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간을 달려왔는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부모님을 따라 청량리역에 내린 시각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다. 청량리역을 나서면서 필자 입에서 나온 일성은 ‘아부지! 하늘에 호롱불이 좍 걸려 삣네요’였다. 그때가 필자 나이 9세이던 1966년 가을이었다.
필자는 경주 인근 작은 산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었다. 초등학교는 논밭 사잇길을 지나 형산강 상류 얕은 곳을 건너고 긴 아카시아 터널과 무서운 보리밭을 지나야 갈 수 있는 먼 곳이었다. 농사철이나 눈보라가 심한 겨울날에는 학교에 오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작은 산골 마을에서 필자 집은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방이 두 개고 방 사이에 작은 부엌이 있는 초가집. 아버지는 일하러 서울에 가시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들과 그 집에서 살았다.
그 시절 서울에서 철공소 일 하시던 아버지께서 다 망가져서 내다 버린 세발자전거를 주어다가 용접하고 색칠해서 보내주신 적이 있다. 그 신기한 물건은 나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한번 태워달라고 내 자전거 뒤로 동네 아이들이 긴 줄을 지어 따라 다녔다.
정식으로 학교에 다니신 적이 없는 어머니께서는 동네 할아버지들을 찾아다니면서 한글을 깨치시고 셈법을 배우셨다. 배움에 한이 맺히신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 ‘ㄱㄴㄷㄹ’ ‘가나다라’가 빽빽하게 들어 있는 책받침을 사다 주셨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깨우쳤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반장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 해에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 오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2학기인 1966년 가을이었다. 검정고무신을 새로 사면 아까워서 신지 못하고 며칠 동안 들고 다녔고 반딧불이 여러 마리를 잡아넣은 호박꽃을 움켜쥐고 밤길을 뛰어다니던 천방지축 필자가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청량리역에서 태어나서 처음 본 가로등을 하늘에 좍 걸려 있는 호롱불로 알았던 것도 당연한 이치.
몸이 약하고 왜소했던 필자는 서울 아이들의 놀림감으로 충분했다. 심한 경상도 사투리는 심지어 선생님들도 놀림감으로 사용했다. 가난도 한몫했다. 솜틀집 귀퉁이 작은 방 하나에 우리 전 가족이 살았다. 시골학교에서 반장을 했던 필자는 자신감이 자꾸 사라졌다. 필자는 더 우울해지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변했고 외톨이가 돼갔다.
그러던 중 친구가 하나 생겼다. 그 친구와는 어떤 계기로 가까워졌는지 기억에 없으나 어린 시절 은인이었다. 그 친구네 집은 'ㅁ‘자 모양의 큰 기와집이었는데 마당 가운데에는 꽃이 피는 정원이 있는 대궐 같은 집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늘 필자를 자기네 집에 데리고 갔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해 주셨다. 반들반들 거리는 마루에 그 친구와 단 둘이 앉아서 텔레비전을 봤다. 그 친구는바둑도 실력급이어서 필자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친구네는 검은색 자가용이 있었는데 광나루에 물놀이 갈 때는 필자도 같이 데리고 가 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 단 일 년 동안의 시간을 보내고 그 친구와는 연락이 끊어졌다. 4학년 때 필자 집이 멀리 이사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의 이름을 긴 세월 동안 잊지 않고 있었다. 성씨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의 이름은 언제나 또렷하게 가슴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우울하고 힘들어하던 어린 시절에 필자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고 필자가 다시 용기를 갖도록 만들어 준 친구. 우여곡절 끝에 나는 2008년에 그를 찾아냈다. 만나서 얼굴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지나간 사십여 년의 긴 시간도 같이 지낸 듯 친근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처럼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그는 원불교 성직자가 되어 있었다. 어릴 때 필자에게 했던 그 나눔을 평생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건네준 시집에서 그 친구와 함께 꼭 뵙고 싶었던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신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의 그림 솜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우리가 시골에 살 때 아버지는 서울에서 철공소 일을 하시면서 돈을 벌어 보내셨다. 그렇게 일하시면서 그림 공부를 하시고 그 시절 미대를 졸업하셨다. 본래부터 가지고 계시던 재능인 그림 공부를 하신 후 평생 나염 공장에서 도안 그림을 그려 가족을 부양하셨다. 블록으로 지은 쪽방 도안실에서 꽃 그림을 그리시는 모습이 아직도 필자 기억에 남아 있다. 철공소의 험한 일은 그만하셨지만 나염공장도 열악하기는 별 차이가 없었다. 월급을 못 받는 경우도 많았고 다니시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나는 경우도 있었으니 우리 집은 늘 가난했다.
필자가 고3 때 미대를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중ㆍ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받은 상은 전부 그림 상이었다. 사생대회를 나가기만 하면 특선을 했다. 필자는 그림이 좋았고 평생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대신 그림과 관련이 있는 건축과로 가라고 하셨다. 건축이 무엇인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필자는 건축과를 가게 되었다. 그림에 빠져있던 내가 공대 건축과를 갈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하게도 수학을 잘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건축과 학생 중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선후배가 모여서 작품전을 준비하는 써클에 가입했다. 1년에 5개월 정도를 써클룸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설계 공부를 하며 작품전을 준비했다. 그 당시 써클룸은 학교의 제일 높은 산 위에 있는 건물의 지하 보일러실 옆 정화조 위에 있었다. 냄새 나는 좁은 공간에서 저학년들이 전체 인원이 먹을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먹는 그 밥으로 대부분 영양실조 상태였다. 잠은 제도판 위에서 쪼그리고 잤다. 낮에는 자고 밤을 꼬박 새우면서 설계하는 습관 때문에 수업을 많이 빠졌다. 그러니 제때에 졸업 못 하는 선배들도 있었고 필자도 학점 미달로 한 학기를 더 다니고 졸업하는 신세가 됐다. 그렇게 희로애락을 함께한 선후배들은 사회에서도 형제처럼 서로 도우면서 건축을 할 수 있었다. 남자 형제가 없는 필자는 그렇게 맺은 건축과 선후배들이 형과 아우 같은 관계를 만들었고 지금도 그 연결고리에서 도움을 받고 나누고 있다.
졸업 후 7년 동안 건축 설계사무실의 도제 생활을 거치고 나서 건축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나이 서른두 살에 건축설계사무실을 개업했다. 개업하기 한 해 전에는 결혼해서 첫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세 식구가 살 작은 원룸 아파트도 돈을 빌려서 전세로 들어갔고 사무실 개업비도 전부 선배들에게 빌려서 해결했다. 1989년이었다. 개업하자마자 일이 밀려 들어왔다. 그 시절 온 나라는 공사판이었고 설계일도 넘쳐났다. 삼십 대 초반에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만져보지 못한 큰돈이 들어왔다. 직원 수도 늘어났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가 많아졌다. 골프도 치러 다녔다. 둘째 아들이 태어난 후엔 작은 전셋집에서 분양받은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필자의 삼십대는 건축이 가져다준 풍요에 방향타를 놓치고 흥청거렸다. 그러나 그 풍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늦가을 어느 날 세상은 천지개벽했다. 그날 필자는 선후배 골프모임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고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급히 연락이 왔다. 설계, 감리를 시행하고 있는 현장에서 인부 두 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경찰서에서 여러 날 공사현장 사고 조사를 받는 중에 IMF가 터졌다. 처음엔 IMF가 뭔지도 몰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필자가 거래하던 중소 건설회사는 전부 부도가 났고 예정된 모든 설계프로젝트가 사라졌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거품이 터지듯 사라졌다.
필자가 사십 대에 접어드는 시기에 일어난 악몽이었다. 삼십 대에 이룬 것을 전부 잃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간 일거리가 없었다. 빚이 눈덩이처럼 쌓여가고 독촉장들이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급기야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협심증과 감각마비라는 중증 질환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신경과 전문의인 둘째 처남이 약을 지어주면서 ““약은 상태호전에 큰 도움이 안 되니 가능하면 약을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진단을 했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는 가족의 단결도 가져왔다. 어머니께서는 늘 기도해 주셨고 아내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밤마다 뜸을 떠주고 필자 손바닥에 빽빽하게 수지침을 놓아 줬다. 몇 달 후 건강이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필자 사진 한 장이 지금도 남아 있다. 허공을 바라보는 초점 없는 눈과 창백한 피부. 그 당시 얼굴은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
이런 가족의 성원에 보답하려고 당시 건축설계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동안 건축을 하면서 예술가인 양 거드름을 피우고 살았으나 필자의 사십 대 건축은 단지 생계 수단일 뿐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빚을 정리하면서 사십 대를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아이들의 키가 나보다 더 커져 있고 필자 머리카락이 반백이 된 것을 알았다. 필자의 불혹은 말 그대로 허무하게 지나갔다.
내 나이 오십이 되던 해, 그러니까 2007년부터 매년 한가지씩 이루어 나가기로 했고 지금까지 실행에 옮기고 있다. 담배 끊기, 목 조각 배우기, 책 내기, 상담사 자격증 따기, 강의하러 다니기, 새로운 사람 오십 명 사귀기 등이 그동안 내가 실행한 일들이다. 올해는 캘리그라피에 도전하고 있다. 앞으로도 매년 성취 가능한 목표를 하나씩 세우고 꼭 이루어 나가려고 한다.
2007년도부터는 건축 분야 가운데서도 환경, 생태건축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연구하고 있다. 어류를 포함한 동물 공부도 하고 수목원과 식물원을 찾아다니면서 식물도 공부하고 있다. 건축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필자가 연구하는 건축은 사람과 함께 지구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을 위한 환경이다. 그와 더불어 지속가능한 소득이 있는 시니어타운을 연구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해 아파트 하나가 재산 전부인 대부분의 베이비부머들에게 작지만 그림 같은 집을 갖게 하고 싶다.
필자가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가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인생 후반전을 능동적이며 긍정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에 필자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퇴직한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생애 재설계 강의도 하러 다니는데 이것도 같은 차원이다. 사실 한국의 시니어들은 퇴직 후의 인생 2막에 대해 대책을 세울 여유가 없었고 앞으로의 대안도 마련돼 있지 않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 대안의 하나로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계속하면서 관계를 넓혀가려고 한다.
최근에 필자는 ‘5070세대의 가슴 펄떡이는 기사를 쓰실 기자를 찾습니다’라는 이투데이의 시니어기자단 모집기사를 보면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필자 희망대로 필자의 경험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배울 수 있는 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야가 좀 더 넓어지고 깊어지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니어들과 서로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의 삶은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대한장애인댄스스포츠서울연맹 소속 선수 겸 코치이다. 자원봉사자로서 시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댄스스포츠를 가르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혼자서는 댄스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나 같은 비장애인이 파트너로 같이 경기대회에 나간다. 올해가 4년째이다.
