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교복 자율화 실시로 학생들의 복장이 제각각이지만 우리 때는 그렇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교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껏해야 나팔바지에 생선 등처럼 주름을 세우거나, 목 칼라 주변에 호크 몇 개 더 달아 덜렁거리도록 해서 멋 좀 내는 게 전부였다. 대학생이 돼서야 비로소 교복을 벗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청바지, 티셔츠가 다였다. 심지어 나는 인터넷 검색을 하면 나오는 ‘윤동주 시인’의 복장처럼, 검은 교복 상의를 걸치고 다녔다. 그거 하나만 입으면 뭘 입어야 하나 고민하지 않아도 됐고 비싼 옷을 살 필요도 없었다. 4년 동안 그러고 다니다가 취업을 하니 그때부터 양복이 정복이었다. 수십 년간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다녀야 했다. 넥타이는 정말 싫었다. 휴일에 경조사가 생겨 넥타이를 매야 할 때는 마치 누가 내 목을 끌고 가는 것 같았다. 은퇴를 하면서 넥타이의 압박에서 겨우 풀려났지만 그마저도 영원한 이별은 아니었다.
제2의 인생 설계 후 강의를 하게 됐는데 의무적으로 넥타이를 매지 않아도 됐다.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이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편하게 입고 다니니 자유롭고 젊어 보이기까지 해서 좋았다. 내가 선호하는 건 진한 색깔의 옷들이다. 나이 들수록 밝게 입는 게 좋다고 해서 티셔츠만큼은 다양한 색상을 골라 입는다. 날씨에 따라 가벼운 조끼를 속에 입고 노타이 차림에 재킷을 걸치면 그만이다. 바지는 청바지도 좋고, 상황에 따라 언밸런스한 정장 바지도 잘 어울린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듯싶다. 어떤 옷은 편한 맛은 있지만 체격에 안 어울리고, 어떤 옷은 디자인은 좋은데 얼굴색과 잘 맞지 않는다. 이럴 때는 아내가 옆에서 코디를 해준다. 아내의 패션 감각은 남다르다. 잘 맞춰서 골라주는 옷을 입으면 실패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사실 내가 좋아하게 된 패션도 아내가 추천한 옷이다. 그 옷을 자주 입다 보니 이제는 내 전용 패션이 됐다. 패션 감각으로 따지면 나는 거의 문외한이다. 계절이 바뀔 때가 제일 부담스럽다. 바쁘게 지내다 보면 옷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봄이 왔는지도 모르고 아직 겨울옷을 입고 있고, 가을이 다 지나고 초겨울이 왔는데도 반소매를 입고 외출해 떨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던 사람이 결혼 후 아내의 달달한 잔소리를 들으면서 무딘 감각이 점점 살아났다. 요즘 내 옷차림은 많이 세련되어졌다. 모임에 나가 사람들에게 패션 감각이 좋다는 말을 들으면 우쭐해진다. “어떻게 그렇게 젊어 보이냐? 비결이 뭐냐?”라고 묻는 친구들도 있다. 그럴 때마다 자신감도 생기고 기분도 좋아진다.
나이 들수록 옷을 정갈하게 잘 입어야 한다. 여든이 넘은 장모님은 병원에 갈 때면 항상 장롱에서 깨끗하고 좋은 옷을 꺼내 입으며 “잘 입고 가야지, 차림이 추레하면 간호사들도 우습게 봐” 하신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옷 잘 입는 비법이 하나 있다. 아내 말을 잘 들으면 된다. 그리고 한마디만 해주면 된다. “역시 당신의 패션 감각은 최고야!” 그러면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고 가정도 화목해진다. 자신에게 패션 감각이 있어도 옷 구매와 외출복 코디는 아내에게 맡기는 게 어떨까? 아내에게는 남편 꾸며주는 시간이 큰 기쁨 중 하나일 테니까….
요즘 뉴스를 보면 분노로 인해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 홧김에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곳에 방화를 하고 울컥하는 마음에 폭력을 쓰거나 살인까지도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일으키는 감정을 분노조절장애 또는 충동조절장애라 진단한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장기간 노출되거나 가슴속에 화가 쌓이면 이 감정이 잠재되어 있다가 자극을 받는 상황이 오면 폭발하게 된다. 과거에는 분노 억압으로 인한 울화병이 많았지만, 요즘은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분노를 발산할 때는 잘 조절해서 서로가 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한다. 먼저 어떤 식으로든 분노를 몸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나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변에서 분노에 의한 폭언과 폭력을 많이 목격했다. 60대 후반의 연령대라면 분노와 관련해 직·간접적으로 다양한 경험이 있으리라고 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분노의 감정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다. 학교 친구들, 직장 동료들 그리고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만난 지인들 중 어느 누구도 내가 분노를 표출한 걸 본 적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분노조절에 있어서만큼은 뛰어난 능력을 갖춘 고수라 자처하고 싶다.
내 비법은, 일단 분노가 몸 안에 쌓이면 조절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분노를 낮추는 또 하나의 방법은 분노의 원인이 나의 내부 또는 바깥 모두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인이 잘못을 해 나를 화나게 하는 상황이 됐을 때, 그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지인을 사귄 내 잘못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화가 나는 상황을 바라보면 분노가 내 몸에서 자리 잡지 못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났다고 해보자. 이때 상대가 잘못했다며 언성을 높여 싸울 필요가 없다. 결국에는 보험 회사들이 판단해서 다 처리해준다. 목소리를 높여봤자 감정만 상한다. 감정을 빨리 추스르는 게 훨씬 이롭다. 더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었는데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라며 액땜한 셈 치면 된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도 자료를 잘 준비해 법의 심판을 받으면 되지 분노를 터트려 폭력을 행사하거나 해서 일을 더 꼬이게 만들 필요는 없다.
나는 전라북도 군산에서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님이 49세, 어머님이 42세에 나를 낳으셨다. 늦둥이로 태어나 부모님이 무척 귀여워해주셨지만, 아버님은 매사에 엄하시고 성질이 불같으셔서 어머님이 항상 아버님의 비위를 맞추셨다. 내가 어머님을 닮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 화를 내면 그걸 수습만 했지 화를 내본 경험이 없다. 더구나 집안에서의 서열이 제일 막내이다 보니 화는커녕 형과 누나들 눈치 보기 바빴다. 형제들이 일을 시켜도 윗사람 말은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만이 쌓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선천적으로는 어머님을 닮았고, 후천적으로는 가정에서의 서열 때문에 감정조절 능력이 자연스럽게 습득된 것 같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체득한 노하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분노란 주로 대인관계에서 발생한다. 관계를 만들기는 어려워도 허물어지는 것은 한순간이며, 허물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고수는 이런 상황에 처할 걱정이 없다. 고수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노력해야 한다. 자신이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고 여기면서 매일의 삶이 그 부족함을 채워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불화나 갈등의 상황이 와도 분노를 제어할 수 있다. 또 목표를 가지고 생활하는 게 중요하다. 어떠한 목표라도 좋다. 주간, 월간, 연간 계획을 세우고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다 보면 사소한 일에 분노할 겨를이 없다.
물론 내가 제시하는 분노 관리 방법이 편협한 것일 수도 있다. 각자에 맞는 보다 나은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조언한 방법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 폭언과 폭력이 없는, 보다 평화로운 사회가 되기를 희망해본다.
발코니 쪽 창문에 에어비닐을 붙이면서 겨울이 옵니다. 여느 계절이 그러하듯 겨울도 순식간에 왔지요. 겨를도 없이 허전한 풍경이 펼쳐지고 싸늘해진 공기가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해도 에어비닐이 창을 다 가리지 않도록 풍경을 위해 가운데를 뚫어놓았고 어느 창은 비워놓기도 했습니다. 풍경 가운데 나무들이 가장 숙연하게 서 있습니다. 한때 열매와 그늘과 싱그러움을 주던 나무들입니다. 그러나 견딤이 있을 뿐 나무들에겐 정작 아무런 보상이 없지요. 그 보상은 인간의 몫인데 나무들만이 한사코 의연히 견딥니다. 겨울이 주는 사유로 사람들에게 내면이란 것이 조금 더 생겨났다면 나무들이 준 의미가 닿은 때문 아닐까요. 아무렇지 않게 건너갈 수 없는 시간의 표정이 겨울 안에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조금씩 침잠하며 돌아보며 긴 시간의 여행에 듭니다.
추위와 더불어 당신이 왔습니다. 이제 당신은 여기 없는데 당신 그리움이 왔습니다. 그곳에서 발은 시리지 않나요? 따뜻한 물은 자주 드시나요? 이제 더 추워하지 않으셨음 해요. 당신을 처음 만나던 15여 년 전의 어느 날도 겨울이었습니다. 어느 문학행사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지요. 지면을 통해서 작품으로만 뵙던, 저보다 훨씬 선배이셨던 분을 만난 거지요. 따뜻하고 진솔한, 아주 시를 잘 쓰시던 분이라 단박에 기억했습니다. 시로써 만나던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면 뭔가 통하는 이미지가 있는데 우린 스치듯 서로 그런 느낌을 확인한 듯했습니다. 그런데 첫눈에도 당신은 추워보였습니다. 한겨울에 서늘함이 느껴지는 흰 와이셔츠에 재킷 하나만 걸친 모습이 안쓰러웠는데 웃는 표정도 겨울처럼 스산하였습니다.
