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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백, 겨울을 품고 봄에 깨어나다
- 겨울에도 꽃이 달린다고 해서 이름 붙은 동백(冬柏). 늦겨울부터 봉오리가 맺기 시작해 3~4월이면 꽃망울이 터져 절정을 이룬다. 대개 울릉도나 대청도, 오동도 등 섬에서 자생하지만 육지에서도 선홍빛 동백꽃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충남 서천군의 동백나무숲이다.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된 마량리 동백나무숲에는 8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다. 동백나무로 유명한 부산 동백섬이나 여수 오동도 등보다 늦게 개화해 4월에도 만개한 꽃을 볼 수 있다. 이곳 전설에 의하면 500여 년 전 마량의 수군첨사(水軍僉使)가 꿈에 바닷가에 있는 꽃 뭉치를 키우면 마을에 항상 웃음이 가득하고 번영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바닷가에 나가보니 그곳에 동백이 있어 증식시킨 것이라 전해진다. 그 뒤로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음력 정월이면 이곳에 모여 고기가 많이 잡히고 바다에서 무사하길 염원하며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동백나무숲은 그렇게 마량리 마을의 수호신이자 방풍림(防風林) 역할을 하고 있다. 동백나무가 심어진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동백정(冬柏亭)이 나온다. 빽빽한 동백나무숲뿐만 아니라 드넓은 서면 앞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다. 일출과 일몰이 아름다운 곳으로도 알려져 있어, 매 연말이면 마량포 해넘이·해돋이축제가 열린다. 동백나무숲 인근 춘장대해수욕장에서도 매년 봄 동백꽃주꾸미축제를 개최한다. 다양한 주꾸미 요리 시식 행사부터, 주꾸미 낚시, 동백 주꾸미 포토존, 동백나무숲 보물찾기 이벤트 등을 즐길 수 있다. △ 마량리 동백나무숲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 산 14번지 동절기 09:00~18:00, 하절기 09:00~17:00
- 2017-03-2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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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금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 우리 사회에서 돈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다. 사회라는 몸을 지탱하는 것이 경제이고 돈은 이러한 경제의 혈관을 도는 혈액이라고 배웠는데 몸속의 혈액이 서서히 빠져나간다면 빈혈로 창백해져 언젠간 죽게 되지 않겠는가! 이런 상상을 해 보니 이걸 만약 영화로 만든다면 드라큘라에 버금가는 스릴 넘치는 호러 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현실을 조금 과장되게 표현해 봤지만, 점차 현금이 지갑 속에서 사라지는 현상이 빠르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발달하는 IT 기술 때문인데 극단적으로 동네 시장에 갈 때를 제외하면 지폐나 동전을 쓸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이런 현실에 익숙해져 가는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솥단지 속 개구리처럼 서서히 익어가도 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돈은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를 확립한 일등공신이다. 고등학교 경제 시간에 배운 대로 인류가 물물교환 시대를 거쳐 가치를 담보하는 금과 은의 시대를 만들고, 나아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지폐의 시대가 열림으로써 자본주의가 활짝 개화했다. 이런 자본주의의 꽃인 화폐가 마치 중생대 공룡처럼 지구 상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돈과 함께 살아오면서 만만치 않은 사연과 스토리를 만들어 왔다. 젊은 날 누런 월급봉투 속에 들어 있던 칼같이 빳빳한 지폐의 감촉을 잊을 수 없다. 침을 발라 한 장 한 장 세면서 우리는 미래의 꿈을 키웠다. 친정에서 돌아오는 어느 저녁나절 동구까지 따라 나오신 어머니가 손에 쥐어주던 축축한 만 원짜리 지폐는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그런 지폐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한 시대와 문명이 저물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앞으로 아이들에게 주는 용돈을 자녀의 계좌로 송금하며,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도 자동이체로 처리할 것이다. 이미 결혼식이나 장례식에는 계좌 이체 번호가 나돌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아마도 돼지 저금통에 ‘딸그락’ 하고 떨어지는 행복한 소리를 들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단지 하나의 문명이 가고 새로운 문명이 도래하는 데 따른 쓸쓸한 세기말적 감상이라면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차 한 잔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만, 아직 IT와 친해지기 어려운 우리 세대에게 화폐의 몰락은 곧 삶의 혼란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스마트폰으로 척척 결제하는 세대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본다. 한국은행은 2020년까지 우선 ‘동전 없는 사회(Coinless Society)'를 만들기로 했고 그 후 차례로 고액권부터 줄여 가기로 방침을 세웠단다. 돈의 제작비용을 아끼고 투명한 사회로 만들어 가려면 바람직한 방향이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 돈에 대한 따뜻한 향수를 차가운 IT기기로 바꾸기 어려운 세대에게 이런 상황은 분명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SF 공포영화로 다가올 듯하다.