장애인들은 겨울철 빙판이 위험하기 때문에 겨울 동안에는 훈련을 쉰다. 그리고 대략 4월부터 새로 선수등록을 하고 연습에 들어간다. 그리고 6월부터 대회에 출전한다. 겨울 기간이 길기 때문에 그 사이에 신상의 변화도 생기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매년 4월이면 안무를 새로 짜고 5월부터는 파트너와 만나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4년 전 처음 만난 파트너는 60대 후반의 시각장애인 할머니였다. 선천적으로 전혀 앞을 못 보는 전맹이었다.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허약해 보였다. 나이를 물어 보니 수줍은 듯 자기 나이를 밝히며 너무 늙지 않았느냐며 미안해했다. 나이도 많지만, 몸이 너무 허약해 다른 시각장애인들처럼 자이브나 차차차 같은 격렬한 라틴댄스는 무리여서 다른 장애인들이 춤출 때 구경만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내가 택한 것이 왈츠, 탱고 같은 모던 댄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각장애인들에게는 공간의 이동이 많지 않은 라틴댄스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농구장에서 하는 경기대회에서 플로어 전체를 돌면서 추는 모던댄스는 무리라고 봤던 것이다. 그러나 한 손만 잡고 추는 라틴댄스보다 한손을 서로 손을 맞잡고 다른 한 손을 여성은 남자의 어깨에, 남성은 여성의 등을 잡아주는 모던댄스가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왈츠 교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왈츠에서 그네의 흔들리는 스윙을 설명하기 위해 그네를 타 봤느냐고 물었더니 그네 자체를 모르고 있었고 타본 적도 없다고 했다. 탱고의 동선을 가르치기 위해 게처럼 옆으로 가는 것을 설명하고자 했으나 역시 게를 본 적이 없어서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다른 시각장애인처럼 점자를 배운 것도 아니었다. 원래 학교를 전혀 다녀 보지 못한 무학이었기 때문에 점자도 배울 생각도 안 해봤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팔과 다리를 잡아 기본 동작을 가르치고 스텝을 외우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시작했으나 다행히 몸이 가벼워서 내가 리드해 나가기 쉬웠다. 스텝을 외우지 못 했어도 내가 힘으로 밀고 나가면 내게 몸을 맡기기 때문에 춤추는 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성격도 좋았다. 얼마 안 되는 장애연금으로 생활하는 형편이었으나 아침부터 복지회관에 나와 수영, 사물놀이 등 무료 강좌를 열성적으로 배웠다. 간식으로 주는 빵이나 떡, 과자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와중에도 받은 먹거리를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가 내게 줬다. “선생님! 선생님!”하며 따르는 모습도 귀여웠다. 그해 첫 대회는 6월에 열린 춘천 전국대회였다. 해마다 6월에는 장애인 대회가 시작된다. 전국 18개 시도에서 모인 선수들끼리 대회를 벌이는 것이다. 필자는 그와 왈츠로 출전했다. 그런데 당당히 3등을 한 것이다. 메달과 상장을 거머쥔 그는 너무나 감격해 했다. 그렇게 시작해 그해 왈츠와 탱고로 전국대회에 출전하며 상위권의 성적을 냈다. 가을 전국체전에서는 단체전 금메달까지 땄다. 그렇게 필자와 한 해를 보내고 그도 다른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고령으로 은퇴했다.
다음해에 만난 파트너는 30대의 젊고 아름다운 시작장애인이었다. 겉보기에도 시각장애인 같지 않았고 아주 가까운 거리는 어렴풋이 볼 수 있는 약시였다. 댄스에 소질이 있어서 가르치는 것을 쉽게 이해했다. 몸매도 예뻐서 같이 춤출 만했다. 장애인대회에서는 처음으로 모던 5종목으로 출전할 정도로 출중했다. 4월에 처음 만나 6월에 창동에서 열린 첫 대회에 나갔다.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장애인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오후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 일반인대회에도 출전해 역시 좋은 성적을 올렸다. 시각장애인이 일반인대회까지 나간 것도 처음이지만, 좋은 성적까지 거둔 것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오전 장애인대회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이 전맹도 있고 약시도 있으므로 공평을 기하기 위해 안대를 착용한다. 그때는 스텝을 전혀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러나 오후에 일반인대회에 나가게 되자 안대를 벗자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방향 감각에 혼란이 왔는지 댄스를 시작하는 코너를 멀쩡하게 잘했던 오전과 달리 반대편에서 해야 한다며 우기기도 했다. 관중들을 의식하면서 스텝을 간혹 틀리기도 했다. 이 파트너와는 그해 장애인대회는 물론 일반인 대회도 나란히 출전하면서 자랑스러운 성적을 만들어 나갔다. 그해 여름,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전에 대중 무용부문으로 참가하여 댄스스포츠로 수상한 것이 그와의 마지막 출전이었다. 안타깝게도 안마사로서 주야간으로 몸을 혹사하다 보니 건강을 상한 것이다.
올해도 6월부터 장애인 댄스대회가 시작된다. 지난겨울 동안 역시 서울연맹 소속 선수들의 신상에 변화가 많았다. 주로 청소년부 선수로 활동하던 남자 비장애인 선수들이 군 입대한 사람이 많아 새로 파트너를 짜야 한다. 내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어쩌면 단일 파트너가 아닌 종목별로 따로 파트너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6월을 위해 지금부터 또 땀을 흘려야 한다.
여전히 청춘의 시간을 통과하는 이화여고 정동길을 안혜초(安惠初·75세) 시인과 걸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 나이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젊음을 보여줬다. 민족지도자인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1891~1965)의 손녀이기도 한 그녀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1967년 의 추천으로 등단했으니 작가로서의 경력도 내년이면 50주년이 되는 원로시인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이와 경력에 안주하지 않고 여전히 꾸준한 시 활동과 더불어 소설, 콩트, 동화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준비하고 있는 안 시인의 젊음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랑 지금은
잠들어 가도
조금씩 알게 모르게
잠들어 가도
그대와 나
어느 한쪽이라도
깨어 있으면
오뉴월의 싱그러운 햇바람으로
깨어 있으면
우리 사랑 이대로
스러지지 않아요
그대 사랑 나 먼저
하품을 하면
내 사랑이 자꾸
자꾸 흔들어 주고
내 사랑이 그대 먼저
눈을 비비면
그대 사랑 자꾸
자꾸 흔들어줘서
- 중
안혜초 시인의 시 은 2006년 봄, 시비(詩碑)로 만들어져 전남 화순군 남면 운산리 평화문화휴양 시비공원에 세워졌다. 또한 2004년 가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중국어역시집의 제목으로 선정, 타이틀 포엠이 되기도 했다. 1941년에 태어난 안 시인의 나이를 잊게 만드는 풋풋함이 담겨 있는 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감수성은 저 시를 쓴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한 듯해 보였다.
시는 기도, 일기, 편지, 세상에 내보내는 뜨거운 메시지
안 시인이 기억하는 자신이 처음 쓴 글은 중학교 2학년 때다. 에서 내는 문예지에 투고했던 산문이었는데 제목은 였다. 그 글이 입선된 것을 계기로 문예란에 계속적으로 글을 투고했다. 이화여고 재학 중 교지 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사람이 된 것이다.
안 시인 스스로 말하길 자신에게 시란 ‘기도, 일기, 편지, 세상에 내보내는 뜨거운 메시지’이다. 그녀는 어떤 길을 갔더라도 시만큼은 계속 썼을 거라고 말하는 투철한 시인이기도 하다.
“무얼 바라서가 아니라 시를 쓰지 않곤 못 배겼을 겁니다. 오죽하면 내가 ‘시는 내게 있어 평생 결혼만큼은 하고 싶지 않은 숙적 같은 연인’이라고 시로도 썼을까요?(웃음) 평범한 시민인 나는 사회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제 시는 관념적이지 않고 쉽죠. 조금이라도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시를 쓰고자 앓고 또 앓았습니다. 시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 시는 쓰는 시인이 아프면 시도 아프고 시인이 비틀어지면 시도 비틀어집니다. 그리고 원래는 언론인으로 크게 성공하고 싶었는데 건강 문제도 좀 생기고 결혼 생활과 병행도 힘들고 해서 집에서도 쓸 수 있는 문학 쪽으로 기울어졌지요.”
윤동주 시인과 안혜초 시인
안 시인은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시집 와 영화 의 흥행으로 다시 주목받게 된 윤동주 시인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바로 2001년 제17회 윤동주문학상의 수상자이기 때문이다.
바보야, 이 바보야
차 한 잔
사과 한쪽에도 맘에 걸리고
잎새에 이는 잔바람에도
잠 못 이루는 …
- 중
“자작시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윤동주 시인하고 나하고는 기질적으로 비슷한 데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동안 50년 가까이 시를 써 오면서 꽤 여러 번 문학상을 받았는데 윤동주문학상은 그중 가장 먼저 내세우고 싶은 상이기도 합니다. 이 상이 내게 더의미가 있는 것은 한국문인협회 사상 처음으로 수상자를 한국문인협회 이사진 및 문협지회장 투표로 결정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동안은 심사위원에 의해 결정했는데 당일 회의석상에서 ‘수상자 선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열띤 토론 끝에 투표로 하자고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난 그 당시 임원이 아니어서 나중에야 알았지만.”
안 시인은 자신의 시집들 중 가장 아끼는 시집은 따로 없고, 시집마다 각별히 아끼는 시들이 있다고 밝혔다.
“이제 시선집을 내게 되면 시선집이 되겠지요. 지난 2012년 9월 세계한글작가대회(국제펜한국본부 주최) 한영대역 자선 소시집을 만들어냈는데, 현재로선 그게 가장 아끼는 시집이에요. 시집 제목은 이구요.”
그녀가 시를 쓰면서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보너스 같은 일들이 있다. 와 등 두 편은 시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 , , 등 여러 편은 작곡되어 노래로 발표되기도 했다. 그녀는 시가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보람 있고 행복한 일이라고 재차 말했다.
