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기보다 비우기가 더 어렵다. 채우는 쪽으로 발육한 욕망의 관성 때문이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허기지는 게 욕심이지 않던가. 지긋이 나이 들어서도 사람은 때로 갈피없이 흔들린다. ‘비우기’에 능하지 않아서다.
귀촌은 흔히 이 ‘비우기’를 구현할 찬스로 쓰인다. 욕망의 경기장인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가급적 빈 마음으로 생활을 운영해 한결 만족스런 여생을 누리겠다는 의도, 귀촌한 시니어의 내심엔 대체로 그런 게 들어 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게 인생. 시간의 골목골목을 통과하는 사이에 그려지는 굴곡의 궤적들. 남들 눈엔 평범해 보이는 인생에도 고유의 행적이라는 게 있으며, 기복과 부침의 과거사가 서려 있게 마련이다. 예순의 나이에 접어든 임미숙 씨의 행장도 예외가 아니다.
대학에서 의상학을 전공한 그녀는 엉뚱하게도 건설업에 뛰어들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사업은 순풍을 만나 쾌속 질주! 이 야무진 여자는 진로를 바꿔 쇼핑몰 사업에 자금을 투자했다. 이 역시 순항. 50명의 직원을 거느릴 정도로 규모를 키웠더란다. 그러다가 빙벽을 만나 한순간에 추락했다. IMF의 파랑에 침몰했던 것.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부채만 산더미처럼 남았다지. 간신히 부채를 정리한 그녀는 오랜 거점이었던 대구를 떠나 서울로 이주, 친구와 함께 커피숍을 차렸다. 그러나 그마저 신통치 않았다. 어이 하나? 고심이 첩첩 겹쳤을 테지.
“사업을 키워나갈 땐 남들의 칭찬도 많이 들었어요. 체구도 조그마한 게 통도 크고 간도 크다고. 자부심도 넘쳤죠. 하지만 추락하고 보니 심하게 주눅이 들더라고요. 지나온 세월을 찬찬히 돌아보게 됐어요. 사업상의 성취가 있을 때 누렸던 만족감, 행복감, 이런 것들이 사실은 근거가 부실한 자부심에 불과했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남들의 찬사도, 행복감도 단순히 돈의 힘에서 나온 거라는 걸 깨닫고 우울했어요. 본질적인 가치를 생각하기 시작했던 거죠. 물질적 조건에 매이지 않고 제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그 결론이 귀촌이었죠.”
물적 토대를 잃은 뒤, 임미숙 씨는 삶이라는 숙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조리를 따져 맹점을 찾아냈던 것 같다. 그동안 나를 기쁘게 했던 건 나 자신이 아니라 돈이었구나, 내가 나를 행복하게 해준 게 아니라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줬구나, 미련한 나여! 보라! 모래 위에 지은 가건물처럼, 이토록 빈약한 행복은 종단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니겠느냐? 그런 인식이 머릿속을 환하게 흘렀던 모양이다. 그게 터닝 포인트였다. 그녀가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후미진 산골로 내려온 건 2011년의 일. 당시 나이 53세.
“시골의 그 무엇에 끌렸죠?”
“조용한 시골 풍경, 울퉁불퉁한 돌담장, 담장 아래 피어나는 봉숭아며 채송화, 그런 게 좋았어요. 한적한 시골에 근사한 집을 짓고 살아보고 싶었어요. 노래 가사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음, 그런 꿈이었죠. 절실하게 꿈꾸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죠? 이 산골에 들어오며 드디어 원했던 삶이 시작된다는 생각으로 즐거웠어요.”
“경제활동에 한계가 있는 게 시골이죠. 생계 대책도 미리 세워둔 귀촌이었겠죠?”
“미리? 그건 아니었고 내려가서 부닥쳐보자, 까짓것 도시에서 이미 실패했는데, 더 이상 잃을 게 뭐람! 그쯤의 생각뿐이었죠.”
“비에 젖은 사람은 더 이상 비가 두렵지 않은 법이죠.”
“결심은 굳었어요. 귀촌을 계기로 싹 비우고 살자는 것. 좋다, 이젠 가늘게 먹고 가늘게 살자! 그 생각 외 별 고민도 궁리도 하질 않았어요.”
외양간을 개조한 사랑채 안 풍경
거참, 두둑한 배짱이렷다. 가녀린 식물을 닮은 외양이지만 내부엔 깡이 서려 있는 모양이다. 천성의 산물이거나 세파를 거치며 단련된 근성이겠지. 물론 그녀가 철부지처럼 엄벙덤벙 무작정 산골에 덤벼든 건 아니었다. 믿을 만한 근거 하나가 있었으니 말이다. 선친이 남겨둔 1500평 규모의 땅과 집이 그것. 생시에 젖소 목장을 하려고 사두었던 부지로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였다. 그녀는 부친이 작고하기 전까지의 25년 세월을 심청이처럼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며 알뜰히 봉양했단다. 갸륵한 행장에 응분의 선물이 주어진 셈이다.
산등성이 외딴 곳에 있는 임미숙 씨의 거처는 수려하다. 갖가지 초목이 들어찬 터전은 널찍하다. 집의 외벽엔 흰 칠을 해 흐린 날에도 태깔이 밝다. 돌덩이와 흙, 목재, 통유리를 적재적소에 옹골차게 도입한 센스도 예사롭지 않다. 집 내부에도 미학과 리듬이 생동한다. 외양간을 개조한 사랑채 안 풍경은 특히나 멋스럽게 튄다. 골방의 절반을 침대처럼 높이 띄워 구들을 놓은 정경은 이색이며, 1인용 간이식 사우나탕은 성냥갑처럼 비좁지만 기발하다. 공간을 기능적으로 분할한 하얀 벽들은 이국정서를 야기한다.
햐, 한마디로 매력적인 집이다. 재활용 자재나 자연에서 무상으로 얻어온 재료를 적극 끌어들였다는 점에서는 참신하며 창의적이다. 별반 큰돈을 들이지 않은 대신 공은 잔뜩 들였다지. 이 집은 원래 금방이라도 와르르 허물어질 듯 퇴락한 고가였다. 어떻게든 손을 봐야 거주가 가능할 상황이었다. 개축을 할까, 자그마하게 신축을 할까, 그녀는 양자를 놓고 고민하다 귀농 관련 인터넷 카페 회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허름하게 기울어진 시골집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려 조언을 구했어요. 용케 목수 한 분과 연결이 됐죠. 시골집을 철거하는 건 너무도 아깝다, 리모델링이 좋지 않겠는가? 그분의 얘기가 그랬어요. 바로 의기투합해 공사에 착수했죠. 제가 원래 인복이 많은데요, 저랑 코드가 맞는 유능한 목수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죠. 비용은 3000만 원이 채 들지 않았지만 저의 취향이 충실하게 반영된 집, 예쁘고 실용적인 집이 한 달 만에 완성됐던 거예요.”
“시골집을 개축하느니 신축이 낫다는 경험담들도 많아요. 비용이나 편의성, 완성도를 따질 때 그렇다는 거죠.”
“귀촌 희망자들에게 집짓기에 관한 조언을 한다면?”
“동네 사람들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크고 화려한 집을 짓는 경우가 흔하지만, 반드시 후회해요. 유지와 관리에 진절머리를 내게 돼 있어요. 시골에서의 집이란 주로 잠자는 공간으로 쓰여요. 마당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으니까. 가급적 작게 짓는 게 요령이죠.”
귀촌으로 얻은 값진 선물들
예쁜 집에 사는 된장녀. 주변 사람들은 임 씨를 흔히 그렇게 일컫는다. 그녀의 전공이 된장 사업이기 때문이다. 귀촌 이듬해부터 된장을 담갔으니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된장을 만드는 기술도 판로도 평판도 이젠 탄탄한 수준에 올라섰다.
된장은 일용할 양식이다.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으면 뚱뚱해져 식인종에게 잡혀 먹힐 수 있다. 된장은 탈날 게 없다. 누구나 좋아하며 누구나 먹는다. 비교적 수월하게 제조 기술을 익힐 수도 있다. 해서, 귀촌·귀농을 한 이들이 쉬 된장 사업에 뛰어든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하다. 흑자를 보는 된장 농가가 드물다. 사정이 이러하지만 임 씨는 기세를 돋우고 있다. 지난해엔 번듯한 된장 공장도 지었다. 현재의 연 매출은 5000만 원 정도. 김천 관내에 널리 알려진 강소농이다. 알찬 행진이다. 이건 단박에 쌓아진 탑이 아니다.
“어디에 갖다놔도 살아갈 여자,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웃음) 비록 돈 없이 귀촌했지만 이 시골에서 무엇을 해서건 밥은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저에게 없었던 건 돈만은 아니었어요. 농사 경험 없지, 시골 물정 모르지, 아는 사람 없지, 한마디로 무지막지한 귀촌이었죠. 그렇다면 부지런하게 배우는 게 지름길. 귀촌·귀농 교육장을 찾아다니거나 밤새워 인터넷에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익혔어요. 주경야독식으로 부지런히 공부했어요.”
“된장 사업은 교육장에서 권장한 종목?”
“아뇨. 이미 포화상태라며 뜯어말리던데요.(웃음) 그러나 저는 된장이 적격이라 판단했죠. 처음 한동안은 남들이 비웃을까봐 몰래 혼자 된장을 만들어 지인들과 나눠 먹었어요. 그런 수련기가 길었어요. 덕분에 실력이 늘면서 작년부터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있어요. 초기의 막막했던 기분은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이제부터 본격적인 출발을 해야죠.”
“어디를 향한 출발?”
“흠. 일단은 된장 사업을 안정적 궤도에 올려놔야죠. 그렇다고 얄팍한 장사치가 되긴 싫어요. 된장을 통한 공감과 소통이 전 참 즐거워요. 저의 시골생활과 된장 이야기를 올리는 블로그로 맺어진 인연들이 많이 생겼거든요. 지역 귀농교육기관에서 가끔 강의도 하고, 견학차 찾아오는 방문자들도 많아요. ‘마음씨 예쁜 여자들’이 모인 ‘마녀 7인방’, 이 모임의 아줌마들과는 친자매 같은 정을 나누고 삽니다. 모두 귀촌한 분들이죠. 아차! 어디를 향한 출발이냐 물으셨죠? 궁극적인 목적은 여행입니다. 맘껏 여행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다는 것, 그럴 수 있는 기반을 빨리 다지자는 것, 이게 현재의 목표예요.”