- 2016-12-0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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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철의 야생화] 야생난의 극치미를 보여주는, 백두산 애기풍선난초
- 높이 2,750m이며, 북위 42도에 위치한 ‘한반도 북방계 식물의 보고’ 백두산. 지난 6월 중순 일주일간 그곳으로 꽃 탐사를 다녀왔습니다. 5월말이 되어야 봄이 시작되고 한여름에도 여기저기에 만년설이 남아 있다는 백두산은 말 그대로였습니다. 6월 중순에도 산정은 물론 드넓은 고원 곳곳에 얼음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수시로 내리는 비는 얼음물처럼 차갑기 그지없었습니다. 이쯤에서 문제 하나 냅니다. 문) 막 눈이 녹는 6월 백두산 깊은 숲에서도 야생난초가 꽃을 피운다? 답) ➀ 맞다 ➁ 틀리다 우문(愚問)에 잠시라도 헷갈렸다면 그 또한 이유 있는 혼동일 수 있습니다. 난초가 대개는 따듯한 온대나 아열대 지역에 서식한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국내에서도 한란과 금자란, 탐라난 등 희귀종을 비롯해 전국 112종의 야생난초 가운데 72%인 81종이 따듯한 남쪽나라 제주도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위 문제에 대한 답은 < ➁ 틀리다 >입니다. 야생난초에 차걸이란, 금새우난초, 섬사철란 등과 같이 제주도 등 남부 지역에 자생하는 남방계 난초가 있지만, 털복주머니란과 구름병아리난초, 손바닥난초처럼 설악산은 물론 백두산 등 고위도 · 고산 지역에 사는 북방계 난초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화려하기 그지없는 야생난초를, 야생난초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애기풍선난초를 겨울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백두산 지하삼림(地下森林)에서 딱 마주했을 때의 감동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습니다. 백두산에 자생한다고 익히 알았고, 개화 시기를 맞춰 가면 만날 수도 있다지만 과연 대면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백두산을 가본 이는 알지만, 폭우나 안개 등 악천후가 찾아오면 수시로 입산이 통제되고, 또 정해진 통로를 벗어나기 어려워 설사 눈에 보이더라도 가까이 다가가 카메라에 담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순판(脣瓣)이라고 부르는 입술꽃잎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고 해서 애기풍선난초라고 불리는 이 야생난초는 6~15cm의 꽃줄기를 포함해 전초가 20cm 안팎에 불과할 정도로 작습니다. 이번에 지하삼림 안의 50m 이내 숲에서 각각 한 송이씩 모두 세 송이를 보았는데, 두 송이는 꽃색이 뚜렷한 연분홍색이었지만 한 송이는 흰색에 가까웠습니다. 각각의 애기풍선난초에는 제각각 짙은 녹색의 타원형 잎이 한 장씩 달려 있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순판 위에 3개의 등꽃받침과 2개의 곁꽃잎이 비슷한 형태의 분홍색 긴 가닥(사진)을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속명 Calypso는 그리스어로 ‘은둔’을 뜻하는데, 어두컴컴한 침엽수림에 자생하는 특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풍선난초속에는 4개 변종이 있는데, 그중 일본에 자생하는 것은 풍선난초(Calypso bulbosa var. speciosa)로 러시아와 몽골, 중국, 우리나라 백두산과 자강도 갑산에 자생하는 애기풍선난초와 구분됩니다. 일본 알프스산 해발 700m 이상 산지의 그늘지고 이끼 많은 곳에 자생하는 일본명 ‘호테이란(ホテイラン 布袋蘭)’이라는 풍선난초는 순판 아래까지 길게 튀어나온 2개의 꿀샘(거)으로 애기풍선난초와 구별된다고 합니다. Where is it? 해발 2,670m 천문봉으로 오르는 백두산 북파 코스의 시작점에 있는 지하삼림. 땅 밑으로 깊게 파인 원시림이란 뜻의 이곳엔 길이 2.5km에 이르는 원시림이 펼쳐져 대낮에도 동굴에 들어간 듯 어두컴컴하다. 숲 곳곳에 소나무와 전나무 등 침엽수가 쭉쭉 뻗었고, 그 아래 무성하게 자란 이끼 방석 위에 애기풍선난초가 일면 곱디고운, 일면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 2016-07-2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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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대열의 역사의 그 순간] 한국인의 서양 나들이 (中) 알렌은 누구인가
- 조선인들 중 두 번째 해외 나들이를 한 사람은 1888년 미국에 공사로 파견된 박정양(朴定陽, 1841~1905.11) 일행이다. 사절단의 ‘일원’이며 가이드로 수행한 인물이 호러스 알렌(Horace Allen, 1858~1932), 한국어 이름 안련(安連)이다. 알렌은 조선이 서양 국가들과 개항조약을 맺은 후 1884년 조선에 온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이다. 조선-미국 개항조약에 선교에 관한 구체적 언급은 없다. 6조에 ‘조선 개항장에 거주하는 미국인은 해당 지역에서 건물 또는 토지를 임차하거나 주택 또는 창고를 건축할 수 있다’, 8조에는 ‘언어, 문학, 법률이나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보호를 받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은 이를 토지나 주택을 사서 교회 등 문화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확대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초대 미국 공사 푸트(Lucius Foote)는 기독교 박해가 자행된 조선에서 선교사 신분은 여전히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알렌을 ‘미국 공사관에 속한 무급 의사’로 임명한다. 알렌은 조선에 도착한 지 3개월 후인 이해 12월 갑신정변에서 개화파의 공격으로 죽어가는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한다. 한밤중에 피투성이가 된 민영익이 업혀 와서 치료받는 장면은 드라마에서 극적으로 묘사되는데 이건 픽션이 아니라 사실이다. 이 운명적 만남 덕분에 그는 명성황후와 황실의 신임을 듬뿍 받는다. 명성황후는 알렌이 조제한 약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알렌이 감기약을 알약으로 주었다면 그 후 다른 의사가 조제한 가루약은 같은 성분이라도 먹지 않고 알약으로 바꾸어 오라고 할 정도로 알렌에 대한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미국인’ 알렌이 구한말 ‘소용돌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 것은 숙명처럼 보인다. 그는 1887년 조선정부의 참찬관(參贊官, 오늘날의 서기관) 자격으로 박정양의 미국행을 주선하고 수행하며 1890년에는 미국 외교관이 되었다. 미국은 한국정부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높이 사서 알렌을 서울 주재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했다. 1897년 9월에는 공사관 최고위 직인 공사로 승격된다. 