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탄생과 유지에 가장 필수적인 것은 물이다. 어떤 물은 몸에 좋고, 어떤 물은 몸을 해친다. 어떤 약초가 내 몸에 좋으냐보다 어떤 물을 마시느냐 하는 것이 건강에는 더 중요하다. 그러기에 좋은 약수터, 석간수(石間水) 약수터는 늘 사람들로 붐빈다. 그 약수만 먹고 병을 고쳤다는 말도 들을 수 있다. 그럼 어떤 물이 좋은 물일까? 물은 전부 H₂O일 텐데...
에모토 마사루(江本勝)는 에서 만물의 근본인 물 입자는 H₂O라는 이름으로 표준화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하나하나의 입자가 살아 있는 개성적인 존재임을 사진으로 보여 주었다. 동일한 장소, 동일한 온도에 있더라도 물 입자는 각각 다른 모양, 각각 다른 운동성을 띤다. 이 세상에 똑같은 물 입자는 없다. 분석된 화학 구조식(H₂O)이 같다고 해서 같은 운동성, 같은 약효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주었을 때의 물 입자 모양과 미워한다는 말을 들려주었을 때의 물 입자 모양이 다르다. 에모토 마사루는 물은 정보를 전사(轉寫, transcription)하고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바닷물은 바다에서 일어난 모든 생명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빙하는 수백만 년의 지구 역사를 담고 있을 것이다.
물은 자신이 경험한 에너지, 파동, 파장을 머금었다가 체내에서 그 기운을 재현한다. 이것이 약효로 나타난다. 에모토 마사루의 말처럼 물은 에너지의 전달 매체, 운반자라고 할 수 있다.
‘물 박사’로 유명한 의 저자 김현원 교수는 물이 기억한다고 말한다. 김현원 교수는 토션장(torsion field)으로 표현되는 물질의 정보를 물에 옮기고, 그 물을 마시게 해서 질병을 치료하고 있다. 정보를 옮기기 전이나 옮긴 후나 물의 성분은 똑같이 H₂O이지만, 효능은 달라진다.
에서는 갓 지은 밥을 3개의 병에 넣고 한 병에는 “고맙습니다”라고 말해 주고, 한 병에는 “멍청한 놈”이라고 말해 주며, 한 병은 아예 무시하는 실험을 했다. 그랬더니, “고맙습니다”라고 말해 준 밥은 발효되어서 좋은 향기가 났고, “멍청한 놈”이라고 말해 준 밥은 검게 썩어 버렸으며, 아예 무시한 밥에서는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났다. 사람이 전달하는 감정이 밥의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에서는 물을 33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33가지 물은 각각의 물 입자가 시간과 공간의 기운 및 운동성을 기억하고 있다가, 사람이 마시면 그 기억을 인체 내에서 재현한다. ‘물은 기억한다’는 관점에 아주 충실하다.
하루 중 새벽의 기온이 가장 낮기 때문에 물은 새벽에 가장 무거워진다. 정화수는 이런 무거운 힘을 기억해서, 머리, 얼굴, 눈, 입에 뜬 열을 아래로 눌러 내려 보낸다. 그래서 입 냄새를 없애고, 얼굴색을 좋게 하며, 머리와 눈을 맑게 하는 데 가장 좋다.
정월에 처음 내린 빗물은 솟아오르는 봄기운을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위장 기운이 약해서 소화가 안 되고 입맛 없는 춘곤증을 치료한다.
가을은 만물이 가라앉는 계절이다. 식물은 지상부가 시들면서 진액이 땅속 뿌리로 돌아가고, 동물은 땅속, 집 안으로 들어가 동면을 준비한다. 가을 이슬 역시 가라앉는 에너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정신을 안정시키고 피부의 충을 제거한다. 피부의 충은 습열(濕熱)로 인해 생기는데, 가을 이슬의 서늘하고 건조한 기운이 습열을 제거해서 충을 죽이기 때문에 피부병에 좋다.
국화수는 국화가 자라는 수원지에 흘러나온 물인데, 장수 마을의 수원지에는 국화가 많다. 국화 담근 물로 차를 달이면 수명을 늘려 준다.
유황은 양기를 보충하고, 피부의 충을 죽여서 피부 질환을 치료하는 데 매우 뛰어나다. 따라서 온천수는 냉증 질환과 피부 질환에 매우 좋다. 하지만 온천수의 도움으로 양기를 보충할 때 사람의 기운도 같이 소모되므로, 꼭 잘 먹으면서 온천을 즐겨야 한다.
물에 황토를 섞었다가 황토가 가라앉은 윗물을 지장(地漿)이라고 한다. 만물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이 흙은 태양[火]과 빗물[水]에 수천, 수만 년 씻기면서 치우친 성질이 사라지고 무독해지며 담백해진다. 특히 땅을 3자 정도 파서 나오는 황토는 해독하는 힘이 매우 강력하다. 이러한 황토의 기운을 머금은 지장은 처방에서 많이 사용되는데, 중독과 답답한 것을 풀어주고, 온갖 독을 푼다.
폭포는 대표적인 급류수이다. 폭포수는 강하게 아래로 하강하는 기운을 머금고 있다. 그래서 폭포에서 발생하는 음이온은 천식, 불안, 불면, 비염 등 열이 상승하는 것을 억눌러서 가라앉히고 안정시켜 주는 것이다. 아래로는 대·소변을 잘 통하게 한다.
그렇다면 내 몸에 좋은 물은 어떤 물일까? 요즘 몸에 좋다는 물은 공해 물질, 오염 물질을 화학적으로 거른 물, 알칼리환원수 등을 기초로 한다. 한의학적으로 내 몸에 좋은 물이라고 한다면, 내 몸에 부족한 에너지, 운동성, 기억을 머금은 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혈액의 운동성이 떨어져 손발이 차다면 온천이나 열탕에 몸을 담가야 할 것이다. 급성 복통일 경우 토하거나 설사하지 못하는 위급한 상태라면 급히 생숙탕을 만들어 마셔야 한다. 대·소변이 시원치 않은 분이라면 상류의 물보다는 하류의 물, 많이 흘러내려 온 물을 마셔야 한다. 아니면 멈춰 있지 않고 계속 흐르는 물을 골라서 마셔야 한다.
간, 위장 등 몸에 독이 많아 해독이 필요한 분이라면 지장(地漿)을 마시는 것이 좋다. 피부병이 있다면 온천 해수욕을 하거나 집에서 고농도 죽염수를 만들어 목욕하는 것이 좋다. 피부와 모발을 좋게 하자면 옥잔에 담아 둔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
봄에 춘곤증을 겪는다면 춘우수(春雨水)를 마셔야 한다. 산에 가서 봄기운을 받은 약수터 물을 마시거나, 봄철에 나오는 고로쇠약수, 자작나무약수 등을 마시는 것이 좋다. 늘 머리와 눈이 맑지 않다면 이른 새벽 약수터에서 뜬 정화수를 마시는 것이 좋다.