그렇게 서로 안부만 주고받았을 뿐인데 이태 뒤 당신은 신작 시집을 부쳐왔습니다. 시는 여전히 깊고 간절했습니다. 반갑고 감사했지요. 무어 그리 더 잘 안다고 할 수도 없는데 곱게 사인한 시집을 보내시다니, 저는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다가 전화를 드렸습니다. 서로 대구와 서울 떨어져 있는 터라 우선 달리 방도가 없다는 생각으로 전화를 드렸던 겁니다. 수줍은 듯 작게 웃으시더니 당신은 되레 고맙다 하셨습니다. 더듬거리며 어떤 시가 좋다는 몇 말씀을 하고 저는 서둘러 꽃 피는 날 다시 전화를 드리겠다 말하고 끊었습니다. 꽃 피는 날은 속절없이 여러 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다는 부음을 들었습니다. 향년 61세. 그것도 한참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말의 빚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책으로 엎디었습니다.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저를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 겨울 당신이 초췌하게 보인 이유와 스산했던 바람 소리가 나던 표정이 오버랩되어 아프게 왔습니다. 하나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글을 쓴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는지, 저는 아주 하찮은 사람이 되어 겨우내 더욱 추웠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당신을 위한 저의 자책을 시로 적게 되었습니다. 이제 만날 수 없는 당신에게, 그리고 저처럼 때를 놓쳐 낭패한 일을 안고 사는 모든 당신에게 바치는 시이기도 했습니다.
꽃 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꽃 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아,/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죄송해요/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인 것을요/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 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 ‘꽃 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전문
창이 커다란 집에 살면서 창을 가리게 된 이유도 많은 풍경을 다 들이기가 아팠던 탓입니다. 커다란 그리움을 다 담기 힘들었던 이유입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누구에겐가 턱없이 모자랐거나 상처를 주었다면 어떤 일로 되돌려야 할까요. 아무리 살펴보아도 달리 가진 재주가 없어 저는 시로써 삶을 살피며 살기로 하였습니다. 존재하는 사물이나 대상, 무생물에게도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야 한다는 시인의 명분을 깊게 끌어안았습니다. 그건 당신이 가르쳐주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만날 수 없는 당신, 그리고 만날 수 없는 진실. 겨울 풍경 앞에 오래 머무는 건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살아 이 풍경을 보며 당신에게 전하기 위해 저는 시를 쓰고 풍경을 나눌 것입니다.
제가 어느 창에는 에어비닐을 붙이지 않는다고 했지요, 풍경을 위한 동시에 당신을 위한 통로임을 고백하겠습니다. 창으로 드는 저 풍경 속 나무 한 그루가 이미 당신이지요. 그래도 종내 안타까움은 사라지지 않고 살아 다 못한 그리움으로 이젠 제가 당신에게 풍경이 되겠습니다. 안과 밖 사이, 냉기와 온기 사이, 삶과 죽음 사이, 모든 사이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지라도 당신에게 저는 꽃 피는 봄날이 되겠습니다. 세상에는 비유가 필요 없는 순간이 있지요.
불가해의 일, 불가능의 일, 죽음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홀연 떠나신 아쉬움 대신 당신의 침묵을 기억하겠어요. 그리고 뻔뻔하게도 저는 다시 당신께 말하겠습니다.
꽃 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말입니다.
이규리 시인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계명대학교, 구미대학교 강사 역임. 질마재문학상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 ‘뒷모습’,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가 있다.
포크 음악 시대의 막바지였던 1980년, ‘슬픈 계절에 만나요’를 발표해 추억의 대명사로 각인된 가수 백영규. 이후로도 그는 제작자, 싱어송라이터, 그리고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제이라는 현업들을 꾸준하게 지켜나가며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최근 그는 자신의 다양한 삶의 경험과 노하우들을 하나로 모아 만든 청춘의 추억 ‘백다방’을 론칭해 업계로부터 ‘제대로 된 게 나왔다’는 평을 듣고 있다. ‘백영규’ 하면 떠오르는 계절, 가을. 그를 만나 그간의 삶과 현재에 대해 들어봤다.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가슴 깊이 파고드는데
들리지 않는 그 목소리에 스쳐가는 바람소리뿐’
1980년에 발표되어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등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노래, ‘슬픈 계절에 만나요’는 제목이나 가사나 자연스럽게 가을을 떠올리게 만든다. 가을이 되면 생각나는 이 노래를 더욱더 가을답게 만드는 것은 백영규 특유의 처연하고도 서정적인 음색일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청소년 시절을 보낸 인천에서 라디오 경인방송(FM 90.7㎒)의 최장수 간판 프로그램인 ‘백영규의 가고 싶은 마을(백가마)’ 디제이로 활동하면서 꾸준한 음악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게 가수로서의 백영규와 디제이로서의 백영규가 합쳐진 이벤트가 얼마 전에 있었다. 바로 ‘백다방 콘서트’다.
원고까지 직접 쓴 ‘백다방 콘서트’
1970년대 한국 가요와 청춘 문화의 핵심이 음악다방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백다방 콘서트’는 그 시절의 음악다방을 음악적 콘셉트로 삼은 백영규의 공연 프로그램이다. 무대 한편에 뮤직박스를 차려놓고 음악다방이 인기 있던 시절 실제로 인기 있었던 디제이가 초빙되고 색다르게 연출 구성한 추억의 음악다방 분위기 속에서 백영규의 공연이 함께 어우러져 진행된다. 당연히 애청자가 보낸 사연을 읽는 시간도 있는데 그 전에 안내방송이 나오도록 설정하는 등 그야말로 ‘정통’ 음악다방의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1월에 시흥에서 처음 쇼케이스를 가졌고, 지난 5월 행사 이후로는 수정 보완을 해 진행하고 있다. 여기서 백영규는 공연 기획뿐 아니라 원고까지 직접 쓰고 있다.
“디제이를 하면서 배운 게, 다른 사람 가슴속에 빠르게 들어가는 법이에요. 그래서 관객의 생각을 파악하며 원고를 썼죠. 음악다방이 중심이 된 무대를 세우니 과거와 추억을 소환하는 보람이 있어요. 음악다방이라는 콘셉트가 관객들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어요. 저는 기분이 좋죠.”
‘인천가수’ 백영규의 보람
올해로 벌써 12년째인 디제이 생활을 이어나가는 그에게 디제이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처음에 디제이를 시작할 때는 겸손하지 못했어요. 가수들이 왕자병 많잖아요.(웃음) 나니까, 인천 출신이니까 시켰겠지 싶었죠. 그게 좀 오래갔어요. 그런데 살다 보면 정신 바짝 차리게 되는 그런 일이 어느 순간 생기잖아요. 저도 그런 일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깨닫게 됐죠.”
라디오 청취자들에게 백영규는 ‘촌장’으로 불린다. 프로그램명에 마을이라는 글자가 들어가서 그렇다. 그는 “촌장이라는 칭호까지 붙었는데 이름값을 해야지” 하며 웃었다.
“제가 썩 좋은 성격은 아니었는데…. 중장년이 되면 배려 차원이든 자기 보호 차원이든 두 얼굴을 갖게 되잖아요. 가능하다면 (안 좋은 얼굴을) 버리는 척이라도 해야 해요. 척을 하다 보면 사람이 달라져요. 저는 특히 안병진 피디와 함께 일하면서 조직과 사회를 알게 됐어요. 큰 경험이죠.”
데뷔 40주년, 그리고 달라진 삶
아직 에너지가 넘쳐 보이는데 백영규가 중장년이라는 말을 한다. 그러고 보니 1978년 그룹 물레방아로 데뷔한 그가 가수활동을 시작한 지 벌써 40년이나 됐다. 이 특별한 숫자에 그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없어요. 괜히 40주년이니까 주위에서 뭐라도 해야 하지 않냐 그러지. 그런데 자꾸 그런 말 들으면 바람이 들게 되잖아요.(웃음) 그래서 백다방 콘서트도 시작하게 된 거고. 2016년 신곡 ‘술 한 잔’을 발표했어요. 그 음반이 대중들에게 좀 더 다가가기를 바랐는데… 올해 하나 더 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작업하고 있어요.”
그는 요즘 싱글로 발표할 곡을 하나 준비하고 있다. 가장 유력한 발표 후보 곡은 ‘그놈의 밥 때문에’라고. 디제이 일을 하고 있어도 가수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 하는 그는 요즘 노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고 말했다.
“습관적으로 음반을 내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완성도가 떨어지더라고요. 한 곡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이유가 됐죠. 그래서 최근 3~4년간은 노래를 만들 때 수정작업을 많이 합니다. 과거에는 수정작업이 없었으니 완성도가 좀 떨어졌겠죠. 요즘은 노래 가사 토씨 하나 바꾸는 것도 하루 종일 고민하곤 해요. 신이 나요.”
노래 64곡을 다시 찾았다
저작권협회에 등록된 백영규의 노래는 총 210곡에 달한다. 싱어송라이터로서 그의 성실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런데 210곡 중 64곡은 최근에 편입된 곡들이다. 한두 곡도 아니고 수십 곡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과거는 지금처럼 곡들을 관리하던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얼마 전에 발견한 거죠. 그 곡들을 한꺼번에 가져갔더니 저작권협회가 뒤집어졌어요.”
