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어 경치와 물이 좋아 아름다운 금수강산이다. 이처럼 좋은 나라에 태어난 나는 문화인인가, 혹은 야만인인가? 지성과 교양이 있는 사람은 문화인(文化人)이고, 그 반대는 야만인이다. 또 문화에 관한 일에 종사하는 지식인들을 가리켜 문화인이라고도 말한다. ‘문화의 힘으로 세계를 감동시키는 나라.’ 이는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우리나라를 일컫는다.
몇 년 전, 직장에서 퇴직하고, 향토문화해설사 교육을 받았다. 그때 국가지정문화재인 국보, 보물과 사적 등을 비롯해 서울시지정문화재에 관해 배웠고, 해설을 할 때 설명을 해 주며 자원봉사도 했다. 하루는 해설을 하러 서울 봉화산에 갔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어 1971년 봉화산 근린공원으로 문을 열었던 곳이다. 전에는 산책이나 등산 등 여가를 즐기러 다녔으나, 해설가로 임무가 주어졌을 때는 그곳에 있는 문화재들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했다. 친구들은 복잡하게 뭣 하러 그 일을 하느냐고 했지만, 공부를 할수록 그동안 몰랐던 것이 너무나 많았고, 유익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봉우재는 해발 160.1m로 문화재가 두 개 있어 서울특별시와 담당 문화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정상에 있는 아차산 봉수대지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5호(1993)로 지정문화재로 복원했다. 조선시대 전국 5개 봉수로 함경도 경흥에서 시작해 강원도를 거쳐 남양주 한이산에서 올린 봉수를 받아, 남산(목멱산)으로 연결하는 제1봉수로의 마지막 봉수대가 있던 자리다.
주민들은 이 봉수대 부근에서 음력 3월 3일 삼짇날 무형문화재 제34호(2005)인 봉화산 도당제를 지낸다. 이때는 국내외의 관심 있는 이들이 모이는데, 친구들을 초청해 공연을 보여주고 맛있는 음식으로 잔칫상을 푸짐하게 대접한 일이 있다. 그때야 친구들은 부푼 배를 두드리며, 나처럼 해설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한때는 골치 아프고 복잡한 일을 왜 하느냐고 핀잔했으나, 지금은 나를 자주 부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당시 친구들에게 문화인이 되려면 지성과 교양을 쌓아야 하며, 야만적인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나 역시 문화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루아침에 바로 되는 것일까? 문화란 세상이 깨고 발달하여 문명이 개화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 이상을 실현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문화의 발전과 향상을 지상목표로 삼는 나라인 문화국가(文化國家:cultured nation)에서 문화인다운 삶을 지향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김구 선생은 가장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무대에 등장할 날을 위해 강조한 그의 이야기가 귓가에 아스라이 메아리쳐 오는 듯하다. 나 역시 ‘문화의 힘으로 세계를 감동하게 하는 나라’를 위해 사명감을 갖고 친구들과 더불어 해설가로서 최선을 다해 활동해보려 한다. 수년 전에 배웠던 수업자료들을 친구들에게 주려고 차곡차곡 정리하는 중이다. 소중한 자료를 넣을 예쁜 봉투를 준비해 친구들에게 줄 반가운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4월, 불가역적인 봄입니다. 춘삼월(春三月)이라 하지만 심술궂은 꽃샘추위로 간간이 옷깃을 여미고 어깨를 움츠려야 했던 3월과 달리, 이제부터는 오로지 화창한 봄입니다.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노랑나비가 살랑살랑 춤추며 날아다니는 봄. 어질어질하고 아찔한, 그런 봄날의 몽환적 분위기를 쏙 빼닮은 야생화가 있습니다. 봄이 농익어가는 4월부터 5월 사이 연보랏빛 꽃을 피우는 깽깽이풀입니다.
주로 산 중턱 아래 낮은 숲에서 자랍니다. 잎이 나기 전, 6~8개의 꽃잎이 지름 2cm가량의 원을 그리며 피는 꽃은 단번에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매혹적입니다. 민가와 가까운 곳에서 자라는 데다 관상미가 높은 까닭에 남획과 자생지 훼손이 심해 한동안 멸종위기 야생식물로 지정됐다가 몇 해 전에야 해제되는 곡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한두 송이가 각기 떨어져 피기도 하지만, 대개는 수십 송이가 뭉쳐서 여기에 한 무더기, 저기에 한 무더기 피는데, 바로 그런 특성에 깽깽이풀이란 이름의 유래와 번식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즉 듬성듬성 자라는 모습에서 한 발로 껑충껑충 뛰는 깽깽이걸음을 떠올리고 깽깽이풀이란 이름을 붙이게 됐다는 설이지요.
그런데 깽깽이풀이 이처럼 듬성듬성 자라게 된 데에는, 당분이 함유된 깽깽이풀의 씨앗을 개미들이 좋아해 개미집으로 운반해가는 도중에 여기에 하나, 저기에 하나 떨어뜨리면서 자연스럽게 분산 발아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창 농사일이 바쁜 4월 농부들이 만개한 이 꽃을 보면 ‘깽깽이(해금이나 바이올린을 낮춰 부르는 말)’ 켜며 땡땡이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늘하늘한 꽃이 예쁘기 그지없지만, 활짝 핀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개화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 날이 조금만 흐리거나 기온이 차면 꽃잎을 아예 열지 않습니다. 게다가 길이 20~30cm의 꽃대 끝에 하나씩 달리는 꽃은 매우 연약해 바람이 조금만 심하게 불거나, 빗줄기가 강하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지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꽃이 진 뒤 나는 잎이 꽃 못지않게 귀여워 그 또한 충분히 볼만합니다. 줄기 없이 뿌리에서 바로 나오는 잎은 적갈색에서 점차 녹색으로 변합니다. 물결 모양의 가장자리나 물에 젖지 않고 딱딱한 형태가 연잎을 많이 닮았는데, 이로 인해 아예 황련(黃蓮) 또는 조황련(朝黃蓮)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Where is it?