이때 시간은 마시는 시간이 아니라 물을 뜨는 시간을 의미한다. 자연과 어우러져 흐르는 물이 자연에서 분리되는 시간을 말한다. 정화수는 아침에 떠서 점심에 먹어도 정화수다. 봄에 채취한 고로쇠약수를 냉장 보관했다가 여름에 마셔도 춘우수의 효과가 나타난다. 물론 바로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 반대로 겨울에 뜬 물을 봄에 먹는다고 해서 춘우수가 될 수는 없다.
>>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에는 빨강, 파랑, 노랑으로 차린 멋쟁이 등산객으로 붐빈다. 사회발전만큼 산행문화도 많이 변하였다. 수십 년 산을 찾으면서 느꼈던 산행문화의 변천사를 살펴본다.
복장이 화려해졌다.
예전에는 전문 산악인을 제외하고는 등산복을 따로 갖추지 않았다. 평소에 입던 셔츠와 바지, 운동화만 있으면 삼삼오오 산에 올랐다. 면바지, 셔츠에 땀이 흠뻑 젖어 생쥐처럼 보기 민망한 모습을 자주 보았다.
아웃도어 발달로 통풍과 발수는 기본이요, 패션전시장이 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따라 유행을 쫓아가기에 허리가 휜다. “운동 중에서 등산이 제일 돈이 적게 든다.”는 통설이 깨진지 이미 오래다.
유학 온 산행을 즐기는 학생이 어느 방송에서 “한국 등산객이 화려하게 입고, 많이 먹으며 산행은 적게 한다.”고 지적하였다. 외장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산행문화가 필요한 대목이다.
취사가 사라지고 식당 뒤풀이로 발전
옛날에는 버너와 코펠이 기본 장비였다. 석유버너에 불 피우는 방법을 익히고 알코올버너, 코펠까지 갖춰 배낭을 메고 등산을 하였다. 산에서 지지고 볶아서 식사를 해결하던 때였다. 근래 등산복 브랜드로 사람의 외양을 구별하는 것처럼 유명 버너가 산행자의 위세를 판가름하였다.
친구들과 산에 갈 때에는 각자 역할을 정했다. 당시 전화통신 부족으로 연락할 수 없는 불참자를 예방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필자는 버너 준비와 밥하기, 그리고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정상주를 담당하였다.
사회에 진출 후에는 젊은 시절에 부족하게 느꼈던 먹거리를 배낭에 가득 채우고 다녔다. 친구들과 어는 산에 갔을 때 이야기다. 고기를 구워서 막 먹기 시작하는데, 학생 한 명이 “고기 좀 먹고 싶다.”고 하였다. 옛일을 생각하여 합석을 흔쾌히 승낙하였다.
잠시 후 일행이었던 나머지가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학생 때처럼 감자 된장찌개로 소주잔을 기울였던 아름다운 기억이 났다.
산마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계곡에는 음식물 찌거기가 쌓였다. 석유버너에 불을 잘 붙이는 사람은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하였던 먼 옛날이야기다. 취사가 금지되면서 환경이 정화되고 버너와 코펠은 자취를 감췄다.
다음부터는 도시락이 취사를 대신하였다. 친구끼리 어울리면 푸짐한 산상 뷔페가 열렸다. 맛 자랑 대회가 열렸다. 학창시절 소풍 때보다 더 즐거웠다. 정상에서 막걸리 한잔으로 천하를 호령하였다.
요즘에는 도시락 문화도 시들해지고 하산 후 뒤풀이를 즐긴다. 산행을 마무리하고 식당에서 오순도순 우정을 나누는 문화가 산행안전에 매우 바람직하다. 등산 출입로 식당은 항상 등산객으로 차고 넘친다.
산행은 놀이에서 필수 운동으로 성숙
대부분의 산 입장료가 있었다. 아침 7시 입장료 받기 전에 등산객이 몰리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십여 년 전부터 입장료가 거의 없어졌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찾는 산이 되었다.
옛날에 등산복에 배낭 메고 나서면 여행가는 한량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산행이 이제는 놀이가 아니고 건강을 다지는 필수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쓰레기 되가져오기 등으로 산행문화가 성숙하였다.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필자는 한국전쟁이 나던 해 자식 많은 가난한 농사꾼의 9남매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의 풍요로움을 느낄 때마다 돌아가신 부모 생각에 마음 한구석 애잔함이 밀려든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로 변한 농촌에서는 극심한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한 13명의 대가족이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가마솥에 밥을 해야 할 만큼 식량이 필요했다. 봄날은 길고 보릿고개는 높았다. 봄에 장리쌀 한 가마니를 빌려오면 가을에 한 가마니 반을 갚아야 했다. 50%의 이자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과히 살인적인 이자요, 착취다.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사회 구조였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 해만 보릿고개를 넘을 때 장리쌀의 고리에서 벗어나면 되었지만 굶을 수는 없으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걸 필자가 해보리라 결심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1년만 포기하기로 했다. 1년 동안 돈을 벌어보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어린 필자가 어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하는 새마을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시절이었다. 필자 동네도 정부에서 구불구불한 논둑을 똑바로 펴는 경지정리 작업을 시행했다. 지금 말로 하면 공공근로다. 읍사무소 담당 공무원이 나와서 그날 할 일을 지정해주고 저녁 무렵 성과를 측정해서 실적에 따라 밀가루 티켓을 나눠 줬다. 지원자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최저임금에 버금가는 적은 밀가루 지급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농사일이 다 끝난 겨울에 하는 일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논둑에 한 뼘 정도 들어 올릴 만큼의 범위를 정하고 곡괭이로 논둑에 구명을 낸다. 거기에 쇠로 된 긴 지렛대를 넣고 논둑을 들어 올리면 논둑이 무너져 내렸다. 그 자리에 직선화된 새로운 논둑을 만드는 일이다. 공사가 다 되면 바둑판처럼 반듯한 직선화된 논둑과 논이 만들어진다. 경지면적도 커지고 농토가 반듯해서 농사짓기에도 편하게 된다. 요즘 같으면 포크레인 등 기계로 하겠지만 당시는 순전히 사람의 노동에 의한 작업이었다.
공공근로라는 것이 다 그렇듯 일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하루 할당된 일의 양도 5~6시간이면 다 마칠 일이었다. 밀가루를 매일 주는 것이 아니고 며칠에 한 번씩 읍사무소에 가서 받아왔다. 이렇게 받은 밀가루가 10포대 정도 되었다. 필자가 벌어온 밀가루로 수제비도 해먹고 콩가루 넣은 칼국수도 만들어 먹었다. 늙은 호박에 팥을 넣은 호박범벅도 해먹었다. 덕분에 쌀이나 보리를 아낄 수가 있었다. 그해 장리쌀의 고리를 끊고 보릿고개를 넘었다. 이제 빚은 없어졌다. 어머니가 두고두고 필자 공을 인정해주었다.
