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오롱인더가 지난해 4분기 부진한 실적을 냈다. 전 사업부의 일회성비용이 반영되고,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된 영향 때문이다. 하지만 증권사들의 분석이 부정적이지만은 않아 관심이 쏠린다. 지난해 저조했던 실적을 올해 회복해나갈 것으로 예상돼서다. 코오롱인더는 오히려 주가가 바닥을 찍은 상황에서 상승여력을 품은 ‘관심주’로 주목받고 있다.
◇4분기 실적과 주가가 부진한 까닭
코오롱인더의 지난해 4분기 매출액은 전 분기 대비 6%가량 증가한 1조1327억 원을 기록했다. 연간으로는 약 4조4000억 원의 매출액을 달성했다. 하지만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는 9.4% 감소한 성적이다. 영업이익도 마찬가지다. 전년 동기 대비 68.6% 줄어든 113억 원을 기록하며 시장 기대치에 못 미치는 실적을 보여줬다.
지난해 4분기 실적은 성과급, 정기보수 등 일회성비용과 국내외 계열사의 적자 심화가 당초 예상 대비 부진했던 영향으로 보인다. 사업부별로 살펴보면 산업자재(타이어코드, 에어백쿠션)의 판매가격 하락이 엿보인다. 또 베트남 신규 타이어코드 설비의 저조한 가동률과 코오롱글로텍 중국법인의 수익성 악화로 인한 부진한 이익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예상된다.
필름부문의 경우는 CPI 출하량이 늘어 긍정적이지만, 기존 범용 PET 필름의 계절적 비수기 전환이 악재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화학부문은 정기보수, 패션부문은 판매량 감소, 기타·의류소재부문은 자회사들의 계절적 비수기의 영향을 피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가도 약세를 나타낸다. 코오롱인더의 CPI는 국내가 아닌 해외 고객사가 많다. 최근 국내 제조사의 폴더블 스마트폰 흥행과 달리 해외 제조사들은 출시 일정 지연과 판매량 가이던스 하향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또한 중국 내 3개의 제조설비를 보유한 코오롱인더에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춘절 연휴 연장과 고객사들의 저조한 가동률은 부정적이다.
◇산업자재·필름부문 회복여부 ‘관건’
올 1분기 실적도 기대에 못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희철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코오롱인더의 올 1분기 실적도 코로나19 확산의 영향을 받아 전년 동기 대비 둔화될 것으로 우려된다”고 분석했다. 다만 이 연구원은 “이후에는 이연됐던 전방산업 수요가 회복되고 아라미드 신증설 효과 등으로 본격적인 개선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이는 증권가가 코오롱인더를 주목하는 대목이다. 주가 반등의 실마리가 있어서다. 일단 산업자재 이익 회복과 CPI 채택 여부 불확실성이 아닌 확대되는 폴더블시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오롱인더는 아라미드 판매가격 상승과 타이어코드 베트남법인 가동 정상화 등 산업자재의 연간 이익 증가가 예상된다. 또 폴더블시장 개화기 속에 해외 고객사향 CPI 출하량이 증가하는 중이다.
노우호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확대되는 시장 속에서 해외 주요 고객사를 확보하고 출하량이 늘어나는 건 필름부문의 점진적 이익 개선에 긍정적”이라며 “코오롱인더는 올해 1899억 원, 내년 2151억 원의 연간 이익 증가가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메리츠종금증권은 코오롱인더에 대한 투자의견 ‘매수’와 적정주가 7만 원을 유지했다. KTB투자증권은 투자의견 ‘매수’와 목표주가 6만 원을 제시했다. 유안타증권은 5만5000원으로 목표주가를 설정했다. 지난 24일 코오롱인더의 주가는 종가 기준 3만5300원이다. 지난해 12월 이후로 지속적인 주가 하락세를 보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연일 장중 52주 신고가를 갈아치우고 있다. 그동안 움츠러들었던 투자심리가 최근 다시 살아난 것으로 보인다. 증권가에 따르면 D램의 가격 하락세가 축소되면서 내년엔 상승세 전환이 예상된다. 낸드는 이미 업황 반등에 따른 가격 상승 사이클에 진입했다. 또 내년 폴더블스마트폰 판매량은 600만~800만대 수준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투자자들이 주가 고점을 잡기 위해 눈치를 살피는 이유다.
◇메모리업황 선도하는 삼성전자
DB금융투자는 삼성전자의 올 4분기 매출액을 전년 동기 대비 3.5% 증가한 60조8000억 원, 영업이익을 38.7% 감소한 6조6000억 원으로 예상했다. 영업이익 부진 요인으로 LCD부문의 매출 감소와 연말 비수기 진입에 따른 12월 중소형 OLED패널 판매 감소를 꼽았다. 하지만 내년에는 실적 호조를 예상했다. DB금융투자는 삼성전자의 내년 매출액과 영업이익을 전년 대비 각각 3.6%, 32.3% 성장한 239조 원, 36조 원으로 전망했다.
무엇보다 삼성전자의 주가 상승을 이끌고 있는 반도체부문의 호실적이 기대된다. 반도체 재고 수준이 올 3분기부터 감소하면서 가격 하락세가 멈춤에 따라 내년 중순에는 업황이 회복될 가능성이 열렸다. 증권 전문가들은 반도체부문이 D램 가격 상승 기대감을 비롯해 낸드의 수익성 개선 확인 등의 요인을 안고 턴어라운드에 성공할 것으로 예상했다.
5G 스마트폰과 갤럭시폴드의 판매 호조 기대감은 삼성디스플레이의 가동률 상승으로 대응될 전망이다. 결국 내년에는 삼성디스플레이 기존 라인 가동률 상승에 따른 부품, 후공정모듈, 소재업체의 수혜가 본격화된다는 분석이다.