그러나 러일전쟁 시기 미국이 한국문제에 적극 개입할 것을 주장하고 본국 정부의 친일-반러시아 정책을 비판함으로써 테드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국무부와 마찰을 빚어 1905년 3월 해임된다. 연세대는 의료 선교사로서 그의 공적을 기리는 ‘알렌관(Allen Hall)’을 만들었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평가가 상반된다. 조선의 의학 발전과 독립을 위해 도움을 주었다는 호의적 평가와, 미국인들을 위해 이권을 얻는 데 급급한 이기적 인물이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이 문제는 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그의 전기가 가장 잘 설명해 줄 것이다. 1962~1970년 위스콘신 대학 총장을 지낸 역사학자 프레드 해링턴(Fred Harrington)이 쓴 이 책의 제목은 우리말로 옮기면 이다. 그는 처음엔 선교사로 일했고, 그 다음 조선 왕실과의 친분을 이용해 미국인들의 이권 획득을 도왔으며, 마지막엔 미국 공사로서 일본인들을 상대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광린 교수가 로 번역했다.) 그의 전기에서는 조선에 대한 애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종 등 황실과 당시 조선사회 전반에 만연한 미국에 대한 호감으로 인하여 그를 친한적(親韓的) 인사라고 인식했을 뿐이다.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을 지지하고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믿은 고종은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기를 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아시아에서 군사력을 보유하지 않아 이 지역 외교무대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게 도덕성뿐이었다. 한국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도나 능력이 없었다는 게 정확한 평가이다. 그런데도 고종은 미국이 조선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알렌에게 수차례 묻는다. 알렌은 이에 서슴없이 “미국인들에게 광산 이권을 주십시오”라고 대답한다. 아시아에서 최대 금광인 운산금광(평북 운산)은 이렇게 해서 미국회사가 차지하게 되었다. ‘노다지(no touch)’라는 말을 유행시킬 정도로 엄청난 수익을 안겨준 금광이다. 1930년대 후반 일본이 강제로 이를 매입할 때 미국 외교문서는 ‘운산금광의 매매와 양도는 미국의 선구자적 금광 사업가들이 동양의 미개발된 땅에서 44년간 이익을 남긴 흥미로운 사업을 종결짓는 것’이라는 감동적이며 애수에 찬 논평을 남기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이나 영국은 고종이 금광만이 아니라 철도, 전차, 전기 등 각종 이권을 ‘팔면서’ 높은 배당금을 챙기는 데만 혈안이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고종의 비자금은 주로 이를 통해 조성된 것이다. 그는 보고서에서 조선을 부정, 부패와 무능으로 인해 곧 망할 나라라고 묘사하고 있다. ‘조용한 아침(Morning Calm)’이란 이제 옛말이다. 조선은 이제 아침이 지나 춥고 음울한 고요의 땅(the Land of the Cold Grey Calm of the Morning After)이 되어가고 있다’, ‘이 나라 국민들은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自治]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과거와 같이 지배자(overlord, 중국)를 가져야 한다’, ‘고종은 로마가 불타는 것을 보면서 악기를 타는 네로와 같이 궁녀들과 유희나 즐기고 있다’, ‘정부가 바뀌면 천연자원과 잠재성을 가진 국민을 가진 이 나라에 약간의 희망을 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 승리한 나라가 조선을 삼키고, 국민들에게 약간의 자유를 주면서 탐욕스럽고도 비인간적인 관리들을 쓸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일본과 러시아 간 전쟁의 결과가 무엇이든 한국은 그 승자에게 먹힐 것이다’. 이것은 알렌 개인의 평가라기보다는 당시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의 일반적인 인식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후일 서양 열강들이 일본의 강제합병에 찬성하거나 묵시적으로 동의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의사 출신 알렌은 특히 조선인들의 비위생적인 모습에 대한 혹평도 빠뜨리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목욕을 하지 않으며 우물물을 소독 없이 식수로 사용하여 선교사들이 이질 등 질병이 걸렸다는 것이다. 이건 알렌의 편견이라 할 것이다. 기후에 관계없이 매일 목욕을 하는 게 위생적인 것은 아니다. 일본은 기후가 습하여 목욕을 자주 해야 하지만 조선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조선인은 우물물을 먹어도 이질에 걸리지 않는데 선교사들만 걸린 것은 풍토병에 대한 면역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고를 지닌 인물이 조선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으로 간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 2016-06-09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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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대열의 역사의 그 순간] 조선인 서양 나들이 (上) ‘어떻게’ 시작됐나
- 한국인들의 첫 서양 나들이는 일본인들이나 중국인들에 비해 늦었다. 개항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30년 이상 늦어진 까닭이다. 중국의 개항은 아편전쟁 후인 1842년(남경조약), 일본의 개항은 1854년인 데 비해, 한국은 일본과의 개항조약을 1876년(강화도조약), 미국·영국과는 1882년에 맺었다. 또 일본이나 중국은 서양문물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각국을 ‘견학’하지만 우리에겐 이 같은 의욕이 부족했다. 조선은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정부 차원에서 허용된 몇 개 항구를 제외하고는 외국과의 해로와 육로를 통한 교류와 통상을 금지하여 문을 잠갔다. 바로 ‘쇄국정책’이다. 조선은 주변 국가들에 비해 약하다고 스스로 평가하여 접촉을 가능한 한 피하려 한 것이다. 교류가 빈번하면 강대국의 영향이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자연스럽게 유입되고, 이 결과 정부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 정권의 안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를 금지한 근본적인 배경이다. 단지 중국으로부터 필요한 정보나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해 1년에 네 번 조공 사절을 보냈다. 