당시는 다 가난한 시절이었다. 먹어야 사니까 흉년에는 콩죽 한 그릇 하고 논 서 마지기를 바꾼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방직공장에 취직한 나이 어린 소녀들이 봉급 받은 다음 날 우체국에 줄을 서서 고향으로 돈을 보내는 모습도 봤다. 고향 집에 보내기 위해 손에 쥔 그 돈이 달랑 3000원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돈으로 오빠나 동생들 학교 다니게 하고 살림 밑천인 송아지도 샀다. 이런 돈들이 모여 논, 밭도 사고 고향 집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한 일등공신들이 수두룩하던 시절이었다. 땅값이나 집값이 지금처럼 비싸다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지만 그 당시는 가능한 일이었다.
필자는 다음 해 공업고등학교 전기과에 진학했다. 적성도 모르고 오직 취업이 잘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공고를 택한 이유라면 이유다. 당시는 공부를 못해서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빠른 취업을 위해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는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나자 동급생들이 하나둘씩 취업되어 학교를 떠났다. 필자도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전매청 연초제조창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담배를 만드는 기계는 이태리 제품인데 요즘처럼 완전자동은 아니나 당시로는 획기적인 자동화 기계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동화 설비에 대해 도면 보는 법을 익히고 고장 난 기계들의 점검하고 수리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익혔다.
군대에서 기술을 더 배워보려고 육군 발전기술병으로 지원했다. 처음에는 대대 참모부에서 군수품을 담당하는 행정병 보직을 받았다. 그런데 전기 일을 하게 될 운명이었는지 부대 목욕탕 관리 병사가 전기 감전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후임으로 전기를 안다는 이유로 필자가 선발됐다. 목욕탕 관리사병은 보일러를 다룰지 알아야 하지만 필자는 보일러에 대해서는 통 몰랐다. 인근 부대를 다니며 독학으로 보일러의 운전법을 배우고 무난히 목욕탕 관리사병의 임무를 마쳤다. 한 번은 목욕탕에 사성장군인 군사령관이 방문했다. 별 4개를 보는 순간 벌벌 떨었다. 35개월을 마치고 제대한 후 한국전기안전공사에 입사하게 됐다. 27세 때었다.
필자 인생에서 전기안전공사를 빼놓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이곳에서 결혼도 하고 자식 공부도 시키고 60세 정년퇴직을 했으며 노후생활도 보장받았다. 안전공사 생활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간부시험에 일찍이 합격한 것이다. 간부는 60세 정년이지만 직원은 58세가 정년이었고 급여에서도 차등이 있어 경쟁이 심했다. 간부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최소 3년의 근무 경력을 바탕으로 하는 근속연수 점수와 상급자가 매기는 고과점수를 합한 기본점수가 있다, 여기에 필기시험을 쳐서 학과 점수를 보태어 성적순으로 뽑았다. 당락을 좌우하는 것은 역시 필기시험이었다.
필자는 상급자인 주임들을 제치고 간부시험에 입사 3년 만에 합격하였다. 간부로 첫 부임지가 공교롭게도 과거 근무한 적이 있는 사업소였다. 간부로 발령받고 보니 옛날 상사인 주임들이 부하로 바뀌어 있었다. 필자도 마음이 불편했지만 주임들도 필자를 대하기에 곤혹스러웠다. 이런 때일수록 필자의 상급자인 과장이 잘 컨트롤 해 줘야 하는데 상급자인 과장도 주임들과 오래 근무한 정으로 심적으로는 주임들과 더 가까운 편이었다. 공식적인 술자리에는 필자가 참석했지만 주임들과 과장 간의 사적인 술자리에는 필자를 고의로 배제했다. 마음고생이 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의 힘으로 간부의 위치를 찾아갔다.
두 번째 사건은 고등학교 후배가 많은 지역에 과장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필자가 졸업한 공고는 선후배 간 위계질서가 엄격하여 동문회 야유회 때는 장난 비슷하게 선배가 후배 엉덩이를 몽둥이로 때리기도 했다. 나쁜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매이니까 웃으며 맞았다. 부부동반으로 야유회도 다녔는데 선배들이 후배 벌주는 것을 부인들이 다 보고 있었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고착화된 선후배 간 전통이었다. 그런데 회사 간부인 필자를 때리기는 아무리 선배지만 버거워했다. 필자로 인해 벌씌우거나 매를 드는 것은 차츰 없어졌다. 하지만 선배들을 사적인 장소에서는 더욱 깍듯하게 모셨다. 술을 따를 때도 3년 이상 선배한테는 무릎을 꿇었다.
세 번째 사건은 기술직으로 감사반장이 된 것이다. 감사는 회계감사가 중요한데 기술회사에서는 기술을 아는 사람이 감사반장을 해야 한다는 사장의 경영방침에 의해서 필자가 선택되었다. 부서별 부장급 감사반원을 이끌고 사업소를 순회하며 실무 감사를 했다. 잘못하는 점보다 잘하는 점을 찾아서 타사업소에 전파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징계도 했지만 표창도 많이 했다. 올바른 비판력과 판단력이 있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았다.
네 번째 사건은 전문대학교에서 겸임교수를 맡은 일이다. 기술사 자격을 갖고 있고 현장 경험이 많다는 점을 들어서 대학교에서 섭외가 들어왔는데, 사장이 허락해 교수직을 겸임한 것이다. 전기응용 과목을 맡았는데 전기응용은 조명, 전동력응용, 전기철도, 전기화학 등 폭이 넓은 실무 분야다. 4년간의 겸임교수 시절은 몸은 힘들었지만 보람도 있었다.
다섯 번째 사건은 전기안전 부문에서 필자가 노력한 일들을 정리하여 공적조사로 만들어 경향신문이 주최하고 한국전력공사가 후원하는 에너지대상을 신청한 결과 국민봉사 부문 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굵직한 상을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부상으로 대만 여행을 보내주고 금 20돈의 황금 열쇠를 받았는데 지금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60세 정년퇴직을 했다. 1남 1녀의 자식도 결혼하여 필자 곁을 떠났다. 비록 나이에 의해 정년퇴직했지만 아직은 신체 건강하여 일자리를 찾았다. 급여는 적지만 필자를 필요로 하는 곳에 다니고 있다. 나이 더 들면 직장에서 완전히 은퇴해야 한다. 그때를 대비해서 취미가 있는 글쓰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글쓰기의 자산은 역시 독서이므로 도서관의 ‘책 읽기 마라톤’에 3년간 참가하여 언제나 1등을 하였다.
귀촌을 위해 도시 근교에 땅도 사두었다. 나이 들어서 버티는 힘은 경제력에서 나온다. 그래서 연금도 부었다. 체력도 중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올해 동호인 테니스대회에서 30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한 것이 기쁘다. 앞으로 전국테니스대회에 노년부로 참가하려고 한다. 우승하고 못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목표가 있어야 한다.
70세가 넘으면 봉사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 건강한 노인이 덜 건강한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에 매진할 것이다. 이것도 공부해야 한다. 사회봉사의 이론을 갖추기 위해 인터넷으로 사이버대학을 수강하여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했다. 말로만 하는 봉사가 아니라 육체가 따라가는 봉사를 위해 발마사지와 경락안마도 배우고 민간자격증도 취득했다, 경험을 얻기 위해 시간 날 때마다 치매센터에 치매전문 자원 봉사자의 일을 하고 있다. 세상살이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신념을 늘 갖고 있다. 필자의 생애가 아직은 진행 중이지만 돌이켜 보니 준비하며 여기까지 잘 왔다고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다.