“깽깽이풀도 없는데 뭐하러 와요?” 몇 해 전 제주의 ‘꽃동무’에게 4월에 방문하겠다고 하자 돌아온 답이다. 남한 최고의 산인 한라산이 있어 ‘없는 야생화가 없는’ 제주도이지만, 4월의 야생화로 손꼽을 깽깽이풀만은 자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실제 제주도와 남해 도서지방을 제외하고 전국에 분포한다. 그중 야생화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유명 자생지는 경북 의성의 고운사 주변, 대구 달성군 본리리 야산, 강원 홍천군 방내리 야산 등지다. 멸종위기종으로 관리하는 동안 인위적인 증식이 많이 이뤄져 전국 각지의 웬만한 식물원·수목원 등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이었다. 몇십 년 만의 강추위가 엄습했고 제주도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에도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사람들은 맹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영국의 낭만파 시인 셀리가 읊었던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은 멀지 않으리~”라는 시 구절처럼 봄이 다가왔다. 이제 움츠렸던 몸을 활짝 펴고 봄을 만끽하며 활발하게 활동할 시기다. 메마른 대지 위에 조물주가 만들어놓은 꽃의 정원으로 떠나보자.
제1추천지 : 접근성이 좋은 서울대공원에서 테마별로 즐거움 만끽하기
필자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울대공원을 한때 자녀들을 데리고 갔던 동물원으로만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서울대공원은 동물원뿐만 아니라 다양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첫째는 동물원이다. 지금은 볼 수 없는 호랑이, 사자 등 맹수와 세계 각국에서 들여온 희귀동물로 가득하다. 세계 각국의 동물들을 이곳에서 다 볼 수 있다. 천천히 여유를 갖고 동물의 고향과 각각의 성향과 습성 등을 살펴보고 관찰하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1984년 5월 1일 개장한 이래 29개 동물 막사에 332종 2700마리의 동물이 있다.
둘째는 식물원이다. 진귀한 꽃들이 많다. 봄꽃들의 화려한 자태를 볼 수 있는 것은 큰 축복이다. 꽃향기는 덤이다. 봄은 꽃들의 잔치가 화려하게 열리는 계절이다. 2017년 5월에는 600여 종의 식충식물로 꾸며진 식충식물관도 개관을 했다. 식충식물은 향, 색, 꿀 등으로 먹이를 유인하는데 끈끈이형, 포획형, 흡입형, 유도형 등이 있다. 날카로운 덫으로 순식간에 파리를 낚아채는 파리지옥, 끈끈이주걱, 벌레잡이제비꽃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셋째는 둘레길이다. 둘레길은 힐링할 수 있는 좋은 코스다. 맑은 공기와 꽃향기를 맡으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봄 향기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장소다. 호수 둘레길, 동물원 둘레길, 숲속 愛 힐링 코스가 있다. 호수 둘레길은 분수대 광장에서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돌아오는 산책로여서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즐길 수 있다. 가볍게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며 잠깐 커피 한잔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운 길이다. 동물원 둘레길은 제법 길다. 청계산 자락인 이 길은 2013년도 서울시에서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단풍길 81개소’에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봄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아름드리나무들이 가득한 곳이다.
서울대공원을 추천한 이유는 동물원뿐만 아니라 테마별로 즐길거리가 있고 사계절의 아름다움까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벚꽃이 화려하게 피는 봄에는 나들이하기 좋은 최고의 명소로 꼽힌다. 벚꽃 축제, 튤립 축제, 장미 축제도 열려 축제의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제2의 추천지 : 고창 청보리밭
청보리밭 축제는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열린다. 봄을 꽃의 계절로만 보는 것은 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푸른 언덕 위에 펼쳐진 청보리의 싱싱함을 느끼고 풋풋한 내음을 맡다 보면 젊음의 에너지가 솟아오름을 느낄 수 있다. 영화 ‘도깨비’의 촬영지이기도 해서 해마다 수만 명의 관람객들이 찾아온다. 청보리밭을 걸으며 청보리 향에 취하다 보면 도시의 소음에 지친 심신이 어느새 맑아진다. 또한 이곳에서는 푸른 청보리밭과 함께 유채꽃도 즐길 수 있다. 우아한 모습을 자랑하는 유채꽃의 샛노란 자태가 눈부실 정도다.
고창 청보리밭을 추천하는 이유는 이곳과 함께 가까운 곳에 있는 선운사 동백꽃을 함께 볼 수 있어서다. 또 먹거리가 풍부하다는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하루 시간을 내어 청보리밭을 거닐고 선운사에 들러 동백꽃까지 감상한다면 시간과 경비가 아깝지 않을 것이다. 주변에는 오래된 장어 요리집도 있다.
제3의 추천지 : 수안보 벚꽃 축제와 온천 축제
수안보는 충주시 수안보면에 있는 온천 지구다. 왕의 온천이라 불리는 이곳은 태조 왕건과 숙종은 물론 현대의 역대 대통령들도 즐겨 찾았던 곳이다. 53℃의 적당한 수온과 각종 미네랄까지 포함돼 있어 장수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매년 4월 중순 벚꽃의 개화 시기에 맞춰 온천 축제와 벚꽃 축제가 함께 열려 온천욕도 하고 벚꽃까지 즐길 수 있다. 천변으로 길게 늘어선 벚꽃길은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 아름드리나무들로 이루어져 있다. 화사하게 핀 벚꽃길을 걷노라면 향기는 물론 눈꽃을 맞으며 황홀감에 젖어들게 된다.
행사기간에는 행진 퍼레이드, 각종 축하공연, 이 고장 명물인 꿩고기 시식회도 열린다. 다채로운 볼거리와 힐링온천 그리고 아름다운 벚꽃이 더욱 풍요로운 봄의 축제를 선사한다. 벚꽃 축제, 온천 축제가 열리는 수안보는 전국 어디에서든 승용차로 오기 적당한 거리에 있다. 문경 옛길을 걸으며 등산도 할 수 있다. 30년 전통의 꿩 요리가 유명하며 올갱이 해장국, 칡냉면, 물만두 전골집 등 맛집도 많아 식도락을 느끼기에도 제격이다.