그가 디제이를 하면서 싱어송라이터 편을 만들었던 게 그 시작이었다. 여러 싱어송라이터의 곡을 모아보다가 정작 자신의 노래들에 대한 정리가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하나는 히트곡 모음, 다른 하나는 다른 가수들에게 준 노래들로 구분해 더블 앨범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팬클럽에 조사를 의뢰했는데, 그 과정에서 64곡이 빠져 있는 게 발견된 것이다.
“저작권협회에 이 사실을 얘기했고 협회가 검토한 결과 모두 내 노래였죠. 그래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며 옥신각신했죠. 처음에는 싸우려다가 언론사에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연락을 했어요. 기자들이 기사 쓸 일이 생겨서 그런지 신나하더라고요.(웃음) 그런데 거기서 스톱했어요. 나이 들어 돈 벌려고 그런다는 말 듣는 게 싫어서요.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지만 협회도 잘못했다. 나 같은 컴맹을 위해 작품관리를 잘 좀 해줘라’ 하고 끝냈죠.”
그는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속이 상해서 작곡을 전혀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것도 제 개인의 역사이니까요. 또 계속 발전해나가는 중이니까 이런 일도 벌어지는 거겠고요…. 그래도 아쉽긴 했죠.”
나를 지탱하게 해주는 건 음악밖에 없다
중장년의 나이에 이르면 삶과 생활 속에서 생긴 생채기들이 흉터처럼 남기 마련이다. 백영규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음악에 의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고 말한다.
“90년대 중반에 이혼하고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굉장히 힘들었는데 어떻게 또 이겨내더라고요. 특별히 떼돈을 벌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제가 잘나갔다는 걸 잘 모르겠어요. 경제적으로 풍요로울 때는 그걸 느낄 새가 없었고. 저는 전초전이 없는 가수여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가수로 성공했죠. 가치라는 걸 몰랐어요. 그게 되게 아쉬워요.”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노래, ‘슬픈 계절에 만나요’를 발표했을 때가 전성기 아니었을까?
“그때가 가장 유명했지만 경제적으론 힘들었어요. 지금은 매니저 시스템이 과학적이잖아요. 그때는 매니저가 가수가 큰다 싶으면 눌렀어요. 자기 말 잘 듣게 하기 위해서였죠. 언젠가 벽제에 공개방송이 있다고 해서 갔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허허벌판이었어요. 매니저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야 하는 그런 시대가 있었어요.”
그는 박정수의 히트곡 ‘그대 품에 안기고 싶어’를 제작하면서 제작자로서도 성공한 삶을 살았다. 그때 필드 매니저라 불리는, 이런저런 잡일까지 다하는 매니저로서의 역할도 해봤다. 그 경험은 지금도 그에게 삶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가요계의 정상에서부터 밑바닥 일까지 다해본 것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는 ‘고통이 자신을 만든다’는 말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일 것이다.
세상을 넓게 보는 재미가 생겼다
백영규는 자신의 원래 꿈은 두루뭉술했다고 회고했다.
“확고한 신념이라는 것도 없었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나왔다 하면 사람들이 놀랍니다.(웃음) 공부는 일찍 포기했어요. 그리고 대학 졸업하자마자 가수가 되었으니 미래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그러나 이제 그의 나이 예순일곱 살, 나이 듦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가 드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더군요. 나이 듦이란 그렇게 달라지는 맛이 있죠. 가끔 웃게 돼요. ‘동갑내기들은 이걸 못 찾았을걸?’ 하면서요.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에서 동네 사람을 마주쳤을 때 서로 외면하는 게 더 힘들지 않나요? 차라리 고개를 숙여 먼저 인사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제가 며칠 그랬더니 이제는 그 사람이 날 만나면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런 것이 바로 내 자신이 달라짐으로써 얻는 맛이죠.”
그가 변하자 노래도 달라졌다. 노래 주제가 예전처럼 서정적이거나 사랑은 빠지고 시사적이고 사회적인 것들을 다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그에게서 ‘계절을 기억하게 만드는 사랑 이야기’ 같은 노래를 원한다는 게 그의 딜레마기도 했다.
“영감을 따로 얻는 원천은 없어요. 그래서 찾아야 해요. 제가 제일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은 감성 지키기예요. 가진 거라곤 그것뿐인데 감성마저 잃으면 어떡하나 싶어서요. 만날 사람 다 만나고, 할 거 다 하면서 감성이 나오기는 힘들죠. 감성을 지키기 위해 저는 주로 책을 읽어요.”
변화를 넘어 계속 진화하고 있다
그는 산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다. 아침마다 산을 탈 정도로 푹 빠져 있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하고 산에 갔다 와서 자투리 시간에 곡을 쓰고, 여유가 생기면 술 한잔하는 게 그의 일상이다. 산은 그에게 스스로 질문하게 하고 답을 모색하도록 하는 시간을 마련해준다. 백다방 콘서트 같은 공연을 구상하고 연출한 것도 그런 시간들이 선물한 숙고의 시간 덕분이리라.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고 묻자 ‘생각하다 말았다’고 답한다.
“계속 진화하는 중이라.(웃음) 그다음에야 할 수 있는 얘기인 것 같아요. 요즘은 ‘이러다 도인되는 거 아냐?’ 싶기도 한데, 그러면 재미없지. 술 한잔 먹고 귀여운 실수도 하고 그래야 사는 맛이 있잖아요. 사람이 완벽하면 쓸데없이 뻣뻣해지거든요. 요즘 고민이요? 이제 돈 좀 벌어야겠는데 돈 좀 벌려고 하니 길이 안 보이네요.(웃음) 그러니 하던 일이나 더 열심히 해야지요, 뭐.”
“우선 작품을 잘 써야죠” 하며 웃는 그를 보며 젊은 시절에는 할 수 없었던 말이 아닐까 싶었다. 그가 인터뷰 내내 강조했듯이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는 변화된 모습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옳게 나이 드는 일이야말로 노년의 보람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보여주고 있었다.
“전에는 뭘 모르고 썼는데, 이젠 정말 괜찮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작품 속에 내가 가진 마음 전부를 다 쏟아볼까 해요.”
“오늘은 먼 곳에서 특별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멀리 미국 유타주에서 오신 존 고 조이(John Ko Joy) 씨입니다. 이 분은 한국 전쟁 중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56년 만에 한국에 오셨습니다. 힘찬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6월 3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 신수교회 주일 예배시간. 트럼펫을 든 한 남자가 성가대와 함께 나와 협연했다. 듬직한 체구에 웃음 밴 얼굴의 조이 씨. 그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 입양 이후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미스터 조이, 인터뷰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으니 “기쁜 마음으로 응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성사시키지 않으면 평생 할 수 없는 인터뷰였다.
이별을 직감한 조이의 선택
조이 씨의 어머니는 16세 어린 나이에 조이를 출산했다. 미숙아로 태어난 조이는 잔병치레가 많았지만 미군이던 생부 덕에 미군 야전병원에서 진료 혜택을 받으며 치료받았다고 했다. 조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생부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소식이 곧 끊겼다. 생각지 못한 임신과 어려운 가정 형편. 조이를 한국에서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한 생모는 아들을 해외로 입양 보내기로 한다. 그렇게 조이 씨는 부산에서 일본 도쿄를 거쳐 하와이를 지나 미국 본토로 갔다. 어린 나이에도 험난한 사회에서 안 굶고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고 했다. 차라리 모국에서 버림받아 미국행 위그선에 탑승한 것이 노아의 방주에 승선한 행운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고 밥을 굶고 있을 가족이 걱정됐다고 회상했다.
“‘플라잉 타이거’라는 비행기 모양의 ‘위그선’을 타고 떠났습니다. 미국으로 가는 일주일 동안 햄버거와 오트밀 수프만 먹었습니다. 그동안 먹었던 된장찌개와 김치가 갑자기 그립기도 했죠. 아니 김치를 찢어 숟가락에 올려주던 엄마가 그리웠습니다. 굶어도 엄마 옆에 있는 것이 좋았다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위그선에는 500명 정도의 영·유아가 베이비 박스에 담겨 배 3층까지 정렬돼 있었다. 얼굴 부분은 열려있었고 가슴 부분에는 양부모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있었다고 했다. 마치 “과수원에서 과일을 포장하여 출하하는 모습이었다”고 그 당시를 회고했다. 위그선 안에서는 수십 명의 간호사가 아기를 돌봤다. 입양이 생모와 영원한 이별임을 직감했던 조이 씨는 훗날 혈연을 찾 는데 도움될까 싶어 이름을 아버지의 성 ‘존’, 어머니의 성 ‘고’ 그리고 자기 이름 ‘조이’를 사용했다고도 덧붙였다.
인생의 친구 트럼펫을 만나다
조이 씨는 미국 유타주에 사는 좋은 양부모를 만났다. 1953년생으로 조이 씨가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1958년 12월 19일. 조이 씨의 입양일인 동시에 새로운 생일날이 됐다. 처음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자기가 잘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잘 못 했는지를 몰라 모든 일에 자신이 없어 했다.
