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생은 살고 싶으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마음은 소통의 문이요 관계의 문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가면을 쓰고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약점이 있어도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사는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 마음의 문을 여는 자물통은 안으로 잠겨 있어 자기 자신밖에는 열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세상과 소통하려는 사람은 밝게 살아가지만, 감추고 사는 사람은 힘들게 산다. 심지어 사람을 피하고 스스로를 고립시켜 우울증에 빠져 지내다가 세상을 등지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멋지게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볼 때 힘차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팔다리가 없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면 어떻게 했을까? 자신을 비관하고 부모를 원망하며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이 사람도 처음엔 그랬다. 그래서 8세가 되던 해 세상을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삶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세상과 소통하며 자신을 드러냈다. 팔다리가 없어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다 하늘의 뜻이 있다는 말씀을 듣고 새로운 삶을 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닉 부이치치 이야기다. 그의 삶은 좋은 조건에 건강한 몸을 갖고도 힘들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 있다. 장애에도 좌절하지 않고, 골프 수영 등 끊임없는 도전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일본의 오토다케 히로타다도 역시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이다. 그러나 그는 장애는 “신체적 특징의 하나일 뿐”이라며 당당히 자기 삶을 살아간다. ‘오체 불만족’을 쓴 작가로 유명한 그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 정치학과를 다녔다. 책가방을 메고 계단도 혼자 올라간다.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놓음으로써 세상과 멋지게 소통하며 당당하게 살아간다.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인 루즈벨트는 미국의 대공황을 뉴딜정책으로 벗어나게 했고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는 기록을 세웠다. 그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던 소아마비 환자였다. 세계적 천재 과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도 루게릭병으로 2년 시한부 선고를 의사로부터 받았지만 의지로 그 병을 이겨냈고 아인슈타인 이후 가장 존경받는 우주 물리학자로 존경받으며 생을 마감했다.
행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닫힌 마음을 열고 세상과 소통할 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온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마음을 열고 세상과 만나야 한다. 그 문은 아무나 열 수 없다. 내가 열어야 한다.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분주했던 하루 일과를 마치고 늦은 밤 집에 도착했다. 습관적으로 오른손으로 열쇠 뭉치를 찾았다. 오른쪽 상의 주머니에 당연히 있어야 할 열쇠 뭉치가 잡히지 않았다. 그 순간 술이 확 깼다. 주머니 내용물을 다 꺼내고 입고 있는 옷에 달린 주머니까지 다 뒤져봤는데도 열쇠 뭉치가 보이지 않았다. 낭패였다. 열쇠 뭉치에는 열쇠와 함께 교통카드, USB가 달려 있고 지인이 선물해준 헝겊 열쇠 케이스도 있다. 무게도 좀 있는 편이라 주머니에서 빠져 나갈 리는 없었다. 누군가 가져갈 만한 것은 최근 충전한 교통카드에 들어 있는 현금 6만 원 정도. 그 외에는 쓸모가 없다.
나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예비 열쇠를 만들어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닌다. 가방 안쪽 주머니를 뒤져보니 다행히 예비 열쇠가 있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잠을 잘 수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날 밤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아끼던 물건, 자주 사용하던 물건을 분실하면 겪는 현상이다.
아침에 깨서 어젯밤 일을 회상해봤다. 모임을 마치고 맨 처음 간 곳은 빈대떡집이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벗어놓은 두툼한 겨울옷이 처치 곤란이라 둘둘 말아 이리저리 옮긴 기억이 난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둔 열쇠 뭉치가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겨울옷들은 디자인을 중시해 주머니 깊이를 얕게 만들어 그것이 늘 불만이었다. 지퍼로 주머니를 잠글 수도 있지만, 추운 날 손을 넣고 다니기 때문에 지퍼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다. 두 번째 간 집은 커피집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간 곳이 당구장, 네 번째 간 곳이 호프집이었다. 가는 곳마다 두툼한 롱패딩을 대충 접어뒀다. 당구장에서는 손님들이 마구 들이닥치는 바람에 손 씻고 계산하고 돌아오니 이미 옷이 옆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전철을 타고 귀가했다.
다음 날 역순으로 돌아보자며 열쇠를 찾으러 나섰다. 먼저 빈대떡집에 들렀는데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 건지 주말이라 문을 닫은 건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원망스럽게 밖을 돌아봤는데 그 흔한 전화번호 하나 없었다. 커피집, 당구장도 가봤지만, 보관하는 분실물이 없다고 했다. 네 번째로 간 호프집은 술김에 따라간 곳이라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돈을 지불하고 카드로 결제한 덕분에 영수증이 있었다. 영수증에 찍힌 상호와 주소를 확인하고 그 집을 찾을 수 있었지만 역시 보관하는 분실물이 없다고 했다. 오는 길에 충무로 전철역 분실물센터에도 들러봤다 전철 좌석에 열쇠 뭉치가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분실물센터는 주간에만 열고 주말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시내로 나가 저녁까지 일부러 시간을 보냈다. 아직 못 가본 빈대떡집에 가봐야 했기 때문이다. 왠지 그 집에 보관되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집에도 열쇠 뭉치는 없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귀가하는데 동네에서 지인들을 만나 또 한잔했다. 열쇠는 분실하기 쉬우니 도어 록으로 교체하는 것이 좋다는 사람도 있었고 도어 록은 지문이 찍혀 어지간한 전문가라면 바로 열 수 있으니 아날로그 자물쇠가 낫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뒤 사무실을 오랜만에 나갔다. 그런데 책상 아래에 있는 컴퓨터 본체에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열쇠 뭉치가 덩그러니 꽂혀 있었다. 열쇠 뭉치가 없어진 날 USB를 사용하려고 컴퓨터에 꽂았는데 접속이 안 되어 몇 번 시도하다가 그대로 두고 간 것이다. 내 손을 벗어난 물건은 잃어버리기 쉽다. 우산도 그렇고 모자, 장갑도 그렇다. 주머니에 넣어두거나 가방 안에 넣어둬야 한다. 주머니도 바지 주머니가 상의 주머니에 넣어두는 것보다 안전하다. 교통카드를 상의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분실한 적이 있으므로 앞으로 열쇠 뭉치는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로 했다. 그런데 걸을 때마다 이물감이 느껴지고 꺼낼 때도 불편했다. 할 수 없이 다시 오른쪽 상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더니 소 잃고도 외양간을 못 고치는 이유다.
1월 6일부터 20일까지 네팔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왔다. 전남불교환경연대가 주관하고 청소년 13명이 포함된 총 27명 팀에 나도 합류한 것이다. 목표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등정이었다. 8박 9일간의 일정에 네팔 수도 카트만두와 제2의 도시 포카라 관광도 포함되어 있었다.
네팔은 한국과 3시간 15분 시차가 나는 나라다. 남한보다는 약간 크고 인구는 약 3000만 명이다. 세계 10대 최고봉 가운데 8개의 봉우리를 보유한 산악 국가다. 히말라야에서는 해발 7000m가 넘지 않으면 ‘마운틴(mountain)’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다. 심지어 세계 3대 미봉으로 불리는 마차푸차레도 피크(peak)로 불린다.
8박 9일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은 비행기를 타고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이동하고 다시 버스로 2시간 만에 당도한 나야풀에서 시작되었다. 첫날부터 고전이었다. 4시간짜리 코스였는데 돌계단으로 된 오르막을 오르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숙소에 돌아와 땀에 젖은 옷을 말려봤으나 습도가 높아 귀국하는 날까지 마르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7시간을 걸어 고라파니까지 갔다. 계속 오르막 돌계단이 나왔고 소똥, 말똥이 마구 방치되어 있어 냄새가 진동했다. 이날부터 체력 미달로 탈락자가 한 명 나왔다. 끝없이 이어지는 돌계단, 등에 진 짐이 부담스러웠다. 원래 짐을 날라주는 포터를 2인당 한 명씩 고용했는데 포터가 가지고 가는 짐 외에도 개인이 지고 가야 할 짐이 있었는데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날씨 또한 한국의 늦가을 정도의 기온이라 내복을 입은 사람들은 진땀을 빼며 고전했다.