어규진 DB금융투자 연구원은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는 메모리업황 선도와 폴더블 및 5G 스마트폰시장 개화를 주도하고 있다”며 “삼성디스플레이는 내년까지 폴더블패널을 독점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어 연구원은 “결국 삼성전자가 없으면 2020년 키워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DB금융투자와 키움증권은 삼성전자를 업종 내 최선호주로 평가하고 각각 목표주가 6만 원, 6만5000원을 제시했다. 삼성증권은 투자의견 ‘매수’와 목표주가 6만 원을 내놨다. 이달 초 5만400원이었던 삼성전자 주가는 지난 18일 5900원(11.7%) 오른 5만6300원에 거래를 마쳤다. 특히 삼성전자는 이날 장중 한때 5만7200원까지 올라 지난 13일 이후 4거래일 연속 52주 신고가를 썼다.
◇SK하이닉스, 윈도7 종료 수혜
DB금융투자는 SK하이닉스의 올 4분기 매출액을 전년 대비 30.1% 감소한 6조9600억 원, 영업이익을 89.6% 줄어든 4590억 원으로 예상했다. 올해는 연간 2조9000억 원 내외의 실적 부진이 불가피해 보이지만 4분기를 기점으로 업황이 턴어라운드에 진입하며 내년 연간 매출액은 29조2000억 원, 영업이익은 6조 원으로 각각 8.1%, 105.9%의 실적 반등이 기대된다.
내년 상반기 기대되는 수요 이벤트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7 지원 종료와 5G 본격화를 꼽을 수 있다. 내년 1월 4일 윈도7 지원이 종료되며 상당수의 기업들이 사용 중인 PC를 업그레이드하거나 교체할 것으로 전망된다. 2014년 윈도XP 지원 종료 당시 메모리 수요가 양호했던 바 있다. 또 내년 상반기는 일본, 러시아, 독일 등이 5G 상용화를 시작하며 글로벌 5G 스마트폰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NH투자증권은 내년 5G 스마트폰 출하량을 3억2000대 정도로 추정했다.
D램은 현물 가격 상승이 재고 축적을 촉진해 내년 1분기 수요가 비수기답지 않게 양호할 전망이다. 수요처 입장에서는 가격 상승이 예상되면 조금이라도 저렴한 가격에 재고를 축적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김경민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이달 시작된 PC D램 현물가격 상승으로 서버 D램 계약 가격 협상에 인상 여지가 생겨 공급사 입장에서는 긍정적”며 “지난주 중반부터 서버 D램 가격 인상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18일 하나금융투자는 D램 가격 인상이 예상보다 빠른 내년 1분기부터 전개될 것으로 보고 SK하이닉스에 대한 목표주가를 9만8000원에서 11만2000원으로 상향했다. DB금융투자와 NH투자증권은 각각 투자의견 ‘매수’와 목표주가 10만 원을 내놨다. 이달 초 8만500원이었던 SK하이닉스 주가는 지난 18일 1만2500원(15.5%) 오른 9만3000원에 장을 마감했다. SK하이닉스 역시 이날 장중 한때 9만4500원까지 올라 지난 13일 이후 4거래일 연속 52주 신고가를 기록했다.
제주도 지역은 육지보다 겨울철 평균 온도가 다소 높아 감귤 재배의 적지다. 겨울철에도 영하의 날씨로 거의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제주도에서는 노지에서도 감귤재배가 가능하다.
제주도 감귤농장의 규모는 21,520 Ha. 여기에서 1년에 60만 톤 안팎의 감귤이 생산된다. 제주 농업에서 감귤이 차지하는 비중이 50% 가까이 된다.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과일로 겨울철 전 국민이 충분히 먹을 수 있다. 올해는 제주도에 비가 많이 오고 태풍이 잦아서 시장에 나와 있는 감귤의 껍질 외피가 다소 곱지가 못한 것도 있다.
감귤의 종류는 하우스귤과 금귤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감귤 하면 노지 재배로 생산되는 온주밀감을 말한다. 온주밀감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지름이 3.5cm에서 4.5cm 정도 크기의 감귤이 최상품이다.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도 상품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등외품(等外品)으로써 파치로 처리하곤 한다. 파치는 별도로 농협 등에서 수매를 해서 생과용이 아닌 초콜릿이나 쥬스, 음료공장 등으로 출하된다.
감귤나무의 특성은 상록활엽수 교목으로 키는 3m 정도까지 키운다. 이것보다 더 높게 키울 수도 있으나 작업의 편리성 등을 고려하여 대부분이 3m 이하로 키우고 있다. 감귤 꽃은 5월에 개화하고 11월에서 12월 사이에 익으면 수확하게 된다. 감귤은 '단위 결과'라고 하는 특징을 가진 과수로서 나무가 꽃이 피고 수정이 되지 않아도 열매를 맺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온주밀감이 씨가 없는 것은 수정이 되지 않고도 바로 과일이 크기 때문에 씨가 없는 것이다.
감귤나무를 키우는 과정은 매년 3~4월에 전지 전정을 하고 비료를 1년에 3번 3월과 6월, 9월경에 준다. 그리고 7~8월경에 병충해의 피해를 입었거나 과일이 너무 크거나 작아서 정상적이지 못한 과일을 대상으로 적과를 실시한다. 제초작업은 수시로 과수원의 상태를 보면서 작업을 한다. 병충해 방제와 병충해 예방을 위하여 농약은 1년에 3번 정도 살포한다.
감귤 수확철인 11월과 12월엔 제주도민들이 대부분 바쁘게 움직인다. 농장의 규모가 크고 일할 수 있는 가족이 부족한 농장에서는 노동력을 얻지 못해서 애를 먹는다. 갈수록 감귤 수확철 노동력 확보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육지에 나가 살고 있는 자녀들도 감귤 수확철에는 고향집에 와서 수확 일을 도와주곤 한다.