“시간이 갈수록 내성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던 중 9살 되던 해에 평생을 같이할 동반자를 만났습니다. 슬프기 전에 먼저 다가와 울어주고 기쁜 일 있으면 가장 기뻐해 주는 트럼펫이었죠.”
[IMG::CENTER]유타주의 한 음악대학에 진학해 재즈 트럼펫을 전공한 조이씨는 LA와 휴스턴, 텍사스를 돌아다니며 음악활동을 했다고. 예배 도중 성가대와 피아노 반주자와 예행연습 없이 연주한 영화 미션의 주제곡 ‘가브리엘 오보에’는 실제 연주보다 더 아름다웠다. 음악을 전공했지만 그의 현재 직업은 버스 운전기사다. 미국 LA에 살면서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여러 명의 음악인과 협연을 하며 음악 봉사를 한다. 한국 교회에서의 협연도 미국 교회에서의 인연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미국 생활 초반 영어를 할 줄 모르던 조이 씨지만 이제는 한국말을 모르는 미국 사람으로 성장했다. 필리핀 출신의 부인과 슬하에 자녀 3명이 있었으나 암으로 사별했다고. 그리고 3년 전 지금의 중국인 부인을 만나 여생을 함께하고 있다.
그리운 어머니의 나라 대한민국
인터뷰는 예정된 시간보다 많이 지났다. 마지막 질문을 했다. 일곱 살 어린아이를 국가가 보호하지 못하고 입양 보낸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조이 씨는 대답했다. 불평이나 원망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너무 어려서 그런 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웃음) 한국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아와서 엄마의 나라를 살갑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말이죠. 그래도 한국은 내 어머니의 나라입니다.”
인터뷰 도중 ‘어머니의 나라’라는 말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어머니를 만날 희망으로 모국을 찾았지만 만남은 뒤로 미뤄야 했다. 한국 방문한 두 주 동안 입양되기 전까지 살던 의정부 집과 보육원, 어머니의 이름은 알아냈지만 말이다. 다음을 기약하며 어머니를 찾기 위해 DNA 신고를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기회가 된다면 눈물의 모자 상봉 장면을 내 카메라에 꼭 담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누구도 관심 두지 않는 이야기에 관심 둬 줘서 고맙다”고 했다. 차마 부끄러워 감추고 싶은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은 인터뷰가 끝날 무렵 친절함과 화기애애함이 담긴 미소와 함께 눈가에는 눈물 가득 고였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악수하는 손은 서로가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엄마 친구 집 대문을 열다
7월의 뜨거운 열기조차 서늘하게 느껴질 만큼 사무친 그리움을 안고 고향 순창으로 갔다. 얼마 전 뇌졸중이 재발되어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나서였다. 한적한 골목길을 거닐다 어느 집 앞에 멈춰 섰다. 엄마의 오랜 친구 정봉애(89) 씨가 사는 집 앞. 한참을 서성이다가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네 엄마가 왼손은 마비됐어도 삶의 의지가 강해 몇 년은 더 살 줄 알았더니, 너무 갑자기 가버렸구나.” 등을 토닥이며 아픈 내 마음을 위로해주셨다. 50년 지기인 두 분은 젊은 시절 학부모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친구가 되어서 보니 어릴 적 가정 환경이 신기하게 비슷했다. 소학교 시절 정봉애 씨는 남원에서, 엄마는 순창에서 우등생이었던 것도 비슷했는데, 같은 상급학교에 지원했다 세월 탓에 좌절한 경험은 아예 똑같았다. 이런 인연으로 두 분은 우정을 돈독히 쌓아왔다. 나이 들어서는 각자 자신이 사는 동네 노인회관 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게이트볼 선수로 여러 대회에 출전도 했다. 또 게이트볼 심판 자격증을 따서 심판을 본 것 등등 두 분은 닮은 점이 정말 많았다. 그런데 이번 만남으로 엄마 친구였던 그녀가 시인으로 등단을 한 사실을 알게 됐다. 엄마가 편찮으신 동안 소식을 잘 듣지 못했는데 이런 축하할 일이 생겼다.
독서를 좋아하던 소녀의 꿈
2014년 월간 ‘문학공간’을 통해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했다. 엄마와 원불교 교당을 같이 다니고, 동갑계모임을 하는 등 그저 평범한 우리네 어머니로만 알았는데 이토록 멋진 시인이 되어 있을 줄이야!
6월에는 첫 시집인 ‘잊지 못하리’가 출간됐다. 더욱이 전북관광문화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아 시집을 출간했다고. 이 말은 작가로 인정받아 당당하게 낸 소중한 시집이란 뜻이다. 같은 달 말에는 순창문인협회 주최로 시집 출판기념회도 열렸다. 우리 나이로 구순. 100세를 10년 앞둔 정봉애 시인의 새로운 인생에 모두들 박수를 보냈다.
정봉애 씨, 아니 정봉애 시인은 어쩌다 시를 쓰게 됐을까? 문득 시를 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 여쭸다. 1929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정 시인은 비교적 부유한 집 막내딸로 귀하게 자랐고, 아홉 살에 사립 소학교에 들어가 열다섯 살에 졸업했다. 전교 1, 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했고, 희망하던 공주사범학교 서류전형 합격도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렇게 똑똑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칼바람 불던 세월 탓에 학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한학자였던 부친이 딸의 상급학교 진학을 완강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혹여 딸아이가 위안부로 징집될까 부친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 간절한 꿈을 접고 정 시인은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전북 순창군 유등면 8남매가 사는 작은 농가의 맏며느리로 들어갔다. 슬하에 7남매를 낳아 기르는 동안에도 틈틈이 책 읽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시동생 친구인 동네 청년들한테 부탁해서 소설, 시, 월간지 가릴 것 없이 책이란 책은 모조리 구해다 읽었지. 시어머니가 호롱불 기름 닳는다고 불 끄고 자라 하면 치마로 문을 가리고 읽었어. 그렇게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지다 보면 시집살이의 고단함도 저만치 날아가곤 했어.(웃음)”
정 시인의 문학적 기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 시절에도 그렇게 책을 읽었다니 새삼 참 멋져 보인다.
“많이 배우지도 못한 사람이 시 쓸 생각이나 했겠나. 2006년에 평생을 같이했던 남편과 사별하고 나서 적적한 마음에 그저 끄적끄적 메모를 해댔지. 그런 습관이 나중에 시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
맘에 드는 것은 행동에 옮긴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적극적인 성격의 정 시인. 어느 날 순창에서 발행하는 지역신문 ‘열린순창’을 꼼꼼하게 읽다가 무척 마음에 드는 필진을 발견하고 곧바로 신문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 머시냐 저기… 박모 씨 글이 하도 좋아서 그 필진과 인사를 한번 나누고 싶은디. 연락처 좀 알려줄라요?’ 내가 그랬어!”
그 일을 계기로 이 재밌는 할머니(?)의 이모저모를 살피던 신문사 직원이 시 창작 공부를 한번 해보라며, 순창여성회관에서 진행하는 ‘시 창작 교실’을 소개해주었다. 글 읽는 것은 좋아했지만 스스로 써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던 정 시인은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시 창작 교실을 노크했다.
“첫 시간에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니 40, 50대 젊은 친구들이 모여 있더만. 속으로 깜짝 놀랐어. 퇴직하고 나이 지긋한 심심한 양반들이나 있겠거니 생각했거든.”
그래도 기죽지 않았다는 정 시인. 젊은이들 틈에 용감하게 자리 잡고 앉았단다. 자그마한 체구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도전정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 공공도서관 등을 찾아다니며 각종 인문학 강좌는 모두 섭렵하다시피 했다고. 특히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시 창작’ 수업을 좋아해 매주 무척 기다렸다고 한다.
“시 창작 강의가 너무 재밌어서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 선생님이 내준 숙제 꼬박꼬박 하고, 꾸준히 다니다 보니 이런 좋은 결실을 보게 된 것 같아.”
시인 정봉애로 살다
정 시인의 하루는 규칙적이다. 오전 4시에 일어나 요가와 스트레칭을 하고 7시에 아침식사를 마치면 외출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가 서예, 시창작, 시낭송, 게이트볼 등 그날그날 정해진 일정을 소화한다. 오후 5시 반쯤에는 귀가해서 신문 보고, 시 다듬고, TV 뉴스 잠깐 시청한 뒤, 9시 조금 넘어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든다. 이런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도 정 시인에게는 단 하나 예외적인 것이 있는데, 자다가도 시상이 떠오르면 새벽 1시가 됐든 2시가 됐든 벌떡 일어나 곧바로 메모하는 것이다. 시에 대한 그녀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다. 솟구치는 그녀의 시심은 아주 중요한 순간에 빛을 발하기도 했다. 작년 11월, 순창읍 일품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할 때 정 시인은 순창평화의소녀상건립군민추진위원회로부터 자작시 낭송 요청을 받았다. 당황스러워 “다른 훌륭한 시인도 많은데 왜 나에게 하라는 거냐”며 한사코 거절했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과 동시대를 살아온 정 시인이 적임자라며 거듭 요청을 해왔다.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결국 시인이라는 사명감 하나로 밤을 새워 작품을 완성했다. 정 시인은 같은 또래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친구’라 부르며 ‘친구여 편히 쉬시라’는 제목의 자작시를 작년 12월 ’평화의 소녀상‘ 건립 행사 때 낭송해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내 사랑, 잊지 못하리
여담으로, 시집 제목을 왜 ‘잊지 못하리’로 했나 여쭸다.
