.
이처럼 노력에 비례하는 특징 덕분에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더욱 골프를 즐기기 좋은 여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시니어 세대에게도 골프는 취미 생활로 확대되고 있다. 골프를 하던 중년층이 나이를 먹은 것일 수도 있지만, 이제 시작하는 시니어들도 많다고 전해진다.
시니어 골프 대회도 쏠쏠한 인기를 끌고 있다. 독일의 베른하르트 랑거(64)는 시니어 골퍼 최강자로 통한다. 그는 지난 10월 PGA투어 챔피언스에서 만 64세로 역대 최고령 우승을 차지했다. 챔피언스는 만 50세를 넘긴 선수만 출전할 수 있는데, 랑거는 노령의 힘을 보여준 것. 한국에서는 김종덕(60) 선수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또한 전문가들은 시니어들에게는 '파크골프'를 추천한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공원에서 치는 골프로, 푸른 자연을 보면서 부담스러운 장비 없이 쉽게 골프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특히 여럿이서 함께 하기 때문에 무료함을 잊고 즐거움을 배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 그리고 먼저 해 본 시니어들의 말처럼 시니어들은 파크골프부터 골프를 접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앞서 말한 대로 시니어에게 골프가 좋은 이유는 시간적 여유가 있고, 육체적으로 무리가 가지 않아 취미 생활로 즐기기 좋은 스포츠라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100세 시대에 스포츠 취미 생활로 심신의 건강을 찾아보자.
요즘 방송가가 노리는 주요 시청층은 시니어, 즉 중장년층이다. 젊은 세대는 넷플릭스, 유튜브와 같은 OTT 프로그램으로 시선을 돌렸기 때문에 TV 앞에 남은 세대는 시니어가 된 것. 이에 방송가에서는 그들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요즘 방송의 트렌드를 보면, 트렌디하고 재밌기보다는 시니어들이 보기 편한 프로그램들이 많은 편이다.
그 프로들을 보면 공통점이 많다. 먼저 장치적인 부분을 보자면, 자막은 보통 시니어들이 알아보기 편하게 크고 강한 편이다. 소리를 잘 못 들었을 경우의 시청자를 위해 이해를 돕는 자막도 찾아보기 쉽다. 사회자도 톤이 높고 큰 목소리로 알아듣기 쉽게 얘기한다. 다인원의 패널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들의 큰 리액션은 시청자도 함께 반응하게 하고,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제작진의 노력에 시니어들은 응답했다. 물론 앞서 말한 장치적인 부분은 부가적인 것이고, 콘텐츠가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어떤 콘텐츠의 프로그램이 시니어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공통점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 오디션 프로의 식지않는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에 젊은 세대가 열광한다는 것은 이제 옛말이다. TV조선의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이후 판도가 바뀌었다. '미스-미스트롯' 이전에 트로트는 기성 세대의 전유물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등장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젊은 세대가 간드러지게 트로트를 부르자, 시니어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푹 빠져버렸다.
특히 오디션 프로그램이 주는 긴장감과 함께, 덧붙여지는 참가자들의 사연이 시니어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다. 심지어 어느 순간 마음에 드는 참가자를 아들, 혹은 딸을 보는 마음으로 응원하게 되고, 팬덤까지 형성하게 된다.
최근 '미스-미스트롯' 제작진은 새로운 오디션 프로그램 '국민가수'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트로트가수가 아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K-POP스타, 국민가수를 뽑는다. 1회 16.1%, 2회 15.4%(닐슨코리아 유료방송가구 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미스-미스터트롯' 시청자들이 '국민가수'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트로트'에서 'K-POP'으로 주제가 바뀌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구성이 이전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앞서 말한 자막, 진행자, 패널 등 장치적인 부분 역시 비슷하다. 아무 정보 없이 '국민가수'를 본 시청자는 '새로운 트로트 오디션인가?'라고 착각하고 볼 수 있을 정도다.
'미스-미스터트롯'과 달리 이번에는 다양한, 시니어들에게 어려울 수도 있는 노래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미 여러 번의 오디션을 거치면서 시니어들도 실력자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길러졌기 때문에 무리가 없다. 중장년층은 프로그램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편이다. 오디션이 특히 그러한데, 한 번 빠지면 끝까지 보고 진심으로 출연자를 응원하게 되는 것. 때문에 '국민가수'가 더욱 대박나려면, 송가인, 임영웅과 같이 시니어들을 확 사로잡을 출연자가 필요해 보인다.
# 전원생활도 예능으로
나이가 들수록 전원 생활에 대한 욕망이 강해진다. 과거에는 드라마 '전원일기'가 있었다면, 현재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니어들은 대리 만족하고 있다. 전원 생활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힐링하게 되는 것. 특히 이러한 프로들은 잠깐만, 어쩌다 봐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MBN의 '나는 자연인이다'이다. 2012년부터 방송된 스테디 인기 프로그램으로 중년 남성들에게 특히 인기 있다. 현재도 평균 시청률 4%대가 나오고 있다. 여성 중년들은 KBS2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 마음을 뺏겼다. 현재 세 번째 시즌이 방영 중이고, 수요일 저녁 방송인데도 5~6%대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는 화려했던 전성기를 지나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 중인 혼자 사는 중년 여자 스타들의 동거 생활을 담은 프로그램이다. 전원생활과 함께 같이 밥 해 먹고 수다 떠는 것이 거의 전부이지만, 오고 가는 아줌마 입담이 웃음을 자아낸다. 리얼하고 현실적이어서 공감하면서 보기 좋다.
# 스포츠 예능의 감동
스포츠 예능도 시니어들이 사랑하는 TV 프로그램이다. 시니어들이 올림픽 경기에 열중해서 보는 것과 유사한 심리다. 스포츠 예능의 인기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잘 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시니어들은 출연자들을 자신의 자녀를 보는 듯이 보고 응원하게 되는 것. 또한 '왕년에는 나도 저랬는데'라는 생각으로 이입해서 예능을 보기도 한다.
시니어들에게 인기를 끈 대표적인 스포츠 예능으로 JTBC '뭉쳐야 찬다'를 꼽을 수 있다. 현재 시즌2가 방영 중이며, 6~8%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화려한 스타 캐스팅은 물론, 웃음과 감동이 이 프로그램을 보는 재미다. 지난 6월부터 방송되고 있는 SBS '골 때리는 그녀들' 또한 시니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본업이 축구선수인 것처럼 연습하고 임하는 출연진을 보면 눈물이 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시니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재밌거나 공감이 되어서 몰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웃음보다는 감동과 서사가 있는 것을 선호한다고 보여진다. 시니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다음 프로그램은 무엇이 될지 궁금하다.
손효정 기자 shjlife@etoday.co.kr
시니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이벤트는 단연 올림픽이다. 올림픽은 1896년부터 열린 전 세계 최대 규모의 종합 스포츠 축제다. 올림픽 여러 종목의 선수 중에는 올림픽 하나만을 위해 4년 동안 준비해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있다. 그만큼 깊은 역사와 이야기를 자랑하는 지구촌 대형 이벤트다.