중국의 명(明)왕조 역시 외래족인 몽골제국 원(元)을 몰아내고 건국되었기 때문에 외부와의 거래는 중국에 대한 정보가 유출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태조 주원장(朱元璋) 때부터 대외접촉을 억제했다. 주변국들의 조공도 3년에 한 번으로 제한했다. 조선에 대해서는 평화가 정착된 후 교류 확대를 허용했다. 조선 정부는 일면 중국과의 접촉을 정부 차원으로 제한하면서 동시에 중국에게는 국경을 철저히 감시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조선인의 압록강·두만강 월경은 극형으로 처벌했다. 그러나 세상만사 자기 뜻대로 되던가.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멈추어 주지 않고’ 조선이 혼자 꿈속같이 편안히 살려고 하나 주변국들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국제정치가 그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 학자들은 1860년대 이후 조선이 중국과 일본 외에는 중국의 허락이 있어야 개항할 수 있다고 내세운 것은 핑계이며 ‘조선의 쇄국은 그 뿌리가 서울에 있다’고 평한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한반도 진출이 본격화되고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야심에 대한 풍문이 베이징(北京)이나 도쿄(東京)에서 끊임없이 나도는 가운데 중국은 조선이 미국·영국 등 서양 국가들과 수교하도록 주선한다. 서양 국가들을 이용하여 러·일을 견제하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다. 그러나 중국의 이 전략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서양 국가들은 조선이 자기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수교했기 때문에 완전한 독립국이며 중국의 속방(屬邦)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조선에 특명전권 공사를 파견했다. 미국이 일본과 중국에 파견한 공사와 동등한 직급이다. 영국은 조선이 국제사회에서 독립국으로 공인되어야 러시아가 열강의 동의 없이 조선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믿었다. 이에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조선 문제는 텐진(天津)에서 자기와 먼저 논의하자는 요청을 무시하고 조선 정부와 직접 거래하는 방식을 택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그동안 정치권에서 밀려나 있던 대원군이 다시 조정을 장악하자 중국은 경악한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으로 복귀하면 조선을 개방시켜 러·일을 견제하려는 중국의 한반도 정책은 밑바닥부터 뒤집힐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 대원군을 지지한 세력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텐진으로 납치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전통적으로 중·조 종속관계는 ‘정교금령(政敎禁令)’, 즉 ‘내정과 외교’의 자주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조공, 책봉 등 형식적, 의례적인 문제들을 제외하면 조선이 내정이나 대외문제를 자주적으로 결정하는 독립국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모호한 ‘종속관계’를 내세워 마치 원(元)나라 시대 고려에 주재한 다루가치와 같이 조선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려 나선 것이다. 이제 조선은 기막힌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 중심인물이 원세개(袁世凱)이다. 이홍장(李鴻章)이 파견한 원세개는 서울에 주재하면서 조선 정부를 장악했다. 1859년 생으로 대원군을 데리고 인천에 들어온 것이 1885년 10월 3일(양력)이니 이때 26세 청년이었다. 그는 1894년 청일전쟁 이전까지 오늘날 을지로의 중국 대사관 자리에서 ‘유안 다이런(袁大人)’으로 마치 총독처럼 행세했다. 우리나라가 1946년 10월 서울의 지명에서 일본식 이름을 정리할 때 ‘을지로’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원세개 등 중국인들의 본거지를 수(隋)양제를 무찌른 을지문덕 장군의 정신으로 제압하려 한 것이었다. 원세개는 서울 주재 외교단의 수장(doyen) 직을 맡으라는 서양 외교관들의 권고를 거부한다. 자기는 중국이 조선에 파견한 외교관이 아니라 조선 문제를 전담한 이홍장(李鴻章)이 조선의 정치를 감독하라고 파견한 ‘주찰조선 총리교섭 통상사의(駐紮朝鮮 總理交涉 通商事宜)’라고 말한다. 그는 조선과 중국은 한가족이라면서 외교사절들을 초청할 때도 자신이 주빈 자리에 앉고 조선의 늙은 외무대신을 말석에 앉혀 손님들을 접대하고 시중들게 했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궁중으로 들어가거나 고종을 배알하는 자리에서도 기립하지 않고 인사문제에도 개입했다. 서양 열강은 이에 중국의 조선 통제를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조선정책을 재평가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1884년 말 “조선에서 미국의 이해는 경제적인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서울 주재 미국공사의 지위를 특명전권공사에서 변리공사(minister resident)로 한 단계 격하시킨다.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던 영국도 중국과의 협조가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판단하면서 조선 독립에 대한 지지를 포기해 버린다. 조선은 중국의 압력을 감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주변 상황은 과거와는 판이해졌다. 열강들과의 수교와 만국공법의 도입으로 평등성에 기초한 유럽적 국제관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과거에는 중국만이 강대국이었으나 이제는 중국을 굴복시킨 강대국들이 포진하고 있다. 1885~1887년 영국의 거문도 철수는 중국을 통한 교섭이 실패한 후 러시아가 개입하면서 해결됐다. 국내에서도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독립당-개화파가 대두했다. 이에 정부는 1884년(고종 21) 조선·러시아 수교조약 체결 후 조선에서 세력을 확대해가는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하는 밀약을 두 차례 추진하며 미국에 외교관을 파견하여 우리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조치를 취한다. 해외 나들이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 2016-05-19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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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6월은 나라를 생각하자