여름은 무더위[濕熱]가 극심한 계절이다. 노약자는 너무 더워서 사망하기도 한다. 한의학적으로 여름은 콩팥[水]이 약해져서 심장[火]을 제어하기 힘든 계절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건강이란 水火의 균형이 중요한데, 여름에는 火가 극성하고 水가 약해지기 때문에 균형이 깨지기 쉽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름은 피부, 얼굴 등 겉은 뜨거워지지만, 위장 등 속은 차가워지기 쉬우므로 주의해야 한다.
여름철 보양식의 특징은 진기를 보충하며, 땀이 많이 새나가는 것을 막아 주고, 속이 허약한 것을 따뜻하게 하며, 콩팥[腎臟]이 약한 것을 보충해 주며, 무더위를 소변으로 빼주는 것이다.
생맥산은 여름을 대표하는 처방이다. 맥문동 8g, 인삼 4g, 오미자 4g을 물에 달여 마시면 좋다. 여름철에 기운이 떨어진 것을 보충해 주고 무더위를 이기게 한다. 생맥산을 만들기 힘들면 오미자차를 자주 마셔도 좋다.
콩류는 습열을 소변으로 빼주는 효능이 있기 때문에 여름철 무더위를 이기기에 아주 좋은 음식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백편두가 좋은데, 더위를 먹어서 비질비질 땀이 나고 입맛이 없을 때 좋다. 여름철 식중독도 예방한다. 기가 허약하고 몸이 무거운 사람에게 더 맞다. 여름철 콩국수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덩굴 식물은 소변을 잘 나가게 하기 때문에 무더위를 소변으로 몰아낸다. 수박, 참외, 포도, 다래 등 열대의 무더운 환경에 적응한 과일들도 무더위를 잘 풀어준다. 야자, 망고, 바나나 등 물론 반대로 무더위를 조장하는 과일도 있다. 자연은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 가지 선택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여름에는 인체의 겉은 덥지만, 속은 차가워진다. 그래서 배탈, 설사가 여름에 가장 많다. 보신탕, 삼계탕, 뱀장어는 여름철 차가워진 속을 덥혀 주고 피부의 열은 식혀 주는 음식이다.
구선(臞仙)의 에 이르기를, “여름은 사람이 정액[精]과 정신[神]을 빼앗기는 계절이다. 이때에는 심(心)은 왕성해지고 신(腎)은 쇠약해져서 신의 정액[腎精]이 녹아 물이 된다. 이것은 가을에야 응집되고 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굳어지기 때문에, 여름에는 더욱 보호하고 아껴야 한다. 그러므로 여름에는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래야만 가을에 곽란으로 토하고 설사하는 우환을 겪지 않는다. 뱃속이 늘 따뜻한 사람은 자연히 모든 질병이 생기지 않고 혈기가 왕성해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런 음식을 먹을 때는 속을 덥혀주는 부추를 넣어서 먹고, 따뜻하게 데워 먹는 것이다.
보신탕은 개고기에 부추, 생강, 토란대, 마늘을 넣어 만든다. 개고기, 부추, 마늘을 삶으면 아랫배 단전을 덥혀서 강화한다. 토란대는 무더위로 가슴이 답답한 것을 식혀 준다. 생강은 맛을 조화시키고, 방아(배초향)잎은 냄새를 제거하고 소화를 돕는다. 보신탕의 효능을 종합해 보면 여름에 차가워진 속을 덥힌다.
삼계탕은 누런 암탉에 인삼 또는 황기, 마늘, 찹쌀을 넣어 만든다. 누런 암탉은 잦은 소변, 설사, 냉, 하혈을 수렴하는 효과가 있다. 황기나 인삼, 찹쌀은 기운을 보충하면서 피부를 수렴해서 땀이 덜 나게 한다. 삶은 마늘은 속을 덥혀준다.
잎이 큰 열대 식물들은 구멍을 열어 증산작용을 활발히 해서 무더위를 잘 식히는 특징이 있다. 인체 내에서는 땀구멍을 열어 무더위를 식히는 작용을 한다. 연잎은 잎이 크면서 물에 살기 때문에, 땀과 소변으로 열을 식히는 효능이 뛰어나다. 그래서 연잎은 여름 더위, 열사병을 이기는 데 중요한 식품이다. 더위를 먹어 입맛이 없는 데도 좋다. 호박잎밥도 잎이 크기 때문에 더위를 식혀준다. 동남아에서 바나나잎밥(론똥), 파초잎밥, 야자잎밥(크투팟), 대나무로 찐 딤섬 등을 많이 먹는 것도 더위를 식혀 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여름철에 좋은 음식 종류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여름철에 적합한 맛은 어떤 것이 있을까?
첫째, 약간 시큼한 과일이나 음료수, 오미자차나 묽은 매실차를 자주 마시면 땀과 기운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아준다.
둘째, 약한 짠맛이 여름에 필요하다. 사막을 횡단하는 카라반은 소금을 늘 복용해서 진액이 땀으로 새지 않도록 한다. 약한 짠맛을 먹으면 진액을 끌어당겨 땀이 덜 나가게 한다. 그리고 몸의 열을 내려주는 효과가 있다. 여름철에 우뭇가사리를 많이 먹는 것과 콩국수에 소금을 넣는 것도 이런 효능이 있기 때문이다. 보신탕, 삼계탕이 여름 보양식으로 좋은 것도 이 짠맛이 있기 때문이다. 뱀장어도 여름에는 소금을 곁들여 먹는 것이 좋다.
셋째, 단맛이 필요한데, 이때는 초콜릿 같은 맛이 아니라 뒤끝이 달달하면서 입에 침이 고이는 단맛이 필요하다. 더운 여름에는 체력이 많이 떨어진다.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 단 것을 많이 먹는다. 더운 동남아와 중동 사람들이 단 것을 엄청 많이 먹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수박, 야자 등 여름 과일, 열대 과일류는 대부분 달다.
>>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이재준(아호 송유재)
초정(艸丁) 김상옥(1920~2004) 시조시인과의 인연은 198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처녀시집인 을 구하기가 어려워 혹여 선생께선 몇 부 갖고 계실 듯해서 어렵게 전화로 여쭈니, 당신께서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복사한 것만 갖고 있다며, 꼭 구했으면 하셨다.
1947년 ‘수향서헌’에서 1000부 한정판으로 발간한 이 책은 한지 바탕에 편집, 문선, 조판, 장정, 인쇄, 제본까지 저자 혼자 손수 한 출판 역사상 유일한 책이라 그 가치는 상당하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봉선화’ ‘청자부’ ‘백자부’ 같은 빼어난 시조들은 그 가치를 더욱 높인다.