3일 차에는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해 푼힐 전망대에 올랐다. 우리는 이미 3000m 고도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때 가장 걱정하던 고산병 증세가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목적지인 4130m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갈 수 없다고 했다. 샤워도 하지 말고 특히 머리를 따뜻하게 유지하라고 했다. 샤워는 물론 세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털모자를 쓰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물티슈로 눈곱만 겨우 닦아내는 고양이 세수를 했다. 남자들은 아예 면도를 포기했다. 자외선 차단제도 땀이 워낙 많이 나서 소용없었다. 무엇보다 날마다 땀에 젖어도 목욕을 못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4일 차에는 타다파니에서 촘롱을 거쳐 시누와까지 6시간, 5일차에는 도반, 히말라야 롯지, 데우랄리까지 6시간을 걸었다. 길도 가파랐지만 데우랄리는 해발 3150m라서 고산병을 적응하는 구간이었다. 도반부터는 눈길이었다. 아이젠 없이는 걸을 수 없는 겨울 날씨에 진눈깨비까지 내려 길이 사라지기도 했다.
6일 차는 디데이였다. MBC로 불리는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해발 3700m), ABC로 불리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해발 4130m)까지 갔다가 다시 마차푸차레 캠프로 돌아와 숙박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입구에는 트레킹 완주 축하, 환영 간판이 있었다. 그 위쪽으로 故 박영석 대장과 히말라야에서 숨진 산악인들을 추모하는 묘비가 있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가 마치 서울의 인왕산처럼 마음만 먹으면 올라갈 수 있을 것처럼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안나푸르나는 8091m, 마차푸차레는 6993m이다. 전문 암벽 등반 기술이 필요한 구간이다. 고산병 증세가 여러 사람에게서 나타났다. 두통에 심하면 구토 증세까지 보였다. 소화도 안 되어 방귀도 자구 뀌게 된다. 약을 먹는 사람도 있었지만, 가이드 말로는 소용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날은 긴장이 많이 됐다 기대감과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신령한 산으로 쉽게 등정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마차푸차레가 눈앞에 다가와 있고 그 아래 양쪽으로 눈 덮인 산들과 계곡을 보고 있자니 태고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설산의 한기와 찬바람은 이불 안쪽까지 뚫고 들어왔다.
7일 차부터는 하산을 했다. 밤부까지 내려온 뒤 8일 차에는 촘롱에서 갈림길로 지누단다까지, 9일 차에는 나야풀까지 매일 8시간을 걸었다. 8박 9일 동안 우리는 약 23만 보, 100km를 걸었다.
히말라야는 여러 산이 겹쳐 있다. 그래서 산 하나를 넘어가려면 계곡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그다음 산을 올라야 한다. 당연히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반복되었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보면 또다시 급경사로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했다. 그마저 돌계단은 우기에 홍수와 산사태가 자주 없어진단다. 도반까지는 돌계단이 많지만 그 뒤부터는 자연스런 흙길이다. MBC에서 ABC까지는 왕복 4시간 코스. 양옆에 트인 계곡이 있어 분위기가 호젓했다.
68세의 나이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를 완주했다. 이 코스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모두 말렸다. 체력적으로도 무리일 뿐 아니라 특히 고산병이 위험하다고 했다. 그러나 위험한 상황도 없었고 고산병 증세도 겪지 않았다. 평소의 체력만으로도 젊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같이 행동할 수 있었다. 시니어의 버킷리스트에 히말라야 트레킹이 들어 있어도 소망일 뿐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 뿌듯한 마음으로 버킷리스트 항목 하나를 지운다. 탄탄해진 무릎 위 근육과 허벅다리 뒷 근육을 만져본다.
숙박과 숙식
롯지(Lodge)는 우리나라 민박집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숙박 시설이 열악하다. 샤워하기가 어렵다. 더운 물을 쓰려면 200루피(한화 2000원) 정도 내야 하고 방은 난방이 안 된다. 싼 건축 자재로 만들어진 건물이라 문도 틀어져 있어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침낭만으로는 추위를 이길 수 없다. 수단껏 이불을 구해왔고 150 루피 정도에 뜨거운 물을 사서 물통과 핫팩을 안고 자야 했다. 식사 메뉴도 다양하지 못해 전통 음식인 달 바트를 자주 먹었다. 돈을 더 주면 한국 라면과 밥을 먹을 수 있다. 김치찌개 등 한국 음식을 파는 롯지도 있다.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좌식 변기라 불편했다. 휴대폰 충전과 와이파이를 사용할 때도 100~200루피의 돈을 받는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롯지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성수기에는 예약 없이는 숙박도 어렵다. 독방도 있지만 대부분 한 방에서 4~6명이 자야 한다. 보통 6시에 저녁식사를 마치지만 특별히 여가시간을 즐길 거리가 없어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자는 경우가 많다.
복장
1월의 날씨이지만, 카트만두는 낮 기온이 약 20℃나 된다. 그러나 고산에서는 영하 15℃까지 떨어지므로 옷을 다양하게 준비해야 한다. 아침시간에는 손이 곱을 정도로 춥고 트레킹을 하다 보면 땀이 나서 하나씩 벗게 된다. 포터가 짐을 날라주지만, 포터 짐에 더 이상 넣을 공간이 없으면 나머지 짐은 스스로 메고 가야 한다. 기온 편차가 심해 여름옷에서 겨울옷까지 갖춰야 하니 짐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포터는 여러 사람 짐을 합쳐서 지고 가기 때문에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은 가져가면 안 된다.
한국 여자농구 전성기의 중심엔 강현숙, 박찬숙, 조영란, 정미라, 전미애 등의 스타군단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강현숙은 빼어난 미모와 실력으로 수많은 남성 팬을 몰고 다녔다. 1972년 청소년 대표팀으로 첫 태극마크를 단 뒤 1980년 은퇴할 때까지 국가대표로 맹활약한 강현숙(姜賢淑·64)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재정위원장을 만났다.
“돌이켜보면 그때 무슨 생각으로 농구를 하겠다고 손을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그가 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조금 특별하다. 초등학교 5학년, 농구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무턱대고 들어 올린 손 덕분(?)이었다. 내성적이고 심지어 운동도 딱히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고 고백하는 그는 “어쩌면 나의 농구 인생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던 연습벌레
그가 챙겨온 앨범을 열자 그의 선수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마치 한 장면도 잊은 적이 없다는 듯이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이때는~”, “이건~” 이라며 설명을 덧붙인다. 그가 어렸을 때 부모님과 찍은 흑백사진부터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젊은 시절의 사진까지, 마치 그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기분이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다. 바로 ‘박신자 선수와 같이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자’라는 문구가 써진 자료다. 가로도 아닌 세로로 써진 글자는 비장함을 더했다.
“박신자 선수가 제 롤 모델이었어요. 1967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가 2위를 했는데 이례적으로 우승팀이 아닌 준우승팀에서 최우수선수상 수상자가 탄생했죠. 그 주인공이 바로 박신자 선수였어요. 정말 대단해 보였죠.”
1999년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아시아 선수로는 유일하게 헌액된 박신자 선수의 인상 깊은 플레이는 새내기 농구선수였던 강 위원의 열정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매일매일 농구에 ‘올인’하는 생활이었다.
“새벽에 학교에 가면 교문이 닫혀 있었어요. 그러면 철문 사이로 가방을 밀어 넣고 담을 넘어서 체육관에 가곤 했죠. 오후에 본 연습이 끝나면 남아서 또 연습했고요. 드리블 연습, 슛 연습 등 혼자 할 수 있는 연습은 다 했던 것 같아요. 밤늦게 집에 도착해서 밥을 먹다가 잠드는 날도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을 농구에 다 쏟아부었죠.”
누구보다 성실하게 노력한 덕분이었을까. 그는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 주전으로 뛰었다. 비록 첫 데뷔 무대에서 골대 방향을 잘못 알고 역주행하는 바람에 자살골을 넣을 뻔했지만 말이다. 그 후 8년간 국가대표선수 생활을 하면서 세계 베스트5에 두 차례나 선정되고, 1979년과 1980년엔 국가대표팀 주장으로서 팀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2위,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린 만남
그는 가장 특별했던 경험으로 북한팀과의 경기를 꼽았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여자농구가 아시안게임 공식 종목으로 채택된 대회이기도 하지만 중국과 북한이 참가한 첫 아시아 스포츠 무대였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그는 난생처음 북한 선수를 만난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을 떠올리며 “참 할 말이 많은 경기였다“며 운을 뗐다.