“나는 그냥 ‘노인네 넋두리’로 하자 했는데, 내가 쓴 시가 그런 제목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더만.(웃음)”
할 수 없이 주변에서 권유하는 대로 ‘잊지 못하리’로 제목을 막상 붙여놓고 보니 아주 마음에 든다며 천진스레 웃으신다. 123편의 서정시를 모아 엮은 정 시인의 첫 시집 ‘잊지 못하리’는 정 시인의 요청을 받아 노인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큼지막한 글씨로 인쇄돼 정감을 준다.
“내 소소한 일상을 보고 느낀 대로 적어 다듬었을 뿐인데, 노인네 넋두리로 치부하지 않고 주변에서들 공감해주니 어찌 이리 고마울 수 있을까.”
90세 넘은 나이에 시 쓰기를 시작해 일본 열도를 감동시킨 100세 시인 ‘시바타 도요’가 롤 모델이라고 했다. 정 시인은 ‘시바타 도요’처럼 100세가 되기 전에 두 번째 시집을 내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한다.
“시는 이제 영원한 내 친구, 시 쓰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앞으로도 쉬지 않고 끈기 있게 계속 쓸 참이여.”
정 시인의 하루는 요즘 더 바빠졌다. 시집 발간 후 여기저기서, 심지어 멀리 미국에서도 축하인사를 보내와 정신없을 정도라고.
“내가 요즘 심심할 겨를도 없이 호강을 많이 한다우. 여기저기 크고 작은 행사에서 모셔가지, 젊은 동호회 회원들이 수시로 전화해 드라이브시켜주고 맛있는 밥 먹으러 다니지, 아주 행복혀.”
90세 인생이 이리도 즐거울 수 있을까. 정 시인은 문자는 물론 컴퓨터와 카카오톡까지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안다. 카톡 프로필 란에 ‘매일매일 싱그럽고 화려하게ㅋㅋ’라는 멘트가 놀랍다. 열정은 사람을 늙지 않게 만드나보다. 이 나이에 뭘 하나, 세상 다 산 듯 정신줄 놓고 있던 게으른 내 영혼에 90세 시니어 시인은 섬광처럼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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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하리 - 정봉애
이토록 보고픔 어찌하오리까
고요 속에 아른아른 아린 그리움
어찌하오리까
가슴 깊이 젖어드는 끈끈한 정
어찌하오리까
마디마디 묻어나는 님의 향기
어찌하오리까
이왕에 가버린 사랑
어찌하오리까
정봉애 시인은, 어린 나이에 결혼해 60년 넘게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아온 남편이 병환으로 세상을 뜨자 하늘이 무너진 듯 온 세상 슬픔이 다 몰려왔다고. 6·25동란 때 오빠들과 부모님을 모두 잃은 정 시인에게 남편은 오빠 같고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내 나이 78세 때 82세 남편이 가버렸지. 다들 살 만큼 살았다고 말들을 하더라만, 남편만 의지하고 살았던 나는 그 허전한 마음을 어디에도 둘 데가 없더라고.”
저녁이면 남편과 오순도순 술 한 잔씩 반주로 나누며 밥 먹던 소소한 행복. 첫 잔을 꼭 먼저 따라주던 다정했던 그 사람. 이 시 ‘잊지 못하리’는 사별한 남편을 그리워하는 정 시인의 애틋한 심정이 아리게 담겨 있다.
발은 거실 소파에 편히 앉아 있지만 눈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TV 화면 속 할배들과 동행하여 체코 프라하의 추억을 반추해 본다. 한국에서 동유럽 여행 코스는 대부분 독일에서 시작하여 체코 프라하, 체스키크룸로프를 경유하여 비엔나로 향한다.
프라하는 체코 공화국의 수도이며 프라하 구시가지에는 체코의 상징물인 프라하성이 있다. 남쪽 오스트리아 국경지대근처에는 아름다운 체스키크룸로프성과 중세의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체코 공화국은 지역적으로 10세기 이전부터 세계사를 끊임없이 움직인 강대국 사이에 위치해 우리나라 못지않게 역사의 부침이 심했다. 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이었지만 직접 전쟁에 가담한 나라는 아니기 때문에, 유적만은 찬란하게 보존되어 있다.
약 10세기를 전후해 이전 신성로마제국 영토 일부에 건설된 보헤미아 왕국이 체코공화국의 전신이다. 보헤미아는 프라하의 옛 명칭이기도 하다. 14세기 세계적인 유적지 프라하 블타바강의 카를대교를 건설하고 유럽 최초의 대학인 프라하대학을 세운 카를 4세는 보헤미아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16세기 체코는 바로 옆 나라이면서 유럽의 최강국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 속해 지배를 받다가 1918년 체코와 슬라브족의 슬로바키아를 합병한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명으로 독립한다. 하지만 다시 독일의 나치정권하에 속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로부터는 독립하지만 동유럽 공산국가로 옛 소련(소비에트 연방)의 영향권으로 편입하고 그 후 끊임없이 공산당과 비공산주의자들의 투쟁, 민주정권 수립을 갈망하던 중 개혁파가 정권을 잡기에 이른다. 이런 노력의 변화를 세계사에서는 ‘1968 프라하의 봄’이라고 부른다.
‘프라하의 봄’ 자유화 운동은 실패하여 다시 긴 겨울이 찾아오게 되지만 1989년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사회주의 체제 개혁에 힘입어 체코의 민주 시민 시위가 성공한다. 1993년 비공산주의자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 취임 후 바츨라프 광장에서 평화적인 무혈혁명을 연설했는데, 이를 상징적으로 ‘벨벳혁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는 분리됐다.
이후 체코 프라하는 세계인의 관광 여행 주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보고 싶어 하는 프라하성은 9세기 보헤미아 왕국 시절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기 시작하여 고딕, 르네상스를 거쳐 18세기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900년에 걸쳐 개축됐다. 그야말로 건축 역사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세계인은 그 아름다움에 놀라고 경탄을 금치 못한다. 프라하성에는 스테인드글라스창이 유명한 비투스 대성당과 대통령궁, 박물관, 유명한 야경 등 볼거리가 즐비하다.
역시 보헤미아왕국에 의해 13세기 고딕형식으로 건축되었던 체스키크룸로프성은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이 되어 르네상스풍의 둥근 지붕이 특징이다. 체스키크룸로프성 인근에는 중세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마을, 미로 같은 뒷골목과 상점들이 어우러져 아름답고 경이로운 풍경을 자랑한다.
관광객들은 활기찬 골목 쇼핑과 사진 찍기에 정신이 쏠려 언제 공산주의가 이곳에 있었는지 가늠해볼 겨를도 없다. 체스키크룸로프 마을은 ‘체스키크룸로프 역사지구’라 불리며,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됐다. 체코의 음악가로는 우리가 잘 아는 안토닌 드보르작이 있고, 교향시 ‘나의 조국’의 작곡자 베드르지흐 스메타나가 있다.
청룡포(淸泠浦). 정작 섬은 아니지만 섬처럼 외진 곳이다. 서강(西江)이 삼면을 휘감아 돌아나가고, 남서쪽 육육봉은 벼랑처럼 가팔라 어디에고 육로가 없다. 일러, ‘육지 속의 섬’이다. 배를 타야 닿는다. 강폭은 넥타이처럼 좁아 도선에 오르자마자 내려야 하지만, 강상으로 펼쳐지는 산수란 풍광명미, 눈을 뗄 겨를이 없다.
배에서 내려 청룡포 안통으로 접어들자 우뚝한 것이, 미끈한 것이, 당당한 것이 눈길에 가득 차오른다. 소나무들이다. 하나같이 굵고 크고 높으니 나무의 장한(壯漢)들이다. 또 여겨보자니 미모도 이런 미모가 없다. 풍만하면서도 늘씬하다. 쭉쭉 벋었으나 미묘하게 휘어 수려하다. 미인송(美人松)들의 경연장이라 할 만하다. 항간에, 산간에, 공원에 무시로 눈에 띄는 게 소나무이지만, 청령포 소나무들을 첫손가락에 꼽는 이들이 숱하다.
솔숲 사이 오솔길에 초록이 너울거린다. 허공을 통째 가릴 기세로 무성히 뻗친 솔잎. 그 사이를 간신히 통과한 햇살이 숲으로 스며든다. 그 한 줌 은빛 햇살마저 덩달아 푸른 기운을 머금는다. 초록 솔에 젖어서다.
숲 안에 감도는 공기는 가을처럼 서늘하다. 살갗으로 차게 다가오는 공기엔 후각을 자극하는 상큼한 향이 서려 있다. 이건 소나무들이 일제히 내뿜는 에테르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숲길에선 오감이 열릴 수밖에 없다. 시각과 촉각과 후각을 흔들어 일깨우는, 저 ‘감각의 제국’을 보라.