서울은 물론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의 서점가를 발로 뛰어 다니며 수소문하였다. 몇 달 후 진주와 대전의 고서점에서 과 동시집 을 구해 우편으로 보내 드렸다. 선생의 시조를 읽으며 어휘와 음률에 대해 전화로 여쭈면 늘 반가워하시며 작품의 제작 동기와 발표 과정 등을 자상히 알려 주는, 길고 긴 시조강의(?)를 듣곤 하였다.
옥수동에서 압구정동, 그리고 이태원동으로 주소를 옮기셔도 통화는 이어졌고, 아내 아이들과 함께 찾아오라고 하셨으나 왠지 문인으로 등단한 후에나 뵙는다는 치기로, 그리하지 못했다. 2001년에야 이태원동 청화아파트로 찾아뵈었다.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 생활을 하고 계셨는데 한낮부터 설핏 가을 해가 기울 때까지 문학, 고서화에서 시작된 말씀은 조선백자 예찬으로 장강을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서재 곳곳에 놓인 문방사우며 책들도 일일이 꺼내어 살펴보게 하셨다. 탁자에 놓인 벼루에 먹을 갈아 드리니, 준비해 가져간 책에 붓으로 서명을 하고 관지까지 해 주셨다. 선생이 지으신 책 중에 두 권을 빼고는 다 수집해서 소장하게 되었다. 그 후로 세 번 정도 찾아뵈었는데, “바쁠 터인데 이리 자주 오지 마라.” 단호하셔서 어렵기도 하고 문하(門下)가 아니라서 그리하시나 야속하기도 하였다. 그 어름에 합죽선(合竹扇)에 ‘성덕대왕 신종 명(銘)’을 전서(篆書)체로 써주셨고 구작(舊作)인 ‘벽도도(碧桃圖)’의 합죽선도 함께 주셨다.
千年碧桃如大斗 천 년 만에 열린다는 푸른 복숭아 큰 말같이 커서
仙人摘之以釀酒 신선이 이를 갖고 술을 빚어
一食可得千萬壽 한 번 마시면 천 년 만 년 산다네
庚戌春夜 於洌上 白瓷丹硏之室主人 艸丁 塗人掃毫 경술년(1970) 봄 밤, 한강 상류 ‘백자와 단계벼루가 있는 집’ 초정 그리는 사람이 붓을 쓸다.
중국의 시를 빌려 그림을 그리고 화제(畵題)를 썼다. 신선이 먹는다는 벽도 세 개와 무성한 푸른 잎사귀를 그리되 화제가 합죽선 끝을 따라 전서와 행서(行書)로 어우러져 가히 문인화의 정수를 느끼게 한다. 부채고리에는 은으로 된 팔각의 선추(扇錘)가 끈에 매달려 있었는데, 펴서 부칠 때 바람 따라 흔들리는 그 운치가 그만이었다.
이 인연이 합죽선을 수집하는 계기가 되어 한때는 여러 문사(文士)나 서화가의 글, 그림을 합죽선에 받아 100여 점을 갖고 있었으나, 은사님이나 선·후배 동호인에게 선물하고 30여 점만 남았다. 선추는 옥이나 은, 호박, 나무로 깎은 장신구들을 사북이라 부르는 합죽선 손잡이 고리에 매다는 것인데 침통이나 나침반 향갑 등 다양하지만 희귀해서 구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기록들에 의하면 쥘부채라고도 부르는 합죽선은 고려 때부터 실용되어 중국인들이 무척 부러워했다고 한다. 일본이나 중국도 합죽선을 만들기는 했지만 대나무의 부챗살이 40~50개나 되게 만든 180도로 펼쳐지는 합죽선은 우리나라 고유의 산물이다. 조선조에는 전주와 안동에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扇子廳)’을 설치, 부채를 진상하게 하였다. 그곳에서 좋은 대나무와 질기고 우수한 한지의 생산에 근거했을 것이다.
합죽선을 만드는 스물네 공정은 까다롭고 세심해서 수백 번 장인의 손길이 공력을 들여 보름이 걸려야 한 자루가 완성된다. 단오 때가 되면 임금이 합죽선에 경구(警句)를 써서 신하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옥 같은 백선에 좋은 글귀나 그림을 그려, 손에 들고 다니며 수시로 펴서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지인들에게 마음의 뜻을 전하는 격조 높은 선물이었다.
국악의 소리꾼들은 꼭 합죽선을 들고 창을 한다. 격정적인 장면에선 접은 부채를 손에 탁탁 치기도 하고 부채를 180도 확 펴기도 한다. 이 소도구 하나만으로 아취가 있다. 한량(閑良)들의 춤사위는 이 합죽선이 더해져 완성도를 높인다. 반원의 합죽선이 허공을 가르며 추파를 일으킨다.
녹음 짙푸른 한여름, 정자에 앉아 선추 흔들며 시조 한가락 유장하게 뽑으면 가히 선인의 정취가 아니겠는가.
명실공히 현대 수채화의 제일인자라 칭하는 강연균(1940~ ) 화백의 그림들은 늘 사실적인 것에 기저를 둔다. 멀리 있는 것, 허구적인 것, 환상적인 것은 그의 그림에는 없다. 태어나서 자란 남도의 가난한 이웃들의 고단한 삶과 스산하고 보잘것없는 자연 풍광을 탁월한 스케치로 표현했다.
그가 수채화에 전념하게 된 것은 궁핍한 생활 속에서 비싼 유화 물감을 살 수 없는 아픔에 연유 되었다. ‘그가 겪어온 슬픔과 번민과 분노가 맑은 빛깔로 응결되어 있다. 그리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흐르고 있다. 우리 인간의 삶의 원초적인 아픔, 근원적인 아름다움까지 철저하게 파악하려 한다.’고 1981년 봄호에서 평하기도 하였다.
1982년 누드 수채화만의 전시 작품이 모두 판매되는 등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수채화에 스며든 진실성을 모두가 아끼고 사랑한다. 백자 제기에 놓인 석류나, 눈 내린 좁은 비탈길, 광주리를 이고 초라한 굴뚝 옆을 지나는 아낙, 소녀의 비감어린 눈빛 등의 수채화를 수집하고 있던 중 인사동 경매에서 이 합죽선에 그린 ‘우시장(牛市場)’을 낙찰 받았다.
팔러 나온 소 서너 마리가 서거나 앉거나 한 사이로 함지박을 인 아낙이 지나고 촌로들이 소 값을 흥정하고 있으나 긴장감은 없다. 참외 수레 옆에는 팔려는 촌부나 강아지 두 마리도 졸고 있는 한가로운 여름, 시골 장터 한 모퉁이가 부챗살 따라 펼쳐져 있다. 전주의 부채 장인이 만든 이 큰 합죽선에 쌍어문(雙魚紋)의 대추나무 선추를 매달아 보았다.