하지만 최근에는 월드컵과 급격히 커진 e스포츠에 밀려 스포츠 이벤트로서 중요도가 점점 떨어지는 추세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겹쳐 개최 자체가 불투명했던 시기도 보냈다.
올림픽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을 경험한 시니어들에게 올림픽은 최고의 스포츠 제전이기도 하다. 이에 시니어들은 이번 도쿄 올림픽에 남다른 기대를 갖고 있을 것이다. 브라보는 올림픽을 즐길 시니어들을 위해 이번 올림픽이 기존 올림픽과 어떻게 다른지, 한국 대표팀 관전 포인트에 무엇이 있는지 정리했다.
도쿄 올림픽, 무엇이 다른가?
2020 도쿄 올림픽은 2021년 7월 23일부터 8월 8일까지 진행된다. 지난해 여름에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여름으로 연기됐다. 대회 명칭은 그대로 사용한다.
사상 첫 무관중 올림픽이다. 당초 일본인과 일본 거주자에 한해 관중을 받으려고 했지만 일본 내 코로나19 확산이 심각해지면서 논란이 커졌다. 결국 IOC와 합의해 일본인 관중도 입장하지 않는 걸로 결정했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 올림픽이 열린 이래 125년 역사상 최초다. 다만 상대적으로 코로나19 확산이 덜한 미야기현과 시즈오카현, 이바라키현 경기장에는 일부 관중 입장을 허용한다.
러시아 대표팀은 올림픽 참가가 금지됐다. 러시아 체육계 선수들이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국가적으로 도핑테스트 샘플을 은폐하는 등 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포츠중재재판소가 2020년 12월 러시아의 도핑 샘플 조작을 인정했고, 러시아는 2년 동안 국가 자격으로 국제스포츠대회 참가가 제한됐다.
하지만 러시아 국적 선수가 올림픽에는 참여한다. 파견된 335명 선수들은 ‘러시아’라는 국가명 대신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라는 이름을 달고 뛴다. 메달을 따도 시상대에는 국기 대신 오륜기가 올라온다. 국가는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으로 대체한다.
경기 종목에도 변화가 많다. 레슬링과 야구가 다시 정식 종목이 됐다. 여성 선수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양궁과 수영, 탁구 등에서 혼성 종목이 대거 늘어났다. 사격에서는 진종오 선수의 주 종목인 50m 권총을 비롯한 3개 남자 종목이 폐지되고, 3개 혼성 종목이 신설됐다.
농구는 세부종목으로 남자 3대3 농구, 여자 3대3 농구가 추가됐다. 사이클은 남녀 BMX 프리스타일, 트랙 남녀 매디슨 종목이 추가됐다. 펜싱은 세부종목인 플뢰레, 사브르, 에페 중 남녀 단체전이 1개씩 번갈아가며 제외돼 총 10개 종목만 배정되던 관행이 있었다. 이번에는 관행이 깨지면서 12개 종목 모두 올림픽 세부종목으로 확정됐다.
야구 종목 부활, 한국야구도 부활할까
2008년 베이징에서 한국 야구 대표팀은 영광의 시간을 보냈다. 류현진, 김광현, 이대호, 이승엽 등 황금세대가 김경문 감독 지도로 9전 전승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야구 종목은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빠졌다. 2020 도쿄 올림픽에 한해 일본의 국기인 야구가 정식 종목에 포함됐다. 이런 이유로 한국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디펜딩 챔피언이다. 야구선수들은 다시 올림픽 무대를 밟을 좋은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국내 야구 상황은 좋지 않다. 10번째 구단까지 출범해 양적 성장은 이뤘지만 코로나 19여파와 e스포츠에 익숙한 젊은 팬의 선호가 떨어지며 야구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대표팀에 뽑혔던 일부 선수가 방역수칙을 위반해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리그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둬, 돌아선 야구팬들의 마음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다.
2024 파리 올림픽부터는 야구가 올림픽 종목에서 빠진다. 이번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야구선수들이 다시 올림픽 무대를 밟을 수 없을지 모른다. 베이징 황금 세대의 일원이었던 강민호, 오승환 등 베테랑들에 이정후, 강백호, 원태인 같은 새로운 세대가 수혈됐다. 영광의 세대와 영광의 순간을 보고 자란 세대가 다시 한번 김경문 감독과 함께 베이징의 감동을 재현할지가 주목된다.
사격의 전설 진종오, 새로운 도전
대한민국 사격의 전설 진종오는 한국뿐 아니라 올림픽을 통틀어 사격 역사에서 최고 선수다. 올림픽 개인 사격에서 금메달 4개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선수다. 이런 진종오가 이번 올림픽에서 큰 변화를 맞았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지난 2014년 IOC가 발표했던 ‘어젠다 2020’에 따라 남자 종목과 여자 종목의 메달 숫자를 맞췄다. 원래 사격은 남자 종목 9개, 여자 종목 6개였다. 하지만 어젠다 2020이 내건 ‘여성 참가 비율을 50%’ 방침에 따라 진종오의 주 종목인 50m 권총을 폐지됐다. 또 다른 남자 종목인 50m 소총 복사, 더블트랩까지 총 3개 남자 종목이 폐지됐다. 대신 10m 공기권총, 10m 공기소총, 트랩에서 3개의 혼성 종목이 신설됐다.
진종오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부터 13년 동안 50m 권총에서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 많은 선수가 그와 실력을 겨루었지만 2012 런던 올림픽에서도, 2016 리우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은 진종오의 몫이었다. 올림픽 3연속 금메달이라는 업적을 세우는 동안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주 종목이 아닌 10m 공기 권총 종목에서도 금메달을 추가했다.
4개의 금메달과 2개의 은메달. 진종오는 총 6개의 올림픽 메달을 따 ‘신궁’ 김수녕과 함께 한국 올림픽 역사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발자취 자체가 곧 역사인 진종오가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사격 역사에 또 다른 기록이 세워진다. 사격의 전설 진종오의 10m 공기권총 남자 개인전은 7월 24일, 10m 공기권총 혼성 단체전은 27일에 열린다.
한편 올림픽 중계는 KBS, MBC, SBS 채널에서 볼 수 있다. 3사 모두 개폐회식과 일부 종목을 4K UHD로 생중계한다고 밝혔다. 특히 KBS는 특설 홈페이지를 통해 TV로 중계되지 않는 종목도 생중계한다. 네이버와 웨이브, 아프리카TV와 LG 유플러스 모바일 TV를 통해 온라인으로도 올림픽 중계를 볼 수 있다.
은퇴 후 가장 먼저 생각해보는 직업 중 공인중개사를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재테크의 대명사인 부동산에 관한 관심은 시니어의 일상 속 일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정부 규제의 변수로 예측도 전망도 어려워져 믿을 만한 부동산 정보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맨손으로 시작해 부동산 업계에서 탄탄한 입지를 다진 전문가이자 여러 부동산 TV 프로그램을 만들고 직접 출연까지 하며 부동산 업계 트렌드를 꿰뚫고 있는 장용석 ㈜장대장 부동산그룹 대표. 그를 만나 현시점 우리나라의 진짜 부동산 이야기를 들어봤다.