칼을 쓰지 않고 손으로 쉽게 먹을 수 있고 비타민C도 많이 함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도도 높은 감귤이 겨울 최고의 과일이라고 제주도민들은 자부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육개장은 ‘오래된’ 전통음식일까? 전통음식이지만 ‘오래된’ 음식은 아니다. 육개장의 역사는 불과 100년 남짓이다. 늘려 잡아도 200년이 되지 않는다.
“육개장은 대구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다수설이다. 그럴까? 부분적으로는 맞다. “육개장을 외부 공간에서 팔기 시작한 것은, 대구의 식당 혹은 시장통이었다”는 표현이 맞다. 이미 민간에 널리 퍼진 음식이었다. 그 음식이 대구의 시장통 등지에서 처음으로 상업화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육개장은 ‘우육(牛肉, 쇠고기)+개장국[狗醬羹, 구장갱, 개고깃국]’이다. ‘우육개장국’이 육개장이 된 것이다. 원래 된장 등을 푼 물에 개고기를 넣고 국을 끓였다. ‘구장갱’ 혹은 ‘구장’, ‘개장’, ‘개장국’이라 불렸다. 그러다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고 마치 개장국처럼 끓였다. 그래서 육개장이라는 게 다수설이다. 개장국 대용품이다. 이 음식이 대구의 시장통으로 나온 것이 바로 지금의 육개장이다.
역사는 100년 남짓
왜 대구일까? 교통 요지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효율적인 한반도 약탈을 위해 경부철도를 건설했다. 만주의 물자를 한반도를 세로로 질러 부산항에 운반해 배로 일본으로 보냈다. 군산, 목포, 여수, 부산이 모두 만주 혹은 한반도의 목재, 쌀, 밀 등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세운 항구들이다. 대구는 경부철도의 주요 거점 도시다. 철도와 더불어 도시가 커지면서 시장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을 위한 식사 공간이 필요해졌다. 식당이나 허름한 천막 아래서 옹기종기 모여 국밥 한 그릇씩을 먹었다.
조선시대에는 역원(驛院) 제도와 주막(酒幕)이 있었다. 역원은 초기부터 있었던 공식 숙박 시설이다. 사용자는 공무원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역원 제도를 통해 공무원의 이동을 도왔다.
주막은 사설 기관이다. ‘막(幕)’은 집이 아니다. 주막의 시작은 정식 건물이 아니다. 비바람을 가리려고 천막을 쳤다. 임시, 가설 시설이다. 이곳에서 목을 축일 만큼만 술을 팔았다. 사설, 불법 시설물이다. 조선시대 후기, 숙종시대를 거치며 이들 주막이 슬슬 공식화(?)된다. 공무원들은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역원을 이용한다. 민간 여행자들은 이용할 공간이 없다. 결국, 주막이다. 주막은 조선시대 후기 ‘탈법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합법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다. ‘눈감아주는’ 정도의 공간이 확대된다.
역원과 주막에서 개장국을 내놓았다. 유교는, 사람이 여섯 가지 가축을 먹도록 허용했다. 소, 말, 돼지, 개, 양, 닭이다. 소는 금육(禁肉)이다. 농사의 도구라 식육을 엄하게 금했다. 살아 있는 말의 가격은 도축한 말고기 값보다 비쌌다. 말을 도축할 일은 없었다. 교통, 통신의 수단이지 고기로 먹을 일이 아니다. 양은 한반도에서 잘 자라지 않는다. 돼지도 마찬가지. 한반도의 춥고 건조한 기후는, 습하고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돼지와 맞지 않는다. 돼지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인간과 ‘먹이’를 두고 다툰다. 사람이 먹는 걸 먹는다. 사람이 먹을 것도 귀했던 시절이다. 돼지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개, 닭이 만만했다. 닭은 개체가 적다. 여러 사람이 몰려드는 역원, 주막에서 닭은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개다. 개고기, 개장국은 보양식이 아니라 늘 먹는 상식(常食)이었다.
육개장의 전신 개장국
조선시대 후기. 역원과 주막에서 널리 사용했던 개고기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다. 중국 청나라 때문이다. 청나라는 개고기 식용을 피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개의 지위(?) 때문이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수렵, 기마민족이다. 개는 사냥의 동반자이자 목숨을 지켜주는 동료다. 농경민족의 개와는 지위가 다르다. 인간은 동반자, 동료를 먹지 않는다. 유목, 기마민족의 청나라가 개고기 식용을 피한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청나라를 세운 태조와 개의 인연 때문이다. 청나라(후금)를 세운 이는 누르하치(Nurh achi, 努爾哈赤, 1559~1626)다. 개가 누르하치의 생명을 두 번이나 구해줬다고 전해진다. 청나라의 통치자는 만주족이다. 이들이 개를 먹지 않자 피지배자인 중국 한족들도 따른다. 중국인들이 개고기를 피한 이유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1637)을 겪으며 조선은 견디지 못할 치욕과 약탈을 당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오랑캐 청나라’를 증오, 멸시했다.
시간이 흘렀다. 강희제, 건륭제, 옹정제 등 명군들은 청나라를 세계 최강의 나라로 바꿨다. 서양 문물들이 급격히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청나라의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된다. 사절단으로 중국에 간 조선 사신단은 발전한 중국과 서양의 문물을 중국, 북경에서 본다. 북학파도 생긴다. 명나라에 대한 막연한 호감,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엷어지고 청나라에 대한 호기심, 흠모가 생긴다.
‘문명 개화된 중국, 청나라’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개고기를 먹는 것은 야만의 짓이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이유원(1814~1888)은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이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하필기(林下筆記)’를 남겼다. 그가 듣고, 보고, 기록한 내용은 19세기 후반, 고급 관리의 시각으로 본 조선시대 후기의 사회상이다. ‘임하필기’에 조선시대 후기, 개고기 식용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연경(북경)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뿐더러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준다. 심상규가 북경에 갔을 때 경일(庚日, 복날)을 맞아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하였다. 북경 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이상히 여기고 팔지 않았다. 심상규가 그릇을 빌려 삶았는데 그 그릇을 모조리 내다 버렸다. (황해도) 장단의 이종성은 잔치에 갔다가 개장국을 보고 먹지 않고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달랐다.”