“선수촌 셔틀버스를 타면 타국 선수들이 있든지 말든지 북한 노래를 부르다가 마지막엔 ‘조선은 하나다!’ 하고 고함을 쳤어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은 물론이고 경기 전 몸을 풀 땐 우리나라 코트까지 넘어오면서 비매너의 끝을 보여줬죠.(웃음)”
북한 선수들은 경기 내내 거칠게 굴었다. 그는 “실력은 우리나라보다 뒤처졌지만 괜히 겁이 났다”고 털어놨다.
“루즈볼 상태에서 볼을 다투는데 북한 선수가 볼이 아닌 김은주 선수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리친 거예요. 결국 들것에 실려 나갔죠. 싸우자는 건지 경기를 하자는 건지….”
한국팀이 큰 점수로 리드하며 경기를 끌고 가자 북측은 게임 종료 2분여를 남기고 퇴장소동을 벌였다. 심판이 반칙한 북한 선수에게 파울을 선언하자 마치 준비해놓은 대본이라도 있는 양 일제히 항의하더니 한국팀을 향해 “너네 심판한테 돈 멕였구나”라고 소리치며 경기장을 나가버린 것이다. 그날 이후 강 위원이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북한 여자농구팀을 볼 수 없었다고. 그렇게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북한 선수와의 인연은 감동이 아닌 전투적 만남으로 기억되고 있다.
여자농구의 제2전성기를 바라며
“요즘 남자 아이돌 부럽지 않았어요.”
그가 기억하는 1970년대 여자농구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경기가 끝난 뒤 나오면 팬들에게 둘러싸여 꼼짝 못하는 일들이 다반사였고 초등학생, 성인 가릴 것 없이 국민들이 보내온 팬레터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1979년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있었던 날은 1층부터 3층까지 빈자리가 없었어요. 경기하다 슛이 들어가면 그 많은 관중이 동시에 함성을 지르는데… 상상해보세요. 소름이 돋다 못해 희열을 느낄 정도였죠.”
특히 그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박찬숙 선수와의 패스 플레이가 득점으로 이어지면 관중의 뜨거운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는 “박찬숙 선수는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동료”라고 설명했다.
농구 코트를 떠난 지 38년이 지난 지금, 그는 세 딸의 어머니이자 ‘손주 바보’ 할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1일, 그의 농구 스토리를 담은 자서전 ‘나는 국가대표 포인트가드’를 출판했다. 자신에게 돌아올 관심보다는 독자들이 다시 한번 옛날 여자농구를 추억하고 그때의 사랑을 현역 선수들에게도 이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예전엔 스포츠 종목이 다양하지 않기도 했지만, 여자농구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주목을 많이 받았어요. 반면 요즘엔 워낙 많은 종목이 생기면서 인기가 좀 분산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 많던 여자농구팀이 이젠 여섯 팀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아쉬울 뿐이죠.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한국여자농구연맹 재정위원장으로서 한국농구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거예요. 사람들의 관심을 조금씩 얻다 보면 언젠가는 여자농구의 전성기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요?”
국립현대미술관은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과 공동 주최로 ‘마르셀 뒤샹’ 전을 22일부터 새해 4월 7일까지 서울 종로구 MMCA 서울 1, 2 전시실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전 세계에서 뒤샹 작품을 최다 보유한 필라델피아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협업으로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마르셀 뒤샹의 작품 150여 점과 아카이브를 선보인다. 이중 다수가 국내 최초 공개작이다. 뒤샹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샘’ 등 레디메이드(기성품을 예술적 맥락에 배치해 재탄생시킨 작품)도 함께 만날 수 있다.
전시는 뒤샹의 삶 여정에 따른 작품 변화를 총 4부로 나누어 소개한다. 1부에서는 작가가 청소년 시절부터 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파 등 당시 프랑스의 화풍을 공부하며 제작했던 그림과 드로잉을 선보인다. 특히 뉴욕 아모리 쇼에 전시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1912년 작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가 포함된다.
2부에서는 뒤샹의 대표작 ‘큰 유리’ 제작에 영향을 준 ‘초콜릿 분쇄기’ 등 관련 작업과 ‘자전거 바퀴’, ‘샘’ 등 레디메이드 작품을 소개한다. 3부에서는 뒤샹의 작품을 총망라한 미니어처 이동식 미술관 ‘여행가방속 상자’를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1941년 에디션과 필라델피아미술관 1966년 에디션을 함께 비교 감상할 수 있다.
마지막 4부는 세계 여러 곳에서 전시를 하던 뒤샹의 아카이브를 보여준다. 1950년대 많은 사람들이 그가 예술계를 은퇴했다고 생각했지만 뒤샹은 아무도 모르게 20년에 걸쳐 마지막 작업에 매진했다. 그 마지막 작업으로 알려진 ‘에탕 도네’를 제작하며 남긴 스터디 작품도 공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뒤샹의 삶과 작품에 영향을 준 사진작가 만 레이, 건축가 프레데릭 키슬러 등 다양한 예술가들과 생전 협업 모습도 만날 수 있다. 또한 전시실 앞 열린 공간에서 한 달 간 전시와 연계한 다양한 교육, 문화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자세한 정보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삼수의 고통 끝에 도도한 대학 문이 열렸다. 3월의 꽃샘추위도 매섭게 따라붙었지만 나에게는 달짝지근한 딸기바람일 뿐이었다. 개강 후 일주일이 지난 하굣길에도 추위는 여전했다. 발을 동동거리며 버스를 기다리는 내 옆에 순한 인상의 남학생이 언뜻 보였다. 기다리던 버스가 와서 타는데 그 남학생도 같이 차에 오르는 게 아닌가. 붐비는 차 안에서 이내 자리가 나자 옆에 있던 남학생이 나에게 앉으라며 눈짓을 했다. 그러고는 가방을 받아주겠냐고 물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신입생이냐, 전공이 뭐냐 등으로 이어졌는데 알고 보니 신기하게도 우리 과 4학년 선배였다.
그날 이후 선배는 하굣길 파트너가 되었을 뿐 아니라 수시로 내 강의실에 일 없이 찾아오는 유명인이 되었다. 현수 선배였다. 그 즈음 나는 적성과 맞지 않는 전공이 힘에 부쳤지만, 삼수까지 한 마당에 또다시 시작할 기력은 없었다. 선배는 그런 고민으로 꽃청춘이 꺾여서야 되겠냐는 말로 한번 웃겨주고 마침 본인이 우리과 장학생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었다.
그로부터 장학생 선배의 개인 과외가 시작되었다. 찬기 도는 빈 강의실에서 자신의 점퍼를 내 어깨에 덮어주고는 안 춥다 말하는 입술을 덜덜 떨었다. 오히려 내 손이 차다며 폭신폭신한 앙고라 장갑을 끼워줬다. 혼자만의 비밀 문건이라며 기출문제를 뽑아오고, 교수님별 족집게 예상문제도 추렸다. 내가 시험 보는 날 속이 탄다고 복도를 서성대더니 차라리 자신이 대신 봤으면 좋겠다고 마음고생을 드러냈다.
선배의 활약 덕분으로 훈훈한 성적이 올라왔다. 그런데 2학기를 시작할 때쯤 딱 부러지게 말하기 힘든 옅은 허전감이 스멀스멀 내 마음속으로 밀려들었다. 생각해보니, 재수강의 험난한 길을 면하려고 하늘같은 선배의 비호 속에서 성적은 얻었는데 다른 게 없는 거였다. 캠퍼스는 모름지기, 미팅으로 부산하고, 지성인의 논쟁을 빙자한 야단스런 동동주 잔치에, 열정을 쏟는 동아리, 이런저런 상큼한 로맨스가 필수 예약된 풍경일 터였다. 그런데 바람과는 달리 어느 것 하나 담은 것 없이 덩그러니 빈 바구니만 흔들거렸다.