오랜 경륜에서 다져진 삶의 철학과 포스
관념적인 시가 아닌 생활 속에서 살아 있는 시를 쓰고 싶었고 주로 우리 누구나의 보편적인 진실을 추구했다는 안 시인은 그렇게 살아있는 것에 대한 몰두를 통해 자신의 생명력을 지켜왔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피할 수 없는, 나이듦에 대한 깨달음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늘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들이 쌓여 있어서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민센터에서 ‘지하철 어르신 우대용 교통카드’를 신청하라는 공문이 날아들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원로시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 정말 이제부턴 내가 노인세대로 분류되는구나’ 하여 내심 당혹스러웠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최근 유엔에서 재정립한 평생 연령 기준을 보면요 0~17세 미성년자, 18~65세 청년, 66~79세 중년, 80~99세 노년,100세이후 장수노인이라네요. 하하.” 활달하게 웃어젖히는 안 시인의 몸짓과 말투에서 오랜 경륜으로 다져진 삶의 철학, 아우라가 느껴진다. ‘20세의 청춘에도 노년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80세 노년에도 청춘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새뮈얼 울만의 저 유명한 말과 함께.
인간으로선 ‘부끄러움’, 여자로선 ‘수줍음’을 잃고 싶지 않아
나이가 들면서도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 그녀가 유지하고 있는 젊음의 비밀이 있는 게 아닐까?
“인간으로선 ‘부끄러움’이고 여자로선 ‘수줍음’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수줍음’은 ‘약한 것’과 다릅니다. 요즘 강하고 유능하게 보이고 싶어 ‘수줍음’을 벗어 던져 버린 듯한 여자들이 많아져 가는 게 안타깝습니다. 요즘 여자들은 ‘예쁘다’보다 ‘섹시하다’는 말을 듣기 원하는데, 수줍음이야말로 여자를 가장 여자답다고 느끼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난 남자도 약간 수줍어하는 남자가 매력이 있어요(웃음).”
그러고보니 활달한 듯 보이면서도 언뜻언뜻 수줍어하는 기색이 만년 소녀와도 같다.
안 시인이 요즘 들어 가장 쓰고 싶은 글 중의 하나가 ‘여자는 여자로 강하라’라는 주제다.
“강하게 보이기 위해 남자처럼 구는 여자들은 한심하잖아요? 보이시한 여자가 일면 매력 있긴 하지만, 그건 남자 흉내하곤 다르지요. 여자로 태어나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 무엇보다 어머니가 된다는 건 숭고한 거예요. 자녀를 낳아 한 사람의 몫을 훌륭하게 해 낼 수 있도록 양육함은 개인과 나라와 인류를 위한 실로 위대한 공헌이 아닐 수 없죠.”
할아버지 민세 안재홍이라는 거대한 산
최근 가장 행복한 일로 지난해 가을 첫 손자를 본 게 가장 큰 경사이고 기쁨이라고 꼽는다.
“너무 늦게 본 손주라서요. 기도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손주를 본 지금이)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맘 편한거 같아.”
안 시인은 독립유공자인 민세 안재홍의 손녀이기도 하다. 민세(民世)는 ‘민족과 세계’라는 뜻이다. 안재홍은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 주필, 사장 등 언론인으로 종횡무진 활약, 일제에 의해 9번이나 투옥되었으며 사학자로서의 업적도 크게 남겼다. 해방 이후엔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국민당 당수 등 중도우파 성향의 정치인으로 활약, 초대 대통령 선거에선 이승만·김구에 이어 3위를 하였고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한국전쟁 때 불행히도 납북되었다.
“혜초(惠初)는 첫 은혜, 첫 손녀라는 뜻으로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분은 아랫사람에게도 존칭을 쓰셨고, 모진 고문에도 신음조차 크게 내지 않아 심문하던 왜경들도 경탄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성실하고 검소해 미 군정시절 한국인 행정수반인 민정장관 시절에도 도시락을 꼭 지참하셨고, 고매한 품성의 민족지도자였습니다. 할아버지께 물질적 혜택을 받은 적은 없지만 나라를 구하시는 데 평생을 헌신한 분의 손녀라는 자긍심과 함께 그 분께 누를 끼칠까봐 조심 조심하며 살아왔어요.”
등단 50주년, 이젠 나를 위해 살아야 할 시점
안 시인에게는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다.
“내년 1월이면 문단 등단 50주년이에요. 시집 7권을 정리해서 시선집을 꼭 내려구요,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신앙 간증집도 내야겠구요. 또한 한불대역 시집, 한일대역 시집도 준비 중입니다. 지난 20년 가까이 할아버지 민세 안재홍 선집에 이어 전집을 내느라고 내 것은 자꾸 보류해왔는데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게 됐어요. 수필집, 칼럼집도 내야 할 것들도 있고 단편소설, 콩트, 동화 들도 써서 발표할 것들이 각각 여러 편씩 쌓여 있는데….”
안 시인에게는 평생을 살면서 꼭 지키면서 살아온 것이 있다.
“40세 전후에 몇 차례 걸쳐 성령은사체험을 경험한 이후로 지금까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을 하루도 잊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넋두리를 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안 시인의 의지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 의지 또한 안 시인의 나이를 믿기지 않게 만드는 젊음의 원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선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지곤 한다. 세상의 잣대에 흔들리지 않고 신념을 따라 걸어온 길은 고스란히 그녀의 자부심이 됐다. 그녀의 시가 투명한 건 삶에 대한 특유의 낙관 때문일 것이다. 정갈하고 깔끔하게 바라보는 안 시인의 예쁜 감정을 담아왔다. 봄이 오는 덕수궁 길목에서 안 시인과의 짧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벌써부터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이 기다려진다.
△ 안혜초 시인
이화여고·이화여대 졸업. 세계여기자 작가협회 한국지부 부회장 역임.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평화위원회 위원장.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 현 지도위원. 한국문인협회 대외 협력위원. 한국여성문인회 이사. 이화여대 동창문인회 회장, 현 고문.
요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힐튼 헤드 섬(Hilton Head Island)이 은퇴자의 천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골프 애호가라면 PGA투어 RBC 헤리티지대회가 매년 열리는 아름다운 하버타운 링크스코스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힐튼 헤드 섬은 미국의 은퇴자들이 좋아할 요소를 거의 다 갖추고 있다.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온화한 기후는 한파에 시달리는 뉴욕, 보스턴 등 도회지의 은퇴자들에게는 큰 매력이다. 30도를 넘는 여름 더위가 9월까지 이어지기는 하지만 수온은 수상 스포츠에 최적이다. 저녁이면 선선해지니 휴식과 숙면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고즈넉한 대서양 해변과 하얀 요트가 즐비하게 정박된 마리나와 야자수가 어우러진 항구의 전경은 숨 막히게 아름답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넓게 펼쳐진 바다, 하얀 모래와 맑고 깨끗한 습지 그리고 이끼로 뒤덮인 울창한 떡갈나무 숲은 대자연이 주는 은퇴기념 선물이며, 넉넉한 남부 인심은 은퇴자들에게 기를 불러 넣어주는 활력소다. 눈부신 햇살 아래 짭짤한 갯바람을 맞으며 160㎞에 달하는 자전거 도로를 달리고, 30여 개 골프 코스에서 라운딩을 하다보면 인생 후반기의 허무감은 어느새 충만감으로 바뀐다.
카약, 승마, 테니스, 낚시 등 갖가지 스포츠와 취미활동은 힐튼 헤드 섬의 주요 일과다. 19㎞에 걸쳐 펼쳐진 해안을 따라 무리지어 유영하는 돌고래를 유람선을 타고 관찰하며 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붉은바다거북의 산란을 위해 해변의 조명을 모두 끌 때면 자연과의 일체감을 맛보게 된다. 저지대 늪지에서는 새우와 게를 쫓아다니는 푸른 왜가리와 큰 입을 딱 벌리고 햇볕을 쬐는 악어를 만나는 놀라움도 있다.
맨해튼(여의도의 30배)만한 넓이의 힐튼 헤드 섬에서는 4만여 주민이 오순도순 지내지만 해마다 250만 명의 외지인이 찾아와 한가하고 여유로운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쇼핑 환경도 맨해튼 수준이다.
특가 상품에서부터 디자이너 브랜드와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할 독특한 기념품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200여 개의 아웃렛과 상점, 그리고 6곳의 마리나 빌리지 상가는 주민뿐 아니라 관광객의 눈길과 발길을 끌고 있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자동차로 5시간, 사바나에서 45분(57㎞) 거리에 있는 힐튼 헤드 섬은 큰 다리로 내륙과 연결되어 있어 여객선이 다니지 않는 섬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이나 사바나국제공항에서 항공편을 이용하면 이동시간을 줄일 수 있다. 미국 동부 연안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힐튼 헤드 섬은 원래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따뜻한 기후와 야자열매, 풍부한 해산물을 즐기던 곳으로 1663년 영국의 윌리엄 힐튼 선장이 처음 이 섬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힐튼 헤드’라고 명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섬의 73%가 은퇴자를 위한 주택단지
힐튼 헤드 섬의 73%는 10개의 대단위 리조트형 주택단지가 차지하고 있다. 이 주택단지 가운데 상당수는 매입 자격을 55세 이상의 신중년으로 제한하고 있다. 대부분 단지에는 관리사무소를 중심으로 실내외 수영장, 피트니스센터, 테니스장, 연회장, 식당 등이 갖추어져 있고 호수와 숲, 골프 코스와 마리나가 인접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섬에 정착한 은퇴자들은 평균 6차례 이상 방문하여 생활환경을 체험한 후 주택을 매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웃과 격이 없이 지내는 이 섬의 분위기를 느끼고 썰물 때면 90m나 밀려나 숨겼던 민낯을 드러내는 갯벌을 산책하면서 돌고래가 수영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게 된다.
이 섬의 지난해 주택매매 가격은 단독주택의 경우 52만달러, 타운하우스와 아파트는 20만달러 수준. 침실과 화장실이 각 2개인 아파트는 20만~40만달러, 단독주택은 25만~45만달러, 그리고 침실과 화장실이 각 3개인 주택은 40만~70만달러를 호가한다. 바다 경치가 아주 좋은 주택은 150만달러를 훌쩍 넘고 700만달러를 호가하는 그림 같은 주택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6개월 정도만 빌려 살아볼 수 있는 아파트도 구하기 어렵지 않다. 스튜디오형은 월 평균 600달러, 침실 1개짜리는 800달러, 침실 2개짜리는 900달러 수준이다. 성수기인 여름철에는 며칠만 빌릴 경우에도 임대료가 치솟는다. 침실 1개인 주택이나 아파트도 전망이 좋으면 1주에 1200~1800달러, 해변을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면 1000~1200달러 정도다. 봄과 가을에는 20% 정도 할인되고 겨울에는 50%나 싸진다. 2억달러 넘게 투입해 새 단장을 한 리조트의 하루 방 값은 일반형 기준으로 130~340달러 수준이다.