귀촌을 통해 맺어진 믿음직한 인연들에 그녀는 기쁘다. 그건 귀촌으로 얻게 된 가장 값진 선물 아닌가. 그렇다 하더라도 외기러기처럼 일쑤 외롭지 않을까? 그녀는 독신이다.
“어서 빨리 똘똘한 마당쇠를 구하라는 성화가 빗발쳐요. 은근히 다가오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나 필이 통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를 어쩌나. 일에 묻혀 사는 바람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는 것도 사실이고요. 게다가 저에겐 병이 하나 있어요. 외로움이 없다는 것, 이건 지병일까? 외로워야 사랑의 갈증도 생길 텐데, 이거 참 문제죠?(웃음)”
“세상에 유일한 진실은 이성을 잃은 사랑에 있다. 뮈세의 말에요. 명심하시라.(웃음) 그런데 말이죠, 독신 여성의 귀촌, 이거 권장할 만한 거예요?”
“저를 보세요. 끄떡없이 잘 살고 있잖아요. 물론 표적이 될 수도 있어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저는 CCTV를 설치했지만, 처신을 똑떨어지게 잘하면 그만이에요. 사고가 나려면 명동 한복판에서도 나는 거 아니겠어요? 접시 물에 빠져 죽는 수도 있고 말이죠. 정 힘들면 짐 싸서 나가면 되지 뭐, 난 어디서건 잘 살 수 있어! 제게 그런 깡은 있어요.(웃음)”
시골생활의 새로운 문법과 맥락을 익히는 일. 이건 오솔길을 거니는 일과 달리 손쉬운 여정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듯, 시련도 불안도 나그네처럼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길은 늘 그렇게 열린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작년 호텔 디너파티 행사에서 필자는 출입관리 봉사를 맡았다. 1인당 20만 원짜리 티켓이 있는 사람들만 입장할 수 있는 행사여서 출입 통제는 중요한 임무였다. 참석자들은 모두 앉아서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먹었다. 필자와 입구 접수 봉사요원들은 그날 저녁을 굶었다. 주최 측에 여러 번 저녁식사에 대해 문의를 했는데도 서로 우물쭈물 답변을 미뤘다. 정작 봉사 요원들은 디너 티켓이 없으니 저녁을 굶을 수밖에 없었다. 매우 섭섭하고 화도 났다. 고픈 배를 참고 뒷마무리까지 끝낸 후 늦은 밤 뒤풀이 자리에서 주최 측에 불만을 토로했다. 주최 측에서는 적자 나는 행사여서 비용을 아끼느라 그랬다는 말을 했다. 미리 얘기해줬으면 김밥이라도 준비해가거나 교대로 밖으로 나가 저녁을 사먹었을 것이다.
해가 바뀌고 비슷한 행사가 또 있었다. 이번엔 점심만 해결하면 되는 행사였으므로 인근 음식점에서 대충 식사를 했다. 뒤풀이 자리에서 행사 식사 얘기가 나오자 작년 행사 때 섭섭했던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그 말에 대한 주최 측에서 한 얘기를 듣고 가치관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최 측은 수백 명이 모이는 행사를 주관하기에도 바쁘니 봉사 요원들은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얘기였다. 알아서 할 일이고 봉사 요원들은 그야말로 봉사하는 사람들이니 다른 참석자들처럼 우아하게 스테이크 먹으면서 칼질할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봉사 요원들은 아침식사도 못 먹고 눈 비비며 새벽에 행사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모든 준비를 마친다. 점심은 김밥으로 때운다 해도 명색이 디너파티인데 저녁식사까지 김밥으로 때우라는 것은 너무 심하다 생각되었다.
주최 측의 생각은 손님 치르는 행사이니 우리 식구는 모든 것을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식구들 같은 봉사 요원들을 먼저 챙기는 것은 기본이고 어려운 일도 아니다. 밖에 나가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하는데 제 식구에게 혹독한 사람들이 있다. 못난 아버지 중에 그런 사람이 많다. 주최 측이 그런 셈이다. 바깥사람들은 볼일이 끝나면 그만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식구들은 영원히 같이 갈 사람들이다. 식구들이니 이해해줄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렇지 않다. 식구들이 정을 떼고 돌아설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필자의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문구점을 운영할 때였다. 필자가 플라스틱 필통을 갖고 싶어서 사용하던 양철 필통 속 연필들을 진열대에 있는 플라스틱 필통에 옮겨 담았다. 양철 필통은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나고 연필도 자주 부러졌기 때문에 싫었다. 플라스틱 필통은 정말 갖고 싶은 물건이었다. 아버지는 파는 물건이라 안 된다며 플라스틱 필통을 다시 가져갔다. 이 일은 두고두고 아버지를 원망하게 된 원인 중 하나였다.
‘먹는 데서 정 난다’는 말이 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도 있다. 사람은 하루 세끼를 먹는다. 매일 겪는 일이지만, 중요한 일이다. 한 끼라도 굶게 되면 서럽고 섭섭한 생각을 하게 된다. 먹을 때는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눠 먹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자기네들만 먹고 곁에 있는 사람을 모른 척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두고두고 원망을 들을 일이다. 백 번 잘하다가 한 번 실수를 하면 그동안 잘한 것이 소용없어지는 것이 먹는 문제다.
필자의 집안은 3대가 개띠다. 아버지가 34년 개띠, 필자가 58년 개띠, 둘째아들이 94년 개띠다. 말티즈도 한 마리 키우고 있어 집안이 온통 개판이라고 가끔 농담을 한다. 34년 개띠이신 아버지 세대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겪으며 생사의 갈림길을 수없이 지나온 분들이다.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지만 58년 개띠도 나름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다. 필자의 초등학교 4학년 성적표를 보면 104번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한 반이 104명 정도는 되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학생이 너무 많아 3부제 수업을 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이라는 표현은 아마 이때 만들어졌지 싶다.
필자도 그랬지만 그 시절에는 판자촌에 사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가난했기에 추워도 외투 하나 없이 교복만 입고 다녔다. 겨울엔 참 추웠다. 특히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초봄 추위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날 만큼 맹렬했다.
58년 개띠는 고등학교 평준화 1세대다. 그래서 ‘뺑뺑이’ 세대라 표현하기도 한다. 왜 뺑뺑이가 시작되었는지는 만천하가 다 알고 있으니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문제는 뺑뺑이 추첨이 가져온 부작용이 너무 컸다는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명문 고등학교에서는 평준화 기수를 후배로 취급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평준화 기수들은 선배를 선배로 대우하지 않는다. 필자도 명문 고등학교에 배정을 받았지만 좋아하기엔 교사들과 선배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 올해가 고등학교 졸업 40주년이 되는 해다. 아직도 동창회에 나오지 않는 친구가 많다. 그들에게 고등학교 시절이 여전히 악몽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건축설계사무소에서 몇 년 동안 도제생활을 했다. 담배 피우고 술 몇 번 먹을 정도의 돈을 월급으로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을 하고 대책 없이 사직서를 냈다. 외부와 연락도 끊고 공부를 해서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해 30대 초반에 건축사사무소를 차렸다. 온 나라가 건설 현장 같았던 시절이다. 일도 많았고 그만큼 직원도 늘었다. 결혼하고 전용면적 7평짜리 벌집 아파트에서 전세로 시작했는데 집도 분양받았다. 골프도 쳤고 해외여행도 다녔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화려한 30대는 40세로 막 접어드는 해에 터진 IMF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감각마비가 겹치면서 정신과 몸이 무너졌다. 암흑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 10년이나 걸렸다.
몇 년 전 필자의 생일에 일어난 일이다. 그날따라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겨 야근을 하게 되었다. 야근하고 간다고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덤덤한 답변이 돌아왔다. ‘혹시 아내가 내 생일을 잊어버린 건가’ 하고 의심을 하다가 속으로 ‘내가 속을 줄 알고’ 하면서 속아 넘어가는 척했다. 그동안 무슨 기념일이 되면 필자는 깜짝 이벤트를 자주 했다. 전혀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기념일 아침에 꽃을 준비한다든지 돈 봉투나 선물을 내놓는 식이다. 이런 이벤트에 익숙해진 아내는 기념일이 가까워져도 특별히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날 야근을 마치고 집 앞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늦었지만 생일 음식을 준비해뒀을 아내와 한잔하려고 가게에서 맥주 몇 병을 사가지고 들어갔다. 현관을 들어설 때 분위기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개는 반갑게 짖으며 달려 나왔고, 아내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큰아들은 컴퓨터에 앉아 있었다.
검은 비닐봉지에 든 맥주를 보면서 야근하고 오면서 무슨 맥주냐고 아내가 한마디했다. 식탁을 힐끔 보니 텅 비어 있었다. 설마 하면서도 그때까지는 깜짝 이벤트를 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을 다녀왔는데도 전혀 상황 변화가 없었다. 시간은 벌써 11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깜짝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고 상황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내와 아들놈을 식탁으로 불렀다. 일단 맥주를 한 잔씩 따르고 말했다. “앞으로 30분만 지나면 여기 있는 두 사람이 오랫동안 심각한 고통에 시달릴 것 같아서 한마디하겠다…. 오늘 내 생일이다!” 사색이 된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떨어 결과적으로 30분 안에 맥주 안주가 준비되긴 했지만 속으로는 좀 섭섭했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전방에서 군 복무하는 아들에게서 온 전화가 위로가 되긴 했다.
“아빠 생신을 엄마도 형도 다 잊어버렸다면서요….”
얼마 전에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시니어에게 강의를 하던 중 환갑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수강생들은 대부분 5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이었다. 그날 필자는 감정이 약간 고조되어 있었다. 수강생들에게 이야기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요즘엔 남 눈치 보느라 환갑잔치를 안 한다고 하는데 왜 남 눈치를 봐야 하는가. 우리 베이비부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릴 때 판자촌에서 살며 춥고 배고팠던 기억이 다들 있지 않은가. 뒤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잠시 한숨 돌릴 만하던 시기에 IMF로 다시 고꾸라졌다. 그리고 또 일어서서 여기까지 정신없이 달려왔다.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머리는 허옇고 주름도 많더라. 무엇을 이루려고, 무엇 때문에 이리도 바쁘게 산 것일까 생각하면 허무할 때도 있다. 그러니 우리 환갑상을 꼭 받자. 거창하게 받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과 아주 가까운 친구들만이라도 모인 자리에서 술 한잔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한 위로의 말을 듣고 싶다….”