친구들과의 교류를 원천차단하는 하교 동행, 공부를 이유로 도서관으로 가는 셔틀버스에 실려 윤기 없는 청춘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시도 때도 없이 강의실로 찾아오는 바람에 내가 원래부터 선배와 아는 사이였고 그래서 이 학교에 입학했다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소문까지 무성했다. 그러니 그 흔한 미팅 제의 한 번 받지 못하고, 언저리에서 기웃거려보지도 못하는 이상하고 괴상한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적이 보장되는 꿀팁이 필요했을 뿐, 다 따주겠다는 별과 달은 필요치 않았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좋겠다는 공감 안 돼는 말에는 침묵했다. 맞닿는 곳이 다른, 정확히 뭐라 명명할 수 없는 어정쩡한 관계 속에 걸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가 흥미로운 말을 꺼냈다.
4학년 중에 나이 꽉 찬 과대표 형이 있는데 솔로라는 것이다. 괜찮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즉 소개팅을 주선하라는 것이었다. 경험도 없고 내 코가 석자인 형편이라 시큰둥해했지만 웃기기도 하면서, 마침 생각나는 언니가 있어 일을 벌여보기로 했다. 야무지기가 빈틈없고 콧소리가 매력적인 친구 언니다. 얼마 전 혼자라는 말도 들었다.
주말에 학교 앞 조명 어둑한 경양식집에서 만나기로 벼락같이 약속을 잡았다. 나와 선배가 먼저 가서 기다렸고 언니가 검은 롱코트로 점잖게 꾸미고 들어섰다. 조금 늦게 마른 몸매의 과대표 형이 수수한 청바지 차림으로 들어왔다. 인사를 하고 앉는데 약간 닳아 있는 코트 소매 끝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좋은 시간 가지라 인사하고 나오는네 알 수 없는 짠한 설렘이 엉겨붙었다. 다음 날 언니는 무슨 남자가 소개팅하는데 지각을 하느냐, 첫 만남인데 옷차림에 성의가 없다는 등 불만을 늘어놓았고 결국 소개팅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야릇한 일이 나에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과대표 형이 내 밤잠을 빼앗아간 것이다. 야윈 체격에 우수에 찬 눈빛을 하고 담담히 걸어오던 모습이 자꾸 마음을 건드렸다. 시간 따라 옅어지기는커녕 누를수록 생채기만 덧났다. 급기야 과대표 형을 보려고 4학년 강의실을 넘겨다보는 어처구니없는 짓까지 하고 말았다. 우연을 가장해 서성거리다 마주치면 인사 한번 나누는 게 뭐가 그리 좋던지. 그런데 그런 만남에도 위기가 닥쳤다. 겨울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방학이 되면 그 딱한 만남조차도 끊길 테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나는 궁리 끝에 좋은 수를 생각해냈다. 당시 학생들은 버스를 탈 때 회수권을 사용했다. 그 회수권은 정해진 요일에 학교에서 구입해야 했다. 생각이 회수권에 이르자 더 이상 방학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12월의 어느 날 과대표 형이 매일 도서관에 간다는 정보를 접수했다. 칼바람이 불었지만 망설임 없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단번에 과대표 형을 찾았고 조신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오랜만이네. 어쩐 일이야?”
“네… 부탁이 좀 있어서요. 회수권이 필요한데 내일 시간이 없어서요. 학교 매일 오시니까 10매만 사주시면 안 될까요? 내일 사놓으시면 제가 모레 찾으러 올게요.”
“그래, 알았어. 근데 왜 현수한테 말하지 않고?”
현수 선배 얘기는 예상 못한 질문이어서 순간 멈칫했다. 다행히 과대표 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내가 주는 돈을 받아 넣었다.
“고맙습니다. 모레 올게요.”
한파를 뚫고 온 보상은 넉넉했다. 오늘도 보고 필연적으로 모레도 만날 수밖에 없는 일을 꾸미고 나니 내가 너무 장해 보였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 과대표 형 만날 때 입을 원피스를 정성스레 다렸다. 그리고 저녁에 영어학원을 가려는데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그래, 내일도 눈이 하염없이 내려주기를. 그래주기만 한다면 과대표 형의 마음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겹겹이 설렘밖에 없었다.
현수 선배가 사준 앙고라 장갑을 살포시 꼈다. 함박눈을 맞으며 학원 가는 눈길이 반짝였다. 공부를 마치고 나오는데 학원 앞에 선배가 있었다. 점퍼에 딸린 모자를 올려 썼는데 녹지 않은 눈이 모자에도 어깨에도 소복했다. 얼른 달려가 어깨의 눈을 털어내려 할 때 선배가 먼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쑥 내밀었다. 앙고라 장갑 위에 올려놓은 것은 기다란 종이 다발. 회수권이었다. 순간 떨군 손에서 밀려난 회수권은 눈밭으로 파묻혔다. 회수권을 집어 묻은 눈을 조심스럽게 털어 다시 내 손에 쥐어주며 선배가 말했다.
“낮에 학교 갔더니, 과대표 형이 주더라. 네가 부탁한 거라면서….”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떻게 회수권이 선배에게서 내게로 오게 됐는지, 마음 따라 손도 같이 바들거렸다. 왜 자신에게 부탁하지 않았는지, 어떤 말도 선배는 덧붙이지 않았다. 양심이 희미해졌을까. 고단한 선배 얼굴이 측은해 아린데, 더 큰 원망이 마음 한구석에 떡하니 버텼다. 왜 마다하지 않고 그걸 가져왔냐고. 한 번쯤 그냥 두면 안 되냐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내리던 함박눈은 폭설로 변해 얽히고설킨 감정을 덮어주었다. 현수 선배를 통해 답을 준 과대표 형도, 앙고라 장갑에 회수권을 올려놓던 안쓰러운 현수 선배도 눈난리가 난 그날 모두 내려놓았다.
설익은 청춘은 야위어가도 잇속을 챙기지 않았다. 다만 그득한 마음을 주는 데 서툴렀을 뿐. 아직 간직하고 있는 현수 선배의 편지를 꺼내들었다. 아무 말 없이 회수권을 전해주고 간 며칠 뒤, 현수 선배가 보내온 손편지에는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 “쓰라렸다”고.
프랑스 남부 도시 니스를 가기 위해서는 로마나 파리를 경유해야 한다. 나는 그중에서 파리 경유를 선택했다. 나만의 이유가 있다. 아주 오래 전의 파리 여행을 했을 때는 어린 두 아들을 챙기며 사진 찍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내 생각이 깃든 파리 사진이 얼마 없다. 이번엔 잠깐이지만 파리 사진을 많이 찍어보고 싶었다. 카메라 배터리와 메모리 카드도 여유 있게 더 준비했다. 늘 간단히 하나 들고 나섰던 카메라에 이번엔 렌즈도 하나 더 넣었다.
그날따라 파리 드골 공항에선 공연히 분주했다. 트렁크 속의 카메라 가방을 꺼내어 따로 메고 가려했지만 어쩐지 공항의 심란한 상황으로 그럴 틈이 안 생겼다. 마음이 분주하다 보니 진땀나고 정신도 없었다. 이날따라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여행자의 줄도 길어서 지쳐버렸다. 소르본느 대학 근처에 예약해둔 숙소에 가서 어서 빨리 짐을 풀어놓고 홀가분해지고 싶었다. 드골공항에서 파리 시내로 들어가는 RER기차의 B노선은 문이 활짝 열린 채 출발지의 여유를 보여준다. 이 여유로움이 문제를 만들었을까. 아니면 긴 비행시간과 입국절차의 피로가 방심을 만들었을까. 떠올리고 싶진 않지만 가끔 이때를 생각해 본다.
