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조금 과장되게 표현해 봤지만, 점차 현금이 지갑 속에서 사라지는 현상이 빠르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발달하는 IT 기술 때문인데 극단적으로 동네 시장에 갈 때를 제외하면 지폐나 동전을 쓸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이런 현실에 익숙해져 가는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솥단지 속 개구리처럼 서서히 익어가도 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돈은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를 확립한 일등공신이다. 고등학교 경제 시간에 배운 대로 인류가 물물교환 시대를 거쳐 가치를 담보하는 금과 은의 시대를 만들고, 나아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지폐의 시대가 열림으로써 자본주의가 활짝 개화했다. 이런 자본주의의 꽃인 화폐가 마치 중생대 공룡처럼 지구 상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돈과 함께 살아오면서 만만치 않은 사연과 스토리를 만들어 왔다. 젊은 날 누런 월급봉투 속에 들어 있던 칼같이 빳빳한 지폐의 감촉을 잊을 수 없다. 침을 발라 한 장 한 장 세면서 우리는 미래의 꿈을 키웠다. 친정에서 돌아오는 어느 저녁나절 동구까지 따라 나오신 어머니가 손에 쥐어주던 축축한 만 원짜리 지폐는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그런 지폐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한 시대와 문명이 저물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앞으로 아이들에게 주는 용돈을 자녀의 계좌로 송금하며,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도 자동이체로 처리할 것이다. 이미 결혼식이나 장례식에는 계좌 이체 번호가 나돌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아마도 돼지 저금통에 ‘딸그락’ 하고 떨어지는 행복한 소리를 들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단지 하나의 문명이 가고 새로운 문명이 도래하는 데 따른 쓸쓸한 세기말적 감상이라면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차 한 잔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만, 아직 IT와 친해지기 어려운 우리 세대에게 화폐의 몰락은 곧 삶의 혼란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스마트폰으로 척척 결제하는 세대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본다.
한국은행은 2020년까지 우선 ‘동전 없는 사회(Coinless Society)'를 만들기로 했고 그 후 차례로 고액권부터 줄여 가기로 방침을 세웠단다. 돈의 제작비용을 아끼고 투명한 사회로 만들어 가려면 바람직한 방향이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 돈에 대한 따뜻한 향수를 차가운 IT기기로 바꾸기 어려운 세대에게 이런 상황은 분명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SF 공포영화로 다가올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