향리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하였다. 이미 그 세월도 50년이 넘었다. 몇 해 전 이러구러 소원하였던 옛 친구에게 ‘심월상조(心月相照)’라 서예가가 써 준 합죽선을 보냈다. 작은 은방울 선추를 매달아서...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마음속엔 서로 달이 비춘다는 고승(高僧)의 고상한 경지를 빌려보고 싶어서였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나이가 들면서 주변에 채식주의자들이 늘어난다. 절친인 J도 혈관에 스탠트 시술을 받은 이후로는 먹는 데 제약을 받는다. 만나면 항상 술을 마시게 되는데 그 때문에 메뉴 고르기가 어렵다. 필자가 좋아하는 술안주는 족발, 보쌈, 삼겹살 등 동물성이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를 겸하기 때문에 술안주는 푸짐해야 한다. 쇠고기, 돼지고기는 물론 닭고기, 생선까지 못 먹는다니 답답한 노릇이다. 막걸리 안주로 적격인 전 종류도 기름으로 요리하기 때문에 안 좋다는 것이다. 결국 두부김치를 시켜 그는 두부만 먹고 필자는 두부와 함께 가운데 놓인 김치 볶음을 먹는 절충안을 찾기는 했다.
날씬함을 자랑하는 동료 여자 댄스스포츠 선수가 있다. 성격도 쾌활하고 돈도 잘 써서 인기가 좋은데 유독 식사 때만 되면 예민하다. 철저한 채식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고기 종류는 일체 안 먹고 채식만 고집한다. 심지어 멸치 국수나 순두부찌개 같은 음식도 육수가 들어갔다며 까탈스럽게 군다. 그 때문에 지방에 내려 갈 때마다 그가 낙점하는 메뉴가 나타날 때까지 낯선 동네를 헤매야 한다.
필자도 사실은 생선은 가려 먹는 편이다. 바다가 없는 내륙 지방에서 태어나 생선 종류는 지금도 안 좋아한다. 생선 비린내에 친숙하지 못하다. 횟집에서 싱싱하다는 징표로 생선회접시에 온몸을 다 잘린 채 머리가 함께 나와서 눈만 껌벅거리는 접시를 내놓는데 잔인해서 정말 싫다. 수족관에 멀쩡히 잘 노는 생선을 찍어 요리해달라는 식습관도 그래서 싫다.
보신탕이라며 먹는 개고기도 필자가 개를 길러봐서 일부러 찾아가서 먹지는 않는다. 계란이라도 얻어먹어 볼까 해서 몇 달간 길렀던 병아리가 컸을 때 수탉이라고 하여 더 기를 이유가 없었다. 일하는 아줌마가 그 닭을 그 날로 잡아 식탁에 올렸는데 기르던 정이 있어서인지 차마 입을 댈 수 없었다.
나이 들면 나물 종류를 찾게 된다고 한다. 어릴 때 할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할머니의 주름살 가득한 시커먼 손으로 마구 주물러 나물을 만드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었다. 그때부터 나물 종류는 안 좋아 한다. 가장 좋아하던 반찬이 여름철 가재, 가을철 메뚜기볶음이었다. 개울에 사는 올갱이도 고기 종류라고 열심히 잡아 먹었다. 고추장 바른 가죽나무 튀김도 좋아했다. 산나물처럼 조물락거리며 무치는 것이 아니라 기름으로 튀긴 것이라 좋아했다. 가끔 시골에 가더라도 나물 반찬을 안 먹기 위해 라면을 사들고 간다. 물론 모처럼 온 손님이므로 필자가 사들고 간 라면을 그대로 끓여 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필자는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어릴 때 다 같이 못 살았으므로 밥상 반찬이 대부분 풀밭이었다. 어쩌다 고기가 나오더라도 식구가 많으니 국물 듬뿍한 찌개 형태로 나왔다. 그래서 밥상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고 얼굴 두꺼운 형제가 먼저 고기 건더기를 건져 갔다. 서열이 한참 밑인 필자는 국물로 위안 삼았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나물이 냉이 무침이다. 향긋한 냄새가 일품이다. 그러나 뿌리의 흙을 털어내는게 어려운 모양이다. 흙이 씹히면 그때부터 더 못 먹는다. 그나마 초봄의 냉이 무침에 한한다.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냉이는 향기가 없다.
‘이밥에 쇠고기 국’이라고 부자네 식단 메뉴였다. 나중에 돈 벌면 고기라도 실컷 먹겠다는 꿈은 누구나 가졌을 것이다. 다 같이 배고팠을 무렵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친구네 집에 가면 친구어머님은 끼니때마다 고기 반찬이 그득하다. 거기에 또 고기를 굽는다. 한국이 아직도 고기는 비싸서 사먹기 어려운 나라로 기억하신다.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요즘 채식주의자로 바뀌었다며 사양했다.
오랜만에 댄스 동호인들끼리 춤을 추고 나서 뒤풀이를 했다. 근처에 있는 빈대떡집이다. 최근 병원에서 건강 검진을 받은 한 사람이 앞으로는 술도 끊고 채식을 하되 기름에 튀긴 것은 안 된다며 채식주의자 대열에 섰다. 결국 만만한 두부 김치를 주문해서 그 친구는 두부만 먹고 가운데 김치와 볶은 돼지고기는 혼자 먹으니 남아 돌아갔다.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놈)가 말해주듯이 조기 퇴직하는 사람은 많은데 퇴직 후 일자리가 없어서 시니어들의 앞길이 막막하다. 기자는 농업에 뜻이 있는 시니어라면 황후의 꽃으로 불리는 칠자화를 통해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했던 충남 서산시 고북면 용암리 서산아로니아랜드를 방문하였다.
대표 이희준(42세)은 종묘상으로부터 황후의 꽃이라고 불리는 칠자화 10그루를 사서 7년 만에 70만 그루로 번식시켰고 이 나무를 이용하여 1등급 팩, 차, 꿀, 식용(나물) 등으로 사용 범위를 다양하게 넓혀가고 있다.
칠자화는 본래 중국이 원산지인데 왕실에서 주로 이용하던 식물이나, 지금 중국에서는 2급 멸종식물로 지정되어 채취 및 이용이 제한되고 있는데, 이 농장에서는 빠른 기간에 대량 번식과 상품화시키는 데 성공하여 지금은 중국에서 놀라움과 부러움을 보인다.
대표 이씨는 본래 건축학을 전공하고 건설회사에서 일을 하였으나 2년마다 바뀌는 새로운 공법을 배워 적응하는 것이 적성에 맞지 않아 농업에 뜻을 두고 미래 가치농업을 찾던 중 칠자화를 발견하고 이를 대량 재배하여 상품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이 사업을 할 당시에는 좋은 직장 버리고 이상한 나무에 매달린다고 주위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으나, 농법에 조예가 깊은 사람도 1년 이상 걸리는 배양을 3~4개월 만에 해내어 대량재배의 길을 열고, 식용 및 화장품 등으로 상품화하자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칠자화를 상품화하는 과정에서 특허가 필요했는데 한국 특허청에서는 사례가 없다는 이유로 허가를 내주지 않아 고민이 많았으나, 종주국 미국의 특허제도를 이해하고 여기서 특허를 출원하여 허가를 받았는데, 중국 등 해외 진출에 오히려 유리한 입장이 되었다.