장용석 ㈜장대장 부동산그룹 대표는 부동산 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빈손으로 출발해 10여 년 만에 이름만 대면 아는 부동산 전문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가 부동산에 관심이 많았다기보다는 부동산 시장에 큰돈이 흐른다기에 혹시나 하고 시작했어요. 2004년 무렵이었어요. 저희 집 형편이 안 좋은 상황이어서 고시원에서 지내던 시절이었죠. 부동산 일을 한번 제대로 해보자 하고 뛰어들었어요.”
2007년, 장 대표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국내 경제도 좋았고, 지방에서 경제자유구역, 혁신도시 등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부동산 시장에도 투자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때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다.
“현지 부동산에 가서 제가 관리하는 고객이 꽤 있는 척했죠.(웃음) 한 지역을 가면 매물을 구하기 위해 열 군데 이상의 부동산을 돌았어요. 그렇게 10여 군데 돌아야 겨우 하나 얻을까 말까 했어요.”
땅은 책으로 경험하는 게 아니다
부동산은 발로 뛰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장 대표 또한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있지만 더러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부동산그룹의 대표가 된 데에는 확실한 성공 사례들이 있었다.
“평택 부동산 가격이 엄청 뛰었잖아요. 평당 20만 원, 30만 원 하던 시절에 많이 소개했어요. 지금은 200만 원, 300만 원 하죠. 세종시는 제가 그렇게 투자를 권했는데도 사람들이 안 하더라고요. 평당 몇십만 원 하던 땅값이 지금은 몇백만 원가량 합니다. 부동산 투자자들 중에 싼 매물만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분들에게는 평당 몇십만 원도 부담스러웠겠죠.”
발로 뛰는 타입이다 보니 에피소드도 많았다. 부동산과 얽힌 사람들의 천태만상은 그를 씁쓸하게 만들기도 했다.
“한번은 새만금을 끼고 있는 부안 땅을 산 장모와 사위가 왔어요. 돈은 장모가 내기로 했고요. 예를 들어 그 땅이 901평이라고 가정하면 장모가 451평, 사위가 450평 반반씩 나누기로 한 상황이었죠. 그런데 장모가 더 갖게 된 한 평을 가지고 식사를 하다가 싸움이 난 거예요. 장모가 땅을 사주는데 사위가 한 평 더 가져가려고 어떻게 저러나 싶었죠.”
가짜 정보와 분양가 상한제의 속내
장용석 대표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SBSCNBC ‘시선집중 부동산 길라잡이’에서 큰 인기를 구가하며 화제에 올랐다. 더불어 TV조선 ‘부동산 로드 이사야사’에서도 최고 전문가로서의 진면목을 선보였다. 최근에는 ‘부동산 삼국지’에 복귀해 가수 방미와 함께 부동산 강의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줬다.
이처럼 장 대표는 다양한 TV 프로그램에서 부동산 강사로 명성이 높다. 부동산 전문 방송에서 패널로 참여하고 싶어 직접 찾아가 면접을 보고 방송을 한 게 방송인 경력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부동산 관련 유튜브 채널이 늘어나면서 온갖 정보들이 쏟아지고 있다. 부동산 방송 전문 패널로서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방송에서는 강한 얘기를 못해요. 그런데 유튜브에서는 가능하죠.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얘기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조회 수와 구독자 수가 많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관심을 갖는다는 뜻이지 유튜브에 나오는 정보들이 진짜라는 걸 의미하진 않아요.”
최근 부동산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화제가 된 것은 분양가 상한제다. 장 대표는 현재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 ‘가격이 조금이라도 오를 기미가 보이면 무조건 막겠다는 분위기’라고 분석했다.
“지금까지는 재건축을 앞둔 강남권의 오래된 아파트가 투자 대상 1등이었죠. 1등이 어느 정도 오르고 나면 그다음은 5년에서 10년 이내에 지어진 신규 아파트로 투자자들이 몰렸고요. 그리고 이들 매물이 좀 올랐다 싶으면 강남 외 지역 재건축 아파트 구매로 이어졌죠. 정부에서는 관련된 규제를 계속 해왔는데 정책 효과가 없자 이제 분양가 상한제까지 적용하게 된 거예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내부적으로는 이견이 있는 듯하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예를 들어 관리 처분을 신청했던 단지들이 분양에 들어가야 하는데 분양가 상한제 기준을 입주자 모집 공고 전까지로 하면 다 해당되거든요. 그러자 조합은 헌법소원까지 가겠다는 얘기들을 하고 있어요. 규제가 많아지고 적용기간이 길어지면 또다시 부동산 시장은 왜곡될 겁니다.”
부동산 부자들이 요즘 움직이는 곳
장 대표는 “부동산은 심리다”라는 말을 강조한다. 최근 언론에서, 서울의 경우 양질의 주거에 대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라는 기사를 싣자 가격이 오를 거라고 생각하는 판매자들은 안 팔려고 하고, 구매자들은 급매물을 노리고 있다는 게 요즘 분위기란다. 그래서 당분간은 보합세에서 약간 올라가는 추세를 유지할 것이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강남 부자들이 요즘 부동산 자금을 회수하고 있다는 말은 사실일까? 최근 SNS를 타고 떠도는 소문에 대해 물어봤다.
“사람마다 달라요. 작은 규모로 여러 채 가진 분들이 있는데, 작은 건 강남 지역 외에 있는 거죠. 그런 곳은 사실상 입주 단계에서 값이 많이 내려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파는 분들이 많아졌지요. 강남권에서도 일부 비슷한 현상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듯해요. 우리나라가 곧 망할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이 모두 판매로 돌아섰다면 강남 매물이 많아야 하잖아요? 말만 무성할 뿐이지 실물 거래는 없다는 얘깁니다.”
장대장 대표는 유튜브 채널 ‘장대장TV’ 등 다양한 SNS를 통해 대중들과 소통하고 있다. 2019년 개정 부동산 세법, 부동산 통계 해석, 조정대상지역 내 각종 규제 적용 시기 등 업로드되는 부동산 관련 최신 정보를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다.
전국에 있는 개업공인중개사를 대상으로 부동산 프랜차이즈 전국 지점도 모집 중이다. ㈜장대장 부동산그룹은 높은 대중적 인지도를 바탕으로 컨설팅에 그치지 않고 선진국형 프랜차이즈 지점을 통해 전국의 알짜배기 분양 매물을 고객들에게 투명하게 소개하고 그로 인한 수익은 본사와 지점이 모두 상생하는 방향으로 공유할 계획이다.