- 5·18 유혈진압, 권력형 비리와 부패, 언론통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등에 대항하여 민주화 요구가 심화되자 전두환 정부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야당과 재야단체로 구성된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는 1987. 6. 10. 박종철 고문 살인 규탄과 호헌 철폐를 촉구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범국민적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이에 차기 여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6.29 선언 후 IMF 구제금융을 받기까지 10년간 노사분규가 극심하였다.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산업현장도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6.29선언 보름 전 서울 강북구 소재 S버스회사 간부가 한 근로자를 해고하겠다며 당시 담당 근로감독관이었던 기자에게 찾아왔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 날 강남구 소재 버스회사에서 노사분규를 주동하다가 해고되었는데, 근무이력을 숨기고 입사하였다가 사회분위기가 뒤숭숭해지자 전력을 공표하며 근로자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해고사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고시기가 좋지 않다. 6개월 전이라면 문제가 없는데 지금 해고하면 섶에 불을 지르는 격이어서 분규가 장기화될 수 있으니, 노동조합 위원장과 사장님 및 간부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잘 전하고 오히려 회유하는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그 회사는 듣지 않고 그 근로자를 해고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태우 후보의 6.29 민주화선언이 있었고, 노사분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그 회사도 해고된 근로자가 주동이 되어 노사분규를 야기하여 6개월가량 버스운행이 중단되었다. 그 과정에서 회사 간부 한명이 답답한 나머지 차량운행을 시도하기 위하여 농성장으로 버스를 진입시키다 근로자를 다치게 하여 구속당하는 사건이 있었고(당시 버스회사는 간부들이 버스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운행이 중단될 경우 거액의 버스 구입비가 잠식됨), 노동조합 위원장도 어용노조로 몰려 물러났다. 미리 대비하지 못하고 문제가 발생해야 일을 한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매번 좋지 않은 앞날이 예견되는데도 대책 없이 정쟁만 일삼다가 큰 고역을 치르곤 하였다. 임진왜란은 이율곡 선생 등이 왜의 침략을 예견하며 10만 양병설을 제안하였음에도 노론과 소론이 나뉘어 정쟁만 일삼다가 7년간 전국이 유린당하는 치욕을 겪었고, 병자호란 역시 당시 정치권이 청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주전파와 화해해야 한다는 주화파가 대비책 없이 다투다 침략을 당해 왕이 남한산성 앞에서 항복하고 공물 공녀를 받치는 치욕을 당했다. 한일합방 역시 쇄국파와 개화파가 대책 없이 대립만하다가 1910년 이후 45년간 일제에 강점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그 밖의 6.25 전쟁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건사고 역시 대책 없이 수수방관하다가 발생하였다. 지금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담하기 그지없다. 첫째, 저출산과 고령화로 항아리형 인구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노동력과 소비가 줄어 산업활동이 크게 위축됨은 물론, 복지비의 증가로 국가재정이 크게 악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가계부채는 세계 2~3위이고, 청년실업률은 11%(체감실업률 25%)나 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효 사상도 무너져 우리 사회가 암담하다. 둘째, 건설 금융 전자 화학 통신 조선 자동차 등의 기술력이 선진국에 뒤지고, 중국 인도 등 후발국은 턱 밑까지 쫒아왔을 뿐만 아니라, 이세돌과 알파고 대결이 시사하듯이 자동화 등으로 앞으로 일자리가 많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셋째, 북한은 핵실험을 비롯한 미사일 실험을 계속하고, 일본 중국 등 주변 열강 역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는데, 우리는 1조원이 넘는 방산비리가 적발되는 등 모든 곳에 비효율(부패 부조리 편가름 등)이 많다. 넷째, 미래가 불투명함에도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비전하나 제시하는 법 없이 패권경쟁만 일삼고 국민은 단합하지 못하고 이합집산하고 있다. 6월은 나라를 생각하자. 우리는 더 이상 문제가 발생한 후 대안을 만든다고 법석을 떨지 말고 조금 여유가 있는 지금 대안을 만들 것을 권한다. 가령, “미래위원회” 같은 범 기구를 만들어 최소 100년 앞을 내다보며 대한민국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과 함께 공유하며 개선해나가야 한다.
- 2016-05-10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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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의 맛] 남산의 풍류를 비비다
- 봄이 물씬 오른 4월이면 봄바람도 쐬고 꽃구경도 하기 위해 산에 오른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등산을 마치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는 발길로 인근 식당이 북적북적해진다. 여러 음식이 있겠지만, 간단하면서도 든든한 산채비빔밥을 빼놓을 수 없다. 벚꽃놀이를 즐기기 좋은 남산 둘레길의 비빔밥 맛집 ‘목멱산방’을 소개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남산 둘레길 관광객을 위한 아늑한 밥집 목멱산(木覓山)은 남산의 옛 이름이다. 그 이름을 딴 ‘목멱산방’은 남산 케이블카 정류장 맞은편 돌계단을 오르면 찾을 수 있다. 서울시가 15억원을 들여 지은 한옥으로, 아름다운 남산자락이 어우러져 멋을 더한다. 시에서 위탁관리를 하고 있지만, 음식의 맛은 운영자 장경순씨의 아내 강현영씨의 부모(강광전·조효숙씨) 역할이 컸다. 고품질·저가격, 무(無)화학 조미료, 족보 있는 먹거리를 지향하는 목멱산방, 이곳의 주재료인 장맛을 강씨 노부부가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 메뉴인 비빔밥에는 ‘비빔 매실 고추장’이 빠지지 않는다.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노부부가 재배한 매실로 만든 매실청(청과 과육을 갈아 넣음)에 고춧가루와 비법이 담긴 육수를 더해 맛을 낸다. 이외에도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메주를 쑤어 만든 간장·된장 역시 나물과 음식에 들어가는 핵심 조미료다. 부모의 손길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장 덕분에 목멱산방의 음식은 믿음직스럽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산 둘레길을 끼고 있어 산책을 나온 시민이나 등산객들의 발걸음이 잦다. 