한국 특허청이 허가해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묻자 “특허청 나름대로 어려움과 고민을 말해주어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가 실현을 거두려면 이런 것부터 개선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칠자화는 1년에 두 번 꽃이 피는데 7~8월 여름에는 재스민과 라일락 냄새가 나는 하얀 꽃이 1개월가량 피고 가을에는 자주색 빛깔의 꽃이 피는데, 향이 진해 양봉으로 이 꽃에서 채취한 꿀은 건강과 미용에 너무 좋아 없어서 못 판다.
꽃이나 꿀은 항산화 억제, 피부재생, 항염작용 등이 다른 것의 10~100배 높은 효과가 있어 팩이나 차 등으로 개발하였는데 팩은 1개 8,000원, 1갑(4개) 27,000원으로 가격이 다소 비싼 편이지만 이를 사용해본 사람은 누구나 최상급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칠자화는 미국에서 최우수 조경수로 선정되는 등 미국과 유럽 등에서 인기가 높은데, 한국도 지방자치단체에서 조경수로 사용하기 위해 묘목을 사기 시작했고, 이 농장에서 열리는 축제는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어 관광산업에도 기여하고 있다.
42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임에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고 괄목할 성과를 이룰 수 있었는가에 관하여 묻자 “오직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음만 있으면 길은 있다”고 말하면서 농업을 하면서 따낸 자격증만 9개(안전기사ㆍ조경기사 등)나 된다.
그는 특히 “최근 중국에 다녀왔는데 중국에서는 무엇을 재배했다 하면 최소 100만 평을 심으나 한국은 30만 평밖에 되지 않는다”며 “앞으로 중국과 경쟁하려면 100만 평 이상 경작지를 늘려야 하는데, 소요비용은 제품 판매를 통해 나오는 수익금을 확보할 생각”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밭을 가진 사람들이 칠자화를 재배할 경우 협력농장으로 인정하여 배양기술을 전수하고 직접 수매해주면 굳이 부지를 매입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고 묻자, “좋은 방법”이라며 검토해보겠다고 하였다.
필자가 보기에도 칠자화는 새로운 고수익 상품으로 독점 성장할 여지가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영농에 뜻이 있는 시니어라면 칠자화를 재배하는 방법도 좋은 대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시니어들에게 가장 익숙한 운동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걷기’다. ‘프리맨 도보여행’ 클럽은 걷기의 즐거움을 깨닫고, 걷기를 통해 건강을 가꾸고 있는 시니어들의 모임이다. 프리맨 도보여행 클럽의 대장을 맡고 있는 기윤덕(奇允德·58) 대장의 목소리를 통해 걷기의 매력과 즐거움을 확인해 본다.
시니어를 위한 종합 포털 유어스테이지에 자리한 ‘프리맨 도보여행’ 클럽은 회원 708명에 방문자수 11만 명에 달하는 인기 클럽이다. 2010년 12월 첫 모임을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매주 모임을 가지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프리맨 도보여행 회원들은 그 이름 그대로 ‘걷기’를 좋아하고 찬양하며 그 즐거움과 가치를 전파하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 있다.
철저하게 자발적인 시니어 모임 추구
“처음에는 산을 다니다가 프리맨 도보여행에 가입하게 됐어요.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건 사람들이더라구요. 그리고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건강도 좋아졌어요. 연세 드신 분이 많다 보니 항상 배려가 있습니다. 걷는 것만이 다가 아니잖아요. 시니어들은 항상 외롭거든요. 나란히 걸으며 소소한 이야기 나누고 서로를 배려하면 모든 게 좋아지는 것 같아요.”
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기윤덕(奇允德·58) 대장의 말에서 ‘시니어를 위한 도보여행 클럽’으로서의 프리맨 도보여행을 정의하는 ‘사람’과 ‘건강’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발견된다. 사실 프리맨 도보여행 클럽에는 관절염, 디스크 등의 문제를 치료하거나 예방하려는 목적으로 가입하는 사람들도 제법 된다고 한다.
기 대장은 “유어스테이지가 클럽 활성화를 시작하면서 시니어들의 체력에 적합한 활동으로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고, 시니어들이 가장 좋아하는 걷기 클럽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프리맨 도보여행’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했다. 프리맨 도보여행은 철저하게 자발적인 시니어 모임을 지향한다. 그러한 정체성은 심지어 회칙에도 기재되어 있을 정도다. 클럽의 그러한 성격은 도보 자체가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족 같은 관계가 된 회원들
프리맨 도보여행 클럽은 자발적인 모임으로서는 이례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정기 모임과 번개 모임이 활발한 편이다. 매주 일요일 서울·경기 지역의 걷기 코스를 순회하고, 주중에도 야간 산행 등 번개 모임을 수시로 가진다고 한다. 특별한 날이나 여행을 갈 때는 20~30명이, 평소에는 15명 내외의 회원이 모여 걷기 여행을 떠난다. 매주 일요일 오후 2시쯤 모여 서너 시간 걷고, 뒤풀이로 맛집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헤어지는 일정이다. 2010년에 시작됐으니 올해로 벌써 6년째. 개중에는 수년째 보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가족 같은 관계가 된 사이들도 있다고 한다.
“물론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니 갈등이 없을 수는 없죠. 너무 가족 같고 격의 없이 대하다 보니 실수가 일어날 때도 간혹 있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대화를 하고 조금 시간이 흐르면 전과 같이 편하고 터놓는 관계가 됩니다.”
자주 보는 동호회의 저력이랄까. 기 대장이 클럽을 운영하며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 ‘사랑과 배려심 그리고 자유’라고 말한 것처럼 프리맨 도보여행은 자율적인 조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게 이채로웠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은 더 나아가 사회를 위하는 마음이 되고, 그런 마음이 모여서 기부와 봉사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회비를 모아 연말이 되면 기부를 하거나 봉사 활동을 하는 것도 클럽 활동의 중요한 일부다.
배려가 있는 즐거운 걷기를 위하여
걷기를 통한 건강 일화들에는 간혹 전설적인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맨발로 전국을 도보로 걸어서 암을 치료한 사람의 얘기라든지. 물론 그렇게 암을 치료하게 된 경우가 일반적인 경우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그 정도 수준은 아니더라도 프리맨 도보클럽 또한 몇몇 가지 건강 사례들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클럽의 한 회원은 척추협착증 때문에 10분도 못 걸었다고 한다. 2년간 클럽 활동을 한 그는 지금은 3시간은 너끈히 넘기면서 걸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한 회원은 당뇨병과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차츰 증세가 호전되어 모임에 나온 지 1년 만에 선두에 서서 걷게 되었다. 한 운영위원은 암 수술 후 열심히 참여하며 건강을 찾아가고 있다. 또 우울증이 있거나 혈압이 높았던 회원들이 이제는 약을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좋아졌다며 클럽에 대해 고마워하기도 한다.
의학적으로 정교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운 이와 같은 현상들은 모임이 가지고 있는 편안함에서 비롯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기 대장은 클럽을 설명하면서 행복과 평화를 강조했다.