그래서 최근 경기 침체, 가짜 부동산 정보, 비관론이 난무하는 가운데에서도 그는 자신이 이끄는 장대장 부동산그룹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바로 지점 확대를 통한 본격적인 종합 부동산그룹으로의 확장이다. 부동산 회사의 기본은 좋은 매물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다. 그가 지점을 늘리려는 이유도 지점이 많아지면 안 팔리는 매물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상품을 만들어도 소비 심리가 죽으면 안 팔리겠지요. 그럴 바에는 싸게 파는 게 낫잖아요. 예를 들어 5억 원짜리를 4억5000만 원에 팔아주고, 대신 2주 안에 해결해주겠다고 하면 건설 사업자도 돈을 벌고 부동산 업체도 이익을 나눌 수 있고, 고객도 좋은 거죠. 사장될지도 모르는 매물을 가져다 모두가 윈윈하게 만드는 게 제 계획이에요.”
새로워져야 할 부동산 투자전략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을 좀 더 투명하게 만들자, 이를 기반으로 부동산 산업을 다양하게 확장하자’는 게 그의 사업 목적이다.
또한 현장과 본사와의 소통을 통해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포부도 갖고 있다.
“저희는 유료로 상담을 하는데 무료로 해달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해가 안 가는 게, 변호사 상담은 당연히 돈을 내는 걸로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부동산 상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부동산 중개소에서 해주는 공짜 상담을 통해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정보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치르지 않으면서 살아왔기에 계속 실수하고 실패했던 게 아닐까?
“미국은 변호사 위에 부동산 전문가가 있어요. 수수료도 굉장히 비싸서 3%나 돼요. 그걸 양쪽에서 받으니 6%죠. 우리나라는 최고가 0.9%예요. 그것도 비싸다고 내리자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자꾸 사기를 당하죠. 적게 받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그는 제대로 된 정보를 얻으려면 그만한 비용을 치러야 하고 그럴 때 신뢰도 생긴다고 말한다. 또 부동산 업계에서 사고를 친 사람은 다시는 업계에서 일하지 못하도록 모종의 인증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에게도, 믿었던 사람에게 속아 무려 10억 원이 넘는 자금을 날려야 했던 아픈 기억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부동산 시장을 더 투명하게 만들고 싶은 그의 사업 목표와 이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부동산 시장 투명하게 만들고파
스포츠를 전공한 그답게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일하는 일면도 볼 수 있었다.
인터뷰 말미에 장 대표는 사업을 안 하고 ‘선수’로만 뛰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고백했다. 사장이라는 자리가 맞지 않다기보다는, 그의 삶의 궤적이 보여주는 바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는 부동산 업계의 부조리함을 개선하고 싶었고, 하던 일을 더 잘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노력해서 어쩌다 보니’ 지금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머리 아픈 일을 너무 겪어서… 이제 좀 편하게 살고도 싶기도 하고, 인생을 즐기고 싶어요. 그렇지만 부동산 연구소를 만들어 최고의 평가도 받고 싶어요. 아무래도 그게 지금 하는 사업과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시장 분석과 통찰력으로 사업을 하면 할수록 고객 사례를 바탕으로 공정하고 적확한 빅데이터가 구축되고 그걸 제 연구에 활용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과 함께 일하는 업계 베테랑들이 한 말을 들려줬다.
“부동산 사업이 경기를 가장 많이 타요. 함께 일하는 이사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너무 욕심 부리지 마라, 욕심 부리지 않고 오래 일해야 무슨 일이 벌어져도 대응할 수 있다.’”
어쩌면 그 말은 음험한 기운이 만연하고 욕심에만 급급한 부동산 분야에 마땅히 필요한 금언 아닐까. 그가 만들 새로운 한국 부동산 비즈니스 모델의 비전이 궁금해졌다.
뭔가 복잡하고 제대로 풀리는 게 없는 듯한 요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지치기 마련이다. 그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놓치고 있는 청춘과 건강을 되찾아주기 위한 특별한 행사가 마련된다. 바로 시니어 공감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브랜드 행사 ‘브라보! 헬스콘서트’다.
올해로 어느새 4회째를 맞이하는 ‘브라보! 헬스콘서트’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사회공헌을 위해 준비한 무료 행사로서 건강 정보를 나누며 콘서트를 즐기는 축제 한마당이다. 이번 행사는 ‘건강과 청춘을 위한 Healthy Senior Life’를 주제로 오는 6월 13일 목요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서 열린다.
1부는 현직 의사에게 의학 정보를 듣는 시간으로 구성했다. 한설희 건국대학교병원 의료원장과 이재동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장, 이병진 콩세알튼튼예방치과의원 원장 등 의료계 명의들을 초빙해 강의를 듣는 시간으로, 시니어의 삶과 직결되는 키워드인 치매, 치아건강 잇몸질환, 장수음식 등 3개의 세션으로 나뉘어 1시간 동안 진행된다. MC는 스포츠 중계로 유명한 김정일 SBS 아나운서가 맡아 특유의 에너지 넘치는 말솜씨를 보여줄 예정이다.
2부에는 8090시대의 추억을 공유하며 열정을 불태우게 할 청춘콘서트가 100분 동안 펼쳐진다.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로 데뷔하고 드라마 ‘아이싱’ 배우로 출연한 당대 미남 가수 조정현, 명곡 ‘이별 아닌 이별’로 가요계를 평정했던 로커 이범학, ‘꿈결 같은 세상’을 부르고 이선희의 명곡들 ‘나 항상 그대를’,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 ‘한바탕 웃음으로’의 작곡가이자 뮤지컬 연출가인 송시현 등 ‘다시 돌아온 8090세대 아이콘’ 가수들이 무대에 오른다. 화려한 레퍼토리에 수많은 라이브 콘서트를 치러온 베테랑들답게 밴드와 함께 20여 곡의 노래를 선보이며 떼창의 진수를 보여줄 예정이다.
‘브라보! 헬스콘서트’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독자들은 물론 50+세대 모두를 환영하는 자리다. 봄이 가고 여름을 맞이하는 이 시기에 새롭게 삶을 충전시킬 수 있는 ‘브라보! 헬스콘서트’로 자신을 위한 선물을 주는 게 어떨까.
이번 행사는 종근당, 아모레퍼시픽 ‘동의본초연구 잇몸치약’, 동국제약, 유한킴벌리, 서울시 50플러스재단이 후원한다.
한국 육상 단거리 최초 아시안게임 금메달, 최초의 아시안게임 2연패, 아시아 육상 최초 유니버시아드대회 메달 수상 등 그의 이름 앞에는 유독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1980년대, 육상 불모지인 한국에서 오롯이 두 다리로 최초의 기록들을 세운 장재근(張在槿·58) 서울시청 육상 감독을 만났다.
무관심 속 탄생한 한국 스프린터
장재근은 스스로 자신을 ‘육상계의 깜짝 스타’라고 표현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배구로 운동을 시작했지만, 배구부가 없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이게 된 종목이 육상이었다. 그때의 선택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줄 누가 알았을까.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그 당시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잘하는 선수가 한 명 가면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 한 명이 같이 가는, 일종의 ‘원 플러스 원’ 같은 관행이 있었어요. 그렇게 껴서 간 선수가 저였죠. 제 딴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못해서 맞기도 많이 맞았죠.”