대충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앞쪽에 앉은 분이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다. 필자도 감정이 북받쳐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지난해 5월, 퇴직하고 반년 동안 현역일 때보다 더 바쁘게 살았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고 여행도 하고 글도 쓰고 사진도 찍으러 다녔다. 돌이켜보니 시간이 참 빠르다. 허둥지둥하면서 살았다. 옆을 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 좀 느리게 걸으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싶다. 해가 바뀌어 필자도 이제 환갑이다. 주변에서는 크루즈 여행을 간다, 북유럽을 간다, 벌써부터 환갑 계획들을 자랑한다. 필자의 계획은 명확하다. 10년 전, 그러니까 오십이 되던 해부터 매년 한 가지씩 목표를 정해 10년 계획을 실행해왔다. 그동안 이룬 성과로 상담 관련 자격증 네 개를 취득했고 공저로 책을 네 권 냈다. 기타 배우기, 목공예 배우기, 명강사 되기, 글쓰기, 그림 다시 그리기, 새로운 관계 맺기 등의 목표를 이루었다. 수필가로 등단도 했다. 환갑인 올해는 다시 일을 시작하고 또 다른 10년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원년이 될 것이다. 지난 10년간 이룬 성과를 주변과 나누고 공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 물론 환갑상은 받고 나서.
1980년대 복싱은 한국의 3대 스포츠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인기 스포츠였다. 복싱 경기가 있는 날이면 팬들은 TV가 있는 다방이나 만화방에 삼삼오오 모여 응원했고 한국 선수가 우승하는 날이면 다방 주인이 무료로 커피를 돌리는 소소한 이벤트(?)도 열렸다. 1980년대를 풍미한 복싱 영웅 유명우(柳明佑·54)를 그의 체육관에서 만났다.
상대가 빈틈을 보이면 유명우는 어김없이 ‘소나기 펀치’를 퍼부었다. 정신을 쏙 빼놓는 공격에 상대가 무릎을 꿇고 링 위에 쓰러지면 경기장은 함성과 열광으로 가득 찼다. 14명의 상대를 KO시켰지만 정작 그는 한 번도 링 위에 쓰러진 적이 없다. “링은 눕는 침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유명우. 163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본인만의 복싱 스타일을 정립하며 세계 타이틀 17차 방어의 신화를 썼다. 한국 프로권투 사상 최다 연승(36연승), 가장 오랜 기간 타이틀 보유(6년 9일), 최단 시간 KO승(1R 2분 46초), 최다 방어 기록(17차). 이 모든 게 유명우가 세운 기록이다.
‘작은 들소’, 세계 정상에 오르다
-1985년 12월 8일 WBA 주니어플라이급 타이틀 매치 (vs 조이 올리보)
‘작은 들소’, 작지만 링 위에 올라가면 들소처럼 매섭게 변한다고 해서 유명우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중학교 1학년 때 ‘복싱은 멋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무턱대고 권투장갑을 꼈던 그는 1984년 동양 주니어 플라이급 왕좌에 오르고 이듬해 미국 출신의 WBA(세계권투협회) 주니어 플라이급 챔피언 조이 올리보를 대구로 불러들여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았다.
“이때 제가 군대에 있었거든요. 군대 복싱부 표어가 ‘지면 죽는다’였어요.(웃음) 전쟁에서 지면 죽는 거잖아요. 물론 복싱이 전쟁은 아니지만 그렇게 비유한 거죠. 챔피언 벨트를 가져오기 위해선 지지 않고 이겨야 하니까 정말 군인 정신으로 싸웠죠.”
조이 올리보는 다양한 공격은 물론 탄탄한 수비 능력을 갖추고 있어 여간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초반 유명우는 올리보를 좌우 연타로 몰아붙이며 쉽게 경기를 풀어나가는 듯했지만 후반에는 올리보의 잽과 스트레이트 연타를 허용하며 고전했다. 15라운드까지 이어진 난타전 끝에 유명우는 판정승을 거뒀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그는 바로 응급실 신세를 졌다. 급하게 마신 물이 복통을 일으킨 것이다.
“경기 중에 엄청 갈증이 나더라고요. 그때가 아주 추운 겨울이었는데 입만 헹구고 뱉어야 하는 찬물을 목마르다고 벌컥벌컥 마셨으니 탈이 난 거죠. 경기할 땐 몰랐는데 끝나고 나니 도저히 참지 못하겠더라고요. 기뻐할 겨를도 없이 병원에 갔죠.(웃음) 그래도 처음 챔피언 벨트를 차던 그 순간의 기분은 아직 잊지 못해요. 복싱을 시작할 때부터 꿈꿔온 세계 챔피언 자리에 앉았으니 마치 세상에 다시 태어난 듯한 기분이었죠.”
39전 38승, 그리고 1패
-1991년 12월 17일 18차 방어전 (vs 이오카 히로키)
유명우는 챔피언 자리에 올라 약 6년간 17명의 도전자를 물리치며 무패행진을 이어갔다. 그런 그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있었으니 바로 ‘안방 챔피언’이다. 17차 방어전까지 홈 링에서만 방어전을 치렀다는 이유에서였다. 18차 방어전. 마침내 그의 첫 원정 경기가 일본에서 열렸다.
“졌죠.”
그야말로 뼈아픈 패배였다. 첫 원정에서 마치 ‘안방 챔피언’임을 증명하듯(?) 타이틀도 뺏기고 연승가도 또한 36연승에서 끊겼다. 20차 방어전 후 은퇴하겠다는 목표도 무너졌다. 그런 그의 패배에 “석연치 않은 판정이었다. 일본에 돈을 받고 져준 게 아니냐”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오랜 기간 방어전을 잘 치러왔고 상대도 한 체급 아래의 챔피언이었기 때문에 안일하게 준비했죠. 저 스스로 나태해진 거예요. 특히 원정 시합 땐 상대를 확실하게 제압하지 못하면 이기기 어려운데 제가 완벽하지 못했어요. ‘타이틀을 돈 주고 팔아먹은 거 아니냐’라는 억측들이 있었는데 자신의 명예가 걸린 타이틀을 어느 누가 돈을 받고 넘기겠어요.(웃음) 당시엔 그런 소리를 들으면 속상했는데 그만큼 절 아꼈기 때문에 큰 아쉬움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생각해요.”
첫 패배 후엔 속상해서 복싱을 그만둘까 했지만 오기가 생겨 재시합 신청을 했다. 단 협회는 이오카 히로키의 2차 방어전 이후에 다시 붙을 수 있다는 조건을 걸었다. 중간에 이오카 히로키가 질 경우 타이틀을 빼앗기기 때문에 유명우 입장에서는 다시 붙는 의미가 없었다. 내심 이오카 히로키를 응원했다고.
“다행스럽게도 히로키가 2차 방어전까지 성공하더군요. 고마웠죠.(웃음) 만약 중간에 빼앗겼으면 복싱을 그만뒀을 거예요. 다음번 만날 땐 정말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 관악산 정상을 뛰어올라갔어요. 체력을 기르면서 만발의 준비를 했죠.”
1년 뒤 챔피언 재탈환을 위해 똑같은 장소, 똑같은 상대와 다시 만났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경기 도중에 상대방 팔꿈치에 맞아 눈썹이 찢어진 것이다.
“피가 많이 나면 경기가 중단돼요. 그때 꽤 많이 찢어졌는데 시합 도중에도 계속 걱정이 되더라고요. ‘이렇게 경기가 허무하게 끝나면 안 되는데…’ 하면서요. 다행히도 피가 많이 나지 않아 무사히 경기를 끝낼 수 있었어요.”
경기 결과는 12라운드 판정승. 1년 만에 타이틀 재탈환에 성공했다. 이후 1차 방어전을 치르고 WBA에 벨트를 반납, ‘영원한 챔피언’이라는 명예를 선택하고 은퇴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체중 감량
시합을 하고 나면 얼굴에 멍이 들어 퉁퉁 붓는 건 당연한 일이다. 1차 방어전 땐 귀를 맞아 고막이 파열됐다. 복부에 정타를 맞으면 숨이 턱턱 막힌다.
“3차 방어전 때 마리오 데 마르코 선수랑 시합하고 나선 정말 챔피언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어요. 1라운드부터 15라운드까지 서로 주먹만 주고받았는데 시합 끝나고 소변을 보니깐 혈뇨가 나올 정도로 굉장히 힘든 시합이었죠. 그만큼 치열했고 복싱 팬들이 가장 열광한 경기였어요.”
사실 맞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있었으니 바로 체중 감량이었다. 유명우는 은퇴 후 음식을 맘껏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말한다. 지금 그 당시처럼 체중을 감량하라고 하면 돈을 줘도 안 하겠단다.
“제가 선수 시절 평소 몸무게가 60kg 정도였어요. 시합을 하려면 49kg까지 빼야 하는데 감량의 고통이 제일 힘들었죠. 식이조절에, 운동을 해도 안 빠지면 사우나 가서 남아 있는 수분까지 다 빼야 했어요. 어떤 선수는 이뇨작용을 도와주는 약도 먹고 그야말로 마지막엔 살과의 전쟁이 아니라 수분과의 전쟁이었죠. 그때 정말 먹고 싶은 것은 고기도 밥도 아닌 물이에요.”
돌까지 씹어먹는다는 20대 중반, 눈앞에 펼쳐진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24시간 코치가 붙어 있진 못하잖아요. 그럴 때 페트병에 우유나 콜라를 넣어서 향만 느끼자 하고 입에 가져다 대요. 그러면 그게 자제가 되겠어요? 막 먹어버리는 거죠.(웃음) 신기한 게 먹은 만큼 체중계 바늘도 움직이는데 그럼 코치한테 바로 들켜서 혼났죠.”
1차와 2차 계체량 측정에서 모두 통과하지 못하면 챔피언은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논타이들전 같은 경우엔 핸디캡이 주어지기 때문에 계체량은 매우 중요하다.
“체중 감량이 힘들어서 중간에 도망친 적이 있어요. 한국 타이틀 매치를 앞두고 잠적한 사건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그래선 안 될 짓이었죠. 한편으론 제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복싱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고요. 그 사건으로 제가 유일하게 못해본 게 한국 챔피언이에요.”