살면서 사귄 초목이 많고 많지만 소나무를 보면 늘 반갑다. 이승에서 만난 가장 친숙하고 가장 오래된 동무라 할 만하다. 저승 가는 길목에도 소나무 조경이 돼 있다면 발길이 더 사뿐하리라. 매양 사람에게 베풀기를 거듭한 나무이지 않던가. 나 태어날 적 대문간엔 생솔가지 꺾어 꽂은 금줄이 걸렸다. 지상의 첫날부터 소나무가 보초를 서줬던 거다. 무엇보다 소나무는 목재로 흔히 쓰여 사람에게 이바지한다. 건축의 재료로 불려가 집을 이루고, 집 안에선 가구가 되고, 가구 앞에서는 다탁이 되고, 다탁 옆에서는 바둑판이 된다. 구들을 데우는 땔감이기도 하고, 송화주(松花酒)와 솔바람과 솔그늘을 희사하기도 한다. 종단엔 관재(棺材)가 돼 사람의 마지막 여행길에 동행한다. 보시(布施)에 보시가 겹겹이니, 가히 소나무 보살이렷다!
청령포 숲엔 700그루쯤의 금강송이 주민을 이루어 산다. 촌장은 숲 복판에 선 관음송(觀音松). 높이 30여 m에 600살쯤의 나이를 자셨다. 위풍당당한 거목이다. 나무 아래에 선 순간 나는 물방개처럼 납작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관음송인들 풍진 세파를 피할 길 있었으랴만, 하늘 괸 기둥처럼 그저 헌칠하고 묵연하다. 둥치 곳곳에 땜질을 입은 건 비바람의 농간이 극심했다는 증명이겠지. 상처 없는 지속이 있는가. 장애 없는 활보가 가능하겠는가. 풍상이 곧 비결임을 암시하는, 저 향기로운 노거수!
소년 하나가 숲길을 걸어간다. 관음송 가지 틈새 턱에 걸터앉는구나. 누군가? 나어린 임금 단종(端宗)이다. 단종은 여기 청령포 숲에서 유배를 살다가 사약을 받았다. 정적(政敵)이 정적을 부리로 찍고 발톱으로 찢어발겨 피 묻은 권력을 틀어쥐는 게 인간세의 생리. 단종은 악마와 협약을 맺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탈취당했다. 1452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었으나, 3년 만인 1455년 계유정난으로 실권을 장악한 숙부에게 왕위를 넘기고 형식상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듬해 6월,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의 단종복위 음모가 발각되면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야사는 전한다. 소년 유배객 단종이 저 관음송 가지 턱에 자주 걸터앉아 궁궐을 그리워했다고. 명민한 준재였다 하니 사념이 깊었을 게다. 슬픔이 북받치면 소나무를 붙들고 울고 바위를 치면서 울었을 게다. 강물 가에 웅크려 소쩍새처럼 흐느껴 울었을 게다. 울었던 건 단종만이 아니었다지. 충신들이 문안을 왔다가 핏줄이 떨리게 울었다. 고을의 백성들이 서강 저편에서 절을 하며 울었다.
청령포 솔숲이 비경이라지만, 여기에 서린 서러운 역사란 꿈자리 어지러운 구렁텅이와 다를 바 없다. 청령포 물가에 놀빛 잠긴다. 붉은 해는 반드시 서쪽으로 지는데, 어린 유배객의 혼령은 어디로 흘러갔는가.
탐방 Tip
영월군 남면 광천리 서강변에 있다. 소나무 숲속 곳곳에 단종의 유적이 있다. 단종 어소(御所), 영조의 친필을 음각한 비(碑), 금표비, 왕방연 시조비 등등. 인근에 있는 장릉과 관풍헌도 단종 유적이니 연계 답사한다. 청령포 관람시간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입장료는 성인 3000원. 주차장과 배편은 무료.
귀촌 5년째. 김석균(55) 씨는 흙집에 푹 빠져 살고 있다. 그간 수십 채의 집을 지었다. 흙집 일색이다. 흙의 내부는 거대하다. 식물을 기르고 벌레를 양육한다. 생명의 출처다. 흙의 이런 본성과 모성이야말로 자연의 표상이다. 사람의 몸처럼, 흙집 역시 수명을 다하면 흙으로 돌아간다. 김 씨는 자연의 생태와 순환을 거스르지 않는 흙집의 미덕에 심취했다. 시골로 이주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흙집의 본거지인 시골에 눌러 살며 맘껏 흙집을 짓고, 널리 알리고, 두루두루 건축공법을 보급하고 싶었던 것.
한낮의 나른한 정적이 감도는 시골마을 찻길 가. ‘흙건축 연구소 살림’이라는 간판을 단 건물 한 채가 있다. ‘마을건축학교’라는 현수막도 걸려 있다. 교장은 김석균 씨. 건물의 외양도 내부도 말쑥하다. 원래 낡고 빈 농협 창고였다. 그걸 사들여 본때 있게 고쳤다. 이 공간에서 흙 건축 사업과 교육과 작업이 이루어진다. 전북 순창군 동계면에 있다.
귀촌 이전, 김 씨는 도시를 전전하며 다채로운 경험을 쌓았다. 전북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청춘기를 예인(藝人)으로 신바람 나게 노닐었다. 연극배우로 무대에 섰고, 근 10여 년 풍물패에 섞여 장구를 쳤다. 이후 서울의 병원 원무과 직원으로 일하다가 다시 행선지를 바꿨다. 강원도 원주의 ‘자연학교’에서 고명한 생태철학자 무위당(無爲堂) 장일순 선생(작고)의 강연을 듣고서였다지. 무위당이 설파하는 생명사상과 ‘모심’의 뉴스에 귀가 번쩍 뜨여 생태적 삶을 실천하는 쪽으로 진로를 돌렸던 것. 그는 이후 한동안 천연염색이나 전통차 제조로 자연이 실린 생활을 꾸려나갔다.
생태건축에 강렬한 감흥을 느낀 것도 그즈음이었다. 해서, 부지런히 전통 한옥의 이론과 기술을 책에서 현장에서 대학원에서 배우고 익히고 다듬었다. 10여 년을 그렇게 내닫아 흙 건축 전문가로 도약했다. ‘끼’와 ‘깡’이 발동하는 방향으로 운신한 덕이다. 성향과 취향이 흐르는 쪽으로 길을 닦은 셈이다. 이는 시중에 흔한 재능이 아니렷다. 그러나 김 씨는 손사래를 친다.
“저를 지도해주셨던 선생님 왈, 어이, 석균이! 자네는 왜 그렇게 재주가 없는가? 하핫. 재주는 없는 대신 제가 뭐든 열성은 다합니다. 좌우명이 하나 있는데요, 매사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보자! 그겁니다. 어떤 상황이건 적극 부닥쳐 확인해보자는 거죠. 문제는 ‘깊이’에 있다는 생각이에요. 이왕지사 건축업계에 들어섰다면 깊이 있게 들어가야 한다는 신념, 그거 하나는 놓지 않고 살았어요.”
김 씨는 흙건축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찌감치 쓰윽 존재감을 드러냈다. ‘담틀집’을 많이 지어서였다. ‘담틀집’이란 거푸집 안에 흙을 다져넣어 지은 집이다. 지금의 그는 ‘생태 단열’의 복음전도사다. 그게 뭔가? 흔히 건축 단열재로 스티로폼을 쓰지만 그는 극구 배척한다. 볏짚과 왕겨, 이 자연 재료들이야말로 탁월하고 안전한 최상의 생태 단열재라는 거다.
“사람에게 옷은 제2의 피부, 집은 제3의 피부입니다. 그런데 현대 건축의 자재 대부분은 석유화학 제품이라 인체에 해로울 수밖에 없어요. 반면 흙이나 나무는 공기정화 능력을 발휘합니다. 볏짚이나 왕겨로 단열처리를 할 경우, 스티로폼으로는 기대할 수 없는 습도 조절 효과까지 거둘 수 있어요. 왕겨는 물에 잘 썩지도 않아 볏짚보다 더 뛰어나고요.”
“흙과 나무와 돌로 지은 시골의 오래된 집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어 아깝더라고요. 비록 현대 주택에 비해 불편하고 열악한 구조이지만, 우리 부모 세대의 숨결이 서린 주거 문화이자 정서적 유적이지 않겠어요?”
“좋은 집이란 뭔가? 바람 잘 통하고, 해 잘 들고,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집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시골집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단열 미비에 있어요. 여름엔 온실처럼 덥고 겨울엔 냉장고처럼 춥죠. 시골집 흙벽 자체가 워낙 얇기도 하거니와, 흙이나 돌이 단열기능을 가진 재료는 아니거든요.”
“보수하고 보강해서 잘 살려 쓸 방법은 없을까?”
“제가 ‘마을건축학교’를 운영하는 취지가 뭐냐 하면, 귀촌·귀농을 준비하는 분들이 굳이 신축을 하기보다는 기존 시골집을 고쳐 쓰는 방법을 택하기를 바라서입니다. 소정의 교육을 이수하면 시골집 단열 작업을 어느 정도 손수 해낼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단열 보강만으로는 한계가 자명해요. 주거와 삶의 패턴도 이미 과거와 달라졌어요. 이래저래 퇴락한 시골집들의 여건은 불리합니다. 화학물질과 공해물질의 폐해가 여실한 현대 주택도 불안전하긴 마찬가지이지만 말이죠. 생태 단열재를 도입한 흙집이 대안이라 봅니다.”