3000m 장거리도, 허들도 해봤지만 성적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카드로 뽑아 든 게 단거리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출전한 전국체전에서 200m 3위를 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단거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스프린터로 주목을 받게 된 건 1982년부터다. 그해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장재근은 뜻밖의 메달 소식을 전했다. 놀랍게도 한국 최초로 아시안게임 단거리 종목에서 200m 금메달과 100m 은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대회를 며칠 앞두고 메달 유력 후보 이름이 나왔는데 제 이름은 없었어요. 경기를 응원하러 온 사람도 없었고요. 저도 메달을 딸 거라고는 생각 못했죠. 그야말로 ‘우당탕탕’ 하고 보니 제가 메달을 땄더라고요. 한순간에 스타가 됐죠.”
‘최초’라는 단어가 가진 힘은 대단했다. 그의 말처럼 하루아침에 명예와 부, 인기를 모두 얻은 한국 육상계의 깜짝 스타가 됐다. 당시 뛰어난 스포츠 선수만 후원하기로 유명한 스포츠용품 브랜드 ‘나이키’가 그를 선택한 일화는 그가 얼마나 영향력 있는 선수였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다.
“나이키 멤버라는 사실만으로도 자부심이 컸죠. 용품 지원은 물론이고 엄청난 대우를 받았거든요. 해외 투어를 가면 공항에서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더 큰 대회에 나가면 나이키 멤버만 사용할 수 있는 호텔을 따로 마련해주기도 했죠. 그리고 대회에 나가면 은근히 나이키는 나이키 멤버끼리, 아디다스는 아디다스 멤버끼리 모이는 분위기가 있었어요.(웃음)”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이후에도 그의 기록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선 아시아 선수 최초로 3위를 기록했고, 1985년 자카르타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선 200m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이뿐만 아니라 이듬해 열린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한국 육상 단거리 최초로 아시안게임 2연패에 성공했다.
인생의 큰 깨달음을 얻은 순간
그러나 순탄할 것만 같았던 그의 육상 인생에도 암흑의 시기가 찾아왔다.
“아시안게임 3연패를 목표로 하고 나간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예선전을 뛰는데 직감이 오더라고요. ‘아, 안 되겠구나’ 하고요. 결국 결승에서 7위를 하고 그날 저녁 감독님과 상의도 없이 바로 은퇴선언을 했어요. 주위에서 말렸지만 제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정말 건방졌어요. 은퇴 후 한전에 입사하고 나니 현실이 보이더군요.”
평생을 트랙에서 보낸 사람에게 회사는 감옥이었다. 큰 고민에 빠져 있던 그에게 때마침 SBS에서 에어로빅 강사 요청 섭외가 들어왔다.
“제 한 달 월급이 50만 원이었는데 출연하면 하루에 10만 원을 준다는 거예요. 그때 든 생각이 ‘그럼 1년만 하고 돈을 모아 유학을 가자. 그리고 골프를 배워서 다시 복귀하자’는 거였어요. 근데 견물생심이라고, 돈이 들어오니까 그만두질 못하겠더라고요. 저 때문에 에어로빅센터는 정말 많이 생겼어요. 그만큼 전 욕을 먹었고요.(웃음) 돈에 미쳐서 옷 홀딱 벗고 저 짓 한다고요.”
유학에 대한 목표 하나로 욕쯤이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순 있었지만 이마저도 어느 순간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순전히 돈 때문에 시작한 에어로빅은 더 이상 하기 싫었고, 체육계로 돌아가자니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문득 겁이 났어요. 그때 쇼핑호스트 제의가 들어왔죠. 홈쇼핑 방송에서 러닝머신 한 번 뛰니까 또 잘 팔리더라고요. 졸지에 이번엔 물건 파는 놈이 됐죠.”
육상 선수에서 에어로빅 강사로, 그리고 홈쇼핑 판매자로, 웬만한 사람들은 도전할 수 없는 분야에서 손만 대면 대박을 터뜨렸다. 그를 만능 재주꾼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단했던’ 육상 선수 장재근을 ‘돈에 환장한’ 장재근으로 바꿔 불렀다. 결국 그는 홈쇼핑에서 발을 뗐다. 그 후 한국 육상 국가대표 코치로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또 한 번의 고비를 맞는다. IMF가 터지면서 모든 재산을 잃고 빚더미에 앉게 된 것이다.
“토요일 오전까지는 선수촌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오후엔 방송국에 가서 홈쇼핑 촬영을 했어요. 밤엔 방송국 지하주차장에서 잠을 자고 그다음 날 새벽에 또 촬영을 했고요. 그렇게 하루도 안 쉬고 2년을 일하면서 빚을 다 갚았어요. 어른들이 그러잖아요, 돈은 쫓아다니면 도망간다고요. 근데 어린 시절의 저는 너무 돈만 바라봤던 것 같아요. 모든 걸 다 내려놓으니까 깨닫게 되더라고요.”
33년 만에 깨진 한국 신기록
2018년, 장재근이 1985년 자카르타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서 기록한 200m 20초41 한국 신기록이 0.01초 차이로 무려 33년 만에 깨졌다. 서운할 법도 할 텐데 그는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반응이다.
“몇 년 못 가서 깨졌으면 섭섭했을 텐데 30년 넘게 가지고 있었으면 오래 해먹은 거죠.(웃음) 사실 그날 밤은 잠을 좀 설쳤는데 하루 지나니까 괜찮아지더라고요.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이왕 깨진 기록, 차이라도 크게 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점이죠.”
30년 넘게 기록 방어자로 살아온 장재근. 그는 요즘 도전자로서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며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0.01초를 당기기 위해서 33년이란 시간이 걸렸잖아요. 이 기록이 또 오랫동안 정체될까봐 그게 걱정돼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도 20초 초반까지는 계속 선수들끼리 경쟁하고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내면 좋겠어요. 물론 제가 지도한 선수가 기록을 깨면 더 바랄게 없겠지요.(웃음)”
그는 마지막으로 초등학교 육상 코치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큰 성적을 바랄 수 있는 나이가 아니잖아요. 기본기부터 제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전수해주면서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점심 먹고, 퇴근하는 길에 헬스장에 가서 운동 좀 하고. 그러면 제 노년 생활이 참 행복하겠단 생각이 들어요.”
“앵커, 명예 졸업합니다. 고맙습니다.”
8년 전 마지막 뉴스를 전하던 날, 유영미(柳英美·57) 아나운서의 마무리 멘트에는 후련함, 시원함 그리고 섭섭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 나이 오십. 여성 앵커로서 최장기, 최고령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시절에 뉴스 인생을 마감했다. 강단 있는 목소리로 SBS 여성 앵커의 표본이던 유영미 아나운서. 한동안 안 보이나 싶더니 작년 말 ‘2018 아나운서 대상’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냈다. TV 시청자 눈을 떠나 라디오 청취자들과 만나고 있었단다. 그것도 빨간 오픈카(?) 타고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외치면서 말이다.
시니어와 소통한 보람을 인정받다
“놀랐어요. 내가 벌써 공로상을 받을 나이가 됐나 하고요. 저희 프로그램은 시니어에게 도움이 되고자 1991년 SBS가 창사하면서 시작한 최장수 프로그램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벽 청취자들을 위한 방송이었죠. 다른 선배님께서 3년 정도 하시다 제가 바통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했는데 이런 큰 상도 받네요.”