해마다 봄이 다가올 무렵이면 사람들은 꽃을 보러 나서기 시작한다. 홍매화를 보러 절 마당을 찾고, 진달래나 철쭉, 산수유, 튤립... 등등 쉬지 않고 피어나는 봄꽃들을 찾아 사람들은 멀리멀리 떠나곤 한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 먼길을 다시 돌아오면 결국 그 모든 꽃들이 서울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고궁에 기품 있는 홍매화가 있고 도심 한 복판 사찰의 기와 위에 산수유가 노랗다. 버스만 타도 진달래가 가득 피어난 산이 있고 지하철역을 나서면 푸짐한 개나리 동산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아름다운 고택의 담벼락에 피어난 능소화를 찾아 남녘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 가까운 공원에 능소화 터널이 있고, 동네 구청 화단에, 가까운 향교 돌담에, 심지어는 도로변에도 꽃담을 이루어 능소화의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먼 남쪽의 산하에, 그 들판에, 고즈넉한 사찰과 함께, 그 마을 뒷산에서 또는 그곳의 숲에서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사실이다. 스님의 맑은 미소가 봄볕처럼 따사로운 절 마당에 피어난 홍매화가 더없이 아름답다. 몽글몽글 빛나는 대웅전 뜰의 빛망울이 분홍빛 진한 홍매를 돋보이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야생화가 언 땅을 뚫고 나왔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광명의 구름산에 야생화가 지천이다. 남양주 쪽의 운길산과 청노루귀의 검단산이 있다. 차를 몰고 영흥도와 구봉도 쪽으로 잠깐 달리면 겨우내 낙엽더미 속에 묻혀있다가 고개를 내민 노루귀를 볼 수 있다. 아직 녹지 않은 눈 속에서 피어난 노오란 복수초가 환하다. 보물찾기 하듯 찾아낸 손톱만 한 야생화와의 조우가 짜릿하다. 반나절만 나서면 봄의 전령사들을 만날 수 있고 바다가 보이는 자연 속의 봄꽃을 귀한 손님처럼 맞을 수 있다.
겨우내 땅 속에 묻혀있다가 강인한 생명력으로 존재감을 보여주느라 애썼다고 눈인사를 하고 싶은 순간이다. 그 산비탈에 엎드려 봄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수줍은 바람꽃을 향해 렌즈 초점을 맞추며 행복하다. 렌즈를 통해서 바라보는 자연의 섭리와 변화를 만끽하는 기쁨에 감사한 시간이다. 반갑게 마주보고 고맙게 담아내고 조심히 남겨두고 발걸음을 옮긴다.
머잖아 꽃망울을 터트리며 개화를 알릴 매화나무도 추위 속에 싹을 틔우는 게 보인다. 온갖 풍상을 겪어 고목이 되어버린 나무에 봉오리가 맺혀있다. 비로소 나무의 굴곡진 꺾임의 멋도 눈에 들어온다.
굳이 멀리 떠나지 않아도 가까이에 봄이 있고 봄꽃이 싹을 틔우고 있다. 봄볕 드는 버스 창가에 앉아 꽃을 보러 가는 기분을 누려볼 수 있다. 봄 하늘은 푸르고 찬 공기는 상쾌하다. 매년 이런 계절을 맞으며 이 땅에 사는 맛을 비로소 즐겨본다. 뒤늦게 내가 사는 세상이 고맙고 애틋하다.
추위를 견디고 피어난 꽃들이 향기도 좋다고 한다. 매섭던 겨울이 지나고 해마다 이렇게 돌아오는 봄에 다투어 피어나는 봄꽃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네 인생은 감사하다.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Hepatica asiatica Nakai
꼭 1년 전인 2017년 2월 중순, 전북 정읍의 내장산을 찾았습니다. 한겨울 그 진면목이 드러나는 겨우살이, 특히 붉은겨우살이를 만나고 싶어 일부러 길을 나섰습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연자봉 중턱 전망대에 오르자 과연 기대했던 대로 한 폭의 멋진 수묵화가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각각 연한 미색과 붉은색 열매를 풍성하게 맺은 겨우살이와 붉은겨우살이가 앙상한 겨울나무 사이로 환하게 드러나 있었던 거죠. 겨울 여행의 정취에 흠뻑 빠져 변산반도 서쪽으로 내처 달려 닿은 곳은 부안의 능가산 내소사. 벌써 10여 일 전부터 야생화가 피기 시작했다는 ‘꽃동무’의 전언이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차로 두세 시간 내려올 만큼 남녘이니 분명 기온 차가 있다고 하더라도, 2월 초순에 꽃이 피었단 얘기가 믿기지 않았기에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내소사를 품은 능가산 자락을 겨우 10여 분쯤 올랐을까. 눈을 헤치고 피어난다고 해서 파설초(破雪草) 또는 설할초(雪割草)란 별칭으로도 불리는 노루귀가 티끌 하나 없는 선홍색 꽃을 활짝 피운 걸 보았습니다. 아~ 봄이 이미 지척이 와 있는 것을, 능가산 산중에선 벌써 봄이 시작된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날 만난 노루귀는 봄의 전령사를 넘어, 그 자체가 화창한 봄날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연은 부지런합니다. 풀과 나무들은 부지런합니다. 흰 눈이 덮인 산을 보며 언제 봄이 오나, 언제나 봄이 오나 하고 안달하는 사이, 이미 꽃은 피어나고 있습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니 봄은 절로 따라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봄꽃은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부지런히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중 봄보다 먼저 피어, 겨울이 가고 새봄이 이미 시작됐음을 알리는 야생화가 바로 노루귀입니다. 원래 꽃이 핀 뒤 둘둘 말려 나오는 삼각형 모양의 잎이 노루의 귀를 닮았다 해서 노루귀란 국명(國名)을 얻었는데, 서양인들의 눈에는 그것이 우리 몸속의 간(肝)과 닮아 보였나 봅니다. 그래서 학명 중 속명으로 간을 뜻하는 헤파티카(Hepatica)를 얻었고, 영어 이름은 아시안 리버리프(Asian Liverleaf)입니다.