‘작은 들소’ 유명우 vs ‘짱구’ 장정구
인터넷 포털에 유명우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장정구 선수가 뜬다. ‘마징가 Z vs 로봇 태권V, 사자 vs 호랑이’처럼 복싱 팬이라면 1980년대 쌍두마차를 이룬 유명우와 장정구 둘의 대결을 꽤나 손꼽아 기다린 듯하다. 아쉽게도 장정구가 은퇴할 때까지 경기가 성사되지 않아 둘의 대결은 머릿속으로만 상상할 수 있다.
“제 경기는 MBC, 장정구 선배는 KBS에서 중계했어요. 이때 누가 중계권을 가져갈 것이냐의 문제도 있었죠. 협회 입장에서도 두 챔피언이 붙으면 한 명의 챔피언을 잃게 되니까 하지 말자는 말도 있었고요. 붙었다면 아마 제가 졌을 것 같아요.(웃음)”
2017년 3월 1일, 3·1절을 기념해 독도 사랑을 일깨우고 비인기 종목으로 전락한 권투를 되살려보자는 취지로 유명우, 장정구의 대결이 독도에서 열리는 듯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일본 복싱 관계자들에게서 연락이 오더라고요. 분쟁 지역에서 그러면 안 되지 않냐, 진행하면 교류는 끝이다. 이런 식으로요. 사실 저야 상관 안 하지만 후배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포기했죠. 참 안타까워요.”
복싱 사랑은 여전했다. 다시 태어나도 복싱을 하겠다는 그는 현재 자신의 별명을 딴 ‘버팔로 체육관’과 ‘버팔로 프로모션’을 운영 중이다. 새로운 한국 챔피언을 육성하는 게 목표라 한다.
“요즘엔 체육관에 올인하고 있어요. 저보다 훌륭한 챔피언을 꼭 배출해내야죠!”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정유재란은 ‘노예 전쟁’이었다. 조선인 노예가 큰돈이 된다는 말에 혹한 일본인 중개상과 외국인 노예 상인들이 일찍이 노예사냥에 나섰다. 왜장들도 되도록 많은 포로를 붙잡아 돌아가서 노비로 종으로 부릴 욕심에 눈이 멀었다. 징병, 징용으로 일손을 잃어 피폐해진 농어촌이 제대로 돌아가게 할 보충 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유재란은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린다. 우수한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 꽃을 피운 도자기 문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쓰마 야키(薩摩燒) 같은 일본의 세계적 도자기 브랜드들은 예외 없이 조선에서 붙잡혀간 도공들을 시조로 하고 있지 않은가.
기술자 쟁탈전이기도 했다. 문화적으로 조선에 뒤졌던 일본은 각종 기술자와 의원, 제약사, 목공, 기와공, 미장공, 직조공, 철장, 야장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 해당 분야에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서울의 주자소에 있던 활자와 인쇄 기계를 약탈하고, 인쇄공을 납치해 인쇄 문화에 첫걸음을 뗀 일이 대표적 사례다. 그때 약탈해간 주자소 활자는 지금 도쿄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정유재란은 또한 ‘각시 전쟁’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여성을 일컬은 ‘가쿠세이’를 찾으려고 왜장들이 눈에 불을 켰다. 당시 야마구치 지방에 유통되었던 일조회화사전에 “고분 가쿠세이 더불어 오라”는 조선말이 미녀를 데리고 오라는 말이라고 해석돼 있다. 이 말은 출진장병을 보내는 인사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잡혀간 규수 중 영주의 첩이 된 사람도 있다. 최고 권력자 수청 들기를 거부하다가 태평양 외딴섬에 유폐되어 죽은 오타 줄리아도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다.
도망쳐 갈 때 빈 배로 항해하기가 위험하다고 선창을 채울 목적으로 양민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기도 했다. 임진·정유 양란(兩亂) 7년간 조선에 붙잡혀간 사람은 대체 얼마나 될까? 왜군이 오래 농성했던 경남 해안 지방과 호남 지방에 피해가 극심했지만, 그 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길이 없다. 전쟁 수행이 급했던 피해국 조선은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고, 일본은 각 지방 영주와 그 휘하 장수들의 개별적인 행위여서 조사도 통계도 불가능했다.
일본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2만~3만 명 또는 5만 명까지 보는 학자가 있다. 국내에서는 적게는 5만 명, 많게는 10만 명으로 보는데 최근에는 10만 명이 넘으리라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 근거의 하나는 사쓰마(薩摩·가고시마) 지역에만 3만700여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는 증언 등, 귀환자들이 남긴 글과 단편적인 일본 측 기록들이다.
경상도 사복(司僕·궁중 수레와 말을 관장하는 관직) 정신도(鄭信道)는 귀환포로 출신 전이생(全以生)의 증언을 인용해 가고시마 3만700명 조선인 거주설을 상소문에 인용했다. 광해군 9년 4월 계축일 ‘광해군일기’에 인용된 이 상소문은 광해군 시대가 되도록 피랍인 수조차 파악되지 않고 미귀환자가 많았던 실상을 보여주는 실록이다.
17세기 초 나가사키(長崎) 히라도(平戶) 지역 조선인 분포를 보여주는 자료(平戶町人數改帳)에는 당시 호수(戶數)로 27%, 인원수로는 11%의 조선인이 히라도에 거주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때 나가사키 지역에는 2300명의 기독교인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규슈의 한 지역에만 그렇게 많은 조선인 포로가 있었다면 일본 전국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끌려갔을까 하는 짐작이 가능하다.
일본 유학의 스승으로 불리는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에는 “전후(정유재란 이후) 이요슈(伊豫州) 오쓰(大津) 지방에 잡혀온 사람이 무려 1000여 명인데, 이들은 밤낮으로 마을 거리에서 떼 지어 울고 있으며, 먼저 잡혀온 사람들은 반쯤 왜인에 귀화하여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는 견문기록이 있다.
귀환포로 정희득(鄭希得)은 포로생활수기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에서 “신이 이르러 보니 우리나라 남녀로서 전후에 잡혀간 자가 아와슈(阿波州) 이야마(猪山)에만 무려 1000여 명인데, 모두 왜졸 하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유재란 포로가 임란 초기 포로의 10배가 넘는다는 견문도 기록으로 남겼다.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가 예수회 총장 신부에게 보낸 글에도 나온다. “이곳 나가사키에는 남자뿐 아니라 많은 여자와 어린아이도 포함된 조선인 포로들이 (기독교)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수는 1300여 명입니다.”
이들이 잡혀가는 모습도 생생한 기록으로 남았다. 마치 개돼지처럼 끌려가는 참상이 저들의 손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에서 수많은 (노예)상인이 왔는데, 그중에는 인신 매매자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포로를 사들여 새끼줄로 목을 줄줄이 엮어 묶은 후 빨리 걸으라고 몰아쳤다. 혹 꾸물대거나 발을 절면 몽둥이로 내리치며 몰아댔다. 그 모습이 마치 지옥의 무서운 귀신이 죄인을 다루는 것이 저럴까 싶었다. 마치 원숭이를 엮어 묶듯 해서는 우마를 끌고 짐을 지고 가도록 볶아대는 것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정유재란 종군 왜승 게이넨(慶念)의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 11월 9일자 일기 내용이다. 급거 귀국하려고 부산에 모여든 여러 부대 무장들에게서 조선인 양민 포로를 노예로 사들여 끌고 가는 정황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궁금증에는 기록으로 전해져오는 성공 스토리 말고는 대개가 고난과 순응으로 한평생을 마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통탄할 일은 그들 중 일부 젊은이가 왜병이 되어 정유재란 때 조국에 총을 쏜 일이다.
“임진 계사년에 어린아이로 잡혀가 장성하여 정용하고 강하기가 왜놈보다 나은 젊은이들이 정유년 재침 때 적을 따라간 자가 무척 많지만 본국으로 도망쳐온 자는 적고 적국으로 돌아간 자가 많았습니다. 신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미 고국에 돌아갔으면 도망쳐 숨기가 쉬운데 다시 적국에 돌아왔으니 이것이 차마 할 짓인가?’ 했더니 ‘우리들이 약속을 맺고 빠져 달아나면 우리나라 복병들이 보고 쫓아오는데 우리는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사람들이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쳐도 더욱 빨리 달려오니 부득이 왜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우리 군사들이 수급을 바쳐 공을 세우려는 생각 때문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오.”
정희득의 ‘월봉해상록’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전쟁의 비극만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애달프다. 그의 가족사는 애달픔을 넘어 비극의 중첩이었다. 남원성이 떨어진 뒤 왜적이 함평으로 들이닥치자 정희득 일가는 급히 배를 구해 바다로 나갔다. 영광 칠산도 바다에서 적선과 조우하자 어머니는 “왜적에게 더러운 꼴을 당하느니 깨끗한 몸으로 죽겠다”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내와 형수, 누이동생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졌다.
남자들은 결박당하여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방도가 없었다. 함께 묶였던 일가 정절은 그렇지 않았다. 큰 소리로 왜적의 무도함을 꾸짖었다. 왜적이 그의 오른팔을 잘랐다. 그래도 멈추지 않아 왼팔마저 잘렸다. 저항하지 않은 정희득 형제는 일본으로 끌려갔다.
강항의 가족사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시기 같은 해역에서 왜적을 만난 강항 일가 여인들도 바다로 투신했다. 그러나 썰물 때라서 왜적의 갈고리에 건져 올려졌지만 두 아이는 물결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눈앞에서 어린 자식이 죽는 것을 뻔히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족과 헤어진 강항의 한이 조용필의 노래 ‘간양록’이 되었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로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허야 허야 허야 허야 어허허
허야 허야 허야 허야 어허허
노랫말과 곡조, 그리고 조용필의 목소리가 아무리 애달파도 어찌 그 한과 고통을 다 담으리! 이 노랫말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포로로 잡혀 끌려갔던 전라좌병영 우후 이엽(李曄)이 탈출을 시도할 때 썼다는 시에서 애절한 대목만 발췌한 것이다. 이엽의 시는 “삼한의 피를 받아 굵어진 이 뼈, 어찌타 짐승 놈들과 섞일 수 있으리(盡是三韓候閥骨 安能略城混牛羊)”로 끝난다. 그는 탈출에 실패하게 되자 “또 잡히느니 차라리 죽으리라” 하고 배에서 칼을 물고 바닷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다.