작년 말, 2018 아나운서 대상 시상식에서 유영미 SBS 아나운서의 이름이 불렸다. 시니어 세대를 위한 SBS 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25년간 진행해온 공로였다. 오랜 시간 프로그램을 이끌어온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유영미 아나운서는 DJ는 물론 2010년부터 PD도 겸하고 있기에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2015년에는 한국방송대상에서 사회공익 라디오 부문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SBS 간판 아나운서로 뉴스를 비롯해 다양한 교양 프로그램을 진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던 30대 초반에 만난 ‘마음은 언제나 청춘’. “유영미 선배의 목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라디오와 잘 어울린다”는 담당 PD의 사탕발림(?)에 못 이기는 척 승낙한 방송이 인생 역작이 됐다.
“처음에는 부모님이나 선배 세대를 생각하면서 방송했어요. 청취자와 서서히 녹아들고 세월이 지나고 보니 저도 어느새 시니어 대열에 합류했네요. 그동안 잘 걸어왔어요.”
매일 새벽 5시. 그 누구도 듣지 않을 것 같지만 유영미 아나운서는 멀리서 묵묵히 라디오를 켜는 시니어의 관심과 사랑을 깊이 감지한다. 진행을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2000년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 대학원에서 노인학을 공부했다. 2010년에는 시니어 프로그램 DJ 경험담을 엮어 ‘두 번째 청춘’도 발간했다. SBS로 채널을 돌리면 ‘또 유영미’ 소리가 나오던 때에 말이다.
금기를 깨고 얻은 타이틀 ‘최초’
유영미 아나운서는 시청자로서 봐왔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파스텔 톤 정장에 정돈된 머리 스타일의 그녀가 밝은 갈색 머리에 꽃무늬 로브룩으로 나타났다. 예능의 끼가 느껴진다 말하니 투정 섞인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재미난 것을 왜 안 했는지 몰라. 늙기 전에 진작할걸. 옛날에는 뉴스 앵커 이미지 때문에 예능을 할 수 없었어요. 이제는 좀 자유롭게 저를 표출하고 싶어요.”
1986년 울산MBC에서 방송생활을 시작해 SBS 공채 1기로 들어와 현재까지 활동하는 최고령 여성 아나운서. ‘여성 아나운서로서 최초’ 타이틀은 왜 이리도 많은지, 33년 여성 방송인으로서의 삶은 마치 ‘가시밭길 몸소 닦아 새길 만드신 신여성 일대기’와도 같았다.
“여성 아나운서는 일을 오래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어요. 저는 살짝 그런 시절을 비껴갔는데 결혼한 여자가 회사에 있기 힘든 시절이었죠. 그런데 저는 결혼과 함께 SBS에 입사했습니다.”
결혼을 앞둔 와중에 SBS 공채 1기 채용 공고가 났다. 결혼을 미룰 수도, 응시를 안 할 수도 없었다. 채용 공고가 언제 또 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당시 저희 팀장님이 ‘SBS를 오래도록 빛내고 기여할 아나운서인데 결혼이 뭐가 그리 문제냐’며 윗선의 날선 시선을 잠재워주셨어요. 덕분에 결혼과 신혼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동기들보다 두 주 늦게 출근했습니다. 임신 9개월까지 뉴스 앵커석에도 앉아 있었고요. 두 달 출산휴가 마치고 앵커석으로 돌아온 여자 아나운서는 제가 최초였어요.”
여자 아나운서가 출산을 하고 다시 뉴스를 맡은 전례가 당시에는 없었다. 내가 잘해야 후배들이 이 길을 따라올 거라 믿었다.
“임신했을 때 뉴스 하지 말라고 했으면 여성운동했을 거예요. 빡빡한 세상이었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선배들이 있었어요. ‘능력 있고 일 잘하는데 결혼하고 애기 낳는 게 무슨 상관이냐, 뉴스 앵커가 뉴스만 잘하면 되지’ 하면서 응원해줬어요. 선배의 역할은 좋은 선례를 남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공채 1기이다 보니 여자 아나운서 선배가 없어요. 그래서 뭘 해도 늘 최초가 된 거죠. 요즘 세대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들을 그때는 싸워서 얻어야 했어요.”
건물 내 흡연이 만연하던 1990년대 말에는 뜻있는 여성 사우들과 함께 ‘꽃을 든 금연 운동’도 전개했다. 사무실에서 금연하는 사람에게 꽃을 주고 박수도 쳐주는 운동이었다. 요즘 건물 밖에서 담배 피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시절 생각이 절로 난다고 말했다.
피겨 중계, 웃고 울다 남은 생채기
유영미 아나운서를 만나니 스포츠 중계 관련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그녀 이름은 뉴스 앵커와 교양 프로그램 진행자, 라디오 PD 겸 DJ로 회자되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스포츠 중계를 한 여성 아나운서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개·폐막식과 피겨스케이팅,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을 중계했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이 열리기 전, 김연아 선수와 일본의 아사다 마오 선수가 세계 주니어 무대에서 주목받으면서 피겨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일던 때였다. 피겨스케이팅 중계를 준비하지 않은 타 방송사에 SBS 유영미 아나운서의 중계가 송출됐다. 이후 SBS는 국제빙상연맹(ISU) 독점 중계권에 이어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중계도 독점하면서 동계스포츠 중계에 모든 것을 걸었다. 유영미 아나운서 또한 2000년부터 피겨 중계를 준비하고 있었으니 이변이 없는 한 김연아 선수의 ‘007 본드걸’ 중계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가혹하게도 이변은 일어났고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중계석 마이크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녀는 방송 인생에서 가장 아픈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녹화 중계였는데 제가 ‘한 선수가 성장하기 위해서 많은 지도자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하던 중에 김연아 선수를 위해했던 코치가 지나갔답니다. 그 사람을 지칭해 한 말도 아니었는데 난리가 난 거예요. SBS 스포츠 인터넷 사이트가 마비될 정도로 공포 그 자체였어요.”
중계를 녹화할 당시 수많은 스태프가 함께 있었지만 원망의 대상은 유영미 아나운서의 몫이었다.
“제가 마이크를 던졌어요. 조직을 위한 결단이었죠. 그저 침묵이 약이었습니다.”
한참 후 담당 팀장이 스포츠 중계를 권했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스스로를 위로할 시간이 필요했다.
“제가 매화랑 동백꽃을 좋아하는데 꽃이 질 때 뚝 하고 떨어져 내려요. 그땐 나 스스로를 부러뜨려야 했어요. 그저 회사만 생각했습니다. 고통스러웠어요. 안티팬 글을 보고 나면 방송 절대 못해요. 그래도 동계올림픽 최초 여성 캐스터라는 타이틀은 되게 좋았어요. 그런 일들이 있었네요. 아나운서 33년 동안 일이 많았네.(웃음)”
힘들 때 달려와 안긴 곳은 라디오
그러고 나서 힘든 마음을 내려놓은 곳이 시니어 청취자를 만날 수 있는 라디오 부스 안이었다. 스포츠 중계석에서 떨어진 동백꽃은 라디오로 되돌아와 다시 예쁘게 자라났다. 마음속 얘기도 꺼낼 수 있고 제작까지 하니 한결 자유로웠다.