또, 서울의 명소인 N서울타워를 보고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도 한국미가 물씬 나는 외관에 이끌려 방문하곤 한다. 특히 남산 둘레길에 벚꽃이 개화하는 4월이면 손님이 늘어나 줄을 서기도 한다. 목멱산방에서 맛볼 수 있는 산방 비빔밥(7000원), 불고기 비빔밥(9000원), 육회 비빔밥(1만1000원)은 골고루 인기 있다. 나물과 밥, 고추장이 따로 나와 입맛에 맞게 비벼 먹을 수 있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나물은 봄 향기 가득한 취나물부터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머금은 깻잎나물, 겨울 눈 속에서 자라는 부지깽이나물, 유채나물 등이다. 지리산 언저리에서 수십 명의 할머니·할아버지가 직접 채취한 나물을 사용한다. 나물에는 순도 99.9%의 들기름을 넣어 깊은 고소함을 느낄 수 있다. (순도 99.9% 참기름은 밥에 들어간다) 목멱산방에는 정이오(鄭以吾)의 ‘남산팔영(南山八詠)’이라는 시에서 따온 여덟 개의 방(운횡북궐(雲橫北闕), 수창남강(水漲南江), 암저유화(岩底幽花), 영상장송(嶺上長松), 삼춘답청(三春踏靑), 구일등고(九日登高), 척헌관등(陟巘觀燈), 연계탁영(沿溪濯纓))이 있다. 방마다 있는 창문을 통해 남산의 경치를 즐길 수 있다. 주기적으로 오가는 케이블카도 흔한 풍경이 된다. 뒤뜰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은 남산을 병풍 삼아 한적하게 식사와 전통차를 즐기기에 좋다. 한쪽에는 작은 인공폭포도 있어 상쾌한 분위기를 더한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경치를 보러 가는 것도 묘미다. 편안하고 아늑한 이미지이지만, 메뉴 주문과 서빙, 정리까지 셀프 서비스(self service)다. 조금 수고스럽긴 하지만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경치가 그에 대한 보답이라 할 수 있겠다. 봄과 가을에 추천하고 싶은 자리는 야외 테이블이 있는 뒤뜰이다. 봄이면 따뜻한 바람을 타고 날아온 꽃잎들이 비빔밥에 달달함을 더하고, 가을에 쌓인 알록달록 낙엽은 한옥과 어우러져 고아한 정취를 풍긴다. 비빔밥과 곁들이는 메뉴로는 해산물 부추전(1만2000원), 지리산 참도토리묵(1만원), 우리 콩 두부김치(1만원) 등이 있다. 그 외에 훈제오리와 참나물 무침·한우 육회 무침·묵은지 보쌈(각 2만5000원)도 푸짐한 저녁 식사를 원할 때 많이 찾는 메뉴다. 식사 후 차를 주문하면 1500원을 할인해준다. (모든 차 메뉴는 아이스로 주문 가능, 500원 추가) 목멱산방에 들어서면 한의원에서 맡을 수 있는 쌉싸름한 한약 향이 솔솔 난다. 십전대보탕·대추차(4500원), 오가피차·당귀차(5500원) 등 몸에 좋은 한약재로 만든 차를 매장에서 직접 끓여내기 때문이다. 유자차·모과차(4500원)는 시원하게 에이드(ade)처럼 즐겨도 좋다. 겨울이면 각종 청을 만드는 손길로 분주해진다. 전남 고흥의 유자, 전북 장수에서 재배한 생강과 경북 청도의 모과 등을 설탕에 재워둔다. 과일청이 들어간 전통차에 카운터에서 판매하는 모둠한과(4500원, 삼색유과·모둠강정·찹쌀약과)를 곁들이면 잘 어울린다. 주소 서울시 중구 남산공원길 627 영업시간 11:00~21:00 문의 02-318-4790
- 2016-04-2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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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철의 야생화] 폭포수의 벗이자, 춘설(春雪)과도 친구인 특산식물 '모데미풀'
- 봄바람 따라 왁자지껄 피어나던 바람꽃들이 어느 순간 기세가 꺾여 눈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는 4월의 깊은 계곡, 높은 산기슭에선 꽃 걱정 말라는 듯 순백의 탐스러운 꽃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서 방긋방긋 눈인사합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고, 산기슭과 계곡에 두껍게 쌓였던 눈이 녹아 폭포수가 되어 흘러내리는 계곡의 푸른 이끼 곳곳에 달덩이처럼 환한 야생화가 꽃잎을 활짝 열어젖히고 봄날의 환희를 노래합니다.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그렇습니다. 높고 푸른 산속에 눈 녹은 맑은 물이 폭포수가 되어 콸콸 흘러내리고, 그 곁에 한국 특산식물인 모데미풀이 무더기로 피어 ‘산꽃 들꽃’, 우리의 야생화를 찾아 나선 벗들을 등산객들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한국 특산식물이란 전 세계에서 우리 땅에서만 피고 자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식물종의 하나라는 뜻입니다. 1935년 지리산 자락인 운봉의 ‘모뎀골’ 또는 ‘모데미마을’이란 곳에서 일본인 학자 오이 지사부로(大井次三郞)가 처음 발견해 모데미풀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합니다. 학명에 오이(Ohwi)란 일본 성이 들어간 이유입니다. 그런데 모뎀골이나 모데미마을이란 동네 이름이 확인되지 않아 꽃이 피어 있던 ‘무덤’을?일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모데미’라는 엉뚱한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학명 중 종명 메갈에란티스(Megaleranthis)는 ‘크다’는 뜻의 그리스어 메가스(megas)와 너도바람꽃(Eranthis)의 합성어입니다. 실제로 10~20cm 안팎의 줄기 끝에 흰색의 꽃잎처럼 보이는 꽃받침 잎 5장과 노란 수술을 가진 꽃송이가 하나씩 달리는데, 꽃은 순백의 너도바람꽃을 닮았지만 크기는 2배쯤 됩니다. 첫 발견지인 전북 남원의 ‘운봉금매화’란 별칭으로도 불리는데, 영어 이름은 한국 특산식물답게 한글명인 모데미풀(Modemipul)입니다. 다행인 것은 세계적으로는 한국만의 고유종, 한국의 특산식물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만나기 힘들 정도로 매우 희귀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남으로 제주도 한라산부터 북방한계선으로 알려진 강원도 점봉산까지 폭넓게 분포하는데, 대부분 해발 800m가 넘는 습지나 능선 부근에서 자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산·아고산 지대가 자생지인 특성으로 인해 늦은 봄인 4~5월 개화함에도 불구하고 설중화(雪中花)의 주인공이 되곤 합니다. 산자락 아래에서는 분명 비가 내리지만, 같은 날 같은 산이라도 정상 부근 고지대에서는 눈발이 흩날리기 때문입니다. Where is it? 첫 발견지라는 학술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전북 남원 운봉의 지리산 자락에서는 정작 모데미풀을 한 포기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대신 한라산, 설악산, 태백산, 점봉산, 오대산, 광덕산 등 전국적으로 폭넓게 자생지가 확인되고 있는데, 개체 수가 많기로는 소백산과 덕유산이 꼽힌다. 특히 소백산 정상 부근은 한국 최대(한국에만 있으니 세계 최대라는 말도 된다) 규모의 자생지가 펼쳐지는 곳으로 유명하다. 야생화 사진작가들이 최고로 꼽는 모데미풀 자생지는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청태산 자연휴양림. 졸졸졸 흐르는 계곡 물과 무성한 초록색 이끼, 바위 사이사이에 하얗게 핀 모데미풀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명소다.