두 사람이 등장한다. 심상규와 이종성이다. 심상규는 개고기 식용론자이고, 이종성은 식용 반대론자다. 두 사람 모두 이유원보다는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이종성은 심상규보다 더 앞선 시대 사람이다. 그는 개고기가 먹을 음식이 아니라 하고 심상규는 복날에 삶아 올리라 했다. 영조, 정조시대를 지나며 조선시대의 사회는 개고기 식용과 반대가 뒤섞여 있었다. 민간도 마찬가지. 문제는 봉제사(奉祭祀) 접빈객의 음식이다.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맞이에 음식은 필수다.
혼례와 제사에도 국수가 필수적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언제 결혼하느냐?” 대신 “언제 국수 먹여주느냐?”라고 묻는 이유다. 일반 인들은 결혼식에나 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상(喪)’을 당했을 때는 음식을 미리 준비할 수 없다. 급작스럽게 닥치지만, 손님맞이 음식은 필요하다. 지금도 상가에서 늘 육개장을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시작은 개장국인데 피하는 이들이 늘어나 어느 날부터인가 육개장으로 바뀐 것이다.
대구 시장통에 등장한 ‘육개장’
‘대구가 육개장의 시작’은 아니다. 조선시대 후기, 민간에서 꾸준히 육개장을 먹었다. 이 음식이 처음 식당에 등장한 것이 ‘대구 육개장’이다.
사족 하나. “왜 육개장은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쓰고 붉을까?”에 대한 엉터리 대답 둘. 귀신을 쫓기 위해 붉은색 음식을 만들었다! 엉터리다. 상가는 돌아가신 조상을 모셔서 먼 길 떠나기 전에 대접하는 자리다. 붉은색으로 귀신을 쫓는다? ‘벽사(辟邪)’의 붉은색이다? 도대체 상가에서 혼령을 모시자는 건가, 아니면 혼령을 쫓자는 건가?
또 하나 엉터리. “대구는 분지라서 춥다. 그래서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쓴다?” 틀린 말이다. 대구보다 추운 지방은 훨씬 많다. 남쪽치고는 추운 편이지만 서울 이북보다는 춥지 않다. 분지? 대구만 분지도 아니다. 다른 지역에도 추운 분지 많다.
육개장의 붉은 고춧가루는 개장국의 영향이다. 개장국은 누린내가 심해 매운맛으로 감춘다. 향신료 사용량도 많다. 개장국이 육개장으로 발전하면서 고춧가루, 붉은색을 본뜬 것이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따듯한 남쪽 나라’라고 하지만 겨울은 그 어느 곳에서나 역시 겨울입니다.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고 몸은 자연스레 움츠러듭니다. 거센 바닷바람이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불더니, 어느 순간 다시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종잡을 수 없게 춤을 춥니다.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아 삼다도(三多島)라 불렸다던 말이 생각납니다. 검푸른 바다와 거무튀튀한 현무암 갯바위, 모래밭 뒤로 펼쳐진 풀밭이 깡마른 갈색으로 바뀐 지 오래. 모래밭에 촘촘히 뿌리를 내린 채 가늘고 긴 이파리를 무성하게 올렸던 통보리사초 더미도, 좌로 우로 비스듬히 줄기를 뻗은 순비기나무도 푸른빛을 잃었습니다. 푸르던 하늘에도 어느새 시커먼 구름이 들어와 반쯤 자리를 차지하니, 겨울 제주의 바닷가 풍경이 일순 을씨년스럽습니다.
황량한 바닷가 풍경에 모처럼 제주를 찾은 길손이 여수(旅愁)에 빠져들려는 순간 달덩이처럼 둥근 꽃송이가 방긋 웃으며 인사를 합니다. 미국에 ‘상하(常夏)의 낙원’ 하와이가 있듯 한국에는 사시사철 꽃이 피는 제주도가 있으니 힘을 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주도 바닷가에는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한겨울에도 많지는 않지만 찾아보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여전히 꽃잎을 활짝 열고 있는 야생화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황금색 국화인 갯국을 비롯해 철 지난 해국과 감국, 수선화,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갯쑥부쟁이 등등. 물론 각종 도감은 갯국 등의 개화 시기를 11월까지로 소개하고 있어, 실제와 차이가 있습니다.
누군가 말했듯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12월. 산방산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탁 트인 바닷가에서 갯쑥부쟁이의 환한 꽃 무더기를 만난 것은 각별했습니다. 모든 것이 사위어가는 한겨울 세찬 바닷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꽃 피운 모습이 ‘이 땅의 장한 여인’들을 똑 닮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모진 시집살이와 가난, 굴곡진 근현대사의 풍파를 이겨낸 며느리와 아내, 어머니의 모습이 갯쑥부쟁이 둥근 꽃다발에 투영된 걸 보았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꽃을 피우고 훗날을 기약하는 모습이 정말 비슷합니다. 흔히 들국화라 부르는 가을꽃 가운데 하나인 갯쑥부쟁이. 쑥부쟁이와 개쑥부쟁이, 단양쑥부쟁이, 까실쑥부쟁이, 눈개쑥부쟁이, 가는쑥부쟁이 등과 마찬가지로 국화과 식물의 하나인데, 주로 바닷가에서 자라는 쑥부쟁이라는 뜻에서 갯쑥부쟁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높이는 30~100㎝로 자라며, 8월부터 11월 사이 원줄기와 가지 끝에 지름 3~5㎝의 동그란 꽃이 하나씩 달립니다. 꽃은 가운데 노란색의 대롱꽃과 대롱꽃을 둘러싼 혀 모양의 자주색 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Where is it?