“힐링도 하고 자존감도 높아졌어요. 청취자들이랑 늙는 얘기 진짜 많이 해요. 오십견 온 얘기도 하고,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한쪽 손으로 방송한 얘기도 하고요. 남들은 25년 한결같이 어떻게 했냐고 하지만 저는 매일매일이 새로웠어요. 제 방송을 듣는 분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면 좋겠어요. 행복하게 사는 방법도 공유하고요.”
앞으로의 꿈이 뭐냐고 물었다. 대답 참 간단했다. SBS 최초로 정년퇴임하는 여성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초라한 성적표일지는 모르겠지만 위대한 여정의 마침표를 찍고 싶단다.
“유영미였습니다. 사랑합니다.”
또 다른 내일을 기약하는 그녀의 마무리 멘트다. 맞다! 방송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어렸을 적 TV에서 본 사람이 맞나 싶다. 기억 속 그는 리듬을 타는 정도의 율동과 함께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노래를 불렀다. 옆집 오빠면 딱 좋을 것 같았던 그가 오십이 넘어 대중 앞에 다시 나타났다. 중후한 매력을 내심 기대했지만 흥폭발은 기본이고 재치 넘치는 입담을 막기가 어려울 정도다. 1980년대 중반 ‘볼리비아發 염소 창법’으로 아이돌 인기를 구가했던 가수 임병수(林炳秀·57)를 만났다. 보다 더한 실제 상황 정글생활 달인 이야기도 있으니 기대하시라!
시대를 대표하던 아이콘, 다시 돌아오다
1980년대 중반 ‘아이스크림 사랑’, ‘사랑이란 말은 너무너무 흔해’ 등으로 소녀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가수 임병수. 그는 요즘 말로 강제 소환됐다는 표현으로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잊혔던 그의 노래가 톱스타의 입을 타고 방송 전파를 탄 것. 제2의 전성기로 갈 기회가 찾아왔다.
“참 그게 운명인 것 같아요. (SBS)에서 배우 김수현씨가 제 노래 ‘약속’을 불렀어요. 그리고 (tvN)에서는 덕선이(혜리 분)와 동룡이(이동휘 분)가 ‘아이스크림 사랑’을 불렀어요. 이게 뭐지? 제 노래와 이름이 다시 나오니까요. 그때쯤 제 새 노래가 나오면 괜찮겠다고 생각은 했죠.”
밝은 웃음으로 마주한 임병수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임병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신선하고 특별했다. 타고난 음색에 볼리비아 교포 출신이라는 이국적 색채를 덧입히니 궁금증을 넘어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말 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임병수가 딱 아이돌 스타였다.
“확 뜰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했죠. 가수 될 거라는 생각도, 되고 싶지도 않았어요. 깜짝 놀랐어요. 내가 노래를 좋아하고 큰 무대에 한 번 서면 좋겠다. 그렇게 막연한 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왔어요. 무명가수들한테 항상 미안한 이야기지만 저는 얼떨결에 가수가 된 거예요.”
아버지, 막내아들을 가수로 만들다
임병수가 아메리카 대륙을 떠나 고국에서 가수가 된 데에는 아버지의 강력한 추진력이 뒤따랐다.
“우리 아버지의 행복이 제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는 거였어요. 사람들이 ‘막내, 노래 잘하네요’라고 하면 아주 좋아하시고요. 저도 음악을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축제 때 공연했던 뮤지컬 에서 주인공을 맡기도 했었거든요. 아버지는 그냥 제가 TV에 나오고 사람들이 손뼉 쳐주는 것까지만 생각하시고 한국으로 저를 보내신 것 같아요.”
뉴욕에서 대학 생활을 하고 있던 임병수에게 아버지는 LA에 사는 지인이 조만간 한국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과 함께 한국으로 가서 가수가 되라는 것이 아버지의 권유였다. 임병수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날아갔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던가.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들어왔고 임병수는 한 시대를 제대로 풍미한 가수가 됐다. 대단한 의지라기보다는 운명처럼 빨려 들어갔다. 딱 3년, 임병수의 쇼 타임. 조금은 짧았지만 말이다. 화려한 시간도 잠시. 대중 앞에 서는 시간이 줄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빠르게 변했다.
“84년, 85년, 86년에 제일 반짝거렸던 거죠. 그러니까 1집, 2집, 3집. ‘약속’, ‘아이스크림 사랑’, ‘난 어지러워요’로 활동했어요. 바쁘고 스케줄도 너무 많았는데 3년이 애매하게 그냥 지나갔어요.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은 했죠. 연말 시상식을 보다가 문득 ‘내가 저기 있어야 하는데…’ 살짝 그런 생각도 했어요. 괴로웠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어요. 약간의 혼란스러움 정도였어요.”
그래도 스스로 질문을 던지곤 했다. 내가 계속 노래를 해야 하나? 그만둘까?
“내 기타랑 모든 카세트테이프, 레코드판 등등 음악이랑 관계되는 모든 것을 태우고 지나간 거 다 잊어버리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작 태워본 적은 없어요. 상상만 해봤죠(웃음).”
혹 생각처럼 모든 것을 태웠더라면 다시 사 모으기에 바빴을 거라고. 시대의 아이콘으로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인기 스타였지만 마음을 추스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단다.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다 인기가 떨어지면 순간 우울증에 걸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연예인들이 있잖아요.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굉장히 편안하게 상황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물론 몇 년은 이게 뭐지 했지만 죽을 만큼 괴롭지는 않았어요.”
눈에 띄는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꾸준하게 음반을 발표했고 본업인 가수로서의 삶과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사이 결혼도 했고, 장성한 딸이 있으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양한 일을 접하며 살았다고. 지난 7월에는 ‘이름’이라는 신곡을 발표해 활발하게 팬들과 만나고 있다.
“10년 만에 신곡을 냈어요. 나름대로 많이 뛰어다니고 있어요. 트로트의 색깔이 있는 노래예요. 그런데 정통 트로트는 제가 아무리 불러도 그 맛이 안 나요. 트로트 같기는 한데 ‘어, 임병수가 부르니까 그냥 발라든데?’ 그런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요.”
나이와 인기를 좇아서 색깔을 바꾼 것 아니냐는 말들이 들리지만, 임병수의 생각은 다르다.
“10명보다는 100명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도 괜찮은 거 같아요. 진짜 나만의 색깔로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부를 기회가 생기는 거잖아요. 신곡도 부르고 제 히트곡도 부르려고요. 그리고 저는 또 라틴 음악으로 메들리도 준비해놓았습니다. 아무래도 그쪽 노래는 제가 부르는 게 훨씬 나을 거니까요(웃음).”