주거비가 웬만한 휴양지나 은퇴자 생활지보다 비싸지만 주거비를 포함한 생활비 총지출은 맨해튼의 50%, 워싱턴이나 보스턴의 75% 수준을 넘지 않는다. 재산세가 다른 지역의 25% 수준인 데다 소득세, 소비세 등 각종 세율이 낮고 85세 이상의 주민에게는 더 낮은 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자동차보험과 휘발유 값이 저렴한 것도 수월찮게 도움이 된다. 이 지역 주민들 가운데는 현역 시절 주택을 구입해 별장처럼 이용하다가 은퇴 후 눌러앉은 사람도 적지 않다. 세컨드 주택을 구입하면 세제 및 금융 혜택이 있는 데다 에어앤비를 비롯한 휴가용 주택 알선 사이트가 붐을 이루면서 목 좋은 곳의 별장은 재테크 수단이 되었다.
미국 남부 사람들이 테러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이 허리케인이다. 힐튼 헤드 섬 주민들은 1850년 이후 섬 주변 반경 80㎞ 이내로 81차례의 허리케인이 지나갔지만 큰 피해를 입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 천혜의 지형 덕분인지 주민들의 후덕한 인심과 간절한 소망 덕분인지 알 수가 없다.
각양각색의 취미활동 그리고 평생교육도
힐튼 헤드 섬에서는 축제와 이벤트가 풍성하다. 해마다 열리는 다양한 뮤직 페스티벌, 해산물 축제, 고기잡이 경진대회, 카약과 보트 경주 등은 주민과 관광객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자리다.
멋을 살린 음악 카페, 길거리 밴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이 늘어선 메이 강변에 각종 포장마차와 공예품 전시판매점까지 어우러지면서 남부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16㎞ 떨어진 블러프턴의 소도심에서는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고 남북전쟁 때의 화재와 파괴를 견뎌낸 대농장주의 저택과 교회는 박물관과 관광안내소로 활용되고 있다. 수백 년 된 거대한 나무와 옛 건물은 그림엽서로도 간직되고 있다.
은퇴자들의 취향은 제각각이다. 요트, 카약, 낚시 등에 빠져 있는 ‘해양스포츠파’, 생태관찰 보존과 식물 재배에 몰입한 ‘에코파’, 골프, 사이클, 테니스와 달리기 등을 주로 하는 ‘육상스포츠파’, 공예품 만들기, 독서, 해변 일광욕, 흔들의자 등을 즐기는 ‘정중동파’ 등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봉사활동과 평생교육은 이곳 은퇴 생활자들의 공통된 일과다. 해안사구와 야생동물 서식지 보호에서부터 노약자 서비스, 도서관 운영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자원봉사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과 협력관계를 맺은 오셔평생교육원은 1600명의 은퇴 생활자들을 대상으로 400여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1년 회비 40달러에, 수업료는 과목당 15달러. 모두 다 합쳐 연간 95달러를 넘지 않게 책정되어 있다. 선생과 학생이 따로 없다. 자신의 전공분야를 가르치고 관심 분야를 배운다. 학습을 하다가도 기분이 내키면 밖으로 나가 현장학습에 들어간다.
미국의 주요 언론과 관련 전문매체의 힐튼 헤드 섬 예찬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 최고의 은퇴 생활지’, ‘인생을 바꿀 건강한 봄철 휴가지’, ‘하계 모임을 위한 남부 최고의 장소’, ‘2016년 북미지역 최고의 골프 휴가지’, ‘캐롤라이나 남부 최고의 사이클 친화지역’, ‘미국 남부 5대 하계 가족휴가지’, ‘세계 50대 테니스 휴양지’, ‘미국 최고의 섬’, ‘인터넷 검색이 가장 많은 섬’, ‘사우스캐롤라이나 최고의 해변’, ‘2015년 세계 최고의 여행목적지’ 등등. 이런 찬사 덕분에 이 지역 은퇴 생활자들의 만족감은 더 커지고 있다.
최근 어느 책을 읽다가 체코의 속담에 마주쳐 한방 맞은 것처럼 잠시 멍해졌던 일이 있습니다. 그 속담은 “겨울이 우리에게 묻는 날이 있으리라. 여름에 무엇을 했느냐고”였습니다. 이렇게 속담의 추궁을 받다 보니 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속담이라기보다 하나의 잠언, 격언으로 보이는 말을 음미하면서, 한 해의 마무리와 지난여름의 일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는 영화가 있었지만, 지난여름에 나는 무슨 일을 했던가?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나는 모르는데, 남들이 오히려 더 아는 게 많을 것 같습니다.
여름은 활동하는 계절, 뜨거운 감정 소비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어느덧 다 보내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가을도 배웅하고, 모든 것이 침잠하고 스스로 감추어 웅크리는 차가운 계절을 맞았습니다. 갈수록 가을은 짧아지고, 봄도 오는 듯 바로 돌아서서 가버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이제 여름과 겨울만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려서 배운 계몽편(啓蒙篇)은 계절의 의미를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봄이 되면 만물이 처음 생겨나고 여름에는 만물이 성장하고 자라나며 가을에는 만물이 성숙하고 겨울에는 만물이 감추어진다. 그런즉 만물이 생겨나서 자라나며 거두어지고 감추어지는 것이 사시의 공이 아닌 것이 없다.”[春則萬物始生 夏則萬物長養 秋則萬物成熟??冬則萬物閉藏? 然則萬物之所以生長收藏 無非四時之功也]
사계절의 일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장수장(生長收藏)입니다. 이 겨울을 맞아서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닫고 무엇을 위해 무엇을 저장할까. T S 엘리엇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장시 ‘황무지’에서 ‘여름은 우리를 놀라게 했다’(Summer surprised us)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겨울이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었지/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고/마른 뿌리로 작은 생명을 길러주었어’(Winter kept us warm,/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라고 합니다.
겨울은 그러니까 모든 게 죽는 계절이 아니라 되살리기 위해서 따뜻하게 묻어두고 그 생명을 잘 기르기 위해 감추는 시기입니다. 동양의 사유나 철학에서는 자연의 운행질서는 조물주의 신공(神功)이며 우리 인간은 그 질서를 거스르지 말고 잘 순응하고 조화를 지향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겨울이 지나지 않고 봄이 오랴?”라는 게 있습니다. 세상일에는 일정한 순서와 법칙이 있는 법입니다.
겨울은 달력으로 입동부터 입춘 전까지, 천문학적으로는 동지부터 춘분까지를 가리킵니다. 이 맹동(孟冬) 중동(仲冬) 계동(季冬)의 삼동세한(三冬歲寒)을 건강하고 보람 있게 보내야만 그 이듬해의 삶을 충실하게 꾸려갈 수 있습니다.
“바깥세상이 폐쇄되면 내부의 세계가 넓어진다. 겨울은 내면의 계절이다.” 일찍이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에서 한 말입니다. 그는 또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라는 글에서 “겨울은 ‘나는 것’이 아니라 ‘부딪쳐야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절망 속에 희망을 잉태한 거대한 역설의 구근인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엇의 시를 연상시키는 문장입니다.
청마 유치환도 ‘나는 고독하지 않다’라는 글에 “온갖 생물을 시들리고, 움츠려뜨리기 마련인 것으로만 알고 있는 그 서글프고 가혹한 추동(秋冬)이라는 계절이 실상은 온갖 생물의 생명들이 다시 움트고 소생함에는 없지 못할,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나는 겨울을 ‘벗과 책의 계절’이라고 말하려 합니다. 옛 선비들은 추운 겨울이 되면 난로회(煖爐會)라는 모임을 즐겼습니다. 벗들을 불러 모아 화로에 솥뚜껑을 올려놓고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을 난로회 또는 철립위(鐵笠圍)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의 시에 이런 게 있습니다. “관서 땅은 시월에 눈이 한 자 넘게 쌓이면/겹겹의 휘장에 푹신한 담요 깔아 손님을 잡아두고/삿갓 모양 솥뚜껑에 노루고기를 구워/가지 꺾어 냉면에다 파란 배추김치 먹는다네.” 흥겹고 정겨운 술자리의 모습이 약여합니다.
추사 김정희의 저 유명한 세한도(歲寒圖)에는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잣나무와 소나무가 더디 시드는 걸 안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는 논어의 말이 씌어 있습니다. 추사는 중국 연경에서 경세문편(經世文編)을 구해 유배지에 가져다준 제자 이상적에게 이런 말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림에 ‘오래 서로 잊지 말자’는 장무상망(長毋相忘) 인장을 찍었습니다. 빈궁하고 어려워지면 벗과 우정의 소중함을 더 잘 알게 됩니다.
도연명의 ‘의고(擬古)’라는 시에는 의복이 언제나 남루하고, 한 달에 아홉 끼니를 먹을 만큼 가난하고, 10년을 관(冠) 하나로 지내지만 언제나 얼굴빛이 좋은 동방의 선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람을 보려고 새벽에 강나루를 건너가니 거문고를 끌어당겨 나를 위해 연주를 합니다. 도연명의 시는 “바라건대 그대 곁에 머무르면서 지금부터 한겨울을 지냈으면”[願留就君住 從今至歲寒]으로 끝납니다. 맑은 인격의 만남이 참 아름답고 부럽습니다.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독서를 하기 좋은 때인 삼여(三餘)는 농사일이 없는 겨울과 밤, 일을 못 하는 비 오는 날을 말합니다. 농사만을 짓고 살던 시대에 만들어진 말이지만 오늘날의 생활에 맞게 개념을 확대해 적용하면 책 읽을 시간을 많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 어느 책을 읽어야 좋은가. 독서에도 그에 맞는 시간이 있습니다. ‘시보다 아름다운 수필’을 쓴 사람으로 평가받는 중국 청(淸)초의 무명 문인 장조(張潮·1650~1703?)는 “경서(經書)를 읽는 데는 겨울이 알맞고, 역사서를 읽는 데는 여름이 알맞고, 제자백가서를 읽는 데는 가을이 알맞고, 여러 사람의 문집을 읽는 데는 봄이 알맞다”고 했습니다.