제주도는 물론 남해안과 동해안 등 전국 바닷가에서 자란다. 일본·대만·만주·중국 등에도 널리 분포한다. 제주도에서는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빙 둘러 바닷가에 자생하는데, 일부 도감은 키가 다소 작고 바닥에 기듯이 자라는 것을 섬갯쑥부쟁이로 구분한다. 또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은 제주도 남부에서 자라며 붉은색을 띤, 줄기가 가지를 많이 치고 억세고 나무처럼 딱딱해지는 것을 왕갯쑥부쟁이로 분류한다. 여러해살이풀로 꽃도 지름 5~7㎝로 다소 크다. 제주도 바닷가에 자생하는 쑥부쟁이의 경우 갯쑥부쟁이로 부르고 있다. 야생화 동호인들이 제주도에서 많이 찾는 갯쑥부쟁이 자생지는 성산일출봉이 바라다보이는 섭지코지와 광치기 해변, 산방산 앞 사계포구 해변, 그리고 마라도 등지다.
병산서원 앞 병산 아래로 낙동강이 굽이친다. 서원 답사 뒤에는 강변 산책을 즐겨볼 만하다. 인근 부용대 쪽엔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한 옥연정사가 있다. 병산서원을 기점으로 하는 둘레길인 ‘선비길’도 운치 있다. 한 시간쯤 걸으면 하회마을에 닿는다.
꽃다운 시절은 저물었어도, 꽃 하나쯤 마음에 두는 맛까지 포기할 수 없다. 때로 꽃 보러 뜬금없이 길을 나선다. 해동 무렵엔 동백꽃 보러 월출산에 간다. 몸통에서 분리된 멸치 대가리처럼 이미 맹탕이 된 꿈, 그게 꽃을 본들 푸르륵 새삼 날갯짓을 하겠는가. 꽃을 봐도 꽃이 없다. 하나, 피기만 하는 게 꽃은 아니다. 목숨 있는 것들, 머잖아 다들 저문다. 그러니 저무는 꽃도 꽃이요, 저무는 인생도 인생이다. 순리를 안다는 건 내 주제를 깨달아 수긍하는 일일 게다. 야야, 저문 꽃날에 앙앙불락할 거 없다! 꽃 보러 간 내게 꽃이 하는 얘기가 대개 그렇다.
안동 병산서원에 꽃이 한창이다. 꽃빛 번져 천지가 붉다. 배롱나무들 일제히 꽃을 피워 서원의 뜰과 늙은 기둥과 잠잠한 기와지붕에까지 붉은 물이 든다. 화양연화(花樣年華), 배롱나무의 아름다운 시절이 바야흐로 절정에 달했다. 백 일쯤 계속 피는 꽃이니 절정치고는 별나게 길다. 폭죽처럼 일시에 작렬하다 일시에 지는 벚꽃은 명함도 내밀 수 없다. 언제 한 번 꽃 피어본 일 없는 인생은 차라리 혀를 깨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나.
배롱나무의 개화기가 긴 건 기묘한 전략을 써서다. 꽃을 아끼는 꽃이지 않은가. 한꺼번에 꽃을 피우지 않고 차례로 개화하도록 꾀를 쓰는 게 아닌가. 한 송이가 지면 또 한 송이가 연이어 올라온다. 먼저 핀 송이가 지자마자 대기해 있던 망울이 송이로 벌어져 빈자리를 채워 넣는다. 꽃들의 ‘인해전술’이다. 무릇 욕망을 아껴 쓰지 않고 욕망을 이룰 수 없다. 빠르게 가는 것은 천천히 가는 것들보다 오래갈 수 없다.
병산서원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터를 잡아 건립했다. 서원 뒤편, 서애의 위패를 모신 사당 존덕사 계단 옆에 사는 배롱나무의 수령은 400년에 가깝다. 유학자들은 배롱나무를 선비의 표상으로 여겼다. 이 나무는 허물 벗는 뱀처럼 스스로 껍질을 벗는다. 그래 줄기가 미끈하다. 군더더기 없이 깨끗하다. 유학자들은 그걸 청렴결백의 상징으로 봤다. 절집에 흔히 배롱나무가 있는 것도 비슷한 까닭에서다. 집착이라는 허물, 망상이라는 허울을 훌훌 벗은 수행승의 참모습을 걸친 것 없는 배롱나무의 형상에 견주었다. 전혀 다른 눈도 있었다. 오히려 불경하게 취급해 집 안에 심기를 꺼렸다. 배롱나무의 맨 살갗에서 발가벗은 여체를 연상했던 것이다. 나무 하나를 놓고도 사람들의 감관이 이렇게 서로 다르다.
불난 호떡집도 아닌 것을, 병산서원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복닥거린다. 하기야 꽃놀이패가 배롱나무의 호시절을 놓칠 리 없다. 여름날의 병산서원 배롱나무꽃은 이미 파다하게 알려졌다. 꽃구경은 보너스로 치고, 서원의 고풍(古風)과 풍취에 반해 한 번 찾은 뒤로 다시 찾는 이도 많다. 한국의 서원 건축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는 평도 숱하다. 산수 간에 들어앉은 건축물이 구현할 수 있는 최상의 자연스러움을 지니고 있어서다.
거저 얻은 자연스러움이 아니다. 건축을 할지언정 인위의 개입을 애써 자제한 흔적이 그걸 알게 한다. 몸을 낮추고서도 한 번 더 몸을 낮추는 일, 유학자들은 그걸 본분으로 삼았다. 신독(愼獨)이라 하지. 홀로 있는 골방에서도 들여다보는 눈이 곁에 있는 것처럼 스스로 삼가길 수양의 방편으로 알았다. 그러니 집을 짓더라도 분에 넘치는 치장을 할 리가 있었겠는가?