“흙 건축엔 비용이 많이 든다죠? 입주 후 관리가 번거롭다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저비용 고효율 주택이란 세상에 없습니다. 집의 완성도나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게 건축비이고요. 관리 문제? 제대로 잘 지은 흙집이라면 신경 쓸 일이 전혀 없습니다.”
흙집이든 모던한 주택이든 허영과 허세의 덩어리가 아니라면, 취향과 실용에 부합한다면, 작고 소박하더라도 박새 둥지처럼 안락하다면 그게 바로 좋은 집이지 싶지만, 김 씨의 흙집 옹호엔 빈틈이 없다.
근성과 뚝심, 그리고 낙관의 힘
그는 손에 별로 쥔 것 없이 귀촌을 했다. 안빈낙도란 흔히 허풍선이의 과욕이라 바랄 일이 아니거니와, 가족 부양의 의무를 면제받을 순 없었으니 수말처럼 들입다 뛸 수밖에 없었을 테지. 앉으나 서나, 오나가나, 하품할 겨를 없이 분주하게 살아온 것 같다.
지난 5년 사이, 그는 많은 일을 벌였다. 마을 안통의 빈 건물을 개축, 청년 귀농인들과 함께 거주하는 공유주택으로 만들었다. 이 일곱 명의 청년들은 ‘흙건축 연구소 살림’의 주주이자 직원들이다. 지자체의 예산 지원을 받아 관내 시골집들을 보수해주는 일도 하고 있다. 근래엔 꽤 너른 임야를 사들여 아동들을 위한 숲속 생태놀이공간을 꾸미고 있다. 근성과 뚝심, 기민한 머리, 노련한 처신, 집요한 실천력이 아니라면 일구기 어려운 일들이다. 부채도 있고, 흙집 사업이 잘 돌아가는 것만도 아니라 하지만, 그는 낙관의 힘으로 어디까지나 기세등등하다.
김 씨는 한때 연매출 30억 원을 목표치로 잡았다. 이런 그에게 아내 이민선(42·‘흙건축 연구소 살림’ 대표) 씨가 어퍼컷을 날렸다. “당신, 그렇게 살면 행복할 거 같아?” 아내의 일격에 그는 코피를 쏟았던 모양이다.
“퍼뜩 정신이 들더라고요. 내가 과욕을 부리고 있구나, 일벌레로 추락하고 있구나, 그런 반성을 했던 겁니다. 가급적 일을 적게 하고, 가급적 많이 놀자! ‘광대 정신’을 다시 끌어내 쓰자!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광대 정신?”
“제가 과거 한때 풍물에 미치다시피 빠져 살았습니다. 장구 하나 짊어지고 전국을 6개월씩 떠돌곤 했어요. 어느 도시를 가건 그곳의 풍물패 광대들을 찾으면 대번에 통했어요. 어이, 나 전주의 김석균이여! 그렇게 기별하면 우르르 달려들 나와 반겨줬어요. 날밤을 새며 마시고 춤추고 놀았고 말이죠. 그 광대의 마음과 기질과 습성을 봉인해두고 일 하나에 몰두하며 50대 중반에 접어들었어요. 자유로운 정신을 스스로 가둔 채 말이죠. 이젠 봉인을 좀 풀자, 나를 풀어놓자, 욕심을 줄이자, 그런 다짐을 했던 겁니다.”
“현실의 규율과 틀에 사로잡히지 않는 방랑자. 사회의 보편적 속물이 되기를 거부하는 아웃사이더. 광대란 과거부터 그런 존재들이었죠. 방탕의 이미지가 따라붙기는 하지만, 본성적으로 자유분방한 나그네들….”
“악기 하나 달랑 들고 세상을 떠도는 삶이 가장 이상적인 삶일 수도 있죠. 내가 나의 진정한 주인으로 사는 길의 하나일 테니까.”
“일찍이 풍물과 더불어 한평생 살다 가겠다는 작심을 한 적은 없으셨고?”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하질 않았습니다. 재주에 빠지는 프로보다는 재미를 즐기는 아마추어로 만족했으니까. 그랬던 광대의 나날을 청산한 건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생태적·실천적 삶에 감화를 받으면서였죠. 풍물을 한답시고 줄창 술이나 퍼마셨던 시간들을 정색을 하고 되돌아봤던 겁니다. 스스로 부끄러워지더라고요. 그 무엇에 앞서 의식주부터 내 힘으로 떳떳하게 해결해야 할 필요를 절감했어요. 그 방편으로 흙집 건축에 착안했고요.”
떠들썩한 축제와 그 뒤에 고이는 허망한 정적. 그 양자의 괴리와 배치(背馳)에 삶의 하중이 얹힌다. 만족은 잠정적인 선물에 그치고, 모색의 시간이 다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빈 잔처럼 여지없이 찾아든다. 고인 물처럼 썩지 않으려면, 정직하게 돌아보고 서둘러 변해야 하겠지.
‘배워서 남 주자!’
김 씨의 귀촌은 변화 욕구의 산물이자, 거듭 새로워져야 할 기회와의 만남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새로운 기회를 잘 활용해왔다. ‘전투적인 노동’으로 일에 전념했으며, 아내에 대한 존중심을 견지, 크고 작은 역경들을 힘 모아 함께 넘어설 수 있는 부부애를 구축했다. 풍물패와 유유상종하던 시절에 배양한 사교적이거나 낙천적인 에너지를 발휘해 주변과 친화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는 차갑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귀촌을 바라본다.
“점점 확산되는 귀촌·귀농 현상은 기본적으로 매우 바람직합니다. 노인들만 남은 시골에 생기를 부여하고 인구 유지에 기여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시골살이란 만만한 게 아녜요. 흔히들 기존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 귀촌의 목적을 둡니다. 이건 현명하고 정당하죠. 도시라는 수레바퀴에 어쩔 수 없이 휩쓸려 돈을 좇는 삶, 자신과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삶이 좋은 것일 리 없으니까. 그러나 전원생활에 관한 낭만이나 동경을 앞세운 귀촌은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신중한 고려를 통한 귀촌이라 하더라도 원했던 걸 얻기까진 상당한 수고와 시간을 쏟아야 하고 말이죠.”
“충동구매처럼 무모한 귀촌을 할 경우, 시련의 시간은 한결 길어지겠죠. 끈질기게 버티다가 10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평온한 정착에 이르기도 해요.”
“처음 2~3년은 어어 하는 사이에 정신없이 지나더라고요. 5년은 지나야 서서히 자리가 잡히는 것 같아요. 저처럼 시골에서 경제활동을 할 경우엔 어려움이 더 커지죠. 실패 가능성도 많고요. 젊은 귀촌자들의 실패는 오히려 미래의 자산이 되겠지만, 시니어는 깊은 상처를 입을 수 있어요. 특히나 농사를 통한 돈벌이를 시도하다 보면 궁지에 몰립니다. 평생 농사만을 전공한 시골 사람들도 쩔쩔매며 산다는 걸 기억해야 해요.”
“원주민과의 관계에 감정의 골이 깊어져 외딴집처럼 고독해질 가능성도 많은 게 귀촌생활이죠.”
“세상엔 파락호도 있고, 괜찮은 사람도 있어요. 도시나 시골이나 마찬가지로요. 시골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존중과 배려에 무신경한 채, 그저 원주민의 텃세를 타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원주민 입장에선 수상한 외지인이 내 동네에 이주해올 수도 있다는 긴장감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배워서 남 주자!’ 이건 우리 회사의 구호예요. 남에게, 이웃에게 기탄없이 나눠주고 배려하는 일은 언뜻 손해 보는 짓 같지만, 사실은 돌아오는 게 더 많아요.”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는 어디에고 있다. 그런 인물은 미구에 걷어차인다. 골치 아픈 원주민 때문에 앙앙불락하기보다, 내가 먼저 골치 아픈 인간이 되지 않는 것. 그게 지름길이라는 것. 김 씨의 얘기인즉, 그런 귀띔이겠지.
1981년. 어렵게 마련한 임대료를 손에 쥐고 며칠 영동(지금의 강남)을 헤맨 김옥란(80) 씨의 마음은 다급했다. 실패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한 달만 참으면 평생 먹고산다”고 호언장담하던 점쟁이 말도 큰 위안이 되진 못했다. 몫이 좋은 가게 터는 가진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복덕방에서 추천해준 곳은 번화가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몇 년의 고생과 실패로 날이 선 직감은 ‘이만하면 됐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강남 빌딩숲 속 명물이 된 교보타워사거리 ‘원주추어탕’의 시작이었다.
원주추어탕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막내아들 이남수(49) 사장은 지금 자리에서의 개업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원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을 때 첫 3년은 가족의 기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미아리에 첫 번째 가게를 차렸지만 가게 자리를 고르는 일도, 식당을 운영하는 일도, 모두 처음이었던 이들 가족에게 손님들의 반응은 냉정했다. 때문에 강남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온 가족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집으로 헐레벌떡 뛰어왔죠. 아직도 생생합니다. 가게 문을 급하게 열었는데 식탁 바닥에 입 닦은 휴지와 나무젓가락 등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첫날부터 손님이 밀려들어 부모님이 그것들을 치울 겨를이 없었던 거죠. 미아리에서 가게를 차렸을 때 3년간 그렇게 많은 손님을 대해본 적 없었어요. 그날 부모님은 꽤 지쳐 보였어요. 하지만 입가의 미소는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날부터 손님은 점점 더 늘어났어요.”