계절별로 다 이유가 있지만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와 같은 경서는 방 안에 앉아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는 겨울에 읽어야 좋다는 뜻입니다. 여름에 역사서를 읽는 것은 낮이 길기 때문인데, 지금도 여름 휴가철에 대하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많은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벗과 사귀고 어울리며 속으로는 그동안 못 읽었던 책을 읽음으로써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1년을 맞는 힘을 갈무리하고 비축하고자 합니다. 2015년 한 해도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지만, 제야와 송년처럼 가는 것과 보내는 것의 아쉬움만 생각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체코의 속담을 바꾸어 말하면 “여름이 우리에게 묻는 날이 있으리라. 겨울에 무엇을 했느냐고”라는 질문과 추궁 앞에 의연하게 마주 설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고재종은 농사를 지으며 시를 써온 전남 담양 출신의 시인입니다. 그의 빼어난 작품 중에서 ‘한바탕 잘 끓인 추어탕으로’부터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길지만 전문을 인용합니다.
우리 동네 성만 씨네 산다랑치논에, 그 귀퉁이의 둠벙에, 그 옆 두엄 자리의 쇠지랑물 흘러든 둠벙에, 세상에, 원 세상에, 통통통 살 밴 누런 미꾸라지들이, 어른 손가락만 한 미꾸라지들이 득시글벅시글 거리더라니, 그걸 본 가슴팍 벌떡거린 몇몇이, 요것이 뭣이당가, 요것이 뭣이당가, 농약물 안 흘러든 자리라서 그런가 벼, 너도 나도 술렁대며 첨벙첨벙 뛰어들어, 반나절 요량을 건지니, 양동이 양동이로 두 양동이였겄다!
그 소식을 듣곤, 동네 아낙들이 성만 씨네로 달려오는데, 누군 풋배추 고사리를 삶아 오고, 누군 시래기 토란대를 가져오고, 누군 들깨즙을 내오고 태양초물을 갈아 오고, 육쪽마늘을 찧어 오고 다홍고추를 썰어 오고, 산초가루에 참기름에 사골에, 넣을 것은 다 넣게 가져와선, 세상에, 원 세상에, 한 가마솥 가득 붓곤 칙칙폭폭 칙칙폭폭, 미꾸라지 뼈 형체도 없이 호와지게 끓여 내니
그 벌건, 그 걸쭉한, 그 땀벅벅 나는, 그 입에 쩍쩍 붙는 추어탕으로 상치(尙齒)마당이 열렸는데, 세상에, 원 세상에, 그 허리가 평생 엎드렸던 논두렁으로 휜 샛터집 영감도, 그 무릎이 자갈밭에 삽날 부딪는 소리를 내는 대추나무집 할매도, 그 눈빛이 한번 빠지면 도리 없던 수렁 논빛을 띤 영대 씨와, 그 기침이 마르고 마른 논에 먼지같이 밭은 보성댁도 내남없이, 한 그릇 두 양품씩을 거침없이 비워 내니
봉두난발에, 젓국 냄새에, 너시에, 반편이로 삭은 사람들이, 세상에, 원 세상에, 그 어깨가 눈 비 오고 바람 치는 날을 닮아 버린 그 어깨가 풀리고, 그 핏줄이 평생 울분과 폭폭증으로 막혀 버린 그 핏줄이 풀리고, 그 온몸이 이젠 쓰러지고 떠나 버린 폐가로 흔들리는 그 온몸이 풀리는지, 모두들 얼굴이 발그작작, 거기에 소주도 몇 잔 걸치니 더더욱 발그작작해서는, 마당가의 아직 못 따 낸 홍시알들로 밝았는데,
때마침 안방 전축에선,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눈물도 있고 이별도 있다고 하며, 한번 놀아 보장께. 기필코 놀아 보장께, 누군가 추어대곤, 박수 치고 보릿대춤 추고 노래 부르고 또 소주 마시니, 세상에, 원 세상에, 늦가을 노루 꼬루만 한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한바탕 잘 노니, 아 글쎄, 청천하늘의 수만 별들도 퉁방울만 한 눈물 뗄 글썽이며, 아 글쎄, 구경 한번 잘 하더라니!
절로 흥이 나고 즐거운 이 시의 세 번째 연에 상치(尙齒)마당이 나옵니다. 상치는 이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니 나이든 노인들을 위해 베푼 잔치마당을 말합니다. 가을철 미꾸라지 보양식으로 한데 얼려 흥겹게 한때를 보내는 마을공동체의 존노상치(尊老尙齒) 전통이 핍진하고 약여합니다.
예로부터 “조정에서는 작위만한 것이 없고 마을에서는 나이만한 것이 없으며 세상을 돕고 백성들의 어른 노릇함에는 덕망만한 것이 없다”[朝廷莫如爵 鄕黨莫如齒 輔世長民莫如德]고 했습니다. 신라 3대 유리왕부터 16대 흘해왕 때까지 썼던 왕호 ‘이사금’은 이가 많은 사람, 즉 연장자는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聖智人]이라고 한 데서 유래된 치리(齒理)라는 말입니다. 유리왕과 탈해왕이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가 이가 더 많은 유리왕이 먼저 즉위한 다음부터 왕을 이사금으로 불렀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흥겨운 상치모임이라도 이가 없으면 저작(詛嚼)을 할 수 없습니다. 못된 사람을 일러 불치인류(不齒人類), 사람 축에 들지 못한다는 말도 하지만 이가 없으면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 없는 입으로 한없이 오물오물하며 식사를 하던 시골 할머니들 생각이 납니다. 그런 분들의 고통과 불편을 스스로 낙치(落齒)의 나이가 돼서야 알았으니 이가 나는 것도, 이가 빠지는 것도 다 인간이 철드는 일 중 하나인가 봅니다. 견마지치(犬馬之齒)란 개나 말처럼 헛나이를 먹었다고 겸손하게 하는 말인데, 지금 이 나이가 견마지치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의술이 발달해 치아를 때우고 새로 해 넣고 교정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예전엔 이가 빠지면 그저 잇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지난해 어금니 한 개 빠지더니/올해는 앞니 한 개가 빠졌다/어느새 6, 7개가 빠졌는데/그 기세가 줄어들지 않는구나.” 당송 팔대가 중 한 명인 한유(韓愈·768~824)의 시 ‘낙치(落齒)’ 중 일부입니다. 마지막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네/이가 빠지는 건 수명이 다한 거라고/나는 말하네. 인생은 유한한 것/장수하든 단명하든 죽는 건 마찬가지.”
여섯 수로 이루어진 다산 정약용의 시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에도 치아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산은 첫 번째 시에서 “늙은이 한 가지 유쾌한 일은/민둥머리가 참으로 유독 좋아라”라고 합니다. 이어 두 번째 시에서 “늙은이 한 가지 유쾌한 일은/치아 없는 게 또한 그 다음이라”고 한 다산은 마지막에 “유쾌하도다. 의서 가운데에서/치통이란 글자는 빼버려야겠네”라고 합니다. 이가 다 빠졌으니 이제 아플 일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 빠지는 게 유쾌할 리 없지만, 이렇게 달관과 해학적인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는 건강과 노화, 두 가지를 알려주는 인체 측정장치입니다. 노(老)를 쇠퇴나 쇠약이 아니라 노숙과 노련으로 해석하려 해도 빠진 이가 새로 날 수 없고 만든 이가 온전히 내 이와 같을 리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참 악착같이 살아왔습니다. 악착도 이와 관련된 말입니다. 작은이 악(齷)과 이 마주 붙을 착(齪)이 합쳐진 악착의 본뜻은 ‘작은이가 꽉 맞물린 상태’ ‘앙다물어 이가 맞부딪히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를 앙다물고 악물고 살아온 게 아닐까요?
그러나 이제 나이 들고 여유가 좀 생겼으면 달라져야 합니다. 재미있는 시를 많이 쓴 오탁번 시인은 ‘문학청춘’ 올해 여름호에 발표한 ‘늙은이애’에서 이렇게 말했더군요.
‘애늙은이’라는 말은 있는데/‘늙은이애’라는 말은/왜 없을까//콩팔칠팔/흘리고 까먹고/천방지방 하동하동/나는 나는/늙은이애!//‘늙은이애’라는 말을/국어사전에 등재는 하지 않고/국립국어원은/낮잠 주무시나?
이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늙은이애’처럼 살아가는 게 보기 좋을 것입니다. 각자무치(角者無齒), “뿔이 있는 건(동물) 이가 없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가 없는 분들은 뿔이 있다고 생각하고 각자 자기 분야에서 두각(頭角)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너무 서두르거나 다투지는 말고!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확산의 여파로 감염병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하지만 메르스와 같은 신종 감염병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감염병에는 예방법이 있다. 적절한 시기에 예방백신을 접종하고 면역력을 높이면 더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중앙대학교병원 감염내과 정진원 교수와 함께 감염병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봤다.
감염병, 너무도 포괄적인 개념인데 쉽게 설명한다면?
우리 인체에도 많은 바이러스가 살고 있고, 대부분의 바이러스가 인체에 들어와도 큰 해를 끼치지 못한다. 면역 체계가 작동해서 병이 발병하기 전에 퇴치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면역이 약해져 있거나 독성이 강한 바이러스가 침투했을 때 감염증상을 보이게 된다.
여기서 잠깐,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 바이러스라는 예를 들었던 것이고 사실은 더 큰 개념에서 생각해야 한다. 세균, 스피로헤타, 리케차, 진균, 기생충 등 다양한 병원체로 인해 감염병이 발병한다.
전파 양상은 어떠한가?
전파되는 경로는 다양하다. 메르스처럼 접촉이나 비말감염으로 전파되는 경우도 있고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과 같이 성교나 수혈과정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말라리아, 뇌염,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 등은 모기를 매개체로 전파된다. 병원체를 보유한 동물이나 사람의 피를 빨아먹은 모기는 건강한 신체의 피를 빨면서 병원체를 체내에 침투시키게 된다. 인플루엔자(독감)는 병원체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 호흡과 함께 인체에 침투한다.
신중년이 특히 주의해야 할 감염병은?
면역력이 약해지는 시기에는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세 가지 감염병이 있다. 폐렴, 대상포진, 인플루엔자(독감)다. 문제는 예방접종을 하는 등의 관리가 안 되면 신체에 큰 타격을 준다는 점이다. 가볍게 생각했던 독감이 원인이 돼 사망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면역력이 떨어진 시기에는 항상 주의해야 한다.
폐렴, 대상포진, 인플루엔자의 원인과 예방법은?
우리나라 사망원인 중 6위인 폐렴은 주로 ‘폐렴사슬알균’으로 인해 감염된다. 이 균은 급성 중이염, 패혈증, 뇌수막염 등을 흔히 일으키고, 중증 감염의 경우 환자의 사망률도 매우 높다. 그러나 폐렴사슬알균 백신을 통해 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 65세 이상이라면 누구나 1회 접종하는 것이 좋다. 65세 이전의 접종자는 65세 이후에 5년 경과 후 추가로 접종하면 된다.