서원이란 한마디로 학교. 서책만을 도구로 삼지 않았다. 자연을 경(經)으로 읽어 심성을 북돋우는 노력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 병산서원은 자연을 가르치는 교실이기도 했다. 만대루(晩對樓)를 보라. 자연 풍경을 끌어들이기 위해 서원 전면에 세운 누각이다. 사방으로 벽이 없으니 뭐 하나 가두지 않는다. 솔바람이 지나가고 물소리가 흘러간다. 나비가 날아들고 잠자리가 쉬어간다. 달빛이 들이치고 노을빛이 다녀간다. 사람인들 가둘까보냐. 만대루에 오르거든 마음의 감옥에서 탈주할 일이다. 내가 나를 가두지 않는 한, 나를 가둘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득달같이 알아차릴 일이다.
촛불 하나
켜 놓고
바라본다
너의 모습이
보일 때까지
- 용혜원의 ‘고독’
찬바람이 불어 마음이 허(虛)하거든 주저 없이 산에 들 일입니다. 그곳에 가면 당신만큼 고독한 꽃 한 송이 기도하듯 명상에 잠겨 있을 것입니다. 가을밤 호젓한 산사에 밝혀놓은 촛불인 양 저 홀로 핀 꽃 한 송이 당신을 반길 것입니다. 폭염이 한결 누그러진 9월 초, 여름내 깡말랐던 숲은 생기가 넘칩니다. 지난여름의 무더위와 장마쯤은 아랑곳 않는다는 듯 여기 불쑥 저기 불쑥 돋아나 가부좌 틀듯 앉은 애기앉은부채가 찾는 이를 반깁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눈이 밝고 기억력이 좋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 애독자들은 “어디선가 본 듯한 야생화인데” 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겁니다. 맞습니다. 2년 반 전인 2017년 3월 아주 흡사한 모습의 야생화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접두어 ‘애기’란 두 글자만 뺀 앉은부채였습니다. 물론 생김새는 아주 비슷하지만, 크기나 개화 시기 등 생태는 크게 다릅니다. 우선 꽃대의 길이가 앉은부채는 10~20cm로 어른 주먹만 하지만, 애기앉은부채는 1cm로 10분의 1 정도로 작습니다. 특히 꽃 피는 때가 크게 달라 애기앉은부채는 7~9월 여름이지만, 앉은부채는 2~3월 초봄입니다. 또 봄에 나온 잎이 7월이면 녹아 사라지고 그 뒤 엄지손톱만 한 꽃을 피우는 애기앉은부채와는 정반대로, 앉은부채는 꽃이 핀 뒤 잎이 무성하게 납니다. 하지만 부처의 후광(後光)을 닮아 불염포(佛焰苞)라고 불리는 꽃 덮개가 타원형을 그리며, 그 정중앙에 도깨비방망이 같은 육수(肉穗)꽃차례가 가부좌를 튼 듯한 모습은 매한가지입니다.
둥근 광배(光背)까지 갖춘 게 불상의 머리 형태와 흡사하니, 누구나 ‘애기앉은부채’란 이름을 ‘애기앉은부처’로 잘못 알아듣기 십상입니다. 도깨비방망이가 바로 수십 개의 꽃이 빙 둘러 핀 꽃 덩어리인데, 거북의 등처럼 갈라진 조각조각이 4장의 꽃잎과 4개의 수술, 1개의 암술을 갖춘 각각의 꽃입니다. 생김새만큼 꽃색도 독특합니다. 꽃 덮개인 불염포가 대개는 짙은 자갈색이지만, 경우에 따라 녹색부터 미색 또는 짙은 홍색, 선홍색, 심지어 연분홍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 그야말로 색색의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영어 이름은 이스트 아시안 스컹크 캐비지(East Asian Skunk Cabbage)인데, 이는 잎이 배추처럼 무성하고 넓은 특징이 반영된 결과로 보입니다. 또 ‘스컹크’란 단어가 들어간 데서 알 수 있듯 꽃에서 고기 썩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냄새가 나는데, 그 냄새로 곤충이나 육식성 동물들을 불러 모아 꽃가루받이에 활용한다고 합니다.
Where is it?
산림청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는 강원도 이북의 높은 지대에서 자란다고만 돼 있는데, 설악산과 대관령, 점봉산, 오대산, 태백산 등 강원 지역뿐 아니라 최근 울산, 경남, 전북 등 중부 이남의 숲에서도 자생지가 확인되고 있다. 이 중 강원도 평창의 선자령과 전북 순창의 쌍치(雙峙), 울산의 울산하늘공원 등이 야생화 동호인이 많이 찾는 자생지로 유명하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치솟는 6월. 여름을 향해 치닫는 계절의 변화에 현기증을 느끼며 뒷산을 오릅니다. 연두색이던 숲은 어느새 짙은 초록으로 바뀌었고, 길섶은 허리까지 차오른 풀들로 한 걸음 내딛기가 주저될 만큼 무성합니다. 몇 걸음 더 오르자 그만그만한 잡초들을 제치고, 어깨높이 이상으로 껑충 솟아난 꽃이 보입니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매혹적인 꽃, 바로 털중나리입니다. 겨우 한 송이 핀 것도 있지만, 대개는 서너 송이가 달려 있습니다. 많게는 열 송이 가까이 달리기도 하는데, 1m 넘게 솟아오른 원줄기 끝에 한 송이, 그 아래 사이사이 좌우로 뻗은 작은 가지마다에도 한 송이씩 다닥다닥 핍니다.