강항의 기개도 이에 못지않았다. 히데요시가 죽어 묘에 만금전이 세워지고 그 문루에 일세의 호걸로 떠받드는 글이 오르자 구경 갔던 그는 붓으로 그 글귀를 쭉쭉 그어버리고, 그 옆에 이렇게 써놓았다고 ‘간양록’에 썼다. “반생 동안 한 일이 흙 한 줌인데 십층금전은 울룩불룩 누구를 속이자는 거냐! 총알이 또한 남의 손에 쥐어지는 날 푸른 언덕 뒤엎고 내닫는 것쯤이야!(半生經營土一盃 十層金殿謾崔 彈丸亦落他人手 河事靑丘捲土來)”
굽히지 않는 절의와 의지를 가졌던 강항이나 정희득은 우여곡절 끝에 환국의 행운을 누렸지만 거개의 포로들은 이름 모를 땅에서 불귀의 고혼이 되고 말았다. 이탈리아 사제 카를레티(Carleti)가 남긴 ‘나의 세계일주기’에 외국인 노예상들에게 팔아넘겨지는 정경이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이 나라(Corea)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녀노소가 노예로 잡혀왔다. 그중에는 보기 딱할 만큼 불쌍한 어린이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주 헐값에 매매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도 12큐스티를 내고 5명을 샀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 인도 고야에 데려가 자유의 몸으로 놓아주었다. 그중 한 사람만은 플로렌스로 데려갔는데, 그는 지금 로마에 살고 있다. 그는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일보 김성우 특파원은 1979년 로마 현지 취재를 통해 안토니오의 선조가 한국인이었음을 밝혀냈었다.
노예로 팔린 사람들은 대개 마닐라, 홍콩, 마카오, 고야 등지를 경유해 아시아 지역의 유럽제국 식민지로 팔려가 사탕수수밭 바나나농장 등에서 혹독한 중노동에 시달렸다. 유럽으로 팔려가기도 했다. 외국인 노예 상인 거개가 포르투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규슈 곳곳에 지금도 당인정(唐人町) 또는 고려정(高麗町)이라는 마을 이름이 남아 있는 것도 조선인 포로가 그만큼 많았다는 반증이다. 당인정이란 글자 뜻으로는 중국인 거주 지역으로 이해되기 쉽지만, 그런 곳은 소수이고 거개는 조선 포로 집단 거주지였다. 일본 사람들은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대륙을 동경한 나머지, 한반도나 중국을 ‘가라’라고 했다. 한(韓)도 가라요, 당(唐)도 가라로 읽는 것이 그 증거다.
당인정 또는 고려정이 있는 곳은 규슈의 크고 작은 도시 대다수로 보아도 좋다. 한반도와의 교통이 편리한 혼슈의 야마구치(山口) 현과 오카야마(岡山) 현, 시코쿠(四國) 등 서일본 지역 여러 도시에도 분포돼 있다.
그렇게 많이 붙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려는 조정의 노력은 한없이 굼뜨고 무책임하기만 했다. 포로쇄환은 정유재란이 끝나고도 7년이 지난 1605년이었다. 강화사로 갔던 사명대사 유정(惟政)은 새 권력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3000명의 쇄환 약속을 받아냈지만 실제로 데리고 돌아온 이는 훨씬 적었다. 1607년 회답사 겸 쇄환사로 갔던 여우길(呂祐吉)과 경섬(慶暹)이 그중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인원은 남녀 합쳐 1418명에 불과했다. 그 뒤로는 점차 감소해 1643년 쇄환사((刷還使) 때는 겨우 14명에 그쳤고, 그 뒤로는 흐지부지되었다. 수십 년 노력의 성과는 70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토록 성과가 부진한 이유는 첫째 일본이 빼돌리고 감춘 탓이고, 둘째는 일본 사회에 녹아든 사람들이 돌아가기를 망설인 탓이었다. 경섬의 보고서에는 “우리 일행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일본 지방관들이 피로인(被虜人)을 모조리 숨겨놓고 거짓으로 찾아내는 체만 하니, 장부에 있는 조선인 수와 실제 수가 달라 통분했다”고 썼다.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단념시키려는 심리전도 있었다. 이경직(李景稷)의 ‘부상록(扶桑錄)’에는 “쇄환된 자는 죽이거나 절해고도에 보내며, 또 사신이 각자 불러 모았다가 바다를 건너가서는 자신의 종으로 만들어 부려먹는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 소문에 현혹된 사람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어렵게 이룬 안정의 보금자리를 떠나기 싫은 사람이 다수였다.
일본인의 종이 되었거나 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나름대로 노력의 대가를 받는 생활에 그런대로 적응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어려서 잡혀간 사람들이 동화가 빨랐다.
지금 일본에서 조선 포로들의 자취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월봉해상록’에 “지나치는 사람의 반이 조선 포로들”이라던 나고야 성터 거리는 너무 조용하기만 했다. 그 많던 영주들의 진영 건물과 상업시설 주거시설 등은 간데없고, 찾는 이조차 뜸한 어촌마을이 되었다.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로 40분을 달려 찾아간 요부코(呼子) 항에는 출어하는 배도 귀항하는 배도 안 보였다. 아침 일찍 귀항해 어획물을 부리고 출어를 준비하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부두 옆에 선 아침시장[朝市]만이 오전 10시인데도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후쿠오카 당인정은 시내 한가운데 있다. 지하철 오호리(大濠) 공원역에서 세 번째가 도진마치(唐人町)역이다. 역사를 빠져나오면 바로 도진마치 시장. 제법 큰 규모의 시장이라서 낮 시간에도 손님들로 붐볐다.
사가(佐賀) 시 당인정도 시내 중심가에 있다. 사가역을 빠져나와 일직선으로 뻗은 큰길에 도진마치 버스 정류장 팻말이 붙었고, 큰길가에 ‘도진마치 유래’ 안내판이 서 있다. “1591년 사가에 정착한 이종환(李宗歡)이 히데요시 조선 출병 당시 통사원(통역원)으로 종군, 도공들 ‘초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99년 영주 나베시마가 데려온 고려인들을 이곳에 모여 살게 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가 왜에 협력해 귀국하지 못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어 입맛이 더욱 개운치 않았다.
시골에 내려가 살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시골에 거처를 마련할 실력이 여의치 않은가? 빈손인가? 걱정 마시라. 찾다 보면 뾰족한 수가 생긴다. 일테면, 재각(齋閣)지기로 들어앉으면 된다. 전국 도처에 산재하는 재실, 재각, 고택의 대부분이 비어 있다. 임대료도 의무적 노역도 거의 없는 조건으로 입주할 수 있다. 물론 소정의 면접은 치러야겠지만 당신이 남파된 간첩이 아닌 한 딱지맞을 일은 없다. 폐교를 빌려 쓰는 방법도 고려할 만하다.
서양화가 원덕식(46)씨는 산골 폐교를 빌려 살고 있다. 귀촌한 지 어언 6년이 지났다. 그녀 곁엔 동화작가 노정옥(49)씨가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이들은 서울에서 뜨거운 연애를 하다 부부 사이로 발전했다. 결혼식은 이곳 폐교 운동장에서 치렀다지. 귀촌의 첫 장을 혼례로 기록한 셈이다.
원씨 내외는 별반 손에 쥔 것이 없는 채로 산골에 들어왔다. 맨몸으로 신접을 차렸다. 온몸을 다해 귀촌 초기를 개척했다. 수천 평 부지에 들어앉은 낡은 폐교를 부부 단둘이 덤벼들어 단장을 하길 날마다 반복했다. 첫해 엄동엔 난방이 안 돼 냉장고보다 찬 사택에서 덜덜 떨며 밤잠을 자야 했다. 살을 에는 추위를 덜기 위해 방 안에 텐트를 치고 선잠을 잤다는 게 아닌가. 도깨비 나올 듯 뒤숭숭한 교사를 고치고 때우고 꾸미고 칠하는 일도 고스란히 부부의 몫이었다. 강철 같은 기세로 운동장을 뒤덮고 우르르 들솟는 풀들을 뽑는 일은 신역이 자심한 반면 좀체 표가 나질 않더란다. 이래저래 고역에 고난에 고심이 첩첩 겹쳤겠지. 신혼의 달콤한 훈김이 시련을 덜어줬을 법하지만,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 추사도 아닌 것을, 어쩌자고 으스스한 폐교에 둥지를 틀었단 말인가? 원씨의 얘길 들어볼까.
“시골생활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처음엔 많이 염려했어요. 과연 잘 살 수 있을지, 견뎌낼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많았죠. 하지만 그런 근심에 사로잡힐 겨를조차 없이 온갖 일에 매달려야 했어요.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시설을 고치거나 운동장의 풀을 뽑아내는 일들이 화급했으니까. 몸으로 부닥쳐야만 하는 그런 일들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그러나 잘 견디며 지내왔어요. 남들이 보기엔 무모하거나 철없는 귀촌일 수 있겠지만 저희에겐 뚜렷한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폐교의 너른 교실 공간을 손질해 미술 작업실로 쓰자, 그것으로 작품에만 매진할 여건을 조성하자는 게 귀촌 동기였거든요.”
글쟁이에겐 골방에 컴퓨터 하나면 그만이지만, 화업(畫業)엔 널찍한 공간 확보가 필수다. 서울의 임대료는 비싸다. 화가들이 그래서 흔히들 교외나 시골에 작업실을 마련한다. 폐교를 임대해 활용하는 이들도 많지만, 수년 안짝에 철수하는 사례도 흔하다. 원씨 내외도 초기 한때엔 서울로 되돌아가는 문제를 놓고 갈등을 했더란다. 주거 환경이 너무도 열악하고, 덩치 큰 폐교의 안팎을 보수하는 일이 버거워서였다. 그러나 서서히 자리가 잡혀 이젠 정착에 이르렀다.
부부는 미친 듯이 창작에 진력할 작정이었다. 남편은 글을 쓰고, 아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치열하게 하자는 게 귀촌의 목적이자 초야에 건 약속이었던 것. 그러나 다소 길이 달라졌다. 마을 주민들을 끌어들인 ‘생활문화공동체사업’을 펼쳤다. 관이 행하는 마을 사업 공모전에 응모,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서부터였다. 부부는 마을 안길에 미술 조형물을 설치했다. 교사 안에 소규모의 농업박물관도 개설했다. 주력 사업은 주민들에게 그림 그리기나 시 쓰기, 도자기 만들기 같은 걸 가르쳐 전시회를 여는 일이다. 반응도 성과도 좋았다지.