전초(全草)라고 해봐야 키 10cm, 잎 5cm, 꽃 1.5cm 정도에 불과해 유심히 살펴봐야 겨우 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주 작은 풀꽃입니다. 그러나 다양한 꽃 색과 깜찍하고 앙증맞은 생김새는 ‘봄 야생화의 대표 주자’로 꼽을 만큼 환상적이고 매혹적입니다. 먼저 꽃 색은 흰색에서부터 홍색과 청보라색에 이르기까지 그 변이의 폭이 매우 넓습니다. 홍색도 연분홍에서부터 진홍색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고, 청보라색 역시 하늘색에 가까운 옅은 색에서부터 코발트블루까지 다양합니다. 단순한 흰색도 있지만, 미색에 가까운 흰색도 있습니다. 꽃 색 못지않게 보는 이를 황홀하게 만드는 건 꽃줄기와 총포(꽃대 끝에서 꽃 밑동을 싸고 있는 비늘 모양의 조각) 등에 난 무수한 잔털입니다. 볕 좋은 봄날 강렬한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노루귀의 하얀 솜털을 한 번이라도 바라본 적 있다면 ‘노루귀’의 황홀한 매력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Where is it?
노루귀의 큰 장점의 하나는 어떤 야생화보다도 개체 수가 풍부하고, 또 개화 기간이 길다는 것이다. 자생지 또한 멀리 제주도에서부터 강원·경기 접경지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어 누구든 관심을 갖고 부지런히 산에 오르면 볼 수 있다. 이르면 1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해 4월에도 꽃이 필 만큼 개화 기간도 길다. 한두 송이가 피기도 하지만, 많게는 수십 송이가 한데 뭉쳐서 핀다. 산비탈 여기저기에 만개한 노루귀는 붉은색 루비나 파란색 사파이어가 박힌 듯 화려하다. 전국의 산이 자생지이지만 야생화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곳은 수도권의 경우 화야산과 구봉도, 구름산 등이 유명하다. 남쪽에서는 포항의 운제산과 경주의 토함산, 부안의 능가산 등도 이른 봄 꽃 보러 다니는 이들의 발길이 잦다.
눈 내리고 내려 쌓여 소백산 자락 덮여도
매화 한 송이 그 속에서 핀다
나뭇가지 얼고 또 얼어
외로움으로 반질반질해져도
꽃봉오리 솟는다
- 도종환의 ‘홍매화’에서
정초가 지나면서 계절은 겨울의 한복판으로 접어들지만, ‘꽃쟁이’들의 마음은 벌써 춘삼월이 코앞에 다가온 듯 들뜨기 시작합니다. 지구온난화 등의 여파로 시절을 착각한 복수초나 노루귀 등의 야생화들이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한 달여나 이르게 꽃망울을 터뜨리기 때문입니다. 그중 엄동설한에 피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꽃이 있습니다. 바로 매화(梅花)입니다. 눈 속에 피는 꽃, 즉 설중매(雪中梅)의 그림에 익숙하고, ‘매화는 일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는 등의 찬사에 너무 길들어서 매화란 으레 한겨울에 피는 꽃이란 선입견이 강하게 박혀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실제 ‘따듯한 남쪽 나라’ 제주도에선 1월이면 팝콘 터지듯 가볍게 터진 하얀 매화꽃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뭍에서도 최근 수년간 이상 난동으로 경남 양산 통도사의 유명한 홍매(紅梅)인 자장매(慈藏梅)가 1월부터 홍색 꽃을 피워 많은 인파를 불러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전남 순천에는 아예 음력 12월이면 피기 시작해, 음력 섣달의 한자 말인 납월(臘月)을 붙여 ‘납월홍매화’란 이름으로 불리는 매실나무가 있습니다. 금전산 금둔사 경내에 있는 홍매화 6그루가 그 주인공으로, 해마다 양력 1월 말부터 3월까지 개화해 남녘의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준다는 말을 듣습니다. 30여 년 전 인근 낙안읍성에 있는 600년 된 홍매화의 씨를 받아다 키운 것인데, 지금은 어미 납월매가 고사해 이 6그루가 마지막 남은 토종 납월매일 것이라고 합니다.
여하튼 납월매가 됐든, 수령 360여 년의 자장매, 또는 뜻밖에 핀 동네 매화이건 정월은 추위가 뼛속 깊이 스며들수록 그 향이 코를 찌를 듯 짙어진다는 매화꽃을 찾아다니며 즐기는, 이른바 ‘탐매(探梅)’가 시작되는 달입니다. 그리고 그 여행길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처럼 쉬 끝나는 게 아니라, 봄철 내내 이어집니다.
Where is it?
매실나무가 국내에 들어온 건 약 2000년 전. ‘정원수로 심기 위해서’라는 게 국가생물종정보시스템의 설명이다. 당연히 오래된 매실나무가 많고, 이른바 유명한 고매(古梅)를 찾아다니며 즐기는 탐매 순례도 오래됐다. 수령 600년을 넘었다는 순천 선암사의 선암매(仙巖梅),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古佛梅), 양산 통도사의 자장매, 구례 화엄사의 흑매(黑梅) 등이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매실나무다. 통도사엔 자장매 외에도 이름난 매실나무가 2그루 있는데, 일주문에 들어서면 먼저 보이는 만첩홍매와 분홍매가 그것이다. 유서 깊은 고불매와 선암매는 담양 계당매(溪堂梅)와 전남대 대명매(大明梅), 고흥 수양매(水楊梅)와 더불어 ‘호남 5매’란 명성을 얻고 있기도 하다. 이밖에 김해의 와룡백매(臥龍白梅)와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栗谷梅), 산청의 남명매(南冥梅) 등 수령 100년 이상 된 고매가 전국에 200여 그루 넘게 산재해 탐매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최근에는 열매인 매실 수확 등을 목적으로 심은 대규모 매실나무들의 연륜이 쌓여 봄마다 농원 일대가 거대한 매화동산으로 변모하면서 수많은 인파가 찾는 매화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전남 광양과 경남 양산의 매화 축제가 대표적이다.
이어령(李御寧·83) 전 문화부장관은 언제나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지는 분이다. 이 시대의 멘토,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기억장치, 외장하드다. 어제 만났더라도 오늘 다시 만나면 새롭고 신선한 이야기가 샘솟는다. 그사이 언제 이런 걸 새로 길어 올렸을까 싶을 정도로 그에게는 늘 말이 차고 넘친다. 스스로 ‘아직도 비어 있는 두레박’, ‘여전히 늘 목이 마른 두레박’이라고 말하고 있을 만큼 새로운 ‘샘’에 대한 열정과 욕구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사회적 자리에서 은퇴를 선언한 뒤 지금은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직만 유지하고 있는 그를 만나 AI(인공지능)와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문명과 시니어 세대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 글은 10월 중순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의 대면 대화와 그 뒤의 이메일 인터뷰를 종합한 것이다.