원주식 추어탕 서울에 보급한 원조
원주에서 온 이 가족의 가업이 식당이 된 사유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 전후 경제발전 과정에서 많은 가족의 선택처럼 이들도 가난을 피하기 위해 1977년 서울행을 결정했다. 아직도 매일같이 출근해 재료를 살피고, 맛을 확인하는 김옥란 씨는 원주추어탕의 시작을 이렇게 설명한다.
“동네 앞집 아저씨가 미꾸라지 잡는 데 선수였어. 양재기 한가득 잡아온 날이면 고추장을 휘휘 풀어 야채와 함께 끓여 동네잔치를 벌였거든. 미꾸라지도 잘 잡고 음식도 맛있으니 주변에서 식당을 해봐라 했는데, 차리고 나서 꽤 잘됐어. 손님이 많은 날이면 가끔 나도 가서 돕곤 했는데, 한 손님이 서울에서도 해봐라 하는 얘기에 내가 차려봐야겠다 싶었어. 식당 주인도 돕겠다 하고. 그래서 미아리에 자릴 잡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가 엉뚱한 데 식당을 냈으니 잘될 리 없었지.”
당시 이웃이었던 원주의 추어탕 집은 현재까지도 성업 중이다. 물론 서울의 원주추어탕과의 교류도 여전해서 이남수 사장은 그곳을 아직까지 ‘큰집’이라고 부른다.
“미아리에서 장사를 시작했을 때 추어탕 한 그릇에 1200원이었어. 처음엔 재래식 요리법을 고집해서 식탁 앞에서 살아 있는 미꾸라지를 냄비에 넣었는데, 손님 옷에 국물이 튀고 난리도 아니었지. 3년간 고군분투하다 안 되고 빚낸 돈 다 떨어지기 전에 다시 원주로 내려가야겠다 싶었는데, 이대로 내려가기엔 그간의 고생이 너무 아까웠어. 그러다 그 시기에 영동에 가게들이 들어선다는 얘기에 거기서 다시 시작해보자 했던 거지.”
강남 개발 광풍 속에서 지켜온 전통
모자는 가게가 자리 잡았던 1981년 강남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1976년 준공된, 길 건너 제일생명 건물은 당시 그 지역이 ‘제일생명 사거리’로 불릴 정도로 존재감이 대단했고, 그 옆에는 영흥자동차학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거리에서 영동시장까지는 목재상, 골재상 등 건축과 관련한 각종 장비와 자재를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강남은 정부 주도 개발의 핵심에 있었고, 그 시기는 강남의 개발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이제 당시의 흔적은 찾기 어려워졌다. 위용을 자랑하던 제일생명 빌딩이 철거되고 2003년 교보타워가 들어섰으니 다른 건물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고집스레 당시 모습을 간직한 곳이 있다. 바로 원주추어탕이 운영 중인 건물이다. 1974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돌아보면 당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강남 제비’의 제비집도 여전히 처마 밑에 그대로다.
그중 모자가 가장 아끼는 것 중 하나는 여전히 현역으로 가게 앞을 지키고 있는 간판이다. ‘원조 고유의 음식’이라고 씌어 있는 간판은 이 사장의 선대가 직접 다듬어 제작한 것이다. 지금 위치에 자리 잡고 나서 2년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식당은 잘 운영됐다. 당시 건물에 4개의 점포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하나씩 인수하면서 조금씩 자리를 넓혀갔다. 그런데 한창 장사가 잘될 무렵 건물주가 부도가 나 건물이 은행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결국 무리를 해서 건물을 샀고, 원래 1층이었던 건물은 증축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누구도 못 말린 재료 고집
이남수 사장이 경영을 맡게 된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원래 볼링선수였던 그는 서울시 대표로도 활약했고 실업팀에 입단할 정도의 실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어머니 김옥란 씨에게는 배부른 직업으로 보이지 않았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가게로 와 도와달라고 했지. 식당일이 워낙 힘드니까. 처음엔 대를 이어 식당을 맡기겠다는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손님도 늘고 할 일이 많아지면서 의지하게 되더라고.”
그렇게 아들 셋은 모두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첫째는 성남시 서현동에 ‘원주추어탕’을 차리면서 독립했고, 둘째는 인근에서 번듯한 주점을 차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막내인 이 사장이 원주추어탕을 이어받게 됐다. 어머니 김 씨는 이 사장이 가게에 합류했을 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다고 기억했다.
“의욕이 넘쳤어. 나는 그동안 잘해왔으니까 잘해온 방식을 고수하고 싶은데, 자꾸 이것저것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자는 거야. 처음엔 불안해서 혼내기도 하고 말리기도 했는데, 지내다 보니 제대로 된 의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거지. 그래서 지금은 뭘 하자고 하면 잘 듣는 편이야.”
새로운 시도를 한 메뉴 중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 메기불고기. 한 가지 메뉴로 사랑받는 맛집이 메뉴를 추가한다는 것은 꽤 부담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장의 고집으로 탄생한 메기불고기는 이제 대표 메뉴가 됐다.
이 사장의 또 다른 고집은 추어탕의 가장 기본이 되는 미꾸라지와 고추장에 관한 것. 특히 손님에게 좋은 미꾸라지를 내놓는 일은 그의 평생 숙제 중 하나다.
“원래 미꾸리로 불리는 토종 미꾸라지를 썼어요. 몸통이 동그란 모양이라 동글이라고도 불리는데 성장 속도가 느려 양식에 적합하지 않아요. 또 자연산은 당연히 수급이 어렵죠. 그러다 보니 넙죽이라 불리는 중국산 미꾸라지가 대세가 됐죠. 저희도 어쩔 수 없이 그걸 쓰지만, 지금 동글이 양식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요. 성공해서 더 맛있는 추어탕을 손님에게 내놓는 것이 꿈이에요.”
구할 길이 없어 자연산 미꾸라지를 1년 내내 재료로 쓸 수는 없지만 소량이라도 매수가 가능한 매년 7월과 8월에는 자연산을 확보해 특별 메뉴로 내놓는다. 단골들은 절대 놓치지 않는 연례행사다.
“다른 지역 추어탕과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고추장 역시 제가 신경 쓰는 재료예요. 3~4년에 한 번씩 담그던 고추장을 이젠 매년 만들고 있어요. 많이 만들어놔 여유가 있지만 그래도 제가 욕심을 부려요(요즘 손님용으로 사용 중인 고추장은 16년이나 묵은 것이다). 고추장 담글 때 어머니는 쉬셔도 된다 할 정도로 이제는 자신 있어요. 간장은 씨간장을 다양하게 만들어가면서 이런저런 실험을 하고 있어요. 고객들 입맛을 완벽하게 만족시켜줄 간장을 찾기 위해 계속 시도를 해보는 거죠.”
자리를 잘 잡아서 맛집이 되고 노포(老鋪)가 될 수 있었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강남은 수많은 식당이 생겼다 사라지는 중심 상권의 대표 지역이다. 원주추어탕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맛에 대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최근에는 미꾸라지가 난임부부에게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포장해가는 고객도 늘었다. 난임시술로 유명한 주변 병원의 환자들 사이에서 퍼진 속설 탓인지 ‘목적을 갖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다고. 실제로 쌍둥이 유모차를 끌고 간증과 함께 감사인사를 전하는 부부가 찾아오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다고 한다.
3대로 이어진 ‘고유의 음식’
이 사장에게는 최근 가슴 벅찬 사건이 하나 있었다. 올해 아들이 원주추어탕 3대 사장이 되겠다며 식품공학과를 선택해 대학을 갔기 때문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그에게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제게는 그런 뜻을 내비친 적 없었거든요. 그런데 여동생하고 아이들끼리는 자주 이야기했던 모양이에요. 식당일을 하고 싶다고 말이죠. 어릴 때부터 식당에 자주 와 일을 돕곤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요즘엔 셰프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고, 또 대견하기도 해서 반대하진 않았습니다.”
입학원서 내는 날 할머니와 아버지, 아들 3대는 특별한 사진을 찍었다. 장소는 학교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식당에 내건 ‘원조 고유의 음식’ 간판 앞에서였다. 이 사장은 이 사진을 계산대 앞 잘 보이는 곳에 세워뒀다.
“아이가 대를 이어준다고 하니 저도 꿈이 생겼어요. 좋은 식당 주인을 만들기 위해 제가 알아놓은 주변 식품기업, 제조시설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어요. 본인은 힘들겠지만.(웃음) 저희 부모님은 가족을 위해 이 식당을 만드셨고, 제가 물려받은 다음부터는 모든 일을 손님을 위해서만 해왔어요. 하지만 아이가 이 식당을 3대째 운영하게 될 땐 사회를 위한 주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주변과 세상을 보살필 수 있는 원주추어탕이 되길 바랍니다.”