- 2016-04-12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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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철의 야생화] 백의 얼굴, 천의 표정을 자랑하는 광릉요강꽃!
- 야생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이라면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꽃, 그리고 야생 상태의 꽃을 만나기를 로또복권 당첨만큼이나 소원하는 꽃, 그러나 정작 만나고 나면 혹시라도 소문이 퍼져 안 좋은 일이 벌어질까 애태우는 꽃, 바로 ‘광릉요강꽃’입니다. 오랜 세월 동호인은 물론 식물학자나 관련 부처의 지대한 관심과 사랑, 보호, 연구 대상이 되어 왔지만, 이렇다 할 안정적인 보전·증식 대책이 나오지 않아 여전히 ‘보호 대상 1호’ 신세를 면치 못하는 꽃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지각 있는 이들은 자신이 본 광릉요강꽃의 자생지를 밝히지 않는 것은 물론 꽃이 피어 있는 동안에는 꽃 사진 등의 공개를 금기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에 개화 시기인 5월 초가 아닌 한겨울에 광릉요강꽃을 소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31년 경기도 광릉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해서 ‘광릉’이, 타원형 꽃의 중앙이 움푹 파인 게 ‘요강’을 닮았다고 해서 ‘광릉요강꽃’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8㎝ 안팎의 꽃을 가운데 두고 앞뒤 대칭으로 펼쳐진 합죽선 형태의 넓은 잎 2장이 주름치마를 닮았다고 해서 ‘치마난초’라고도 불립니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야생화, 특히 야생난 중에서 20~40㎝가량의 전초나 꽃의 크기는 물론 꽃의 생김새나 색상이 아름답고 활달하고 화려하기가 단연 손에 꼽을 만합니다. 옛날 중국 4대 미녀의 하나라는 서시가 지병인 심장병 통증으로 얼굴을 찡그리자 무엇이든 서시를 흉내 내면 아름답게 보일 거란 생각으로 뭇 여인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바람에 ‘효빈(效嚬)’이란 말이 생겼다는데, 광릉요강꽃에서도 그런 전천후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잎이든 줄기든, 어린 꽃봉오리든 만개한 꽃이든 시들어 가는 꽃이든, 햇살이 역광이든 순광이든, 백의 얼굴로 천의 표정으로 보는 이에게 각양각색의 황홀감을 선사합니다. 어떤 꽃은 어릿광대의 몸짓으로, 어떤 꽃은 하회탈의 웃음으로, 또 어떤 꽃은 절세미인의 요염한 표정으로, 또 다른 꽃은 시골 처녀의 순박한 미소로 보는 이를 행복하게 합니다. 세계적으로 일본과 대만에도 자생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경기도 포천과 가평, 강원도 화천, 전북 무주, 전남 광양 등 6개 산악지역 18곳에서 모두 800~1000개의 개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지만, 그중 순수한 자생 개체는 절반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광릉요강꽃은 희귀성과 뛰어난 관상미 등으로 여전히 남획의 위험에 처해 있는데, 자생지에서 강제로 옮겨지면 길어야 2~3년 안에 거의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생 관계에 있는 자생지 토양 내 곰팡이균이 파괴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Where is it? 국립공원인 덕유산을 비롯해 죽엽산, 천마산 등 주요 자생지의 경우 철조망을 두르고 보호·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다만 경기도 광릉 국립수목원에서는 몇 년 전부터 수목원 안에 펜스를 치고 광릉요강꽃을 공개하고 있다. 대량 뿌리증식에 성공한 강원도 화천의 한 보호시설로부터 몇몇 개체를 옮겨 놓고 일반에 공개하는 것. 이전에 복원한 광릉요강꽃을 통해 일반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줌으로써 실제 자생지들이 훼손되는 것을 막자는 취지에서다. 또 강원도 화천군 환천읍 동촌리에서는 마을 주민이 수십 년 전 평화의 댐 공사 부지의 광릉요강꽃 몇 개체를 인근 산에 옮겨 심은 뒤 독자적인 노력으로 500여 개체에 이를 만큼 대량으로 ‘뿌리증식’하는 데 성공한 군락을 볼 수 있다.