우선 시니어의 관심사인 건강문제부터 질문했다. 올해 83세인 이 이사장은 종전 그대로 활기차게 말했지만 4년 전 병을 만나 세 번이나 수술을 받은 상태다. 그런데 투병이나 치병(治病)이 아니라 병과 함께하는 친병(親病)을 말하고 있었다.
요즘 어떠신가요.
“글 쓰는 사람들이 병이 나면 글을 못 쓰게 됩니다. 자기가 겪은 불행한 일은 글로 쓸 수 있으니 불행까지도 재산이 됩니다. 그러나 병은 그렇지 않지요. 병이 나면 서양에서는 구술을 많이 하지만 우리말은 논리적 바탕이 약해 말한 걸 풀어놓으면 주술(主述)관계가 안 맞고 비논리적인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구술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나는 컴퓨터를 일곱 대나 가지고 있는데 병이 나니 그게 다 소용이 없더군요. 우선 키보드를 치기 힘들고 모니터 보기도 힘들고. 그래서 전자펜으로 필기를 해 텍스트 파일로 바꾸고 있어요. 그런데 나는 조사(助詞) 하나 가지고 온종일 씨름할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인데 불편할 수밖에 없지요. 병이 나자 글도 못 쓰고 구술도 못 하고 써야 할 글은 많은데 아무것도 못 쓰니까 병 자체가 글 쓰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글을 쓰는 재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부디 건강하세요. 나처럼 병으로 시달리지 마시고.”
병의 문학적·문화적 의미가 크군요.
“사람들은 병이 나면 피해요. 피병(避病)이야. 병은 자랑하라지만 실제로는 직장인이건 정치인이건 밝히면 손해니까 속이고 피하지요. 그런데 지병(持病)이라는 말이 있잖아? 휴대전화처럼 병을 갖고 다니는 거지요. 옛날 선비들의 글을 보면 ‘강호(江湖)에 병이 깊어’ 이렇게 읊거나 답장에 꼭 병 이야기를 하곤 했지요. 늙고 병든 몸이라는 걸 내세워 정치적 수난을 피하고 정쟁의 위험으로부터 피했어요. 병을 자기 재산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거지. 그래서 한국에서는 병이 갖는 문화적 의미가 큽니다. 당쟁 사화(士禍)가 많았던 시절, 병이 오히려 목숨을 지켜준 일이 많았지요(웃음). 근데 병은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어요. 내가 건강했더라면 하고 땅을 쳐도 시원찮아. 그런데 병까지도 인간을 이길 수 없게 하는 방법은 친구로 삼는 거지요. 적으로 맞서 싸우면 병에 이길 수 없어요.”
그동안 그런 마음을 작품으로 쓰신 게 있으면 소개해주십시오.
“많이 썼지요. 그런데 다 메모 정도이고 알파고 때문에 쓴 시 하나가 생각나는 군요. 정보시대에는 숨을 곳이 없다는 내용입니다.”(‘이어령의 근작 시’ 참고)
이사장님은 은퇴를 선언했지만 정보시대는 그걸 허용하지 않는 거지요?
“은퇴 후 스마트폰을 없앴으면 신문사 전화를 안 받았을 것이고 그랬으면 알파고에 대해 전화 인터뷰를 하고 봇물 터지듯이 라디오 TV에 나가 말을 하지 않았겠지요.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는 은퇴에 관한 책 한 권을 썼지만 정보시대에는 은퇴가 불가능합니다. 정보시대에는 숨을 곳이 없지요. 그래서 TV, 인터넷, 휴대전화 일체를 일정 기간 플러그 오프하는 것을 정보단식이라고 합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영화배우 사진을 보여주고 그 표정에 나타난 감정을 물으면 제대로 읽고 대답할 줄 아는 아이가 반도 안 된다고 해요. 하지만 스마트폰을 빼앗고 1주일 동안 캠프생활을 하게 한 뒤 같은 테스트를 하면 훨씬 능숙하게 사진 속 인물의 감정을 읽어요. 스마트폰 대신 서로의 얼굴을 보고 감정을 나눈 결과죠. 사람의 안면을 보지 않고 화면을 보는 시대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자찬명(自撰銘) 같은 글을 써놓으신 게 있는지.
“그런 건 없습니다만 스스로 묘비명을 쓰라고 한다면 ‘평생 퍼내도 퍼내도 항상 갈증을 느껴 우물을 판 사람’이라고 말하겠어요. 영원히 두레박의 갈증을 가지고 평생 살아온 사람. 두레박은 늘 비어 있어야 물을 퍼낼 수가 있지요. 이 비어 있는 것이 갈증입니다. 영원한 갈증이지요.”
스스로 우물을 파는 사람이라고 말해오셨는데, 요즘 어떤 우물을 찾고 있습니까?
“지금 파고 있는 우물은 아주 특이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판 우물은 주로 글로, 펜으로 판 것입니다. 문학평론, 에세이, 소설, 희곡, 그리고 시나리오까지 많은 땅에서 우물을 파왔죠. 그런데 이번에는 글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야기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젠 문학평론가나 인문학자가 아니라 나무꾼처럼 이야기꾼이 되는 것이지요. 책을 읽기 전 어렸을 때 나는 할머니, 어머니로부터 옛날 얘기를 듣다가 잠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고개를 넘어가는 이야기였지요. 꼬부랑 할머니가 한 고개도 미처 넘기 전에 잠이 들었지요. 꼬부랑꼬부랑, 꼬부랑길을 따라 고개를 넘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듭니다. 이제는 내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입니다. 팔십이 지난 이제야 그 꼬부랑 할머니가 한국인인 우리를 낳아주신 생명력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힘없어 보이는 그 할머니가 바로 보릿고개를 넘고, 나운규와 같이 일제 압박시대에 아리랑고개를 넘고, 전쟁과 가난과 모든 수난의 고개를 넘어온 영웅이었던 것이죠. 노자가 ‘곡신불사(谷神不死) 현빈(玄牝), 즉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현묘한 암컷이라고 한다’고 했듯 그것이 바로 할머니의 생명력의 원천이었던 거죠. 그리고 그 지팡이는 미사일이나 원폭이 아니라 생명력을 지탱해주는 자연의 힘이었던 겁니다. 마녀의 요술지팡이도 아니고 신선의 지팡이도, 개화기 때 개화장(開化杖)이라고 했던 서양의 단장도 아니었던 겁니다. 한마디로 폭력의 몽둥이가 아닙니다.”