대상포진은 어렸을 때 감염된 수두바이러스가 몸 안 신경 속에 숨어 있다가 성인이 된 후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다시 활성화되어 수두처럼 반점이 생기는 병이다. 하지만 중년 이후가 되면 발병률이 상대적으로 높아지게 된다.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는 것이 특징이며, 드물게 시각 손실이나 난청 등의 심각한 후유증이 생기기도 한다. 60세 이상에게 1회 접종을 권하고 있다.
인플루엔자(독감)는 누구나 앓는 호흡기 감염증이지만, 암환자나 만성질환이 있는 노약자는 폐렴을 부르는 원인이 되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65세 이상 연령층에서는 위험성이 더욱 높다. 매년 가을에 인플루엔자 백신을 맞는 것이 좋다.
면역력 증가를 위한 해법은?
면역력 증가를 위해서는 먼저 면역력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요인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면역력이 떨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스트레스’라고 말할 수 있다. 개별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는 강도의 차이가 있는 만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규칙적인 생활과 꾸준한 운동이 가장 수월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매일 30분 정도 가벼운 걷기 운동을 빼먹지 않고 하는 것이 좋다.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지키기 위해 손쉬운 방법임에는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스트레스 완화에도 도움이 된다. 또 면역력 증대를 위해 제철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는 게 좋다. 육류와 채소류를 적절히 혼합해 먹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8월 제철음식으로는 토마토, 블루베리, 전복, 참나물, 고구마 등이 있다.
풍토병이라는 말이 없어지는 추세다. 그렇다면 해외여행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은?
해외여행을 할 때 일반적으로 필요한 감염병 예방백신은 A형 간염, 장티푸스, 수막알균, 수두, 홍역-풍진-볼거리, 광견병, 황열, 폴리오 등이 있다. 이들 예방 백신은 여행하고자 하는 나라에 맞춰 병원에서 적절한 상담을 통해 사전에 접종이 가능하다.
실제로 중앙대병원을 포함해 대다수 종합병원은 여행의학클리닉을 운영하고 있으니 이를 이용하는 게 좋다. 통상 여행 출발 4~6주 전 병원의 여행의학클리닉을 미리 방문, 전문의사와의 상담과 건강검진을 하게 되는데, 건강검진은 단기 여행인 경우 기본적인 검사가 시행되고, 장기 체류인 경우 정밀종합건강검진을 할 수 있다.
건강검진의 결과, 여행 목적지, 여행 기간에 따라서 예방 접종, 각종 질환 및 주의사항에 대한 설명 및 안내서, 여행자 상비약 처방, 영문 진단서(필요한 경우)등을 발급 받고, 귀국 후 발열 등 건강 이상 발생 시 후속 진료를 받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을 갈 때, 어떤 예방접종이 필요한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남미 지역을 여행할 때 도시를 벗어나거나 장기 체류할 경우 장티푸스 예방 백신 접종을 하고 여행 전 말라리아 약을 복용해야한다. 이들 지역에서 동물과 접촉이 많을 것이 예상되는 경우나 한 달 이상 장기간의 여행을 하는 경우에는 광견병 예방접종을 하는 것이 좋다. 홍역이나 수두에 면역이 없는 경우에도 이에 대한 접종 또는 추가 접종을 해야 한다. 특히 유럽이나 미국, 사하라 사막 이남의 중부 아프리카 지역이나 중동의 시골지역을 여행 또는 장기 체류하는 경우나 게스트하우스, 유스호스텔 같이 여러 사람이 같이 쓰는 숙소를 이용하는 경우 수막구균 백신을 접종하는 것이 좋다. 이들 예방 백신은 접종을 하고 3~4주쯤 지나야 병에 대항하는 항체가 최고치에 도달하기 때문에 해외여행 전 서둘러 접종을 할 필요가 있다.
해외여행 감염병 예방 건강수칙
1. 해외여행 전에 반드시 여행의학 전문가를 찾아 풍토병에 대한 상담 및 예방접종과 예방약(말라리아, 장티푸스, A형 간염, 파상풍 등) 처방을 받는다.
2. 여행 중 곤충기피제를 사용하고 긴소매 복장 등으로 벌레나 모기에물리지 않도록 주의한다.
3. 설사약과 해열제 등 여행용 상비약품을 준비한다.
4. 끓인 물이나 상품화한 물을 먹는다.
5. 현지 음식은 익힌 음식으로 잘 골라 먹어야 한다
6. 맨발 등 상처나 노출에 주의한다.
7. 강, 호수 등에서 수영이나 목욕을 하지 않는다.
8. 성관계 등 오염된 체액에 접촉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 감염내과 전문의 정진원
현 중앙대 의대 교수, 2012~2013 미국 메이요클리닉(Mayo Clinic) 교환교수 근무
대한내과학회 정회원, 대한감염학회 정회원, 대한화학요법학회 정회원
대한병원감염관리학회 정회원
의사와 환자, 생명을 걸고 맡기는 관계, 둘 사이에 맺어지는 깊은 신뢰감을 라뽀(rapport)라고 말한다.당신의 의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내 신정아(申貞娥·44) 씨의 간을 이식받아 새 삶을 얻은 이경훈(李敬薰·48) 씨와 그를 살린 분당서울대병원 한호성(韓虎聲·56), 최영록(崔榮綠·40) 교수가 그들만의 따뜻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감사합니다. 저는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서, 그리고 여기 좋은 교수님들과 함께해서 전 복 받았죠. 제가 새 삶을 얻은 것은 모두의 사랑 덕분입니다.”
이경훈씨에게서는 남다른 긍정적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씨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은 따뜻했고, 부부를 바라보는 교수들은 흐뭇한 미소로 화답했다. 아내의 간을 이식받은 남편, 이 부부의 새로운 삶에 동행하는 의료진은 한가족과 다름없어 보였다.
어느 날 찾아온 통증, 그리고…
이경훈씨는 2011년 11월 신정아씨와 화촉을 올렸다. 마흔 넘어 결혼했지만, 그렇기에 남들보다 즐겁고 소중한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이씨는 아내에게 무슨 일이든 다 해주고 싶은 남편이었다. 결혼 후에는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과로가 쌓이다보니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다. 결혼 2년이 지난 시점부터 위가 쓰린 날이 많아졌다. 동네 병원에서 위궤양을 판정받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선선하게 가을바람이 불던 일요일로 기억됩니다. 말로 못 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어요. 결국 119를 불렀고 응급실에 실려갔습니다. 위궤양은 약 처방을 받으며 조금씩 호전되는 양상을 보였지만, 평소 앓던 B형 간염 증세가 악화되면서 간성혼수(肝性昏睡)가 생겼더라고요. 그때부터 응급실에 가야 하는 날이 많아졌어요.”
병원을 오가는 동안 그는 점점 지쳐갔다. 지난해 7월에는 응급실에 두 번이나 실려 가야 했다. 그 이후, 다니는 병원을 포천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의정부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정밀검사결과는 간암이었다. 다행히 색전술은 받았으나 간기능 저하로 인해 간이식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당시 그 대학병원에서는 간이식 수술을 할 만한 의료진이 없었다.
“처음에는 위궤양 판정을 받았으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간암이라고 하니까 마음이 무너지더라고요. 간이식을 받아야 한다니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아내를 위해서 간이식을 받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때만 해도 아내의 간을 받을지는 몰랐었죠.”
이씨는 주변사람들에게 수소문해 간이식 명의로 알려진 한호성 교수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 한 교수의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최종 목적지를 분당서울대병원으로 생각하고 2014년 가을 한 교수를 처음 만난다. 지난 3월 드디어 간이식 수술을 받았다. 아내의 사랑과 의료진의 헌신에 힘입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현재 이씨는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통상 간이식 환자들은 면역억제제를 장기복용해야 하기 때문에 부작용 등 어려운 부분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열심히 극복하고 있다. 의료진의 말을 잠시 빌리면, 수술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이지만 관리가 되고 있어 약도 줄이고 있고 이상 징후를 보이는 검사결과도 없다. 아마도 아내와 의료진에게 받은 사랑 덕택이 아닐까? 다만,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하는 과정동안 직장을 잃게 돼 경제적인 부분이 어려운 상태다. 그런데도 그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문제를 뛰어넘으리라 다짐한다. 그에게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는 기간이면서도, 가장으로서 다시 뛸 준비를 하고 있는 중요한 시기다.
엄마에게 신장, 남편에게 간을 준 여자
신정아씨는 가족을 위해 두 번 장기 기증을 했다. 어머니에게는 신장을, 남편에게는 간을 떼어준 특별한 사람이다. 신씨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고혈압과 갑상선 질환을 앓다가 유행성출혈열의 합병증으로 신장 기능부전이 생겨 신장이식 수술이 필요하게 됐다. 신씨는 어머니를 위해 신장을 기증키로 했다. 이식 수술 후 어머니와 신씨 모두 건강하게 지냈다. 이씨와 결혼도 하고 행복이 무르익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께 신장을 떼어준 지 8년이 지났을 때, 남편이 간이식을 받아야 살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제가 남들과 다른 건지, 이상한 건지 모르겠는데요. 간을 떼어주는 일, 그걸로 고민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신장이식을 했기 때문에 간이식도 가능할지 궁금했어요. 결국 적합판정을 받게 됐고, 남편을 위해 간을 떼어주는 일은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신씨는 남편도, 의료진도 만류했지만 간을 떼어주고 싶다고 확고하게 말했다. 가능성이 있다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게 그녀의 특기였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다시 깨 볶는 소리가 들리는 가정으로 당당히 복귀했다.
현재 신씨는 퇴원 후 건강관리를 받으며 음식 조절과 가벼운 운동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두 번이나 장기기증을 했지만, 남편의 사랑에 기운을 내고 있다. 그녀에게 장기기증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두 번의 장기 이식 수술을 경험하며 확고한 신념이 자리 잡게 되었어요. 장기이식은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니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많은 사람이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는 겁니다.”