파리의 도둑놈은 재빨랐다
도둑을 도둑님이라 할 수도 없고 도둑이라고만 말하고 싶지도 않다. 이럴 때 마음 놓고 '놈'자를 써 보고 싶다. 기차에 올라 트렁크를 내 자리 옆에 놓고 출발시간이 얼마나 남은 건지 휴대폰 시계를 잠깐 보며 한숨을 돌리는 시간이 불과 10초나 20초 정도였을 것이다. 내 옆에 있던 트렁크가 순간 없어졌다. 어? 둘러보아도 없다. 내 비명에 모르는 주변 사람들도 일어나 친절하게 이쪽저쪽 찾아봐 준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출발 전 기차에서 얼른 내렸다. 그리고 무전기 들고 오가는 공항직원에게 말했더니 안내데스크에 우릴 데려다 놓고 기다리라고 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리게 하는 그들의 무심함에 화가 치밀어 직접 물어물어 미로 찾듯 공항경찰을 찾아갔다. 이때쯤 난 가방 찾기가 어려울 거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냥 맥없이 포기하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과와 상관없이 파리 사람들의 이런 짓을 그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분노와 멍청함으로 온전치 않은 정신의 내게 친절히 길안내를 해준 지나던 멋진 조종사와 젊고 착한 어느 공항직원이 그나마 미쳐버릴 것 같았던 나를 조금 가라앉혀 주었다. 육중한 철문의 공항 경찰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인터폰으로 연결해줘야만 하는 또 다른 공항직원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여곡절 끝에 겁 없이 공항 경찰서에 들어가니 건장한 흑인 경찰이 우릴 맞는다. 경찰복으로 무장한 그 모습에 조금 두려움이 생겼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이미 피곤하고 지쳤다. 정수기가 보이기에 물 좀 먹어도 되는지 물었더니 직접 한 잔 받아다 준다. 친절하군...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이제부터는 정식 절차에 따라 분실 신고를 하면 된다. 말도 안 통하는데 어째야 하나 막막했지만 영어를 그런대로 받아주어 남편이 한참을 설명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조금 있더니 전화를 받아보라고 한다. 한국인 여자 불어 통역사였다. 세계 각국의 통역 장치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파리 경찰과 통역사를 중간에 두고 자초지종을 모두 이야기했고 연락처와 연결방법 등을 남겼다. 전화를 끊기 전 그 통역사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런데요... 크게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곳에서는 이런 일이 흔하기 때문에 각자 조심하는 수밖에 없어서요." 아무튼 파리 공항경찰에서 마음껏 한국말을 할 수 있게 해 준 그녀가 무조건 고마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경찰은 그것을 한 시간 정도 서류화 하느라 바빴고 우린 기다려 여러 장의 서류에 서명을 하고서야 끝이 났다.
공항열차를 타러 밖에 나오니 캄캄했다
기진맥진했지만 분풀이하듯 공항경찰에 모든 걸 털어내고 나서 그런지 시원했다. ‘까짓 가방 하나 잃어버릴 수도 있지 뭐, 살다 보면 별별 일 다 있는데 여행 중에 이런 일 정도 해프닝이라 해 두자...’ 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호텔에서 잠들라치면 속이 뒤집히며 화병을 일으키듯 속상하기를 몇 번이었지만 이런 여행도 해 본다 하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참아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여권이나 여행에 필요한 중요물품은 모두 남편 가방에 있었다. 오직 내 가방만 분실했기에 여행에 큰 지장은 없었다. 남편은 일찌감치 잊어버리라 누누이 말한다. 하지만 내 옷가지와 필요물품 정도는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지만 카메라 관련 일체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가끔 유럽 여행 중에 생기는 도난방지 꿀팁이라거나 소매치기 체험기를 듣곤 했다. 그러나 나는 무심히 다녀도 그런 일은 여태 한 번 일어나지 않았다고 잘난 척했다가 이렇게 크게 당한 꼴이 되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더없이 소중하고 아까운 내 카메라 생각에 속병이 날 지경이었지만 이젠 분통 터지는 내 여행의 경험담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종종 메일을 뒤적이며 프랑스 경찰의 소식이 없나 찾아본다. 혹시라도 본분에 충실한 파리의 어느 경찰 덕분에 내게 연락이 오는 기적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는 중이다.
‘딱 1년만 있다 돌아가자’ 하고 한국에 들어왔다. 타국에서의 시절이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체념도 희망도 아닌 시간들이 안간힘을 쓰며 흘러갔고 20대 네팔 청년은 어느새 40대 중반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토끼 같은 아이들도 태어났다. 섬유공장 30여 만 원 월급으로 시작해 인도·네팔 요리전문점 ‘두르가’를 7호점이나 연 네팔인 비노드 쿤워(Binod Kunwor·45), 이제는 귀화해 ‘서민수’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주한 네팔인협회장을 거쳐 국제부위원으로 지내는 그의 하루는 너무도 바빠, 인터뷰하러 간 날 하마터면 바람맞을 뻔했다.
오후 2시 ‘두르가’ 종로 1호점에서 그를 기다린 지 30분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만나기 전 미리 문자메시지도 보냈는데 무슨 일인가 해서 전화를 했더니 병원이라고 했다. 30여 분 뒤 그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네팔에서 일하러 온 사람이 뇌출혈로 쓰러졌다고 해서 급하게 병원엘 다녀오느라 인터뷰가 있는 걸 그만 까맣게 잊었네요. 돈 벌러 왔다가 다치면 의사소통도 안 되고 병원비도 없어 딱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제가 주한 네팔인협회 일을 보고 있는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네팔인들이 4만 명가량 되다 보니 일도 많이 생기고, 그래서 늘 바쁩니다.”
인도·네팔 요리전문점을 7개나 운영하는 대표라 점포 일로만 바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국에서 지내는 네팔인들에게 일이 생기면 통역도 해주고 모금활동을 통해 물질적 도움을 주는 등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느라 더 눈코 뜰 새 없었다.
미지의 나라에서 묶여버린 발
그가 한국에 온 것은 1992년, 스무 살 때였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이 전부였다. 당시에는 북한이 자원이 풍부한 나라로 더 많이 소개됐는데, 남한과 북한이 한민족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경제적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한국에 와서야 알았다.
“법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좀 따분한 나날들이었어요. 그 무렵 동네에서 알고 지내는 형이 한국에 갔다 왔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저도 네팔을 떠나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일본에 갈까 한국에 갈까 고민하다가 한국행 비행기를 탔어요.”
네팔에서 그의 집은 꽤 유복한 편. 어느 날 한국에 가겠다고 차비 좀 달라고 하자 아버지는 “가려면 네 힘으로 가라”며 꿈쩍도 안 했다. 계속 고집을 피우자 부모님은 결국 100만 원을 내놓았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꽤 큰돈이었다. 제 앞가림 알아서 잘하는 자식이라 믿고 지원해준 돈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그는 난감한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처음엔 염색공장에서 일했어요. 한 달 일하고 손에 쥐는 돈이 30만 원 남짓밖에 안 됐는데 그 돈마저 떼이기 일쑤였죠. 요즘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대우가 좋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노동 환경이 정말 열악했어요. 차별도 심했고 피해를 입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죠. 딱 1년만 일하고 돌아가자 하고 왔는데, 한 푼도 모으질 못한 거예요. 월급을 떼이면 직장을 옮기고 거기서 또 월급을 떼이는 일이 반복됐으니까요.”
인도·네팔 요리전문점 대표가 되다
그 후 1년만 더 있어보자 한 것이 귀화까지 하게 됐다. IMF, 금융위기를 차례로 겪으며 경제적 활동이 순조롭지 못했지만 그의 도전 욕구는 오히려 불타올랐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태어났다. 가장으로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국면 전환의 기회를 엿봤다. 사정이 조금씩 나아진 건 한국과 네팔을 오가며 무역업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동대문에서 옷, 가방, 모자 등을 떼어다 네팔에 팔았어요. 돈을 모아 식료품점도 열었죠. 그때 동남아 바이어들과 자주 만났는데 그분들이 한국에 오면 갈 만한 식당이 전혀 없었어요. 특히 인도 사람들은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이 많아 식사 대접이라도 하려면 곤란했죠. 그러다 문득 한국 사람들도 카레 음식을 좋아하니 인도 음식점을 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네팔 사람이니까 네팔 음식도 곁들여 선보이면서요. 인도 음식은 향신료를 좀 더 쓸 뿐 네팔 음식과 거의 비슷해서 복잡할 건 없었어요.”
그는 판단이 서면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이었다. 사업 계획을 세우자마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해서 2006년 서울 종각역 근처에 1호점을 연 인도·네팔 요리전문점 ‘두르가(Durga, 힌두 여신 가운데 가장 숭배받는 여신)’는 현재 7개 점포나 된다. 물론 그동안 부침(浮沈)이 없었던 건 아니다.