‘한국인 이야기’를 쓰고 계신다는 거군요. 신문에도 연재하고 방송에서도 들려줬던 그 글을 마무리하시는 건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시즌1밖에 쓰지 못한 ‘한국인 이야기’를 전부 정리하면 12권이 됩니다. 물론 그것을 정리 중이지요. 하지만 전혀 새로운 이야기의 우물 파기는 알파고에 관한 것입니다. 왜 하고많은 땅 다 두고 일본, 중국 제쳐놓고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가 서울 광화문에 와서 전 세계에 AI 시대를 선포했겠습니까. 바둑을 두기 위해 온 게 아니라 알파고는 바로 우리 호주머니 속 스마트폰의 혁명을 일으키고 자율자동차가 되어 세계 모든 도시의 길을 달리게 될 겁니다.
그뿐이 아니죠. 병실의 환자들 머리맡에, 소외된 장애인들 곁에, 전쟁과 테러의 현장이나 폭력의 골목 속에서 알파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류를 위협하는 것이 되느냐, 또는 꼬부랑 할머니의 지팡이처럼 인류를 도와주는 기능을 갖게 될 것이냐 그것이 한국인 손에 달렸다는 거죠. 할머니의 꼬부랑 지팡이는 곤봉이 아니기 때문이죠.”
왜 하필 알파고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이유가 있어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학을 떠날 때의 내 마지막 강의가 바로 인공지능에 관한 것이었지요. 당시 미국의 컴퓨터과학자 빌 조이의 ‘왜 미래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Why the future doesn't need us)’라는 글을 학생들에게 읽히고 리포트까지 받았어요. 그 글은 ABC(Atom, Bio, Chemical) 기술(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화생방 기술이죠)이 21세기에는 GNR(Genome, Nano, Robotics)로 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인공지능, IT(정보기술)가 이 기술들과 결합되면 인류는 파멸할 것이라는 경고였죠. 그런데 레이 커즈와일이라는 미국 기업인은 그러한 시대를 싱귤래리티(Singularity)라 부르면서 2045년이면 천지개벽해서 인간이 불로장생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커즈와일이 바로 알파고를 만든 구글의 AI 분야에서 고문직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AI는 과학기술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문제이고 그 기술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특히 바둑권 문화인 아시아에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우리 자손들을 위한 한국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AI와 4차 산업혁명 등은 아주 중요한 화두이지만 시니어 세대는 낯설고 어려워합니다. 이런 시대에 어떤 생각과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4차 산업혁명은 생각 혁명으로 연결돼야 합니다. 그동안 전문 분야에서 인간처럼 생각하는 도구는 일부 있었어요. 컴퓨터가 인간을 대신해서 탄도탄 발사 거리를 계산하는 식으로 군사용으로 사용되고, 이어 기업에서 물자를 만들 때 컴퓨터를 썼어요. 군에서 IT나 컴퓨터를 사용하면 강병(强兵)이 되고, 기업이 사용하면 부국(富國)을 이루었던 거지요. 그런데 IT를 금융과 연결해 금융공학을 만들어 파생상품을 판 결과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제 산업사회와 부국강병의 패러다임은 끝났습니다. 4차 산업혁명에서 노동과 작업은 인공지능(AI)이 합니다. 사람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검색에 매달리지 말고 사색을 해야 합니다.”
AI를 잘 활용해야겠군요. 시니어 세대일수록 백세건강, 수명연장을 위한 인공지능의 기여에 관심이 높습니다.
“알파고는 사람보다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AI가 효도를 하고, 사랑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AI 시대의 의학은 치료 위주에서 병을 미리 가려내주고 발병의 위험을 알려주는 예방의학, 미리 수술해주는 선제의료, 나아가 개인별 건강을 설계해주는 맞춤의학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부작용도 참 많지만 좋은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 인공지능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지능이 문제입니다. AI가 발달했다고 무서워할 게 없습니다. AI가 하지 못하는 심성이나 덕성, 아름다움, 봉사를 사람이 하면 됩니다. 이제 가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지금까지 늘 즐겁게 일을 해오셨는데, 그런 자세야말로 은퇴 세대, 시니어 세대에게 절실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누가 시켜서 일을 한 적이 없어요. 다 좋아서 한 거지요. 장관도 안 한다고 고사하다가 초대 문화부장관이라고 해서 했습니다. 각종 이벤트를 많이 했는데, 먹고 놀면 안 됩니다. 놀면서 먹어야 합니다. 내가 돈벌이하자고 책 쓰고, 88서울올림픽을 하고, 교수를 했으면 다 실패했을 겁니다.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공자님 말씀대로입니다. 인터넷 시대의 지지자(知之者)는 인간이 아니라 AI입니다. 지지자 위가 호지자(好之者)이고, 또 그 위가 낙지자(樂之者)입니다. 바로 지호락(知好樂)이지요. 연애가 노동이라면 비 맞아가며 연인을 기다리겠어요? 골프가 땅을 파는 노동이라면 18홀을 돌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 지호락을 추구하면서 임도 보고 뽕도 따는 마음과 자세로 사는 게 중요합니다.”
이어령의 근작 시
차멀미가 나면 내리시게.
그게 자동차라면 길 이름 묻지 말고
그게 기차라면 역 이름 알 것 없이
얼른 내리시게나.
그런데 그게 배멀미라면 어쩌시겠나.
그게 비행기멀미라면 어쩌시겠나.
그래도 눈 딱 감고 뛰어내리시게나.
바다 속이면 발광어(發光魚)가 되고
하늘이라면 별똥별이 되겠지.
그러나 묻지 마시게.
그게 TV, 인터넷, 정보멀미라면 어쩌시겠나.
옛날 사람들은 ‘사람’멀미가 나면
산림 속으로 숨었지만
정보시대에는 숨을 곳이 없으니
황진이의 시조 한 수라도 읊어보시게.