참 따뜻하고 믿음직한 의료진
부부는 한목소리로 말했다. “참 따뜻한 선생님들이에요. 친절하다는 부분이요. 겉으로만 그러는지 진짜로 생각을 해주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이 선생님들은 ‘환자를 진심으로 살리고 싶다’는 마음을 몸소 보여주고 있죠. 그래서 참 감사합니다. 우린 많은 병원을 다녀봤기 때문에 잘 알아요.(웃음)”
특히 이씨는 수술 전후 상황이 아주 편했다고 회상한다. “자상하게 대해주시고 잘 될 거라고, 아내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니까. 긴장되고 떨리기도 할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수술 후에도 그냥 숙면한 것처럼 일어났죠. 중환자실에 있어도 되는 건지 미안할 정도였다니까요. 수술도 수술이지만 심적으로 편안하게 해주시니까. 두려움도 사라졌죠.”
전문의 3명의 긴박한 협동작전
2015년 3월, 부부의 간이식 수술은 분당서울대병원 암센터 간이식팀 한호성 교수(암·뇌신경진료부원장)와 조재영, 최영록 교수가 맡았다. 이들 3명은 팀을 이뤄 수술을 진행했다. 보다 신속하고 정교하게 수술을 하기 위해서였다. 기증자 수술팀, 수혜자 수술팀으로 나눠 각각 진행하고 다시 협력하는 방식이다. 10시간이나 걸린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최영록 교수에게 당시 가장 고민했던 부분과 남은 과제가 뭔지 물어봤다.
“이식 수술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기증자의 안전입니다. 이미 신씨는 어머니께 신장이식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죠. 부부는 우리들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수월하게 수술을 할 수 있었죠. 다행히 부부 모두 빠르게 회복하고 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사실 흔치 않은 상황인 만큼 특별한 수술이었어요. 앞으로도 부부가 더욱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치료에 최선을 다하는 게 남은 과제입니다.”
의사는 항상 환자 중심으로 산다
또 다른 이야기지만, 메르스 공포가 한창이던 6월 20일 분당서울대병원에서는 잠정 의심환자에 대한 간이식 수술이 진행됐다. 사실 의료계에서 다들 쉬쉬했던 환자였다.
그런데 위험을 무릅쓰고 수술을 집도한 한호성 교수는 이른바 ‘노력하는 명의’로 통하고 있다. 부부의 이야기에서도 그렇듯 한 교수의 삶은 환자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가 생각하는 의사로서의 신념을 듣고 싶었다.
“학생들에게 항상 책보다 환자를 먼저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의사로서 살고 있는 중요한 가치이기도 합니다. ‘어느 책에 제시된 것처럼 이 정도면 포기하는 게 옳다’라는 판단 대신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환자의 안녕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잘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의사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교수에게 좋은 환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봤다.
“본인의 의사를 믿어주세요. 그리고 잘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외과의로서 말씀드리자면, 작은 수술이나 큰 수술이나 합병증을 조심하셔야 되는데요. 합병증으로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만큼 수술 후 관리가 중요합니다. 의사와의 관계가 깊을수록 그 관리가 더 수월해집니다.”
2012년 18대 대통령선거에서 가장 큰 화두는 복지 문제였다. 당시 대선 후보들이 나왔던 TV토론에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었고, 박근혜 대통령은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하다고 반박했었다.
그때만 해도 이후 3년여의 세월이 흘러 ‘증세 없는 복지’가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난무했던 ‘증세 없는 복지’라는 말이 가진 허점을 일찌감치 꿰뚫은 이가 이미 있었다. 전 건설교통부 장관이며 건전재정포럼을 만들어 이끌어 가고 있는 최종찬(崔鍾璨·65) 대표가 바로 그 사람이다. 건전재정포럼 주간회의를 하고 있는 그의 아침을 들여다봤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최종찬 대표가 건전재정포럼 설립에 참여한 것은 대선을 코앞에 둔 2012년 가을이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가 양쪽이 서로 복지 공약 많이 하면서 경쟁하는 모양새였어요. 그래서 그 양상을 본 재정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아니 대체 나라를 어디로 가게 만들려고 복지 얘기만 하는가’ 해서 경종을 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건전재정포럼이 만들어질 수 있었어요. 그때 발기인을 보면 아무래도 재정 쪽에 몸담았던 공무원 출신들이나 장,차관들, 그리고 언론계 출신들이 많았죠.”
최 대표를 인터뷰한 건전재정포럼 회의 장소에서는 안병우 전 국무조정실장,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장준봉 전 경향신문 사장, 고광철 전 한국경제 편집국장, 허승호 신문협회 사무총장, 이계민 전 한국경제신문 사장, KDI 박진 교수, 김원식 한국재정학회장 등등 쟁쟁한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실무 경제에 있어 LG경제연구원, 현대경제연구원에서조차도 정보를 참고한다는 건전재정포럼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박근혜 정부 지난 2년간 재정정책 평가 및 향후 대응방향에 대한 주제 회의 안건이었다.
“나라 걱정하는 열정이 남들 못지 않잖아요. 새벽에 나와서 이러는데, 이게 무슨 대통령 앞에서 국무회의하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국무회의 못지않게 진지하잖아요. 그런데 이분들이 무슨 내가 재정정책 만든다고 누가 물어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자진해서 걱정하는 이런 분들이 많거든요. 누가 귀담아 듣지도 않는데, 이걸 어떻게 제대로 전달할까, 말귀를 알아듣게 할까, 어떻게 보면 이런 분들이 많고, 어떻게 보면 이게 국가의 자원이고 힘이죠. 이런 분들이 있어서 이 사회가 지탱이 되는 거지요.”
한국 사회를 향한 거침없는 쓴소리를 모으니 ‘부족한 복지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라는 발제였다. 토론을 통해 박 대통령 공약 검증과 복지 어떤 모양으로 갈 것 인지, 법인세 ·부가가치세 ·소득세 등 증세를 어떻게 해야 하나를 짚어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나라 걱정에 쓴소리 쏟아내는 건전재정포럼의 현장
이처럼 운영위원들의 의견을 아울러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를 고심하는 최 대표는 서울대를 나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1971년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 공직에 발을 들인 그는 이후 경제기획원, 제1대 기획예산처 차관 등을 거치며 경제통으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국민의 정부에서 건설교통부 차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맡은 후 참여정부에서 초대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지내면서 참여정부의 각종 부동산 정책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이후 2008년에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선한 그는 같은 해 저서 을 펴냈다.
“평생 공직생활을 하다 보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 사회가 골고루 잘 살 수 있느냐’는 생각이 계속 있습니다. 그래서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골고루 잘 살 수 있는 시스템 개혁을 하는 데 일조를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허한 것보다 구체적인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날 하는 총론이나 ‘막연히 열심히 일해라’라는 말이 아니라 열심히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치가들은 말로만 대의를 찾는가?
최 대표는 우리 사회를 보면 시스템이나 현실과 안 맞는 것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사회를 향한 최 대표의 시선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고, 수많은 문제점들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정치가들은 지역 균형도 말만 할 게 아니라, 중대선거구 같은 제도를 도입하면 지금보다는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만날 지역균형 하자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구체적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호남에서도 새누리당이 당선될 수 있고 대구에서도 민주당 국회의원이 나올 수 있고….”
‘국회의원들이 왜 자기 지역에 다리 놓는 문제에만 신경 쓰고 있을까’에 대해, 최 대표는 현재의 소선거구제도가 문제라고 설명했다. 만약에 전국 비례 대표로 한다면 우리 동네 다리 놓는 문제는 국회의원들이 안 할 거 아니냐는 반문이다. 정치가들이 말로는 대의를 생각한다고 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늘 어물쩍 비켜가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논리가 없는 현재의 교육감 제도, 고쳐야 한다
국민들이 골고루 인간답게 사는 길을 찾는 데 작은 힘이 되고 싶다는 그의 인생 후반부에서 불합리한 것들이 눈에 들어와 사회시스템 전반적인 공부를 하고 있다. 그중에 최 대표의 직설은 교육 부분도 건드리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교육자치와 지방자치를 엄격하게 분리해놨단 말이죠. 여기에도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어요. 지자체장은 무상급식에 대해 ‘내가 공약한 것도 아니고 내가 왜 돈을 대느냐’라며 관심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들여다보니까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같은 교육자치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어요.”
최 대표는 교육감이 정치적으로 무소속이라는 것이 논리가 없는 제도라고 질타했다.
“교육감은 당적을 갖는 것이 안 좋다, 이거잖아요. 그런데 어느 나라고 교육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대통령 아니에요? 대통령은 정치인이죠. 그리고 교육부 장관은 현직 국회의원이잖아요. 교육감은 교육부에서 정한 것의 일부를 집행하는 입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있는 두 사람이 다 정치인이에요.
서울시 교육은 서울시 교육감이 다 하는 게 아니라 예산은 서울시 교육위원회, 조례는 서울시 의회 교육 분과에서 정해요. 다 정치인들로 구성됩니다. 아, 그럼 정책을 결정하는 이들이 온통 정치인인데, 정작 교육감은 당적이 있으면 안 된다니 이게 무슨 논리예요.”
예를 들어 현재 강원도는 교육감은 전교조 출신 야당 성향이고 도의회 교육위원들은 다 새누리당 계열이다. 교육감은 혼자 야권 출신인데, 대통령, 교육부 장관, 강원도의회, 전부 다 여권인 상황에서 어떻게 당해내느냐는 반문이다. 교육 시스템에 가장 밀접한 영향을 받는 학부모들조차도 자식들 교육은 중요하다면서 이러한 모순적인 교육감 시스템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상황에 분노한 최 대표는 그에 관한 칼럼을 쓰고 난생 처음으로 지난해 1월에 가두시위도 했었다.
시니어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사회를 바꾼다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의미있는 일을 찾아 거침없이 피력하던 최 대표는 그래도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부분을 높이 평가했다.
“뭐 요란스럽게 신문, 언론에 안 나서 그렇지 요즘 제가 볼 때는 우리 사회와 나라를 걱정하고 봉사하는 게 과거에 비해 많아졌어요. 제가 여러 군데 참여도 해봤는데, 우리 건전재정포험, 또 시니어 어치브먼트(Senior Achievement : SA)라든지 제가 공동대표로 있는 선진사회만들기연대, 돌아가신 남덕우 총리, 지금은 이승윤 총리가 하시는 선진화포럼 등, 그런 곳들을 보면 오시는 분들이 다 옛날에 상당한 사회적 역할을 하던 분들이에요. 그런 분들이 뭘 바라고 아침부터 토론하고 그러겠어요. 우리 사회에 나름대로 기여하려는 의지가 참 많아요.”
최 대표는 건강한 시니어들이 과거에 비해서 많아졌고, 경제적으로도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이뤄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파악했다. 요즘은 60대 전후로 은퇴해도 향후 20~30년은 더 사회적으로 활동하게 된 세상이다. 시니어의 힘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공익을 위해 애쓰는 대한민국 멘토가 많아지는 현상에 긍정적 의견이다.