소외된 촌로들을 공방으로 끌어들이다
주민의 대다수는 노인들. 평생을 두더지처럼 땅을 파며 살아온 농부들. 그들에게 글과 그림이란 생판 생소한 딴 세상의 물건이기 십상이다. 실상이 그렇지만 노인들은 손수 만든 작품으로 전시회까지 여러 차례 흐뭇하게 치렀다. 도시에 번성한 문화 예술은 좀체 시골에 손을 내밀지 않는다. 원씨 부부의 행장은 이 점에서 가상하다. 소외된 촌로들의 고즈넉한 삶을, 파묻힌 기층문화를 수면 위로 돋우는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눈여길 건 노인들을 모아들인 원씨 부부의 출중한 사교 능력. 그들은 배타적이거나 고독한 노인들을 폐교의 공방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였다.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시골 어머니들의 삶은 참 고달파요. 겨울 한철을 빼곤 늘 농사일에 매여 살죠. 새벽에 들에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귀가하는 일상을 지켜보면 안쓰러워요. 얼굴엔 주름투성이이고, 손발은 갈퀴처럼 거칠고, 벌레에 물린 자국으로 온몸이 얼룩지고, 그러면서도 강인하고 씩씩하고요, 가슴 찡해지는 모습이죠. 그런 어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자주 접촉하고 수시로 스킨십을 하고 그랬어요. 애교도 부리고, 장난도 치고, 옥희씨! 순자씨! 그렇게 이름도 불러드렸고요. 스스럼없이 다가가 다정한 관계를 맺었어요.”
“예술을 한다고 외돌아 앉아 오불관언식 처세를 했다면 미운털이 박혀도 야무지게 박혔겠죠? 이웃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만 참하게 잘해도 기특하다는 평이 돌아오는 게 시골이죠. 툭하면 벌어지는 마을 술판에서의 호출에도 가급적 득달같이 달려가는 게 현명한 처신이고 말이죠.”
“술자리 참석은 남편의 전공 분야입니다(웃음). 마을의 갖가지 경조사에도 부지런히 찾아다녔어요. 내 부모 대하듯 어르신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존중하는 버릇도 남편의 처신에 배었죠. 괜한 참견이나 잔소리에도 토를 달기는커녕 고맙게 받아들였어요. 덕분에 소통이 쉬웠던 것 같아요. 음, 복된 관계랄까, 일찌감치 저희는 자식처럼 따뜻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이런 정황 하에 마을공동체사업을 원활하게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시골의 부당한 텃세를 운운하지만 저희는 그런 조짐조차 느끼질 못하고 지냈어요. 텃세란 귀촌자의 처신 여하에 달린 문제이지 않겠어요?”
“세태란 야박해서 내 안의 이기적 유전자를 발동하지 않고선 남에게 당하거나 밀리기 십상이죠. 날이면 날마나 피 튀기는 복싱이 벌어지는 게 서울이라는 사각 링일 뿐일까? 시골의 풍정은 안도해도 좋을 만큼 평온한 거예요?”
“도시의 인간관계란 대체로 메마른 계산 중심으로 흘러요. 시골은 좀 달랐어요. 그 머릿속에 계산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시골 할머니들의 태도엔 순응이랄까, 순수랄까, 그런 기본 정서가 농후하게 서려 있어요. 그러나 내면엔 아픔, 슬픔, 상처가 가득 고여 있죠. 개인의 꿈은 접고, 고단한 시골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억지로 살아온 한평생에 관한 한(恨)! 할머니들의 이 억압된 꿈과 깊은 한을 주제로 한 그림 작업, 요즘 저는 거기에 몰두하고 있어요.”
원씨는 알아주는 눈들이 많은 화가는 아니다. 주변의 촉망을 한 몸에 받는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죽을 여자도 아니렷다. 그림을 평생의 본분사로 삼았으니 말이다. 그녀가 진정 남김없이 열정과 깡을 다해 작업에 임하는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 일이겠지만, 미술을 위해 귀촌을 결행했으니 그녀 내부엔 나름 큼직한 사이즈의 포부가 들어 있을 테지. 최근엔 해외 아트페어에서 할머니들의 고달픈 노년에 서럽게 잔존하는 여성성을 주제로 한 작품 몇 점이 팔려나가기도 했다. 그녀는 이를 의미심장한 신호로 읽는다. 비로소 작풍의 방향을 찾았다는 안도감에서다. 아울러 이를 귀촌의 선물로 간주한다. 마을 할머니들과의 애정에 찬 교제의 산물로 여긴다.
상처에서도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자연으로부터도 많은 걸 얻었다. 다채로운 걸 느끼고 배우고 담았다. 자연이란 흔연한 사랑을 닮아 조건 없이 준다. 수업료를 받지 않고 강좌를 펼치며 음성을 내지 않고도 메시지를 전달한다. 산봉우리에 오르면 그 높음을 배울 수 있으며, 물길을 만나면 그 맑음을 배울 수 있다. 소나무에서는 그 푸름을, 달에서는 그 밝음을 배울 수 있다. 한적한 시골의 삶에도 남모를 부침이 있고 일희일비가 교차하는 법. 갈등과 괴로움 없이 삶을 건널 수 있던가. 마음이 쑥대밭처럼 뒤엉킬 때면 원씨는 자연 풍경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게 자연의 품에 안겨 살아가는 귀촌 생활자의 특권이라는 것.
“사람을 보듬어주는 자연을 느끼며 살아가는 게 만족스러워요. 도시에선 좀체 만나기 어려운 새소리, 물소리, 달과 별, 숲과 적막, 이런 것들이 들끓던 고민들을 순식간에 잊게 해주는 거예요. 작업이나 일로 힘들었던 하루가 저문 깜깜한 밤에 운동장에 나가면 허공에 모인 별들이 빛을 뿜어요. 초롱초롱 빛나는 그 별들을 바라보면 저절로 피로가 가시고 근심이 달아나요. 남편과 다투고 난 뒤의 상심도 씻겨나가죠.”
“자주 다투세요? 이는 우문이리. 밑바닥까지 드러난 감정 충돌이 잦은 게 부부 사이라서. 결혼 자체가 짐이나 멍에일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왜들 결혼을 할까(웃음).”
“소소한 다툼이 생기곤 해요. 이건 어쩌면 긍정할 만한 기회이기도 해요. 서로 간에 미처 몰랐던 상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오해에서 벗어나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찬스이기도 하고요.”
고적한 시골에서 날마다 24시간 부부가 붙어 사는 삶엔 창작만큼이나 각별한 재능이나 내공이 요구될 수도 있겠지. 사람이란 천성적으로 ‘삐딱이’가 아니던가. 본능의 밑뿌리인 에고이즘과 ‘귀차니즘’이 불러들이는 불협화음으로 소소한 상처를 주고받는 게 부부 사이 아니던가. 그러나 상처도 인간 내부의 자연이다. 상처에서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허황한 욕망과 소비 중심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에서 살았다면 부부 관계가 한결 단조로웠을 것 같아요. 귀촌 덕분에 남편의 내면을 더욱 깊이 있게, 또는 성숙한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죠. 남편은 섬세하고 다정해요. 욱하는 성질은 좀 있지만 독한 게 없어요. 요리도 잘하고, 늘 내 편이라는 게 고맙고 좋아요. 자연이 주는 안정감 같은 걸 남편에게서 느낍니다.”
“두 분, 가진 것 없이 귀촌을 해 온몸을 쓰는 노역으로 폐교를 가꿔 활달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소박하고 간소한 살림, 수굿한 태도, 긍정심, 이런 것들이 보기에 좋아요. 소유에 대한 예찬과 경쟁이 극에 달한 이 세속에서 그렇게 순하게 살기란 쉬운 게 아니라서.”
“틀에 박히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삶,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게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걸 귀촌을 통해 확인하고 있지요. 점점 더 미니멀한 삶으로 가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줄어들고 있어요. 훗날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여러모로 여전히 불편하고 어려운 점들이 많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이행하는 이 과정엔 회의가 없습니다.”
원씨의 언어는 정밀하거나 기민한 맛을 결여한 대신 유연하고 온순해 평화롭다. 아둔한 나의 머리엔 잡념이 술렁인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과연 실현 가능할까, 불가능할까.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이기나 할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취미(趣味)란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얻기 위해 좋아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필자는 10대 때부터 지금 60대에 이르기까지 바둑을 취미로 삼고 살아왔다.
바둑을 두는 환경은 인터넷이 들어오면서 급격하게 바뀌었다, 예전에는 상대할 사람이 있어야 하고 도구로 바둑판과 바둑돌이 있어야 했다. 지금은 인터넷에 접속만 하면 바둑 둘 상대가 사방 천지에 널려 있다. 심지어 바다 건너 일본 선수 또는 중국 선수하고도 둔다. 말이 필요 없기 때문에 외국어 능력도 필요 없다. 바둑돌과 바둑판은 컴퓨터 화면에 다 있다. 이기고 지는 계가(計家)도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자동으로 계산된다. 다시 돌아보는 복기는 물론 전적과 과거 승패 기록도 고스란히 보관된다.
바둑 취미의 장점은 돈이 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치매에 걸리지 않고 천수를 누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역사상 최초의 바둑책인 를 쓴 반고(班固)는 “우주 대자연의 음양원리를 원용한 바둑은 상대성을 추구하는 놀이다. 이를 즐기며 체득하는 동안 인간은 우주원리에 순응하는 법을 알게 되고 그로서 수명을 늘려 장수할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필자는 해결책이 없어 짜증이 날 때나 엉뚱하게 오해를 받아 속이 상해 있을 때 바둑을 둔다. 또 원인 모르게 기분이 울적해져 혼자 있고 싶을 때도 바둑이 생각나고 구미가 당긴다. 혼자서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해 바둑 방을 두드리면 비슷한 기력(碁力)의 상대가 덤벼든다. 이제부터 무아지경에 빠지는 바둑판에서 두뇌전쟁이 시작된다.