“저희 클럽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든 강압이 없이 자율적으로 진행합니다. 그리고 5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모이다보니 항상 배려가 있어요. 시니어들은 외로울 수밖에 없고, 사람은 살다 보면 상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저희 클럽에서는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 나누고 정겹게 교감하면서 상처를 치유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게 강점이죠. 저희가 굉장히 재미있어요. 일요일에 도보를 한다는 걸 어려워하는 분들도 있지만 막상 나와 보시면 모두 즐거워하십니다. 회원들 간의 마음의 교류가 있기 때문이에요.”
한 달에 두 번은 쉬운 코스, 두 번은 어려운 코스 등 난이도를 조절해 가면서 길잡이가 사전 답사를 통해 꼼꼼히 회원들을 위해 준비한다. 일련의 이런 과정들이 최적화되면서 프리맨 도보여행 회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사고와 평화를 가질 수 있도록 운용지침들이 다듬어져 있었다.
치유하는 걷기, 어렵지 않다
기 대장은 평소에는 부담 없는 코스를 택해 서울과 근교의 둘레길을 주로 가는 편이라고 말했다. 북한산 둘레길, 서울 성곽길, 서울 둘레길 등 아름다운 곳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계절마다 경치가 다르다 보니 갔던 곳도 계절이 바뀌면 다시 찾기도 합니다. 특히 봄과 가을에는 꽃을 테마로 길을 잡기도 하죠.”
매년 한 번 정도는 멀리 지방으로 여행을 가는 정기 모임도 있고, 뜻 맞는 사람끼리 삼삼오오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연초에는 2박 3일 코스로 동해안 영덕, 부산 등을 찾아 도보 여행으로 새해를 열기도 한다. 테마 여행으로 서해안에 있는 여러 섬을 걷기도 하고 특별하게는 제주도에 가서 올레길을 걷고 온 적도 있다. 작년에는 지리산, 진주, 진도를 다녀 왔다. 올해도 제주도로 떠날 예정이다.
기 대장은 평지를 갈 때는 워킹화로도 충분하지만 중간에 산이 있을 때면 등산화를 신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클럽에서는 주로 여름에 산을 가는 편이라고 한다. 시니어에게는 비타민D가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모일 때마다 참가비로 2000원씩 걷고, 뒤풀이 저녁 식사는 n분의 1로 각자 지출합니다. 이렇게 해서 모은 회비는 연말에 회원들 선물과 불우 이웃 돕기에 쓰지요. 추석이나 설 등 특별한 날이면 봉사 기관에 직접 찾아가 노숙인 및 홀몸 어르신들께 봉사 활동도 했습니다.”
단순히 걷기만 하는 것보다 클럽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봉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의미이기도 하거니와 자체적인 이슈로서도, 그리고 클럽의 자부심으로서도 남을 수 있는 일이다.
“좋은 자연을 만나서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걸으면 힘든 일도 자연스럽게 치유가 이뤄집니다.”
기 대장의 말에는 프리맨 도보여행 클럽이 추구하는 자연스러움의 가치가 담겨 있었다. 그 힘들다는 치유, 이렇게 쉽고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창한 게 아니라 단지 마음 먹고 시작하면 되는 일, 아직 늦지 않았다.
60대 초반 정년퇴직과 함께 몸 좀 만들어 보겠다는 심산으로 가끔 타고 다니던 자전거로 장거리 라이딩이란 황당한 도전에 처음 나선 것은 지난해 가을. 동해안 최북단인 강원 고성군 금강산콘도에서 강릉시 정동진까지 2박 3일간의 해안선 라이딩에 나선 것이다. 심장이 방망이질 쳐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수백 번, 수천 번을 들었으나 포기하지 않고 정동진까지의 라이딩에 성공했다. 비록 작디작은 성공이지만 스스로가 너무 대견했던 필자는 올해는 자전거 라이더들의 영원한 꿈인 낙동강 700리 길(3박 4일) 라디딩에 도전하기로 했다. 거리가 멀다 보니 혼자 달리는 것은 너무 외롭고 위험할 것 같아 필자가 속해 있는 자전거 동아리 SD21 회원 5명도 당돌한 도전에 동참하라고 사주했고 회원들도 흔쾌히 동의해줬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작은 도전기를 5회로 연재한다.
5월 5일 어린이날 드디어 그토록 고대하던 출발이다. 우리는 서울에서 자동차에 자전거와 먹을 것을 싣고 경북 안동댐으로 향했다. 쾌청한 날씨는 왠지 모를 설렘으로 다가왔고 우리의 도전을 축하해주는 것 같았다. 안동댐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쯤이었다. 낙동강 700리 길 자전거 라이더들이 도장 받는 안동보인증센터 주차장에서 모두 라이딩 복장으로 갈아입고 라이딩의 첫발을 뗐다. 오늘의 목표는 안동보에서 상주보까지다.
아직도 서늘한 기운이 있어 바람막이 옷을 입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등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자전거길 중간마다 나타나는 업힐을 오를 때는 숨이 막혀 오뉴월 개처럼 헐떡거렸다. 어쩔 수 없이 나이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말로만 듣던 낙동강 700리 길의 첫 도입부는 무르익어가는 봄으로 상큼했다. 둑길에 가지런히 피어 있는 라일락 꽃의 향기가 코끝을 야릇하게 자극하고 서울에서는 아직은 철 이른 아카시아 꽃도 흐드러지게 피어 달콤한 향기와 백색의 우아한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5월의 아카시아 꽃잎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어린 시절 꽃잎을 입에 넣고 우걱거리면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히 퍼졌다.
낙동강 물줄기는 광활한 평야의 젖줄처럼 유유히 흐르고 물줄기가 휘돌아 치는 모퉁이마다 기암괴석과 수목이 어우러져 참으로 멋진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멋진 풍경 속으로 우리는 미끄러지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가히 한 폭의 그림이었다.
몇 개의 고개를 넘은 뒤 굽이굽이 강줄기를 따라 페달을 밟으니 어느덧 안동시 하회마을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잠시 가쁜 숨을 고른 뒤 다시 달려 예천군으로 접어들 무렵 온몸이 묵직하고 다리가 뻐근해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길가의 어떤 상점 앞에 멈춰 목을 축이는 동안에 우연히 해맑은 표정의 두 젊은이를 만났다. 그곳에서 만난 그들의 자전거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무거운 많은 짐이 실려 있었다. 숙식에 필요한 텐트와 일체의 장비를 갖추고 서울에서 출발해 부산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누군가 ‘청춘은 꽃’이라고 했던가?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그들은 부산까지 자전거로 이동한 다음 전남 목포시까지는 대중교통으로 점프해 목포에서 제주도까지 배를 타고 간다고 했다. 환상의 제주도 자전거 일주도로를 정복한 다음 서울로 돌아가는 방법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고 한다. 누구나 젊다고 해서 다 이런 도전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일행 모두는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격려를 나눈 뒤 다시 출발해 달리는 내내 그들의 젊고, 건강한 향내가 깊은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