털중나리가 꽃을 피웠다는 것은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털중나리를 비롯해 하늘나리, 중나리, 참나리, 땅나리, 솔나리, 말나리, 하늘말나리, 날개하늘나리, 섬말나리, 누른하늘말나리 등 백합과의 나리꽃들이 곧 우리 땅에서 여름 내내 피고 지는 ‘여름꽃의 대명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0여 종 나리꽃들의 피고 짐이 털중나리로부터 비롯되기에, 털중나리의 개화는 곧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꽃색은 여름꽃답게, 이글거리는 태양을 닮은 듯 한결같이 붉습니다. 하지만 얼핏 보면 붉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홍색(紅色) 일색은 아닙니다. 분홍색의 솔나리와 진한 홍색의 큰솔나리 사이에, 주홍색과 주황색 등 다른 색의 꽃을 피웁니다. 물론 솔나리의 경우 아예 꽃잎이 온통 하얀 흰솔나리, 검은빛이 도는 홍자색 검은솔나리가 따로 있기도 합니다. 털중나리의 꽃은 노란빛이 감도는, 이른바 황적색(黃赤色)입니다. 간색(間色) 특유의 진한 색감이, 보면 볼수록 매력적입니다. 게다가 6개로 갈라져 완전히 뒤로 젖혀진 꽃잎, 그 안쪽으로 황적색 바탕에 새겨진 진한 자주색 반점과 6개의 수술, 1개의 암술을 모두 드러낸 모습은 집시 여인보다도, 삼바 여인보다도 뇌쇄적입니다.
10종이 넘는 나리꽃들 이름의 유래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6개로 갈라진 꽃잎이 하늘을 보면 하늘나리, 땅을 보면 땅나리, 그 중간을 보면 중나리, 줄기 등 전초에 솜털 같은 털이 있으면 털중나리, 꽃잎이 하늘을 보되 잎이 빙 돌려나면 하늘말나리로 불리는 식입니다.
Where is it?
털중나리의 가장 큰 매력은 누구나 조금만 품을 팔면 만날 수 있는 야생화란 점이다. “제주도와 울릉도를 비롯한 전국의 해발 1000m 미만 지역에서 자란다”는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의 설명처럼 전국 어디서나 잘 자란다. 그렇다고 도심에서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동네 뒷동산이라도 찾아가야 한다. 서울의 경우 광화문 한복판에서 30분 이내에 닿을 수 있는 종로구 수성동 계곡에서도 만났다. 다만 각종 공해(公害)에서 벗어날수록 꽃이 더 싱싱하고 탐스러우며 꽃색도 맑고 깨끗하기에, 멋진 털중나리를 만나려면 조금은 공을 들여야 한다. “해발 1000m 미만에서 자란다”는 건 해발 1000m 즈음까지 자란다는 뜻이기도 한데, 높은 곳의 털중나리는 탁 트인 전망과 어울려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린다. 경남 합천군 오도산 정상에서 일출과 함께 만나는 털중나리는 가히 환상적이다. 경기도 팔당 예봉산 자락과 김포 문수산도 털중나리와 주변 풍광이 멋지게 어우러지는 곳으로 인기가 높다.
꽃이 핀다. 온갖 봄꽃들, 활짝 몸을 연다. 그러니 온 산야가 후끈하다. 백목련, 벚꽃, 동백꽃, 유채꽃, 개나리, 진달래…. 붉거나 희거나 샛노란 꽃들의 미색에 쓰러질 것 같다만 정신은 깬다. 순결한 꽃들의 성(聖)으로 내 안의 속진(俗塵)이 헹궈진다. 봐라, 절정이다! 꽃들은 그리 속살거린다. 잘난 척하는 바 없이, 뭘 내세우는 기척 없이, 수줍은 듯 바람결에 하늘거리며 자연스러운 제 생태에 당당함을 슬며시 웅변한다.
숲길을 오르자니 이내 다산초당. 기와를 입었으니 초당이 아니고 와당이겠으나, 숲속 산방이라 외져 수수롭다. 지금 이곳에 갖가지 꽃들이 피어나지만 다산 정약용, 그는 진정 꽃핀 사내였다. 꽃다운 한살이를 누리고 떠난 인물이었다.
꽃다운 한살이? 이는 웬 거친 은유? 다산은 다산초당에서의 10년을 포함, 강진 땅에서 도합 18년간 유배를 살았다. 말하자면 그는 이 적막한 숲에서 ‘지옥의 한철’을 살았다. 그러나 기이하도록 고등한 이 인물은 운명의 농간에 굴복하지 않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가 시베리아 유형 체험을 창작의 퇴비로 변용했듯이, 다산은 유배의 고난을 정련해 학문의 보검(寶劍)을 벼렸다. 그는 유례가 드문 운명의 연금술사이자 뛰어난 곡예사였다. 거대한 학문의 포식자이자 불굴의 강철 인간이었다. 불후의 명저 ‘목민심서’를 비롯해, 자그마치 500여 권에 이르는 각종 경집과 문집이 다산초당에서 생산되거나 기획되었다. 독을 약으로 삼아 개화 만발한 특유의 기화(奇花). 후세에 쏟아진 갈채는 응분의 몫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꽃핀 다산의 한살이는 그 자신의 영광이자 시대의 쾌거였다.
유배객 신세에 고독인들 없었으랴. “봄잠 자고 술에 취해 사립문 닫았노라”, 다산은 그리 시를 썼다. 술과 시로도 누르지 못할 외로움이 들솟으면 숲을 배회했을 테지. 궁지에 몰릴수록 자연이 살가워지는 법. 만고에 믿을 만한 벗인 자연과 교유하며 시름과 갈증을 다독였을 게다. 나는 지금 다산이 즐겨 걸었다는 숲길을 밟아 나가고 있다.
만덕산 허리춤을 빙 에워 도는 숲길이다. 휘거나 꺾이거나 오르내리거나, 다채롭게 변주하는 오솔길이다. 숲을 이룬 수종 역시 다양하다. 흔전만전하기론 소나무·참나무·물푸레나무·조릿대·소사나무이지만, 남도 특유의 상록 교목인 동백나무·후박나무·비자나무·차나무 또한 숲을 채워 식생의 향연을 펼친다.