바둑은 흑백의 돌이 목숨을 걸고 서로 많은 집을 차지하려는 싸움이다. 싸움판은 급박하게 돌아간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도록 몰입을 강요한다. 조금 전까지 우울하던 마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물고 물리고 죽고 죽이는 바둑돌의 싸움에 정신은 통일되고 손에는 땀이 난다. 바둑이 끝나면 피곤하지만 마음은 평온을 되찾는다. 이런저런 일로 울적했던 기분들이 리셋되어 평온해진다. 잡념들이 사라져 다른 일을 해도 손에 잡힌다. 이 맛에 바둑을 둔다. 글을 쓰다가 콱 막힐 때, 기계를 수리하다가 고쳐지지 않을 때, 하던 일을 멈추고 인터넷 바둑을 둔다. 바둑을 두면 머리가 깨끗하게 포맷된다.
“바둑돌 죽지 사람 죽나”
필자는 고등학교 때 형님으로부터 바둑을 배웠다. 형님의 기력도 보잘것없는 6~7급의 수준이었지만 초보자인 필자를 골려주기 위해 툭하면 바둑을 두자고 졸랐다. 형님을 꺾기 위해 바둑이론을 공부하고 바둑 월간잡지도 뒤적였다. 군대에 입대할 때는 3급 정도의 기력이 되어 일병이 하늘같은 대대장인 육군 중령과 바둑을 뒀다. 가끔은 대대장 관사에 호출되어갔다. 대대장과 바둑을 두는 필자를 고참 들은 못마땅해 했지만 감히 때리지는 못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바둑을 좋아하는 상사를 만났다. 그런데 이분은 너무 승부욕이 강해 반칙을 하곤 했다. 불리하면 바둑돌을 놓을 때 소매로 이미 놓인 바둑돌의 위치를 슬그머니 밀어서 이동시켰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내 말을 죽게도 만들고 죽어 있는 상사의 바둑돌은 살리기도 했다. 나이와 직급이 있어서 항의하거나 싸울 수도 없었다. 그때 필자의 명언이 탄생했다. 바로 “바둑돌 죽지 사람 죽나”였다. 감사 실장하고도 바둑을 두면서 불합리한 제도로 억울한 처벌 위기에 있는 동료 직원들을 많이 변호해줬다.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장기판의 말은 차, 포, 마처럼 계급 같은 중량감이 있고 가는 길도 다르다. 하지만 바둑은 평등하여 361점 어디에도 비어 있으면 놓을 수가 있다. 하지만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정수도 되고 꼼수도 되며 군사의 매복처럼 암수도 되고 스스로를 옭아매는 자충수도 된다. 아무리 큰 대마라도 두 집을 못 지으면 미생이 되고 두 집을 지어야 완생이 된다. 적을 공격하기 전에 내 말의 안위를 먼저 살펴야 한다. 혼자 떠도는 말은 죽기 십상이다. 아군끼리 연락 체계를 유지해야 안전하고 적을 공격할 때 힘을 발휘한다. 인생도 똑같다.
바둑에 임하는 자세와 작전 요령을 밝히는 열 가지 요령을 위기십결(圍棋十訣)이라고 하는데 모두가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주옥같은 말이다. 그 첫 번째가 부득탐승(不得貪勝)으로 승리를 탐하면 이길 수가 없다고 한다. 인생에 있어서도 눈앞의 사리사욕을 탐하다 감옥에 가는 사람도 있다. 열 번째가 세고취화(勢孤取和)로 고립되었을 때는 화평을 취하라는 말이다. 인생도 더불어 살아야지 왕따로는 결코 행복하게 살 수 없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도 이런 말은 마음속에 크게 간직해야 할 명언 중에 명언이다.
반드시 상대할 사람이 눈앞에 있어야 대국이 가능했던 예전에는 수많은 동호회가 있었지만 요즘은 인터넷 바둑에 접속만 하면 되므로 동호회는 거의 사라졌다. 직장에서도 바로 옆 사람하고 오프라인에서 두지 않고 인터넷에 접속하여 바둑을 둔다. 그 많던 바둑판과 바둑돌도 사라지고 도심의 기원도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었다.
바둑을 잘 두려면 바둑교실, 바둑 서적, 바둑전문채널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그러나 바둑으로 생업을 유지하려는 프로가 아니라면 너무 실력 향상에 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다. 바둑 실력이 하수라면 비슷한 하수끼리 두면서 즐기면 된다. 조급해하거나 승패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고 즐겁게 바둑을 두면 된다.
취미는 중독을 경계해야 한다. 도박, 마약, 스포츠, 섹스, 음주와 같이 바둑도 중독성이 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말처럼 취미에 너무 탐닉하면 건강을 해치거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기도 한다. 밤을 새면서 바둑을 두거나 돈을 걸고 내기바둑을 두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모든 잡기에는 수준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고수는 오래 배워서 수준이 올랐을 수도 있고 소질이 남달라 빨리 수준을 높였을 수도 있다.
동네 당구 클럽에서도 유유상종이라고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끼리 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수준 차이가 있는 사람들과도 칠 기회도 생긴다. 그러면 고점자들은 일단 꺼려한다. 하점자들과 쳐 봐야 배울 것도 없고 하점자가 너무 못 치니까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이겨야 본전이고 지면 기분 나쁘다. 소위 ‘물’이라 하여 하점자에게 잡혔다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고수는 하점자와 칠 때 최선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질 수도 있다. 이론적으로는 원래 자기 점수대로 놓고 치는 것이므로 이기고 지는 확률은 같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수가 이기는 확률이 더 높은 것이다.
고점자와 치게 되면 배울 점이 확실히 있다. 지더라도 그것을 익힐 수 있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승패에서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이다. 고수와 칠 때는 지는 경우가 많다. 고수를 이겼을 경우는 또 기분이 괜찮다.
골프도 그렇다. 못 치는 사람과 같이 하게 되면 못 치는 사람은 공 찾기에 급급하다. 같이 치는데 같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이 치는 것이 아니다. 고수가 잘 친 경우라면 우쭐하기도 하고 칭찬도 받아야 하는데 하수는 잘 친 것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남이 치는 공을 바라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댄스도 그렇다. 기껏 하수를 잡아주는데 하수는 정작 자신이나 비슷한 수준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하수를 잡아주자니 재미도 없고 집중하지 않다보니 스텝이 틀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너나나나 비슷한 수준으로 보는 것이다. 잔소리를 하면 너는 잘 하느냐고 반문한다. 강사나 프로가 아니면 같은 수강생으로 보는 것이다. 자기수준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대우 받으며 하수를 잡아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수는 고수가 상대해 줄 때 예의를 표하는 것이 좋다. 일종의 존경심 표시이다. “배우겠습니다” 한 마디면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어진다. 고수가 멋진 솜씨를 발휘하면 맞장구를 쳐주거나 칭찬을 하는 것이 좋다.
돌아가신 아버님은 말년에 친구가 없어 외롭게 지내셨다. 친구들과 바둑을 두거나 당구라도 치라고 권했다. 그러나 이제 배워봐야 남들은 수준급인데 초보자는 상대를 안 해주니 같이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퇴직한 동생에게도 당구를 권했었다. 그러나 질 때가 많은 하수 시절을 겪기 싫다는 것이었다.
모든 잡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입문하고 나면 초보자 소리를 듣고 어느 정도까지는 ‘하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 고수를 만나면 하수 과정을 빨리 벗어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겸손하면 더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겸손하지 않거나 감정이 무감각하면 고수는 하수를 외면할 수밖에 없다.
18년 전 아내와 이혼하게 되었을 때 아내가 재산분배에 대한 계산서를 내밀었다. 지금 회고해보면, 아내나 필자가 이혼 얘기는 많이 했지만, 실제로 이혼할 생각이 확고했던 것은 아니었다. 졸지에 퇴직을 하게 된 충격으로 필자는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잘못해서 이혼 당할 유책 배우자도 아니니 이혼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내가 얼굴만 보면 이혼 얘기를 꺼내 견디기 어려웠다. 이혼 절차를 밟아도 마지막으로 구청 신고를 하지 않으면 별거를 하다가 재결합의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내민 계산서를 제대로 따지지 않고 서명을 했다.
당시 아내가 내민 계산서에는 우리가 가진 재산이, 동산과 부동산 합해서 5억 원 정도로 되어 있었다. 50평짜리 아파트가 2억5000만원 정도였다. 맞벌이를 했으므로 아내가 축적한 비자금이 상당액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아내는 가진 동산이 한 푼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필자의 동산은 퇴직금과 당시 주식시장에 약간의 여윳돈을 넣고 있던 것까지 합해 2억5000만원으로 계산했다. 그러나 깡통계좌가 속출하던 시절이어서 주식시장에 넣어두었던 돈의 잔존 가치는 별로 없었다. 증권회사 직원의 강권으로 대박이 난다는 텔슨전자 주식을 샀다가 얼마 안 되어 상장 폐지되면서 휴지가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의 계산서에는 투자한 원금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부부가 재산을 반분하면 필자 몫이 2억5000만원인데 아내는 여기서 또 1억원을 떼었다. 왜냐고 물으니 앞으로 있을 아들딸 결혼자금이라는 것이었다. 왜 벌써 떼냐고 물으니 10년 후 아들딸이 결혼할 때 필자가 경제적 여력이 없을 수도 있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면 입장이 달라져 오리발을 내밀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내도 오랜 시간 고민했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충고를 한 모양이었다. 필자는 재결합의 가능성도 열어놓았으므로 다투지 않고 그대로 수락해줬다. 결국 필자에게 남은 돈은 장부가격으로는 1억5000만원이었지만 주식으로 날린 돈 때문에 잔존 가치는 5000만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돈이면 일단 원룸을 전세로 얻을 돈은 되니까 그대로 수락하고 짐을 씨서 나왔다.
독립을 하고 나서 당장 수입이 없어 막막했다. 그래도 아직 젊고 건강했으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스포츠용품 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동대문 지역에 빌붙어 있다 보면 무슨 수가 생길 것 같았다.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 ‘Umbro’ 대표이사를 지냈기 때문에 경력도 있었고 영어가 취약한 업체들이 필자를 필요로 할 거라고 예상했다. 마침 계약 추진 중이던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도 결국 다음 해 성공적으로 따내서 성가를 높이고 있었다. 개인 사업도 바이어 중 하나가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메인 스폰서로 선정되면서 매출이 급증해 승승장구했다. 형제간에 끝없는 갈등을 낳게 했던 아버님 유산도 필자가 나서서 해결하고 공평하게 배분받았다. 그렇게 해서 경제적으로 기사회생하고 겨우 노후 대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0년 후 아들의 결혼 소식을 접했다. 아들은 그동안 엄마와 같이 살았으므로 결혼 준비는 전 아내가 다 했다. 아내는 이혼할 때 떼어줬던 돈으로 오피스텔을 사서 자금을 불렸고 그 돈으로 아들에게 신혼집으로 작은 빌라 전세를 얻어줬다. 그리고 예물이며 결혼식장 계약 등은 전 아내와 아들이 직접 해결했다.