- 2015-12-09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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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대열의 역사 그 순간] 청일전쟁을 보며
- 광복 70년을 맞아 우리의 근세사를 회고하면서 교훈을 찾으려는 시도들이 방송사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KBS는 7월 말 1894~1895년 청일전쟁에 관한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전쟁은 조선에서 중국과 일본이 패권을 다툰 전쟁이다. 아산만에서 시작된 전쟁이 황해해전으로, 일본군이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후 만주, 요동반도, 그리고 중국본토로 들어가는 산해관(山海關)까지 확대됐다.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조선의 독립이 보장됐다.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전쟁이 시작됐을 때 서양 국가들은 대부분이 중국의 승리를 예견했다. 중국은 아편전쟁 후 50여 년간 서양 열강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는 연전연패했지만 동양의 작은 나라 일본에는 이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흔히들 명치유신으로 개화에 성공한 일본이 보수-반동정권이 지배한 중국에 이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의 패배를 설명하는 편린일 뿐이다. 당시 중국은 근대 이전 유럽의 상황과 유사했다. 유럽의 전제군주들은 엄청난 개인 비용으로 (사실은 국민 세금이지만) 양성한 ‘국왕 개인의 군대’가 전쟁으로 약화되면 국내정치에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진다고 보았다. 전쟁이 장기화돼 병력이 소진되면 승리한다 해도 국내의 반대세력들이 이 틈을 이용해 반기를 들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단기전으로 끝났다. 상대방과 한번 부딪쳐 서로의 힘을 시험해 본 뒤 곧 협상으로 들어가 주고받기를 하면서 병력 손실은 최소화하려 했다. 전쟁이 정치·외교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청일전쟁 시기 중국은 이보다 더 심했다. 명목상으로는 모두 조정의 지휘 아래 있으나 워낙 땅덩이가 커서 통합된 단일 명령체계를 갖춘 ‘국군’이란 개념의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청 제국 군대의 모태인 8기군 외에 몽골, 회(무슬림), 한족 부대가 있었으며 이들은 다시 지역 단위로 나누어져 분리·통치됐다. 그러나 8기군은 나태해져 과거의 용맹성을 잃었고 태평천국의 난/운동(1851~1964)은 임진왜란 때 ‘의병’과 같은 집단들이 진압한다. 당시 중국의 대외관계를 총괄하던 인물은 이홍장(李鴻章)이었다. 그는 태평군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증국번(曾國藩)의 회군((淮軍-안휘성 일대에서 조직한 의용군) 출신이었다. 이홍장은 증국번의 후계자로 회군을 배경으로 수도 북경이 아닌 천진(天津)에 거주하면서 중국 북부의 해군과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북양대신이라는 직함으로 중국의 외교, 군사, 경제의 실권을 장악했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조선 문제에 관한 한 내가 조선왕’이라고 호언할 정도였다. 그러나 눈길을 국내정치로 돌려보면 북경의 만주조정과 이를 둘러싼 보수-반동 집단들의 끊임없는 견제는 물론, 다른 지역 군부의 질시와 경쟁에 싸여 있었다고 할 것이다. 정통 왕조에서 황제가 거주하는 ‘경성·수도’에서 떨어져 있는 관리의 지위는 항상 불안했다. 중국 해군은 겉보기에는 당당했다. 서양식으로 북양, 남양, 복건, 광동함대 등 4개 함대 편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중 북중국(황해) 일대를 담당한 북양함대는 ‘극동’ 최강의 함대, 세계 8위의 함대이며 함선 78척, 총 배수량 8만3900톤으로 일본해군 전체를 능가하는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다. 북양함대 기함(旗艦) 정원(定遠)과 동급인 진원(?遠)은 독일에서 건조돼 배수량이 7670톤으로 일본의 기함 마쓰시마(松島, 4217톤 영국에서 건조)의 두 배에 가까운 덩치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일본과 싸우기 싫었다. 20년 넘게 키운 북양함대와 육군이 여전히 문제점이 많았으며 전쟁에서 타격을 입으면 북경에는 그를 탄핵하는 상소로 넘칠 것이고 간신히 버텨오던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 다른 함대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 전쟁에 전력투구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눈은 국내정치에 둔 채 떠오르는 일본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하고 또 피해를 줄여 군사력을 최대한 보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동서고금을 통해 전쟁의 승패가 무기와 병력의 수로 결정되던가? 총지휘관은 정치적 이유로 전쟁을 망설이고, 병사들은 훈련과 정신무장이 안 되어 있고, 부대 간 유기적인 상호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군대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북양함대 예산은 위에서는 서태후가 공공연히 빼돌려 별장 이화원(?和園)에 연못을 만들고 그 흙으로 산을 쌓는데, 전선들은 전력 유지를 위해 필요한 개조를 못하고 정비 불량으로 규정 속력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탄약의 비축도 불충분해 해전 중 부족에 시달렸다고 한다. 주포에 장전한 포탄이 부족할 뿐 아니라 구경이 다르며 오랫동안 내부 부식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다. 중국의 실화소설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홍장은 정원과 진원을 점검하자 사용 가능한 주포 포탄이 세 발뿐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면 합쳐 단지 여섯 발뿐이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정원에 한 발, 진원에 두 발, 모두 합쳐서 세 발입니다.’ 정원과 진원에는 주포가 각각 4문씩 있었다. 또 포의 구경 15인치에 쓸 수 없는, 예를 들어 10인치짜리 포탄이 준비됐다면 어떻게 포를 발사할 수 있겠는가. 육전의 승패를 가른 평양전투(1894) 직후 일어난 황해해전에서 중국은 10척의 군함 중 5척이 침몰, 3척이 파손되고 일본은 제해권을 장악한다. 다음 해 일본군이 위해위(威海?)를 공격하자 중국 해군은 정원의 배 밑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켰다. 진원은 전리품으로 빼앗긴다. 이후 진원은 러일전쟁 때 고물 취급을 받지만 발트함대를 섬멸한 대한해협 전투에서 러시아 수송선을 공격하는 등 ‘적국’을 위해 봉사했다. 중국을 대표하며 위용을 과시하던 전함의 기이한 운명이었다고 하겠다. 이 전쟁은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아니라 이홍장과 일본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청일전쟁의 역사를 읽으면 통영함 비리사건이 떠오를까?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 2015-09-17 0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