‘나도 몰라 하노라’
불[火]의 계절 여름입니다. 붉은 태양이 땅 위의 모든 것을 태울 듯 이글거리는, 사계절 중 불의 기운이 가장 성한 시기입니다. 그런 화기(火氣)를 달래려는 듯 사람들은 너나없이 물가를 찾습니다. 계곡으로, 강으로, 바다로 갑니다. 장맛비는 물론 소낙비라도 내리면 금세 사위를 삼킬 듯 사납게 질주하는 계곡물과 흰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오는 성난 파도….
여름이면 만나곤 하는 성난 물의 모습은 여름이 곧 불과 물이 정면으로 맞서는 계절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7~8월 불과 물이 상극(相剋)하는 틈새에서 피는 각별한 꽃이 있습니다. 태양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 식히려는 듯 그늘 한 점 없는 연못, 흐르지 않는 저수지에 커다란 이파리를 잔뜩 깔고 보랏빛 영롱한 꽃을 피우는 물풀이 있습니다. 바로 100년 만에 꽃을 피운다는 가시연꽃입니다.
2m에 이르는 거대한 이파리로 1년 중 가장 강한 여름 불의 기운을 받고, 뿌리로는 강 대 강(强 對 强)으로 맞서는 물의 기운을 흡입해서인지, 생김새는 물론 꽃이 피는 과정 등 모든 것이 예사롭게 않습니다. 먼저 그 이름은 온몸에 가득 가시가 박혀 있어 함부로 다가가 멋대로 휘저을 수 없는 존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파리(앞면뿐 아니라 물에 잠기는 뒷면까지)는 물론 줄기와 뿌리, 꽃받침까지 식물체 전체에 길게는 1cm쯤 되는 가시가 촘촘히 나 있습니다. 전초에서 가시가 없는 부분은 꽃잎과, 가시가 송송 돋은 열매 안에 든 완두콩 모양의 씨앗뿐입니다.
가시만큼 위압적인 것은 커다란 이파리입니다. 보통 가시연꽃이 자라는 수면은 그 잎으로 뒤덮일 정도로 개체마다 여러 개가 달릴 뿐 아니라, 타원형의 잎 하나가 어른 한 사람을 휘감을 만한 크기까지 자라납니다. 한해살이 물풀이 한두 달 만에, 줄기는 어른 엄지손가락보다 굵고 잎은 2m까지 크려면 하루에 무려 20cm씩 자라야 하기에 그 과정이 눈에 보인단 말이 나올 법합니다.
이렇듯 까칠한 가시연꽃이지만, 그 꽃은 모두를 단숨에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입니다. 물론 꽃이 피는 과정도 촘촘한 가시나 넓은 잎에 못지않게 기이합니다. 생살을 찢는 고통 속에 새 생명을 낳듯, 가시연꽃도 가시가 촘촘히 박힌 봉오리로 역시 가시투성이의 두꺼운 잎을 뚫고 올라와 지름 4cm 안팎의 꽃을 피웁니다. 꽃은 오전에 열었다가 저녁이면 오므리기를 사나흘 되풀이하다 물속으로 들어가 씨앗을 생성하는데, 꽃봉오리가 맺혔다고 해도 수온과 수심, 기후와 일조량 등이 맞아야 열리기 때문에 활짝 핀 모습을 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까다롭기로 치면 개화(開花)보다 씨앗의 발아(發芽)가 훨씬 정도가 심합니다. 계명대 김종원 교수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가시연꽃의 종자 발아율은 4% 이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낮은 발아율이 역설적으로 가시연꽃의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즉 발아가 안 된 씨앗이 수년이든 수십 년이든 발아력을 유지하다가 수온과 기후 등이 최적의 조건이 되면 발아해서 뿌리를 내리고 커다란 잎을 펼치고 마침내 꽃을 피우는 것이지요. 휴면 상태의 씨앗 속에 내재된 생명이 되살아나며 ‘백 년 만에 피는 꽃’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실제 2010년 강원도 경포호에서 가시연꽃이 나타나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는데, 연원을 추적한즉 1960년대 농경지 개간 이후 휴면 상태에 있던 가시연꽃의 종자가 습지 복원 사업으로 생육 조건이 맞자 반세기 만에 다시 발아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Where is it?
가시연꽃은 발아도, 개화도 까다롭지만 그렇다고 1급수 청정지역에서 자라는 것은 아니다. 큰 잎에서 알 수 있듯 영양분이 풍부한 수질, 즉 적당히 부영양화(富營養化)된 연못에서 잘 자란다. 최대 자생지로는 경남 창원의 우포늪이 꼽힌다. 우포늪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 이름이 아예 가시연꽃마을인데, 가시연꽃 등 우포늪의 수생식물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생태체험장도 있다. 수도권에선 경기도 시흥의 관곡지가 유명하다, 충남 홍성의 역재방죽공원과 부여의 궁남지, 강원도 강릉의 경포호 등 전국적으로 20여 곳에서 자란다. 진못(사진) 등 오래된 연못이 많은 경북 경산과 영천에도 자생지가 여럿 있다.
강화도는 서울 서쪽에 위치해 있다. 자가용이 있던 시절에 몇 번 가보고 그 후로는 오랫동안 외면하던 곳이다. 초지진, 광성보 등 해안에 초라한 진지가 남아 있을 뿐 별로 기억에 남는 것들이 없다. 마니산은 올라가는 계단만 보고 왔고 전등사는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절이었다. 어느 식당에 갔다가 음식이 너무 맛이 없어 일행들이 젓가락만 돌리고 있어 뒷산에 있는 고들빼기를 좀 뜯어와 겨우 한 끼를 먹은 적도 있다. 폭우를 만나 하마터면 급류에 휩쓸려 일가족이 몰사할 뻔하기도 했다. 석모도에 갔을 때는 불친절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왔다. 강화도의 밴댕이회가 유명하다지만 생선회는 어디나 비슷비슷하다.
얼마 전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회원 40명이 대중교통으로 강화도에 다녀왔다. 강동 쪽에서 전철로 송정역까지 2시간 걸렸고, 송정역에서 다시 3000번 버스를 타고 1시간 반을 달리고 나서야 강화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다음 날부터 시작된다는 장마 때문인지 날씨는 푹푹 찌고 불쾌지수가 높았다.