“‘두르가’를 오픈할 때 자신감 하나로 덤볐어요. 처음에는 손님이 없어서 힘들었죠. 월세 400만 원에 주방장과 직원들 월급 주느라 허리가 휘었어요. 그러자 동업자가 겁이 났는지 슬금슬금 손을 빼더군요. 이대로 혼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을 때 언론에 저희 음식점이 소개됐어요. 며칠 뒤 전화통에 불이 나더군요. 기사를 본 손님들이 몰려오고 매상이 쑥쑥 올라갔죠. 그렇게 1년간 입소문을 타면서 비로소 안착할 수 있었어요.”
두르가 주방장은 모두 네팔인이다. 인도·네팔 요리를 맛보고 싶어 하는 손님들에게 제대로 된 요리를 제공하려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그의 점포는 물론 한국의 네팔 요리점에 그가 소개한 주방장이 100여 명이나 된다. 알게 모르게 네팔인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해온 셈이다. 한국에 와서 이만큼 성공했으면 유연자적하듯 살 만도 한데 그는 여전히 바쁘다. 아내는 그래서 불만이 한가득이다. 좀 천천히 살라는 의미에서 남편에게 서(俆) 씨 성까지 지어줬건만 소용이 없었다.
“아내가 어느 날 밖으로만 돌아다니는 저를 보고 ‘너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 안 했어’ 하더라고요. 아이들과 아내에게는 미안하죠. 좀 쉬면서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네요. 제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거든요.”
이 정도면 일 중독자가 분명하다. 일을 벌이는 데도 거침이 없다. 요즘은 한국과 네팔 양국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구상 중이라면서, 이미 네팔에서 수력발전 사업을 추진해 곧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모노레일 사업, 심지어 해외송금 관련 금융 사업까지 그의 머릿속은 일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네팔 정부 고위층도 한국에 오면 꼭 그를 찾는다고 한다. 서민수 씨만큼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 대한 차별, 속상하다
한국에 온 지 5년째 되던 해에 그는 아내 이지형 씨를 만났다. 이웃으로 지냈는데, 함께 밥 먹고 대화하다가 정이 들어버렸다. 그가 먼저 프러포즈를 했다. 처가의 반대가 심했지만 무사히 결혼에 골인했다. 네팔 부모님도 섭섭해하긴 했어도 큰 반대는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성공을 이룬 건 아내 덕이 크다. 한국 문화에 어두워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그가 일을 벌이면 아내가 쫓아다니며 궂은 업무를 도맡아 하는 식이었다. 2005년도에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귀화도 결정했다. 아들딸에게 부족한 부모가 되지 않으려 두 사람은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런데 경제적 여유도 생기고 30여 년간 살며 적응도 되어 한국에서의 생활이 별 문제 없을 줄 알았는데, 그는 요즘 꽤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귀화를 해도 다문화 가정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심한 것 같습니다. 우리야 상관없지만 아이들은 어린 마음에 상처가 큰 모양입니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힘들어하더군요. 아이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 사람인데 생김새가 다르다고 외국인 취급하니까 억울하고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지금 학교에서 겪는 일들을 앞으로 직장에서도 겪을 테고, 또 결혼할 때도 분명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부모로서 자식의 험난한 인생 여정이 예상되는데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답답하네요.”
그는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더 심한 상처를 받고 있다며 속상한 마음을 내비쳤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구나’ 하면서 상심할 때도 있다고 했다. 그도 가끔은 “그럼 그렇지, 네가 네팔인이지 무슨 한국인이냐?” 하는 소리를 듣는데 아이들이 그런 말을 들으면 정체성 혼란은 물론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 말했다.
“대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을 2~3년간 유학 보내볼까 합니다. 좀 더 큰 세상에서 살면서 마음이 열리길 바라면서요. 내가 바뀌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아이가 빨리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에게도 차별로 인한 번민의 시절이 있었을 터. 아들의 상처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그의, 아비의 눈은 순간 한없이 깊어졌다.
요즘은 서민들 사이에서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정부에서는 조금만 더 기다리면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는 얘기를 하지만 이제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말이 가까워 오니 주민센터마다 노인잔치를 벌인다. 노인잔치 스케줄은 입소문을 타고 시니어들 사이에서 오간다. 어느덧 노인잔치에 초대받을 나이가 되었지만 관심을 안 두었으나 돌보아드리는 어르신이 같이 갈 것을 권하는 바람에 따라나섰다.
막무가내 노인들
서울시 강동구의 한 주민센터에 어르신과 함께 찾아갔는데 열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행사장은 꽉 차있었다.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앞자리부터 차례대로 앉기를 권하지만 요지부동이다. 중간 중간에 앉은 여자 분들이 꿈쩍도 않는다. 자원봉사자들이 애원해도 말이다. 이유는 미리 자리를 맡아 놓기 위해서란다. 오히려 남자 분들은 그런대로 잘 따르는 모양새였다. 나이가 들면 성호르몬이 바뀐다더니 맞는 말인 것 같다. 미리 차려놓은 반찬 몇 가지는 기다리는 동안 허기를 참지 못한 노인들이 앞에 있는 음식을 드시기 시작했다. “여기 떡하고 김치 좀 더 갖다 주슈!” “머리고기가 떨어졌어!” 행사 시작도 전에 밥상은 텅 비어 갔다.
오겠다던 시간에도 나타나지 않는 지역행정 수장 때문에 기다림이 길어졌다. 100여명의 시니어가 모이다 보니 행사 진행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노인들을 위한 공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앞에 있는 음식에만 자꾸 눈길을 줬다. 공연장이 아니다 보니 스피커가 무용지물이었다. 무대에서 가수가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도 뒤에 앉은 노인들은 즐기지도 못하고 관심 밖. 빨리 식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표정이 역력했다.
행사시간에 늦게 와서 행사가 끝나기도 전에 빠져나간 외빈들
드디어 행사를 주관하는 수장이 등장하자 사회자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유도한다. 무표정한 노인들은 사회자의 요구에 따라 건성건성 박수쳤다. 문제는 내, 외빈 소개시간이었다. 지역 국회의원, 시의원, 구의원, 각종 단체장 등 얼핏 들어봐도 20여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호명됐다. 그럴 때마다 박수를 유도하고 인사말을 듣지만 ‘소귀에 경 읽기’. 끝나고 나면 1년 동안 수고했다는 공무원과 단체들의 상장수여식이 이어졌다. 고생하고 잘 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은 좋지만 하필 노인들을 불러다 놓고 밥 한 끼 대접하면서 지루한 행사를 이어나가는 것은 크게 바람직하지 않아보였다. 낮 열두시가 가까워오자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아우성 또 아우성
점심식사는 열두시가 가까울 무렵 시작됐다. 고기를 듬뿍 넣고 끓여낸 국밥이 배달됐다. 테이블마다 서로 먼저 달라고 소리쳤다. 봉사자들은 식사배달 쟁반을 들고 허둥거린다. 이 때, 테블마다 목소리 큰 노인이 등장한다. 아예 일어서서 손을 흔들어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참으로 볼썽사납지만 누구하나 말하는 사람은 없다. 헌데, 옛 속담에 ‘우는 아이 먼저 젖준다’는 말과 같이 설쳐대는 테이블에 식사가 먼저 도착한다. 어디 그 뿐이랴. 테이블 마다 올려놓은 홍시를 잽싸게 가방에 챙겨 넣은 노인들. 자원봉사자를 부르더니 홍시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살기 어렵던 1960~70년 대. 동네잔치에 가서 콧수건에 떡이며 과자를 챙겨오시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그래도 맛있게 식사 하시는 노인들의 얼굴에는 주름이 훈장처럼 자글자글하게 열려있다. 어려운 시절에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뼈빠지게 고생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식사를 맛있게 끝낸 할머니들은 부리나케 자리를 챙겨 빠져나가고 할아버지들은 그나마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시간을 보낸다. 게다가 노인들이 식사하던 자리를 찾아 인사했던 내, 외빈의 모습은 찾아 볼 수 가없었다. 행사를 위해서 잠깐 얼굴 보이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사람들을 기다리던 시간에 비하면 너무 성의가 없는 건 아닐까?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는 노인들을 위한 진정한 잔치가 되었으면 좋겠다
매년 10월 하순부터는 노인들을 공경하고 수고로움에 보답하는 행사가 많이 열린다. 바람이 있다면 조금만 더 행사에 신경을 썼으면 하는 것. 보여주기 식 행사는 조금 더 간단하게하고 노인들이 행복하고 화기애애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면 좋겠다. 노인들을 위한 잔치이니 세심한 주의와 보살핌이 힘을 기울여야할 것이다.