유배객 다산에겐 절친하게 지낸 승려 둘이 있었다. 저 아래 두륜산 일지암에 머물렀던 초의와 여기 만덕산 백련사 주지였던 혜장이 바로 그들. 당대 최고의 선승이었던 두 스님은 연상의 다산을 스승으로 섬겼다지. 특히나 혜장은 다산의 고달픈 유배생활에 많은 편의를 제공했더란다. 둘의 학문적·사상적 교류 또한 흐벅진 것이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1km 남짓한 숲길. 이 길이 바로 다산과 혜장이 만나고 통하고 논하고 배운 길이었다. 당대의 걸출한 석학과 선승이 교유한 ‘유(儒)·불(佛) 소통의 크로스로드’였다. 다산의 고독과 사색이 서린 길이기에 ‘다산의 철학 산책로’라 이를 수도 있겠지.
숲길 막판엔 백련사가 있다. 절 앞 저만치에서는 구강포 바닷물이 너울거린다. 꽃빛 낭자하게 번진 뒤편 만덕산은 젖을 내주는 어미의 표정을 지은 채 산사를 와락 보듬는다. 그리고 산사의 옆 자락엔 붉은 꽃초롱 총총! 동백꽃, 지천으로 흐드러져서다. 백련사 동백숲엔 1500여 그루의 동백나무들이 있으며 수령 300년이 넘었다는 노거수들도 많다. 주름과 검버섯, 생채기와 옹이에 뒤덮인 거목들 가지마다에 붉디붉은 꽃이 피어 회춘의 일락(逸樂)을 구가한다. 동백 꿀을 탐하는 습성이 있어 마냥 동백숲에서 지지구재재구 노래하는 저 새들은 동박새.
이채로운 건 동백숲 안에 산재하는 석탑과 부도들이다. 이끼 낀 저 수려한 석물 사위로 동백꽃 향불이 물결처럼 일렁거린다. 해서, 숲 안은 법당처럼 그윽하며, 불화(佛畫)처럼 장엄하다. 옛사람 납신다. 이 요요한 봄날의 동백꽃 제전을 바라보다 휘적휘적 숲 밖으로 가뭇없이 사라진다. 환(幻)으로 오신 다산. 그는 동백숲이 못내 그리울 테고, 나는 외람되이 그가 그립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1925년 간행된 김소월 시인의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시이지요. 봄가을 없이 돋는 달이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땅에서 자라는 풀·나무를 하나하나 알아가기 전에는 그토록 많은 꽃이 산과 들에서 피고 지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특히 야생 난초의 존재는 경이, 그 자체였습니다. 난초는 으레 ‘잘 빠진’ 화분에 담겨 집 안이나 사무실 등 실내에서 감상하는 원예종이라고 생각해온 탓이지요.
그런데 서울, 경기, 강원 등 겨울이면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곳에서도 봄이 되면 감자난초, 은대난초, 나도제비란 등이 돋아나 희거나 노랗거나 붉은 꽃을 저마다 피워낸다는 사실을 알고는 1차로 크게 놀랐습니다. 이어 많은 사람이 보고 싶은 1순위 야생화로 꼽는 광릉요강꽃을 비롯해 복주머니란, 보춘화 등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친숙한 이름의 난초들과 으름난초, 흑난초, 무엽란처럼 다소 생소한 이름의 난초 등 무려 90여 종의 야생 난초가 이 땅에서 저절로 자란다는 걸 알고는 두 번째로 놀랐습니다.
자주색, 즉 ‘짙은 남색을 띠는 붉은 색’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어 자(紫)와 난초 난(蘭)의 의미가 더해진 자란(紫蘭). 군더더기 없이 단출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의 야생 난초는 이에 더해 또 다른 놀라움을 선사합니다. 처음 보는 순간 강렬하고 진한 홍자색 꽃 색으로 인해 열대 지역이나, 고온의 온실에서 자라는 이국적인 난초일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자란이 우리 땅에서 저절로 나고 자라는 야생 난초라는 걸 알고는 놀라움과 반가움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나아가 한 야생화 애호가가 썼듯 “발에 밟힌다고 할 정도로 흔하게 자생”하는 걸 보는 순간 더 큰 기쁨과 놀라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2018년 5월 5일 차마 건너기를 주저했던 진도대교를 지나 진도(珍島)의 남쪽 바닷가에 도착해 갯바위를 밟았습니다. 그새 무성해진 산기슭을 살피니 군데군데 불쑥불쑥 돋아난 홍자색 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초록의 숲에 홍자색 꽃이 피니 눈에 확 뜨입니다. 자란이란 단순명료한 이름의 연유를 알 것 같습니다. 자생 난의 화려한 개화 현장을 확인한 것만도 감격스러운데, 조금 뒤 더 놀라운 장면을 만났습니다. 수백 촉의 자란이 바다와 섬이 한눈에 보이는 해안 평지에 한데 뭉쳐서 홍자색 꽃잎을 일제히 벌리고 선 장관을 본 것이지요. ‘어린이날 교통 체증’을 무릅쓰고 서울에서부터 500km 가까이 달려온 보람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Where is it?
전라남도 무안, 신안, 진도, 해남, 완도, 고흥, 그리고 제주도가 자생지다. 남쪽 바닷가와 제주에서 자란다는 것은 자란이 열대식물까지는 아니지만 추위에 약하다는 걸 보여준다. 남쪽에서 자라다 보니, 다른 야생 난초들에 비해 키도 크고 꽃도 큰 편이다. 50cm 안팎의 꽃대를 포함해 키가 60cm 정도까지 자란다. 길이 20~30cm, 너비 2~5cm의 길쭉한 타원형 잎이 5~6장이나 나와 줄기를 감싸며 위로 뻗는다. 5~6월 잎 사이에서 나와 50cm까지 자라는 꽃대 끝에 3cm 크기의 홍자색 꽃이 6~7개까지 달린다. 남서해안 10여 곳 미만의 한정된 지역에서만 자생하지만, 개체 수는 지천이어서 진도나 해남 등 자생지 야산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