이번에는 시내 쪽으로 가봤다. 횡단보도 신호등을 대여섯 개 지나자 남문이 나왔다. 남문을 지나서 조금 더 가니 서문이 보였다. 서문 안쪽으로 다시 시내 도로로 되돌아 나오는 길에 용흥궁이라는 표지가 있었다. 도로 안쪽에 작은 표지판이 있어 미리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가면 지나치기 쉽다.
용흥궁은 철종이 19세 때까지 살던 사저였는데 그 후 기와집으로 새로 지었다. 성공회성당이 높은 자리에 위용을 자랑하고 있어 하마터면 못 보고 갈 뻔했다. 이 광장이 이번 관광의 하이라이트였다. 심도 직물이라는 큰 직물회사가 있던 자리라고 했다. 한쪽으로는 강화 문학관이 있고 마침 조경희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지나칠 뻔 했던 곳이 고려 궁지도 관람할 수 있었다. 강화 성당을 보고 언덕을 올라갔는데 초라한 한식 대문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고려 궁지’였다. 입장료는 900원, 경로우대는 무료였다. 서울 선정릉의 4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곳인데 이곳이 바로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 당시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로 옮긴 곳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왕이 있었던 곳이다. 1232년부터 39년간이었다. 그 당시에도 불에 탔고 개화기에도 프랑스 선원들이 불에 태워 다시 지었다. 이곳에는 그 유명한 외규장각이 있다. 전철 한 칸의 3분의 1 정도 되는 작은 건물이다. 조선의궤를 따로 보관하던 곳인데 프랑스 선원들이 훔쳐갔던 의궤를 얼마 전 프랑스에서 영구 반환받아 조명을 받았던 곳이다.
고려 궁지 성벽을 따라 북문 쪽으로 올라갔다. 아름드리 벚꽃 나무들이 도열해 있었다. 제철에 오면 볼 만할 것 같았다. 강화도에도 둘레길이 있다. ‘강화 나들길’이라 하여 6시간짜리 코스가 20개나 있다. 지금 이웃 교동도에는 연육교가 있어 강화도와 연결되고 석모도도 곧 다리가 완성될 예정이다. 자동차가 있으면 하루 일정으로 교동도까지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가 없으며 1박 정도 예상해야 한다. 오가는데 너무 멀어 진이 다 빠지는 것 같다. 그래도 강화도는 서울의 관문으로 외세 침략을 일선에서 막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1970년대 서울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앞으로 역사와 관광의 이점을 잘 살린다면 가볼 만한 장소가 될 것 같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이 한 폭의 수채화 풍경 같은 쾌청한 5월의 어느 날,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시니어 블로거 협회 회원 40여 명이 군산으로 근세 문화를 둘러보러 나들이에 나섰다.
군산은 전라북도 북서부에 있는 도시이며 일제강점기 이후 군산항을 중심으로 성장한 항구도시로 1899년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곡창에서 나는 좋은 쌀을 일본으로 빼앗아가는 항구도시의 역할로 급성장했다는 슬픈 역사가 있다.
언젠가 TV에서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물자를 수탈해가는 관문이었던 군산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군산은 일본인이 많이 자리 잡고 살았던 곳으로도 설명되었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 문화와 건축물이 남아 있고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취지로 잘 보존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떤 동네에서는 서울의 고궁 근처에서 한복을 빌려 입고 한국 문화를 체험하는 것처럼 일본의 기모노를 빌려 입고 일본 문화를 체험해 보는 곳이 있다고 한다. 일본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역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아픈 역사이므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설명에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필자가 일제강점기를 겪은 세대는 아니어서 일본 문화에 그리 큰 관심은 없었지만 일본의 건축물이나 일반인들이 살던 가옥은 보고 싶었다. 어린 시절 필자가 좋아했던 외갓집도 적산가옥이라 불리던 일본식 가정집이었기 때문에 무언가 아련한 그리움이 남아 있어서다.
일본의 정원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던 외갓집은 꿈의 궁전으로 생각될 만큼 필자에겐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집 건물이 있고 왼쪽으로는 넓은 마당이 있었는데 커다란 팽나무에는 할아버지께서 필자를 위해 매어주신 그네가 있었다.
마당에는 또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수 있을 정도의 동산과 돌다리가 걸쳐진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 속에 있던 돌로 만든 거북이도 멋있었고 연못 속에서 피어난 늘씬하게 쭉쭉 뻗은 수선화의 초록 이파리와 보라색 꽃도 아름다웠다.
건물 가장 끝에는 부엌이 있었고 그 옆에 칸칸으로 나누어진 커다란 미닫이 유리창은 안방 문이었다. 부엌 앞에는 마중물을 부어 위아래로 빨리 움직이면 언제나 콸콸 시원한 물이 쏟아지는 펌프가 있었다. 작은방 옆에는 석류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새빨간 석류가 딱 벌어지면 그 안에 가득 들어 있는 보석 같은 알맹이를 보는 게 즐거웠다.
다다미로 이어진 건넌방, 긴 복도 끝의 화장실로 가는 길은 좀 으스스했지만 모두 그리운 추억의 장소로 기억된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군산에서의 근세 문화와 일본 가옥 돌아보기를 시작했다.
먼저 근대 역사박물관에서는 193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필자가 신어본 적은 없지만 상표는 알고 있는 경성 고무 만월표 신발가게, 조선 주조인 술도가, 군산극장, 군산역이 재현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납작 고무신이 정겨웠고 술도가의 술 만드는 기구와 술통이 흥미로웠다. 이곳엔 국제무역항 군산의 과거, 현재, 미래와 관련한 전시물과 함께 의병장 등 독립 영웅들의 자취 등 많은 자료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군산 개항 후 일본인과 함께 들어왔다는 동국사는 일본 사찰 건축 양식을 따랐고 대체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개화기와 근․현대사의 역사를 증명하는 건축물로서 식민지의 아픔을 확인할 수 있는 교육 자료로 활용가치가 높다고 한다.
큰 관심을 갖고 돌아본 일본식 가옥은 필자가 기억하고 있는 외갓집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나무 창살이 촘촘한 창문도, 둥그런 유리창도 모두 추억 속 외갓집과 닮아 있어서 어린 날로 돌아간 듯 그리움이 밀려왔다.
낯설고 새로운 모습을 보는 여행도 즐겁지만 이번처럼 어린 시절을 추억해볼 수 있는 나들이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필자에겐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