어딘가 처박아뒀던 먼지 쌓인 앨범 속 장면이 총천연색 화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만 같다. 통바지에 브랜드 이름이 크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풋풋한 젊은이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자극하는 먹거리가 편의점 한편에 자리 잡았다. 돌고 돈다는 유행은 조금씩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그 시대를 대변해왔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어릴 적 유행과 흡사하지만 뭔가 새롭다. ‘복고(復古)’라는 말 대신 ‘레트로(retro·복고)’란 용어로 바꿔 부른 지도 오래다. 친숙한 듯 아닌 듯 우리 시대 레트로 열풍. 뭔가 달라진 옷[衣], 먹거리[食] 그리고 생활공간 [宙]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패션계는 한마디로 힙트로·뉴트로·영트로
“맨 처음 옷을 이렇게 입을 때 복고 패션이라기보다는 유행하는 와이드 팬츠(통바지)나 데님재킷 정도를 따라서 사서 입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제가 요즘 입는 옷을 아빠가 보시더니 본인이 어릴 때 입었던 옷이랑 똑같다고 예전에 입으셨던 것을 주셨어요. 진짜 요즘 유행하는 거랑 너무 비슷해요. 그런데 1990년대 패션이랑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요! 예전에는 통나무처럼 바지가 컸다면, 지금은 슬림하고 길어 보이게 입는 추세랄까요?”
은평문화재단에서 시민연극 연습이 한창인 한규열(21) 군은 요즘 스타일대로 깔맞춤(?)을 하고 다닌다. 통이 살짝 큰 바지에 넉넉한 사이즈의 티셔츠를 즐겨 입는다. 바지는 허리춤까지 올려 단정하게 허리띠를 두르고 티셔츠는 바지 안에 넣어 입는다. 가끔은 티셔츠 앞부분만 바지 안에 넣은 뒤 살짝 옷을 밖으로 잡아당겨 느낌을 살린다. 말해놓고 보니 1990년대에 즐기던 스타일 아닌가. 1990년대를 살았던 이들이 보기에 그저 신기한 젊은이 패션이 아닐 수 없다. 예전과 엇비슷한 모습에 웃음이 나지만 정작 선뜻 선택하지는 않는다.
패션계야말로 작년 초부터 시작된 레트로의 인기가 상승하고 있는 분야다. 특히 1990년대 유행했던 패션이 1980년대에서 2000년 초반 사이에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 혹은 1995년 이후 태어난 ‘Z세대’에게 사랑받고 있다. 부모 세대가 20대에 향유했던 패션을 지금의 스타일로 새롭게 해석하고 활용하는 움직임이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나다 보니 레트로 패션을 의미하는 다양한 신조어도 탄생했다. 개성 있고 신선함을 표현하는 신조어 ‘힙하다’의 ‘힙(hip)’과 레트로(retro)를 결합한 단어 ‘힙트로’, 젊은이(young)를 붙여 ‘영트로’, 새롭다(new)를 더해 ‘뉴트로’라 부른다. 지루한 ‘복고 패션’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새로운 세대가 추억의 아카이브에서 찾아낸 유레카가 이 시대 레트로 열풍이다.
코듀로이, 체크 그리고 호피
폐기처분한 줄 알았더니 전설의 코듀로이가 레트로 바람을 타고 돌아왔다. 일명 ‘골덴’으로 불리는 코듀로이가 포근한 느낌과 함께 내구성이 뛰어나 최고의 한파가 예고된 올겨울 제몫을 할 것으로 보인다. 코듀로이는 물론 벨벳과 스웨이드, 트위드(두꺼운 실로 직조해 무게감이 느껴지는 원단), 플란넬(부드럽고 가벼운 모직원단) 등 편안한 캐주얼 분위기에 어울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원단도 이번 겨울을 대표하는 소재다. LF의 김현진, 김은정 디자인 실장은 남녀 인기 색상과 관련해 “뚜렷한 구분 없이 밤색과 빨강, 노랑 계열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강렬하고 도발적인 빨간색 계통을 의외의 인기 색상으로 꼽았다. 남성의 경우 붉은 계열에 벨트가 있는 트렌치코트처럼 레드로 포인트를 준 스타일이 인기를 끌 전망이다. 여성의 경우 레트로 여파로 ‘웨스턴 스타일’이 뜰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 카우보이 복장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1980년대에도 큰 인기였다. 술 장식 조끼, 부츠컷 청바지 등이 대표 아이템으로 사랑받을 전망이다. 올겨울 남성 패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바로 체크무늬다. 체크는 유행이라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늘 인기가 있지만 이번 시즌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클래식한 느낌의 체크부터 다채로운 컬러가 섞인 개성 있는 체크까지 다양하다. 패션 포인트로 체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옷 전체를 체크로 맞춘 슈트 패션도 곧 거리에서 볼 수 있을 예정.
여성 패션은 더욱더 과감하고 재미있는 무늬가 거리를 수놓을 전망이다. 특히 호피무늬의 인기가 눈에 띈다. 인터넷 쇼핑몰 ‘11번가’ 분석에 따르면 호피 패션이 올 하반기 패션 트렌드를 대표하는 패턴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최근 11번가 사이트 내 ‘호피’ 아이템 검색 횟수는 무려 15배 이상 급증했다. 11번가 하원지 MD는 “예전에는 다소 과한 패션으로 여겨졌던 호피무늬 패션이 요즘에는 한층 밝은 색상의 패턴이나 실크, 시폰 소재에 더해지면서 색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며 “호피무늬는 스카프나 가방, 구두 등 한 가지 아이템만으로도 강렬한 포인트를 줄 수 있어 남녀 모두에게 인기”라고 말했다.
레트로를 입다
숏패딩과 빅로고 재등판
평창동계올림픽 영향으로 발목에서 머리끝까지 온몸을 감싸는 롱패딩이 지난겨울 유행했다면 이번 시즌에는 허리에서 마무리되는 짧은 점퍼가 대세다. 아웃도어 브랜드 ‘밀레’의 ‘레트로 두두느 다운 다운재킷’이 옛 인기 상품 소환 패션 중 하나다. 1980년 프랑스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다운재킷 ‘듀벳’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롭게 제작한 의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덕다운 점퍼가 바람을 일으키면서 강렬한 색감의 짧은 기장의 점퍼가 사랑을 받았다. 1990년대 후반에는 스톰, 겟유스트, 닉스, 잠뱅이 등 데님 브랜드가 성장하면서 세련된 느낌의 무채색 구스다운 점퍼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가 끝나갈 무렵 퇴물 취급받고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구스다운 점퍼가 20년 만에 젊은 감각으로 재해석되어 숏패딩으로 돌아왔다.
이와 함께 대놓고 “나는 누구요!”라고 말하듯 브랜드 이름이 제품에 크게 박힌 이른바 빅로고 패션도 레트로 바람을 타고 있다. 브랜드 이름을 옷이나 가방, 모자 등에 크게 새기거나 예전에 비해 사이즈가 적당히 작아진 것이 특징이다. 1990년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랑받았던 스포츠 브랜드 휠라(FILA)도 옛 느낌을 살려 빅로고 패션을 선보였다. 뿐만 아니다. 굳이 빅로고를 새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명품 브랜드도 빅로고 패션 대열에 합류해 레트로 열풍에 동참하고 있다.
개성 있고 신선함을 표현하는 신조어 ‘힙하다’의 ‘힙(hip)’과 레트로(retro)를 결합한 단어 ‘힙트로’, 젊은이(young)를 붙여 ‘영트로’, 새롭다(new)를 더해 ‘뉴트로’라 부른다. 지루한 ‘복고 패션’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새로운 세대가 추억의 아카이브에서 찾아낸 유레카가 이 시대 레트로 열풍이다.