이윽고 아들의 결혼식 날, 아내와 필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정상적인 부부처럼 나란히 서서 하객들을 맞았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그날 온 하객들의 80%는 필자가 부른 손님들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던 전 아내의 직장 동료들 몇 명과 처가 친척들을 빼고는 거의 필자 손님이었다. 직장은 물론 동창모임, 댄스와 커뮤니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사회활동을 한 덕분에 필자의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전 아내나 필자 모두 처음 치러본 결혼식이라 잘 몰랐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전 아내가 결혼식이 끝났는데도 하객 명단을 필자에게 안 주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었다. 아내의 직장 동료들이 접수를 봤고 그대로 아내에게 전달되었으므로 필자는 아는 것이 없었다. 하객들이 누가 왔고 축의금으로 얼마를 냈는지 알아야 인사도 하고 추후 관혼상제가 있을 때 갚아야 할 돈이라 반드시 명부가 필요했다. 필자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내는 우여곡절 끝에 명부를 건넸다. 필자는 그것을 기초로 결혼식장에 와준 하객들에게 직접 인사 또는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데 누구 손님인지를 가려 들어온 축의금을 그대로 나눠야 하는데 아내는 한 푼도 못 내놓겠다고 했다. 그동안 아들에게 들어간 양육비며, 사두었던 오피스텔이 안 올라 신혼집 빌라 전세금 마련하느라 힘들었다는 얘기였다. 이혼 초기에는 필자도 상당히 어려웠다. 밥은 안 굶었지만, 여윳돈이 없어 당장 전세금을 올려달라 하면 대책이 없었던 시절이다. 반면, 전 아내는 살던 집도 있었고 직장도 있었으므로 아이들 양육에 큰 문제가 없었다. 아이들이 크면서 아르바이트를 통해 경제적으로 도움도 주고 있었다. 돈 문제로 다투는 것이 아이들 보기에도 안 좋은 것 같아 포기했으나 섭섭한 마음은 금할 길이 없었다.
덕분에 이제는 아내와의 이혼이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특히 돈 문제에서는 한 푼의 양보도 없는 전 아내의 냉정한 태도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들이 결혼도 했으니 전 아내를 배척할 필요까지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느슨했던 마음이 냉수 마시고 정신 차린 계기가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아들딸 결혼식을 대비해서 미리 돈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아내의 속셈은 신의 한 수였다.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전 아내는 필자를 가능한 한 빈털터리로 내보내면 얼마 안 가 못 버티고 항복하고 다시 들어올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직 딸이 출가 전이다. 제 말로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니 결혼할 의사가 없는 듯하다. 아빠로서 결혼을 강권하고 싶지도 않다.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다. 더구나 제 힘으로 벌어 이미 그럴듯한 아파트 한 채도 사놓았다. 필자가 18년 전에 남긴 결혼 비용 5000만원을 얼마나 불려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큰 아파트로 이사 가는 데 보태라고 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세상에 재테크에 밝은 똑똑한 딸이나 신의 한 수를 두었던 전 아내가 이 방면에 해박하니 알아서 할 일이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일명 ‘웰다잉법’에 따라 8월 4일부터 말기환자에 대한 호스피스가, 내년 2월부터는 임종기 환자의 연명의료 중단이 가능해졌다. 우리 삶의 일부인 ‘죽음’에 대한 법률임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그동안 ‘죽음’과 관련한 책을 출간하고 다양한 강연을 펼쳤던 서울아산병원 유은실(劉殷實·61) 교수는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녀는 최근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데이비드 케슬러의 을 우리말로 옮겼다.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웰다잉법을 이르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올해 8월 4일부터는 말기 암환자에 한해 시행되던 호스피스 서비스가 후천성면역결핍증·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만성간경화 말기 환자에게도 확대됐다.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해석도 중요하겠지만, 유 교수는 그보다 앞서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는 개개인의 마음가짐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 법률이 우리에게 왜 필요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답을 자연스레 찾아가게 될 것이라고. 이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겠지만, 무엇보다 죽음을 가까이하는 의사와 환자를 곁에 둔 가족에게 더욱 중요한 이야기다.
“사실 의사들은 늘 죽음을 가까이하기 때문에 의식하려 하지 않거나 고민할 겨를이 없어요. 또 주변에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이를 돌보는 분들이 읽으면 좋겠더라고요. 막상 자신이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은 이런 책을 읽게 되지 않아요. 오히려 아직 건강한 중장년이나, 환자를 둔 가족이 읽으면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죠.”
웰다잉법 시행, 죽음을 이야기해야 할 때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의미나 영적인 부분을 다루면서도 사전의료의향서 작성 등 우리가 준비해야 할 실질적 항목들을 소개한다. 유 교수는 일단 이러한 책을 사서 보는 것만으로도 죽음 준비의 첫 단추를 꿴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우리 여고 동창 중에는 의사가 꽤 많은 편이에요. 어느 날 그 친구들이 제가 어디서 강의하는 걸 들었는데, 다들 웬만큼 공부도 하고 알만 한데도 막상 자신들이 실천해온 게 없다고 털어놓더라고요. 그만큼 ‘죽음 준비’는 우리에게 낯설죠. 이제 웰다잉법이 시행되면서 여기저기서 강연도 열리고 관련 책도 쏟아져 나올 거예요. 그런 데 참여하고, 책 한 권이라도 찾는 분들은 이미 죽음 준비의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볼 수 있죠.”
은 유 교수의 번역을 통해 올해 국내에서 만났지만, 본래는 미국에서 라는 제목으로 1997년 출간됐다. 그리고 10년 뒤 현재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고, 그로부터 10년 뒤 유 교수가 우리말로 옮기게 된 것이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전의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교훈은 무엇일까? 혹시나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닐지 묻자, 유 교수는 오히려 시점이 잘 맞는다고 답변했다.
“책은 오래됐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 의미 등은 변함없이 통해요. 다만, 미국과 우리나라의 법적, 제도적 환경이 다르죠. 그동안 우리는 죽음에 대해 공론화할 기회가 없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 법이 만들어지고 시행되면서 상황이 바뀌었잖아요.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당시 미국의 모습이 현재 우리 형편에 실질적으로 들어맞는 부분이 있어요.”
유 교수는 무엇보다 법이 시행되면서 병원을 찾는 환자나 보호자가 똑똑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녀가 말하는 ‘똑똑함’이란 의료 행위나 질병 등에 대해 알고 싶은 부분을 의료진과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을 뜻한다.
“완화의료는 무엇인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어떻게 쓰는지, 호스피스 기관에는 어느 단계에서 가는 것인지 등 궁금증이 많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 환자나 보호자들은 이런 문제를 주치의와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더라고요. 왠지 그런 말을 하면 의사가 안 좋아할 것 같다는 등의 이유로 뒤로 딴 사람을 통해 알아보죠. 그런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큰 문제는, 그런 질문을 해도 속 시원히 대답해줄 수 있는 의사나 기관이 몇 안 된다는 거예요. 법 시행 전에 교육을 하고, 뒷받침하는 제도 등이 마련돼야 했는데 그게 이뤄지지 않아 보조를 못 맞추는 실정입니다. 참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죠.”
죽음의 질이 높아야 삶의 질이 높아진다
2010년 영국 가 OECD 40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죽음의 질’ 평가에서 한국은 32위에 머물렀다. 쉽게 말해 죽음의 질이 낮은 편. 그렇다면 죽음의 질이란 무엇일까?
“간단한 예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가 평생 쓸 의료비의 절반을 죽기 전 1년 사이에 쓰고, 그것의 절반 이상을 떠나기 석 달 안에 쓰고 간다고 해요. 대부분의 환자가 치료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이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시점부터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의 과정에서 삶의 질을 죽음의 질이라 말합니다. 그러니, 그때의 삶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죽음의 질이 좌우된다고 볼 수 있어요. 죽음의 질이 높은 나라의 경우를 보면 무의미한 치료보다는 스스로 주변을 정리하면서 더 의미 있게 보내는 편이죠.”
환자가 죽음을 앞두었을 때, 이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는 보호자들이 있다. 혹시 이런 행동이 환자의 죽음의 질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우려스러웠다.
“물론 당장 이야기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의사들도 자기 가족이 그런 상황에 처하면 쉽게 입을 떼지 못하니까요. 그러나 미루지 말고 단계적으로 본인과 신뢰하는 가족, 심지어는 문제가 될 만한 가족과도 사실을 공유해야 합니다. 당사자가 자기 죽음에 대해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존엄한 죽음이 가능해져요. 자기결정권을 행사해서 순간순간 선택해야 할 일이 많은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모든 게 엉켜버리고 말죠. 그러면 한 사람의 죽음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요.”
맞이하는 죽음을 위해 실천할 것들
유 교수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타인이 아닌 환자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전에 가족과 죽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유언장 등을 미리 써두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녀 역시 이러한 준비를 모두 끝내놓은 상태다. 이밖에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런 서류를 당장 어디에 제출하지 않더라도 한번 쓰려고 시도해보면 생각이 많이 달라질 거예요. 저도 죽음학회에서 나온 유언장 샘플을 채우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이게 하루아침에 쓸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깊은 고민과 성찰을 필요로 하죠. 그러니 꼭 죽음이 다가왔을 때보다는 해마다 연말연시나 생일 등 특정일을 정해서 써보면 어떨까 해요. 혹시 병을 앓고 있다면 막연히 치료를 받기보다는, 내가 왜 아프고 무슨 치료를 받고 어떤 약을 먹는지 한번 정리해볼 필요가 있어요. 또 시간을 내서 호스피스기관에서 봉사활동을 해볼 것을 권해요. 그렇게 간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하다 보면 나에게 맞는 실천 사항들이 하나둘씩 생겨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