의미 찾는 일에 미래를 만들며 살고 싶다
성공적인 포럼 운영과 인생 후반전을 드라이빙하고 있는 최 대표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최 대표는 생애설계를 하면서, 하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 있었을까?
“딱히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를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보람 있는 일을 해야겠다 싶어요. 옛날처럼 밤새워 일할 순 없지만 만날 놀 수도 없으니까. 그 의미 있는 일이라면, 역시 우리 국민들이 골고루 잘 살 수 있게 만드는 쪽에 내 경험이나 능력을 살려서 재능기부 비슷한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異) 길에 답이 있다”
이 한마디에 협업(Collaboration)의 핵심이 담겨 있다. 다름과 만나 세상을 보라, 그리고 미래를 열라는 뜻이다. 두 개 이상 개체의 결합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협업은 비단 기술에 인문학을 입힌 애플의 성공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세계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고도성장기를 지나 상생과 동반성장이 화두가 된 한국사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물결이기도 하다. ‘협업은 축복이다’라며 협업 문화 전파에 앞장서고 있는 윤은기(尹殷基)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을 지난 1월 7일 만나봤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윤 회장은 협업을 대학병원에서의 협진을 예로 설명했다. 서로 다른 전공의들이 만나야 협진이 이뤄지는 것처럼, 앞으로는 서로 다른 분야가 만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융·복합돼야 협업의 가치가 일어난다는 설명이다. 나아가 그는 다름이 아니면 소용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지내서 동지, 동포, 동료, 동창생 등 같은 것에는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끼지만 이교도, 이문화, 이단, 이민족 등 다른 것은 가차없이 배척했다. 이에 중앙공무원 교육원 원장을 역임한 윤 회장은 한국사회의 운명을 바꿀 만한 의제에 대해 고민하던 중 ‘협업’에 주목했고 지난해 1월 협회장에 취임해 사람들을 만나 협업에 대해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 1년간 전국을 돌며 1달에 보통 10번에서 많게는 20번가량 강의했고 그러다보니 처음엔 협업이란 단어를 생소하게 느끼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포털사이트에 협업 관련 콘텐츠들이 꽤 많아졌고 ‘협업’검색에도 그의 이름이 상당히 등장하게 됐다.
그와의 일문 일답이다.
지난해 매우 바쁘게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2015년은 어떻게 설계하고 있나
지난해 1월 협회장에 취임하고 한해 동안 협업문화의 원년으로 삼고 강의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2015년은 협업문화 확산의 해로 정해서 더 활발히 활동할 생각이다. 1월 말에는 직접 쓴 협업관련 도서도 나올 예정이다. 번역서는 있지만 한국인이 협업에 대해 쓴 첫 책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는 셈이다.
협업 전도사로서, 협업을 잘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세를 꼽는다면
다름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게 먼저다. 그리고 서로 협력을 해야 협업의 진정한 가치가 빛을 발한다. 지금까지는 ‘동’의 시대였지만 앞으로는 ‘이’의 시대라고 본다. 그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핵심이다. 문화 자체가 달라지는 이 시대에서는 ‘포’자 붙은 두 가지가 있으면 지혜롭게 살 수 있다. 포옹력(抱擁力)과 포용력(包容力).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더 끌어안아주는 포옹력, 서로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데는 포용력이 필요하겠다. 혹시 엉뚱한 데 가서 포옹하는 건 성희롱이니 조심하고.(웃음)
올해 64세로 누구보다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시고 있다. 100세 시대, 행복한 노후를 위해 무엇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첫째는 건강, 둘째는 적절한 경제력, 셋째는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나 놀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를 추가하자면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친구, 선배, 후배 상관없이 격의 없이 속마음을 나누고 같이 즐길 수 있는 삶의 동반자는 있어야 100세 시대를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멋지게 나이 들고 싶은 이유는
매력적인 시니어가 없는 사회는 선진 사회가 아니다. 닮고 싶은 시니어가 있다는 것은 참 행운일거다. 60이 넘어서부터 진짜 인품이 나타나는 것이고 진면목이 보여지는 시기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멋지게 나이 먹어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매우 유쾌하시다. 즐겁게 나이 먹는 비결이 있나
보통 청소년기 꿈을 이루는 사람이 행복한 인생이라는 말을 하지 않나, 나는 그때 꿈이 소설가였다. 심리학과도 그래서 갔고, 비록 현재 소설가의 길을 가고 있진 않지만 단 한 번도 그 길을 포기한 적이 없다. 나는 지금도 70세 전까지는 전업작가로 데뷔하겠다는 꿈을 품고 있어서 늘 소설가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또 한국문단의 대표적 작가인 ‘객주’의 김주영 선생도 꾸준히 만나 뵈면서 꿈을 가꿔나가는 중이다. 물론 연애소설은 이미 틀렸겠지만(웃음), 아마 자전적 소설을 쓰게 되겠지. 워낙 다양한 분야에 몸담아왔던지라 쓸 게 많지만 그냥 사실을 쓰는 게 아니라 소설로 다듬을 생각이다. 소설을 쓰겠다는 꿈, 그것만으로도 나는 즐겁다.
보물 1호가 있나
내가 가장 많이 가진 물건은 책이다. 하지만 가보 1호는 따로 있다. 내가 5개월 훈련받고 만 4년간 공군장교로 근무했는데, 그때 입었던 정복 한 벌은 지금도 깨끗하게 손질해 보관하고 있다. 이사 다닐 때마다 소중히 챙겨가지고 다니니 아내도 의아해한 적이 있는데, 나는 공군장교 시절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서, 그때 입었던 이 군복이 내 정신적 가치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마침 지난해에는 내가 근무했던 부대를 찾아가는 국방TV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때 정복을 입어봤는데 다행히 20대 때 입던 게 잘 맞아서 입은 채 출연할 수 있어서 매우 기분이 좋았다. 아, 언젠가 KBS에서 방송작가가 연락이 와서 가보를 묻길래, 이 정복 얘기를 했더니 진품명품이라며 당혹스러워하더라, 그런데 이 정복이 나에게는 몇 천만원짜리 도자기보다 더 소중하다.
그러고보니 중앙공무원교육원장, 서울 과학종합대학원 총장, 국가브랜드위원회 글로벌시민분과 위원장, 명강사 등 워낙 다양한 길을 걸었다.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끊이지 않았을 것 같은데
학계, 재계, 관계, 문화예술계 그러니까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봤다. 안 해본 건 정치인데, 지금도 정치는 안 하기 진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안 해봐도 좋은 게 있는데, 나에겐 그게 정치다.
늘 청춘처럼 왕성하게, 나이를 잊고 도전하시며 살아오신 것 같다
진짜 간단하게도, 아내의 말이 부드럽게 들릴 때, 내가 진짜 어른이 됐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강의하고 책도 쓰고 심리학도 공부했고 그러다보니 젊었을 땐 이론적으로 따지면서 의견 충돌이 있었다. 서로 누구 말이 맞느냐 논쟁을 많이 했는데, 그게 시간이 지나다보니 아내 말이 들릴 때가 있더라. 내 말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그 말을 하는 심정을 헤아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영역에서는 OX나 사지선다형이나 과학적 정답 같은 걸 뛰어넘는데 그 말들이 들릴 때 우리는 어른이 되는 것 같다. 젊을 때는 모르던 세계가 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책이 있다면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나는 그 책을 읽고 다니던 종합무역상사를 그만두고 여행 다니다가 정보전략연구소(?)를 차렸으니까. 남들은 그냥 재밌다하고 말았는데 나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아내가 1주일간 여행을 간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나. 중년 남성들의 로망인데
내 서재에 책이 한 천 권 이상쯤 있는 것 같다. 종종 정리해서 줄이는데도 그 정도. 평소에는 그중에서 경영, 심리학 관련 책들을 주로 본다. 만약 아내가 여행을 간다면 소설책을 꺼내 쭉 읽게 되지 않을까. 아무래도 소설책은 호흡을 길게 가져가야 하니까.
자녀들에게는 어떤 아버지인지 궁금하다
나는 아주 담백한 아버지다. 엄하지도 않고 잔소리도 하지 않고 살갑지도 않은, 그냥 수채화나 담담한 가을날 같은 아버지다. 내가 밖에서 너무 교육적으로 살아오지 않았나. 심리학, 경영학하고 대학 총장에 방송에 강의도 많이 했으니까. 근데 집에서도 그러기 시작하면 이건 부자관계가 아니라 사제관계가 돼버리는 거다. 그래서 집에서는 절대 스승노릇은 안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내는 좀 아쉬워하기도 하지만 나는 가장 평범한 부자관계, 부녀관계를 맺고 싶다. 그리고 유수의 심리학자들도 실수하는 게 있는데, 심리학에서 배운 걸 그대로 자식에게 적용하는 것, 대개 망친다. 우리나라 성공한 사람들도 가정에서는 비슷한 실수로 관계를 망친다. 그냥 아들, 딸이 보고 알아서 느끼면 좋겠다. 나는 철저하게 스승 사절, 존경받는 아빠도 사절이다. 그냥 인간적으로 멋있게 살다 간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다.
살다보면 무수한 선택들을 하게 된다.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은 선택은
일단 심리학과에 진학한 것, 심리학을 원해서 지원했고 여전히 좋다. 또 공군장교 된 것과 현재 아내와 결혼한 것. 내 아내는 멋있는 사람이다. 부드럽고 여성적이면서도 매우 정의롭고 바른 길을 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건 당신이 포기해야 하는 것이라고 부드럽게 나를 설득해준다.
다양한 길을 걸어오셨다. 마지막으로 성공의 기준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세상은 넓다. 한 우물만 파지 마라. 많이 싸돌아다녀라. 우리 세대는 한 우물만 파면 먹고 산다고 여겼고 실제로 그랬지만 지금은 세상이 변했다. 많이 싸돌아다니고 시야를 넓혀라. 60세 넘어서 제일 안타까운 모습이 맨날 노인정만, 청계산만 왔다 갔다하는 사람들이다. 조금만 더 가면 춘천도 남해도 동남아도 있다. 나이 들어서 가장 멋있는 건 많이 싸돌아다니는 거다. 아내에게도 그런 거 제한하지 않는 편이라, 다음주에는 친구랑 베트남에 간다고 하더라. 가라고 적극 지원해줬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와 평등이다. 비록 현실적 조건으로 인해 평등은 제약이 있겠지만 자유는 최대한으로 누리고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