레트로를 먹다
곁에 있었지만 레트로였다!
패션을 넘어 옛 먹거리에 대한 향수 또한 레트로 열풍으로 번졌다. 인기의 일등공신은 단연
2년 전 방영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tvN)이다. 시청자들은 매회 쏟아진 음료, 초콜릿, 과자 등을 보면서 옛 감성을 느끼고 맛에 대한 기억도 제대로 자극받았다. 드라마 방영 당시 ‘저거 한번 다시 먹어보고 싶다’ 했던 것들이 실제로 상품 출시로 이어져 레트로 호황을 반짝 누린 바 있다. 추억 속 먹거리가 슈퍼와 편의점에 등장한 것도 그 무렵이다. 1974년 첫 출시돼 지금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빙그레의 ‘바나나맛우유’가 드라마 인기와 함께 ‘1988에디션’으로 등장했다. 추억의 빙그레 로고와 서체가 부착된 것만으로도 너도나도 열광했다. 인기에 구애받지 않던 스테디셀러인 바나나맛우유가 다시 사랑을 받고 회자된 계기였다.
갈배사이다 그리고 따봉!
해태htd의 ‘갈아만든 배(이하 갈배)’의 경우 숙취 해소 효과가 입증되면서 눈에 띄는 레트로 전략 상품이 됐다. ‘갈배’가 숙취에 좋다는 입소문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는데 2015년 ‘호주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CSIRO)’ 실험을 통해 ‘갈배’가 두통 완화에 효과가 있음을 밝혀냈다. ‘갈배’는 작년 말 숙취해소제로 등장하는가 하면, 올 3월에는 탄산이 추가된 ‘갈배 사이다’로 재탄생했다. 진일보하는 레트로 상품의 전형이 1996년 등장한 ‘갈아만든 배’라 할 수 있다.
롯데칠성음료 사상 최고로 인정받는 광고가 있다. 오렌지를 따는 브라질 농장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따봉(Esta bom)’이라 말하면 주위 사람들이 흥에 겨워 춤을 추던 ‘델몬트 오렌지 주스’ 광고다. 델몬트라는 이름보다 따봉이 강렬했던 나머지 1989년 따봉주스가 출시되기도 했다. CU편의점에 등장한 롯데의 ‘따봉 제주감귤’이다. 복고 느낌에 친근감이 더해져 자꾸 손이 가는 음료다. CU 상품기획 관계자는 “복고가 촌스러움에서 벗어나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1980~90년대 감성을 즐기는 젊은 세대와 어릴 적 향수에 젖어 있는 40~50대 모두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10월에 종영한 인기 드라마 ‘미스터선샤인’(tvN)에 등장한 ‘불란셔 제빵소’의 빵은 파리바게트 PPL 상품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아울러 ‘#불란셔제빵’과 관련한 ㅍ단순 검색만 SNS상에서 4000건이 훨씬 넘었다.
레트로를 살다
옛날옛적풍 요즘 냉장고
1980년대 안방에 모셨던 190ℓ 냉장고를 1990년대에 500ℓ 냉장고로 바꿨을 때 진짜 크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900ℓ 양문형 냉장고도 부족하다. 전자레인지 또한 오븐기능을 비롯해 눌러야 할 버튼이 너무 많다. 갈수록 대형화되고 복잡해지는 가전제품 시장에도 레트로 바람이 불고 있다. 대우전자가 선보인 레트로 디자인 ‘더 클래식’ 시리즈의 냉장고와 전자레인지는 가전제품의 초기 모습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특히 1인 가구의 증가와 욜로, 미니멀리즘을 삶의 주제로 받아들이는 세대에게 ‘가치소비’에 대한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작지만 고급스러움은 유지하고 유행에도 뒤지지 않는 스타일로 틈새시장에서 주목받는 상품으로 떠오른 것이다. 더 클래식 시리즈는 120ℓ, 80ℓ급 소형 인테리어 냉장고다. 크림화이트, 민트그린 두 가지 색상으로 라운드형 도어와 프레임을 통해 ‘레트로’ 느낌을 살렸다. 동급 대비 약 30% 비싼 가격에도 독보적 디자인으로 올해 월평균 판매량 1500대 이상을 유지하며 레트로의 인기를 증명했다. 전자레인지 또한 크림화이트 색상에 은색 손잡이와 조그 다이얼, 라운드형 디스플레이로 소비자의 마음을 녹였다. 레트로를 표방한 ‘더 클래식’ 시리즈 대우전자 관계자는 “경기불황에도 자기만족과 개념 소비를 원하는 이들이 급증하면서 레트로 디자인 미니 가전들이 인기”라며 “레트로 디자인에 프리미엄 기능을 추가한 제품개발을 주도해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시대보다 옛 감성 공유
큰 가구에서부터 작은 소품 하나까지 매일 사용하는 리빙 제품들은 질리지 않고 오래 쓸 수 있어야 하고 실용성까지 겸비해야 하기에 꽤 까다로운 선택 과정을 거치게 된다. ‘앤티크’란 이름으로 레트로 감성은 꾸준히 이어졌지만 매번 대세 상품은 아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가구점에는 도시적인 느낌의 가죽소파 등이 즐비했다. 최근에는 레트로 인기 덕에 따뜻한 감성의 패브릭과 나뭇결이 적절히 살아 조화된 가구가 소비자의 선택을 받고 있다. 창고에 쌓여 찾기 힘들었던 레트로 가구가 자주 눈에 띄는 걸 보면 유행은 유행이다. 인테리어 전문 브랜드 ‘까사미아’의 쇼핑몰 사이트도 요 몇 년 사이 좀 더 따뜻하고 여유로운 감성의 리빙 상품으로 대체됐다.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의 헤링본 패턴을 이용한 침대 시트와 카펫 등이 눈에 띄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북유럽 등지에서 전해져온 스타일이다. 나라마다 복고 스타일이 다르지만 유독 가구나 인테리어에서 북유럽 혹은 스칸디나비아의 오래된 스타일이 레트로 기본이 됐다.
이는 나무가 많은 북유럽 일대에서 유명 가구 디자이너가 등장해 다양한 스타일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양질의 원목이 수입되고 있어 적당한 가격에 레트로 감성을 즐길 수 있다. 레트로 가구 하면 ‘북유럽 스타일’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꼭 이 스타일만이 레트로라 할 수는 없다. 만약 한국의 레트로 가구가 인기였다면 고가의 자개장, 저가의 비키니장, 실용적인 철제가구, 19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등나무 가구가 등장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레트로 유행에서 있어 가구만큼은 20년 전의 한국 스타일이 소환되지 않았다. 패션이나 음료, 가전 등에서 이전 세대 제품들이 다시 불려나오는 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까사미아 개발 팀장은 “골동품 느낌보다는 앤티크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을 잃지 않는 디자인이 사랑받고 있다”고 말했다.
레트로 놀이가 쉬웠어요!
옷만큼이나 패션에 민감한 주방식기도 레트로 열풍이다. 물방울무늬와 나뭇가지 형태의 접시 등 1980년대 후반 우리네 식탁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디자인이 다시 등장했다. 까사미아는 스페인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의 웅장함과 섬세한 패턴을 담아낸 ‘알함브라 양식기’ 6종을 내놓았다. 제품별로 화이트, 진한 남색, 연한 하늘색이 고급스러운 무늬와 함께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다. 중고시장도 부쩍 바쁜 눈치다. 각 가정 찬장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법한 디자인의 컵과 식기 등이 중고시장에서 인기다. SNS상에는 ‘할머니 찬장에서 찾은 컵’이라며 사진이 올라오기도 한다.
김용섭 ‘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 소장은 레트로의 식을 줄 모르는 인기에 대해, 앞에서도 언급했듯 “핵심 축에는 20대 밀레니얼 세대가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디지털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처음부터 경험치에 대한 소비욕구가 굉장히 커서 흔하고 비싼 물건보다 희소한 물건을 갈망했다. 기업도 업계 불황 혹은 새로운 답을 찾지 못할 때 증명된 과거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레트로를 활용해왔는데 잠재적 소비층인 밀레니얼 세대 소비욕구와 맞물려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