불모지 볼리비아를 개척하다
문득 이야기하다 보니 하고많은 나라 중에 왜 볼리비아로 이민을 갔는지 궁금해졌다. 외국을 나가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 볼리비아에서 날아온 청년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외국에서 왔다고 하니 부자려니 지레짐작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부모님이 모두 황해도 분들이셨어요. 우리 아버지 생각에 대한민국은 좁으니까 좀 넓은 나라로 가자,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에 이민 신청을 했는데 볼리비아에서 먼저 연락이 왔대요. 그때는 볼리비아가 한국보다 더 잘살았어요. 제가 다섯 살이던 1965년도에 볼리비아로 떠났습니다. 부모님과 7남 3녀, 12명의 가족이 모두요.”
한국에서 떠날 때만 해도 부모님이 목욕탕과 생선 냉동 창고를 운영해 집안은 넉넉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북 출신으로 전쟁을 겪은 부모님이 전쟁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은 생각을 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떠난 임병수의 집안은 한국에서 볼리비아로 간 첫 이민 가족. 우리 교포들 사이에서는 조상으로 불린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볼리비아로 이민을 가면 임병수의 집으로 인사를 하러 가기도 한다.
“전쟁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모험을 좋아하셨어요. 말 한마디도 못하는 상태로 볼리비아에 가셨는데 그때 아버지가 쉰다섯이셨어요. 당시 500달러 정도를 가지고 가셨답니다.”
이민 떠난 그곳은 말 그대로 정글이었다
아버지를 따라간 볼리비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정글만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 가족은 산속으로 들어가 제재소를 했어요. 카라나비라는 지역이었어요. 한 5~6년은 산에서 살았어요. 화장실도 없고, 신발도 없었어요. 집도 그냥 원두막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벽도 없었고요. 뱀도 지나가고 개미도 지나가고 각종 생명체가 주변을 지나다녔어요. 내가 다섯 살 때부터 살았는데 열 살 무렵까지 있었어요.”
맨발로 다니는 게 익숙했던 어린 시절.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어린 임병수에게 선물로 신발을 안겼지만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잘사는 교포 출신일 줄만 알았는데 타잔의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다.
“타잔한테 신발 한 번 줘봐요.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신발을 신고 나가도 학교에서는 벗고 돌아다니다가 집에 들어올 때쯤 다시 신고 집으로 들어갔어요. 혼날까봐요. 지금도 불편해요(웃음).”
(SBS)이 우스워 보이지 않냐며 넌지시 물었다.
“웃기죠(웃음). 냇가에 다이너마이트 하나 던져 터뜨려서 물고기는 그냥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됐어요. 새도 잡아서 불에다 구워 먹고요. 에이, 저는 5년 동안 정글에서 살았잖아요. 가끔 이야기할 때마다 사람들이 저를 신기한 듯 바라봐요. 방송은 아무리 힘들어 보여도 주위에 카메라 있고 사람들도 있고 일단 조명도 있잖아요.”
정글 삶에 대한 얘기는 끝이 없었다. 키가 큰 아보카도 나무를 타고 올라가 열매를 따먹던 일, 뱀이 몸 주위를 지나간 사건, 개미 밥으로 개구리를 던져준 일 등 상상할 수 없는 정글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펼쳐졌다. 이야기할 때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지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몸으로 표현하면서 이해를 도왔다.
“하여튼 좋았어요. 아쉬운 게 있다면 그때 너무 어렸다는 거죠. 우리 형들은 재밌었다고 해요. 즐긴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힘들어도 재밌었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요? 사람이 사람 만나는 거요. 밤에 산길 가고 있는데 빨간 불빛이 보여요. 얼마나 무서워요. 담배 피우면서 일(?) 보고 있는 거예요.”
혹시나 에서 섭외가 온다면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가면 본능적으로 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못할 것도 같아요. 그때는 벌레 같은 거 손으로 막 잡고 그랬는데 이제는 무섭거든요(웃음).”
프로레슬링 선수들 의상실을 열다
5년이 흘러 12명의 대가족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로 떠났다. 볼리비아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스포츠는 바로 프로레슬링. 이곳에서 임병수의 가족은 레슬링 선수의 옷을 만드는 의상실을 열었다.
“볼리비아에서는 레슬링 선수들이 니트 옷감으로 된 선수복을 입어요. 우리 누나들이 옷을 잘 만든다는 소문이 나서 선수들이 옷을 맞추러 많이 왔어요.”
정글에서 내려와 도시로 이주했으나 고단한 삶은 계속됐다.
“이런 거 보면 누나들 울겠다. 왜냐면 누나들이 고생 많이 했거든요. 그러다가 의상실이 잘되니까 아버지가 여덟째 형을 독일로 보내서 섬유 기계를 사오라고 하셨어요. 섬유 관련 사업에 필요한 것인데 볼리비아에 처음으로 들어온 기계였어요.”
정글을 벗어났지만, 여전히 화장실은 없었고 방도 작아서 잠을 잘 때면 식구들이 몸을 바짝 붙이고 칼잠을 자야 했다. 누나들은 재단이 끝나면 탁상 위에 요를 깔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가족들이 매달려 열심히 사업을 일궜다. 가업이 생긴 것이다. 임병수의 집에서 만들어진 원단은 인접 국가인 아르헨티나, 칠레로 팔려나갔다.
“볼리비아에서 얼마나 놀랐겠어요. 한국 사람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마침 그러다 볼리비아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국가적인 제압도 있고 탄압받는 느낌? 경제 사정이 안 좋아지니까 외국 사람들을 반기지 않게 됐죠. 지금은 가업은 다 접고 각자 다른 나라에서 다른 일 하고 살아요. 저만 지금 한국에 있고요. 큰형님 세 분은 돌아가셨습니다.”
형님과 누나들은 가끔 보고 싶은 정도다. 이젠 가족이 다 떨어져 살기 때문에 다 같이 모이는 일은 더 기대하지 않는다.
“오래전에 부모님 금혼식 때 10형제들이 모두 모였어요.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사진을 찍는 데 한 시간 걸렸다니까요. 사진을 찍으려 하면 한 명이 화장실 가고, 화장실에서 돌아오면 누가 또 잠깐 넥타이를 고쳐 매고 그래서요.”
어렸을 때 정글에서 살았던 추억 때문일까? 기회가 되면 볼리비아 나무를 수입해 사업을 해보고 싶은데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대신 조카가 추진하고 있는 커피 사업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저는 되게 밝게 보이잖아요. 나쁜 것은 옆으로 밀어놓고 좋은 생각만 하려고 해요. 내가 여기 혼자 있어도 잘 버텨온 힘이에요. 이런저런 고민이 있어도 결국은 늘 음악 생각뿐이에요. 10곡, 15곡 발표할 필요 없잖아요. 한 곡 내고 노래 부르고 다시 또 만들면 되죠. 음악은 계속할 거니까요.”
그의 노래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평생이 나그네 인생이다. 예전에 수줍었던 모습에 힘이 들어가고 더 밝아진 이유는 마음 깊이 숨겨놓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노래를 향한 열정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